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Mourning), 그 ‘불가능한 가능성’에 관한 에세이

이상철
(한신대 외래교수)

 

Prologue: The day after April 16

그날 이후 40일이 지났다. 아직 16명이 영혼이 바다에 잠겨있고, 대통령은 이 참사에 대해 눈물을 흘렸으며, 내각의 수반과 청와대 사람들이 경질되었다는 뉴스, 해경과 구원파가 이 사건의 해결을 위한 희생양으로 제단에 바쳐질 듯 하고, 그 둘을 제거하고, 몇몇 관리들을 정리하는 것으로 ‘이번 사건 퉁치자!’는 것이 미스 박과 그녀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환관들의 바램인 듯 하다. 
그날 이후 몇 번의 집회가 있었고, 그날 이후 신학생들은 광화문 세종대왕상 위에서, 혹은 청계광장에서 구호를 외치고 삭발을 하고 단식에 돌입했다. 왜, 세상은 하나도 변하지 않은걸까? 탄압하고 투쟁하고 삭발하고 잡혀가고…투쟁하고 단식하고… 정말이지 이 놈의 사회는 어찌 이리도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는 것일까? 지난 10년 유학기간 동안 나는 이런 류의 소란으로부터 자유로왔는데, 그래서 홀가분했는데, 이제 10년이나 지났으니 세상이 변했겠거니 했는데, 어쩌면 이렇게 하나도 안 변했을까? 

May 21, 데리다 수업이 열리던 날

<해석학과 윤리> 세미나가 열리는 지난 수요일 저녁, 내 수업에 참여하는 3명의 대학원생들이 청계광장에서 삭발을 하고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그 전날 학생들은 내일 제출해야 될 리포트를 미리 보내며, “교수님, 에세이 보냅니다. 내일 수업에는 참여 못할 것 같아요. 죄송해요. 안 그럴 줄 알았는데 떨리네요. 기도해 주세요” 라는 문자를 보내왔다.
그 세미나는 슐라이에르마허부터 시작하여 레비나스까지 열 한명의 굵직한 인물들의 해석학적 특징을 다룬다. 그리고 그날 5월 21일 수요일에 우리 앞에 나타난 인물은 데리다였다. 나는 원우들과 데리다가 말하는 애도의 방식을 놓고 대화를 하고 싶었다. ‘어떻게 우리는 세월호에 대한 애도를 해야할까? 그것이 가능이라도 한 것일까?’라는 물음에서부터, 데리다가 말하는 ‘불가능한 가능성’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까지 생각해보고, 그런 연후에 세월호 사건에 대한 애도의 가능성은 무엇이고, 애도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또 무엇인지? 그리고, 최종적으로, 현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애도의 방법이 무엇일까?를 놓고 나는 학생들과 이야기를 하려 했는데, 11명의 수강생 중 3명이 청계광장에 있었던 까닭에 그 논의는 하지 못했고, 농성이 끝나고 모두 모인  종강 날쯤 세미나에 대한 결론격으로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려고 한다.

쾌락의 원칙을 넘어서 (1): 안티고네의 애도 방식

애도에 대한 고전적인 판본은 고대 그리스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 이야기이다. 사건의 대강은 이렇다. 국가를 배신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해 들판에 버려져 들짐승의 먹이가 되어버린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를 거두어 장례를 치루려는 안티고네와 반역자(폴리네이케스)에 대한 응징의 차원에서 애도를 허락치 않는 테베왕 크레온 사이 갈등이 이 비극의 줄거리다.
국가에 반역을 저지른 자들에 대한 역사의 형벌은 어느 민족이건 대체로 일치한다. 공동체 성원들 앞에서 공개적이고 잔인한 사형이 집행되고 그 주검을 마을 어귀에 대롱대롱 매달아 공포의 타산지석으로 삼게 하거나, 혹은 그냥 시체를 들판에 내동댕이쳐 독수리의 먹이가 되게 함으로써 그 반역자와 공동체간의 거친 수직적 결별을 선언하는 것이 그것이다.
공동체에 심각한 타격을 끼친 인물에 대한 응징과 처벌은 공동체의 이익을 보호하고 공동체 성원들의 결속과 단합을 유지하고 지켜내기 위한 당연한 처사다. 공동체의 이익이라는 대의를 위해 한 인간의 존엄도 무시되는 이 마당에 하물며 반란의 수괴를 어떻게 넉넉하게 봐줄 수 있단 말인가?
문제는 안티고네가 이러한 합리적인 상징계의 질서를 거부하였다는 사실이다. 사회의 법을 어기면서까지 안티고네는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되찾아 장례를 치루겠다는 의지를 꺽지 않는다. 안티고네는 공동체의 운영원리인 실용주의적이고 공리주의적인 현실의 원칙, 쾌락의 원칙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누구나 죽으면 장례를 치루고 고이 안장되어야 한다는 존재일반이 마땅히 누려야 할 근원적 원칙, 상상계적 원칙에 무게를 둔다.
이를 좀 더 정신분석학적으로 풀어내면, 안티고네는 공동체의 타자인 폴리네이케스를 향한 금지된 욕망을 현실 질서(법)의 위협과 협박과 조롱과 공포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관철시켰다. 이것은 프로이트가 말했던 쾌락의 원칙을 넘어가는 행위다. 왜 안티고네는 그 법을 어겼을까?

쾌락의 원칙을 넘어서 (II):  “집도 주고, 밥도 주고, 몸도 줬는데…왜 가니?”

내 기억에는 안티고네보다 더 ‘쾌락의 원칙’에 충실하지 않았던 인물이 있다. 황석영의 소설 <오래된 정원>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오현우다. 나는 이 작품을 소설보다 영화를 통해 먼저 접했다. 본래 소설을 영화 한 경우 원작에 훨씬 못 미치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임상수 감독의 영화 <오래된 정원>은 예외적 케이스가 아닐까 싶다. 영화에서는 오현우의 역할을 지진희가 맡았고, 여주인공 한윤희 역을 염정아가 맡았었다. 
1970년대 말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지하조직 활동을 한 오현우는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수배자가 되어 도피생활을 하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을 도와준 시골학교 미술교사 한윤희와 사랑에 빠진다. 그들은 한적한 시골 외딴 마을에서 3개월 남짓 둘만의 따뜻하고 오붓한 시간을 갖지만, 오현우는 다시 동지들을 규합하여 투쟁의 길로 나서기로 마음을 먹고 길을 나선다.
서울가는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는 두 사람, 비내리는 시골길에서 한윤희가 오현우에게 이렇게 따져 묻는다: “왜 가니? 집도 주고, 밥도 주고, 몸도 줬는데…왜 가는 거야? 그곳에 뭐가 있길래…이 병신아!” 오현우는 한윤희의 이 질문에 아무런 말을 못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다 안다. 그가 죽으러 간다는 사실을 말이다.
왜, 오현우는 집도 주고, 밥도 주고, 몸까지 제공되는 쾌락의 공간과 시간을 거부하고, 그 쾌락에 만족하지 못하고 왜, 죽음을 향해 나가는 것일까? 왜, 안티고네는 공동체가 제공하는 쾌락의 원칙에 머무르지 못하고 죽은 오빠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지내야겠다고, 아직 나의 애도는 끝나지 않았다며 절규하는 것일까?
위의 경우에서와 같이 상징계속 쾌락원칙에 만족하지 못하는 욕망을 쥬이상스라 부른다. 욕망이 상징계속 타자로부터 기인한다면, 쥬이상스는 상징계의 밖 대타자가 제공하는 욕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쥬이상스로 인해 안티고네는, 그리고 소설 <오래된 정원>속 주인공 오현우는 상징계속 쾌락의 원칙을 거부하고 박차고 일어나 대타자를 향해 나가지만… 대타자 역시 비어있다.

“대타자는 없다”, 그리고 “불가능성의 가능성”

라깡은 이를 “대타자는 없다”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대타자는 없다”라는 말은 초월성이 없다는 말로 치환 가능할 것이다. 지난 60호 웹진에서 필자는 라깡의 “대타자는 없다”에 주목한 지젝의 정치적 기획 - 어떤 초월성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그 초월성을 망가뜨리는 틈을 부여 잡으려고 하는 - 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이와 관련된 기사는 지난 웹진 60호 필자의 졸고 “세월호 침몰사건을 바라보는 지젝의 시선과 산자의 독백”을 참조하기 바람) 
라깡의 “대타자는 없다”라는 말을 안티고네에 적용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안티고네는 존재의 심층에 자리한 텅 비어 있는 공간으로부터 들려오는 사이렌의 음성에 정직하게 반응하였고, 그 음성을 차마 배반할 수 없어 그곳을 향해 묵묵이 걸어나간다. 물론, 그 음성은 텅 비어 있는 공간에서 공명되었던 소리었겠지만서도, 안티고네에게 있어 그것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실재였다. 
그렇다면, 안티고네가 취한 애도의 자세를 데리다의 ”불가능성의 가능성”으로 바라보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그것은 세월호 사건과 관련한 우리의 애도를 이어가는 데 있어 어떠한 성찰을 제공하는가?  
라깡이 말한 “대타자가 없다”라는 말과 데리다의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라는 말 사이에는 모종의 연관과 상동성이 있다. 전기 데리다의 대표적 언어가 ‘차연’이었다면, 후기 데리다를 상징하는 대표적 개념어는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다.  데리다 전기는 주로 기존 형이상학 틀에 익숙한 언어, 텍스트, 의미 안에 숨어 있는 부분을 들추어 냄으로써 기존의 상식과 질서에 균열을 일으키는 탈구축을 감행한다. 반면, 1993년 <맑스의 유령들>이후 출간된 데리다의 후기 저작들은 단순한 텍스트 해체에 만족하지 않고, 윤리, 종교, 정치적 이슈들과 과감히 맞서면서 실천철학적 대응을 도모한다.  
후기 저작에서 데리다는 많은 무조건적인(unconditional) 것들에 관심을 기울인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무조건적인 환대, 무조건적인 용서, 무조건적인 선물, 그리고 무조건적인 애도 등. 하지만, 이 무조건적이라는 강박은 오히려 역으로 그것들에 대한 불가능성을 증폭시켜 나가다가 급기야는 데리다 작품에서 중요한 역설적 아포리아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 불가능성으로 인해 야기되는 흉흉한 소문과 유령 같은 음산함이 죽어버린 현실에 활력을 불어넣어, ‘혹여 그 불가능이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기대 섞인 전망을 내놓는 것이 데리다 후기의 기획이고, 그것은 결국 정의에 대한 해체주의적 결말을 예견케한다.

애도, 그 ‘불가능한 가능성’을 향하여

애도(哀悼)를 국어사전에서 찾으면 이렇다: “사람의 죽음을 슬퍼함”. 그러므로 애도가 성공했다 함은 그 슬픔이 극복되었음을 말한다. 만약 그렇다면, 성공한 애도는 필연적으로 실패한 애도가 되는 것 아닌가? 본래 애도란 망자에 대한 기억을 유지하고, 망자의 상실로 인한 아픔을 계속 지속시키는 행위이어야 되는 것 아닌가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애도란 애도의 사전적 의미, 즉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는 행위를 현재진행의 사건으로 계속 작동케하는 행위다. 세월호 참사로 인해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인터뷰에서 빨리 슬픔에서 벗어나는 것을 꿈꾸는 것만큼이나, 이 슬픔이 완전히 극복되고 잊혀지게 되는 것이 두렵다고 말하는 것은 진정한 애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우리로 하여금 다시 묻게 만든다.
결론적으로 ‘불가능한 가능성’이 노리는 바는 우리의 타자를 향한 무조건적인 환대와 우리의 무조건적인 용서와 우리의 대가를 바라지 않는 무조건적인 선물과 그리고 우리의 멈출 수 없는 무조건적인 애도라는 개념들을 살아있게 하여, 그것들로 인해 현실이 미래로 열릴 가능성을 담보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의 세월호에 대한 애도는 미완으로 남겨져야 한다. 미완으로 남겨진 채 이어지면서 망자들을 계속 호출해 내야 하며, 그 공간에서 죽은자들과 살아남은 우리들간의 대화와 관계 맺음이 계속 유지되도록 판을 형성하는 가운데 ‘도래하는(to-come)’ 가능성을 우리는 전망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그 애도의 불가능성은 오히려 변혁을 향한 가능성의 지점이자 거점으로 우리 앞에서 살아있게 된다.
이렇듯 세월호에 대한 애도는 우리사회의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측면을 강화할 수단과 가능성을 제공하였다. 이 비극적이고 극적인 서사가 제공하는 비탄의 되새김을 통해 복수적이고 대안적인 의미의 계열들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애도를 통해 다양한 유령들의 목소리가 현실의 복도에서 돌아다니게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과거처럼 단 하나의 목소리 큰 유령이 그 공간을 지배케 해서도 안 되고, 과거처럼 촌티나는 분파적인 헤게모니 다툼이 있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3류 신파극이 되어버려 우리의 애도는 끝나버리고 만다. 그 쾌락의 원칙을 넘어가야 한다.
우리의 애도는 실재를 향해야겠지만, 그 실재는 어떤 특징도 지니고 있지도 않은 실재이고,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실재이다. 즉, 우리의 애도는 무엇 무엇에 대한 애도가 아니라, 이 애도의 한 가운데에 자리하는 공백에 대한 사랑이다. 그 공백은 앞서 말한 것처럼 환상으로도 채워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애도란 그 결여를 긍정할 줄 아는 태도다. 이러한 의식들을 통해 현실을 서서히 조금씩 잠식해 들어가는 것, 그렇게 현실에 조금씩 균열을 가하고 얼룩을 칠하고 조롱을 하면서 우리의 애도를 유포하다 보면, 어느새 우리 앞에 현실의 파국이 (불가능한) 가능성의 형태로 우뚝 솟아올라와 있을 것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의 애도는 완성된다.

에필로그:  청계광장에서…

문제는 우리의 애도를 완성시킬 파국을 예감케하는 행위가 무엇인가? 라는 점인데…이 문제에 대한 뾰족한 돌파구가 없었던 내게 지금 청계광장에서 벌어지는 퍼포먼스는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삭발과 단식이라는 오래된 내러티브가 있는가 하면, 그 무겁고 장엄한 투쟁의 공간을 경쾌하게 날려버리는 족보도 없는 날날이 같은 댄스와 딴따라 같은 노래와 잡다한 수다들이 꼬이고 공존하면서, 그 숨막히는 메타내러티브가 지배하던 공간이 하찮은 놀이의 공간으로 변모되는 것을 본다. 그것들을 접하면서 어느새 내 안에 자리잡은 신파와 노파심과 촌스러움을 꾸짖는다. 아마도 ‘젊은 그대’는 훨씬 더 과거 그들의 선배들 보다 이 애도를 즐기면서 오랫동안 파국의 도래까지를 잘 견딜 수도 있겠다라는 예상을 한다. 
이렇듯 세월호 참사가 불러온 애도 정국은 2014년 5월 대한민국을 슬픔과 뜨거움이 공존하는 도가니로 우리를 몰아넣고 있다. 80년 광주와, 87년 6월 항쟁, 97년 IMF와 더불어 2014년 세월호는 한국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 역사적 탄식과 요청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무척 떨리고 흥분되고 소름돋는 시간을 우리는 지금 지나고 있는 셈이다. 문득, 삭발에 앞서 눈에 눈물이 파르르 고이던 아이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내일 나는 다시 그들을 만나러 간다.      

ⓒ 웹진 <제3시대>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바울신학가이드8]

바울신학과 탈식민주의III

- 탈식민주의, 바울, 그리고 여성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필자가 다니는 CTS (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해방신학과 여성신학을 가르치는 수잔 띠쓸트웨잇 (Susan Thistlethwaite) 교수는 신학교내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학자중의 한명이다. UN이나 각종 세계 평화회의에 주요 패널로 참석하기도하고 정치권이나 각종 TV 토론 프로그램에도 얼굴을 비친다. 교회의 각종 강연에서 진보적 신학의 필요성과 여성의 관점에서 교회의 복음등이 재해석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그녀가 이야기 해준 여러 재미있고도 의미심장한 에피소드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를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해본다. 어느날 교회에서 강연하던 중 어느 한 화난 여성의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뜨쓸트웨잇 교수의 강의에 화가 났는디 일어나서 열심히 성서는 그런식으로 읽혀져서는 안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간의 방식으로 그렇게 재단하면 안된다는 흔하다면 흔한 그러나 쉽지 않은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그녀에게 답한 띠쓸트웨잇 교수의 말 “그래요? 그럼 제가 당신이 원하는 방식인 성경적인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거기 여성분! 입 다무시고 앉으세요! 고린도전서 14장의 말씀입니다.” 좀 심하다 싶지만 어쩌면 오늘의 우리가 성스럽게 생각하는 성서가 얼마나 여성차별적인 시각에서 쓰여졌는지 가르쳐 주는 이야기이다. 필자는 오늘 탈식민주의와 바울이라는 주제를 마치면서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한다. 여성신학과 탈식민주의의 관계, 그리고 여성의 관점으로 본 성서와 탈식민주의에 대한 문제를 간단하게나마 소개할 것이다. 어렵지 않은 표현과 정보들로 되도록이면 독자들이 간단하게나마 탈식민주의와 여성신학이란 주제에 익숙해 지게 하기 위한 글이 될 것이니,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면 아래에 소개하는 몇가지 텍스트로부터 시작해도 좋을 것이다.
   흔히들 여성을 이해하기 위해 남성들에게 권하는 책들이 있다. 대표적으로는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등이 있고, 유튜브에 찾다보면 여성을 어떻게 이해할지에 대한 유머와 위트가 있는 동영상들도 있다. <화성에서…>라는 책을 전체 일독한 것은 아니지만 몇페이지를 넘기며 내가 생각한 것은 여성이라는 존재에 대해 우리가 어쩌면 당연한 듯 생각하는 지식이라 불리우는 것들은 마치 푸코의 담론이론처럼, 그리고 사이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연구에서 서구인들이 중동과 아시아에 대해 가진 생각들과 비슷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방법은 이러하다. 현대의 여성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들의 특징을 조사한다. 그 특징들에서 여성과 남성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원인을 찾고 해결책을 제시한다. 언뜻 합리적인 방법인것 같지만 여성을 어떻게 연구하고, 묘사할 것이냐의 문제는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여성에 대한 연구 자체에 대해 심도있게 공부해보진 않았으나, 여성이란 누구이고, 어떤 존재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사실 꽤나 근대적인 관심일 것이다. 물론 그 연구를 시작한 것은 남성일 것이다. 여기서 남성이란 생물학적 남자만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생물한적 여자또한 남성위주의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꽤나 남성적 가치나 판단등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결국 마치 서구인들이 동양인들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려 노력했다 하더라도 자신의 가치관에서 열등한 존재로 치부할 수 밖에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성이란 존재는 연구를 통해 여러가지 관점에서 열등한 존재로 보이게 된다. 여성의 감정적이고도 섬세한 성격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데 아주 제한적인 능력으로 보여질 수 있다. 그런데 누가 여성은 감정적이고 섬세하다고 하였나? 오히려 여성은 그런 존재라는 사회적 통념을 충실하게 흡수하여 자라난 존재들이 여성들이 되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질문은 여성에 대해 이야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상황과 담론들에 나타난 여성의 모습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성서가 쓰여진 시대의 여성관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리 풍부한 자료들은 없으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등의 저작을 보면 남성과 여성은 절대 두 극을 형성하는 대등한 존재들이거나 상하관계의 두 개채를 뜻하지는 않는다. 생물학적 남성과 여성이라는 눈에 보이는 차이는 존재하지만 고대 헬라 사회의 유일한 판단의 기준은 남성성(Masculinity)의 유무이다. 얼마나 마초적이냐를 기준으로 남성성의 상징인 영웅과 전사가 가장 상위이고 가장 남성성이 없는 여자가 최하위이다. 이는 만약에 여자라 할지라도 남성성을 많이 가졌다면 여성적 남자보다 상위에 설수 있음을 뜻한다. 즉 여성은 남성성의 부재를 뜻하며,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인식체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한 상황이다 보니 바울이 여성의 인권을 위해 싸웠다라고 하거나 예수가 여성의 인권을 위해 노력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논증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여권주의신장이라는 말은 여성이라는 의미에 대한 확인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미 우리는 여성을 바라볼때 탈식민주의에서 말해왔던 ‘타자화’라든가 ‘재현’의 문제가 여전히 존재하고 탈식민주의의 쟁점들을 활용하여 여성을 라볼때 더욱 심도있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스피박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Can the Subaltern Speak?

   스파박을 일약 스타덤에 올린 짧은 논문인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는 여성주의 탈식민주의 연구에 경종을 울린 기념비적 작품이다. 원래 서발턴 (Subaltern)은 그람시의 글에 나오는 ‘자신의 목소리를 가질 수 없는자들’을 뜻하는 것으로 the other(altern) 보다 더 아래 (sub)에 있는 자들을 뜻한다. 인도에는 서발턴 스터디 그룹들이 있는데 그들은 영국 아래의 식민지 생활동안 계속된 저항운동에서 나타난 서구의 근대적 담론에 대항하는 고유의 대항담론을 찾아내어 연구하는 자들이다. 그런 그들에게 스파박이 던진 질문은 식민지시대하에서 그리고 탈식민지시대하에서 진정한 서발턴들은 바로 여성들이며 그들의 정치적 행동이나 목소리들은 언제나 오해되고 이용된다는 것 이었다. 어쩌면 서발턴들은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들리워지지 않는다. 한국의 상황을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짧다면 짧은 한국의 독립운동사에서 여성들은 국가의 독립이라는 대의 명분아래 그들의 삶을 희생했다. 광복 이후로 계속된 민주화 운동과 노동운동에서 여성들은 국가를 위해 희생한 자들로 기록되어졌다.  유관순은 그런 예에 대표적인 인물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태극기를 들고 일어선 젊은 여성이라는 아이콘은 민족애라는 감성을 자극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장치이지만 거기에 내재한 여성성은 정치적 주체라기 보다는 민족적 감흥을 자극하기 위한 기폭제로만 사용되고 이내 사라진다. 노동운동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자신의 젊음을 바쳐 조국의 근대화에 기여하고 사라져간, 그리고 저항한 그들이 그려지는 것은 젊은 대학생의 혈기를 끌어올리거나 교과서의 한페이지를 장식하기 위해 사용될 뿐이다. 그들의 목소리, 그들이 참으로 원하는 것에 한국의 독립운동과 노동운동은 얼마나 관심이 있어왔을까?
   우리의 교회를 보자. 필자가 신학교에서 공부할 무렵, 필자보다 똑똑하고 열심인 많은 여학생들이 있었다. 그랬던 그들은 지금은 목사의 사모들로 조그만 교회의 목사들로 헌신한다. 그들은 자신의 정치적 목소리를 숨기고 교인들의 스트레스를 푸는 수단으로 목사를 돕는 도우미로 살아간다. 돈이 없다고 불평하면 믿음이 없는 사모가 되고 가정형편을 돕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구할려고 치면 사모가 바깥으로 돈다는 불평의 목소리를 각오해야 한다. 그러한 불평을 하는 사람들중의 많은 이들이 또한 같은 여성신도들이다. 수많은 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내며 자신의 시간을 들여 헌신한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남성 목회자들의 그림자를 자처해야하는 지금의 상황은 한국사회에서 여성문제를 들여다보는 작은 단편일 뿐이다. 근대화의 발전과 민주정치의 발전의 그림자에서 언제나 어둠속에 있어야 하는 인간의 개체수의 거의 반을 차지하는 여자들은 그러기에 진정한 서발턴 들이다. 물론 모든 여성들이 서발턴이라고 하는 것은 상징적인 표현이다. 여성들 중에서도 상위 3% 속하는 사람들이 있고, 유색인종들에 비해 언제나 상위를 차지한 백인 여성들도 있으며, 선진국에서 상대적으로 적은 차별과 많은 기회를 확보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기에 탈식민주의는 여성의 문제를 정치, 경제, 사회, 문화등의 복잡한 고리들속에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제 이러한 생각의 방식이 성서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살펴보자.

 

   바울서신, 그 복잡한 여성과의 관계

   이제 신약성서로, 또한 바울서신으로 들어가보자. 먼저 바울 서신에서 여성에 대한 논쟁은 여성학적 성서해석이 시작된 이후로 계속 되었는데,  바울은 과연 여성을 어떻게 생각했는가? 또는 바울은 여성 차별주의자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혹자들은 바울의 서신에서 여성에게 침묵을 강요하고 출산을 담당하는 것으로 여성의 지위를 국한 시키는 것을 가르쳐 바울은 여성차별론자임을 강조하고, 또 다른편에서는 본문은 후대의 첨가를 가능성이 많고 바울이 서신에 여성 지도자들을 로마서와 빌립보서에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진보한 사상을 가진 남녀차별철패론자로 본다. 시대가 더함에 따라 논쟁은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에 왔다가도 변화되는 과정을 거치고 있는데, 연구들을 계속 읽다보면 바울에 대해 궁금한 것이라기 보다는 연구자들이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하여 연구를 거듭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마치 슈바이쩌가 그의 유명한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역사적 예수를 발굴해내기 위해 지난한 노력을 하고 난후, 그려낸 예수는 바로 연구자 자신의 얼굴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 것과 같이 말이다. 이에 반해 탈식민주의 성서읽기는 해석의 스포트라이트를 바울에 맞추기를 거부한다. 성서의 시대의 여성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성서라는 텍스트는 여성들을 바라보기 위한 통로의 구실을 한다. 당시의 여성들의 모습이 문자에 그대로 나타나 있는 것이 않고 여러 복잡다단한 거미줄과 같은 그물망으로 가려져 있기에 하나, 하나 그 그물망을 그러내어 그 안에서 여성을 재발견해내야 한다. 아마도 그러한 복잡다단한 연구를 하는 이유는 당시의 여성의 모습속에 드러난 기독교 신앙과 마주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왜 이러한 연구가 기독교 신학에 기여할 수 있는지 짧게 나마 논해보자.
   성서가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이 문자화되어 기록된 것이라는 표현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이른바 축자영감을 따른다면 글자 하나하나에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되어 있으므로 성서 자체가 직접계시라는 말이 되지만, 좀 더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경험을 통해 여러 형태의 문명적 결과물과 조화되어, 언어를 통해 기록된 것이 성서라고 생각한다면 말씀에 대한 해석은 어떻게 그 안의 인간의 경험물들을 이해해 가느냐가 될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바울의 기록은 그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그 언어속에 들어있는 바울의 고뇌와 체험을 이해할 때만이 예수의 부활을 전하려 몸무림친 바울을 이해할 수 있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경륜을 간접적이나마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초기 1세기의 신앙인들의 기록이 신약성서에 담겨있고, 가장 예수와 지근 거리에 있었던 그들의 삶을 이해할때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삶에 대해서 다시금 결단할 수 있는 용기와 말씀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자, 이제 당시의 여성들에게 눈을 돌려보자. 인간 사회의 먹이사슬의 가장 밑바닥에 존재했던, 그저 한 집안이나 개인의 사유재산 정도로 존재했던 사람들이 바로 여성들이었다. 그들에게 기독교 신앙은 어떠한 의미로 다가왔을까? 사회의 불의를 온몸으로 감내해야 했던 사람들에게 구원은 어떤 의미였을까? 구약의 히브리 백성의 신앙의 시작이 노예생활로 부터의 탈출이었다면, 신약의 여성들에게는 예수의 부활이 어떤 의미였을까? 그 해답의 단초는 오로지 성서라는 텍스트 뿐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신약성서의 기록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이루어졌고, 성서의 기록자들 또한 그러한 현실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가깝게나마 여성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여성학적 성서해석은 탈식민주의안에서 영근 이론들을 바탕으로 성서에 접근하게 된 것이다.

 

   신약성서의 여성들

   이 장에서는 간략하게나마 여성주의적 성서해석으로부터 탈식민주의 여성주의적 성서해석까지를 대표적인 몇몇의 학자들을 통해 소개 한다.

   엘리자벳 S. 피오렌자 (Elizabeth S. Fiorenza)는 불모의 성서신학계에서 여성주의적 해석의 씨를 뿌리고 거두기까지 한 대표적인 학자이다. 그녀의 대표작 ‘In Memory of Her’는 마가복음 14장 9절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각주:1]는 말씀을 연구의 시작점으로 놓는다. 예수에게 최고의 찬사를 받은 이름없는 여인의 행적이 왜 이후의 복음사역에서는 사라져 버렸을까? 피오렌자는 초기 기독교의 역사가 바로 기독교 공동체의 가부장제화(Patriarchalization)가 이루어진 시기라고 본다.[각주:2] 바로 예수의 시대에 복음의 중심이 되었던 여성들의 신앙들이 그 이후에 서서히 사라져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피오렌자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전통적인 양식비평의 방법으로 후기의 전승을 담고 있는 다른 복음서들의 같은 이야기들을 마가복음과 비교하여 어떻게 이 이름없는 여인의 이야기가 퇴색되고 사라져가는지 보여준다. 바로 전통적인 성서비평을 방법을 통하여 어떻게 여성들의 이야기를 재구성해낼 수 있는가를 보여주려 한 것이다. 피오렌자가 주장하는 바는 성서에 남아있는 비가부장적 전승의 흔적들을 통하여 초기기독교 공동체가 남녀평등의 공동체를 꿈꾸었음을, 적어도 남성과 여성 지도자들이 활발히 활동했던 공동체였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고 믿었다. 피오렌자는 성서를 통한 여성해방은 바로 기독교 공동체의 초기 모습을 발굴하고 어떻게 그 공동체가 남성과 제국중심의 종교로 변화되어 갔는지 밝힘으로 가능한 것이라 믿었다.[각주:3]
   탈식민주의 시각에서 최초의 여성학적 성서해석을 시도한 무사 두베 (Musa S. Dube)는 피오렌자의 업적은 인정하면서도 그녀의 방법론의 문제점이 결국 성과 제국주의 담론이 얽혀있음을 보지 못하는 실패를 낳아 결국 여성을 얽매고 있는 복잡다단한 제국의 논리를 밝혀내지 못했음을 지적하였다. 두베는 먼저 피오렌자의 방법론이 전통적인 편집비평과 양식비평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함으로 텍스트 밖의 이데올로기를 지배하고 있었던 제국과 식민담론을 읽어내는 데 실패했다고 비판한다.[각주:4] 여성에 촛점을 맞추다보니 오히려 더 큰 콘텍스트에 대한 시각에서 멀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필자는 두베의 이러한 비판을 인정하면서, 그러한 피오렌자의 방법론이 초기 기독교를 이상화하는 결과를 낳았고 식민지시대의 저항공동체였던 기독교 공동체가 남녀의 평등을 실현한 이상적 공동체로 읽히워지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두베는 아울러 종래의 예수 대 제국의 담론을 비판한다. 예수 공동체와 제국을 대립관계로 놓고 예수의 복음에서 정치적 저항의 메세지를 찾아내는 연구는 저항의 한 축을 담당했던 여성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해왔다는 것이다. 성서 해석을 명확한 두축의 갈등 (지배자와 피지배자)으로 봄으로 여성에 대한 시각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한 해석은 현대 정치를 비판하는 윤리적인 해석으로 보일지는 모르나 바로 남성과 곁에 있는 여성의 문제들, 가정폭력, 이혼, 낙태, 임금 불평등, 인신매매, 성매매등과 같은 것들에 대한 하등의 비판적 능력을 상실한 비윤리적 해석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두베는 성서의 진정한 해방적 관점은 이 두가지를 아우르는 해석이어야 하며 성서에 여전히 존재하는 가부장제와 제국의 논리를 벗기고 성서를 탈식민화 (Decolonization) 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바로 성서의  중심에 내재하는 제국주의적 복음화에 대한 비판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때에야 비로소 성서는 여성과 남성의 평등과 우주적 하나님의 지혜 (Universal Sophia of God)를 말할 수 있는 텍스트로 읽히워 질 수 있다는 것이다.[각주:5]
   피오렌자가 치나치게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이상화하는 방식으로, 두베가 끝없이 성서의 제국담론을 벗기는 방법으로 여성과 식민해방의 가능성을 이야기했다면, 다비나 C. 로페즈 (Davina C. Lopez)는 그녀의 저서, The Apostle to the Conquered (정복당한 자들의 사도)에서 바울을 다시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여성에 대한 담론을 개진한다. 로페즈는 바울의 역사적 상황이 식민담론, 제국주의, 인종, 여성, 이원론등의 복잡다단한 거미줄 망으로 얽혀있었지만 그 중 가장 전면에 선명하게 대두되었던 이미지는 바로 남성과 여성의 이미지라고 주장한다. 그녀는 당시의 로마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었던 로마의 신전에 조각들중 클라우디어스 황제의 브리타니아(현재의 영국) 정복을 기록한 조각에서 로마의 황제는 남성으로 피정복민인 브라타니아는 여성으로 조각되어 있음에 주목한다. 반나의 여성으로 조각된 브리타니아는 그녀의 머리채를 로마의 남성전사에게 잡히워 진채 몸부림 치고 있다. 이에 로페즈는 여성이 피식민인과 피지배자로 형상화됨을 통해, 남성인 로마의 사유재산이 되고 그의 보호를 받아야 됨을 너무나 간단하게 이데올로기화 됨을 지적하였다. 결국 여성은 제국의 담론이 피지배자들에게 형상화 시켰던 이미지이고 이러한 이미지는 피지배자들의 마음에 아로새겨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남성적 이미지를 투사함으로 타민족에게 우월감을 형성하는 이데올로기는 유대민족에게도 존재했다. 이전의 웹진에서도 논했듯이 유대민족이 제국을 통해 내면화시켰던 제국의 이미지는 다웟왕국의 제건이나 정치적 메시아에 대한 소망하에서도 등장한다. 또한 끊임없이 복음안에서 제국주의적 복음주의로 나타난다.
   로페즈는 위와 같은 관점에서 바울의 회심사건을 남성적인 제국적, 유대적 이데올로기에서 예수의 부활을 토대로한 여성적, 이방인들을 (모든 다른 민족들) 위한 복음의 사도로의 전환으로 해석한다. 여타의 제국주의를 콘텍스트로한 성서신학 담론들이 로마제국이나 유대민족주의 속에 숨겨진 이데올로기에는 주목하였으나 정작 이방인 (Gentiles, pagans)의 정치, 사회적 콘텍스트를 읽어내지 못해온 것을 비판하면서, 로페즈는 할례에 대한 바울의 비판이나 바울 자신을 ‘어머니’ (갈 4:19)로 묘사하는 것을 새롭게 해석하여 바울의 복음은 남성적 제국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핍박받는 여성으로 묘사된 피식민인에게 향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고 주장한다. 바울의 박해자에서 박해받는자로의 역전은 종교적 영역을 벗어나 정치,사회적 영역에서 읽히워 질 수 있으며 여성학적 입장이 바울을 다시 봄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비록 로페즈가 로마제국의 이데올로기와 식민상황을 남성과 여성의 관계로 지나치게 환원시킨감이 있지만, 바울의 회심사건을 새롭게 해석하여 피지배자을 위한 복음에 재해석은 바울을 정치적인 관점과 종교적인 관점에서 함께 해석할 수 있는 탁월한 시각이라 할 수 있다.

 짧게나마 세번으로 나누어 탈식민주의와 바울의 관계에 대하여 약술해 보았다. 탈식민주의와 바울은 아직도 새롭게 조명되는 분야이므로 앞으로의 발전이 기대되는 학문의 장이 될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개역개정 막 14:9 [본문으로]
  2. Fiorenza, In Memory of Her, 35. [본문으로]
  3. Ibid. [본문으로]
  4. Dube Shomanah, Postcolonial Feminist Interpretation of the Bible, 39. [본문으로]
  5. Ibid., 41. [본문으로]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1. 2017.01.05 20:33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비밀댓글입니다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수강신청하기<<

>>수강신청하기<<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 발제 개요

20세기는 두 번의 세계대전은 물론 많은 국지전을 통해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세기임을 입증했다. 그런데 전쟁은 국가라는 공적 집단의 행위요 그 배후에는 모든 집단주의의 가장 폭력적 형태라고 할 수 있는 제국주의라는 악이 존재하고 있다. 전쟁은 우리에게 악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하고 특히 원초적 죄악 또는 “원죄”의 문제를 재고하게 만든다.

원죄를 막연히 인류 시초로 부터 내려오는 악의 경향, 인간의 본성에 포함된 악의 경향, 또는 인간 개인의 악의 경향, 인간의 실존상황에 내포된 악의 경향으로 보는 것은 원죄의 형식적 보편성을 유지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그것은 동시에 원죄를 대단히 추상적으로 또 개인주의적으로 간주함으로서 원죄 내용의 심각성을 간과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원죄의 형식적 보편성과 내용의 심각성을 동시에 표현하면서 개인적 죄와 사회적 죄 모두의 원천이며 맥락으로서 원죄를 다시 개념할 수는 없을까?

여기서 원초적 죄악(original sin)으로서 원죄를 개인과 집단의 차별을 넘어서 인간의 상호의존적 실존 속에 내포된, 내적으로는 억압적이고 외적으로는 침략적인 집단주의적 경향으로 개념하고, 이에 대한 반대개념으로 원초적 은총(original grace), 즉 인간의 상호의존적 실존을 포용적, 건설적, 사회적 유대로 전개시킬 수 있는 은총의 개념을 상정하면서, 이 두 개념의 삼위일체적 신학적 측면, 상호의존의 존재론적 측면, 그 발전과정의 역사적, 윤리적, 또 정치적 측면을 분석해 본다. 원죄는 개인적 차원의 개인적 죄도 아니고 특정 집단의 사회적 죄도 아니면서 이 두 가지 종류의 죄에 선행하는, 인간의 상호의존성에 내포되어 있는 원초적 죄의 경향이다. 개인적 죄와 사회적 죄는 모두 이 원초적 죄의 경향을 구체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두 개념을 교회론에 적용하여 교회 안에는 억압적이고 침략적인 집단주의적 경향은 없는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긍정적 유대의 구현으로서 하느님의 원초적 은총의 집단적 표현이 될 수 있을까? 교회 성원 개개인의 자기반성을 떠나 공동체로서 교회의 집단적 자기반성의 가능성은 없는가? 등의 질문을 던져본다.

본 강연의 근본취지는 전쟁의 잔학성에서 출발하여 추상적이고 무규정적이고 개인주의적일 수 있는 전통적 원죄개념을 보다 인간실존의 현실에 맞게 구체화하고 거기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원초적 은총을 상정하면서 교회는 교회내의 원죄와 싸우면서 원초적 은총의 보다 구체적 표현으로 혁신돼야 함을 강조하고자 한다.


* 발제자

민경석(Anselm K. Min) 교수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클레어몬트 대학원 대학교 종교학과 석좌교수(Dean and Maguire Distinguished Professor)이다. 밴더빌트 대학교에서 종교학 박사, 포담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1992년부터 클레어몬트대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헤겔과 아퀴나스, 해방 ․ 종교간 대화 ․ 다원주의 ․ 세계화의 문제, 현대 신학과 아시아 신학 등을 주제로 다양한 논문을 썼다. 현재는 세계화와 관련한 신학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자문위원이기도 한 민경석 교수는 평신도 신학자로서 교회쇄신을 위한 연구와 활동도 적극적으로 해왔다. 20대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접하고, 1970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면서도 미국 가톨릭교회와 교포 공동체의 일에 관여했다. 1987년부터 4년 간은 미주 한인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으로서 매년 강습회를 열어 사회교리를 전파하는 데 힘썼고, 1992년에는 동료들과 함께 교포 평신도 전국조직인 ‘미주한인가톨릭평신도연합’을 창설하고, 연간지 <만민의 빛 Lumen Gentium>을 출간한 바도 있다. 국내 저서로는 ≪한국교회 2000: 권위주의와 교회중심주의를 넘어서≫(분도출판사, 2000)가 있다.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를 통해 한국사회 청년층 문제를 새롭게 환기하여 주목받았던 엄기호의 신작. 기존의 인문사회과학이 관계 단절을 하나의 문제적 현상으로만 여겨왔던 관성에 도전한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 단절의 양상, 즉 우리가 언제 누구와 접속하며 또 언제 누구와는 단절하는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중산층, 시민사회 등의 사례를 채집해왔고, 결론적으로 우리 모두가 자신이 속한 가족, 직장 내에서 소통이 쉽지 않음을 호소하면서도 그 불통의 당사자와 직접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자기만의 ‘취향의 공동체’ ‘힐링’을 통해서만 이를 해소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던진다. 책 속에는 관계 단절이 어떻게 개인의 무기력을 낳고 곧이어 사회의 붕괴로 이어지는지를 날카롭게 드러내는 흥미로운 에피소드들로 가득하다.



책을 펴내며

프롤로그 누구의, 어떤 관계의 단절인가

제1부 악몽이 된 곁, 말 걸지 않는 사회

1장 정치공동체의 파괴: 폭로하고 매장한다
2장 단속사회의 출현: 타자와 차단하고 표정까지 감춘다
3장 기획된 친밀성: 철저히 감시하고 매끄럽게 관리한다
4장 사생활의 종언: 고독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제2부 쓸모없어진 곁, 몽상이 된 사회

1장 관계: 질문하면 ‘죽는다’
2장 소통: 위로를 구매하라
3장 노동: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라
4장 국가폭력: 껍데기까지 발가벗겨라

제3부 고통에 대면하기, 사회에 저항하기

1장 성장은 가능한가
2장 무엇이 우정을 가로막는가
3장 경청이란 무엇인가

에필로그 누구에게 말을 걸 것인가

주석

 

* 당일 북토크와 관련하여 미리 참조할 만한 저자의 인터뷰를 추천합니다.

1. 엄기호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듣는 감수성http://ch.yes24.com/Article/View/24805

2. ‘단속 ’ 아닌  애도의  권리를  애도의  공간을  http://education.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35600.html


 

  • 저자 : 엄기호  
최근작 : <단속사회>,<교사도 학교가 두렵다>,<상상하라 다른 교육> … 총 32종 (모두보기)
소개 :
울산에서 나고 자랐다. 초등학교 때 폭력적이고 부패한 교사를 만나 교육과 학교에 대한 문제의식에 눈떴다. 전교협 해직교사들의 편지글 모음인 《내가 두고 떠나온 아이들에게》를 중학교 때 읽으며 다른 교육의 가능성을 갈망하게 되었다.
사회학과에 진학하였지만 학부 시절에는 거의 공부를 하지 않고 가톨릭학생회 동아리 활동에 푹 빠져 있었다. 대학원 석사과정에 진학하고서야 공부를 시작하였지만 곧 국제단체에서 일하자는 제안을 받고 국제가톨릭학생운동 아시아.태평양 사무국에 나갔다. 당시 한창 달아오른 반세계화 현장에 참가하며 주로 대학생들의 사회의식을 고양하는 양성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일을 했다.
그 후 한국으로 돌아와 하자센터에서 글로벌학교 팀장을 하고 늦은 공부를 마무리하기 위해 문화학과 박사과정에 들어가 신자유주의와 청년 하위문화를 주로 연구하였다. 돌아보면 늘 교육의 언저리에서 살아온 셈이다.
성장이 불가능한 시대의 페다고지를 만드는 것을 삶의 화두로 삼고 있다. 2013년 박사학위를 마치고 현재는 덕성여대 겸임교수, ‘교육공동체 벗’에서 발간하는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을 하고 있다.
저서로 《닥쳐라, 세계화!》(2008),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2009),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2010),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2011)를 냈고, 이 외 다수의 공저가 있다.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BLOG main image
by 제3시대

공지사항

카테고리

웹진 <제3시대> (818)
특집 (8)
시평 (93)
목회 마당 (59)
신학 정보 (133)
사진에세이 (39)
비평의 눈 (69)
페미&퀴어 (23)
시선의 힘 (133)
소식 (153)
영화 읽기 (31)
신앙과 과학 (14)
팟캐스트 제삼시대 (12)
연구소의 책 (13)
새책 소개 (38)
Total : 344,778
Today : 787 Yesterday : 1,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