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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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일경
(월곡교회 담임목사)

사람들이 많이 본다는 ‘미수다’라는 프로그램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외국인 여성들에게 한국의 문제점들을 묻기 전에
요즘 초등학생들이 느끼는 한국의 문제점들을 사회자가 말하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5위 : 정치인들이 맨 날 싸운다.
4위 : 가난한 사람들을 더 가난해지고 부자들은 더 부자가 되는 것 같다.
3위 : 일본이나 중국 사람들은 왜 우리 땅을 자기네 땅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2위 : 어른들은 공부를 잘해야만 알아준다.
1위 : 남한과 북한이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어디서 나온 자료인지는 모르지만,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니라면, 사뭇 놀랄 일이다.
어떻게 이런 주제들이 아이들의 가슴에 배이게 되었을까 ?
싸움과 갈등, 긴장과 왜곡, 분열이 배어버린 것이라면 걱정이다.
아니면 평화와 평등, 존중, 화해의 꿈들을 담고 있는 것이라면 다행이다.
그러나 지금 이 사회를 주도하는 힘이 어디로 끌고 가고 있는지는 분명하다.
‘상대에게 철저히 인색한 정치는 더욱 피폐한 싸움을 예상케 하고
빈부의 양극화는 일정한 추세를 넘어 당연지사로 삼고 있다.
여전히 무소불위 성장경제의 환상은 민족주의를 너머서고, 한편, 낡은 좌우의 빗금을
쳐대며 반쪽짜리 민족주의를 들이댄다. 통일은 커녕 전쟁이 우려되는 위기이다.‘
아이들의 가슴에 꿈이 들어있을까 ? 멍이 들어 있을까 ? 참 쉬운 문제가 아닌가 ?

노무현의 죽음이 슬프다.
그를 죽게 한 세력들은 움추린듯 하지만 그들에게 그게 중요한 변수가 될까 ?
좌향우라고 비판하며 일찍이 정치적 기대를 저버렸던 우리 같은 사람들은 가슴이 아프지만
뭐라 보탤 말이 없다.
백무산이 노래한다.
‘우리가 당신을 버렸습니다.  ...말뿐인, 허세뿐인 우리가
새벽닭이 울기 전에 열 번 스무 번 당신을 부인했습니다.
그렇게 당신을 버리고 나니 난데없는 철벽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바위벼랑에 떨어진 피투성이 얼굴은 우리의 얼굴이었습니다.
... 이천년 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한 사내의 외침을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나의 패배가 여러분의 승리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피에 굶주린 자들에게 당신을 먹이로 던지고 피의 잔을 나누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오, 슬픈 선지자의 꿈이여... 당신은 정치가가 아니었습니다. ‘(백무산)
안도현도 노래한다.
그러니 이제 일어나요, 당신, 부서진 뼈를 맞추어 일어나야
우리가 흩으러진 대열을 가다듬고 일어나요.
끊어진 핏줄을 한 가닥씩 이어 당신이 일어나야
우리가 꾹꾹 눌러둔 분노를 붙잡고 일어나요
피멍든 살을 쓰다듬으며 당신이 일어나야 우리가 슬픔을 내던지고 두둥실 일어나요
당신이 일어나야 산하가 꿈틀거려요  당신이 일어나야 동해가 출렁거려요
당신이 일어나야 한반도가 일어나요 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
아아! 노무현 당신!(안도현)

이 독실한(?) 정권하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슬픈 전직 대통령에게 이들은 십자가와 부활의 이미지를 부여하고 있다. 교회 밖에서 선연한 성서의 이미지들이 뿜어내고 있다.
소위 ‘성령충만’ 하다는 이 땅의 교회들이 이런 외침들을 어떻게 들을까 ?
‘욕심충만’ 한 성공의 신화 속에 예수를 끼워 파는 자들은 어떻게 들을까 ?
아이들의 가슴에 새겨진 멍은 비극의 전조일 수 있다.
아니 ‘바위에 떨어진 피투성이 얼굴 같은’ 삶이 민중의 현실이 될 수 있다.
욕망의 성전들이 정의의 강물을 삼켜버리는 ‘하마’로 보일 수도 있다.
왜 그렇게 부정적이냐고 ? 이 정권이 강요하는 희망의 황폐보다는 더 낫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가슴에 어른들을 심판하는 그림자가 멍울져 있다.
가난한 시인들이 첨탑의 꼭대기들을 부끄럽게 한다.
강령도, 전술도 없는 촛불 속에, 등 떠밀지도 않는데 나선 조문의 행렬 속에
성령의 바람이 실려 있다고 한다면, 너무 비신학적인가 ?
성령이 임하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눌린 자, 눈먼 자, 갇힌 자에 자유를 숨 쉬게 하고
서로 다른 이들이 소통하며, 함께 살아갈 길을 트게 하는 것이 아닌가 ?
이 소중한 추상을 오늘 우리 삶에 어울리는 구상으로 그려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하지?  아니 어디선가 들어봄직한 표현으로 ‘어찌 할꼬 ?’ 이다.
이 땅에서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무엇일까 ?
기만과 허위의 이념, 언론장악의 맹목, 전쟁의 위기, 치졸한 권세의 폭력을 거슬러
가는 길은 무엇일까 ? 
살면서 물어야 한다. 살아서 그려가야 한다. 죽어도 여한이 없을 때까지 물어야 한다.
열세와 약세와 한계와 작음에서도 물어야한다.
우울과 비관과 역겨움과 설움에서도 그려가야 한다.
그야말로 또 하나의 희망이, 또 하나의 기쁨이, 또 하나의 용서가
이 슬픔과 좌절과 분노의 복판에 일어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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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7.24 00:0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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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보가 천당서 띄우는 편지


    고졸 출신, 자수 성가
    취임 초 부터 ‘그들’은
    바보를 아예 대통령으로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재임 5년 동안 사사건건
    시비 걸고 발목 잡고
    탄핵까지 들먹거리고
    대통령 ‘못해 먹게’ 했다

    그 바보는 너무나 바보였다
    반 세기 넘게 쌓이고 쌓인
    한국 사회의 각종 악폐들
    어찌 해보려 혼신을 다했다

    정경 유착 / 금권 정치 타파
    권위 주의 / 지역 감정 해소
    서민 옹호 / 정의 사회 구현
    온 몸을 던져 싸웠다

    앙시엥 레짐에 밀착된 그들
    빨갱이다, 좌파 노선이다
    두 눈에 쌍심지 켜고
    ‘노무현 죽이기’를 작심했다

    그 바보가 낙향한 후에도
    ‘노무현 죽이기’는 이어졌다
    뜻있는 일 해보려는 ’雄志’
    그들에겐 눈엣 가시였다

    권력의 시녀 검찰이 나섰다
    무죄 추정의 원칙
    피의 사실 공포 금지의 원칙
    아랑곳 않고 혐의를 마구 흘렸다

    수구 꼴통 황색 신문들
    얼씨구나 신나서 작문을 써댔다
    억지 ‘진술’를 ‘진실’인 양 호도
    한국식 인민재판으로 몰고 갔다

    포괄적 뇌물죄 라고?
    그럼, 권력 쥔 너가 누구에게
    점심 한 번 얻어 먹은 것은
    포괄적 뇌물이 아니더냐?

    100만 불? 500만 불? 40만 불?
    그래, 백만 불 집사람이 빌려 썼다
    남들같이 자식 키우고 싶은 母情
    나중에 갚을 셈 치고…

    해외에서 500만 불?
    네 얼굴 보고 준 돈이라고?
    너가 몰랐을 리 없다고?
    ‘정황상’ 그렇다고?

    그들끼리 사업상 주고 받은 돈
    바보 얽어 넣으려 억지 춘향
    어느 권력자 어떤 정치인 이라도
    그 ‘정황상’ 잣대를 한번 대봐라


    國監도 못 묻는 ‘특수 활동비’
    법적 보장된 ‘묻지 마’ 예산
    이를 전용 횡령 했다고?
    역대 대통령에 한번 물어봐라
    어디에,어떻게들 ‘탕진’했냐고…

    1억 시계 뇌물로 받았다고?
    명품이 뭣인지도 모르는 바보다
    바보가 그런 따위 걸치고
    거드럭 거리는 속물로 보이더냐

    하나님이 물으신다
    아무리 상황이 어렵다 라도
    그 세상에서 惡과 싸워야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느냐고

    바보는 눈물 흘리며 대답한다
    ‘죽이기’를 겨눈 화살 칼날
    방어할수록 더욱 옥죄오는 그 强度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 고통 그 시련이 나 하나면
    비록 그 것이 惡法이라도
    감옥이고 어디이고
    즐거이 갔을 것 입니다


    그러나, 나 로 인해 고통받는
    수 많은 주변 사람들 가족들
    차마 눈을 뜨고 볼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고통을 덜어줄 힘 없는 바보
    자신을 죽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바보를 껴안으신다
    너의 자결은 순교와 같니라
    한국 역사상 첫 ‘참 대통령’
    이제 너의 진가가 밝혀지리라

    <장동만: 05/25/09 記>
    ://kr.blog.yahoo.com/dongman1936

안식년과 네팔 이야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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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정
(향린교회 담임목사)


히말라야 트레킹
(히말라야라는 말은 ‘높은 산들’이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네팔의 트레킹 코스는 크게 4군데이다. 사실 정해진 코스는 없다. 어디든지 가면 그게 코스이다. 한국인이 쓴 네팔 트레킹 책에는 12곳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텐트와 산악장비 없이 롯지(lodge)에서 숙식을 하면서 이동할 경우 크게 4코스가 있다. 에베레스트(15일), 안나푸르나(12일), 안나푸르나 일주(15일) 그리고 랑탕(12일)이다. 물론 이곳도 짧게는 3일에서 한 달 이상 그 코스를 다양하게 정할 수 있다. 이름으로 가장 잘 알려진 곳은 에베레스트이지만, 트레킹으로 가장 잘 알려진 코스는 안나푸르나이다. 나는 에베레스트, 안나푸르나 그리고 랑탕 세 곳을 다 다녔다. 그리고 이 지역도 짧게 다닌 것이 아니라, 긴 코스로 다녔다. 일일이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안나푸르나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이유는 가장 높은 곳이 4천미터 고지이지만, 설산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고, 거의 정상에 이르도록 풀과 나무가 있어 고산병에 걸리는 율이 가장 적기 때문이다. 나무가 우거진 열대림을 통과할뿐더러 짧은 빙하도 두 곳이나 통과해야 하고, 눈도 있을뿐더러 온천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비해 에베레스트는 3천 미터부터 나무가 거의 없고, 4천 미터가 되면 완전 삭막한 광야지대로 변하고 만다. 최고 5천 5백 미터까지 올라가기에 고산병에 시달리는 비율이 상당히 높다. 나도 3천미터부터는 잠을 자기가 힘들고 걷는데 숨을 몰아쉬어야 하고 설사에 식욕부진으로 전반 일주일은 내내 고생을 했다. 5천 미터의 가장 높은 숙소에서는 2,3분마다 숨이 턱턱 막혀 잠을 도저히 잘 수가 없어 오줌이 자주 나오게 하는 약을 한 알 먹고 견뎌야 했다. 그리고 5천미터 이상이 되는 세 곳의 정상을 올라가야 했는데,(물론 두 곳은 원치 않으면 안 올라 갈수 있다. 그러나 한 곳은 코스를 바꾸어 돌아가지 않는 한 피할 수가 없다.) 이때는 한발자국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몰아쉬는 숨을 세 번씩 하기도 하였다. 내가 만난 트레커들 중 고산병으로 고생을 하거나 5천미터 롯지에서 최종 목적지 칼라파타(5천 5백미터)를 포기한 사람이 열에 7,8명은 되었다. 체력이 건장한 20대의 서양 젊은이들도 포기를 한다. 그리고 바람이 너무 세고 새벽에 올라서면 영하 20도에 가깝다.

랑탕 코스는 에베레스트와 안나푸르나의 중간 만큼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나무와 물도 많고 5천미터까지 접근하기에 눈도 많았다. 내가 갈 때는 하루 밤에 눈이 너무 많이 와 무릎 때로는 허벅지까지 눈에 빠지면서 걸어야 했다. (사실 위험하기도 하여 대부분이 포기하지만, 난 이미 경험을 하였고, 포터가 이곳 출신으로 길을 잘 알기에 강행을 했다.) 그리고 가장 힘든 에베레스트 코스를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맨 처음에 하였기에 다른 두 곳은 약간은 쉽게 할 수 있었다.

이 세 곳을 음악에 비유한다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겠다. 에베레스트 지역은 베토벤의 교향곡 5번(운명)과 9번(합창)을 합쳐 놓은 것만큼 감동적이었다. 한 산둥어리를 돌아설 때마다 펼쳐지는 7,8천미터의 설산과 암반과 광야는 그야말로 한 폭의 웅장한 그림이었다. 안나푸르나는 마치 교향곡 6번(전원)을 듣는 것과 같은 편안함으로 시작되었다. 물론 정상에 가까운 곳에 이르러 빙하를 건너거나 눈길을 걸을 때의 힘듦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힘들었다. 때로는 두 시간 내내 만 개의 계단에 가까운 돌계단을 오르거나 내려가야 한다. 랑탕은 처음 며칠 동안 빙하에서 만들어지는 힘찬 물줄기를 거슬러서 올라간다. 교향곡 3번(영웅)의 힘찬 음악을 듣는 듯 했고, 5천미터 정상에서의 반쯤 얼어붙은 여러 작은 호수들을 바라볼 때에는 교향곡 7번과 8번의 활기참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 곳 모두 나름대로의 특징이 있다. 

트레킹에서 힘들었던 것들

체력적인 요소 외에 먹는 것(난 먹는 준비는 전혀 없었다. 처음에는 고추장은 커녕 사탕 한 알도 준비하지 못했다. 보통 한국 사람들의 짐은 내 짐의 3배가 넘는다. 서양 사람들의 짐은 한배 반에서 두 배 정도이다. 한국 사람들이 짐이 큰 것은 유난히 먹는 것을 밝히기 때문이다. 돼지고기 삽겹살에 개스 곤로까지 가져와 구워먹기도 하고 닭백숙을 먹겠다고 모든 양념에 커다란 통까지 들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하다. 난 외국까지 와서 그리고 그것도 트레킹을 와서까지 그렇게 바리바리 싸와서 먹어야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새로운 것을 경험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약간의 어려움을 경험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이곳까지 멀리와서 산을 걸어 다녀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그룹으로 다니면서 너무 떠든다는 것이다. 본래 산행은 자연과의 대화 그리고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는 성찰과 침묵을 하기 위함인데, 요즘은 모두가 떠들고 먹기 위해 산행을 하고 있다. 올해는 경제 사정으로 한국인이 적은데, 작년에는 세계 나라 중 최고로 많이 왔다고 한다. 주의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먹는 것은 약간의 고추장과 김치정도만 있으면 밥(질지가 않다)이 있으니까 비벼먹으면 된다고 본다. 그런데 문제는 추위이다. 내가 갔던 때가 시즌이 시작하기 전인 3월초였는데, 너무 춥다는 것이다. 낮에 햇빛이 비치는 동안은 마치 봄날 같고 추워도 움직이니까 문제가 없는데, 해만 지고나면 상당히 춥다. 그래 롯지에서 저녁 먹는 동안에는 난로 불을 피워주어 그런대로 견딜만 한데, 난로가 꺼지고 방에 들어가면 완전 영하의 냉장고이다.(높은 곳에는 나무가 없어 난로도 없다.) 방한복을 입고 잠자리에 들지만, 처음에는 추위로 잠을 들기가 힘들다. 그리고 힘든 것은 화장실이다. 화장실이 냄새가 나고 옛날 변기 형태로 되어 있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는데,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야 하고 엉성하기 짝이 없어 영하의 찬바람이 들어온다는 것이다.(물론 방도 칸막이가 되어 있기는 하지만, 옆방의 코 고는 소리는 물론이요 이불 들척이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이다.) 그래 자다가 일어나 화장실을 가는 것이 너무 고역이어, 새벽 한 두시면 할 수 없이 다녀왔지만, 새벽 3시가 넘으면 6시 기상할 때까지 참고 견디곤 했다.

네팔에서 만난 사람들

1. 여러 사람을 만났지만, 3사람만 소개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마모루라고 하는 일본인 젊은 부부이다. 20대 후반인데, 이곳에 산지가 반년이 넘는다. 남자는 나무 조각으로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이고 부인은 간호원이다. 2년 전 트레킹을 왔다가 부인이 몹시 아팠는데, 이때 네팔인 목사와 결혼한 한국인 부인에게 신앙의 감화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리고는 인생의 방향을 바꿔 지금은 일본기독의사협회의 파송을 받아 부모가 감옥에 감으로 고아가 된 네팔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 트레킹을 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남편이다. 그는 안나푸르나 일주 트레킹을 하는 중에 우리가 머물던 고방의 그 호텔에 하루 밤을 머물기 위해 왔다.(사실 그는 가난한 사람인데, 일주일을 샤워 한번 하지 못하고 너무 허술한 곳에서만 잠을 잤기에 하루 밤 호사를 위해 찾아왔다고 한다.) 그리고는 우리 일본인 일행이랑 이틀을 어울렸다. 이 부부는 영어를 곧잘 한다. 그가 7년 전 그러니까 그가 20세 때에 에베레스트 트레킹을 혼자서 하였다고 하면서 내게 그 코스를 알려주었다. 그래 여기서 내심 자극을 받았다. 그런데 그가 알려준 코스는 chola pass라는 매우 험하고 위험한 지역을(5천미터 이상) 넘어야 하기에 책에는 소개가 되지 않는 코스이고 지도에도 굵은 선이 아닌 점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리면 불가능한 코스이다. 실상 나를 인도한 친구도 이곳을 열 번이나 다녔다는데, 처음에는 이곳을 가지 않으려고 여러 가지 핑계를 됐다. 그래 나도 포기를 하고 돌아가려고 하고 있었는데, 전날 저녁에 그쪽에서 넘어온 서양인 부부를 만나 이 길로 가게 되었다. 한마디로 너무너무너무 힘들었다. (후에 그곳에 15년을 살고 있는 한국인 트레킹 회사 사장 얘기에 의하면, 자기가 아는 한 그룹으로 건넌 한국팀은 한팀밖에 없다고 한다.)
네팔의 고아들을 돌보는 일이 너무 즐겁다고 말하는 부인의 천진한 미소가 그립다.

2. 두 번째 소개하고 싶은 사람은 Scott Burnham이라고 하는 미국에서 온 친구이다. 나이가 나와 같고 수염을 기르고 있다. 에베레스트 코스를 올라가고 있는데, 누군가가 기타를 들고 내려온다. 아니 먹을 것 입을 것 챙겨다니기도 힘든 판에 기타를 들고 오다니, 너무 놀라 얘기를 걸었더니, 아침에 칼라파타(5천5백미터) 정상에서 노래를 부르고 내려오는 중이라고 한다. 그래 내가 노래를 청했더니 매우 흥겹게 두곡을 부른다. 생각해 보라. 별로 사람도 없는데, 그 설산이 바라보이는 그 산골짜기에서 흥겨운 노래를 듣는 것을. 그가 첫 번째 부른 곡은 Rock & Roll Never Die 라는 곡이었다. 같은 록엔록 세대였으니 모르는 노래였지만, 나도 흥이 겨워 따라 불렀다. 후에 그는 에베레스트를 떠나기 전날 루카라라는 도시에서 다시 만났다. 짐을 푸는데, 옆방에서 하도 시끄럽게 떠들어 어떤 사람인가 하였더니 그 친구였다. 저녁 때 식당에서 만나 맥주 한잔을 나눈 다음 다시 한 번 그의 노래를 들었고, 나도 보답으로 ‘송학사’를 불렀다.

그가 전해준 짧은 인생담. 21세 때에 사랑하던 여인으로부터 배반을 당하고 나서 상처를 달랠 겸 여행길을 떠났는데, 돈이 떨어져 터어키에서 인도까지 순전히 hitch & hike에 의존해서 갔다고 한다. 그리고 더 놀라운 얘기는 자신도 결혼을 했고 지금은 이혼 상태(18세 되는 아들과 함께 왔다.)인데, 이미 결혼한 그 첫 번째 여인이 내년에 자기한테 다시 돌아오기로 했다고 한다.

3. 세 번째 소개하고 싶은 사람은 한 여성 트레커이다. 안나푸르나를 올라가고 있는데, 가이더와 포커를 데리고 앞서가는 사람의 걸음이 상당히 느리다. 저렇게 느린 사람이 어떻게 트레킹을 왔을까 의아해 하면서 바라보니 의외로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다. 그래 물었다. “상당히 나이 들어 보이는군요.‘ ’아 그래요.‘ ’80세가 넘었나요?‘ ’물론이죠?‘ ’85세?‘ ’세살을 더하세요.‘  우리나이로 89세인 독일인 할머니였다. 모자를 거꾸로 쓰고 배낭까지 메고 있었다. 당연히 예전에 경험이 있었다고 믿고, 네팔은 몇 번째냐고 물었더니,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한다. 너무 놀래 한국에서 온 목사라고 소개하고 그녀를 힘껏 껴안았다. 그리고 다음날 정상 바로 아래(MBC)에서 머물었는데, 저녁부터 내린 눈이 아침에야 비로소 그쳤다. 정상(ABC)에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많은 사람들이 그냥 내려갔지만, 나를 포함한 몇 명은 올라갔다. 생각만큼 위험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내려오는데 오후에 이 할머니를 다시금 만났다. 난 이 할머니가 이 길을 포기했을 것이라고 상상했던 것이다. 너무 놀라 다시 한번 포옹을 하고 나서 내년에 다시 보자고 작별의 인사말을 했다. 그러자 ’아니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다시 한 번 소리친다.‘ 사실 60세에 가까운 서양 사람들은 많이 만난다. 그러나 동양인들은 거의 없다. 사실 나는 한국인들 또한 거의 만나지 못했다. 가장 잘 알려진 코스의 낮은 곳에서 한국인 그룹을 보았고, 중간에 20대의 오누이를 만났을 따름이다. 서양인들의 저 도전정신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는 돈하고는 별 상관이 없는 문제이다.

물론 히말라야의 8천미터 이상 되는 14좌를 다 올라선 한국인 산악인들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지금 여성들 가운데 누가 제일 먼저 이를 이룩할 것인가?가 세계 산악인들의 초관심사인데, 3명의 산악인들이 대결 중이고, 우리나라의 오은선이라는 여성이 그중 한명이다. 네팔에서 우연히 함께 만나 식사도 나누었는데, 이미 9좌를 올랐고, 지금 10좌인 캉첸쿵가라는 산을 오르고 있을 것이다. 앞서 말한 3명의 여인이 우연히도 모두 같은 시기에 이 산을 오르기로 되어 있다고 한다. KBS 방영팀이 함께 하고 있으니 얼마 있지 않아 방영이 될 것이다. 그리고 또 한명의 한인 할아버지를 만났다. 이름은 모르지만, 산악협회 회장도 지내고 지금은 현대자동차의 고문변호사로 계시는 71세가 되신 분이다. 그런데 포터 5명을 데리고 이번 4월 말쯤에 에베레스트 정상 8천 8백 5십미터를 밟기 위해 오셨다고 한다. 대단한 도전이다. 그런데 이분이 말씀하시기를 에베레스트를 올라서기 보다 더 힘든 것이 가족들의 설득이라고 한다. 죽을지도 모르니 가족들이 어찌 반대하지 않을 것인가. 에베레스트 트렉 중에 여러 돌무덤들이 있다. 산을 오르다 죽은 사람들을 기념하는 비석들이다. 거기에는 열 한 번째 에베레스트 정상을 올라갔다 내려오면서 죽은 무덤도 있다.

이런 얘기들을 쓰면서 나도 한번 최소한 꿈이라도 꿔보련다. 65세에 에베레스트 정상을 한번 밟아보리라고. 체력과 경험도 문제이지만, 돈도 문제란다. 이 글을 읽는 사람 가운데 후원자 혹은 동반자가 있기를 기도해 본다.

네팔과 한국

2월 21일자 카트만드 포스트에 실린 “Seoul Mates"(서울의 친구들)이란 네팔 이주노동자들에 관한 사설을 통해 외국인들이 보는 한국과 저들의 삶의 모습을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내가 며칠 동안 살펴본 카드만드 포스트 신문은 한 면을 외국 기사에 할애하고 있는데, 항상 한국 얘기가 주요한 사진과 함께 등장했다. 물론 당시 클린톤 국무장관이 남한을 방문하고 있던 민감한 시기라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한번은 김정일위원장의 생일을 축하하는 북한 주민들의 활기찬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사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현재 남한에는 4천명의 네팔 노동자들이 살고 있지만, 그들은 남한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갖지 못한 채 성공의 꿈만을 안고 왔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 그들은 열악한 환경에 빠져 있다. 2. (이 사설이 본 남한의 모습은 이렇다.) 남한은 강도 높은 일, 집단적 사고, 군사적 문화, 인간의 감성 보다 특권계층의 이익을 중시하는 나라이다. 대부분의 네팔인들은 흔히 말하는 3D 직업에 종사한다.(dirty dangerous difficult 더럽고 위험하고 힘든) 3. '빨리빨리' 라는 재촉 단어는 꿈속에서도 등장하는 강박 언어가 되었다. 그들은 결코 3년의 제한된 비자 기간 안에 자신들의 꿈을 이룰 수 없다. 그리하여 불법체류자의 신분으로 전락한다. 4. 그리고 이민단속반원들의 체포의 위험에 항상 직면하여 불안 속에서 살아가고 보통은 여러 친구들과 함께 한방을 빌려 함께 쓰면서 하나의 가방을 갖고 있는데, 그 안에는 몇 개의 옷가지와 체포되었을 때 비행기 표를 살 수 있는 패스포트를 갖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기독교를 믿지는 않지만, 교회가 제공하는 여러 서비스에 의존하고 있다.(최근 제가 부이사장으로 있는 서울이주노동자센터의 최의팔목사 소장은 지난 주에 네팔을 방문하였는데, 이곳에서 일하다가 불구자가 된 장애인 네팔인들을 돌보기 위해 네팔 차와 커피를 수입하는 방안을 강구하기 위해 왔다갔다.)
5. 남한은 이혼율이 높다. 그래서 많은 이혼녀들은 네팔인과 결혼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는 쉽지 않다. 라즈 비스타의 경우를 보면 한국인 아내와의 결혼식을 위해 이미 만불(천오백만원)을 썼다. 그는 지금 한달 60만원의 월세를 내고 살고 있고, 전 남편의 아이들을 위해 돈을 지불하고 있다. 그리고 외식을 하게 되면 한국사람들은 혼자서 밥을 먹지 않아 아내는 친구나 가족들을 식사에 초대하고 있는데, 한 번에 보통 200불(30만원)이나 든다. 그래 그런 얘기를 하면 아내는 그을 떠나겠다고 위협한다. 이제 그간 모아 놓은 돈이 바닥이 났다. 그리고 다른 네팔인들의 경우도 비슷하며 심지어는 자신의 어머니와 비슷한 연령 때로는 할머니의 연령 때의 여성과 결혼을 하기도 하여 네팔인들이 모이는 자리에 나타나기를 꺼려한다. 

남한에는 지금 많은 네팔인들이 운영하는 식당이 있지만, 대부분 인도식당이란 간판을 달고 있고 고국에서는 전혀 해보지 않았던 차를 만들고 있다. 80개의 네팔인 조직이 있고 때로는 서로 경쟁하기도 하고 있고, 명절에는 네팔의 배우나 가수를 초청하여 축제를 열기도 한다. 이때 어떤 사람들은 고향이 그리워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지금 네팔인들은 버는 돈을 고국으로 보내 이를 저축하여 장사의 밑천으로 삼으려고 하지만, 쉽지는 않다.

나가면서 - 감사의 말

처음 서두에서 밝힌대로 이번 안식 3개월의 기간은 신학교를 방문하여 강의와 독서를 통해  새로운 신학의 동향을 알아보고자 했다. 물론 이의 궁극적인 목적은 신(神)을 더 잘 알기 위함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신의 현존을 더 깊이 깨닫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이 방식은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쌓아놓은 곧 논리와 이성에 기초한 신 이해 방식이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가운데 세계의 지붕이라고 할 수 있는 히말라야의 깎아지른 빙하의 설산들의 침묵 속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이는 이전에 그리 깊이 경험하지 못한 감성에 의한 신의 현존 인식이었다. 논리와 언어와 이성에 의한 것만이 절대적이고 바른 신 이해는 아니지 않는가? 이성적인 방식이 대체로 옳은 길로 인도하지만, 절대적인 길은 아닌 것이다. 창조주는 우리에게 이성만이 아닌 감성을 주었다. 종교의 깊은 차원, 사랑 자비 같은 개념들이 이성으로 접근함이 옳을까? 아니면 감성으로 접근함이 옳을까? 둘 다 필요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감성이 아닐까?

트레킹을 하면서 읽은 책 가운데, 존 오도노우가 지은 아남 카라(‘영혼의 동반자’ 류시화 역)가 있다. 그 속에 이런 글이 있다. “이 시대의 비극 중 하나는 우리가 그런 자연의 원초적인 시각과 접촉하지 못한 채로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도시에서의 삶은 어머니 지구와의 풍요로운 관계로부터 우리를 추방시켰다. 흙으로 빚어진 우리는 흙의 모습을 한 영혼들이다. 따라서 우리 존재 안에 있는 흙은 목소리인 그 깊은 갈망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 하지만 이 시대에 그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읽어버렸는지 조차 깨닫지 못하고 그 결과 방황하는 영혼의 고통은 더욱 커져간다. 대부분은 그 이유마저 알지 못하는 채로...(16쪽)

공교롭게도 내가 네팔에 있었던 기간은 사순절 기간이었다. 그래 산을 거닐면서 나는 예수께서 보낸 40일 광야라고 하는 것이 단지 한곳에 쭈그리고 앉아 드리는 정적인 기도가 아닌 몸으로 드리는 트레킹의 기도였음을 깨달았다. 더 나아가 전설에 의하면 예수께서 인도를 다녀갔다고 하는데, 나는 예수께서 히말라야를 다녀간 것은 아닐까? 그냥 추측을 넘어서서 나 혼자 확신을 가졌었다. 육신적으로는 5킬로 이상이 빠지는 힘든 과정이었지만, 영적으로는 훨씬 더 풍성해지는 시간이었다. 네팔에서 돌아오자마자 그 다음날로 나는 우리 산의 아름다움을 경험하기 위해 설악산과 동해바다와 무릉계곡과 동강을 한 주간 돌아봄으로 사순절의 마지막 고난주간을 보내고 교회의 부활절 예배에 참석했다. 내 일생에 두 번째 맞이한 안식 3개월의 기간이었지만, 참으로 뜻 깊은 시간이었다. 이런 기회를 허락한 향린 교우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여기서 얻어진 깨달음과 힘이 이어지는 목회 현장에서 더 크게 하느님께 영광 돌려지기를 기도한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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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21(일) 한백교회 하늘뜻나누기 원고

그런 나라는 없다, 그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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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솔로몬 왕이 강제 노역꾼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주님의 성전과 자기의 궁전과 밀로 궁과 예루살렘 성벽을 쌓고,
하솔과 므깃도와 게셀의 성을 재건하는 데,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열왕기상」 9장 15절


팔레스티나에 철기문명을 선도했고 국가적 체제를 앞서 이룩했던 블레셋을 결정적으로 물리치고, 팔레스티나 거의 전 영역을 병합했으며, 요르단 강 건너의 모압과 암몬 족속을 예속화했고, 남쪽과 북쪽의 상당부분의 영토를 장악했던 나라, 하여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의 최강대국으로 부상한 소제국. 성서는 다윗과 솔로몬의 나라가 이러했다고 말한다. 이만한 영토의 나라는 이 지역에서 이전이나 이후 누구도 이룩한 적이 없었다. 오랫동안 이 지역의 종주권을 주장해 왔던 제국 이집트는 혼인관계를 통해 선린을 도모해야 했고, 지중해 문명의 최고봉을 장식했던 페니키아와도 대등한 국제무역관계에 있었다고 한다.
 
예루살렘에는 웅장한 도성이 건설되었고, 헤롯의 성전에 비견되는 화려한 성전이 건조되었다. 또한 지방 곳곳에 수많은 도시들이 세워졌고, 특히 몇몇 요새도시는 훗날 아시리아 제국을 막아낸 아합의 군사력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막강한 군사력을 예시하고 있다.

그뿐인가. 솔로몬이 지었다는 시들은 대대로 성전 예배의 노래로 찬송되었으며, 나무와 풀과 동물의 분류학이 발전하기까지 한다. 예술이면 예술, 지식이면 지식, 지혜면 지혜, 군사력이면 군사력, 어느 하나도 모자랄 것 없는, 그야말로 팔레스티나의 황금시대가 기원전 11세기 말에서 10세기 전반부를 장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성서의 묘사에 걸맞은 다윗-솔로몬의 나라는 역사상 실재한 적이 없다. 솔로몬의 시편들이 그의 것이 아니었음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었고, 그의 당대로 보이는 기원전 10세기 말경에 예루살렘에는 문자사용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니 동식물의 분류학이 발전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화려한 성전이나 웅대한 궁전터도 찾아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지방에 세워졌다는 요새들은 적어도 한 세기 이후, 그것도 (유다 왕국이 아니라) 북왕국 이스라엘의 것임이 밝혀졌다. 조잡한 도성의 흔적, 문자사용을 통한 체계적 통치술의 부재 등, 알 수 있는 증거들을 종합해보면 어느 모로 보든 팔레스티나와 그 인근의 영토들을 병합한 전대미문의 제국은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해서 1980년대 후반 이후 다윗-솔로몬 제국 가설은 성서 역사학계에서는 더 이상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붕괴하고 말았다. 또한 다윗-솔로몬의 나라가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 때에 분열하여 두 나라로 나뉘게 되었다는, 이른바 통일왕국 가설 역시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 거의 정설이 되었다.

그런 나라는 없었다. 다윗-솔로몬의 시대, 팔레스티나 남쪽의 지형이나 유적 등을 통해 추정해보면, 이 지역에 등장했을 법한 나라는 기껏해야 아직 국가 단계라고 할 수 없거나 잘 보아야 국가로 막 진입한 나라, 그것도 북쪽의 나라들보다 보잘 것 없는 빈약한 나라였던 것으로 보인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후 잠시를 제외하면 이 나라는 팔레스티나의 약소국 가운데 하나로, 변변한 국가제도도 갖추어지지 않았던 후진적 나라였으니, 그 시조인 다윗-솔로몬 시대가 팔레스티나의 황금시대였다는 상상은 그야말로 상상일 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역사비평학적 성서주석들은 아직도 낡은 가설을 전제로 하여 집필되고 있고, 신학교 학생들은 낡은 가설에 기초한 성서 해석을 역사적 해석처럼 배우고 있으며, 대부분의 교회들은 낡은 역사적 정보들과 긴밀히 결합된 신앙제도에 기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최근의 새로운 역사적 성과들은 이제까지의 성서학, 성서교육, 신학교육, 신앙제도에 대한 발본적인 비판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비단 다윗-솔로몬 시대만이 아니라, 제1성서(구약성서) 시대 전체, 그리고 제2성서(신약성서) 시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성서 역사학의 최근 조류에 대해, 반대론자들은 대안을 내놓으라고 반문한다. 사실 1990년대 이후 성서에 대한 역사적 연구는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지만, 다수가 공감하는 안정된 가설은 확립되지 않았다. 다수의 성서 역사가들이 그러한 대안 가설을 향해 매진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나의 생각으로는 그건 불가능하다. 과거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밝히는 일은 자료가 축적될수록, 역사해석학적 인식이 발전할수록 불가능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서 역사학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온갖 영화로 차려 입은 솔로몬도 이 백합화처럼 아름답지는 못합니다.’(「마태」 6,29) 이 말 속에는 솔로몬의 시대가 황금시대였다는, 천년이 지난 예수시대의 대중과 예수 자신이 공유하는 믿음이 깔려 있다. 하여 사람들은 그 시대에 대한 상상을 통해 메시아 시대에 대한 기대를 그리고 있다. 곧 예수와 대중은 솔로몬 시대에 대한 판타지를 통해 하느님나라에 관한 기대를 의사소통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 시대 역사학이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 무엇인지가 시사되어 있다. 곧 역사학은 시간 속에서 벌어지는 대화를 발견하고, 그것을 읽어내는 학문적 논의여야 한다는 얘기다. 마치 안병무 선생이 「마가복음」이 그리는 예수전은 예수의 독백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오클로스 대중이 나누고 있는 꿈에 관한 이야기라고 보는 것처럼 말이다. 선생은 주-객 이분법이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에 항거하고 있고, 그것을 넘어서는 역사는 과거의 유일무이한 존재로 있다가 사라져간 예수라는 개체적 존재가 아니라, 오클로스를 매개로 하는 예수와 마가공동체의 시간대화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 연장선에서 선생은 ‘제2의 마가복음’을 얘기하고 있다. 그것은 한국의 전태일 사건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오클로스를 매개로 하는 시간대화에 관한 예수전이다. 그것이 바로 민중신학이다. ‘증언의 신학’이라고 이름 붙은 그 신학운동은 바로 민중(오클로스)의 이야기를 발견하고, 거기에서 예수를 보는 것이며, 바로 이것, 한국의 민중-예수 이야기가 바로 ‘제2의 마가복음’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알고 있는 한, 시간대화에 관한 현대 역사학적 문제설정을 가장 성공적으로 체현하고 있는 성서해석은 바로 민중신학이다. 그것을 비록 학문적 언어로 세공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반면 오늘날 서구학자들의 대부분의 역사비평적 주석학이나 실증주의적 성서역사학은 학문적 세공은 있으나 역사적 문제설정에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는 한계를 갖고 있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한 것은, 성서 역사학의 최근 동향이나 과제가 아니라, 그것이 오늘 우리의 신앙적 의제와 만나고 있다는 데 있다. 성서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읽는 우리와 대화 과정 속에 들어가 있을 때, 바로 그 순간에 유의미한 것이 된다는 말이다. 성서 그 자체로는, 최근의 성서 역사학이 밝혀낸 것처럼 허황된 역사 이야기들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성서 얘기를 더 해보자. 흔히 간과하는 사실은, ‘성서’라는 책이 신앙의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근대’ 이후라는 점이다. 활판 인쇄기술이 발달하여 제작비용이 저렴해짐으로서 책은 비로소 독서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또 바로 국가 단위의 공교육이 제도화됨으로써 잠재적 독자로서의 문자대중이 등장하였다. 이른바 ‘책의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됨으로써 서양 근대를 대변하는 종교로 그리스도교는 재구성될 수 있었다.

이미 종교개혁기에 성서가 자국어로 번역됨으로써 근대어의 발전을 가져왔고, 이후 신앙제도만이 아니라 국가적, 사회적 제도의 형성에 ‘성서라는 책’ 혹은 ‘책으로서의 성서’를 매개로 하여 발전하게 된다. 나아가 근대의 지식과 성서의 이해는 상호 연관되어 발전하며, 지식 엘리트는 동시에 성서학자이기도 했다. 과거와 미래, 전통과 전망은 성서를 매개 삼아 대중과 교호하였다. 하여 서구의 사회는 기독교를 낡은 시대의 유물로 생각하게 된 것이 아니라, 바로 동시대의 종교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성서’는, 기독교를 근대종교로 재탄생할 수 있게 한 매개이지만, 동시에 근대적 종교이기에 불가피하게 겪어야 했던 위기의 핵이기도 하다. 책이라는 것은 바로 ‘독서’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책의 독서는 읽는 이의 체험이 개입함으로써 가능해진다. 해서 사람마다 책에 대한 취향이 생긴다. 어떤 이는 러브스토리를 좋아하고, 어떤 이는 대하 서사물을 좋아하고, 어떤 이는 무협지를, 어떤 이는 판타지물을 좋아한다. 또 어떤 사람이더라도 책을 읽는 때마다 취향이나 기대가 다르게 나타나곤 한다. 한데 독서가 독서하는 이의 삶, 취향 등과 얽힌다는 것은, 책이 그 자체로 의미가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읽는 이의 그때마다의 사정과 얽힘으로써 완결된다는 것을 뜻한다.

한데 성서의 독서에는 개개인의 체험이 끼어들 수 없다. 성서는 이미 완결된 책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정전(Canon)이라는 성서의 외장(外裝)은 그러한 ‘선험적 완결성’의 다른 이름이다. 개인이 자기 삶을 가지고 끼어들어 해석하기 이전에 성서는 이미 답을 갖고 있으니, 개인이 할 일은 그 답에 준해서 자기를 돌아보면 될 일이다. 다르게 읽는다든가 항변한다든가 재해석한다든가 하는 것은 금지된 일이다. 그러니 성서는 결국 읽지 않아도 되는 책인 셈이다. 아니 읽을 수 없는 책이다. 해석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성서가 해석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해석을 독점하는 존재가 있으며, 그이들은 그것이 마치 신탁을 수행하는 자처럼 자임함으로써 자신의 해석 행위가 해석이 아님을 주장할 뿐이다.

결국 성서는, 성서를 둘러싼 책의 제도는 독서를 가로막는다. 이미 완결된 책이라는 전통적 믿음이 성서의 의미 속에 엉켜 있기 때문이다. 문자가 의미를 완결짓는 용도로 사용된 것은 근대 이전의 형식과 관련이 있다. 고대의 책은 국가가 임의적인 법을 확정짓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임의적인 계약을 확정짓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즉 고대의 책은 구술의 해석적 기능을 제한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근대의 책은 읽는 이마다 저마다 다르게 읽을 수 있는 매체가 되었다. 즉 책은 근대에 와서 해석적 텍스트로 자리잡은 것이다.

전근대적 책으로서의 성서, 그 전통이 근대적 책으로서의 성서를 포박하려 했던 것이다. 하여 신앙제도는 교리라는 이름의 답을 미리 정해 놓고 성서를 읽도록 제한하였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각기 자기의 경험을 개입시킬 수 없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독서일 수 없다. 해석이 불가능한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근대적 원칙이 강고하게 작동할 때 사람들은 성서를 읽는 것이 아니라, 성서읽기라는 행위를 수행한다. 가령, 몇 번 읽었다는 것이 독서를 대체하게 되는 것과 같은 경우다.

근대 이전에는 구술이 해석을 수행하는 매체였기에 신앙은 삶과 만날 수 있었다. 한데 책의 종교가 된 근대 그리스도교에서 성서라는 책이 해석을 불허하게 된다면 신앙은 끊임없이 삶과 어긋나게 된다.

책의 종교에서 책(성서)을 해석하지 않으면 신앙은 삶을 표현할 수 없다. 전통에, 교리에 얽매이지 않고 저마다 자기의 삶을 담아낼 수 있을 때 책을 매개로 하는 신앙은 가능하며 그것이 성찰에 이르게 한다. 매순간, 독서할 때마다 해석대상이 되어야 한다. 매순간 다르게 읽어야만 살아 있는 책이 된다. 다르게 읽을 수 있는 책이 되어야만 성서는 하느님의 소리로서의 성서일 수 있다. 하여 그래야만 성서는 책으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우리의 일상에 개입하는 하느님의 구원의 목소리가 될 수 있다. 하여 성서는 매순간 다시 쓰여야 하며, 매순간 새롭게 자기를 드러내야 한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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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1)
: 죽음의 고고학 考古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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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철
(시카고 신학교 / 윤리학 박사과정)

살아남은 자의 슬픔, 당혹, 그리고 질문

고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식이 열리던 시간에 맞춰 시카고와 뉴욕에 거주하며 신학공부하고 있는 한인 유학생들도 추모예배를 드렸다. 뉴져지 드루 대학과 뉴욕 유니언 신학교의 유학생들이 함께 드루대학에 모여 문동환 목사님을 모시고 예배를 드렸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시카고의 경우는 감리교 신학교인 Garrett 신학교, 장로교 신학교인 McCormick, 시카고 루터란 신학교, 시카고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한인 학생들이 시카고 신학교 채플실에 모여 추모예배를 드리고, 소찬을 나눈 후에 시국토론회도 개최하고, 성명서도 낭독하였다.

두 경우 모두 지역 언론의 보도를 타서 추모예배에 대한 기사가 신문에 실려 한인사회에 알려졌는데, 문제는 추모예배 기사 밑에 달린 댓글들에서 발생하였다.2) 노무현이 크리스챤이 아니었는데 왜 추모예배를 드리냐? 신학교에서 불교신자의 추모예배를 드렸다고 난리다. 노무현이 불교신자였나? 다른 쪽에서는 빨갱이를 걸고 넘어진다. 미국 이민사회에서 좌파와 빨갱이는 한국 본토에서보다 훨씬 더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다. 전체 미국사회에 있는 한인 이민자의 상당수가 박정희, 전두환 시절에 이민 온 경우라, 아직도 반공은 그들의 굳건한 실천이성이다. 이런 까닭에 이민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와 토론중에 좌파와 빨갱이가 뜨면 모든 상황은 종료된다. 노무현은 바로 그 좌파다. 그런데, 어떻게 좌파에 대한 추모가 가능하냐는 것이다. 사실 여기까지는 허허 웃으며 넘어갔는데, 죽음과 자살에 대한 물음 앞에서는 말문이 막혔다. 신앙인으로 죽음을, 그리고 그 죽음을 스스로 결정한 선택과 행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미국에 와서 생활하면서 나는 고국에서 들려온 몇 건의 굵직한 자살소식에 충격에 빠졌던 기억이 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오! 수정’에 나왔던 영화배우 이은주가 자신의 아파트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는 소식, 그 전에 현대그룹 회장 정몽헌이 자신의 사무실에서 투신하여 자살한 사건, 작년에 있었던 대스타 최진실의 자살,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까지....인기스타와 재벌, 그리고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죽음에 대한 유혹과 압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들을 죽음으로 이르게 했던 강압의 내용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 그들의 죽음은 살아남은 우리들의 일상적인 인식의 범주를 벗어나 존재론적으로 우리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만은 분명하다.

죽음의 무도

국민 여동생이라 불리는 피겨 요정 김연아 선수가 검정색의(빨강이었나?) 드레스를 입고 연기를 펼치다가 급하게 턴을 돌더니 관객들에게 뇌살적인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연기를 마무리 짓는다. 언론에서는 여자 선수 최초로 200점이 넘은 피겨스케이팅 세계신기록이라고 호들갑이다. 김연아 선수가 연기할 때 흘러 나왔던 음악이 바로 생상의 ‘죽음의 무도’이다. 원래 이 곡은 중세말기에 유행했던 ‘죽음의 무도’ (dance macabre)에서 기원한다. 춤을 추고 추다가 죽음에 이른다는 경이적이고 낭만적인 모멘트, 그 안에 깃든 서글픔, 허무를 초극하려는 의지와 공포에 맞서는 몸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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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무도’는 중세 말과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서구 종교와 예술 전반의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위에 걸린 그림 Bernt Notke (1435-1508)의 <죽음의 춤>을 비롯한 많은 ‘죽음의 무도’를 그려내는 작품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면 일반 백성, 귀족, 사제, 심지어는 교황까지 해골과 손을 맞잡고 춤을 춘다. 마치 온 유럽이 죽음과 한판 대동의 춤판을 벌이고 있는 형국이다. 이런 문화사적 영향에서일까, 기독교에서 춤은 중요한 상징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내가 자라난 교회에서 즐겨 불렀던 노래 한 곡이 기억난다. 1960년대 미국 사회운동 전성기에 불리웠던 노래를 번역한 곡이라고 하는데 “춤의 왕”이라는 제목의 노래다. 예수의 일생을 짧게 요약하여 각 절의 가사를 만들고, 후렴구를 반복하는 형식이었는데, 그 후렴구 가사가 이렇다: “춤춰라 어디서든지, 신나게 멋있게 춤춰라. 나는 춤의 왕, 너 어디 있든지 나는 춤 속에 너 인도하련다.” 예수의 춤을 통해 (예수의 기억 속에) 우리가 새겨진다는 것, 우리의 춤을 통해 (우리의 기억 속에) 예수가 저장된다는 이 가사의 내용은 사춘기 시절 나에게 예수에 대한, 그리고 인간에 대한 한없는 울림으로 다가왔었다.

몇 해전 Karen Baker-Fletcher가 <Dancing with God>를 출판했다.3) 책 제목을 처음 접하는 순간 중.고등부 시절 자주 불렀던 ‘춤의 왕’이 생각났다. 이 책의 부제가 The Trinity from a Womanist Perspective 인 것으로 보아 삼위일체 교리를 흑인 신학, 특별히 흑인 여성의 관점에서 풀어내고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Baker-Fletcher는 Dance를 중요한 메타포로 사용한다. ‘그녀에게 있어 Dance는 폭력과 고난을 극복해 나가는 용기와 치유’라고 이 책의 서평에 참여한 GTU의 Archie Smiths는 말한다. 결국, Baker-Fletcher가 이 책에서 끌어온 Dance라는 상징도 중세 말 ‘죽음의 무도’이후 서구정신 깊숙이 저장된 춤에 대한 모티브에서 영감을 가져와 그녀 자신의 해석학으로 발전시킨 경우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기독교뿐 아니라 중세 말 유럽을 강타한 이슬람 신비주의 계열의 수피교도들에게도 춤은 신에 이르는 중요한 모티브이다. 시카고는 미국에서도 대표적인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 사회이다. 이런 까닭에 신학교들마다 유대교와 이슬람에 대한 관심과 대화의 일환으로 이슬람권 학생을 장학생으로 선발하여 이슬람과 신학의 대화를 도모하기도 하고, 유대교 랍비를 교수로 초빙하여 유대교와 기독교간의 다리를 놓는 강의를 열기도 한다. 이러한 학문적 분위기 속에서 모스크와 유대교 회당을 방문하여 그들의 예전에 참여하고 이슬람 이맘(이슬람 종교 지도자)이나 유대교 랍비들과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궁금증에 대해 묻고 답을 할 기회가 종종 있다. 몇 해전 터키에서 온 이슬람 친구 덕분에 수피교도들이 신과의 만남을 갈망하면서 원색의 양탄자위에서 빙글빙글 춤을 추면서 입신(?)의 경지에 이르는 모습을 볼 기회가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면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구나. 이 춤을 추다가 이 춤을 추고 추다가 죽어도 괜찮겠다’라는 위험한(혹은 황홀한) 프로이트적 상상에 빠진 적이 있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삶을 생동케하는 에너지를 언급하며 에로스(삶의 본능)와 타나토스(죽음 본능)를 거론한다. 프로이트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 계기가 된다는 <쾌락의 원칙을 넘어서>는 바로 이 삶과 죽음의 욕동을 해부하는 책이다. 궂이 프로이트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어쩌면 모든 종교는 삶과 죽음이 매양 하나임을 말하고 있지 않을까? 각 종교의 제도화된 종파에서는 교리적 잣대로 어느 정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엄격성을 유지하겠지만, 모든 종교의 신비주의 계열에서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무화된다. 물론, 역사는 그들을 변방에 머물러 있었던 이단아로 적고 있지만 말이다.             

이렇듯, 중세 이후 서구사회 깊숙히 각인된 ‘죽음의 무도’라는 상징은 죽음의 일상성, 죽음의 편재라는 절망적 상황을 춤판이라는 상반된 이미지와 결합시켜 그 비극미를 극대화시킴과 동시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녀)가 비록 대단한 권력과 인기를 가진 왕이나 교황, 혹은 유명한 슈퍼스타라 할지라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를 가리켜 사람들은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의 부제를 ‘죽음의 고고학考古學’이라 붙였다. 푸코의 개념을 차용한 것이다. ‘고고학’은 푸코가 그의 초기 저작들에서 관심했던 사항이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었던 <광기의 역사>, 그를 세상에 알린 <말과 사물>, 그리고 <지식의 고고학>에서 푸코는 다양한 지식들을 둘러싼 관계들의 역학과 역사를 다룬다. 역사적 주류에 의해 정립된 지식이면에 가리워진, 침묵하는 소리를 발굴하고, 주류 담론학에서는 나오지 않는 잊혀진 과거를 드러내어 당대 지식에 시비를 걸고 흠집을 낸다는 측면에서 푸코의 ‘고고학’은 탈근대적 가치를 지닌다.
죽음이라는 테마는 다분히 종교적이다. 특별히 기독교에서 죽음은 부활과 한 쌍의 완벽한 조합을 이루어, ‘고난-죽음-부활-승천-재림-새하늘 새땅’으로 이루어지는 기독교 주류 담론의 기틀을 형성한다. 내가 이 글의 부제를 ‘죽음의 고고학’이라 명한 이유는 분명하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죽음 이외의 침묵하는 죽음에 대한 증언들, 예를 들어 미술, 역사, 철학 등 다양한 유물(?)을 통해 죽음과 결부된 묻혀있는 과거를 발굴한다는 점에서 ‘죽음의 고고학’이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죽음이 팽배하고 만연한 우리사회에서 죽음을 이해하는 또 다른 창과 약간의 틈을 낼 수 있다면, 그래서 죽음을 다시 사유하고 물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이 글의 의미는 족하다. ‘죽음의 시대’에 죽음과 맞서는 구체적 결단과 행위에 대한 부분은 다음 과제로 미룬다.

2) 시카고 신학교와 드루 대학에서 드렸던 고 노무현 대통령 추모예배 관련 신문기사와 반응을 아래에 링크시킵니다.
http://chi.christianitydaily.com/view.htm?id=183792&code=cg
http://www.usaamen.net/bbs/zboard.php?id=usa3&no=4588

3) Karen Baker-Fletcher, Dancing with God: The Trinity from a Womanist Perspective (Chalice Press,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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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6.25 21:5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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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철 목사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지난 5월 드루신학교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추모예식을 마친 후, 뉴욕, 뉴저지 교계의 반응이 무척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뉴스앤조이 인터넷 언론을 통해 "예배와 예식에 대한 바른 이해"를 촉구하는 글을 올린 것이 있어 아래에 링크합니다. 참고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1357

    그리고 아멘넷에 드루신학교에서 열린 추모예식과 관련해서 공개토론이 있었습니다. 아래에 링크합니다.

    http://www.usaamen.net/bbs/zboard.php?id=sss1&page=1&sn1=&divpage=1&sn=on&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346
  2. 이상철
    2009.06.25 23:00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김남중 목사님,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예술과 예수

김현화
(영국에서 미술치료 공부 중)

일주일간의 무서운 고민을 끝내고 나를 포함한 8명의 졸업준비생들은 각자 계획한 프로젝트에 맞는 장소 결정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졸업작품 작업에 들어갔다. 우리들은 7주 후에 있을 전시를 앞두고 마지막 프로젝트 작품에 힘을 쏟아야 했다.
 
지름이 족히 10미터는 됨직한 동그란 땅, 그 위에 세워진 원형 가건물이 내게 주어졌다. 프로젝트의 주제나 재료도 고민해야 할 일이었지만, 설치작품을 하려는 나에게 제일 중요한건 먼저 공간을 제대로 읽어내는 일이었다. 작품이 들어설 공간에 아름다운 작품이 놓여지건 보기 흉한 작품이 놓여지건 어쨌든 공간과 같은 울림을 내는 것이어야 한다. 골치 아픈 작품으로 20세기 미술가들을 울렸던 마르셀 뒤샹이나 화장실에서 남자들의 변기를 떼어다 전혀 다른 공간인 갤러리에 갖다 놓을 일이었다. 한 세기 지난 지금의 나는 다른 입장에서 공간을 이해하고, 공간과 작품을 말 그대로 동등하게 대하리라 부푼 꿈을 꾸며 몇일을 가건물 주변에서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건물 밖을 따라 뱅뱅 돌기를 수십 번, 안팎을 들락날락거리며 안테나를 세워 온갖 소리와 냄새를 감지해보기도 한다. 이 공간에는 어떤 작품이 필요한지, 내가 생각하는 주제와 어느 지점에서 공간이 만나게 될지, 서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진단하고 타협하기를 시도해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몽골리안의 양모 천막집을 닮은 이곳은 안에 서 있으면 어지럼증을 느끼게 할 뿐, 나를 편안히 작업으로 이끌기는커녕 오히려 밀어내는 것이었다. 너무 조용하고 둥글었으며, 한낮 햇빛은 불투명 플라스틱 지붕을 뚫고 한없이 쏟아져 내렸고, 땅바닥은 콩크리트 마냥 단단히 말라붙어 있었다.

어느 작가처럼 통째로 건물을 포장해버리지 않고선 수가 없겠다 생각하며 한숨을 내쉰다.
일주일 후, 이 공간은 학교와 마을 재활용 센터, 인근 농장에서 모아들인 작품 재료들로 넘쳐났다. 산더미 같은 헌옷과 쓰던 천들, 100그루가 넘는 긴 나무 더미들. 넓은 공간에 대한 부담감과 작업할 수 있는 날이 몇 주밖에 남지 않았다는 초조함에 좋은 작품을 하겠다는 욕심까지 보태져 밖에서 모아들이는 재료는 눈덩이처럼 불어만 갔다. 어쨌든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섰고 도와줄 수 있는 친구들도 불러 모았다. 공장 작업장같이 되어버린 둥근 건물은 날이 갈수록 사람과 재료와 작업에서 나오는 쓰레기로 뒤덮혀 갔다. 이전에 공간을 채웠던 부담스런 정적은 수다소리에 쫒겨 났고, 말라붙은 땅은 나뭇가지로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루하루를 보내며 내 머리 속과 마음도 수많은 아이디어와 걱정, 피곤으로 범벅이 되었다. 어떻게든 생각의 가지를 쳐내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모든 일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할 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가에 힘 빠진 몸을 기대고 초점 없는 눈으로 헝클어진 작업장 안을 내려다보는데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결국 이런 게 예술이었단 말인가?’. 4년간 문학을 공부하고, 석사과정으로 현대미술사를 전공했고, 그걸로도 모자라 다시 대학원에 들어가 사진을 찍고 돌아다녔었다. 예술이 뭔지 그래도 모르겠어서 영국까지 와서 3년을 또 고생했는데 이 놈의 질문은 끝날 줄을 모른다. 바쁜 와중에 별 도움 안 되는 생각이라며, 그리고 원래 답도 없는 것이라며 혼자 속삭이고는 당장 급하게 작업을 해야 할 넓은 지붕으로 다시 눈을 돌린다. 저 지붕을 어느 세월에 검은 비닐로 다 덮어 씌워 이 공간을 어둡게 만든단 말인가. 너무 밝은 내부를 어둡게 만들고 싶었던 나는 지붕 전체에 검은 비닐을 씌우겠다는 만만치 않은 일거리를 두고 다시 힘이 빠진다.

새가 날아 들어왔는지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여기서 뭐하니?”... 할아버지 선생님이 나타나 묻는다. 나는 지붕을 다 덮어 버릴 거라며 검은 비닐 얘기를 꺼내고는 그런데 이 공간을 어둡게 만드는 게 과연 가능하겠느냐며 그간 쌓인 피로를 그에게 풀어낸다. 그러나 작품 때문에 복잡한 내 심경은 안중에도 없는지 그는 대형 비닐은 이러저러하게 구하면 되겠고, 지붕 밑둥은 이렇게 마감하고, 바람과 비가 자주 오니 그건 저렇게 처리하자는 둥 온통 비닐 얘기 뿐이다. 아, 예술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달픈 일인지 알아주는 이가 이렇게 없을까. 나는 속으로 한탄을 한다.

그새 말을 다 마친 할아버지는 뒤돌아 서기 전에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마지막 말을 던지고 사라진다. “언제든 필요하면 부르기만 해. ‘일’은 내가 할게. 그러니 너는 ‘예술’을 해.”

사실이 그랬다. 3년간 그에게 수업을 받아왔지만 한 번도 그가 작품하는 모습을 본 일이 없었다. 굽은 등으로 항상 돌을 나르거나 나무를 패고 있었고, 물건을 실어 나르느라 운전을 하거나 수레를 끌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도 그에게 묻지 않았었다. “왜 예술을 하시지 않나요?”

사람들이 내게 물어왔다. 어떤 작품을 만들 건지, 왜 이런 재료를 선택한 것인지. 그러나 대답하기 어려웠다. 처음부터 작품에 대한 선명한 구상이 있었지만, 그렇게 야심차게 시작했지만 그건 이 공간이 정해진 시간부터 계속 변했고, 나는 도통 그 끝이 어떻게 끝날지 예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몇 주가 지나면 끝나리란 것만 알뿐, 난 이 공간과 함께 어디로 가는 건지, 작품을 하는 건지 놀이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고 그저 뭔가를 따라가고 있었다. 비가 내리면 플라스틱 지붕에 잔 나뭇가지와 잎들이 떨어져 우박소리를 냈고, 열린 문 사이로는 새들이 걸어 들어와 조용히 몇 분을 산책하다 돌아나가곤 했다. 어지럽게 동그랗던 원형 바닥과 벽은 묘한 기운을 내뿜으며 오브제를 위한 완벽한 무대가 되어갔다.

5주 후, 발에 치여 넘어질 정도로 쌓였던 나뭇가지들의 반은 버려졌다. 모아온 옷가지들 대부분은 다시 재활용센터에 넘겨졌고, 땅바닥에 누워있던 나무들은 헌옷과 천으로 옷을 해 입고 딱딱한 땅에 새로운 나무로 심겨졌다. 그리고 밖에서 날아 들어오는 새들이 이상한 나무들과 어울리며 이상한 숲을 만들어냈다. 불투명한 지붕에선 바닥 구석구석까지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두 주 지나면 있을 졸업식 때 졸업생들 각자가 생각하는 예술은 무엇인가를 말해달라는 주문이 들어왔다. 두 주가 지나기 전에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웹진에 신학이 아닌 예술에 대한 글을 올리고 싶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예술에 대한 질문에 대해 운 좋게도 하나의 대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예술과 예수. 이 둘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가.

끌어낼 수 있는 최대한의 인내로 자기를 침묵시키고, 대신 그 공간에 타자를 초대하여, 타자가 자기 목소리를 찾아 스스로 말하도록 하게 하는 일. 자신을 뒤로 물리고, 죽음에 가까운 침묵으로 소리를 낮추어 타자가 타자되도록 놓아버리는 일. 그렇게 해서 끝내는 자신이 타자가 되어버리는 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일.

나는 이제 예수를 빼고 예술을 생각하기 어렵게 되었다. ⓒ 웹진 <제3시대>



아래는 김현화 님의 프로젝트 작품과 작품이 있는 정경을 찍은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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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6.23 21:54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예술가 예수.

    자신을 침묵시키고 타자가 타자되게 하는 일... 끝내는 자신이 타자가 되어버리는 일....

    하아. 저도 그런 목회를 하고 싶은데 말이죠..

121차 월례포럼 (제4회 맑스 코뮤날레 세션 참여로 대체합니다.)

세계화 시대의 '이주'와 사회적 고통
- '결혼 이주'를 통해 보는 한국 사회의 감성적 경계의 재영토화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는 그동안 신학의 경계를 넘어 인문.사회과학과 대화하려는 시도를 지속해왔습니다. 그 일환으로 이번 제4회 맑스 코뮤날레에서 본 연구소는 주관단체 세션에서 민중신학적 관점으로 현대사회를 읽는 시도를 하고자 합니다. 민중신학자 안병무 선생의 '오클로스론'을 발판으로, 현대 한국사회에서 세계화로 인해 교란되고 재영토화되고 있는 경계가 무엇이며, 포섭/배제는 어떤 기제를 통해 이뤄지고 있는지 밝혀보고자 하는 의미있는 시도가 될 것입니다.

▲ 일 시 : 2009년 6월 25일(목) 오후 4시 ~ 7시
▲ 장 소 : 서울시립대학교 법학관 103호 (찾아가는 방법 안내 클릭)
▲ 주 제 : 세계화시대의 '이주'와 사회적 고통
― 발제1. 결혼이주자의 '경제주체 되기'
              - '타자' 재생산을 통해 구성되는 '다문화 자본주의'의 꿈
           발제: 유승태_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상임연구원
           논찬: 김현준_CAIROS 회원, 서강대 사회학과 석사 수료
― 발제2. 대중매체의 결혼이주자 재현과 상징폭력
           발제: 정용택_한신대 신학과 Th.M 과정 신약학
           논찬: 김민아_한국기독청년학생연합회 간사
▲ 문 의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02-363-9190) / yminjung@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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