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 안내 - 5월을 맞아 열리는 유익한 강연들을 소개합니다.


 
플러그 인, 기독교 미술의 현대적 의미

        ▲ 발제자 : 그리스도 생애에 대한 회화적 고찰 | 김이순 교수(홍익대)
                       렘브란트의 성경 그림 | 서성록 교수(안동대)
                       선교사 빈센트 반 고호 | 김상근 교수(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후기 자본주의 속의 종교와 예술: 앤디 워홀의 경우 | 김학철 교수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 일   시 : 2009년 5월 9일 (토) 오후 2시~6시
        ▲ 장   소 : 홍익대학교 E동(조형관) 103호
        ▲ 주   최 : 홍익대학교 성화감상회 /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제1회 심원 콜로키엄

심원 안병무 선생 기념사업회에서 역사 앞에 민중과 더불어 신학을 하면서 우리 시대의 과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던 심원 안병무 선생의 뜻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이 모여 정기적으로 콜로키엄을 열기로 했습니다. 그 첫번째 자리가 5월 14일에 열립니다.

        ▲ 일   시 : 2009년 5월 14일(목) 오후 5시 ~ 7시
        ▲ 장   소 : 향린교회 1층 향우실
        ▲ 주   제 : '역사의 예수'는 서구적 모던 예수였다
                            ― 역사의 예수 담론의 영토성 연구
        ▲ 발제자 :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바울과 현대> 열린토론회

천주교 '바오로의 해'를 맞아 우리신학연구소와 공동기획한 <바울과 현대> 강좌가 7강 중 마지막 2강을 앞두고 있습니다. 최근 인문사회학과 신학에서 바울에 다시 주목하고 있는 맥락을 이해하고,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바울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함께 사유하는 것을 목표로 그동안 박진우, 한보희, 김학철 세 분의 강사님들과 강의를 진행해왔습니다.

5월 15일(금)에는 마지막 7강을 열린토론회로 기획하고 수강자뿐 아니라 원하는 모든 분들께 무료로 참석하실 수 있도록 할 예정입니다. 강의를 진행한 세 분 강사님이 모두 참석하신 가운데 우리신학연구소의 엄기호 연구위원이 사회를 맡아 진행됩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 일   시 : 2009년 5월 15일(금) 오후 7시 30분
        ▲ 장   소 : 한백교회당(5호선 서대문역 1,2번 출구 사이 골목 30미터)
        ▲ 참가비 : 무료 (수강여부와 상관없이 누구나 참석 가능합니다.)
        ▲ 토론회 사회 : 엄기호(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
        ▲ 토론회 참여 강사 : 인문사회학 - 박진우, 한보희 / 신학 - 김학철
        ▲ 문   의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02-363-9190 / yminjung@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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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숨
- 영화 도쿄소나타를 본 뒤 -

손성호
(밀알교회 목사)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너희에게 평안이 있으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시고 또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으라” (요한복음 20:19-20)

힘든 교우들이 많다. 가장 많은 이유는 물질적인 어려움이고, 그 다음 이유는 직장생활이다. 덧붙이면 자녀걱정인데, 그 또한 물질적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종종 이메일이나 문자메시지를 통해 비밀스레 건네지는 교우들의 고민과 기도제목은 솔직히 ‘노골적(?)’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적어놓는 ‘목회 노트’속 하나님은 풍요의 신이며, 수호신이고, 가끔 두려운 분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설교강단은 한층 더 현실 언저리를 맴돈다. 삶과 신앙을 떼어놓을 수는 없겠지만, 복음이 관념이 되고, 추상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설교자의 고뇌는 더욱 깊어간다. 늘상 ‘생활신앙’을 외치고, ‘생명윤리’ ‘교회일치와 연합을 위한 에큐메니즘’ ‘문화와 과학’ 등 21세기 신학적 화두들을 붙잡고 늘어지지만, 이를 설교와 목회로 추구되는 교회현장에 적용시키고자 할 때엔 더 진지하고, ! 끈기 있는 ‘우려냄’이 요청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설교는 ‘삶과 신앙’을 평행시키는 ‘철로’가 되고, 목사는 점점 더 교인들과 다른 길을 가게 된다. ‘내가 아직 젊기 때문일까...’ 혼자 되묻는다. 물질적인 어려움이나 직장생활의 고충을 토로하는 교인들에게 ‘잘 될꺼다’ ‘기도해보자’ 정도의 대답을 하고나면 찜찜하다. 그러나 마땅히 해줄 수 있는 말도 없다. 한번은 40대 후반 집사님 한 분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그가 요즘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단다. 회사에 정리해고 바람이 불었는데  간부가 아니다보니 언제 정리해고를 알리는 이메일이 날아들지 모른다는 것이다. 문제는 회사에서 느끼는 불안이 고스란히 가정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아내와 아들들도 불안해 한다. 가장으로서의 위치가 흔들리고, 아내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그도 무언가 다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다 했다. 그가 보낸 메시지의 마지막은 ‘기도해주세요’였다. 


요즘 영화를 자주 본다. 대학시절 학보사 문화부기자를 맡으면서 취재를 빌미로 거의 매주 영화를 보는 행운을 누렸다. 장르불문. 닥치는 대로 보았다. 그 덕에, 나는 나만의 아마츄어 영화독법을 가지게 되었다. 그중 하나, ‘감독은 역할의 비중에 상관없이 영화 속 인물 중 한 사람에게 자신을 심는다. 그리고 그 사람의 대사나 행위를 통해 설(說)을 푼다’ 요즘은 영화관련 사이트마다 관객이 적어놓은 ‘극중 명대사’들이 있어 재미가 감소됐지만, 1시간 30분 내내 신경을 곤두세우고 ‘인물’이나 ‘대사’를 긁어내는 ‘숨은그림찾기’는 참으로 재미난 일이었다. 최근에 ‘도쿄소나타’라는 영화를 봤다. 예상대로 개봉관은 없었고, 1시간 가까이 골목을 헤매다 겨우 상영관을 찾았다. 영화포스터는 헐리우드 영화 ‘어거스트 러쉬’를 연상케 한다. 어린 소년이 피아노 앞에 앉아있다. 영화를 수입하고 배급한 회사의 홍보 전략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홈페이지를 통해 본 이 영화의 일본판 포스터는 달랐다.  부모와 두 아들, 네 식구가 식탁에 앉아있다. 하지만 식탁에 앉아있다는 사실 말고, 그들이 가족임을 보여주는 어떤 다른 이미지도 보이지 않았다. 예상대로 감독 ‘구로사와 기요시’는 영화에 대한 설명을 통해 ‘일본가정, 일본사회, 21세기’를 함께 언급한다.
  
“내가 지금 가장 관심 있는 주제는 ‘진정한 21세기는 과연 어떤 시대인가’이다. 21세기는 왜 매우 혼란스럽고 어지러운가? 그것은 왜 우리가 이전 세기에 가졌던 미래의 모습과 크게 다른가? 일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그 대답을 찾는 것은 어렵다. <도쿄 소나타>는 내가 직면한 이 복잡한 문제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나는 그것이 나에게 새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나는 현대 도쿄 어디서든 찾을 수 있는 사람들의 작은 드라마를, 가능한 작은 과장과 함께 묘사하려 노력했다.” (무비위크 2009. 3)


‘우리 가족은 모두 거짓말쟁이입니다’ 초등학교 6학년생 켄지는 엄마가 건네준 급식비 봉투를 들고 피아노교습소를 찾는다. 엄격한 가장인 아빠가 반대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형은 출구 없는 미래를 불안해한다. 그는 결국 아무도 모르게 외국인의 입대를 허용한 미군에 지원한 뒤 ‘신원보증서’를 들고 집으로 온다. 엄마는 가정주부다. 가족들을 위해 도너츠를 만들고, 청소를 하고, 저녁식사를 준비한다. 입대지원서를 들고 온 큰 아들의 질문에 가정주부로 사는 것도 충분히 행복하고 보람 있는 일이라고 말하지만, 실상 그녀는 외롭다. 빈 집, 쇼파에 홀로 누워 두 팔을 허공에 뻗으며 읖조린다. ‘누가 나를 좀 잡아줘’ 한편 제법 큰 의료기 회사의 서무과장이었던 아빠는 고학력 저임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중국인 직원들에 밀려 실직 당한다. 하지만 매일아침 정장을 차려입고 집을 나선 뒤, 동네 공원 무료급식소를 찾아 점심을 해결한다.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백화점 청소용역 노동자가 된 아빠가 엄마와 마주치는 장면이다. 아빠는 엄마를 피해 도망친다. 그리고 엄마는 바다로 간다. 더 이상 길이 없는 모래사장 위에 차를 세운 뒤 망망한 바다를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여기서부터 새로운 길이 생겼으면 좋겠어’ 같은 시간, 지나던 트럭에 치여 길 위에 쓰러진 아빠가 울먹이며 중얼거린다. ‘어떻게...어떻게 하면, 여기서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어떻게 하면’

그날 두 시간 여 동안, 나는 아빠가 되고, 엄마가 되고, 큰 아들이 되고, 막내아들이 되었다. 네 사람 모두가 우리의 분신 같았고, 미래 같았다. 권위를 상실해가는 아버지는 불안하다. 무관심에 길들여져 버린 엄마는 외롭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큰 아들은 무기력하다. 막내아들의 눈에 비친 부모와 학교 선생님은 말과 행동이 다르다. 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언제나 말하려 든다. 그러나 정작 그들의 말은 그들의 행동과 다르다. 켄지는 고립되어 간다.

결국 영화는 이들을 ‘가족’으로 다시 묶어주고, 이들 각자가 ‘다시 시작’하게 하는 순간으로 엔딩을 선택했다. 그러나 영화 속 주인공들이 찾아낸  ‘새로운 길’과 ‘새로운 시작’은 혁명적이지도, 격변적이지도 않았다. 다만, 그 순간 나는 ‘느리고 긴 호흡’으로 그들에게 다시 찾아온 ‘평화’를 느낄 수 있었다.

뱀은 몸이 자라고, 비늘이 닳게 됨으로 반드시 허물을 벗어야 한다. 새 비늘옷이 낡은 비늘옷 아래에서 형성되고 있는 동안, 뱀은 안전한 곳으로 물러나 숨어 지낸다. 재미있는 사실은 눈꺼풀도 허물을 벗어야 하므로, 이 무렵에는 눈도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새 껍질이 완성되면, 낡은 허물을 장갑 벗듯 벗어버린다. 그제서야 눈도 다시 뜬다. 살아가며 하나의 변화를 겪을 때, 말하자면 낡은 허물을 벗거나, 벗어야 할 때 눈도 함께 흐려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 같다. 바울은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큰 빛을 보았고, 내적변화를 겪었다. 이때 그는 ‘눈은 떴으나 앞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마침내 낡은 허물을 벗어버리던 순간, ‘그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며 다시 보게 되었다’고 하지 않던가. 변화가 필요할 때, 새로움이 간절할 때, 눈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어쩌면 그때야말로 먼 곳이 아닌 가까운 곳에 내 시선을 기다리는 돌파구가 있지 않을까 말이다.

요한복음 20장은, 예수가 처형당한 뒤 제자들이 얼마나 무서운 공포에 휩싸여 있었는지 보여준다. 그들은 한 방에 모여, 문을 걸어 잠구고 있었다. 이어질지도 모를 죽음의 연좌를 피하고 싶은 마음은 스승의 죽음을 애도하고, 회상할 여지조차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 침묵과 공포의 순간, 이 폐쇄된 공간속으로 예수가 들어온다. 그리고는 두 번이나 ‘평화의 인사’를 건넨다. 공포에 공포가 더해진 상황, 제자들에게 ‘평화(평강)’는 역설 중에 역설이었을 것이다. 그리곤 뜻 모를 행동을 한다. 제자들을 향해 숨을 내쉬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성령을 받아라’.

나는 이것을 ‘두번째 숨’이라 이름 짓고 싶다. 여기서 예수가 말한 성령은 무엇이었을까? 분명 사도행전에 기록된 ‘불의 혀’같이 찾아온 그 성령은 아니었을 것 같다. 굳이 구분하자면, 예수는 제자들에게 호흡을 불어넣었고, 이때 그들 속으로 성령이 들어갔다. 그것은 ‘생명’이었다. 반면 사도행전의 그 영은 ‘능력’이었던 것 같다. ‘생명’과 ‘능력’은 공존한다. 생명이 있어야 능력이 있을 수 있고, 능력이 있음으로 생명은 유지될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이 앞선다. 예수는 먼저 생명을 불어넣었다. 흙으로 형상 지어진 사람의 모양에 첫 번째 숨을 불어넣은 야훼처럼, 그도 두려움과 공포로 빚어진, 살아있으나 죽은 것 같은 폐쇄된 자아들을 향해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은 것이다. 그것이 제자들의 환상체험이었든, 부활한 예수의 현현이었든 그것을 밝히는 것은 무의미하다. 다만, 이 무겁고 답답한 글,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그리고 혹시라도 ‘새로운 시작’을 모색하는 모든 분들께 ‘성서가 이렇게 말하더라’고 조심스레 건네 보는 것이다. 호흡을 불어넣은 뒤 예수는 제자들에게 호언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여 주면 사하여질 것이요, 사하여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요 20:23)

영화가 끝나고 한참동안 평온히 숨을 내쉬며 앉아있었다. 그리고 이메일을 보낸 그 집사님께 문자를 보냈다. ‘집사님 부부 데이트 한번 하시죠. 영화 어떠신가요?’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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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적 실패의 상상력
―엘리야 다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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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예언, 예언자

1970년대 중반 출간된 두 권의 저술 김정준의 『정의의 예언자』와 서인석의 『하나님의 정의와 분노』는 연구사적으로 한국 제1성서(구약성서) 학계의 기념비적 저작에 속한다. 한데 흥미롭게도 이 두 권이 모두 예언자 아모스를 다루고 있다. 또한 아모스를 읽는 주요 코드를 ‘정의’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양자는 공통적이다. 당시 독재정권의 국민총동원적 개발주의에 대해 그 발전의 어두운 이면을 비판하는 맥락에서 ‘하느님의 정의’라는 모티브가 성서 읽기에 개입한 결과다. 아무튼 이후 한국의 비판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아모스뿐 아니라 ‘예언자 일반’을 ‘(하느님의) 정의의 사도’처럼 이해하는 경향이 생겼다.

물론 이러한 이해는 예언운동에 대한 편협한 시각에 불과하다. 성서에 언급된 예언자들의 면모는 하나의 이념적 지형만으로 포괄하기에는 너무 다양하기 때문이다. 특히 「열왕기상」 22장의 미가야 벤 임라와 시드키야(주전 9세기), 「아모스서」 7장의 아모스와 아마지야(왕실 사제)(주전 8세기), 그리고 「예레미야서」 28장의 예레미야와 하나니야(주전 7세기)의 대립에서 볼 수 있듯이, 지배와 저항이라는 코드에서만 보아도 한 편은 당대 왕실의 비판자인 반면 다른 한 편은 왕실의 입장을 대변하는 존재다.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한 쌍으로 기억되는 존재조차도 실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 이사야나 예레미야는 중앙의 유력한 귀족 가문 출신이고, 복잡한 권력 투쟁과 이념 투쟁의 맥락에서 입지를 형성한 존재였다면, 아모스나 미가 등은 변두리 지역의 농부 혹은 지방 토호 출신이다. 여기에 좀더 다양한 관점을 개입시키면 예언자들의 동질성을 찾아내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편, 성서의 예언서들에서 예언자에 대한 역사적 정보를 읽어내는 일 또한 매우 제한적이다. 왜냐하면 예언자들의 대부분은 북왕국에서 활동한 사람들인데, 현재의 성서에 편찬된 양식은 남왕국 출신 사가들의 창조에 가까운 손길을 거치면서 내용이나 형식, 그리고 분류에서 심하게 변형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많은 정보들이 생략되었을 것이고, 더욱 심하게는 다른 예언자들의 이야기가 혼합되고 심지어 해석에 속하는 새로운 언급들이 마치 원래의 것이라도 되는 양 은근슬쩍 끼어들어오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예언서들에서 원래의 예언자나 예언운동을 재건해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요컨대 학문적으로 예언, 예언자, 예언운동을 정의내리는 일은, 현재의 학문적 동향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상태다.

그럼에도 우리는 성서의 예언들을 귀담아 들으려 한다. 그만큼 신앙에서 예언은 중요한 전통으로 간직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에 있다. 여기서 다시, 앞서 언급한 한국의 두 성서연구자들의 성서의 예언 읽기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예언서를 선별하고, 그것을 연구자 동시대의 문제의식 특히 위기의식과 연계시키는 방식이다. 그것은 과거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현재와 대화하기 위한 과거의 읽기’라고 규정할 수 있다. 현재의 시선으로 과거를 일방적으로 읽어내는/조작하는 것도 아니고, 과거의 시선으로 현재를 억지 규정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과거에 관한 정보를 통한 역사학적 연구 경향과, 현재의 문제의식 간에는 첨예한 긴장이 필요하다. 여기에 역사학적 상상력과 문학적 상상력은 분리되면서도 분리할 수 없이 서로 얽힌다.
 
그러나 ‘정의’라는 시대 비판적 예언 읽기의 코드는 오늘날, 1980년 5공 정권의 등장한 이후,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정의’는 시대 비판적 입지로서만 실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게 오늘 우리의 개념 속에 자리잡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1987년 이후, 이른바 ‘민주화’ 과정과 지구화 과정에서 ‘개인’과 ‘일상’이 삶의 인식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이후, ‘정의’로 표상되는 해방의 문제의식은 그다지 명료한 해방적 가치가 되지 못한다는 게 입증되었다. 개발주의적 총동원 못지않게, ‘정의론’에 기반한 총동원도 삶의 다양성을 억압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던 것이다. 오히려 다양한 정의, 심지어 정의들 간의 상이한 해방적 가치를 둘러싼 논쟁이 가능한 상황이 오늘 우리의 이해를 지배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예언을 읽는 오늘 우리의 대안적 코드를 찾기 위한 탐색이 필요하다. 나는 ‘예언자로서의 예수’에게서 그 실마리를 찾는다. 그것은 ‘낯설음’이다. ‘육이 된 신’이라는 예수에 관한 신학적 담론은 ‘신에 관한 친숙함’을 ‘낯설음’이라는 문제의식으로 해체한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의 예언자적 독특성은 친숙한 것, 일체의 인습적인 삶의 지혜에 대한 전복적인 도전에 있다. ‘시대를 낯설어함’ 바로 그것이 예수 활동의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나는 단언한다. 바로 이와 같이 성서의 예언들에서 나는 시대를 낯설어하는 이미지를 발견한다.
 
1930년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당시 자본주의의 최첨단의 미학을 자랑하는 파리의 아케이드를 거닐면서 문뜩 자신을 낯선 세계를 방황하는 ‘배회자’로 느낀다. 그 몇 년 뒤 장 뽈 싸르트르는 그의 첫 소설 『구토』에서 어제까지 일상 속에서 무감각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수용되던 것들 하나하나에서 구역질을 하는, 이상한 생리현상을 이야기한다. 불현듯 감지된 세계의 낯섦이 몸을 불편하게 한 것이다. 김수영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 내 몸이 아프다”(「먼 곳에서부터」)고, 1960년 초의 역사의 흐름에 대한 불편함을 자신의 몸에서 기억해낸다. 마찬가지로 민중신학자들은 1970년 11월 13일의 전태일에게서 시대를 불편하게 보는 예수에 대한 이해에 문득 도달했다. 바로 이러한 민중신학의 시선에서 성서의 예언을 읽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집고 넘어갈 게 있다. 성서 전통에서 예언자는 거의 남자들의 전통이었다는 점이다. 물론 여예언자들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출애굽기」 15장 20절의 드보라, 「판관기」 4장 4절과 「열왕기하」 22장 14절, 「역대기하」 34장 22절의 훌다, 「이사야서」 8장 3절의 이사야의 부인이라고 언급된 익명의(가상의?) 예언자, 그리고 「루가복음」 2장 36절의 안나, 「묵시록」 2장 20절의 티아디라 교회의 ‘이세벨’ 등, 여러 명의 여성 예언자들에 관한 정보에 접할 수 있다. 그러나 드보라나 훌다 등 주요 인물조차도 묘사가 극히 제약적이고, 티아디라의 이세벨처럼 종종 부정적으로 다뤄진다. 독자적인 이름의 예언서로 기억된 경우는 전무하며, 무엇보다도 ‘성해방’적인 문제에 대한 담론에 대해 성서가 침묵하고 있는 것처럼, 예언자들의 담론도 거의 전적으로 성적 소수자에 대한 문제의식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언 전통은 오늘 우리에게 비판적으로 이해되어야 할 측면도 적지 않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성서 전통 속의 엘리야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엘리야임을 드러내려는 용의주도한 노력을 기울였다. 광야에서 활동하며, 낙타털옷, 가죽허리띠 같은 의복이나 메뚜기·석청 같은 음식을 먹는 모습은 영락없이 사람들의 기억 속의 엘리야 바로 그였던 것이다. 그것은 「말라기서」의 다음과 같은 구절과 관련이 있다.

너희는 내가 호렙산에서 나의 종 모세를 시켜 온 이스라엘에게 내린 법과 규정과 계명을 되새기도록 하여라. 이 야훼가 나타날 날, 그 무서운 날을 앞두고 내가 틀림없이 예언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엘리야가 어른들의 마음을 자식들에게, 자식들의 마음을 어른들에게 돌려 화목하게 하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세상을 모조리 쳐부수지 아니하리라.
―「말라기서」 3장 22~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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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변화산에서 예수와 엘리야, 모세

여기서 보듯이 엘리야에 관한 대중적 기억은 ‘종말’과 ‘심판’이라는 전통적 인식 코드와 연결된다. 현재에 대한 강력한 부정(否定)이 대중의 열망으로 간직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세례자 요한의 “회개하라.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포는 대중의 현 체제에 대한 불만을 증폭시켜 종말에 대한 신앙과 연계시킨다.

이것은 예수가 요한의 운동을 계승했을 때, 대중의 기억 속에서 다시 부활한다. 즉 요한의 부활한 몸이 예수라는 대중적 인식은 ‘엘리야=요한’이라는 대중의 믿음과 연결되어, 예수에게서 엘리야를 떠올리는 연상작용을 낳았던 것이다(마르8,28).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처절한 고통 속에서,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라며 절규하는 고성을 지르며 임종하는 장면에서 사람들은 그 소리가 ‘엘리야’를 부르는 소리로 오인했다고 한다(마르15,34~35). 필경 이러한 드라마적 상상력은 예수와 엘리야를 동일시하려는 욕망이 예수의 십자가 처형 장면에 대한 기억에 영향을 미쳐 만들어진 상상력의 산물일 것이다. 그만큼 예수는 동시대에 부활한 엘리야로 인식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에 더욱 깊이 다가갔음이 분명하다. 예수의 실천은 유대 대중의 민중적 상징체계와 맞물림으로써 강력한 대중 전승의 일부를 이루었던 것이다. 여기서 예수 동시대의 대중의 문제인식은 엘리야라는 거의 9세기 전의 인물에 관한 기억과 대화하여, 서로를 해석하는 시선이 된다. 엘리야와 예수, 예수와 엘리야. 그리고 민중신학에서 이것은 ‘예수-전태일’의 해석학적 상호작용으로 이해되었다.

한편, 제2성서(신약성서) 시대의 유대교 주류 담론들, 특히 라삐적 바리사이즘은 이러한 엘리야를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그것은 대중 담론에 대한 그들의 불신과 관련된다. 그런 점에서 예수운동과 유대교 주류 담론간의 갈등의 이면에는 바로 이러한, 대중적 희망과 엘리트주의적 희망 간의 계급적인 상이한 전망이 깔려 있었던 것 같다.

아무튼 그럼에도 주로 묵시적인 유대교의 문서 텍스트 속에 엘리야가 들어올 수 있었던 것, 그리고 그리스도교 문서들 속에 예수와 엘리야가 내적인 연계를 갖도록 내용이 구성된 것은 지식 계층 사이에도 대중적 희망의 체계가 일정하게 스며들 수 있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아마도 이와 비슷한 이유로, 이슬람교 문헌에서도 엘리야가 ‘의인’의 반열에 들어가게 되었을 것이다.

역사의 엘리야

그렇다면 역사의 엘리야(historical Elijah)는 어떤 존재였을까? 그는 정말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을 만한 이였을까? 아니면 실존의 그와는 전혀 엉뚱한 모습으로 변형되어(transfigurated) 기억된 것은 아닌가? 역사의 다윗은 매우 억압적인 시대를 연 장본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그는 후대의 야훼 신앙사에서 해방의 상징으로 변형되어 대중에게 기억되었다. 반면 모세는 억압당하는 히브리의 해방을 상징하는 존재로서 야훼 신앙사 속에 도입된 상징이었음에도, 특히 바울의 텍스트 속에서는 억압을 상징하는 존재로서 재현되었다. 이렇게 이미지의 재현은 변화무쌍한 양상을 띤다. 그렇다면 과연 엘리야는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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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도표를 클릭하면 큰 화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오므리 왕조, 특히 아합 왕 시대에 활동한 예언자다. 오므리와 아합 왕의 시대는 아마도 팔레스티나 역사에서 이스라엘이 가장 막강한 국력을 자랑하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토만 보더라도, 요르단 동편의 암몬, 그 남부의 모압, 그리고 에돔과 유다 왕국을 속국으로 지배했던 것으로 보이고, 북으로 갈릴래아 북부 지역 끝의 ‘단’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다마스커스 왕국과의 국경인 시리아 남부 지역까지 차지하였다. 상부 갈릴래아의 북단의 단과 하솔, 하부 갈릴래아의 므기또와 이즈르엘, 그리고 사마리아 지역 등에서 오므리-아합 대에 건조된 거대한 왕궁 및 요새가 발굴되었는데, 그 규모나 세련미가 당대뿐 아니라 상당한 후대에까지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특출나다. 특히 이 도시들에서 발굴된 지하수로나 마구간의 규모는 이 왕조가 얼마가 강력한 위용을 가진 나라인지를 시사한다.

실제로 아시리아의 샬마네셀 3세(Shalmaneser III, 859 BCE~824 BCE 재위)의 비문에는 아시리아의 서방원정군에 맞서는 시리아-팔레스티나 연합군의 주축이 이스라엘의 아합 왕이며, 파견된 이스라엘의 군사력이 마전차 2천 승과 보병 1만 명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숫자가 어느 정도 정확한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상당한 규모라는 점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필경 아합의 군대는 평지전투에 관한 한 아시리아의 팽창주의를 막아내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므리 왕조에 이르러서 팔레스티나 거의 전역을 통제할만한 강력한 왕조가 비로소 탄생한 것이다. 흔히 다윗-솔로몬 대의 왕국을 팔레스티나에서 성립한 최초의 고대국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러한 이해의 근거는 단지 성서의 다분히 이데올로기적인 묘사에서만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솔로몬이 건립했다는 도성의 보잘 것 없는 흔적을 비롯한 고고학적 증거도 그것을 입증해주지 않고, 외국의 비문에는 전혀 언급조차 얻을 수 없을 정도다. 반면 ‘오므리의 집안’은 외부의 시선에서 남북의 왕조를 통틀어 이스라엘 족속들의 나라를 대표하는 존재로서 오랫동안(이 왕조가 몰락한 이후에까지도) 기억되었다.

왕궁의 고고학적 흔적에서 드러나듯 아마도 비교적 잘 짜인 관료제도가 성립되었던 듯하다. 왕실에서 대규모의 예언자와 사제 집단을 양성했다는 성서의 묘사를 염두에 둔다면, 관료조직은 군사조직만이 아닌, 많은 이데올로그들의 양성 시스템도 포함하고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것은 국가의 발전에 관한 신학적인 체계화 및 대중화가 상당히 활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페니키아의 왕녀인 이세벨이 아합의 부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전승에는 아세벨에 대한 적개심이 가득하다. 그만큼 이세벨의 상징적 이미지는 아합의 정책에서 중요하다. 성서는 그것을 바알과 아세라 신앙과 관련시킨다. 이 텍스트들에서는 이 왕실신앙을 혼합주의로 다루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우선 오므리 왕조의 제국적 발전은 다종족 연합체를 통해 구현되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고대의 국가들이 영역 내의 종족을 어느 정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는지를 과장해서 이해하는 것은 금물이다. 이 시대 국가들은 군사적으로 영토를 통제 관장할 수 있을지언정, 백성의 경험과 기억을 통제할 수단과 능력을 갖추지는 못하였다. 또 군사적 통합조차도 지방에 왕 직속의 관료제도를 구축함으로써 실현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제국 요소요소에 설치된 몇몇 군사요새 정도가 왕의 직속 부대가 배치된 곳이었고, 각 지방의 구체적인 행정 및 일상은 지방 토호 세력들에 의해 통제되었다. 그러니 지방 권력과 중앙 권력 간의 비대칭적 동맹의 결과가 고대의 국가들의 실상이라고 하는 게 적합하다.

물론 오므리 왕조도 예외가 이니었다. 오므리 왕조의 수도가 둘이라는 점은 이런 관점에서 중요한 사실을 시사적으로 보여준다. 성서는 사마리아 지방의 성읍인 사마리아를 오므리가 돈으로 사들여서 수도로 삼았다고 한다. 반면 이즈르엘 성읍은, 나봇의 이야기에서 보듯, 토착민의 땅을 강탈하여 수도로 삼았다. 그것은 사마리아 건설이 족속간의 계약 전통에 의해 왕권이 행사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면, 이즈르엘은 왕권에 의한 일방적인 강탈 점유를 통해 구축된 도시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최근의 고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두 성도가 한 편은 보다 이스라엘적인 반면, 다른 한 편은 보다 비이스라엘적이라는 견해를 제시한다. 요컨대 오므리 왕조는 이중수도를 통해 두 유형의 통치를 시행했다는 것이다. 하나는 야훼신앙의 계약 군주적 전통이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제군주적 전통이다.

앞의 ‘표’에서 보듯 이스라엘의 선후대 왕조들은 예언자들의 지지에 힘입어서 왕위를 획득한다. 그것은 대중과의 계약이 왕권 형성에 중요한 기반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필경 오므리 왕조도 그러한 예언자적 지원을 기대했을 성 싶다. 그러나 바아사, 지므리 등으로 이어지는 계속되는 군사쿠데타의 상황에서 예언자의 지지는 그다지 정당성을 갖지 못하였을 것이다. 아마도 오므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직후 티브니를 주축으로 한 세력과의 내란 상황에 빠진 것은 이러한 예언자적 지지의 약한 정당성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란을 극복한 뒤, 이러한 약한 정당성은 오므리 왕조의 강점이 될 수 있었다. 그것은 예언자적인 계약 전통에 덜 의존적인 정권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 이 왕조는 보다 자유롭게 강한 전제군주적 모델을 구축하기 위한 모색을 할 수 있었다. 오므리가 아들 아합을 페니키아의 왕녀 이세벨과 결혼시킨 것은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가능했다. 그러므로 아합은 보다 적극적으로 이즈르엘에 왕궁을 건립하고, 그곳을 전제군주적 통치의 기초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합의 혼합주의’ 정책은 종족 연합에 기초한 고대의 국가로서는 불가피한 상황이었고, 오므리 왕조는 그런 점에서 이러한 이질성을 효과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한편, 혼합주의 문제는 좀더 복잡하게 사유할 필요가 있다. 우선 ‘혼합주의’라는 표현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다. 왜냐면, 혼합주의의 문제는 한참 후대인 주전 5세기 이후 페르시아에서 귀환한 유대공동체가 정체성을 형성해가는 몇 세기 간의 내적 투쟁에서 만들어진 신학적이고 종족적인 이데올로기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순수함’을 원리주의적으로 추구한 예루살렘 중심의 유대공동체의 이데올로기가 성서 편찬에 개입한 결과, 과거의 역사를 ‘혼합’과 ‘순수’라는 틀로 억지로 짜맞춘 데서 성서의 혼합주의에 관한 논의들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수함’이란 특정한 시기의 역사적 발견물에 다름 아니다. 즉 혼합적인 것은 ‘순수한 것’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 개념인데, 실제로 순수한 것은 후대의 발견물이고, 그 시선에서 과거의 역사를 혼합주의적이라고 재해석했다는 얘기다. 다만 수만은 이질성들이 서로 경합하고 때로는 조합되고 혼재하기도 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삶과 의식은 구성되었다. 그런 점에서 바알 신앙은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의 다양한 이질성들이 만나 절충하고 혼재한 요소의 핵심에 있다. 아세라 신앙도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야훼 신앙은 시리아-팔레스티나의 이러한 대전승의 주류에서 약간 벗어난 소수 전통이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야훼 신앙이 대전통과 단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일단의 사람들은 대전통에 의존하면서도, 새롭게 등장한 소수 전통에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게 적합하다.

여기서 오므리 왕조가 페니키아의 바알 신학을 도입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왜냐면, 오래전부터 지중해 무역 시장 형성에 뛰어든 페니키아의 문화전통은 보다 사적인 소유 개념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그것은 능력이 있으면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는 자유방임주의적 관점과 어느 면에서 맥을 같이 한다.

오므리 왕조에 의한 ‘국가의 성공’은 이러한 신학적 발전의 중요한 단서가 되었을 것이다. 대대적인 건조물은 모든 백성에게 그 위용을 드러냄으로써 국가주의적 성공의 미학을 홍보한다. 또 국가적인 지원에 힘입은 대규모 제의는 그 화려한 전례 행사를 통해 성공주의를 찬양한다. 반면 이러한 국가주의적 신학에 도전하는 자들은 국가의 공공연한 억압을 받았다. 많은 이들이 지하로 숨어들었고, 그들의 담론 또한 침묵의 늪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이제 전 사회는 왕조의 찬란한 성공 신화에 온통 사로잡힌 듯했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문화 속에서 태어났고, 자랐으며, 그 속에서 문법화된 성공 게임에 몰두해 있었다.

이때 엘리야가 활동한다. 왕조의 이러한 성공의 미학이 한참 활기를 띠던 바로 그 때다. 어느 나라를 점령했다는 전령의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연일 들렸고, 그 나라에서 보내온 공납물의 행렬이 계속되는 도로 한복판을 거닐면서, 그는 그 화려한 성공에 문뜩 ‘불편함’을 느낀다.

그에 관한 성서의 묘사는 문학 양식상 ‘전설’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마치 예수에 관한 담론처럼, 서기관적 저술가들의 지적인 매체를 통해 기억된 것이 아니라, 민간전승을 통해 입에서 입으로 오랫동안 간직되어 온  이야기인 것이다. 그만큼 이 이야기는 대중의 분노와 희망의 언어로 가득하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역사의 엘리야’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한다.

「열왕기상」 17장의 시돈 지방의 사렙다의 과부 이야기를 보자. 여기에는 왜 그가 대중적 분노와 꿈의 이야기, 그러한 기억의 대상이 되었는지에 관한 근거가 슬며시 들어가 있다. 여기서 그가 베푼 기적은 작은이들의 매우 일상적인 고통과 관계하고 있다. 다른 예언자들이나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의 기적 같은 것이 다분히 이데올로기적인 큰 메시지를 담고 있는 데 반해, 엘리야의 활동은 이념에 채색되지 않은,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생생한 역경과 그것의 극복 과정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특히 과부와 어린아이가 그의 기적의 수혜자로 나온다는 점은 대중적 고통의 극한에 더욱 가까운 곳에서 그에 관한 애틋한 기억이 잉태하여 자라고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요컨대 엘리야는 아합 왕조가 추진하던 강력한 전제군주제 정책이 대중의 희생을 동반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불편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권력을 동원하여 왕이나 귀족들이 소농들의 토지를 몰수하는 일이 숱하게 일어났고, 하루가 멀다 하고 전쟁이나 부역에 동원되어야 했던 대중으로선 땅을 지키는 일이 너무나 버거웠다. 이런 사회에서 과부나 고아는 무수히 양산되기 마련이고, 그들의 생존권은 전혀 보장될 수 없다. 이런 부의 극심한 편중 현상이 국가주의의 발전과 관련되어 있고, 페니키아식 바알 종교에 의해 미학화되고 있다는 사실은, 아마도 엘리야를 통해 대중에게 속속들이 들춰졌을 것이다. 그의 활동이 얼마나 성공적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성공한 정도만큼은 그것이 들춰졌다고 하는 것은 이론의 여지없다.

가르멜 산은 페니키아와 이스라엘 접경지대에 있는 산이다. 또한 이즈르엘 성읍에서 그리 멀지 않은 중요한 요새성읍이었다. 그러므로 이곳은 양국의 상이한 종교 전통간의 대립이 빈번한 지역이기도 했고, 이 점에서 이 지역의 상징성은 단순한 장소의 점유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문제를 넘어선다. 아합과 이세벨은 아마도 이곳에 바알신앙을 기리는 신전을 세웠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야훼신앙이 그 하위에 포섭되어 있었을 것이고, 사람들에게 전혀 불편하지 않은 것으로 기억되게 하는 장치를 포함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대규모의 승려들이 국가제의를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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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가르멜 산 사건 이후 엘리야는 도망자가 된다

그런데 엘리야는 대중을 선동하여 이들을 몰살한다. 성서가 묘사하듯 천 명에 이르는 대대적인 학살극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실상은 훨씬 소소한 사건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는 이 거사가 혁명으로 발전하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세벨의 공권력에 그는 추격당하는 신세가 되었고, 유다 남부 네겝 지역인 브엘세바로까지 도주해야 했다.

먼 길을 달음질하느라 온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하지만 더욱 그를 좌절시킨 것은, 그토록 열망해마지 않던 새 세상에의 희망이 좌절된 것이리라. 차라리 죽여 달라고 절규하는 모습은, 아마도 엘리야보다 더욱 절망했던 대중의 심정을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대중은 엘리야를 기억하면서 가르멜에서의 실패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실패의 기억은 엘리야에 관한 전승의 진수를 보여준다.

그가 천사에 이끌려 호렙으로 간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혁명적 거사 실패와 그에 따른 절망에 사로잡힌 상황을 극복하는 대중의 자존적 지혜를 담고 있다. 본문에 따르면 호렙 산에 이른 엘리야는 야훼의 계시를 받고자 했다. 새로운 희망의 근거를 갈망하는 자의 몸부림으로 말이다.

그때 엄청난 바람이 휩쓸고 지난다. 모세 전설에서나 나올 법한..., 과연 야훼의 임재를 체험할 만한 기세다. 그러나 야훼는 거기에 없었다. 이윽고 온 땅을 뒤흔드는 지진이 일었다. 이 세상의 최고 지배자이신 야훼의 발소리에 놀란 땅의 요동이기라도 한 양. 하지만 여전히 야훼는 나타나질 않는다. 도대체 어떤 어마어마한 일이 더 일어나야 한단 말인가.

갑자기 불길이 치솟는다. 그래, 이제야 말로, 야훼가 나타나시나보다. .........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야훼는커녕 송사리 귀신도 보이질 않는다. 이를 어쩐단 말인가? 야훼는 바알에게 졌단 말인가? 바알이 더 강한 신이란 말인가? 세상은 악이 지배할 수밖에 없단 말인가? 그렇다면 민중의 해방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말인가! .........

그때였다. 솔바람이 스치듯이, 세미한 소리가 그의 귓가를 슬쩍 건드리고 지나간다. ‘엘리야, 네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느냐?’ ‘광풍에도, 지진에도, 천길 불꽃 속에서도 없던 신이..., 아 이런, 그렇구나.’ 엘리야는 야훼의 임재가 이렇게 오는 듯 마는 듯 다가오는 것임을 비로소 발견한다. 천지를 진동시킨 혁명적 대사건에서가 아니라, 미세한 일상 속에서 감각 세포들을 살며시 건드리며 다가오는 것, 밖에서 오는 것인지 안에서 발아하는 것이지도 모르도록 다가오는 것. 천지와 자아가 합류하는 곳, 바깥에서 흘러오는 물과 안에서 솟아오른 물이 어우러져 뒤섞이는 곳, 나와 신이 아와 타로 구분되지 않고 하나로 합체되는 곳, 그곳에서 하느님의 나라는 도래하는 것이라고.

대중은 엘리야 이야기를 통해 국가주의적 성공의 미학을 불편해하는 예언자적 감수성에 공감한다. 동시에 그의 이야기에는 혁명적 이념의 이데올로기가 담고 있는 또 다른 성공주의에 대한 불편함이 스며 있다. 바로 여기에 가르멜 실패의 기억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간직하는 대중의 니힐리즘적 지혜가 되살아난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세월이 흐르면 누구나 죽기 마련이다. 하지만 대중은 이런 시간의 법칙에도 굴복하지 않는 엘리야를 기억하고자 한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불말이 끄는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날아갔다고. 이러한 믿음은 그가 언젠가 바로 그런 모습으로 다시 돌아오리라는 소망의 다른 표현이다. 그리고 이런 대중의 믿음은 시간이 지나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증폭됐다. 후대의 역사에서 그는 메시아 왕국 도래의 상징으로 기억됐다. 그리고 예수는 그러한 메시아 왕국이 또 다시 저항의 성공주의에도 물들지 않는 전통으로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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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사람들은 그가 죽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가 불수레 승천 이야기이다.

영웅적 예언자는 없다. 오직 그것을 부정하는 예언자적 성찰이 있을 뿐이다

엘리야, 그는 칼을 든 예언자다. 그는 혁명가다. 그러나 성공한 혁명가가 아니다. 그는 실패했다. 그리고 좌절하는 모습을 보여줄 틈도 없이 역사의 무대에서 긴급히 사라져야 했다. 하지만 대중은 바로 그 실패 때문에 괄호 쳐진 후속의 이야기를 채워 넣어야 했다. 성서는 엘리야의 미완성 교향곡을 완성시킨 대중의 기억술의 단초를 보여준다. 그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실패로 말미암아, 대중에게 실패는 곧 더욱 온전한 성공의 흔적임을 알려주었다. 대중은 엘리야로 말미암는 온전한 성공의 담론을 창조하는 주역으로, 곧 ‘민중’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사건을, 그 속에서 영웅이 탄생하고 그의 뒤를 추종함으로써 거대한 변화가 이루어지는 사건을 통해 단박에 확보되는 그런 성공의 파노라마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약간의 성공과 약간의 실패가 끝없이 교차되는 가운데 되는 듯 마는 듯 만들어지고, 끝없이 지양되면서 펼쳐지는 일상적 사건의 연쇄이다.

영웅은 없다. 메시아도 없다. 그러한 성공의 화신으로서의 ‘영웅/메이사/신의 죽음’에 관한 예언자적 성찰이 있을 뿐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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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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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바우
    2009.05.08 11:59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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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재밌네요! 좋은 글과 묵상, 감사드립니다.
  2. 이상철
    2009.05.20 02:18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90년대 이후 데리다는 자신의 이론적 성찰 deconstruction을 구체적 영역에서 (종교와 윤리, 정치분야)에서 풀어내기 시작합니다. 데리다의 해체주의적 종교담론을 묶어 편찬한 책이 Acts of Religion(2002)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한마디로 데리다의 종교론을 요약하는 문장이 the messianic, or messiancity without messianism, 한국말로 번역하자면,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데리다는 벤야민과 만나고, 후기 데리다는 그런 의미에서 초기에 그가 레비나스와 대결했던것과는 달리 레비나스를 많이 닮아갑니다.
    목사님의 글을 읽으며 그런 (후기) 데리다가 떠올랐습니다.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에 대한 (기대, 엿보기, 관음증,희망,지연, 연기, 미끄러짐...무엇이 적합한 표현인지는 여전히 남겨진 숙제입니다)

6년을 기다린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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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임방주
(차별없는세상을위한기독인연대)

어디서 어떤 사람을 어떻게 만날지는 ‘하느님’도 모르는 것 같다. 만약 아신다면 안가르쳐 주시는 걸 꺼다. 모르시든 안가르쳐주시든 ‘나는 알수없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불교에서는 인연을 짓는다는 표현을 쓰는데 그 의미는 상황이 끝난 후 알게 되는 경우가 허다한 것 같다. 나도 마찬가지. 하느님과 부처님을 오가며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만남의 의미는 꽤나 지나서나 아나부다~’라는 상식을 깨우쳐준 소중한 만남에 관한 것이다.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이하 KSCF)의 회원자격으로 태국의 버마이슈라는 곳에서 인턴이 되어 버마 민주화와 난민, 종족 갈등에 대해서 이런 저런 경험을 하고 있던 것이 2003년 여름의 일이다. 숙소에서 버마이슈 사무실까지 걸어서 3분, 아주 짧은 거리지만 그 사이에 식당이 2개, 이발소가 1개, 구멍가게가 1개 있을 정도로 빽빽한 주택가였다. 아침에 출근길에 아침인사와 목례를 하면 ‘Good Morning’이라고 답을 해주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정말 외국인으로 보이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될 정도로 동네에서 눈에 띄는 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한달 가까이 지내다 보니 머리가 많이 자라 지나면서 늘 인사하던 이발소에 들어가 머리를 손질(?)하게 되었다. 이발사 청년과 자연스럽게 짧은 영어로 가계조사와 먹고 사는 일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게 되었다. 워낙 친절한 사람이라 나중에는 머리 깎지 않아도 서서 이야기를 나눌 정도가 되었다. 그렇게 태국의 찜통 더위와 소나기를 경험한지 두달이 지날 무렵, 그 친절한 친구가 시간되면 저녁을 먹자고 했다. 가까운데 좋은 곳이 있으니 가자고 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요리사’인데 곧 요리를 배우러 유럽에 가게 될지 모르니 가기 전에 식사를 하자는 것이었다. 거절할 이유도 없었고 오히려 현지인과 ‘민주와 인권, 투쟁’이 아닌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좋아서 흔쾌히 ‘OK’하고 사무실로 들어와 이 사실을 이야기했다. 기쁜 표정으로. 그런데 사무실에 일하는 친구들이 서로 눈치를 보면서 내가 모르는 정보와 느낌을 나누는 듯했지만 상관하지 않고 저녁식사를 하러 그 친구와 ‘룸비니 공원의 나이트 바자’를 갔다. 시끄럽게 공연과 흥정이 오가는 시장에서 조금 조용한 레스토랑에 앉아 식사를 하면서 그의 꿈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난 별로 할 말이 없어 주로 듣고 있었는데 식사 시간이 거의 끝날 즈음 그 친구가 나에게 “당신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싶어요”라고 말했고 나는 “와~ 기대가 됩니다”라고 답을 했다. 그런데 그 이후 진행되는 이야기가 ‘커플이 되가는’ 수순을 밟고 있다는 생각이 확 스치면서 정확하게 무슨 이야기인지 물어보았다. “무슨~ 뜻이에요?” 돌아온 답은 “당신이 맘에 들어요, 좋아요~”. ‘앗! 이거였구나’라는 생각이 스치면서 뭐라 할말이 떠오르지 않는 긴장된 상황이 되어버렸다.

‘앗, 어떻하지? 거절해야 하는데, 뭐라고 하지, 어~ 이거 뭐라고 하지???’라며 머릿속을 굴리고 있는데 그 요리사가 꿈인 친구가 폼나게 거절할 미끼를 던져주었다. “내가 같이 살고 있는 친구가 있지만 내 마음을 이해해 줄 거예요”라고. ‘이거다. 이때다!!’ 나는 2.7초도 지나지 않는 순간에 “그러면 안되죠, 사귀는 사람이 있는데, 이러면 안되는 거잖아요. 안되요, 당신의 친구가 불쌍하잖아요~~”라고  ‘웃으며’ 정당하고, 윤리적으로 거절하였다. 이후 이야기는 순풍에 돗단배처럼 술술 풀려갔다. 그 이발사가 비윤리적인 사람이 되지 않아야 한다고 설득하고, 나중에 더 좋은 기회가 올거라고 달래며 택시를 태워보냈다. 그리고 생맥주 한잔......‘지금 뭔일이 있었는데, 아~~ 정리하고 싶지 않다.. 휴~~’ 한숨을 돌렸다.

한국에서 KSCF회원으로 민주와 통일, 인권, 소수자의 권리 운동에 음으로 양으로 관계를 맺어오면서 논리와 당위는 머릿속에 또라이1)를 틀고 있었지만, 그 권리의 주체가 [사람]이라는 생각은 없었던 것을 알아차린 것은 ‘그 인연’이 시발점이었다. 그러나, [사람]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하고 자각하기까지 6년이란 시간동안 그 기억은 내 머리 한편에 독방에서 구금 당해 있었다.

기독교내의 동성애자가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도 어려운 상황임을 절실하게 알아가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 차별없는세상을위한기독인연대(이하 차세기연)의 활동이 6년전의 기억을 눈 앞으로 불러세웠다. 여전히 동성애인권을 말하는 내 입은 6년전 눈 앞에 있던 ‘요리사가 되고 싶은 이발사 친구’를 내가 동성애인권을 알게 해준 ‘은인’으로 조작하면서 차세기연에서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내 위치를 돋보이게 하는 ‘지지자’로 변화시키고 있었다. 그러면서 다시 이 인연을 생각하게 되었다.

6년전 너무나 당당하게, 윤리적으로 설득했던 내 모습과 그 인연을 활용하여 동성애인권과 신앙과 신학을 말하는 내 모습 어디에도 ‘그 인연 속의 그 친구’는 없었다. [사람이 없었다]

6년을 기다린 그 기억의 친구를 다시 만난다면, 이제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미안해~ 내 스타일이 아닌데~”

하느님도 부처님도 말해주지 않는 그 인연의 깊은 뜻은 뭘까?라고 다시 질문하는 내 머릿속에 또 [사람]이 없어지고 있다.
‘에이씨~ 이런 된장~~’

ⓒ 웹진 <제3시대>


1) 오타가 아닌 필자가 독자에게 던지는 30대 개그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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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옹달쌤
    2009.05.07 20:19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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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초가 의미하는게 뭐에요?

천주교 '바오로의 해'를 맞아 우리신학연구소와 공동기획한 <바울과 현대> 강좌가 7강 중 마지막 2강을 앞두고 있습니다.

최근 인문사회학과 신학에서 바울을 재발견하고 있는 맥락을 이해하고,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바울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함께 사유하는 것을 목표로 박진우, 한보희, 김학철 세 분의 강사님들과 강의를 진행해왔습니다.

5월 15일(금)에는 마지막 7강을 열린토론회로 기획하고 수강자뿐 아니라 원하는 모든 분들께 무료로 참석하실 수 있도록 할 예정입니다. 강의를 진행한 세 분 강사님이 모두 참석하신 가운데 우리신학연구소의 엄기호 연구위원이 사회를 맡아 진행됩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 일   시 : 2009년 5월 15일(금) 오후 7시 30분
          ▲ 장   소 : 한백교회당(5호선 서대문역 1,2번 출구 사이 골목 30미터)
          ▲ 참가비 : 무료 (수강여부와 상관없이 누구나 참석 가능합니다.)
          ▲ 토론회 사회 : 엄기호(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
          ▲ 토론회 참여 강사 : 인문사회학 - 박진우, 한보희 / 신학 - 김학철
          ▲ 문   의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02-363-9190 / yminjung@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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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 소개


『미국의 중동정책과 묵시 종말론
 - 요한묵시록의 희망 이야기』


바바라 로씽 지음
김명수, 김진양 옮김
경성대학교출판부 펴냄

출간일 : 2009-02-20
정   가 : 1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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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상철
    2009.05.08 04:1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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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미국 신학교중 성서학으로 유명한 신학교인 시카고 루터란 신학 대학원 (Lutheran School of Theology at Chicago; 이하 LSTC)이 있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알수 있는 구약 역사서의 대가 Ralph Klein, ‘역사비평이란 무엇인가?’( 이 책은 전에 한국신학연구소에서 출판되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의 저자 Edgar Krentz, ‘마가이야기’로 유명한 복음서분야의 걸출한 학자 David Rhoads, 그리고 요즘 주가를 높이고 있는 요한 서신의 권위자(특별히 요한계시록)인 Barbara Rossing등 교과서에 등장하는 막강한 성서신학자들이 LSTC 소속입니다.

    LSTC에서 구약학 박사과정을 수료한 김진양 목사가 ‘미국의 중동정책과 묵시 종말론: 요한묵시록의 희망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Barbara Rossing의 책 'the Rapture Exposed: the Message of Hope in the Book of Revelation' (Westview Press, 2004) 을 번역하여 경성대출판부(2009)에서 출판했습니다. 로씽 교수는 이 책을 출판한 이후 미국내 신학계와 인문학계에서 일약 종말론 핵석의 권위자로 떠올랐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격렬한 선악의 이분법, 아마게돈 전쟁과 휴거같은 종말론을 미국 기독교인들의 45%가 믿고있다고 합니다. 저자는 이것이 어떻게 네오콘과 연결되어 미국내 위기의식을 고조시켜 미국의 대중동정책과 연결되는지? 를 지적한 후, 그 이면에 깔려있는 미국내 근본주의 기독교 세력(부시가문의 강력한 후원자였던)이 지닌 세대주의 종말론 (Dispensationalism)과 같은 잘못된 종말론과 성서해석을 다양하고 광범위한 측면에서 비판하고 있습니다.

    로씽 교수는 이데올로기 대립이 사라진 후 지구촌에서 더 다양하고 광범위하게 발생하는 종교간 폭력과 전쟁을 대면하면서 요한묵시록이나 다니엘서 같은 묵시문학에 대한 올바른 독해가 필요하다고 역설하면서, 전쟁의 정당성을 제공하는 요한묵시록에 나온 오도된 종말론을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비판하면서, 종말에 대한 새로운 성찰과 깨달음을 독자들에게 제공합니다.

    번역을 한 김진양 목사는 부산신대(현 경성대 신학과)와 한신대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시카고 McCormick 신학교를 거쳐, LSTC에서 구약학을 수료한 진지하고 성실한 구약학자입니다. 번역자는 이 책이 한국 기독교의 잘못된 종말론에 경종을 울리고, 한국 기독교의 극단적 근본주의 성향에 대해 도전을 줄 수 있으리라 희망합니다.

    로씽 교수는 2004년 이 책을 출판한 이후 미국내 신학계와 인문학계에서 일약 종말론 핵석의 권위자로 떠올랐습니다. 특별히 그 시기가 2001년 9.11 이후 미국의 대 이락크 공세가 가열되던 시점이라는 점에서 이 책에서 전개하는 묵시록에 대한 해석은 미국 내 진보세력에게는 의미있는 해석으로, 전쟁을 정당화하던 근본주의 측에게는 곤혹스러웠던 묵시해석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아래에 책의 목차를 남깁니다.

    1. 휴거의 파괴적인 공갈협박
    2. 꾸며낸 이야기로서의 휴거
    3. 중동의 관점에서 보는 휴거문서
    4. 예언과 묵시
    5. 여정이 시작되다: 승리에 대한 로마의 숭배
    6. 어린양의 힘
    7. 비폭력: 요한묵시록에 있는 정복의 의미
    8. 요한묵시록의 출애굽 이야기
    9. 어린양 공중납치: 신의 분노와 전쟁중독
    10. 거꾸로 된 휴거: 세상을 새롭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비젼
    11. 바깥세상으로 향하는 여정: 세상으로 돌아오기
  2. 이상철
    2009.05.24 03:00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지지난 주에 이 책의 저자인 바바라 로씽을 번역자인 김진양 목사와 함께 학교앞에서 우연히 마주쳤습니다. 본인의 책이 한국말로 번역되었다는 소식에 기뻐하더군요.
    그리고, 제가 미처 빠뜨렸는데, 이 책에는 또 한분의 번역자가 계십니다. 부산 경성대 신학과에서 신약을 가르치고 계신 김명수 교수입니다. 민중신학자로서 <그리스도교와 탈현대성>, <Q복음서와 민중신학>등의 저작이 있고, 김진양 목사의 부산신대(경성대 신학과 전신) 시절 스승이기도 합니다. 스승과 제자가 함께 번역을 한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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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 소개


『하느님 새로 보기』

김은규 지음

동연 펴냄

출간일 : 2009-04-25
정 가 :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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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구약학자가 구약학을 비판하고 기독교를 자성하는 차원에서 쓴 신앙고백서

기독교신학에서 가장 보수적이라 할 성서신학, 그중에서도 구약신학을 전공한 학자가 이제까지의 일방적인 한국 개신교의 하느님을 새로 보자고 한다. 보수적인 한국 교회에서 말하는,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며 지배자로서 군림하는 구약의 하나님만이 유일한 하느님인지에 대해 구약신학을 전공하는 학자로서 문제를 제기한다.

기독교는 초기 시대에 박해 받은 일 빼고는 4세기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이래 현재까지 세속권력과 교리로 튼튼한 방어벽을 치고 권력의 편에서 벗어난 일이 없다. 사실 인류 역사에서 기독교는 악영향도 많이 끼쳤다. 이교도들에 대한 차별과 억압, 재산 몰수, 강제 추방, 화형, 마녀사냥, 종교재판, 식민지 영토 확장, 대학살, 전쟁 등으로 언제나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기독교 내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불행하게도 언제나 그 전면에 하느님과 예수를 가해자로 내세웠다. 곧 인간의 끝없는 권력과 탐욕의 성취를 신을 앞세워 자행했던 것이다. 기독교인들에게 십자가는 구원의 상징이지만, 이교도들에게 십자가는 약탈과 폭력과 전쟁이라는 두려움의 상징이었다. 이런 점에서 하느님과 예수도 인간의 권력에 선의의 피해자다.

사실 구약성서의 하느님은 그렇게 절대권력을 가진 분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지리적 위치가 강대국가들에 둘러싸여 휘둘린 것처럼, 이스라엘의 하느님도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나약한 분이었다. 예수도 인간의 가장 낮은 자리로 오셔서, 인간들에게 매 맞고, 채찍 맞고, 창에 찔려 돌아가신 분이었다. 그래서 성서 안에 비추어진 이들의 모습과 성서 밖에서 세속권력, 교회권력 그리고 교리로 새로 무장한 하느님과 예수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느님 새로 보기 : 종교 간 대화를 위한 구약성서 다시 읽기’는 하느님을 보다 넓은 시야로, 교리에 갇히지 않은 시야로 보자는 것이며, ‘구약은 곧 배타적’이라는 등식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에 대한 고민의 산물이다.

하느님과 다른 종교들의 관계는 창과 방패의 관계이며, 물과 기름의 관계이다. 결코 함께할 수 없는 관계로, 지난 2천 년 넘게 그렇게 상극(相剋)으로 물고 물리는, 때로 죽이고 죽는 관계였다. 이 책은 세계사 속에서 성서의 어떤 요인들이 그 같은 잘못된 일들을 저질렀는가에 대해 실증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구약의 단 두 명제가 종교들이 서로 섞이거나 대등하게 바라보며 만날 수 없게 했던 것이다. 기독교는 십계명의 제1계명인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과 “우상숭배 금지 내지는 철폐”. 이 두 말에다가 “예수 구원”을 교묘히 이용했고, 성서를 ‘일점일획도 바꾸지 못한다’고 선언한 ‘정경’의 권위로 지배권력의 위치에서 배타적인 태도로 지난 2천 년 동안을 군림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이러한 부정적 역사의 흐름과 성서를 이용해 온 교회권력에 대해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성서학 연구가 성서 안에만 머무른다면, 계속해서 지배 이념을 양산하는 데 일조할 것이기에, 가장 보수적이라는 구약학을 하는 학자가 자기성찰적 비판으로 그 대안을 제시한다.

21세기 대화문명의 시대에 종교 간 대화는 필수적인 사안이 되었는데, 구약성서는 이를 가로막는 최대의 걸림이 되고 있다. 저자는 지난 수년 동안 이와 씨름하면서, 나름대로 새로운 방법과 논리를 만들고,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흔적들을 이 책에 담았다.
이 책은 한 구약학자가 이 시대 새로운 한국 기독교를 위해 던지는 뼈아픈 자기반성적 고언이자 신앙고백이다.


지은이 소개

이 책의 지은이 김은규 신부(성공회)는 연세대학교 신학교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구약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머리말에서도 밝히듯이, 필자가 구약을 전공하게 된 것은 부친인 김찬국 교수(전 연세대 구약학 교수, 전 상지대 총장)의 영향이 컸다. 지금 부친은 연로하고 안타깝게도 수년째 치매로 고생하고 계신다. 다행히 김 교수의 어머니께서 뜨거운 애정으로 돌봐 주시고 모든 형제가 손수 집에서 봉양하여 불편함 없이 지내신다. 이제 연로하신 아버님께 늦기 전에 그 간의 구약신학자로서 생각을 정리하여 저서를 헌정하는 것이 아버지의 길을 따른 아들의 도리라는 마음으로 책을 출간하게 되었다.

필자는 이 책을 내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고, 용기도 필요했다고 한다. 근본주의에 가까운 한국 기독교의 풍토에서 ‘종교 간 대화’라는 것이 그리스도교 교리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이단적 행위로 취급받기 때문에 반발과 역풍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다가 나도 (변선환 전 감리교신학대학 학장이나 여타 많은 진보적인 신학자처럼) 강단에서 쫓겨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이랄까, 쫓겨나면 택시운전이라도 해야겠다는 결심으로 예까지 오게 되었다”고 심경을 고백한다. “그럼에도 기독교가 새롭게 성숙하고 발전하려면, 종교 간 대화는 절대적인 명제이기 때문에 본서를 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현재 성공회대학교 구약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고, 한국구약학회와 종교학회, 문화신학회, 기독교교육학회 회원이며,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 총무로 활동하고 있다. 역서로는 『구약 오경 이야기』(토마스 W. 만, 맑은울림, 2004),  『성서비평 방법론과 그 적용』 (스티븐 헤이네스, 기독교서회, 1997),  『구약입문』 (안토니 R. 세레스코, 바오로딸, 2008) 등이 있다.


책 구성

이 책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됐다.

앞부분 ‘책을 내며’, ‘글을 시작하며’와 뒷부분 ‘글을 맺으며’는 출간의 의미와 조금은 전문적이고, 학술적 논문으로 된 1~3부의 내용에 대한 해제이자 전체 글의 자리매김에 해당된다. 종교 간 대화의 당위성과 한국 개신교의 신학적 편향성이나 몰이성주의에 대한 비판, 그리고 한국 기독교가 지향해야 할 포용적인 자세와 시대적 과제에 대한 제안이 들어 있다.

1부는 종교 간 대화의 걸림돌로서 작용해 온 구약성서의 해석방법론에 대해 이야기한다. 말하자면 배타적인 구약성서의 근본적인 토대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구약성서의 본문(text)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적 정황을 담고 있기 때문에 단어나 구절, 문단, 이야기들에도 그 배경들을 함께 이해하지 않으면, 성서를 문자적으로 보게 되어, 절대화시키기 쉽다. 그래서 필자는 구약해석에 대한 준거틀이랄까, 나름대로 그 구체적인 해석 방법론 몇 가지를 제시한다.

우선 전통적인 성서 해석 방법론을 약술하고 이에 대해 새로운 영성적 해석 방법론을 제안한다. 역사 비평 방법이 주로 “통시적”(diachronic)인 기술로 역사적인 순서에 따르면서 해석하는 방법이라면, 신문학 비평은 역사의 순서보다는 횡적인 이야기의 내용들을 분석하는 “공시적”(synchronic)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신문학 비평은 역사 비평의 한계점으로 지적되는 본문의 저자, 의도, 편집에서 탈피한다. 그래서 영성 해석 방법론으로 이 두 가지를 종합하여 “통시적”이면서 동시에 “공시적”으로 성서에 접근했다. 그리고 ‘영성’의 범주가 한 개인의 실존에만 국한되지 않고, 이성을 바탕으로 사회, 문화, 예술, 사회정의, 생태, 환경, 복지, 종교 간 대화, 인권, 평화운동에 이르기까지 확대시킬 수 있으며, 종교들 간에 사회적 연대를 통해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함께 해결해 나가야 할 것이다.

2부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두 신관(세계관)을 소개한다. 즉 엘로힘 신과 야웨 신이다. 야웨 신은 인간에게 명령하고, 인간의 마음을 헤아리고, 자신의 의도를 전하고, 인간에게 행동을 요구하고 징벌을 내릴 때 등장한다. 이에 반해 엘로힘은 가나안 만신전의 최고신으로서 “신들 중의 신”, “인간들 중의 신”인 엘(El)답게 최고로서 당당한 위치를 유지하려 했다. 엘로힘은 우주와 인간과 자연을 창조하는 근원적인 분(창세기 1장), 노아 홍수 이후에 새 창조를 이루는 분(창세기 9장), 그리고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는 생명의 근본적인 것을 이루게 하는 분의 역할을 주로 한다.

야웨가 인간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사회와 역사 곳곳에 파고 들어오는 분이지만, 동시에 유일신 사상에 근거하여 다른 종교들에 대한 거부와 배척하는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는 반면, 엘로힘은 우주적이고 생명의 근원자답게 모든 인간과 종교들에 대해서 보다 포용적이고 수용적인 태도를 견지하고자 했다. 야웨는 이스라엘 왕조가 진행되면서 이스라엘 내부의 구심점을 만드는 데 기여를 하지만, 이미 극단적인 배타적 태도로 말미암아 이웃 국가와 종교들로부터 역으로 배척되는 현상을 보였을지 모른다. 그래서 후대 성서 사가에게서 이스라엘이 멸망한 포로기 상황에서 보다 근원적이고 큰 틀을 제시하는 엘로힘의 모습을 야웨와 구별시켜 부각시킴으로써 주변 국가들의 종교를 뛰어넘는 포용성을 가지려고 했던 의도가 있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다시 말해 구약의 신은 하나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신도 시대적 요청에 따라 변모한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근원인 구약성서에서 보면, 유일무이한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배타성은 시대적 산물이다. 다만 후대에 와서 그 신을 내세워 세계정복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삼은 데 불과하다는 것이 구약성서를 통해 실증적으로 제시하는 성서적 진실이다.

3부는 성서의 정경 문제를 다룬다. 정경이란 본문이 전승되어 갈 때, 어느 시점에서 종결(closure)을 선언하고, 더 이상 본문에 가감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다른 본문들이 들어올 수 없게 차단한다. 이런 정경의 권위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성서에 전혀 오류가 없다는 성서무오설을 신봉하게 되고, 교회권력과 함께 상대 종교인들에게 공격적이 되고 파괴력까지도 보일 수 있다. 기독교 역사에서 볼 때에도 불행히도 성경이 정경으로 선포된 순간 일체의 사상과 철학, 문화, 역사의 수용이 거절되었으며,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의 의미와는 전혀 다르게 그 생동감과 유연함을 상실하고 오직 로마제국의 국가종교라는 지배적 위치에서 해석해야만 하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성서의 정경이 최초의 의도와는 다르게, 결과적으로 약의 역할보다는 독으로서 세계 민족들을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였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여기에 성직 계급은 참다운 종교의 본질과 가치를 찾기보다는, 폐쇄적인 교리와 종교권력과 정치권력의 힘으로 백성들을 박해하고 전쟁에 동원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반면 ‘정경화’는 본문들이 계속해서 전승되어 가면서, 거듭하여 재작업되고, 재해석되고, 삭제되거나, 새로운 본문들이 추가되는 연속되는 과정을 말한다. 그런데 이 정경화 과정을 통해 기독교의 정체성이나 배타성의 문제를 비추어 보면 미래를 향하는 새로운 지향점이 생겨난다. 앞으로 한국신학에서 그리스도교 정경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정경으로 묵어놓은 초대 그리스도교 시대의 족쇄는 이제 벗겨야 한다. 성서는 새롭게 각색되고 쓰일 필요가 있다. 이것은 개인적 판단이 아니라, 이성적이고 보편타당한 그리고 사회적, 공동체적 신뢰감이 있는 집단들이 그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고 그 작업을 해나가야 할 것이다. 단순히 교단과 교리의 권력에 갇혀 그것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재구성하는 것은 또 다른 지배와 통제를 만드는 것이며 사회적, 종교적 죄라고 본다. 지난 1700여 년간 보여준 그리스도교의 모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경화 작업으로 오늘의 신자유주의, 지구적 제국, 생태환경의 위기, 국가 간 경제적 격차 심화, 여성 차별, 종교 갈등, 한반도 분단과 통일 등의 지구촌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데 유연성을 가짐으로써, 그리스도교 내부에 고질적으로 묶여 있는 과제들을 풀어갈 역동성과 활력을 가져야 할 것이다.


차례

책을 내며
글을 시작하며

1부 구약성서와 종교 간 해석 방법론

1. 그리스도교 역사의 인식과 관점
2. 현대 세계의 상황 인식
3. 종교간 대화의 걸림돌 : ‘우상숭배 금지’의 극복
4. 역사비평 방법을 넘어
5. 종교들 안에서 종교의 해석
6. 성서 비평방법과 ‘영성적’ 해석
7. 지구적 제국의 상황에서 성서해석

2부 구약성서의 하느님 새로 보기
 
1. 우상숭배 금지의 족쇄 풀기
2. ‘야웨’와 ‘엘로힘’의 종교 간 대화 - 구약의 오경과 예언서를 중심으로
3. 야훼의 배우자이자 민중종교로서 ‘아세라’(Asherah) 여신(女神)

3부 구약성서와 종교 간 대화

1. 그리스도교의 정경(正經) 선언은 약이었는가, 독이었는가?
   - 지배적 그리스도교와 민중 유대교의 비교
2. 창세기 1장의 생명과 생태사상 : 노장사상과 불교적 이해
3. 구약의 ‘고통’에 대한 불교적 해석

글을 맺으며
참고문헌

(자료 : 동연출판사 보도자료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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