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문안 인사드립니다.


걱정할 것도 많고 힘든 일도 많았지만

크고 작은 기쁨과 보람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새로 맞이하는 해에는 더 즐겁고 건강한 일들로 마음 벅차하실 일 많기를 바랍니다.


저희 연구소는 회원님의 후원에 힘입어 적지 않은 일을 하였고,

나름의 성과를 얻었습니다.

올해에도 어려우시겠지만 계속 저희 연구소의 활동을 격려해주시고

후원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충고와 조언의 말씀도 부탁드립니다.


회원님과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빕니다.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원 일동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죽음의 굿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의인이 망해도 그것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경건한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도 그 뜻을 깨닫는 자가 없다. 의인이 세상을 떠나는 것은, 실상은 재앙을 피하여 가는 것이다.
― 「이사야서」 57,1

 

제국의 경제가, 그 시스템이 온 이스라엘을 요동치게 했습니다. 황제가 재가한 국제적 거상(巨商)들이 이 지역에도 들어왔고, 대지주들은 그와 거래하기 위해 생산물의 가격 낮추기 경쟁에 매진했습니다. 일단 그와 거래관계가 트이게 되면 국제무역의 지역 독점권을 얻게 되었지요. 또한 세금대납업자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이는 경제적 지위와 정치적 지위를 동시에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되었지요.

그러다보나 경쟁력이 떨어지는 대지주들이 몰락하는 경우도 빈번했고, 무엇보다도 소농들의 몰락이 속출했습니다. 몰락한 소농들은 대지주의 소작으로 전락하거나 도시로 몰려들어 생존을 위해 뭐든 해야 하는 하급노동자나 노예로 전락했습니다. 또 일부는, 그 땅에서 어떤 기회도 얻을 수 없었기에, 막막한 심정으로 해외 이민의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하여 이른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된 것입니다. 기원전 3세기, 프톨레마이오스 제국 치하에서 말입니다.

한편 이 시기, 국제경제의 활성화로 인한 다른 변화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거래장부, 거래계약서, 물품관리장부 등, 기록문명이 발달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또 상거래가 활발해지는 만큼 분쟁도 많아져 소송의 수요가 크게 늘었습니다. 이것 역시 기록의 중요성을 강화시키는 이유가 되었지요. 이에 이집트산 파피루스가 대량 수입되어, 기록을 위한 비용은 크게 감소하게 됩니다. 또 당국은 세수(稅收)가 늘면서, 통치를 위한 기록의 필요도 높아졌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당국이 주도하는 종교의문서화 작업이 대대적으로 벌어졌고, 이른바 ‘성서’ 문서들이 편찬되거나 저작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저작된 성서 문서들 가운데는 흥미로운 책들이 많은데, 그중에 하나가 오늘 읽은 성서본문이 포함된 한 문서입니다. 현대의 학자들이 ‘제3이사야서’라고 부르는 문서입니다. 「이사야서」의 세 번째 파트(56~66장)에 수록되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시기의 문서 작업이 전례 없이 활기를 띠게 되었지만, 그래도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글을 쓸 수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한데 놀랍게도 ‘제3이사야서’라는 저자미상의 이 문서는 하층민의 관점을 담고 있는 책인데다, 그 기조 또한 민중적이기에 우리는 이 책에 대해 주목하게 되는 것이지요.

특히 오늘 읽은 본문이 포함된 텍스트인 57장 1~13절은 당시의 민중 현실과 저항의 흔적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진진합니다.

‘의인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한데 그 죽음을 사람들은 마음에 담아두지 않습니다(1절). 도대체 ‘의인들’이란 누구일까요? 또 왜 그들이 죽어가고 있으며, 그 죽음을 기억하지 않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5~9절에서 우리는 의인의 죽음을 모른 체 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바람을 피우는 자이고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자입니다. 여기서 바람을 피우는 것은 우상숭배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인신제사를 말합니다. 원래 아하스 왕이 시리아의 르신 왕과 이스라엘의 베가 왕이 이끄는 연합군이 침공하여 국가가 존폐 위기에 놓였을 때, 자기 아들을 야훼께 바치는 제사를 말하는데(「열왕기하」 16,3. 기원전 734~732년), 한 세기 쯤 후인 요시아 왕이 개혁 드라이브를 본격화하던 때(기원전 622년경)에 이 인신제사는 요단강 건너 지역 암몬족의 신인 몰렉에 대한 제사로 해석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아하스로 표상되는 불의한 통치자가 바로 의인의 죽음을 모른 체 한 자로 지목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데 기원전 3세기, 제3이사야서의 시기에는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었습니다. 한데 그 시절 이스라엘 사회를 다스리던 유력한 가문이 있었는데 토비야 집안입니다. 한데 이 사람은 암몬족 토호였고, 제국 왕제로부터 이 지역의 총독으로 위임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필경 토비야 집안이 죽음의 방관자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죽어가는 의인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입니다. 9~12절에서 우리는 바로 그 정보를 추론해낼 수 있습니다. 그 죽음의 방조자들은 “섬길 신들을 찾아 먼 나라에 사신을 보”냈다(9절)고 합니다. 아하스 왕은 르신-베가 연합군에 대항하기 위해 멀리 아시리아 황제에게 원병을 요청했었지요. 한데 이 애기를 전하고 있는 제3이사야서의 시대에 아시리아는 존재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이 시기에 아시리아 황제에 대응하는 이는 물론 프톨레마이오스 제국의 황제일 것입니다. 그리고 아하스의 나라를 구출하기 위해 오는 아시라아 황제의 군대는 프톨레마이오스 황제의 대리인, 곧 황제가 재가한 거상의 거대한 행렬과 비견됩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 거상은 이스라엘의 통치자들, 대지주들의 후견인, 곧 그들의 구원자입니다. 한데 바로 이런 네트워크가 대변하는 제국의 경제 시스템은 소농의 몰락을 초래했고, 소작농의 심화된 혹독한 노동 현상을 야기했습니다. 요컨대 제국의 거상이 대변하는 질서는 이스라엘의 통치자에게는 구원을 의미했지만, 민중에게는 고통을 의미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1절의 본문을 주목해 봅시다. “의인이 세상을 떠나는 것은, 실상은 재앙을 피하여 가는 것이다.” 민중의 고통이 얼마나 혹독한지, 그들이 죽는 것은 도리어 재앙 피하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요컨대 이 텍스트에는 제국의 경제 질서가 민중의 죽음을 부르고 있다는 예언자의 고발이 담겨 있습니다. 한데 그 제국적 체제를 불러들이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토비아 가문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입니다. 그들이 제국의 경제 질서를 불러들임으로써 자기들의 권력과 돈을 쌓아가고 있을 때 민중은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을 만큼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선 정국이 이제 막바지입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맘 땐 네거티브 전략이 불꽃을 일으킵니다. 그러는 중에 박근혜 씨가 연루된 스캔들이 여러 개 폭로되었는데, ‘억대 굿판’ 스캔들도 그 하나입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11월 14일, 사단법인 박정희 생가보존회가 구미의 박정희 생가에서 탄신제를 올렸다고 합니다. 물론 이 행사에는 경북도지사, 구미시장, 지역 국회의원 등이 참석했습니다. 
이들 주요 인사들이 한마디씩 소원과 축하의 발언을 했습니다. 굿판이니 그 말들 속에 박정희 신격화 발언이 포함되었음은 충분히 예측할 만 합니다. 또 대선이 임박했으니,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기를 소망하는 말이 들어있으리라는 것 역시 당연한 것이겠지요. 물론 모두 의전용 발언입니다.

한데 굿을 했다느니 신격화 발언이 있었다느니 하는 건, 근본주의 성향의 유통성 없는 개신교 신자들에게 민감한 사안일 것입니다. 해서 새누리당은 극도의 예민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최초 유포자를 고발하고, 네거티브와의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이때 박근혜의 표정이 얼마나 살기등등한지 그이가 대통령이 되면 무슨 사단이 날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지요.

이 스캔들을 둘러싼 공방이야 두 정당과 열혈 지지자들이 할 일일 테고, 나는 이에 대해 좀 다른 점에서 유감을 표하고자 합니다. 나의 관심은 이 굿에 참여한 대중의 마음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매년 박정희를 기리면서 제단 앞에 세워진 사진을 향해 절을 하고 소원을 빕니다. 그들은 필경 세상 속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리 터지고 저리 터지면서 얼굴에 몸에 상처투성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보상받을 만한 역량이 그들에겐 없습니다. 해서 종교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교회나 성당, 사찰 등에서도 그들의 상처는 좀처럼 보듬어지지 못했습니다. 이 종교들이 지배층의 종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해서 그들은 굿이 필요합니다.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이들을 받아주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상처는 상하로 권력이 나뉜 사회의 아랫사람들에게 가해지는 일반적인 상처이겠지요. 특히 한국 근대의 폭력성이 주된 원인이 된 상처일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혹독한 현실이 가장 깊은 상처의 흔적을 새겨놓았을 것입니다.

그런 이들이 굿판을 찾아왔습니다. 한데 그 굿에서 신격화된 이의 딸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최첨단을 보여주는 국제조약인 한․미 FTA를 원안대로 추진하겠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굿은 자신들에게는 구원을 선사하는 굿일 테지만, 민중에게는 죽음의 굿, 그것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 웹진 <제3시대>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시카고 통신> : 미국 대선을 통해 본 한국 대선 읽기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 과정)

 

Hyde-Park 사람들

오바마의 당선이 확정된 다음 날(11월7일) 시카고 신학교 채플에서 시카고 대학 역사학 교수로 있는, <한국전쟁의 기원>을 쓴 저자이기도 한 부르스 커밍스 교수의 강연이 있었다. 미국 대선이 어제 진보진영(?)의 승리로 끝났고, 이제 남은 우리나라 대선에 대한 전망을 듣기 위해 학교로 가는데, 학교 진입하는 골목마다 경찰들이 깔려 있어서 시간이 좀 걸렸다. 오바마가 지금 하이드팍에 와 있다는 것이다.  미국 인권운동을 상징하는 지역이 몇 군데 있는데, 시카고 남부 하이드팍(Hyde-Park)이 그 중 하나다. 시카고대학을 끼고 있는 이 지역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후계자라 여겨지는 흑인인권 운동의 대부 제시 젝슨 목사가 여전히 활동하고 있고, 그 밖의 다양한 분야에서 수많은 담론들이 끊임없이 생산되는 미국진보 진영의 몇 안 되는 거점이다. 오바마의 집이 바로 이 하이드팍에 위치한다. 오바마는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전 상원의원시절부터 이곳 하이드팍에 살았고, 오바마의 부인 미셀 오바마는 시카고 대학 병원 행정부원장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오바마의 아이들은 시카고 대학내에 있는 부속 중고등학교에 다녔는데, 가끔 아이들을 학교에 ride해 주는 오바마의 모습이 종종 목격되기도 했었다. 우리학교 지하에 위치했던 서점에서 갓 출간된 오바마의 책에 대한 사인회도 열렸고… 이렇듯 하이드팍에는 오바마의 흔적과 추억이 곳곳에 서려있다.

미국 대선의 계산법

대선이 있기 전 하이드팍 사람들은 오바마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여론조사의 추이만을 따져보자면 만만치 않은 접전이 예상되었었다. 미국은 주마다 대통령 선거인단 수가 다르고, 주단위 선거인단 투표에서 승리하면 그 주 선거인단 수 전체가 모두 해당 대선 후보의 표가 된다. 이런 이유로 전국단위 선거인단 투표율에서 승리했지만, 선거인단 수 확보에 실패하여 대통령이 안된 케이스도 있다. 2000년 공화당 부시와 민주당 엘 고어가 맞붙었을 때가 그랬다. 이번에도 오바마와 롬니 간 투표율에서는 별 차이 없었는데, 선거인단 수에서는 오바마의 압승으로 나타났다. 늘 그랬지만 경합주들의 표심의 향배가 승부를 결정지었다. 민주당과 공화당은 나름 확고한 지지기반을 갖고 있다(우리나라보다 더함). 그래서 공화당의 지지기반인 남부 바이블벨트로 상징되는 지역에는 민주당이 선거운동을 포기하고, 민주당의 지지기반인 뉴욕, 시카고, 샌프란 같은 대도시의 표심에 공화당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당락의 관건은 소위 Swing State라 불리는 경합주들의 향배다. 이것이 미국 대선을 바라보는 가장 중요한 게임의 법칙이라 볼 수 있다. 플로리다, 오하이오, 펜실베니아, 위스콘신, 버지니아, 아이오하, 뉴햄프셔, 콜로라도 등이 대표적인 Swing State이다. 대부분 미중서 백인 밀집지역에 몰려있다. 오바마는 초접전이 되리라고 보았던 지역들에서 비교적 안정적으로 대의원수를 확보하여 332명(오바마가 얻은 선거인단수)대 206명(롬니가 얻은 표)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재선에 성공하였다.

오바마가 잘 해서라기보다는…

오바마 승리의 요인에 대한 많은 분석들이 있었다. 막판에 몰아친 허리케인 샌디가 롬니의 열기를 식혔다는 의견에서부터 여성결정권(낙태)을 둘러싼 일부 공화당 의원들의 망언이 롬니의 발목을 잡았다는 분석에 이르기까지 이번 선거 역시 많은 이야기 거리들을 남겼다. 사실 이번 대선은 4년 전 과는 달리 오바마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커서 오바마를 선택했다기보다는, 롬니에 대한 경계와 불안 때문에 오바마를 택한 사람들이 많았다. 사실 오바마 1기는 전 부시 행정부의 무리한 전쟁으로 엉망이 된 경제상황, 그로 인한 국론분열, 전쟁 종주국이라는 국제사회에서 추락한 미국의 위상 등 어느 것 하나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 있었던 것이 없었다. 하원을 장악한 공화당의 딴지에도 불구하고 나름 소신껏 경제회생의 의지를 관철시켜 실업률을 선거막판에 7%대로 떨어뜨린 점, 의료보험과 이민법에 대한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는 점 등이 그나마 오바마의 자존심을 세워준 부분이라 할 수 있겠지만, 여전히 7%후반에 머물고 있는 실업률, 좀처럼 살아나지 않고 있는 실물경제, 미국민들이 갖고 있는 강한 미국에 대한 미련과 미국의 대외정책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계인들의 불신 사이에서 어떻게 대외정책을 지혜롭게 풀어가야 하는지의 문제, 이번 선거에서도 하원 장악에 성공한 공화당, 풀리지 않는 난제인 이스라엘과 중동평화 등등 오바마 집권2기 역시 많은 어려움이 예상되고, 그렇다고 특별히 뾰족한 돌파구는 있어 보이지 않는다.  오바마의 지난 4년을 학점으로 따지만 B- 정도, 그리고 앞으로의 4년도 전체적으로 흐림의 상황인데 미국민들은 다시 오바마의 손을 들어줬다. 미국민들은 왜 다시 오바마를 선택했고, 이번 미국 대선의 메시지를 한국대선에 어떻게 감정이입을 시켜야 할까?

부시의 망령 

필자가 보기에 가장 큰 오바마의 승리요인은 공화당의 시대착오적인 발상과 막혀있는 태도에 대한 반사이익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미국이 영국 식민지 시절 무리한 조세강요에 항거한 ‘보스톤 차사건’(Boston Tea Party, 후에 독립전쟁의 도화선이 됨)에서 유래했다는 ‘티 파티’운동은 오바마가 추진하는 각종 경제개혁에 발목을 잡으며, 국가안보 최우선(테러와의 전쟁), 전 국민의료보험 확대 반대에 목소리를 냈는데, 이는 전통적 공화당 지지자들을 하나로 묶는 데는 성공했는지 몰라도 부동층을 끌어안는 데는 치명적인 악재로 작용하였다. 롬니는 오바마와의 1차 TV토론을 거치면서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나름 보수적인 이미지를 벗고 중도적 이미지를 보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롬니는 선거운동기간 내내 공화당 출신의 전임 대통령 부시와 비슷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무지 애를 썼지만, 그가 말하는 공약들은 미국민들로 하여금 부시의 악령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기업들에게는 세금인하, 친재벌, 탈규제를 약속했고, 불공정무역에 대한 보복을 강조하면서 중국을 몰아부치며 다시 냉전의 분위기를 연출하려 한다는 점, 오바마의 어정쩡한 정책들이 미국의 국가 이미지를 실추시켰기에 ‘강한 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 점 등 롬니는 너무나도 Bush스러웠다.  지난 4년으로 부시를 잊기에 미국민들은 부시에게 당한 것이 너무나 많았고 혹독했다.

너무나 닮은 롬니의 사람들과 박근혜의 사람들

롬니의 지지세력은 백인, 부자, 남성들이었다. 이는 오바바의 지지층인 유색인종, 가난한 자, 여성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표심이었다. 일부 공화당 의원들은 여성결정권(낙태)을 찬성하는 오바마에 맞서 보수적 기독교 세력들의 표를 규합하기 위해, “강간에 의한 임신도 하나님의 뜻” 혹은 “강간으로 임신이 안 된다”는 망언을 일삼았다. 그야말로 남성우월주의의 극치라 할 수 있다. 이런 구태는 젊은 유권자들의 표심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쳐 20대 유권자의 60%, 30대 유권자의 55%를 오바마로 향하게 했다. 공화당의 여성비하는 여성표에도 절대적으로 영향을 끼쳐 여성유권자의 55%가 오바마를, 44%가 롬니를 지지하는 결과를 낳았다.  우리나라도 정치권에서 발생하는 여성비하 발언과 성추문 사건 때문에 문제가 되었던 사례가 한 두 건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온도차는 미국 유권자들과는 전혀 반대다. 예전에 최연희, 박계동 같은 사람들 식당여주인, 여기자 성희롱 사건이 터졌을 때 뻔뻔하게 응수했던 것 기억해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의 이미지에는 별반 타격이 없었다. 성희롱 때문에 구설수에 올랐던 한나라당 사람들이 버젓이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국회로 무사히들 안착했다. 이러한 현상을 지켜보면서  ‘당대표가 여성이기 때문에 ‘한나라당=성희롱당’ 이미지 성립이 불가되고 있지 않는가?’라는 물음을 가진 적도 있었다. 문제는 박근혜의 ‘여성성’이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아니, 지금 생각해 보니 그녀의 의지대로) 반(反)여성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의 여성성은 철저히 가부장제에 기생하는 여성성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근혜는 한국 여성운동의 최고 수혜자일는지 모르겠다. 모든 사회운동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그 운동의 열매는 투쟁한 당사자들보다는 권력에 근접한 사람들이 맛보기 마련이다. 여성운동 역시 가부장제 사회의 기득권과 가장 지근거리에 있는 여성이 최대 수혜자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물론 그 여성은 힘있는 아버지를 둔 딸들이다. 한국사회에서는 아직까지 그 굴레가 딱 대통령의 딸, 재벌의 딸 그 이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2012 미국 대선 총평, 그리고 한국 대선

한국에 조.중.동이 있다면 미국에도 그에 못지 않는 수구, 보수 언론이 많다. 대표적인 것인 폭스 뉴스와 러시 림보인데, 그곳에 등장하는 조갑제 같은 보수언론인들의 땡깡과 억측과 막말이 이번 미국 대선에서 젊은 유권자들 사이에 회자되면서 공화당의 꼴통 이미지를 더 부각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독설로 유명한 폭스뉴스 진행자 빌 오라일리는 6일 선거가 끝난 후 이런 말을 하였다: “미국은 이제 더 이상 과거의 미국이라 할 수 없다. 미국의 인구분포가 바뀌어 백인들이 이제는 소수파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말이다.  아직까지 패배의 원인을 정확하게 감지 못하는 미국 근본주의 세력의 현실감각을 잘 표현해주는 논평이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번 미국대선은 시대의 변화에 대처하는 자세에서 공화당의 롬니보다 오바마의 자유로운 이미지가 아직까지 미국 유권자들에게 약발이 먹히고 있음을 증명한 사건이었다. 대선 때마다 공화당이 물고 늘어졌던 낙태와 동성애 문제에 먼저 선수를 치면서 공격적으로 맞섰고, 의료보험, 이민법 문제 등에서 보여준 오바마의 제스처는 다문화 사회를 걸어왔고, 지향하는 미국의 정체성과도 부합하는 일관된 태도라 볼 수 있다. 이번 선거를 통해 최초로 레즈비언 상원의원이 탄생했고, 메인주와 메릴랜드 주에서는 동성결혼이 투표로 합법화되어 미국 내에서 동성결혼이 합법화된 주의 숫자를 아홉으로 늘렸다. 콜로라도와 워싱턴 주에서는 마리화나가 합법화되었다. 이로서 마리화나가 합법화된 주가 19개에 이르렀다. 한국에 계신 분들은 미국 사회가 망조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으나, 미국 사회가 매우 치열하게 차이와 다름에 대해 고민하고 몸부림 치면서 다양성을 수용하는 최적의 방식을 놓고 숙고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이제 12월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우리는 미국 대선으로부터 무엇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까? 앞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오바마는 유색인종, 가난한자, 여성들에게 표를 얻어 대통령에 재선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오바마는 흑인의 93%, 히스패닉의 71%, 아시아계 70%, 여성55%의 지지를 이끌어 내는 데 성공했다. 이들을 무조건 가난한 자 혹은 소수자라고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그동안 백인 남성 위주의 미국 주류사회에서 상대적 약자였던 것만큼은 확실하다. 이들은 본인들에게 덧칠된 사회적 약자라는 굴레를 극복하고 자신의 계급과 사회적 위치를 자각하면서 그것을 배신하지 않은 채 적극적으로 이번 대선에 참여하였다. 즉 자신의 계급에 반하지 않는 정치 참여가 미국사회를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는 말이다.  4년 전 이명박이 당선되었을 때, 누군가 이런 말을 했었다: “국민은 무능보다는 부패를 선택했다.” 그 다음해 총선에서도 한나라당은 서울 강북을 싹쓸이했었다. 대한민국 국민은 지난 선거에서 자신의 계급을 대변하는 후보보다는 자신이 되고 싶은, 자신의 욕망을 부추기고 그 환상을 계속 주입하는 후보에 한 표를 행사했다는 말이다. 이번 대선에서는 그러한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란다. 남아 있는 대선 기간 동안 자신의 주제를 잘 파악하고, 자기의 입장과 계급과 위상에 대해 성찰하는 시간을 각자가 가져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12월 19일 대통령 선거일 날, 나의 신념에 부합하는 한 표를 정직하게 행사한다면, 우리사회가 조금 앞으로 옮겨지지 않을까?  하지만, 여전히 답답한 마음은 감출 수 없다.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1. 2012.12.20 22:53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승태씨, 이 기사는 내려주시죠. 보기싫군요.

너희가 지젝을 아느냐? (II)
: 우리는 어떻게 인간이 되었나?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 과정)

 

프롤로그: 우리는 어떻게 인간이 되었나?

‘신은 누구인가?’라는 물음 못지 않게 오랜 시간 동안 많이 물어왔던 질문이 바로 ‘인간이란 무엇인가?’이다. 그것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 주변을 떠도는 많은 명제들이 기본적으로 ‘인간은 …이다’라는 선언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로부터 우리 삶의 의미와 목적, 희망과 행위가 선택되고 결정된다. 하지만, 인간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 오래되었다고는 하나, 동.서양 공히 신적인 ‘로고스’ 내지 하늘의 이치인 ‘道’에 의해 구성되어지고 운행되어지는 그 인간을 참 인간으로 오랫동안 간주해 왔었다. 사물의 형성과 운행의 법칙이 확고부동한 질서로 실재하고 있는 우주에서 인간은 그 법칙의 한 일원이었을 뿐이다. 어떤 비밀도, 어떠한 사연도 모두 속속들이 하늘의 빛 아래 선명하게 드러나야 했고, 인간의 내포와 인간의 외연은 그 빛 아래에서 수미일관하게 하나로 엮어졌다. 어쩌면 인간의 삶은 신적인 로고스(내지 天理) 아래 놓여있다는 점에서, 주체적 의지와 신념을 바탕으로 결단하고 행위하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신적인 기표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그 중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기독교의 인간론이다. 구약성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얻었나이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편 8편)”라고 노래하면서, ‘인간이란 전적으로 절대자 하나님의 섭리 안에 놓여 있는 존재’로 자신을 규정하였다. 포스트 맑시스트의 선두주자라 할 수 있는 게오르그 루카치는 이러한 인간이 살던 시대를 다음과 같은 낭만적인 문장으로 표현한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루카치, <소설의 이론> 서문 中)
그러나, 수 천 년 동안 인간의 갈 바를 밝혀주던 그 빛은 계몽주의 시대를 지나며 점점 광채를 상실하더니, 19세기에 이르러 어둠에 휩싸이고 만다. 빛이 사라진 것이다. 빛이 사라졌다 함은 그 빛 아래에서 살았던 인간(성)의 상실을 의미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찰스 다윈과 칼 맑스가 그 진앙의 진원였다고 후대 역사가들은 평한다. 맑스는 1845년에 발표한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테제>에서 “인간의 본질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성이다”라고 말하였고, 같은 논문에서 “세계는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변혁의 대상”이라 주장하면서, 그토록 지긋지긋했던 신의 그늘에서 벗어난, 물적 토대에 기반한 인간을 선언하였다. 다윈의 ‘진화론’은 오늘날의 인간이란 오랜 세월 시간을 버티면서 축적한 경험과 기억과 본능과 생존방식의 총체라는 것 이외에 인간에게 더 이상의 큰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프로이트는 본인이 창안한 ‘정신분석학’을 통해 인간이란 의식이라는 명료한 정신의 활동이 아닌, 알 수 없는 무의식에 의해 떠받쳐져 있는 불안한 실존임을 서늘하게 증명해 보였다. 각기 다른 분야에서 활동했던 세 사람었지만, 그들을 통해 신적인 원리에서 벗어난 인간, 오랫동안 익숙하고 낯익은 고향을 등지고 길을 떠나는 인간, 그래서 이제는 고향집 아버지가 사라진, 더 이상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modern 인간!’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지난 <웹진 49호>에 이은 ‘너희가 지젝을 아느냐?’ 두 번째 글의 제목을 ‘우리는 어떻게 인간이 되었나?’로 정하였다. 그렇다고 인간의 본질에 관한 여러 이론들을 이 글에서 다루지는 않는다. 내 깜냥에 그럴 능력도 없고…… 앞으로 연재를 계속하면서 기독교와 맑스주의에서 말하는 인간에 대한 논의를 간헐적으로 끌어들이겠지만, 이번 <웹진 50호>의 주된 내용은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발달(?)과정’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난 웹진에 이어<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 나오는 지젝의 라깡 해석을 토대로 이루어진다.
사실 지젝 이론의 화두는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넘어가면서 개인이 사회적 주체로 전환되는 과정에 관심을 두었던 라깡의 초기이론보다는, 라깡의 후기 이론, 즉 현실(the reality)은 그 자체로 완벽한 무엇이 아니라, 곳곳에 구멍이 뚫려있는 그 무엇인데, 그 구멍들이 환상에 의해 봉합되어 구성된 현실이라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므로 현실보다는 현실을 지탱케하는 그 무엇, 곧 실재(the Real)에 대한 규명이 지젝을 이해하는 첫 단추이고, 그 단추를 풀어가면서 지젝 특유의 (실재의) 정치학, 윤리학, 신학, 문화비평이 전개된다. 졸고에서 논의되는 내용은 라깡의 초기이론, 즉 주체구성의 상징화 과정에 대한 지젝식 해설이고, 실재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다음 웹진부터 전개될 것이다. 자~~이제부터 가 볼까요? 아 유 뤠디?
     
징후(Symptom): 억압된 것의 귀환

지난 <49호 웹진>에서 ‘빗금 그어진 주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정신분석학의 제 1원리를 ‘억압된 것의 귀환’이라고 정의했었고, 그 억압이 숨겨져 있는 지점을 우리가 흔히 ‘무의식’이라 부른다고 했었다. 그러나 무의식은 실증할 수 있는, 덩어리가 있고 물리적 실체가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징후(Symptom)’로서 나타난다.[각주:1] 이 징후에 대한 실례로 우리는 지난 웹진에서 어렸을때 성폭행을 당했던 소녀가 성인이 되어 우연히 어느 문방구로 들어갔는데 갑자기 몸이 떨려오고 심장이 격하게 뛰는 예를 들면서 설명한바 있다.
다시 한번 징후에 대해 생각해보자. 징후란 무엇이고 언제 나타나는가? 징후는 뭔가 억압되었던 것이 튀어나온 것이다. 이번 미국 대선에서 오바마의 재선에 혁혁한 공을 세운 빌 클린턴이 대통령 재임시절 본인의 집무실에서 백안관 인턴으로 일하고 있던 모니카 르윈스키와 정사를 벌인 사건으로 말미암아 미국 전체가 발칵 뒤집혔었다.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클린턴에 대한 청문회가 열렸고, 대통령 탄핵에 대한 여론까지 조성되면서 미국 정계 전체가 큰 소용돌이로 휘말렸던 사건이었다. 그 무렵 ‘클린턴이 왜 그랬을까?’를 둘러싸고 온갖 이야기들이 나돌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클린턴의 어린 시절 성장배경이 그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클린턴의 생부는 그가 태어나기 석 달 전 교통사고로 사망하였고, 그의 나이 4살 때 클린턴은 알코올중독자 로저 클린턴을 계부로 맞이하였다. 그는 자주 취해 폭력을 일삼는 자였고, 그 아버지 밑에서 성장하면서 클린턴은 유소년 시절을 보냈다. 로저 클린턴 사망 후 클린턴의 생모는 세 명의 남자와 세 번 더 결혼하였다. 얼굴도 못 본 생부와 계부 4명, 총 다섯 명의 아버지가 클린턴에게 있었던 것이다. 성장기 내내 클린턴은 자기집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불행한 일이 없는 것처럼 최면을 걸었다.
이 때문에 클린턴은 어렸을 때부터 모순되는 것을 잘 조화시키고 상황에 따라 잘 적응하는 법을 길렀다고 전해진다. 불굴의 의지, 승부욕, 남에게 인정받으려는 강한 욕구 등이 이때 자리잡았고, 그것이 여성에게는 성적욕구로, 정치적으로는 승리에 대한 욕망으로 표출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던 심리학자들의 인터뷰가 당시 난무했었다. 요약하면, 어린시절 억압되었던 그 무엇인가가 드디어 징후가 되어 귀환하여 대통령이 된 클린턴으로 하여금 르윈스키와 백악관 정사를 벌이게 했다는 결론인데…..
어렸을 때 아무런 억압 없이 성장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클린턴과 같은 강렬한 징후는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 하나씩 그런 징후들을 갖고 있는 셈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본격적으로 라깡의 사유와 만난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이 왜 생기는가?’라는 물음에 무의식은 어떤 억압적인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즉 이런 억압이 눌려 저장되어 있는 장소가 무의식인 셈이다. 하지만, 라깡은 프로이트보다 한 발짝 더 나간다. 라깡은 개별적 한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인간이 반드시 겪게 되는 억압의 경험을 말하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이 언어의 세계로 진입하는 경험이다.

라깡의 주체론
 
‘언어의 세계로 진입한다’함은 아기가 제도와 문화와 사회속으로 진입함을 의미한다. 시간적으로 환산하면 옹알이를 시작한다는 생후 6개월에서부터 말을 하기 시작한다는 18개월 사이다. 그 기간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그 이전 엄마와 아기의 관계는 연속적이고 합체된 이자관계였다. 아기에게는 나는 나이고, 저것은 엄마라는 주객 이분이 없다. 주관과 객관 사이의 거리가 확보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지만, 18개월이 지나면서 엄마와 아기사이의 연속성은 서서히 깨어지고 불연속면이 펼쳐지는데, 그 파열을 제공하는 자가 바로 아빠다. 그곳은 엄마의 젖가슴이 곧 나였던 달콤한 상상계와 대비되는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법이 지배하는 차가운 상징계를 대변한다.
라깡은 이와 같은 상상계와 상징계를 설명하기 위해  ‘the ideal ego(이상적 자아)’와 ‘the ego-ideal(자아이상)’라는 개념을 끌어온다. 각각은 상상적 동일시, 그리고 상징적 동일시와 쌍을 이루는 말이다. 지젝은 상상적 동일시를 “우리가 되고 싶어하는 그 무엇을 표상하는 이미지와 동일시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상징적 동일시는 “우리가 관찰 당하는 장소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바라보는 장소를 동일시 함으로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사랑할 가치가 있고 좋아할 만하게 보이는 것”이라 표현한다.[각주:2]
예를 들어, 엄마의 젖가슴 만으로도 충분히 엄마와 합일이 가능했던 아이에게, 어느 날 엄마가 “너는 의사가 되어야 해! 그래야만 나와 합일을 계속 유지할 수 있어!”라고 말했다고 치자. 엄마는 더 이상 나를 더 이상 당신의 젖가슴을 만지는 나로 만족하지 않는다. 뭔가 다른 것을 보여달라고 성화다. ‘나는 가수다!’ ‘나는 의사다!’ ‘나는 박사다!’……이렇듯 엄마는 자신의 젖가슴만을 탐닉하면서 상상계속에만 머물러 있는 내가 아닌, 가수, 의사, 박사, 판검사 등등의 이름으로 기표화된 나를 요구한다. 그 결과 아이는 더 이상 엄마의 젖가슴을 만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깨닫게 되고, 엄마가 제시하는 이름표(기표)를 따는, 즉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주체로 거듭나게 된다.
이 지점에서 라깡은 desire와 jouissance를 구분한다. Desire은 상징계속 주체가 갖는 욕망이다. 이것은 타인의 시선을 따라가는 욕망이다. 박사가 되고 교수가 되고, 의사가 되고 CEO되는 것과 같이 어떤 기표를 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욕망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이다. 남이 좋아라 하는 시선을 내가 따라가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한국의 결혼풍속도를 보면 상징계의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결혼식에서 신랑과 신부간의 사랑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남들이 이 결혼을 어떻게 볼까?’ 가 제일 중요한 부분이다. 신랑은 뭐하는 사람이고, 신부의 집안 배경은? 혼수도 얼마나 했는지? 예식장은 어디? 신혼여행은? 이 모든 사항들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조정되고 꾸며진다. 반면, jouissance는 상상징계 진입할 때 제거당한(남겨진) 대상을 향한(대한) 욕망이다. (이 부분은 다음 시간에 실재에 대한 부분을 다루면서 본격적으로 다룰 것이다.)
이런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통과의례를 경험한 주체는 (내가 보기에) 슬픔과 외로움과 안타까움을 마음속 깊숙히 근원적으로 간직한, 자기소외와 분열과 억압을 동반한 주체다. 왜냐하면, 상징계속 주체(사회적 주체)가 되는 과정에서 원래 아기(상상계속 주체)가 지녔던 것이 모두 상징계속 주체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지금 시카고에 살고, 신학으로 박사공부하고 있고, 결혼했고, 목사인 이상철이다. 하지만, 그 이상철으로 완전히 온전히 환원되지 않은 또 다른 이상철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남겨진 부분, 즉 잔여다. 이런 이유로 주체가 상징계로 진입하는 과정은 무척이나 고통스럽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를 spaltung(파열)이라 표현한다. 이것은 아기가 엄마의 자궁을 뚫고 나올 때 엄마의 배가 찢어지는 것과 비유할만 하다. 그 고통을 수반해야 아기는 더 이상 자궁속에만 머무르고 있는 잠재적 주체가 아닌, 세상에서 카운트 되어 살아가는 주체로 설 수 있다. 

결국, 주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라깡의 답변은 근대철학이 제시하는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계몽이성에 의해 인도받은 근대적 주체는 이성의 빛으로 중세적 어두움을 정복하고 무지와 미지의 지점을 하나씩 무너뜨리면서 세계를 통합하고 종합하면서 전체를 총체적으로 구성해나갈 줄 아는 그런 주체였다. 하지만, 라깡의 주체는 근대적 주체와는 반대로 uncanny하고 weird한 존재이다. 독일말로는 Ungeheuer! 카프카의 <변신>에 보면 한 친구가 아침에 자고 일어났더니 엄청 큰 괴기스러운 벌레로 변신이 된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카프가가 쓴 단어가 Ungeheuer이다. 섬뜩하고 무시무시한 무엇인가를 표시할 때 쓰는 단어다. 예전에 리들리 스콧, 제임스 카메론 감독 같은 대가들이 연출하고 시고니 위버가 주연으로 나왔던 영화 <에어리언>시리즈가 있었는데, 그 영화에서 괴물들의 숙주가 인간의 몸에서 자라는 씬이 나오는데, <변신>에서와 마찬가지로 uncanny하고 Ungeheuer하다는 표현을 쓰기에 딱 걸맞는 장면이었다. 영화 <에어리언>의 그 장면은 라깡의 주체에 대한 이미지를 설명하는 데 가장 탁월한 그림이 아닐까 싶다. 이렇듯 내 안에는 내가 모르는 어떤 파열과 분열과 섬뜩함의 도사리고 있는 공간이 있다. 그것은 우리 속 어딘가에 꼭꼭 숨어있다가 징후가 되어 간간이 우리의 통제와 제약을 넘어 분출한다. 라깡은 징후가 되어 귀환하는, uncanny한 에어리언 같은 ‘내가 인간임!’을 선언하였다.  이것이 바로 라깡이 이룩한 주체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통찰이다. 너무 우울한가?      

<다음 웹진에 계속>

  1. Slavoj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New York: Verso, 1989), 56. [본문으로]
  2. Ibid., 105. [본문으로]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BLOG main image
by 제3시대

공지사항

카테고리

웹진 <제3시대> (835)
특집 (8)
시평 (96)
목회 마당 (61)
신학 정보 (139)
사진에세이 (41)
비평의 눈 (59)
페미&퀴어 (25)
시선의 힘 (139)
소식 (154)
영화 읽기 (34)
신앙과 과학 (14)
팟캐스트 제삼시대 (12)
연구소의 책 (15)
새책 소개 (38)
Total : 381,253
Today : 255 Yesterday : 1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