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이번 11월 26일에는 본 연구소가 주관하는 <한국사회 보수주의 형성과 그리스도교 포럼>의 여덟번째 마당을 개최합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포럼 취지_

제도적ㆍ정책적 수준에서 한국의 복지발전이 비약적으로 이루어진 김대중 정부를 기점으로, 아울러 이명박 정부 하에서 정당을 중심으로 한 복지정치 논의가 한층 진전되면서, 현재 한국은 비복지국가에서 복지국가로의 이행과정을 거치고 있다는 평가가 복지국가 연구자들 사이에서 지배적이다. 물론 그러한 이행의 양상과 더불어, 과거 개발독재 시대의 발전주의적 복지체제의 유산과 흔적이 아직도 강하게 잔존하면서, 한국 복지체제의 변동에 강한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e)을 부여하고 있다는 평가 역시 공존하고 있다.

따라서 그러한 이행의 과도기적 현실을 고려할 때, 지난 시대 발전주의적 복지체제 형성의 근간을 제공한 박정희 정권기의 복지체제에 관한 연구는 김대중 정부 이후 현재까지의 한국 복지체제의 구조와 문제점, 그리고 향후의 과제를 규명하는 데 있어서도 여전히 중요한 주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들어 몇 몇의 연구자들을 통해 그 시기 복지체제의 특성에 관한 고찰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정작 그러한 ‘문제적’인 복지체제가 취약한 물적토대와 빈약한 정책 위에서도 비교적 성공적으로 유지될 수 있게 만든 당시 사회의 통합 기제나, 그와 같은 억압적인 국가주도의 복지체제에 대한 대중들의 다층적인 반응 내지는 포섭과 저항의 복합적인 양상에 대해선 충분한 설명이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

이번 포럼에서는 그 시대에 한국경제와 더불어 급성장한 한국교회가 도시에서 수행한 복지적 역할, 즉 제3섹터로서 교회가 수행한 비공식적인 복지활동의 사회적 효과를 살펴봄으로써, 관련 쟁점들에 대한 신학적 차원의 개입 가능성을 모색해보고, 나아가 복지라고 하는 공간을 매개로 하여 한국사회의 보수주의 형성과 교회의 역할 간의 관계에 대한 탐구를 발전시켜 보고자 한다.

발표자_ 정용택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상임연구원)
일시_ 2012년 11월 26일(월) 저녁 7:30
장소_ 안병무홀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1번과 2번 출구. 두 출구 사이 골목 50미터, 좌측 건물의 1층)
문의_ 02-363-9190, 010-3043-5058(유승태 연구원), 010-4944-2019(정용택 연구원),

         3era@daum.net
참가비_ 3천원(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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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그 때에는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들의 조상이 살던 땅에서 그들이 살게 될 것이다. 그 땅에서 그들과, 그 자자손손이 영원히 거기에서 살 것이며,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영원한 왕이 될 것이다.
―「에스겔서」 37,25

 

실패한 체제 이후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문제를 두고 바벨로니아에 의해 강제 유배된 이주민 집단들 내부에서 복잡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특히 제국의 끝이 임박했다는 믿음이 널리 확산되자 이런 논쟁은 폭발적으로 활기를 띱니다. 그리고 많은 대중은 다분히 메시아주의에 들떠 있었습니다. 하여 당대의 지식인들은 메시아적 열망을 부추기며 자기들의 미래 기획 속에 저들 대중을 끌어들이려 했습니다. 
과거의 인물 에스겔의 상징성을 추종하는 사제집단들도 당대의 주요 정파였는데, 이들이 추구하는 미래 기획의 핵심은 군주 중심의 체제를 사제 중심의 체제로 대체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또한 성전에서 사제들의 공간(안뜰)과 평신도의 공간(바깥뜰)을 이분화하고 전자는 사제들이, 그리고 후자는 사제들의 지휘를 받는 레위인들이 주축이 되어 사제 중심적 질서를 이룩하면 야훼의 영광(카보드)이 성전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주장이지요.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 사회는 진정 회생하게 된다고 그들을 믿었습니다.
이 야훼의 영광이 이스라엘에게로 귀환하는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그리는 묵시적 상상이 「에스겔서」 37장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지난 고난의 역사 속에서 죽어갔던 동족들, 아무렇게나 흩어져버린 그네들의 뼈들이 되살아나고 그 속에 생기가 들어가 생명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유다국과 이스라엘국 백성이 하나가 되고 한 위대한 통치자가 다스리는 나라가 되어 온 세계에 널리 알려지는 위대한 족속이 될 것이라는 얘깁니다. 한데 그 통치자는 다름 아닌 유다국의 군주 다윗입니다. 다윗의 통치 아래서 야훼의 백성이 다시는 쫓겨나지 않고 영원히 이 땅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요.
한데 여기에는 모순이 있습니다. 사제 중심의 성전체제가 미래 기획의 핵심인데, 그렇게 되면 군주인 다윗이 다스리는 영원한 나라가 이룩될 거라고 합니다. 에스겔 정파가 그리는 사제 중심의 미래 기획은 군주체제의 실패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과거 얘기인 듯하지만, 실은 미래의 시나리오이기도 합니다. 왜냐면 미래에 귀향해서 구축할 사회가 다시 군주 중심의 체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 의하면 유다국의 몰락은 군주체제의 실패이고, 하여 군주체제는 청산의 대상입니다. 하여 그들은 새 체제로의 정치개혁을 주장했고, 그 중심에는 군주가 아니라 사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순적인 얘기가 하나로 엮이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 텍스트가 두 부류에 대한 포용전술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말할 것도 없이 왕당파에 대한 포용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대중입니다. 왜냐면 영원히 다스릴 군주가 다름 아닌 ‘다윗’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대중이 다윗이 미래에 자신들을 구원해줄 메시아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 메시아니즘’이 바벨로니아 제국 말기에 유대계 유배민 대중 사이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나자 대중을 정치화하는 일이 대단히 중요해졌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제 중심의 미래 기획이 실현될 때, 왕당파는 과연 이익이 있을까요? 그리고 대중에게도 이익이 있을까요? 상상하자면 왕당파는 사제 중심의 세력 재편과정에서 이익 분점 세력이 될 것입니다. 그 분할 점이 어디인지는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말입니다. 그것은 왕당파가 자신들의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해 협상할 수 있는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중의 경우는 영락없이 토사구팽(兎死狗烹)될 운명입니다. 곧 권력재편이 이뤄지면 단순한 피통치자로 전락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대중은 협상할 자신들의 이해를 제도적 언술로 명료히 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대개 대중들이 품고 있는 언어는 열망의 언어이지 제도의 언어가 아닙니다. 그것은 빼앗기지도 쫓겨나지도 않으며,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을 자자손손 지키며 사는 권리 같은 식입니다. 
제도의 언어가 아닌 언어들은 체제의 구축 과정에서 제도의 언어로 번안되어야 합니다. 가끔은 대중을 포섭하는 단계에서 번안 작업이 시작되기도 합니다. 최근 대선정국에서 각 대선후보 캠프에서 이구동성으로 제시하는 경제민주화론 같은 것이 그렇습니다.
한데 에스겔을 추종하는 사제세력들은 아직 번안하지 않고 단지 ‘조상이 살던 땅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고 모호한 말만 하고 있습니다. 가령 ‘희년제도’를 도입하겠다든지, 과거 요시아 정부처럼 지주들에 의한 착취와 착복을 억제하는 각종 제도를 시행한다든지 하는 제도의 언어가 원론적인 열망의 언어로만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모호한 언어들은 제도로 실행되지 않고 ‘약속’으로만 남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유신체제가 모호하게 약속했던 많은 것들이 끝내 바람으로만 남겨졌던 것처럼 제도의 형태로 정착시켜야 하는 부담이 덜한 약속들을 짊어질 만큼 여유 있는 체제는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 열망의 언어가 메시아주의적 성격을 띨 경우 더욱 그러합니다. 메시아주의적 언어는 최대주의적 열망을 담고 있습니다. 이런 고강도의 열망을 외치면서 도래할 가상의 성취감에 몰입되어 있는 이들은 이 성취감만으로도 행복감에 충만히 젖어 있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그러한 미래를 위해서 현재 감당해야 할 과제가 주어지면 앞뒤 가리지 않고 그것에 열정적으로 몰입합니다. 이 몰입 과정은 그이들을 정체 모를 희열에 젖게 합니다. 게다가 그 과제가 누군가를 증오하는 일인 경우 그 쾌감어린 열기는 불꽃을 일으키곤 합니다.
이쯤 되면 메시아주의적 열망에 젖은 대중은 길을 잃습니다. 자기들의 열망이 어느 것인지 되돌아볼 여유 없이 메시아주의를 충동질하는 이들이 제시한 과제에 맹렬하게 몰입합니다. 그리고 그 충동질한 이들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을 때, 곧 메시아주의적 열망이 성공한 권력에 흡수되었을 때, 대중의 그 열망은 흐지부지되어 지리멸렬해지는 일이 허다합니다. 그리고 메시아주의는 실종되어 버립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대중은 이익 분점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단지 피지배자가 될 뿐입니다.
에스겔을 추종하는 사제집단이 대중을 그렇게 배신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본문은 그렇게 메시아주의에 열광하는 대중을 선동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염원했던 것과 같은 사제 중심적 체제가 몇 세기 후에 실제로 구축되었습니다. 하지만 실현된 사제 중심적 체제가 에스겔을 추종하는 사제집단의 직접적 후예들은 아닙니다. 다만 그이들의 신학을 후대의 체제는 적극 활용했습니다. 한데 이 체제에서 대중은 아무런 이익 분점의 주체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번 대선에서 세 명의 유력후보들은 예외 없이 경제민주화를 주요 슬로건으로 내놓았습니다. 그것은, 알다시피, 지난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경제가 무수히 많은 대중을 몰락하게 했고, 대부분의 대중으로 하여금 잠재적 몰락자가 되게 했던 것 때문입니다.
대중은 심각한 고통에 휩싸여 있습니다. 그 고통에서 헤어 나올 대안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대안 부재의 상황에서 대중사회에는 메시아주의가 폭넓게 확산되어 있습니다. 특히 세 명의 유력 후보 중 둘은 그러한 대중적 메시아주의 신앙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박정희 메시아주의와 노무현 메시아주의 말입니다. 또 안철수도 유사메시아주의 혹은 원초적 메시아주의라고 할 수 있는 ‘팬덤’ 현상의 주역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대중은 절망 상황에서 자신을 구원해줄 이를 갈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세 명의 대선후보들은 이런 메시아주의적 대중을 동원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경제민주화에 관한 한, 안 캠프와 문 캠프는 ‘잘 준비되었는지’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제도의 언어로 번안하려는 데 시도를 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됩니다. 그것은 집권 이후 어떻게 해서든 실행에 옮겨야 하는 부담을 짊어져야 하며, 그렇지 않을 때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데 박 캠프는 모호한 원칙적인 말만 되풀이합니다. 더욱이 그런 대중을 향해 박 캠프는 NLL논란 같은 논거 없는 북풍에 대중을 동원합니다. 어쩌면 박근혜씨를 지지하는 메시아주의적 대중은 벌써 그이들이 고통 속에서 품어온 메시아주의적 열망을 실종해버렸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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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지젝을 아느냐? (I)
: ‘빗금 그어진 주체($)’ 안에 숨겨진 함의에 관한 에세이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 과정)

 

프롤로그:  지젝 연재를 시작하며

소원을 말해봐 니 마음속에 있는 작은 꿈을 말해 봐
니 머리에 있는 이상형을 그려봐 그리고 나를 봐.
난 너의 지니야 꿈이야 지니야~
<중략>
I'm Genie for you, boy!
I'm Genie for your wish!
I'm Genie for your dream!
I'm Genie for your world!

소녀시대가 부른 ‘소원을 말해 봐’의 노래가사 중 일부다. 9명의 소녀시대 멤버들이 내게로 와 소원을 말해보라고 속삭인다. 실제로 그녀들이 내 소원을 다 들어주면 나는 어떻게 될까? 노래가사처럼 램프에 숨어있던 지니가 ‘뽕’하고 나타나 나의 모든 쾌(快)를 만족시켜 준다면? 아마도 미쳐 터져버리지 않을까?
실제로 그 소원을 끝까지 밀어부쳐 실행한 사람이 있었다. Sadism의 어원이 된 사드(Sade)가 바로 그다. 사드는 칸트와 동시대 인물이다. 하나는 “네 의지의 준칙이 보편타당한 입법이 되도록 행동하라”고 설파했던 엄숙한 성인이었고, 다른 하나는 “타인을 우리의 쾌락의 도구로 즐길 수 있는 권리를 우리 행동의 보편적인 준칙으로 삼자”[각주:1]고 주장했던 가학적 성 도착증환자 취급을 받는 자다. 라깡은 이 둘을 교차시키면서 정신분석학의 윤리를 정초하려 했고,[각주:2] 이는 현재 지젝으로 대표되는 슬로베니아학파로 이어져 ‘실재의 윤리’로 각색된 채 인문학 전 분야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각주:3]
오랫동안 미루어왔던 지젝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연재될 글의 목표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실재의 윤리’[각주:4]가 무엇이고, 왜 그것이 이 시기에 필요한지에 대한 물음과 답변이다. 또 다른 하나는, 지젝으로 신학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은 기존의 신학함과 어떻게 다른지? 에 대한 신학적 분석이다. 하지만, 그곳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라깡과 지젝을 지날 때 만나게 되는 몇 가지 용어와 개념에 대한 정리가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각주:5] 특별히, 라깡과 지젝간의 이론적 접점이라 할 수 있는 실재(the Real)를 규명하는 일이 그 작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각주:6] 라깡-지젝에게 있어 실재가 중요한 이유는 이들이 말하는 ‘the Real’이 사상사의 흐름속에서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져 왔던 실재, 즉 궁극적 진리, 만물의 원인, 혹은 모든 운동의 동인으로서의 그 ‘실재’와는 의미와 위치가 전혀 다른 새로운 실재이기에 그렇다. 이렇게 획득된 실재로부터 주체에 대한 논의는 다시 시작되고, 욕망에 대한 시각은 교정된다.
이 작업을 위해 나는 좀 오래된 책이긴 하지만, 지젝 사상의 밑그림이라 평가받는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NY: Verso, 1989)中 Ch3 ‘Che Vuoi(케보이)?’에 나와있는 라깡의 악명높은 욕망그래프에 대한 지젝의 해석을 먼저 살필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성취된 지젝식 주체, 욕망, 실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필자는, 이 글이 진짜로 노리는 지젝식 실재의 윤리와 유물론적 신학이 지닌 함의로 넘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예상했겠지만) 앞으로 쓰게 될 원고들의 대부분은 지젝의 이론과 그 이론에 대한 각주로 채워진다. ‘이론을 어떻게, 얼마만큼, 어느 정도의 깊이로 글에 투여해야 할런지?’ 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고민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좋은 글이란 이론에 함몰되어서도 안되지만, 이론에 쫄아서도 안된다. 이론은 혈액세포로 따지면 체내 산소를 공급하고 이산화탄소 제거를 담당하는 적혈구와도 같다. 산소를 원할히 공급하여 세포의 운동을 활발하게 하고, 쓸데없는 분비물을 제거해 신체리듬을 원할히 유지하게 하는 적혈구처럼, 이론은 글의 과잉과 부하를 조절하고 글에 긴장과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한다. 한국처럼 이론의 유행이 급격하게 변하는 학문풍토 속에서 이러한 이론에 대한 천착은 근본주의 혹은 교조주의라는 불명예를 쓰기도 하지만, 그것이 이론에 안착하려는 사람들을 향한 지적일 수는 있어도, 이론을 넘어 횡단하려는 사람들을 향한 단죄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나는 지젝 전공자도 아니고, 지젝을 따로 시간을 내어 심도있게 공부한 연구자도 아니다. 단지, 지젝이라는 소문에 귀가 솔깃해 있는 정도의 수준이랄까. 그러기에 지젝을 읽어나가면서 많은 오독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따끔한 질책을 기대하며 글을 시작한다. 바라기는 지젝에 대한 글을 앞으로 웹진을 통해 연재하면서 현재 지젝이라는 소문에만 의지하고 있는 내 지식의 얄팍함이 지젝을 직접보고 대화하는 경지로까지 고양되기를 기대한다. 내가 너무 큰 꿈을 꾸나? 어쨌든… Are you ready?  

케보이(Che Vuoi): “소원을 말해 봐!”

본론으로 넘어가기 전에 워밍업 차원으로 서두에서 언급했던 소녀시대의 ‘케보이’를 둘러싼 이야기를 마무리 하도록 하겠다. ‘케보이’는 주체의 대타자[각주:7]를 향한 질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소녀시대의 열혈팬클럽 회원이다. 소녀시대라는 확고한 대타자가 제공하는 질서속에서 쾌락을 누리고 있던 나는, 어느 날 은밀하게 다가와 ‘소원을 말해 봐!’를 속삭이는 소녀시대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 후 묘한 충동과 고민에 빠진다. 나는 그 동안 대타자 소녀시대의 명령과 바램에 순종하고 부응해왔다고 자부하는데, 내가 뭐가 부족했었나? 내가 그녀들의 바램을 제대로 알고 있었던 것인가? 그녀들이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지? 그럼, 이제부터 나는 무엇을 욕망해야 되는 걸까?
꼬리를 무는 이런 질문들을 통해 주체는 상징계의 질서안으로 편입되던 과정에서 떨어져 나간 무의식을 떠올리고, 억제되고 차압당했던 본능을 다시 되살린다. 사실 소녀시대의 팬클럽이 되기 위해 나는 팬클럽 규정을 잘 준수했어야 했다. 사진을 찍을 때 다정한 포즈를 취할 수는 있지만, 너무 몸을 밀착한다거나 과도한(섹슈얼한) 애정표현은 자제했어야 했다. 개인 홈페이지에 따뜻한 응원의 말은 올릴 수 있지만, 사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발언은 삼가한다. 그녀들의 숙소 앞에서 몇 시간 동안 기다릴 수는 있지만, 스토커 같은 짓을 해서는 안 된다. 그저 대타자 소녀시대는 바라만 봐도 좋은 그런 대상이어야 한다. 그 법칙을 인정한 후에야 나는 비로소 소녀시대의 팬클럽이 될 수 있었다. 소녀시대를 브라운관에서 처음 봤을 때 느꼈던 짜릿함과 뭔가 설명할 수 없었던 꿈틀거림을 나는 기억한다. 하지만, 대타자 소녀시대를 더 가까이서 합법적으로 품기 위해 나는 애초 그 욕동의 일정부분을 포기했어야 했다.
그런데, 소녀시대 팬클럽 회원이라는 상징계의 질서 안으로 편입하기 위해 거세당해야 했던 나의 본심들(?)이 ‘소원을 말해 봐’라고 속삭이는 그녀들의 음성을 들으면서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What does this mean? 이 지점이 바로 라깡의 유명한 욕망이론이 펼쳐지는 진원이다: “당신은 무엇을 원하는가?” 이제, 악명 높은 라깡의 욕망그래프로 가야 할 시간이다.[각주:8]
진짜로, Are you ready?

빗금 그어진 주체($) 曰: “나는 지난 여름 네가 한 짓을 알고 있다”

일단, ‘빗금 그어진 주체($)’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기로 하겠다. 라깡의 주체는 단일하고 독립적이며 이성의 능력으로 모든 우주의 법칙을 관조하는 근대적 주체와는 달리 분열되어 있고 균열이 많은 주체이다. 특별히 라깡에게 있어 주체의 문제는 언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인간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알파벳을 익혀 글자를 읽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상징 시스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가 제시하는 규범에 동화되어 가는 과정이고, 대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점점 대타자의 욕망을 닮아가는 과정이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주체는 상상계의 유아에서 상징계의 인간으로 성장한다. 그런 면에서 인간은 태초의 본능과 욕구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상징계의 질서가 부과하는, 즉 대타자의 욕망을 내면화하면서 살아야만 하는, 어떤 면에서는 훼손당한 존재다. 이렇게 불완전한 존재를 ‘빗금 그어진 주체($)’로 라깡은 표기하였던 것이다.
앞으로 살펴보게 될 라깡의 욕망그래프는 이 ‘빗금 그어진 주체’로부터 시작된다. 라깡의 욕망그래프가 ‘빗금 그어진 주체’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은 주체가 사후적으로 탄생한다는 말이다.[각주:9] 이 부분에서 설명이 좀 필요한데…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속류 히치콕 영화 혹은 스릴러, 잔혹 복수극, 여성주의 영화에서 관습적으로 등장하는 패턴이 하나 있다. 극 중 어느 특정 장소에서 현재에서 과거로 오버랩 되는 경우다. 영화 속에서 여주인공이 길을 가다 갑자기 무엇인가 필요해서, 혹은 갑자기 이상한 기운에 이끌려 문방구(or 구멍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문을 열고 그 점방 안으로 들어가 물건을 찾으며 가게 안을 두리번 거리는데 갑자기 몸이 떨려오고 가슴이 급하게 뛰기 시작한다. 순간 주인공은 정신을 잃고, 화면은 급하게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더니 20년 전 혹은 30년 전 그 문방구(가게)로 카메라는 시간이동을 한다. 주인공의 어렸을 때로 오버랩이 된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5~6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똑같이 그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씬이 나오고, 물론 그 여자아이는 주인공의 어렸을 때를 상징한다. 그 여자아이가 물건을 찾고 있는 사이 주인 아저씨가 가게 문을 닫고 셔터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 주인 아저씨는 여자아이에게 인형을 주면서 인형놀이를 하자고 제안한다. 인형을 공짜로 받은 여자아이는 기뻐서 아저씨와 함께 인형놀이를 신나게 하는데…아저씨가 인형 옷을 하나씩 벗기더니 자기 옷도 벗고 내 옷도 벗긴다. 아저씨는 인형을 만지고 나서 그 아이 몸도 만진다. 그때 아이는 ‘어, 뭔가 수상한데…이 아저씨가 왜 이러지?’라고 순간적으로 섬뜩한 생각이 들었지만, 동시에 ‘인형놀이를 하는 것이니까~’라는 방어기재를 작동하여 그 순간을 덮고 넘어간다. 문방구 사건 이후 20년, 30년이 흘러 성인이 된 주인공이 그 사건에 대한 혐의를 발견하면서 영화는 긴장과 반전을 거듭하며 급물살을 타게 되는데….너무나 우리들이 많이 봐 왔던 영화 속 한 장면이다. 위의 기사는 ‘주체가 사후적으로 구성된다’는 말을 잘 드러내고 있는 적절한 예라 할 수 있다. 

라깡의 욕망 그래프 I: “주체는 사후적으로 구성된다?”

 

<Graph I>[각주:10]

위의 그래프는 라깡 Graph I이다. S에서 S’로 이어지는 벡터는 기표(ex. 말, 목소리)의 진행과정을, △ 에서 $로 이어지는 연쇄는 주체의 진행과정을 상징한다.  S-->S’벡터와 △--> $ 벡터
가 만나는 접점을 편의상 A, B라고 했을 때, S쪽과 가까운 접점을 B, S’쪽과 가까운 접점을 A라고 하자. 성인이 된 주인공이 문방구에 들어가 공포를 느끼는 지점은 B이고, 어린 주인공이 가게 아저씨와 인형놀이를 하면서 성추행을 당한 지점은 A이다. A(억압된 것, 어린 주인공이 당한 성추행 사건)가 원인이고 B(성인이 된 주인공이 뒤 늦게 어렸을 적 사건의 의미를 깨닫는 것)가 증상으로서 A의 효과라면, 아래 그래프 I은 원인(A)을 선행하는 효과(B)를 나타낸다.[각주:11] 즉 주체는 사건이 발생한 이후(A)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 그 의미를 알게 되고, 그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된 주체는(B) ‘빗금 그어진 주체($)’로 남겨지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는 인식론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진리란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이미 완성된 채 계속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그 무엇인데, 여태까지 내게 알려지지 않았던(모르고 있었던) 그 진리가 어느 날 문득 내게 다가왔다”라는 기존의 관점에서, “진리란 원래 과거에 그 차제로서는 의미가 확정되지 않았던 것들이다. 시간이 흘러 미래의 어느 시점인 현재에서 소급적으로 진리는 주체에 의해 구성되어지는 것이고, 과거의 사건을 새롭게 구성한 그 주체는 과거에 사건을 맞딱드렸던 애초의 주체와는 다른 주체, 즉 빗금 그어진 주체이다”라는 발상의 전환을 라깡의 Graph I은 우리에게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주체가 사후적으로 구성된다’는 말은 주체란 언어적, 문화적 과정을 거치면서 ‘빗금 그어진 주체’($)로 등장한다는 말이고, 그 주체에서부터 모든 사건은 다시 출발되고 다시 해석된다. 이 말은 프로이트로의 복귀를 주장하며 라깡이 인용한 프로이트의 유명한 발언: “그것이 있었던 곳에 내가 존재한다”[각주:12]를 상기시킨다. 위의 인용문에서 등장하는 그것은 나의 의식 속에서 그 동안 배제되어 왔고, 잊혀져 왔던 그 무엇이다. 그것은 앞에서 예를 들었던 영화 속 장면처럼 한 여인이 어렸을 때 문방구 아저씨로부터 당했던 성추행일 수도 있고, 남자아이들의 경우 성장기에 학교(or 동네)형들에게 끌려가 금품을 갈취 당하고 집단구타 당한 후에, 전문용어(?)로 표현하면  삥 뜨기고 돌림빵 당한 후에, 무릅이 꿇려 복종을 강요당해야 했던 기억일 수도 있다.
프로이트가 ‘모든 억압되었던 것들은 귀환한다’고 했다지? 억압되었던 것의 부활은 위의 예에서처럼 개인적 차원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집단적 억압의 차원도 마찬가지다. 80년 광주에서 벌어진 살육은 아무리 집권자들이 숨기고 감추려 했어도 5월 그 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피! 피!를 쏟게 했다. 아니, 그리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이 정권들어 용산에서 혹은 쌍용차에서 불타 떨어진 사람들의 넋들은 다시 우리사회로 증환이 되고 예언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 어쩌면 역사는 이 사실을 계속 증언해 왔는지도 모르겠다. 비록,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 서로에게 아픔뿐일지도…. 그것이 이 어두움을 건너 우리를 해방케 하리라’를 읊조렸던 어느 가수의 노래가사처럼, 우리가 당했던 개인적, 집단적 억압이 끝까지 우리를 압도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이 바로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인 것이다.  
단,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 그곳을 찍고 와야 한다. 그 자리로 돌아가 그것들과 대면한 후, ‘그때는 내가 어리고 약하고 무지하여 당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며 옅은 미소를 지으며 살짝 비웃어 주고 그곳을 유유히 빠져 나와야 한다. 물론, 그 주체는 애석하게도 에덴에서 지녔던 태초의 순수함와 충만함을 상실한 존재이지만, 바로 그 주체, 즉 ‘빗금 그어진 주체들’에 의해 시간은 계속 이어지고 역사는 다시 쓰여진다. 이것이 바로 라깡의 욕망그래프가 ‘빗금 그어진 주체($)’로부터 시작되는 이유다. (계속)

P.S 다음 웹진에서는 ‘빗금 그어진 주체’로부터 시작되는 라깡의 욕망그래프 II에 나와있는 상상적 동일시, 상징적 동일시에 대해 알아보고, 그래프 III에 나오는 ‘케보이’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Let us take as the universal maxim of our conduct the right to enjoy any other person whatsoever as the instrument of our pleasure.”- Jacque Lacan, The Seminar of Jacques Lacan: The Ethics of Psychoanalysis (1959-1960) (Vol. Book VII) Trans. Dennis porter (New York: W.W. Norton & Company, 1992), 79. [본문으로]
  2. 라깡 세미나 7권 &lt;Ethics of Psychoanlysis&gt;(New York: W.W. Norton & Company, 1992)와 라깡 &lt;Ecrits&gt;trans. Bruce Fink (New York: W.W. Norton, 2006)중 ‘Kant avec Sade 사드와 함께 칸트’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3. 포스트모더니즘 윤리학의 세가지 경향 (자기의 윤리-타자의 윤리-실재의 윤리)에 대한 논의는 졸고 <탈경계의 신학>(동연, 2012)중 ‘포스트모던 윤리의 지형’(140-143쪽)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4. 본격적으로 라깡주의 정신분석학에 입각한 ‘실재의 윤리’를 선보인 책은 주판치치에 의해 2000년에 출판된 Ethics of the Real (NY: Verso, 2000)이다. 지젝은 이 책의 서문에 참여하였고, 본인의 독일어 저작인 Die politische Suspension des ethischen. (Suhrkamp. Frankfurt am Main, 2005)에서 이를 더욱 발전시키고 있다. [본문으로]
  5. 지젝을 구성하는 이론적 층위는 크게 세가지라 볼 수 있다. 맑스-레닌으로 이어지는 꼼뮨주의, 칸트-헤겔로 이어지는 독일관념론 전통, 그리고 라깡주의이다. 이 글에서는 주로 라깡을 경유한 지젝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밝힌다. [본문으로]
  6. 흔히 라깡의 사상은 상상계-상징계-실재(계)로 이루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지젝은 라깡 후기 사상인 실재(계)와 욕망에 집중하고 있고. 하지만, 상상계-상징계-실재(계)의 구분이 두부모 자르듯 선명히 나누어지는 것은 아니다. 서로가 얽히고 중첩되고 겹쳐있다. 그러므로 상상계-상징계-실재(계)를 연속적인 한 스펙트럼 상에서 바라볼 줄 아는 안목이 필요하다. 지난 웹진 33호(2011년 3월)에 실린 ‘욕망 혹은 그것의 좌절과 얽힌 (욕구)불만에 관한 에세이’, 웹진 34호(2011년 4월) ‘라깡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웹진 35호(2011년 5월) ‘한국땅에서 라깡적으로 윤리하기’ 기사가 라깡의 이론을 이해하는 데 다소 도움이 될 것이다. [본문으로]
  7. 대타자(the big Other)에 대해 지젝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대타자는 주관적 전제라는 위상속에서 비실체적, 혹은 문자 그대로 가상적(virtual)이며 부서지기 쉬운 것이다. 대타자는 주체가 마치 그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행위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 대타자의 위상은 공산주의나 민족 같은 이데올로기적 대의의 위상과 같다. 그것은 자신이 대타자 속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개인들의 실체적 토대이며, 개인들의 존재적 기반이며, 삶의 의미 전체를 제공하는 참조점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지만, 존재하는 것은 개인들과 그들의 행위뿐이다. 그래서 이 실체는 개인들이 그것을 믿고 따르는 한에서만 현실적으로 작동한다.”-슬라보예 지젝, &lt;How to Read 라깡&gt;, 박정수 역 (웅진지식하우스, 2007), 21쪽. 결국, 지젝에게 있어 대타자는 실체가 아니라 가상적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대타자가 실체인 것처럼 생각한다. 예를 들어 ‘군사부일체’라는 유교식 대타자의 명령은 한국사회에서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의 법칙이다. 마치 그것이 실제하는 것 처럼 우리는 행동한다. 그래서 어버이날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고, 스승의 날에 선생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이명박이 아무리 개판으로 나라를 망쳐놔도 나랏님이기에 감히 뭐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이를 어긴다면, 우리는 뷸효자, 배은망덕한 제자, 그리고 종북좌파 빨갱이가 되고 만다. 그런 낙인이 찍히면 살기 피곤해 진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군사부일체’라는 텅 비어있지만, 상징적 세계에서 실질적 힘으로 작동하는 대타자의 명령에 따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본문으로]
  8. &lt;에크리&gt; 마지막 부분 ‘주체의 전복과 욕망의 변증법’에서 라깡은 4회에 걸쳐 그래프를 그려나가면서 본인의 욕망이론을 완성한다. Graph I 은 정신분석학에서 진실이 어떻게 소급적으로 구성되는지? 에 대한 기본문법을 언어학(ex. 기표와 기표의 관계)을 끌어들여 설명하고 있다. Graph II 는 완성된 상상계와 상징계에 대한 부분이고, graph III는 케보이, 즉 상징계 속에서 안주 못하는 주체와 그 과정에서 밝혀진 대타자의 비밀을 그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라깡은 graph IV에서 본인의 욕망이론을 완성시키고 있다. [본문으로]
  9. “The effect of meaning is always produced backwards, après coup.”- Slavoj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New York: Verso, 1989), 101 [본문으로]
  10. Ibid.,101. [본문으로]
  11. Ibid.,56-57. [본문으로]
  12. “Wo es war, soll Ich warden (Where is was, I am to become)….That ‘I’ which is supposed to come to be where ‘it’ was, and which analysis has taught us to evaluate, is nothing more than that whose root we already found in the ‘I’ which asks itself what it wants.”- Jacque Lacan, The Seminar of Jacques Lacan: The Ethics of Psychoanalysis (1959-1960) (Vol. Book VII) trans. Dennis porter (New York: W.W. Norton & Company, 1992), 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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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자다 못가의 사람들 [각주:1]

유승태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 그 병자가 대답하였다. "주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남들이 나보다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 …
― 「요한복음」 5:1-9 중

 

오늘의 성서 본문에서는 38년간 베드자다 연못가에서 첫 번째로 물에 뛰어들 날만을 기다리던 한 병자가 예수를 만나 몸이 치유된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라고 말하자, 그는 몸이 나았고 예수의 말대로 행동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의 말은 그가 그토록 바라던 ‘몸의 회복’을 한순간에 가능하게 했습니다, 연못의 신비한 힘을 빌지 않고도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이 치유 사건은 뭔가 수수께끼 같은 면이 있습니다. 환자의 치유를 선언하는 타이밍에 예수는 왜 “네 병이 나을 것이다” 또는 “네 병을 고쳐주마”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마치 원래 있지 말아야 할 곳에 그 병자가 자리를 깔고 있다는 듯이 “자리를 걷어 떠나라”고 한 것일까요? 그리고 왜 예수는 그를 성전에서 다시 만나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14절)라고 권면한 것일까요? 문맥 상 이 두 말은 등가의 의미를 갖는 듯 보입니다. 그렇다면 8절의 예수의 치유 선언과 14절의 권면은 “네가 있지 말아야 할 곳에서 떠나는 것이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다”라는 의미로 서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렇게 문제를 설정하면 우리는 그 병자가 38년이나 지키고 있던 그 자리가 어디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과 그 병자가 있었던 자리는 어디인지 함께 생각해보고,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는 예수의 치유선언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 수 있는지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본문에 따르면, 그 병자가 있던 곳은 ‘양의 문’ 곁, 베드자다 못가입니다(2절). 그리고 거기에는 “많은 환자들, 곧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중풍병자들이” 있었습니다(3절). 예수는 많은 환자들이 누워있는 베드자다 연못가의 주랑을 거닐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다 그는 거동이 쉽지 않은 “서른여덟 해가 된 병자”를 발견합니다. 그 병자는 표정 없는 얼굴로 연못만 응시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38년이나 앓아온 그 병자는 날이 갈수록 굳어져가는 몸 때문에 이렇게 인생이 끝장날 수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갈 수 없고, 공동체에서 온전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몸 때문이라는 생각에, 이 몸은 쉽게 고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온 희망을 연못의 신비한 힘에 걸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병세가 깊어갈수록 더 강한 처방을 원했고, 그렇게 오게 된 곳이 베드자다 연못이었을 듯합니다. 대체 베드자다 연못은 어떤 곳이기에 거동이 힘든 중증 환자들이 모여들고 있었던 것일까요?

 

'양의 문'의 위치


애초에 베드자다 연못은 포로기 이후 강화된 사제 집단의 권위를 중심으로 예루살렘의 공간이 형성된 것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본문 2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양의 문’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 느헤미야에 의해 중건된 성벽의 문 중 하나입니다. 「느헤미야」 3:1에서는 이 문이 대제사장 엘리아십과 동료 제사장들이 나서서 만든 것이며 첫 번째 문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북쪽 지방에서 사마리아를 거쳐 성전으로 이어지는 길의 최종 관문과 같았던 ‘양의 문’은 그 이름이 주는 인상과 같이 제의용 가축이 성전으로 대거 유입되는 통로였습니다. 그리고 베드자다 연못은 이러한 도시의 흐름에 맞춰 성전에 제사용 물을 대거나 제의용 동물을 씻기기 위한 목적으로 조성된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활동하던 당대에는 성전 안에서 제의용 동물을 거래하는 산업이 이미 활성화돼 있었습니다. 네 복음서에 모두 언급된 예수의 ‘성전 정화’ 사건이 이 산업과 관련돼 있습니다.(마태 11:15-19; 마가 11:15-19; 누가 19:45-48; 요한 2:13-22) 아마도 이 산업은 성전 중심 체제가 형성된 초기부터 성장했을 것입니다. 레위기 기록(레 22:17-25)으로 볼 때 제의용 동물은 엄격한 기준에 따라 ‘흠이 없는 것’을 선별해야 했는데, 원근 각지에서 성전으로 모이는 이들이 제의용 동물을 온전하게 수송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연히 성전 근처 및 성전 안에서 ‘흠 없는’ 소나 양, 염소 등을 구입하려는 수요가 넘쳐났고, 베드자다 연못은 (자신이 정성스레 가져온 제의용 동물을 씻기는 곳이라는) 본래의 목적과는 달리 누군가가 구입했거나 곧 구입하게 될 제의용 동물을 제사장들의 형식적 검사를 받기 전 잠시 들러 씻기는 곳이 되었습니다.
중증 환자들의 집합소가 된 베드자다 연못은 이처럼 성전 중심의 도시공간 배치와 상업화된 제의 방식이 결합된 체제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공간이 중증 환자들의 희망의 보루가 된 것을 설명하기 위해 약간의 음모론적 상상력을 보태보겠습니다. 이렇게 상업적으로 구성된 제의 체제에서라면 종교 상품인 동물의 시장가격을 통제하기 위한 핑계이자 사람들에게 종교적 신뢰를 주기 위한 장치가 필요했을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박물관에 있는 베드자다 연못 모형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이 높이가 다른 쌍둥이 건물로 구성된 베드자다 연못은 상층의 물이 수로를 통해 하층 건물로 유입되는 구조를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베드자다 연못에 관련된 자료를 찾다 보니, 오른쪽에 보이는 상층 건물은 동물을 씻기던 곳이었고, 왼쪽 건물은 환자들의 치유센터였다는 기록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기록대로라면, 동물 씻긴 물이 하층으로 흘러들어가 환자들을 씻기는 치유센터의 물로 사용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기록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의 음모론적 상상을 돕는 촉매제가 되기에는 충분할 듯합니다.
제사장 그룹은 상하층의 물을 모두 동물을 씻기는 데 써도 부족하겠지만, 하층의 회랑을 병자들을 위한 치유센터로 내어주자는 결단을 ‘힘겨운 척 쉽게’ 내립니다. 제의용 동물들을 씻긴 물이 신비한 치유의 힘을 갖는다는 소문이 득이 되면 됐지 실은 아니라는 판단에서였습니다. 이 제사장들의 음모를 제의용 동물을 구입할 능력을 가진 이들이 정말 모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속아 넘어가는 척하며 짐승(그것도 그다지 거룩해 보이지 않는) 씻긴 물에 ‘나만 안 씻으면 되지’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종교 지도자들과 종교 상품 구매력을 소유한 이들 사이의 암묵적 합의, 그것이 베드자다 연못에 대한 대중들—율법에 의해 죄인으로 규정된 이들, 구매력을 통해 자신의 죄를 사함 받을 능력이 없는 이들—의 소망을 떠받치는 토대였던 것은 아닐까요.
다시 예수와 병자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수가 병자에게 “낫고 싶으냐”라고 묻자, 병자는 원망 섞인 어조로 대답합니다. “주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남들이 나보다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7절). 함께 누워있는 병자들은 자신이 연못에 들어가도록 도와주기는커녕 자기를 밀쳐내는 경쟁자들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저는 문득 궁금해집니다, 정말 그곳에는 환자들을 ‘연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었을까요?
언뜻 생각해보면, 어떤 환자들은 가족이나 친척이 함께 와서 못에 넣어줄 준비를 하고 있었나, 싶습니다. 그리고 부유한 사람이라면 종들을 거느리고 못가의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겠다, 하는 상상도 해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상은 너무 순진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종을 부릴 수 있을 만한 사람이라면 이 연못이 아니라 의원을 찾아갔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베드자다 못에서 씻으라고 한다면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의 사환에게 화를 냈던 것처럼 불쾌해하고 화를 냈겠지요.(열왕기하 5:10-12) 그리고 죄인으로 규정돼 가족과 함께 살 수 없는 사람들에게 가족이 얼마나 냉정한지, 그와 함께 있다가 자신들까지도 율법을 어긴 사람으로 내쳐지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요한복음은 기록하고 있습니다.(요한복음 9:20-22) 그러니 가족도 그들과 함께 있었던 이, 즉 환자를 ‘연못에 넣어주는 사람’이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몸이 불편한 환자들에게 “내가 당신을 연못에 넣어주겠다”고 말했을 법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베드자다는 체제의 일부분이지만 동시에 체제의 작동 논리가 발현되는 장소, 곧 체제 자체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성전 중심 체제의 곳곳에서 ‘속죄’라는 종교적 가치와 제의용 동물이 상호 교환되는 상업적 종교의례가 일관성 있게 발현되고 있었는데, 베드자다라고 예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베드자다의 하층 연못에서도 구원과 속죄를 바라는 열망이 그들에게 남아있는 모든 자원을 값으로 지불하게 만들고 종교 상품으로 교환되는 일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었겠지요. 그 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사람, 천사가 물을 휘저을 때 제일 먼저 당신을 연못에 넣어주겠다며 유혹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듯합니다.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를 보니 중증 환자들을 ‘물에 넣어주는 사람’, 밑바닥 사람들의 소망을 이뤄주겠다며 접근하는 사람들의 면모를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영화에서 이강도(이정진)는 몰락해가는 청계천 금속 가공 상가를 돌아다니며 일수를 회수하는 사람입니다. 일수를 쓴 이들은 쉽게 상환기한을 넘겨버리고 이자는 원금의 열배로 금세 뛰어오릅니다. 강도는 일수를 줄 때 채무자가 상해보험에 가입하도록 요구하고 일수를 갚지 못하면 가차 없이 그의 신체를 훼손해 보험금을 가로챕니다. 일수를 빌려야 하는 이들, 낮은 신용등급을 가진 죄밖에 없는 그들은 그 죄값으로 신체가 영구히 훼손되는 형벌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형벌을 집행하는 사람은 바로 그들과 별반 다른 삶의 조건을 갖지 않았을 사람인 것이지요. 형벌의 집행자인 이강도는 ‘빌린 돈’의 달콤함을 선전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잔인한 이면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요즘의 불경기를 반영하기라도 하듯 일수를 갚는 사람은 하나도 담아내지 않고, 일수를 못 갚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 이들이 맞게 되는 지옥만을 보여줍니다. 아마도 그것은 불경기 때문에 욕망을 소비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지불 능력은 축소됐지만, 이들로부터 이윤을 갈취하는 이들의 욕망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욕망의 격차’가 자본주의 사회의 수많은 패배자와 무능력자를 생산해내게 됩니다. 이렇게 생산된 패배자와 무능력자들은 ‘일확천금’이라는 실현 불가능한 꿈을 꾸면서, 현실에서는 고리대금의 유혹에 한걸음 더 다가가는 삶을 살아가게 되겠지요.

청계천 금속 상가와 대비되는 주변 건물들

한편, 영화는 종로나 명동의 고층빌딩과 청계천 금속 상가를 한 화면에 보여줌으로써 두 지역 간 건물의 높낮이가 얼마나 다른지, 외양에서 얼마나 큰 격차가 나는지 드러내 보입니다. 한때 청계천 금속 상가는 ‘잘 나가’기도 했지만 지금은 재개발만을 기다리는 곳이 된 느낌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며 베드자다 연못이 상층과 하층으로 구분된 이중구조라는 것이 떠올랐습니다. 연못은 성전 중심으로 배치되고 작동하는 종교-사회체제의 일부분입니다. 연못은 이 체제의 작동 논리 속에서만 기능할 수 있고 존재 가치가 있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베드자다 연못에서 소비되고 있는 희망과 꿈의 담론은 체제의 작동 논리와 전혀 무관할 수 없습니다. 하층 베드자다의 ‘신비한 힘’이 성전체제의 배치 속에서 등장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구매능력을 가진 자만이 ‘속죄와 구원’을 향유할 수 있는 종교체제 안에서, 불구의 몸뚱어리만 남은 사람들은 가진 게 없기 때문에 죄인이고, 죄인이기 때문에 결국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38년 된 병자, 가진 게 몸밖에 없어서 ‘속죄와 구원’을 구매할 수 없고,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죄인일 수밖에 없는 한 사내에게 예수는 “네 자리를 걷어서 떠나라”고 말했습니다. 베드자다에 일등으로 뛰어들 꿈을 꾸는 한 그는 악한 체제의 작동을 돕는 부품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이지요. 바꿔 말하면, 그 꿈, 그 악몽에서 깨어나지 않으면 그는 죄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그의 불구인 몸을 근거로 그를 죄인이라고 규정했던 것과 전혀 다른 기준입니다. 오늘 여기에서 “네 자리를 걷어서 걸어가라”고 하는 예수의 명령을 듣는 저에게, 예수의 명령이 “꿈 깨”라는 말로 들립니다. 악몽 그만 꾸라고, 악몽 속에서 취해있지 말라고 말입니다.
어찌 들으면, 예수의 이 말은 남의 심정도 모르고 질러대는 ‘훈계’나 ‘계몽적 언사’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말을 따라 일어나 걸어간 그 병자가 그를 죄인으로 간주하던 사회적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성서는 그다지 밝은 전망을 제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말이 위로를 주는 말일 수 있는 것은, 그의 삶에 대한 전승들이 그를 먼발치에서 태평하게 훈계나 던져대는 사람이 아니라 붕괴돼 가는 삶의 자리에 서 있는 이들과 함께 서서 이들을 지지해줬던 분으로 전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베드자다A를 떠난 병자가 결국 맞닥뜨리는 현실은 ‘자유’가 아니라 베드자다B, C, D에 불과할지라도, 예수는 여전히 그 곁에서 그 병자가 그를 죄인 취급하는 체제의 시선에 순응하지 않도록 그를 격려하고 일으켜주는 사람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 이 글은 한백교회 2012.9.30. 예배의 하늘뜻 나누기(요 5:1-9) 본문을 일부 수정한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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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소개> 미국땅에서 ‘한.정.살림’의
통분 불/가능성을 묻다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 과정)


Korean Resources for Pastoral Theology: Dance of Han, Jeong, and Salim’ (Pickwick Publications, 2012)  James Newton Poling and HeeSun Kim

오늘날의 신학은 세계화된 세상속에서 차이와 다름에 대해, 다양성과 상이성에 대해서 열린 사고를 요청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여러 가지 혁신적인 신학들이 싹터 올랐다. 흑인신학으로부터도 소외되고, 백인 페미니스트 신학으로부터 소외되었던 흑인여성신학자들이 womanist theology를 이야기하고, 수 천년 동안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금기시되었던 Queer 이론과 Queer theology도 밝은 광장에서 이제는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 토착민의 관점에서 서구 식민주의의 잔재를 극복하고자 하는 포스트콜로니얼니즘 역시 이러한 대열 중 하나라 볼 수 있다. 이는 서구 신학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토양을 우리들에게 제공하였다. 그리하여 기존 서구신학에 내재된 공허한 보편주의와 허위적 패권주의를 지적하고, 비어있는 그 곳에 인종적, 문화적, 종교적 다양성을 선사하여 신학의 지평을 확장시킨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한동안 유행했던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말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다.

미국 신학계에서 한국신학을 알리는 주목할 만한 책이 출판되었다. James Poling과 김희선이 함께 쓴 ‘Korean Resources for Pastoral Theology: Dance of Han, Jeong, and Salim’ (Pickwick Publications, 2012)이 그것이다. 이 책은 한국적 소재인 ‘한, 정, 살림’을 미국 신학계에 소개하고, 그로 인해 미국 목회상담계의 지평이 확장되기를 바라는 기대에서 집필되었다. 사실, ‘한, 정, 살림’은 미국학계에서 한국신학을 말할 때 단편적으로 소개되었던 내용이기도 하다. ‘한’은 민중신학의 핵심개념이고, ‘정’은 이 책의 추천사를 쓴 Garrett의 Wonhee Anne Joh교수가, ‘살림’은 뉴욕 Union 신학교의 (정)현경 교수가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이론신학의 영역에서 1세계 신학에 대한 저항담론으로 존재했던 ‘한. 정. 살림’이 종합되어 실천신학 파트인 목회상담에서 치유와 화해의 방법론으로 구체화된 예는 일찍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앞으로 미국신학계에서 한국신학을 알리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본서의 결론부라 할 수 있는 마지막 두 Chapter(6장은 폴링, 7장은 김희선 단독으로 씀)를 제외한 본문의 모든 내용들은 저자들이 마치 탁구 치듯이 서로의 입장과 앎의 지평을 교환하면서 발전시킨 결과물이다. 한 명은 진보 성향의 이미 유명하고 노련한 미국 백인 남성 신학자, 다른 저자는 목회상담과 포스트 콜로니얼 페미니즘을 전공하고 있는 신출내기 피가 끓는 젊은 한국 여성신학자이다. 이 둘이 만나서 무슨 대화를 할 수 있을까? 다행히 이런 우려는 책의 제목이 시사하듯 한국적 재료인 ‘한. 정. 살림’을 메인 테마로 가지고 오면서 불식되었다. 폴링 교수가 지닐 수 있는 한국적 소재에 대한 낭만적이고도 소박한 일반화의 우려는 김희선의 도움으로 극복되었고, 김희선이 갖고 있던 서구신학에 대한 날선 칼날은 폴링교수의 다독거림으로 다소나마 부드러워졌다. 그래서 이 책에 ‘Dance of Han, Jeong, and Salim’라는 부제가 달렸다. 몇 해전, 이 책에서도 소개되고 있는 Karen Baker Fletcher가 쓴 ‘Dancing with God’이라는 책을 출판돼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삼위일체교리를 Womanist관점에서 춤이라는 메타포를 이용해 풀어낸 작품인데, 기존의 정태적인 삼위일체 이해에 맞서 춤이 담고 있고 변화와 리듬, 율동과 조화를 새로운 삼위일체 해석학으로 제시했던 책이었다. Karen Baker Fletcher가 흑인여성신학의 관점이었다면, 이 책의 저자 폴링교수는 Constructive 입장에서, 또 다른 저자 김희선은 포스트콜로니얼즘, 더 나아가 포스트콜로니얼 페미니스트 입장에서 춤을 끌어 들인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들은 ‘한, 정, 살림’을 함께 무대 위에 세우고 이렇게 말한다: “Shall We Dance?” 

기본적으로 이 책은 미국독자들을 위한 책이다. 우리가 알고 느끼는 ‘한. 정. 살림’과 이 책을 통해 전달될 미국사람이 알고 느끼게 될 ‘한. 정 .살림’은 분명 다를 것이다. 저자들은 그 차이를 좁히기 위해 최대한 서로의 입장과 지식을 조율하면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리하여 한국적 소재인 ‘한. 정. 살림’이 어느 정도 미국 신학계에서 통분 가능할런지를 묻는다. 물론, 통약불가능한 부분도 눈에 띨 것이고, 양국간의 여러 차이로 인한 ‘한. 정. 살림’을 둘러싼 의미의 과잉과 차액과 잉여들도 발견될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문제점들의 등장이 이 책의 저자들이 노리는 진짜 속셈이 아닐런지.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미국 신학계 내에서 ‘한. 정. 살림’에 대한 친절한 안내서 역할도 물론 하겠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미국 신학계를 향한 의미있는 도전이고 불편함이다. 


James Poling은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미국 목회상담계를 대표하는 학자이고 작년에 Garrett에서 은퇴하였다. 폴링교수는 미시적 차원에 머물던 목회상담의 영역을 사회적 구조와 폭력의 상관성으로 확대시켜 목회상담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별히 각 그룹별, 민족마다 지닌 독특한 역사와 그 과정에서 발생하였던 폭력과 희생에 주목하면서, 각각의 주체들이 어떻게 그 한들을 정의하고 풀어(치유해)나가는지에 관심한다. 그리고 그러한 자료들을 미국 신학계에 소개하고, 미국 목회상담계에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일까? 를 고민하는 창조적인 신학자이다.    

또 다른 저자 김희선은 Poling 교수의 제자로 현재 시카고 인근 에반스톤 위치한 Garrett에서 목회상담으로 박사과정 중이고 현재 논문만 남겨놓고 있는 Ph.D Candidate이다. 한국에서는 이화여대 기독교학과와 동대학원에서 신학수업을 받았고, 지금은 뉴욕 Union 신학교에 있는 (정)현경 교수 이화여대 재직시절 마지막 제자이기도 하다. 미국 유학 전 명지전문대학에서 외래교수로 강의하였다. 김희선은 목회상담 이외에 Postcolonial Feminist Theology를 부전공으로 택하고 있다. 시카고 신학교에 있는 Beyond Monotheism의 저자 Laurel Schneider 교수와 여성신학을, Heart of The Cross를 쓴 Garrett의 Anne Joh교수와는 포스트콜로니얼니즘을 함께 공부하고 있다. 


*아마존 책 소개 링크  

http://www.amazon.com/gp/product/1608995844/ref=cm_sw_r_fa_alp_I-3mqb0BYSM51#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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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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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강 _10월 30일(화) 죽임의 시스템과 맞서기

제5계명(“살인하지 말라”)를 도구로 하여, 최근 크게 늘어난 이른바 ‘묻지마 범죄’(방화, 폭력, 살인)를 초래하고 있는 우리 시대의 근원적인 죽임의 시스템에 대한 민중신학적 비평을 모색하는 시간. 존재의 활력이 소진된 상태에서 타자에게 그 분노를 폭력적으로 전가하는 사람들이 넘쳐나게 만든 이 사회의 구조적 폭력성에 대한 성찰을 통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재해석하는 시간.

강사_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 제2강 _11월 6일(화) 오늘날 우리에게 ‘쉼’이란 무엇인가?

제3계명(“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를 출발점으로 삼아, 신자유주의 소비문화적 쉼의 원리와 공간이 지배하고 있는 동시대 한국사회에서 ‘생명유지’의 기본 조건인 ‘쉼’조차도 보장받을 수 없는 소비무능력자들의 고통의 치유와 쉼의 회복의 방안을 급진민주주의론의 관점에서 탐구하는 시간. 

강사_이승원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


● 제3강 _11월 13일(화) 오늘날 우리에게 신은 누구인가?

제1계명(“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하지 말라”)와 제2계명(“너는 너의 하느님 야웨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를 중심으로 종교다원적인 한국사회에서 신의 존재와 의미는 무엇이며,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우상숭배 또는 신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탐구해보는 시간. 

강사_이찬수 (종교문화연구원장)


● 제4강 _11월 20일(화) 가부장제로부터 성과 사랑을 해방하라

제6계명(“간음하지 말라”)와 제9계명(“네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를 ‘성과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시간. 그동안 현대 가부장적 질서를 정당화하는 계명으로 동원되어 온 ‘간음하지 말라'와 ’네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한 여성신학적 비판을 통해 우리 시대의 ‘성과 사랑’, ‘결혼’ 등에 대한 새로운 질문과 고민들을 공유하는 시간. 

강사_백소영 (이화여대 인문과학원 HK연구교수)


● 제5강 _11월 27일(화) 부모되기, 가족되기를 통한 세대 간의 신앙소통

제4계명(“네 부모를 공경하라”)를 출발점으로 하여 불완전한 부모와의 불화 및 화해의 경험을 통해 자녀됨의 문제를 다루고, 나아가 에베소서 6:1-4의 맥락에서 네 아이를 낳아 키우며 발견한 하느님(자궁 달린 하느님, 산파 하느님, 젖가슴 달린 하느님)에 대한 발견, 더불어 소비문화 시대에 차상위 계층으로 나름의 '자발적 가난'을 살아가며 느끼는 곤경과 기쁨에 대해 잔잔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강사_박총 (재속수도원 ‘신비와 저항’(준) 수도사)


● 제6강_12월 4일(화) 공(公)을 사유화하지 말라!

제7계명(“도적질하지 말라”)를 개인윤리적 차원의 문제를 넘어, 사회윤리적 관점에서 분배정의와 경제적 평등에 관한 주제로 재해석하는 시간. 특히 현재 한국사회에 첨예한 쟁점이 되고 있는 ‘경제민주화론’과 연결시켜, 민중신학적 관점에서 경제와 정치의 공공성을 담보하는 제도와 질서의 구축을 모색해보는 시간. 

강사_최형묵 (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한국민중신학회 총무)


● 제7강 _12월 11일(화) 교회, 진실을 향한 투쟁

제8계명(“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를 출발점으로 삼아, 오늘날 교회가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의 하나로서 언론투쟁의 필요성을 함께 고민하며, 어떻게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억압적 구조 안에서 그 자체로 '하느님의 소리통'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진실을 알리는 도구로 쓰임받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시간.

강사_한상봉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 제8강 _12월 18일(화) 탐욕과 치유의 (불)편한 동거

제10계명(“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를 중심으로, 소외당하고, 상처 받은 마음들을 보듬기 위한 ‘치유’ 프로그램들조차도 상품으로 등장하고 있는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시대 속에서, 종교적 영성과 동의어로 인식되고 있는 ‘치유’라는 용어가 사실은 ‘치유’의 외피를 쓴 ‘탐욕’은 아닌지를 되돌아보는 시간. 

강사_경동현 (우리신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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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 취지_
대선 정국을 해석하는 담론들이 난무한다. 이 글 또한 그러한 해석의 하나다. 특히 이 글은 대선을 둘러싼 최근의 열정을 감정의 차원에서 묻는다. 그 중에서도 종교적 감성을 다룬다. 즉 대선을 ‘의도의 정치’의 차원에서 살피는 게 아니라, ‘종교적 감성의 정치’의 차원에서 묻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이 글은 박정희 담론과 노무현 담론에서 메시아 정치적 차원을 읽어내고, 그 각각의 특징들을 해석하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이 글이 주목하는 것은 왜 오늘의 대중은 메시아 정치를 열망하는가의 문제다. 그 속에서 한국의 근대를 대중이 어떻게 체감하고 있고, 그것이 왜 종교적 열정으로 표현되고 있는가를 묻는다. 또한 그 열정이 각기 다른 두 개의 메시아주의적 욕망으로 정치화되고 있는 메커니즘을 살피고, 그것의 문제점을 해석하고자 한다.

발표자_김진호(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일시_ 2012.10.29.(월) 7:00~9:30

장소_ 안병무홀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1번과 2번 출구. 두 출구 사이 골목 50미터, 좌측 건물의 1층)
문의_ 02-363-9190, 010-4944-2019(정용택 연구원), 010-3043-5058(유승태 연구원), 3era@daum.net
참가비_ 3천원(자료집)


※ 참석자들은 이 글이 수록된 책 『당신들의 대통령. 선출된 왕과 민주주의 그 이후』(지은이: 김상봉, 이택광 외/ 펴낸이: 문주/ 발행일 2012.10.11)을 현장에서 할인가격에 구입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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