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 신앙 실력을 발휘해 보자

김학철
(신약학 / 연세대 신학 박사)

고등학교 때부터 친한 친구들이 아직까지 모인다. 대학을 졸업하고 공기업 연구원, 대기업 계열사 중간 간부, 공무원, 대기업 중간 간부, 방송국 PD 등 각기 자리를 잡았다.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결혼을 해서 아이를 두었다. 가족들이 종종 모이는데, 남자들만의 모임과는 달리 가족 간의 대화에서 화제는 언제나 두 가지로 모이게 된다. 하나는 ‘집’이고, 다른 하나는 ‘자녀 교육’이다. 다른 이야기들은 그 주제에 도달하기 위한 서언이고, 모임이 끝날 무렵 덕담은 그 두 가지가 잘 되기를 바라는 기원이다. 그러나 대화 내내 우리는 괴롭다. 그 두 가지 ‘문제’가 오늘 이 땅을 사는 사람들 대부분의 삶을 피폐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 삶의 과수원을 망치는 두 마리 여우의 정체가 무엇이고 그것들을 잡는 덫이 무엇이어야 하며 어디에 놓아야 하는지, 갑론을박 중에 유일하게 얻는 소득은 서로가 서로의 크고 작은 고통을 위무하고 있는 친구임을 확인하는 것뿐이다.

인간이 문명을 발달시키고 난 후 거주권과 교육권이 중요하지 않은 때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헌법도 거주에 관한 권리와 교육권을 국민의 중요한 권리를 보장한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우리가 괴로운 건 지금 우리에게 ‘집’과 ‘교육’이 단순히 거주나, 교양 및 직업 지식을 얻기 위한 교육 이상인 데에 있다. 어쩌면 그것들은 우리 삶의 포도원을 망치는 ‘여우’, 그래서 몽둥이를 들고 잡을 수 있을 훼방꾼의 수준을 넘어선 것 같다. 그 둘은 이른바 물신화되었다. ‘집’과 ‘교육’은 일종의 신이 되어 사람들에게 자신을 숭배하라고 말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가나안의 바알과 아세라가 오늘 우리에게 ‘집’과 ‘교육’으로 모습을 바꾸어 나타난 듯 싶다.
 
바알은 우뢰와 비를 주관하며 자기의 짝신인 아세라와 함께 풍요와 다산을 약속한다. 숭배자들은 그 복을 얻기 위해서 지극한 제사로 바알과 아세라를 섬겨야 한다. 그러나 바알과 아세라는 우상일 뿐이다. 그것이 우상인 까닭은 그것 자체가 그저 상상물일 따름이며 따라서 약속을 실행해 줄 능력도 없고, 그들이 요구하는 제사가 과하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집’과 ‘교육’도 이와 비슷하다. 그 둘은 우리에게 달콤한 약속을 한다. 집은 안정과 여유와 안락을, 교육은 그것에 이를 수 있는 길이자 탁월함 및 명예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 둘은 바알과 아세라처럼 우상일 뿐이다. 그들의 약속은 빈 것이고, 그 헛된 약속에 도달하기 위해 지내야 할 제사는 우리의 삶을 망칠만큼 파괴적이다. 문득 아합 왕 때 갈멜 산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내리기를 바라면서 바알과 아세라에게 제사를 지내던 바알 선지자 4백 명과 아세라 선지자 4백 5십 명의 제사 광경에 대한 묘사가 떠오른다. 소를 재물로 삼고 아침부터 부르짖는 그들은 제단을 돌면서 춤을 추고 칼과 창으로 피가 흐르도록 자기 몸을 찔러 대면서 미친 듯이 날뛴다. 그러나 불은 내리지 않았다. 그 광경의 현대적 소프트코어 버전은 영화 <즐거운 인생>에서 자식을 조기 유학 보내고 사무실 한 켠에서 라면을 먹으며 행복해하다가 자식과 함께 외국에 갔던 아내에게서 버림을 받았던 ‘혁수’의 모습이다. 하드코어 버전은? 말하기도 싫다.
 
기독교를 궁극적인 실재와의 만남을 통해 삶의 원동력을 확보하게 도와주는 상징 체계라고 편의상 정의할 때, 이 시대에 기독교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우상의 본질적 허구성을 비판하고, 그것이 우리 삶에 얼마나 파괴적인지를 폭로하는 성서를 손에 들고 읽는 신앙인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곰곰이 헤아려 본다. “바알은 신이니까, 다른 볼일을 보고 있을지, 아니면 용변을 보고 있을지, 아니면 멀리 여행을 떠났을지, 그것도 아니면 자고 있으므로 깨워야 할지, 모르지 않소!”라고 호기롭게 말하며 제단과 제물에 물을 붓고는 하나님께 불을 청하던 엘리야가 나타나주기만을 기다렸다가, 누군가를 향해 냉큼 ‘엘리야가 오셨다’고 환호하는 것이 우리의 책무는 아닐 것이다. 엘리야는 우리 가운데서 나와야 한다.
 
한국 기독교, 신앙 실력 좀 발휘해 보자. ‘신앙을 통한 물질의 축복’이니 ‘다니엘 학습법’이니 하면서 ‘집’ 우상, ‘교육’ 우상의 제단을 섬기는 부끄러움은 그만 반복하자. 우리 시대 우상의 본모습을 폭로하고, 그것이 살 길이 아니라고 설득하고, 실제로 다른 삶을 집단적으로 훌륭하게 살아보여 주자.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교회로 모여 뭐 하겠는가?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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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ineluna
    2009.05.21 10:1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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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시대 우상의 본모습을 폭로하고 아니라 외치고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사람을 피폐하게 하는 삶의 고리를 똑바로 쳐다볼 수 있게 하는 신앙의 힘이 우리안에 존재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 독한 열정
우리의 고통은 이렇게 자본화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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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그렇게 욕을 보이고 나니, 암논은 갑자기 다말이 몹시도 미워졌다.
이제 미워하는 마음이 기왕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하였다.
암논이 그에게, 당장 일어나 나가라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사무엘기하」 13장 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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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지스와프 백진스키 作 <무제>

그녀가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얼굴, 몸매, 목소리, 걸음걸이, 그녀에 얽힌 모든 것이 하나하나 사랑스러웠다. 저 멀리 사람들 틈에서도 금방 그녀임을 알아 볼 수 있었고, 눈을 감고 있어도 그녀의 자태가 선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은 그녀를 볼 수 있기 때문이고, 밤에 잠을 자는 것은 상상 속에서 그녀를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루 스케줄은 그가 꿰고 있는 그녀의 동선(動線)을 따라 짜였고, 그녀 때문에 국정을 배우는 일에도 더욱 열정을 다할 수 있었으며, 신체를 연마하는 데도 더욱 부지런히 준비할 수 있었다. 그녀가 있었기에 그는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더욱 최선을 다할 의지가 북돋아졌고, 그녀가 있었기에 최고를 위한 경쟁에서 수단방법 가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의 모든 행동과 생각과 계획은 모두 그녀와 연관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사랑해서는 안 되었다. 그녀가 이복누이동생이어서가 아니라, 바로 자기와 왕권을 두고 경쟁하는 이와 같은 혈족 출신이기 때문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그 집은 정말 재수 없는 집안이었다. 유다 왕국보다 결코 나을 것이 없는 새똥만한 나라(요르단 동북부 바산 지역에 있는 소국인 그술)에 불과한데, 그것도 왕족 출신이라고 얼마나 있는 척하는지 아니꼽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에도 왕족이라는 점이 대신들에게 먹혀들고 있다는 사실이 그에겐 부담스러웠고 부러웠다. 게다가 그자는 용모가 준수했고 기골이 장대했다. 말은 또 어찌나 수려한지, 감언이설에 넘어가 장자인 자기보다 그 동생을 지지하기로 한 이들이 하나씩 늘어가고 있었다.

그가 왕이 되고 싶은 것은, 적어도 그 즈음에는, 이복누이인 다말 때문인데, 그가 왕이 되려는 한 그녀는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그녀의 친 오라비인 압살롬은 대권을 포기할 자가 아니고, 자기 또한 그럴 수 없었다.

마침내 병이 들고 말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정이었기에, 욕정은 더욱 불타올랐고, 그런 마음을 다스릴 만큼 그는 야심만만한 성품도 단호함도 갖추지 못했다.

궁이란 이런 낌새가 비밀로 지켜질 만한 곳이 아니다. 더구나 대권을 두고 싸우는 두 왕자의 일거수일투족은 궁의 모든 사람들의 표적이었다. 아무도 아는 척하지 않지만, 각자는 그 정보 하나하나를 두고 치밀한 계산을 하며, 전략을 편다. 암논, 이 영리하지 못한 왕의 장자는 자기의 약점을 노리면서 펼쳐지는 온갖 술책들을 간파할 이해력도 없었고, 사랑의 열정은 그나마 있는 부족한 판단력마저 마비시켜 놓고 말았다.

그때 왕의 노련한 책사인 요나답이 접근해 왔다. 어릴 적부터 친구였고 너무나 영리한 자여서 가깝게 지내고 싶었지만, 그는 자기가 아닌 왕의 사람이다. 근데 어느 날 그가 와서 권한다. 자리에 아예 누워 앓는 시늉을 하라고, 왕이 문병 오면 다말의 시중을 청하라고 말이다. 그녀 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그는 단박에 그렇게 행동을 한다.

아버지 다윗은 암논의 청을 들어준다. 궁내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왕이 저 조심성 없는 장자의 간청을 들어주었다가 자칫 형제간에 골육상쟁이 벌어질 수 있다는 점을 모르지 않을 법한데, 어찌된 일인지 왕은 요나답이 예상한 대로 행동했다. 왕의 측근의 한 사람이기에 왕이 허락할 줄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위에서 추측한대로, 왕의 허락이 조심성 없는 것이라면, 요나답은 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왕이 허락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그런데 뜻밖에도 왕은 허락했다.

그렇다면 잠시 왕의 입장에서 사태를 점검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요나답이 암논의 사정을 알고 다가와 자문을 해주었다면, 다윗이 그것을 모를 가능성은 별로 없다. 말했듯이 요나답은 왕의 측근이고, 왕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것이 가장 유리한 것임을 잘 아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윗은 그 허락이 초래할 사태까지도 계산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장자인 암논은 영리하지 못한 아들이다. 나라를 맡기기엔 부족했다. 한편 다말의 친오라비인 압살롬은 너무 영리했다. 게다가 그의 어미는 그술국의 공주다. 그술국과의 친선관계가 유다 왕국에게 유리했기에 다윗은 그녀와 정략결혼을 했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왕권을 그술국 공주의 아들에게 물려주는 것은 왕으로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문제는 대신들이다. 대신들은 벌써 줄서기를 시작했다. 이 두 왕자가 왕권을 승계할 유력한 후보들이니 그들을 지지하는 파가 나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하여 왕과 책사인 요나답은 일련의 음모를 기획하였던 것은 아닐까. 두 왕자를 제거하려는 .........

아무튼 간병차 방문한 이복누이를 암몬은 충동적으로 강간해 버린다. 상사병으로 몸져 누워있던 터였다. 오직 다말 생각에 판단력이 극도로 흐려져 있던 차였다. 하여 그는 순간의 욕정을 주체하지 못했던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걱정이 밀려온다. 가뜩이나 압살롬에게 호감을 갖는 이들이 하나씩 늘어가고 있는데, 가뜩이나 자질이 부족하다는 말이 돌고 도는데, 누이동생을 강간했다는 소문이 나면 그야말로 치명적인 사태가 예상되었다. 게다가 아버지 왕의 매서운 눈초리가 그를 몸서리치게 했다.

순간 그는 이 모든 것이 다말 때문이라는 생각에 빠져든다. 그녀가 원망스러웠다.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피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어쩌자고 오라비의 경쟁자인 자신에게 왔단 말인가. 혹 압살롬, 그자의 간계는 아닌가. 몸을 팔아서라도 자기 오라비를 왕으로 만들려고......, 이런 창녀 같으니라고.
암논은 그녀를 사납게 밀치고 내쫓아 버린다. 남자와 성관계를 맺은 한 여인이 버림받으면 그것은 그녀의 수치이고 가문의 수치다. 해서 그녀는 뭇 사람의 눈에 뜨이지 않아야 한다. 그게 사대부가나 왕실 여성의 법도다. 암논이 그걸 모를 리 없지만, 그 순간 그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아니 배신은 자기가 한 게 아니라 저 창녀 같은 여자가 한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아니 충동적으로 그렇게 믿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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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m Dine 作 <The Six Foot Heart Machine>(1991)

모든 것을 다 걸만큼 열렬했던 그의 사랑은 한 순간에 재로 변했다. 최고가 되고자 하는 열망의 가장 강력한 동력이었던 사랑의 열정은 한 순간에 최고가 되고자 하는 열망의 가장 심각한 장애물로 각인되었다. 그는 그녀를 원망했고 저주했다. 그의 사랑, 그 ‘독한 열정’은 녹아버린 더러운 눈의 잔해에 다름 아니었다.

드라마 같은 얘기다. 대개의 현실은 그렇게 극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의 독한 열정만큼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수없이 많은 열정적 사랑들이 불꽃을 일으켰다. 사랑의 열정과 열병은 누구나 거쳐 가는 통과의례처럼 다가왔다 지나간다. 삶의 커다란 동력이 되고, 가장 소중한 것과 맞바꿀 수 있을 만큼 강한 충동을 일으킨다. 그런데 불꽃을 일으키며 사랑을 불태우고 있는 그 순간조차도 그 격정적 감정들은 다른 욕망들과 겹쳐지며 표출되곤 한다. 그리고 종종 열정적 사랑은 독기를 내뿜으며 증오를 일으키고 극심한 상처를 발생시킨다. 하여 사랑은, 그 앞뒤 안 가리는 열정은 가끔 독한 열정으로 변모한다.

한데 모든 열정적 사랑이 독기를 일으키며 상처를 야기하는 이별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적지 않은 열정적 사랑이 결혼으로, 이별을 억제하는 그 제도 안으로 안착한다. 일단 이 제도 속에 포섭되면 이별은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굉장한 비용을 지불해야만 가능하다. 하지만 사랑의 완성이라는 미학적 담론으로 포장된 그 제도를 둘러싼 현실이 또한 사랑의 독성을 야기하는 주요 원인임을 간과할 수 없다. 이에 관해서는 수많은 얘기들을 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그 제도로의 진입의례라고 할 수 있는 결혼예식에 관하여, 그 독성의 가능성에 대하여 얘기해보기로 하자.

열정적 사랑에 빠진 이는 결혼을 그 제도 속의 일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그것을 포장하는 판타지를 통해 열망한다. 그런 점에서 결혼을 향한 열병은 현실을 유보시키는 ‘초월적인 정념’이다. 한데 누구든 그 제도 속으로 진입하는 과정에 다가서면, 그 초월적 정념은 지극히 세속화된 현실과 접속하게 된다. 물론 그러한 초월과 세속의 접속은 사랑의 열정이 진행되는 도처에서 체험된다. 사랑의 열정 자체도 그러한 계산법과 결코 분리되어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결혼예식은 그 중의 단지 하나의 체험일 뿐이다. 

최근 결혼의 상업화 현상을 연구한 한 논문에 따르면, 2003년에 결혼예식 전후 과정(상견례에서 집들이까지)을 포함하여 평균 1억 3천5백만 원 정도가 지출되었다고 추산한다. 이 중 신혼집을 구매하는 비용이 가장 높으며, 가구 가전 등 살림기구의 구매 비용 또한 큰 비중을 차지한다. 또한 예식 자체를 위한 비용도 적지 않다.

이러한 지출구조는, 1998년을 예외로 하면, 1990년대 이후 줄곧 가파른 증가추세를 띠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결혼 컨설팅 업체들의 활발한 마케팅의 소산이며, 드라마 영화 가요 뮤직비디오 등에서 이른바 ‘사랑 마케팅’이 고도로 첨예화된 탓이다. 좀더 넓게 보면,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가 소비사회로 본격적으로 진입하기 시작하였고, 그로 인해 ‘일상의 상업화’가 급속하게 진행된 하나의 양상으로 결혼을 둘러싼 소비시장이 극대화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사랑은 일상의 상업화를 위해 가장 효과적인 부문임은 의심의 여지없다.

결혼이라는 판타지를 활용한 마케팅은 소비욕망을 불러온다. 이 욕망은 치밀한 ‘사랑의 계산법’과 결합되어 있다. 그것은 일종의 ‘위신의 전략’이기도 하다. 소비사회는 위신이라는 자본을 위한 비용을 마케팅 전략으로 활용한 것이다. 그리고 이 위신의 계산법은 사랑의 열정을 녹아버린 더러운 눈처럼 만들기도 한다. 아니 사랑의 열정 자체가 상업화되는 사랑의 계산법과 뒤엉키면서 이미 독성을 띠고 있기도 하다. 알게 모르게 그 열정 속에 상처 주고 상처 받는 파괴적 독기가 함유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결혼비용의 과다지출은 결혼 당사자의 수입으로는 불가능한 액수다. 하여 그 비용은 많은 경우 부모로부터 나오는데, 그것은 부모세대 가계부채의 주요 요인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이로 인한 노년의 비루함에 대해서는 차치하고, 이것이 가족주의를 온존시키는 하나의 요인임을 지적고자 한다. 그런데 소비사회의 주체화된 개인들은 전통적 가족을 수용할 수 없는데, 아직 소비사회에 적합한 대안적 가족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가족주의는 여전히 전통과 접속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결혼의 과다지출은 가족 내의 갈등을 야기하는 고통의 주된 요인이 되곤 한다.

여기에서 언급한 것은 결혼비용의 과대화가 초래할 수 있는 많은 것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그런데 말했듯이 이것은 사랑의 상업화, 직접적으로 ‘사랑 마케팅’이 활성화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사랑 마케팅은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그 욕망은 사랑의 열정 속에 스며들어 있다. 하여 사랑의 열정은, 그 속에 담긴 사랑의 욕망은 누구나, 대소의 차이는 있겠지만, 시장화된 가치에 의해 잠식되어 있다. 요컨대 사랑의 욕망이 초래할 수 있는 비극의 배후에는 시장의 원칙이 작동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암논의 욕정과 배신의 배후에는 왕권쟁탈이라는 전근대정치로서의 권력의 원리가 작동했다면, 현대인에게는 시장의 정치로서의 권력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님의 부활을 기리면서 나는 이 시대의 고통에 관해 얘기하고자 했다. 특히 고통을 일상적 차원에서 살피고자, 그 중 두드러진 하나인 열정적 사랑과 결혼에 관해 얘기했다. 그 아름답게 포장된 정념과 제도가 담고 있는 독한 성질에 대해, 사랑하던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심지어 죽게 할 수도 있는 그 독함에 대해 말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속에 자본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성찰하고자 했다. 부활을 기리는 우리의 고통은 이렇게 자본화되어 있다고 말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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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월 12(일) 한백교회 '물질을 드리는 기도'

나를 하느님께 드리는 기쁨으로...

나상윤
(본 연구소 회원)

「에스더기」에 나오는 에스더 왕후는 죽을 각오를 하고 페르시아의 아하수에로 왕의 마음을 사로잡아, 재난 당할 위기에 처한 유다 민족을 구합니다. 왕은 에스더에게 연거푸 이렇게 묻습니다. “에스더 왕후, 당신의 간청이 무엇이오? 내가 다 들어주겠소. 당신의 소청이 무엇이오? 나라의 절반이라도 떼어 주겠소.” 왕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정도로 왕의 마음을 사로잡아 민족의 평안을 도모하길 바라는 유다 민족의 염원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누군가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한 치도 불안한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들의 처지를 애처롭게 여기면서, 유다 민족은 이 이야기를 읽어왔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에스더의 처지를 생각하며 에스더기를 읽어보았습니다. 에스더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의 미모는 왕의 인정을 받는 한에서만 가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상상하기에 그의 미모는 왕과 왕에게 잘 보이려는 유다 민족의 욕망에 의해 꾸며진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인정을 받기 위해 악기 연습을 하는 것은 고행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떤 이를 유혹하기 위한 수단으로 음악을 하기보다는, 소리 자체와 사랑에 빠지고 싶습니다. 그 누군가의 마음을 사로잡는 연주를 추구하기보다는, 소리의 긴장을 놓치지 않으며 그 소리와 한몸 되는 연주를 하고 싶습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 무언가를 드리기보다는, 드리는 행위와 나 자신이 일체가 되어, 나를 하느님께 드리는 기쁨으로 살길 원합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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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 - 세상에게 한나를 읽어주다.

백종옥
(본 연구소 회원)


홍역이 유아성장의 한 과정이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일 것이다.
간염은? 미하엘은 15살의 가을 어느 날 간염으로 인한 구토로 괴로워할 때 한나를 만난다. 그리고 그 만남은 한나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야 했던 역사라는 대의와 그 안에 숨겨진 한 개인의 진실을 찾아 떠나는 긴 항해의 시작이었다.
영화 홍보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 영화가 관객을 끄는 표면적인 모티브는 스물 한살의 나이차이가 나는 남녀의 사랑일 것이다.
“그 비밀집회를 여는 집단은 피를 나누어 마시는 의식에서 집회를 시작한대!”라는 식의 얘기가 비밀집단의 성격을 더 내밀하게 만들듯이 그들에게도 사랑전의 의식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책읽기와 목욕이다.  
목욕이라면 모를까 책읽기는 왜? 더구나 <오디세이>나 <전쟁과 평화>같은 문학작품들이 그 목록이라니.
그 의식이 시작된 것은 한나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고 한나에게 빠져있는 15살의 미하엘에게 그 의식의 의미나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무 설명 없이 한나가 사라진다. 몸과 마음의 기억 속에 남은 한나는 시간의 바깥쪽으로 밀려나는 듯 보이지만 미하엘에게 있어 그녀는 어떤 여성도 대신할 수 없는 시간의 정지이기도 했다. 그리고 법대생 신분으로 나치과거사 재판에 참석한 미하엘은 법정에 선 한나를 다시 봄으로써 그들의 사랑의 의식이었던 책읽기의 의미에 대해 비로소 질문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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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서 숨죽이며 한나의 얘기를 듣고 있는 미하엘.
나치 친위대의 전력에 대해 이유를 묻는 판사에게 한나는 오히려 되묻는다. "판사님이라면 어떻게 하셨겠어요?"라고.
우리는 영화 “어 퓨 굿맨”속에 등장하는 대령이나 “닉슨 대 프로스트”의 닉슨에게서 권력의 최고지점에 있다가 용의자나 불의한자로 지목된 사람들이 자신들에게만 적용되는 면죄부의 당위성을 설파하는 언술을 보게 된다. 즉 그들에게만 불의가 정의로 적용되는 왜곡된 사고체계의 구도를.
위에 언급한 한나의 되물음 역시 나를 죄인으로 몰아세우는 당신들 역시 나치가 있었던 시대를 함께 산 사람들이거나 국민이 아니었냐는 공범의식을 일깨우는 공격적 언술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그녀가 보이는 태도는 체화된 당당함이 아니라 어리둥절함 그것 자체였다.
그녀의 다소 직설적이지만 재판정에 피고의 신분으로 서있는 자신을 세상이 어떤 시선으로 보는지 상황파악을 못하는 유아적인 그래서 한편으로 순수하게까지 들리는 이 반문은 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재판정에 참석한 어떤 사람에게도 적용되지 않지만 오직 한나에게만 적용되는 문맹에 대한 치명적인 인식이었다.

한나가 대문자적인 인류애의 가치에 앞서서 알게 된 것은 글자를 모름에 대한 공포였으며
문맹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당연히 누리는 삶의 영역가운데 한 부분을 박탈당한 한나가 선택한 생존의 우선순위는 문맹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로 삶의 영역을 한정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문맹인 자신에게 다행스럽게 주어진 일을 누구보다 잘해내려고 애썼을 것이다. 그것이 나치의 친위대로서의 역할이었을지라도.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이 내리는 결정에 그녀가 관여할 수 없는 것처럼 나치의 결정은 그녀의 영역 밖의 일이었다. 오히려 조만간의 죽음이 내정된 강제수용소의 소녀들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란 단 며칠간이지만 따뜻한 잠자리와 먹을 것을 주면서 아이들에게 책을 읽게 하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책을 읽는 아이들의 목소리 속에서 그녀 역시 냉혹한 현실 속에서 잠시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누군가가 책을 읽어준다는 것은 일종의 사랑의 방식이었으니까.  
그러나 나치의 통치는 끝이 났고 다시 문맹인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찾아 살고 미하엘을 만나 사랑하고 그리고 떠나야 했던 그녀는 별안간 나치통치의 주체가운데 하나로 법정에 서게 된다.
따라서 한번도 세상의 주체일 수 없었던 그녀에게 주체로서의 역할에 대한 책임을 묻는 재판관에게 다시 되묻는 “판사님이라면 어떻게 하셨겠어요?”라는 그녀의 질문은 자신의 이해의 한계에 대해 도움을 구하는 솔직한 질문인 것이다.

그러나 나름대로 생존이라는 문제에 당당한 의지를 갖고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던 그녀는 이송 중 화재사건의 책임자를 가려내는 과정에서 요구된 필적감정에서 갑자기 모든 의지력에 손을 놓아버린다. 그리고 문맹을 밝히는 일 대신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을 자신이 했다고 거짓 증언을 함으로써 무기징역을 언도받는다.
이제 미하엘은 그녀의 말하지 못한 진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서 기억의 연인의 선택에 대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놓고 번민에 빠지게 된다.
그 번민은 미하엘이 한나의 면회를 위해 나섰던 길을 되돌아 역사의 장소인 강제수용소로 향하는 선택으로 마무리된다.
눈 내리는 회색의 하늘아래 펼쳐진 강제수용소를 향해 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고 강제수용소 내부를 꼼꼼히 살펴보는 동안 한나는 면회소에서 이제나저제나 미하엘이 나타날까 기다리다 면회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간수의 목소리에 희미한 전구가 빛을 비추는 좁은 교도소의 통로를 따라 천천히 걸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다.
그것은 한나와의 열정적인 사랑 속에서도 드러나지 않게 조금씩 한나를 배신해왔던 미하엘만이 알고 있는 지난 시절의 방식이었으며 한나가 그렇게 떠나지 않았다면 결국은 미하엘이 먼저 한나를 버렸을 것이라는 마음 깊은 곳의 죄의식을 역사라는 대의를 통해 덜어보려는 내면의 행동이기도 했다. 미하엘은 그렇게 반만큼만 한나를 이해하고 사랑했다.
아니 좀 더 정직하게 말하면 소년시절 추억 속 자신의 사랑은 지키고 역사의 죄인은 단죄하는 셈이었다.
그것은 미하엘이 그들 사랑의 의식이었던 책 읽는 일을 다시 시작하고 녹음해서 한나에게 보내주지만 한나가 미하엘의 목소리를 따라 단어를 배워가는 방식으로 어렵게 글자를 깨우치고 서툰 글씨로 써 보낸 편지 속에서 답장을 기다리는 그녀의 간절한 마음을 읽으면서도 끝까지 견지하는 냉정함속에서도 보여진다.

사랑에서 의무만 남은 표정 없는 지난날의 연인을 한나는 출소 전날 비로소 만나게 된다.
이미 흰 머리가 수북히 내려앉았고 지난날의 육감적인 몸매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자신을 알면서도 한나가 미하엘을 보려고 했던 건 미하엘만은 자신을 이해할 거라는 믿음이 아니었을까?그래서 그녀는 미하엘의 나치의 전력에 대해서 법정에서의 얘기처럼 설명할 것이 없냐는 질문에 “넌 알거야”라는 단정을 담아 비로소 얘기를 시작한다. “나는 그 누구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누구도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런저런 일을 하게 만들었는지 알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어. 그리고 넌 알 거야. 너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 누구도 너한테 해명을 요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야. 그렇기 때문에 법정 역시 나한테 해명을 요구할 수 없었어. 하지만 죽은 사람들은 내게 그것을 요구할 수 있어. 그들은 나를 이해하거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법정에 있을 수는 없었지. 하지만 그들이 그곳에 있었다면, 그들은 나를 특히 잘 이해했을 거야. 이곳 교도소에서 그들은 나하고 자주 같이 있었어. 그들은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매일 밤 나를 찾아왔어” 미하엘은 이미 반 이상의 마음을 역사라는 대의에 주어버렸고 한나는 18년만의 해후이자 마지막 재회에서 미하엘의 마음을 비로소 읽게 된다.
그리고 자신에게 죽음을 의미하는 문맹을 밝히는 일 대신 선택했던 18년의 무기징역을 다 치루고 출옥하는 날 동틀 무렵에 자살한다. 
그 무기징역의 세월 속에는 한나가 직접 책을 읽을 수 있게 됨으로써 나치 친위대로서 자신의 선택이 무엇이었나를 알아가는 과정도 포함되는 것이었다.
영화에서 그녀는 자신의 분신처럼 아끼던 책을 꺼내 책상위에 차곡차곡 쌓은 뒤 그것을 밟고 올라서 목을 맨다.
나는 어쩐지 한나가 밟고 올라서는 책들이 먼저 간 사람들, 그러니까 한나를 이해해줄 수 있을 거라고 한나가 믿는 유일한 이들을 향해 내딛는 한발 한발의 계단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하엘은 15살의 어느 가을 성장통과도 같은 간염으로 인한 고통 속에서 한나를 만나고 한나는 문맹이라는 고통 속에서 비극적인 역사와 만난다.
두 사람의 이별 후 세월이 흐르고 이제 한나는 교도소에서 어렵사리 얻은 글자 읽은 능력으로 모든 방법으로 세상과 소통이 가능한 때이지만 자신이 문맹일 때 느껴야 했던 그 벽이 자신 앞에 다시 놓여있음을 미하엘과의 재회에서 알게 된다.
그녀가 한번 더 생존이라는 절대적 의지를 발휘해 문맹을 숨기기 위해 떠났던 것처럼 자신의 나치 친위 전력을 알지 못하는 곳으로 정처 없는 유랑의 길을 떠나야할까?
한나는 그녀가 갈 곳을 비로소 알았고 그것은 정처 없는 유랑의 마지막 정착지였다.
자신이 교도소에서 모은 재산은 이송 중 화재 사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가운데 한명인 유태계소녀에게 남기고 미하엘에게는 안부 인사를 남기고.
이제 그녀의 진실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것은 그들의 몫으로 남은 것이다.
미하엘이 만난 중년의 여인이 된 유태계 소녀는 한나가 모은 돈은 거부하고 자신의 기억이 담긴 상자만을 받는다. 
너무 늦게 한나의 진실을 알아버린 미하엘은 한나의 죽음 뒤 우리에게 그녀의 이야기를 읽어준다.
그것은 문맹인 한나에게 닫혀있는 한 세계를 책을 읽어줌으로써 알게 해주었듯이 대문자로서의 역사, 정의의 잣대에 의해 마음 안에 등을 돌린 채 돌아서지 않는 우리에게 한 인간의 진실에 그만 몸을 돌려 귀 기울여 듣자는 초대이기도하다.
이 진행형의 초대에 몸 돌려 귀 기울이는 이들은 모두 한나처럼 미하엘의 청중일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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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usin
    2016.01.13 02:48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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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영화 볼 때 먹먹함이 글로 잘 설명되어 있어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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