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당을 폐하라[각주:1]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산당’(山堂)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바마’(bamah)는 제1성서(구약성서)에서 80회 이상 등장하는데, 거의 모든 경우에 극단의 부정적인 뉘앙스로 사용되고 있다. 도대체 산당이 무엇이길래 성서가 그토록 위험시하고 있을까? 더욱이 그렇게 위험한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거의 모든 왕들은 문제의 산당 예배를 철폐하기는커녕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기원전 7세기 유다국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특히 기원전 639~609년 재위에 있던 요시야 왕정의 사관실로 찾아가보자. 이곳에서 유다국 역사상 처음으로 왕국 역사가 편찬되었다. 또한 선사(先史), 그리고 예언자들의 문서 등도 편찬되었다. 이 문서들이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제1성서의 토라(오경), 〈사무엘기 상/하〉 〈사사기〉 〈열왕기 상/하〉, 그리고 〈이사야서〉 같은 예언서들의 최초 문헌본이다.  

    이들 요시야 왕실 사관들은 유다국과 이스라엘국의 선왕들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을 ‘산당’의 처리 문제에 두었다. 이에 따라 오직 두 명의 왕, 유다국의 히스기야와 요시야가 산당 철폐를 추진한 이로서 칭송되고 있다. 또 이사야, 미가, 호세아, 아모스 등의 예언집들에서도 한결같이 산당은 치명적인 사회문제의 온상처럼 언급되어 있다. 심지어는 왕국 시조의 한 사람인 솔로몬조차 산당을 짓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린 것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열왕기상〉 3,3) 그리고 모든 왕들 가운데 이 일로 가장 극렬한 비판을 받고 있는 이는 바로, 요시야 왕의 아비이자 선대왕인 므낫세다.

    여기서 우리가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산당 문제가 요시야 왕실 정치의 가장 예민한 의제였고, 그것은 무엇보다도 므낫세의 정치와 정반대의 입장에 있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요시야 왕실의 문헌 편찬 작업이 왕성하게 펼쳐지고 있는 당시에도 이 문제를 놓고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제1성서에 나오는 산당에 대한 비판적 논점은 아하스, 히스기야, 므낫세, 요시야, 이 네 명의 왕 시대에 벌어진 격렬한 논쟁을 히스기야-요시야의 시각에서 기술한 결과다. 하여 이 시대 이전의 산당에 대한 기술도 이 시대의 시각에서 재평가된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렇다면 산당이라는 장소의 존치와 철폐를 놓고 벌인 정쟁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여기서 주지할 것은 이스라엘 부족동맹 시대의 가장 위대한 제사장이자 예언자였던 사무엘의 본거지가 실로의 산당이었다는 사실이다.(〈사무엘기상〉 9,19) 그러니까 요시야 왕실 사관들의 주장과는 달리 모든 산당이 우상숭배의 장소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아니 오히려 예루살렘 성전이 생기기 훨씬 전에 산당은 야훼의 전형적인 성소였다. 

    말했듯이 요시야 왕실이 문제시한 산당은 므낫세의 산당이었다. 그곳에서는 당시 유다국을 식민화하고 있던 아시리아 제국 풍의 일월성신 의례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요시야가 므낫세의 산당을 철폐한 것은 유다국 내에서 친아시리아 세력을 거세시키려는 의도였음을 추론할 수 있다. 

    이것은 역사를 좀더 앞으로 돌려야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므낫세의 아비이자 선왕인 히스기야는 당시 강력한 세력으로 메소포타니아 전역과 이집트 지역을 크게 위협하던 아시리아에 반기를 들었다가 처절하게 패배하여 항복하고 말았다. 이 전쟁 이후 히스기야는 그냥 왕위만 유지할 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식물통치자에 다름 아니었다. 이때 공동통치자로 그의 아들 므낫세가 등극하지만, 그 나이가 12세에 불과했으니 사실상의 권력은 아시리아를 지지하는 귀족당파가 장악했을 것이다. 필경 므낫세 모친의 가문은 친아시리아 정파의 유력 가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9년이 흘렀고 히스기야가 사망했다. 그리고 어린 므낫세는 어느새 권력의 핵심으로 성장했다. 이후 그가 단독 왕으로 다스린 기간은 무려 46년이다. 도합 55년간 왕으로 군림했던 이는 유다국은 물론이고 이스라엘국에도 전무후무하다. 그 긴 시간은 친아시리아 당파가 정국을 주도한 시기였다. 하지만 아마도 어느 때부턴가는 므낫세 자신이 완전히 권력을 장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동안 유다국은 친아시리아 동맹의 열렬한 일원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히스기야식 정치가 철저히 파괴되었으며, 적지 않은 히스기야의 잔당들이 비참하게 살해되었다. 한데 그가 죽은 뒤 아들 아몬이 즉위했다가 2년 만[각주:2]에 궁중정변으로 살해당하자, 민중적 농민세력(암하아레츠)이 들고 일어나 정변을 수습하고 다른 아들 요시야를 왕으로 추대[각주:3]했는데, 이때 요시야를 추대한 세력은 히스기야를 추종했던 반아시리아파 귀족들과 예루살렘 성전의 귀족들, 그리고 민중세력 등이었다. 하여 이 왕은 므낫세에 반대하고 히스기야를 계승하는 정책을 폈다. 

    여기서 요시야가 왕이 되는 데 민중적 농민세력이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이 특히 중요하다. 그것은 선왕 므낫세의 정치가 친아시리아적일뿐 아니라 반농민적이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필경 그가 피를 많이 흘린 통치자라는 점(〈열왕기하〉 21,15; 〈역대기하〉 33,9)은 정적을 가혹하게 처벌했을 뿐 아니라 반민중적 정책으로 많은 농민들이 희생되었다는 의미도 포함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히스기야-므낫세-요시야로 이어지는 산당을 둘러싼 갈등의 배후에는 대(對) 아시리아 정치만이 아니라 농민의 권익을 둘러싼 정치도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아하스-히스기야-므낫세-요시야로 이어지는 네 명의 유다국 군주 시대에 산당을 둘러싼 격렬한 갈등의 역사가 시종 ‘몰렉 제사’ 문제와 얽혀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열왕기하〉 21,6; 〈역대기하〉 33,6)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몰렉 제사는 절체절명의 긴박한 위기에 처한 이들의 제사 형식의 하나였다. 하지만 이런 인신제사는 대체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한데 시리아의 다마스쿠스 왕국과 이스라엘 연합군이 공격해 들어왔을 때 국가는 존폐의 위기에 놓였고 히스기야의 부친인 아하스 왕이 장자를 제물로 바치는 의례를 지냈다. 한데, 거짓말처럼 적들이 물러간 데다, 그 침공자들이 아시리아에 의해 역사의 무대에서 영원히 퇴장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것은 아시리아라는 제국이 유다를 구원하기 위해 야훼가 불러일으킨 제국이라는 신앙을 낳았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아브라함처럼 아들을 죽이기까지 스스로를 희생한 왕 아하스의 신실함 때문이라는 여론을 낳았다. 게다가 그는 유다국 역사상 처음으로 강국의 반열에 오르게 한 장본인이었다. 

    한데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점은 그가 유다국을 번성케 할 때, 이 나라의 기득권세력이 출현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물리적인 힘만을 갖춘 것이 아니라 권력을 장기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담론적 장치를 보유한 세력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대중의 수탈자임에도 대중의 지지를 유지할 수 있는 담론적 장치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산당’이라고 묘사된 ‘성소’다. 풍요제의를 드리고 온갖 사적 공적 재앙에서 사람들을 보호해주는 신의 장소가 성소인데, 그곳이 이들 기득권층의 이해를 위해 종사하는 사제들에 의해 장악되어 대중을 포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이 아하스의 인신제사를 칭송하고 대중의 수탈을 정당화하는 장소가 바로 산당이었던 것이다. 

    히스기야가 이 성소, 곧 산당을 철폐하고자 했던 것은 아하스의 정치, 곧 귀족 중심의 정치를 종식하려는 것을 의미했다. 한데 이것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아하스 대에 형성된 기득권 세력이 친아시리아파였고, 아시리아의 개입에 의해 반아시리아를 표방한 히스기야가 무력화되었기 때문이다.  

    므낫세의 부상은 친아시리아파의 승리를 의미했고 민중의 절망을 뜻했다. 그런 점에서 요시야의 반므낫세 정치는 곧 반아시리아 노선의 개혁세력이 부상했다는 것을 뜻하고, 대중 중심의 정치의 부활을 의미했다. 

     2013년 한국에서 산업화 시대의 전통적인 극우정부가 재집권했다. 복지를 주장했고 경제민주화를 부르짖었음에도, 이 정부가 기본적으로 기득권층을 중심으로 하는 체제를 지향하고 있다는 데 의심의 여지는 없다. 알다시피 박정희 정부 때 한국에서 산업화 시대의 기득권체제가 안착되었다. 이 정부는 본래 한국전쟁을 전후로 하여 압도적인 권력집단으로 부상한 군부세력에서 나왔지만, 1970년대 영동(강남권) 개발 과정에서 신흥부유층이 관료, 법조계, 정치계, 학계, 언론계를 아우르는 기득권세력으로 부상하게 되고, 군부와의 동맹체제를 구축하게 되면서 산업화 시대의 기득권세력이 형성된 것이다. 이후 민주화를 거치면서 전통적인 기득권 동맹이 와해되었다가 다시 군부와 기타 엘리트 세력이 재동맹을 맺고 등장한 것이 바로 박근혜 정부인 것이다. 

    이 정부의 탄생은 다양한 요인들이 우연히 서로 얽히면서 나타난 것이지만, 국가정보원이 특정 정치세력의 집권을 노골적으로 지원하여 선거개입을 했던, 이른바 ‘국정원 사태’는 가장 전형적인 산업화 시대적인 기득권체제의 행동양식이다. 그런 점에서 박근혜 정부는 박정희 체제의 복사판이다. 하지만 이 정부의 다른 점은 과거와는 달리 거대한 기획자가 없는 가운데 군부, 경찰, 언론 등이 서로 공명하면서 이 사건이 벌어졌다는 점이다. 지금까지의 정황으로는 그렇게 추정된다. 한데 박근혜 정부는 현재까지 줄곧 이래적인 가공할만한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다. 계속되는 정책적 정치적 실패와 서투름, 그리고 추문들이 끊이지 않음에도 지지율은 큰 변화 없이 유지되고 있다. 그것은 대중을 흡수하는 장소들, 7세기 유다국의 산당 같은 장소들을 기득권 세력이 견고히 유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른바 ‘극우적 대중정치의 장소’가 어느 때보다 잘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언론이 그 대표적인 장소다. 한데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또 다른 극우적 대중정치의 장소가 교회, 특히 대형교회라는 점이다. 교회는, 고도성장기에도 주된 대중의 공간이었지만, 아직은 극우적 대중정치의 장소로 일반화되지는 않았다. 한데 민주화 이후 교회에는 대중이 없고 귀족주의적 대중정치만 남았다. 그리고 그 무렵 극우주의가 대형교회를 주도했다. 하여 교회에는 산업화 시대적인 기득권체제의 수호자들이 들끓고 있다. 오늘 교회가 또 다른 우리 시대의 산당이 된 것이다. 하여 오늘의 히스기야에 의해, 오늘의 요시야에 의해 교회는 철거될 운명이 놓여 있게 되었다. □ (올빼미)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경향신문의 1월 22일 칼럼 <산당을 폐하라>(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1222059065&code=990100&s_code=ao048)의 원고를 보완수정한 글입니다. 앞으로 경향신문과 더불어 웹진 <제3시대>에서도 연재될 예정입니다. [본문으로]
  2. 유다국의 연대계산법에서 2년은 햇수계산방식에 따른 것이다. 그러니까 극단적으로 말하면 한 해의 마지막 날에 재위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새해가 되면 재위 2년째로 계산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몬이 2년 만에 살해되었다는 정보로 24개월 안에 살해된 것인지 며칠 만에 살해된 것인지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아무튼 그는 재위한 지 얼마 안 돼서 궁중암투의 희생자가 되었다. [본문으로]
  3. 민중적 농민세력이 아몬이 죽임당한 정변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이 이들이 요시야를 추대하는 주역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본문으로]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바울신학가이드14]



지젝과 바울(I)


- 사람들, 지젝에게 갈 길을 묻다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지난 웹진에서 무어를 통해 이야기했듯이 다시금 인문학에서 성서 읽기가 시작되고 있다. 성서가 이천년의 시간동안 살아남은 이유는 무엇보다 서구 기독교의 정치적 경제적 힘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패도의 정치 폭력에 신음하던 자들의 텍스트 또한 성서였다. 미국 자동차 여행중에 머문 값싼 허름한 인터넷도 되지 않는 방에서 심심한 마음에 서랍장을 열었을때 언제나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보인 책이 성서이듯, 성서의 생명력만큼은 쉽게 폄하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단지 그러한 생명력만으로 작금의 인문학의 성서읽기의 이유를 찾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성서 읽기를 독려하는 진보지식인들은 여전한 기독교의 힘 때문이라도 진보적 성서 해석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 말도 옳은 말이지만 지금의 현상을 설명해 줄 수는 없다. 왜 현대의 담론을 이끌어가는 내로라 하는 철학자들이 성서와 기독교를 다시 말하는지는 그들 자신들에게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의 방식에서 이해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지난 웹진에서 지적했듯이 과연 그러한 읽기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대답해 보아야 한다.  

   이번 웹진에서는 기독교에 대해 흥미있는 이론을 전개하는 학자중에 가장 대중에게 잘 알려진 슬로베니아의 기인, 슬로야보르 지젝(Slavoj Žižek)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그의 기독교에 대한 저서인 [죽은 신을 위하여] (Puppet and the Dwarf)에 대해서는 다음 웹진에서 다룰 것이고 여기에서는 그의 기본적인 문제의식과 사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먼저 밝히지만 나는 철학을 전공한 학생도 아니고 지젝에 대해서는 과문하다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웹진의 내용이 지젝에 대한 처음과 끝이 아니다. 또한 여기에서 말해지는 라깡, 칸트, 헤겔, 알튀세르등의 인물들은 오직 지젝이 말하는 그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밝혀두고 싶다. 더욱이 그러한 지젝의 말을 필자가 오해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해둔다.  

    본 글은 지젝을 미국에서 스타로 발돋움하게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를 기본으로 다루고 있다. 다음 웹진에서 다룰 지젝의 기독교 담론을 이해할 만한 수준까지만 이야기하고자 한다. 필자가 생각하기로 지젝이 유명해진 대표적인 이유는 그가 자신의 독창적인 이론을 고집하는 학자가 아니라 이전의 대가들의(칸트, 맑스, 헤겔, 라깡) 충실하고도 삐딱한(?) 해설자이기 때문이다. 지젝의 시대에는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이들을 현실의 담론 속에서 되살려서 다시금 재해석하고 그들의 논리를 이용하여 이른바 포스트모던이나 후기구조주의에 맞서는 기백은 그의 책을 읽는 독자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나오게 한다. 그럼 이러한 감탄사의 이유들을 알아보도록 하자.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의 서론에서 밝히듯이, 지젝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가지이다. 첫째, 라깡은 후기구조주의자가 아니다. 둘째, 라깡을 통해 헤겔의 변증법을 새롭게 이해한다. 셋째, 앞의 두개의 결과로 우리는 새로운 이데올로기 이론을 정립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본다. (Zizek 2009, xxx)


1. 라깡은 후기구조주의자가 아니다.


    후기구조주의의 특징을 간단하게 말하면, 리얼리티, 실재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데리다식으로 말하면 실재를 건져올리기 위해 언어를 이용하여 닻을 내리면 그 닻은 실재의 대상과 닿는 순간 끊임없이 미끄러져 내려간다. 이리 저리 잡히는 것은 계속되는 언어의 연쇄일뿐 실재는 그 안에 없다. 그러므로 진리란 없다. 모든 개념은 ‘차이와 반복’을 통해 존재하는 것 처럼 보일 뿐이다. 끊임없이 미끄러지니 반복한다고 언제나 같은 것이 생겨나지 않는다. 즉, 차이와 반복을 통해 계속 생성하는 운동을 지속한다. 그러나 이것은 언어로 규정된 세상이다. 구조주의가 실재하는 세계가 하나의 언어적 구조를 통하여 나타나 우리가 사는 사회를 형성되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달리 후기구조주의는 구조자체도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봄으로써 우리에게 존재하는 사물과 이별할 수 밖에 없음을 역설했다. 비록 당신 앞에 사과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사과라는 언어로 규정된 먹어보면 어떤 감각으로 밖에 알 수 없는 것이다. 당신 앞에 놓은 것이 진정 무엇인지 영원히 알 수 없다. 

    이제는 어느 정도 식상한 비판이지만 지젝의 후기 구조주의와 데리다에 대한 비판은 그것이 지나치게 이론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지나치게 이론적이라는 것에 있다. 헤겔식으로 보면 후기구조주의의 코멘터리는 같은 이론적 토대에서 무한적인 반복의 해석을 제공할뿐, 어떤 새로운 것을 생산해내지는 못한다. (ZizekSlavoj 2009, 174) 이에 대해 맑스주의 비평가인 프레드릭 제임슨은 후기 구조주의의 이러한 형식을 맑스주의적으로 풀어내어 후기-자본주의의 비평적 토대를 만들었는데, 차이와 반복을 중심으로 한 해체주의적 독법자체가 후기-자본주의의 징후라고 비판한다. 지젝은 라깡은 후기구조주의자가 아님을 주장한다. 

    지젝은 이러한 후기구조주의의 이론을 ‘deadlock’(교착상태)라고 이름한다. (ZizekSlavoj 2009, 174) 지젝의 거의 대부분의 저작은 이 교착상태를 어떻게 돌파할 것이냐에 중점을 두고 있다. 다음 웹진에도 다루게 되겠지만 기독교에 대한 지적의 독법 또한 과연 기독교에 이 교착상태를 돌파할 어떤 것이 있느냐에 지젝은 관심한다.

     Real, 가질 수 없는 너.

    지젝이 리얼이라고 말하는 것이 위에서 말한 실재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데리다는 메타랭귀지라고 부른다. 후기구조주의와 데리다는 이 메타랭귀지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라깡 또한 이 리얼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노래의 가사 처럼 ‘못 가지는 너’ 가 아니라 ‘가질 수 없는 너’이다. 즉, 가질 수는 없지만 갖고 싶다는 욕망은 꼭 남기는 것이다. 지젝은 데리다가 결국 ‘가질 수 없는 너’를 포기하기 위해 메타랭귀지를 포기하고, 그 결과로 모든 언어를 메타랭귀지로 만들어버리게 되었다고 말한다. 마치 물질 뒤에 존재한 신은 인간으로서는 영원히 만날 수 없다!라고 말해버리면 (신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모든 물질이 신이 될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범신론) 라깡은 이와 달리 ‘결핍’ 즉, 가질 수 없다라는 것을 그의 관점의 핵심으로 놓았다. (Zizek 2009, 176) 바로 내가 너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그 어떤 것보다 더 실재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언어는 대상을 가리킨다. 소쉬르는 사인의 구조를 통하여 대상-언어의 관계에서 이른바 언어만 따로 떼어내어 사인(언어)=기표(signifier)+기의(signified)라는 것을 만들어냈다. 즉, 언어는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 없이도 홀로 존재할 수 있는데, 바로 그것이 의미하는 어떤 것과 목소리와 같은 물질적 요소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쉬르는 사인이라는 것을 독립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었고 근대 언어학의 아버지가 되었다. 만약에 여기서 사인들이 자유로이 돌아다니는 세계를 언어의 세계, 또는 상징의 세계라고 한다면 문제는 이 언어들과 실재들을 연결할 수 있는 지점을 찾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데리다는 그것이 불가능한 것이라 규정하고 대상과 언어의 관계를 해체시켰다. 지젝의 라깡은 이 언어의 세계, 상징의 세계에 자유로이 떠돌아다니며 서로를 잊는 거미줄과 같은 세계의 자리를 잡는 하나의 중요한 시그니파이어가 있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것이 결핍이다. ‘가질 수 없는 너’의 결핍은 비록 가질 수는 없지만 ‘너’의 자리를 떠나지 않고 굳게 서서 다른 거미줄들을 안정시킨다. 그것은 ‘결핍’이므로 그 안에 아무것도 없다. 이것이 바로 라깡이 말하는 Object a이다. 기의 (signified)가 없는 기표(signifier)이다. (Zizek 2009, 177)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동자와 같이 충만으로 가득차서 모든 세상의 운동의 원인이 되는 ‘신’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텅비어서 결핍된 아무런 의미가 그 안에 없는 어떤 기표이다. 이 기표가 표시하는 것은 실재 대상에 대한 정보가 아니다. 거기에 무엇인가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는 결핍이다. 이 결핍이 가르쳐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없다’는 것 뿐이다. 그러나 그 ‘없다’라는 것이 명확하게 존재하므로 ‘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은 그저 없다는 후기구조주의의 언술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는 완전히 다른 말이 된다. (Zizek 2009, 180) 즉, 라깡을 오해한 것이라고 지젝은 말한다. 여기에 지젝이 자주 사용하는 중요한 단어를 하나 기억해 놓아야 하는데, 바로 Kernel이란 단어이다. 이 단어의 정의는 ‘핵심’을 뜻한다. 지젝은 핵심이란 표현을 쓸때, kernel과 core를 쓰는데 커널이란 표현은 바로 결핍된 상태 자체가 핵심이 되는 것을 뜻한다. (Zizek 2009, 181) 이 표현은 다음에 기독교에 대해 ‘perverse core and subversive kernel’을 할때 다시 설명하겠다. 이 기의가 없는 기표인 ‘대상 A’(object a), ‘리얼’(실재), 또는 결핍된 기의(signified)가 없는 기표(signifier)와는 다른 ‘더 리얼’(the Real)이 있다.


     the Real, 바로 '너'


    바로 ‘너’이지만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이 ‘더 리얼’이다. 원래 ‘더 리얼’은 충만함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이것을 상징계 (Symbolic order: 인간의 세계라고 하는 것이 가장 쉬운 이해일 것이다.)로 가져오기 위해 상징화할때 그 충만함은 상징을 거치면서 결핍이 된다. ‘너를 가지기 위해 너라고 불러서 데리고 오는 순간 가질 수 없는 너가 된것이다.’ 이 결핍은 구멍으로 나타나있고 이 구멍을 중심으로 상징계는 구조화되어있다. (ZizekSlavoj 2009, 192) 여기서 잠깐, 지금까지의 내용이 정치사회적 관점에서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말해보자. 

    혹자는 반대할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시대를 인류의 마지막 시대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본주의가 마지막 경제체제이고 자본에 여지없이 휘둘리는 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 이상의 것이 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인류의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인 이유는 더 이상의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혁명의 시대가 오지 않을 것이다. 이는 자본이 만들어낸 가난과 불법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며, 정치 참여를 통한 변화는 그전 하나의 미봉책으로 인류의 생존의 기간을 좀 더 연장할 뿐이다. 그렇다면 철학은 더 이상 설자리가 없다. 현실 경제학과 정치학과 냉험한 현실주의만이 대안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종교는 그저 엄난한 삶속에서 잠깐의 안식을 제공하는 안식처로서 오직 죽음 이후의 세계를 반복할 것이다. 자, 이제 소위 빅브라더 (세상을 지배하는 인물)은 우리 앞에 앉아서 비릿한 웃음과 함께 선택을 강요한다. 인간의 삶은 구조속에서 극히 제한된 선택만을 할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해야하는 것이 되었다.
    윗 단락의 말들은 원래는 20세기가 저물기전에 이미 인문학에서 말하여지던 것들이다. 불과 몇십년이 되지 않아 우리는 표현을 달라졌지만 이와 비슷한 말들을 흔히 접한다. 흙수저, 금수저, 열정페이, 유리천장, 정치의 몰락, 전지구적 자본주의속에 한치앞도 볼 수 없는 경제의 흐름등. 20세기말에 철학적 담론들은 이러한 현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인간은 구조속에 갇혀진 존재다. 솔직히 말하면 인류의 역사는 언제나 그러했다. 근대이전에 인간은 계급이란 명확한 카테고리로 규정된 존재였다. 소작인 아버지밑에서 태어났다면 소작인일 뿐이다. 그 인생에 맞게 쓸데없는 생각없이 살아가면 된다. 근대가 되자 인간은 마치 자유와 인권을 얻은듯이 생각했다. 이에 칼 맑스는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가 그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인간에게 자유를 주는 척한 것이고 실상은 노동자라는 새로운 계급을 만들었고 민주주의라는 그럴싸한 포장으로 좋은 물건인양 보이게 했다. 산업기술의 발전은 이러한 자본주의의 내적모순을 제 3세계로 이동시켰고 빈부의 격차는 국가와 국가간에 계층과 계층간에 만연한 현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물어야한다. 과연 이 세상을 뒤집을 수 있는가? 새로운 정치는 가능한가? 새로운 삶은 가능한가? 이 질문을 철학적으로 물으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된다. 인간은 자신이 속한 사회구조에서 요구하는 것과는 다른 어떤것을 상상하고 꿈꾸고 또한 그렇게 살 수 있는가? 불행하게도 ‘그렇다’라고 말하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현실적으로도 그렇지만 담론적으로도 그러하다. 인문학은 담론으로 말하는 것이니.
    ‘그렇다.’ 또는 ‘가능하다’라고 말하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것들이 있다.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하는 것은 이른바 후기구조주의라고 불리우는 거대한 이론에 맞서야한다. 바로 이것을 감행한 사람이 지젝인 것이다. 후기구조주의의 가장 강력한 주장은 ‘실체란것은 존재하지 않는다.’이다. 즉, “지금의 너는 네가 아니다. 오로지 너라고 누군가가 만들어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우리가 생각했던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단어, 언어일 뿐이다. 언어로 이루어진 세계. 이것을 상징계(Symbolic order)라고 이름하자. 그것에 반대되는 것, 우리가 언어의 힘을 빌지 않고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의 세계는 상상계(imaginary order)라고 부르자. 원래 이러한 생각의 대표적 철학자는 바로 임마누엘 칸트이다. 우리가 고등학교 시절 “개념없는 직관은 맹목이고, 직관없는 개념은 공허하다.”라는 말을 뜻도 모르면서 외우던 그 학자이다. 바꿔말하면 언어없는 생각은 맹목이고, 생각없는 언어는 공허하다..라고도 바꿀수 있다. 즉 칸트는 생각과 언어를 결합시킴으로써 기본적으로 사물 그 자체 thing in itself 를 우리의 앎의 차원에서 분리시켰다. 즉, 우리는 실재 세상과는 분리된 삶을 사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사물의 세계를 그저 의미없는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물의 세계는 단지 물질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를 현실이라고 바꾸어보면 그 현실은 노동자의 눈물이 서려있는 곳이며 노동의 가치와 인간의 삶의 가치들이 무가치해지는 상처입은 세계이다. 그렇다면 후기구조주의를 벗어나려는 지젝의 목적은 바로 어떻게 현실을 바라볼 것인가? 아니 우리가 과연 현실을 볼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자, 이제 지젝의 책,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의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불리우는 라깡의 욕망의 그래프를 통해 이 결핍이라는 것이 인간사회에서 무엇을 생성해 내는가를 살펴보자.

2. 라깡의 욕망의 그래프


그래프 I

     그래프 I 에 대하여
    지젝은 여기에 의미의 소급성이라는 제목을 붙인다. 대문자 S에서 S’로 가는 것은 시그나파이어의 운동이다. 즉, 기표가 자유로이 움직이고 있다. 운동의 시작에 표시된 삼각형(∆)은 이른바 신화적 욕구, 즉 원인을 물을 필요없는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묻지말자. 중요한 것은 어떻게 주체(Subject)가 상징계를 만나 (즉, 기표의 운동을 만나) 자신의 이름을 얻고 다시 귀환하느냐이다. 상징계를 세모로부터 출발해 다시 돌아오면서 주체는 빗금친 $가 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이 운동은 과거로의 소급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즉 지금 상징계의 기표의 운동을 뚫고 들어가더라도 그 의미를 획득하는 것은 과거의 기표의 운동을 뚫고 나오면서이다. 즉, 현재의 주체는 과거에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된다. 어떤 의식의 운동을 따라 기표의 세계에 도착했을때 만나게 되는 기표(signifier)에 의해 주체는 호명되어진다. (ZizekSlavoj 2009, 112) 예를 들어, 모태신앙으로 교회를 다닌 사람은 교회에 들어선 순간 신앙인이라는 또는 기독교라는 거대한 기표에 의해 이름 불러워진다. 그 이후의 그가 만나는 여러 기표들, 믿음, 소망, 사랑, 삶의 의미, 인간의 자유등은 이미 모두 스스로 결정되어있다. 마치 그는 자신이 스스로 그 의미들을 찾아간다고 생각하겠지만 위의 운동과 같이 과거에 의미 결정되어져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프로이드의 케이스들에 비교할 수도 있다. 어떤 장소에 도착했을때 갑자기 겁이나고 답답해지는 것은 그 장소에서 어렸을때 폭행을 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 장소의 의미는 자신이 깨닫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이미 과거에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프 II(Zizek Slavoj 2009, 114)

    두번째 그래프는 좀 더 복잡한데, 지젝은 ‘소급의 효과’ (the effect of retroversion)이라고 부르고 있다. 먼저 빗금친 $가 원쪽으로 와서 운동을 시작한다. 첫번째 그래프에서 어떻게 주체가 되기위해 호명되고 상징계를 통과해 빗금친 $가 되는지를 말했지만, 사실 이미 주체는 빗금쳐저, 상징계에서 호명되어 있다. 일단 기표(Signifier)의 운동은 $를 두번 만나고 목소리 (Voice)가 된다. 여기서 목소리는 운동 이후에 남은 나머지를 뜻한다. 이 그래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타자 (O:the big Other)인데 처음에 예를 든 것이 기독교였으니 기독교의 가치가 지배하는 사회를 상상해보자. 바로 상징의 코드(Symbolic code)를 대변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대타자, 기독교 사회에서는 기독교라는 코드를 중심으로 모든 기표들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s(O)는 기표들이 대타자에 의해 결정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빗금친 $는 대타자를 뚫고 대타자에 의해 이미 결정된 기표를 뚫고 다시 귀환한다. 여기서 귀환한 주체는 대타자에 의해 동일시된 I(O)[ego-ideal:상징적 동일시]가 된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호명된 주체, 빗금쳐진 주체$는 대타자를 만나고 다시금 대타자에 의해 설정된 기표들을 만나 귀환하면서 대타자와 동일시(identify)된다. (Zizek 2009, 115) 즉, 대타자에 따라 자신을 규정하게 되는데, 쉽게 설명하면 이제 주체는 자신이 바라는 어떤 것이 되지 않고 대타자가 바라는 어떤 것이 되고자 한다. (원래 주체가 무엇을 바라는지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을 뿐더러 알 수도 없다. 주체 자체가 기표와 대타자의 만남에 의해 나타난 것이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교회에 다니고 신앙을 가지면서 나는 어떤 좋은 신앙인이 되고자 한다. 이때 주체는 마치 자신이 원해서 좋은 신앙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사실 그는 대타자(O)에 눈에 비친 자신을 상상하면서 대타자의 눈에 좋은 신앙인을 훌륭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좋은 신앙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라깡의 말인 “욕망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라는 표현이 여기에 들어맞으며, 이것이 바로 상징적 동일시(I-ideal)의 의미이다. (Zizek 2009, 117)

   중간 부분 왼쪽의 e란 상상적인 자아 ‘imaginary ego’이고 i(o)는 상상적 동일시를 뜻한다. (Zizek 2009, 119) 대타자를 통해 동일시[I(O)]하는 것과는 달리 상상적 동일시 (ideal-ego)는 타인의 무엇을 부러워 하여 모방하는 것을 뜻한다. 빗금친 주체 $와 대타자(O)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상상적 동일시[i(o)], 또는 타인을 모방하는 것을 통해 자아(e)를 형성할 수 있지만 주체는 끊임없이 대타자를 통해 상징계로 나아간다. 그것이 사회에서 ‘나’라는 주체로 살아갈 이름을 얻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프 III(Zizek Slavoj 2009, 124)
    ‘케보이’ (Che vuoi?)가 나타나는 곳이 바로 그래프 III에 보이는데, 바로 “뭐라구요? 나에게 원하는것이 뭐라구요?”라고 해석할 수 있다. (Zizek 2009, 123) (이경재 2009) 그래프 II처럼 빗금쳐진 주체가 언제나 아무런 문제 없이 상징계에서 동일시되어, 즉 행복한 목사가 되어 충실하게 살아간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라깡은 언제나 상징계에서 동일시되는 과정에서 어떤 잔여가 남는다고 말한다. 또한, 그 잔여 없이 상징적 동일화의 과정은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사회에서 어떤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나는 사회가 원하는 무엇인가가 되어야 하고 그 때에 어떤 잔여가 남는다는 것이다. 그 남아있는 잔여가 주체에게 욕망(그래프에서 소문자 d)을 선사하고 주체는 대타자와의 만남에 만족하지 못하고 대타자에게 끊임없이 묻기 시작한다. “도대체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 겁니까?” 여기서 욕망(d)는 라깡에 따르면 욕구(need)와 요구(demand)와 구별된다. 욕구란 생물학적 필요를 뜻하는 것으로 배고프면 먹어야 하는 욕구를 뜻한다. 요구란 그러한 욕구가 상징계를 통해 표현된 것이다. “먹을 것 좀 주세요.”라는 것은 바로 ‘배가 고프다’는욕구가 타인에게 전해지기 위해 요구로 바뀐 것이다. 그런데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달라고 했는데, 스파게티와 피클이 나왔다고 생각해보자. 주체는 순간적으로 묻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원한 것일까?’ 또는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이 먹고싶어서 짜장면을 시키고 짜장면을 먹으려는 순간, 옆 테이블에 짬뽕을 맛있게 먹고 있는 사람을 보았을때, ‘짬뽕을 먹을걸…’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나의 욕구가 요구로 바뀌었을때 주체의 요구는 언제나 욕구를 완전히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내가 먹고 싶은 말로 다 할수 없는 그 무엇을 완전히 채워줄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가 최선을 다해 어떤 짬뽕이 먹고 싶다고 말하더라도 타인은 내 마음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결국 나도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확실히 모르고, 비록 말로 하더라도 그것을 타인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잔여가 생긴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시켜먹고도 채우지 못한 그 잔여물이 바로 욕망(desire)이다. (이경재 2009, 206) 그러므로 여기에서 욕망(d)라는 것은 주체가 대타자(the big Other)가 무엇을 원하는지 완전히 알 수 없어서 남겨지는 잔여, “나한테 정말로 바라는게 뭐예요?”의 ‘케보이’로 남는 것이 욕망이며, 그 욕망의 곡선은 결국 세번째 그래프의 끝에서 ($<>o)에 멈추게 된다. 바로 빗금쳐진 주체와 대타자사이의 끝없는 질문이 계속되는 곳이다. “나한테 무엇을….” 지젝은 아브라함의 예를 들면서 유대교는 이처럼 끊임없이 주체가 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를 물어야 하는 ‘불안의 종교’라고 말한다. (ZizekSlavoj 2009, 128)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바치라고 했을때, 정말 바치라는 이야기인가? 왜 나를 택했나? 왜 이스라엘을 선택했나? 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빚진자가 되었나? 끊임없는 질문이 연속되는 상태라는 불안이 계속된다. 하나님을 직접 만나지 못한다면 그 답은 찾아질 수 없다. 그 대답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환상(fantasy)이며 ($<>o)는 라캉의 환상공식이다. 그래서 만들어지는 것이 마지막 완성된 욕망의 그래프이다.



    완성된 그래프(Zizek Slavoj 2009, 136)

    맨위 왼편의 S(O)에서 시작해보자. 처음에 리얼과 더 리얼에 대해 이야기한것을 상기하자. 더 리얼(the Real)은 절대 가질 수 없고 그것이 상징계로 들어오면 리얼(real)이 되는데 이 리얼은 충만함을 모두 잃어 버리고 결핍된 기표 (Signifier)로써 상징계를 지탱하는 누빔점(nodal point)가 된다고 하였다. 이 텅비어 있는 기표(Signifier)는 프로이드식으로 말하면 남근이며 아버지의 법이다. 상징계를 지탱하고 있는 아버지의 법은 금지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언제나 충만하지 못한 결핍의 상태이므로 그 금지를 어기려는 의도가 생겨나게 되는데 이를 라깡은 향유(Jouissance)라고 부른다. 애초에 충만했던 더 리얼(the Real)이 리얼(real)이 되면서 그 충만성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향유(쥬이상스)는 그 충만성을 찾는 인간의 또 따른 욕망 운동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비어있는 대상 a(object a)를 찾아 계속운동하여 다시금 $<>D에 다다른다. 여기서 D는 상징적 요구(Symbolic demand)를 말한다. (ZizekSlavoj 2009, 138) 주체에게 요구된 상징적 요구를 뚫고 주체의 욕망의 그래프에 귀속되지 않은채 거세된 결과를 낳는 향유의 운동은 주체에게 더 리얼(the Real)에 대해 끊임없이 속삭이고 상징계에서 그것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주체에게 끊임없이 알려준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판타지이다. 주체를 다시 불안하지만 텅비어있는 S(O)에 귀속시켜 주는 것이 바로 라깡의 판타지 공식인 $<>o이다. 바로 주체와 상상적 타자가 결합되는 곳이다. 바로 이 판타지가 대타자(O)의 결핍을 매워주고 리얼(real)의 결핍을 매워주고 향유에 의해 나타나는 충격을 감싸준다. 중요한 것은 이 판타지야 말로 이 그래프의 중심이며 불안한 주체를 안심시켜 다시금 상징계에 머물게하고 상징계의 기표 [s(O)] 에 안전하게 안착하게 한다. 바로 이 판타지적 효과에서 지젝은 이데올로기 이론을 뽑아내는데 이는 다음 웹진에서 다룰것이다. 판타지에 대하여 지젝은 ‘불안의 종교’인 유대교에 반해, ‘사랑의 종교’인 기독교가 바로 이 환상 효과를 사용하여 주체의 불안을 없애고 안정화 시켰다고 말한다. 기독교의 사랑은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으로 아버지 신의 사랑을 확증함으로써 주체의 불안을 사랑으로 채운다. 즉, 대타자가 자신을 내어줌으로 주체의 비어있는 불안과 욕망을 채워주는데 그 순간에 대타자의 빈 공간또한 이미 주체 안으로 들어왔기에 해결되는 것이다. (ZizekSlavoj 2009, 130) 이를 지젝은 정확하게 하나의 판타지라고 보았고 그 판타지가 작동함으로써 비어있는 대타자(O)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았다. 이상 짧게 살펴본 지젝의 욕망의 도식을 필자는 ‘만능 도식’이라고 부르는데, 지젝의 저서에서 애매한 부분을 만날때는 이 도식을 상기하면 쉽게 풀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다음 웹진에서는 이 도식을 바탕으로 이데올로기를 새롭게 이해하고 어떻게 맑스와 헤겔을 통해 지젝이 제시하는 대안을 살펴보자.



<참고문헌> 

이경재. 욥과 케보이.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2009. 

Zizek Slavoj.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London;New York : Verso, 2009.


ⓒ 웹진 <제3시대>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남한의 사회적 분열과 "비시민"의 출현에 대한 고찰(2)


- 민중신학과 탈식민주의의 결합을 통하여




 황용연

(Graduate Theological Union 박사과정,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객원연구원)


    1. 서론


    2. 한국 전쟁 이후 남한의 "반공 민족주의"라는 사회적 합의의 형성과 붕괴

     (1) 남한의 반공 민족주의의 형성


     (2) 남한 국가의 형성과 근대화에 미친 미국의 영향 


     (3) 남한 사회의 사회적 균열의 시작 – ‘민중’의 출현

    근대화 이론은 남한 사람들의 경제적 근대화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켰지만, 동시에 민주주의에 대한 욕망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근대화 이론에 근거하여,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거나 혹은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 사례들이 등장했다. 예를 들어, 이기백은 한국 역사를 ‘지배계급의 확장’의 역사로 파악하였으며, 그 귀결점이 ‘민중’이라고 주장했다.[각주:1] 이기백의 관점에서는, ‘민중’은 ‘자유민주주의의 주체’였으나, 민중신학에서는 그의 ‘민중’ 개념을 급진화하여 남한의 사회적 저항 전통으로서의 ‘민중 전통’을 정립하는 근거로 활용했다.[각주:2] 또한, 자본주의와 신분제 철폐 등의 맹아가 이미 조선 말기에 존재했었다는 내재적 근대화론을 주장한 역사학자 강만길 역시, ‘민중’을 한국사에서 그들의 저항을 통해 근대성을 진전시키는 주체로 규정했으며, [각주:3]민주화운동에도 이기백보다 더 열심히 참여했다. 

   민중은 잘 정의된 개념이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 모호성이 다양한 사회운동을 포괄하는 데에는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했다.[각주:4] 그래서, ‘민중’에는 정치적으로 억압받는 사람들, 사회적/문화적으로 소외되는 사람들, 경제 발전의 이익에서 배제되는 사람들이 모두 포함될 수 있었다.[각주:5] 

   또한, 민중은 한국 민족의 ‘실체’로 이해되었는데,[각주:6] 이는 ‘민중’이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이해되었음을 시사한다.[각주:7] 이 때, 민중은 박정희 정부가 구축한 민족주의를 극복하는 대안적 민족주의의 주체로 상상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모호성과 더불어, 이 ‘한국 민족의 실체’라는 이해 또한, 민중 개념이 다양한 사회운동을 포괄할 수 있게 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 

   민중을 ‘한국 민족의 실체’로 이해할 때, 이는 민중이 “식민주의, 외세 개입, 내전,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북한의 권위주의, 남한의 권위주의적 군사독재, 그리고 남한과 북한 사이에 계속되는 대립과 갈등”[각주:8] 등의 한국 근대성의 부정적 효과에서 야기되는 ‘실패’[각주:9]를 직접 겪어온 주체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다른 한편으로, 박정희 정권에 저항하던 저항 엘리트 대다수는, 민중이 경제적/사회적 진보를 달성할 생산력의 주체이나 한국 경제의 종속적 구조와 이 구조를 유지하려는 정부 정책 때문에 자신들의 진정한 힘을 억압당하고 있다는 견해를 견지하기도 했는데,[각주:10] 김보현은 이런 견해를 이 저항 엘리트들이 박정희 정부와 근대화 비전을 공유하고 있는 증거라고 비판했다.[각주:11] 이 때, 민중 개념은 남한 근대화 과정의 부정적 측면을 반영하긴 하나, 근대화의 긍정적 측면까지 거부하는 개념은 아니게 되며, 도리어 박정희 정부 하에서 남한 사람들이 경험하던 ‘종속적’ 근대화와는 다른 ‘진정한’ 근대화에 대한 욕망을 담고 있는 개념이 된다. 또한, 민중론자들은 민중과 맑스주의의 프롤레타리아를 구별하는데, 이 구별의 주 목적은 이들이 공산주의자라고 몰릴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지만,[각주:12] 동시에 이들이 일정하게 반공주의에 동조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각주:13] 

    여기서, 앞에서 지적한 민중 개념의 모호성을 남한 사회운동의 발전과정과 연관지어 살펴 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남한 사회에서 분단과 한국 전쟁으로 말미암아 그 이전까지의 사회운동이 붕괴한 이후, 흔히 ‘민중운동’이라고 불리우던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등의 사회운동이 새롭게 형성될 때, 이 운동들은 정당, 노동조합, 농협 등의 국가/시민사회의 제도 바깥에서 형성되게 마련이었다. 그리하여, 앞에서 논의한 대로, 남한 사람들의 민주주의와 근대화에 대한 의식과 담론이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서 형성되는 동안, 그 담론들은 앞에서 언급한 새로운 민중운동의 출현을 전혀 반영하지 못했다. 예를 들면, 민중운동의 대표적 사건 중의 하나인 전태일 열사의 분신자살은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박정희 정부의 ‘종속적’ 근대화에 맞서는 이상적 근대화를 추구하던 지식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는데, 이는 자신들이 전태일이 분신하기 전에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면, 전태일 사건에 맞닥뜨렸을 때, 이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민주화 담론이 전태일과 같은 노동자들의 고통의 현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는 것을 그때서야 깨달았다는 것이다.[각주:14] 민중운동이 이렇게 국가/시민사회/학계의 제도 바깥에서 형성되는 현상을 민중운동의 ‘외부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 ‘외부성’이 민중 개념이 ‘모호성’을 띠는 것으로 보이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민중 개념에 내재한 이러한 ‘외부성’은 남한 사회의 저항 담론이 앞에서 논의한 ‘미국의 범위’의 한계를 넘어서야 할 필요성과 가능성을 보여 준다 하겠다.


     (4) 남한 사회의 내부 합의의 동요와 붕괴

     1979년 박정희의 죽음으로 그의 정권이 붕괴한 후,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의 쿠데타에 대한 광주 시민의 저항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천명의 시민이 학살당했다. 그 결과, 전두환 정권은 출발선부터 그 정당성에 심각한 하자를 갖게 되었다. 또한, 광주항쟁 이후, 미국은 남한군의 작전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신군부의 진압과 학살을 막지 않았다는 점에서, 전두환 정권의 후원자라는 의심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는 반미운동이 한국 사회운동의 주요 주제로 떠올랐고, 이에 따라 남한 사회 내의 미국의 헤게모니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시기 남한 사회운동의 담론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어떠한 호감도 보이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였으며, 학생운동가들 중 상당수와 노동운동가들 중 일부는 남한 사회의 대안을 맑스주의 (맑스레닌주의)와 주체사상 등에서 찾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한 맑스주의 이데올로기를 전적으로 수용하지는 않은 대다수의 사회운동가들 역시도, 반공주의와 북한에 대한 적대감을 버리고 민족주의 성향의 통일론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전두환 정권은 남한 사람들의 민족주의적 경향에 영합하여 헤게모니를 구축하려 했는데, 영합의 방법으로 선택된 것은 경제성장을 지속시키고 올림픽을 유치하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정책은 전두환이 그의 동료 노태우에게, 당시 민주화운동 측의 요구인 대통령 직선제를 하지 않고도 정권을 승계하는 것을 정당화하려는 명분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전두환의 이러한 시도는 6월 항쟁으로 좌절되었고, 대통령 직선제가 실시되었으며, 그 직후 7월부터는 3개월간 전국적인 노동자 대투쟁이 있었다. 자유주의 야당과 사회운동의 분열로 인해1987년 직선제 대통령선거에서 노태우가 당선되고, 또한 1991년 구사회주의권의 붕괴로 맑스주의 이데올로기의 영향력이 약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87년 이후로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이 성장하고 정부의 억압이 약해졌다. 이로 인해 1987년은 일반적으로 남한 사회의 민주화가 시작된 연도로 인정받고 있다.

     민주화로 인해 시민과 노동자의 목소리가 커지고 계속된 경제 성장으로 말미암아 재벌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남한의 정부 통제 경제 시스템은 조금씩 힘을 잃어갔다.[각주:15] 또한, 남한의 국제경제적 지위가 상승함에 따라, 재벌과 미국 등의 양편에서 시장개방과 규제철폐의 압력이 심대해졌다.[각주:16] 군사정부의 후계자들과 자유주의 야당 일부의 협력으로 형성된 김영삼 정권은 “한국병 치유”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개방경제와 세계화의 경향에 조응하는 새로운 경제 시스템을 구축해 보려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고, 이로 인해 금융산업 규제 철폐를 틈탄 재벌의 과잉투자와 과잉확장을 막을 수 없었다.[각주:17] 결국 1997년 김영삼 정권은 IMF 구제금융을 신청하게 되었고, 그 대가로 IMF의 프로그램에 근거한 신자유주의적 경제개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러한 경제 붕괴는 양면적인 결과를 낳았는데, 한편으로는 자유주의 야당의 지도자이며 오랜 기간 ‘빨갱이’로 치부되기도 했던 김대중이 1997년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남한 사람들의 집단적 기억 안에 ‘경제성장을 성취한 지도자’로 각인되어 있던 박정희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1961년 박정희의 쿠데타 이후 자유주의 세력의 첫 집권이었던 1997년 김대중의 집권은 반공발전주의의 합의에 근거한 과거의 경제/사회 시스템의 총체적 파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자유주의 정부조차도 IMF의 요구에 따른 신자유주의적 경제개혁의 수행을 피할 수 없다는 의미가 되기도 했다.


     (5) 남한 민족주의의 분화와 분열

     1997년 IMF 구제금융 신청과 김대중의 집권이 있은 후, 보수주의 진영과 자유주의 진영 양 편 모두가 신자유주의적 경제개혁에 동의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진영 사이의 정치적 갈등은 점점 더 심해졌다. 보수주의 진영이 박정희의 리더십에 대한 향수에 기반하여 자신들을 ‘산업화세력’이라 규정한 반면, 자유주의 진영은 자신들을 ‘민주화세력’이라 규정했다.

     이 두 진영 사이의 갈등의 주 이슈 중 하나는 과거사 문제였다. 친일 문제, 군사 정권 하에서의 의문사와 민간인 학살, 국가 권력에 의한 인권 침해/폭력/살인 등이 과거사 진상 규명 대상이 되었다. 그 결과, 보수주의 정부의 악행들이 드러났고, 해방 이전과 이후에 있었던 지식인과 언론의 친일/친독재 행위들도 역시 드러났다. 그에 따라, 보수주의 진영의 많은 인물들이 자유주의 진영에 의해 ‘친일파’, ‘민족 반역자’, ‘반통일세력’, ‘극우 보수주의자’ 등으로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 비난의 언어들은 그 비난 밑에 깔려 있는 이데올로기가 민족주의임을 잘 보여 준다.

     이러한 비난에 직면한 보수주의 진영은 이 비난들이 자유주의 정부가 자신들을 억압하는 명분으로 활용된다는 의심을 표했다. 그리고 이러한 공격에 대응하여, 보수주의 진영은 반공주의를 강조하고, 북한이 더 이상 남한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기본 인식 하에 북한에 대한 포용을 강조한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이 북한이 핵실험을 자행하는 상황에서는 위험한 정책이 된다는 비판을 가했다. 한 발 더 나아가, 이들은 남한의 첫 대통령인 이승만을 “친일파와 함께 정부를 수립한 대통령”으로 비판하고, 박정희를 “일본 제국의 괴뢰국가인 만주국 장교 출신 대통령”으로 비판하는 자유주의 진영의 비판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흔들려는 불순한 비판이라고 주장했다.

     보수주의 진영의 이러한 비판들 중에, ‘뉴라이트’로 자신들을 지칭하는 일군의 지식인들의 시도를 살펴 볼 만 하다. 이들은 남한과 북한이 공유하는 기본 이데올로기인 반일민족주의와 분리된 남한 역사를 성립시키려고 시도한다. 뉴라이트의 대표적인 학자인 이영훈은 남한의 현대사를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기반한 서구 문명의 수용사로 볼 것을 제안한다.[각주:18] 이영훈에 따르면, 일제 식민지 시대는 근대적 법률, 시장 경제, 근대적 관료제 등의 근대적 제도가 도입되는 시기였으며,[각주:19] 이승만은 일제 식민지 시대에 도입된 이러한 근대적 유산들을 잘 계승하여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기반 위에 남한을 건국함으로써 오늘날 남한이 번영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각주:20] 반면 북한은 그 근대적 유산들을 “친일 잔재”라고 매도하며 거부하고 민족주의 기반 위에 사회주의 국가를 건국함으로써, 오늘날 북한의 쇠망의 실마리를 열게 되었다.[각주:21] 하지만 이영훈이 보기에는, 이러한 현실을 인지하는 것을 과도한 민족주의가 방해하고 있으며, 그 결과 대한민국 역사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만연하게 되었고,[각주:22] 심지어 민족주의의 명분 아래 북한 독재를 비판 없이 관용하는 위험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영훈의 제안은 ‘현재’의 번영을 명분 삼아 ‘과거’를 정당화하려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즉, 그는 남한의 건국 과정이 현재 남한의 경제와 민주주의의 ‘성공’의 진정한 기원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그 건국 과정을 정당화하려 한다. 또한, 이영훈은 남한이 북한의 존재를 고려할 필요가 없는 완전한 국민 국가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그가 남한 사람들이 민족주의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긴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의 주장은 남한의 건국 과정을 높이 평가하고 남한 국가의 현재의 성공을 크게 강조함으로써, 민족주의의 대상에서 북한을 배제하고 남한에만 그 대상을 한정한 일종의 ‘남한 민족주의’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영훈의 주장은 종종 “친일 반민족주의”로 비난당하는데, 이는 그가 일제 식민지 시대에 근대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긍정하기 때문이다. 이영훈의 “민족주의”에 대해서 이러한 비난이 벌어지는 상황은 남한 사람들 대다수의 민족주의적 관점의 한계를 드러내 주는데, 그 “민족주의”에 깔려있는 냉전 이데올로기를 주목하지 못하고 오히려 “친일 반민족주의”라고 비난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르게 말하면, 남한 사람들의 민족주의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등등이 쳔 꽝싱이 지적하듯이 그 자체로 냉전 이데올로기로 작용해 온 측면[각주:23]을 밝히는 탈식민주의적 성찰을 하지 못하게 하는 한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2000년대부터는 자유주의 진영 사람들의 민족주의에도 일정한 변화가 있었다. 특히 이 시기의 변화는 주로 반미 이슈를 둘러싸고 일어났다. 2002년 미군의 군사 행동 중 부주의로 살해된 두 명의 소녀를 추모하는 촛불 시위가 남한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나, 반미감정이 폭넓게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때, 그 반미감정은 소녀들을 살해한 미군이 한미간의 불평등한 행정협정으로 인해 한국 법정에서 심판되지 못함으로서 한국의 주권이 훼손되었다는 감정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 때의 반미감정은 그 동안 사회운동에서 견지되던 반미감정과는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었는데, 후자가 미국이 남한을 통제하고 한국의 통일을 방해하는 ‘지배자’라는 인식에 근거한 것이라면, 전자는 ‘주권국가’로서의 한국이 미국과 마땅히 가져야 할 평등한 관계를 요구하는 감정이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리하여 이 사건은 자유주의적 시민들 사이에 반미감정이 자리잡게 되는 기원이 되었고, 이에 대응하여 보수주의자들은 미국이 ‘혈맹’이라는 것을 다시 강조하며 미국에 점점 더 집착하게 되었다.

     

ⓒ 웹진 <제3시대>



  1. 이기백, 한국사신론(제2판, 서울: 일조각, 1976), 442. [본문으로]
  2. 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서울: 한길사, 1983), 64-66 [본문으로]
  3. Brazinsky, Gregg. Nation Building in South Korea: Koreans, Americans, and the Making of a Democracy. Chapel Hill: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2007, 184 [본문으로]
  4. Koo, Hagen. Korean Workers: The Culture and Politics of Class Formation.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2001.143 [본문으로]
  5. Ibid. [본문으로]
  6. 안병무, 민중신학 이야기(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0), 38 [본문으로]
  7. Koo, ibid. [본문으로]
  8. 이남희 지음, 유리/이경희 옮김, 민중만들기(서울: 후마니타스, 2015), 25 [본문으로]
  9. 위의 책, 23. [본문으로]
  10. 김보현, 박정희 정권기 경제개발 (서울: 갈무리, 2006), 315~318 [본문으로]
  11. 위의 책, 321 [본문으로]
  12. Koo, ibid, 143 [본문으로]
  13. 김보현, 앞의 책, 323. [본문으로]
  14. 안병무, 앞의 책, 257~258 [본문으로]
  15. 지주형,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서울: 책세상, 2011), 131 [본문으로]
  16. 위의 책, 133~137 [본문으로]
  17. 위의 책, 166 [본문으로]
  18. 이영훈, 대한민국 이야기(서울: 기파랑, 2007), 318 [본문으로]
  19. 위의 책, 173~179 [본문으로]
  20. 위의 책, 233~249 [본문으로]
  21. 위의 책, 174 [본문으로]
  22. 위의 책, 315~316 [본문으로]
  23. 쳔 꽝싱, 제국의 눈(파주: 창비, 2003), 194 [본문으로]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新 公無渡河歌(신 공무도하가)[각주:1]

부제 : 저 물을 건너는 방법에 관하여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한신대 외래교수)

 


백성이 요단 강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진을 떠날 때에,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백성 앞에서 나아갔다. 

그 궤를 멘 사람들이 요단 강까지 왔을 때에는, 마침 추수기간이어서 제방까지 물이 가득 차 올랐다. 

그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물가에 닿았을때에... 

- 여호수아 3:14-15

 



I. 

    오늘 설교제목이 신공무도하가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고전문학 시간에 배웠던 고대가요입니다.  


    임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公無渡河 공무도하) 

    임은 결국 물을 건너시네.(公竟渡河 공경도하) 

    물에 빠져 죽었으니,(墮河而死 타하이사) 

    장차 임을 어이할꼬.(將奈公何 당내공하)  


    이 곡은 어느 이름 모를 백수광부(白首狂夫)의 아내가 지었다고 합니다. 원가(原歌)는 전하지 않지만, 그 한역(漢譯)인 「공후인(箜篌引)」이 진(晋)나라 최표(崔豹)의 『고금주(古今注)』에 설화와 함께 채록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최표의 『고금주』에 기록된 이 노래의 배경설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공후인은 조선(朝鮮)의 진졸(津卒) 곽리자고(霍里子高)의 아내 여옥(麗玉)이 지은 것입니다. 자고(子高)가 새벽에 일어나 배를 저어 가는데, 머리가 흰 미친 사람(백수광부)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호리병을 들고 어지러이 물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가 뒤쫓아 외치며 막았으나, 다다르기도 전에 그 사람은 결국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이에 그의 아내는 공후(箜篌)를 타며 ‘공무도하(公無渡河)’의 노래를 지으니, 그 소리는 심히 구슬펐다고 합니다. 그의 아내는 노래가 끝나자 스스로 몸을 물에 던져 죽었습니다. 자고가 돌아와 아내 여옥(麗玉)에게 그 광경을 이야기하고 노래를 들려주니, 여옥이 슬퍼하며, 곧 공후로 그 소리를 본받아 타니, 듣는 자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라는 전설이 전해져 옵니다.  


II. 

    공무도하가는 죽음이 주제이고 물이 소재이죠. 거의 모든 민족의 신화나 설화속에서 물은 생명을 상징하는 아이콘이기도 하고, 반대로 죽음, 난관, 어려움, 고난을 상징하는 아이콘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 원칙을 더 말하자면 통과의례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물로 상징되는 고난과 역경과 죽음의 그림자를 통과하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는 집단적 주술이 물과 관련된 이야기들 속에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에도 물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를 보면 물을 항아리에 붓는 장면이 나오고,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가에서 물을 깃는 대목에서는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이 생수와 관련된 내용으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의 물은 생명을 상징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여호수아 본문 역시 물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물과 관련된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출애굽사건이 아닐까 싶습니다. 출애굽 사건 과정에서 등장하는 물은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 될 수도 있겠고, 통과의례를 상징하는 사건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출애굽의 시작은 물을 건너는 것이고, 출애굽의 완성 역시 물을 건너는 것입니다. 전자의 물은 홍해이고, 후자의 물은 요단강입니다. 종교학적으로 설명하면 출애굽과정에서 등장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두 차례의 도하(渡河)가 고등종교로 발전하는 과정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홍해를 건널때와 요단강을 건널때의 차이가 뭡니까? 홍해를 건널때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홍해가 갈라진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건넙니다. 반면, 오늘 여호수아 본문에 등장하는 물을 건너는 장면에서는 요단강이 갈라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 앞에서 강물이 철철 흐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흐르는 강물을 향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발을 담금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표상에 의지하지 않고 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는 것이고, 이것은 또한 현상과 감각에 흔들리지 않고 내면의 목소리와 우주의 소리를 일치시킬 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교적 깨달음, 구원의 시간, 해탈의 시간이라는 말로 바꿔도 무방할 것입니다.   


III.

    공동의회를 하루 앞둔 어제‘하늘 뜻 나누기’를 준비하면서 오늘 본문이 생각났습니다. 공동의회를 하나 치루는 것이 무슨 홍해나 요단강을 건너는 거창한 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앞에 두고 어떤 심정이었을까? 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동안 의지하고 믿었던 모세도 없습니다. 이제 그들은 성인이 되었기에 세상을 전처럼 마냥 낙관적으로만 바라보지도 못합니다. 세상이 호락호락 하지 않다는 사실도 알았고, 하나님이 마냥 우리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사실도 깨달았으며, 우리들 사이 관계 역시 생각만큼 견고하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지난 40년의 광야생활을 통해 알아버렸습니다. 이 모든 것을 깨달은 지금 이 순간 그들 앞에 놓여 있는 것이 바로 시퍼런 요단강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전처럼 하늘을 우러러 저 흐르는 강물을 멈추게 해달라고, 예전처럼 하늘을 우러러 저 강물 사이로 길이 생기게 해달라고 더 이상 그들의 신에게 땡깡을 부리지 않습니다. 그냥 눈을 질끈 감고 흐르는 강물에 자신들의 몸을 던집니다. 저에게는 이 장면이 무척 인상적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여호수아 3장 16절까지 하지 않고 3장 15절까지만 했습니다. 물론 16절 이하를 읽어보면 강물이 멈추고 땅이 말라 모두 무사히 그 강을 잘 건너갔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하지만, 저는 16절 이하에 나오는 성취와 성공에 대한 스토리보다는 오늘 우리가 읽은 14-15절 내용이 더 빛나는 내용이 아닐까 합니다.


IV.  

    잠시 후에 우리는 공동의회를 합니다. 2015년 한해를 결산하고, 2016년 한백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바를 결정하고 실행하겠음을 다짐하는 공동의회입니다. 작년 한해 우리를 지켜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고, 올 한해도 동일한 기쁨과 감사가 깃들기를 함께 바라는 공동의회가 될것입니다. 특별히 이번 공동의회에서는 그동안 5년 동안 헌신했던 김0숙 장로님, 김0승 장로님을 대신할 두 분의 장로님을 선임하는 시간이 들어있습니다. 늘 이렇게 누군가를 다시 세워야 하는 시간이 되면 우리는 고민하고 걱정을 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처음에는 이 두 분을 대신할 분이 누가 있을까? 고민이 되기도 했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주께서는 우리의 염려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한백교회 교우 여러분, 이것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오늘 여호수아 본문에 나오는 요단강가에서 법궤를 들고 서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 모두 한백이라는 법궤를 함께 지고 발을 한 발짝만 앞으로 내밉시다. 그리하면 우리 앞을 흐르는 강물도 멎을 것이고, 그리하면 젖어있던 땅도 말라 있을 것입니다. 그러할 것입니다. 정말로 그러할 것입니다.  


ⓒ 웹진 <제3시대>


  1. 지난 2016년 1월 31일 주일 한백교회 ‘하늘 뜻 나누기(설교)’ 원고입니다. [본문으로]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우리는 각자의 이름으로_소설 <계속해보겠습니다> 리뷰

 





(평범한 워킹맘, 페미니스트, 간간이 글쟁이로 변신)


    몇 년 전부터 친족을 상대로 한 범죄 행위가 뉴스에 끊임 없이 등장한다. 물론 이건 현대 사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최근 유행하는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의 이방원만 해도 자신의 형제를 가차없이 죽였던 인물이고, 가족의 비극을 낳는 이러한 왕족의 역사는 어느 나라에서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인류가 이야기를 시작한 이래로 가족은 수 많은 문학, 연극, 영화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한때 한국 문단에서도 신춘문예에 당선되려면 무조건 가족을 소재로 써야 한다는 공식이 있었을 정도다. 


   가족은 진부하고 구태의연하다. 문학 작품의 소재로서 뿐만 아니라 현실의 영역에서도 그 하나하나의 역할들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데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엄마, 아빠, 딸, 아들. 호칭은 그대로 이름이 되고, 우리는 여기에 때때로 이름들을 더하고 빼며 자를 대고 그린 것만 같은 올곧은 직선으로 ‘가족'이라는 형태를 만든다. 그리고 수 세기의 작품들이 단호하게 지시하는 것처럼, 이렇게 만들어진 것을 우리는 사랑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우리를 파괴할 것이다.


1. 

    이름은 공식적으로 가족만이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결혼을 해서 성을 나누거나 출생, 입양 등을 통해 성과 이름을 물려주기도 하고, 우리나라의 경우엔 돌림자로 이름을 짓기도 한다. 그러나 황정은의 장편소설 <계속해보겠습니다>에서의 가족은 이름도 비슷하지 않고, 성씨도 나오지 않는다. 부모에게도 엄마, 아빠라고 하지 않고 애자, 금주씨라고 부른다. 엄마인 애자는 소라와 나나의 양육자로서의 엄마라기보다는 금주씨를 끔찍이 사랑했던 연인이고 소라와 나나도 피를 같이 하는 자매라기보다는 서로를 애틋하게 챙겨주는 동거인 관계에 가깝다. 오래 입어 느슨해진 바지 허리춤처럼 이들이 지닌 가족적인 색깔은 엷디 엷다. 소라가 표현하듯, 정형성을 입은 다른 가족이 ‘물감으로 그린 가족'이라면 이들은 ‘간장으로 그린 가족'이다. 


   소라와 나나의 가족이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었다. 애자가 그토록 사랑해마지 않았던 금주씨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이후, 애자는 남은 생을 놓아버린다. 아무것도 안하고 누워있다가, 갑작스럽게 일어나서 음식을 하기도 하고, 또 어딘가를 향해 훌쩍 떠나버렸다가 느닷없이 돌아오기도 한다. 생의 이유를 잃은 애자는 소라와 나나에게도 인생이란 너무나도 허망한 것이라고 가르쳐왔다. 아직 어렸던 소라와 나나를 누구도 돌보지 않았던 건 그때부터였다. 기댈 친척도 없었으니 소라와 나나는 둘이서만 시간을 보냈다. 


   그런 소라와 나나를 대신 돌본 것은 순자였다. 순자는 배가 고파 쉰떡을 데워 먹던 소라와 나나의 손에서 떡을 빼앗아 먹어버리고 떡 대신 따뜻한 밥을 차려주었다. 또한 소라와 나나에게 늘 점심 도시락을 챙겨주고, 때가 되면 같이 만두를 빚곤 했다. 나기와 소라, 나나는 그때부터 늘 함께였다. 나기의 존재는 특별하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옆집 남자아이에서 소라와 나나를 은근히 챙겨 주는 가족이 되기까지 크게 다른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단지 몇 년 동안 밥을 함께 먹었고, 서로의 등굣길을 함께 했을 뿐. 그렇게 조용히 이어져 온 일상은 방치되었던 소라와 나나를,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없어질 뻔한 이 두 삶을 천천히 다시 끌어 올렸다. 소라와 나나가 ‘계속해'볼 수 있었던 것, 그 뒷편에는 아무것도 아닌 듯, 하지만 무엇보다도 커다란 이 일상의 지속이 있었다. 


   소라와 나나의 이름이 의미를 갖게 된 것도 아마 이 때부터였을 것이다. 나기의 이름은 소라와 나나와 합하여져서 ‘소나기'라는 단어를 갖는다. 가족이 나누는 작명법과는 완연히 다르고, ‘소나기'라는 단어가 그렇게 특별히 의미있는 단어도 아니지만 이렇게 만들어 진 새로운 이름은 새로이 구성된 이 관계를 다른 가족들과 사뭇 다르게 품어 낸다. 한 단어를 쪼개어 나누어 가진 이름처럼, 이들의 동행은 서로의 삶에서 ‘따로 또 같이' 다.


2. 

    그런 상상을 해보았다. 한 사람과 연애를 하고, 나의 뱃속에서 열 달을 길러 아기를 낳아 만든 나의 가족. 이 사람들이 아닌 다른 사람을 내가 우리 집으로 불러들여 가족으로 삼을 수 있을까. 기꺼이 손 내밀고 싶은 사람은 너무나 많지만 계약으로도 혹은 혈연으로도 맺어지지 않은 완연한 타인을 내가 지금의 가족처럼 사랑하고 보살필 자신은 없었다. 그러나 사랑의 방법을 찾고 싶었고, 그 생각 끝에서는 이런 물음이 들었다. 어쩌면 사랑을 넓힐 수 있는 방식은 기존의 가족을 그대로 유지하는 한에서 확장시키는 것이라기보다는, ‘가족'이라는 미명 아래 부둥켜 묶어 놓은 매듭을 한 겹 풀어내는 데에서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아기를 낳고 기르면서도 나는 종종 그런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건 불공평한 게 아닌가. 사람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고, 누군가가 와주기를 바라며 울고 있는 수만의 아기들이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내가 단지 내가 낳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 아기만을 사랑해 준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설픈 박애주의자가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답이 없는 이 생각 속에 도착한 사실은, 우리네의 가족이 너무나도 편협하다는 것이다. 이 편협함은 가족을 둘러싼 안팎으로 나타난다. 가내 집기가 날아다니는 대형 폭력이 발생해도 경찰들은 부부싸움이라고 하면 끼어들지 않는다. 그와 동일선상에서 ‘데이트 폭력'이라는 단어 자체도 수면 위로 떠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가족의 일이니까 제 삼자는 신경을 꺼야 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가족의 일이기 때문에 가족의 구성원들은 무엇에든 강제된다. 그래서 이 가족 내에 있는 사람들은 어디에도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못하고 반복되는 폭력의 굴레 속에 사로잡혀 버리고, 바깥 쪽의 사람들은 이 완고한 경계선 안으로 결코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순자 역시 가족의 틀에 그대로 사로 잡혀 있던 사람이었다면, 소라와 나나는 지금처럼 살아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담벼락 안으로 불쑥 들어 온 순자의 손은 이들에게 수치심을 주지도 않으면서 이 두 소녀에게 자신의 아들과 같은 자리를 기꺼이 내주었다. 게다가 여전히 이들 사이에 놓여진 낮고 얇은 이 담벼락 하나는 이들의 관계를 확장된 가족이라기보다는 ‘따로, 또 같이'하는 새로운 관계임을 암시한다. <계속해보겠습니다>는 서로를 아끼고 보살피는 데에 있어 가족이라는 단어 외의 것으로도, 그러니까 서로에게 정해진 역할과 의무의 굴레를 씌우지 않더라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분명 ‘계속’될 수 있음을 조용히 보여주고 있다. 


   앞으로는 이름을 나눠 갖기로 하자. 

   아주 공평하게. 


   지금까지의 시간은 

   너무 이기적이고 외로웠어. 


   우리는 두 개의 눈과 

   두 개의 귀와 

   수많은 머리칼이 있지만 

   나의 몫은 

   그런 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 신해욱, <따로 또 같이> 중  


   가족의 몫은 언제나 분할된다. 가사일은 엄마의 역할, 직장은 아빠의 역할, 애교는 딸의 의무이고 가족의 미래는 아들의 것. 그러나 <계속해보겠습니다>에는 엄마도, 아빠도, 딸도, 아들도 없다. 그곳에는 마음이 따뜻한 순자와 열정적으로 금주를 사랑했던 애자, 나나를 애틋하게 생각하는 소라, 자신의 의견이 분명한 나나, 차분한 나기가 어울려 산다. 서로의 역할을 강제하지도 않고, 따라서 의무도 책임도 없다. 딸도, 아들도 아닌 이들은 그저 떨어져 나온 한 명, 한 명의 하찮은 개인이지만 이들은 그 안에서 새로운 공존의 방식을 모색한다. 


   나나가 임신한 아기는 그야말로 이 이야기의 정점이다. 기꺼이 아기 아빠와의 결혼을 거부했으니 나나의 아기는 이제 나나와 소라, 나기의 아기로서 자라게 될 것이다. 단순히 형태가 다른 가족인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가족이라는 단단하고 견고한 벽이 일견 허물어 진 공동체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 이 공동체에는 ‘가족'과 같은 끈끈함은 없다. 언제든 툭, 끊어져버릴 것 같지만 이들은 서로를 먼 발치에서 늘상 바라보고 있다.


   나기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소라 너는 ‘소라'라는 부족, 나나는 ‘나나'라는 부족, 나기는 ‘나기'라는 부족. 이 세상엔 한 명 뿐인 부족도 있는거야.’ 이들의 동행은 이렇다. 서로를 같은 부족으로 섣불리 에두르지 않고, 한 명 한 명을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 세워 준다. 이들의 이름은 쪼개지지도 겹쳐지지 않는다. 단지 나란히 서로에게 어깨를 기댄 채 그렇게 서 있다. 계속해서 말이다.  



ⓒ 웹진 <제3시대>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올 해 102살 창호네 할매. 15살 시집와서 한곳에서 근 90년을 살고 있다. 

아들 혼인식 마당에서 잔치가 벌어졌을 때 꼬맹이들도 얼마나 신났는지를 할매는 기억하고 있을까. 

할매와 홀로 남게 된 손주 창호를 동네 아이들이 은근히 놀렸다는 것은 알까. 

손주도 객지로 나가자 할매는 매일 우리집에 찾아와 엄마와 말벗이 되었다. 

마을에 예배당이 생기고 다른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유일한 우리동네 교인이 되었다. 

아마 외로웠을 것이다. 이제 우리집에 찾아올 기력이 없다. 

찾아와도 수다 떨 엄마는 집에 없다. 그래도 100년 삶의 기억들은 곳곳에 퍼져 있다. 

모든 할머니들은 역사의 기록 저편에 삶의 기억들이 있다. 





 

 

 


 

 

 

도홍찬 作 (본 연구소 회원, 한백교회 교인)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이 첩첩산중으로 걸어 들어 온, 첫 사내가 궁금하다. 

 길도 없는 산을 뚫고 들어 온 사연들은 저렇게 마을이 되었겠지ㅡ





길은 열리고, 전기가 들고 

 눈이 내리고 ㅡ 


 방 한켠 머리맡에 열여섯 가지의 약을 쌓아 두고, 

두려운 잠을 청하는 여인의 사연도 소복소복 쌓인다.



 

 

 이수만 作 (한백교회 교인)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BLOG main image
by 제3시대

공지사항

카테고리

웹진 <제3시대> (835)
특집 (8)
시평 (96)
목회 마당 (61)
신학 정보 (139)
사진에세이 (41)
비평의 눈 (59)
페미&퀴어 (25)
시선의 힘 (139)
소식 (154)
영화 읽기 (34)
신앙과 과학 (14)
팟캐스트 제삼시대 (12)
연구소의 책 (15)
새책 소개 (38)
Total : 381,251
Today : 253 Yesterday : 1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