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왜 전병욱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가?
- 성공 이데올로기, 욕망의 경제학, 소비주의적 신앙



정용택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1. 전병욱 사태의 제2막, ‘홍대새교회’

지난 7월 12일 서울 명동 청어람 소강당에서 《뉴스앤조이》 주최로 “전병욱 사건을 통해 보는 한국교회”라는 제목의 토론회가 열렸다. 《뉴스앤조이》는 토론회가 끝나고 나서 자사의 홈페이지에 현장에서 이루어진 발표와 토론을 소개하는 기사를 총 네 편으로 나누어 신속하게 게시하였다. 모든 기사가 흥미로웠지만, 그중에서도 메인 기사로 올라와 토론회 전반을 요약하고 있는 정재원 기자의 기사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토론회의 한계로 지적된 부분을 소개하고 있는 그 기사의 마지막 문장만 인용해본다.

한편 이번 토론회에서 여성의 관점에서 이번 사건을 바라보는 발제가 없고, 사건의 실체가 상당 부분 드러나고 전 목사가 공개 회개하는 과정을 밟지 않았는데도 많은 교인들이 그를 추종하는 현상에 관한 분석이 없었다는 점이 아쉽다는 의견도 나왔다.1)

위의 문제제기에서 핵심적인 키워드는 각각 “여성의 관점에서”와 “많은 교인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를 추종하는 현상”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 글은 바로 그 두 가지의 문제제기를 적극적으로 받아 안으려는 시도이다. 그런데 첫 번째 문제제기와 관련해선 이미 지난 7월 31일에 열린 “전병욱 사태를 보는 또 하나의 시선”이란 제목의 토론회에서 심층적으로 다루어진 바 있다.2) 먼저 있었던 《뉴스앤조이》 주최의 토론회에서 나온 문제제기를 보완하기 위한 취지에서 이와 같은 후속 토론회가 마련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문제제기, 즉 이른바 ‘홍대새교회’로 대변되듯이 “많은 교인들이 그를 추종하는 현상”에 대해선 필자와 같은 연구소에서 일하는 동료에 의해 본격적인 분석이 한 차례 시도된 바 있다.3) 이 글은 그 글과 유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도, 한편으론 아직 충분히 말해지지 않은 전병욱 목사 지지자들의 심리세계에 관한 또 다른 방식의 접근을 모색한다. 먼저 발표된 글이 ‘잘못된 권위 의식’, ‘무조건적 복종’, 그리고 ‘값싼 회개’를 키워드로 하여 홍대새교회 현상이 지속되고 있는 주체 외부의 구조적 조건을 탐색하고 있다면, 이 글은 홍대새교회 현상을 만들어낸 전 목사 지지자들 내면의 욕망구조를 분석해보려는 시도이다.


2. ‘이미’ 용서받은 전병욱 목사

나는 지난 7월 29일에 홍대새교회의 주일 오후 예배에 참석했다. 마침 내가 참석한 3부 예배에선 전병욱 목사의 설교를 들어볼 수 있었다. 어림짐작으로 봐도 100명은 족히 넘는 인원이 예배에 참석한 것 같았다. 이날 전 목사는 출애굽기 28-31장을 본문으로 하여 “죽도록 준비하고 대충하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수행했다. 《뉴스앤조이》가 주최한 토론회에서도 한종호 대표가 전 목사의 홍대새교회 설교에서 드러나는 후안무치에 가까운 자기합리화 및 자기정당화를 꼼꼼하게 짚어낸 바 있는데, 내가 그날 들은 설교에서도 역시 그런 지점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었다. 예컨대 설교의 말미에서 전 목사는 이런 얘기를 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래요. 제 스스로 볼 때 허물 많고 죄 많고 문제투성이 목사 아닙니까? 그렇죠. 그런데 혼자 생각할 때 이래요. 내가 이런 모습을 갖고 말씀을 증거할 때 변화될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그렇지 않아요. 그저 하나님의 말씀 붙들고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신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십자가 의지하고, 주님의 능력 의지해서 증거하면 연약하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믿는 자들이 나오고 변화되는 사람이 나오더라구요. 바로 그게 뭐에요? 하나님 의지하는 백성들에게 주시는 자유로움이에요. 자유로움. […] 하나님께 맡기고 부족함 가운데서 뛰게 될 때, 그 안에서 자유로움이 생기게 되고, 그 안에서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사장에게 주시는 메시지에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고귀한 것들이 많아요. 완벽하지 않아요. 그러나 주님 의지하여 믿고 나아갈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자유로움이 있습니다. 그 안에서 세상을 다 품을 수 있는, 세상이 나의 익스텐션(extension)이 되는 그런 은총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때 나는 마치 “더 지체하지 말고 피해자들에게, 삼일교회 교인들에게, 그리고 한국교회 앞에 깊이 사죄하며 진심으로 회개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전 목사를 성토하고 있는 이들을 향해 그가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당신들이 요구하는 사죄, 반성, 성찰, 사과, 책임, 면직, 출교, 처벌, 개척중단, 사임, 성중독 치유 등등 그 모든 것으로부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복음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자유로워졌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나를 율법으로 가두지 마시오. 나는 이제 자유롭게 내 길을 갈 것입니다.”라고 당당하게 선언하고 있는 것 같았다. 40분 가까이 되는 설교에서 전 목사는 ‘자유’라는 단어를 셀 수 없을 만큼 반복적으로 자주 언급했다. 자유라는 단어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free의 다채로운 의미를 생각해본다면, 전 목사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어떠한 대가도 더 이상 치르고 싶어 하지 않으며, 교회와 사회의 제약을 받고 싶어 하지도 않으며, 도덕적 책임과 법률적 처벌에도 얽매이고 싶지 않은, 말 그대로 어떠한 외부의 간섭이나 비판에 굴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자신의 길을 올곧게 가겠다는 뜻을 다시 한 번 지지자들 앞에서 천명한 것이다. 과연 이런 전 목사에게 우리가 회개나 사죄를 기대하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사실 이 설교 한편만 들어 봐도 전 목사가 이해하는 복음, 믿음, 은혜 등이 얼마나 기괴한 것인지 알 수 있다. 기독교신앙의 고귀한 언어들이 철저하게 전 목사 자신의 자유, 성공, 목회활동, 교회사역 등을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되는데, 역시나 가장 끔찍한 것은 그 모든 것들이 궁극적으론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전 목사는 이 설교에서 인간이 완벽주의에서 벗어나서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이 가능한 시점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길 때라고 주장한다. 고대 이스라엘의 제사장이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도 바로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었다고 한다. 하나님에게 맡겨야만, 비로소 자유롭게 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시편 37편 5절을 근거로 제시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그의 논리에 따르면, 하나님께 맡길 때 인간은 자유로움을 느끼게 되고, 그 자유로움 가운데서, 혹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서, 결국 모든 일을 하나님이 이루어주신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매개로 하지 않는 어떠한 인간의 자율성이나 책임성도 말하지 않는다. 얼핏 보면 매우 신앙적이고 경건한 태도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논리 속엔 ‘나’와 하나님만이 존재할 뿐, ‘나’의 타자들, 즉 ‘너’와 ‘그/녀’에 대한 ‘나’의 관계나, 하나님과 ‘나’의 타자들 간의 관계는 전혀 ‘나’의 고민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오로지 하나님께 의지함, 하나님께 맡김, 또는 하나님을 믿음이라는 논리로 ‘나’와 하나님의 관계에서 모든 일들이 이루어질 뿐인데,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졌는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것도 사실상 ‘나’밖에 없으며, 만일 ‘나’의 판단으로 믿음이 잘 실천되었다면, 곧바로 ‘나’는 자유로움을 누릴 수 있다는 논리로 귀결된다. 결국 ‘나’와 ‘하나님’의 관계에서 문제가 먼저 해결되었다면, 그것으로 이미 남은 모든 문제도 해결된 것이며, 굳이 ‘너’나 ‘그/녀’와의 관계 속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에 집착할 필요도 없고, ‘나’의 타자들과 하나님의 관계에 대해서도 ‘나’는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식의 주장을 펴고 있는 셈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전병욱 목사가 체질적으로 일체의 타자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부정하고 오직 자신의 이해에 의해서만 행동하는 에고이스트(이기주의자)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물론 전 목사 자신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라고 항변하겠지만, 그가 믿는 그런 하나님을 나로선 도저히 신뢰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가 말하는 하나님은 그저 자신의 행동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동원되는 알리바이일 뿐이고, 실제론 ‘나’라는 소우주에 갇혀 살면서 자신이 만들어낸 하나님이라는 환상을 타자와 관계 맺고 있는 현실보다 우선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는 자신에게 피해를 입은 여성들의 진술이 계속해서 공개되고, 언론매체를 통해 자신이 저지른 범죄의 전말이 대부분 공개된 상황에서도 여전히 침묵으로 버티고 있으며, 심지어는 당당하게 홍대새교회를 개척하여 삼일교회 시절에 못지않게 열정적으로 목회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이라는 자기 환상 속의 허구적 대상의 힘을 빌려 자신이 처한 현실을 (타인의 자유에 대해선) 너무나도 무책임하면서도 (자신의 자유에 대해선) 너무나도 책임 있는 모습으로 돌파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자신의 욕망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그런 책임적 자세로 말이다. 그래서 전병욱 목사의 존재는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이 나온 이래로 한국의 개신교인들에게 아주 익숙한 신학적 질문을 환기시킨다. “내가 그를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보다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그럴 권한은 주님에게도 없어요.” 전병욱 목사에게 끔찍한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이 아직 그를 용서하지 않았는데, 전 목사는 어떻게 자신이 하나님께 이미 용서를 받았노라고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는 것일까?

사실 《밀양》에서 나온 저 질문은 개신교의 ‘값싼’ 대속론, 요컨대 자신이 죄를 지은 사람에게 용서를 비는 과정, 어쩌면 용서받는 것이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가운데서도 끝까지 감내해야할 그 처절한 속죄의 과정을 생략하고, 대신에 보다 ‘근원적인’ 죄를 저질렀다고 하는 신 앞에서 용서를 구하고 신의 아들의 대리적 속죄를 통해 인간이 아닌 신으로부터 아주 간단하게 사면 받는 과정을 제도화한 개신교의 그 독특한 죄와 고통의 망각 구조에 대한 성찰을 자극하면서 등장했다. 과연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속죄가 정말 속죄일 수 있냐고, 피해자의 고통에 대한 일말의 진지한 접근조차 생략하고 있는 속죄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냐고, 이런 식으로 속죄와 구원을 제도화한 신을 우리가 과연 신뢰할 수 있겠냐고 말이다. 《밀양》에서 전도연이 연기한 주인공 신애가 자신보다 먼저 신에 의해 이루어진 살인범 박도섭의 속죄와 구원 앞에 절망하며 신에게 항거하게 된 것도, 결국엔 개신교의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대속 구원의 논리가 지니고 있는 현실의 모순과 대면하면서부터였다. 그런데 전병욱 목사는 바로 그러한 모순적인 대속 구원의 논리를 철저하게 내면화하여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인정받았음을 당당하게 선언하며 이제 다른 이들에게까지 ‘자유로움’을 권하고 있는 것이다.

전 목사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는 삶을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타자의 고통에 대한 망각이나 피해자에 대한 책임 회피가 불가피한 것처럼 현실을 왜곡되게 인식하고 있다. 그는 ‘나’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절대화함으로써, 피해자들의 고통에 대한 책임 회피마저도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비윤리적 구원론의 적자처럼 보인다. 피해자를 만나기도 전에 이미 교도소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 평안을 되찾은 《밀양》의 살인범 박도섭 같기도 하고, 성찰 없는 믿음 내지는 정의 없는 복음을 손쉽게 소비하며 한국교회 고속 성장의 시대를 견인한 무수한 보통의 개신교인들의 표본 같기도 하다. 즉, 고속 성장의 교회부흥 시대에 형성된 ‘나’만의 신앙세계를 체화하면서 그에 어울리는 내면을 갖게 된 무수한 보통의 개신교인들의 전형성을 이른바 ‘복음적’으로 이념화하고,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그러한 전형성을 오늘날 시대정신이 된 지배이데올로기를 통해 ‘신앙적’으로 현실화하는 데 성공한 인물이 바로 전병욱 목사인 것이다. 이처럼 전 목사는 설교를 통해 자신의 실존을 뻔뻔하게 정당화하고 있다.


3. 그들은 왜 전병욱 목사를 다시 불러내야만 했을까?

문제는 이러한 방식의 정당화/합리화가 다른 이들에게까지도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예컨대 전 목사는 설교의 후반부에서 본문에 대한 주해를 마친 뒤, 곧바로 21세기의 성공 아이콘인 스티브 잡스를 언급하면서 메시지에 대한 현실적 적용을 시작한다. 정확히 얘기하면, 경제전문지 《포춘》의 선임기자인 애덤 라신스키가 쓴 『인사이드 애플Inside Apple』이라는 책을 소개하는 것인데, 이 책은 한 마디로 MBA가 가르치는 모든 현대 경영학 이론을 전면적으로 거스르고도 세계 최고 기업으로 우뚝 선 애플의 문화와 일하는 방식을 다각도로 분석해 애플 파워의 원천을 분석하고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전병욱 목사는 라신스키가 밝혀낸 애플의 강점을 이렇게 소개한다.

“그런데 애플이 왜 강한가? 그 안에 자기 자신으로서의 자유로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스티브 잡스가 했던 일이 무엇이냐? I play my own game. 나의 게임을 하는 것입니다. 나의 게임을… 다른 사람에게 맞춰 가지고 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나, 그 사람이 얼마나 기뻐하나 싫어하나… 그래서 남에게 맞추는 게임이 아니라 I play my own game. 내 자신의 게임을 한다는 거에요. (이 책의) 마지막 권면이 뭔지 아십니까? Play your own game. 우리에게도 너 자신의 게임을 하라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사가 있지 않습니까? 능력이 있지 않습니까? 그 안에서 자유로움 가지고 자기 노래 부르고, 자기 게임을 하면 누구나 다 강해집니다.”

위의 진술을 통해 전 목사가 과거 삼일교회 시절부터 지금의 홍대새교회로 이어지는 동안에도 청년층을 중심으로 수많은 이들에게 지지를 받으며 명성을 구가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신자유주의 무한경쟁의 한국사회에서 누구보다도 성공에 목말라 있지만 그것이 세속적인 욕망과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함부로 그것을 표출하지 못했던 보수적 신앙을 가진 개신교인들에게 전 목사는 영적으로 건강한 삶이 세속적 성공을 보증한다는 신념을 정당화할 수 있는 강력한 근거를 제공했다. 그리하여 그의 설교는 세속적 성공에 대한 욕망이 그 지지자들로 하여금 영적 삶의 태도를 자극하는 효과를 가져왔고, 마침내 세속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철저하게 나누면서도 동시에 세속적 성공과 신앙적 승리를 일관된 지평 속에서 추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준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진술처럼 전 목사에겐 애플의 성공 신화와 자신이 제시하는 신앙적 승리의 원리는 결코 상반되지 않는 것이다. 둘은 동일한 논리구조 속에서 진행된다. “Play your own game!” 물론 하나님은 아무런 변수가 되지 않는다.

바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전병욱 목사가 그동안 제시해온 성공하는 신자의 라이프스타일은 세속적 성공에 대한 욕망을 신앙적 승리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기를 갈망해온 한국 교회 일부의 집단적 감정구조를 안전하게 자극했던 것이다. 실제로 그날도 전 목사는 모든 책임을 자신이 믿는 하나님이라는 존재에게 떠넘기고 있었는데,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자유롭게 해주셨다는 근거로 성서의 다양한 본문들을 (맥락과 관계없이) ‘자유롭게’ 인용했다. 그런데 홍대새교회에 모여든 그의 지지자들은 그런 전병욱 목사의 주장에 ‘아멘’으로 화답하며 기꺼이 그 자유로움을 공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가 정말로 문제 삼아야 할 지점은 이러한 전병욱 목사의 기괴한 설교 및 그 설교에 담겨 있는 신학이 아닐지도 모른다. 사실 전병욱 목사가 홍대새교회와 함께 이토록 화려하게 컴백할 수 없었다면, 그의 설교나 신학 역시 자연스럽게 사장되었을 것이다. 그의 책은 이제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이며, 그의 설교 역시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전 목사가 저런 설교를 할 수 있도록, 아니 과거 삼일교회에서 했던 것보다도 더 노골적으로 자신의 성공지상주의 신앙을 설파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있는, 다시 말해 그로 하여금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사는 것이 바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게 만들어주고 있는, 홍대새교회의 전병욱 목사 지지자들이야말로 진짜 문제인 것이다. 만일 전병욱 목사에게 평소 배운 대로 믿고 행동하여 전 목사를 다시 살려낸 지지자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홍대새교회도 그리고 후안무치한 전 목사의 컴백도 없었을 것이다.

그날 3부 예배가 끝나자 나는 얼른 나와서 다음 예배 시간이 될 때까지 생각을 좀 정리하려고 홍대새교회가 들어서 있는 건물 1층의 커피숍에 들어갔다.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데, 마침 내 옆으로 방금 나와 마찬가지로 예배에 참석하고 나온 것으로 보이는 이들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대화를 들어보니 두 사람은 부녀지간이었는데, 그들은 자리에 앉자마자 전병욱 목사의 설교에 대해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마도 딸이 아버지를 예배에 이끌고 온 것 같았다. 딸은 왜 자신이 그토록 아버지를 여기에 데려 오고 싶었는지, 자신이 왜 전병욱 목사의 설교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지, 전병욱 목사의 설교가 어떤 점에서 아버지한테도 필요한지를 한참 동안 설명하고 있었다. 그 얘기를 다 듣고 아버지도 자신이 설교를 듣고 느낀 바를 얘기해주며, 두 사람은 전병욱 목사에 대한 긍정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잠시 후에 딸이 무슨 일이 있는지 밖으로 나갔고 커피숍 안에는 아버지만 남게 되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이 교회의 교인은 아닌데, 전병욱 목사와 교회에 관심이 생겨서 방문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몇 가지 궁금한 점이 있는데 혹시 대화 좀 나눌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 아버지 되는 중년 남성은 자신도 이 교회의 정식 교인은 아니며, 그저 딸이 예배에 같이 가자고 권유해서 온 것일 뿐이라고 말하면서도, 의외로 대화에 흔쾌히 응해주었다. 그와 나눈 대화를 재구성해보았다.

나: 전병욱 목사의 성추행 스캔들에 관해 아십니까?
그: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집이 숙대 근처입니다. 우리 딸도 삼일교회를 다녔습니다.
나: 지금 이 홍대새교회의 개척을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는 교회와 사회 각계의 비판과 우려의 목소리에 대해서도 아시겠군요.
그: 네. 그것 역시도 잘 알고 있습니다.
나: 그런데도 어떻게 딸을 이런 곳에 보내고, 또 같이 예배에 참석할 수 있으세요? 전병욱 목사가 혐오스럽지 않습니까?

그의 대답은 놀랍게도 방금 전에 전병욱 목사가 설교에서 자신을 변호했던 논리와 완벽하게 일치했다.

그: 전병욱 목사가 흠이 많고 부족한 사람이지만, 하나님이 그를 들어서 쓰시는데, 과연 인간이 어떻게 막을 수 있겠습니까?
나: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하나님이 전병욱 목사를 계속 사용하신다고 보는 것이죠? 하나님이 저렇게 물의를 일으킨 인물을, 아직 충분한 사과나 반성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사용하실 리가 있을까요?
그: 글쎄요. 전병욱 목사가 반성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거겠죠. 그러나 어쨌든 그의 설교를 통해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있는 것이 하나님이 그를 쓰고 계신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 아닐까요? 비록 내가 생각하기에 전병욱 목사가 한국교회의 다른 중견 목사들에 비해 영성이나 카리스마가 상대적으로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 시대 청년들에게 갈급한 부분을 잘 채워주고 있으며, 실제로 내 딸 역시 전병욱 목사의 설교를 통해 신앙생활을 잘 해내가고 있어요. 인간적·세속적 잣대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죠.
나: 혹시 홍대새교회 교인들도 아버님과 같은 생각일까요?
그: 잘은 모르지만, 내 딸을 통해 듣기론 이 교회 사람들도 전병욱 목사의 삼일교회 시절 과오에 대해선 (그 정확한 수위나 정도에 대해선 외부와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일단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간주하고 있어요. 우리 딸도 자세히는 말 안 하지만 전 목사가 실수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구요. 홍대새교회 교인들도 전병욱 목사의 실패에 대해선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나: 선생님 말씀대로면, 홍대새교회의 교인들은 기존의 다른 이단사이비 종파에서처럼 이성적 판단을 상실한 채 맹목적으로 교주를 추종하고 있는 이들이 아니라는 말씀이시죠?
그: 네. 그렇죠. 오히려 전병욱 목사 개인의 문제와 전병욱 목사를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철저히 구분하면서, 이 분들은 전병욱 목사가 아니라 전병욱 목사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따르고 있는 것이라고 봐요.
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전병욱 목사가 자신에게 피해를 입은 여성들에게 먼저 공개적으로 사죄하고, 또 자신의 범죄에 상응하는 대가를 철저하게 치루고, 또 모두가 납득할 수 있을 만한 그런 반성의 모습을 먼저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 부분은 좀 아쉬워요. 하지만 전병욱 목사 말마따나 인간이 모든 면에서 완벽할 수는 없는 것이고, 홍대새교회는 설교자로서 전병욱 목사의 강점에 최대한 집중하며 전병욱 목사와 함께 자신들의 길을 열어가고 있는 것으로 봅니다. 

결국 좁게는 설교의 은혜, 넓게는 전병욱 목사의 사역 전반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열어 가시는 삶의 길이 더 소중하기에, 전 목사의 지난 과오쯤은 충분히 용납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이 대화를 통해 내가 깨달은 것은 전 목사로 하여금 교회 개척의 용단을 내릴 수 있도록 자극한, 또는 그것이 바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게 만들어준 홍대새교회 교인들은 적어도 그의 카리스마에 일방적으로 휘둘리고 있는 추종자들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전략적인 판단 가운데서 전 목사를 밖으로 끌어냈고, 그의 후견인을 자처하며 전 목사를 이 교회의 설교자이자 목회자로 세운 것이다. 전 목사가 그들을 불러내기 전에 그들이 전 목사를 먼저 불러냈고, 전 목사는 그 부름에 대한 응답으로 과거보다 더 강화된 성공지상주의를 설파하며 자신을 향한 지지자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홍대새교회 교인들로 하여금 세상의 온갖 비난마저 뚫어내고 전 목사를 설교자/목회자로 세울 수 있게 만든 그 원동력은 대체 무엇일까? 전 목사 스스로도 인정하고 홍대새교회 교우들도 이미 인정하는 것처럼, 전 목사는 죄질이 극히 불량한 성범죄자로서 이렇게 쉽게 목회를 재개해선 안 되는 인물인데도, 그들은 왜 오직 전병욱 목사여야만 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전 목사의 그 무엇이 그토록 많은 이들에게 함께 교회를 계속 하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켰을까? 그들은 어떤 ‘감정구조’를 갖고 있기에 전 목사에게 이토록 지독하게 매료되어 있는 것일까? 


4. ‘성공적인 삶’에만 몰두한 그들의 ‘욕망의 경제학’

홍대새교회의 개척 과정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접하고 나서 그런 확신이 들었다. 전병욱 목사가 직접 나서서 사람들을 모아 교회를 만들었다기보다는 그의 메시지와 사역이 주는 매력으로부터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던, 혹은 그 메시지와 사역이 제공하는 자극이 다시금 절박했던 이들이 전 목사를 적극적으로 설득하고 대외적으로 변호하면서 마침내 그를 강단 위에 세우는 데 성공한 것이라고. 어쩌면 전 목사의 메시지나 사역과 함께 하면서, 그를 따라 신앙의 영역과 세속의 영역 양측에서 모두 성공하는 인생의 게임을 즐겨온 이들에게 전 목사의 갑작스러운 공백은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전 목사가 성폭력 스캔들을 일으킨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가 사역을 중단함으로 인해 더 이상 자신들에게 메시지를 줄 수 없다는 것, 다시 말해 지금껏 자신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정당화해온 이데올로기적 보충물의 역할을 더 이상 전 목사가 해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야말로 진짜 심각한 위기로 다가왔을 것이다. 전 목사의 메시지와 사역으로 총칭되는 그 어떤 ‘성공한 삶’의 상상계가 자신들의 삶을 더 이상 지탱해줄 수 없다고 상상했을 때 맞닥뜨려야만 했던 그들의 불안과 공포는 우리로선 짐작조차하기 어려운 것이다. 길게는 20년, 짧게는 몇 년 동안 전병욱 목사의 메시지에 심취하여 그가 제시하는 라이프스타일이나 성공지상주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해 온 이들이 갑자기 그 모든 것들을 상실할 위기에 처했을 때, 그들 가운데 적극적인 일부가 자기 삶의 안정과 지속을 위하여 ‘전병욱 구하기’를 자발적으로 시도했으리라는 가정은 충분히 타당하다. 여기서 자신이 범한 죄악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잠적 중이던 전 목사를 밖으로 끌어내어 홍대새교회를 만든 이들이 갖고 있었던 그들만의 ‘합리적 신앙’을 프로이트의 ‘리비도 경제학’의 관점에서 풀어보자.

쉽게 말해 리비도 경제학(libido economics)이란 한 대상에의 ‘몰두’가 항상 다른 대상에 대한 ‘무관심’과 병행한다는 사실을 밝혀낸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한 이론이다. 리비도는 라틴어에서 갈망, 욕망을 의미하던 단어인데, 프로이트는 이것을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심리적 에너지로 재정의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 주체에게 있어 리비도의 양은 제한되어 있으며 자아의 욕망생산(쾌락)은 이 제한된 양을 효과적으로 투자하여 항상 안정된 상태로 유지하려는 경향적 법칙을 갖는다(‘쾌락원칙’).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만족을 얻는 것이 리비도 경제학의 원리인 것이다. 그래서 프로이트의 리비도 경제학은 소자본가의 경제학이라 불리기도 한다. 마치 자본가가 투자 대상을 찾아다니는 것처럼, 인간 주체도 자신의 욕망을 투여할 대상을 끊임없이 찾아다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리비도 경제학을 구성하는 핵심에 바로 ‘몰두’의 원리가 존재한다. ‘몰두’란 리비도가 한 대상에만 집중하는 현상을 말한다. 이와 같은 리비도의 집중 현상이 ‘카덱시스’(cathexis)이다. 한 대상에 대해서만 배타적으로 리비도가 집중되는 카덱시스는 리비도의 절대량을 그 대상으로만 향하게 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주변의 다른 대상들에도 투여되어야 할 리비도의 양을 감소시킨다. 이를테면 선택과 집중의 원리 또는 배제와 차별의 경제학적 원리가 욕망의 세계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리비도 경제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전병욱 목사를 불러내어 홍대새교회를 함께 만든 이들 역시 자신들이 몰두해야 할 대상을 전 목사의 메시지와 사역을 통해 생산되는 ‘라이프스타일’, 혹은 ‘성공적 삶’의 이데올로기로 한정지었고, 다른 여타의 문제들에 대해선 어떠한 심리적 에너지도 투여하지 않기로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전 목사의 성범죄 여부나 그의 인격적 미숙함, 사임 당시 삼일교회와의 약속, 고액의 전별금 문제, 개척에 대한 외부의 비판, 그리고 전병욱 목사에게 피해를 당한 여성들, 그에게 실망한 많은 신자들, 개신교의 대(對)사회적 이미지 등등. 한정된 리비도(자본)를 가지고 최대한의 만족(이윤)을 얻기 위해 선택과 집중의 원리에 따라 자본을 투자하는 리비도 경제학, 즉 오로지 전 목사가 가져다줄 쾌락에게만 ‘몰두’하고 있었던 홍대새교회 멤버들은 자신들의 신앙적 욕망의 경제학에서 여타의 다른 변수들을 의도적으로 또는 전략적으로 배제해버렸다. 전 목사과 함께함으로써 유지되는 성공주의 이데올로기가 그들에겐 모든 신앙적 리비도가 집중되는 카덱시스였던 것이다.

따라서 전병욱 목사와 함께 하는 ‘성공적인 삶’이라는 단 하나의 욕망생산, 혹은 그 쾌락추구를 달성하기 위하여 그들이 먼저 전 목사를 다시 목회현장으로 불러냈다. 그리고 전 목사는 자신을 향한 그들의 부름을, 모든 죄를 이미 용서하고 자신을 계속 쓰고자 하는 신의 부름으로 간주했던 것이고, 이제 억울하게 고난당하는 ‘주(主)의 종’의 이미지까지 덧입혀져 과거보다 한층 진화된 ‘성공주의 이데올로기’를 홍대새교회 강단에서 설파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전 목사가 평소 자신들에게 가르쳐준 논리에 입각하여 위기에 빠진 자신들과 전 목사를 모두 구원했고, 전 목사는 이제 자신을 구원해준 이들을 위하여 더욱 열정적인 목회사역에 돌입한다. 그런 점에서 홍대새교회의 전 목사 지지자들은 그의 성범죄 피해자들에 대한 2차적 고통을 재생산하고 있는 공범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차적 가해가 성폭력사건을 둘러싼 사회적 시선이나 피해자를 대하는 태도로 인해 피해자에게 또 다른 피해를 주는 것을 말한다고 했을 때, 전 목사와 함께 하려는 욕망에만 충실한 그들의 리비도 경제학이 결국엔 전 목사의 성범죄 피해자들에겐 끔찍한 2차적 가해를 낳고 있는 셈이다.   


5. 누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인가?

앞서 전병욱 목사의 존재가 영화 《밀양》에서 제기된 신학적 질문을 환기시킨다고 말했었다. “내가 그를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보다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그럴 권한은 주님에게도 없어요.” 교도소에서 기독교 신앙에 귀의한 살인범이 이미 자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았다고 확신했던 것처럼, 전 목사 역시 이러한 신앙 속에서 자유로움을 누리고 있다고 강단 위에서 당당하게 말한다. 《밀양》에서 신애가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 전 목사에게 끔찍한 폭력을 당한 여성들이 분노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전 목사가 누리는 주님 안에서의 자유로움, 그것은 대체 어떤 상태일까? 피해 여성들은 동일하게 주님을 영접하고도 전 목사에게 당한 폭력의 기억 때문에 치가 떨려 한 순간도 평안할 수 없는데, 그녀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은 범죄자는 이미 마음의 자유로움을 얻고 불과 1년 만에 목회현장으로 복귀하여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들먹거리고 있다니? 

이 대목에서 전 목사를 데려와 홍대새교회를 만든 이들에게 진지하게 묻고 싶어진다. 어쩌면 당신들의 소중한 교우였을지도 모르는 그 피해 여성들의 절규를 단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공유한 적이 있는가? 아마 그랬다면 이렇게 홍대새교회를 만들고 전 목사를 다시 강단에 세우는 짓 따윈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겐 피해 여성들의 신음이나 비명은 애초부터 들리지도 않았던 것이다. ‘은혜’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욕망의 경제학에 탐닉하고 있던 그들은 전 목사의 성공주의 신학과 자신들의 성공 욕망을 동일시하는 데만 몰두했을 뿐, 전 목사의 그런 ‘성공적인’ 목회 이면에서 욕구 해소의 도구로 희생된 여성들의 시선으로 하나님께 다가가려는 노력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전 목사에게서 《밀양》의 살인범과 같은 섬뜩함을 느끼지도 못했던 그들이니, 전 목사에게 피해를 입은 여성들을 마음 깊이 위로하고, 그녀들의 고통을 자신들의 생생한 ‘현실’로 앓음으로써, 그녀들의 자리로 나아가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신앙적 실천을 기대하기조차 어려운 것이다.

비록 용서와 화해, 고통과 치유, 속죄와 구원이 반드시 기독교 신학만의 주제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밀양》의 중심서사가 자리 잡고 있는 공간이 다름 아닌 지역의 평범한 개신교회라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창동 감독은 《밀양》에서 바로 개신교를 향해 속죄와 구원을 둘러싼 신학적 토론을 제기한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과 설교자들이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을 제출했다. 감독 본인은 《밀양》이 인간과 종교의 문제, 인간과 구원의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니라, 밀양(密陽)으로 상징되는 일상적 공간과 그 속에서 상처받고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 그리고 그 상처의 치유 방식으로서의 사랑에 대해 그린 멜로영화일 뿐이라고 강조했지만, 결국 그도 자신의 영화로 인해 만들어진 신학적 토론의 장에 참여하고 말았다. 바로 2010년 영화 《시》에서 전작인 《밀양》을 통해 제기된 신학적 질문에 대한 감독 자신의 답변을 담은 것이다.

《시》에서 우리는 양미자라고 하는 인물이 자신에게 뜻하지 않게 다가온 비극적인 타인의 희생을 어떤 방식으로 애도하고 속죄하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집단 성폭행을 당한 어느 소녀의 자살 사건에 자신의 손자가 가해자로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그녀가 취한 행동은 손자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었다. 죽은 소녀의 엄마와 돈으로 합의를 끝냈음에도 불구하고, 양미자는 손자를 경찰에 고발하고, 소녀에게 바치는 「아네스의 노래」라는 시를 묵묵히 완성해 나간다. 아네스는 죽은 소녀 박희진의 세례명이자, 가톨릭의 전통에서 성녀로 추앙된 순교자의 이름이다. 양미자가 완성한 「아네스의 노래」, 그것은 자살한 소녀 아네스의 목소리로 양미자가 대신 부르는 비탄에 찬 애가이자, 검은 강물로 뛰어 내리기 직전 다리 위에서 자신의 지난 삶을 회상했을 아네스를 양미자가 손자를 대신하여 애도하며 속죄를 구하는 시편이다. 

「아네스의 노래」가 읊어지던 엔딩 장면에서 그것을 읊고 있는 목소리의 주인이 처음에는 양미자였다가 나중에는 죽은 소녀로 바뀌는 설정이나, 떠난 이는 양미자인데 결국 버스에서 내린 후 카메라가 비추는 사람은 영화의 첫 장면에서 나왔던 그 소녀라는 것과 더불어 카메라가 양미자의 주변 풍경을 비추다가 어느새 소녀가 평소 거닐었던 공간의 풍경으로 옮겨가는 설정, 그리고 마침내 검은 강물을 내려다보던 아네스가 고개를 돌려 관객을 바라보며 엷은 미소를 띠는 장면에서 우리는 감독이 두 인물이 하나로 겹쳐지는 상징적 결말을 의도했음을 알 수 있다. 어느 인터뷰에서 감독은 양미자가 단지 소녀의 목소리만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소녀와 운명을 일치시키는 걸 받아들였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양미자가 아네스이고 아네스가 바로 양미자라는 것. 그래서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소녀의 모습이 보이는 것은 이미 죽은 아네스의 플래시백일 수도 있고, 소녀의 시선을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하고 그녀와 자신을 동일시했던 양미자의 모습일 수도 있는 것이다.

영화 속에선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양미자는 결국 아네스가 되어 아네스의 길을 뒤따른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양미자는 자신의 죽음으로 손자의 죄를 대속하고 소녀의 한(恨)을 신원한 것이다. 이창동 감독은 우리에게 이것이 바로 가해자 또는 그 가해자의 죄책을 공유하는 이들이 죄를 씻으며 희생자를 애도하는 참회의 한 방식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내가 참석했던 홍대새교회의 예배에서도, 전 목사의 설교 그 어느 곳에서도, 그리고 그 교회의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수백 개에 달하는 게시물 어디에서도 전 목사에게 유린당한 아네스들에게 속죄를 구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물론 전 목사에게 참회를 촉구하는 이들도 없었다. 전 목사의 복귀를 환영하며, 그의 사역과 홍대새교회의 앞날을 축복하는 목소리만이 홈페이지에 가득할 뿐이었다. 그들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와 달리 아네스들의 편에 서 계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속죄를 구하지 않는 전 목사의 편에 서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성공과 강함에 대한 병리적 집착에 가까운 욕망이 낳은 이 기괴한 형태의 신앙관이 과연 한국교회 일반의 신앙관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전 목사와 홍대새교회가 향유하고 있는 그 성공지상주의 복음으로부터 우리는 전혀 자유롭다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의 관심이 전 목사의 설교를 향해 있는가, 아니면 피해 여성들의 절규를 향해 있는가에 따라 그 대답은 달라지리라. 홍대새교회는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이 될 것인가, 그리스도를 소비하는 신앙인이 될 것인가를 새삼스럽게 다시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1) 정재원, “전병욱 사건은 한국교회 현주소”

2) 정재원, “우리 안의 ‘전병욱’을 직면하자”

3) 유승태, “왜 홍대새교회로 청년들이 몰리나?”




* 이 글은 "그들은 왜 전병욱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가?"라는 제목으로 <뉴스앤조이>에 실렸던 글의 원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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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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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p
    2014.04.14 16:2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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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lay my own game"이란 주제가 이시점에서 전ㅂ 욱 씨의 설교주제라면 나로서 그에 대한 경계심을 갖게됨을 금할 수가 없다. 그 이유는 반복적인 즉 연쇄 범행자들이 갖는 생각구조이기 (thought pattern) 때문이다. 성범죄란 단 한번 행함으로서 발각나는 것이 아니므로 그동안 과거에 그런 범행이 주욱 있었음을 암시한다. 습관적인 연쇠 범행자들의 특징이 남보기에 평범하지만 남몰래 저지르는 범행에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뒷골에서는 자신만이 아는 게임이있다. 즉 mind game이다. 그들은 범죄행위 보다 그 게임의 자체에 더 쾌감을 느낀다. 자신의 계획대로 되어져가는 그 자체…
    그래서 그의 목회에 대한 열성과 동기는 다름이 아닌 mind game 또는 play my own game일 가능성이 있기때문,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쾌감이다. 즉 피해자들이나 그를 반대했던 사람들에게 던지는 자신의 승리! 그들 앞에서 그는 당당하게 미소를 지으며 "봐라, 어쩔래???" 등의 쾌감! 바로 이것을 즐기는 것이 아닌가?
    또한 그는 자신의 범행성 생각구조를 은폐하기위해서 많은 계산 즉 선한사업, 선교등등을 펼쳐나갈 것이고, 이런 행위와 소식은 그에게 있어서 승전이나 다름이 없고, 피해자나 반대자들 귀에는 많은 괴로움이 될 것을 생각하면서 또 한가지의 쾌감을 느끼게 되리라. 그러면서 범행성 행위는 중지되지않을거라고…이제 다음에 당하는 피해자들은 더 약해지는데, 이유는 "많은 고발이 있었지만 이렇게 건재하지않냐?" 이것이 다음 피해자들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 될지도 모름다. Mind game으로 범행을 저지르는 주인공들이 갖는 특징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그의 범행성 생각구조 즉play my own game 을 설교를 통해 노출했는 데도 그의 이것을 알아 차리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그는 무슨생각을 하고있을까? 조롱???
    (다음에 계속….)
  2. jp
    2014.04.14 16:4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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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justice)란 범죄를 고발하고 그 댓가를 치르게 하고, 피해자를 돌아보는 것이다. 교인이 정의에 대해 무관심해 버린다면 그들은 그 교회 교인은 될지 몰라도, 또는 십자가를 목에 걸고다니는 기독교인(Christian)은 될지 몰라도 하나님의 사람은 되지 못할 것이다. 성경과 하나님은 (절대적으로)정의를 원하신다. 정의를 위해서는 때로 고통도 따르는 것이다. 그 교회 교인들은 정의가 동반하는 고통을 두려워하고 있지는 않나?
  3. 2014.04.15 03:2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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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범행은 반복적인 범행이다. 발각나고나면 더욱 조심할뿐 사라지는 버릇이 아니다.
  4. 2015.01.30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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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댓글입니다

세일즈맨의 죽음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그 여자의 주인들은, 자기들의 돈벌이 희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서, 광장으로 관원들에게로 끌고 갔다.

―「사도행전」 16장 19절


극작가 아서 밀러(Arthur Miller)는 한 세일즈맨의 자살에서 1930년대 대공황기 미국의 사회적 모순을 들추어냅니다. 유복한 가정의 가장으로 비교적 좋은 직장의 세일즈맨이던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성실하게 일하면 성공하게 될 것이라는 신념으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하지만 두 아들은 아버지의 그 열정에 반항하며 탈선했고, 그 역시 대공황기를 맞아 직장에서 해고되고 말았습니다. 삶의 막바지에 몰린 그는 자식에게 보험금이라도 남겨주고자 사고를 가장한 자살을 했는데 그 보험금을 탈 아들은 이미 그를 떠나버린 뒤였습니다.

지난 8월 22일 또 다른 세일즈맨이 칼을 휘둘러 전 직장동료 2명과 행인 2명에게 큰 부상을 입히고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파리 같은 자기 목숨을 끊는 대신 자기를 해코지 한 전 동료들의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그는 2005년 더 이상 학비를 감당할 수 없어 대학을 중퇴하고 직장인의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7년 동안 그는 네 곳의 직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했고 마지막 직장에서 퇴사한 지난 4월, 그간의 노동의 대가로 남은 것은 4천만 원의 부채였습니다. 곧 그는 신용불량자가 되었고, 노동의욕을 상실하였으며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첫 두 번의 직장은 대기업의 하청을 받아 휴대폰 미납요금을 독촉하는 일이었고, 모두 2년이 되어 정규직으로 전환되기 직전 고용계약이 해지되었습니다.

세 번째 직장도 휴대폰 미납요금을 받아내는 일이었습니다. 역시 대기업에서 위탁받은 회사입니다. 그런데 이 회사는 개인사업자 형식으로 계약하여 실적에 따라 수당을 지급하였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매일 업무가 종료될 때 개인 실적과 팀별 실적을 공개하여 심한 노동압박을 가했습니다. 세 번째 직장에서 그는 불과 1년 만에 회사를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가 취업한 회사는 한 시중은행의 대출상품을 위탁판매하는 곳이었습니다. 한데 이 회사는 지금까지의 회사보다도 더 안 좋은 방식으로 노동자를 고용했습니다. 기본급은 없었고 실적만으로 급여를 지급했습니다.

그의 급여로는 기초생계도 불가능했습니다. 그나마 상대적으로 저리인 은행대출은 꿈조차 꿀 수 없습니다. 결국 이자율이 높은 카드빚을 져야 했고, 상환기일을 못 지켜 고리의 이자가 발생했습니다. 일할수록 그의 부채는 늘었고, 그나마 네 번째 작장을 그만둔 뒤 그는 신용불량자가 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최선을 다하면 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날 거라고 믿었습니다. 해서 몸이 부수어지도록 일했습니다. 회사의 고강도의 강박을 받으며 그의 전 노동력, 아니 몸 전체를 세일즈했습니다. 한데 7년 동안 그는 늘어만 가는, 아니 더 이상은 늘 수 없는 임계점에 도달한 부채 상황에 놓였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7년은 그의 노동의욕을 소진시켰고, 감정조절 능력도 분쇄시켜 버렸습니다. 하여 그는 더 이상 세일즈맨이 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세일즈맨은 7년 만에 사실상 죽어버린 셈입니다.

이것은 2천년대 우리의 삶을 휘둘리게 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재앙인지를 보여주는 한 전형적 사례입니다. 그 체제는 모든 사람들을 세일즈휴먼으로 만들어버립니다. 노동력을 팔고 몸을 팔며 끝내는 정신까지 팔아버리게 합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은 노동력은 물론이고 몸과 정신까지 ‘소진’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 존재가 소진되어 버린 사람은 여간해선 회복이 어렵습니다. 왜냐면 존재의 바닥까지 소진된 그이는 회생을 위한 노력을 할 수 없을 만큼 자아가 붕괴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최근 크게 늘어난 이른바 ‘묻지마 범죄’(방화, 폭력, 살인)는 그 붕괴의 한 실례입니다. 감정조절에 실패하여 모르는 누군가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자살은 그 또 다른 예입니다.

또 많은 이들은 ‘언어 붕괴’ 양상을 보입니다. 횡설수설, 무차별적인 독설 등이 그 양상의 전형적 사례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많은 이들을 피곤하게 합니다. 해서 사람들은 그이를 외면해 버리거나, 심지어는 가까지 못하도록 쫓아내기도 합니다.

해서 그런 이는 자기를 외면하지 않는 이들을 만나면 지겹도록 따라다니면서 말을 겁니다. 어떤 때는 듣기 벅차게 존경을 표현하고 어떤 때는 분노를 표합니다. 그러나 대화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언어 붕괴 상황에 놓인 그는 뜬금없는 말을 하고 횡설수설하며 상대를 배려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존재의 소진 상황에 놓인 이들은 더 이상 노동을 할 수 없을 만큼 무기력하지만 동시에 어떤 부분에서는 주위사람에게 폭력으로 느껴질 만큼 지나치게 열정이 넘칩니다. 자녀나 아내, 혹은 약한 이웃이나 동료에 대한 상습적 폭력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비인간적 체제의 폭력적 할거는 이런 사람들이 넘쳐나는 사회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빌립보에서 바울이 만났던 한 여자도 그랬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서 그녀는 ‘점치는 귀신’이 들러붙은 소녀입니다. ‘점치는 귀신’의 그리스어는 프뉴마 퓌토나(pneuma puthōna)입니다. ‘퓌톤’(puthōn)이 ‘점쟁이 영’을 뜻하고 ‘퓌토네스’(puthōnes)가 ‘복화술사’를 가리키는 단어임을 감안하면, 이 소녀는 복화술처럼 말하여 점을 치게 하는 영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녀는 ‘주인들’에 고용되었습니다. 여러 사람의 주인이 그녀로 인해 돈을 벌고 있습니다. 그녀는 점치는 조합에 고용된 노예이고 그 조합의 운영자들이 점술사들의 점으로 수입을 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대사회는 점치는 귀신 들린 소녀 같은 이를 신령한 자로 여겼습니다. 빌립보에는 그런 이가 많았습니다. 해서 그런 회사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것은 불과 반세기 전 이 도시가 겪은 엄청난 재앙 때문입니다. 부르투스와 캇시우스가 이끄는 공화군이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이끄는 부대와 바로 이 도시 앞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것입니다. 두 공화군 지도자가 자살하는 것으로 전투가 종료되는데, 이때 양군의 전사자의 수가 무려 2만 명에 육박했습니다. 잘 훈련된 로마군끼리의 전쟁에서 전사자의 수가 이렇다면 이 도시 민간인의 피해는 훨씬 혹독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이후 이 도시는 격변을 거치면서 바울 당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런 혹독한 역사, 그리고 빠른 변화는 이 도시 주민을 고강도의 집단적 스트레스 상황에 몰아넣은 것 같습니다. 해서 점에 대한 수요도 넘치게 많았고, 광인들 가운데 점치는 광인이 많았으며, 또 그이들을 고용한 회사들이 세워졌던 것입니다.

근데 여기서 주지할 것은 그 광인들을 사람들이 신령스럽게 여겼다 해도 그이들은 몸과 마음에 깊은 병이 들어 있던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그녀가 몇날 며칠을 바울 일행을 따라다니며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이예요. 그분들이 여러분에게 구원의 길을 전하고 있습니다.”고 외쳐댔다고 합니다(17절). 이에 바울은 ‘귀찮아서’ 그녀에게 들러붙은 귀신을 쫓아냈다고 합니다(18절).

이상한 구절입니다. 귀신을 쫓아낸 것이 그녀가 안타까워서가 아니라 귀찮아서입니다. 그것은 그녀가 바울이 자기를 애틋이 여긴다는 것을 알고는 그를 존경하며 따랐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언어 붕괴 상황에 있어서 그녀의 말투에 바울 일행이 괴로워했다는 것을 시사할 것입니다.

바울이 만난 소녀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전쟁으로, 전쟁의 상흔으로 영혼이 파괴된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그 도시의 자본은 그런 이를 이용해서 돈벌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민들은 그것을 소비하고 있었습니다. 파괴된 영혼으로까지 세일즈해야 하는 소녀, 그런 도시에서 바울은 바로 그런 이들의 해방을 뜻하는 복음을 전합니다. 비록 바울은 그 소녀를 이해하지 못했고 귀찮아했지만, 아무튼 그 도시는 그런 죽임의 시스템을 교란시켰던 바울을 위험한 존재로 여겼습니다.

우리는 바울을 따라 죽임의 시스템과 맞서야 할 것입니다. 한데 과연 우리는 그 소녀를 귀찮아했던 바울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을까요. 여의도에서 칼부림한 청년을 보는 우리의 태도는 과연 어떤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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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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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식객
    2012.09.06 11:3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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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명 깊게 잘 읽었습니다.
    여의도 사건이 신자유적인 자본주의가 영육을 소진한 예라고 보는 각도가 신선합니다.
    언어 붕괴는 특별한 트라우마가 없다고 하더라도 넘쳐나는 정보에 빠져 사는 요즘 사람들이 보이는 흔한 증세인 것도 같습니다.....

축구 한.일전의 정신분석학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 과정)

 

프롤로그: 나의 축구 사랑

독자들도 잘 알겠지만 예전에 '여자들이 지루해하는 이야기 세가지?'라는 유머가 있었다. 하나는 남자들이 하는 군대이야기, 두 번째가 남자들이 하는 축구 이야기, 세 번째가 남자들이 하는 군대에서 축구 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우리나라가 2002년 월드컵을 유치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도 대한민국에 산재한 조기축구회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했다.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전국의 초.중.고등학교 운동장으로 모여들어 볼을 차는 백성들이 세계에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그것도 선수들도 아닌 평범한 민간인들이 말이다. 오로지 축구사랑 때문에! FIFA를 감동시키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러한 우스갯 소리들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축구가 차지하는 함의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농담이라 할 수 있다. 필자도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아닐까 싶다.

사실 나는 축구에 관한 한 매니아 수준이다(물론, 진짜 축구매니아들이 보면 비웃겠지만). 초등학교 때 처음 봤던 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때부터 2010년 사십이 넘어 본 남아공 월드컵까지 우승국, 득점왕, 이슈가 되었던 게임, 대회 때 마다 새롭게 등장한 축구 전술, 한국의 월드컵 도전사 등을 필자는 줄줄이 꿰고 있다. 이론만 강한 것이 아니다. 축구를 직접 하는 것도 즐겼다. 한창 전성기(?) 때는 빠른 발을 바탕으로 내가 속했던 (학교, 교회, 동네, 군대) 축구팀의 붙박이 라이트 윙을 담당했었다. 바람의 아들 카니자(아르헨티나 축구선수), 변병주(80년대 말 90년대 초 한국대표팀 라이트 윙) 등을 축구할 때 나의 애칭으로 불러달라고 동료들에게 강요(애원)했었다. 물론 지금은 축구장에서 30분 뛰면 삼 일을 앓아 눕는 신세가 되었지만….유학을 온 이후로 축구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시들해지고, 이제는 새롭게 등장하는 축구선수들을 따라잡는 것이 힘들긴 하지만, 축구에 대한 나의 사랑만큼은 아직까지 변함이 없다.

 

왜, 우리는 축구에 열광하는가?

FIFA(세계축구연맹)에 가입되어있는 가맹국수(208개국)가 UN(197개국)이나 IOC(202개국)보다 많다는 사실은 세계인들이 갖고 있는 축구에 대한 단순하지만 정확한 애정의 척도라 볼 수 있다. 왜, 유독 축구를 좋아하는 것일까? 갑자기 머리를 스치면서 든 생각이다. 야구도 있고, 농구도 있고, 배구도 있는데…왜 나는, 아니 세계인들은 축구에 열광하는가?

많은 근거들을 끌어올 수 있겠지만, 필자가 보기에 사람들이 축구에 특별한 애정을 느끼는 이유는 그것이 무척이나 단순하고 원초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룰과 작전도 단순하고, 경기장도 단순하고, 등장인물들도 단순하다. 우선, 룰이 단순하다. 축구처럼 단순하고 쉬운 경기규칙도 없다. 업사이드만 알면 된다. 물론, 그 업사이드가 보는 사람의 시점과 관점에 따라 약간의 견해차가 있어 논란의 대상이 되곤 하지만, 그 역시 축구의 일부분이다.

축구는 특별한 장비도 필요없다. 공 하나만 있으면 된다.[각주:1] 특정한 장비를 필요로 하고, 일정량의 훈련과 교정을 통해 폼과 자세를 익힌 후 실전에 투입되는 종목들에 비해, 축구는 현장에 투입되는데 소요되는 절차와 과정이 상대적으로 간소하다. 큰 돈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접근성면에서 무척 용이한 스포츠다.

축구는 또한 다른 종목에 비해 신체적.계급적 조건에 제한을 덜 받는다. 축구장안에는 160cm대의 선수도 있고 2m 가까운 선수도 있다. 170대의 남미 선수들이 190대의 유럽선수들과 맞짱떠서 당당히 승리하는 종목이 축구다. 계급적으로도 그렇다. 변방에 있는 소년들에게 그나마 지금의 삶의 자리에서 인생 역전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스포츠를 꼽으라면 당연 축구가 1순위다. 유럽 빅리그 유소년 축구팀에서 어렸을 때부터 체계적 훈련을 받고 축구스타가 되기도 하지만, 남미의 지저분한 뒷골목에서 공 하나 가지고 놀았던 아이들이나 아프리카 사막에서 공을 차던 소년들 중 세계 축구계의 별이 된 케이스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또한, 축구는, 수시로 교체를 할 수 있어서 선수들이 들락날락거리는 다른 구기종목들에 비해, 처음 등장했던 인물들이 비교적 수미일관하게 끝까지 간다. 교체멤버가 세 명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특별히 외부에서 분위기를 반전시킬 패가 별로 없다는 말이고, 꼼수 사용에 제한이 있다는 말이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축구가 지닌 이러한 고지식함이 자칫 축구를 지루하게 느끼게 할 수도 있겠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축구가 지닌 이러한 단백함이 오히려 축구를 보는 사람이나 경기에 참여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좀 더 그라운드로 녹아 들게하는 요소가 아닐까 싶다.

종합적으로 말하면, 이처럼 축구가 지닌 단순함과 그로부터 야기되는 평등성, 그에 임하는 심기의 정직함은 현대인들로 하여금 본인들의 잃어버린 본능과 야성과 지각을 되살리게끔 하는 아드레날린 같은 역할을 한다. 축구를 보면서(혹은 하면서) 분출되는 아드레날린은 우리의 심장을 강하고 빠르게 뛰게하여 혈관을 수축시키고 동공을 확대시킨다. 점입가경으로 우리는 올림픽에서 축구 동메달을 놓고 외나무 다리에서 일본과 만났다. 일본에 대한 뿌리깊은 반일감정은 축구를 하는 선수들이나 축구를 보는 우리들의 아드레날린 분비를 더욱 촉진시킬것이다. 이 보다 더 극적인 상황이 어디 있겠는가? 이제, 드디어 축구 한.일전을 관람할 시간이다.

 

한.일전의 정신분석학

올림픽 축구 한.일전이 열리기 전날, 필자는 한 달간의 한국 방문을 마치고 다시 시카고 돌아왔다. 8월 9일(목) 밤 10시(시카고 타임)에 나는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 도착했고, 그 다음 날(8월 9일, 금 오후 1시 30분) 시차적응이 안되어 비몽사몽함에도 불구하고 눈을 비비며 일어나 무슨 예식을 치르듯 인터넷을 뒤져 SBS 차범근이 해설하는 2012년 런던 올림픽 축구 3-4위전 한국과 일본의 축구경기 앞에 앉았다. 그것은 정말이지 성스러운 예배에 참여하는 심정과 절차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국 축구 사상 최초의 올림픽 동메달, 병역특례, 박주영 파동, 독도문제, 며칠 남지 않은 광복절, 그리고 일본! 너무나 완벽한 예배 순서였고, 그 예배가 끝난 다음에 벌어질 감격과 은혜를 기대하며 나는 TV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근래 방영되었던 드라마 중 최고의 흥행작이라 평가받는 현빈과 하지원 주연의 '시크릿 가든'의 최고 시청률이 30% 내외에서 형성되었다고 한다. 2012년 런던 올림픽 동메달을 놓고 벌였던 축구 한일전은 새벽 3시였음에도 불구하고 33%라는 국민 드라마 급의 경의적인 시청률을 기록하였다. 시청이 용이한 시간대였으면 최소한 60% 이상의 최고 시청률도 나왔을 것이라고 방송관계자들은 예측한다.

축구 한일전의 영향력은 비단 방송 시청율뿐 아니다. 한일전 패배는 곧바로 감독들의 퇴출로 연결된다. 비근한 실례로 현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인 최강희 감독 전에 한국팀의 지휘봉을 잡았던 조광래 감독은 작년 한일전 3:0패배 후에 대표팀 감독에서 물러났다. 한일전 골 세레머니 혹은 승리 후 세레머니는, 이번 올림픽 대표팀 박종우의 독도세레머니가 대표적 케이스가 되겠지만, 정치적 액션으로 비화되기도 하여 양국의 국민감정에 영향을 끼쳐 외교문제로까지 확대되기도 한다. 합리적 판단과 사고가 아닌, 뭔가 원시적이고 원초적인, 경우에 어긋나고 상식을 뛰어넘는 과한 잉여가 축구 한.일전 후에 흘러 넘친다는 말이다. 이처럼 정상적인 비평의 도그마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한.일전 축구의 틈새와 잉여에 대한 설명은 무엇으로 가능할까?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축구 한.일전에 대한 정신분석학이 작동된다.

 

'Id-Ego-Superego' in 축구장

정신분석학은 프로이트로부터 시작되었다.[각주:2] <꿈의 해석>(1899)을 통해 무의식의 존재와 그것의 의미에 대해 밝힌 프로이트는 <자아와 이드>(1923)에서 인성Personality을 욕망의 차원인 Id와 현실적 차원인 ego, 그리고 도덕적 차원인 superego 사이의 역학관계로 설명하였다. 자, 그럼 프로이트가 밝힌 인성의 역학관계를 축구장으로 옮겨보겠다.

 

  • 초자아 Superego

우선, 초자아인 superego는 주심과 부심이 될 것이다. 이들은 승부를 향한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그라운드 속에서 그나마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야만속에서 문명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축구장내 유일한 존엄자들이다. FIFA는 심판들에게 선수보호와 재미있는(골이 많이 나는) 축구경기를 위해 많은 권한을 부여하였다. 선수보호를 위한 백태클 금지, 허리우드 액션 금지, 골키퍼의 시간 끌기에 대한 경고, 업사이드에 대한 완화 등... 하지만, 이 모든 판결은 절대적으로 심판들의 촉에 의지한다. 내버려두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온갖 Id에 대한 방어책이자 공격책으로 축구는 심판들에게 다른 종목 심판들에 비해 비교적 넓은 영역에서 광범위한 판단의 결정권을 강하게 부여하였다. 이 말은 반대로 말해 때로는 심판의 판정이 다분히 주관적 일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한번 내려진 결정은 절대 번복이 안 된다. 숱한 오심과 석연치 않은 판정에도 불구하고 축구는 그것조차 축구경기의 일부로 흡수하여 초자아를 보호한다. .

  • 자아 Id

광기에 찬 관중들은 Id로 분류해야 할 것이다. Id는 인성의 가장 원초적이고 일차적인 원리인 '쾌락원리Pleasure principle'의 지배를 받는다.[각주:3] 유럽축구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훌리건들, 한국의 붉은악마가 대표적이다. 축구장내 관중 난동과 패싸움은 추락한 이드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모습이 오히려 축구를 보는 재미라고 말하지만, 이것이 국가적 차원으로 확대되면 문제는 심각해 진다. 실제로 1969년 월드컵 중남미예선전 이후 온드라스와 엘살바도르가 일주일동안 축구전쟁을 경험한 바 있다. 이번 올림픽 3-4위전이 끝난 후 발생한 박종우의 독도세레머니 후폭풍도 비슷한 케이스라 볼 수 있다. 이 모두가 이드가 초자아의 통제와 감시를 뚫고 올라와, 아니 정확히 말하면 초자아가 퇴각한 이후 분출되지 못했던 이드가 축구장 안팎에서 만개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오직 우리팀의 승리만을 염원하는 관중들의 집단적 에너지는 한.일 전이 벌어졌던 축구장안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스크린을 통해 브라운관을 통해, 인터넷과 SNS를 통해 확대되고 증폭된다. 그 다음에 벌어지는 사태는 이미 축구가 아니다. 오직 '애국자인가? 매국노인가?' 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 박종우의 독도 세레머니는 애국의 차원으로 번져나갔고, 메달박탈과 병역특혜제외에 대한 논의는 절대 있을 수 없는 것으로 평가된다. 축구와 애국이 대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이것은 합리적 설명의 테두리를 벗어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는 무엇인가에 의해 매개되어있다. What?

  • 자아 Ego

그라운드의 선수들은 Ego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뚜렷한 이드의 특성과 덜 성숙한 초자아 면모를 모두 지닌 존재들이다. 달리 표현하면, 선수들은 초자아가 제시 하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화려한 개인기와 톱니바퀴 같은 팀웍으로 이드의 괘락원칙을 양(+)으로 충족시키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초자아의 감시를 피해 능란한 솜씨로 반칙을 범하여 이드를 음(-)으로 자극하는, 마치 마징가 Z에 나오는 아수라백작과도 같은 존재들이다.

특별히 한-일전에 임하는 한국 축구선수들의 ego는 무척이나 복잡하다. 예전에 일본과 경기 전 한 선수가 인터뷰하면서 "독립운동하는 마음으로 경기에 임하겠다"고 밝힌 적이 있었다. 이렇듯 민족감정, 특별히 반일감정은 축구장내에서 이드를 작동케 하는 커다란 원천이자, 에고의 정신을 강하게 무장시키는 동기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한-일 전 때는 초자아의 힘이 이드와 이드에 의해 영향받는 Ego를 완벽하게 압도하지 못한다. 이번 런던올림픽 3-4위 일본전에서 경고누적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끊임없이 반칙을 해대는 한국선수들을 보라!

우리가 구자철에게 반했던 이유는 본인이 행한 플레이가 반칙으로 지적당하자 초자아인 심판에게 달려가 "Why? Why?"를 외치며 격하게 저항해서였고, 일본선수들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적대의 시선과 그에 걸맞는 호전적인 액션을 취했기 때문이다. 물론, 구자철은 축구를 잘하는 선수이지만, 구자철이 일본을 상대로 보였던 파이팅으로 구자철은 단순히 축구를 잘하는 선수를 넘어섰다. 구자철은 들끓는 이드의 욕구를, 아니 그들의 환상을 정확히 알고 충족시킬 줄 알았던 선수였던 것이다. 본인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그렇다면, 그 환상이 정말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 Che Vuoi? (케 보이?); 당신은 무엇을 원하는가? 라깡과 지젝이 출몰하는 지점이다.[각주:4]

 

에필로그

애초에 별 생각 없이 프로이트가 말하는 인성의 역학관계와 축구장내에 존재하는 인물들간의 역학관계를 엮으면 재미있는 글이 나올 것 같아 글을 시작했는데, 결국 라깡과 지젝으로 까지 글이 번져나갈 태세다. 그래서 화들짝 놀라 황급히 이번 웹진 글을 마무리 한다. 한 달간 숨을 고르면서 겹겹이 쌓여 있는, 라깡과 지젝이 이룩한 사유의 거적을 천천히 들춰내야 할텐데……솔직히 그것이 좀 거시기하다. 언제면 그들을 나의 언어로 쉽고 명쾌하게 설명해 낼 수 있을까? 언제면 그들이 내는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가 되고, 언제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그들을 가뿐하게 넘어 갈 수 있을까? 그런데, 그렇게 사자가 되고 바람이 되고 나면 나는 기쁠까?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뭐지? 소원을 말해 봐~~ 소녀시대가 설마 케보이를?

(다음 글은 소녀시대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1. ‘공 하나만 있으면 된다’는 말은 위험한 발언이다. 자칫, 평등을 내포하는 말로 해석이 되어 높은 양반들의 심기를 건드려 히스테리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21세기를 다스리는 세력은 역대 지배계층이 지녔던 히스테리적인 요소들마저 자본의 흐름안으로 녹아들게 만드는 신출귀몰한 능력을 지녔기에 저 정도의 구호쯤에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이 글을 쓰면서 생겼다. 실례로, 몇 해전 필자는 방학을 맞아 한국 방문 중에 하루 짬을 내어 인사동을 돌아다녔었다. 어느 화랑에서 전시회가 열렸는데 ‘민중예술 회고전’이었다. 70-80년대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었던 시절, 당대의 아픔과 모순을 파헤쳤던 예술들을 전시한다고 적혀 있었다. 당시에는 그 작품들을 이렇게 불렀었다.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 국민일반의 정서에 반하는 풍기문란,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는 선전물 등. 그로부터 한 세대가 흐른 지금, 당시 지배계층에게 히스테리적인 요소였던 그 작품들은 쇼윈도에 전시되어 압구정동이나 청담동에서 온 부자집 사모님들에 의해 15만원에, 30만원에, 50만원에 팔려나간다. 21세기 한국의 지배계급은 전 시대 자신들의 적대와 히스테리마저 순화시켜 회고할 줄 아는 넉넉함과 관조와 아량을 지닌 존재들이다. 위대한 자본의 승리랄까. 이런 자들이 ‘공 하나만 있으면 된다’라는 소박한 말에 무슨 자극을 받겠는가? 내가 또 오바했다. [본문으로]
  2. 프로이트 이후 대부분의 정신분석학자들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이론과 인성의 역학관계에 초점을 맞춰 실제 정신치료에 프로이트를 적용하였다. 하지만, 라깡은 정신치료만을 목적으로 실천지향적으로만 치닫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철학적. 사변적 영역으로 전환시켰다. 라깡의 새로운 정신분석이론은 후에 지젝으로 대표되는 슬로베니아학파로 이어져 현재 인문학 전분야에서 걸쳐 강력한 파괴력을 발휘하고 있다. [본문으로]
  3. 대부분의 프로이디안들은 프로이트 후기를 대표하는 <쾌락윈칙을 넘어서>(1920)에 대해 언급을 회피해왔다. 프로이트의 대부분의 책들이 구체적 사례에 바탕한 실천적 측면을 다루는데 반해, 이 책의 경우는 예외적으로 사변적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라깡은 프로이트가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죽음충동’이 내포하는 철학적. 문명사적 의미에 주목한다. 이것은 후에 쥬이상스를 설명하는데 다시 이용되고, 궁극적으로, 라깡과 지젝이 말하고자 하는 the Real(실재)’을 설명하기 위한 중요한 단초가 된다. [본문으로]
  4. ‘케보이(Che Vuoi)’는 라깡이 말하는 주체의 대타자를 향한 질문이다. 지젝은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3장에서 라깡의 ‘케보이’에 대한 질문을 자신의 언어로 재서술하고 있다. 다음 웹진에서는 ‘케 보이’에 대한, 라깡을 경유한 지젝의 논의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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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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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상철
    2012.09.06 20:50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각주 4개가 모두 빠져 있네요. 원래 보낸 원고와 대조해서 정정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저는 아직 윤리학 박사가 아니고, 박사과정 (나부랭이)입니다. 제 신분을 돌려주세요. 지금보니 사진의 제 얼굴이 부담스럽게 크네요. 지난 웹진부터 사진이 확대되더니, 이번 웹진 사진은 거의 영정사진 수준입니다. 6월 웹진 이전 사진 크기가 개인적으로 좋은데...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어 얼굴이 날로 확대되는 건가요? 아니면 기술적인 이유라도...사진 크기 좀 줄여주시기를.
  2. 2012.09.07 09:07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MS word에서 원격 발행하는 걸 테스트하다 문제가 생겼네요. ㅠㅠ
    사진은.. 워낙 멋지셔서 크게.. ;;
    사진, 각주 수정했습니다.
    글자체도 전과 다르게 나오게 됐는데,
    이미 올라간 글을 수정하려면
    (기본 제공되는 웹폰트가 아닌지라) 수정작업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글자체는
    그냥 둡니다.
    사실 그동안 폰트나 줄간격 등은 매번 공들여 HTML 태그를 하나하나 수정해왔답니다. ^^;
    아무튼 원격 발행은 원래 텍스트대로 잘 안나오므로 이전 방식대로 올려야겠습니다.
  3. 이상철
    2012.09.07 09:18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바쁜데 귀찮게 해서 죄송해요.
  4. 유승태
    2012.09.11 22:26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아닙니다. 늘 좋은 글 보내주시는데 실수 투성이로 블로그에 올리니 죄송할 따름입니다.

 

우리신학연구소와 제3시대그리스도교 연구소가 공동으로 마련하는 이번 심포지움에서는 미카엘 뢰비의 저서 <신들의 전쟁>을 통해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의 오늘과 최근 급성장하는 복음주의 개신교 상황을 살펴봅니다.

<신들의 전쟁: 라틴아메리카의 종교와 정치> (미카엘 뢰비 저, 김항섭 역, 그린비출판사, 2012년)
왕성한 저술활동과 사회운동 참여로 국제적인 인정을 받고 있는 미카엘 뢰비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이 책은 라틴아메리카의 ‘해방그리스도교’를 이론적 측면에서, 그리고 실천적ㆍ역사적 측면에서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분석한 역작입니다. 책의 제목인 ‘신들의 전쟁’은 두 가지 ‘전쟁’을 의미하는데, 그 중 하나는 진보적인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신 개념과 보수적인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신 개념 사이의 투쟁이고, 더 중요한 다른 의미는 해방신학의 신과 자본주의의 우상들(돈, 시장, 상품, 자본 등) 사이의 전쟁입니다.
이번 심포지움에서는 가톨릭 해방신학운동의 현재와 최근 라틴아메리카에서 급성장하는 복음주의 개신교의 상황을 비교함으로써, 진보적인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신 개념과 보수적인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신 개념 사이의 투쟁을 중심으로 살펴 볼 예정입니다. 이를 통해 현재 한국 사회에서도 일어나는 보수적 신앙과 진보적 신앙의 갈등을 어떻게 바라보고 종교의 역할을 정립할 수 있을지 시사점을 얻고자 합니다. [심포지움 현장에서 책을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 저자 미카엘 뢰비(Michael Lowy, 1938~ )는 브라질 출신의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이다. 1938년, 오스트리아에서 이민 온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1960년에 상파울루 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프랑스에 유학하여, 1964년에 프랑스 소르본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 명예 연구이사이고, 사회과학고등연구원, 암스테르담에 있는 국제연구·교육연구소에서 강의하고 있다. 프랑스 신 반자본당과 제4인터내셔널에서 활동하면서 브라질 노동자당이나 무토지농민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 등, 사회활동에도 활발하게 나서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2007년 파리에서 열린 제1차 국제생태사회주의회의를 조직하기도 했다. 미카엘 뢰비는 지금까지 수많은 논문과 책을 썼는데, 1980년대 중반까지는 주로 맑스, 루카치 등 맑스주의 사상을 지식사회학적 관점에서 다뤘고, 8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문화사회학적 관점에서 다양한 문화 현상, 특히 종교와 정치의 관계에 대한 많은 글을 발표하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이 책 『신들의 전쟁』 이외에도 『체 게바라의 맑스주의』(1973, 2007), 『루카치 : 낭만주의에서 볼셰비즘까지』(1981), 『조합되고 불균등한 발전의 정치 : 영구혁명론』(1981), 『구원과 유토피아 : 중부 유럽의 해방적 유대교』(1992), 『세계 변화에 대해 : 정치철학 에세이-맑스에서 발터 벤야민까지』(1993), 『조국이냐 어머니 지구냐 : 민족 문제에 대한 에세이』(1998), 『프란츠 카프카 : 꺾이지 않는 몽상가』(2004), 『화재경보 : 벤야민의 ‘역사개념론’』(2005), 『체 게바라 : 꺼지지 않은 불꽃』(2007) 등이 있다.

* 역자 김항섭은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학 석사를 마치고, 브라질 상파울루 가톨릭대학교에서 종교학 석사, 상파울루 감리교대학교에서 종교학 박사를 하였다. 현재 한신대학교 종교문화학과 교수이고 우리신학연구소 이사장을 맡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생태학의 도전과 그리스도교』, 『21세기 사회와 종교 그리고 유토피아』(공저), 『신자유주의시대 라틴아메리카 시민사회의 대응과 문화변동』(공저)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물신』(프란츠 힌켈라메르트), 『생태 신학』(레오나르두 보프), 『종교사회학 : 마르크스주의적 관점』(프랑수아 후타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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