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의 내재화, 그 순박한 열정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40년쯤 전 시리아-이스라엘 연합군의 침공으로 유다국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다.[각주:1]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궁중모반까지 일어났다.[각주:2] 영토는 예루살렘과 그 남쪽 일부만 남았고, 국론은 분열될 대로 분열된 상황이었다. 그때 아하스 왕은 소름끼치도록 냉정한 결정을 내린다. 아들을 제물로 바치기로 한 것이다. 도성 남서쪽의 힌놈의 아들 골짜기 도벳의 성소에서 아들을 불태우는 제사를 지낸 것이다.

"Ahaz the King of Judah" by Otto Elliger (18c 초) 아하스 왕은 재물로 불타고 있는 아들을 보며 절규하고 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아시리아 제국의 디글랏빌레셀 3세가 쳐들어와 다마스커스를 멸망시키고 이스라엘국도 재기불능의 상황으로 만들어버렸다. 이것은 유다국 백성에게 아하스의 피눈물 흘리는 제사를 야훼께서 들어준 사건으로 기억되었다.
그것만이 아니다. 이제 유다국은 전례 없는 초고속 번영을 이룩하게 되었다. 아시리아의 침공을 당한 나라들로부터 대거 유민들이 남하한 결과, 산지인데다 척박하여 인구가 적었던 유다국 영토에 새로운 마을들이 속속 건설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새로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수백 개의 주거지가 발굴되었고, 도성인 예루살렘의 크기도 15배 이상 늘어났으며, 도성의 인구도 그만큼 증가했다. 하여 이들이 바친 공납물로 왕실 창고가 가득 차게 되었고, 유다국은 번영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또한 아시리아의 침공으로 무력화된 블레셋 영토였던 서부 평야지대로 영토가 확장되어 식량생산이 비약적으로 불어났고, 소읍이던 라기스 성은 예루살렘에 필적하는 도시로 발돋음했다. 또 산악지대에서 생산된 올리브를 압착시켜 추출한 기름을 이집트와 아시리아로 수출하는 등 국제무역도 크게 증대하였다. 이제 유다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팔레스티나의 신흥 강대국 반열에 진입하게 되었다.
백성들은 아하스를 칭송했다. 아하스는 유다국의 진정한 군주로 떠받들어졌고, 아하스적 신앙은 많은 이들의 모방의 대상이 되었다.[각주:3]
한데 아하스 시대의 국가의 번영은 동시에 사회의 위기를 내포하고 있었다. 시골에서 대규모 땅을 소유한 부자들이 등장했고, 땅을 상실한 몰락농민들 또한 속출했다. 조정에는 이들 부자들의 대표들이 관료로 들어와 대지주들의 농민들에 대한 무분별한 착취를 두둔하는 정치를 폈고, 농민들의 희생을 대가로 하는 국가의 성공 정책을 추구했다.
그럼에도 대다수 백성들은 아하스를 칭송했던 것이다. 대지주들 또한 왕을 열렬히 환호했다. 대도시의 시민들과 시골 농민 대다수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도 지역의 성소들이 대지주들에게 장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성소들의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은 대지주들이 낸 기부금으로 생계를 유지했고, 이들 지주들이 낸 제물 덕에 제사도 드릴 수 있었다. 지역의 성소들은 얼마나 화려하고 풍성한 제물로 제사를 드릴 수 있느냐에 따라 위상이 결정되었고 인근의 작은 마을들의 성소를 복속시키는 유력 성소가 될 수 있었기에 대지주들의 기부능력에 점점 의존적이게 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성소의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의 위계질서도 만들어졌다.
또한 성소에서 드린 풍성한 제물은 그 지역에 대한 신의 돌봄의 정도를 결정짓는다고 믿어졌기에 백성들은 자신들의 행운이 대지주들의 기부 덕이라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여기에는 그런 식으로 신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예언자들과 사제들의 역할이 지대했다.
채 10년도 안 되는 시간이었다. 그 사이 유다사회는 번영의 기틀을 마련했고, 사회 전 영역에서 빈부격차가 크게 벌어지기 시작했으며 대지주들로 구성된 기득권 집단의 보수주의적 체제가 형성되었다. 이것은 강자 독식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아이러니한 것은 그 체제가 백성의 열렬한 지지를 기반으로 하는 체제였다는 점이다.
히스기야 왕이 아하스를 승계했다. 그런데 새 왕은 왕실을 위협하는 세력으로까지 성장한 기득권세력을 견제하면서 왕실 중심적 개혁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그것은 기득권세력과 연동하여 지배체제를 구축했던 선왕의 정책과는 대비되는 것이었다. 한데 공교롭게도 이 개혁의 기반은 선왕이 구축한 풍요한 왕실재정이었다.[각주:4]
히스기야의 개혁은 농민들의 몰락을 막는 조치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야 왕실을 좌지우지하는 대지주들의 세력을 약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하여 왕실의 개혁이 친 서민정책과 맞물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조치들을 백성은 제대로 알 길이 없었다. 중앙의 메시지가 백성에게 전달되는 주된 통로는 지역 성소들인데, 이곳의 사제들과 예언자들은 그것이 야훼의 노여움을 사서 결국 나라를 망치게 할 것이라고 호도했다.[각주:5]
하여 히스기야의 개혁이 성공하려면 백성을 왕실의 지지세력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암하아레츠’, 즉 민중적 농민정치세력이 개혁세력에 가담했다.[각주:6] 그리고 조정에도 귀족출신임에도 개혁을 지지하는 신주류 인사들도 있었다. 하지만 시골의 대다수 농민들은 여전히 아하스와 그 시절 형성된 구 지배엘리트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던 것이다. 해서 왕실의 개혁은 지역 성소들을 철거하지 않으면 불가능했다. 이것이 히스기야-요시아 개혁이 지역 성소들을 철거하려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했던 주된 이유다.
그러나 히스기야의 29년간의 재위기간 중 후반기는 아시리아의 침공으로 개혁의 기반이 송두리째 붕괴된 시기였다. 서부 평야지대는 인구가 70%나 줄었고 마을 수는 85%나 사라지고 말았다. 하여 왕실재정은 고갈됐고 그 와중에도 엄청난 전쟁 배상금을 치러야 했다.
그리고 왕이 죽자 무려 55년간이나 재위에 있었던[각주:7] 왕 므낫세가 즉위한다. 그리고 이 왕은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히스기야의 개혁 흔적들을 무자비하게 파괴하였다. 이때 므낫세의 정치는 아하스의 방식을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다시 대지주 중심의 체제를 만드는 것이다.

자식들은 땔감을 줍고, 아버지들은 불을 피우고, 어머니들은 ‘하늘 여신’에게 줄 빵을 만들려고 가루로 반죽을 하고 있다. 또 그들은 나의 노를 격동시키려고, 다른 신들에게 술을 부어 바친다. ―「이사야서」 7,18 (작은 따음표는 인용자가 붙인 것임)

이 구절은 므낫세 시대의 강도 높은 반개혁 현상에 관한 하나의 유의미한 특징을 시사하고 있다. 여기에는 한 평민 가족이 벌이는 가족 제사 장면이 스케치되어 있다. 본문에서 ‘하늘 여신’이란 아스다롯(Ashtaroth)을 말한다. 금성의 신으로 이 시기에 아세라(Asherah)를 대신해서 야훼 신의 부인으로 신앙되던 여신이다. 원래 이 여신은 아시리아의 폭풍우의 신 아닷(Adad)의 부인이다. 즉 아시리아가 지배하던 므낫세 치하의 유다국에서 아닷 신과 야훼가 동일시되면서 아스다롯 여신이 야훼 신의 부인으로 숭배되고 있는 것이다. 한데 이 아닷의 별칭이 멜렉이다. 이하스가 아들을 바친 바로 그 신의 이름말이다.[각주:8] 즉 아하스를 칭송한 백성의 신앙이 므낫세의 반개혁의 기틀이었다는 얘기다.

므낫세는 부왕 히스기야의 개혁 세력을 말살하고자 했다.


묘하게도 역사는 되풀이되고 있다. 독일의 저 유명한 <슈피겔>지(Der Spiegel)는 이번 대선을 “독재자의 딸이 인권운동가를 이기다”(Diktatoren-Tochter schlägt Menschenrechtler)라는 카피로 소개하였다. 이런 결과의 이면에는 지배연합을 지지한 무수한 대중이 있었다. 더구나 그 독재의 시대를 살았던 세대에서 압도적인 지지가 나왔다. 또한 지난 MB 정부를 거치면서 기득권세력에게 바닥까지 털려버린 서민층에게서도 대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렇다면 대중은 독재를 갈망하는 것일까? 확신컨대 그렇다고 대답할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심지어 독재자의 딸도 독재자가 아닐지 모른다. 또한 나의 소견으로는 그녀가 독재자가 되려는 의지가 있다고 해도 지금의 사회적 여건으로는 독재정부가 등장하기란 쉽지 않다. 가장 강력한 기득권 세력인 거대자본들조차 독재정부가 자신들의 이해에 유리하지 않다고 볼 것이기 때문이다. 또 군사쿠데타를 일으킬 정치화된 강력한 군부세력도 없다. 미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메이저 보수언론들이나 법률권력, 그리고 보수지식인들도 통제받지 않는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그러면 <슈피겔>의 카피는 단지 과거사를 들먹이는 야유에 불과한 것일까? 나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독재정부는 불가능할지라도 이번 선거는 대중의 독재정치에 대한 무의식적 욕망을 가득 품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선거 직후 도처에서 보복이 횡행한다. 한진중공업의 자살한 해고노동자도 그런 보복의 희생자였다. 또 다시 징계를 당한 복직 교사들도 마찬가지다. MBC 노조원들에 대한 무더기 징계도 그렇다. 무수한 영역에서 힘을 남용하는 법률적 혹은 탈법적 폭력들이 속출하고 있다. 일인치하의 독재자는 없지만 무수한 독재자들이 법률적 혹은 탈법적 힘을 남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것을 문제로 보았던 민주주의적이고 인권적인 감수성이 퇴조된 현상이 시민사회에서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아하스에 대한 대중의 열망이 반개혁적 폭력의 체제를 만들어냈던 것처럼, 발전국가 한국을 이룩한 독재자에 대한 대중의 갈망도 민주화 이후 겨우겨우 세워가던 인권의 질서를 곳곳에서 산산이 부수어버리는 결과를 낳고 있다. 대중은 독재의 영성에 취해 버렸다. 독재자가 보여주었던 힘에 대한 그 순박한 열정이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기원전 735~734년 경 시리아-팔레스티나의 패권국은 다마스커스를 거점으로 하여 르신 대왕이 다스리던 아람국이었다. 르신(Rezin)은 이스라엘의 베가(Pekah) 왕과 더불어 아시리아 제국의 침공을 막는 시리아-팔레스티나 군사동맹을 주도했다. 한데 이 동맹에 동참하지 않는 소국들 중 아하스(Ahaz) 치하의 유다국이 있었다. 이에 르신-베가 왕이 이끄는 연합군이 유다국을 침공하였다. 이 연합군은 유다국을 거의 멸망 직전까지 몰아갔으나 아시리아의 디글랏빌레셀 3세(Tiglath-pileser III)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철군하였다(기원전 734~732). 본문에서 “40년 전”이라는 표현의 시점은 히스기야 왕이 죽고 므낫세 왕이 반개혁 정책을 펴는 어느 시기를 가리킨다. 즉 이 시점은 반개혁의 시간을 상징한다. 그 시점에서 40년 전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으로]
  2. 「이사야서」 7,6에 따르면 다브엘의 아들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궁중모반 사건이 시사되고 있다. [본문으로]
  3. 히스기야-요시아 정부가 자식을 재물로 바치는 제사를 우상숭배로 몰아치는 담론을 적극적으로 유포시킨 것은 아하스 왕의 지지세력을 견제하려는 취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여기서 박정희를 연상하고 있다. 아하스와 박정희, 이 두 인물은 무에서 유를 창출한 인물로 국력을 크게 신장시킨 장본인이다. 동시에 이 둘은 그 성공을 위해 누군가의 희생을 필요로 했던, 아니 적극적으로 그 희생을 활용했던 통치자였다. 그럼에도 백성/국민은 그이들을 칭송해 마지 않았다. [본문으로]
  4. 현대의 많은 국가들의 민주화를 연구한, 폴란드 출신 미국의 정치학자 아담 쉐보르스키(Adam Przeworski)의 가설에 따르면, 사회의 경제적 성장은 그 사회를 민주화로 이행하게 하는 주된 요인이다. 그 경우 전(前) 민주주의적 체제가 축적해 놓은 경제적 기반은 민주화를 위한 제도적 비용으로 활용된다. 한데 흥미롭게도 고대국가인 히스기야의 민중주의적 개혁도 아하스의 귀족주의적 국가가 이룩한 재원을 기반으로 해서 실행될 수 있었다. [본문으로]
  5. 마치 우리사회에서 주류 언론들이 복지가 국가를 망치게 할 것이라고 호도하는 것처럼 말이다. [본문으로]
  6. 고대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사용된 ‘암하아레츠’에 대한 용례 연구에 따르면 이들은 농민 일반을 지칭한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농경사회가 지역의 대지주에게 예속되어 있으니 이들을 지방토호세력으로 해석했던 종례의 관점도 어느 정도 타당하다. 하지만 「열왕기」에 몇 차례 등장하는 이 용어는 위의 농민 일반을 지칭한다는 용례 해석과는 다르다. 이들은 유다국의 정변 상황에서 등장하며 특히 요시아 개혁의 중심세력의 하나로 묘사된다. 그러므로 「열왕기」의 암하아레츠는 정치화된 농민개혁세력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7. 유다국은 물론이고 이스라엘국, 그리고 오랜 식민지를 거친 뒤 수백 년 만에 건국한 하스모니아 왕국이나 헤롯 왕국에도 이렇게 긴 시간을 왕으로 재임한 이는 없었다. [본문으로]
  8. “그는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the Valley of Ben Hinnom)에 있는 도벳(Tophet)을 부정한 곳으로 만들어, 어떤 사람도 거기에서 자녀들을 몰렉에게 불태워 바치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또 그는, 유다의 왕들이 주님의 성전 어귀, 곧 나단멜렉 내시의 집 옆에 있는, 태양신을 섬기려고 하여 만든 말의 동상을 헐어 버리고, 태양수레도 불태워 버렸다.”(「열왕기하」 23,10~11) 이 구절에서 요시아 왕은 아하스의 제사를 바벨로니아 지역에서 유래였고 암몬의 주신(主神)이기도 한 불의 신 ‘몰렉’ 제사로 해석하면서 우상숭배로 규정한다. 한데 그 다음 구절에서 이것을 ‘나단멜렉’(Nathan-melech)이라는 인물과 연계시키고 있다. ‘멜렉’은 「열왕기하」 17,31에 나오는, 불에 태운 인신재물을 받는 스발와임(Sepharvaim, 아시리아의 지명)의 신 아드람멜렉(Adram-melech)과 관련된 구절로 보인다. 즉 나단멜렉은 아시리아의 아드람멜렉 신과 관련이 있는 아시리아의 내시인 것이다. 여기서 아드람은 아닷 신(Adat)을 가리킨다. 즉 멜렉은 이 시기에 아닷을 가리키는 호칭인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요시아 왕실은 이 구절을 통해 말렉을 몰렉(Molech)과 동일시하면서 말렉에 대한 모독을 꾀하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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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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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3.29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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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늙은 민중신학자의 편지(II)[각주:1]

: 민중신학의 위기론에 부쳐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 과정)

 

<지난 51호 웹진에 이어>

IV

형. 이 대목에서 부정성에 입각한 민중신학의 윤리학에 대한 논의로 넘어가기에 앞서, ‘부정의 변증법’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예전에 수없이 나누었던 변증법 관련 대화들은 결국 ‘유한과 무한의 대립이 어떻게 종합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을 둘러싼 공방이었습니다. 헤겔은 이 대립을 철폐하면서 논리적 일치성을 향해 치달았고, 결국 모든 것의 차이를 무화시키는 일원론(ex, 절대정신)으로 자신의 주장을 마무리합니다. 이것이 헤겔식 변증법의 정의라 한다면 너무 조야한가요? 
헤겔과 동시대에 살았던 키에르케고르는 헤겔적인 변증법에 대한 최초의 반항아였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높은 단계에서 종합되는 헤겔의 ‘전체성의 변증법’에 맞서 본인 특유의 ‘실존의 변증법’을 고안합니다. ‘진리의 내용이 무엇이다’라는 논증보다는, ‘그 진리에 내가 어떻게 도달했고, 그 진리가 어떻게 내게 역사하는가?’를 묻는 것이 더 옳은 관전 포인트가 아니냐며, 헤겔을 물고 늘어진 것이죠.
예를 들어, 성육신, 즉 신이 인간이 된 사건을 설명한다고 하면서, 헤겔은 신과 인간의 대립을 너무나 서둘러 봉합한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독교의 진리는 헤겔식 변증법의 논리와는 달리, 신과 인간사이의 간격(대립)이 여전히 유지되면서, 그 차이를 고스란히 느끼고 고민하는 가운데, 그 역설과 간격을 통해 유지되는 것이 아닐런지요? 키에르 케고르는 바로 이점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기독교의 진리는 우리 실존에서 절대적으로 역설과 간극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결국,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 진리란 헤겔식의 거대하고 종합화된 ‘내용(What)’보다는 구체적 실존의 ‘어떻게(How)’를 통해 결정되는 것이었습니다.
키에르케고르에 의해 헤겔의 변증법이 한차례 의심의 대상이 되긴 하였으나, 막 일시 시작한 서구 근대의 진보적 사관과 낙관적 사고는 18세기 말부터 시작되어 19세기를 풍미하였습니다. 그리고 헤겔식의 종합과 체계와 전체의 변증법은 이런 세계사를 움직이는 힘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세기 말에 니체와 맑스, 그리고 프로이트가 등장하여 그 질주에 제동을 걸긴 했지만, 아마도 헤겔 변증법에 대놓고 딴지를 걸었던 사람은 아도르노가 아닐까 싶군요.
그는 프랑트푸르트 학파의 탄생을 알린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쓴 기념비적인 작품인 <계몽의 변증법>과 더불어 <부정의 변증법>을 세상에 내놓으며 헤겔 변증법의 균열을 직시합니다.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죠. 그는 종전 후에도 계속 이 문제에 매달렸고, 최종적으로 아우슈비츠의 비극은 히틀러의 광기가 아니라, 근대적 이성이 쌓아올린 동일성의 논리가 그 원인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는 이러한 본인의 주장을 파리의 콜레쥬 드 프랑스에서 행한 강연들을 통해 밝혔고, 그 강의들이 모아져 나온 책이 바로 <부정의 변증법>(1966)입니다.

 

V

<부정의 변증법>에서 아도르노는 변증법이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정-반-합’의 도식을 따라 어떤 사태나 현상에 대한 해결로 나가는 법칙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보편성과 동일성을 요구하는 모든 방법들에 대한 저항과 대립을 의미하는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각주:2] 특별히, 아도르노는 인식론적 영역에서 벌어지는 동일성의 법칙이 실질적인 삶에서 작동되는 자본주의 교환시스템에 대해 예리한 비판을 가합니다. 동일성의 원칙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교환가치로 전환되어 인간의 주체성을 물화된 형식으로 치환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 입니다. 이곳 시카고에는 매일 새벽마다 인력시장이 섭니다. 어쩌다 새벽기도 가다 길을 잘 못 들어 그 곳을 지나치다 보면,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누군가의 선택을 기다리며 삼삼오오 공원주변으로 모여드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멘트 할 줄 아는 사람 4명!” 하면서 차량 한대가 그들 앞에 멈춰서면 열 댓 명의 사람들이 손을 급하게 흔들며 자신의 의지를 표명합니다. 그 상황에서는 마이클이 가도 되고, 호세가 가도 됩니다. 물론 나 이상철이 가도 되고, 김진호 목사도 가능합니다. 그 누구든 상관없습니다. 시멘트를 할 줄 아는 건장한 남자라면 말입니다. 이때 호세, 마이클, 이상철, 김진호는 서로 교환 가능합니다. 아니, 이 네 명만이 아니라, 시멘트를 할 줄 아는 신체 건강한 남자 모두는 이 교환 시스템의 일원이 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모든 개별존재자들을 거의 예외 없이 100% 돈으로 교환할 수 있는 원칙입니다. 그것은 서구 근대이성이 이룩한 동일성 원칙의 결정판입니다. 이 법칙하에서는 인간과 사물 사이의 질적 차이가 없습니다. 교환가치로 매개된 노동자와 자본가, 그리고 이 시스템을 뒷바침하는 부르주아 사회장치는 각각의 존재가 지니는 질적인 차이와 다름을 물화된 공동성으로 탈바꿈 시켰습니다.
<부정의 변증법>에서 아도르노가 비판하고 있는 대목이 바로 이점입니다. 동일성의 원칙에 의해 억압당한 단독자 혹은 비개념적인 것들, 특수하고 예외적인 것들, 셈해지지 않는 것들, 혹은 셈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 그것들은 역사에서 고아와 과부였고, 여성이었고, 장애인이었고, 이교도들이었고, 흑인이었고, 유대인이었고, 제3세계 민중이었고, 불법이민자들이었고, 빨갱이었고, 그리고 동성애자들었습니다. 그들에 대한 해방을 위한 전략이 아도르노에게 있어서는 <부정의 변증법>이었던 셈이죠.
흔히, 서구사상(신학 포함)은 아우슈비츠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할 만큼, 아우슈비츠가 서구사회에 던진 파장은 엄청났습니다. 전후 대륙 철학을 휩쓸고 있는 프랑스의 실존주의, 구조주의, 포스트모던 철학, 해체주의 등은 기본적으로 동일성에 기반한 서구정신 전반에 대한 부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프랑스의 해체의 철학자들이 등장하기 전에 이미 아도르노에 의해 우리는 이러한 전조를 맛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정의 변증법>이 지닌 미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해체를 말하고, 부정을 언급하는 것일까요? 이 대목에서 ‘위기담론’에 대한 내용으로 화제를 전환할까 합니다. 그와 동시에 ‘민중신학의 위기론’에 대한 생각과 위기의 시대에 대응하는 ‘민중신학적 윤리’를 다루면서 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VI

프랑스 철학자들이 해체를 말하고, 아도르노가 ‘부정의 변증법’을 말하는 이유는 한마디로 현대 사회가 ‘위기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진보에 대한 신념과 신기루로부터 출항한 근대! 그곳의 사람들은, ‘비록 지금 우리에게 약간의 혼돈과 동요가 있지만, 저 지평선 너머에는 어김없이 찬란한 미래가 있다’는 환상에 휩싸였던 족속들이었습니다. 하지만, 20세기 초에 발생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유토피아를 향했던 동경은 미래에 대한 공포와 허무와 위기로 전환되었습니다. 바야흐로 본격적으로 위기사회가 도래한 셈이죠. 2차 대전 후 확립된 미.소의 냉전체제와 그 구도 밑에서 전개되는 핵무기 경쟁도 이러한 위기담론을 급하게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고전적 위기의식이라면, 지금부터 말하는 부분은 현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새로운 버젼의 위기의식일 것입니다.
20세기 말을 휩쓴 냉전체제의 붕괴는 우리에게 다른 차원의 위기를 선사하였습니다. 현실의 모순과 역설을 봉합하려 했던 이데올로기의 역할이 공식적으로 수명을 다한 것입니다. 사회주의의 붕괴는 세상의 변혁과 인류의 진보를 낙관하고 믿고 의지하였던 많은 사람들을 광장으로부터 떠나가게 했습니다.  텅 빈 광장을 바라보고 그 광장의 부활이 요원하다는 현실을 직시하기까지, 동시에 우리에게 새로운 차원의 위기가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데까지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던 것으로 회고됩니다. 그 무렵부터 쏟아지기 시작된 온갖 종류의 위기담론은 이제 우리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물론, 민중신학도 그 예외는 아닙니다.
진화생물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이 다른 동물들보다 발달한 것이 위기본능이라고 합니다. 위기를 예감하고 그 위기에 대처하면서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였고 물리적으로 우세한 다른 종들을 지배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위기의식은 인간이 삶을 영위하고 종족을 보존시키고 문명을 이룩해가는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불가결한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펼쳐지는 위기담론은 진화생물학자들이 말하는 그것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 위기의 요체는 우리 삶의 구조와 방식이 인간의 통제와 예측이 통하지 않는 강력한 자본의 자기장안에서 형성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또한 우리가 만든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인간이 교환가치로 전락되어 개별적이고 단독적인 인간가치가 셈해지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어둡고 몽매했던 중세의 어둠을 비추던 한 줄기 이성의 빛, 그것으로 인해 인간은 어둠의 터널을 벗어나 자유와 번영을 구가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빛은 주인의 손을 벗어난 통제가 안 되는 광선검이 되어 세상을 베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치 한번 가열된 원자로가 식을 때까지는 외부에서 손을 쓸 수 없는 것처럼, 현대 문명은 이미 인간의 손을 벗어났습니다. 인류역사상 가장 풍요롭고 기술의 발달한 이 시대에, 인류역사상 가장 불투명한 디스토피아적인 전망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미증유의 사태가 현 위기담론의 요체인 셈이죠. 그러므로 지금의 위기담론들은 어떤 구체적인 정황이라기 보다는, 지금까지 우리를 지켜왔고 지탱해왔던 중심들이 사라진 시대를 살아가는 주체들이 느끼는 막연한 불안 내지는 징후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 위기는 요체는 ‘우리가 의지했던 중심들이 우리가 생각하고 믿었던 그것이 아닌가 봐!’라는 황망함과도 연관됩니다. 즉 지젝식 실재(the Real)를 봐버린 후에 주체가 느끼는 트라우마 같은 것 말입니다. 밤새 달게 마셨던 바가지에 담겨 있던 그 물이 사실은 해골에 담겨져 있었던 물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원효에게 다가온 그 실재(the Real)! 물론, 원효는 그 다음 단계에서 깨달음이 와 당나라로 가던 길을 돌려 신라로 돌아갔지만, 대부분의 범인들은 어둠 속에 벨이 울리면서 다가오는, 그 동안의 믿음과 신뢰를 무너뜨리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우악스럽고 흉측한 실재 앞에서 위기를 느낍니다. 민중신학의 위기도 그와 같은 연장선상에 위치합니다. 중심의 부재와 상실, 그리고 믿었던 실재에 대한 배신, 실망 등등의 복합적인 감정들이 ‘민중신학의 위기’를 발설케 한 것이죠.

 

VII

하지만, 본디 중심이란, 데리다의 말처럼, 무엇인가 꽉 차 있어 중심이 아니라, 비어있는 공간으로, 실재하는 현실에 대한 不定으로, 반드시 도래할 그 무엇에 대한 대망으로 존재하는 중심이 아닐런지요. 그 비어있는 중심을 차지하려는 세력에 대해 성서는 ‘선악과 이후 아담’, ‘바벨의 언어’, ‘금송아지 상’ 등으로 치환하면서 맹렬히 비난합니다. 성서는 또한 신의 자기비움(필리오케)을 통해야만 드러나는 그리스도 현존을 강한 어조로 주장합니다. 중심을 잃어버려 방황하는 우리들에게 그 사라져 버린 중심의 형태와 격이 어떠해야 할런지를 성서는 비교적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민중신학이 이런 성서의 메시지에 너무나도 충실했다고 봅니다. 민중신학은 태생적으로 중심의 부재와 해체를 선언하면서 등장한 진정한 위기의 신학이었고, 그로 말미암아 본성상 주변에 위기를 선사할 수 밖에 없는 싸이렌의 음성이었습니다. 그것이 민중신학을 여전히 현재진행적인 위태로운 사건의 문법으로, 혹은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위험한 증환의 방식으로, 아니면 도래할 미래를 불러내는 유령의 언어로 남아 있게 하는 건지도 모르죠.
형. 그래서 저는 ‘민중신학의 위기’라는 말이 좋습니다. 물론, 민중신학의 위기론을 어떤 의도를 갖고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민중신학이 위기다!’라는 선전을 통해 얻어지는 반사이익으로 비어있는 중심을 차지하려는 자들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고, 민중신학의 위기론 유포를 통해 자신들의 불안과 조급증을 극복하고자 하는 세력들이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무리들을 향한 지적질과 그들과의 대결을 통해 민중신학의 외연을 확장시키고 내용을 좀 더 촘촘히 가다듬어야 하겠지요. 그러므로 ‘민중신학이 위기다!’라는 안팎에서의 걱정과 비난은 민중신학의 체질을 강화하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 봅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제가 ‘민중신학의 위기’라는 용어를 좋아하는 이유는 다른데 있습니다. ‘민중신학의 위기’라는 말은 우리 안에 있는 결핍을 확인케 하는 거울이고, 그 결핍을 메울 환상을 제공 하는 기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마치 ‘광주 민주화운동’이라는 말보다 ‘광주사태’라는 말이 더 生으로 날것으로 다가와 살 냄새가 나고 피 냄새가 나서 우리의 심장을 뛰게 하였던 것처럼, ‘광주사태’라는 말을 곱씹으며 미완으로 끝난 우리의 혁명을 상상했던 것처럼, ‘민중신학의 위기’라는 말 역시, 적어도 제게는 아직 끝나지 않은 어떤 사태를 직감하고 예감케 하는 용어입니다.
맞습니다. 민중신학은 위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민중신학은 여전히 위기 가운데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민중신학이 안전한 토대 위에서 그 위용이 전파되는 순간 이미 민중신학은 민중신학이 아닌 것이 되어버리는 까닭입니다. 민중신학을 말하면서, “민중신학은 무엇이고, 앞으로 이런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라는 선언을 물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구호는 결단코 민중신학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민중신학은 부단히 스스로를 부정적으로 해체적으로 대하면서 그 권위와 정당성이 유지되는 탈영토화된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영토화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선언되지 않고 규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민중신학이 위기’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 비난에 오히려 감사의 마음을 전해야 하리라 봅니다.      

형. 아도르노가 “진정한 깊이는 저항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말했다지요. 결국, 모든 저항은 자기 자신에 대한 저항이 아닐까라는 의미로 저는 그 말을 해석하고 싶습니다. 민중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저항이 멈추는 날, ‘민중신학의 위기’라는 말이 걷히는 날이 될 것입니다. ‘민중신학의 위기’라는 말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우리의 저항이 계속 지속되고 있다는 반증일테구요. 그럴 것입니다. Peace.  <다음 호에 계속>

 


  1. 졸고는 현재 진행중인 필자의 학위 논문 [The Turn to the Other: Minjung Theology in a Dialogue with Levinasian Ethics and Derrida’s Deconstruction Ethics]중 서론의 일부를 번역 각색한 원고입니다. 글의 제목으로 사용된 ‘어느 늙은 민중신학자’는 특정인이 아니라, 논문을 웹진 원고로 번역 각색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작중화자임을 밝힙니다. [본문으로]
  2. Theodor. Adorno, Negative Dialectics, trans. E.B. Ashton,(New York: Seabury Press, 1973), 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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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재형
    2013.05.10 14:4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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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의 글을 읽고, 많은 영감을 얻고 공감을 갖습니다. 어서 빨리 형과 함꼐 배울 그 날이 오길 기대해 봅니다. 결핍과 부정이 민중신학의 동력이고 가능성이라는 말... 깊게 되새겨봅니다.^^ 주님의 평화!!!

 

 

<지슬>을 대하는 자세

김현준
(본 연구소 회원, 연세대학교 정치학 석사)

 

영화 <지슬>을 보았습니다. 한국 민족주의의 다양한 양태에 관심 있으면서도, 고향이 제주도인 저로서는 이런 영화에 객관적이고 적절한(?) 감정을 가지기 힘들다는 자격지심에 오히려 영화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살면서 경험한 제주도의 삶과 4.3 사건 당시의 삶 역시 같다고 할 수는 없기에, 저 역시 관찰자(?)의 눈으로 영화를 보고자 했습니다.

일단 영화의 내용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스포일러 혐의를 피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제가 이 글에서 의도하는 것은 영화 소개라기보다 이런 영화를 대하는 자세 또는 방식에 대한 제 생각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만 전체적인 형식은 영화가 하나의 제의(祭儀)의 형식을 빌려 당시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참사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삶과 정치적 이념이 마주치는 현실의 모순을 드러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정도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영화는 마지막에 당시의 사상자 현황과 사건을 주도한 국가폭력과 미군정의 문제를 자막으로 명시하고 현대화된 제주 민요를 들려주며 엔딩 크레딧을 보여줍니다. 사건의 원인을 지적한 점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특히 영화로도 미처 담아내지 못한 당시의 말 못할 참상들을 고려하면 당시의 문제의 원인을 규명하고 책임소재를 찾아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분도 지적한 바와 같이, 당시의 피해자들을 아무것도 모른 채 순수하게 ‘당하는’ 사람들로만 비추었다는 사실, 제가 덧붙이자면 사건의 원인과 참상을 지나치게 미시화(가족 및 연인관계의 아픔)하고 그것의 대척점을 국가폭력이라는 추상적 대의, 또는 개인적인 욕정과 매너리즘에 가득 찬 군인들 개개인의 문제로 집약시켜놓았다는 점이 다소 안타까웠습니다. 이에 영화에도 잠간 언급된 바, (제가 사실관계는 잘 모르지만) 당시의 민병대 등 가족과 마을을 지키기 위한 거주민들의 자발적인 움직임들을 포착하고 그것에 대응하는 국가폭력의 역동적인 반응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또한 이 영화가 진짜 ‘빨갱이’와 국가 폭력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낀 채, 자신들만의 삶의 의지를 보여주는 일반 거주민들의 삶에 집중하였다면 어땠을까요? 어쩌면 폭력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든 방법을 취했던 제주도민의 ‘억척같음(? 어쩌면 야비함)’의 모습 역시 보여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만일 그랬다면 당시의 역사적 기억을 지나치게 ‘로맨스화’했다는 비판, 그리고 그것을 구실삼아 변명거리를 찾으려는 일부의 몰지각한 반응에도 적절히 반응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솔직히 제주도라는 지역은 현재는 “이어도 사나-”, “혼저옵서에” “한라봉” 정도로 표상되고, 4.3에 관련해서는 ‘대한민국 정체성’이 형성되던 시기 ‘무고한’ 양민들이 희생된 곳으로 표상되기 쉽습니다. 참고로 지금 제주도 마트에서 “지슬주세요.”라고 하면 알아들을 사람이 몇이나 될지도 궁금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끔은 ‘제주도의 삶’ 역시 ‘오리엔탈리즘’화 된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런 오리엔탈리즘을 없애기 위해 감독은 개인들의 삶에 집중했지만, 결국 개인과 (민족)국가라는 대당‘사이에 놓여있는 무언가’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과 호기심은 충족시키지 못했습니다. 갑자기 잔뜩 기대하고 샀다가 그 책에 나온 “제주 허씨”의 뜻을 알고 말 못할 거부감을 느꼈던 ‘문화유산답사기’ 베스트셀러가 떠오르기도 했고, 학부시절 “떠나요~제주도~” 노래를 부르며 “밤별 초롱초롱”을 되뇌던 친구를 불쾌하게 쳐다보았던 경험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4.3 당시 “초토화 작전”의 참사에 불구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자손으로서, 뻔뻔함을 극복하기 위해 당시의 희생자들을 어떤 식으로 추모해야 할지 고민도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학부 때 수업 과제로 자신의 연대기를 국제정치사와 연관시켜 설명하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저희 할아버지의 형제 중 종손이 4.3의 희생자였다는 사실, 저희 외할아버지가 (4.3이 일어난 당시인지는 명확하지 않은) 비슷한 시기에 제주 모 지역의 군인으로 근무했다는 사실(하지만 진압 투입 여부는 절대 모른다는 사실)을 발견한 경험이 떠올랐습니다. 이 양가적인 기억과 함께 느껴지는 감정은 그 곳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죄책감이 든다는, 어쩌면 타향의 분들은 이해하지 못할 감정이었습니다.

극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천안함 3주기’를 추모하는 새누리당의 포스터에는 “잊지 않겠다.”는 말이 적혀있었습니다. “46용사(?)”의 죽음과 유가족들의 슬픔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현실 ‘천안함’을 잊지 않는 방식을 소비하는 사람들을 떠올려 봅니다. 심지어 이 영화가 나왔을 때, ‘애국자’를 자칭하는 일부 극단적인 온라인 동호회에서 별점 테러를 했다는 사실이 떠올라 슬픔에 전율이 흐르기도 합니다. 억울하게 죽은 그들의 죽음을 잊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희생자’들을 우리들만의 방식으로 ‘희생자’ ‘용사’들로 사유해버리기 쉽습니다. 그것을 담아내는 그릇이 여전히 지난한 좌-우 논쟁 속에서도 끈적끈적하게 살아있는 국가주의적 관념이라면, 그들이 ‘우리’를 위해 희생된 수동적 주체라는 생각에 젖어버리면 그들은 영원히 우리의 관념 속에 “오리엔트”로 남아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남겨진 ‘추억’들. ‘향수’들이 각자의 마음대로, 제멋대로, 자발적으로, 지속적으로 전유될 때, 우리는 또 다른 ‘4.3’, 또 다른 ‘천안함’을 목도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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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3월 정기포럼은 다큐멘터리 영화 관람과 감독과의 대화 모임으로 갖습니다. 많은 참여 바랍니다.

 

영화 소개_

1997년 12월 18일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 영화는 대구에 살던 한 가난하고 독실한 기독교인 50대 남자(손경화 감독의 아버지)의 이야기다. 
그이를 통해 우리사회의 보수주의와 기독교 신앙이 경상도의 가난과 어떻게 서로를 규정하며 동거해 왔는지를 묻고 있다. 

 

              초청_ 손경화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                   

              일시2013년 1월 28일(월) 저녁 7:30                 

              장소_ 한백교회 안병무홀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1번과 2번 출구. 두 출구 사이 골목 50미터, 좌측 건물의 1층)

              문의_ 02-363-9190, 010-3043-5058(유승태 연구원), 

                        010-4944-2019(정용택 연구원), 3era@daum.net

              참가비_ 3천원(자료집)

 

* 손경화 감독은...
< 그 자식이 대통령 되던 날>로 서울영상위원회와 영화진흥위원회로부터 제작지원을 받는 영화로 선정되었고,

인디다큐페스티벌에서 '심사위원 특별언급'을 받았다.

이후 영화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서울인권영화제 등 다수의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손 감독의 다른 작품으로는 <개(開)청춘> 등이 있고,

<자, 이제 댄스타임>, <의자가 되는 법>을 제작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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