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신학가이드18]



조르지오 아감벤 I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1942년생, 이탈리아의 철학자, 그의 저서 [The State of Exception] (예외상태)와 [Homo Sacer] (호모 사케르)로 잘알려져있다. 삶정치(Biopolitics)의 개념을 중심으로 철학을 개진한다." 이 짧은 서론이 위키피디아에 나와있는 아감벤의 첫 소개이다. 위의 두 저서가 정치학, 사회학, 철학, 신학에 필수적으로 읽어야할 책으로 떠오르면서 일약 스타덤에 오른 과거에는 로마제국 현재에는 이탈리아의 신성으로 떠오른 학자의 이야기를 이제부터 하고자 한다. 필자는 신약신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어서 그의 철학적 깊이를 쉽게 다룰수는 없지만 그의 바울에 관한 책 [The Time That Remains: A Commentary on the Letter to the Romans] (남겨진 시간: 로마서 주석)을 중심으로 바울에 대한 그의 생각을 논할 것이다. 물론 점차적으로 그의 철학적 프로젝의 중심을 논하기도 할 것이다. 

   바로 [남겨진 시간]을 펴보자. 본 서는 쉽게 말하면 로마서 1장 1절,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나 바울은 부르심을 받아 사도가 되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따로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개역개정)에 대한 길다면 긴 주석서이다. 원래 본문은 “Παῦλος δοῦλος Χριστοῦ Ἰησοῦ, κλητὸς ἀπόστολος ἀφωρισμένος εἰς εὐαγγέλιον θεοῦ”이고 굳이 직역하자면 “바울, 그리스도 예수의 종, 사도로 부름받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구별된” 정도가 되겠다. 먼저 아감벤식으로 용어를 정리하자. 그리스도란 메시아에서 온 말로써 기본적으로 ‘기름부은 자’를 뜻한다. 그렇다면 처음 부분은 “바울, 메시아 예수의 종”이 된다. 아감벤은 본서 처음부터 기독교가 역사를 통해 이 메시아를 그리스도란 말과 분리해내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했다고 말한다. 이유는 여러가지이겠지만, 결국 로마서는 메시아 예수에 대한 소개이며 그러므로 ‘메시아적 텍스트’이다.[각주:1] 그리고 이 메시아 예수를 통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메시아의 시간, “time of the now”이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시간적 개념으로 소개하는 세번의 표현 [τοῦ νῦν καιροῦ (8:18), τῷ νῦν καιρῷ (3:26), τῷ νῦν καιρῷ (11:5)]에서 아감벤이 착안한 것으로 보인다.) 쉽게 말하면 어느 광고에서 흘러나오는 말과 같은 ‘지금 이순간’이다.[각주:2] 결국 아감벤이 바울을 통해 메시아 예수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메시아사상의 핵심은 바로 메시아의 시간, 지금 이 순간이 어떤 의미를 말하는지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아감벤의 시도가 필자에게는 매우 흥미로운데 바로 바울의 새관점주의 이후에 나타난 특정한 바울 해석에 대한 반론으로 읽어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바울에 대한 본 웹진의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필자는 소위 ‘바울의 새관점’을 설명하는데 상당 부분을 할애하였다. 그 이유는 새관점주의가 나타나면서 과거의 바울에 대한 설명이 그의 ‘이신칭의,’ 즉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 구원을 중심으로 한 바울신학이 획기적인 전기를 맞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율법을 벗어나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닌 또 다른 바울 신학의 핵심, 즉 왜 바울이 그토록 열심히 에클레시아 (모임: 현재 ‘교회’로 번역되는)를 만들고 서신을 통해 신학적 진술을 했는지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했다고 하였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 여러 바울신학이 탄생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필자는 크게 바울신학의 ‘이신칭의’를 새롭게 해석한 제임스 던(James Dunn)이나 톰 라잇 (N. T. Wright)을 소개했고 다른 한편으로 바울의 종말론을 중심으로 놓은 알버트 슈바이쳐 (Albert Schweitzer)나 크리스쳔 베커(Christiaan Beker)를 소개하였다. 특히 던과 같은 학자는 바울의 주요 공격 대상은 유대교의 율법이 아니라 유대교의 민족적 우월감이라고 생각했고, 바울이 집중적으로 공격한 것은 유대교의 아이텐티티 마커 (Identity Markers)라고 하였다. 즉 자신들의 다른 민족들보다 우월하게 만드는 특정한 전통이나 문화 (안식일, 음식법, 할례)가 절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구원의 지평과 동등될 수 없다고 바울이 목놓아 외쳤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바울의 신학의 핵심은 어떤 민족성이나 문화등으로 인류를 갈라놓는 모든 형식에 반대하면서 평등하고 선입견 없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새로운 보편적 공동체의 정초를 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신학은 보편적 구원의 지평만이 아니라 현실세계의 여러 인종적 갈등과 종교적 충돌을 해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고 할 것이다.

    이에 대한 아감벤의 대답은 단순하다. 바울은 어떠한 새로운 보편적 인간을 말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감벤은 바울이 말하는 메시아니즘, 즉 메시아적 시간론을 토대로 던의 방식이나 종말론적 방식으로 바울을 보지 않고 이와는 차원이 다른 새로운 메시아론을 바울이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미리 말해두지만 아감벤에 따르면 바울에 대해 오로지 올바르게 이해한 사람은 바울 이래로 아마도 딱 두명일텐데, 처음은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이고 그 다음은 바로 자신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아감벤이 말하는 메시아적 시간이 도대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메시아적 시간, 남겨진 시간(The time that Remains)


    먼저 가장 쉽게 아감벤의 생각을 알 수 있는 예는 본서의 50–51페이지에 나오는 아펠레스와 포로토게네스의 일화이다. 둘다 헬라세계의 위대한 화가였는데, 프로토게네스가 아펠레스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붓으로 더는 가늘게 그릴 수 없는 선을 그려놓았다. 프로토게네스가 떠난 이후 도착한 아펠레스는 이 선을 보고 자신의 붓을 들어 그 선의 중간을 가르는 더욱 가는 선을 그렸다. 즉, 더 가는 선을 그림으로써 이전의 선이 두개로 갈라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아감벤은 ‘아펠레스의 절단’ (The cut of Apelles)라고 부른다.[각주:3] 이 소개된 예화로 설명하자면 프로토게네스가 먼저 그린 선은 유대교의 율법이나 로마의 법이 만들어내는 구분선을 뜻한다. 갈라디어서 3장 28절에서 바울은 유대교와 그리스인들, 노예와 자유인들이 모두 구분없이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유대교와 그리스인을 분리하는 것이 바로 유대의 율법이고 노예와 자유인을 가르는 것이 로마의 법을 뜻한다.[각주:4] 즉, 당시 바울에게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처럼 인간을 구분하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법(Law)이였던 것이다. 바울의 서신에 반율법적인 시각이 있다면 바로 법에 대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그 기원을 찾아야 한다고 아감벤은 생각한다.[각주:5] (48) 결국 법은 나와 너를 나누고,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를 분리한다. 아감벤의 사상을 소개하는 다음편에서 법이 가지는 중요성에 대해서 논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아펠레스의 절단’은 바로 바울이 말하는 새로운 법을 의미한다. 인간이 그릴수 있는 가장 가는 선의 구분 위에 그려 넣음으로 그 이전의 선이 가지는 의미를 무화시켜 버리는 선, 그것은 쉽게 말하면 바울이 스스로를 ‘메시아의 노예’라고 선언함으로 나타나는 효과와 같은 것인데, 아감벤은 바울에게 아펠레스의 선은 ‘육과 영’이라는 구분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래서 유대인은 다시 육체에 속한 유대인과 영에 속한 유대인으로 나누어지고, 이방인 또한 육에 속한 이방인과 영에 속한 이방인으로 나누어진다.[각주:6]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영에 속한 유대인과 영에 속한 이방인들을 합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고자 함일까? 그렇지 않다. 여전히 영에 속한 유대인은 율법아래 매여있고, 영에 속한 이방인들도 로마의 법 아래에 매여있다. 바울이 육/영이라는 아펠레스의 절단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의 구절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아감벤은 말한다.

    “유대 사람들에게는, 유대 사람을 얻으려고 유대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면서도,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을 얻으려고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율법 안에서 사는 사람이지만, 율법 없이 사는 사람들을 얻으려고 율법 없이 사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개역개정 고린도전서 9장 20–21절)  

    바울은 자신이 율법이 아니지만,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이자, 그리스도의 율법 위에, 율법 없이 사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유대인/헬라인이라는 구도는 사라진다. 즉, 율법아래에 그러나 율법없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바로 율법과 법이라는 프로토게네스의 선의 가운데 육/영이라는 선을 그음으로써 그 선안에 나타나는 새로운 존재들, 즉, 남겨진 존재들을 말하고자하는 것이 바로 바울의 의도라는 것이다. 바로 존재들, 유대인이지만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지만 이방인이 아닌 자들이 나타나는 시간이 바로 메시아의 시간이다. 다음 구절을 음미해보자.


    “형제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이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 부터는 아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처럼 하고,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하고, 기쁜 사람은 기쁘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무엇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처럼 하도록 하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는 사라집니다.” (개역개정 고린도전서 7장 29절–31절)   


    전도서 3장은 “모든 일에 다 때가 있다”고 하면서 태어날 때와 죽을때, 심을 때와 뽑을 때… 울 때와 웃을 때를 분리시킨다. 그러나 바울은 이 분리된 시간을 하나로 합친다. 바로 메시아적 시간이다. 바울은 “웃는 것처럼 울라”라고 하지 않는다.[각주:7] “마치 울지 않는 것처럼 울라”라고 말한다. 바로 이 “as if not”이 아감벤이 말하는 바울의 메시아적 시간에 일어나는 핵심적 사건이다. 바로 세상의 어떤 법도, 어떤 효과도 그 효력을 중지하는 시간(Inoperative time)이다. 그래서 바울이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표현하는 그 표현은 바로 노예와 자유인을 분리하는 로마의 법을 중지시키는 효과를 낳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분리하는 유대의 율법의 효력을 소멸시키는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자신을 소개할 때 ‘메시아의 노예’라는 표현은 바로 메시아적 소명 안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효과를 말하는 것이며 모든 법적 조건들이 변화를 맞이하는 순간을 표현한다.[각주:8] 그러므로 ‘부름받은’로 해석되는 클레토스 (κλητὸς)는 더 나아가 모든 소명받은 자들의 커뮤니티인 ekklesia (All Kleseis)로 명명되는 것이다.[각주:9] 바로 메시아적 시간에 메시아적 소명을 받은 새로운 공동체를 뜻한다고 아감벤은 설명한다.  

    그러므로 바울 신학의 핵심은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 공동체, 즉 그리스도 공동체를 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이전의 모든 정체성이 그 효력을 잃어버리는 시간, 메시아적 시간에 나타나는 메시아적 공동체를 말하고 있다. 다음 웹진에서는 이 메시아적 공동체가 어떤 공동체인지 왜 아감벤에게 현시대에서 이 메시아적 시간이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그토록 큰 의미를 가지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 웹진 <제3시대>


  1. Giorgio Agamben, The Time That Remains: A Commentary on the Letter to the Romans (Stanford, Calif.: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5), 1. [본문으로]
  2. Ibid., 2. [본문으로]
  3. Ibid., 50. [본문으로]
  4. Ibid., 13. [본문으로]
  5. Ibid., 48. [본문으로]
  6. Ibid., 51. [본문으로]
  7. Ibid., 23. [본문으로]
  8. Ibid., 13. [본문으로]
  9. Ibid., 2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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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우파'와 대형교회, 다섯 번째[각주:1]


'주권교인'과 귀족영성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성령운동의 역사와 자본주의


    신사도운동(new apostolic movement)적 성령운동 이론가인 피터 와그너(Peter Wagner)는 20세기 북미에서 일어난 성령운동의 역사를 3번에 걸친 ‘물결’(wave)로 유형화했다. 그에 의하면 ‘제1의 물결’은 1900년대 초의 ‘오순절운동’, ‘제2의 물결’은 1960~1970년대의 ‘은사주의운동’, 그리고 ‘제3의 물결’은 1980년대의 ‘신사도운동’이다. 한데 여기서 신사도운동은 그 기원을 1980년대로 소급할 수 있으나 1990년대에 거대한 물결을 이루었으니, 시기를 정정하는 게 낫다.

    한편 피터 와그너가 말하는 성령운동을 내 식으로 말하면, 개신교적 감성이 일으킨 종교적 열광주의 현상이다. 소리의 현상인 방언, 몸의 현상인 경련, 그리고 그런 현상과 결합해서 나타난 몸과 정신의 치유 등이 성령운동의 핵심적 구성요소다.

    그런데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 시기다. 성령운동의 첫 번째 물결이 휘몰아치던 시기는 미국의 빠른 산업화 과정에서 농촌에서 도시로 대대적으로 이주하게 된 이들이 자본주의의 야만적 폭력성에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던 때다. 두 번째 물결은 소비사회로의 이행이 급격하게 진행되면서 배제와 박탈의 새로운 양상이 심화되던 시기에 일어났다. 그리고 세 번째 물결은 신자유주의적 체제로의 변동이 폭력적으로 진행되던 때다. 요컨대 세 번의 성령운동의 물결은 모두 자본주의적 구성 양식의 급격한 변화와 관련이 있는데, 특히 그 변화 과정에서 심각한 고통의 상황에 놓인 이들 사이에서 성령의 바람이 휘몰아쳤다.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서 벗어날 이성적인, 즉 계산 가능한 비전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개신교적 감성의 정치를 통해 폭력으로부터의 해방구를 찾아내려는 현상이 바로 성령운동이라는 것이다.

   이때 성령운동의 지도자는 대중의 감성을 집단적으로 고조시키는 전문가다. 그이를 매개로 해서 성령운동의 대중은 절망이 희망으로 반전되는 몸과 정신의 체험을 하게 된다.  

   이 글이 주목하는 것은 세 번째 물결인데, 이와 관련해서 하나 더 이야기할 것이 있다. 앞의 두 번의 물결은 자본주의적 변화 과정에서 주변화된 대중 사이에서 더 강렬하게 발생하며, 그 지도자들도 그런 체제에서 배제된 자 중의 하나였다. 한데 놀랍게도 세 번째 물결의 주요 대중은 사회적으로 결코 주변화된 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비교적 안정적인 자산능력을 보유하고 좋은 직업을 가졌으며 향후에도 상승 가능성이 막힌 이들이 아닌 계층 출신이 많다. 그리고 지도자들도 대개 매우 성공적인 사회적 능력을 갖춘 이들이었다.  

   한국에서 1970~1980년대에 세계적으로 전무후무한 성령운동을 이끌었던 것은 조용기와 순복음교회다. 그의 성령운동의 출발점은 1954년, 전후(戰後) 사회적 보건의료체계가 철저히 붕괴된 상황에서 방언과 병고침으로 유명했던 나운몽의 성령운동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지만, 1970년대 중반 이후 그의 성령운동을 포장하는 신학적 서사를 채운 것은 미국의 오순절운동과 은사주의적 성령운동의 담론이었다. 즉 첫 번째와 두 번째 물결의 담론이 결합되어 조용기 현상의 서사를 구성한 것 같다. (이에 대하여는 나의 책 《시민K, 교회를 나가다》를 보라.)


신앙의 감성적 기획으로서의 ‘귀족영성’과 1990년대


    한편 신사도운동적 성령운동이 한국에 상륙한 것은 1980년대 초 대학가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일부 성령운동 계열의 선교전문 신앙단체들에 의해서다.(마라나타선교회, 예수전도단 등) 하지만 1980년대 말 온누리교회가 ‘경배와 찬양’ 프로그램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다. 이 프로그램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이 교회 성장의 중요한 촉매 역할을 했고, 1990년대 말 이후 전국적인 붐을 일으켰다.

   ‘경배와 찬양’이란, 예배의 모든 요소가 설교자에게 집중되어 있는 전형적인 예배 형식을 파괴하고, 설교자만이 아니라 찬송, 공간구성과 운용, 조명 등 다양한 구성요소들이 ‘따로 그리고 서로 간섭하며’ 일으키는 메시지 효과를 통한 해체적 예배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워십 디자이너라는 기획자의 전문적 역할이 중요하다. 아무튼 이러한 해체적 예배 기획은, 설교자의 말을 통해 이성적 해석을 자극하는 개신교의 전통적 예배 양식과는 달리, 예배참여자의 감성을 자극하여 종교적 메시지를 체감하게 한다는 점에서 성령운동과 친화적이다.  

    그렇다면 왜 성령운동과 친화적인 종교성이라는 캐릭터를 갖는 온누리교회에 수평이동을 거듭하던 교인들이 정착하게 된 것일까? 앞의 연재글에서 말했듯이, 이들 수평이동을 반복하던 교인들은 정보능력이 상대적으로 뛰어난 이들이며, 그러한 능력에 걸맞게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갖춘 이들이 많다. 그리고 많은 교회들은 종교시장에서 이들의 까다로운 종교성을 유념하며 종교상품적 이미지로서의 교회적 캐릭터를 창출한다. 즉 이들은, 소비사회의 소비주체적 시민에 대응되는, ‘주권교인’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이들이 왜 사회적 소외계층들이나 선택한다는 성령운동적 신앙에 집단적으로 매료된다는 것인가?


   한국계 독일 철학자 한병철이 쓴 《피로사회》는 이를 이해하는 하나의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신자유주의 시대는 무한긍정의 정신으로 무장하며 더 높은 성과를 위해 끊임없이 그리고 자발적으로 노동하는 인간상을 강조한다. 성공한 자라고 멈추거나 속도를 늦출 수 없다. 그 순간 그이는 추락의 나락으로 떨어질 위기를 겪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가 바로 신자유주의적 세상이다. 하여 이 시대의 사람들은 누구든 쉼 없이 자기를 불태우며 노동해야 한다.  

    문제는 노동의 대열에서 낙오된 자만이 추락의 위기를 겪는 건 아니라는 데 있다. 낙오되지 않으려면 성공을 위해 쉼 없이 달려야 하고 그 과정에서 몸과 정신의 자원이 과도하게 소진되어 버림으로써 ‘추락’의 위기를 겪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 많은 이들이 소진성 질환에 걸린다. 소화기 계통의 질환들, 대사증후군(고혈압, 고지혈증, 당뇨), 심혈관계 질환, 우울증, 조울증 등에 시달리는 것이다. 나아가 소진성 질환에 걸리지는 않았어도, 추락의 예감 속에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무기력 상태에 빠지는 경우도 많다. 말했듯이 이들은 일터에서 밀려나고 가족이 파괴되고 사회적 관계가 무너진 자들이 아니다. 아니 그 반대다. 무기력증이나 소진성 질환 같은, 이미 헤어 나올 수 없을 만큼 추락한 이들이 더 잘 걸린다는 증상에, 모든 것이 건재한 듯 보이는 중상위층의 귀족적 시민들도 고통을 겪고 있다.  

    한국에서 이러한 증후는 1997년 외환위기와 더불어 본격화되었다. ‘경배와 찬양’으로 표상되는 온누리교회적 영성이 전국화된 시기와 정확하게 겹친다. 즉 중상위계층 사이에서도 소진성 질환이 만연한 가운데 이러한 질병의 치유를 위한 종교적 기획들이 등장하던 시기에, 온누리교회의 성령운동은 그 중 가장 성공한 종교상품에 속한다. 예배에서 무대와 객석, 대중과 설교자로 양분되던 중심-주변의 이분법이 해체되고, 설교자의 강론에 집중되었던 메시지가 예배를 구성하는 요소들 속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특히 ‘경배와 찬양’이라는 명칭에서 드러나듯 찬양은 그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다. 일렉트릭 기타와 어쿠스틱 기타가 중심축을 형성하여 건반과 타악기와 어우러지고 이것을 율동 섞인 찬양대의 팝적이면서도 진취적인 사운드를 만들어 예배 대중의 감성을 자극한다. 대중은 찬양대와 함께 노래하고 율동하면서, 찬양대의 관람자인 동시에 일원이 된다. 그리고 찬양 이끔이가 그 사이사이에 간단명료한 멘트를 던져 대중과 함께 하는 경배 예배의 메시지를 명료히 한다.  

온누리교회의 '경배와 찬양' 집회


손기철 장로 집회에서 그의 안수에 쓰러지는 교인들


    이 멘트들은 네러티브 없이 한두 단어, 한두 문장 정도에 그친다. 하여 그 멘트는 전체 예배 속의 일부이면서도 예배에 견고히 묶여 있지 않고 따로 튀어나와 예배 대중의 개인 속으로 쑥 들어가 버린다. 하여 예배 대중 개인이 겪고 있는 실존 상황과 맞부딪친다. 그런데 그 멘트의 내용은 대부분 축복과 윤리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하여 예배 대중은, 전통적 예배의 집단성과는 달리, 개개인을 호명하여 축복을 선사하며 삶의 신앙적 규범을 부여하는 예배와 만난다. 이것이 ‘경배와 찬양’이 만들어내는 예배의 이팩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종의 치유의 작용이 시작된다.

    한데 종종 이 예배는 보다 본격적인 치유집회와 만난다. 온누리교회에도 손기철 장로라는 과학자이자 대학교수인 전문적 치유사가 활약했다. 목사 자신이 퇴마사(exorcist)였던 은사주의적 교회들와는 달리, 한 평신도가, 그것도 사회적으로 매우 성공적인 이가 그 역할을 담당한다. 최근에는 그의 집회에 이단시비가 일면서 그의 집회는 온누리교회와 분리되었지만, 초기에 이것은 이 교회 성장의 주요 요소였다.  

    그의 집회는, 방언과 경련 등이 뒤섞이면서 무질서한 상태에서 은사체험과 치유가 일어나는 전통적인 치유집회와는 달리, 매우 질서 있게 진행되며 윤리적 강론의 비중이 매우 크다. 또 일반적 은사주의 퇴마사들은 병원의 치료(therapy)와 적대적인 경향이 있는데 그는 이 둘을 이분법적으로 가르지 않고 치유(healing)와 병행할 것을 권고한다. 현실의 모든 것을 상실한 이들이 마지막 순간에 의지하는, 하여 일반 의료체계와 극적으로 분리함으로써 치유를 실현하려는 은사주의적 치유집회와는 달리,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고도 축복의 징표를 얻어낼 수 있고, 사회 질서에서 일탈하지 않는 윤리적인 삶에 대한 요청이 동반된 축복이 강조되는 것이다. 요컨대 그의 집회는, 제3의 물결에 속하는 일반적 성령운동처럼, 자신의 것을 다 걸지 않아도 되는 이들의 신앙 형식과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온누리교회가 표상하는 성령운동의 영성은 귀족적이다. 신앙에 삶을 다 걸지 않아도 되는 이들에게 닥친 삶의 위기를 축복으로 되돌려준다. 동시에 축복의 수혜자들에게 윤리를 부과한다. 즉 온누리교회적 귀족영성은 신비체험이자 윤리적 재무장의 과정이다. 내가 이 연재 서두에서 강조했던 중간범주의 존재들이 윤리를 통해 웰빙적 삶을 추구하고 나아가 사회의 계몽적 주체로서 스스로를 주체화하는 것과 잘 결합되는 신앙의 양식이 이 교회의 귀족영성 속에 구현되고 있다.


캐릭터 교회들과 신자유주의


    1960~1990년 사이 대성장기에 대형교회들은 대개 유사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목사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에 있었다. 권위주의 시대의 독재자의 그것처럼 일종의 영웅주의가 대성장기를 이끌었다. 한데 ‘주권교인’들이 수평이동을 거듭하는 가운데 그들을 정착시키는 데 성공한 대교회들은 종교시장의 상품으로서 교회를 대외적으로 이미지화하는 캐릭터를 필요로 했다. 사랑의교회와 온누리교회는 그런 현상을 선도했던 대표적 교회들이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주간경향>에서 연재하고 있는 '김진호의 웰빙-우파와 대형교회'의 다섯번째 글입니다.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606271603271&code=11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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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서평 2 


우리 사회의 딜런들을 위하여



신윤주*


 

좋은 양육이라는 신화


    대량살상을 저지른 열일곱 살의 딜런 클리볼드. 그의 어머니 수 클리볼드는 문제아의 부모가 대단히 잘못된 양육 방식을 갖고 있을 거라는 통념과는 달리 20세기의 미국 사회가 제시한 기준에 매우 부합하는 방식으로 아이들을 키웠다. 수는 진보적인 평화주의자로서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두 아들이 약자를 배려하는 삶을 살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렇게 가르쳤다. 또 워낙 매사에 조심성이 많은 편이었기에 자녀들이 좋은 버릇을 기를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했다고 한다. 그는 전공 분야 덕에 인간 심리에 관한 지식을 평균 이상으로 지니고 있었으며 그러한 지식을 아이들을 관찰하고 대하는 데 적극적으로 사용했다(119).[각주:1]

    그럼에도 콜럼바인 사건을 피할 수는 없었다. 비극적인 사건 후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수는 우연히 한 육아 잡지를 집어 들었다. 거기에는 “윤리적 육아”에 관한 퀴즈가 실려 있었다. 열 개의 문항 중 아홉 개의 대답이 정답이었다. 단 하나, ‘아이의 사적인 일기를 읽는지’에 관한 질문에는 오답을 냈는데, 그 역시 딜런이 살아있을 때에는 정답으로 맞췄을 법한 질문이었다(322).  

    수 클리볼드는 좋은 시민이었고 자신이 알고 있는 옳음의 기준에 따라 아이들을 양육했다. 그것은 좋은 결과를 만들어냈어야 마땅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의 해설을 쓰기도 한 임상심리학과 교수 앤드루 솔로몬이 밝힌 것처럼, 콜럼바인 사건은 마치 쓰나미처럼 예측하거나 대비할 수 없는 성격의 재앙이었다.  


나는 속으로 클리볼드 부부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면 했다. 이 사람들을 좋아하게 된다면 이 일이 두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고 우리 중 누구도 안심할 수 없다는 말이 되니까. 그런데 두 사람은 정말 너무 좋은 사람들이었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설 무렵에는 콜럼바인 학살을 일으킨 정신이상은 어느 가정에서라도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예측하거나 알아본다는 건 불가능했다(9). 


    그러므로 딜런이 저지른 만행의 원인을 부모와 연관 짓는다면 그것은 수 클리볼드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라기보다, 수의 아들이었음‘에도’ 그렇게 되었다고 말해져야만 할 것이다. 딜런 클리볼드는 범죄자의 부모가 어딘가 따로 있을 것이라는 통념에 맞서기라도 하듯 아니, 어떤 아이가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게 될지 ‘당신들은 모른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기라도 하듯 범행에 가담하고 준비하고 실행에 옮겼다.   


양육 주체는 사회화 주체인가


    그런데 우리는 과연 ‘좋은’ 양육을 통해 자녀가 어떤 아이로 성장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일까? 오늘날 부모의 역할은 통상 자녀의 성공적인 사회화를 돕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경우 양육을 돕는 1차적 주체primary agent의 자리에는 ‘사회 공동체’가 놓인다. 부모는 아이들에게 사회가 기대하는 바에 대해 자신이 지니고 있는 신념이나 가치, 관점에 따라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행동이 무엇인지 인식시킨다. 상당히 오래 전부터 부모들은 ‘잘 자란 아이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그들의 역할과 책임이라는 말을 들어왔다. 잘 자란 아이들은 부모의 말을 잘 듣고, 말썽을 부리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고, 학업을 완수하며, 독립적이고 성공하는 어른이 된다. 부모들은 자신이 독재에 가까운 사회적 요구에 복종해왔던 것처럼 아이들도 살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사회 공동체에 대한 강조로부터 시선을 옮겨 더 확장된 생태계에 속한 동등한 주체로서 부모와 자녀를 바라본다면 어떨까? 특히 초기 양육 관계에서 감정적인 그리고 심리적인 측면을 함께-조절co-regulation하는 일에 방점을 둔다면? 그렇다면 양육은 부모가 자녀에게 행하는 것만이 아니라 아동 자신도 발달의 주체로서의 참여하고 상호 작용하는 것이 될 수 있다.[각주:2]  

    딜런의 경우, 콜럼바인 사건이 있기 1년쯤 전에 이미 조금씩 문제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수가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으로 기억하는 것은 딜런이 주차 중인 차에서 전자장비를 훔친 일로 경찰에 체포된 사건이다. 죄목은 중죄인 1급과 무단침입, 절도, 그리고 경범죄인 범죄성 높은 장난이었다. 


딜런이 한 행동이 잘못이라는 걸 딜런이 알기를 바랐다. 나는 딜런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려고 하면서 누가 네 물건을 훔쳐 가면 기분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딜런, 살면서 다른 규칙은 따르지 않는다고 해도 적어도 십계명은 따라야 한다. 살인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말라.” 나는 십계명 가운데 또 어떤 것이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보려고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쯤해서 그만두기로 했다. “이런 건 반드시 따라야 하는 규범이야.” 딜런이 말했다. “알아요.” 우리는 잠시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내가 다시 말을 했다. “딜런, 나는 걱정이 되는구나. 어떻게 하면 네가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딜런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자기가 충동적으로 나쁜 짓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놀란 듯했다. 비참한 심정인 것 같았다. 그때에 나는 더 이상 분노를 느끼지 않았고 딜런이 안쓰럽기만 했다(316).


   회고적인 진술은 지나간 상황을 충분히 재현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지만, 그럼에도 이 대목에서 두 사람 사이 발화 비중의 차이는 마음을 복잡하게 한다. 

   부모는 자녀에게 문제가 생기면 책임감과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당면한 문제적 상황이나 미래에 반복될 일에 대한 걱정, 혹은 부모로서의 역할이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에 함몰되지 않을 수 있을까? 만일 자녀가 말하지 못했지만 문제를 통해 전해야만 했던 어떤 메시지가 있다면, 그 메시지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면 부모는 자녀의 삶의 환경을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 설계자로서 그 혼돈스러운 여정을 함께 헤쳐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선도의 형태가 아니지만 무관심이나 태평함과는 다르다. 고등학생 정도가 되면 아이들은 이미 대부분의 정답을 알고 있다. 다만 아직 구성되어 가고 있는 자신의 내면의 힘과 복잡성을 끌어안고 분투하는 것뿐이다.


매뉴얼의 한계


   양육 주체에 관한 문제와 함께 재고할 부분은 양육의 ‘매뉴얼화’이다. 매뉴얼은 우리에게 위험 요소를 상기시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무탈하기를 바라는 소망을 지지해주기도 한다. 매뉴얼은 개별성과 예외성을 지우고 사태를 단순화하기에 좋은 도구이기 때문에 효율성과 생산성 등의 가치에 주도되는 현대 사회에 친화적이다. 일례로 2015년에 발표된 “동시대적 양육 모델을 향하여”라는 논문에서 저자들은 양육 행위에 관한 포괄적인 평가 지표 개발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오늘날에는 부모들과 자녀들이 각종 광고와 매체, 신기술에 노출되면서 양육에 관하여 서로 모순된 정보와 조언을 접하기 때문에 ‘좋은’ 양육의 정의가 점점 더 모호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오늘날의 아동은 30년 전의 아동들에 비해 여러 방면에서 우수해졌음에도 유아기 우울이나 불안 등의 적응 문제 및 심리 문제를 더 많이 겪고 있다. 저자들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양육에 관한 핵심 요인들을 추출하고 양육 행위에 관한 포괄적 평가 지표를 개발하는 일의 중요성을 주장한다.[각주:3]

    그러나 매뉴얼은 양날의 검이다. 그것은 큰 흐름 속에서 사태를 파악할 수 있도록 돕지만 한편 개별 사례의 특수성을 간과해도 되는 근거로서 작동할 수 있는 맹점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맹점은 양육에 있어서 치명적일 수 있다. 모든 아이, 모든 부모, 그리고 모든 상호작용이 지니는 고유한 성질과 양상이 지니는 중요성 때문이다. 매뉴얼에 대한 과신 탓에 현실 속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문제의 전조를 발견하더라도 자신의 감각을 바탕으로 판단하지 못할 위험이 있다. 매뉴얼의 유용성을 인정하여 참고하거나 사용할 때에도 일반화의 사각지대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간주될 수 있음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매뉴얼의 이용자는 행위 주체인 인간의 한계를 유념해야 한다. 세계는 언제나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범위를 초과하고, 습득한 지식은 실천의 범위를 초과하기 마련이다. 매뉴얼의 이상은 인간의 의지와 실천, 통제의 한계에 종속된다. 양육자 개인의 한계를 고려하지 않은 일반적 이상이 양육 스트레스를 야기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일지도 모른다. 사실상 무언가 알아야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매뉴얼이라기보다 낯설게 바라보는 법이 아닐까?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낯설게 배워가고, 자신의 앞에 놓인 타자를 새롭게 배워가는 태도야말로 서로의 주체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함께 나아갈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


   사회화를 돕는 과정으로 양육을 이해하거나 양육 기준의 매뉴얼화를 지향하는 것은 미국의 주류 양육 담론에서 발견되는 특징이다. 딜런 클리볼드를 키운 이러한 양육 담론은 이데올로기로서의 국가주의 및 자본주의와 맞닿아있다. 자본주의는 꾸준히 진화를 거듭해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렀다. 자본주의의 핵심인 자본의 의미는 후기자본주의에서 초기의 그것과는 상당히 거리 먼 것으로, 이제 돈은 더 이상 교환가치가 아닌 ‘동원mobilization’이라는 개념과 연동된다. 동원은 국가가 전쟁 상황에 처했을 때 활성화되는 국가-사회체의 상태인데 후기자본주의는 이러한 군사적 논리를 경제 일반의 영역으로 이식했다. 그 결과 불안정한 일상은 전시의 경쟁이라는 하나의 명령에 복종하게 되고 인간 사회의 에너지는 “살아남기 위해 모든 타인과 싸운다는 목표에 징집”당한다.[각주:4]  

   콜럼바인 고등학교는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의 속성을 지닌 곳이었다. 학술 자본의 축적을 추구하고 학원 사회의 기준에 따라 학생들의 계급을 나누며 종교적으로는 근본주의적 성향이 강한 불관용의 사회였다. 그곳에서 딜런은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어릴 적부터 심각하게 수줍음을 많이 타고 불안의 정동을 강하게 느꼈던 딜런은 자라면서 친구들을 사귀었지만 사회 적응에는 여전한 어려움을 겪었다. 머리가 좋은 학생이었지만 열등감을 많이 느꼈고 자기혐오가 심하기도 했다. 딜런의 일기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하고 모욕하는 것 같다는 표현, 그럼에도 여전히 사람들이 자신을 받아들여주기를 바라는 기대 같은 것들이 발견된다. 콜럼바인 사건 2년 전의 일기에서는 자살에 대한 생각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도 한다. “자살을 생각하면 다음 생에 가게 될 그곳엔 내 자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된다. 나 자신, 세계, 우주와 치루는 이 전쟁도 비로소 끝낼 수 있을 것 같다.” 딜런은 심각한 상태의 우울을 겪고 있었으며 자가 처방으로서 몰래 보드카를 마시기도 했다.[각주:5] 학내의 질서를 따라 강자의 대열에 들지 못한 그는 자연히 낙오자로 낙인 찍혔고 이는 콜럼바인에서 곧 속수무책으로 괴롭힘을 당해도 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모든 우울한 사람이나 자살 충동을 느끼는 사람이 테러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딜런도 에릭의 영향이 아니었다면 테러를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딜런과 에릭, 두 사람 모두가 일기를 남겼기 때문에 사건을 맡은 심리학자들은 이들의 일기를 분석할 수 있었다. “딜런의 일기는 에릭의 일기와 내용이나 문체 면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다. 에릭은 자기애적 오만과 살기 띤 분노로 가득한 반면 딜런의 일기는 외로움, 우울, 반추, 사랑에의 갈구 등에 초점을 맞춘다. 에릭은 무기, 스와스티카, 군인을 그렸다. 딜런은 하트를 그렸다. ......딜런은 진정한 사랑을 갈망했다”(272). 

(캡쳐 이미지 출처 https://m.youtube.com/watch?v=zHRcF-pFGYI&autoplay=1)


    그런데 자기혐오가 강하고 우울한 청소년이었을 뿐이었던 딜런이 가학적인 성향의 에릭과 함께 움직이면서 증오의 방향을 외부로 틀게 되었다. FBI 조사반 자문이었던 퓨질리어 박사는 사건 당일 두 아이의 심리상태를 이렇게 진술했다. “에릭이 사람을 죽이러 학교에 갔고 그러다 자기가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반면, 딜런은 죽으러 학교에 갔고 그러다 다른 사람도 같이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280). 에릭과 딜런은 심리학적 견지에서 거의 양쪽 극단에 위치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둘은 결국 하나의 욕망을 공유하게 되었기에 함께 행동할 수 있었다. 그것은 죽음에 관한, 곧 죽이고 싶은 욕망, 죽고 싶은 욕망이었다.[각주:6] 


누가 자살 테러를 저지르는가?

 

    딜런과 에릭의 경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자살 테러범의 유형은 단일하지 않다. 형사 사법 분야의 전문가인 랭크포드 박사는 자살 테러를 크게 네 범주로 분류한다. 이는 가장 전형적인conventional 자살 성향을 보이는 유형의 사람들이 저지르는 테러, 강압적인 집단의 폭력에 시달리다가coerced 가담하는 테러, 절망적인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escapist 자행하는 테러, 처형을 당하기 위한 간접적인 덫indirect으로 기능하는 테러 등이다. 각각의 유형과 사례들에서 고유한 독특성이 발견되지만 그럼에도 전체를 아우르는 공통점이 있다. 첫째, 이러한 테러가 이미 자살 충동을 느끼던 사람들에 의해 자행되었고, 둘째, 그들이 처한 상황이 매우 절박했다는 것이다. 자살 성향을 보이는 사람들은 외부 현실의 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경우 실행을 지연하지만 고통스러운 정신적 현실에서 벗어날 만한 기회를 찾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들은 똑같이 위험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자신의 삶에 조금 더 애착을 가지고 있는 주체라면 고르지 않을 법한 선택지를 택한다.[각주:7]  

    전형적인 테러의 형태가 아니어도 정신적으로 취약한 인물이 반사회적인 폭력 사태를 야기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아주 많다. 이때 행위화는 촉발의 계기를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어떤 사회 안에서 문제적인 사태가 자주 발생한다면 그만큼 그 사회가 취약한 이들을 자극할 만한 요인을 많이 가지고 있는 장이라는 뜻일 것이다. 한국 사회는 어떠한가? 취약한 이들에게 얼마나 안전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는 곳인가? 베라르디는 오늘날의 남한 사회를 경제적 신조가 정체화의 토양인 곳으로, 동시에 완벽하게 고립되고 완벽하게 연결된 개인들로 이루어진 디지털 사회로 진단한다. 한국은 일본제국주의와 한국 전쟁을 겪은 후, 폐허 위에 국가를 재건할 사명을 지니고 있었다. 과거의 정체성이 사라진 아노미 상태에서 박정희 정부는 산업화와 경제성장이라는 시뮬라시옹을 성공적으로 구사했고 이후 남한 사회는 폭발적인 변화를 경험했다. 단 두 세대 만에 서구 사회에서도 가장 선두에 있다는 나라들에 견줄만한 부를 축적하고 또 소비 수준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한국이 치르는 대가는 일상의 사막화, 리듬의 과잉가속, 생애의 극단적 개인화, 노동시장에서의 걷잡을 수 없는 경쟁 같은 것들이다. 젊은 세대는 이러한 고립, 경쟁, 무의미의 감각, 강박, 실패라는 유산으로부터 탈출하고자 시도하지만 고작 10만 명 중 28명만이 탈출에 성공한다.[각주:8]  


모든 구성원에게 자리를


    고백하건대 이 글을 시작할 당시에 나는 딜런 클리볼드의 문제가 누구의 잘못에서 기인한 것인지 밝히고 싶었다. 부모의 실책이었음이 자명할 것도 같았고, 주체 자신의 선택이라는 항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수 클리볼드가 스스로를 증언석에 세우면서까지 말하고자 했던 바를 독자로서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과거를 되짚어보는 일은 중요한 작업이지만 어떤 부분은 순전히 개인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하며 사회 공동체가 함께 고민해야 할 몫이 따로 있다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의 예수가 소경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을 경유해 글을 맺고자 한다.  

    요한복음 9장은 제자들과 길을 가던 예수께서 소경을 만난 일화로 시작된다. 이 소경은 눈이 먼 채로 태어난 사람인데 제자들은 그이가 누구의 죄 때문에 앞을 볼 수 없게 된 것인지 궁금해 했다. "선생님, 저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자기 죄입니까? 그 부모의 죄입니까?"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우리는 해가 있는 동안에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 때는 아무도 일을 할 수가 없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내가 세상의 빛이다.”[각주:9]  

    잘못 놓인 결과를 보았을 때 우리는 그것을 야기한 원인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이런 접근은 같은 오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무수히 반복하는 과정이며 무엇보다 예방의 차원에서 유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의 접근은 조금 달랐다. 예수는 발화의 시점에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의 명제-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를 제시함으로써 예기치 못한 미래로 향하는 가능성을 열었다. 공동체의 층위에서 과거를 묻지 않는 행위는 구성원이 우리 안에 존재한다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셈하지 않겠다는 결단이다. “타자를 사람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그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에 대한 질문을 괄호 안에 넣은 채 그를 환대하는 것을 말한다. 타자가 도덕적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이러한 환대를 통해서이다. 타자는 사회 안에 그의 자리를 마련해주는 우리의 몸짓과 말을 통해 비로소 사람이 되고, 도덕적 주체가 된다.”[각주:10]  

    다수의 가해자들은 본디 피해자였던 사람들이다. 애초에 그들이 피해를 입은 것 역시 그들에게 피해를 입힌 사람들이 무뢰한이어서 벌어진 일이라기보다 개인의 한계와 사회의 한계가 일으킨 상승효과가 낳은 비극적인 결과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한계, 인간 세상의 한계 속에서 좀처럼 벗을 수 없는 굴레 같은 것. 한 사회의 성장이 역사와 세월의 무게를 단번에 거슬러 이루어질 수 없는 것처럼 개인의 성장도 그러할 것이다. 우리는 양육자들 개개인에 대하여 그 자신의 역사를 초인적으로 극복해내고 일정한 표준에 해당하는 양육을 해내야 한다는 식으로 요구하거나 기대할 수 없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가닿지 못하는 한계들에 대하여 가혹하게 단죄하는 것은 역시나 해당 구성원의 자리를 없애는 일이 될지 모른다.  

    그러므로 명백한 범법 행위는 법리에 따라 다스리되 우리 사회의 취약한 구성원들이 가해자로 몰락하지 않도록 건전한 사회를 구성해가는 일이 우리가 함께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일상이 사막화되지 않도록 고삐를 단단히 쥐고 분자화된 개인의 삶을 랜선 너머로 연결하며 정체성의 바탕을 다원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 모든 성원에게 자리를 만들어주는 일. 다음 생에는 자신의 자리가 있을지 모른다고 되뇌는 우리 사회의 딜런들을 위하여.  


    * 필자소개  

메모광. 학부에서 국제어문학을, 석사과정으로 비교문학을 공부했으며, 향후 프로이트 라깡주의 정신분석학을 중심으로 연구를 지속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1. 수 클리볼드,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홍한별 옮김 (반비, 2016). 이하 괄호 안에 페이지 번호만 표시하는 경우 같은 책. [본문으로]
  2. Arminta Lee Jacobson, “Contemporary Models for Positive Parenting”, Journal of Family and Consumer Sciences 96(4), 2004. [본문으로]
  3. Carly A.Y. Reid, Lynne D. Roberts, Clare M. Roberts, Jan P. Piek, "Towards a Model of Contemporary Parenting: The Parenting Behaviours and Dimensions Questionnaire", PLoS One 10(6), 2015 [본문으로]
  4.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 『죽음의 스펙터클』, 송섬별 옮김 (반비, 2016), 38쪽. [본문으로]
  5. Adam Lankford, The Myth of Martyrdom: What Really Drives Suicide Bombers, Rampage Shooters, and Other Self-destructive Killers, Palgrave Macmillan, 2013: 133-136. [본문으로]
  6. Ibid., 133. [본문으로]
  7. Ibid., 125-147. [본문으로]
  8. 베라르디, 『죽음의 스펙터클』, 231-240쪽. [본문으로]
  9. 요 9장 1-5절(공동번역) [본문으로]
  10.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2015), 211-212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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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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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윤주
    2016.10.18 13:0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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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글을 너무 편집하시기 복잡하게 해서 드리지요... 죄송합니다 ㅠㅠ 전반부 인용 부분에 지난번에 쓴 글이 약간 묻어있어서 수정을 부탁드려야 할 것 같아요.

    소제목 <양육 주체는 사회화 주체인가> 부분의 인용구 아래 "특히... (250)"은 저번 호에 냈던 부분이더라구요.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 2016.10.19 14:17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신윤주 필자님.
    수정완료했습니다. 이런 일이 생겨서 필자님께 죄송해요.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3. 신윤주
    2016.10.19 16:04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아닙니다 별말씀을요 ㅠㅠ 수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아주 아카데믹하지 않아서 더욱 아카데믹한 단상

여섯. <불안하면 불안하기>




 김정원*


    찰떡 같은 위로를 주는 사람들이 있다. 개떡 같은 설명에도 불구하고 자아의 밑바닥을 훑어내는 그들의 신묘함은 울음마저 그치게 한다. 그들을 찾아가면 슬픔도 눈물도 하물며 우울도 그칠 수 있었다. ‘불안’한 마음도 어찌 할 수 있을까 하여 찾아가 물어보았지만, 그들의 신묘함도 ‘불안’을 처분하지는 못하였다.


'나는 불안하다'


    불안을 인식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보통 긴장이나 공포로 불안을 혼동할 때가 많으며, 그 원인을 제거하기만 하면 이내 해방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안은 어떤 긴박하거나 무서운 사건에 앞서 닥쳐오는 긴장감이나 공포와는 다르다. 예를 들어, 한 여자가 대중 앞에서의 연설을 앞두고 극도의 불안감을 느꼈다고 해보자. 그녀는 다시는 대중 연설을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침밥을 먹다 말고는 불안을 마주한다. 여자는 이제 아침밥은 건너 뛰기로 한다. 이 때, 큰 소음을 내며 지나가는 쓰레기차의 소리가 창문 밖에서 들려오자 더욱 거세진 불안을 느끼게 된다. 이에 여자는 불안의 원인을 규명할 수 없음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게 된다. 이제 여자는 불안을 ‘죽이기’ 위한 다른 방도를 찾는다. 많은 선인들과 상담가들이 일러주었듯, 심호흡과 명상을 시도한다. ‘괜찮다, 괜찮아’라며 스스로를 격려하고 감독하며 상황을 안정으로 이끌어 내본다. 잠시 괜찮아지는 듯하여 마음을 놓아보지만, 휴대폰의 채팅창을 확인하고 나니 어인 탓인지 다시 불안해지어 하던 명상을 포기하고 만다. 심장 뛰는 소리가 귀에서 요동하는데, 명상이 될 리 없다. 그대로 불안이다.

    즉, 공포와 긴장은 그것들의 원인을 쉽게 찾을 수 있는 반면 불안은 그 원인을 찾지 못한다. 공포와 긴장의 원인을 찾았던 그 방식으로는 더욱이 찾을 수가 없다. 따라서, 공포와 긴장감은 이 시간(순간)이 지나가 버리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곧 잘 해결 되지만, 불안은 쉬 지나가는 일이 거의 없기에 명상이나 기도로는 약발이 들지 않는다. 특히 ‘괜찮다, 괜찮아’라고 스스로를 채근한다고 불안한 마음이 달래진다는 것은 그야말로 헛다리다. 그러니 평안과 안식의 방향으로 불안한 마음을 질질 끌고 갈 필요가 없다. 또한 불안은 엄마나 아빠에게로부터 받은 상처에서 비롯된 내면적 심리 상태(혹은 결정론적인 상태)가 더 이상 아니다. 그러니 이제 필요한 것은 불안을 향한 ‘판단 중지’이다. ‘어디서’, ‘왜’라는 물음을 중지하는 것부터가 ‘불안 죽이기’의 역설적 시작이다.

    다음으로는 불안증에 지친 스스로를 바라보는 일을 하면 된다. 이는 심장이 널뛰는 채로, 아랫배가 뒤틀리는 채로, 입이 바짝 마른 채로, 다시 말해 몸뚱이가 전하는 불안을 그대로 드러내며 자신의 존재를 가만히 마주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불안은 은폐 돼 있던 내가 다시 나에게 폭로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곧, 불안하다는 것은 실존으로 나아가는 바로 ‘거기’에 내가 ‘나가 서’ 있는 것이다. 불안을 타고 오는 ‘존재의 요구’ 즉, 하이데거의 말처럼 존재의 “말 건넴”에 응답하는 것, 이 때의 응답은 ‘나는 불안하다’, 혹은 ‘지금 여기에서 불안해 하는 것은 나다’ 라고 할 수 있겠다.


'불안할 수 있어 다행이다'


    ‘지금 여기에서 불안해 하는 것은 나다’라는 응답은 나 개인의 고백에서 비롯되었다. ‘말 건넴’과 그에 따른 응답. 이 지루하기도,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서 찾아 낸 오직 하나의 기쁨이라면 ‘내가 불안하기 때문에 사유할 수 있다’라는 것이다. 아니, 불안하기 때문에 사유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왜냐하면 불안은 필연적으로 존재론적 질문을 몰고 오기 때문이다. 즉, 나를 사유하게끔 만들었던 것이 바로 불안이었다.

    신, 죽음, 삶, 사랑, 몸, 아름다움, 권태, 실존 등을 사유하다 보니, 어느새 나는 고독 속에 내팽개쳐져 있었다. 고독한 것이 불안한 것보다 나았기에, 나는 차라리 고독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밖에 나가지 않기’를 작정한다.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최소로 하고 싶은 마음이 하나요, 반대로 외부의 자극으로 인해 불안증이 잦아들거나 환기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 또 다른 하나였다. 도피이면서 도피가 아닌 상태. 불안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으면서도 도망가지 않으려 하는, 그러니까 사르트르의 말처럼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라면 피할 수도 가릴 수도 없다는 그 불안을 적나라하게 목도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음식을 사러 나가는 일 말고는 밖에 나가지 않았다. 근 반 년의 세월을 그리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철학자들의 위로 덕분이었다. 내가 대단한 철학적 사유를 해서도 아니고, 할 수도 없었지만 그들의 위로는 채 표현할 수 없는 위로 곧, ‘고독한 위로’였다. 찰떡 같이 위로하던 이들도 해내지 못했던 ‘불안’에 대한 물음을 그들의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었다. 내가 불안 속을 헤매어 잠도 이루지 못하고, 심장이 배 밖으로 튀어 나온 줄로 착각하던 때에 하이데거는 내 귀에 속삭였다.

    ‘네가 지금 불안 한 것은 허무감이나 무상감 때문이 아니야. 네가 남들(세인)과 똑같이 살아가려는 것을 멈추기 위한 것이야. 세계 속에 내던져져 있는 네 존재가, 온전하게 지속되기 위한 일종의 면역 반응인 거지. 바로 독자성과 자립성을 기르기 위한 시간인 거야. 그간 은폐되어 있던 본래적 너를 발견 할 바로 그 때가 지금 온 거란 말이야. 너의 실존가능성을 개시 할 때 말이야. 그러니 너는 이제 가능성이란다! 비본래적인 너를 벗어 던질 준비가 되었니? 불안한 지금, 바로 환희와 기쁨의 시간 속에 네가 ‘나가 서’ 있단다.’         

    이보다 큰 위로는 없었다. 그의 속삭임처럼, 나는 ‘비본래적인 나’에서 ‘본래적인 나’로 돌아서는 길목에 서 있었다. 불안할 수 있어 비로소 다행이었다.


'기분에 충실하기'


    화염같이 일어나기도, 가랑비처럼 내리기도 하는 불안을 막지 않기로 작정하는 것. 철학자들이 건넨 ‘고독한 위로’의 힘이다. 그런데, 이처럼 ‘불안을 작정’하는 것, 다시 말해 불안한 그 기분을 충실하게 느끼는 것은 진짜 나에 가까워 지는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기분이야말로, ‘저절로’ 일어나는 본래적이고 근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웃고는 있지만 기분이 딱히 좋은 것은 아니야’라고 할 때,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이 더 진짜라는 것은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이처럼 기분은 늘 우리 안의 본향을 향해 있다. 오늘의 기분이 어제의 기분과 같은 수 없고, 지금의 애인과 있을 때의 기분과 과거의 애인과 있을 때의 기분이 같을 수 없다. 우리가 어떠한 기분에 늘 ‘사로 잡혀’있(을 수 밖에)다는 말이다.

    바꿔 말하면, 기분은 이성보다 앞서 벌어지는 현상이며, 그러기에 나의 존재를 이성보다 앞서 규정하는 아주 근원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오늘 느끼고 있는 기분에 충실한 것이 나의 근원을 캐묻는 일이 된다.

    나를 ‘괜찮다’라고 타이르는 행동이 약발이 들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절로 “피어 오르는 기분”이 이성으로 꺼질 리 없다. ‘괜찮다’라고 나를 타이르는 행동이 고안된 것이라면, 기분은 말 그대로 “나를 덮치는 것”으로서, “우리가 말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닌, “저절로 지어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다음의 조언은 틀렸다. 늘 방구석에만 쳐 박혀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니, 나 같은 여자도 밖에 나가야 하지 않겠나. 어느 날 ‘밖’에 나가는 것 자체로 불안하여 외출을 지체하고 있었는데, 누군가 “밖을 안이라 생각하라”라고 조언 하였다. 당시에는 발상의 전환이라며 무릎을 쳤지만, 그런 이성의 간계가 불안한 기분과 그에 따른 몸의 변화를 막아내진 못했다. 몸이 이성보다 앞선다는 것을 알던 이였지만, 그의 조언은 허위다.

    다시 강조하자면, 기분은 “강제 되는 것이 아닌 우리가 그리로 빠져들어버리게” 되는 것이기에, 기분을 있는 그대로 살펴보는 것이야 말로 아주 근본적인 존재 물음이 된다. 이성보다 한 발 빠르게 우리를 사로 잡고 있는 기분에 충실한 것이야말로 ‘오늘의 진짜 나’를 만나는 시간이 될 것이다.


    결국 나를 사로잡고 있는 아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한 불안을 잘 붙들어 매 놓아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래 봤자 불안하다면, ‘불안하면 불안하기’로 하면 되는 것이다. 본래적 자기에로 나아간다는 말에 고독한 위로를 삼으며 불안함을 애써 움켜본다.


* 필자소개

   "한신에서 기독교교육을 공부하고, 킹스칼리지런던에서 조직신학으로 석사 과정을 마쳤다. 현재 박사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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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회초리기도대회
    2016.11.08 20:5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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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맴매맞을준비



삶의 고백


이연화*

 


   매일 아침 7시에 일어나 그전날 끓여놓은 국을 데우고, 딱 한컵의 쌀을 씻어 전기 밥솥에다 앉힙니다. 그 시각에 남편은 집을 떠나 회사 통근버스로 향하지요. 운이 좋으면, 딸들의 배웅을 받을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날엔 곤한 잠을 자고 있는 딸아이들 볼에다 얼굴을 부비부비 하곤 서둘러 나가죠.  

   아이들이 한둘 뒹굴거리다 거실에 나와 나에게 몸을 맡기면서 치대다 잠에서 완전히 깨면 서둘러 아이들 밥을 멕입니다. 먹다가 앞서락 뒤서락 두 딸들이 소변, 대변을 보지요. 6개월전만 해도 애들은 세수, 양치질 하지 않고 어린이집에 갔었는데, 어느날 연차낸 남편이 아침에 애들 챙기다 세수, 양치질 시키지 않는 저에 대해 기본적인 걸 안 한다고 비난했다 그날 한바탕 싸움을 벌였죠. 그 후엔 애들에게 그 기본적인 걸 시키게 되었네요.   

   그러곤 옷입히고 어린이 집 가방 챙기고, 제 출근 준비 대충 끝낸후 애들 엘리베이터에 태우고 지하주차장으로 갑니다. 일진이 좋지 않는 날엔, 차키를 집에 두고 와서 다시 애들을 다 데리고 집에 다녀와야 하기도 합니다. 출근시간이 고작 20-30분 남지 않았는데, 세 살 먹은 둘째 녀석이 양말을 혼자 신겠다 신발을 혼자 신겠다 고집 피우면 순간 열이 확 올라 아이를 거칠게 대하기도 하지요. 언어폭력도 휘두르죠. 아침의 일분은 하루의 십분과 맞먹을 만큼 밀도가 높습니다. 그런 시간의 압박에 아이들은 이리 채이고 저리 채입니다.   

   아이들을 어린이 집에 인계하고 회사로 가는 차안, 하루의 1부를 무사히 마치고 한숨 돌리는 시간. 길어야 15분, 짧으면 10분... 그 짧은 시간이 어찌나 단지요. 그 짧은 단내 나는 시간동안 전 2부의 노동시간을 향해 시속 100킬로미터로 밟고 자유로를 탑니다.  

   회사에 도착한 후 오늘 올릴 결재 기록을 정리하고, 어제 들어온 신건과 보정문건, 담보제공문건들을 검토합니다. 제가 하는 일은 법원의 민사본안 재판하기 전에 채무자들이 재산을 빼돌리지 못하도록 그들의 재산에 가압류가처분을 하는 일입니다. 부동산 가압류할적엔 이렇게라도 자산이 있는 채무자들이 부럽기도 합니다. 자산관리대부, 캐피탈의 이름을 쓴 거대 사채업자들이 원금보다 더 많은 이자를 청구하면서 채무자들의 임금, 임대보증금에 가압류 신청할 때엔 그들의 신청이 매정하고 야멸차고 때론 잔인하기까지 하지만 그들을 대신에 합법이라는 이름으로, 기계적으로, 사무적으로, 일상적으로 집행하는 제가 가끔 무섭습니다.  

   아, 오늘도 진상 민원인이 어김없이 등장합니다. 제가 하고 있는 일은 신청업무지만, 신청과 공간이 부족해 제 자리가 종합민원실에 있어서인지 소란이 끊이지않습니다. 법원은 다 좋지 않은 일로 오는 곳이고, 사회의 갈등들이 최종적으로 모이는 배설구 같은 곳이라 오는 사람들 또한 분노, 스트레스, 우울한 기운의 사람들 태반이죠. 누구하나 건드려 봐라 이런식의 호전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가끔씩 히스테리를 부립니다. 잃을게 없는 사람들이라 두려울 게 없습니다. 그들의 분노와 짜증을 여과없이 받아들이는 접수계장님들의 얼굴엔 표정이 없습니다. 하나같이 똑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합니다. 그렇게 무표정해야 견딜수 있기 때문이란 걸 알고있습니다. 가진것이 많은 죄로, 지킬것이 있기에, 잃을까 두려워, 모욕을 견딥니다.  

   그 시간이 지나고 퇴근시간입니다. 5분 빨리 퇴근해야 어린이 집에 빨리 도착해서 얼마남지 않은 아이들 틈에 아이들을 데려올 수 있습니다. 그렇게 눈치봐가며 데리러 가도 큰 애는 엄마 왜이렇게 늦게 왔나며 타박입니다. 여름철 해가 길땐 6시 15분이라도 화해 놀이터에서 놀기 좋던데, 해가 짧아진 요즘 이미 어두워져 놀기가 어려운 놀이터에서 아이들은 놀자며 떼를 씁니다. 그런 아이들을 보면 미안해 하면서도 짜증이 납니다. 밖에서 놀고 나면 집에 가서 저녁밥 먹는 시간이 빠듯하기 때문이죠.  

   7시에 가서 밥하고 찬준비하면 7시 반에야 3식구, 4식구가 저녁을 먹습니다. 복직 후 그 시간에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부엌에서 서성이는 절 남편이 옷도 안 갈아 입냐고 뭐라 한적있는데, 순간 열이 났죠. 안 갈아 입은 게 아니라 못 갈아 입은 건데. 설거지는 남편 몫. 설거지 하는 동안 전 애들 씻깁니다. 그 후 잠시 책을 읽거나 놀아주다 9시에 애들을 재웁니다. 애들 재우면서 같이 잠들어 버리는게 부지기수입니다. 재우고 나와 뭔가를 하려고 맘 먹지만, 아침 7시부터 저녁 9시가지 14시간의 노동에 지쳐 애들따라 그냥 자고 싶습니다.  

   남편이 부부관계를 요구할땐, 내가 14시간의 노동하고 성노동까지 해야하나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여성의 성노동 또한 진정노동이라는걸 깨닫습니다.잠자리에서 몇백, 몇천 받았다는 연예인들이 부러워지기까지 합니다. 남성지배사회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성적인 능력을 가지고 자원을 획득하는 그녀들이 대단합니다. 성매매특별법, 고쳐야합니다. 성노동자들에게 정당한 노동의 댓가를 주도록 바꾸어야 합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느라 지쳐 성욕이 없다하니 남편은 내 노동을 줄이고자 나름 노력합니다. 가사노동을 줄이면 성노동하는게 더 수월하지 않을까 하는 계산이겠지요. 마치 가사노동은 자기 일이 아니라는 듯이 대가 없이는 하지 않는 태도에 남편, 그리고 남자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뭐 저 역시도 할 말은 없습니다. 이 가부장 체제를 원했던 건 저였고, 그래서 결혼했고, 이 남자의 경제력에 기대 제 삶을 새로이 건설했습니다. 아이 키우기에 적합한 환경을 줄 수 있어서 감사해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잃어버린 그 무엇에 대해 억울해 하고 분노하고 있습니다.  

   아침에 미칠듯이 바빠도 공무원이기에 9시까지 출근할 수 있기에 아침밥이라도 아이들에게 먹일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냐... 6시에 칼퇴근 할 수 있어서, 어린이집 눈치 안 보이고 데려올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냐... 남편이 정년까지는 아니더라도 대기업에 다녀서 돈도 상대적으로 많이 벌고, 퇴근시간도 7시나 8시 안이니 얼마나 다행이냐... 니가 60살까지 일 할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하냐...  

   그렇죠. 제 현재 삶의 조건들은 어쩌면 감사해야할 것들이 많기에 불만을 제기하는 것이 사치스럽다는거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사치스럽고 배부른 소리입니다. 누구는 지금 공권력에 맞서 저항하다 희생되었는데... 누구는 비정규직으로 삶의 미래를 포기하는데... 사회는 얼마나 야만스럽고 전쟁같은데 이런 한가한 소리나 하고 앉아있나... 


   14시간의 내 노동이 누군가에겐 소망이고 꿈일거라는 생각에 나는 말을 잃어버립니다.  


* 필자소개 


딸 두명에 남자하나 기르고 있는 30대 중반 아줌마. 개성이 서울보다 가까운 곳에 살고 있다. 좀더 밝게 살고 쉽게 살고 싶은게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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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투쟁을 원한다



유하림*

 


   엄마아빠는 이십대 시절 소위 말하는 운동권 이었다. 덕분에 어릴 적 부터 집회에 참여하곤했다. 그들 대신 나를 맡아 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따라 나선 집회 였지만 신나게 ‘2MB OUT’을 외쳤다. 그 말에 담긴 의미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노래를 부르며 같은 구호를 외친다는 것이 그저 재밌었다. 그리고 열네살이 되었을 때 아빠 손에 이끌려 대안학교에 들어가게 됐다. 입학하고 2년 정도가 지나서 였을까, 친구들과 내가 조금은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무리 슬픈 영화를 봐도 흐르지 않던 눈물이 5.18에 관한 다큐를 보면 줄줄 흘렀다.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보다 가슴이 뜨거워져서 친구들 몰래 눈물을 닦던 일도 있었다. 다른 친구들은 책상에 엎드려 시간을 때우거나 담담히 보던 영상들을 가슴이 벅찬 채로 시청했다. 나는 친구들과는 달랐다.  

   학교에는 운동권이었던 선생님들이 많았다. 그들에게서 한국 현대사와 정치, 경제 같은 것들을 배웠다. 처음으로 세상의 온갖 불의한 일들에 대해 알게 되어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주말에 열리는 집회에 나가는 것이었다. 그 때는 2011년 겨울이었는데 한창 한미 FTA 반대 집회가 열리던 시기였다. 평일에는 강원도에 있는 학교에서 기숙생활을 하고, 주말에 집으로 돌아가게 되면 대부분의 시간을 집회에 나가는 것으로 보냈다.   

   솔직히 내가 스스로 찾아간 집회는 너무 지루했다. 영상을 보는 것 만큼 가슴이 벅차 오르지도 않았고 오히려 빨리 시위가 끝나기만을 바랐다. 차가운 바닥에 앉아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잘 알아듣지도 못하겠는 말을 듣고 있으니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집회에 참여했다. 십대의 내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FTA 발효를 하루 남기고 있던 평일날에는 선생님께 매달려 수업도 빼고 서울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여했다. 그렇게 열정적이던 나의 참여에도 불구하고 FTA는 2012년 3월 15일에 정상적으로 발효되었다.   

   너무 허무했다. 바뀔 수 있을 줄 알았다. 간절히 원하면 이뤄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떤 어른들의 말처럼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집회에 나갔다. 내 마음 속엔 역사적 존재로서의 사명감 같은게 있었다. 타고난 것도 있고, 어릴 적부터 보고 자라기도 했다. 당장은 내 일이 아닐지라도 결국엔 나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집회에 나갔다. 그러니까 의리로 집회에 간 것이다. 가면 지루할 것이 뻔한 집회를, 당장 바뀌는 것이 없을 거라는 걸 잘 알면서도 시간을 내고 친구들을 모아 꾸준히 참여했다.  

   작년에 나는 대학에 입학했다. 긴 투쟁의 역사를 지닌, 진보 대학이라고 손꼽히는 대학이다. 우리 대학에는 여전히 운동권이라고 불리는 집단이 존재한다. 학생운동, 젊은 사람들이 꾸리는 운동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기존의 집회 문화와 다를거라는 기대였다. 그 기대는 얼마가지 않았다. 학생총회가 열리던 날이었다. 대학 구조조정에 대해 반대 하며 다같이 박근혜 정권 퇴진을 외치자고 했다. 우리가 보고 자라온 것이 그것 뿐이어서 그랬던걸까? 대학에서도 지루한 그 구호를 외쳤다. 박근혜 정권이 퇴진한다고 우리가 겪는 모든 문제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한 정권의 문제로만 다가가는게 실제 우리에게 닥친 일의 본질을 흐려버린다. 나는 대학 안에서 조차 의리로 투쟁 현장에 나갔다. 그러면서 마음 한구석에 불만이 쌓였다. 어렵게 시간을 내고 마음을 모아 참여한 집회에서 얻는 것이라고는 내가 이 곳에 왔다는 사실 뿐이라면 갈 필요가 있을까.  

   영화로도 나온 "리스본 행 야간열차"라는 책에서 이런 구절이 나온다. ‘독재가 현실이라면 혁명은 의무다.’ 불의한 일에 대한 투쟁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 투쟁의 방식이 늘 똑같을 필요는 없다. 집회는 무언가 바꾸기 위한 행동이지만 동시에 퍼포먼스다. 기득권을 향한 퍼포먼스 이면서 집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퍼포먼스 이기도 하다. 모든 집회를 재밌고 웃기게 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늘 비슷한 집회의 구조에서 벗어나자는거다. 30년 전에 부르던 민가를 부르고, 현 정권을 향한 퇴진을 요구하고, 각 소속집단의 대표들이 돌아가며 연설하는 집회말고, 가끔은 꿀같은 주말을 희생할 만큼 재밌는 집회를 원한다. 나는 현실적이던지, 흥미롭던지, 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춤이라도 출 수 있는 그런 집회를 원한다. 고등시절에 우연히 본 월가의 시위 장면이 아직도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가면을 쓰고, 얼굴에 그림을 그리고, 피켓엔 제멋대로 쓴 글씨들을 채워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월가를 점령했던 그들을 떠올린다. 재밌고 신나서 가고싶은 집회라니, 너무 멋지지 않은가.  


* 필자소개 


페미니스트. 모든 차별에 반대하지만 차별을 찬성하는 사람은 기꺼이 차별합니다. 간간히 글을 쓰고 덜 구려지기 위해 노력합니다. 꿈은 나태하고 건강한 백수이고 소원은 세계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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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어반복




오종희

(본 연구소 회원, 한백교회 교인)







    부모들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자연도감 속의 짐승들을 확인하러 가는 동물원은 원본과 복제의 전복을 상영함과 함께 사실 그런 동물과의 만남이 불가능함을 숨기는 거대한 무대이다.  

    세상 가운데 실재하는 유토피아로서의 동물원은 그 불가능함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생명의 가능성을 카피하고 가능성의 환경을 카피한다. 

    세계의 디즈니화는 경계의 무너짐을 받아들이는 현대인의 일상 감각이다. 위계 판단은 철지난 것이다. 

    제는 먼지 한 톨 묻지 않는 매끄러운 이미지의 세계에 먼지 묻고 짐승 똥 내나는 동물원은 차라리 초기 복제 기술의 구수한 노스텔지어 풍 고색창연한 장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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