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계'모와 '계'부가 문제인가[각주:1]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원영이를 사망에 이르게 한 ‘비정한 부모’에 대해 경찰은 미필적 고의에 의한 부작위 살인 등의 혐의를 적용해서 검찰에 송치했다. 그리고 검찰은 전담반을 만들어 이 혐의의 공소유지에 총력을 다할 것을 밝혔다. 누가 보아도 살인임이 명백한데, 그것도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너무나 악질적인 살인행위인데, 경찰과 검찰의 이런 모습이 좀 의아하다. 무려 3개월간 화장실에 가둔 채 1ℓ짜리 락스를 두 병이나 몸에 뿌리는 등 가혹한 학대행위를 해왔고, 사망 전날 영하 10도 이하의 날씨에 옷을 다 벗기고 찬물을 끼얹은 채 방치하여 죽게 했으며, 죽은 시신을 야산에 유기하기까지 했다. 이것은 웬만한 모의살인보다 더 악질적인데 미필적 고의 살인은 뭐고, 전담반을 만든다거나 총력을 다한다거나 하는 말들은 뭔가.

    그런데 실은 그럴 만했다. 지금까지 자녀학대가 사망으로 이어진 사건들 중 살인죄가 적용된 사례는 불과 15%에 불과했다.  

    학대로 인한 사망 사건들 그 어느 것도 원영이 사건에 비해 악질적 양상이 덜 하지 않은데, 실제로 적용된 양형은 터무니없이 ‘관대’했다.

    해서 원영이 사건을 비롯해 최근 연이어 터져나오는 자녀학대와 그로 인한 사망 사건들에 대해서 한국여성변호사회는 국가적 차원의 안전시스템 미비가 원인임을 지적하는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정치권이 너나없이 공천에만 몰두하고 있는 와중에 나온 이 성명에는 정치권이 외면하고 있는 구체적인 대안들도 적시되어 있다. 아동학대 행위에 대한 엄정한 양형기준 마련, 아동학대 예방교육 상시화, 아동학대 피해자 지원제도 개선 등이다. 

    한데 이 성명에도 언급되지 않은 다른 하나가 내겐 걸린다. 이 사건에 대해 대부분의 언론은 ‘계모’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 사건 직전인 지난 2월에 밝혀진 부천 여중생 사망 사건에서도 딸을 죽게 한 직접적 가해자로 밝혀진 신학자인 이모 목사와 함께 그의 부인인 백모씨도 학대 가해자였는데, 그녀가 ‘계모’임이 강조된 바 있다. 또 그 무렵 다섯 살 된 아이가 시끄럽게 군다고 밀쳐 죽게 한 비정한 아버지에 관한 사건이 보도된 바 있는데, 이때도 언론들은 앞다투어 이 남자가 죽은 아이의 계부임을 강조했다. 

    이렇게 자녀학대와 사망 사건에서 계모, 계부 등이 언급되면 사람들은 사건의 구체적인 정황에 대해 자세히 알기 전에 미리 답을 예단하는 경향이 있다. 콩쥐, 심청이, 장화와 홍련, 신데렐라 등 가장 대중적인 고전 이야기들의 주인공도 계모에 의한 학대의 피해자들이다. 이것은 동서양을 아우르고, 고대와 현대를 아우르는 대중의 일반적 생각 중 하나로 자녀학대를 계부모, 특히 계모의 학대로 동일시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원영이를 죽게 한 가장 의심스러운 부모의 성향은 ‘온라인 게임 중독’이다. 원영이가 사망하던 무렵 8개월 동안 무려 6000만원을 온라인 게임에 지출했으며 거의 모든 대인관계가 단절된 상태였다는 정황은 그녀가 온라인 게임 중독자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게임 중독이 자녀 살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사건은 최근에 적지 않았다. 그 사건들 대부분은 계모, 계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많은 전문가들은 온라인 게임이 충동조절장애를 야기하고 이것이 자녀 살해로 이어질 가능성을 이야기한 바 있다. 

    게다가 최근 일어난 자녀학대 사건 중 80%가 친부모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계모, 계부와 자녀학대가 당연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나는 최근 연이어 터진 자녀학대와 사망 사건들에서 ‘계’모, ‘계’부 등의 무의미한 표현이 마치 의미있는 것인 양 소비되는 것에서 우리 사회 안전시스템의 중대한 문제 하나가 드러나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가령 자녀학대와 사망 사건 중 분노조절장애가 직접적인 이유인 것이 많다고 알려져 있는데, 분노조절장애는 그이가 겪었던 특정한 사건(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리고 분노조절장애로 인한 범죄가 최근 급증하고 있다. 수많은 분노조절장애로 인한 살인 사건들의 가해자들은 어린 시절 겪은 피학대 경험, 게임이나 약물 중독, 경제적 위기 상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마도 최근 우리 사회에서 연이어 불거져나온 자녀학대 및 사망 사건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해서 이 사건들에 대한 좀 더 세밀한 분석이 필요하며, 그것에 대한 사회적 진단과 대안이 필요하다. 그런데 계부니 계모니 하는, 언어 습관의 일부가 되어 버린 ‘혈연주의적 깔때기’는 이런 진단과 대안 모색의 중대한 장애물이다.  □ (올빼미)


ⓒ 웹진 <제3시대>



  1. <경향신문> 2016년 3월 19일자 '사유와 성찰'에 게재된 칼럼 글입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100&artid=20160318204043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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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가이드15]



지젝과 바울(II)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지난번 지젝과 바울에서 주제는 지젝의 라깡 읽기였다. 라깡의 욕망의 도식을 바탕으로 판타지가 어떤 역할을 하며 주체는 어떻게 상징계(심볼릭 월드)에서 빗금쳐지는지, 케보이(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으로 주체는 상징계 안에서 언제나 불안한 상태로 남을 수 밖에 없는지 살펴보았다. 이러한 라깡에 대한 이해가 진정으로 힘을 발휘하게 되는 지점은 라깡을 바탕으로 한 지젝의 칸트와 헤겔, 그리고 맑스 (후기 맑스주의를 포함한) 읽기이다. 이번 장에서 주된 텍스트는 물론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을 중심으로 출발하겠지만 이것만으로는 지젝과 바울을 연결시키는 것은 어렵다. 처음 이 책이 나온 이후 지젝은 왕성한 필력으로 수십권의 책과 아티클들을 출판하였고, 그만큼 그의 사상과 현 시대에 대한 해법도 변화 발전되었다. 특히 지젝의 기독교에 대한 이해는 그 이후에 나타난 것이므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몇가지 지젝에 대해 나온 수많은 학자들의 저서들중에 도움을 받은 몇권과 지젝의 다른 저작들을 바탕으로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글을 진행해보려한다. 지젝을 쉽게 설명하기는 어려우며, 특히나 철학이나 정신분석학에 전문성이 부족한 필자에게는 지젝에 대한 오해의 가능성이 쉬울 것이나, 필자의 경험으로 어려운 학자를 대할때는 먼저 최대한 쉽게 그의 사상을 오려내고 그 간단한 그림안에서 계속적으로 그 학자의 저서를 만나면서 자신의 생각을 변형시켜 가는 것이 코끼리 다리 더듬듯 방대한 저작 속에서 몇개의 편린을 붙잡는 것보다 효과적이었다.  

   지젝의 출세작인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만이 아니라, 지젝의 처음 학문에 대한 계기는 그의 특이한 콘텍스트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단순한 질문, “왜 나름 성공한 공산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공산주의적으로 살아가지 않는가?”이다. 이 질문을 바꾸어 말하면, “왜 타락한 공산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진정한 공산주의적 혁명 정신으로 그 사회를 바꾸어 놓으려 하지 않는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지젝은 자신의 담론을 펼치면서 빈번히 정치적 사건과 예들을 비유로 사용한다. 그러한 예들을 바탕으로 글을 진행하는 것이 좋겠으나 필자 또한 여러 배경지식의 부족으로 지젝이 말하고자 하는 예를 잘 이해하지 못한 적이 많았고, 그 예를 이해하기 위해 여러번 웹검색에 의지해야 했다. 그래서 조금 때로는 맞지 않은 예일수도 있고 복잡한 현상을 단순화 시킬수도 있지만 본 글에서는 ‘교회’를 예로 들어 지젝의 담론을 설명해 보겠다. 물론 지젝이 데드락 (교착상태)을 해석하기 위해, 희망적 정치를 시작하기 위해 기독교를 예로 들기도 하니 그리 나쁜 시도는 아닐 것이다.


지젝으로 교회 보기


    처음 지젝의 질문을 교회를 바탕으로 바꾸어보자. ‘왜 사람들은 교회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냥 교회를 다닐까?’ 이것은 교회를 심각하게 비판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에 다니는 일반적인 신앙인들은 자신들이 읽는 성경의 나오는 신앙인의 삶이 자신이 사는 삶과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연봉 오천만원이 넘는 사례비에 고급 자가용을 타고 다니며, 자녀들을 미국에서 유학시키는 대형 교회 담임목회자의 삶이 성서에 나오는 영적 리더들의 삶은 아님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좌우당간에 신앙생활을 해가며 큰 갈등없이 살아간다. 이것이 지젝이 말하는 이데올로기의 힘이다. 원래 맑스가 말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기본적인 정의는 ‘거짓 믿음’ 즉 쉽게 말하면 ‘거짓말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면 만사가 행복해진다.’라는 거짓말로 시작하여 ‘목사는 거룩한 존재다.’라는 구라로 끝나는 기독교는 시민들이 현실의 부조리와 거짓을 보지 못하게 하여 사회 정의와 혁명을 방해하는 아편적 조직이라는 것이었다.[각주:1] 그렇다면 이 거짓 믿음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지젝은 파스칼을 인용하여 믿음은 앎(Knowledge)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관습(Custom)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각주:2] 재미있게도 이런 가정이 가능한데, 백일기도의 효과를 믿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백일기도를 하게 하는 것이다. 아담 카스코(Adam Kotsko)는 지젝의 말을 응용하여 현대 미국 대형교회의 성공을 해석했는데, 윌로우 크릭 교회와 같이 열린 예배 형식이 성공을 거둔 가장 큰 이유는 교회 예배에 지루함을 느낀 사람들에게 새로운 예배 관습을 제공했는데, 재미있는 것은 교회의 구성원들이 그들의 전통적인 예배에 대한 믿음을 바꾸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팝음악과 강연형식의 순서를 교회적 예배라고 정의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각주:3] 알튀세르는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믿음에 대한 이해를 더욱 발전시켜 그 유명한 ISP(Ideological State Apparatuses)에 의해 이데올로기가 하나의 사회적, 정치적 문화의 영역으로 확장되어 있음을 말했다. 이데올로기를 받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어떤 거짓-믿음이라는 비물질적 요소가 아니라 경제, 교육, 문화를 이끌어가는 물질적 조직과 기구들이란 것이다. 결국 이데올로기의 힘은 강제적이라기 보다는 ‘자연적’이고 ‘부드러운’것이다.[각주:4]


지젝의 이데올로기 이론


    그러나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해가 요즘과 같이 한국의 대형교회들의 수많은 타락과 문제점들이 공유된 상태에서도 가능한지 물어봐야 한다. 성서에 나타나는 초대교회는 몰라도 현대의 교회는 ‘구원’이나 ‘복’으로 포장된 거짓으로 가득찬 집단으로 보인다. 하루가 멀다하고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목회자들의 불법과 타락이 사탄의 장난이라 믿는 사람은 이제 극소수일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교회는 사람들로 가득 차있다. 지젝의 설명은 이런 것이다. “그러한 것들이 거짓이라는 것을 이미 그들도 알고 있다. 그러나 마치 모르는 것처럼 행동한다”[각주:5] 아주 소수의 운빨로 부자가 된 사람들을 예로 든다고 하더라도 현실은 준엄하며 냉정하다. 백일 기도를 한다고 자신의 자녀가 서울대를 합격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라도 하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하는 기대심리가 존재할 뿐이다. 즉, 번영신학의 허울과 희생적 사랑이라는 선언 뒤에 숨겨진 교회의 이기심은 그 구성원들이 더 잘 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번영신학이 엉터리라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으로 번영신학은 무너지지 않는다. 차세대 영적 지도자로 각광받던 목사가 성추문에 휩싸여도 교회의 공금을 횡령해도 논문 표절이란 구설수에 올라도 교회는 무너지지 않는다. 바로 이전 장에서 논했던 환상(Fantasy)가 등장하는 곳이 이 지점이다. 여기서 판타지의 역할과 현실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좀 길긴 하지만 지젝의 말을 직접 옮겨보자. 다음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의 한부분을 필자가 번역 정리한 것이다.


    한 아버지가 병들어 죽어가는 아들의 곁을 오랜동안 지키다가 아들이 죽자 옆방으로 가서 잠깐 잠이 들었다. 그때 아들의 침대 옆에는 촛불이 켜져 있었고 한 노인이 아이를 지키며 기도를 읖조리고 있다. 그 때 그 아버지는 꿈을 꾸었다. 그의 아들이 그의 옆에 서서 그의 팔을 잡고 꾸짖듣이 말한다. “아버지 제가 불타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나요?” 그가 일어나자 아들이 죽어 있는 방에서 불길을 발견한다. 노인은 잠에 들어 있었고 촛불이 그의 죽은 아들의 팔에 떨어져 불타고 있었다. 

    전통적인 꿈에 대한 해석은 이렇다. 꿈은 잠든 이의 잠을 연장 시키는 역할을 한다. 잠자던 아버지에게 현실로부터의 방해가 일어난다. (타는 냄새) 그러자 꿈이 발동하여 그의 잠을 연장시킨다. 짧고 작은 이야기는 외부의 요소를 담는다 (불, 아이- 그 편이 더 자는 자를 안심시킬수도 있다.) 그러다가 현실의 방해요소가 강해지면 잠자던 이는 깨어나게 된다. 

    라깡은 이런 전통적인 해석과는 반대의 해석을 개진한다. “주체는 외부의 방해가 너무 강해질때 자신을 깨우지 않는다.” 외부의 방해가 강하기 때문에 깨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먼저 그는 꿈을 만든다, 물론 자신의 잠을 연장하기 위해서 그리고 현실로 깨어나지 않기 위해서. 그러나 그가 그 꿈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그의 욕망의 실재다. (Lacanian Real) 이 경우에는 아버지에 대한 아이의 꾸짖음이 바로 실재이다. “내가 불타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나요?” 이것은 아버지의 근원적인 죄책감이며 이것이야말로 외부의 실재 그 자체보다 더욱 두려운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깨어나게 되는 이유이다. 그의 욕망의 실재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꿈 안에서 그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그 실체로부터 소위 현실의 세계로 탈출한다. 계속 꿈을 꾸고, 그 자신을 속이고, 그의 욕망의 실체로 깨어나지 않기 위해 우리는 현실의 세계로 돌아온다. 결국 현실은 우리의 욕망의 실재를 가리우기 위한 하나의 판타지 만들기인 것이다.[각주:6] 

    쉽게 말하면 보통 우리는 꿈을 판타지라고 생각하고 꿈을 벗어나서 현실의 세계로 온다고 생각하지만 지젝의 라깡은 이를 역전시킨다. 바로 보통 우리가 말하는 현실세계가 판타지이다. 역으로 꿈은 우리가 판타지인 현실세계를 넘어서 만나는 리얼의 세계이다. 이를 지젝은 라깡의 현실(Lacanian Real)이라고 표현한다. 결국 현실이 판타지라면 과연 무엇이 우리가 판타지를 현실이라고 믿게 하는가? 바로 이데올로기이다. 이데올로기의 역할은 바로 이 판타지가 현실이라고 믿게 하는 것이다.[각주:7] 그러므로 이데올로기의 진짜 힘은 교회의 타락을 숨기고 ‘믿기만 하면 된다.’라는 거짓에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교회 자체가 환상이라는 것을 숨기는 것에 있다. 우리가 교회의 타락과 문제점을 비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타락과 문제점의 원인을 밝히고 고쳐 나가면 진정한 교회의 모습에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또는 갱신과 개혁을 포기하고 ‘가나안’ 교인의 길을 걷는다.[각주:8] 둘 다 이데올로기를 더욱 강화하는 함정이 된다. 지젝에 따르면 이 둘의 상황에서 이데올로기의 기능은 진정한 교회의 핵(Kernel)을 만나지 않기 위해 환상적 현실을 제공하는 것이다.[각주:9] 왜냐하면 두가지 방법 모두 교회 자체가 이데올로기적 환상이라는 것을 밝히는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왜 바뀌지 않는가?


    약 40년전에 지나친 번영신학과 교회의 계급주의, 그리고 지나친 헌금강조등의 율법적 신앙을 바로잡고자 평신도 사역자를 강화하고 신유나 은사를 중심으로 한 예배를 금하고 세계선교의 희망을 불태운 교회가 있었다. 그것이 지금의 ‘구원파’교회이다. 현재의 교회가 거짓된 교리로 얼룩져 있다고 하여 모든 것을 바꾸고 새로운 교회를 만든다고 하더라도 이내 그 곳은 이전보다 더욱 신비적이고 세속적인 집단으로 바뀌는 곳이 교회이다. 그렇다면 이 이데올로기는 도대체 왜? 어떻게? 인간을 이리도 쉽게 조종할 수 있는가? 사람은 누구나 강제로 어떤 것을 하게 되는 것을 싫어한다. 이러한 조종이 가능하려면 두 가지가 선행되어야 한다. 먼저, 자신이 자유로운 존재라고 착각하게 해야한다. 그리고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믿게 만들어야한다. 이 두 가지를 가능하게 할 수있다면 그러면서도 인간을 조종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지젝이 말하는 이데올로기의 진정한 힘이다. 예를 들어보자.

    한 대형교회의 담임목사가 교회를 크게 건축하기 위해 헌금을 모으고자한다. 이 목회자는 교회를 크게 건축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는 크게 상관이 없음을 이미 알고 있다. 그것이 성서의 뜻이나 신앙의 황금률이 아님을 알고있다. 그러나 교회의 규모를 유지하기 위해서 더욱 큰 사업을 편하게 하기 위해 건물을 늘리고 신자를 늘리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헌금을 많이 하면 복을 받는다.’는 설교를 하기 시작한다. 여러 헌금을 많이 하여 사업에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건축헌금을 강조한다. 그 교회의 신자들은 굳이 헌금을 많이 한다고 해서 복을 받거나 삶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있다. 헌금을 많이 함으로 사업에 성공했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은 그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으며 그러한 신앙을 비판하는 목사들의 글이나 신학자들의 글도 넘쳐난다. 그러나 그들의 걱정은 다음과 같다. ‘그것을 아는 것이 나뿐이라면? 오직 나만이 그것을 알고 있고 나머지 대부분의 교인들은 목사의 말을 믿고 열심히 헌금을 한다고 한다면?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처음부터 교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삶이 곧 신앙의 중심이 되는 사람에게 (또한 이것이 교회의 기본 신앙이기다하다) 이것은 대단한 위기이다. 자신은 교회를 위해 희생하는 신앙인이어야하고 그러한 삶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 바로 헌금이 복과 직결되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교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삶의 형태 이외에는 자신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규정할 길이 없는 사람들은 알면서도 헌금에 목숨을 걸게 되는 것이다.[각주:10]
    다른 예를 들어 설명한다면, 학벌위주의 사회라는 것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다. (지젝은 반유대주의를 가장 좋은 예로 드는데, 우리의 현실에서는 그리 와닿지 않는 것일 수 있다.) “좋은 대학을 나와야만 사회에서 대접받고 좋은 직장을 잡고 돈을 잘 벌고 행복하게 살수 있다.”라는 것이 학벌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이다. 처음에 이것은 하나의 루머일 수 있다. 아마도 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자신들이 대접받기 위해 만들었을 수도 있다. 대학 간판이 좋지 않아도 자신의 노력과 특성으로 충분히 행복하고 돈을 잘 벌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정말로 이것을 믿고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을 가려고 할 수도 있다. 이와는 반대로 어떤 사람은 이것은 거짓말이며 현실은 실상 그렇지 않고 대학 간판없이도 충분히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하자. 그러나 이 똑똑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생각할 것이다. “만약에 바보처럼 순진하게 이것을 믿고 정말로 좋은 대학이 좋은 인생을 만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면 어떻게 하지? 게다가 그런 사람들이 사회 지도계층에 있다고 하면 어떻게 하지. 그렇다면 나는 비록 이것이 거짓말이고 말도 안되는 이야기지만 나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 좋은 대학을 가야겠다.” 결국 이것이 거짓이든 아니든 그것을 믿거나 믿지 않든 결과는 같다. 무슨 생각을 하든 좋은 대학을 목표로 살아가는 것은 같은 것이다.

지젝의 주체론(칸트와 헤겔)

    필자는 가끔 평신도이지만 상당히 높은 신학적 지식과 건전한 신앙관을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스스로 성서를 공부하고 고민하며 참된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나름의 답을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이야기하면서 자주 듣는 질문은 이런것이었다. “전도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물론 예외도 있겠지만 건전한 신앙관을 가진 신앙인이 제일 먼저 찾는 것은 자신의 생각에 동의하고 수긍해줄 목회자이다. 아무리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기독교라는 거대한 상징계 (Symbolic Order or The big Other)에 의지하지 않고는 자신을 위치시킬 수 없는 것이다.

    지젝의 이데올로기론에 따르면, 왜 대형교회가 수많은 문제들과 갈등에 시름하면서도 마치 그 교회에 맹종하는 사람들에 의해 유지되는 것 처럼 보이는지 알 수 있다. 그들도 알고있다 우리처럼. 다만 알면서도 계속 하던대로 할 뿐이다. 바로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할 방법이 그것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안다.’ 그러기에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느낀다. 안다는 것은 비판의식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성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신앙은 변하지 않는다. 그들만이 아니다. 나와 이글을 읽는 여러분도 모두 마찬가지로 살아간다. 이 부분에서 지젝은 라깡을 데카르트, 칸트, 헤겔에 연결시키는 작업을 시작한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의 후반부가 ‘주체’(Subject)에 할애되어 있는 이유가 이것이다. 책의 초반부에 지젝은 알튀세르의 실패는 바로 어떻게 주체가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토대에 의해 ‘이름 불리워지는가?’ (Interpellation)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것에 있다고 하였는데,[각주:11] 이를 설명해내기 위해 라깡을 데카르트, 칸트, 헤겔의 전통에 위치시킨다. 바로 지젝이 라깡은 후기구조주의자가 아니라고 했을때 이는 결국 구조주의를 넘어서 독일의 관념론에 라깡을 안착시키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각주:12]


가정된 주체


    우리는 어떤 판단을 내리기 이전에 이미 어떤 것을 가정한다. 그 가정 뒤에는 또 다른 가정이있다. 이것을 끝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에는 가정된 주체(subject)가 있다. 이 가정된 주체를 만드는 것이 바로 이데올로기이며 이것을 이전 웹진 글에서 우리는 판타지라고 불렀다. 바로 맑스주의의 이데올로기와 라깡이 연결되는 지점이 이곳이다. 우리는 언제나 상징계(심볼릭 월드)안에서 이미 가정된 존재이며 (빗금쳐진 $) 불안한 상징계속에서 끊임없이 나를 안정시켜줄 거대한 존재(신)를 찾아나서지만 결국 텅빈 대타자(교회-신이 있다고 하는 장소)를 만나 그 비어있는 곳을 판타지로 채운다. 그곳은 바로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곳이며 바로 숭고한 대상 (무섭고도 장엄한 빈 물체)가 자리한 곳이다. 여기서 지젝이 숭고한 대상 (Sublime object)이라고 명명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데, 바로 칸트가 말하는 thing in itself (물자체)를 지칭한다. 그 이유는 이후에 이야기하겠지만 지젝이 보기에 헤겔의 철학의 사유의 시작은 칸트이며 칸트의 사유를 극복한 지점이 바로 이 물자체에 대한 헤겔의 칸트비판이기 때문이다.


    칸트는 물자체와 인간의 사유사이를 건널수 없는 강으로 구분지었다. 이 부분은 후기구조주의적 사유와 좀 닮아있는데, 칸트는 인간이 물체를 인식하는 방법이 이미 선험적으로 (태어날때부터)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붕어빵의 틀이 언제나 그 형틀의 빵만을 만들듯 인간의 이미 구조화된 인식의 방법 (시각, 청각, 미각, 길이, 무게…)으로 물체를 인식한다. 즉, 인간은 자신의 인식의 도구를 통해 이해된 방식으로만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결국 물자체인 세계와 인간의 의식 속의 세계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기에 칸트는 머무르지 않고 그 사유화된 세계를 뛰어넘어 물자체의 세계를 인식하는 능력이 인간에게 있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숭고함(Sublime- 두렵고 떨리는 대상)을 만날때이다. 수백미터의 파도를 만났을때, 영혼마저 뒤흔들어 버리는 음악이나 그림을 만날을때, 인간은 자신의 사유의 깊이를 훌쩍 뛰어 넘어 사물자체가 가지고 있는 장엄함에 빠져들어간다. 바로 단순히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서의 물자체가 인간의 영혼마저 흔드는 경험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헤겔은 이러한 칸트의 사유의 방식이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물자체라는 외부적 요소를 이용하여 주체의 사유의 방식을 규정하려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칸트의 문제점은 주체가 물자체를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려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방식이 주체가 물자체를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박탈해 버렸다는 것에 있다는 것이 지젝이 보는 헤겔의 주장이다.[각주:13] 위에서 사용한 교회의 예를 들어 설명하면, 칸트식으로 교회는 하나님을 보고 인간 나름으로 만든 기구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을 이해할수도 바로 볼 수도 없으며 다만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이해할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만든 하나님의 나라에 준하는 교회는 하나님 자체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문득 문득 인간은 하나님의 장엄함을 그 숭고한 대상을 체험한다. 두렵고 떨림으로. 헤겔의 불만은 이것을 거꾸로 이해하면 인간이 자신의 방식으로 이해한 신은 언제나 틀릴수 밖에 없다가 된다. 숭고함을 통한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이미 인간이 자신의 방식으로 이해한 신이 틀렸음을 칸트는 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헤겔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지젝이 보는 헤겔의 정수(essense)는 칸트가 말한 묘사할 수 없는 물자체의 경험, 즉 숭고함 (Sublime)에 대하여 칸트는 옳았지만 칸트의 실수는 그 이면에 여전히 물자체가 있다라고 생각한 것에 있다. 그 이면에는 아무것도 없다. 칸트는 여전히 무엇인가 주어져 있다고 생각했다.[각주:14] 그러나 헤겔에게 물자체 (Thing-in-itself)란 아무것도 없는것, 묘사할 수 없음 그 자체인 것이다. 지젝이 말하는 헤겔의 변증법은 ‘부정의 부정’ (negation of negation)인데, 바로 현세계(정)에서 묘사가 불가능한 숭고한 무엇(Sublime object)로 부정(반)을 거쳤다면, 마지막 변증법의 단계인 합은 그 부정이야 말로 실재 그 자체임을 말하는 것이다.[각주:15] 이 아무것도 없는 순수한 부정의 공간이 주체가 나타나는 곳이다. 데카르트가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을 하기 위해 생각하는 주체 자체를 상정하기 위해 모든 것을 부정했던 그 공간이 바로 이곳이다.[각주:16] 독자들은 이전 장에서 빗금쳐진 주체에 대해 논했을때, 이미 주체는 빗금쳐져 있었다라는 말을 기억할 것이다. 그 ‘이미’에 대한 설명이 여기에 있다. 지젝은 바로 절대 부정의 공간에서, 비어 있는 공간에서 주체는 나타났으며 주체의 자리와 생성은 정확하게 이데올로기적 환상의 나타남과 일치한다고 말한다. 이 문장을 좀 더 심도있게 살펴보면서 지젝이 제시하는 대안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전기 지젝의 대안


    보통 지젝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지젝이 그의 이데올로기 이론에 대한 대안으로 두가지를 말했다고 한다. 초기의 지젝은 급진적 민주주의 (Radical Democracy)를 대안으로 제시했는데, 이는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 언급되어 있다. 후기의 지젝은 그의 기독교 읽기를 통해 또 다른 대안을 제시했는데, 다음 웹진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지젝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설명과 칸트,헤겔로 이어지는 설명에 지면을 할애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기 지젝이 말하는 급진적 민주주의라는 대안이 어떻게 대안이 될지에 대해 알아보자.

    만약에 주체가 언제나 쥬이상스속에서 판타지에 묶여 벗어날 수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대안을 찾을 수 있을까? 지젝은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주체가 생성되는 지점으로 거슬러 올라가 이데올로기의 시작점을 살핀다. 바로 독일 관념론적 전통의 주체론에 이미 그 주체에 대한 설명이 있었고 헤겔에 와서 주체론은 완성되어 라깡의 이데올로기 이론과 연결되었다는 것이 지젝의 생각이다.

    포이에르바하는 신(God)이란 인간이 스스로의 유한성과 반대되는 무한성을 투영한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포이에르바하는 외부적 신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고 인간 주체의 개념의 부정성만으로 신에 대한 설명을 완성했다. 그래서 그는 무신론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러나 지젝은 포이에르바하의 시도가 주체를 중심으로 외부적 세계 또는 신을 설명하려 했으나 결정적으로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보았다. 포이에르바하의 설명은 왜 인간이 굳이 신(God)을 상상해야 하는 필요성을 설명해 주지 못한다.[각주:17] 칸트가 물자체 (Thing-in-itself)를 상정하고 숭고함이란 개념으로 그 사이에 존재하는 비어있는 리얼에 다가서기를 포기한 것과 비슷한 논리로 포이에르바하는 주체의 속성에 신을 위치시킴으로 비어있는 리얼을 인간의 속성에 소외된 이질적인 어떤 것으로 채운다. 여기에는 특별한 대안이 없다. 기독교의 신이 인간의 약함의 부산물이라 선언한다 할지라도 이러한 신에 대한 지식이 믿음의 근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이데올로기의 부분에 언급되었다.

    지젝은 헤겔이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 주체를 설명했다고 했는데, 이를 간단히 말하면, 인간이, 또는 주체가 신의 이면에 자리한 진실이 아니라 주체는 주체이전에 신을 가정해야한다. 여기서 신을 실체(Substance)라 해도 좋다. 주체는 포이에르바하식으로 신을 자신의 주체 이후에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신을 먼저 가정하고 그 신이 인간, 즉 주체가 되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각주:18] 이것이 이른바 헤겔식의 그리스도의 화육 ‘incarnation’에 대한 이해이다. 바로 절대 정신인 신이 인간이 되는 것이 주체가 나타나는 시작이 된다는 의미는 거꾸로 바로 그 신을 신의 자리에 세우는 것은 주체라는 말이 된다. 이를 라깡식으로 하면 바로 상징계 (the big Other)의 시작은 주체에 의해 전제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각주:19] 지젝은 이러한 헤겔 읽기를 판타지를 가로지르는 것(Traversing Its Fantasy)이라 생각한 듯하다. 바로 전기 지젝의 대안은 헤겔의 변증법으로 라깡의 상징계 안에 자리한 주체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상징계를 전제한 것이 바로 주체임을 인식하고 주체와 상징계를 묶는 이데올로기의 그 숭고한 대상의 자리가 비어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급진적 민주주의는 라클라우 (Ernst Laclau)에 착안한 것으로 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목표하는 평등, 자유, 평화등의 급진화된 형태가 이른바 타인의 개성을 평준화하고 수량화하는 ‘전체주의’로 흐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러한 이데올로기의 비어있는 가치들과 거리를 유지하고 인권, 여성주의, 환경주의등의 가치들과 연대하면서 이른바 민주적 가치라는 평등 담론등을 통해 계속적인 투쟁의 영역을 넓혀 가는 것이다.[각주:20] 이를 교회적 상황에 비교한다면, 기독교의 신이라는 드러나 있는 기표와 가치들이 이데올로기임을 감안하고 그것이 비어있는 기표들의 상징계임을 전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기독교적 신앙을 포기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기독교의 가치로 존재하는 사랑과 평화를 기반으로 좀 더 현실적인 층위에서 신앙의 방법들을 세워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에 대하여 후기 지젝은 스스로 의문을 표한다. 다음 웹진은 그 이유와 후기 지젝의 대안을 살펴볼 것이다.



<참고문헌> 

Kotsko, Adam. Zizek and Theology. 1 edition. London ; New York: Bloomsbury T&T Clark, 2008. 

Zizek, Slavoj. Tarrying with the Negative: Kant, Hegel, and the Critique of Ideology. First Edition edition.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Books, 1993.

———.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Second Edition edition. London; New York: Verso, 2009.


ⓒ 웹진 <제3시대>


  1. 이러한 맑스의 기독교에 대한 입장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함께 읽어야 한다. 자본주의에 허상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 당시의 기독교에 대한 평가는 정당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본문으로]
  2. Slavoj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Second Edition edition. (London; New York: Verso, 2009), 39. [본문으로]
  3. Adam Kotsko, Zizek and Theology, 1 edition. (London ; New York: Bloomsbury T&T Clark, 2008), 24. [본문으로]
  4. Ibid., 25. [본문으로]
  5.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30. [본문으로]
  6. Ibid., 44–45. [본문으로]
  7. 지젝은 환상의 두가지 효과는 첫번째는 현실과 환상이 맺고 있는 관계를 보지 못하게하고 이 환상이 이데올로기적 판타지라는 것을 숨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Ibid., 30. [본문으로]
  8. Ibid., 24. 지젝의 냉소주의 (Cynicism)을 가나안교인들의 생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지젝은 변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냉소주의’를 비판하는데, 결국 이데올로기의 구조를 밝히기 보다는 구조를 지속시키는데 공헌하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근본주의 (fundamentalism)또한 냉소주의의 반대로서 같은 논리적 구조를 공유한다. [본문으로]
  9. Ibid., 45. [본문으로]
  10. 지젝은 이에 대한 몇가지 유명한 예들을 말했는데, 다음을 보라. Ibid., 210–211; ibid., 33. [본문으로]
  11.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42. [본문으로]
  12. Kotsko, Zizek and Theology, 44. [본문으로]
  13.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232. [본문으로]
  14. Ibid. [본문으로]
  15. Ibid., 233. [본문으로]
  16. Kotsko, Zizek and Theology, 51; Slavoj Zizek, Tarrying with the Negative: Kant, Hegel, and the Critique of Ideology, First Edition edition.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Books, 1993), 12–15. [본문으로]
  17.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260. [본문으로]
  18. Ibid. [본문으로]
  19. Ibid., 262. [본문으로]
  20. Ibid., 9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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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진실



심범섭



    곧 국회의원 선거가 열린다. 그래서 지금은 정치적 수사가 요란한 때이다. 분별있는 사람으로서 국회의원 후보자들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종종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고, 자신의 작은 장점을 과장하고, 단점은 축소하거나 감추며, 개인의 야심을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위장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말이 흥성한 이런 때에 말에 대한 믿음은 허약해진다. 그리고 이런 때에 어떤 말이 참된 말인가를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정치적 성향을 떠나, 선거에서 누구를 지지하는가를 떠나 진실한 말의 의미를 헤아려 보는 것도 마음을 가다듬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어떤 말이 참인가라는 물음에 가장 똑똑하고 진지하게 대답하는 길 가운데 하나는 분석철학에서 다루는 진실론(theory of truth)을 중심으로 논의를 펼치는 것일지도 모른다. 대표적인 것으로 상응론, 정합론, 실용론이 있고, 이 외에도 다른 이론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학술적으로 접근할 능력은 나에게 없으므로 이 글에서는 그저 나 자신의 주관적이고 소박한 견해를 나누어보고자 한다. 어떤 말을 참이라고 판단할 수 있게 하는, 서로 배타적일 필요가 없는 네 가지 특성을 생각해 보았다. (이 글에서 “말”은 ‘언어’를 뜻하며 따라서 말과 글을 모두 가리킨다.)  


1


    말은 그 내용이 현실과 상응할 때 참이다. 예를 들어 “홍길동은 2016년 4월 4일 사과차를 마셨다”라는 문장이 있을 때, 실제로 홍길동이라는 사람이 있고 이 사람이 위의 날에 사과차를 마셨다면 이 문장은 참이다. 말이 가리키는 현실이 과거나 현재가 아니라 미래 상황일 때 우리는 약속, 예측, 예언, 다짐, 계획, 선언 같은 범주를 다루게 된다. 미래를 향해 던지는 말은 미래가 이와 맞아떨어져야만 참이 된다. 많은 경우 이런 참을 얻으려면 말한 사람의 의지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 말의 내용이 현실과 상응할 때 우리는 이 말이 ‘정확하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삶의 구체적 상황에서 정확한 말이 정직한 말의 전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정직한 말은 많은 경우 정확한 말에 공평무사한 판단이 더해진 것이다. 이런 사실에 담긴 중요한 의미 가운데 하나는 정확하게 말하지 못하면 때로 자기도 모르게 정직하지 못하게 말한 것과 같은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정확이 인지적인 개념인데 비해 정직이라는 개념은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개념이므로 내가 한 말이 부정확했다라기보다 부정직했다라고 인식되는 것은 나를 더 난처하게 할 수 있다. 우리가 정확하게 말하기 위해 신경을 써야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이미 존재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거나, 이미 한 말에 현실을 일치시키려 의식적으로 노력하거나, 훗날에 대한 예측이 (말한 이가 가만히 있어도) 맞아떨어져 말이 참이 되는 경우와는 다르게 우리는 때로 말 자체에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는 힘이 있다고 여기기도 한다. 예를 들어 “말이 씨가 된다”라는 속담은 이런 인식을 드러낸다. 말이 그대로 현실이 되는 것은 한편으로 생각하면 신비롭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익숙한 현실의 인과관계 논리로 설명할 수도 있다. 어떤 말이 사람의 심리에 영향을 미쳐 그 말의 내용대로 움직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 아이에게 긍정적인 말을 많이 해주면 아이가 성격과 인격이 건전하며 성취도가 높은 사람이 된다는 주장을 우리는 듣는다. 더불어 악담과 저주의 말이 한 사람을 절망으로, 심지어 죽음으로까지 몰아갈 수 있음을 우리는 또한 알고 있다.  

    그러나 어떤 말은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현실이 되지 않는다. “내 국민은행 통장에 오늘 10억원이 들어온다”고 내가10억번을 말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때로 말이 새로운 현실을 낳아 (어떤 의미에서 스스로) 참이 되는 경우에 감탄하고 때로 그러지 못함에 실망하면서 우리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진정 말이 기적처럼 현실을 창조해내기를 소망하는 듯 하다. 동화에 가끔 나오는 ‘소원을 말해 봐’ 모티프는 이런 소망을 반영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소망이 가장 거창한 차원에서 표현된 것이 히브리 (구약) 성서 <창세기> 제일 처음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에서 신이 말로써 천지를 창조하는 장면이 아닐까라고도 생각해 본다.    


2


    어떤 말의 표면적 의미가 현실과 상응하지는 않지만 삶이나 인간의 이치를 맞게 전할 때 우리는 이런 말에서도 참을 인지한다. 이런 인식이 널리 정착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는 소설 같은 장르가 “개연성 있는 허구” 또는 “가공의 진실”이라는 주장을 우리가 얼른 받아들인다는 사실인 듯 하다. 전설, 신화, 우화 등도 사실이 아닌 언어로 진실을 전달하는 방식이며, 속담에도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나 “뭐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처럼) 이러한 예가 많다. 이러한 언술을 해석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 숨은 원리를 찾아내는 일이다. 그런데 많은 경우 해석의 가능성은 여러 가지로 열려 있으며, 또한 누가 해석하는가가 한 해석이 사회문화적으로 받아들여지는가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어떤 말이 전하는 진실이 무엇인가를 결정하는데 권력과 권위가 개입하는 경우가 많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언술 자체에 크고 무거운 권위가 부여되어 있을 경우에는 이 언술을 표면적인 의미로, 사실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사실성은 인정하지 않고 진실만을 찾아 이해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기독교 성서에 나오는 초자연적인 이야기에 대한 접근법이다. 예를 들어 마틴 루터(1483-1546)는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1473-1543)를 이렇게 비판했다고 한다. “이 바보는 천문학이라는 과학 전체를 뒤집고 싶어한다. 하지만 성경은 여호수아가 멈추라고 명령한 것이 태양이지 지구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각주:1] 루터처럼 해석한 힘있는 자들이 코페르니쿠스처럼 다른 견해를 주장한 사람들을 죽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물론 루터 자신은 지동설 주장자를 물리적으로 박해하지 않았고, 코페르니쿠스도 교회 당국에 의해 처형되지 않고 병으로 사망했다). 오늘날에도 성서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성서에 대해 서로 차분하게 대화하기가 늘 쉽지는 않은 것이 현실이다.    

    사실 경험과 현상을 있는 그대로 말로 전하기는 매우 어렵다. 언어의 정확함이란 어디까지나 타협의 범주이다. 우리는 인식과 기억과 언어의 한계에 매여있기 때문이다. 옆집 사는 사람이 오늘 한 평범한 일도 아주 정확하게 말로 재현하는 건 힘든 일이다. 이런 어려움 때문에 우리는 허구를 통해서도 진실을 전하는 언어의 차원이 있음에 자신도 모르게 안도하는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이 자서전 대신 자전적 소설을 쓰겠다는 말을 할 때 나는 그가 (예술적 형상화에 대한 의욕이 있어서겠지만 동시에) 개인사를 정확하게 기억해내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나고 싶어 저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한다.  


3


   어떤 말이 평소에는 보기 힘든 인간의 더 ‘정직한’ 모습을 보여줄 때 이런 말을 참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평범하지 않은 상황에서 사람은 어떤 감정이나 소망 등을 강렬하게 드러내는 말을 하기도 한다. 비록 말의 내용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말하는 사람의 절실한 심정이 인간 본성을 더 깊이 깨우쳐 준다. 이런 말은 김춘수 시인이 쓴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자면 “존재의 깊이”에서 우러나온다고 할 것이다 (“악마의 총탄에 딸을 잃은 부다페스트의 양친과 함께 / 인간은 존재의 깊이에서 전율하고 통곡할 것이다.”). 상대적으로 가까운 예 가운데 하나는 사랑에 빠진 사람이 애인에게 바치는 찬사일 것이다. “네가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워” 같은 말에 들어있는 최상급 표현은 이 안에 어느 정도 객관적인 기준에 따르는 비교가 포함되어 있다고 받아들이면 안된다. 이런 최상급은 일상과는 다른 차원의 경험을 가리키기 위해 극한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말은 실증적인 것이 아니라, 신학에서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고백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나폴레옹이 한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말은 없다!”라는 말도 같은 유형에 속한다고 봐야 한다. 오래 전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불가능이 없다고? 그러면 럭비 공으로 농구공처럼 드리블을 해보시지?”라는 유머를 읽은 적이 있다. 하지만 ‘불가능은 없다’라는 말에 절실한 내적 경험이 담겨있다면 이 말은 참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소설가 윌리엄 마치(William March 1893-1954)가 쓴 단편 “자그마한 아내 (The Little Wife)”에서 우리는 이러한 언어의 슬픈 예를 만난다.[각주:2] 회사 일로 출장 중이던 조 힝클리는 아내 베시가 출산 후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에 오른다. 기차 안에서 그는 두번째 전보를 받는데 여기에는 아내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어있다. 조도 이를 짐작하고 차마 전보를 꺼내서 읽지 못하고 찢어서 내버리고 만다. 그러고 나서 그는 가까운 곳에 앉은 사람들에게 다가가 자기 아내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는 아내가 방금 첫 출산을 했는데 산모도 아기도 모두 건강하다고 말하고 자기가 아내와 어떻게 만나게 되었고 어떻게 연애했는지를, 지금까지 결혼 생활이 어떠했는지를 쉬지 않고 미친 듯이 이야기한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이 사람이 술에 취하거나 정신이 나갔거나 마약에 취한 것이 아닐까 의심할 정도이다. 그러나 조에게는 자신이 베시에 대해 이야기하는 한 그녀가 안전하지 않을까하는 느낌이 있다. 열차는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하고 조는 역에서 검은 상복을 입은 장모를 만난다. “그는 더 이상 자신에게 거짓말 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는 더는 베시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서 그녀를 살아있게 할 수 없었다.”[각주:3]  

    조 힝클리는 아내가 아이를 낳고 아주 건강하다고 말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가 하는 말은 현실과 상응하는가의 측면에서는 가장 중요한 점에서 참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말이 아내의 죽음에 깊이 절망하는 마음, 아내의 죽음을 부인하고 싶은 간절한 심정에서 비롯되었으므로 여기에서 우리는 어떤 진실을 느낀다. 그가 미친 듯이 쏟아놓는 출혈같은 말은 “존재의 깊이에서 전율하고 통곡”하는 인간을 보여주는 참된 말이라 할 수 있다. <논어> “태백편”에서 증자는 “새는 죽을 때 그 울음이 슬프고, 사람은 죽을 때 그 말이 착하다.”라고 말하는데 죽음을 앞두고 모든 욕심에서 자유로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착한 말도 진실된 말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또 신약성서에서 예수가 십자가에서 절명하기 전 외쳤다고 하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마태복음 27:46)라는 말도 절망의 극한에 처한 인간의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참된 말이 아니겠는가.  


4


    어떤 말이 우리 안에 있는 생명력을 비범하게 증진시킬 때, 곧 우리 영혼을 더 높은 차원으로 고양시켜 새로운 생각을 하게 하고 새로운 희망을 품게 할 때 이런 말을 참된 말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플라톤이 쓴 <향연>에서 알시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를 칭송하면서 그의 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하는 말은, 그냥 띄엄띄엄 들어도, 더구나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듣는 데다가 그 사람이 그 말을 아무리 불완전하게 전할지라도, 그리고 듣는 이가 남자든 여자든 어린애든 간에 그 사람의 영혼을 깜짝 놀라게 하고 그 영혼을 사로잡아 버립니다.[각주:4]  


    이 인용문에서 부각되는 것은 소크라테스의 말은 듣는 사람이 그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해도 영혼에 충격을 준다는 점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것을 직접 듣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부터 부분적으로, 그것도 또 부실하게 전해듣는다는 설정이 이런 뜻을 전한다. 같은 의미는 듣는 사람이 “어린애”라도 그 영향력에 차이가 없다는 말에서도 얻을 수 있다. 어린애는 아직 인지능력이 부족하여 소크라테스의 말을 이해하는 능력이 어른보다도 떨어진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잘 이해하지 못해도 영혼을 일깨우고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는 소크라테스의 말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언어가 전달하는 것에 특정한 정보, 말하는 이의 생각, 정서, 사회문화적 배경, 사람됨 등이 있다고 할 때 소크라테스의 말이 지니는 마력은 그의 사람됨, 곧 그가 어떤 사람인가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 우리의 말에는 우리 영혼의 힘이 실리며 소크라테스의 말은 그의 심오한 영혼에서 태어나 비범한 힘을 지닌다고 이해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예가 우리에게 분명하게 상기시켜 주는 것은 때로 우리가 누구의 말에 영향을 받는 이유는 그 말의 구체적 내용이라기보다는 그 말이 일으키는 어떤 정신(영혼)의 울림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해 말은 그 말을 한 사람의 정신의 힘을 싣고 어떤 “울림의 장(field of resonance)”을 형성하면서 듣는 사람에게 다가가는데, 그 말에 영향받는다는 것은 듣는 사람의 정신이 이 장에 포섭되어 같은 방식으로 울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새로운 울림이 우리 영혼의 눈을 새로이 띄워 주어 더 고결한 경지에 이를 때 이 울림을 일으킨 말을 참된 말이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속담에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것이 있는데, 이 말이 가리킬 수 있는 모든 상황이 여기에서 논의하는, 말이 영혼을 고양시키는 경우는 아니라도 하더라도 이러한 경우를 포함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곧 빚진 사람이 빚 받을 사람한테 한 어떤 말이 그의 영혼을 더 높은 차원으로 이끄는 강렬한 감동을 일으켜 경제적인 차원의 천냥 손해가 더는 중요하지 않다는 관점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물론 말하는 사람의 사람됨과 상관없이 듣는 사람의 마음 상태가 영혼이 고양되는 이유가 될 수도 있다. 8세기 일본의 선승 반잔이 깨달음을 얻은 계기가 이러한 경우의 한 극단적인 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반잔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여러 해 노력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어느 날 시장을 걸어가는데 옆에 있는 푸줏간에서 주인과 손님이 나누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손님이 말했다. “고기 이 집에서 제일 좋은 걸로 주시오.” 그러자 주인이 맞받아쳤다. “우리 집에는 제일 좋은 고기가 따로 없습니다. 우리 집 고기는 모두 다 제일 좋은 고기입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반잔은 득도했다. 살아있는 모든 순간이 가장 좋은 순간임을 깨달았다. 푸줏간 주인이 한 말은 장삿꾼의 닳아빠진, 사실성도 떨어지는 말이었지만 반잔에게는 존재의 본질을 짚어주는 지혜의 말이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물론 그에게 깨달음을 간절히 원하는 수도자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이렇게 우리의 본질적 생명력을 증진시키는 언어는 쉽게 마주치기가 어려운데, 우리가 종교를 믿는 것은 이런 언어를 꾸준히 듣고 싶어서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교회에서 설교를 들을 때 이런 언어를 듣기를 원한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은 설교뿐만 아니라 종교생활 전반을 통해 이런 언어를 만나기를 원한다. 신약성서 요한복음 14:8에서 예수는 “내가 . . . 참이요 생명이니”라고 말하고, 같은 책 10:10에서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를 언어 차원에서 생각해보면 영혼을 더 풍성하게 하는 말, 그래서 참된 말을 나누는 것이 기독교를 믿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한다.  


맺는 말


    비록 많은 경우 진실은 고정된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항상 진실을 원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럴수록 진실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는 것은 가치있다고 할 것이다. 비단 지금이 선거철이어서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가 이른 바 ‘저신뢰 사회’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대한민국은 사기공화국이다”라는 심한 표현도 쓴다), 그래서 의심과 두려움이 많은 사회이기 때문에 참에 대해서 고찰해 보는 것이 더욱 의미있지 않나 생각한다. 진실에는 말뿐만 아니라 다른 영역도 관련되어 있는데 이 글에서는 진실된 말에 대해서 대강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듣는 말의 진실성을 따지는 것은 우리에게 진실된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는가를 성찰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삶터에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언어가 범람한다면 그것은 말하는 이들의 천박함과 위선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깊이와 진정성이 결여되어 있어서가 아닐까? 마음을 가다듬고 생각해 볼 문제이다.  


    * 필자소개  

영어강사. Rice Univ 언어학 박사(Ph.D) 후에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과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 웹진 <제3시대>



  1. 칼 세이건(Carl Sagan)의 Cosmos p.52에서 재인용(Ballantine Books, 1980). [본문으로]
  2. <20세기 영미 단편 소설 (The 20th Century English-American Short Stories)>, 양병택 편집, 서울: 신아사, 2013년, pp. 264-277. [본문으로]
  3. 같은 책, p.276. [본문으로]
  4. 작품 구절 번호 215c-d. 벤자민 조웟(Benjamin Jowett)의 영어 번역을 내가 우리말로 옮긴 것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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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는


'진짜 여성'에 대하여


- 장강명 소설 [댓글부대] 리뷰

 





(평범한 워킹맘, 페미니스트, 간간이 글쟁이로 변신)


0.


    이 글은 <댓글부대>에 다는 하나의 긴 댓글이다. 내 뒤엔 합포회도 없고, 수십만의 조작된 ‘좋아요’도 없다. 그러므로 이 글은 쏟아지는 다른 컨텐츠들에 금방 묻혀버릴 것이다. 그래도 구태여 이 글을 쓰는 건 <댓글부대>의 독자인 나, 불쾌하고 속상한 나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 대부분의 댓글이 그런 목적에서 쓰여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1.


   <댓글부대>의 주요 전선은 정치 성향이 아니라 젠더였다. 여초 커뮤니티를 붕괴시키는 것이 팀-알렙의 목적이어서만은 아니다. <댓글부대>에서 여성은 가장 하찮고 대상화된 존재인 동시에, 가장 중요하며 언제나 중심에 있다. 둘의 증오는 여성이 자의식을 가진 하나의 주체로 등장했다는 데에서 불꽃처럼 타오른다. 그들에게 여성의 주체성은 그 자체로 남성의 기득권 상실이다. 마음대로 가슴을 주무를 수 없고, 내키는대로 섹스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그들의 성욕을 반영하는 것처럼, <댓글부대>에서는 섹스가 매 챕터마다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룸살롱과 안마방에서 시작해 요정에 이르기까지 작품 내 등장하는 다양한 성매매 장소는 팀-알렙과 합포회의 남성성을 공고히 하기 위한 것이다. 이 남성성은 진보로 표방되는 여성(혹은 여성으로 표방되는 진보)에게 끊임없이 위협 받는데, 그래서 더욱 더, 팀-알렙과 합포회의 남자들은 본인들이 지배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성기로서의' 여성들 속으로 파묻힌다.


    팀-알렙과 합포회의 일원들은 성매매 업소에서만 쾌락과 안정감을 느낀다. 잠시동안 합포회의 일원이 미팅을 주선했던 ‘강연 카페'같은 곳들은, 그들이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될 트렌드이자 위협이다. SNS와 온라인을 지배하지 않으면, 지금의 돈도 권력도 깡그리 무력화될 것이라는 불안도 같은 방식으로 표출된다. 그들이 지배하지 못했고, 아직까지 알지 못하는 공간들은 그 자체로 그들에게 ‘위협'으로 다가선다. 그래서 합포회는 몇 천만 원의 돈을 투자하면서까지 ‘지능형 댓글 알바'인 팀 알렙-을 고용하는 것이다. 그들이 알지 못하는 공간을 붕괴시켜 이윽고 온라인을 지배하기 위해서. 


   이러한 맥락에서 합포회는 팀-알렙에게 진보적 정치 성향을 띤 여성 커뮤니티를 공격하라고 지시한다. 팀-알렙은 합포회에서 준비해 준 커뮤니티 아이디들을 활용하여 커뮤니티 안에서 논쟁의 불씨를 피우고 싸움을 부채질해가며 손쉽게 커뮤니티를 붕괴시킨다. 그들은 여성 커뮤니티에 내부 균열을 일으켜 회원 간 갈등을 촉발시켰을 뿐 아니라 그들의 이중성을 폭로하기도 했다. ‘사회의 폭력성’을 누구보다도 경계하는 이들이 조그마한 계기가 주어지자 내부에서 서로를 ‘폭력적’으로 몰아가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댓글부대>는 이렇게 주장하고 싶은 듯 했다. “온라인에서 제 아무리 여성/진보가 득세하는 것처럼 보인다해도 실제 세력은 남성/보수들의 손아귀에 있으며, 온라인도 그들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깨부술 수 있다”고. 그러나 <댓글부대>라는 작품을 통해서 우리가 들을 수 있는 다른 메세지는 이렇다. “아무리 온라인을 누군가 침입해서 깨부수더라도, 여성/진보의 위협은 사라지지 않는다.” 


   끝내 그들이 여성을 혐오하더라도 그들은 결국 커뮤니티를 부술 뿐이지, 여성을 부술 수 없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여초 커뮤니티 하나를 끝장낸다 하더라도, 그것이 진보의 ‘망조'를 불러낸 건 아니다. 손에 꼽는 국지전이고, 어차피 이들은 그들의 커뮤니티 하나를 잃었을 지언정 스스로의 정체성에 위협을 받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댓글부대>라는 작품 속에서 지속적으로 신변상의 위협을 느끼는 건 팀-알렙과 합포회다. 커뮤니티의 여성들은 기껏해야 고소에 대한 처벌을 두려워할 뿐이다.


2. 


    나는 현실과 허구의 영역이 모호할 정도로 세심하고 사실적으로 쓰여진 이 소설에서 유독 젠더 양상만 극단화되어 나타나고 있는 점에 주목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여성들 중에서도 그가 채택한 건 극단의 여성상이었다. 한 부류는 유흥업소에서 일하며 팀-알렙, 합포회 남성들에게 성적 쾌락을 주는 여성들이다. 그리고 다른 한 부류는 여초 사이트에서 정치적 성향을 뚜렷하게 내보이며 팀-알렙, 합포회를 은연 중에 비웃는다.(실제 비웃지 않았더라도, 팀-알렙과 합포회는 여초 커뮤니티의 회원들이 자신들을 비웃고 우습게 여긴다고 생각한다.)


   이 극단화된 여성상은 온라인의, 그것도 남초 커뮤니티의 상상적인 여성상을 그대로 베껴 놓은 듯 했다. 그에 비하면 그나마 작중의 남성들은 다양화된 편에 속한다. 여성이 사회적 약자임을 이해하고 있는 K신문 기자와 업소 여자에 대해 저속한 뒷담화를 나누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녀들과의 로맨스를 기대하는 찻탓캇, 여자는 그저 노리개로만 취급하는 합포회까지 나름의 스펙트럼을 갖추고 있다. 


   <댓글부대>는 온라인에서 과잉묘사된 여성을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마치 정말 있는 여자처럼, 어딘가에서 본 사람처럼. 사실 이건 남초의 보수 커뮤니티에서 여성 혐오를 부풀리는 데에 자주 사용되는 방법이다. 사실이 아닌 사건을 자신이 직접 본 것처럼 날조하면서 ‘역시 김치녀 클라스’라는 식으로 여성을 매다는 것이다. 


3.


   <댓글부대>의 남성 캐릭터는 입체적이다. 특히 <댓글부대>의 주요 화자인 찻탓캇이 그렇다. 본인들의 일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는 한편 어떤 불안감을 직시하고, 성매매 여성을 ‘더럽게’ 보면서도 그녀들에게 어떤 연민과 애정을 가진다. 그러나 <댓글부대>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모두 단편적이다. 이중적이라는 의미와는 다르다. 작중에 여성 ‘캐릭터’는 없다. 이 작품에서 여성은 그저 ‘관찰된 객체’로서만 존재한다. 


   <댓글부대>가 지닌 리스크는 ‘여성’이라고 생각한다. 장강명은 <댓글부대>가 진보와 보수, 그리고 온라인의 위험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설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작중에 설정된 여초 커뮤니티의 이미지와 성매매 업소들의 비중 때문에 사실 ‘정치적 성향’의 문제는 크게 보이지 않았다. 구태여 짚는다면 ‘역시 진보는 분열로 망하는군’이라는 뻔하디 뻔한 클리셰 정도. 오히려 읽혔던 건 이런 말이었다. “조작 가능한 건 ‘정치적 여론’이 아니라 ‘성별 간 적대감’이다.”


   나는 많은 온라인 커뮤니티들이 여성을 ‘된장녀/간장녀/생강녀’라는 식으로 개인들의 다양한 성질들을 과장하여 구분짓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어째서 우리 사회의 성적 구도는 늘 한결같이 ‘극단적’인가. 우리에게 필요한 건 여혐도, 여혐혐도 아니다. 그저 우리가 쉽게 구분하고 판단 짓지 못하는 개인들이 다양하게 있을 뿐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스타벅스를 좋아하면서(된장녀) 에코백을 메고 다니는(생강녀) 사람도 분명 있는 것처럼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죽기 전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그는 ‘극단’과 ‘중간적인 것’에 대해 언급했는데, 그 문단만을 여기 옮겨 본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모든 극단에 적용될 것이네. 다시 말하면 매우 신속한 것과 매우 느린 것,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검은 것과 흰 것 등등. 이처럼 모든 것에 있어서 극단은 희귀한 데 비해 그 중간적인 것은 대단히 많은 법이네. 자넨 이와 같은 것에 대하여 관찰해 본 일이 한 번도 없었나?”[각주:1]  


   나는 이 질문을 그대로 장강명에게 돌리고 싶다. ‘자넨 중간적인 여성에 대하여 관찰해 본 일이 한 번도 없었나?’[각주:2] 정말로?  



ⓒ 웹진 <제3시대>

  1. 플라톤 저, <파이돈> 중 [본문으로]
  2. 이전에도 나는 장강명 작품에서 느껴지는 이러한 아쉬움에 대하여 쓴 적이 있다. <표백>, <삶어녀 죽이기>, <한국이 싫어서> 의 여자 주인공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비현실성과 마녀성이 주제였다. 해당 글 원문은 여기서 확인 가능하다. http://ichungeoram.com/958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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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어리석은 삶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우리는 모든 일이 다 벌어지고 난 이후의 일을 알기에 그렇게까지 마음을 졸일 이유는 없지만, 성서에는 어리석기도 이렇게 어리석을까 싶은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전해오고 있다. 대표적으로 이삭은 그런 어리석은 사람들 중 하나다. 지금부터 그에 관한 이야기 중 두 가지만 조금 해 보려 한다.


장면 1. 모리아 산


    여기 야훼 하나님에게 번제를 드리러 가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다. 이 무리의 우두머리 아브라함은 일찍이 예전부터 그리 똑똑하고 세상 물정에 밝은 사람이 아니었다.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온 가족과 재산을 싸짊어지고 알지도 못하는 곳으로 떠나서 생고생을 자처하였고, 다 큰 조카가 다른 부족에 납치를 당하는 곤경에 빠지자 목숨을 걸고 가신들을 거느리고 멀리까지 가서 전쟁을 벌여 기어코 찾아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외에도 그는 수도 없이 어리석고 무모한 짓을 일삼던 자였다. 이 날의 번제도 사실 야훼 하나님의 무모한 명령으로부터 시작된 일이다. 누군가 이 사실을 먼저 알았었다면 어리석은 일이라고 욕하며 뜯어말렸을 그런 일 중에 하나다.

    아브라함의 어리석은 전력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그 못지않게 우습고 어리석은 이가 있었으니, 그의 아들 이삭이다. 그 정도 똥오줌 가릴 나이에 번제도 몇 번 드려본 아이라면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처음부터 아비에게 물어봤어야 할 질문이 있었다. 대체 “제물이 어디 있는지” 말이다. 그 당연한 질문을 제단이 있는 바로 아래에 와서야 질문하는 그 어리석음이란! 제물이 준비되어 있다는 아비의 말만 믿고 산을 올라 갔는데, 결국 닥친 일은 자기에게 오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어이없고 황당한 순간에 두 어리석은 이들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성경은 기록하지 않는다. 성경에서는 그 ‘어리석은’ 아들은 아비가 제단 위에 오르라고 하자 정말 올랐다는 것만 기록해 놓았다. 큰 저항이 없이 말이다. 이야기는 결국 극적인 하늘의 음성으로 자식 살해의 끔찍한 현장은 면하게 되었고, 그 집안의 씨가 크게 번성할 것이라는 창대한 계약이 맺어졌지만, 생과 사의 아주 얇은 경계에 날카롭게 베일뻔한 두 어리석은 이들 부자 사이에는 얼마간의 미묘하고도 민망한 침묵이 흘렀을 것이라 추측해 본다.  


장면 2. 우물


    이 어리석은 아들은 결국 어른이 되어서도 어리석음을 그치지 않는다. 그의 어리석음은 그가 우물을 파는 창세기 26장의 이야기에서 또 한번 드러난다. 정착해 살고 있던 가나안 땅에 큰 흉년이 들자 물이 풍부한 애굽으로 내려 가는 게 지혜로운 일이었건만, 아비의 어리석음을 닮아 야훼 하나님과의 약속을 저버리지 못하고 그는 또 야훼 하나님이 지시한 땅으로 유랑하여 가게 된다. 우물을 파는 일은 물을 얻는 일이기에 농사의 성패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물론, 이삭은 블레셋 그랄 땅에서 농사가 잘 되어 거부(巨富)가 되었지만 결국 ‘굴러온 돌’이었던 그는 그 땅의 토박이들에게 시기를 받고 모든 우물이 메워지는 봉변을 겪는다. 우물만 메워진 게 아니다. 그 땅의 왕으로부터 쫓겨난다. 자신은 성실히 일했을 뿐이고, 또한 풍요의 복을 받은 것 뿐인데, 어리석은 이삭은 두말없이 순순히 쫓겨남을 당한다. 하루 아침에 거처를 잃은 그와 그 가족은 골짜기로 숨어든다. 겨우 안정적이었던 정착민과 거부(巨富)의 삶에서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는 지긋지긋한 난민의 삶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그래도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쫓겨난 삶이라도 다시 시작해야 한다. 봉변 당했던 그 우물을 찾아가서 다시 팠다. 과거 힘이 있던 시절에는 별 볼일 없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본래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은 우물에마저 시비를 건다. 기껏 다시 파 놓은 우물인데, 큰 ‘싸움(에섹)’이 나고 또다시 귀중한 우물을 내준다. 뜨거운 뙤약볕에 피투성이가 된 몸을 이끌고 다시 우물을 판다. 새 우물을 파자 이윽고 다투었던 그 불한당 같은 놈들이 또 사람들을 보내어 그를 ‘대적(싯나)’하자 또다시 생명과도 같은 우물을 내주고 만다. 한 번 파기도 힘들다는 우물을 세 번씩이나 하고서야 이삭은 물과의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 


    대체 이 어리석고 무모한 일들을 일삼은 이야기들을 성서는 왜 기록해 놓았을까? 아니, 그저 기록한 것이 아니라 칭송하기까지 할까? 소위 이렇게 사리에 밝지 않고, 세상 물정 모르는 짓을 하는 어리석은 이들을 왜 ’믿음의 조상’이라고까지 일컬어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의 뿌리로 삼았을까? 사실, 따지고보면 이삭 외에도 성서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어리석게 행동한 이야기가 여과없이 기록되어 있다. 노아가 만든 배, 갈렙과 여호수아의 무모한 정탐보고, 룻이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고 타지에 남은 일 등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들이 행한 어리석은 일은 믿음의 본보기로 기록되어 있다. 크게는 역사서에 나오는 왕과 국가가 시행한 정책들에 대한 평가기준, 지혜서에 나오는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에 관한 판단 준칙들, 선지자들이 외친 수많은 예언과 상징행위들, 교회의 성립과정에서 벌어진 사도들과 초대교회 교인들의 이야기까지 성경은 무모하고도 어리석은 행동이 곧 믿음의 행동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사렛 출신 촌뜨기 목수 청년, 권력의 변두리만 돌다가 십자가에 고꾸라진 그 정치범을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행태는 또 무어란 말인가?  



    우리가 이 수수께끼를 풀어가기 위해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과연 ‘어리석음’, 그 정체가 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일 것이다. 이 문제를 짧은 글을 통해 그 질문에 모두 대답하기는 벅찬 일이다. 대신 얼마 전 한글로 번역된 체코 출신의 철학자이자 문화비평가인 아비탈 로넬(Avital Ronell)의 저작 『어리석음』(아비탈 로넬 지음, 강우성 옮김, 2015, 문학동네)은 ‘어리석음’을 다시 보게끔 만드는 통찰을 제공해 준다.  


    그는 ‘어리석음(Stupidity)’을 퇴치하려 애쓰고, 또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믿는 시도들이 곧 ‘유혹’이자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통상적으로 사람들이 ‘어리석음’을 대할 때 보이는 불쾌하고 짜증섞인 반응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어리석음은 그런 물질성을 초과하고 훼손하며, 멋대로 돌아다니다가, 몇 차례 승리를 거둔 뒤 퇴각하고는, 완강하게 거부하며 집으로 실려온다. 그러고는 복귀한다. 또한 어리석음은 본질적으로 소진 불가능한 것들과 연계되어 있기에, 지식을 피로하게 만들고 역사를 지치게 하는 그 무엇이다.[각주:1]

  

    로넬은 이런 ‘어리석음’에 대한 경멸어린 반응들은 계몽주의가 주창한 ‘앎의 주체’, ‘안다고 가정된 주체’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인간이 사유를 단련하여 어리석음에서 떨어져 나올 수 있다는 기대는 계몽주의로부터 비롯된 것인데,[각주:2] 데카르트 이후 질주해 온 ‘주체중심주의’, ‘계몽의 빛을 통해 안다고 가정된 주체’는 두 차례의 큰 전쟁과 국가사회주의의 대량학살이라는 광기를 겪으며 이런 사태의 주범으로 지목 당했고, 계몽주의는 힘을 잃는듯 보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위세가 되살아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교화의 진리는 잠시 가려지고 어두워지며 본질적으로 바로 잡을 수 있는 하나의 일탈을 보였을 뿐이라는 듯이 계몽주의의 원리들은 재생되고 있는 것”[각주:3]이다. 로넬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국가사회주의의 흥기에 맞선 (…) 자유, 국제주의, 그리고 “인간적인 것의 도덕성”에 관한 지속적 관심은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와 장 아메리의 『죄와 속죄의 저편』같은 결정적 증언에도 반영되어 있다.”[각주:4]고 말하며, 이러한 시도들에 대해 계몽주의의 거대한 폭력을 목도했음에도, ‘달리 의탁할 데가 없었을 수도 있고, 폭력이 행사된 이후의 유일한 마지막 희망을 거부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각주:5]이라 평한다.  


    그렇지만, 로넬은 계몽주의가 어리석음의 영원한 반란을 봉쇄하거나 거부하거나 진정시킬 만큼 그렇게 강력한지[각주:6]를 질문하고 있다. 그의 대답은 역시 ‘아니오’이다. ‘어리석음’이란 우리 안에 존재하는 ‘이물질’ 같은 형체를 지닌 형상도 아니며, 사회와 성격의 사실에 불과하지도 않으며, 우리의 사유의 구조 그 자체[각주:7]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리석음은 아주 뿌리 깊게 우리 안에 퍼져 있어 실제로 주체의 형성에 선행하고 그 형성이 결코 완성되지 못할 것을 늘 고지한다. 오히려 어리석음은 라깡이 말한 ‘그것, das Ding(The Thing)’과도 흡사하다. 어리석음, ‘그것’은 존재를 북돋아주기보다 세절분쇄의 공포와 환상에 대면시키기까지 한다.[각주:8] 로넬이 ‘그것 das Ding’과도 같이 작동하는 ‘어리석음’에 대한 묘사를 들어보자.  


    어리석음은 우리가 가장 취약한 순간을 노리고 어슬렁대며 또다른 기습을 준비한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확실히 알지 못한다면 바로 그 때 어리석음이 눈앞에 떡하니 나타나 우리를 위압하고, 실제로 일말의 동정심도 보여주지 않는다. 어리석음은 자서전을 쓰는 우리의 노력을 장악하여 우리의 ‘나’를 대신하며, 그로 인해 소심해진 ‘나’는 수치심에 사로잡힌다.[각주:9]  


    그리스도교 신앙은 온통 이 ‘das Ding(The Thing)’들의 부조화스러운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정점인 십자가는 어리석음이고, 늘 삶의 조화를 깨뜨리는 ‘그것’으로 작동한다. 고린도전서 1:23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표준새번역)” 바울 자신이 전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대 질서를 잘 아는 사람에게는 “Scandal(걸려 넘어지는 것, 장애물, 부정행위, 추문)”이며, 당시 이성적 수준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던 이방 및 헬라 세계에는 “Foolishness(어리석은 일)”이다. 당시 깨나 책을 읽었다는 이방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진리에 정통해 있다고 생각했고, 유대인들은 수천년간 이어온 종교적 법칙을 통해 세상을 통달했다고 여겼다.  


    하지만, 십자가는 그 모든 것에 균열을 내었다. 십자가 사건은 모두가 쓸모 없다고 여긴 모퉁이 돌을 이용하여 이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집을 지은 사건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하나님은 사회와 인간 세계의 통념 그 이상을 보여줌으로써 세상을 확장하고 계속적으로 창조하시는 분으로서 창조주이시다. 어줍짢게 둘로 가르는 열매(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죄에 대항하는 섭리자의 방식은 ‘제 3의 지대’를 열어젖히는 방식이다. 늘 선과 악을 구분하고 자기를 ‘선’의 영토에 구겨 넣어 안주하기 좋아하는 인간에게 하나님은 제 3의 영역을 ‘굳이’ 만드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파문을 일으키신다. 그래서 성서에서 ‘믿음’이라 부르는 행위의 방식은 질서와 기존의 흐름을 깨고 방해하며 등장한다. 마치 예수의 강론 중에 어린 아이가 모든 흐름을 뚫고 들어와 예수의 품에 그저 안겨 해맑게 웃는 방식으로, 네 명의 용기 있는 친구들 덕에 지붕으로부터 줄에 달아 내려오는 그 병자처럼, 예수가 말한 그 ‘하나님 나라’는 불시에 도래한다.  


    우리는 다시 계몽주의 이후-이후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최근 인공지능, SNS의 발전을 등에 업고 다시 ‘지식’의 이름으로, ‘앎’의 이름으로 재현될 것만 같은 ‘빛의 폭주’는 과거 계몽주의가 남긴 상흔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오래 전부터 인간의 그러한 계몽의 기획은 번번이 실패하고 좌절되어 왔고, 계몽의 빛이 빛나면 빛날수록 인간의 폭주에 대한 경보음일 때가 많았다. 인간에게 주어진 ‘어리석음’은 인간과 세계가 살고 있는 ‘삶’ 그 자체다.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어리석음, 그것(das Ding)이 거기에 있음을 물끄러미 응시하기를 제안한다. 직면하고 직시할 때, 우리는 타자와의 어렴풋한 교감과 세계와의 연대를 이루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처음에 언급한 이삭의 어리석음을 떠올려 본다. 모리아 땅으로 가는 내내 제물이 없음을 알고도 묵묵히 뚜벅뚜벅 걸어갔고, 결국 자기의 자리가 제단 위 한 가운데였음을 안 그 순간에도 순순히 그 시간을 견뎌 죽음 너머의 하나님 뜻을 완성하고자 했던 이삭, 우물을 파고 파고 또 파도 빼앗기고 빼앗기고 또 빼앗겨도 다시 묵묵히 삶의 우물을 판 이삭. 그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진정한 ‘어리석은 자’의 삶의 방식이 아닐까.  


ⓒ 웹진 <제3시대>



  1. 아비탈 로넬, 강우석 옮김, 『어리석음』 (서울 : 문학동네, 2015). 19쪽. [본문으로]
  2. 위의 책, 50쪽. [본문으로]
  3. 위의 책, 50쪽. [본문으로]
  4. 위의 책, 50쪽. [본문으로]
  5. 위의 책, 51쪽. [본문으로]
  6. 위의 책, 52쪽. [본문으로]
  7. 위의 책, 47쪽. [본문으로]
  8. 위의 책, 37쪽. [본문으로]
  9. 위의 책, 31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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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에서의 4년을 돌아보며



 

박혜인
(University of Chicago Divinity School, PhD student, Theology)


 


       유학 5년 차에 접어드는 지금, 아직도 무언가를/누군가를 위해 글을 쓴다는 건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왜 항상 마감일 직전까지 골수를 말리고 두뇌가 비도록 나를 짓누르는 두려움과 우울함에 짓눌려 바닥을 맛보기 전까지는 단어 하나조차 두드리지 못하는 걸까요. 추구하는 것은 완전함인데 안타깝게도 제 실존의 전부를 쥐어짜도 여전히 자신의 멍청함과 비루함에 짓눌려, 그저 시간에 떠밀려 의도치 않았던 생각들을 기워나가는 넝마주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형편이 이럴진대 누군가를 위해 글을 쓴다는 건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어떤 인연이든 이 글을 읽게 되는 딱 한 사람의 곁눈질만 상상해도 부담이 밀려옵니다. 이 창피함으로부터 언젠가 자유로울 수 있을지. 눈앞에 수많은 과오들이 스쳐 갑니다. 

       글을 부탁받고 간만에 웹진 제3시대, 우리나라 신문, 잡지 등 갖은 매체를 통해 모국어를 다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영어라는 우상에 파묻혀 한국말로 편지 한 장 써본 적 없이 4년의 시간을 보냈건만 정작 가슴을 울리고 머리를 잔뜩 긴장시키는 깊은 글들은 내가 그속에 태어나고 자라고 습득해온 언어로 쓰여있습니다. 모국어로 쓰인 글들의 내공 앞에 창피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고, 소통하고 생각하는 법을 되레 잃어버린 건 아닌지, 회의가 밀려오기도 했습니다.  

      해마다 방학 때면 고국으로 돌아가는 선후배들이 묻습니다. 왜 한번도 고향을 방문하지 않았느냐고. 치유되지 않은 열등감, 소통할 수도 구제받을 수도 없는 외로움은 입만 열면 동정을 사고 싶어 발버둥치지만 더 진솔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왜 아직 돌아갈 수 없을까. 차라리 타지에서 특이한 인간으로 사는 게, 23년을 내가 나고 자란 곳에서 존재하지 않는 삶으로 사는 것보다 어쩌면 쉬운 까닭입니다.  


       "시카고로 떠나는 것이 잘된 일일까요?"

       벌써 6년 전이 된 학부 마지막 해 졸업을 앞두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시카고에서 목회학석사 학위 프로그램의 입학허가를 받았을 때 진심으로 제 앞길을 축하해준 분들은, 그닥 많지 않았습니다. 워낙 다원주의적 경향이 강하고, 우리나라 주요 교단과의 연계성도 전무한, 공부하기는 까다롭고 졸업은 더욱 쉽지 않기로 악명높은 시카고에 합격했을 때 붙은 저로서는 그저 기적에 감사하며 넙죽 제게 주어진 숙명을 받아들였지만 저를 무척 아껴주셨던 선배님들의 불안과 의심 가득한 그 마지막 한 마디가 아직까지 잊히질 않습니다. “혜인자매, 나중에 귀국해서 직장을 못 구하는 건 둘째치더라도, 과연 그곳으로 가는 게 하나님 뜻일까요?”

       하나님의 뜻. 하루하루가 구덩이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 같은 슬픔이었던 학부시절에도 신학을 공부했다지만, 박사과정에 합격한 지금도 저는 저 헤아릴 수 없이 커다란 말 앞에 황망할 뿐 아무런 정립된 개념이 없습니다. 아마도 열번의 성경통독 이후에 왠만한 귀절은 암송하시는 어머니께 여쭈면, 더 시원한 답을 얻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울증 (양극성 장애; bipolar disorder) 진단을 공식적으로 받게 된 2007년 이후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몰지 않은 유일한 까닭은 ‘자살하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엄격한 교리였습니다. 지옥에 갈까봐 두려워하는 유치하지만 너무도 강렬한 그 실재에 대한 믿음 때문에 저는 살았습니다. 대학생활은 참 힘겨웠습니다. 감성좌파 재불작가 목수정씨의 요즘 젊은이들에 대한 일갈— 욕망하는 법을 잊고, 길들여지고, 생존하기 위해 철드는 그 비판의 대상이 오롯이 저자신인 것처럼, 애매한 나의 정체성을 비판하며, 자학하기 일쑤였습니다. 돈도 돈대로 없었지만, 나는 강남좌파도, 감성좌파도 아닌, 그냥 우울한 신학생 1인이었습니다. 자신을 가리켜 당당하게 ‘저는 OO주의자입니다’라고 말할 수도, 할 줄도 몰랐기에 당황스러운 존재감은 곧 진보적인 운동성과 괴리된 삶이었고 노동운동에 헌신했던 아버지의 이름으로 운동권 일선에서 투쟁하고 공부하던 선배들과 통성명은 할 수 있었지만 내 마음과 생각을 제대로 나누지는 못했습니다. “너는 죽고사는 문제를 감당해본 적이 없잖냐,” 이시대 젊은이로 산다는 게 얼마나 힘겹고 치열한 노동인지, 다른 역사를 살아가는 사람끼리 고통을 비교한다는 게 얼마나 역겨운지 볼멘소리로 답하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단한번도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차마. 내 머리, 내 몸뚱이, 나자신의 이성과 감정조차 통제할 수 없다는 선고를 받은 이후 세상은 좌로도 우로도 판가름할 수 없는 기묘하고도 잔인한 무대로 보였습니다.  

       수면제를 먹고 깬 다음날 아침 기계처럼 반복되는 학교의 일상 가운데 내면에 어떤 변화도, 내적 진보를 감지할 수 없어서 서글픈, 이렇게 어디에도 누군가에게도 속하지 못해서 슬픈 날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정신질환은 하나님보다 피조물을 더 사랑했을 때 필연적으로 인간이 감당해야 할 형벌이라든가, 성경에 근거한 귀신들림, 심지어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암묵적 동의아래 일어나는 악마의 장난질이라는 해석을 끊임없이 교회에서 반복할 때마다 저는 더 비참해졌습니다. 선하고 완벽하신 하나님의 통치에서 나가떨어진 돌쩌귀가 된 기분으로 4년을 채웠고, “너 때문에 제명에 못살겠다” 우시던 아버지를 뒤로하고 저는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시카고는 그렇잖아도 삶이 버거운 제게 편집증, 피해망상, 공황장애, 주의력결핍이라는 덤터기를 씌웠습니다. 전화로 음식을 주문하거나 조금만 당황해도 심장박동이 주체할 수 없을만큼 빨라지며 벌벌 떨기 일쑤였고 이 현상이 세미나 중 발표 때 더 심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지식생산의 최정점에 있는 교수들에게 자신감 없어보이는 외국학생의 말더듬은 당연히 용인해주기 힘든 사안이었고 어떤 수업에서는 곧장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내나라에서는 죽고플 만큼 우울했어도 나름 똑똑한, 통찰력 있는 신학생이었지만 상황이 이쯤되니 미국대학원에서 관계를 쌓아가는 것에 대한 공포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이 힘겨운 공부를 묵묵히 지원해주시는 부모님에 대한 부채감과 죄책감, 한편으로는 자괴감과 열패감에 시달리면서 하릴없이, 끝이 보이지 않는 지난함에 어쩔 수 없이 할 수 있는 공부만 해나가며 터질 듯한 머리를 재웠습니다.  

       때로는 새 아침을 맞이하며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 도서관을 향해 한 걸음을 떼는 것 자체도 저혼자 우주를 감내하듯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했습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는 것— 지식이 최고의 자산인 학계에서 이해하지/받지 못하고 따라서 소통하지 못한다는 저의 현실에 석사 4년은 좌절로 가득했습니다. 절망이라는 감정은 익숙해지면 좀 덜 아픈 동무가 될 줄 알았건만, 매번 쓰린 것이 오랜 시간이 지나도 면역이 되질 않았습니다.  

       그렇게 마음 깊이 새겨진 상처는 아물지 않았지만 서서히 그 상처로 인해, 조울증이라는 의학 진단보다도 중요한 절망의 깊이, 그 자체가 어느덧 제 신학공부의 주제로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조울증을 앓는/(감추지 않아 특이한)아시안/여성’으로 조심스럽게, 아주 느리게, 진득하게 가리지 않고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습니다. 끊임없는 의심과 자기혐오, 학대, 우울은 인종과 성별, 국적을 가리지 않는 질병임을 배웠고 이들과 사랑, 욕망, 가난, 결핍, 좌절, 절망, 젊음의 한계와 덫, 희망, 평안, 용기, 안식, 연대, 위로, 공감에 대해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학교 바깥에서는 침례교 설교자이신 흑인해방신학자 지도교수님 (Dwight N. Hopkins)을 찾아가 저의 진단에 대해 솔직히 말씀드렸고 퇴짜를 맞지 않았습니다 (여태까지는). 목회상담학, 정신의학 관련수업을 자유롭게 수강하면서 내면의 고통을 파고들라치면 사실 뿌리깊은 인종차별, 식민주의 역사, 경제양극화, 가식적인 세월호 인양을 두고 여태 치유되지 못한 피해자 가족들의 상처와 같이 시민을 억압하여 정상인을 병자로 내모는 사회의 부조리, 불의를 함께 따지지 않을 수 없음을 함께 배웠습니다. 내가 자라난, 그치만 떠나온 그 환경에서는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아 던질 수 없던, 뇌리에 깊이 파묻혀 있던 질문들이 머리를 들고 탐구되기를 외치는 것만 같았습니다.  
       미국 지식사회에서는 이미 트라우마, 내적치유나 신경과학을 논함에 있어 불교명상수행과 철학의 깊이와 유용성이 커다란 영역을 차지하고 있어 마음챙김 (mindfulness)에 대해 저또한 선불교 수행자인 친구로부터 아주 조금이나마 배우고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뜻’이나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생각할 때마다 제가 시카고에서 딛는 걸음이 두려움에 떨립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여기서 늦게나마 참 나다운 내가, 아프지만 태어나고 있는 것을 느낀다는 점입니다. 다른 과에 가서 신학을 공부한다고 하니 마치 원시인을 보듯, ‘쟤가 무엇 때문에 여길 왔나’ 의구심이 가득찬 눈빛도 이젠 지겹지 않습니다. 저같은 부류는 종교성의 미신을 타파한 세속화한 근현대로부터 시간을 영성으로 ‘회귀’시키려는 보수적인 종족인 마냥, 과연 수업에 도움이 될런지 쳐다보아도 괜찮습니다. 신학이 세대를 거듭해 인문학과 과학, 문화와 사회 변화에 응답하며 끊임없이 정체성의 진보를 꾀해왔듯이 저도 배움의 도정에 있는 사람으로서 겸손히 걸을 뿐입니다.  
       워낙 관심분야가 다양하고 귀가 얇아 신학 공부도 체계적 조직적으로보다는 폭식과 잡식에 가깝게 해온 터라 지속적으로 충실한 글들을 거둘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를 지금 여기 있게 한 모든 삶의 부분들이, 우리가 차마 위로하고 회복하지 못한 아픔을 보듬으며 진정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더불어 알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신학생으로, 신학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던 이유— 희망, 구원, 사랑이라는 단어가 그립고 더 절실해지는 순간들을 나눌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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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독일어 성서 번역에 깃든 해체성[각주:1]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한신대 겸임교수)

 


 

    종교개혁은 신으로부터 독립한 인간을 선언한 사건이었을 뿐 아니라, 유럽이 국민국가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던 도화선이었습니다. 그 후 유럽은 국민국가의 틀 속에서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을 경쟁적으로 도입하게 됩니다. 즉, 근대의 가장 큰 외형적 특징은 국민국가와 자본주의의 확립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의 시작이 종교개혁이었다는 것이죠. 이것이 종교개혁이 갖는 정치-사회학적 의미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위에서 언급한 종교개혁을 둘러싼 해석은 사후적으로 구성된 종교개혁의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자들이 실제로 이렇게 거창한 목적의식을 갖고 종교개혁을 진행시켰는지는 미지수입니다. 실제로 루터는 종교개혁을 기점으로 양분되는 종교개혁 이전의 유럽과 이후의 유럽을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저 소박하게 교회의 개혁을 주장했을 뿐이죠. 이런 자기의 시도가 중세의 종말을 고하는 비약적 사태로 확대되는 것에 대해 루터는 적잖이 당혹스러워 하지 않았을까요? 

    1517년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 교회의 문에 붙여 놓은 95개 논제로 된 “면제부의 효력에 관한 반박문(Disputation)”에서 루터는 면죄부의 효력을 지적하는 95개 논제를 제시했습니다. 루터의 반박문이 파괴력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인쇄술의 발달이 한몫을 차지합니다. 1450년경부터 보급되기 시작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루터의 반박문을 독일 전역으로 확장시키는 데 일조하였습니다. 원래 루터의 반박문은 라틴어였으나 독일어 번역으로도 인쇄되어 전파되면서 독일국민들에게 넓리 읽히면서 반향을 일으켰는데 아마도 루터는 그 파급력에 적잖이 놀랐을 것이고, 이를 계기로 독일어 성서번역에 대한 상상을 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저는 비텐베르크 대학교회에 붙은 95개조 반박문은 종교개혁의 예고편이었고, 진정한 종교개혁은 루터의 독일어성서 번역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중세 천년을 지배했던 라틴어 성경, 라틴어 강론, 라틴어로 구성된 각종 교회언어들에 균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즉 텍스트에 대한 해체가 루터의 독일어 성서 번역으로 도모되기 시작한 것이죠.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대타자의 목소리, ‘아버지의 이름으로’상징되는 교회의 권력은 일차적으로 경전이 갖는 권위와 숭고함으로부터 나옵니다. 하지만, 루터에게 있어 믿음이란 교회의 권력과 전통에서부터 기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이란 성경의 믿음뿐입니다. 루터는 이 믿음을 기초로 교회와 사회와 문화 활동 전반이 운영되기를 기대했습니다. 따라서 성경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급선무였고, 이러한 신념아래에서 루터는 성경번역에 착수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성경에 대한 번역은 당시로서는 그 자체로 교회 권력에 대한 도전을 의미했습니다. 언어란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사고의 방식과 삶의 태도를 결정합니다. 이런 이유로 역사에 등장했던 거의 모든 권력은 언어를 지배하고자 했습니다. 언어가 곧 정신이기에 그렇습니다. 루터 당시 라틴어는 1000년 가까이 전 유럽을 지배했던 삶의 조건이자 전제였습니다. 권력은 이에 대한 누수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루터의 독일어판 성경은 교황의 명령으로 독일 전역에서 소각되어졌고, 영어로 성경을 번역했던 윌리엄 틴텔(1484-1536)은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언어가 단순한 담화의 도구가 아니라 그 이상의 가치와 의미가 담겨져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루터에 의해 감행된 독일어 성서 번역은 신앙의 자유, 학문의 자유를 견인하면서 중세의 해체를 선언한 사건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루터가 외쳤던 Sola Scriptura! (오직 성서!)가 해체주의자 데리다의“텍스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각주:2]라는 말과 상동성이 있다고 봅니다. 통상 해체주의는 파괴, 전복,폭력 등의 용어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어렵고 무거운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데리다를 옹호하는 학자들마다 제일 먼저 시도하는 것은 해체주의에 대한 선입견을 불식시키는 작업입니다. 데리다에게 있어 해체란 즉물적인 의미에서 무엇인가를 파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있어 해체란 기존 텍스트 안에 묻혀있었던, 저자 조차도 의도하지 못했던 진실을 발굴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텍스트 해석의 지평을 확장하는 과정 혹은 절차 일반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데리다가 지니고 있었던 문헌학자로서의 특이한 이력의 소산이라 할 수 있는데, 그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후설, 하이데거, 소쉬르 등의 책을 면밀히 분석하면서 기존의 관점이 아닌 새로운 시각으로 그들의 텍스트를 읽어냅니다.[각주:3] 데리다가 플라톤의 『티마이오스 Timaeus』를 읽으며 플라톤조차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코라(Khora)의 중요성을 언급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각주:4] ‘코라’는 조물주인 데미우르고스가 우주를 창조 할 때 물질의 역할을 담당합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세상은 이데아의 모방(imitation)이고, 세상속에서 이데아가 구현되는 터, 질료, 대지가 바로 “코라”입니다. 이데아가 질서(Order)라면 코라는 혼돈(Chaos)을 상징합니다. 흔히 서양 철학의 오래된 질문이라 할 수 있는 형상과 질료, 주관과 객관의 조화란 범박하게 말하면 이데아를 코라에 이식함으로 코라의 혼동을 극복하고 현실가운데 안정과 질서, 그리고 통일을 가지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데리다는 플라톤 스스로도 의도하지 못했던 코라의 의미를 찾아 집요하게 파고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발견한 것이‘코라 없이는 이데아도 없다’는 것입니다. 코라는 지금까지 논외의 영역이었고, 단지 이데아가 발현되는 과정에서 소모되는 것으로 치부되었었는데, 데리다의 꼼꼼한 텍스트 분석에 의해 코라는 이데아 못지않은 위상을 부여받게 된것이죠. 코라에 이데아가 심겨져야 비로소 그것이 발현되는 것으로 말입니다. 이렇듯 그동안 묻혀있었던 텍스트의 의미를 재발견하는 것, 혹은 그 과정 일반을 데리다는 ‘deconstruction’이라 불렀습니다.  

    데리다의 해체를 좀 더 해석학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존 재현의 형이상학은 텍스트 밖에 로고스로 상징되는 빛이 있어 텍스트 안으로 그 빛을 비추어 텍스트 속에 숨어있는 천상의 진리를 발견하는 시스템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자궁에 있는 태아가 탯줄에 의지해 산모와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천상의 진리인 이데아는 이성의 원리인 로고스에 의해 인도되어 텍스트로 들어와 진주처럼 박혀 있는 것이죠.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진리들을 우리의 언어로 다 설명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것을 로고스중심주의(Logocentrism)이라 부르는데, 데리다에게 있어 로고스중심주의는 플라톤이래로 서구철학을 근거짓는 지침이었습니다. 로고스중심주의 하에서는 ‘말하는 것’(시니피앙)과 ‘말하려는 의미’(시니피에)가 일치합니다. 이것이 대상과 인식의 일치, 주관과 객관의 통일을 매개하여 진리에 대한 확증을 보증하면서 서구 형이상학을 지탱하는 믿음으로 자리잡았던 것입니다. 데리다는 이러한 로고스중심주의가 이룩한 연쇄고리를 서구 정신사가 성취한 허상이라 지목하면서 그것에 대한 해체를 주장하였던 것입니다.[각주:5]

    데리다가 텍스트 밖에서 텍스트를 짓누르는 로고스 중심주의에 저항하면서 텍스트의 의미를 재조명했던 것처럼, 루터의 독일어 성서번역은 텍스트 밖에 존재하면서 텍스트를 강제하던 교회의 권력과 라틴어 중심주의에서 텍스트를 해방시켰던 사건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텍스트를 텍스트이게 끔 했던 사건, 즉 텍스트 스스로가 말하게끔 선언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갇혀 있었던 성서해석의 올무를 풀어줌으로써 말씀은 드디어 회중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각 사람들과 소통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각각의 이해와 반응과 행동이 첨가되면서 성서는 이전의 사물화되었던 경전이 아니라 비로소 살아 숨쉬는 말씀으로, 박제화된 관념이 아니라 이 땅을 변혁시키는 사건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루터의 독일어 성서 번역은 이러한 영감을 우리들에게 선사하면서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성서를 통해 이루어지는 이 땅의 변혁을 꿈꾸게 합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감리교 기관지 <기독교세계> 4월호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본문으로]
  2. “There is nothing outside of the text”-Jacques Derrida, Of Grammatology. Corrected edition. Trans. Gayatri Chakravorty Spivak ,(Baltimore and London: Johns Hopkins Press, 1997), 158. [본문으로]
  3. “내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독해하고자 했던 방식은 이러한 유산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반복하고 보존하는 그런 방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떻게 그들의 사유가 작동하고 있는지 또는 작동하지 않는지를 발견하고자 하는, 그리고 그들이 남긴 언어 자료 안의 긴장, 모순, 이질성을 발견하고자 하는 그런 하나의 분석이다”- Jacques Derrida, Deconstruction in a Nutshell. Ed. John D. Caputo, (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1997), 9. [본문으로]
  4. “나는 플라톤을 연구하는 매 순간마다 그의 작품 안에 있는 이질성(heterogeneity)을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예를 들어 티마이오스에 등장하는 코라가 어떻게 플라톤이 전제하고 있는 체제 속에서 양립할 수 없는지 찾으려고 한다. 나는 플라톤에 대한 존경과 사랑, 그리고 플라톤을 충실히 이해하기 위해 그의 작품에 대한 작용과 반작용을 공히 분석한다.”- Ibid. [본문으로]
  5. 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18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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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으로 잠겼던 수몰지역에 땅이 드러나고 넓은 평야가 펼쳐졌다.




제 부모도 누려보지 못한 평야를 활보하다.. 사냥을 당하였다. 



시선을 빼앗는 갑작스런 빛이, 망막을 가득 채울 때...

탕~~!

헤드라이트에 묶인 고라니가 쓰러졌다.



이십 청년의 망막에 빛이 침입하여,

탕~~!

거죽만 남은 오십중년이 쓰러졌다.



 * 진안고원의 밤길을 운전하다보면, 헤드라이트를 보고 순간 그 자리에 얼음이 되어버리는 고라니를 종종 만난다. 헤드라이트의 강한 빛이 고라니의 망막에 부딪히면 순간 맹인이 된 것처럼 꼼짝을 못하는데, 이때 고라니는 돌진하는 차를 피하지 못하고 로드킬을 당한다. 수몰지역에서의 고라니의 참사는 이런 고라니의 습성을 이용한 사냥꾼의 소행이 분명하다.  


   난 20대의 젊은 날,  '종교'라는 강한 빛에 망막을 강탈당하였는데, 50이 되어서야 ‘무능한 남편, 부끄러운 애비’가 된 나를 발견케 되었다. "수치스럽다." 그것은 수몰지역에서 벗겨져 껍질만 남겨진 존재도 없는 고라니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젊은 날, 나를 사냥한 자여!!!!!!!!



 

 

 이수만 作 (한백교회 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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