후쿠시마 이후 선교는 가능한가?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가련하고 빈궁한 사람들이 물을 찾지 못하여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탈 때에, 나 주가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겠고,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겠다.
― 「이사야서」 41장 17절


지난 3월에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 직후, 영국의 일간지 <인디펜던트>는 이 사고로 100만 명이 사망할 것이라는 충격적인 보도를 내놓았습니다. 그것은 1986년에 발생한 체르노빌 원전 사고 이후 20년 동안 방사능오염으로 사망한 20만 명의 다섯 배나 되는 수치입니다. 그 방사능 유출의 양은 1945년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방사능보다 무려 168배나 되는 양이라고 합니다. 체르노빌 사고의 13배나 된다고 합니다. 

이 무시무시한 재앙은 인간의 기술이 얼마나 파괴적인지를 시사하는 하나의 전조입니다. 더구나 그것은 전쟁이나 테러 같은 재앙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파괴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의도하지 않은 사고’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그 피해는 대규모 전쟁 못지않은, 아니 어쩌면 더욱 치명적인 재앙을 초래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하여 2011년 3월 11일 이후 후쿠시마는 ‘문명발전의 의도하지 않은 파괴성’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후쿠시마 이후’는 인류의 발전지상주의적 문명에 대한 성찰의 절대적 요청에 직면한 시간의 도래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후쿠시마 이후’에 대하여 더 이야기할 게 있습니다. 일본의 저명한 반핵 평화운동가인 히로세 다카시는 '지금은 운동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실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일본의 시민사회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날 때까지 원전의 치명적인 위험에 대하여 거의 알지도, 문제로 느끼지도 못했습니다. 사고가 나고서야 히로세 다카시가 말한 것과 같은 정보가 비공개되고 있다는 걸 문제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정보의 독점이 시민사회가 위험을 감지할 기회를 차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원전은 하나의 신화처럼 일본 시민들의 가슴 속에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일본은 세계 최고 수준의 원전 관리국가이고, 따라서 원전은 현존하는 가장 안전한 에너지라고 말입니다. 또한 그러한 원전으로 말미암아 일본 같은 초일류국가의 발전은 담보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무모한 확신은 정부와 기술엘리트에 의해 독점된 정보로 말미암아 시민사회가 원전의 위기에 대해 무지함으로써 지탱된 것이었음이 사고 이후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하여 시민사회는 국가와 기술엘리트가 충동질하는 발전지상주의 체제에 자신의 욕망을 함께 실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사회의 종말이 ‘후쿠시마 이후’가 시사하는 성찰의 내용인 것입니다.

한데 한국사회 또한 이점에서 일본사회와 쌍생아적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1986년 체르노빌 사태가 발생했을 때, 한국의 전두환 정부는 미국과 신규원전 건설계약을 맺었습니다. 이 계약은 그 해에 있었던 전 세계의 유일한 원전 수주계약이었습니다. 또 올해 3월 후쿠시마 사건이 발발할 즈음, 대통령 이명박은 아랍에미레이트와 맺은 원전 수출 기공식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원전은 발전을 상징했고, 실제로 한국사회가 이룩한 성공은 원전이 제공한 전기 능력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할 정도로 원전 의존적 성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시민들도 일본의 시민만큼이나 원전의 위험성에 대해 무지했습니다. 그리고 원전에 관한 정보는 국가와 기술엘리트에 의해 독점되어 있었습니다.

두 사회는 공히 전 세계에서 가장 발전 지상주의를 신봉하는 사회입니다. 국가의 복지 시스템보다는 국가적 발전주의가 시민이 상상하는 유토피아의 밑그림을 이루는 사회인 것입니다. 물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지구를 휩쓸었던 1990년대에 이르면 세계의 거의 모든 사회가 이러한 발전지상주의의 제도화를 추구하지만, 특히 일본과 한국은 신자유주의 이전부터도 그런 지향성의 사회였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발전 지상주의는 국가와 기술엘리트를 중심으로 하여 정당화되었습니다. 기술엘리트는 이른바 과학적 맹신주의를 퍼뜨리는 주역이었고, 국가는 이러한 기술엘리트의 과학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안전의 신화를 성공주의와 결합시켜 통치의 기반으로 삼았습니다. 하여 시민은 발전주의를 뒷받침하는 기술문명의 요소들을 경유하면서 자신의 욕망을 키워갔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의 신화가 후쿠시마로 인해 여지없이 붕괴된 것입니다. 

한데 저는 ‘후쿠시마 이후 교회는 선교를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주장을 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특히 한국사회에 관하여 제기한 논점입니다. 왜냐면 알다시피 발전 지상주의에 있어 한국사회와 교회는 너무나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한국사회의 고도성장과 교회의 고도성장은 시기와 양상을 같이하면서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한국사회의 성장지체와 교회의 선교 위기도 서로 겹쳐 있습니다. 요컨대 발전지상주의의 제도화에 있어 한국사회와 교회는 서로 엮여 있습니다. 이것은 발전지상주의를 극복하려는 모든 개혁적 시도에 발목잡고 있는 주된 사회적 세력의 하나가 교회임을 의미합니다. 확실히 우리사회에서 교회는 성공에 미친 사회를 추동하는 역사적 세력임에 분명합니다.

최근 정부와 서울시가 ‘부채 의존형 사회’의 위기에 빠져버린 것도 발전지상주의 정책을 추구한 결과입니다. 알다시피 한국정부와 서울시의 발전지상주의 정책은 과도한 토건주의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이른바 부동산 거품으로 만들어진 발전/성공의 신화를 공모하는 사회를 통해 정권을 유지하고자 했던 체제가 위기의 나락에 떨어져 버린 것입니다. 물론 이 나락으로 먼저 떨어진 이들은 사회적 약자들이고, 점차로 전 국민이 함께 내던져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체제를 충동질했던 이들은 아마도 마지막으로 떨어지겠지요.

아무튼 이러한 토건주의적 발전지상주의에 교회도 한몫하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교회는 뻥튀기된 욕망을 교회건축을 통해 표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교회를 특징짓는 가장 두드러진 현상입니다. 그런데 과도한 교회건축은 전 교인을 이 과도한 교회건축에 총동원해야만 가능한 사업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신앙은 끊임없이 발전지상주의를 정당화하면서 제도화됩니다. 즉 한국교회의 신앙체계는 발전지상주의를 체현한 신자들을 양산합니다. 즉, 발전지상주의에 익숙한 신자들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회의 발전지상주의에 이물감을 느끼지 않는 시민-성도, 발전지상주의를 욕망함으로써 신앙과 세속의 성공을 함께 누리는 자들을 양산하는 장치가 교회라는 것입니다.

하여 한국사회에서 교회는 가장 발전지상주의에 열렬한 광신자들의 온상입니다. 그런 이들이 교회를 찾아오고, 또 교인이 되는 과정은 그런 이들로 거듭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교회담론 속의 권력의 구조도 한몫하고 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담론에서 하느님과 성도는 서로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즉 성도를 구원하고 축복하는 신은 성도에게 그러한 구원의 말을 직접 전하는 것이 아니라 중계자들을 통해 합니다. 그것은 그 중계자들이 신에 관한 정보를 독점하고 있기에 가능합니다. 이것은 국가와 기술엘리트가 정보를 독점하고, 이러한 정보 망각상태에서 이뤄지는 시민의 거품 욕망의 체계가 한국과 전 세계의 발전지상주의의 담론 구조인 것과 유사한 형식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발전지상주의는 엄청난 재앙을 낳았습니다. 2011년 후쿠시마는 바로 그것을 보여주는 계기적 사건이었습니다. 하여 우리 시대에 시민의 성찰은 ‘후쿠시마 이후’라는 개념을 통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지요.

문제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성찰을 가로막는 주요 장소인 것입니다. 하여 교회는 오늘날 선교를 할 수 없습니다. 낡은 시대의 낡은 인습, 낡은 욕구의 체계가 잔존하는 장소로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여 교회는 선교 대신에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해야 합니다. 성장지상주의의 키워드가 들어 있는 모든 제도적 장치들을 찾아내고 그것을 해체하며 후쿠시마 이후를 성찰한 새로운 모색들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나는 그 첫걸음은 성장주의를 추구하지 않는 ‘작은 교회’의 추구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은 사회 속의 작고 빈궁한 자의 축복을 위한 신앙과 교회의 모색에 있다고 봅니다. 후쿠시마 이후의 선교가 가능하다면, 바로 이런 모습일 것입니다.

오늘 읽은 성서 텍스트는 그러한 신앙의 한 전거입니다. 발전지상주의를 추구했던 다윗왕조의 신학은 국가의 몰락을 초래했습니다. 다윗왕조만이 신의 축복을 백성에게 나눠줄 수 있다는 국가신학이 낳은 재앙입니다. 한데 식민지 시대 유배지에서 과거 다윗왕조의 신학을 위해 성전에서 일했던 일단의 사제와 하급성직자들이 새로운 개혁의 구호를 외칩니다. 그중의 하나가 이 텍스트에 담겨 있습니다. 신은 다윗계 왕의 기도에 응답하는 이가 아니라, 가련하고 빈궁한 이들의 신음 소리에 응답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재앙의 시대에 개혁은 바로 이와 같이 국가의 성공을 추구하는 신학이 아니라 작은 자들의 고통에서 시작하는 신학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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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과 건전한 상식

송진순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박사과정)

지난 3월 일본 동북부를 덮친 지진과 쓰나미는 대규모 인명피해와 함께 후쿠시마의 원자력 발전소 폭발이라는 대참사로 이어졌다. 10월 13일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대지진의 피해 복구비용이 향후 10년간 30조엔(약 450조원)에 이를 것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원전 사고의 피해 복구에 드는 시간과 비용은 그 누구도 구체적으로 전망하기 어렵다. 30년이 걸릴 원전 폐쇄와 12만 톤의 방사능 오염수 같은 일차적인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10만 명의 피난민과 일본 전역과 바다에 확산되는 방사능에 대해 안정적인 복구를 전망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후쿠시마의 원전 폭발이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13배, 그곳에서 방출된 방사성 물질의 양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의 168배의 위용을 자랑한다면 그 참사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후쿠시마의 재앙은 우리 일상에서 빠르게 잊혀져갔다. 심심치 않게 들리는 일본의 세슘과 스트론튬 검출 보도조차 우리에게는 신문 한 구석의 국제 기사 중 하나일 뿐이다. 그보다는 9월의 정전사태를 극복하고 경제성장을 위해 원전 건설에 박차를 가하는 정부와 원전 산업계에 막연한 기대와 수긍의 눈길을 보내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원전의 안전 신화가 후쿠시마 사고로 처참하게 무너졌음에도 우리가 핵에 대해 느끼는 위험은 여전히 제자리다. 이 불감증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가난도 전쟁도 겪어보지 못한 세대가 상상하는 방사능의 공포가 우리에게 얼마나 유효할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원자력에 대한 우리의 무지만큼이나 원전의 정당성을 심어주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정부와 언론의 대응방식일 것이다: “청정한, 녹색 성장의, 연료비가 저렴한, 인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기준치에는 못 미치는...”

그러나 눈 가리고 아웅한다해도 원자력 발전의 분명한 함의에 대해 이야기 할 수밖에 없다. 애당초 원자력을 안전하고 평화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낙관적 기대는 태생적으로 원자력의 탄생과는 모순된 것이었다. 원자핵을 인위적으로 분열시켜 발생하는 에너지인 원자력은 근본적으로 존재의 안정성을 파괴한데서 발생한다. 인간이 원하는 에너지를 얻기 위해 안정성을 희생시킨 대가로 치명적인 방사능, 영원히 끌 수 없는 재를 남겨 놓은 것이다. 불안정을 인간의 기술로 안전하게 방호한다 해도 그것은 실험실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인간의 시간을 뛰어넘는 물질을 통제할 수 있다는 인간의 오만은 또 다른 은폐와 왜곡된 현실을 낳는다. 불안과 파괴라는 샴쌍둥이는 평화적으로 보일 수는 있어도 본능은 숨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원자력이 핵의 다른 이름인 것처럼.

어찌 보면 자본주의의 수혜를 입은 모두가 원전 시스템의 공범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팡팡 트는 에어컨, 철철이 바뀌는 핸드폰, 가가호호 뉴모델 대형양문냉장고, 불야성의 금융시장.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성장위주의 소비 자본주의만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이라는 믿음이 스러지는 경제신화 속에서도 밝히 빛나고 있다. 이에 경제성장과 에너지의 불가분의 관계는 원자력 발전이 뒷받침하리라는 논리가 버티고 있다. 따라서 자의든 타의든 모두의 합의 속에 추진되는 원자력 산업은 학문과 정재계의 권력과 맞물려 돌아간다. 맞물리는 거대한 힘은 그 어떤 목소리도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말 그대로 중앙집권적이 된다. 원자력 문제의 바탕에는 거대 과학기술과 산업이 권력을 기반으로 운영되는 비민주적인 체제가 깔려있는 것이다. 원전이 유치된 지역, 에너지의 주 소비지역, 원전 내 노동자, 방사성 물질의 피해, 원전 사고의 은폐, 원자력 정보의 편중. 어느 것 하나 민주주의와 원자력이 양립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후쿠시마 사태이후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등의 유럽 국가들은 탈원전을 선언했다. 그들의 선언이 더 의미가 있는 것은 현재 인류와 미래 세대에 대해 준비된 정부와 깨어있는 시민의 힘이 공동으로 발휘된 데 있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건전한 상식이 통하는 사회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건전한 상식은 무엇이 중요하고 먼저 되어야 하는지 아는 힘이다. 우리의 건전한 바람은 내 가족과 이웃이 안전한 땅에서 인간적이고 소박하게 사는 것이다. 나아가 다양한 많은 사람들과 미래에 공동의 안전을 기반으로 인간과 자연의 이야기가 어우러질 수 있는 사회에 대한 이상을 갖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의 삶을 꿈꿔야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에너지 집약적이고 대량폐기물로 넘치는 파괴적인 산업문명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이 시대의 동력이 되어 온 원자력 발전에 대한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진행 중인 재앙을 멈출 수는 없어도 또 다른 재앙을 막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세상의 안정과 신뢰를 회복하고 소외된 인간의 목소리를 찾기 위해 건전한 상식을 가진 시민 사회의 역량을 키우는 일이 급선무가 될 것이다. 책임있는 미래는 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불편을 감수하는 소박한 삶이더라도 함께 즐겁고 안전한 삶을 꿈꿀 수 있다면 우리는 말해야 할 것이다. 문규현 신부님의 말처럼 “사랑한다면 원전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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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10.24 14:4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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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펜을 드셨군요. 경계밖 타자에 대해서 따뜻하고, 그 경계를 구획짓는 체제에 대해서는 완강한 글! 부탁합니다.


'탈경계의 신학'[각주:1]을 위하여...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신학이라는 말이 처음 사용되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신학은 시대를 전제하고 시대의 문제와 도전에 대처하고 응전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본서의 제목으로 사용된 ‘탈경계의 신학’은 ‘신학, 시대와 통하라!’는 신학적 전제에 대한 현대적 각론 내지는 현대적 version 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탈경계’라는 말이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대면하고 있는 당대의식 이기에 그렇다.
   국가와 민족, 그리고 이념을 중심으로 움직이던 세계질서는 20세기 말에 밀어닥친 현실 사회주의의 패망과 함께 종말을 고하였고, 바야흐로 현재의 세계는 자본의 전지구화라는 보다 간교하고 유령과도 같은 지배질서로 대체되었다. 유령과도 같다고 표현한 이유는 그 권력의 배후와 실체가 뚜렷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전 시대의 권력의 양태보다 훨씬 광범위한 범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화와 세계화라는 슬로건을 걸고 전개되는 신자유주의라는 유령의 첫 번째 강령은 경제적 자유주의에 입각한 무역 장벽의 철폐였지만, 그것은 단순히 재화와 자본의 유통을 가로막는 국경의 해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삶의 전 영역에서의 개방과 해체를 의미하고 그 틈을 타고 유입되는 모든 낯선 것에 대한 열림과 환대가 이 시대의 미덕이고 윤리라 가르친다.
   한국 또한 이러한 흐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여, 강력한 단일민족문화 전통속에서 형성되었던 경계와 질서들이 해체되고 재편되는 급격한 변화를 맞고 있다. 실례로 2009년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110만명이 넘어섰다고 한다. 이는 전체인구의 2%가 넘는 수치로 전년대비 약 25% 증가한 것이라 한다. 학자들은 2050년이 되면 전체인구의 1/10이 외국인이 될 것이라 예상한다. 십 여년 전부터 시작되었던 외국인 노동자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요 근래는 동남아 일대에서 한국의 농촌으로 시집온 처녀들이 정착하여 한국 남성과의 사이에서 2세들이 태어나면서 다문화가정의 문제가 수면위로 부상하고 있다. 이제 우리사회도 다인종, 다문화, 그리고 그에 따르는 다종교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시대는 우리에게 세계가 겪고 있는 변화와 진통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그에 걸맞는 적극적 해명, 그리고 해방을 위한 새로운 전략과 리듬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수많은 경계와 차이와 다양성들에 대한 환대의 방식을 숙고케함과 동시에, 한편으로 우리 사회속에 여전히 상존하고 있는 다름에 대한 차별과 배제와 폭력에 대해서는 분노하라고 가르친다. ‘탈경계의 신학’은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대한 응답이라 할 수 있다.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시대를 향한 신학의 답변은 늘 어색하고 어눌했고 위험했다. 하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자기만의 자리, 자기만의 언어를 고집하려 했다면 신학은 이미 예전에 폐기되었을 것이다. 로마교황청의 교권주의를 넘어 종교개혁을 감행한 마틴루터, 히틀러의 광기와 맞섰던 고백교회와 본회퍼, 흑인차별이라는 무너질것같지 않았던 장벽을 돌파한 마틴루터 킹 목사, 체제로부터 버림받고 이용만 당하는 타자, 즉 민중을 신학의 전면으로 내세웠던 민중신학 등 세계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면 시대의 장벽과 경계에 막혀 신음하던 시절, 신학은 늘 그렇게 위험한 상상과 무모한 도발을 감행해왔다. ‘탈경계의 신학’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등장했던 자랑스런 변혁지향적 전통을 지지하면서, 신학의 전통주제인 신과 인간, 그리고 세계에 대한 문제를 다인종, 다문화, 다종교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사회속에서 어떻게 다시 묻고 대답할 수 있을지에 주목한다. 이를 통해 교회 안에만 갇혀 있었던 신학의 외연이 확장되어 신학의 탈영토화 (대중지향적, 현장지향적, 소수자지향적, 학제간 연구)를 선도할 수 있는 새로운 시선의 발견과 그 과정에서 원활한 소통의 통로가 되는 것을 꿈꾼다. 
   하지만, ‘탈경계의 신학’은 ‘탈경계’라는 말속에 숨어있는 정치-경제적 음모와는 과감한 결렬을 시도한다. 신자유주의 체제속에서 전개되는 자본의 법칙처럼 탈경계적인 성격을 지니는 것이 또 있을까?  오직 부의 축적을 위해서라면 자본은 모든 경계를 무너뜨린다. 그것이 이념이든, 신앙이든, 역사든… 자본은 그것들 안에 저장되어 있었던 기억과 상처들을 모두 깔끔히 지우고는 자본의 원활한 유통을 막는 또 다른 경계를 찾아 경쾌히 돌아다닌다. 이렇듯 자본에 의한, 자본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탈경계는 새로운 형태의 제국이라 할 만하다. 역사상 등장했던 제국의 모습이 무엇이었나? 모든 경계를 무너뜨렸던 세력들 아니었나? 화폐를 통일하고, 언어를 통일하고, 사상을 통일하고, 급기야는 종교까지 통일한다. 자본은 21세기형 제국이다. ‘탈경계의 신학’은 21세기형 제국이라 할 수 있는 자본의 입을 통해 선포되고 선전되는 ‘탈경계’에 대해서는 저항한다. 그것이야 말로 이 시대의 가장 강력한 경계이자 한계이기에 그렇다. 그러므로, ‘탈경계의 신학’은 ‘탈경계’에 대한 옹호와, ‘탈경계’에 대한 배반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중적이고 변증법적이다.      

‘탈경계의 신학’을 위한 방법론

   필자는 기독교윤리를 전공하고 있다. 다른 여타의 학문들과는 달리 윤리학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지점은 인간의 행위이고, 윤리학은 바로 그 행위의 분석을 위한 종합적인 학문이다. 윤리적 행위가 종합적이려면 윤리적 판단 기준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전제로 한다. 여러가지 윤리적 판단기준이 있겠지만, 기독교 윤리학에서 말하는 윤리적 판단의 궁극적 목표는 이 땅 위에서 이루어져 가는 하나님 나라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신학이론들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교의학적인) 공부가 현실에서의 행위의 준칙으로 바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현실의 질서와 운동의 법칙은 다양한 제 학문간 교류와 협력을 통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소박한 교리적인 접근으로는 현대 사회에서 발생하는 복잡다단한 현상에 접근할 수 없다. 바로 그 접점에 기독교 윤리학이 위치한다.
   그러므로, 다원화된 사회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행위를 묻는 기독교 윤리학, 즉, 현대 세계 속에서 올바른 판단의 기준과 행위의 준칙을 묻는 기독교 윤리학은 인문 사회과학적 현실 인식과 대안을 다양한 신학적 사고들에 연결하여 대결할 줄 알아야 한다. 그 과정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이데올로기(혹은 교회)의 위선과 폭압을 넘어서고, 우리 의식, 무의식에 영토화되어 우리를 지배하는 온갖 (신학적인, 그리고 이념적인) 우상과 맞설 수 있는 기독교윤리학으로 바로 설 수 있다.
   소제목으로 ‘탈경계의 신학을 위한 방법론’이라고 붙였는데, 그 보다는 ‘탈경계의 신학에 걸맞는 글쓰기’ 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싶다. 필자의 글쓰기는 다분히 위에서 언급한 기독교 윤리학이 목표로 하는 학문적 지향점을 겨냥한다. 올바른 기독교윤리적 판단을 위한 기준은 내게 있어 신학과 인문학적 상상력과의 만남을 통해 그 체적을 넓혀왔고, 그에 걸맞는 구체적 행위로의 결단은 세계 기독교 역사 안에 간직되어 있는 해방을 향한 전통들과 맞닿아 있다. 이러한 전체적인 틀 속에서 필자는 본서에서 윤리적 판단의 직영 확대를 위해 현대에서 논의되고 있는 다양한 인문학적 상상력이 어떻게 당대의 문화와 사건속에서 만나고, 그것이 최종적으로 어떻게 신학과 합류할 수 있을지에 주목하였다.
   이는 미국 진보신학계의 일반적 방법론이라 할 수 있는 구성신학(constructive theology)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바 크다. 신학이 지나친 교리논쟁, 법리논쟁에만 몰두하여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가는 상황과 이론에 대한 설명과 각주가 가득 차야 신학이라고 평가받는 풍조에 맞서 구성신학은 개인의 내러티브를 기본으로 그것이 어떻게 다종의 다성의 목소리와 어울리며 신학함(doing theology)으로 모아져 가는지에 주목한다. 개체발생은 개통발생을 반복한다. 우리의 피부, 머리카락, 장기의 어느 조직을 검사해도 그것은 나만의 DNA을 갖는다. 마찬가지로 구성신학은 우리 각각의 내러티브 역시 놀라우리만큼 그분의 섭리안에서 작동되고 유지되고 있다는 강한 믿음을 역설적으로 전제한다. 그리하여 구성신학은 엄한 교리적 잣대로 신학/앙을 단죄하는 근본주의 신학/앙을 향해 과도한 신학적 설명과 신학적 단죄를 그만 중단하고, 이제부터는 각각의 걸어온 경험과 역사와 신앙, 그리고 신학을 풀어놓고 나즈막한 목소리로 함께 대화에 동참할 것을 권유한다.
   ‘탈경계의 신학’은 내 나름의 구성신학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다인종, 다문화, 다종교’로 특징지어지는 현대사회의 다양한 지적흐름속에서 ‘어떻게 신학이 이 시대를 가로지를 수 있을까?’ 에 대한 필자 나름의 물음이자 고민이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기독교가 개독교로 전락한 우리사회의 서글픈 현실속에서 교리 안에 갇혀버린 신학의 폐쇄성을 폭로하고, 물신에 취한 교회를 향해서는 시장 논리와의 의식적 결렬로 나설 것을 요구하며, 신학과 교회전통에 대한 몰이해를 바탕으로 그리스도교 공격에 매진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대화의 테이블로 나설 것을 제안한다.

   본서는 체계적인 이론서가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지난 2년간 ‘제3시대 그리스도 연구소’가 운영하는 웹진 <제3시대>를 통해 발표된 필자의 졸고를 다듬고 수정한 결과물이다. 수정하고 다듬었다고는 하나, 아직 영 글지 않은 내 생각의 단초들이고 걸음마이다. 혹 책의 제목이 <탈경계의 신학>이라 ‘탈경계의 신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사전적 의미, 내지 그에 대한 신학적 각주를 기대했던 사람들이나, ‘탈경계의 신학’이라는 말에서 어떤 새로운 조류 내지 선언을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이 책은 실망스러운 결과물이 될 것이다.
   내 처지에서 다양한 인문학적 전통과 신학과의 접속을 도모하는 가운데, 주류신학계 속으로 영토화되지 않고 탈주하는 외침과 몸부림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탈경계’이고, 이것이 신학의 외연을 확대시킬 수 있다는 기대 섞인 전망에서 책 제목을 최종적으로 <탈경계의 신학>이라 이름 붙였지만, 지금 다시 한번 책의 목차를 훑어보면서 드는 생각은 각각의 내용들이 오늘 탈고를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필자가 투신하고픈 신학적 과제들로 남겨진 채 저 앞으로 미끄러져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본서는 앞으로 필자가 그려나갈 학문적 궤적을 암시하는 지형도 내지 밑그림이자, 내 스스로가 상정한 신학적 논란의 제목들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까지 생각이 이르니 더욱 이 책을 독자들에게 내놓기가 부끄럽다. 학문적 완성도면에서 많이 부족하기 때문일것이다. 그래서 책의 부제에 ‘신학노트’라는 꼬리표를 달았다. 비록 지금은 ‘노트’라고 이름 붙여진 소박한 결실이지만, 이 책의 출판을 계기로 내 안에서 ‘탈경계의 신학’에 대한 보다 집요하고 구체적인 모색이 일어나고, 아울러 단순한 신학적 구호의 나열이 아니라 삶과 신앙의 차원으로 번져나갈 수 있는 방안까지를 포괄하는 ‘탈경계의 신학’으로 진화하기를 소망한다. 

  1. 2009년 6월 ‘근대와 탈근대 사이에서’라는 제목으로 첫 원고를 보낸 이후 지금까지 매월 ‘제3시대 웹진’ [신학정보]란에 필자의 글이 게재되고 있습니다. 독자님들이 많이 읽어준 덕에 조만간 책으로 나온다고 합니다. 책 제목은 『탈경계의 신학: 시카고에서 띄우는 신학노트』 (기획: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출판: 동연출판사)입니다. 웹진에 게재되었던 글들을 몇 개의 카테고리로 분류하였고, 미흡한 부분들은 원작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내용을 보강하였습니다. 이번 호 웹진에 올린 글은 출판예정인 책의 머리말 중 일부임을 밝힙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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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석학 초청 강연회(제147차 월례포럼)

"포스트모던 상황에서 회심(개종)이란?"


강연자_크리스티네 린네만-페린(Christine Lienemann-Perrin, 바젤 대학 명예교수)

크리스티네 린네만-페린 박사는 스위스 바젤대학의 명예교수이며, 오늘날 선교학 분야의 가장 저명한 원로신학자의 한 사람입니다.

그녀는 일찍이 독일에서 남한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정치신학을 비교연구하여 교수자격 취득을 한 이후 한국신학에 가장 정통한 서구 신학자의 한 사람이었고,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등 제3세계국가들의 기독교와 현대성의 문제에 관한 깊이 있는 많은 논점을 제기해온 연구자입니다.

이 토론회에서는 ‘포스트모던 상황에서 기독교의 회심(개종)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린네만-페린 교수의 강연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통역_최현덕 박사(프리드리히-에버트 재단 기획연구위원)

일시_2011년 11월 7일(월요일) 오후 7:00~9:00
장소_안병무홀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1번과 2번 출구. 두 출구 사이 골목 50미터, 좌측 4층 건물의 1층)
문의_02-363-9190 / 010-4944-2019
참가비_3,000원

주관_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주최_기독교통합학문연구소 우리신학연구소 한국기독교연구소 한국민중신학회
후원_기독교사상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의 10월 월례포럼(제147차)은 이 강연으로 대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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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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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용순
    2011.11.17 23:03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참으로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이곳 프랑스에 있는 관계로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사는 곳에서 2시간을 가면 바젤인데 이런 귀한 교수가 계셨군요.
    제3시대 연구소의 변함없는 부흥을 항상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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