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 서울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나도 모든 일을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들게 하려고 애씁니다. 그것은, 내가 내 이로움을 구하지 않고, 많은 사람의 이로움을 추구하여, 그들이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 「고린도전서」 10,33

 

춘절을 맞은 중국의 귀성 인구는 수억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것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한국의 설날 귀성 인구도 엄청나서 정부가 추산한 수는 2천 8백만 명을 상회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인구의 58% 이상이나 된다는 얘기지요. 한국과 중국처럼 근대화가 몇몇 도시 중심으로 심하게 불균등하게 진행된 사회는 광범위한 이촌향도 현상이 초래될 수밖에 없지요. 더욱이 이 두 사회는 확대가족의 의미가 여전히 강한 사회이니 명절은 그 반대로 대대적인 귀성의 물결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귀성을 할 때 어떤 생각을 할까요? 확대가족의 온화하고 친근한 품을 상상할까요? 적어도 귀성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탈가족화는 근대화가 초래한 노동체제로 인한 불가피한 현상이었지요. 가족이 핵가족 단위로 협소해졌고, 그나마 가족 간의 연결고리가 너무 심하게 해체되었다는 것이지요. 하여 이러한 노동체제는 사람들에게 가족의 품을 상실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귀성은 일시적으로라도 가족의 품을 체감하게 함으로써 삶의 활력을 되찾게 해준다는 이데올로기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한데 실상 이런 이데올로기는 이제 그다지 실제 경험을 반영하지 않는 ‘죽은 담론’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명절에 흩어진 가족이 같은 시간에 모이기도 쉽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도 가족 간의 갈등 요소들이 위험수위를 넘나들곤 합니다. 식구들의 경제적 차이, 성적 차이, 종교적 차이, 세대 차이 등이 싸움으로 비화되는 일이 어느 때보다도 흔하게 일어나지요. 그리고 과거에 비해 그런 갈등의 거중조장자로서 어른의 위상은 크게 실추했습니다. 그러니 명절은 가족의 품보다는 가족의 피로감이 증폭되는 시간이 되어버렸습니다.
요컨대 명절의 귀성은, 가뜩이나 피폐해진 도시민들, 힐링이 간절히 필요한 그이들의 각박한 삶을 거의 힐링하지 못합니다. 힐링 이데올로기가 넘쳐나는 시간에 힐링의 실상은 없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서울 얘기를 해봅시다. 한국 자체가 일종의 확대된 서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한국은 도심 서울과 그 외곽으로 이루어진 ‘도시국가 서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서울 얘기란 도심인 서울의 논리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의 얘기이기도 합니다.
바야흐로 서울은 힐링 신드롬에 휩싸여 있습니다. 방송마다 ‘힐링’ 운운하는 말로 넘쳐나고, 무수한 공적, 사적 단체들마다 힐링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교회도 힐링 목회가 유행하고 있지요. 가는 곳마다 멘토-멘티 짝짓기가 성행하고, 시민의 멘토 역할을 하는 대중스타들이 탄생하였지요. 심지어는 어느 동네에는 ‘힐링 헤어’라는 이름의 미용실이 나왔고, ‘힐링 국밥’라는 음식 메뉴가 등장하기까지 했습니다. 힐링과 아무 관계없는 것도 힐링을 표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도대체 왜 이렇게 힐링에 ‘미쳐’ 있을까요? 물론 자기가 병들어 있다는 상실감이 널리 퍼져 있기에 그렇겠지요. 우선 건강검진의 일반화가 질병의 일상화와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국민 누구나 건강검진을 하는 제도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질병 걸린 몸’으로 자기를 설명하게 하는 담론 현상을 낳은 것입니다. 심지어는 아직 병증은 아니지만 잠재적인 병증까지도 자기 설명의 목록에 포함되게 되었지요. 그렇게 사람들은 병에 예민해진 것입니다.
거기에 서울이 매우 활발한 소비사회로 발달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대단히 예민해졌습니다. 자기 취향, 자기 감정, 자기 의지 등에 대해 과민해진 것이지요. 어떤 학자는 이런 현상을 ‘자기 과민’이라고 이름 붙였지요. 요컨대 자기 과민 상황에 처해 있고, 이런 자기 상황에 약간의 위기감이 오면 그것을 병증으로 생각하는 현상이 도시국가 서울의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입니다. 심각한 정신적 외상을 일컫는 말이 ‘트라우마’가 일상어가 되기까지 했지요.
한데 신자유주의가 맹렬하게 사회를 휘젓고 다니면서 사람들은 소비사회적 ‘자기 과민성’과는 모순적인 존재가 되라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강력한 요구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삼성의 총수 이건희는 그 요구를 단적으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모조리 바꿔라.”
이 말은 타인에게 자기의 것을 팔기 위해 자기를 해체하고 그 사람이 되라는 주문입니다. 총체적인 자기 쇄신의 방향은 자기 해체에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그 목적은 자기 자신의 교환가치를 최대화하는 것입니다.
자기 과민의 존재에게 자기 해체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결국에는 과민할 대로 과민한 자기 욕구를 가장 잘 실현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딜레마에 빠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기 과민 현상은 미래를 향해 자기를 유보할 여유가 별로 없습니다. 현재의 결핍을 병증으로 인식할 만큼 현재에 집착하는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지금 자신이 필요한 것을 소비하고야 마는 소비적 욕구로 최대한 충전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충분히 성공해야 하고, 충분히 성공하려면 자기 해체를 절실히 필요로 합니다. 자가당착에 빠집니다. 헤어 나올 수 없는 모순 관계, 그 속에서 사람들은 너도나도 힐링에 집착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일종의 삶은 전쟁터입니다. 하지만 그 후방지대인 명절도 별로 뾰족한 대안이 아닙니다. 아니 명절은 명절대로 새로운 괴로움을 안겨주곤 하니 말이지요. 하여 힐링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서울은 힐링되지 않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한편, 흥미롭게도, 「고린도전서」 10,33에서 바울은 마치 2천년대의 재벌총수 이건희와 흡사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나도 모든 일을 사람의 마음에 들게 하려고 애씁니다.” 그 앞에는 이 말의 부연설명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자의식이 있지만 유대주의자들에게는 유대주의자처럼, 그리스인에게는 그리스인처럼 하겠다는 것입니다. 우상에게 바친 제사 재물을 먹는 것에 거리낌이 있는 사람에게는 거리낌 있는 사람처럼 행하고, 그런 터부가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먹는 이가 되겠다는 것이지요.
바울 당시의 고린도는 과거에 전쟁으로 처절한 파괴를 당했지만 불과 한 세기도 못돼서 지중해 전역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의 하나로 급상승한 땅입니다. 한데 이곳은 로마에 대한 식민성이 높고, 물건을 팔아야만 존속할 수 있는 무역 의존성이 절대적인 도시입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고린도가 서울과 매우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서울도 전쟁으로 처절하게 파괴되었지만 불과 60여년 만에 놀랍도록 발전한 도시였지요. 또한 미국과 자본주의에 대한 충성도가 대단히 높은 도시이고, 특히 한⋅미 FTA 비준은 그러한 충성도의 질을 한층 높여 놓았지요. 게다가 도시국가 서울은 외국과의 상업적 거래에 대한 의존성이 절대적이라는 특성을 갖습니다.
이런 도시의 주민들은 끊임없이 자기 해체의 주문에 직면하게 됩니다. 소비자의 마음으로 생산하고 판매를 합니다. 노동자들은 주인의 마음으로 노동을 하고, 이 도시 주민은 종주국 도시의 마음으로 살고자 그 도시를 선망합니다. 곧 높은 자의 마음이 되고자 낮은 자인 자신을 해체하는 것입니다.
이런 요구가 일상인 도시 고린도에서 유대주의자들은 자기 해체를 다른 곳에 적용하여 해석합니다. 무수한 종족 결사체들이 저마다 자기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는 일이 다반사인 도시에서, 그 제사음식을 먹는 것은 그 음식을 베풀어 놓은 이들의 신앙심을 품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한데 바울은 그런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을 빗대면서 다른 논지를 폅니다. 일종의 패러디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는 전혀 다른 논지를 폅니다. 자기 자신은 자유인이지만, 곧 예속되지 않은 자이지만, 예속된 낮은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를 해체하겠다고 합니다. 높은 자를 선망하는 자기 해체가 아니라 낮은 자에게 구원을 선사하기 위한 자기 해체를 주장하는 것이지요.
정리하면 힐링이 필요한 사회는 높아짐을 위한 자기 해체를 강요하는 사회입니다. 그런 사회에서 자기 해체는 높은 곳을 선망하는 자기 욕구와 갈등을 일으킵니다. 한데 바울은 낮아짐을 위한 자기 해체를 주장합니다. 그것은 힐링 받아야 하는 자기가 아니라 남에게 힐링을 주는 자기가 되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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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늙은 민중신학자의 편지[각주:1]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 과정)

 

I

형. <민중신학>이 출범한지 어언 40년 가까이 되어갑니다. 함께 했던 선배들이 사라진 자리에서 저는 이제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되어 젊은 신학자들이 내뿜는 패기와 열정에 놀라고, 우리 때와는 다른 그들의 재기 발랄함, 능숙하고 유려한 매체 적응력, 그리고 현란하고 아찔한 공감각적 감수성에 탄복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확실히 세상은 우리가 살았던 시절과는 많이 변했고, 이런 시대의 변화는 당연히 신학하는 우리들에게도 체질개선을 요구하였습니다. 포스트모던, 신자유주의, 세계화, 다문화….등등의 용어들을 풀이하면서 그 말들이 지닌 사회학적 의미에 대해 하나씩 이 자리에서 장황하게 늘어놓고 싶지는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한국교회와 한국신학은 발 빠르게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면서 수요자 중심의 교회, 그 수요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신학을 양산해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벌써 10년도 휠씬 지난 일이네요. 이제는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대세가 된 듯합니다.
세계화되고 다원화된 오늘날의 현실에는 그 다양성만큼의 편견과 억압과 폭력이 잠재해 있습니다. 전 시대와는 비교가 안 되는 세련된 방식으로 그것들은 교묘히 은폐된 채 자신들의 모습을 숨기고 있지요. 그것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영토화 된 것이든 탈 영토화 된 것이든, 그것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것이 제도에 의한 것이든 관습에 의한 것이든, 우리의 삶의 방식은 이제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일종의 매트릭스 안에 갇힌 듯 합니다.
그 매트릭스 안에는 체제에 대한 냉소와 체제를 향한 분노를 분출할 수 있는 장치까지 다 마련되어 있답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모든 과정이 전과 같은 체제의 강제가 아닌 인민들의 자발적 동의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현 체제가 옛날 독재정권과 같은 막가파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아주 폼 나고 우아하게, 아주 부드럽고 나이스하게 체제는 인민들을 스스로 낭떠러지 끝으로 걸어가게 만듭니다.
뉴타운을 조성시켜 집값을 올려주겠다는 공약에 속아, 4대강 사업으로 땅값을 올리겠다는 공약에 넘어가 우리는 자발적으로 이명박을 찍었고, ‘잘 살아보세!’라는 박정희의 주문은 약발이 다한 그때의 추억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아닌 그의 딸을 통하여 엄연한 현실의 질서로 아름답고 화려하게 복귀했습니다. 그것도 5.16을 연상시키는 51.6%라는 국민적 동의를 등에 업고 말입니다. 이를 어찌 해석 해야 할까요? 


II

이런 씁쓸한 현실 속에서 저는 지금 지난날 우리가 함께 일구어냈던 <민중신학>을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민중신학을 전망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지난날 있었던 많은 사건들을 회고하게 되는데, 마치 어제 일처럼 또렷하네요. 혁명의 시대를 건너오면서 광장에서 울려 퍼졌던 함성과 환희를 기억하고 있는 우리들, 핍박의 시대 골방에 갇혀 쓰고 또 쓰고 하면서 다듬어진 민중신학의 언어를 간직하고 있는 우리는 분명 행복한 세대였습니다.
형도 기억하듯이, 우리가 <민중신학>이라는 새로운 신학을 선언할 즈음, 이미 우리 앞에는 유수한 신학적 전통과 권위들이 상존하고 있었습니다. 20세기 서구신학을 장식했던 거장들이 사라졌다고는 하나, 그들이 이룩해 놓은 풍부한 신학적 토대 위에 많은 후학들이 신학적 담론들을 왕성히 토해내던 때가 바로 그 무렵이었죠. 과정신학, 세속화 신학, 희망의 신학, 신 죽음의 신학 등이 서구신학의 전통 내에서 발생한 자기갱신의 목소리였다면, 페미니즘 신학, 흑인신학, 해방신학은 서구신학의 방계전통에서 일구어낸 혁혁한 공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고수들의 틈바구니에서 우리는 그런 권위들에 주눅들지도 않았지만, 물론 살짝 엿보기는 했었겠지만서도, 그렇다고 그들을 밟고 뭐 기막힌 신학을 만들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우리의 방식대로, 우리의 언어와 우리의 상황 속에서 그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신학에 시비를 걸고 싶었던 것 것뿐이죠. 그 결과 <민중신학>이라는 나름 엣지있는 신학적 영토를 구축했다고 저는 자부합니다.
하지만, 현재 민중신학은 더 이상 광장의 아우성도 아니고, 고독한 독방에서의 고투도 아닙니다. 피를 끓게했던 광장의 언어는 이제는 서늘히 식어버려 죽은 놈 뭐 만지는 식의 불임의 언어가 되어버렸고, 독방에서 만들어낸 영감의 언어는 더 이상 소통하지 못하는 밀폐의 언어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재 민중신학이 당면하고 있는 현실이고 조건이라고 한다면 너무 큰 자학일까요.  
미국에서 10년 가까이 공부하면서 여러 차례 세계에서 온 친구들 앞에서 민중신학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많이 놀라하고 무척 흥미롭게 민중신학에 대해 관심을 보이다가도 얼마 안 있어 금방 지루해하며 이렇게 묻더군요: we don’t want to know the past of minjung theology any more because we had heard enough of this. My question is that; “what is the influence of minjung theology on Korea and the Church today?” “How minjung theology can continue to be relevant and functioning in the present age called as global-capitalism, postmodernism?” “Please, tell me about the present and future of minjung theology”
저는 이런 질문들을 받으며 두 가지 점에서 놀랐습니다. 하나는 저의 미국친구들이 이미 민중신학에 대한 개론적 지식에 많이 노출되어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제가 그다지 민중신학의 현재 내지 미래에 대해 그들에게 해 줄 이야기가 별로 없었다는 점입니다. 새삼 저의 민중신학에 대한 무지와 무감각과 무관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수 있었던 기회였습니다. 그 자극이 저의 논문 제목을 최종적으로 <The Turn to the Other: Minjung Theology in a Dialogue with Levinasian Ethics and Derrida’s Deconstruction Ethics>으로 정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III

요즘 논문을 핑계 삼아 다시 기독교 2천년 역사를 읽으며 새삼 깨닫는 사실은 올곧은 신학이란 언제나 시대의 위기 속에서 비상을 꿈꾸다가 마침내 도약해서는 시대의 아픔을 부등켜안고 추락하고 마는, 마치 봄날 화려하게 피었다가 처연히 흩날리며 낙화하는 목련과 닮았다는 것입니다. 모든 개별적인 사건들과 현상들은 하나의 절대적 관념, 즉 신으로 복속될 것이라 주장하고, 서로 상이한 진리들이 언젠가는 더 큰 진리로 통합되고 그 안에서 극적인 화해를 이루게 될 것이라 믿는 전통적인 신학은 위에서 언급한 신학의 남루하고 초라한 위상을 부정하겠지만, 신학적 진리란 기존의 신학에서 말해왔던 것처럼 복음 안에서의 화해나 종합보다는, 복음을 들고 시대와의 부조화를 선언하고, 복음을 근거로 시대의 균열을 조장하며, 복음과 함께 시대를 가로지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번영을 담보로 차이의 소멸에 공조하는 신학이 아닌, 은폐된 차이와 모순을 드러내고, 시대의 위기를 발설하며, 그 모순과 위기를 향한 구체적 praxis속에서 발견되는 그 무엇, 그것이 바로 온갖 쭉정이 같은 신학들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교회와 세상을 지켜냈던 신학의 참 모습 이라 믿습니다.
저는 이러한 신학적 전통을 요즘 유행하는 지젝의 말을 인용하면서 ‘부정성과 함께 머무는 것!’ 이라고 말하려 합니다. ‘부정’이라고 할 때 거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negative의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不定(Infinite,정해지지 않음 혹은 한계없음)’의 의미입니다. infinite는 현실에서는 deferrable(연기할 수 있는) 혹은 difference(차이), 아니면 emptiness(비어있음)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지젝이 ‘부정성과 함께 머물기(Tarrying with the Negative)’라 했을 때, 얼핏 보면 전자의 ‘부정’을 사용하고 있는 듯 하나, 지젝 사상의 핵심인 실재(the Real)를 이해하려면 오히려 후자의 ‘부정’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참고로, 21세기 윤리학의 지형을 새로 짜고 있는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학’, 데리다의 ‘해체의 윤리학’, 그리고 지젝으로 대변되는 슬로베니아학파의 ‘실재의 윤리학’이 서로 상이한 지적 전통에서 시작되었고, 그래서 각자가 노리는 바가 다르다 할지라도, 셋은 공히 부정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민중신학 안에는 앞서 언급한 두 가지 형태의 부정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이 부정성을 이론적 토대로 삼는 현대의 사상가들과 민중신학이 함께 공모할 수 있는 대목이라 여겨집니다. (이 부분이 논문의 핵심이 될 텐데, 아직 연구가 충분히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나름 정리가 되고 어느 정도 맥이 잡히면 그 과정과 성과에 대해서 다시 의견 나누겠습니다) 
하지만, 민중신학이 간직하고 있는 부정성에 대한 자각과 그 부정성의 계기들을 어떻게 발화시킬 수 있을지를 둘러싼 모색은 서로 다른 성질의 문제입니다. 즉 ‘부정의 방식으로 말을 건네는 어법을 민중신학이 산출할 수 있을지?’ 가 관건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우리는 말하고자 하는(타도의) 대상에만 관심이 있었지, 말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몰지각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제 민중신학은 말을 건네는 대상에 집중했던 과거의 방식이 아니라, 말하는 방식의 개선을 통해 민중신학의 새로운 준거점을 확보해야 할 때입니다. 저는 그 실마리를 윤리에서 찾으려 합니다. <다음 웹진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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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졸고는 현재 진행중인 필자의 학위 논문 [The Turn to the Other: Minjung Theology in a Dialogue with Levinasian Ethics and Derrida’s Deconstruction Ethics]중 서론의 일부를 번역 각색한 원고입니다. 글의 제목으로 사용된 ‘어느 늙은 민중신학자’는 특정인이 아니라, 논문을 웹진 원고로 번역 각색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작중화자임을 밝힙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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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미술 이야기(1)]

'만만한' 예술가

김현화
(연구소 회원, 영국 Emerson College에서 설치미술 전공)

 

얼마 전 끝난 대선 이후에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할 말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내가 찾아 읽는 몇몇 신문에는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인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이해할 수 없다는 인터뷰 내용으로 시작해 민심을 잘못 이해한 것이었나, 시대정신을 오독한 것이었나, 또 누구의 책임인가 하는 분석의 말들로 이어졌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영화 <레미제라블>을 찾아보며 스스로 위로하고 다독이기에 바쁘다.
이런 와중에 나는 다소 뜬금없이 내가 아는 예술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직업적 예술가도 아니고, 게다가 누군가가 자신을 예술가라고 부르는지도 모르며, 예술가가 되고자 하는 마음도 없는 평범한 이이다. 그런데도 이런 이를 굳이 예술가라고 부르는 것은 소소한 일상의 사건 속에서 요셉 보이스에 동의해 왔던 내가 나의 친구들을 기억하고 호명하는 특별한 방식이다. 보이스가 “모든 사람은 조각가(예술가)이다”라는 한마디 말로 모든 이의 깊은 영혼 속에 잠들어 있는 예술성을 불러 깨우고 있듯이 말이다.

너의 두상은 나의 초상이다

소개하려는 이 예술가는 늦은 나이에 다시 시작한 나의 유학길에서 만난 친구이다. 지난 석 달간 우리는 함께 조소 과목을 수강했는데, 두 사람씩 짝을 지어 일대일로 마주보며 서로의 두상을 진흙으로 빚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수업에서 두세 명을 제외한 나머지 수강자들은 진흙으로 작업을 해본 경험이 전혀 없었고, 이런 이들에게 실제 크기의 두상작업은 부담과 무리가 아닐 수 없었다. 눈앞에 모델이 있어 계속 바라보고 관찰하지만, 그래서 이제 자신의 모델에 대해 눈감고도 떠올릴 수 있을 정도가 되었지만 정작 그대로 빚어내는 일에선 문제가 달랐던 것이다. 결국, 바로 앞에 모델이 있고 손으로 만져보기도 하고 측정도 하면서 작업했건만 많은 두상들은 실상과 점점 더 멀어져가기만 했다. 그런데 그렇게 실상과 멀어져 갈수록 웬일인지 이들의 작품에 대한 몰입은 놀랍도록 깊어져 갔다.
그러던 중 개인적인 사정으로 한 주 수업을 못하게 된 교수가 내게 수업을 맡기게 되었다.  사실 조각을 공부했던 나는 조금은 답답한 마음으로 이들의 작업을 지켜보고 있던 차였다. “모델을 과학자처럼 잘 관찰하고 충실히 표현하라. 너희는 다른 사람의 두상을 만들고 있으나 결국은 자신의 초상이 될 것이다”는 말 이외에 수업이 진행되는 2-3 시간가량 이렇다 할 조언을 주지 않던 노장의 교수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고 있던 참이었다.
드디어 시간이 되었고, 기다렸다는 듯이 조각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대상을 보고, 관찰해야하는가에 대한 충분하고도 화려한 설명으로 수업을 시작했다. 먼저 조각이란 수십 수백의 다른 각도, 다른 관점에서 보지 않으면 완성할 수 없으니 작품을 돌려가며 작업을 하든지 아니면 작업자 본인이 작품 주위를 계속 돌면서 작업할 것, 또 이때 특히 주의를 기울여서 두상에서 보이는 갖가지 작은 산(convex)과 웅덩이(concave)를 찾아낼 것을 주문했다. 이와 더불어 조각과 공간의 관계, 조각이 위치한 공간 속에서 조각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조각적 공간에 대한 설명까지 덧붙였다. 이들이 두상의 기본 구조를 이해하고, 회화적 관점을 극복하여 3차원적 조각을 해나가길 바랬던 것이다.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게 나의 짧은 강의가 끝났고, 각자 작업이 이어져 한 시간 가량이 지났다. 이제 좀더 정확하게 대상을 보며 작업하고 있는지 궁금했던 나는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지 나의 설명에 모두 동의하고 귀 기울이고 이해한 듯 보였던 이들이 이전과 조금도 변함없이 자신이 하던 그대로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콜롬비아에서 온 어떤 이는 자신의 모델이 웃을 때마다 드러내는 얼굴 주름을 포기할 수 없다며 그것에 매달렸는데, 그 결과 젊은 모델의 두상은 할아버지가 되어가고 있었고, 모델이 되어준 이는 불만이 가득해 두상에 눈을 돌리려 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저쪽 각도에서 보면 이 주름이 조금 다르게 보이니 이러저러하게 고치면 좋지 않겠는가 설명을 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수정된 주름을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이 보고 느끼는 모델의 주름은 이와 다르다는 이유였다. 작업실 전체가 대충 이런 분위기였다.
이러는 중에 나의 친구도 한 쪽 구석에서 작업으로 고심하고 있었는데 얼마나 작업에 몰입했는지 주변 세상을 잊은 듯한 그의 모습은 사뭇 진지하여 성스러움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그가 만들고 있는 두상은 충격적이었는데, 그것이 실제 모델의 두상 크기보다 많이 작은데다 뒷머리와 이마 부분이 함몰되어 있었고, 두 눈 사이는 너무 멀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누가 봐도 코와 입이 많이 비틀려있어 얼굴 전체가 균형 잡힌 모양새를 갖추지 못하고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다는 점이었다. 사실 그의 모델은 아름다운 일본인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옆으로 다가간 내게 자신의 작품이 “실제 모델의 모습이나 분위기와 많이 다르고 뭔가 이상한데 어디가 이상한 건지 도저히 모르겠다”고 한다. 한 발짝 뒤에서 보자고 했으나 그래도 모르겠단다. 동의를 구하고 오른쪽 입꼬리를 조금 올리고 볼에 소량의 흙을 살짝 덧대어주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보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보지 못하고 있었다”며 탄성을 내더니 연이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다른 부분들까지 찾아내며 고쳐가기 시작했다. 한 달 후 완성된 두상은 바이올리니스트의 편안한 미소가  드러나는 그만의 독특한 작품으로 완성되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실상을 제대로 보는데 실패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지낸다. 그런데 보는 것에 실패를 거듭했던 우리가 ‘본다’는 행위를 조금씩 수정하며 그것을 차곡차곡 쌓아 간다면 실상을 보는 일에 더 가까워지게 되지 않을까. 그러니 어쩌면 ‘본다’는 것이 짧은 눈깜빡임처럼 한 순간에 완성되는 일이 아니며 오히려 생각보다 긴 시간이 걸리는 일일 수도 있겠다. 


핀란드인인 이 친구는 사실 어릴 적에 부모에게 버려져 양부모에게 입양되는 일을 겪어야 했다. 그의 친부는 일찍 사망했고, 친모 역시 알콜중독자로 어려운 삶을 살다가 2년 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종종 이 친구는 친모를 처음 만났던 날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고 한다. 양부모는 그를 입양하기 전에 이미 두 자녀를 낳아 기르고 있었고, 그는 양부모뿐만 아니라 이 자매들과도 연락을 피하고 있는 상태였다.
여기서 그의 개인사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런 굴곡진 삶의 역사가 마치 그가 만들던 기이한 두상처럼 그로 하여금 실상을 왜곡된 상으로 보게 하고 그렇게 표현하도록 몰아갔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술(행위)이 우리 삶에 어떻게 말을 걸고 파고드는지를 말하려고 한다.
두상 작업을 만족스럽게 마친 후에 이 친구는 수년간 소식이 끊겼던 양모를 어렵게 만나 몇 일간 밤을 새워가며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이 일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양모를 만나는 동안 웬일인지 내가 만든 두상이 계속 생각났어. 그런데 이상하지. 양모가 아주 다른 관점에서 보이더니 그녀의 말이 이해되기 시작하는 거야. 그리고는 내가 그토록 믿지 못했던 양모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지. 이제야 나는 진짜 엄마를 갖게 됐어.”

몸속에 흐르는 예술, 유익한 기억

흔히 일상의 경험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믿지 못할 것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과거의 경험이 왜곡되거나 과장되어 저장되기 일쑤이고 현재 시점에서 다시 불릴 때는 실재와 다소 다르게 재현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때로 ‘지난 경험에 대한 기억은 기억 주체로 하여금 새로운 것을 볼 수 있게 돕기도’ 한다. 바이올리니스트의 두상을 조각한 나의 친구는 ‘본다’는 행위의 필연적 착각 혹은 착오를 침묵의 관찰로, 관찰을 유연한 자기변화로 이어갔다. 이 순간 그에게 예술은 기억처럼 저장되어 그의 몸속에서 생명체처럼 이리저리 흐른다. 이때 ‘기억은 그에게 가장 유익한 것이 된다.’
예술이란 무엇인지, 예술가란 누구인지 고민했던 19세기 말엽 조각가 Hans Brandstetter는 비엔나에서 만난 당대의 사상가에게서 시를 한편 받게 된다. 이 시의 한 구절이다.

...... To bring life and spirit
 to dead and rigid matter
 is the aim of the artist...(중략)

죽은 듯 단단한 물질에 작가적 생명력을 불어 넣는다는 것은 굳어져서 좀처럼 그 흐름이 바뀌지 않는 우리의 사고에 생명의 온기와 유연함을 되찾아주는 일일 것이다. 이 관점에서 저 관점으로 넘어가는 작가의 유연한 발걸음은 고집스럽고 딱딱한 사고를 말랑말랑하게 만들고, 종국에는 쌓아올린 차가운 흙덩이를 온기 있는 예술품으로 만든다.
이쯤 되면 본다는 것이 더 이상 안구에 맺히는 이미지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처럼 끊임없이 자신이 보는 것을 수정하며 새로운 보기의 각도를 넓혀가는 모든 이들이 예술가로 불려야 하지 않겠는가.
대선 이후 분분한 말들 속에서 많은 이에게 필요한 건 경직되고 무딘 사고를 말랑하게 만드는 예술가가 되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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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지젝을 아느냐? (III)
: 지금, 여기서 다시 이데올로기를 묻다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 과정)

 

지난 <49호>, <50호> 웹진에서 필자는 라깡을 경유한 지젝식 주체에 대한 해설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고, 이를 위해 나는 지젝을 세상에 알린 책이자, 지젝 사상의 근거가 되는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에 나와 있는 라깡의 욕망그래프 하단에 대한 지젝의 해설을 인용하였다. 이번 웹진부터는 지젝 사상의 백미이자, 가장 중요한 이론적 틀이라 할 수 있는 실재(the real)에 대한 부분이 전개된다. 지젝식 ‘실재’가 사상사에서 어느 지점에 위치하고, 그것이 왜 중요한지? 그리고 이러한 지젝식 실재가 어떻게 정치학, 윤리학, 신학과 관련을 맺게 되는지?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것들이 함의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 앞으로 남은 과제들이다.
우선, 이번 웹진(51호)을 포함하여 앞으로 3회에 걸쳐 지젝의 실재에 대해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하지만, 그것은 지젝이 말하는 이데올로기 분석을 통해 그 진상이 서서히 드러나는 마치 스무고개와도 같은 지난한 작업이다. 그곳에 다다르기 위해서 우리는 맑스주의 사상사에서 등장하는 백가쟁명에 대해 빠르게 살펴봐야 할 것이고, 알튀세와 라깡도 지나야 하며, 숭고의 미학과 헤겔 변증법 사이의 관계도 살펴야 한다. 이런 전체적인 틀 속에서 이번 웹진과 다음 웹진은 ‘이데올로기의 계보학’이라는 주제로 지젝의 이데올로기론에 주로 초점을 맞출 것이고, 그것은 알튀세와의 만남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지젝 시카고 강연사진: 지젝은 몇 차례 걸쳐 시카고에 방문했었다. 위의 사진은 가장 최근 2011년 10월에 있었던 시카고에 위치한 일리노이 주립대 강연 후 청중과 대화하는 장면이다. 지젝은 이날 ‘modern culture and its problem’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괴물, 지젝의 탄생!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조금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지젝의 생애에 대해 간략히 돌아볼 필요를 느낀다. 지젝이 중앙무대로 진출하기 전까지 그가 겪었던 부침에 대해 잠시 살펴 본 후, 그 끝에 등장하는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1989)가 갖는 의미가 무언인지를 밝히면서 서서히 이 글은 본론으로 진입하게 될 것이다.     
지젝은 1949년 구 유고 연방 슬로베니아에서 태어났다. 유고의 공산주의는 소련의 휘하에 있었던 다른 동구 공산권과는 형태가 매우 달랐다. 티토라는 걸출한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된 유고식 공산주의는 1948년에 공산권 내에서 민족주의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스탈린이 주도했던 ‘일국혁명론’에 반기를 들었다. 이는 국제공산주의 운동 사상 최초의 항명사태로 기록되었고, 이를 계기로 유고는 소련에 의해 코민테른에서 제명당한다. 스탈린 사후에 유고와 소련이 겉으로 화해의 제스처를 취했다고는 하나, 양국 사이 공산주의 주도권을 둘러싼 자존심 경쟁은 티토가 사망한 1980년까지 계속되었다..
지젝은 이렇듯 체제 경쟁에서 소련과 대립각을 세웠던 유고식 공산주의 시스템속에서 성장하고 자랐다. 교조적인 소련식 공산주의에 비해 상대적으로 널널한(?) 유고 분위기속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서구사상을 흡입하였던 지젝은 슬로베니아 수도에 위치하였던 류블냐나 대학에서 공산권 학자로는 드물게 라깡과 데리다, 쥴리아 크리스테바, 들뢰즈 같은 프랑스 사상가들의 이론을 정리해 <프랑스 구조주의의 이론적, 실천적 타당성>이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1975년), 하이데거로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1981). 후에 지젝은 당시 공산권출신 학자로는 거의 유일하게 파리 8대학에서 라깡의 사위이자, 라깡의 모든 학문적, 물적 토대를 계승한 자크 알랭 밀레 밑에서 라깡의 정신분석학을 주제로 본인의 두 번째 박사학위를 받는다.(1985년).
공산권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탓에 유물론적 인식을 마치 공기처럼 받아들였던 지젝!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물론이 아닌 독일관념론의 완성이자 해체론의 발단이라 할 수 있는 하이데거를 주제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이는 후에 지젝의 거의 모든 저작에서 칸트와 헤겔에 대한 탁월한 독해를 가능케 했던 원동력이 되었다. 자크 알랭 밀레와의 만남은 어쩌면 지젝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는지 모르겠다. 지젝은 그를 통해 라깡을 만났고, 마침내 라깡을 넘어선다. 지젝은 자신의 거의 모든 지식체계가 그 무렵 파리에서 완성되었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하지만, 지젝이 한창 지적 흡입을 하던 60년대 말부터 80년대 중반까지 당시 세계는 미.소의 냉전체제가 팽팽히 지속되었던 시기로, 미국에서는 반공사상이 팽배하였고, 이에 맞서 동구권에서는 체제유지 차원에서 정통 맑시즘이 강조되던 시기였다. 물론, 유고가 소련식 공산주의와는 달랐다고는 하나 맑스와 레닌에 대한 숭배에 있어서는 별반 다르지 않았던 공산권 분위기 속에서 지젝은 정통 맑시즘을 전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강단권력으로부터 제외되었다. 이것이 오히려 지젝에게는 결과적으로 전화위복이 되었지만…
이렇듯 무척 특이한 지적 이력을 거듭하면서 점차 괴물로 성장한 지젝은, 마치 무협영화에서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15년 동안 산속에 쳐박혀 무술을 연마한 주인공이 하산하여 강호를 누비듯, 현대 사상계에 혜성처럼 등장하여 지적 이단아로서의 이름을 휘날리기 시작한다. 그 영웅의 출몰을 알린 책이 바로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1989)이다. 
지젝이 쓴 대부분의 책들이 그렇듯이,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역시 제목부터 난해하고 자극적이다. 어떻게 ‘이데올로기’와 ‘숭고’가 한 제목 안에 있을 수 있을까? 그것은 마치 내게는 이런 낯설움이었다. 태양이 중천에 떠 있는 한 여름 오후 12시, 그날따라 웬일인지 고속도로에는 지나다니는 차 한대 없었다. 쫙 뻗은 고속도로를 100마일로 주행하고 있는 나!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전방에 검정색 물체가 놓여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급 브레이크를 밟고 속도를 줄여 천천히 그 물체 앞으로 가까이 가 확인해 보니 검정색 시장 비닐봉지가 덩그란히 고속도로 한복판에 놓여있는 것이 아닌가! 차문이 잠겨있는지를 재차 확인하고, 차창너머로 그것을 다시 똑바로 응시하였다. 작열하는 태양빛을 받아 녹아 흘러 넘칠 것 같은 아스팔트 위에 또렷히 놓여있는 검정 봉달이! 언뜻 보아도 물컹하고 질퍽한 질감이 피부로 전달되는 것이 느껴지고……차에서 내려 그 검정 봉지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확인해야 할까? 아니면, 그냥 지나쳐야 할까? 독자들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갑자기 내 눈앞에 펼쳐진 이 낯선 풍경 앞에서 나는 어쩔 줄 몰라한다. 고속도로에서 차를 몰고 가는 행위와 시장에서 순대와 내장과 간을 사서 검정 봉달이 안에 넣고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우리에게 얼마나 익숙한 광경인가! 그런데 너무나도 일상적인 고속도로와 시장 검정 봉달이를 조합시켰더니 낯선 효과가 나타났다. 정말 이런 느낌이었다. ‘이데올로기’와 ‘숭고’를 한 권의 책 제목 안에서 동시에 접했을 때……갑자기 나는 고속도로 위에 놓여있는 검정색 시장 봉달이가 생각났다. 

이데올로기와 숭고, 그 어울리지 않는 조합

그것은 분명 잘못된 만남이었다. 이데올로기라는 정치. 사회적 용어와 숭고라는 미학적 용어가 어떻게 어울릴 수 있는가? 책 제목을 접하고서 나는, 맑스 이후 레닌을 지나 알튀세가 등장하기 전까지 맑스주의 발전과정에서 다양하게 등장했던 이데올로기론의 전사가 일단 빠르게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갔다. 레닌과 함께 시대를 같이 했던 베른슈타인, 카우츠키, 트로츠키의 실패한 이데올로기론이 떠올랐고, 불꽃 같은 의지로 살다가 장렬히 전사한 로자 룩셈부르크도 생각났다. 그녀는 ‘철의 여인’이라 불리며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함께 신자유주의의 초석을 놓았다고 평가받는 80년대 영국 수상 마거릿 대처보다도 수 십년 앞서, 인간해방과 혁명의 기수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진정한 철의 여인이었다. 그람시와 루카치는 맑스주의의 외연확장과 이데올로기론에 대한 논의를 다양하게 이끌었던 장본인들이었고, 나중에 등장하는 맑시스트들에게 풍부한 영감을 제공하는 인물들이었다. 위에서 간략히 언급한 인물들과 그들의 이데올로기론은 사실은 하나하나가 세미나 제목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중요하다. 이렇게 복잡다단하게 전개되는 이데올로기론의 역사속에서 각각의 이데올로기들은 먼저 등장했던 이론에 대한 비판과 대안의 노릇과 후에 등장하는 이론에 대한 암시와 징후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반면, ‘숭고’는 어떠한가? 숭고는 미학적 용어이다. 우선, 칸트가 그의 감성론과 미학을 다룬 <판단력비판>에서 미와 숭고를 대비시키며 전개시키는 대목이 생각나고,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하는 리오타르가 내세웠던 현대예술 안에 깃들어 있는 숭고미에 대한 찬양도 떠오른다. 요즘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는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 시대의 세계관을 미리 예단한 학자였으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언어철학에는 숭고에 대한 집착이 강하게 베어있다. 복제(요즘 유행하는 폼나는 말로 시뮬라크르)와 숭고가 아찔하게 교차하는 매력이 그에게 있다는 말이다. 바로 이점이 근래에 등장하는 사상가들이 벤야민에게 훅 가는 이유일런지 모른다. 이렇듯 숭고에 대한 논의 역시, 물론 이데올로기론에 대한 논쟁만큼 피비린내 나지는 않지만, 다양한 지적 지형 위에 위치한다.
그렇다면, 왜 지젝은 전혀 다른 계열상에 존재하는 이데올로기와 숭고를 결합시키는 것일까? 혹 그 결합 안에 숨어있는 무엇, 아니 그 결합의 방식 내지는 서술의 형태가 지젝이 실재를 드러내는 패턴이 아닐까? 이러한 질문을 갖고 지금부터 지젝의 이데올로기론으로 진입할 텐데, 그 전에 우리는 알튀세를 경유해야 한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알튀세를 걸고 넘어지는 이유

난데없이 지젝을 이야기하다 말고 알튀세를 끌어들인 이유는 분명하다. 지젝의 이데올로기비판은 몇 가지 단계를 거치는데, 특별히 지젝과 마찬가지로 라깡의 욕망이론에 의지했던 알튀세의 이데올로기론과의 대결을 통과하면서 그 윤곽이 확실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번 웹진에서는 지젝 사상 이해의 중요한 정거장이라 할 수 있는 알튀세를 회고하는 시간을 잠시 갖도록 하겠다. 
알튀세는 맑스주의 진화과정에서 이전 이데올로기론과 이후 이데올로기론을 구분짓는 변곡점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맑스부터 68혁명 때까지 전개된 맑스주의는 범박하게 표현하자면 근대적 주체가 지녔으리라고 사려되는 보편적 이성에 대한 신뢰를 밑에 깔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근대정신에 기반한 맑스주의는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와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대변되는 이론적 혼종성으로 인해 그 약발이 예전만 못하고,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탈주체적 사유를 내적 동력으로 내세우는 새로운 맑시즘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 도화선이 되었던 인물이 바로 알튀세였다. 그가 던진 패는 맑스주의 안에서 맑스주의 이론을 수정하고 쇄신하려는 시도들 중 사실상 마지막 카드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 과정에서 알튀세는 항상 현실적 문제의식 위에 자신의 사유를 위치시키려 했던 사상가였고, 이후 등장하는 많은 후학들에게 현실에 적합한 철학적.정치적 문제의식과 그에 걸맞는 비판적 무기와 이슈가 될만한 개념들을 지적 유산으로 남긴 20세기 맑시즘의 마지막 거목이었다. 알튀세로부터 바디우, 랑시에르, 발리바르가 나왔고, 지젝 역시 알튀세의 이데올로기론에 자극을 받아 본인의 이데올로기론을 예각화시킨 경우다. 둘은 공히 라깡의 이론을 교집합으로 삼고 각자의 이데올로기론을 전개시키고 있다. 하지만, 알튀세가 라깡의 초기이론에 근거한다면, 지젝이 관심하는 부분은 라깡의 후기이론이라는 점에서 양자간에는 분명한 간극과 갈등이 상존한다.

알튀세를 통해 바라본 맑스주의 논쟁사

앞서도 언급했듯이 알튀세는 맑스주의 전개과정에서 독특한 지점에 위치한다. ‘양날의 칼’과 같은 존재라고 할까? 여전히 스탈린적 교조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소련의 정통 맑스-레닌주의를 향해서도, 이에 대한 반론으로 등장하는 서구 맑시즘, 소위 휴머니즘적인 맑시즘에 대해서도 알튀세는 동일한 비판을 가한다. 이를 통해 알튀세가 궁극적으로 제시하고자 했던 맑시즘은 ‘탈향(脫鄕)적 맑스주의’ 내지 ‘반목적론적 맑스주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알튀세적인 의미에서 역사란 하나의 원형으로 환원불가능하고, 하나의 목적으로도 통분불가능한, 오히려 아이러니컬하게도 反-역사적 시각을 가질 때야 비로소 그것의 전체적인 조망이 확보되는 그런 역사이다. 이를 위해 알튀세는 우선, 근대(성)의 획득이라 할 수 있는 주의(主意)주의, 진화론적 역사주의, 인간주의로부터 과감히 결렬한다.
이러한 시도들을 통해 알튀세가 노렸던 바는 분명하다. 우선은 헤겔이 완성한 근대철학의 주체론에 대한 비판이었고, 그 연후에는 헤겔과 맑스의 연결고리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이런 차원에서 알튀세는 유명한 “맑스로 돌아가자!”라는 구호를 제창하는데, 여기서 돌아갈 맑스는 헤겔의 영향 아래에 있었던 맑스, 즉 <1884 경제철학수고>를 썼던 당시 청년 맑스가 아니다. 우리가 돌아갈 맑스는 <자본론>을 쓴 성숙한 맑스, 즉 헤겔주의에 오염되지 않은 맑스이다.
자본주의 전개과정에서 발생하는 주체의 역할, 즉 ‘우리는 왜, 무엇 때문에, 어떻게 투쟁을 해야 하는가?’ 에 대한 논의는 엄격히 말해 맑스가 썼던 <자본론>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맑스는 <자본론>에서 주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상품분석, 교환가치, 잉여가치, 노동의 사회적 성격 등 자본주의 운동법칙에 대해서만 이야기 했을 뿐이다. 맑스는 오히려 역사적 변혁의 주체로서의 개인보다는 체계(구조)에 우위를 두고 과학적으로 전체를 분석하려 했던 인물이었다. 알튀세는 이런 맑스, 즉 휴머니스트 맑스가 아닌 사이언티스트 맑스에 방점을 두었고, 이를 위해 라깡의 구조주의적 정신분석학과 공모한다.
이러한 알튀세를 향해 휴머니즘적인 맑시스트 루카치는 ‘자본주의 운동법칙에 대한 천착도 중요하지만, 그 법칙을 변형시킬 전망과 비젼이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닌가?’ 반문한다. 그런 다음  루카치는 알튀세와는 반대로 <1884 경제철학수고>로 돌아가자고 제안한다. 맑스가 이 책에서 주체의 의지와 실천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루카치는 알튀세와는 다르게 휴머니스트 맑스를 주장하면서, <1884 경제철학수고>를 쓴 청년 맑스와 <자본론>을 쓴 성숙한 맑스가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하지만, 알튀세는 바슐라르가 썼던 “인식론적인 단절”이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헤겔주의에 경도되었던 청년 맑스와 헤겔로부터 벗어난 성숙한 맑스를 서로 다른 맑스로 간주한다.
이상의 논의에서 보이듯 알튀세는 소련식 스탈린주의로 상징되는 공식적 맑스주의와 대결했을 뿐 아니라, 비공식적 맑스주의 (서구맑스즘 혹은 휴머니즘적 맑시즘) 진영과도 거리를 두었다. 그는 ‘전환시대의 맑시즘?’이라는 문제의식 속에서, ‘무엇이 맑스주의인가?’라는 질문에 정직하고 치열하게 온몸을 던져 답하려 했던 우리시대 사상가였고, 그 정신적 가위눌림으로 인해 (진짜로)미쳐버릴 수 밖에 없었던 비운의 사상가였다.  

에필로그

맑스주의의 과학성을 재건하려는 알튀세의 노력은 무의식을 구조로 파악한 라깡의 초기이론(상상계-상징계)에 기대면서 전개되었고, 그 흐름속에서 알튀세는 본인의 이데올로기론, 즉 이데올로기의 호명이론을 고안하였다. 하지만, 알튀세의 이데올로기론은 이론 자체의 정합성보다는 그것으로 인한 파장 때문에 더 유명해진 케이스다. 실례로 알튀세와 동시대 혹은 이후에 등장하는 맑스주의자들, 예를 들어, 데리다, 바디우, 랑시에르, 발리바르, 지젝, 라클라우와 무페 등이 맑스주의의 현재성에 대한 논의를 알튀세에 대한 계승과 극복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점만 보아도 알튀세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이 어떤 관점과 얼마만한 간격에서 알튀세를 받아들이고, 어느 지점에서 알튀세와 결별하는지를 따지는 것이 현대 맑시즘의 경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알튀세의 이데올로기론은 흠모의 대상이자 동시에 ‘공공의 적’이다. 그 한 가운데 지젝이 있다.

(다음 웹진에서 알튀세의 이데올로기론과 지젝이데올로기론 사이의 차이를 밝히면서 지젝의 실재개념으로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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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상철
    2013.03.12 23:4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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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젝이 경희대에 온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 불온하다는(?) 철학자가 이제는 과다노출에 벌금을 때리겠다고 선언하기까지 이른(그냥 빨갱이라고 하지), 온통 '불온'히스테리에 젖어있는 땅으로 환영을 받으며 들어가네요. 지젝이 불온한 철학자가 맞는지? 아니면, 한국사회는 그 어떠한 불온에도 흔들림없는 안전한 사회는 아닐런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백년동안 '불온'이라는 단어는 어쩜 이리도 강력히 작동하는지? 갑자기 '볼온'이라는 말이 옆집 똥개 처럼 느껴지네요.
  2. 2013.03.21 08:39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다행히도 그들은 지젝이 누구인지 모르는 걸 겁니다.

매트릭스

오종희
(본 연구소 회원, 한백교회 교인)

 

생면부지의 사람들끼리 어깨를 맞대고 줄맞추듯 앉은 지하철에서 한 남자가
음악 CD를 판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추억의 팝송이란다.
능숙하게 CD기를 돌려 맛보기 음악을 틀며 아줌마 아저씨들의 구매욕을 흔들어본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러브미 텐더... 페티 페이지의 아이 웬트 유어 웨딩.... 이글스의 호텔 켈리포니아” ...
제법 어색하지 않은 발음이다. 발음뿐만 아니라 정돈된 얼굴, 날선 옷매무새며 마치 화이트 칼라 같다.  그러고 보니 지하철에서 파는 물건 중 음악 CD 품목을 파는 사람들이 - 조금 낯간지러운 표현이지만 - 가장 세련됐다. 아니, 가장 낫다. 아니 가장 덜 가난해 보인다.   다용도 채칼을 파는 사람보다 찍찍이 복대를 파는 사람들보다 좀 낫다. 단가도 좀 세고...
그렇다 해도 저 남자는 나가도 너무 나갔다.
그런데 단속 대상인 저 멀쩡한 장사꾼이, 유난히 화이트칼라 같은 저 장사꾼이 사람 마음을 우울하고 불안하게 만든다.
차라리 그가 지하철에서 물건을 팔정도의, 딱 그 정도의 외모였다면, 그 계층에 걸 맞는 가난한 얼굴이었다면 마치 그 상황이 순리인양 넘어갔을 텐데 기대치보다 멀쩡한 모습에서 그 사람과 나의 경제적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음을 자꾸만 상기 시켜준다.

중간이 사라져가는 한국 사회에서 계층 추락의 불안은 계층 상승의 욕구 보다 훨씬 현실적이다. 또한 지하철 판매상과 가난한 얼굴을 등치시키는 내 미학적 관점은 분명 사회가 학습시킨 관리자의 언어리라!
그 언어에서 조금만 벗어나는 상황이 생기자 견고하였던 상황 속의 인물도 그걸 바라보는 나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내가 기대하던 지하철 판매상의 가난한 얼굴은 자연이 아니다.
내가 상상하던 계층 추락의 불안한 현실도 자연이 아니다.
필경 누군가의 매트릭스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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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아카데미 탈/2013년 겨울봄 강독 모임

[1] 초기 그리스도교 사회사 공부 모임

함께 읽을 책: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회사: 고대 지중해 세계의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에케하르트 슈테게만볼프강 슈테게만 지음, 손성현 김판임 옮김; 동연출판사 2009)

책임도우미: 김진호(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참가비 : 1회당 5,000

일정: 2012219~ 611, 매주 화 pm. 7:30~10:00

219

1

1세기 지중해 연안의 경제와 사회

서문 & 1

23~42

2 26

2

43~100

305

3

101~167

312

휴가

 

3 19

2

이스라엘에서 유대교의 사회사, 그리고 예수 따름

서론 & 4

171~211

3 26

5

212~227

402

6

228~302

4 09

7

303~354

4 16

8

355~396

4 23

휴가

4 30

3

로마제국 도시 안에 있던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의 사회사

서문 & 9

399~454

507

10

455~498

5 14

11

499~565

5 21

휴가

528

4

지중해 세계와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여성의 사회적 역할과 사회적 상황

서문 & 12

569~593

604

13& 14

594~639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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