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백인 남성'은 누구인가?




김나미

(미국 Spelman College 교수, 종교학)




     아기예수가 태어난 것을 축하하는 기독교의 성탄절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성탄절이 되면 영화극장에 굳이 가지 않더라도 텔레비젼을 통해서 예수의 생애나 초대 기독교인들이 로마제국에서 박해 받는 이야기, 아니면 성경의 인물들에 관한 할리우드의 ‘고전’영화를 시청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왕중의 왕’, ‘벤허’, ‘쿼바디스’, ‘메시아’, ‘나사렛 예수’, ‘예수 그리스도 수퍼스타’, ‘십계명’등이 있다. 아니면 유툽이나 비디오로 멜 깁슨이 2004년에 제작한 ‘그리스도의 수난’이나 러셀 크로우 주연의 최근 영화인 ‘노아’를 본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영화에 나오는 주연 배우들은, 노아이든, 모세이든, 예수이든, 예수의 제자들이든 거의 대부분이 유럽인의 형상을 한 백인 남성들이다. 주연 배우들과 그들을 옆에서 돕는 ‘선한’ 역할의 배우들이 백인 남성과 여성들이라면 악역은 주로 유색인종이나 검게 분장을 한 백인들이 맡는다. 악역으로 나오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머리 색깔이든 수염 색깔이든, 피부 색깔이든 어느 한 부분이 ‘검게’ 묘사되곤 한다.


    많은 교회들의 예배당과 방들의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예수의 이미지는 또 어떠한가? 눈부신 금발과 푸른 눈을 가진 키가 큰 백인 남성이 하얀 옷을 입고 서 있는 모습. 부드러워 보이는 갈색의 머리와 갸름한 얼굴을 한 백인 남성의 모습. 하얀 양떼들 사이에서 지팡이를 짚고 온화한 미소를 지으면서 서있는 젊은 백인 남성의 모습. 마굿간의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예수와 그의 젊은 부모인 마리아와 요셉도 백인의 모습으로 묘사되곤 한다. 심지어 그 옆을 지키는 천사들도 곱슬한 금발머리의 백인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데 법인류학자들이 (forensic anthropologists) 여러가지 자료들에 근거해서 약 2,000여년 전 예수의 모습과 가장 흡사할 것으로 추정해서 그려낸 이미지는 할리우드 영화에서 묘사해온 ‘백인 남성’ 예수나 교회당을 장식하는 ‘백인 남성’ 예수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아래의 링크 사진 참조][각주:1]. 아마 그렇게 생긴 팔레스타인에서 온 남성이 지금 미국이나 유럽국가들의 공항에 나타난다면 철저한 검문검색을 당하거나 특별한 이유없이 단지 ‘수상해’ 보인다는 이유로 입국이 허용되지 않을 수도 있고, 비행기 탑승이 거부될 수도 있다. 요즘의 국제 정세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이 결코 아니다.  


   


[잘 알려진 워너 살맨(Warner Sallman)의 ‘그리스도의 머리’ (Head of Christ, 1941)[각주:2], 좌측 /  

예수의 실제 모습과 가장 흡사할 것으로 추정되는 이미지[각주:3], 우측] 


    그렇다면, 지금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약 2000년 전에 태어난 것으로 믿어지는 유대인 예수가 언제부터 어떻게 ‘백인’의 모습으로 묘사 되기 시작했을까? 2000여년이 되는 기독교 역사에서 예수의 이미지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를 이 짧은 글에서 충분히 논의할 수는 없지만, 학자들은 반유태주의 정서가 심해지기 시작한 유럽 중세시대부터 르네상스시기를 거치는 동안 유대인 예수가 유럽인의 형상을 한 백인 남성으로 그려지기 시작됬다고 보고 있다. [그리스도의 피부색] (The Color of Christ: The Son of God and the Saga of Race in America)이라는 책을 보면 최소한 지난 5세기 동안 아메리카(미국)에서 진행된 ‘백인’ 예수 만들기와 그 이미지의 재생산 과정에서 백인우월주의, 인종차별주의, 미국의 제국주의, 그리고 기독교의 선교가 어떻게 서로 긴밀하게 연결 되어져 왔는지를 조금은 알수 있다.  


    [그리스도의 피부색]의 공동 저자인 에드워드 블룸과 폴 하비는 아메리카(미국)라는 국가형성기와 아메리칸(미국) 시민권을 규정하는 시기에 예수가 ‘백인’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새로운 이민자들의 물결이 백인 미국들인들로 하여금 “백인성 (whiteness)의 범주와 그리스도의 모습을 백인 남성으로 더욱 엄격하게 규정”[각주:4]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백인’ 예수가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큰 백인 형으로서 ‘반은 악마같고 반은 아이같은’ 외국인들에게 수출”[각주:5] 되어져 왔다고 주장한다. 저자들은 미국에서 그런 ‘백인’ 예수의 모습에 계속 도전하고 저항해 온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종과 관련된 상징적인 힘 때문에 ‘백인’ 예수의 이미지가 계속해서 만연할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미국내에서 ‘백인’ 예수 형상에 대한 저항의 이미지로 ‘검은’ 예수 (흑인의 이미지) 와 ‘붉은’ 예수 (‘인디언’이라고 불리는 원주민의 이미지) 의 형상이 제시되었지만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백인’ 예수의 이미지를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제국주의는 선교사들의 노력과, 세계 도처에 있는 미군기지들과, 글로벌 영화 시장을 통해서 백인 인종차별주의와 인종간의 위계질서를 확장해 나감으로서 ‘백인’ 예수를 다른 나라에도 수출해왔다. 선교를 통해서 성서의 이야기들 뿐만이 아니라 어린이들의 성경공부 교재와, 교회 장식 용품, 다양한 선교용 팜플렛들, 그리고 영화들을 통해서 일정한 이미지들도 전달된 것이다. ‘백인’ 예수가 다른 나라로 ‘수출’되었다는 것은 ‘백인’ 예수에 함축되어져 있는 백인우월주의와 미국의 인종간의 위계질서와 인종차별주의가 다른 ‘작은 형제’국가들에도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편적인 구세주로 만들어진 ‘백인’ 예수는 백인의 권위와 지배에 특권을 부여했다.[각주:6] 에드워드 블룸과 폴 하비는 이런 ‘백인’ 예수가 가장 극적인 방법으로 소비 자본주의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 계기가 영화라는 미디어를 통해서라고 한다. 처음엔 영화산업이 자신들의 ‘도덕성’을 정당화 시키기 위해서 예수를 필요로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미국내와 다른 나라들로 예수를 퍼트리기 위한 수단으로 오히려 영화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각주:7] 백인 선교사들을 통해서 전달 받은 예수의 이미지는 ‘백인 남성’이었고, 그 이미지가 ‘은막의 예수’를 통해서 더욱 견고하게 되었다.  

   

   예수의 이미지가 ‘백인 남성’으로 기정사실화 된 것은 백인우월주의 사회에서 만들어진 현상이지만 한국의 많은 교회들도 이런 ‘백인 남성’ 예수와 그의 ‘아버지’인 하느님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문제는 예수의 피부색이 그저 하얗다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하느님을 대표하는 ‘백인성’이 곧 ‘선함’과 ‘우월성’을 상징하게 되고, 그것과 대조되는 ‘검은색’이나 ‘갈색’은 잘하면 ‘종속적’이거나 ‘열등한’ 상태, 그렇지 않으면 ‘악함’을 상징하게 된다는 것이다. 피부색에 따라 사람의 가치와 가능성이 다르게 평가되고, 피부색에 근거해서 인종간에 우열이 매겨지게 된다. 나아가 그런 인종간의 ‘질서’가 하느님이 의도한 질서라고 믿게 되면서 흑백간의 인종적 위계질서가 신학적으로도 정당화 되어진다.[각주:8] 여기서 물론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예수와 하느님의 백인성뿐 아니라 남성성이다. 백인성과 남성성 이 두가지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지금은 고전이 된 [하느님 아버지를 넘어서] (Beyond God the Father)에서 철학자이며 신학자였던 메리 데일리 (Mary Daly)가 “만약 하느님이 남성이라면, 남성이 곧 하느님”이라고 기독교의 가부장적 하느님 이미지를 신랄하게 비판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하느님이 특정한 성/젠더가 없는 실체이고 한가지로 규정될 수 없는 존재 또는 힘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부장적 사회에서는 하느님이 남성적인 존재로 투사된다는 것이다. 한국의 여성신학자인 이숙진도 여성들을 ‘공적 언어활동’에서 소외시키고 통제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의 하나는 “언어의 차별성을 규범화하여 제도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종교의 가장 핵심 상징인 ‘신’을 ‘남성’으로 표상하고, 소수의 남성들이 성서의 몇 몇 구절에 근거해서 여성들의 설교를 불허하면서 설교권을 장악하는 경우이다.[각주:9] 이숙진은 “가부장적 헤게모니가 작동하는 교회공간”이 여성들의 말할 권리를 제한하는 대표적인 공간이라고 한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하지만 어머니 또는 다른 친밀한 존재로 부르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고 용납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가 될 수 있는 남성들만이 교회에서 말할 권리가 있고 ‘어머니’로 대표되는 여성들은 ‘보살피는’ 역할만을 하도록 노골적으로 또는 암묵적으로 요구되어진다.  


    메일 데일리와 이숙진이 말하는 것에서 좀 더 나아가면, 예수나 하느님이 그냥 남성인 것이 아니라 ‘백인 남성’이고, 그런 이미지가 규범적인 모습으로 받아 들여지면서 ‘백인 남성이 곧 하느님’이 되는 것이다. 여성신학자 로즈메리 류터 (Rosemary Redford Ruether)가 남성 지배적인 신학을 비판하면서 쓴 “남성 구원자가 여성을 구원 할 수 있을까?”라는 글의 주장과 관련해서 워머니스트 (womanist) 신학자 재클린 그랜트 (Jacquelyn Grant)는 “유색여성들, 예를 들어 흑인 여성들은 하느님의 이미지로 부터 두 배나 멀리 떨어져있다”[각주:10]고 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나 하느님과 관련된 신학적 토론에서 남성성만을 얘기하는 것은 인종차별의 경험이 없는 백인 여성의 경험을 표준화하고 우선시하는 것이기에 남성성과 인종 모두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랜트가 이런 주장을 편 것은 이미 25여년 전이고,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성과 계급과 인종은 물론이고, 섹슈얼리티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또한, 조선시대 양반 남성들의 복장인 도포와 갓을 쓴 ‘조선인’ 예수, ‘중국인’ 예수, ‘일본인’ 예수, ‘아프리카’인 예수등 다양한 이미지들의 등장과 이를 뒷받침하는 신학적 주장들도 이미 펼쳐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인 남성’으로서의 예수와 하느님의 이미지는 당연한 것으로 국경을 초월하여 받아들여 지고 있다. 더불어, 하느님은 남성으로 뿐만이 아니라, 호전적이고 적을 정복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 왕정 시대의 군사적 왕이나 군주로도 아무 문제없이 불러지고 찬양되고 있다. 한국사회와 세계 곳곳에 팽배해 있는 인종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를 이데올로기적으로 뒷받침 해온 ‘백인 남성’으로서의 예수와 하느님의 이미지를 더 이상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일 수 없는 이유이다. 


    인간의 ‘다름’에 근거한 차별이 없는 사회를 만들어 가려면 알게 모르게 쓰고 내뱉는 인종차별적, 성차별적, 장애비하적 언어와 이미지, 군사주의와 사회의 군사화를 당연하게 여기는 언어와 이미지가 왜 문제가 되는지를 먼저 묻고 알아나가는 것으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봄과 함께 찾아오는 기독교의 또 다른 큰 명절인 부활절에 부활의 새벽을 알리는 ‘밝은 빛’으로 더욱 ‘눈부셔진’ ‘백인 남성’의 모습이 교회들을 수놓는다면 물어보자. 도대체 그 백인 남성이 누구인지.  


ⓒ 웹진 <제3시대>



  1. http://news.bbc.co.uk/2/hi/entertainment/tv_and_radio/1243954.stm. [본문으로]
  2. http://www.warnersallman.com/collection/images/head-of-christ/ [본문으로]
  3. http://www.popularmechanics.com/science/health/a234/1282186/ [본문으로]
  4. Edward J. Blum and Paul Harvey, The Color of Christ: The Son of God & The Saga of Race in America (Chapel Hill, NC: The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2012), 143. [본문으로]
  5. Ibid., 159. [본문으로]
  6. Ibid., 154. [본문으로]
  7. Ibid., 183. [본문으로]
  8. Regarding the image of Jesus in film, see David Morgan, ed., Icons of American Protestantism: The Arts of Warner Sallman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6); W. Barnes Tatum, Jesus at the Movies: A Guide to the First Hundred Years (Polebridge Press, 1997); Lloyd Baugh, Imaging the Divine: Jesus and Christ-Figures in film (Kansas, KY: Sheed & Ward, 1997); Stephenson Humphries-Brooks, Cinematic Savior: Hollywood’s Making of the American Christ (Westport, CT: Praeger, 2006); Adele Reinhartz, Jesus of Hollywoo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7). [본문으로]
  9. 이숙진, “방언과 간증: 성령운동의 젠더 정치학.” 종교문화비평10 (2006), 235. [본문으로]
  10. Jacquelyn Grant, White Women's Christ and Black Women's Jesus: Feminist Christology and Womanist Response (Scholars Press, 1989), 6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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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히브리 민중사” 





김진양

(Ph.D. The Lutheran School of Theology at Chicago (the Old Testament))




    시카고 신학대학원 내에 소재한 한국신학연구원(CSKC) 주관으로 지난 2011년 문익환 목사의 책 『히브리 민중사』로 가을 독서모임을 했다. 독서모임의 목적은 한국 성서학자의 저서를 함께 읽고 토론하는 것이다. 수많은 성서 개론서와 해설서 중 문 목사의 책을 선정한 이유는 이렇다. 번역서나 여러 논문들을 짜깁기 한 책들이 난무한 한국의 성서학계에서 문 목사의 책은 한국인의 눈으로 구약성서를 해석한 책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구약성서의 사회/정치적 상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성서 개론서는 아니지만 민중의 시각으로 이스라엘 역사를 재구성 하였다는 점에서 학문적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책의 부제가 표명하듯(문익환 이야기마당) 문 목사는 구약성서를 이야기 식으로 풀어썼다. 구약성서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읽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각주나 인용은 달지 않았지만 수많은 책을 읽고 연구한 흔적이 분명하다.


   『히브리 민중사』는 필자에게 구약성서를 민중의 역사관으로 꿰뚫는 눈을 뜨게 해 주었고 내 삶에 큰 변화를 주었다. 그저 연구와 집필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받는 사람들의 삶에 동참해야 함을 배웠다. 


   『히브리 민중사』는 문익환 목사가 안양교도소에 수감생활 중 생활성서에 연재하였던 히브리 민중사를 책으로 묶은 것이다. 1985년 시작된 네 번째 징역생활로 한번 중단 되었고 또다시 중단된 채 미완성인 히브리 민중사를 삼민사가 출판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느헤미야와 에스라 같은 포로 이후 성전 공동체의 문헌을 민중의 시각으로 해석하고 분석한 부분이 없다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와서 다시 『히브리 민중사』를 읽는 이유는 이렇다. 구약성서를 민중의 눈으로 읽는 문 목사의 책은 탈식민주의 성서비평 방법론의 아주 좋은 예가 된다는 생각에서다. 문 목사의 히브리 민중사는 창세기가 아닌 출애굽기에서 시작한다. 출애굽기의 중심주제는 당시 고대 근동의 맹주 애굽[각주:1] 제국의 억압과 착취에 당당히 맞서 승리한 하비루의 신 야훼의 승리라는 것이다. 출애굽기의 하나님은 애굽의 지배자의 신과는 달리 억압과 착취에서 고통당하는 히브리인들의 하나님 이라는 것과 출애굽을 기념하는 유월절을 해방절 이라고 부르는 점은 민중의 시각으로 출애굽기를 보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해방신학자들이 출애굽기 해석에만 집중한 반면, 민중의 시각으로 성서를 읽는 문 목사의 해석은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여호수아서를 읽는 독자는 애굽에서 탈출한 해방군이 가나안을 점령한 침략군이 되는 기록을 보면서 의아해 한다. 하지만 문 목사는 히브리인들을 침략군이 아니라 해방군이라고 부른다. 문 목사에 의하면, 여호수아의 하비루 부대는 반 애굽 기치를 들고 일어선 농민 해방군과 출애굽 한 농민 해방군이 합세하여 애굽의 지배를 추방하는 해방전쟁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그것은 애굽 지배자들의 앞잡이가 되어 있는 도시국가들을 타도하는 일이다. 여호수아가 보낸 두 명의 정탐꾼을 숨겨준 창녀 라합과의 동맹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여호수아 2:1, 3; 6:17, 23).


    여호수아 6-7장에 기록되어 있는 여리고 성 함락은 해방전쟁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사기는 200년간 이루어진 해방전쟁을 기록하고 있고 특별히 사사기 5장은 해방전쟁의 승전을 노래하고 있다고 한다. 문 목사는 히브리인 다윗이 블레셋을 굴복시킴으로 농민해방 전쟁이 대단원에 이른다고 주장한다(삼상 29:3).[각주:2]  


   여호수아서와 사사기를 해방전쟁으로 보는 관점은 조지 맨덴홀(George Mendenhall)의 논문 “히브리인의 팔레스타인 정복”(The Hebrew Conquest of Palestine, 1962년)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맨덴홀은 고대 이스라엘의 기원은 타락한 토착 가나안의 정치 사회적 체계에 대항한 사회적 약자 연대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고대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하부계층과 출애굽 한 히브리인들이 연대한 농민봉기의 결과라는 것이다. 맨덴홀은 아마르나 편지가 농민봉기의 고고학적 자료라고 주장한다. 후에 노만 갓월드(Norman Golttwald)는 자신의 책 “야훼의 족속들”(The Tribes of Yahweh, 1979)에서 이스라엘의 기원을 농민봉기에서 찾을 수 있다고 다시 주장하였다. 성서학자 브루거만도 갓월드의 영향을 받아 사회학적 방법론으로 성서를 해석한다. 문 목사의 『히브리 민중사』도 맨덴홀, 갓월드, 브루거만과 같은 맥락의 사회과학적 방법론으로 성서를 해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히브리 민중사』는 거의 절반에 가까운 상당히 많은 지면을 민중의 시각으로 예언자의 메시지를 해석하는데 할애한다. 이는 타락한 이스라엘 왕조에 대항하여 “해방신 신앙을 되살리려는 신앙운동이 예언 운동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각주:3] 문 목사는 이스라엘의 예언운동을 하비루 농민 해방군 전통에서 봇물처럼 터져 나온 엄청난 물줄기라고 주장한다(아모스 5:24).[각주:4] 


    사울을 왕으로 기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는 설화는 사무엘이 이끄는 예언운동이 출애굽 해방전쟁의 연장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에게서 구해 낼 것이다. 내 백성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았고 그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사무엘상 9:16). 문 목사는 사무엘이 출애굽 민중 해방운동을 이어나갔다는 점에서 사무엘을 제2의 모세라고 부른다.[각주:5]   


    문 목사는 예언자 사무엘의 뒤를 이은 엘리야도 8세기 예언자들도(이사야, 아모스, 호세아, 미가) 출애굽 해방전통을 이어간다는 점을 강조한다. 문 목사에게는 예언운동은 당시 최대 강국인 앗시리아 제국의 비호아래 악행과 억압적 정책을 저지르는 북 이스라엘 왕국과 남 유다 왕국의 지도층과 부유층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재야의 목소리”라고 주장한다.[각주:6]  


    히브리 민중사는 출애굽 해방정신과 그 정신을 이어가는 예언전승이다. 구약성서는 제국의 억압과 폭정에 굴하지 않고 해방정신을 이어갔던 히브리 민중의 신앙과 삶을 기록한 민중의 책이다.  



* 필자소개

    현재 미 연합감리교회 북 일리노이 연회에서 목회, 시카고 루터란 신학대학에서 구약학 전공(Ph.D.), Wartburg College에서 강의


ⓒ 웹진 <제3시대>

  1. 필자는 고대 이집트를 현대 이집트와 구분하기 위해 히브리어 미츠라임을 이집트라고 번역하지 않고 애굽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본문으로]
  2. 문익환, 『히브리 민중사』 (서울: 삼민사, 1990), 35-73쪽. [본문으로]
  3. Ibid., 129쪽. [본문으로]
  4. Ibid., 134쪽. [본문으로]
  5. Ibid., 143쪽. [본문으로]
  6. Ibid., 154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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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난감함...




구선애
(한백교회 교인)


 

지난 주일은 시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스무번째 맞는 제삿날이었습니다. 

12년 전부터 저희 집에서 제사를 모시고 있습니다 

제수는 기본적으로 밥과 국을 올리고 떡과 술은 물론, 삼색 나물, 고기, 생선, 전들, 그리고 탕. 포, 밤, 대추, 제철에 올릴 수 있는 모든 과일 등 음식이란 음식의 종류들을 다 올립니다. 

상다리가 휠 정도로 올리고야 정성을 다했다는 느낌이 드나 봅니다. 

시댁에서 지낼 때는 시어머님 주관아래 제수를 마련했으나 저희 집으로 제사를 모셔오면서 제수 마련은 전적으로 제 책임이 되었고 남편이 제관 즉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처음 몇 해 동안은 그동안 하던 데로 했지만 해마다 조금씩 제수를 줄였습니다. 

일하면서, 혼자 손에 버겁기도 했고 형식적이고 가지 수 늘린다는 느낌도 크기에 고구마 전, 삶은 계란 등을 제수에서 제외 시켰습니다. 

삶은 계란 찾는 남편에게 전 부치는데 스무 개짜리 계란 한판 다 들어갔다고 우스게 소리를 하며 오금을 박았습니다. 

그러면서 남편에게 혹시 제사상에 빠진 품목이 있더라도 찾지 말라고, 모두 모인 앞에서 지적하지 말라고 미리 당부를 해 놓아도 올해도 고구마 전, 삶은 계란 타령을 형제들 앞에서 또 했습니다. 

밉상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까짓것 계란 3개만 삶고 고구마 2개만 구우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시 계란을 삶고 고구마 전을 굽는다는 건 그동안 제가 조금씩 간소화 시킨 의례를 다 되돌린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에 제가 양보가 안 됩니다. 

저는 그간 제사를 지내는 동안 귀신이 들어와야 된다며 열어 놓던 현관문을 혼백은 시공간을 초월한다며 닫았고 집 밖에서 태워 공중에 날리던 지방을 대야 위에서 태워 재를 집안으로 가져 오도록 했는데 이 모든 걸 다시 돌려야 합니다. 

이웃에게 피해가 가는 일이기도 하고 개신교 신자들이 많은 요즈음은 이웃들이 노골적으로 싫어하기도 합니다. 

제가 양보가 안 되는 더 큰 일이 있습니다. 

‘제사를 잘 지내야 복을 받는다’ 는 남편의 정서가 저로 하여금 양보가 안 됩니다. 

사업 실패하고 난 후 조상이 돌보길 간절히 기원하는 남편이 참으로 딱하고도 안쓰러워, 또 아버지 잃은 형제들의 애통을 존중하여 10여년은 봐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젠 그만 할 때도 된 것 같습니다. 

복 받고 집안 잘되는 건 사람이 할 일이지 죽은 조상이 할 일은 아닙니다. 

제삿날은 돌아가신 분을 기억하며 그 분이 베풀어 주신 은덕과 사랑에 감사하고 남은 자손들이 모여 앉아 우애를 돈독하게 할 자리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올해도 남편의 불만을 짐짓 모른 체, 제사 준비를 했습니다. 

해마다 참석 인원이 조금씩 줄더니 올해엔 18명이 참석했습니다. 

1부는 제사, 2부는 형제애를 돈독히 하는 애찬입니다. 

제수는 대표 음식으로 마련하고 모이는 형제들이 좋아하는 갈비와 회를 주 메뉴로 했습니다. 

총 경비가 70만원을 조금 넘었습니다. 

갈비를 호주산으로 했기에 그 정도입니다. 

유쾌한 가족들이 배불리 먹고 마시고, 남은 음식 한 보따리씩 들고들 돌아갔습니다. 

남은 음식이 아닙니다. 첨부터 싸 보낼 분량까지 감안하여 마련한 음식입니다. 

수고했다며, 잘 가라며 인사하고 돌아섰지만 찜찜합니다. 

그 놈의 삶은 계란, 고구마 전에 “저래서 복 받겠나~!”하는 시누들의 소리가 자꾸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아이고~~~~~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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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의 시간



심범섭



    어느 고생물학 강연에서 강사가 화석 사진을 보여주며 이렇게 물었다. “이 화석이 몇 년 된 건지 아시는 분 있나요?” 그러자 한 사람이 대답했다. “100만 7년 되었습니다.” 강사는 “어떻게 그렇게 구체적으로 알고 계시나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다. “7년 전에 그 화석이 100만년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거든요.” 이 사람은 고생물학의 시간 표현을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런 특이함 덕분에 이 이야기가 우스갯 소리가 된다. 고생물학보다는 덜하지만 인간 역사를 말할 때에도 많은 경우 시간의 양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우리나라 역사가 5천년 되었다는 말을 처음 들은 것이 적어도 36년 전인데 그 후로 내 나이는 한 해 한 해 꼬박꼬박 많아져도 아직도 우리나라 역사는 5천년이라고 한다. 이광수의 <무정>이 출간된 것이 1917년인데 누가 “<무정>이 나온지 100년이 되어 . . .”라고 말한다고 해서 ‘사실은 99년인데 왜 1년을 더하느냐?’라고 따질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몇 만 년 차이까지에도 관대하던 분들도 100미터 달리기 세계 기록인 9.58과 내 평생 최고 기록인 13.80 사이의 4초 남짓한 차이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우리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시간 감각 또는 시간 리듬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시간’이란 표현에는 여기 예를 든 것처럼 객관적으로 측정되는 시간이라는 일차적 의미도 있지만 ‘시간을 배경으로 일어나는 일’ 같은 의미도 있다. 우리 시대 큰 인문학자인 김우창 선생은 여러 해 전 어느 대학에서 강의를 하던 가운데 “우리가 말하는 ‘시간 여행’은 사실은 역사 여행이지요. 시간 자체는 아무런 내용이 없으니까.”라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보면 ‘시간여행’ 같은 표현에서 ‘시간’은 ‘특정한 시간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 등의 뜻을 지니는 대유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누군가 “한 아이가 태어나는 건 새로운 시간이 태어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이때에도 시간은 시간에 실려 펼쳐지는 이야기를 뜻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수치로 표현되는 양적 시간에 대해 여러 가지 감각과 틀이 존재하듯이 이야기를 뜻하는 질적 시간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인식의 틀과 리듬이 존재한다. 정치가의 시간, 기업가의 시간, 학자의 시간, 농부의 시간은 각각 그 구성방식과 질감이 다르다. 그리고 이런 시간에는 이를 직접 경험하는 사람 또는 이를 밖에서 바라보는 사람으로부터 일관된 의미가 부여되는 경우가 많다. 이 의미는 해당 시간을 경험하는 사람의 정체성을 형성하거나 이해하는데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곤 한다.  

    이청준의 단편소설 “시간의 문”에서도 “시간”은 삶의 이야기를 의미한다.[각주:1] 이 소설의 주인공은 유종열이라는 사진작가인데 그는 미래의 시간을 찍는 사람이다. 그가 미래를 찍는 방법은 사진을 찍을 당시에는 해석을 보류하고 시간이 한참 흐른 다음에야 사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의 촬영 행위는 “해석이 행해지는 그 미래의 현실에 속하는 것”이 되는데, 그가 이렇게 현재를 “미래의 이름으로” 사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의 무게”로부터 “압살을 모면하기 위해”서이다. 그가 사람이 아닌 자연물의 사진을 찍으며, 길고 추상적인 자연의 시간 리듬에서 미래로 가는 시간의 문을 찾아 현재로부터 자기 실종을 꾀하지만 동시에 이 실종을 두려워하기도 한다.  

    유종열은 시간의 흐름을 정지시키기만 하고 미래로 진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카메라의 숙명” 때문에 시간의 문을 찾지못하면서 고민하다가 자연의 시간보다 더 역동적인 사람의 시간을 찍는 데에서 돌파구를 찾으려 한다. 그래서 월남전 취재를 자원하여 비극과 참상 가운데 고통받는 사람을 촬영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카메라는 “대상의 시간을 정지시킬 뿐 . . . 그 시간의 벽을 뚫고 대상 안으로 들어가 함께 흐를 수가 없”음을 깨닫는다. 그는 카메라가 인간의 치열한 현실 앞에서 무력함을 느끼면서도 사진찍기를 포기할 수도 없는데, 전장의 극단적 고통 가운데 울부짖는 사람들의 얼굴이 그에게 촬영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고민하던 그는 전쟁 후 바다 위에서 표류하는 월남 난민을 촬영하기 위해 취재여행을 떠난다. 일본인을 선장으로 하는 화물선에 편승해 사진을 찍던 그는 어느날 실종되고 만다.    

    그로부터 5년 후 유종열의 아내에게 이 일본인 선장으로부터 그가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의 필름과 그가 실종된 구체적인 사연이 담긴 편지가 찾아온다. 유종열은 처음에는망원 렌즈를 이용해 근처를 지나는 난민선을 촬영하기만 했으나 어느 날 카메라를 남겨두고 직접 한 난민선에 홀로 배를 타고 건너가기로 한다. 그가 바다안개 속에서 멀어져 가는 모습을 선장이 겨우 사진으로 찍는데 이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 된다. 유종열의 아내와 옛동료인 ‘나’는 그가 사라진 연유를 듣고 그가 마지막으로 찍었던 사진들을 보면서 그가 마침내 미래로 가는 문을 찾았고 대상과 함께 미래로 흘러갔으며 “그 자신이 미래의 모습이 되”었음을 알게 된다.  

   소설의 복잡한 의미망을 내가 제대로 파악했다는 자신은 없지만 나름대로 이 작품에서 중요하게 다가오는 의미를 오늘의 현실을 개혁하고자 하는 ‘우리’와 연관시켜보고자 한다. 유종열이라는 개인은 몇 단계에 걸쳐 성장하는데 그것이 오늘 대한민국에서 깨어서 살고자 하는 우리의 이야기로 번역될 수 있는 부분은 그의 사진이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미래로 가고 싶어하는 지점부터이다. 처음에 그는 현실의 무게에서 도피하고 싶었고 이 탈출구를 자연의 시간에서 구했지만, 어느덧 미래를 사람의 시간에서 구하게 되었고 특히 월남전 취재 이후에는 바로 지금 보이는 사람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는 박애적 의지를 지니게 된다. 미래의 시간은 그에게 “구원”의 시간이며, 따라서 대상과 함께 흘러가는 미래는 대상과 함께 구원받는 미래이다. 그리고 오늘 대한민국에서 소외받고 억압받는 이들과 우리가 함께 가고자 하는 미래도 같은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런데 이런 미래로 들어가는 문턱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자기 실종이라는 단계를 통과해야만 한다. 이는 유종렬에게 두려운 것이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두려운 것이다. 이 자기 실종을 제대로 이루기 위해 유종렬은 카메라로 대상을 찍는 것마저 포기하는데, 이를 작품 안에서는 “절망”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표현한다. 사진 찍기로써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대상에게로 다가감으로써 난민들과 미래를 함께하는 유종열의 모습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물론 우리는 유종열이 몸으로 건너감을 우리 모두가 소외받는 이들의 삶의 물리적 현장에 뛰어 들어가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을 저만치 떨어져 있는 관찰과 논평의 대상으로 보기만 하는 이상, 곧 우리 마음에 구별의 벽이 서있는 이상 그들과 같은 시간을 흐를 수는 없다는 뜻으로 새기고 싶다. 우리는 자기 부인으로써 그들과 같은 차원에 서서 그들과 손을 잡아야 한다.  

   사실 유종렬이 미래로 가는 시간의 문을 찾았다는 사실을 그의 아내와 ‘나’는 그의 마지막 사진들만 보고서는 깨닫지 못한다. 일본인 선장이 보내준 편지를 읽고서야, 곧 유종렬의 마지막 행동의 정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서야 그의 “성취”를 알게 된다. 이 점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인생에서 어떤 의미있는 성취가 사람들에게 제대로 이해되려면 반드시 그것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전달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오늘의 소외받는 사람들과 시간(역사)을 함께 하는 공동체를 이루었다고 할지라도 이를 더 넓은 세상과 후세에 알리지 못한다면 아쉬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 생각은 소설 안에서 유종렬의 아내가 남편의 성공이 보편적 적용이 가능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연결된다.


만약 종열씨에게 그 미래의 시간이 열리고 있었다면, 아까 허선생님도 말씀을 하셨듯이, 그 미래의 시간이라는 것은 다만 유종열씨 한사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내야 할 만인 공유의 것이 되어야 하니까 . . . (182-83)

  

    실제로 작품에서는 유종열 개인이 도달한 미래의 시간에 다른 사람도 따라갈 수 있다라기보다는 그의 성공이 다른 사람도 각각 자기만의 미래의 시간을 찾아가는데 영감을 준다라는 결론을 암시하는 듯 하다. 분명한 것은 유종열이 이룬 일을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이 그들도 미래로 가는 문을 찾는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며,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노력과 성취를 기억하고 기록하고 전해야 한다는 뜻을 취할 수 있다고 본다. 소설에서는 유종렬과 그의 마지막 행적을 기록하고 전달하는 사람이 서로 다르고 유종열은 이 사실조차 모르지만 우리의 현실에서는 반드시 이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서는 유종열과 일본인 선장이 하나가 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이청준이 소설에 담은 심원한 의미를 너무 쉽고 단순하게 번역하지 않았나하는 두려움을 느끼면서, 해석 부분의 첫문단에서 미래의 시간은 구원의 시간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 조금 더 상술하고자 한다. 곧, 어떻게 하면 우리가 다가가고자 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미래가 구원의 시간이 될 것인가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고자 한다. 이 질문에 답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을 텐데 그 중 하나를 다음 싯구를 통해 생각해보고 싶다.   


사랑이 낳아준

눈물 속에

하도 잘 익어서

별로 뜨는

나의 시간들[각주:2]

  

    여기에서 “시간들”은 어떤 특정한 시간대의 경험들로 이해되는데, “잘 익어서 별로 뜨는” 과정을 거쳤으므로 이미 발생한 경험들, 곧 과거의 “시간들”이라 할 수 있다. 시적 화자의 과거 이야기는 사랑에서 솟은 눈물에 변용되었다. 이 변용 과정이 “잘 익”는 것이었음은 그 눈물이 매우 뜨거운 것이었음을 암시한다. 누군가가 시적 화자의 과거를 뜨겁게 사랑함으로써 이 시간을 별로 탈바꿈시켰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별”은 초월적이고 영원한 원리 및 이상으로 해석할 수 있고, 따라서 미래까지 포함하고 또 초월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더불어 별이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대상이므로 이 원리는 보편적 적용력을 지닌다고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구절에서 우리는 한 사람의 구체적 경험이 누군가의 깊은 사랑에 의해 시간을 초월하는 보편적, 지도적 원리를 낳게 된다는 의미를 끌어낼 수 있다. 이런 원리를 구원의 원리라고도 이름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이 해석에서 “사랑”이라는 막연한 개념은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이 사랑에 ‘선하고 희생적인 의지’나 ‘대상과 하나되려는 뜻과 실천’ 같이 긍정적이나 여전히 막연한 의미보다는 조금 더 현실적인 뜻을 담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이 사랑에 마태복음 10장 16절에서 예수가 열 두 제자를 파송하면서 한 말의 의미를 담고 싶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뱀 같은 지혜와 비둘기 같은 순결 가운데 순결이 조금 더 기독교의 본질에 어울리는 덕목인 듯한 것은 나에게만 국한된 느낌이 아닐 것이다. 뱀 같은 지혜는 날카로운 판단력, 예민한 분별력, 깊은 사고력 등을 뜻하는 듯한데 이는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익숙한 기독교에서는 그리 강조하지 않는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나운 악의 세력이 들끓는 세상에서 하늘나라를 확장하려 할 때 순결한 마음만으로는 현실을 바꾸기 힘든 것 같다. 그리고 엄밀하게 말해서 순결이 지혜보다 얻기 쉬운 덕목인 것도 아니다. 두 가지 다 성실한 노력과 고도의 훈련이 있어야만 얻을 수 있는 가치이다. 제대로 사랑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주요 종교에서 사랑을 최고의 가르침으로 강조하는 이유는 사랑이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세상에 참사랑이 워낙 드물기 때문이기도 해서인 듯 하다.  

    며칠 전 이화여대 후문 맞은 편에 있는 필름포럼이라는 극장에서 <나쁜 나라>라는 기록영화를 보았다. 세월호 특별법이 제정되기까지 유가족분들이 투쟁하신 이야기를 담은 작품인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 김진열 감독님과 유가족분 가운데 영만 어머님(이분 본인의 이름도 들었지만 기억이 안남)과 함께 하는 질의응답 시간도 있었다. 영화와 질의응답 시간을 통해서 절실히 깨달은 것 가운데 하나가 상식과 정의를 외면하는 권력자들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비범한 지혜도 있어야겠다는 것이었고, 이 생각이 나로 하여금 과거를 미래의 구원의 원리로 통합하는 사랑의 의미에 뱀같은 지혜도 포함시키게 한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각주:3]  

    세월호 참사로 고통받는 분들을 비롯하여 우리 사회의 억압받는 이들과 함께 구원의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에게는 비범한 지혜와 비범한 순결이 있어야겠다. 이런 사랑으로 우리는 먼저 이들의 지나온 역정에 뜨거운 관심을 가져야 하겠다. 김우창 선생은 한국 소설의 시간을 논하는 한 글에서 성숙한 소설의 시간을 “구체적인 사건과 사람과 사물들 사이에서 자라나오는 사건 전개의 내적 원리”[각주:4]로, 그리고 더 간략하게 “내면적 유기적 시간”으로 이름한다.[각주:5] (이 개념이 비록 다른 영역에서 쓰인 것이지만 해석적 관점이 있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 글에서 말하는 시간과 같으므로 여기 빌려와 적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우리는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구체적인 사건과 사람과 사물들”,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자라나오는 사건 전개의 내적 원리”를 파악해야겠으며, 동시에 이 사건, 사람, 사물, 원리를 재창조해야겠다. (“재창조”라는 표현은 남의 경험을 멋대로 편집하자는 말로 들리는 위험도 있지만, 경험이 구원의 미래로 이어지는 최선의 해석의 틀을 찾자는 뜻을 적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나쁜 나라> 같은 영화를 만드는 일, 이런 영화를 보는 일, ‘416 가족협의회 기억저장소’에서 주관하는 “기억과 약속의 길”이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도 이러한 노력의 구체적인 예가 될 것이다.  

    양적 시간을 측정하는 준거로서 인류 역사에서 오랫동안 해와 달의 움직임, 추의 왕복, 심장 박동처럼 주기적인 운동이 이용되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심장 박동은 개인적인 현상이며 심장이 정서의 근원지로 간주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동시에 질적 시간을 비유하는 개념으로도 쓰일 수 있다고 본다. 한 사람의 독특한 시간 리듬이 있는 이야기를 그 사람의 심장의 이야기, 심장의 시간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다른 사람의 시간에 동참하는 것을 그와 심장의 고동을 같이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로마서 12장 15절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라는 권고는 곧 그들과 심장의 시간을 함께하라는 권고가 아니겠는가? 오늘의 대한민국에서 우리가 억압받는 이들과 새로운 미래의 시간, “내면적 유기적 시간”, 심장의 시간을 창조하기 위해 자기 부인의 용기, 비범한 지혜와 비범한 순결, 정확하고 정직하게 기억하고 전달하는 실천이 필요하다고 소박하게 제안해보았다. 우리가 갈 길은 참으로 멀고 험한 듯 하다. 한 발 한 발 내딛을 뿐이다.  


    * 필자소개  

영어강사. Rice Univ 언어학 박사(Ph.D) 후에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과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 웹진 <제3시대>



  1. 이청준, <1982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문학사상사, 1982, pp.134-206. 이 문단에서부터 여러 문단에 걸쳐 작품의 내용을 요약 또는 해석하면서 직접 인용이 많이 등장하는데 독자분들이 글을 원활하게 읽으시도록 일일이 출처를 밝히지는 않기로 했다. [본문으로]
  2. 이해인, “너에게 가겠다”, <작은 위로>, 열림원, 2008, p.30. [본문으로]
  3. 영만 어머니께서 들려주신 이야기 가운데 특히 가슴 아픈 것이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병무청에서 남학생 희생자 가운데 아직 사망신고가 안된 사람 중 일부를 대상으로 징집 신체검사 통지서를 보냈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아이들 누구에 대해서도 신규주민등록증 발급을 위한 통보는 없었다는 사실도 언급하시며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또 하나는 참사 이후 싸우는 과정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배보상 문제에 대한 일부 국민들의 비뚤어진 시각이었다고 말씀하시면서 언급하신 한 예였다. 유족 가운데 어떤 분은 세탁기가 고장이 났지만 배보상과 관련하여 안좋은 반응을 일으킬까 두려워 몇 달 동안 손빨래를 하셨다고 한다. 첫번째 예는 국가의 잘못이지만 두번째 예는 보통 사람들의 문제이다. 영화 제목 “나쁜 나라”에서 “나쁜”이라는 수식어가 과연 권력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인지 아니면 (비록 영화 제작자의 의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대한민국의 평범한 시민에게도 적용가능한 것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본문으로]
  4. “한국 소설의 시간”, <심미적 이성의 탐구>, 솔, 1992, p.253. [본문으로]
  5. 같은 책, p.26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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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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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들과 아이들에겐 국경이 없다

 



유경종

(본 연구소 회원)



    얼마 전 한 도서관 사서로부터 도서관에서 개최하는 행사 홍보 기사를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동물과 관련한 글을 쓰는 재일한국인 3세 작가가 도서관을 찾아와 강연을 한다는 것이었다. 자료로 모아 건네준 책들은 무척 흥미로웠다. 몇권의 논픽션과 동화책을 하룻밤동안 다 읽은 다음 나름 정성을 들여 행사를 알리는 기사를 썼다. 그리고는 강의가 있는 날 도서관으로 가서 직접 작가를 만나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이 이야기는 교토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며 세 딸아이를 키우고 있는 심강만의 이야기다. 동시에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동물과 관련된 주목할만한 논픽션과 동화를 쓰고 있는 작가 김황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둘은 55세로 나이도 같고 키도 같다. 다만 아저씨 심강만은 재일조선인 3세이고, 작가 김황은 재일한국인이다. 먼저 심강만의 이야기부터 들어보자. 좀 길지만 한번 읽어 줄 만한 가치가 있는 글이기를 바란다.





* 친척들과의 이별과 맞바꾼 출생


    심강만의 할아버지는 경남 진주가 고향이다. 십대 후반인 1930년대에 강제 노역 노동자로 끌려 가 일본 교토 인근의 망간 광산에서 노예처럼 일을 하게 된다.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전쟁이 끝난다. 당시 일본에는 200명의 조선인들이 있었는데 다수가 귀국하지만 65만명은 일본땅에 남게 된다. 그 대부분은 한국으로 돌아가도 먹고 살 길이 막막한 이들이었다. 미국이 주축이 된 연합군 총사령부는 귀국하는 조선인들에게 일화 1000엔만 가지고 나가게 했단다. 심강만의 할아버지가 일본에 남은 까닭은 일본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가족들을 굶어 죽일 수 없어서였다.

    하지만 일본에서의 삶도 순탄하지 않았다. 값싼 미국의 광물이 수입되면서 망간 광산은 폐쇄되었다. 마침 그 즈음 조국에서 손짓이 왔다. 문제는 그 조국이 북한이라는 것. 재일조선인(아시겠지만 남한 사람도 북한 사람도 아닌, 해방 이전의 조선에 자신의 정체성을 두고 있는 이들이 곧 재일조선인이다)에 대해 철저히 무관심과 무대책으로 일관한 남한과 달리 북한은 일본에 남아 있는 조선인들에게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을 보였다. 물론 체제 경쟁과 정치적 선전의 목적이었다고는 해도 말이다. 그런 까닭에 재일조선인 대부분이 남쪽에 고향을 두고 있는 이들임에도 불구하고, 1959년부터 북송 사업이 시작된 이래 거의 십만명에 가까운 이들이 북녘땅에 있는 조국으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1960년 심강만의 할아버지도 모든 가족을 데리고 북으로 가기로 결심한다. 이 또한 먹고 살기 위해서였다. 십대 때 끌려와 망간 캐는 일밖에 모르던 조선 청년이 어느새 식구들이 줄줄이 딸린 무직자 가장이 되었는데 달리 무슨 선택을 할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하필 그 때 첫째 며느리(심강만의 엄마)가 임신중이었다. 낯선 곳에서 아이를 낳는 게 두려웠던 심강만의 엄마는 북송선을 나중에 타겠다고 고집을 피웠단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뱃속의 심강만은 일본에 남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고모 삼촌 등 나머지 아홉 식구가 모두 북송선에 몸을 싣는다. 가족들과 헤어지며 심강만의 아버지는 동생에게 은밀한 부탁을 한다. 편지 속에 몰래 약속된 사인을 표시해서 그 곳이 정말 살만한 곳인지 아닌지를 알려달라고 말이다. 얼마 후 북으로 간 동생으로부터 편지가 온다. 그 안에는 형과 약속한 사인이 숨어있었다. 그 사인 뒤에서 동생이 어두운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형, 이곳은 지상 낙원이 아니예요. 형은 오지 마세요... 북녘행을 포기하며 심강만의 아버지는 가족들과 영영 이별을 하게 된다. 그렇게, 모든 친척들과의 엇갈림을 담보로 태어난 아이가 심강만이었다. 


* 어린 시절의 유일한 친구


    일본에 남은 심강만의 가족들은 이웃들로부터 경멸의 대상이 된다. 아버지가 작은 세탁소를 운영하며 근근이 먹고 살았지만, 가족 모두가 북한으로 넘어간 간 집이라는 눈총은 늘 따라다녔다. 심강만이 학교에 입학하자 아이들은 김치냄새 나는 녀석이라며 심강만을 따돌렸다. 간첩일지도 모른다는 수근거림도 들렸다. “조선놈은 조선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늘 들으며 학교에 다녀야 했다. 심강만의 유년 시절은 심한 콤플렉스와 자괴감만이 가득한 무채색의 세계였다.

    그런 심강만에게 구원이 찾아온다. 한국에서 친구 한 명이 전학을 온 것. 그 친구의 이름은 김황이었다. 그는 운동을 잘 했고, 싸움도 잘 했다. 무엇보다도 김황은 스스로 나는 한국 사람이라고 말하는 당당한 아이였다. 김황은 일본 아이들에게 괴롭힘 당하는 심강만을 돕는다. 그리고는 유일한 친구가 되어준다. 아무리 왕따를 당해도, 아무리 세상이 지옥같아도, 정말 마음을 주고 받을 수 있는 단 한명의 친구만 있으면 견딜만한 게 또 세상이다. 심강만에게 김황은 세상을 살아갈 용기와 의미를 찾아 준 친구였다. 비로소 심강만은 사람으로서의 자존감을 처음으로 품게 된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가 되자 심강만은 친구 김황처럼 한국말을 잘 하고 싶어서 민족학교에 가기로 결심한다. 그리고는 기쁜 마음으로 그 이야기를 김황에게 전한다. “김황아, 나 어제 아빠하고 얘기했는데 중학교는 민족학교로 가기로 했어.” 하지만 기대는 빗나갔다. 왠일인지 다음날부터 김황은 심강만을 멀리 하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김황의 아버지는 민단계열의 한국 학교를 세우기 위해 한국에서 파견 온 교장이었다. 아들이 조총련계 민족학교를 가겠다는 친구랑 사귀는 것을 봐 줄 리 만무한 시절이었다. 결국 김황은 단 하나의 친구와 멀어지게 된다. 세상은 다시 깜깜한 지옥이 되었다. 그 사건은 심강만에게 너무나도 큰 상처로 남는다.

  심강만은 중학교와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까지도 교토의 조선학교, 다시 말해 조총련계 민족학교를 다닌다. 같은 처지의 친구들끼리 함께 생활한 민족학교 시절의 생활은 유년시절에 비해 훨씬 행복했다. 그러면서 심강만은 자연스럽게 북한을 자신의 뿌리로, 정치적 조국으로 받아들이며 성장한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켠에는 여전히 어릴 적 가슴 아픈 이유로 멀어져야 했던 친구 김황에 대한 그리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 사육사의 꿈을 포기하고 세탁사가 되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차별과 좌절은 다시 시작된다. 어린 시절부터 동물에 관심이 많았던 심강만은 동물원 사육사가 되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조선국적 신분으로는, 그리고 민족학교 졸업장을 가지고는 사육사 시험에 응시조차 불가능했다. 공립 동물원에서 일해야 했기에 사육사는 공무원 신분이었다. 당시만 해도 민족학교는 학력 인정조차 받지 못하는, 모든 권리에서 배제된 제도권 밖의 교육기관이었던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심강만은 동물원 사육사의 꿈을 접고 조선민족학교의 교사가 된다. 민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그는 남다른 지도력을 발휘해 탁구부 아이들을 성공적으로 지도한다. 그가 지도한 탁구부가 교토시 학생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하지만 민족학교에게 출전권을 주어지지 않아 전국대회 출전 자격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전국의 민족학교끼리 모여 탁구 대회를 열어 우승컵을 차지한다. 그리고 우승자의 특권으로 탁구부 아이들을 데리고 북한땅을 밟는다. 이 때 북쪽의 탁구 국가대표 선수들과도 안면을 트게 된다.  

   1991년 남북 통일팀이 지바에서 열린 국제탁구대회에 참가한다. 우리에게는 현정화와 리분희의 복식조로 기억되는, 영화 <코리아>의 소재가 된 바로 그 대회다. 이 때 심강만이 통역으로 활동한다. 그는 주최측 일본에서 선발한 통역이었지만, 남과 북의 선수단을 넘나들며 보이지 않게 그 둘 사이의 비공식적 만남과 접촉을 매개하는 역할을 재밌게 해 낸다.

   심강만은 30살 때 교사를 그만둔다. 연년생으로 쪼로록 태어난 세 명의 아이들을 기르기 위해서는 좀 더 안정된 직장을 찾아야 했다. 심강만은 스스로 결심한다. 나는 이 세 아이의 아빠로 행복한 삶을 사는 걸 내 남은 생의 목적과 의미로 삼으리라. 그때 아버지가 건강에 문제가 생겨 새탁소 일을 그만둬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심강만은 아버지의 세탁소를 이어받기로 결심하고는 세탁사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관련기관을 찾아간다. 그런데 웬걸, 민족학교를 졸업한 재일조선인에게는 세탁사 자격증조차 주지 않는 것이었다. 심강만이 바란 건 대단한 게 아니었다. 그저 동네에서 열심히 다림질하며 장사할 수 있는 세탁사가 되겠다는 거였다. 심강만은 차별적 행정의 부당성을 호소하는 편지를 써서 직접 내무성 장관에게 보냈다. 다행히 장관이 응시해도 좋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그렇게 심강만은 내무성 장관의 특별 편지를 통해 자격증을 취득한 첫 번째 세탁사가 되었다. 비로소 세 아이를 먹여 살릴 안정된 호구지책을 얻게 된 것이다.


* 심강만, 스스로 김황이 되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동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해소되지 않았다. 동물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국적을 이유로 차별이 일상화된 사회에 대해 뭔가를 간절히 외치고 싶었다. 그는 결심한다. 글을 쓰는 작가가 되자. 그래서 인간과 동물이 공존하는 세상에 대해 말하면서, 아울러 인간과 인간 사이의 차별과 불평등을 호소하자. 더 이상 재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꿈을 접어야 하는 아이들이 나오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작은 목소리라도 내 지르자! 

    막상 작가가 되려고 결심했지만 앞길은 막막했다. 민족학교를 다닌 탓에 일본어도 세련되지 못했고, 그렇다고 조선말도 완벽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작가로서 빠른 시일에 성공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쿨하게 인정했다. 그리고 긴 안목으로 3단계 계획을 세운다. 세탁소일을 하면서 짬짬이 공부를 하고 글을 써서 35세에 본격적으로 작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하고, 40살이 되기 전에 첫 책을 내고, 45살에는 남들이 알아줄만한 상을 하나 쯤 받고, 드디어 50살에는 세탁소를 그만두고 전업작가로 독립하기로 말이다. 

    제2의 인생을 출발하며 그는 또 하나의 선택을 한다. 작가로서의 제 2의 인생을 상징할만한 필명을 갖기로 한 것이다. 그가 선택한 필명은 바로 하나밖에 없었던 유년시절의 친구, 김황이었다. 어릴적 자신에게 우정과 선의를 처음으로 베풀어 준, 하지만 너무도 안타깝게 멀어질 수 밖에 없었던 친구. 심강만은 그 자신이 김황이 돼 버리기로 한다. 그 이름 안에는 자신을 사람답게 대해 준 한명의 친구에 대한 고마움, 친구의 이름 앞에 부끄럽지 않은 진실하고 작품을 쓰리라는 다짐, 그리고 언젠가는 그 친구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간절한 염원까지도 담겨 있었다. 

    심강만, 아니, 작가 김황은 자신의 꿈을 이루었을까? 첫 번째 약속은 그리 성공적으로 이루지 못했다. 40세에 그는 알뜰히 모은 돈을 털어서 자비 출판을 하지만 책은 겨우 300여 부 팔린다. 하지만 두 번째 약속은 얼추 비슷한 시기에 제대로 지켰다. 마흔 여섯 되던 해에 그의 책 <코끼리 사쿠라>는 일본 논픽션대상 최우수 작품상을 받는다. <코끼리 사쿠라>는 일본의 한 동물원이 폐원하면서 한국의 서울대공원으로 이사를 가게 된 사쿠라라는 이름의 코끼리의 행적을 추적하는 이야기다. 장난꾸러기 코끼리 사쿠라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동물을 매개로 한 한국과 일본의 교류의 역사를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사려 깊게 되짚는 흥미로운 책이다. 책 전반에 흐르는 김황의 섬세하면서도 친절한 시선이 따뜻하게 전해지는 책이기도 하다. <코끼리 사쿠라>가 계기가 되어 김황은 한국과의 인연을 시작한다. 50살에 세탁소를 그만두고 전업작가로 독립하겠다는 세 번째 꿈 역시 55살인 현재 절반만 성취했다. 매일 가게에 매여야 하는 세탁소는 얼마전 그만두었다. 하지만 글만 써서 먹고 사는 일은 여전히 언감생심이라 아내와 함께 카페를 운영하며 먹고 산다. 하지만 예전보다는 자유롭게 글을 쓰기 위해 동물들을 만나러 다닐 수 있어서 만족스럽단다.


* 호적에서 나와 한국 국적을 택하다

 

   한국과의 교류가 깊어지면서 김황은 또 다른 선택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한국을 자유롭게 오가며 한국의 학자, 작가, 출판업자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려면 조선 국적을 가지고 있는 게 장애가 되었다. 오랜 고민 끝에 그는 조선 국적을 버리고 한국 국적을 취득하기로 결심한다. 김황이 자신의 결심을 말하자, 그의 부모는 대노한다. 어머니는 심지어 부엌에서 칼을 들고 와 국적을 바꾸려면 니 에미를 찌르고 가서 바꾸라는 말까지 했단다. 그 말 앞에서 김황은 너무 슬퍼서 엉엉 울었단다. 굳이 지역적 연고를 따지자면 남쪽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들이 왜 대한민국에 대해 그토록 격렬한 거부감을 갖고 살아가는 것일까? 김황은 그 이유를 몇 가지로 설명한다. 하나는 북으로 간 형제들에 대한 미안함과 의리, 또 하나는 마이너리티로 살아온 이들의 뿌리 깊은 피해의식에서 비롯된 강렬한 자기 방어 본능, 그리고 남한 정부에 대한 뼈에 사무친 서운함 등이 그것이라는 것. 

   김황은 결국 부모의 호적에서 독립하고 나서(좋은 말로 독립이지 호적에서 파버린 것) 한국 국적을 취득한다. 부모를 제외한 모든 친척들과의 이별과 바꾸며 태어난 심강만은, 일본과 남에서 동시에 활동하는 작가 김황으로 다시 태어나면서 이제 부모와도 이별하게 된 것이다. 


* 반편이의 목소리

 

   책을 통해 그가 다루는 소재는 인간과 가장 친근한 동물인 개로부터, 멸종 위기에 처한 황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그의 글이 일반적인 생태 동화들과 조금 다른 점은, 인간 사회의 차별과 소외를 바라보는 애틋한 시선이 늘 배어있다는 점이다. <황새>라는 논픽션에서는 부리를 다쳐 다른 황새들로부터 따돌림당하는 암컷 황새를 보며 왕따로 인해 고통받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기도 하고, <생태통로>라는 동화에서는 동물들을 위한 생태통로가 만들어졌지만 여전히 이동하기 힘든 날다람쥐를 주인공으로 삼아 마이너리티 중에서도 더 마이너리티인 존재에까지 관심의 시선을 던지기도 한다. (실제로 날다람쥐만을 위한 높은 기둥형 생태통로가 우리나라에도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으며 처음 알았다.) 

  그는 스스로를 반편이라고 칭했다. 일본인도 아니고 조선 사람도 아닌, 남한사람도 아니고 북한 사람도 아닌 반편이. 하지만 그는 반편이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역할이 있다고 여긴다. 그 스스로가 증거가 되어 차별과 편가름의 어리석음을 호소하는 역할이 그것이다. 그는 말한다. 동물에게는 국경이 없다고. 또 하나, 아이들에게도 국경이 없다고. 

  누구에게나 산다는 일은 어느 정도 가혹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삶은 특별히 더 그렇다. 심강만의 삶을 가만히 상상해보면 구멍이 숭숭 뚫린 한겨울의 창호문처럼, 도처에서 스산한 바람이 분다. 하지만 사람으로 인해 얻은 기쁨과 사람으로 인해 얻은 상처와 정면으로 부딪히며 자신의 방식으로 의미있는 길을 열어가는 모습을 김황이 된 심강만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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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에필로그 1 : 김황은 부모와 여전히 등 돌리고 살까? 아니다. 화해를 했다. 부모의 마음을 녹인 건 황새 복원 사업에 대한 논픽션을 쓰면서 찍은 단 한 장의 사진이었다. 복원된 황새의 자연방사행사장을 찍은 그 사진 안에는 아키히토 천황의 둘째 아들과 김황이 한 프레임에 잡혔다. 김황의 부모는 그 사진을 가문의 영광처럼 받들었다. 동네방네 다니며 우리 아들이 황세자와 사진을 찍었다고 자랑을 했단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동물 복원 사업에 관여하는 김황을 받아들였단다. 황민화 교육의 깊은 영향과 늘 약자로 살아온 이의 뿌리 깊은 인정 욕구가 복합적으로 빚어 낸 웃픈 장면이 아닐 수 없다.

    ■ 에필로그 2 : 가짜 김황은 진짜 김황을 만났을까? 만났다. 한국의 한 잡지에 작가 김황이 친구 김황을 찾는다는 글을 썼더니, 글을 읽은 진짜 김황의 친척이 연락을 해 줘서 몇해 전 한국에서 다시 만났단다. 김황은 어릴 적 함께 찍은 사진과 다시 만났을때의 사진을 나란히 비교하며 보여줬다. 잘생긴 꼬마였던 진짜 김황은 여전히 인상 좋은 호남형 아저씨였는데, 소심해 봬는 꼬마 가짜 김황은 그 사이 머리숱이 모두 사라진 대머리 중년이 되었다. 하지만 둘의 미소는 그때나 지금이나 아주 천진하게 닮아 있었다.


* 필자소개

    몇 달 전부터 고양신문사에서 일하고 있으며 신도제일교회에서 청년들과 생각을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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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menade 프롬나드 – 산책


1. 대부도의 풍경


1994년, 시흥시의 오이도와 대부도의 방아머리를 잇는 시화 방조제 건설은 대부도 연안의 역사를 다시 쓰는 사건이었다. 대부도로 이주하는 외부 인구 유입이 늘어나면서 대부도는 주민구성이 크게 바뀌었고 개발가치 상승과 함께 연안자원, 환경파괴, 전통생산, 문화유산 소실의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그래서 프롬나드 프로젝트는 레저와 관광지로서 부분별하게 개발되고 있는 대부도에서 아직 남아있는 서해 섬마을로서의 풍경을 모아 재구성 해보고자 한다.


2. 산책 


프롬나드(promenade)는 불어 단어로 ‘산책 혹은 산책로’를 뜻한다. 

이는 단순히 ‘걷다’라는 동작 이외에 거닐면서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등의 감각적, 지적 작용도 동시에 유발되는 단어이다.


새로운 장소에 도착 했을 때 그 곳의 지리적 위치와 특색, 환경을 체감하며 파악하기에는 산책만큼 좋은 방법도 없는 것 같다. 

프로젝트에 사용된 꽃게잡이 원형 통발은 이곳 대부도에 처음 왔을 때부터 산책을 하며 관심 있게 보았던 어구들 중 하나이다.


수명이 다한 낡은 통발은 쓰레기 처리비용이 부담스러워서 그냥 바다에 버리고 오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이야기를 마을의 낚시 배 선장님에게서 전해 들었다. 바다 속에 버려진 이 폐 통발들은 해양 생태계와 환경을 위협하며 심각한 오염원이 되고, 이로 인해 수자원을 황폐화 시키는 유령어업(Ghost fishing)이란 현상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이렇게 산책을 하며 발견했던 재료와 대부도 사람들, 그리고 그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을 나는 다른 맥락 위에서의  ‘산책’ 이야기로 풀어내고자 한다. 


관람객들이 갈대밭 오솔길과 연결된 프롬나드를 천천히 거닐며 통발 그물 사이로 보이는 갈대밭의 풍경과 생태환경을 느끼고 체험하는 동시에, 선감도와 선감학원의 가슴 아픈 역사에서부터 오늘날의 연륙 개발된 대부도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에 대한 이야기들을 환기시키며 걸으면서 느끼고, 감상할 수 있는 또 다른 풍경을 제시하고자 한다.


3/제작과정 

             770여개의  통발을 사용하여 프롬나드 제작






4/ 작품 완성

나선형 구조의 ‘프롬나드’ 안을 걸으면서 포획되어진 갈대밭의 풍경들을 재구성 해보기도 하고 동시에 지금의 대부도의 모습과 선감도의 역사적 사실들을 되새겨보는 경험을 할 수 있었으면 한다.





 


 

  

정승원 作 (설치작가)


- 작가소개

프랑스 부르주 국립 고등 미술학교 졸업, 경기창작센타 입주작가 

개인전 | 2014 해석의 재해석, 경기창작센터 

           2011 PLI, Eapace PRIVAT, 디종, 프랑스 

그룹전 | 2015 알 수 없는 그 무엇? 하하하, 전라남도 도립 옥과미술관 

           2014 루와얄 섬 레지던시 보고전2 금천예술공장 

프로젝트 | 2015 프롬나드(황금산프로젝트), 아르코, 경기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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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 이후의 선교 2]



믿는 것과 의심하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의 단상




홍정호

(신반포감리교회 목사)




*

    선교가 문제라는 지적이 새삼스러울 리 없습니다. 유럽에서의 선교와 식민주의의 협력관계는 근대의 서막을 여는 교황의 교서들에 이미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니콜라스 5세가 포르투갈의 알폰소 5세에게 발행한 ‘둠 디베르사스’(Dum Diversas, 1452)와 ‘로마누스 폰티펙스’(Romanus Pontifex, 1454) 등의 교서에는 새로운 식민지들에 대한 포르투갈의 배타적 점유권, 즉 노예무역을 포함한 식민통치의 권리인준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장차 발견하게 될 식민지들에 대한 통치권을 미리 확립한 경우도 있습니다. 알렉산더 6세의 교서인 ‘인테르 카에테라’(Inter Caetera, 1493)는 앞으로 ‘발견’하게 될 식민지들을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분할해서 통치할 것에 대한 교권의 인준을 포함합니다.


    식민 통치권에 대한 인준은 복음화의 책임을 수반하는 것이었습니다. 식민통치는 교회가 수행해야할 복음화 사업의 일환으로 여겨졌으며, 식민통치와 교회의 선교는 점차 불가분리의 관계에 접어들었습니다. 교회로부터 통치권과 복음화 사명을 위임받은 이들의 임무가 ‘선교’(mission)였고, 그 임무를 수행하도록 (제도화된 교회로부터) 파송 받은 이들이 선교사였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선교사들의 관심은 식민지배와 복음화의 유착된 고리를 끊는 대신 협력의 증진을 통한 임무(선교)의 효율적 수행에 자연스레 집중되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식민주의와 선교의 유착을 통해 개인적으로는 흠 잡을 데 없을 헌신적인 이들의 숭고한 실천을 통해 결코 숭고하다고 말할 수 없을, 흠으로 얼룩진 근대 선교의 역사가 비서구세계 곳곳에 새겨졌다는 데 있겠습니다.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여러 국가들에서의 빈곤과 폭력의 문제가 근대 선교의 식민주의적 실천과 과연 무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근대 선교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숙고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식민통치에 대한 교황의 교서들이 발행될 무렵부터 식민주의에 대한 서구의 자기비판담론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20세기 말엽에 이르기까지 선교는 신학적 반성과 성찰의 주제가 되지 못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세계교회협의회 에큐메니컬 총회들로 대표되는 20세기 그리스도교 선교의 변화와 쇄신을 향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교는 그 실천의 당위성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재확인하는 역할에 머문 채 근원적 회의의 대상이 되지는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심지어 종교다원주의 신학조차도 존재-신학의 형이상학적 구도 내에서의 관용의 포괄범위를 확장하는 정도에 그쳤을 뿐, 타자로부터 비롯되는 신학적 질문으로부터 선교를 재정의 하려는 시도에는 미치지는 못한 것으로 사료됩니다. 한 마디로, 지금까지 임무를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에 집중하는 동안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원적 물음은 괄호 안에 들어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20세기에도 선교를 ‘왜’ 지속해야 하는지에 대한 비판적 물음이 제기되었을 때 선교학 전공자들로부터 만족할 만한 답변을 들을 수 없었던 이유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점에서 “보수적 복음주의 신학계는 물론 자유주의 신학계에서도 오늘날의 선교신학은 갈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각주:1]는 비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왜 그토록 중요한 선교가 현대인들에게는 여전히 하나의 ‘스캔들’로 남을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더 많은 물음과 성찰이 단편적인 형태로나마 전개되어야 합니다.


**

    왜 선교는 여전히 ‘스캔들’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우리 시대는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신을 믿는 것과 의심하는 것이 모두 불가능한 시대이기 때문은 아닐까요. 어쩌면 이것이 선교가 스캔들로 남을 수밖에 없는 근본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에 대한 믿음이 불가능하다는 건 인류가 지금껏 믿어왔던 방식대로 신을 믿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해졌다는 뜻입니다. 낭시(Jean-Luc Nancy)가 그러더군요.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하늘은 저 위에 있는 하늘이 아니고, 우리가 두 눈을 통해서, 또는 망원경을 통해 보는 그런 하늘이 아니”[각주:2]라고 말입니다. 이런 정도의 말은 꼭 낭시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당연한 이야기인데, 문제는 이 말이 당연하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시대에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종교가 말하는 하늘이 더 이상 신이 거하는 장소일 수 없다는 사실은 하늘도, 그리고 거기에 거하는 신도 더 이상 (그런 방식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이 거하는 곳은 모든 장소와 다른 어떤 장소, 곧 “장소 아닌 장소”(Nancy, 같은 책, 19)라는 게 낭시의 말인데, 장소와 존재의 불가분리성을 생각한다면 신은 결국 “장소 아닌 장소에 없이 있는”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는 난관에 봉착합니다. 저 어딘가의 ‘장소’에 그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 신이 아니라 ‘장소 아닌 곳’에 ‘없이 있는’ 신이라니요, 발화자도 헷갈릴 각오를 해야 하겠지만, 언어를 통한 사유에 있어 개념으로 고착된 말의 껍질을 깨고 들어가 그것의 새로운 의미와 씨름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을 것 같습니다.


    한편 신을 믿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는 사실과 더불어 의심하는 것 역시 불가능해졌다는 사실에 대한 숙고도 필요합니다. 의심하는 것의 불가능성에 관해서라면 아마도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논의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 기록한 일련의 노트들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어떤 종류의 확실성도 앎을 보장할 수는 없다고 보았습니다. 제 아무리 여러 단계의 의심을 거친 확실한 지식인 듯해도 실상 “가정에 대한 모든 검사, 모든 확증과 반증은 이미 하나의 체계 내에서”[각주:3]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의 논의를 두고 노야 시게키(野矢茂樹)가 든 재미있는 예시를 조금 각색해서 소개하겠습니다.


    여기에 고양이가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저것이 고양이임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한 번 의심해 보기로 합니다. 고양이임을 확인하기 위해 저것(고양이)을 데리고 와 마취제를 놓고, 죽지 않게 신중하게 해부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고양에 앞에 놓인 액체가 마취제가 맞는지부터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마취제가 아닌 마취제와 비슷한 색과 향을 지닌 다른 액체라면 고양이 해부는 시작도 못하고 망칠 테니까 말이죠. 일단 마취제라고 ‘믿고’ 고양이에게 투여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해부용 메스가 맞는지 의심됩니다. 확인을 위해 현미경을 가져와서 살펴봅니다. 이번에는 현미경에 든 렌즈가 해부용 정말로 렌즈가 맞는지 의심이 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렌즈에 관한 권위 있는 연구소에 렌즈를 보내보기로 합니다. 연구소에 보낼 렌즈를 포장하다가 렌즈를 담을 박스가 정말 박스가 맞는지를 의심합니다. 박스 모양의 단단하고 큰 과자는 아닌지 한 입 깨물어 봅니다. 중요한 건 아직 고양이 해부는 시작하지도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박스가 과자가 아닌지 깨물어 보고 있는 중에 고양이는 마취에서 깨어나 도망가 버립니다.[각주:4]


    비트겐슈타인은 의심을 풀기 위한 증거가 또 의심의 대상이 되는 이런 상황, 의심이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상황을 두고 말합니다. “모든 것을 의심하려는 사람은 의심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의심하는 놀이 자체는 이미 확실성을 전제한다.”(앞의 책, §115).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의심은 “검사되지 않는 어떤 것을 전제”(앞의 책, §163)로 할 때만 가능한 실천입니다. 시게키의 농담을 또 빌려와야겠습니다만, 축구선수가 ‘이것이 공인가?’라고 묻거나 ‘공 안에 폭탄이 감춰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동안에는 축구를 할 수 없습니다. 의심을 멈추고 폭탄일지도 모르는 공을 힘껏 발로 차는 순간에 축구는 시작됩니다. 의심은 어느 시점에 이르러 ‘의심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대한 승인으로 중단되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앎은 결국 승인에 근거한다”(앞의 책, §378)는 비트겐슈타인의 지적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

    앎이란, 혹은 ‘안다’는 느낌이란, 자기승인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타인의 (무조건적) 승인에 기반을 둔 것입니다. 어느 순간 나에 대한 의심을 거둔 타인의 무조건적 환대와 인정 덕분에 내가 사회 안에 있습니다. 나에 대한 타인의 인정, 혹은 타인에 대한 나의 인정은 의심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순간에 이르러 우리가 서로를 그냥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로부터 그냥 받아들여진 존재라는 사실에 있어 예외인 사람은 없습니다. 믿는 것과 의심하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에 선교가 여전히 가능하다면, 그것은 이 선언—‘누군가로부터 그냥 받아들여진 존재라는 사실에 있어 예외인 사람은 없다’—의 충실한 매개자가 되는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필자소개

    연세대학교 학부대학 강사,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객원연구원


ⓒ 웹진 <제3시대>

  1. 장왕식,『종교적 상대주의를 넘어서』(대한기독교서회, 2002), 179. [본문으로]
  2. 장-뤽 낭시,『신 정의 사랑 아름다움』(갈무리, 2012), 18. [본문으로]
  3. 비트겐슈타인,『확실성에 관하여』(책세상, 2006), §105. [본문으로]
  4. 노야 시게키, “논리를 행위한다”, 고바야시 야스오 ‧ 후나비키 다케오 엮음,『지의 논리』(경당, 2008), 3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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