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우리의 삶-정치를 묻다

: ‘동작을’ 선거를 통해 바라본 우리시대 욕망의 정치학

이상철
(한신대 외래교수)

 

프롤로그: “동작을”과의 인연

내가 “동작을”과 인연을 맺은 것은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9년 여름, 나는 지금의 아내가 된 한 여인을 만났고, 그녀가 살던 동네가 “동작을”이었던지라 연애하던 기간 3년 내내 지하철 4호선 총신대입구역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 걸어 올라가 “동작을” 끝자락에 위치했던 그녀의 집 앞에서 헤어지고, 다시 “동작을” 길을 따라 내려와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갔었다. 그 후 우리는 결혼했고, 10년 전 미국 유학가기 한 두해 전부터 “동작을”에서 살다가 시카고로 먼 길을 떠났다. 그리고 10년 후, 2 주전에 귀국 한 우리는 다시 “동작을”에 삶의 둥지를 틀었다. 

귀국하자마자 온 동네를 난리로 몰아넣은 보궐선거 분위기 때문에 가뜩이나 시차적응 때문에 혼미한데 더 정신없이 보냈던 지난 2주였다. 마을버스 종점에서 연예인 같은 나경원을 만났고, 연애시절 해장국 먹으러 다녔던 남성시장 골목에서 역시 연예인 같은 노회찬과 악수했다. 그리고 오늘, 정몽준의 서울시장 출마로 공석이 된 “동작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나경원은 권토중래 끝에 노회찬을 49:48로 누르고 다시 국회로 입성하는데 성공했다.


“동작을”에 대한 前史

돌이켜보면 15년 넘게 “동작을”과 인연을 맺고 있는데, 한 번도 “동작을”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곳은 어떤 곳일까? 오늘 선거개표방송에서 잠시 스쳐가면서 본 내용인데, 이 지역의 정치적 성향을 가늠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잠시 언급하는 것이 도움이 될 듯싶다. 비교적 근래에 끝난 지난 6.4 지방선거를 살펴보자면, 서울시장 선거에서 당시 현직 “동작을” 국회의원인 정몽준이 서울시장 후보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동작을” 지역은 박원순이 정몽준에 비해 20% 가까이 앞선 지역이었다. 구청장 선거에서도 비슷한 지지도로 새민연 소속 후보가 당선되었다. 2012년 대선에서 당시 야당 후보였던 문재인의 지지도가 대통령으로 당선 된 박근혜보다 10% (44:54) 앞선 지역이 바로 “동작을”이었고,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도 박원순 현 서울 시장이 당시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에게 56:42로 승리를 거두었던 지역도 바로 이곳 “동작을”이다. 이 정도면 비교적 야당 성향이 짙은 지역이라 할 수 있다.

지역적으로 동작대로를 사이에 두고 “동작을”은 “서초갑”과 마주한다.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강남 8학군에서 소외된 지역이 “동작을”이고, 횡단보도 하나를 두고 “서초갑”에 비해 집 값이 두 배 이상 차이 나는 지역이 바로 이 “동작을”이다. 그리고 참 이상한 현상인데, 시내에서 밤늦게 집에 귀가할 때 택시를 잡으려고 동작구를 외치면 꼭 택시 한 두 대는 그냥 지나가지만, 서초구를 외치면 바로 멈춘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동작을”은 강남에 있지만 강남 스타일이 아니고 그렇다고 위치상 강북도 아닌…강남과 강북 그 중간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는 지점이 “동작을” 아닐까 싶다. 어쩌면 이곳 사람들은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으면서도 속으로는 “서초갑”의 삶을 동경하고 흠모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경원의 당선 공식: 다시 귀환한 ‘성공 신화’

언제부터인가 보수는 언어싸움에서 진보진영을 압도하고 있다. 노회찬과 기동민의 야권연대에 맞서 나경원은 “주민과의 연대”라는 구호로 맞섰고, 야권연대 후 박뱅의 승부가 예상되자 나경원은 “살려주세요!”라는 읍소를 날리기 시작했다. 시종일관 정권심판론 밖에는 할 말이 없었던 야권에 비해 카멜레온처럼 보수는 자신들의 색깔을 바꾸며 상황에 맞게 자신들을 변신시켰다.  

그 중에서도 이번 선거에서 나경원이 보여준 압권은 “동작을” 주민들이 차마 자기들의 입으로는 말 못하는 꿈과 환상을 다시 깨우고, 그간의 서러움에 공감하며 외친 “동작=강남 4구”라는 선거구호다. “이보다 더 명확한 복음이 ‘동작을’ 주민들에게 어디 있겠는가?” 20년 동안 마을버스 운전을 한 기사아저씨의 말이다. 그렇다, 성공신화만큼 성공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먹히는 약발도 없을 것이다. 유독 ‘동작을’은 그간 정몽준, 그 이전에 이계안 등 현대그룹 출신의 전문(?) 경영인들이 지역 국회의원을 차례로 대물림했던 공간이다. 현대그룹처럼 투박한 성공스토리를 자랑하는 코드가 어디 있을까? 그것의 정점에 바로 MB의 성공신화가 있다.  

그것이 옳지 않지만, 그것이 물론 진리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MB의 성공신화는 -가난한 집안에서 어렵게 공부해 명문대 진학. 현대그룹에 말단사원으로 입사 마침내 사장이 되고, 국회의원, 서울시장을 거쳐, 대통령에 오른 입지전적인 성공스토리- MB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던 그 무렵 ‘동작을’ 구민이라면, 아니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공리 같은 거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BBK 사건에 대한 전말이 대선 전 이미 만천하에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명박이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될 수 있었겠는가?  대표적 친이계 인사였던 나경원은 이런 MB류의 성공신화를 “동작을” 주민들에게 상기시키며 과거프레임으로 돌아가는 모험을 감행했고, 그것은 결론적으로 성공이었다.  

나는 이 글을 통해 나경원이 왜 승리를 했고, 노회찬이 왜 패배했는지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주체가 되어 그것을 채워야 하는 사람은 정치인들이 아니라 우리라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말하려는 것이고, 그에 대한 단서를 이번 선거와도 무관치 않은 이명박식 성공신화와 대비되는 안철수식 성공신화의 등장과 몰락을 통해 전개하고자 한다.


따로 또 같이: 안철수식 성공신화 Vs. 이명박식 성공신화

지난 6.4 지방선거와 이번 7.30 보궐선거를 거치면서 현실 정치인이 된 안철수는 단 두 번의 선거로 정치적 역량과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 보였다. 안철수가 상한가를 치던 무렵, 안철수 현상에 대한 다양한 분석과 해석이 있었다. 당시 미국에 있었던 나는 강호동이 하는 ‘무릅팍도사’를 통해 안철수를 처음 접했었는데, 솔직히 무슨 말을 하는지? 왜, 사람들이 그에게 빠졌는지?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슨 자기개발서 책 홍보하는 사람, 혹은 나이브한 행복전도사쯤 되는 사람인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은 왜 안철수에 열광했었나? 다시 한번 복기를 해보자. 안철수 현상의 배경에는 신자유주의의 기본정신이라 할 수 있는 2등은 기억되지 않는 무한경쟁, 승자독식 사회로 인한 누적된 국민적 피로감과 그런 정글로부터 탈출하여 함께하는 공동체적 가치로 국가를 개조해야 한다는 국민적 여망이 맞물려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안철수는 이명박과의 차별성을 부각한다지만, 둘은 공히 각자의 성공신화를 지녔다는 점에서 서로에게 거울과 같은 존재다. 물론, 안철수의 그것이 이명박식의 블도저 같은 성공신화가 아니라, 상식과 원칙에 입각한 성공신화라고 한다지만, 그 공정한 룰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현실의 무자비한 정글의 법칙안에서 깨끗한 승부를 하자는 것인데 그것이 도대체 가능이나 한 일인가? 대중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명박식 성공신화가 아니라, 상식과 원칙을 갖추고 덕성과 인간미까지를 겸비한 따뜻한 성공신화를 찾았고, 그 순간 안철수는 마치 메시아의 재림처럼 순간적으로 한국땅에 강림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냉정하게 안철수 현상을 평가하면, 그에 대한 국민적 열광은 표면적으로는 현실정치와 현실원리에 대한 부정이었겠지만서도, 내면적으로는 여전히 성공한 자에 대한 동경과 성공에 대한 욕망이 우리의 본능임을 단적으로 드러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안철수 현상의 明과 暗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철수 현상이 유지되었던 가장 큰 이유는 안철수의 잠행 때문이었다. 그의 침묵은 안철수로 상징되는 한국 정치 속 구멍 내지 얼룩을, 안철수로부터 야기되는 미래를 향한 지연(연기)을 창출하였다.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박원순에게 미련없이 서울시장 후보를 양보한 이후 안철수는 유력한 대권주자로 떠올랐지만 일체의 (현실)정치세력화 없이 2012년 대선 전까지 징후적 행보만을 거듭했다. 안철수가 상종가를 쳤던 시기는 바로 그 무렵이었다. 

현실정치의 일원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오히려 안철수라는 한국정치 현실 속 구멍과 얼룩과 침묵을 통해 새로운 시민정치와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기대했던 것이다. 이명박식 불도저가 아니라 안철수식 첨단 테크놀로지에 입각한 네트워크 안에서 이루어지는 정당정치에 대한 기대가 젊은 세대를 다시 정치로 소환하게 만들었고, 광장으로 모여들게 했다. 

하지만 정작 안철수는 자신을 호명한 대중들의 환호에 “당신은 무엇을 원하는가?”(Che vuoi) 오히려 반문한다. 위의 인용은 라깡이 환상공식에 등장하는 유명한 말이다. 환타지란 “당신은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답이 없는 질문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주체와 큰 타자 사이에 발생한다. 그 사이에서 환타지는 주체가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 고안된 것인데, 주체는 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환타지를 만듦으로 그 결여를 메운다. 

초기 안철수에게는 국민이 대타자였다. 그는 국민들에게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되려캐묻는다. 이 물음이 바로 현실정치에는 없었던 안철수의 신선함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안철수가 정치를 하면 잘 할 것이다’라는 막연한 기대가 아니었다. 안철수가 제공하는 환타지는 그가 정치를 하면 기존 정치에서 실험되지 않았던, 기존정치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발생할 것이라는 기대다. 하지만, 그것은 구체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텅 빈 공간이다. 안철수도 모르는 그 결여를 통해, 안철수도 오히려 반문하는 그 빈틈을 통해, 사람들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발생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것이다. 

안철수가 그것을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이 방식은 “동작을=강남4구”로 대변되는 나경원식 (보수주의)욕망의 정치학과는 대조되는 새로운 욕망의 정치학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안철수가 새정치를 내세우며 현실정치로 뛰어들어 김한길과 야합한 후, 새정치민주연합이라는 이름으로 본인의 빈틈과 구멍을 메우고 얼룩을 지우면서 환상은 사라졌다. 환타지가 사라지자, 그 환타지가 자아내는 기대와 율동도 사라졌고, 안철수도 사라졌다.


실패한 안철수에게서 배우다

7.30 보궐선거는 여당인 새누리당의 완승으로 끝이 났고, 야당은 완패로 인한 충격으로 빠져들었다. 여당은 그 동안 구사했던 그들 나름의 욕망의 정치학에 충실했고, 오랜 학습을 거쳐 더 세련되고 진정성있는 보수주의 욕망의 정치학을 완성해가고 있다. 반면, 야당은 새로운 프레임을 짜지 못하고 정권심판이라는 해묵은 구호만을 갖고 야당임내 우기다가 국민의 외면을 받았다. 아무런 환타지를 제공하지 못한 탓이다. 

야권은 초기 안철수 현상을 학습했어야 했다. 안철수 현상의 요체는 태풍의 눈과 같은 현실 정치 속 구멍과 결핍을 유지하는 것이다. 안철수도 모르고 국민도 모르는 그것 말이다. 그 결핍을 채우고 그 구멍을 메우려 하지만 결코 채워지지도 메워지지도 않는 그 텅 빈 공간을 통해 소통은 시작되었다. 그 구멍이 계속 찢어지면서 새로운 정치적, 사회적, 인문학적 상상의 장이 마련되고, 그 파열이 지속되고 이어지다 보면 어느덧 정치도 복원되고 다시 혁명을 꿈꿀 수 있는 동력이 생겨날 수 있었을 텐데… 그것에 대한 소중함을 모르는 안철수와 김한길로 대표되는 무능한 야당으로 인해 그 구멍은 닫혀버렸고 그 결과가 7.30 보궐 선거로 나타났다고 나는 판단한다.      

어떻게 우리는 다시 진보진영의 새로운 욕망의 정치학을 구성할 수 있을까? 나는 초기 안철수 현상에서 그 힌트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안철수 현상은 한국정치의 구멍과 틈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안철수 현상은 그 틈을 과거 같은 섣부른 공약, 구호, 당파성들로 채우지 않고, 계속 그 공백을 유지하면서 되려 우리들에게 그 틈과 구멍에 들어갈 것들에 대해 묻고 대답하게 한다. 안철수가 남긴 유산이라면 바로 이것이다. 정치적 주체가 결국 우리라는 점, 우리가 만드는 삶과 우리의 정치로 한국 정치의, 한국 사회의 틈과 균열을 매워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었고, 이제 그것을 학습해 주었던 안철수가 사라진 그 텅 빈 공간에서 우리가, 국민이 그 틈과 균열 속 주체로 홀로 남겨졌다. Are you ready?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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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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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otium1798
    2014.08.07 23:48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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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다만 이름이 잘못 표기된 곳이 눈에 띄네요. 문제인->문재인 / 정몽주->정몽준.
  2. 민주당
    2014.08.09 19:17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저는 빨강도 노랑도 둘다 싫던디
    http://jsapark.tistory.com/2303
  3. 2015.08.24 20:10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 공식 홈페이지 : http://trilateral.org/

    ※ 2015년 한국인 명단 ( http://trilateral.org/download/file/TC_list_4-15(3).pdf
    박태호(Bark Taeho) : 서울대 교수
    조석래(Cho Suck-Rai) : 효성
    정몽준(Chung Mong-Joon) : 정치인, 현대중공업
    함재봉(Hahm Chaibong) : 아산정책연구원 원장
    한승주(Han Sung-Joo) : 집행위원
    홍석현(Hong Seok-Hyun) : 집행위원, 중앙일보
    현홍주(Hyun Hong-Choo) : 김&장법률사무소 고문
    정구현(Jung Ku-hyun) : 경제기관단체인, 대학교수
    김기환(Kim Kihwan) : 전 골드만삭스 고문
    이홍구(Lee Hong-Koo) : 중앙일보 이사회 의장
    이재용(Lee Jay Y.) : 삼성전자 부회장
    이신화(Lee Shin-wha) : 고려대학교 교수
    이숙종(Lee Sook-Jong) : 성균관대 교수
    나경원(Na Kyung-Won) : 국회의원
    류진(Ryu Jin Roy) : 집행위원, 풍산 회장
    사공일(Sakong Il) : 중앙일보 고문
    신동빈(Shin Dong-Bin) : 롯데그룹 회장
    손지애(Sohn Jie-Ae) : 전 방송기자, 기업인
    서광현(Seo Kwanghyeon) : 한국무역정보통신 사장

    ※ 관련 글 - 데이비드 록펠러 : http://yellow.pe.kr/110053253061
  4. 2016.09.10 15:15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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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발새꺄 생각는데 좋각트작야 씨발새꺄
  5. 2016.09.11 17:59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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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가이드9]

 바울과 종말론

바울과 신비주의 I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보통 찬양집회나 기도회에서 흔히들 하는 기도를 들어보면 “주님 우리는 새롭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죄악으로부터 우리를 새롭게 하여 주시옵소서.”라는 말을 듣게 된다. 현실의 삶에서 여전히 세상의 원칙에 휘둘리는 사람들의 기도는 마치 기도를 통해 우리의 삶자체가 변화될 수 있다는 믿음위에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왜 교회는 이리도 더디게 변할까? 오히려 더 나빠지는것 처럼 보일까? 왜 우리는 의롭게 되지 못할까?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구원의 인침을 얻었다는 뜻이라고 하는데 왜 아무런 변화도 느낄수 없을까? 필자는 중학교 시절 여름 수련회를 다녀오면 마치 몇일의 기도와 말씀을 통해 나 자신이 변화되었다는 믿음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것을 느끼면서 믿음을 통해 나의 존재안의 신비로운 변화에 대해 의심한적이 있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전도사님마다 목사님마다 제각각이었다. 그 변화가 천천히 일어남으로 잘 모를수 있다는 말부터 그때 받은 성령이 제대로 된 성령이 아니었다는 말까지. 필자는 이 웹진에서 이 질문을 해결하려 하진 않는다. 다만 바울의 신학을 논하면서 바울이라면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할까를 생각해보자.

20세기에 위대한 위인으로 우뚝 솓아있는 의사이자, 음악가이자, 신학자이자, 아프리카 선교를 위해 스스로를 바친 알버트 슈바이쩌는 이러한 신비적 신앙이 바울을 오해해서 생긴것이라 말한 학자이다. 그는 Being-in-Christ로 대표되는 그리스도적 신비주의가 바울 신학의 핵심이며 그 핵심은 오로지 종말론에 대한 이해로부터 접근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보통 바울신학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하면 쉽게 대답하지 못하곤 한다. 비교적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방법은 바울신학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집이 토대로 하고 있는 기초가 무엇인지로 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제까지 그 기초에 대해 이야기 할때, 학자들이 유대교의 율법주의와 라비닉 유대주의의 언약적 율법주의 사이에서 오랜동안 논쟁해 왔고, 각기 다른 구원론이나 기독론을 생산하였다고 하였다. 또 다른 학자들은 예수의 부활 사건이라고도 했다. 또는 로마제국의 정치라고도 하였다. 위의 모든 것들과 관계를 가지고 있겠지만 필자가 지금부터 소개하려 하는 것은 바울신학의 확실한 기초, 또는 동인은 바로 종말론 (Eschatology)라는 시각이다.

종말론이라는 말을 들은 독자는 “뭐 종말론이 어쩼다고?”라고 하고 쉽게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시각 변화는 종래의 바울 신학의 근간을 흔들정도로 크다. 일단 보통의 그리스도인들은 종말론에 큰 관심이 없다. “예수님이 곧 오십니다!”라고 종종 말하고,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금방이라도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 같다.”라고 하지만 실제로 자신의 세대에 예수의 재림을 믿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만약에 정말로 그럴 것이라고 믿는다면 일단 다음 세대에 대한 투자가 아무런 의미가 없고 현실에서 열심히 하고 있는 많은 것들이 크게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하는데 세상을 떠들섞하게 하고 있는 말세론자들 이외에는 그러지 않는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메시아에 대한 소망은 점점 현실적 삶에 대한 고민으로 바뀌어갔다. 그것을 타협이라할 수도 있고 변절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 결과로 교회와 신약신학에서 현실적 종말론은 오랫동안 심각하게 다루어 지지 않았다. 칭의라든가 구원이라든가 교회라는 주제들은 쉬지 않고 줄기차게 다루어 지지만 종말론은 요한 계시록 연구 정도나 전도 부흥회의 하루 프로그램을 장식할 뿐인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한다면 과장일까?[각주:1] 그러나 신약성서의 저자들이 바로 내일 올지도 모를, 또는 자꾸만 연기되어가는 재림을 기다리는 긴장가운데서 하루 하루를 살았다고 생각해보자. 그러한 생각이 그들의 삶과 신학에 끼친 영향을 우리가 간과할 수 있을까? 재림에 대한 믿음 하나은 때로는 교회의 교리를 송두리채 바뀌고, 온순한 사람들조차 생명을 아끼지 않는 순교자로 변모시키는데, 종말론에 대한 숙고 없이 우리가 신약성서를 또는 바울서신을 재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종말론에서 부터, 종말론에 의해, 종말론을 통해 바울 서신을 이해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하나의 체계적인 해답을 거의 최초로 제시한 신약학자가 바로 알버트 슈바이쳐이다.

슈바이처를 신약학자로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지만 신약신학도들에게 슈바이처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역사적 예수 연구는 지워질 수 없는 자취를 남긴 위대한 통찰이었다. 당시의 예수를 인류 역사의 혁명가나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해 연구해야할 인물로 보았던 자유주의 신학에 맞서서 예수를 종말의 시대의 예언자이며 메시아 왕국을 더 빨리 오게 하기 위해 자신을 역사의 수레바퀴에 던진 인물이었다고 슈바이처는 주장하였다. 그의 연구의 영향력은 그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묘사보다는 당시 자유주의적 예수연구에 대한 준엄한 일침에 이었는데, 그 이후로 예수를 일반적 위인으로 그리거나 위대한 사회주의자로 서술하는 경향에 마침표를 찍었을 뿐 아니라, 역사적 예수를 그리는 이들은 예수의 얼굴이 아니라 자신의 얼굴이나 자신이 원하는 얼굴을 그릴뿐이라는 위대한 통찰을 보여주었다. 이에 반해, 그의 바울에 대한 연구는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슈바이처는 아프리카 선교사역중에 안식년을 받아 독일로 돌아와 ‘바울과 신비주의’를 저술하였는데 보통은 바울을 종말론적 지평에서 서술한 첫번째 저작으로 소개될뿐이었다. 그의 ‘바울과 신비주의’라는 저작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그의 연구에 비해 평가절하된 경향이 있다. 첫째로 유대교적 종말론에 중점을 두는 그의 연구가 당시의 헬레니즘을 중심으로 바울을 연구하던 경향과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개신교 바울신학이 바울의 칭의론에 대한 연구에 매몰된 나머지 칭의론을 바울신학의 핵심으로 보지 않는 슈바이쳐의 저작을 다룰 수 없었기 때문이라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이번 글에서는 슈바이쳐의 저작을 중심으로 종말론을 통해 바울의 저작을 새롭게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슈바이처의 통찰이 상당히 설득력 있음을 살펴볼 것이다.


묵시문학(Apocalyptic Literature) 과 종말론(Eschatology)

보통 요한계시록 또는 요한묵시록으로 대표되는 세계 종말에 대한 이야기는 흥미위주의 다큐멘타리들의 단골 소재이다. 사탄이나 세계종말에 대한 영화나 드라마에서 성서는 주요 자료로 쓰여지고 보수적인 교회나 신학에서는 실제 종말의 시기에 대한 추측이 주요 논쟁의 쟁점이 되기도 한다. 슈바이쳐와 바울의 종말론을 다루기 이전에 먼저 간단히 성서학에서 말하여지는 종말론이나 묵시문학에 대해 간단히 정리해 보자.

종말론(Eschatology)은 끝을 뜻하는 헬라어 에스카톤(Eschaton)과 지혜나 지식을 뜻하는 (logos)로 부터 나온  로지(logy)의 합성어로써 역사의 종말에 대하 논하는 학문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마치 크리스토로지(Christ+logy)가 ‘기독론’또는 그리스도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해 논하는 학문인 것과 같다. 바로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누군가가 “당신의 역사의 끝이 어떻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까?”라고 묻는다면 당신의 생각이 어떻든 어느정도 논리적으로 생각을 설명하려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당신의 종말론이된다. 이 ‘종말론’이라는 것이 성서와 연결되는 이유는 성서에서 인류역사의 마지막에 대한 말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말론은 누구나 자유롭게 말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으며 굳이 성서에 얽매일 필요가 없는 상당히 넓은 학문이다. 그 논의중에 성서와 연결시킬때 종말론과 성서간의 연결점이 생겨난다.

성서를 펴고 세계 종말에 대한 말들을 찾아보면 바로 눈의 띄는 것이 있는데, 그 구절들은 다니엘서와 요한 계시록에 분명하게 나타나고 복음서들에 몇몇 구절들 바울서신들에서도 몇몇 구절들이 보인다. 복음서는 예수에 대한 고백과 기록이고 바울서신은 바울이 썼던 편지들이고 세계의 마지막에 대한 구절은 극히 일부이며 그 묘사도 단편적인 서술에 그치므로 복음서는 복음서로 부르고 바울서신은 그야말로 편지라고 부르지만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는 세계종말에 대한 나름 역사적이고 전체적인 서술이 보이는바, 이 둘을 묵시문학(Apocalyptics Literature)이라고 부르고 이를 하나의 문학적 장르로 구분한다. 시의 형식을 가진 글을 시라고 부르고, 소설의 형식을 가진 글을 우리가 소설로 부르듯이 인간의 글을 근대에 들어와서 여러 형식으로 분류하고 그 형식에 따라 이름짓는 현상이 나타났는데, 존 콜린스 (John J. Collins)로 대표되는 묵시문학 연구집단은 묵시문학이라는 하나의 형식적 장르를 만들고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을 묵시문학이라 불렀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당시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을 적었던 사람이나 사람들은 세계종말에 대해 말하고 기록한 어떤 전통과 형식에 따라 둘을 저술했다는 것이다. 곧, 유대주의와 초기 기독교 공동체안에 종말에 대해 서술하고 발전시켰던 전통(마치 예언 전통이나 지혜 전통과 같이)들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묵시문학 장르를 하나의 구성된 문학적 흐름으로 보는 사람들은 묵시문학을 읽는 형식화된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마치 우리가 시를 읽을때 소설을 읽는 것처럼 읽어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묵시문학이라는 장르를 확립하고 찾아보면 성서 이외에 외경과 위경에 묵시문학이라고 볼 수 있는 글들이 있는데 보통의 분류는 다음과 같다. -1 (Ethiopic Apocalypse of) Enoch, 2 (Slavonic Apocalypse of) Enoch, Sibylline Oracles, 
Treatise of Shem, Apocryphon of Ezekiel, Apocalypse of Zephaniah, The Fourth Book of Ezra, Greek Apocalypse of Ezra, Vision of Ezra, Questions of Ezra, 
Revelation of Ezra, 
Apocalypse of Sedrach
, 2 (Syriac Apocalypse of) Baruch, 3 (Greek Apocalypse of) Baruch, Apocalypse of Abraham, Apocalypse of Adam, Apocalypse of Elijah, Apocalypse of Daniel.-[각주:2] 그리하여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과 함께 앞에 언급된 글들을 모두 묶어서 묵시문학이라 한다. 묵시 또는 묵시록(apocalypse)으로 번역할 수 있는 Apocalypse는 성서학에서는 보통 묵시문학과 같은 용법으로 쓰인다. 그리고 묵시사상(Apocalypticism)은 세계 종말에 대한 관점으로 시작하는 세계관이나 생각들을 포괄하는 표현이다. 묵시문학의 근원이나 형식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언급하기로 하고, 묵시문학이 성서학에서 가지는 의미에 대해 간단히 생각해 보자.

구약성서 또는 히브리 성서가 기록된 시대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후에 겪은 길고 긴 식민지 시대였다. 이전까지 유대국가들의 기둥역할을 하였던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한 제사장 전통과 그 대척점의 예언전통, 그리고 왕정시대의 역사를 기록했던 신명기사가등의 역사서술 전통과 왕국의 엘리트를 중심으로 발달했던 지혜전통의 시대가 국가의 몰락과 함께 끝이나고 있었다. (물론 그 이후에도 지혜전통의 민초들의 삶의 지혜로, 예언전통등과 함께 작게나마 명맥을 유지했다.) 끝나지 않는 식민시대와 오지 않는 다윗왕국의 부흥에 지쳐갈 무렵, 새로운 종교 전통이 유대사상안에서 태어났다. 이것은 하나님의 왕국이 심판과 함께 불현듯 세계밖에서 온다는 새로운 형식의 역사를 바라보는 방식이었다. 이른바 묵시전통이라 불리게 된 유대정신사에 새로운 계기가 된 이것은 종말론이라 불리우는 역사의 끝에 대한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이전가지의 유대 전통속에서 생산되어온 신학들은 이를 통하여 새롭게 조명되게 되었다. 중요한 몇가지만 살펴보자.

이전까지의 유대전통은 인간 사회와 현실적 상황에 대하여 민감했을뿐 아니라 정력적으로 참여하였다. 예언전통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사회정의에 대해 준엄한 비판의 메세지를 생산하였다. 지혜전통은 나름대로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법칙과 인간관계에 대한 통찰을 제공했다. 이에 반해 묵시전통은 현실세계를 곧 하나님의 심판속에 사라질 곳으로 여긴다. 현실 정치와 그 위정자들은 심판의 대상이긴 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대상인듯 보인다. 사회의 정의보다는 과연 누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것인가가 더 중요한 문제라 말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세속화된 기독교적 묵시운동이라고 볼 수 있는 다미선교회 사건을 생각해 보면 묵시전통이 가지는 부작용을 좀 더 쉽게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필자는 묵시전통이야말로 기독교에 폭팔적인 생명력을 불어넣어준 위대한 종교적 운동이자 현대사회와 기독교에서 반드시 기억되고 새롭게 논해져야할 주제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와 묵시전통과 종말론을 통한 현대 기독교 갱신의 문제를 천천히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일단 지금은 알버트 슈바이처와 함께.


바울의 신비주의와 종말론

신비주의(Mysticism)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면, 보통 ‘초월적 실재와 하나되는 즉각적인 체험’이라고 나와있다. (브리테니커 참조) 흔히 바울의 신비주의라고 하면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언급한 삼층천의 체험등을 언급될뿐 신비주의는 바울에게는 조금은 생경한 주제이다. 슈바이쳐가 바울의 신비주의를 언급할때, 초월적 실재인 신과 하나되는 체험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점에서 슈바이쳐는 명확한데, 그는 바울의 신비주의는 Being-In-Christ라고 말한다. 다른 표현으로 Christ-Mysticism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바울의 서신을 읽다보면 예수 그리스도와 믿는자들의 관계가 자주 앤(en-헬라어)/in(영어)의 표현으로 자주 등장한다. In Christ, 예수 안에서 라는 바울이 즐겨 표현하는 말은 구원에 대한 논증에서 부터 믿는자의 실제 생활에 대한 윤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보통은 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영에 믿는자가 참여한다는 상당히 형이상학적인 해석을 붙이는 경우가 많지만 슈바이쳐는 바울이 직접 말하는 바와 같이 예수안에 연합된다는 표현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실제적 경험”을 느낀다는 것이다.[각주:3] 그러기에 슈바이처가 보는 바울에게는 헬라적인 신비주의의 자리는 없다. 보통 헬레니즘에서 부활은 재생(rebirth)으로 해석된다. 헬라세계의 신화에서 부활은 흔히 죽고난 후에 새로운 생명체로 다시 태어난다. 보통 기독교에서 중생이라고 표현되며 요한복음의 니고데모와 예수의 대화속에 나타난 ‘불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남을 뜻한다. 비록 요한복음에서는 헬라적 표현으로 중생의 개념이 나오지만 슈바이쳐는 바울에게는 믿는자의 중생은 없다고 말한다.[각주:4] 적어도 바울에게는 성령을 받으면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생거짓말이라는 말이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이 자신의 선행을 위한 무능력을 토로하듯이 인간의 신성화(deification)는 바울에게는 낯선 개념이며,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다는 것은 “세례의 순간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이다.[각주:5]

이러한 바울의 신비주의를 다시금 확인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 슈바이쳐는 그의 신학 저서에서 예수와 바울을 헬라적 종교관과 세계관으로 해석하던 당시 독일 신약신학계를 통렬히 비판한다. 예수와 바울은 온전히 유대적 세계관에서, 특별히 종말론적 세계관에서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보편적인 종교개념과 역사관으로 예수를 우주적 정의와 사랑을 외친 혁명가나 현자로 그리고 바울을 그런 예수의 가르침을 고등종교의 형태와 사상으로 발전시킨 사람으로 보던 당시의 연구가 가지는 한계가 슈바이쳐에게는 너무도 분명하게 보였다. 헬레니즘적 심볼리즘에 치우친 기독교 신비주의는 개신교에 두가지 성례전, 세례와 성만찬을 형식적 종교제의로 변모시켰다. 원래 바울에게는 이 두개의 성례전은 예수와 함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는 유일한 통료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심볼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성례전은 마술과도 같은 효과를 보장한다. 세례를 받는 것으로 죄의 사함을 얻고 성찬에 참여함으로 예수의 몸과 피와 연합한다. 이는 신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이에 참여함으로 인간은 신의 영역을 체험하게 된다. 이러한 신비주의적 신앙의 목적은 불멸의 삶이다. 죽어서 다시 살아나는 불멸의 삶이 신앙의 목적이 되는 것이다.[각주:6] 필연적으로 윤리적 관점은 뒷전이된다.

바울의 신학은 어떻게 불멸의 삶을 얻을 것이냐?하고는 거리가 멀다. 그의 관심은 새롭게 변화되는 세계내에서 살아가는 믿는자의 운명이다.[각주:7] 세례는 이제 자신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들어간다는 시작을 의미할뿐, 그것 자체가 가지는 마술적 효과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공동체에게 세례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들어간다는 세례식을 시작으로 믿는자는 완전히 다른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되는데, 바울은 서신을 통해 과연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가르쳐 주고 싶었다. 첫째,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지금까지 세계를 지배해 왔던 세력의 시대가 끝이났다. 곧 종말의 시대가 막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묵시문학에서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사탄의 세력인데 그들에게는 무저갱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그들에게 이제 심판이 임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예수의 죽음은 그와 연합하여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는 사람들의 죄를 해결해주었다. 셋째, 이제 믿는자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선택받은 자로써 마지막 메시아가 통치하는 제국의 수혜자가 된다.[각주:8] 이러한 변화 이후에 곧 새하늘과 새땅이 시작되고 선택받은 자들은 메시아 왕국으로 들어가게 된다. 바울의 서신을 살펴보면 바울은 예수가 금방이라도 재림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살전 1:10, 2:19, 3:13, 4:23) 비록 학자들이 후대의 바울서신에 지연된 종말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고 하지만 바울이 그리 멀지 않은 때의 재림을 의심했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각주:9] 그러므로, 슈바이처는 바울이 말했던 여러 주제들은 모두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종말의 시대, 곧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는 시대적 배경을 통하여 해석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바울이 말하는 구원의 교리, 이신칭의 (Justification by Faith)조차도 종말론적 지평에서 읽어야 된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바울의 종말론적 신비주의와 구원론

보통 “구원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보통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대답할까? 아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사함의 확신이나 하나님앞에서 부끄럽지만 의인으로 바로선 자기 확신정도의 대답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위 시한부종말론자들에게 구원이 무엇인지 물으면 어떤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그들에게 구원은 아마도 이 세계가 끝장이나고 맞이하는 영광의 시대라고 대답하지 않을까? 바울의 구원론이 현재에서 오해되는 결정적인 차이가 여기에 있다고 슈바이처는 생각했다. 종말론적인 지평에서 구원이란 메시아 왕국의 시작을 뜻한다. 이는 인간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하나님 사이에 일어나는 일종의 거래가 아니다.[각주:10]

예수 그리스도 이전의 시대는 죽음과 고통의 시대만이 아니라 앙겔로스(angel)의 시대이다. 여기서 앙겔로스는 흔히 영어로 angel로 번역되어 우리에게 ‘천사’로 다시금 이해되지만 원래 헬라어 ‘앙겔로스’의 의미는 메신저, 또는 심부름꾼을 뜻한다. 유대의 묵시문학에서 하나님의 심판이전의 시대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이 지배하는 시대이다. 에녹서에 따르면 창세기 4장 전반에 나타난 천사들의 반란은 금세 진압되었지만 그들과 인간 사이에 태어난 악마 (Demon)들이 세상의 골칫덩이로 남게 되는데 그들의 왕인 사탄(Satan-디아볼로스)은 인간의 사악함을 고발하는 자로써 하나님에게 심판날까지 세상에서 거주하는 것을 허락받게 된다. 사탄에게 주어진 시간이 끝나는 시기가 바로 메시아가 나타나는 시기이며 바로 구원의 시대인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 가지는 첫번째 의미이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새로이 시작된 시대를 의미한다. 그러나 묵시문학의 기록을 보면 메시아 왕국의 시작 이전에 환난의 시대가 시작된다. 그 환난의 시대에서 믿는자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고난을 감내함으로 그들의 죄를 사함받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되는데, 바로 그 믿는자가 받아야할 고난을 대표하여 죽은자가 바로 예수이다.[각주:11] 바울의 이러한 해석에는 그가 가지고 있었던 두개의 전승, 속죄적 죽음에 대한 제사전승(고전 15:2)과 메시아니즘(롬 1:4, 빌 2:8-11),을 종말론적 지평아래에서 종합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즉, 곧 도래할 메시아 왕국을 위해 예수는 죽음으로 환난의 시대의 고난을 대신 지고 부활함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연것이다. 결국, 바울에게 구원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현실적으로 경험하는 선택받은 자들이 하루 하루 이루어 가는 것이다. 역사의 종말의 시기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의 문제가 바울에게 중요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고, 보통 대충 넘어가는 바울의 윤리적 권고나 믿는자에 대한 충고들이 바울서신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종말론적인 긴장을 바울을 신학에서 제거해 버릴때 나타나는 부작용이 바로 믿음만을 부르짖는 신앙이고 윤리를 강조함을 율법적으로 비판하는 복음이다. 현대 기독교의 도덕적 타락을 근본적으로 논의 하려면 바울신학에서 종말론을 제하여 버린 신학에서 먼저 찾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신칭의?는 율법페기론은? 루터가 말했듯이 오직 믿음으로!라는 바울의 목소리들은 어떻게 된 것인가? 다음 원고에서 슈바이쳐가 종말론적 지평을 가지고 이제껏 개신교회들이 금과옥조로 섬겨왔던 구원론에 대한 시각을 교정해 나가는 것을 지켜보기로 하자.  

Charlesworth, James H. The Old Testament Pseudepigrapha, Vol. 1: Apocalyptic Literature and Testaments. 1 edition. Garden City, N.Y: Doubleday & Company, 1983.

Schweitzer, Albert. The Mysticism of Paul the Apostle. Baltimore, Md: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98.


ⓒ 웹진 <제3시대>



  1. 소위, ‘위기의 신학’으로 불리는 몰트만의 신학이나 불트만의 제자인 케제만등이 종말론적 신학과 신약신학을 말하였고, 두번의 세계대전이나 밀레니엄의 때에 종말론이 자주 언급되긴 하였지만 신약을 이루는 중요 주제로써 꾸준히 다루어지거나 조명된 것은 최근에 이르러서이다. [본문으로]
  2. Charlesworth, The Old Testament Pseudepigrapha, Vol. 1, 4. [본문으로]
  3. Schweitzer, The Mysticism of Paul the Apostle, 16. [본문으로]
  4. Ibid., 15. [본문으로]
  5. Ibid., 17. [본문으로]
  6. Ibid., 23. [본문으로]
  7. Ibid. [본문으로]
  8. Ibid., 25. [본문으로]
  9. 갈라디아서와 고린도전서 로마서는 율법에 관한 논쟁이 주를 이루지만 여전히 종말론적 믿음이 보여진다. (갈라디아서 1:4, 4:10; 고린도전서 7:29;31, 10:11, 6:3, 3:13-15, 11:26, 26:22 고린도후서 1:14, 5:10, 11:2; 로마서 8:19;11;12, 16:20; 빌립보서 1:6, 1:10, 2:10, 3:20-22, 4:1-5) [본문으로]
  10. Schweitzer, The Mysticism of Paul the Apostle, 54. [본문으로]
  11. Ibid., 6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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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게 하는 것과 보지 못하게 하는 것[각주:1]

 

정용택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35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 사람(나면서부터 눈 멀었다가 예수로부터 고침을 받은 사람)을 내쫓았다는 말을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만나서 “네가 인자를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 36 그는 대답하였다. “주여, 그분이 어느 분입니까? 내가 그분을 믿겠습니다.” 37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이다.” 38 그는 “주님, 내가 믿습니다” 하고 말하고서, 예수께 엎드려서 경배하였다. 39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사람은 볼 수 있게 하고, 볼 수 있는 사람은 눈이 멀게(blind) 하려는 것이다.” 40 예수와 함께 있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우리도 눈이 먼 사람이란 말이오?” 하고 그에게 말하였다. 4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도리어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 - 요한복음 9장 35-41절

[7:53 그리고 그들은 제각기 집으로 돌아갔다. 8:1 예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2 이른 아침에 예수께서 다시 성전에 가시니, 많은 백성이 그에게로 모여들었다. 예수께서 앉아서 그들을 가르치실 때에, 3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간음을 하다가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워 놓고, 4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5 모세는 율법(레 20:10; 신 22:22-24)에, 이런 여자들을 돌로 쳐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예수를 시험하여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는 속셈이었다. 7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 8 그들이 다그쳐 물으니, 예수께서 몸을 일으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는 다시 몸을 굽혀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 9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나이가 많은 이로부터 시작하여, 하나하나 떠나가고, 마침내 예수만 남았다. 그 여자는 그대로 서 있었다. 10 예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 너를 정죄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느냐?” 11 여자가 대답하였다. “주님,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 요한복음 7장 53-8장 11절



1. 보지 못하던 사람은 볼 수 있게, 보고 있던 사람은 보지 못하게

요한복음 9장은 예수님 당대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다”는 22절의 상당히 독특한 진술로 인해, 요한복음 연구학계에서는 오랫동안 논란의 중심에 있어온 본문입니다. 예컨대 22절에 등장하는 ‘회당으로부터 축출하다’ 즉 ‘출교하다’로 번역되는 단어인 ‘아포쉬나고고스’(aposynagogos) 때문에 그런 것인데요. 이 단어가 예수님 당대의 상황 보다는 1세기 후반의 요한공동체가 처해 있었던 유대교 회당과의 갈등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마틴(J. L. Martyn)의 획기적인 주장 이후 요한공동체의 역사와 신학에 관한 수많은 가설들이 제기되었습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예수님 사후부터 성전이 파괴되고 유대가 로마에 완전히 종속되는 70년 전쟁 이전까지의 역사적 상황이 반영된 사도행전이나 바울서신 어디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이 회당에서 공식적으로 쫓겨났다는 진술은 발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85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알려진 유대교 회당의 공공 기도문인 쉐모네 에스레(Shemone Esre)의 비르카트 하-미님(Birkath ha-Minim)에 나타난 ‘나사렛파와 이단들’에 대한 저주가 발견이 되었는데, 마틴은 요한복음 9장 22절(그리고 12:42, 16:2)의 아포쉬나고고스가 이 기도를 통해 일어난 회당으로부터의 그리스도인 축출 사건을 가리키는 전문용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이 전하고 있듯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이들이 예수님 당대에 회당에서 쫓겨났다는 보도는 요한공동체가 자신들의 현재적 경험을 예수님 당시의 과거로 투영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라는 겁니다. 마틴은 그런 의미에서 요한복음이 요한공동체와 역사적 예수에 관한 이야기가 결합된 두 차원의 드라마라고 말합니다.

바로 그러한 저간의 사정으로 인해, 학자들의 관심은 정확히 9장 34절(“그리고 그들은 그를 (회당) 바깥으로 내쫓았다”)까지 일어나고 있는 상황 즉, 소경이었다가 눈을 뜬 사람과 그 부모들을 향한 바리새인들의 심문 및 추방 사건의 역사적 진실 규명에만 쏠려 있었습니다. 정작 눈 뜨게 된 남자가 바리새인들로부터 회당에서 쫓겨난 후에, 예수님과 만나서 나누는 대화나 그 대화 중에 바리새인들이 끼어들어 예수와 나누는 대화가 갖는 신학적 의미를 성찰하는 데는 소홀하게 된 것이지요. 오늘 살펴볼 본문에 첫 번째에 해당하는 본문에서 예수님이 하고 계신 말씀의 요지는 크게 두 가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당신은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는데, 그 심판은 다름 아닌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보지 못하게―원문에 따르면, ‘눈이 멀어 버리게’―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에 발끈한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이 눈이 먼 사람이라는 것이냐고 따지자, 예수는 당신네들이 스스로 눈이 멀었다고 생각한다면 그나마 다행히 죄인이 아니지만, 발끈하는 태도로 보아 스스로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당신네들은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대체 이 이야기가 무슨 뜻일까요? 예수가 말하는 보게 하는 것과 못 보게 한다는 것이 심판의 행위의 일종이라면, 그것은 단순히 눈이 먼 사람을 치료해서 볼 수 있게 한다거나 반대로 눈이 잘 보이는 사람을 해코지하여 실명하게 하는 그런 차원의 얘기는 분명히 아닐 것입니다(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좀 유치해지잖아요?). 오히려 이 이야기는 매우 신학적인 차원의 심오한 진리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리는 심판으로서 보게 하는 것과 보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여러분들과 함께 찾아보고자 합니다. 저는 예전부터 예수님의 이 발언에 담긴 신학적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찾는 데 고심해왔습니다. 어쩌면 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앞에 소경의 치유 이야기가 먼저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도 해봤습니다. 앞의 치유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가 하신 이 말씀의 진의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저도 그렇지만, 요한복음을 주석한 학자들 역시 이런 예수의 심오한 주장이 어떤 방식으로든 요한복음 본문 안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9장 1-41절과 그 뒤에 바로 이어지고 있는 10장 1절 이하의 이야기들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모습을 띠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9장 35-41절에서 중요하게 드러나고 있는 “보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에 관한 예수의 발언과 10장 1절 이하의 ‘양의 우리의 비유’나 ‘선한 목자의 비유’는 문맥상 전혀 관계가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불트만을 비롯한 많은 주석가들은 본래의 요한복음에서는 9장 41절 뒤에 오는 본문이 현재의 10장 1절이 아니었을 것으로 보고, 복음서의 순서를 각기 나름대로 재구성해왔습니다. 불트만의 경우는 8장 12절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이 9장 41절 뒤에 오고, 8장 12절 뒤에 다시 12장 44-50절 12:44 예수께서 큰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요,  45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다. 그것은 나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47 어떤 사람이 내 말을 듣고서, 그것을 지키지 않을지라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는 것이다.  48  나를 배척하고 나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심판하시는 분은 따로 계신다. 내가 말한 바로 이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49  나는 내 마음대로 말한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무엇을 말해야 하고 또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가를, 친히 나에게 명령해 주셨다. 50 나는 그 명령이 영생을 준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무엇이든지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해 주신 대로 말할 뿐이다.”

이 와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또한 8장 13-20절은 원래는 8장 12절 뒤에 와야 할 것이 아니라, 5장의 뒤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그런 식으로 해서 9장 35-41절에서 언급되는 보게 하는 것과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요한복음 자체 내에서 찾아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이것은 보게 하는 것과 보지 못하게 한다는 진술을 또 다른 신학적 담론으로 되풀이한 것이지, 해석의 실마리가 될 수 있는 실례(實例)는 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2. 시선은 권력이다. 진리는 시선의 권력의 산물이다.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참조하여, 요한복음 9장의 상황을 잠시 정리해보겠습니다. 9장은 세 개의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장면은 예수와 제자들이 소경인 사람을 화두로 대화하다가, 예수가 그를 고쳐주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1-7절). 두 번째 장면(7-34, 특히 13-34절)은 바리새인들과 고침 받은 사람의 대화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바리새인들은 그가 눈을 뜨게 된 것을 삐딱한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사람을 윽박지르며 말합니다. “너를 눈뜨게 한 이는 메시아(그리스도=구원자)가 아니라 죄인이다”(24절). 이런 문맥에 이어지는 세 번째 장면(35~41절)에서는 예수와 그 고침 받은 사람이 대화를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는 ‘봄’(보게 함)과 ‘보지 못함’(보지 못하게 함)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소경인 자는 누군가에 의해 항상 관찰되어 왔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누군가를 볼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는 항상 타인의 시선 안에 들어 있었지만, 그는 한 번도 타인을 바라볼 수 없었던 존재인 것입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보는 자들입니다. 타인의 일거수일투족을 때론 엿보고, 때론 훔쳐보면서 남들이 율법을 준수했는지 안 했는지를 판정해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그러한 시선의 특권을 가졌다고 주장해왔습니다. “시선은 권력이다”라는 말이 절로 생각나는 대목이지요. 시선이 곧 권력이라는 명제는 달리 말하자면, 그 시선의 권력을 가져가는 이가 ‘보는 자'가 되고, 반대로 그 시선의 권력 하에 놓인 자가 ‘보임을 당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대사회에서도 그렇겠지만, 예수 당시의 맥락에서는 더욱 그러하건대, 보는 자는 곧 권력을 가진 자들이고, 보임을 당하는 자들은 권력의 지배 아래 놓인 사람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같이 ‘보는 자’는 소경과 같이 보이는 자를, 그의 존재의 됨됨이 곧 죄인이냐 의인이냐를 규정지을 수 있었습니다. 이때 보는 자는 그를 제압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보이는 사람이 그것을 알아차린다면, 말할 것도 없이 그는 자신을 보고 있는 사람에게 제압당해 버립니다. 즉 보임을 당하는 자는 보는 자의 ‘시선’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이런 주종관계는 보는 자의 마음대로 규정되는 ‘사실의 세계’를 현실 가운데서 만들어냅니다. 언제나 그렇듯 지배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특정한 세계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현실 그 자체가 되는 것이지요. 볼 수 있는 자의 시선에 진리가 만들어지고, 보임을 당하는 자는 그렇게 보고 있는 자의 시선에 의해 만들어진 그 진리를, 그 기만적인 세계관을 객관적인 현실로 수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진리는 시선의 권력을 장악한 자의 상상의 산물이며, 그런 그의 전유물로 형성됩니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이 지배하던 1세기 초반 유대 촌락 사회의 일상적인 죄인 생산 메커니즘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소경과 바리새인의 관계는, 바리새인들의 시선에 제압당해 자신의 존재가 규정되고 있는 당시 사회의 권력 질서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소경이 단지 한 불행한 개인만을 의미하는 게 아님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의 시선에 의해 제압당하고 존재가 규정된 사람들 일반, 즉 바리새주의가 지배하는 사회 속의 대중을 집합적으로 표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공동체의 경험에선 70년 전쟁 이후 더욱 보수화된 기조로 무장된 재건 유대교 회당체제의 이념적 지배틀인 랍비적 바리새주의 아래 포획된 전쟁 이후의 대중 일반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눈을 뜨게 된 사람이 바리새인들에게 말하는 것을 보십시오. 그는 더 이상 바리사이(바리새파)가 본 것을 자신의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자신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을 그들에게 당당히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는 이제 누군가의 시선에 의해 규정당하고, 그 시선의 권력을 내면화하여 스스로를 바라보던 이가 아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도움으로 그는 자신이 경험해온 시선의 권력의 지배관계를 완전히 전복해버린 것입니다.

소경과 바리사이로 대표되는, 보는 자와 보이던 자의 권력 관계를 전복하여 이제 스스로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못하던 자들을 볼 수 있게 해주고, 반대로 권력의 눈으로 세상과 타인을 보고 있던 혹은 감시하고 있던 자들을 눈멀게 해버리는 사건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9장 39절에서 보듯이, 예수님은 이러한 권력 관계를 전복시키는 활동이야말로 자신이 행하는 ‘심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불트만이 주장하는 것을 따를 경우 그 뒤에 오는 구절이 되는 12장 47절에서는 이렇게 보지 못하던 자를 보게 하는 것이 바로 자신이 행하는 구원 활동의 요체라고 선언하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이 내 말을 듣고서, 그것을 지키지 않을지라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는 것이다.”


3. 예수는 그녀를 죄인으로 보지 않았다. 

저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역사상의 많은 요한복음 사본 필사자들이 끈질기게 요한복음 본문에 편입시키고자 했던 어떤 이야기가 바로 이처럼 ‘보던 자’과 ‘보지 못하던 자’의 관계를 전복하는 것 즉 ‘볼 수 있게 하는 것’과 ‘보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표현되는 예수님의 심판/구원 사역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해설해주는 예라고 보고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저명한 요한복음 주석가들이 ‘버렸던’(?)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이 말하는 심판과 구원 사역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7장 53절부터 8장 11절까지의 본문을 통해서 말입니다.

이 본문은 흔히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이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사본학적으로 이 본문은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본문입니다. 대다수의 권위 있는 오래된 요한복음의 사본들에 이 본문이 없을뿐더러, 그 문체도 요한복음의 다른 본문과 현저히 다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국제적으로 공인된 헬라어 원문성경에도 이 본문은 7:53-8:11의 자리에 들어 있긴 하지만, 그래도 꽤나 오래전의 사본들에서 발견되는 점을 고려하여 이중 꺽쇠갈호로 묶어 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 원문성경을 그대로 번역한 한글 성경들에서도 이 본문은 항상 이중꺽쇠 괄호로 표시되어 있고, 그 밑에 난외주에는 “가장 오래된 사본들에는 7:53-8:11이 없음. 사본에 따라서는 7:36 다음에 이어지기도 하고, 21:25 다음에 이어지기도 함”이라고 표기해놓고 있는 것입니다.

권위를 인정받는 요한복음 주석서들 중에는 아예 이 본문에 대한 주석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학자들은 이 본문이 요한복음의 원문에는 없던 것이 분명하다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본문이 왜 그렇게도 끈질기게 여러 사본들에서 계속 발견되고 있는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봅니다. 어차피 요한복음 역시 다른 복음서들과 같이 예수에 관한 구술전승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책이라면, 오래된 요한복음 사본에 이 본문이 있고 없고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이 본문이 문서텍스트로 정리된 것이 늦어졌을 뿐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 본문의 위치는 상당히 불안정합니다. 8장 9절과 11절에서 보듯이, 여인을 간음죄로 잡아서 예수 앞에 끌고 왔던 이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고 말했는데, 12절에서는 갑자기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라고 하고 있는 것만 봐도, 이 본문이 여기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매우 어색합니다. 저는 9장 1-41절 다음에는 8장 12절이 오고, 그리고 그 다음에는 12장 44-50절이 오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다고 봅니다. 그 다음에 대다수의 신약학자들이 버린 7장 53-8장 11절의 본문을 놓게 되면, 9장 1절부터 34절까지 묘사된 소경을 눈 뜨게 하는 이야기와 함께, 예수님이 행하신 사역의 본질 즉, 당대의 지배적인 권력자들에 대한 심판의 사역이자 지배받는 민중들에 대한 구원의 사역으로서 보게 하는 것과 보지 못하게 하는 행위의 의미가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기존의 신학자들은 거의 모두 이 간음죄로 고발당한 여인을 자명하게 ‘간음죄를 지은 죄 많은 여인’으로 간주합니다. 어떤 학자는 예수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말함으로써 간음죄를 지은 죄 많은 여인도 용서해 주었으나 결코 그 여인의 죄를 가볍게 용서해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해”라고 주장합니다. 이른바 예수도 사람은 용서하되 죄는 용서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또 어떤 이는 예수 본인도 그 여인의 죄만큼은 사실로 인정했기 때문에 마지막의 11b절에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라고 엄중히 경고했으며, 단지 그 여인에 대한 심판을 연기한 것일 뿐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정말 그런 것일까요? 학자들이 이런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은 그들조차도 이 여인을 죄인으로 ‘보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시선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만일 그렇다면, 예수님조차도 그런 바리새인들과 동일한 죄의 시선으로 이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해석에 반대합니다.

저는 예수님이 이 여인을 결코 죄인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실 사본학적으로 볼 때, 이 본문이 들어간 사본들 가운데는 8장 11b절이 발견되지 않는 사본들이 더 많이 있고, 이런 사본들이 오히려 이 11b절이 첨가된 사본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오래된 사본들로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굳이 그런 사본학적 문제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미 앞서 살펴본 9장 35-41절의 말씀에 근거하건대, 예수님은 이 여인을 죄인으로 보고 있는 자들이야말로 죄인이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바리새인들에 의해 죄인으로 보임을 당한 그 여인이 스스로를 다시 볼 수 있게 해주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정당할 줄로 압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 본문 어디에서도 ‘간음죄로 고발당한 여인’의 이름이나 나이, 가족 관계와 성장 배경, 그녀의 구체적인 행적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여인이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다고 말하는 것은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그녀를 잡아온 바리새파 사람들의 말일 뿐입니다. 그들의 고발만 가지고는 그녀가 정말로 간음을 했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예수 당시의 유대 사회에서 이해되던 간음이 어떤 것인지에 관한 상세한 역사적/성서적 고찰이 선행되어야만 하는데도, 그러한 연구에는 무관심한 채 이 여성을 바리새인들의 주장에 따라 그대로 간음한 여성으로 간주하는, 이른바 시선의 공유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왔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여자들은 자유를 가진 인격체가 아니라, 남종과 여종, 소와 나귀처럼 그 소유주인 남자의 ‘소유물’로 존재했습니다. 남자들은 일부다처제를 채용하여 합법적으로 아내 이외에도 여러 여자를 첩으로 거느렸고, 여자를 사서 성적 소유물로 삼을 수도 있었습니다(신21:11-17). 남자가 처녀를 억지로 강간한 경우에도 그 강간한 처녀의 소유주인 아비에게 은 오십 세겔을 준 후 아내로 삼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신22:28-29). 돈과 권력의 힘으로 다른 남자의 약혼녀나 아내 역시 자신들의 성적 파트너로 삼는 일이 빈번했습니다(신22:30). 유대 율법은 단지 다른 남편의 소유물에 속하는 남의 ‘약혼녀’와 ‘아내’를 강제로 범함으로써 다른 남자의 소유물을 훼손하고 훔친 경우만을 ‘간음’으로 규정하고 ‘타인의 아내를 간음하지 말라’(레18:20)고 말하는 형벌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유대 사회에서 ‘간음 금지’ 조항은 도덕이나 윤리적 측면 보다는, 남성들의 소유권 보장과 공정한 성거래(?)를 위해 제정된 남성 위주의 상도덕적 규범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신명기법은 여자가 결혼 후, 처녀였음을 나타내는 징표가 보이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돌로 쳐죽이라(신22:21)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결혼 후, 남편이 아내의 처녀성을 의심할 경우, 그 여인은 ‘의심의 법’에 의해 남편으로부터 쓴 물을 먹혀서 넓적다리가 붓게 되는 고문을 받았다고 합니다(민5:11-31). 

놀랍게도 남의 약혼녀나 유부녀를 범한 ‘간음’에 대한 형벌 규정 가운데는 이런 것도 있습니다. 신명기법에 따르면 한 남자가 다른 남자의 약혼녀를 강간했을 때, 그것이 ‘들’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성읍 안’에서 일어난 경우에는 ‘강간범’만이 아니라 ‘피해여성’도 “함께 돌로 쳐죽이라”고 명하고 있습니다(신22:23-24). 여자가 성 안에 있으면서 소리지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 남자가 남의 아내를 강간했을 경우, 이유 불문하고 남자뿐 아니라 피해를 당한 여성도 무조건 함께 교살하라(신22:22)고 말합니다. 이미 더럽혀진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 과연 이런 유대 사회에서 보통의 부녀자 혹은 처녀가 자발적으로 다른 남자와 ‘간음’을 한다는 것이 실제로 가능했을까요? 당시 유대 남성들은 여성이 폭력적으로 강제로 타인의 의지에 의해 간음, 더 정확히는 성적인 폭행을 당한다는 그런 개념조차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피해를 당한 여성에게 가해자 남성보다 더하면 더한 책임을 물으면 물었지, 그녀들의 상황을 이해해주고 보호해주는 그런 예는 전무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 남성들은 자신들의 간음 행위를 여성의 유혹 탓으로 돌렸고 간음을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찾아가는 음탕하고 방종한 행위로 낙인찍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자기 아내를 버리면서도, 버림받은 자기 아내가 이제 생존을 위해 다른 남자를 만나려고 할 경우 그 아내를 비난하고 ‘간음한 여자’로 몰아갔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등장하는 여성은 어땠을까요? 이 여성이 정말로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의 부도덕한 여성이었을까요? 제가 보기에는 이 여성은 그저 남자의 소유물 이상의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던 한 남자의 약혼녀나 아내로서, 다른 남자에 의해 강간당하거나 성적 폭행을 당하고 있었던 그런 여성이었을 것 같습니다. 더구나 자신을 그렇게 죄인으로 만든 당사자인 그 강간범은 현장에 함께 잡혀오지도 않았습니다. 어쩌면 지금 그 여성을 잡아온 바리새인들 가운데 그 놈이 섞여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고, 여성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채, 바리새인들과 공모하여 그 여인을 미끼로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고  있는 것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바로 그런 자리에서 예수님은 이 여성을 구원하는 동시에, 그 모든 남성들을 심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여성을 죄인으로 보고 있는 너희들이야말로, 예수님 자신과 이 여성의 눈에는 죄인으로 보인다고 폭로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T1z3-aVxf74&feature=share

(유튜브에서 사용자의 요청으로 영상바로보기가 되기 않습니다. 위 주소를 클릭하시면 새 창에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 장면은 민중이 아닌 이들, 오늘 본문에서 본다면 바리사이와 같은 이들이, 예수님 앞에 끌려온 여인이나 영상에 나온 여인과 같은 민중의 말, 그것이 중얼거림이건 비명소리이건 몸짓이건 간에, 그들의 그런 고통이 담겨 있는 말과 얼굴을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귀머거리이자 소경임을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에서 이 에피소드는 민중신학이 민중에 대해 갖고 있는 문제의식, 더 정확히는 민중의 비언어적인 언표, 혹은 언표화되지 않는 목소리가 이 사회에서 ‘들리지 않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과도 정확히 일치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과 달리, 사실 어떠한 민중신학자도 “민중이 자신의 말을 할 수 없다”라고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반대로 민중신학은 민중이 자신들의 고통에 대하여 말을 할 수 있다고 늘 주장해왔습니다. 이른바 그것이 민중신학에서 말하는 민중의 자기초월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병무와 서남동 이래로 민중신학자들은 민중이 자신들의 고통을 끊임없이 토로하고 표현하고 있다고 주장해온 것입니다. 동시에 민중신학자들은 민중의 그러한 말이 민중이 아닌 이들에게, 즉 이 사회의 다수자들, 소위 시민이라고 하는 그들에게 전혀 ‘들리고’(hear) 있지 않다는 점에서, 민중의 고통이 민중의 한(恨)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말해왔습니다. 특히 서남동 목사에 따르면, 민중의 한(恨)은 “하늘에 호소하는 억울함의 소리, 무명(無名)의, 무고(無告)의 소리”를 의미합니다. 물론 민중의 한은 민중이 벙어리라서 말을 못 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민중이 아닌 이들이 민중의 말, 그것이 중얼거림이건 비명소리이건 몸짓이건 간에, 그들의 그런 언어행위를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귀머거리이자 소경임을 시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중신학자들이 민중의 언어가 갖는 독특성, 그 비언어적인 표현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여왔던 것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드라마의 에피소드에 나오는 저 변호사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민중신학자가 ‘한(恨)의 사제’ 역할을 한다는 것, 혹은 ‘민중사건의 증언자’가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비(非)언어적인이고 비합리적인 민중의 언어, 혹은 정치적으로 의식화된 운동이나 실천이 아니라, 사실상 이해 불가능한 퇴행에 가까운 집합행동 또는 일탈적인 자기학대 등으로 표현되고 있는 그런 실천 아닌 실천들 속에서 민중의 목소리, 민중의 고통을 읽어내고 그것을 증언할 수 있는 감수성을 발휘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민중신학자라면 왜 우리는 듣지 못하는가, 우리는 보지 못하는가, 무엇이 우리의 귀와 눈을 가리고 있는가를 폭로하는 비평가의 역할도 겸해야 한다고 말해왔습니다. 증언과 폭로는 동일한 실천의 양면인 것입니다. 결국 “민중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사실상 “민중은 들릴 수 있는가”라고 하는 우리 사회의 청음(聽音)능력 및 청음구조를 향한 비판적 질문의 반어적인 표현에 불과한 것입니다. 

최근에 민중신학에서는 그러한 민중의 고통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그 언어화되지 못하고 있는 고통의 비명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또한 그들의 얼굴을 정직하게 볼 수 있는 우리의 신앙적 감수성을 가리켜 ‘사회적 영성’(social spirituality)이라 개념화하고 있습니다. 좀 더 민중신학적인 어법으로 말하자면, 사회적 영성이란 민중을 죄인으로 보고 있는 혹은 그렇게 보는 현실을 만들고 있는 이들의 그 눈을 멀게 하고, 즉 그들의 권력을 해체하고, 반대로 자신들을 죄인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그 보지 못하는 자들이 스스로를 새롭게 볼 수 있게 하는 것, 즉 하나님 나라의 주인으로 바로 설 수 있게 노력하는 신앙의 태도와 감수성을 말합니다. 

이 설교의 본문과 연관시켜 본다면, 사회적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펼쳐나간 예수운동의 본질이자, 요한공동체가 자신들의 삶의 자리에서 계승해나간 ‘예수따름’의 본령을 잘 담아내고 있는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러한 영성을 체화함으로써 지금 이 땅에서 예수운동을 계승하기를 예수님은 혹은 그분을 보내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여전히 바라고 계신 것이 아닐까요? 우리 모두가 우리 주변의 고통당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그 얼굴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면서 그들에게 책임 있게 응답할 수 있는, 사회적 영성을 추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천안살림교회 2014년 7월 20일 예배 설교문을 보완한 것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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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로 가자

: 무감 무통의 인간들과 아이리스 머덕(Iris Murdoch)의 도덕적 자아

조민아

(세인트캐서린 대학 조교수)

 

왜 아파할 줄 모르는가

경악스러웠던 것은 사실 평범해 보이는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었다.  4월 16일 그 날 이후 정지된 시간 속에 그저 나날이 반복 되고 있는 이 참사의  시작부터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할 주범들이야, 서로 서로 추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으니 지들도 살려고 저렇게 금수만도 못한 짓들을 하고 있다고 치자. 그러나 저 아무럴 것 없어 보이는, 집 앞에서 마주쳤으면 인사라도 나눴을 이웃들의 입에서 (혹은 손가락에서) 304명의 자식들을 잃은 가련한 부모들을 향해 상상하기도 힘든 폭언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뿐이랴, 그들의 얼굴은 밀양 송전탑 반대 농성 움막을 필사적으로 지키고 있었던 할매들의 주름진 몸을 난폭하게 끌어 낸 후 승리의 브이를 올리며 단체 사진을 찍었던 경찰들과도 겹친다. 멀리는 수천의 무고한 생명들에게 내리치는 폭격을 스포츠 관람하듯 도시락을 싸들고 구경 하고 있는 가자지구 이스라엘인들의 얼굴과도 닮았다. 그들을 어떻게 이해할까. 왜 그들은, 자신의 손가락에 박힌 눈에 보이지 않는 가시에 아픔을 느낄 줄은 알면서 자신들의 생명과 똑같은 가치를 가진 생명들의 몸에 미사일 파편이 박혀 죽어 나가는데는 아무 느낌이 없는가.

그들의 냉정함과 무례함은 타고난 것일까?  아니면 모두 반사회성 인격장애를 앓고 있는 환자들일까? 아니다. 그들도 어느 누군가에게는 애틋하고 정성이 지극한 부모이며 자식이고 친구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기에 궁금하다. 왜 그들은 자신들 삶의 테두리를 벗어난 이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저리도 무감한가? 왜 누군가에게는 타인의 고통이 조롱거리이거나 경멸의 대상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는—그냥 지나칠 수 없는 통증이며 상처인가? 왜 누군가는 죽어가는 사람을 보며 흔들림 없이 뻔뻔하고, 누군가는 뻔뻔한 그의 수치심까지도 떠맡아 괴로워하며 인간의 양면성에 치를 떠는가? 


아이리스 머덕(Iris Murdoch, 1919-1999)의 도덕적 자아

아일랜드 출신의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아이리스 머덕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같은 세상을 살고 있는 그들과 우리는 단순히 다른 정보와 견해를 선택하여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들과 우리는 세상 자체를 달리 보기 때문에 다른 것이다” (Murdoch, “Vision and Choice in Morality,” 82).  즉, 우리가 세상을 보는 눈이 타인의 고통에 대해, 또는 선함(the Good)의 기준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방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말이다. 

머덕의 주장을 좀더 풀어 보자. 타인의 고통에 대해 서로 다르게 반응하는 즈음의 현실이 잘 보여주듯, 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고 해서, 또 선하고 바른 것에 대해 익히 알고 있는 “보편적인” 기준에 동의한다고 해서, 우리 모두가 동일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보편적인 도덕은 개개인이 갖고 있는 복잡하고도 모호한 상황의 차이를 반영할 수 없기에, 삶과 분리되어 존재한다면 공허한 껍데기로 남을 뿐이다. 그러므로 근대 철학에서 흔히 강조하는 “도덕적 원칙에 대한 선험적인 체득”과, 그 “원칙을 선택하는 도덕적 주체의 의지” 프레임으로 인간의 다양한 도덕적 인식과 행위를 설명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인간을 선하게 만드는 것은, 머덕에 의하면,  도덕적 원칙과 개인의 의지라기보다는 도덕적 비전 (moral vision)이다. 선한 목적이 선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선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 봐야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보는” 행위는 “공감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선하게 하는 원칙과 규범들을 천명하고 기술하는 데서 벗어나,  또 나와 이해 관계를 주고 받는 삶의 반경을 넘어, 다른 이들의 삶을 보고 느낄 때 비로소 내가 알고 있는 “선함”에 관한 원칙과 규범들은 얼굴을 갖는다. 그리고 우리는 경험으로 알게 된 그 구체적인 얼굴들에 기반하여 각자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있는 나름의 지식을 쌓아간다. 이 지식은 우리가 살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상황들을 도덕적으로 이해하고 판단하는 기본적인 자료가 된다. 물론 자료는 확장하고 변화한다.  

타인에 대한 공감이 인간을 선하게 하는 본질적 요소라면, 공감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일까. 혼자 만의 세상에 사로 잡혀있는 자아이다. 고립된 자아는 끝없이 불안하다.  자신을 둘러 싸고 있는 것들을 지키고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자꾸만 자꾸만 안으로 숨어 들어 견고한 성을 쌓는다. 이러한 이기적인 자아를 가진 인간에겐 타인의 고통을 느끼고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공간이 없다. 그 자아가 타인들로 향하는 시선을 가로막고, 그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못하도록 왜곡하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 (Hannah Ardent)가 저 유명한  나치 전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재판을 지켜보며 남겼던 글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아렌트는 평범한 인간이 악행을 저지르게 되는 이유를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라 진단했다. 아이히만을 에워 싼 불통의 벽은 그를 다른 이들의 말과 생각과 현존으로 부터 분리시켰다. 결국 그는 수많은 학살을 자행하면서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아렌트와 마찬가지로 머덕 또한, 타인과의 공감과 소통을 거부하고 자아에 갇혀 있을 때 인간은 세상을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고 끝내는 사랑할 능력을 잃는다고 말한다. 인간은 타인과 함께 할 때, 타인의 삶을 자신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일 때만 비로소 선한 지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머덕의 말을 빌자면,  “인간은 오로지 사랑을 함으로써 사랑을 배울 수 있다.” 

세상을 바로 보기 위한 첫번 째 조건은 자기 삶의 반경 너머를 보기, 그리고 아집에 사로잡힌 자아를 탈출하기이다. 머덕은 이를  “자아 벗기 (unselfing)” 라는 말로 표현했다. 자아를 벗는 것은 부단한 훈련을 요구한다. 반복적인 행위와 습관으로 자신을 잊는 연습을 해야 한다. 머덕은 주시(attention)를 훈련의 필수 항목으로 제시한다. 인내심을 갖고 겸손하게 사물과 사람을 응시할 때, 혹은 예술 작품과 자연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길 때,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상의 다른 숨결들을 비로소 발견하고 잔뜩 부풀어 있는 자아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리고 나 외에 다른 이들이 살고 있는 세상으로, 생명이 살아 있는 진짜 세상으로 나아가는 통로를 찾기 시작한다 (Murdoch, “The Sovereignty of Good Over Other Concepts,” 375).  그러므로, 머덕에게 있어서 도덕적 인식과 미학적 지각 (aesthetic perception)은 서로 통한다. 영화 <타인의삶 (Das Leben der Anderen)>에서 드라이만이 연주하는 “선한사람들을 위한 소나타”를 들으며 전율하던 비즐러를 기억하는가. 냉혈한이었던 그, 자기 세상의 원칙과 규범에 갇혀 살던 비즐러의 단단한 자아를 벗기고 세상으로 끌어 당긴 그 위대한 예술의 힘 말이다. 아름다움에 반응할 줄 아는 인간과 선한 인간은 흔들릴 줄 아는 인간들이다. 흔들리다 흔들리다 결국 자기를 내려 놓을 줄 아는 인간들이다.  

타인의 삶에 공명함, 그리고 그를 향해 나의 자아를 던짐. 머덕에게는 이것이 덕(virtue)이다. 따라서 그들과 함께 나를 나누고 그들로 인해 슬퍼하고 기뻐하는 것이 곧 도덕적인 비전을 갖게 되는 길이며 선해지는 길이다.  그러나 도덕적 자아는 금욕적인 자아가 아니다. 거북함과 불쾌함을 무릅쓰고 타인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성정 자체가 부드럽고 여리게, 남들과 공명하는 성정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물론 하루 아침에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선한 눈과 의식으로 세상과 타인을 주시하고자 반복적으로 노력할 때, 자기 중심성을 작동하게 하는 메카니즘은 깨지고 자신을 향하던 에너지는 방향을 바꾼다. 마침내 시선은 밖으로 향하고, 사랑도 밖으로 흐른다. 그러기에 타인이 고통으로 몸부림 칠 때 내 살이 베어져 나가듯 아픈 것이다. 그러기에 타인이 기쁘고 행복할 때 내 얼굴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번지는 것이다.


사람에게로 가자

세월호 가족들 앞의 무례한 그들. 밀양과 가자지구의 후안무치들. 그들이 보는 세상은 내가 보는 세상과 다르다.  어쩌면  그들은 피를 나눈 가족과 이해를 나누는  주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 자신의 작은 세상을  벗어나 본적이 없었을지 모른다. 어쩌면 그들은 타인들과 눈을 맞추고, 소통하고, 절절한 가슴을 맞대어 본 경험이 없었을지 모른다. 단 한번 다른 이들의 부름에 흔들려 본적 없을, 단 한번 더불어 사는 삶의 뜨거움에 설레어 본적이 없을 그들은 어쩌면 미워해야 할 존재라기 보다 연민을 느껴야 할 존재들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미욱한 나는 아직 훈련이 덜 되어 그들에게까지 나누어 줄 연민이 없다.  언젠간 그들에게도 비즐러가 경험한 것과 같은 은총의 순간이 다가오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자식이 죽어봐야 알지,” 라는 말을 돌리고 싶지는 않다. 내자식이 죽어야만 남의 자식이 죽은 심정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세상에는 희망이 없다. 죽은 아이들이 내 아이처럼 느껴지는 세상, 자식 잃은 부모들이 내 식구처럼 느껴지는 세상에 희망을 건다.  

그리고 그 희망을 지켜 나가기 위해 나와 내 공동체를 점검한다. 비통한 시간이 흐르고 있다. 국회 앞에서, 광화문에서, 용산에서, 밀양에서, 청도에서, 강정에서, 4대강에서. 우리는 많이 울었고, 지금도 울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과 함께 울었는가? 지금 이 순간도 홀로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가슴을 친다.  초단위로 정보가 업데이트 되는 페이스북과 트위터가 마치 고통의 소우주같다. 수천의 사람들이 거기서 분노하고 옷을 찢고 후회하지만 정작 오프라인에서 움직이는 사람은 적다.  SNS를 통해 소리만 요란하게 퍼다 날라지는 정보들은 감정을 극대화할 수는 있겠지만  구체적인 행동이 될 가능성은 적다.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자. 사람에게로 가자. 나 하나 무슨 도움이 되랴 컴퓨터 앞에 주저 앉아 혼자 울지 말고 작은 일이라도 행동을 하자. 일인 시위 피켓을 들던, 광화문에서 가족들을 지키던, 기다림의 버스를 타던, 봉사를 하던,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던 말이다. 점점 추상적이 되어 가고 있는 이 고통에 사람의 얼굴과 사람의 체온을 더하자. 사람이 없다면, 고통도 우상이 될 수 있다. 사람을 통해 확인하지 않는다면 공감 또한 값싼 로맨스에 불과하다. 사람을 잃어 버린다면, 우리도 냉정하고 무례한 저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다만 저들과 다른 표정을 하고 있을 뿐이다. 

참고 문헌: Iris Murdock, “Vision and Choice in Morality” and “The Sovereignty of Good Over Other Concepts” in Existentialists and Mystics: Writings on Philosophy and Literature, edited by Peter Conradi (NY: Penguin Books, 1998).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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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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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otium
    2014.08.09 10:0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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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찰이 담긴 좋은 글 감사합니다. 고통을 겪어본 자가 반드시 타인의 고통에 더 민감해지는 것은 아니더군요.. 최근 댓글 중에 "내 자식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을 때 아무도 내게 와 위로해주지 않았다. 근데 유가족들은 왜 이리 난리냐"라며 독한 언설을 쏟아내는 글을 보았습니다. 때로 고통이 일상에 균열을 내고 자기중심성을 깨뜨리는 자기 초월의 계기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모든 이들이 그 계기를 선용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이 없다면 고통도 우상이 된다'는 말씀이 깊게 다가오네요.


What does this mean?[각주:1]

이상철
(한신대 외래교수)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 사도행전 1:8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 사도행전 2:6-8


Greeting

10년 유학 생활을 청산하고 한국 돌아온 지 열흘 정도 되었는데, 아직까지 시차 때문에 고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난 한 주간 동안 어떻게 지냈습니까? 제가 지금 사는 곳이 사당3동인데, 7.30 보궐선거가 이루어지는 요란스러운 동네입니다. 선거와 관련된 시끄러운 뉴스들, 유병언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터무니 없는 뉴스, 세월호 100일 지났다는 슬픈 뉴스, 이런 뉴스들이 아직 시차에 적응하지 못한 저에게 꿈결에서 들리는 것처럼 다가왔던 한 주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한 주간 동안 제일 저를 힘들게 만들었던 것은 시차적응으로 인한 고생도 아니고, 조국의 서글픈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오늘 설교를 해야 한다는 압박이었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설교를 해야 한다는 압박이 아니라, 설교를 하는 교회가 하필이면 한백교회라는 억압이 저를 힘들게 했던 한 주였습니다. 

왠지 한백교회에서 설교를 하려면 심오하고 어려운 말을 해야 될 것 같고, 멋있는 학문적 표현을 날리면서, 그리고 진보적인 해석과 성찰, 뭐 그런 이야기들을 해야 할 것 같아서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 억압이 저를 더 시차에 적응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원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조금 전까지 이런 이유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는데, 이렇게 앞으로 나와 여러분들 얼굴을 보니까 그래도 조금은 기분이 낫습니다. 제가 설교하다가 (시차 때문에) 졸거나, 횡성수설하면서 설교를 죽 쑤더라도 너그러이 양해주실 줄 믿고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왜, 성령강림(절) 인가?

오늘이 교회력 상으로 성령강림절 여덟 번째 주일입니다. 보통 교회에서 가장 큰 명절이 2가지가 있는데,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이죠.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기간을 대강절이라고 하고, 부활절을 준비하는 기간을 사순절이라고 합니다. 크리스마스와 부활절 말고, 교회의 명절을 하나 더 고르라면 추수감사절도 물론 있겠지만, 저는 성령강림절을 꼽고 싶습니다.  

성령강림절이 중요한 이유는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 사건 이후, 성령강림 사건 이후에 에클레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공동체인 교회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성경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성령강림 사건을 그리는 대표적인 성경구절이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본문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교회가 무엇인지? 교회가 지향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잘 드러내고 있는 구절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제가 본격적으로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도입질문을 하나 던지겠습니다. 성령이 뭘까요? 여러분, 성령 받으셨나요? 성령을 받았다는 의미가 뭘까요? 성령을 받은 사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러한 질문들은 초대교회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반복적으로 되풀이 되는 질문입니다. 저도 이런 질문을 받으면 솔직히 자신있게 할 말을 못 찾겠습니다.   

비록 제가 성령이 무엇인지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성령을 받았는지 조차 자신 있게 확신할 수 없는 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성령을 받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성령이 임하는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이어야 할런지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저로 하여금 추측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던 본문입니다. 


‘영성 현상(학)’을 둘러싼 기억, 혹은 회상

오늘 설교제목을 ‘성령임재와 사회적 영성’이라 정했습니다. 영성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쓰여졌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죠. 하지만, 영성이라는 신학적 언어의 기원은 알 수 없습니다. 학자들마다 고대 사막의 교부들, 중세 수도원 전통, 종교개혁의 전통속에 그 기원이 있다고 말은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영성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는 그 현상 자체는 중요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영성이라는 말의 유행은 20세기말 세기말적인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종교적 언어의 발굴이 시급했던 요청속에서 파생된 부산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특별히 한국신학계에서 영성 신드롬의 확산에 결정적 공헌을 한 책이 하비콕스가 썼던 <영성, 음악, 여성>이라는 책입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그 책을 읽고 독서보고서를 썼던 것 같은데, 지금 그 책에 대한 아무런 기억이 없는 것을 보면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책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런데, 단 하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책의 원제목입니다. 그 책의 한국말 제목은 <영성, 음악, 여성>이라는 근사한 제목인데 반해, 그 책의 원제목은 Fire From Heaven이라는 다소 섬뜩한 제목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과 연관이 있는 책 제목입니다. 그 이후로 저는 영성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나, 영성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 사도행전 1장과 2장을 근거로 이야기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오늘 설교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사도행전 본문에 대한 주석학적인 작업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임재와 연관시켜 ‘사회적 영성’이라는 부분을 숙고하는 것입니다. 현재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에서 사회적 영성에 대한 작업들, 글들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이 부분에 대해 할 말이 별로 없습니다. 10년 동안 고국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 적합한 ‘사회적 영성’을 이야기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대신 여러분들이 오늘 본문을 현재 한국 사회에 적합한 사회적 영성과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을지? 에 대해 이따가 설교 후 토론 시간을 통해 저에게 알려 주셨으면 합니다. 여기까지가 설교의 서론이었고, 지금부터 본격적인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땅 끝’에 대한 오해와 진실 

조금 전 제가 도입질문에서 ‘성령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성령 받으셨나요?’라는 폭력적인 질문을 여러분들에게 던졌습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질문은 누구든 한두 번씩은 받아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첫 번 답변에 대한 tip이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1:8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성경구절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말씀하셨던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래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예전부터 부여하여 왔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유언과도 같은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 마지막으로 유언을 하잖아요. 그 유언을 우리는 꼭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초대교인들이 이 말씀을 예수님의 유언처럼 생각하면서 최선을 다해 잘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예수님의 이 마지막 말씀은 선교를 떠나는 선교사님들이 몸에 지니고 다니는 성경구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본문은 크리스챤들에게 대표적으로 잘 못 알려진, 진리를 호도하는 성경구절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통상 한국교회 이 본문을 해석할 때 강조되는 단어가 뭘까요?   ‘성령’과 ‘증인’, 그리고 ‘땅 끝’일 것입니다. 이 중 문제가 되는 것은 ‘땅 끝’에 대한 오해입니다. 이 본문을 갖고 설교할 때 거의 모든 목사님들이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땅 끝까지 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말로 결론을 짓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논리가 교권이라는 이름으로 평신도를 장악하려는 교회권력자들에 의해 잘못 해석되면 이렇게 변질되기도 합니다.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만이 성령을 잘 받은 사람이다”. 이렇게 해석되면 이 말씀은 교인들을 정죄하고 교권을 강화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맙니다.

하지만, 이 본문은 그런 의미가 절대 아닙니다. 영어성경에 보면 오늘 본문이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When the Holy Spirit has come on you, you shall be my witnesses in Jerusalem and in all Judea and Samaria and to the end of the earth.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가 나의 증인이 되는데, 어디서? ‘예루살렘 and 유다와 사마리아 and 땅끝에서 나의 증인이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예루살렘이 중요한가요? 유다와 사마리아가 중요한가요? 땅끝이 중요한가요?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은 등위접속사 ’and’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등위접속사(예: and, but, or, nor, so등등)의 성격이 뭐죠? 등위접속사로 연결된 대상들은 성, 수, 격이 똑같아야 됩니다. 똑같은 의미와 같은 중요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 and 유다와 사마리아 and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했을 때,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 사이 관계 설정에 있어 셋 중 어느 하나에 무게중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셋이 공히 같은 비중과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위의 성경구절의 진정한 의미는 지금 내가 거하고 있는 바로 이 순간, 이 공간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과 이 공간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는 말입니다. 굳이 땅끝까지 가야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한국에서 미국에서, 지금 폭염에 휩싸인 팔레스틴땅에서, 우크라이나에서, 아프리카에서… 더 구체적으로 우리가 일하는 직장에서, 학교에서, 우리의 가정에서… 내가 성령을 받았다면 마땅히 그곳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땅끝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히스테리적인 경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깃발을 꼿아야 신앙이 좋은 것으로 생각하고, 땅 끝을 찍고 와야 뿌듯하고 자랑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에 빠져있었다는 말입니다. 안으로는 곯아터지고 있는데, 그 점에 대해서는 묵인하고 땅끝을 향해 가려고만 하는 한국교회의 선교정책이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내가 지금 있는 이곳에서 주변사람들을 감동시키지 못하고, 주변사람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땅끝까지 갈 수 있겠습니까?  


너희가 성령을 아느냐?

그리스도의 증인된 삶을 사는 것이 성령을 받은 사람들의 첫 번째 원칙이라면, 오늘 우리가 읽은 두 번째 본문 사도행전 2장은 ‘성령의 현상학’, 뭐 그런 제목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 2장은 유명한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임재한 성령강림에 대한 기사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보면 “하늘로부터 강한 바람”(2:2)이 내려온 이후에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했다”(2:3) 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서, 방언의 은사가 발생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스터리 한 것은 그 다음구절입니다.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2장 6절-7절). 

이 본문의 상황을 이해하려면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간단한 배경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남왕국 유다가 587년에 망한 후에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그리고 60-70년 세월이 흐른 후 에스라-느헤미아때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죠. 하지만, 그때 돌아오지 못하고 바벨론에 남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 일제시대를 연상하면 됩니다. 해방이 된 후에 일본으로, 만주로, 연해주로, 중국으로, 중앙아시아로 끌려갔거나 흩어졌던 조선백성들이 해방 후에 한국으로 모두 돌아오지 못했던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벨론 포로 귀환 후부터 500년 이상 흐른 시간적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오백년이면 세대로 따져도 15세대 이상이 흐른 다음입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지 어언 70년이 되어갑니다. 지금 각지로 흩어져사는 한민족들이 이민 2세대, 혹은 3세대까지 생겨났습니다. 사할린에, 일본에, 만주에, 중국본토에, 러시아에, 중앙아시아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이 한국어를 잘 구사할까요? 미국에 살고 있는 교포 자제들인 경우 대부분 영어만 사용할 줄 알았지 한국말 구사는 못하는 경우가 거의 다반사입니다. 

이렇듯 2세대 3세대까지 흘러도 모국어를 잃어버리는데, 바벨론 패망 이후 500년이 넘게, 15세대, 16세대, 17세대 넘게 이방 땅에서 살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는 어떠했을까요? 마찬가지 경우가 아니었을까요? 그들 역시 흩어져서 지금 거하고 있는 그 땅의 풍토와 문화와 언어에 동화된 채 오랜 세월을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고국의 언어를 잃어버리지 않았을까요?   

다행히 그 세월속에서 야훼 신앙을 간직했던 사람들이 있어 그들이 민족의 명절인 오순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성경에는 그들이 바대인, 매대인, 엘람인,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보도와 아시아….등지에서 몰려들었다고 적혀있습니다(사도행전 2:9-11). 우리로 따지면 재일교포 15세, 재미교포 16세, 재중 교포 16세, 재러시아 교포 17세, 재멕시코 교포 15세, 재하와이 교포 16세, 재타슈겐트 교포 15세, 재사할린 교포 15세가 서울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여한 것이다.   

그 사람들 앞에서 제자들이 말을 했다고 적혀있습니다. 제자들이 그 사람들 앞에서 무슨 말을 했을까요? 복음을 전했겠죠: “내가 만났던 예수님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 분은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3일만에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구원받습니다. 그 분은 우리 같은 약한 사람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내가 곧 다시 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분이 다시 오시기 전까지 그 분이 말한 자유와 평화와 정의를 실천해야 합니다. ”  


What does this mean?

이렇게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 성령의 바람이 불어옵니다.  그러면서 놀라운 일이 발생합니다. 뭐가 그리 놀랍다는 거죠? 내가 지금 한국말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지금 미국사람, 일본사람, 중국사람, 멕시코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한국말을 모르죠. 그런데 성령의 바람이 임하니까 내가 한국말로 설교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나라말로 들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8절에 너무 놀라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냐?” 

 “저 사람이 지금 한국말로 설교를 하고 있는데, 난 영어밖에 모르는데, 나는 일본말 밖에 모르는데, 나는 중국말 밖에 모르는데, 나는 한국 말은 배워 본 적도 없는데, 어찌하여 한국말 설교가 내 귀에 들리는 거지? 이게 어찌 된 일이야? What does this mean?”                         

“나는 메소보다미아 말밖에 모르는데, 나는 갑바도기아 말밖에 모르는데, 나는 아라비아 말밖에 모르는데, 나는 로마말 밖에 모르는데, 나는 이스라엘 말을 모르는데 어찌하여 이스라엘 사람이 하는 설교가 내 귀에 들리는 거지? 이게 어찌 된 일이냐? What does this mean?” 

우리가 출신 성분도 다르고, 자라온 배경도 다르고, 말도 다르고, 역사도 다르고, 문화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성령이 임해서 그 모든 차이와 다름이 극복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What does this mean? 

여러분 성령을 체험했다는 것은 무슨 마술적인 신비체험을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 성령을 받은 공동체는 우리 사이에 있는 모든 차이와 차별을 성령의 능력으로 물리치는 공동체입니다.  진정 성령을 받은 공동체는 우리 사이에 있는 모순과 분열을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가 되게끔 하는 공동체 입니다.   진정 성령을 받은 공동체는 우리 사이에 있는 상처와 아픔을 성령의 능력으로 치유하는 공동체 입니다.  

결국, 오늘 본문을 종합하면, 성령을 받은 사람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방언의 능력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치유의 능력이 있는 사람도 아니며, 예언의 능력이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성령의 능력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또 하나 성령을 받은 사람의 중요한 특징은, 우리 안에 있는 분열과 다툼과 시기와 질투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관계가 깨진 그 공동체를 하나가 되게끔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이란 우리를 하나되게 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에게, 그리고 우리 한백교회 위에 이러한 성령의 능력이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2014년 미국 장로교 총회, 그리고 ‘사회적 영성’에 대한 데자뷰

여기까지가 오늘 본문에 나와있는 ‘성령의 임재’를 둘러싼 해석이었다면, 남아있는 오늘 설교의 과제는 이러한 성령의 임재를 어떻게 ‘사회적 영성’과 연결시킬 수 있을까? 에 대한 문제입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 부분은 제가 오히려 여러분들에게 듣고 싶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한국땅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고, 그런 상황속에서 성령을 받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할지? 에 대해 이따 말씀을 나누는 시간을 통해 저에게 일러주시기 바랍니다. 

그 전에 ‘사회적 영성’과 관련하여 이번에 제가 이번 미국에 있는 한 달 동안 있었던 일화를 하나 소개한 후에 여러분들에게 마이크를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달에 미국장로교 총회가 있었습니다. 미국의 전통적 main line church 4개입니다. 감리교, 루터교, 성공회, 장로교, 하나를 더 더하자면 회중교회가 있습니다. 장로교는 미국내에서 크지 않습니다. 교단차원의 규모와 영향력에 있어 감리교가 일단 우위에 있고, 루터교, 성공회가 그 다음이고, 장로교가 그 뒤를 잇습니다. (물론, 남침례교회가 가장 수적으로는 우세하나, 워낙 개교회 중심적이라 교단차원의 영향력은 생각보다는 크지 않음)  

그런데 미국장로교가 중요한 이유는 미국의 독립과정, 남북전쟁 등 미국정신의 근간이 형성해가던 무렵 나름의 역할을 감당하였다는 점입니다. 미국 헌법을 기초하는 과정에서 장로교 헌법을 참고하였고, 남북전쟁과정에서는 미국 장로교가 분열하면서 미국 시민사회의 발전에 일정부분 공헌을 합니다. 물론 미국 장로교가 전보다는 교세가 많이 쇄락했다고는 하나, 미국 역사발전에서 남긴 족적만으로도 그 영향력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미국장로교 총회에서 발표된 동성결혼에 대한 발언은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2014년 6월 14일부터 21일 사이에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미국 장로교 제221차 총회에서 많은 논란과 관심의 초점이 되었던 결혼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바꾸는 헌의안이 찬성 429대 반대175 (약 7:3)로 통과되었습니다. 쟁점이 되었던 내용은 아래 문구였습니다. 

Marriage involves a unique commitment between two people, traditionally a man and a woman to love and support each other for the rest of their lives. 

전통적으로 남자와 여자 사이에 형성되었던 독특한 헌신을 결혼이라 정의했었는데, 개정된 결혼에 대한 정의는 남자와 여자 대신 ‘두 사람(two people)’이라 명시한 것입니다.  총회가 끝나갈 무렵인6월 19일에 이 결정이 내려졌고, 이 발표 이후 미국 장로교 소속 한인교회들은 거의 모두 반대의사를 표명하면서 미국 장로교에서 탈퇴까지 불사하겠다는 강한 유감의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 50개 주 가운데 현재 19개 주에서 동성애 결혼이 합법화 되어 있습니다. 이미 UCC와 미국성공회, 미국 루터란은 미국 장로교보다 이 안건을 먼저 통과시킨바 있습니다. 그때도 이와 비슷한 사회적 논란이 있었습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들 가운데 이번 미국 장로교 총회에 다녀왔던 목사님들이 있어 그 곳 분위기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동성 결혼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과 동성 결혼을 인정해야 한다는 사람들의 주장이 공교롭게도 다 같았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인해 교회가 분열될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동성 결혼을 찬성하는 입장에서는 미국 장로교도들이 동성애에 대한 교회의 분리와 차별로 인해 교회를 떠나고 있다고 말하고, 동성결혼을 반대하는 입장에서도 미국 장로교가 이 안건이 통과되면 분열될 것이라 주장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양 진영 모두 교회를 하나로 이끄는 성령의 임재를 기원했다고 하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죠.


성령의 임재와 사회적 영성은 결국 다름에 대한 성찰에서 부터…

21세기 미국 진보신학계의 화두는 신자유주의와 동성애 논란에 대한 신학적 대처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은 건국 초기부터 이민자들의 나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다름을 수용하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기술과 능력에 있어 나름의 노하우를 갖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말입니다. 신분적, 계급적, 존재론적 차이와 다름으로 야기되는 사회적 갈등을 적당히 분출하면서, 어떻게 사회적 통합의 과정으로 이끌어낼는지에 대해 잘 학습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여성차별의 문제, 흑백문제, 이민자 문제 등이 대표적인 이슈였다고 할 수 있고, 근래에는 동성애문제가 바로 그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Queer theology를 공부하다보면 오늘날 사상계에서 논의되는 성담론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 성서 안에 들어있는 동성애관련 문구에 대한 새로운 접근들,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발생했던 차이와 다름에 대한 억압들, 그리고 그것을 타파하려했던 변혁적 몸부림, 그 연장선상에 위치했던 교회의 응전들을 살피면서 비교적 통전적인 차원에서 동성애 문제에 접근합니다. 아울러 오늘 본문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성령에 대한 면밀한 검토도 시도합니다. 

사도행전에 드러난 성령의 임재에 대한 해석을 미국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등장하는 차이와 다름으로 인해 야기되는 억압과 불평등을 깨는 성서적 근거로, 그리고 현 미국사회의 갈등의 원인인 동성애 논란을 극복하는 중요한 성서적 근거로 끌어오려는 노력은, 물론 좀 더 예각화할 필요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본문은 성령의 임재와 사회적 영성을 연결시키는 중요한 해석학적 작업인 것 만은 분명한 듯 합니다. 

물론, 여기에도 위험이 도사리고는 있습니다. ‘우리를 하나되게 하는 성령의 임재’라는 구호가 자칫 포스트모더니즘의 다문화주의가 구사하는 느슨한 수평적 연대에 정박되어 고착화됨으로써 다문화주의를 프로파간다로 내세우는 신자유주의와 공모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We are the World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모순과 부조리가 순화되고 묻혀버리는…그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변혁의 의지를 감소시키고, 결국에는 냉소주의로 빠지게 한다는 것이죠. 이런 이유로 성령제일주의와 영성의 남발을 경계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 부분은 따로 시간을 내어 다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Closing  

오늘 저는 지금 ‘성령의 임재와 사회적 영성’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본문에 보면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일어난 성령임재 사건을 바라보며 어떻게 말했다고 적혀 있습니까? “What does this mean?”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우리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습니까?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

결론적으로 말해 성령의 임재와 사회적 영성은 떨어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차이와 불평등은 오랜 사회적 역사와 사회적 연관관계 속에서 작동되어 왔고, 결코 사회와 독립적이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령은, 모든 차이들- 그것이 성적 차이든, 계급적 차이든, 문화적 차이든, 인종적 차이든 간에-, 그 차이로 인한 부당한 폭력이 잔존하는 그곳으로, 성령은 임재해야 합니다. 이 말은 성령의 임재는 결코 개인적인 체험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경고이고, 이 말은 성령의 임재는 집단적 경험으로, 그리고 그것이 집단적 기억으로 전승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임재와 사회적 영성이 지니는 방정식 입니다. 제가 준비한 설교는 여기까지 입니다. 잠시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도록 합시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지난 7월 27일 한백교회 설교 “성령강림과 사회적 영성”(본문: 사도행전 1:8-11/ 2:1-13)을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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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 취지_

이 글에서 질문할 사회적 영성의 위치는 세월호의 상흔과 그것을 잊기를 종용하는 욕망 사이의 어느 지점이다. 자극하지 않는다면 쉽게 망각으로 끌려가 버릴 그 불균형한 힘에 개입한다.  상흔과 망각. 그 두 힘의 대립을 나는 예수의 시신이 사라진 무덤 앞에서도 발견한다. 예수의 제자들은 스승을 배반하고, 죽어 가던 그를 유기하고, 제각기 살길을 찾아 떠났다. 그 날의 수치를 견디지 못해 서둘러 망각으로 도망치던 제자들을 제어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약했던 그들이 어떻게 망각을 멈추고 기억을 붙잡을 수 있었을까? 스승이 이미 떠난 자리에서 진리는 어떻게 잊혀 지지 않고 살아 남았으며. 어떻게 그 모래알과 같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퍼져 나갈 수 있었을까?  이 질문들을 사회적 영성이란 화두와 연결하며, 우리 시대의 빈무덤, 세월호의 기억을 지속하고 확장시킬 신학적 언어들을 재고해 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빈무덤 앞의 제자들처럼 혼란스럽고 수치스러운 우리들 또한, 그들이 예수에 관한 기억을 놓지 않았듯, 그날의 기억을 공동체의 기억으로 재구성하고 공감의 에너지로 활용할 수 있기를, 나는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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