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바라지 골목을 둘러싼 서사학[각주:1]




이상철
(본지 편집인 / 한백교회 담임목사)

 


프롤로그: 옥바라지 골목 잔혹사


    옥바라지 골목은 서울 종로구 무악동 인왕산 자락에 위치한다. 이곳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 것은 일제 강점기부터다. 한일합방에 성공한 일본은 체제에 반하는 독립운동가나 불순분자들을 잡아 감옥에 쳐넣었는데 그곳이 바로 서대문형무소이다. 옥에 갇힌 남편과 아들, 그리고 딸의 옥바라지를 위해 서대문 감옥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기거할 곳을 마련하면서 동네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것이 옥바라지 골목의 시작이다. 김구, 여운형, 김좌진, 손병희, 유관순 같은 인물들이 일제 강점기때 이곳에 투옥되었었고, 해방 후 4.19, 5.16을 거치면서는 시국사범들이 주로 그곳에 수감되었다. 대법원 판결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되었던 악명 높았던 인혁당 사건(1975년)도 서대문 형무소 역사에는 또렷히 새겨져 있다. 이렇듯 옥바라지 골목은 일제 강점기 부터 박정희 독재시대까지 한국현대사의 비극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몇 안되는 장소이다. 1987년 경기도 의왕으로 구치소가 옮겨 가면서 옥바라지 골목은 점차 쇠퇴하였고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재개발 이야기가 나오더니 2015년 7월 주민 70% 이상의 동의를 받아 재개발 정비사업 관리처분인가를 받았단다. 그리고 올초부터 철거가 시작되었다. 현재는 최은아씨와 구본장 여관 건물주 이길자 사장만이 남아 외로운 투쟁중이고... 옥바라지 골목은 다양한 서사와 함의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이슈가 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지난 5월초에 몇몇 단체들이 뒤늦게 대책위를 꾸렸고 감신, 장신, 한신에 재학중인 신학생과 졸업생들이 합류하면서 옥바라지 선교센터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지난 5월 11일부터 매주 수요일마다 신학도들이 기도회를 이끌면서 옥바라지 골목 사수를 위한 마음을 모아가고 있다.  


<옥바라지 골목>


공간의 몰락


    나는 2004년에 미국 시카고로 유학을 떠났다가 2014년에 학위를 마치고 귀국했다. 10년 만에 귀환한 셈이다. 5년 동안 해외에 나갔다가 들어온 사람은 1년 반, 10년 해외에 나갔다가 들어온 사람은 적응하는데 3년 걸린다고 누가 말했줬는데, 나는 귀국한지 2년이 지났으니 앞으로 한국땅에 완전적응하려면 1년 더 남은 셈인가? 어쨌든 아직까지 난 살짝 어리버리하다.   

   10년 만에 돌아온 조국은 정권이 바뀌어 있었다. 2004년 미국 갈 때는 대통령이 노무현이었는데, 2014년에 돌아와 보니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이명박도 대통령을 해먹었다고 누가 내게 귀띔해 주었다. 10년 전 정권과 현 정권이 다르다라는 현실보다 나를 몇 배나 당혹스럽게 만든 것은 달라진 서울의 모습이었다. 사라진 골목과 변해버린 광장과 물이 흐르는 청계천, 철거된 후진 건물들과 새롭게 섹시하게 들어서는 건물 사이에서 귀국 한지 2년이 다 되어 가는 나는 여전히 길을 잃고 배회한다. 

    달라진 거리의 풍경을 위해 용산에서는 사람들이 자본이라는 제단위로 올라가 희생양으로 바쳐졌다고 언젠가 누가 나에게 고자질을 했던 것이 기억난다. 용산뿐만이 아니란다. 4대강이 흐르는 국토 곳곳에서, 밀양으로, 강정으로 대표되는 수많은 대한민국의 그곳에서 자본의 행진은 지속된다. 그리고 이제 이곳 서대문 옥바라지 골목으로 악령이 찾아왔다. 

    지금 돌이켜보니 옥바라지 골목의 비극이 시작되기 전에 한 가지 징후가 있었다. 작년에 서대문 고가가 철거된 사건이었다. 예전에 서대문고가 밑에 화양극장이라고 있었는데 고등학교때 중간고사 끝나고 미성년자관람불가 영화보고 몰래 숨어서 담배도 처음 펴보고 했던 골목이 있었다. 그 골목이 사라졌다. 다행이다. 1989년으로 기억하는데, 그 무렵 대한민국은 임수경과 문익환 목사님 방북으로 인한 통일운동이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당시 기청과 감청이 중심이 되었던 기독청년들이 아현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시내로 데모를 하러 갈라치면 꼭 서대문 고가 밑에서 담배 한 대씩 피고 갔었는데...그 고가가 사라졌다. 우리의 칙칙하고 암울했던 과거와 기억이 사라져 홀가분은 한데 어딘가 영 마음은 편치 않다. 육중했던 고가가 사라지자 서대문로터리는 너무나 밝고 화려한 거리로 변모되었다. 새롭게 상권이 조성되면서 후진 건물들은 철거되고 집값도 오르고 땅값도 올랐다. 살짝, 아니 많이 앞으로 닥쳐올 한백교회 월세 인상이 걱정된다.(※참고로 한백교회는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2번 출구 롯데리아 골목에 위치한다)   


기억의 종말


    앞서도 말했듯이 정권이 바뀐 것 보다 내가 놀던 동네와 내가 활보했던 거리가 달라졌다는 것이 귀국 후 나에게 다가왔던 가장 큰 당혹감이었다. 무조건 7080을 낭만적으로 회고하고, 아무런 비판없이 그때 그 시절에 대한 주례사적 비평을 쏟아 붓는 것은 민망하고 유치한 일이다. 우리는 더 큰 거리로 나가야 하고, 더 큰 세상으로 진출해야 한다. 그래서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배워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리 기분이 엿 같은 걸까?  

    미국에서 살았던 학교 기숙사가 하도 낡고 삐걱거려 도대체 언제 이 건물이 세워졌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는데 1893년 시카고 무역박람회에 참여하기 위해 세계에서 왔던 각국 대표단들의 숙박을 위해 지어졌다고 답했던 학교 직원의 말이 떠오른다. 당시 우리나라도 COREA라는 이름으로 참여했다는 그 박람회 말이다. 백년이 지났어도 건물과 도로의 변화와 차이를 별로 느낄 수 없는 지역에서 살다 돌아온 나로서는 10년 만에 변한 조국 산하가 놀랍고 경이롭다.  

    하지만 점점 살아보니 이 변화가 마냥 즐겁거나 유쾌하지 만은 않다. 모종의 정권적 차원의 음모 같은 것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의심같은 것도 들고... 그 혐의의 내용은 대략 이런 것이다. 거리와 동네가 사라지고 달라지고 있는 것은 각각의 장소와 공간에 베어있는 과거 그곳에서 벌어졌던 서사에 대한 세탁, 혹은 그 장소성으로부터 야기되는 기억의 연쇄를 차단하거나 거세하기 위한 정권적 차원의 노력 아닐까?  

    실례로 귀국하여 뒤늦게 안 사실인데 큰돈을 들여 권력은 온 나라의 길 이름과 집주소를 새롭게 개명하였다. 옛 지명을 다 지우고 새 주소로 싹 교체한 것이다. 현대철학이 이룩한 성과중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바로 언어의 재발견이다. 그전까지 언어란 단지 사물이 지닌 의미를 겉으로 외화시키는 도구에 불과했다. 하지만 언어는 현대철학에서 와서 더 이상 보조적 차원의 그 무엇이 아니다. 언어는 사건을 일으키는 단서가 되거나 실마리가 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 언어는 사건 그 자체가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도로명과 집주소를 바꾸는 일, 시내의 대표적 상징적 건물을 부수고 파헤치는 일은 장소성과 연관된 사건의 의미와 의식을 다시 주조하겠다는 정권적 차원의 야욕을 드러내 보인 것이다.

    실제로 그 약발은 먹혔다. 돌아와서 내가 만나본 사람들의 상당수는 예전 거리의 이름과 옛날 동네어귀에서 벌어졌던 사건들을 회상하는 것에 대해 낯설어하고 불편해 한다. 과거 기억을 떠올리고 옛 동네에서 벌어진 사건을 들먹이는 나를 보며 시대착오적이라고 충고해주는 친구도 있었고, 나를 측은하게 여겨주는 고마운 동무도 있었다. 순간 문득 이런 불안감이 밀려왔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멍청하고 파렴치하고 양아치 같고 천박한 정권이 민중들이 지니는 기억의 매커니즘을 알아차린 것은 아닐는지. 4월과 5월 그리고 6월이 되면, 거리와 광장에서 출렁이며 메아리 쳐졌던 민중들의 함성 안에 감추어져 있는 봉기의 기억과 그 기억의 반복이라는 매커니즘을 말이다. 그것이 지니는 파괴력을 성실히 학습한 후 그것에 대처하는 자세를 MB와 그네가 터득했던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우선적으로 민중들이 지닌 기억의 고리를 하나씩 절단하기로 작정을 했고, 잘려나간 지면을 잘 다지고 정리하면서 새로운 기억의 공간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라면? 새롭게 조성된 광장과 거리에서 제한적으로 뛰어 놀게 하고, 폼 나게 단장된 동네에서 세계시민이 되어 촌티내지 말고 세련되게 그 문화를 향유하라고 다독이고 있다면 말이다. (이상은 얼마 전 달라진 종로길과 광화문 광장, 그리고 고가가 사라진 서대문에 이르는 도심길을 걸으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옥바라지 선교센터 포럼>



에필로그: 문설주에 피를 바른 그 집, 옥바라지 선교센터

  

    악령이 종로와 광화문을 지나 서대문을 거쳐 북으로 방향을 틀어 옥바라지 골목에 다달았다. 그리고 그곳에 옥바라지 선교센터가 있다. 센터라고는 하지만 길 한모둥이에 설치된 남루하고 초라한 천막이다. 그곳으로 사람이 모이고 그곳에서 매주 수요일 저녁 예배를 드린다. 그 탓에 악령이 잠시 발목이 잡힌 듯하다. 

    문득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모세의 10번째 재앙이 떠오른다. 처음 난 것은 다 죽는다는 신탁말이다. 하나님의 영이 온 나라를 스쳐지나가면서 장자들의 목숨을 거두어 갈 텐데 그때 문설주에 피를 바른 집은 죽음의 그림자가 피해갔었다. 21세기 대한민국 서울, 하나님의 영은 자본의 악령으로 대체되었고, 그 악령이 온 서울을, 전 국토를 유린하고 있다. 문설주에 피를 바른 집은 죽음을 면한다고 했는데, 나는 문설주에 피를 바른 그 집이 옥바라지 선교센터가 되기를 소망한다. 

   옥바라지 투쟁은 단순히 공간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 아니다. 그것은 기억과 기록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들의 분노이고, 역사에 대한 신뢰와 소망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사람들의 양심이다. 사물과 인간에 대한 예의, 시간과 장소에 대한 성찰, 그리고 신앙과 믿음에 관하여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투쟁의 기록은 우리에게 의미있는 전망과 책임있는 행위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계속 던지면서 답을 하게 한다.   

    나는 옥바라지 선교센터에서 활동하는 젊은 신학도들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다시 작동되는 것을 본다. 부디 자본의 악령이 그들을 보고 도망하기를, 그리고 자본의 횡포에 시달려 낙담한 사람들, 자본의 악령이 들린 사람들에게 옥바라지 선교 센터가 부적이 되고 퇴마사가 되어 악령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는 싸인으로 작동하기를 소망한다. 현장을 지키고 있는 여러 손길들에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보내며... (간만에) 아멘!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지난 7월 11일 옥바라지 선교센터 포럼에서 발표한 글을 수정 보완한 것임을 밝힌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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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ool
    2017.01.16 01:15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옥바라지 골목은 서울 종로구 무악동 인왕산 자락에 위치한다. 이곳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 것은 일제 강점기부터다. 한일합방에 성공한 일본은 체제에 반하는 독립운동가나 불순분자들을 잡아 감옥에 쳐넣었는데 그곳이 바로 서대문형무소이다. 옥에 갇힌 남편과 아들, 그리고 딸의 옥바라지를 위해 서대문 감옥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기거할 곳을 마련하면서 동네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것이 옥바라지 골목의 시작이다.

    ㅡㅡㅡ>>>

    이 대목에 대해서 구체적근거가 있으신가요???
  2. Sey
    2017.01.16 15:29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다음의 텍스트를 참조하시면 좋을것같습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www&artid=201605262047005&code=990100



교회의 여성혐오를 다루지 않고서는 


500주년 종교개혁을 논하지 말라





김나미

(미국 Spelman College 교수, 종교학)




     [작은 것들의 신] (The God of Small Things)의 저자로 잘 알려진 아룬다티 로이(Arundhati Roy)는 “전통”과 “시장 중심의 신자유주의”로 부터 동시에 공격을 받는 인도의 여성들이 어떻게 많은 투쟁을 이끌게 되었는지에 관한 인터뷰에서, 인도는 “여러 세기를 동시에 살고 있는 나라이다”라고 말한다.[각주:1] 인도란 나라에는 여성을 상대로 여러 형태의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은 반면에, 동시에 이런 폭력에 저항하는 강하고, 독립적이고, 급진적이며, 독창적인 생각을 하는 여성들도 많다는 것이다. 그렇다. 한국이란 나라도 지금 여러 세기를 동시에 살고 있다. 21세기에 살고 있지만 ‘과거’에나 행해졌을 법한 여성들에 대한 차별, 혐오, 비하, 희롱, 폭력, 살해를 도심지에서, 동네 골목길에서, 섬에서, 산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병원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집안에서 서슴없이 행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물론, 이에 저항하는 여성들도 적지않다. 


    서른명의 학생들과 포르투갈에서 2주 단기 수업을 하는 동안 서울 강남역 근처의 공용화장실에서 일어난 여성살해 사건을 전해 들었다. 그 때 마침 포르투갈의 한 여성운동단체를 방문하여 포르투갈 여성들이 직면한 여러가지 이슈들에 관해서 듣고, 포르투갈에서도 ‘여성살해’ (femicide)가 얼마나 큰 사회적 문제인지, 또 여성들이 이에 어떻게 저항하는 지에 관해서 막 접한 터였다. 공용화장실에서 일어난 여성살해 사건이 너무나 끔직한 뉴스이긴 했지만, 사실 여성들에게 행해지는 폭력, 살인, 성폭행, 성희롱, 성차별이 사회 전반에 너무나 만연해 있었기에 그 뉴스가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다르게’ 와 닿았던 것은 이번에 발생한 여성살해를 그저 ‘또 하나’의 ‘일상적’인 사건으로 지나쳐 버릴 수 없었던 여성들이 이 사건을 ‘여성혐오’ (misogyny) 사건으로 규정하고, 여성혐오의 심각성을 지적하면서 피해자를 공공장소에서 추모하기 시작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그 뿌리가 깊고 넓은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를 당연하게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없애야 할 사회악으로 보고 여성들이 그것에 저항했다는 것과, 그런 저항의 움직임을 받아 들일 수 없어하는 남성들이 그들을 비판하면서 공공연하게 여성혐오를 또 다시 드러냈다는 것이다. 한국도 인도처럼 여러 세기를 동시에 살고 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잘 지적했듯이 여성혐오란 용어가 한국에서 생소하다고 해서 여성혐오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여성혐오를 보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은 오히려 그것이 얼마나 ‘일상화’ 되어져 있고, 개개인의 사고방식과 행동 및 사회구조에 ‘자연스럽게’ 내재되어 있는지를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여성혐오를 보지 못한다는 것은 여성혐오에 대한 해결책 또한 내놓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니, 감시 카메라를 늘리고, 치안을 강화하고, 가해자에 대한 형량을 높이거나 그들을 사회에서 격리 시키면, 몇 몇의 ‘이상한’ 사람들이 저지르는 연관 없는 ‘사건들’이 사라지게 되면서 모두가 ‘안전’한 사회가 될 것이라는 실로 대책없고 공허한 방안을 내놓는 사람들도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성신학자 메리 헌트 (Mary Hunt)가 말하듯이, 폭력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각개의 개별적인 에피소드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삶의 “상황” (context)이다.[각주:2] 여성혐오, 성차별, 여성을 상대로 행해지는 다양한 형태의 폭력은 그저 어쩌다 일어나는 개별적인 사건들이 아니라 기독교회와 신학이 외면해 온 여성들의 ‘치명적인 일상’인 것이다. 이렇듯 여성혐오를 인식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인식한다해도 해결할 노력이나 의지가 없어 보이는 곳 중의 하나는 교회이다. 교회내의 ‘여성혐오’는 그 사례들을 일일이 나열하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물론, 교회내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여성혐오에 저항하는 목소리와 운동은 지속되어져 왔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소수의 저항으로 종종 무시 되어지거나, 저항의 주체들은 오히려 여성우월주의자들로, 또는 ‘남성혐오자’들로 매도되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교회도 여러 세기를 동시에 살고 있다. 


    내년에 종교개혁 500 주년 (1517-2017)을 맞이해서 이미 많은 사람들이 마틴 루터의 고향인 독일을 비롯하여 종교개혁과 관련이 있는 유럽국가들로 ‘순례’를 계획하고 있고, 개신교회들도 한국교회의 미래와 교회개혁을 논의하는 준비를 시작했다고 한다. 무엇을 준비하고 논의를 할 것인가? 주로 논의 되는 주제들은 “한국 교회에 만연한 물질 만능주의와 성장주의, 배타주의”[각주:3]라고 한다. 모두 중요하고 절실한 주제들이다. 그런데, 많은 교회를 비롯하여 사회 전반에 깔려있는 물질 만능주의, 성장주의, 그리고 배타주의의 원동력이 되어온 구조적 성차별과 여성혐오, 그리고 이와 관련된 여러 형태의 혐오들에 관한 논의는 누가, 어디서 할 것인가? 


    성차별과 여성혐오, 그리고 다른 형태의 차별과 혐오들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고서는 “한국 교회에 만연한 물질 만능주의와 성장주의, 배타주의”를 제대로 논의 할 수 없다. 그러니 진정한 교회 개혁은 있을 수 없고,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다. 여성혐오를 없앤다는 명목하에 다른 혐오를 정당화하는 과오를 저지르는 일 없이 한국 교회와 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 성소수자혐오, 장애인혐오, 이주노동자혐오, 이슬람혐오를 ‘개혁’의 대상으로 삼는 ‘저항인’ (Protestant) 들이 되지 않는다면 500년을 또 기다려도 ‘개혁’은 없을 것이다. 교회는 그저 계속해서 여러 세기를 동시에 살게 될 뿐이다.  


    한국교회의 미래와 교회개혁을 진정으로 논의할 의지가 있다면, 500년 전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종교개혁가들의 사상과 행동에 깊이 뿌리 박혀 있었던 여성혐오와, 지금까지 지속되는 여성혐오적이고 차별적인 신학, 성서해석, 의례, 예배 형식, 언어, 교회 조직, 활동들을 먼저 인정해야 할 것이다.  


    500 여년 전, 당시의 부패했던 교회에 ‘저항’의 목소리를 내면서 시작된 ‘종교개혁’이었지만, 여성신학자들이 지적해 왔듯이 그 시대 그 공간에서 살았던 여성들의 삶과 그 이후 세대의 여성들에게 부정적으로 미친 종교개혁의 영향은 비판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조명되어져야 할 것이다. 가부장적 성서해석으로 가정과, 교회, 사회에서 여성들의 종속적인 위치를 확실하게 못박았고, 야곱의 딸 디나의 납치와 강간은 그녀가 자초한 일이라면서 피해자를 비난하는 성서해석을 내놓았으며, 성과 관련해서 남녀에게 적용된 이중잣대를 정당화 시켰던 마틴 루터나 존 칼빈의 남성중심적 성서해석과 신학이 아직도 어떻게 교회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를 묻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각주:4] 동시에 여성혐오를 사회에서 견고히 하는 데 한국의 개신교회가 어떻게 앞장서 왔는지를 반성하면서, 같은 과오를 되풀이 하지 않도록 실천을 통해서 보여주는 방법 밖엔 없다.  

   

   교회의 진정한 개혁을 논의하고 변화를 가져오려면, 교회와 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 성소수자혐오, 장애인혐오, 이주노동자혐오, 이슬람혐오에 저항하라. 그런 저항으로 말미암아 변하기를 거부하는 기존 교회와 사회로 부터 설사 ‘이단자’로 불린다 할지라도 말이다. 마치 500여년전 ‘이단자’로 불렸던 종교개혁가들처럼. 그러나, ‘이단자’로 불릴 각오와 결심이 없다면 500주년 종교개혁의 이름으로 교회의 미래와 개혁을 논하지 말라. 변화없는 교회의 ‘미래’란 과거와 과거가 되어 버렸을 지금의 현재가 여전히 뒤엉켜서 존재하는, 그래서 “여러 세기가 공존”하는 맞이 하고 싶지 않은 ‘미래’일 뿐이다.

  

ⓒ 웹진 <제3시대>



  1. http://www.outlookindia.com/magazine/story/i-dont-believe-there-are-only-two-genders-i-see-gender-as-a-spectrum-and-im/295061 (accessed 09/10/15). [본문으로]
  2. Carol J. Adams and Marie M. Fortune, “Preface,” in Violence against Women and Children: A Christian Theological Sourcebook, ed., Carol J. Adams and Marie M. Fortune (New York: The Continuum Publishing Company, 1995), 12. [본문으로]
  3.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10/22/0200000000AKR20151022143000005.HTML (accessed 11/30/2015); http://www.koreatimes.com/article/879912 (accessed 10/18/2014). [본문으로]
  4. Denise Lardner Carmody, Women and World Religions (Prentice Hall, 198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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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 왕들의 유대인 하나님 찬양

: 다니엘서 2-6장 다시 읽기[각주:1]





김진양

(Ph.D. The Lutheran School of Theology at Chicago (the Old Testament))




    다니엘서에 나오는 다니엘과 세 친구의 영웅담은 주일학교나 여름성경학교 교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메뉴다. 대부분의 교재에서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믿음으로 고난을 이겨내어 이방 땅에서 출세한 영웅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 그들이 지키려고 했던 믿음의 내용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다니엘서의 앞부분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이야기(1-6장) 뒷부분은 묵시적 계시(7-12장)로 나누어지는데, 그동안 성서학자들은 뒷부분의 묵시적 계시에서만 제국에 대한 저항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최근 성서학자들은 앞부분 이야기와 뒷부분의 묵시적 비전과의 관계를 다시 해석함으로써 아람어로 쓰인 다니엘 설화를(다니엘서 2-6장) 제국에 대한 저항문학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헬라 제국이든 셀류커스 제국의 안티오커스 4세의 지배이든 유대인 민중은 재국의 지배 아래서 고난 받고 박해 받았던 약자들이었음에 틀림없다. 다니엘서 아람어 설화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의 영웅담은 과히 제국의 박해 아래서 고통 받는 민중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이야기로 읽혀왔다고 단언할 수 있다. 다니엘서의 아람어 설화를 제국에 대한 저항문학으로 해석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들의 저항의 의미와 방법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들은 과연 무엇에 대해 저항하는가? 


   다니엘서 설화의 역사적인 배경은 바벨론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이지만, 실제로 설화의 최종형태는 그보다 훨씬 후대인 헬라 시대에 완성되었을 것으로 본다. 그 이유는 다니엘서 2장의 네 번째 제국은 다름 아닌 헬라 제국이기 때문이다.[각주:2] 또 다른 근거로 다니엘서 2장의 “철이 진흙과 섞인다”(다니엘 2:47)라는 표현은 역사적으로 셀류커스 제국과 프톨로미 제국 사이의 혼합 결혼을 의미하므로 다니엘서 아람어로 기록된 설화는 헬라 제국시대에 편집되고 완성된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다니엘서가 최종 편집될 당시의 독자는 다름 아닌 헬라 제국 지배 아래 살았던 유대인 민중들이었다.


   다니엘서의 아람어로 기록된 설화는 “이방 왕정이야기”라고 불리는 독특한 장로인데 이는 다니엘서 외에도 구약성서와 외경에서도 각각 발견된다. 다니엘서 설화와 그 이외 다른 이방 왕정 이야기의 공동점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이들의 이야기가 역사적 내용을 전달하는 것에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약자이자 피지배자인 유대인 민중에 의해 이방의 왕들이 유대인의 하나님을 인정하게 된다는 신학적 고백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아람어 설화에서 다니엘과 세 친구는 “유대인 포로” (2:25; 5:13; 6:14 [6:13 한국어성경]) 또는 “유대인들” (3:8, 12)로 소개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사회적 위치는 바벨론 제국의 소수인종이다. 아람어 설화는 바벨론 제국의 지배와 힘을 과시하는 내용으로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또한 특징이다: (1) 국왕의 칙령 (다니엘 3장과 6장); (2) 제국관리의 목록 (다니엘 2장, 4장, 6장); (3) 바벨론 마법사 목록 (다니엘 2장); (4) 금 신상 헌정식 (다니엘 3장); (5) 지방행정 목록 (다니엘 6장)


    제국의 지배와 힘을 과시하는 특성들은 사실 유대인 하나님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되는 문학적 기법이라고 볼 수 있다. 다니엘서 2장의 “거대한 입상”은 바벨론, 페르시아, 메대, 그리스 제국으로 이어지는 세상의 제국 그 자체를 상징한다.[각주:3] 다니엘은 세상의 제국이 산산 조각나 급기야 여름 타작마당의 겨와 같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고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한다. 거대한 입상을 친 작은 돌은 이제 큰 산이 되어 온 땅에 가득 찬다고 한다(다니엘 2:35). 이 땅의 거대한 제국은 멸망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영원하다는 유대인 민중의 제국의 지배 이데올리기에 대한 저항적 고백을 담고 있다. 


 다니엘서 3장은 다니엘 세 친구의 이야기다. 풀무불에 던져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남는 광경을 목격한 느부갓네살은 유대인의 하나님을 “찬양받으실 분”으로 고백하고 있다(다니엘 3;28). 다니엘서 4장에서 느부갓네살이 본 “거대한 나무”도 역시 제국의 위엄을 상징한다. 하지만 그 제국의 위엄은 유대인 하나님의 심판 앞에 무너지고 만다. 급기야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을 가장 높으신 분이며 영원하신 분으로 유대인 하나님의 통치는 영원하고 그의 나라는 대대로 이어진다고 고백한다(다니엘 4:34). 다니엘서 5장은 유대인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느부갓네살과 달리 유대인의 하나님의 위대함을 인식하지 못한 벨사살의 죽음을 언급하고 있다. 다니엘서 6장의 설화는 페르시아 제국의 왕 다리오의 고백을 담고 있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서 구원받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 다리오는 마침내 다니엘의 하나님을 살아계시며 영원하신 분이라며 찬양한다(다니엘 6:26). 아래는 도표는 다니엘서 아람어 설화에서 사용된 과정법과 이방 왕들의 유대인 하나님을 찬양하는 고백을 보여주고 있다.


 

과장법 

사건 

사건의 해결 

이방 왕들의 고백 

 다니엘서 2장

거대한 입상 

 느부갓네살의 꿈

 다니엘의 꿈 해석

- 가장 위대하신 신

- 가장 으뜸가는 왕

- 비밀을 드러내시는 분 

 다니엘서 3장 

 금으로 된 거대한 입상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느부갓네살의 

우상숭배 거절

 하나님이 다니엘의 

세 친구를 풀무불에서 

구원하심

 - 찬양받으실 분

- 자신의 종들을 구원하시는 왕

 다니엘서 4장

거대한 나무 

느부갓네살의 꿈 

다니엘의 꿈 해석 

- 가장 높으신 분이 인간을 다스리심

- 그의 뜻에 맞는 사람에게 나라를 주심 

 다니엘서 5장

 거대한 잔치

벽에 쓰인 글씨 

다니엘의 글자 해석 

- 벨사살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함  

 다니엘서 6장

 거대한 제국

 다리오만을 신으로 숭배

 하나님이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구원하심

- 살아계신 하나님

- 영원하신 분


 위 도표로 살펴본 바와 같이 다니엘서 2-6장의 각 설화는 이 땅의 제국이 위대하고 거대하다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이방 왕들이 유대인의 하나님을 배우게 되고 그들의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방 왕들인 느부갓네살과 다리오는 유대인의 하나님을 이렇게 고백한다:   


 • 가장 위대하신 신 

 • 가장 으뜸가는 왕 

 • 비밀을 드러내시는 분 

 • 찬양 받으실 분 

 • 자신의 종들을 구원하시는 분 

 • 가장 높으신 분이 인간 세상을 다스리심 

 • 그의 뜻에 맞는 사람에게 나라를 주심 

 • 살아계신 하나님 

 • 영원하신 분


 이들의 고백에서 주목되는 것은 유대인의 하나님이 왕인 자신들보다 더 위대하다는 것이다. 바벨론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느부갓네살은 약자 유대인의 하나님을 가장 으뜸가는 왕으로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엘리아스 비컬만(Elias Bikerman)은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야기 중 느부갓네살은 유대인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상적인 이방 왕이라고 주장한다.[각주:4]  


 외경 마카비하서에 의하면 셀류커스 제국의 군대 22,000명이 예루살렘에 주둔하여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전통적 유대인 종교행위 금지령(기원전 167년)에 위배되는 자는 모조리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많은 유대인들이 왕의 칙령에 순응하였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이 제국의 박해에 완강히 저항했다. 셀류커스 제국에 저항은 마카비 항쟁의 군사적 저항인 반면, 다니엘서 아람어 설화는 다른 차원에서 저항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아람어 설화는 “일시적인 세속의 지배” (the temporal human kingship)와 “영원한 천상의 지배” (the eternal heavenly kingship)를 반복하여 강조한다. 아람어 “왕국” (מלכו)은 다니엘 아람어 설화전체에 걸쳐 등장하는 가장 중요한 단어중 하나다. 이 단어는 때로는 세속의 왕권에 때로는 하늘의 왕권에 적용한다. 즉 아람어 설화의 저자는 제국의 힘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대신 제국의 힘을 제한한다. 아람어 설화는 제국보다 더 위대한 지배자 유대인 포로의 하나님을 다니엘의 입술과 이방왕의 입술(느부갓네살과 다리우스)을 통해 고백하고 있고 이처럼 이방왕이 유대인 하나님을 찬양하는 문학양식은 외경과 사해문서에도 발견된다.  


 • 다니엘의 하나님 찬양 (다니엘 2:20-23) 

 • 느부갓네살의 하나님 찬양 (다니엘 2:47) 

 • 느부갓네살의 하나님 찬양 (다니엘 3:28) 

 • 느부갓네살의 하나님 찬양 (다니엘 3:31-33, 4:31-34) 

 • 다리우스의 하나님 찬양 (다니엘 6:27-28) 

 • 알렉산더 대왕의 하나님 찬양 (요세푸스, Ant. 11.305-339) 

 • 프톨로미 4세의 하나님 찬양 (마카비 3서) 

 • 고레스의 하나님 찬양 (벨과 용, 칠십인역 다니엘) 

 • 네바나이드스의 기도 (사해문서, 4QPrNab ar).  


 다니엘서와 더불어 에스더서, 에스라-느헤미야서, 그리고 역대기서와 같은 포로이후 문서의 특징은 비록 포로 이후 유대인들이 이방제국의 지배 아래 살았지만, 자신들의 하나님이 누구이며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각주:5] 이러한 측면에서 다니엘서 아람어 설화를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째, 이방왕들의 유대인 하나님 찬양은 주전 2세기 헬라 제국의 박해 아래 고통 받는 민중들에게 그들의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가르치고 있다. 즉 그들의 하나님은 “찬양받으실 분,” “영원하신 분,” 그리고 “가장 높으신 분”인 것이다. 이와 같은 최상의 표현은 비록 그들이 억압받는 피 지배자이지만 그들의 하나님은 지배자보다 우월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둘째, 이방왕들의 찬양은 세상의 제국은 일시적이지만 하늘의 나라는 영원하다는 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따라서 지금은 비록 제국의 지배아래서 고통 받고 있지만 그 고통은 일시적이며 끝난다는 희망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이방왕들의 찬양은 포로 이후 유대인 공동체의 정체성을 대변하고 있다. 즉, 제국의 지배 아래 살았던 유대 민중들은 제국의 황제가 아닌 자신들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그들의 삶의 목적을 삼았던 것이다. 다니엘서 2-6장의 설화는 헬라 제국과 이방 왕의 박해에 대해 무력과 전쟁이 아니라 지혜와 기도와 찬양으로 저항하는 포로이후 유대인 공동체의 독특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필자소개

    현재 미 연합감리교회 북 일리노이 연회에서 목회, 시카고 루터란 신학대학에서 구약학 전공(Ph.D.), Wartburg College에서 강의


ⓒ 웹진 <제3시대>

  1. 본글은 지난 2011년 시카고에 소재한 한국신학연구소에서 주최한 제26차 월례포럼에서 발표한 글을 수정/보완한 것임을 알린다. [본문으로]
  2. 제4에스라와 요세푸스는 다니엘서 2장의 네 번째 제국을 로마제국이라고 명시했다. 다니엘서 2장의 네 번째 왕국에 대한 논의는 다음의 글을 참조하라: John Collins, Daniel (1993), Gerhand F. Hasel, "The Four World Empires against Its Near Eastern Environment," JSOT 12 (1979), 17-30. [본문으로]
  3. 성서학자들은 종종 다니엘서 2장의 네 제국과 다니엘서 7장의 네 짐승을 비교 분석하면서 다니엘서 아람어 설화의 중심주제인 제국의 멸망을 강조한다. A. Lenglet는 “La Structure Litteraire de Daniel 2-7," Bib 53 (1972), 169-190. [본문으로]
  4. Elias Bickerman, Four Strange Books of the Bible (New York: Schocken Books, 1967), 67. [본문으로]
  5. Sweeney, Reading the Hebrew Bible after the Shoah (2008), 20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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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에게 인공지능이 문제가 되는가?


김경래

(GTU 조직신학 박사과정)


 

   구글 딥마인드(Google DeepMind)의 인공지능 알파고(AlphaGo)가 이세돌 9단을 이기면서 인공지능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유래없이 더 커졌다. 각종 언론사는 미래에 인공지능에 대체될 직업과 살아남을 직업의 목록을 만들어 앞다투어 보도했고, 미래창조과학부는 '한국형 알파고'를 위해 민간연구소를 설립하여 지원하겠다는 '지능정보산업 발전 전략'을 발표했다. 이 사건은 또한 인공지능 개발자들이 오래전 휴버트 드레이퍼스(Hubert Dreyfus)가 "What still computer can't do"에서 그 한계를 지적했던 전문가 시스템(Expert System)이 아닌 머신러닝(Machine Learning)으로 전환하여 드디어 바둑까지 정복한 사건이기도 하다. 필자 또한 이 이벤트에 관심을 가지고 미국에서 시차에도 불구하고 밤을 새워 가며 상황을 지켜 보았는데,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서의 반응도 매우 흥미로웠다.

   날마다 여러가지 소재로 다투던 곳에서 조차 모든 사람이 하나의 연대를 이루어 이세돌 9단이 이기기를 응원했고, 질 때마다 아쉬움이 가득한 글들이 올라왔다. 이와 함께 인공지능 발전의 수준에 놀라워하며, 인공지능과 로봇의 발달로 인해 인간이 노동으로부터 해방되는 유토피아에 대한 기대보다는, 앞으로 어떤 직업이 사라질까? 대부분의 직업이 사라지고 거의 모든 사람이 실업자가 되는, 또는 여러 SF영화에서 보여줬던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디스토피아가 오진 않을까? 등을 걱정하는 분위기로 흘러갔는데, 이것은 현시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질문들이다. 그것은 지금이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 빌 게이츠(Bill Gates), 엘론 머스크(Elon Musk) 등 세계적인 과학과 기술의 전문가들이 인공지능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처럼, 인공지능의 발전이 인류에게 어떤 의미에서 불안요소로 작용할지 생각해보지 않고 그저 낙관하고 있을 수 만은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은 어떤 의미에서 위험할까? 인공지능의 위험성은 인공지능이 자아를 가지고 자유의지를 행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크게 두가지로 경우로 분류할 수 있다. 왜냐면 자유의지를 가지지 않은 인공지능은 그 능력이 아무리 거대해도 결국 설계자의 의도에 따라 움직일 것이기 때문에, 그 능력이 어떠한 위험성을 내포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통제 가능한 영역안에 머무를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자의식을 가진 인공지능을 강인공지능(Strong AI)라고 부르고, 자아 없이 주어진 명령을 수행할 뿐인 인공지능을 약인공지능(Weak AI)라고 부른다.  

   알파고와 같이 딥러닝(Deep Learning)을 통해 학습하고 인간을 뛰어 넘는 모습을 보여주는 인공지능은 마치 자아와 창의성을 가진 존재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알파고 역시 여전히 약인공지능이다. 하지만 약인공지능이 자유의지를 갖고 있지 않다고 해서 위험요소가 약하거나 통제가 쉬운 것만은 아니다. 약인공지능에 의한 자동 제어 시스템을 고려할 때, 자동차나 비행기 같은 교통 수단의 경우 인공지능의 잘못된 판단으로 사고가 날 수도 있다. 더욱이 인공지능에 의해 자동 제어되는 군사 무기가 잘못된 판단으로 공격을 할 경우, 그 영향력과 파괴력은 엄청나게 커질 수 있다. 그래서 인공지능을 위한 윤리규정은 그 인공지능이 약인공지능이어서 아직 자아가 없어 그 윤리적 목적을 이해할 수 있든 없든 필요하다.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는 컴퓨터와 로봇 기술의 발달로 강력한 힘을 얻게 될 미래 로봇들에게 있어 윤리 문제가 중요하고 복잡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의 작품들 속에서 로봇 3원칙을 제안하고 그 3법칙이 서로 모순되어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경우를 여러가지로 보여줬다. 그가 제안한 3원칙은 다음과 같다. 

    1. 로봇은 인간에 해를 가하거나, 혹은 행동을 하지 않음으로써 인간에게 해가 가도록 해서는 안 된다. 2. 로봇은 인간이 내리는 명령들에 복종해야만 하며, 단 이러한 명령들이 첫 번째 법칙에 위배될 때에는 예외로 한다. 3. 로봇은 자신의 존재를 보호해야만 하며, 단 그러한 보호가 첫 번째와 두 번째 법칙에 위배될 때에는 예외로 한다.

   이 3원칙은 약인공지능의 윤리 규정에도 가이드라인이 되겠지만, 강인공지능을 염두에 두고 설계한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인공지능을 소재로한 SF영화에서 인간에게 가장 큰 불안요소를 제공하는 것은 바로 인간을 훨씬 뛰어넘는 초지능을 가지고 자아가 있어 인간이 설정한 윤리 프로그램을 넘어 자유의지를 행사할 수 있는 강인공지능이다. 강인공지능의 실현 가능성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많지만, 만약 그것이 실현 가능하다면, 강인공지능은 인류에게 어떤 의미에서 위협적일까?

   우선 가장 상상하기 쉬운 상황은 제임스 카메론(James Cameron)의 영화 터미네이터나 워쇼스키(Wachowski) 자매의 영화 매트릭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자유의지를 가진 강력한 초인공지능이 인류를 지배하거나 멸망시키려는 상황이다. 하지만 강인공지능이 문제가 되는 지점은 이런 상황만이 아니다. 그것은 철학과 신학의 인간론의 근간을 뒤흔들고 새로운 윤리적 문제를 발생시킨다.

   만약 유기체가 아닌 컴퓨터에 담긴 강인공지능이 인간두뇌 안에서의 의식작용을 완벽하게 모사함으로써 만들어질 수 있다면, 그래서 인간과 동일한 수준의 지능과 자아를 가진다면, 그것은 인간과 동등한 존재인가? 이 기술이 가능해질 때, 키시토 유키토(木城ゆきと)의 만화 총몽에서처럼 현존하던 인간 의식이 컴퓨터 안에 복제된다면 그것은 인간인가? 인간지능보다 훨씬 더 뛰어나고 자의식을 가지고 자유의지를 행사하는 초인공지능 등장한다면 그것은 인간 이상의 존재인가?

   그렇다면 다시 인간의식이란, 또는 영혼이란 무엇일까? 최근의 유행인 심신동일론이나 의식의 창발론 관점에서 강인공지능이 등장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인공지능이 어쨌든 기본적으로 소프트웨어라고 할 때 결국 소프트웨어인 마음과 하드웨어인 몸의 이원론으로 회귀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어떤 소프트웨어든 현실적 존재를 위해선 어떤 형태이든지 미디어가 필요하므로, 이 것만으로는 육체에서 떨어진 영혼을 주장할 근거로는 부족한 것일까?

   이것은 앞서 말한 것보다 더 많은 윤리적인 문제도 만들어 낸다. 인간의식을 완벽히 모사한 강인공지능이 등장한다면, 이러한 수준의 인공지능을 전원 공급을 차단함으로써 소멸시킨다면, 그것이 전원 공급을 재개함으로써 부활할 수 있을지라도 기존 인격에 대한 살해인가? 또, 인공지능이 자유의지를 갖게 된다면, 그들도 죄를 지을 수 있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은 신학안에서도 고전적인 교리들과 맞물려 큰 문제를 만들어 낸다. 인간의 영혼이란 무엇일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자아를 가진 초인공지능의 등장 이후에도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최종 피조물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가? 만약 인간이 만물의 최종적 영장이 아니라면 예수님은 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는가? 인공지능도 신앙을 가질 수 있는가?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의 죽음이 인공지능의 죄도 대속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인공지능도 구원 받을 수 있는가? 아니 인공지능에게 구원이 의미가 있을 수 있는가? 인간지능을 완전히 모사한 인공지능에게 구원이 필요 없다면, 또 인간의 인격을 그러한 방식의 인공지능으로 복제하여 영원히 유지할 수 있다면, 그러한 세계에서 인간에게는 어떠한 의미에서 구원이 필요한가?

   물론 자유의지를 가진 강인공지능의 출현이 영원히 가능하지 않다면, 위에서 인간의 안전을 위해 약인공지능을 제어하는 데 필요한 윤리적 문제를 제외한 나머지 질문들과 그에 대한 답을 추구하려는 노력들은 아무런 실천적 소득이 없는 단지 사변적인 유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현대 뇌과학, 신경생물학, 그리고 인지심리학의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인간에게도 자유의지가 없다면, 즉 인간이 단지 물리적 인과율에 맞추어 신경세포가 반응하여 춤추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면, 위에서 강인공지능에 대해 질문했던 많은 문제들이 다시 인간에게로 돌려질 것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강인공지능의 가능성과 그것의 인류에 대한 영향력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신학안에서도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 질문의 핵심은 앞으로의 글에서 이야기할 인류의 정신사만큼이나 오래된 주제, 자유의지 논쟁과 관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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ὑπομονή (후포모네) 신앙

 



김혜란
(
캐나다 세인트앤드류스 대학, 실천신학 교수)


 

    지난 6월에 한국을 잠시 방문했다. 한국 국회의원 선거가 끝난지 얼마 후다. 그런데도 많은 가족들 친구들이 이렇게 살기가 힘들 수가 없다며 한숨을 내어쉬었다. 그 고통의 무게가 그들의 한숨소리로 내게도 강하게 다가왔다. 열심히 사회 운동을 하고, 진보적인 기독교 에큐메니칼 운동을 하시는 분들을 만나도 분위기는 같았다. 동성애 문제, 이슬람교 종교간 대화 문제, 교회에서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아예 이야기를 꺼내놓을 수가 없을 정도라고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드셨다. 그 분들의 답답함과 아픔이 전해졌다. 

    이는 한국에 사는 한국사람들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지난 6월 23일 영국이 유럽연합에서 독립을 하기로 국민투표를 했다. 어째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냐고 한탄하는 소리가 유럽 전역에 울리고 있다. 7월 첫주 이슬람교에서 가장 성스러운 절기인 라마단 기간 중에 이슬람국가 중 대표적인 이라크, 그것도 수도 바그다드에서 폭탄테러가 일어났다. 그것도 같은 라마단을 지키고 그 종교를 믿는 이슬람교도(물론시아파, 수니파 이렇게 파는 다르지만)에 의해 벌여진 사건이다. 무고한 시민들 150여명의 생명이 희생되었다. 그 희생의 울부짓음 소리가 중동, 서아시아 그리고 세계를 울리고 있다.  

    북미로 가보자. 6월 12일 올란도 한 게이바에서 총기를 든 미국시민권자인 오마 마틴 (동성애혐오주의자이고 반미주의자이자 극단적 이슬람교 출신)이 당시 바에 온 무고한 이들을 마구 학살한 사건이 있었다. 약 100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총기난사가 비일비재한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조차도 한 사람의 총기로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사상자를 낸 것은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라고 보도한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마틴이 총 한방에 수십 수백번 총알이 퍼지는 그런 총, 도저히 민간인이 소지해선 안되는 전쟁용 총을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7월 5일 루이지에나주에서 흑인 남성 앨튼 스털링 (37세)가 CD를 팔고 있다가 백인 경찰이 쏜 총에 의해 사망했다. 다음날 6일 미네소타주 세인트 폴지역에서 젊은 흑인 남성 필란도 카스틸 (32세)가 자신의 차 안에서 백인 경찰이 쏜 총에 의해 사망을 했다. 연일 벌어진 이런 살인사건은 약 2년 전 2014년 8월 미져리주 세인트 루이스에서 벌어진 마이클 브라운의 살인 사건과 유사하다. 그 때도 백인경찰에 의해 쏜 총에 맞아 18세의 젊은 흑인 청년이 사망을 했다.아직 어른이라고 할 수 없는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은 마이클 브라운의 죽음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엄청났다. Black Lives Matter라는 운동 조직을 중심으로 인종에 관계없이 미국 도시 곳곳에서 경찰의 폭력, 인종차별, 그리고, 총기 난사에 대해 반대시위를 벌여왔다.  

    7월 5일 6일 희생된 흑인 남성들의 죽음에 대한 시위가 8일 달라스에서 일어났다. 평화시위였다. 많은 경찰들이 그 평화 시위를 보호하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그 경찰들을 향해 총기를 겨눈 흑인이 있었다. 아프카니스탄 참정용사 출신인 미가 존슨 (25세)은 백인경찰을 향해 마구 난사를 했고, 5명의 경찰이 목숨을 잃고 10명이상의 부상자를 발생시켰다. 그는 이런 흑인을 차별하는 백인이 싫고, 백인 경찰이 싫고, 그래서 그들을 죽이고 싶다고 고백을 했다. 심지어, Black Lives Matter시위도 지겹고 싫다고 말했다. 달라스 경찰 살인사건이 일어난지 열흘이 지났는데, 분위기는 계속 살벌하고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시위는 계속되고 있고, 경찰을 향한 분노는 죽음의 협박으로까지 벌어지고 있다.

    경찰의 총기 난사, 특히 흑인과 유색 인종을 향한 폭력의 문제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매일 미국 경찰이 쏜 총에 의해 발생한 사망자는 3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사망자는 거의 흑인이거나 유색인종이다. 가히 충격적이다. 흑인-백인 분리정책이 공식적으로 폐기된지 50년이 지났다. 그런데, 흑인과 백인들 관계는 풀리지 않고 있다. 6월-7월 올 해 벌어지는 일련의 인종관련 폭력 상황을 두고 많은 이들은 1968년 상황이 되풀이 되는 건 아닌지 우려를 하고 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흑인-백인 관계가 물과 기름처럼 나누어진 것은 아니라고 선언했다. 피부색을 넘어서 대다수 많은 이들이 인종 차별에 항의하고, 총기없는 세상을 외치고, 정책적 변화, 구조적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오바마는 이런 모습을 기술하면서 지금 모두 힘들지만 어렵지만 대안이 안 보이는 것 같지만 절대 희망을 버려선 안된다고 전 미국인들을 향해 호소를 했다.

    이런 희망이 담긴 메시지를 들으면서, 절망하지 말라는 절절한 메시지를 들으면서, 연상되는 성서메시지가 떠올랐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 모두 다양한 성서 본문들이 떠오르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오늘 별로 인기가 없는, 그래서, 감히 단언하건대, 다들 별로 알지 못하는 성서를 소개하려고 한다.

    히브리서신은 학자들 내에서 신약성서의 고아라고 알려져 있을 정도로 인기가 없는 성서다. 로마서와 고린도전서 다음으로 세번째로 긴 장 수를 가지고 있기에 신약성서에서 비중이 있는 성서이지만, 그 내용이 낯설다는 이유로 설교자들, 일반 교인들 모두 기피하는 성서다.

    나도 마찬가지다. 성차별적이고 희생을 강요하는 서신으로 이해하고 기피했다. 지난 22년동안 한번도 히브리서신을 본문으로 택해서 설교를 해 본적이 없다. 그런데 최근 내가 속한 사스카추완 주립대 교수인 Mary Ann Beavis 와 이 서신을 주석하는 작업을 같이 하면서 이런 생각이 바뀌었다.[각주:1]


    히브리서신은 16장 전체가 하나의 설교다. 마치 유대인출신 초대 기독교인들 공동체에게 서신기자가 긴 설교를 했다고 상상해보라. 이 설교가 선포될 당시 상황은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 상황만큼, 아니 그 이상 심각했다. 이 공동체는 소수였다. 미국의 흑인이나 유색인종처럼, 한국사회 이주민들처럼 소수였다. 유대교를 따르는 대다수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박고, 동시에 로마 제국으로부터도 박해를 받는 기독교인들이었다. 곧 오실 거라 믿었던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다. 자고 깨면 같이 신앙 생활하던 친구들이 순교를 당해 보이지 않았다. 그런 살벌하고 두려운 상황에서 살아야 했던 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이 설교가 들려졌다.

   이 설교를 듣는 대부분 교인들은 아마도 자신들도 곧 박해로 인해 순교할 것을 알았다. 죽을 줄 알면서, 믿음을 버리지 않고 결단하는 이들을 설교자는 위로하고 이들의 믿음을 격려한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바탕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11:1) 라는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히브리 서신은 그 공동체가 겪는 고민과 고통을 자신 히브리 신앙의 선배들도 겪었다고 위로를 한다. 아브라함도 사라도, 이삭도 야곱도, 요셉도, 모세도, 라합도,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그리고 모든 예언자들이 이런 고생을 겪었다고, 너무나 많은 성서의 인물들을 열거하면서 위로한다. 이 신앙의 선배들도 당신들이 바라고 소망하는 곳으로 가지도 못했고, 원하고 바라던 모든 일을 이루어내지도 못했지만, 그래도 그렇게 힘든 길을 갔다고, 그러니 우리도 갈 수 있다고 이들 공동체를 격려한다. 그래서, 이들 모두가 “구름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이 되어 이 공동체를 둘러싸고, 보호하고 있다고 확신을 준다. 그러니 보이지 않지만, 지금 보이는 현실이 너무 갑갑하고 어둡지만, 소망하는 그것을 향해 포기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고통을 견뎌내고 달려가자고 절절히 외치고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주석 작업을 하면서 배운 점이 많다. 하나는 후포모네 (hypomone)라는 헬라어의 의미다. 소위 “인내, 감내, 저항”이라는 뜻으로 해석되는 이 단어는 구약, 신약성서 전역에 걸쳐 나오는데 (예. 시 37:9, 이 51:5; 미 7:7; 스 3:8; 마 24:13, 롬 5:3-5), 히브리서신엔 11장 27절에 나온다. “그는 보이지 않는 그 분을 마치 보는 듯이 바라보면서 견디어 냈습니다” 라고 설교자는 여기서 모세를 인용하고 후포모네를 썼다. 즉, 후포모네는 고통을 견딘 모세의 파라오 이집트 제국에 대한 저항을 가리킨다. 신약성서에서 히포모네는 저항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저항과 약간 의미가 다르다. 무언가 나서고 드러내고 시위를 하는 저항도 중요하다. 그래서 Black Lives Matter는 오늘도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보면 드러나지 않고 견디어내는 것, 이런 저항도 필요하다. 바로 이 저항을 히브리 서신이 강조한다. 그렇다고 해서 히브리서가 고통을 무조건 감내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더 더욱 고통을 이쁘게 포장하고 정당화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고통을 겪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온다는 것, 그 고통이 올 때, 수동적으로 피하지 않고, 감내하겠다는 것, 그 결단을 고백하고 있다.

   여기서 히브리서신이 가지고 있는 구원론 (그리스도론)을 잠시 살펴보자. 이 서신기자가 펼치고 있는 십자가의 신학이 가히 놀랍다. 십자가가 구원의 상징인 것은 그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통해서 예수님이 변화되셨기 때문이라고 사도 바울과는 완전히 다른 주장을 펼친다.[각주:2] 사도바울은 십자가 사건이 구원의 사건인 것은 그 사건이 믿는 자들을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갈 2:20). 그런데, 히브리서신 기자가 보기에 십자가 사건이 구원의 사건인 것은 그 사건이 예수를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히 5:7-10; 2:9-18).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그 길을 가지 않고 피할 수 있었지만 (5:8), 예수님은 몸소 힘들게 그 길을 갔다고 히브리서신은 고백한다. 그리고 그 고통과 죽음으로 예수님은 우리 인간, 아니 피조물 모두가 겪는 고통에 대해 죽음에 대해 철저하게 경험했다는 것이다 (2:9; 2:17). 그래서 우리 인간과 유한한 피조물을 완전하게 이해하시고, 우리와 완전히 공감하시고, 우리를 완전하게 품어내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5:9).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 (12:2)이다. 예수님이 완전하신 건 그 분이 인간의 고통을 완벽하게 공감한다는 의미이다. 그 분이 하나님이신 건, 구세주인 것은, 그 분이 철저하게 인간의 고통, 죽음을 감내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후포모네 신앙의 역설이자, 히브리서신이 주는 지혜이다.

    세상이 어디로 가고 있는 지 모르는 요즘 같은 세상, 살상이 난무하고, 분노가 폭력으로 자행되는 이런 세상, 평화의 길이 도대체 안 보이는 이런 상황을 보면서, 포기하지 않으나 감내하는 후포모네 신앙의 저항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살기가 너무 힘들어 한숨이 나오고, 땅이 꺼질 만큼 무거운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가야하지만, 그런 상황을 견디어 내는 신앙이 필요하다. 그 신앙은 결코 절대 희망을 버리지 말라고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런 고통이 (다른 이에겐 일어나도) 내겐 일어나지 않을거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안일함에 후포모네 신앙은 우리에게 함께 다른 이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하라고 격려한다. 예수님도 하셨기에, 그 분이 우리와 함께 철처하게 아픔과 고통을 공감하셨기에 우리도 그를 따르는 자들로서 할 수 있다는 히브리서신 공동체의 믿음의 고백을 우리도 할 때다.


ⓒ 웹진 <제3시대>


  1. Mary Ann Beavis and HyeRan Kim-Cragg, Hebrews Wisdom Commentary (Collegeville: Liturgical Press, 2015). [본문으로]
  2. Ruth Hoppin, “The Book of the Hebrews Revisited: Implications of the Theology of Hebrews for Gender Equality,” cited in Beavis and Kim-Cragg, Hebrews, 57-5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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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이 시다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그 곳은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마음 한 켠에 어떤 하나의 장소, ’그 곳’을 두고 산다. 이 문장을 접한 지금 당신이 떠올리는 ‘그 곳’은 행복하고 기뻤던 기억이 있었던 곳이었을 수도 있고, 반대로 아프고 슬픈 기억이 있었을 수도 있다. 또한 시간이라는 축으로 비교해보면 과거의 흔적이 묻어 있는 곳일 수도 있지만, 죽음 이후에 가는 ‘천국, 하늘나라’처럼 있을지 없을지 잘 모르는 그런 장소일 수도 있다.  


       ‘그 곳’하면 떠오르는 그 장소가 좋았던/나빴던 기억이 있는 곳이든 혹은 과거 어느 한 때의 장소이든, 미래에 도달해야 할 그 장소이든 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와 별개로 아주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장소에서 살아간다. 일상적인 터전을 — 자발적으로 혹은 강제로 — 잃은 유민이나 난민의 신세가 아니라면, 아침에 눈을 뜨고 밤에 눈을 감을 때까지 거의 비슷한 공간을 점유하고 경험하며 살아간다. 매번 같은 교통수단을 타고 출근을 해서 같은 공간에 가서 업무를 보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같은 집 안에서 매번 해 오던 살림을 반복하는 것이 보통의 삶이다. 한데 왜 유독 우리가 떠올리는 ‘그 곳’은 일상적인 공간과 다르게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일까? 우리가 떠올리는 그 곳은 세 가지의 의미에서 ‘시(이)기’ 때문이라 상상해본다.   


1. 그 곳은 시(Ti)다 : '결핍'으로서의 그 곳


      우리가 부르는 노래에는 계이름이 있다. 우리 고유의 오음계도 있지만, 근대 이후 우리에게 익숙한 서양의 음계는 도(Do), 레(Re), 미(Mi), 파(Fa), 솔(Sol), 라(La), 시(Ti). 이렇게 일곱 개로 이루어져 있다. 서양의 7음계에서는 음정을 쌓아 화음을 만드는데, 서로 잘 어울리는 음끼리 쌓으면 ‘협화음’이라 부르고, 그렇지 않으면 ‘불협화음’으로 분류한다. 보통 1, 4, 5, 8도 화음을 협화음 중에서도 가장 잘 어울린다 하여 ‘완전’협화음이라 부르고 나머지는 완전하지 않더라도 어울리는 화음으로 분류한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관심하는 계이름 ‘시(Ti)’는 불협화음 중에서 ‘장7도’이라 불리는 화음을 생산한다. 그나마 ‘장 2, 3, 6도’ 화음은 우리의 귀에 완전협화음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안정감을 주는 반면, 장 7도만큼은 가장 불안정한 화음을 들려준다.

  

        내가 ‘그 곳’을 ‘시(Ti)’라고 표현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시(Ti)’라는 계이름을 통해 불협화음이 발생하듯이 ‘그 곳’은 늘 우리 삶에서 불완전한 화음으로 한 켠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시’가 들어가는 major7 이라는 코드는 결정적으로 첫 번째 음인 ‘도’에서 ‘미’, ‘미’에서 ‘솔’까지 세 음씩 쌓을 때는 아주 안정적이고 조화로운 화음이지만, 거기서 또다시 세 음째인 ‘시’음을 쌓으면 앞에 쌓았던 조화가 모두 무너지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마치 달리기 경주에서 1~3번 주자가 줄곧 선두를 지키다가 앵커 주자가 중간에 넘어져 모든 경주가 어그러지는 기분이다. 절룩거리는 시, 완벽을 깨뜨리는 이 ‘시’는 마치 미운 오리 새끼처럼 눈총을 받기 딱 좋은 녀석인 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완벽성과 그 조화에 일침을 가하며, 조화로움을 깨뜨린다 비난받는 ‘시’는 기죽거나 위축되지 않고 자기 소리를 낸다. 발가벗겨진 채로 적나라하게 자기 자신을 내비치고 내던지는 기분이다. 협화음이 어렵사리 만들어 놓은 철옹성같은 완벽성에 균열을 내기 위해서.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그 곳은 ‘시’음이 만들어내는 ‘major7’ 코드와 같지 않을까? 우리는 늘 완벽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대로 진행되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장밋빛 계획을 늘 세우고, 그렇게 실행해 가지만 그 행복한 삶 속에서 언제나 ‘시’가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이 거기에 끼어들어 절룩거리게 한다. 가난, 폭력, 이기심, 시기, 질투, 질병, 그리고 죽음 등 우리를 늘 괴롭히는 그 고통의 장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과거에 좋았던 기억을 가진 장소나 미래에 다다러야 할 그 장소들은 ‘지금 없기’에 더욱 가슴을 아리게 하고, 나아가서는 우리가 현실에서 만족할 가능성을 지연시킨다.  


       이러한 ‘결핍’으로서의 그 곳, ‘시(Ti)’로서의 그 곳을 최근의 철학에서 많이 회자되고 있는 용어, ‘타자(他者)’라고 바꾸어 부를 수도 있을까? 우리는 결핍들인 ‘타자’를 끝없이 사랑하고 성취하고자 하지만, 동시에 미워하고 어서 그것들이 사라지도록 바라기도 한다. 인간은 언제나 결핍으로서의 ‘타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살아가며 그것이 곧 삶의 주된 동력이라고까지 부를 수도 있을만큼 강력하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깡은 오히려 그러한 욕망이 사라지면 우리가 살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무의식에서는 그 욕망의 성취를 우리가 자발적으로 지연시키기까지 한다고 말한 바 있지 않았던가!   


2. 그 곳은 시다(Sour) : 몸이 먼저 반응하는 '새콤한' 그 곳


       그 곳은 신 맛이다. 그 곳을 맛 중의 하나로 표현할 수 있다면 아마 ‘신 맛’과 가장 가까울 것이다. 비유의 언어일 따름이지만, 만약 그 맛이 짜거나 달콤하거나 맵다면 우리 기억에 강렬하게 ‘그 곳’으로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신 맛은 매우 묘한 매력을 가진 맛이다. 신맛하면 무엇부터 떠오르는가? 노오란 색의 레몬 또는 집 안에 있는 식초가 떠오를 것이다. 이런 음식들은 생각만 해도 벌써 침부터 고이고, 미간이 찌푸려지곤 한다. ‘여우의 신 포도’라는 우화에서 나오듯이 인간에게 신 맛은 고대로부터 부정적인 맛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동시에 신 맛은 인간에게 사랑받는 맛이기도 하다. 인간은 생명이 뱃속에 잉태했을 때, ‘신 맛’을 찾기도 하고, 뭔가 깔끔하게 뒷맛을 잡아주거나 잡내를 제거하는 데에 신 맛을 이용한다. 심지어 가학적이라고까지 여겨지는 그 애증의 맛. 그 맛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 곳’의 맛과 연결 지어볼 수 있다. 한 블로거가 표현한 ‘신 맛’에 대한 말을 인용하면서, 그 신 맛이 가지고 있는 묘한 매력을 떠올려보도록 하자.


       사실, 신 맛이 그렇게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호사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다. 많은 이들이 선호하는 달콤함의 옆에 어느새 능청스럽게도 자신의 성격을 죽이며 새콤함으로 다가가 달콤함을 보조해 주기도 하고, 온통 지치기 쉬운 미각을 흔들어 깨우며 식도락의 기쁨을 되새김질 하도록 격려해온 결과이다. 심지어 가끔은 단 맛에게 자신의 공적마저 양보하며 자취를 완전히 감추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 신 맛은 악착같다. 때로는 자신의 고개를 숙이기도, 때로는 쉽지만은 않은 일을 도맡아 오며 각고의 노력을 들여 악착 같게도 신 맛은 인정받고 있다.[각주:1]  


       우리가 기억하는 ‘그 곳’이 주는 맛도 레몬처럼 시큼하다. ‘그 곳’에 대한 기억과 향수는 언제나 우리 안에 잠복하고 있지만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곳’과 관련된 자극이 주어지면 불현듯 나타나 우리의 뇌와 몸을 쏘고 도망간다. 그 자극은 나쁜 것인지, 좋은 것인지 이성의 판단을 받을 틈을 주지 않고 빠르고 순간적으로 지나간다. 이성이 중지되고 몸이 먼저 반응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일상이 무료하기 짝이 없을 때마다 ‘그 곳’은 자연스럽게 아무 일 없는듯이 흘러가는 일상을 중지시키고 우리가 누구이고, 어디로부터 왔는지 다시 질문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 곳’은 그렇게 우리 안에 알게 모르게 숨어 있으면서도 불현듯 나타나 우리의 존재를 건드리는 ‘신 맛’과도 같다.  


3. 그 곳은 시다(Poem) : '극단적'인 것으로서의 그 곳


        ‘그 곳’은 우리 삶의 ‘시(poem)’로서 존재한다. 그 ‘시’라는 것이 무엇일까? 무엇인지 딱 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우리가 공감하고 있는 ‘시적인 무엇’이란 것이 있다고 우리는 공감하고 있다.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문학비평가 황현산 선생은 『우물에서 하늘보기』(2015. 삼인)에서 ‘시적인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시에는 한 편 한 편마다 무언지 모를 극단적인 것이 있다.(…)

시를 쓰거나 읽는 사람들에게 “무언지 모를 극단적인 것”이란 말은 빈말로 들리지 않는다. 시는 늘 우리에게 이 세상의 시간이 아닌 것 같은 다른 시간을 경험하게 한다. (…) 사람들은 저마다 제 심정이 한 자락 노래를 타고 날아오르듯 약동하고, 삶의 어떤 매듭이 물결처럼 밀려드는 몽환에 휩쓸리고, 정신이 문득 소스라치면서 도 하나의 새로운 각성에 이르던 순간들을 기억할 것이다. 내가 ‘시적인 무엇’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그 순간의 동력과 연결된 모든 것들을 말한다. 그 동력은 정신이 집중된 시간에도 나타나고 심신이 풀려 자유로워진 시간에도 솟아올라 내 존재가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것은 아님을 알려주곤 한다."[각주:2]


        ‘그 곳’은 그렇게 극단적인 무엇이다. 우리가 삶에서 있는 힘껏 치닫다가도 애써 발을 땅에 끄을며, 멈추어야 하는 거기에서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이 바로 ‘그 곳’이다. 가고는 싶고 어디인지도 알고 있지만, 갈 수 없는 곳. 그래서 더욱 갈망하게 되는 곳이 ‘그 곳’이다. 그래서 ‘그 곳’은 시가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곳이다. 너무나 원하지만, 갖가지 현실의 제약으로 갈 수 없는 곳, 그럼에도 ‘시’라는 극단적인 언어를 통해서만 갈 수 있는 거기가 ‘그 곳’이다.

       마치 신명기 34장에서 묘사되고 있는 모압평지에 선 모세의 느낌이라고 하면 어떨까. 분명히 자기 자신의 발로서는 넘어설 수 있지만, 하나님의 준엄한 소리가 계속해서 가로막는다. ‘너는 거기에 건너가지 못할 것이다.’(신 34:4)라고 말하기에 오히려 더욱 미치도록 건너가고 싶은 그 곳! 모세에게는 삶의 이유였고, 광야 여정의 최종 목적인 그 곳! ‘여기까지 그 많은 사람들은 데려온 게 나인데, 그깟 잘못 하나 때문에 이 선을 넘어가지 못하는가!’라고 울부짖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그 곳, 거기가 ‘그 곳’이다.


그 곳은 없다, 하지만...



        ‘시다’라는 말로 정리해 본 ‘그 곳. 과연 우리가 떠올리는 ‘그 곳’은 있는 것일까? 있다면 어디일까?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것 같은 ‘그 곳’이라 말하는 게 가장 정확한 언술이겠지만, 나는 그럼에도 ‘그 곳’이란 ‘없음’으로 존재한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가 떠올리는 그 곳, 그리고 거기서 함께했던 그 ‘시간’, 그 ‘사람’ 그리고 ‘수많은 무언가들’은 이제 없기에 존재한다. 그 곳이 없기에 고통스럽고, 그 곳이 없기에 이성과 의식이 아닌 무의식과 몸으로만, 언어를 초월한 언어로만 갈 수 있다. 그래서 꿈에서나마 그려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 곳’은 가려고 해도 결코 갈 수 없는, 어떤 극단적인 무언가로 남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삶을 움직이는 힘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훗날 우리가 미래의 그 순간에 기억할 ‘그 곳’은 언젠가 과거에 우리가 지나온 ‘현재적 공간’이었다. 없음으로 그리워하고 추억하기 이전에, 우리가 ‘그 곳’으로 만들어지기 이전 찰나와 같은 그 순간에 별과 같이 반짝이는 ‘그 곳’을 소중하게 만들려 몸부림친다면 시린 가슴으로 ‘그 곳’을 그리워하지는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있을 것 같다고.


ⓒ 웹진 <제3시대>

  1. http://berkeleyopinion.com/440 [본문으로]
  2. 황현산, 『우물에서 하늘보기』 (2015. 삼인), 8~9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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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도시 



                           


백정기, The Palimpsests Of The City, 비디오, 가변크기, 10분, 2014


   선릉역은 아침마다 출근길 인파로 수선스럽다. 특히, 계단을 좁게 빠져 나온 사람들이 지하철역 입구에서 한꺼번에 터져 나와 장관을 연출한다. 이런 풍경은 도시가 있는 한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다. 출근길 인파는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사실 인간성 이라는 것은 전혀 담겨있지 않다. 인간성뿐만 아니다. 자유의지와 전혀 상관 없는 몸뚱이가 질량(mass) 운동을 위해서 팔다리를 흔들다가 멀리 사라져 버린다. 그렇다고 여기에 비관적인 감상이 들지는 않는다. 어쩌면 비인간적인 인간상은 이미 자연스럽고 익숙한 현상이다. 인간적인 진보, 이성, 도덕, 자유의지처럼 추상적인 가치야 말로 간헐적으로 인간의 그림자 위에 떠오르는 환상일 지 모른다. 이 환상은 인간이 다른 동물들 보다 우월하다는 신화를 만들고 인간을 세상의 중심으로 사고하게 만든다.   


   시리즈는 도시에 존재하는 사람이 지워진 풍경을 보여준다. 작품 속 인간은 몸의 경계 조차 분명하지 않다. 그래도 작품 속 세상은 평화롭다. 사랑도 원한도 과한 의지도 없이 누구나 자연의 법칙대로 흘러간다. 인류의 종국적인 목표를 단정하는 사람들은 무기력하고 비관적으로 보이겠지만, 실은 인류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자연스러운 움직임일지 모른다.  


                     

백정기, Palimpsests_announcement, 비디오, 가변크기, 12분, 2014




 


 


백정기 作 (미디어작가)


- 작가소개

홍대 회화과를 중퇴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을 졸업했다. 2008년 개인전 를 시작으로 5회의 개인전을 했고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2012년 홍은예술창작센터, 2013년 경기창작센터 입주작가로 레지던시 활동을 한바 있다. 음악적 청각화를 주제로 “Walking alone on a clear night: Musical sonification based on cityscape”외 1편을 등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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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육강식이 정글의 법칙이라고? 아니죠![각주:1]


 

권오윤[각주:2]



       요즘 디즈니가 신경 쓰는 주요 프로젝트 중 하나는, 애니메이션 고전들을 실사 영화로 리메이크하는 것입니다. '소재 우려먹기' 라는 점에서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가 늘 하는 게으른 선택이라 할 수 있지만, 작년에 나온 <신데렐라>처럼 오래된 이야기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방식이라면 나쁘지 않은 기획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정글북> 역시 그런 기획의 일환입니다. 리메이크의 원본으로 삼은 디즈니의 1967년 작 애니메이션은, 러디어드 키플링의 원작에서 늑대와 함께 자란 소년 모글리가 나오는 이야기 몇 편을 따와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주관객층인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게 캐릭터와 에피소드를 '만화적'으로 순화시키다 보니, 원작 소설이 가진 나름의 박진감과 긴장감 대신 히피풍의 유쾌함이 강조된 작품이 돼 버렸지요. 

       하지만 실사판은 다릅니다. 컴퓨터그래픽 기술을 통해 정글 배경과 동물 캐릭터들을 사실적으로 구현함으로써, 원작이 지닌 야생의 느낌을 아주 잘 살려냈거든요. 특히 각각의 특징을 실감 나게 포착한 다양한 동물 캐릭터들의 존재는, 그들 사이에 기본적으로 흐르는 긴장감은 물론이고 액션 시퀀스의 박진감과 스릴까지 배가시킵니다. 3D로 보면 확실히 더 좋은 영화들이 매년 한두 편씩은 꼭 있기 마련인데, 올해는 이 영화가 그런 것 같습니다.

       시각 효과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짜는 기술도 괜찮은 편입니다. 메인 플롯은 주인공 모글리의 전형적인 성장 서사인데, 내면의 성장을 위한 여정과 호랑이 쉬어칸과의 대결 과정을 잘 배합해 리듬감 있게 뽑아냈습니다. 또한 모글리를 돕는 동물 캐릭터들의 내적 성장까지 서브플롯으로 함께 다루면서 진정한 '정글의 법칙'이란 어떤 것인지 그 의미를 되새긴 것도 특기할 만합니다.  

       주요 배역을 맡은 할리우드 유명 배우들의 목소리 연기가 좋은데, 그중에서도 곰 발루 역할을 맡은 빌 머레이의 연기가 돋보입니다. 모글리에게 삶의 여유와 즐거움을 전해주는 느긋하고 수다스러운 발루의 캐릭터는 빌 머레이의 체념 섞인 말투와 아주 잘 어울리죠. 또한 이번 영화에서 발루는 모글리를 위해서 자신의 한계를 여러 번 넘어서야 했는데, 그런 장면들의 뉘앙스까지 세심하게 잘 표현한 것도 점수를 줄 만합니다. 


영화 "정글북" 포스터 (저작권자: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2천 대 1의 경쟁을 뚫고 모글리 역할에 캐스팅된 아역 배우 닐 세티는, 꾸밈없는 감정 표현과 대사 처리를 통해 인간의 세계에 물들지 않은 야생의 순수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배경과 상대 캐릭터가 모두 CG였기 때문에, 가끔 인형들과 함께할 때 말고는 거의 혼자서 연기할 수밖에 없었던 어려움을 감안한다면 정말 좋은 연기를 보여준 겁니다. 물론 감독 존 파브로의 연기 지도가 그만큼 효과적이었다고 해야겠죠. 

       흔히 '정글'이라는 단어를 쓸 때는 비정한 약육강식의 논리를 염두에 두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힘센 육식동물이 약한 초식동물들을 사냥하는 이미지를 떠올리면서요.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정글은 하나의 생태계로서, 구성원 모두가 도움을 주고받는 커다란 순환 체계거든요.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우리 인간들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자연스러운 순환의 고리를 깨뜨리기 일쑤였습니다. 정글을 불태우고 개간하여 개인 소유의 경작지로 만들고, 각종 희귀 동식물들을 삶의 터전에서 뿌리째 뽑아내서 구경거리로 만들어 돈벌이에 나섰던 거죠.   

      약육강식의 논리란 본디 자기가 가진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싶은 작자들이 자연 현상을 멋대로 해석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식동물이 초식동물을 사냥하는 것은, 인간들이 그러하듯 힘의 우위를 통해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해 행동하는 것일 뿐이니까요.

       이 영화 <정글북>은 서로 돕고 의지하는 연대의 정신만이 정글 공동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정글의 법칙을 제멋대로 해석하여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호랑이 쉬어칸의 몰락과, 인간인 모글리가 진정한 정글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통해서요. 지속 가능하고 건강한 인간 사회를 만들기 위해, 혹은 전 지구적 생태 순환계를 보전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 웹진 <제3시대>

  1. 제목에 대한 주석으로 "이 글은 오마이뉴스의 6월 14일자 기사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218018)로 게재된 원고입니다. “ [본문으로]
  2. <발레교습소> <삼거리극장> <화차> 등의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일했으며, 현재 연출 데뷔작을 준비 중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물 [권오윤의 더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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