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가는 민주주의 : 역사의 회귀?

 



김혜란
(
캐나다 세인트앤드류스 대학, 실천신학 교수)


 

    지난번 원고에서 한국의 삶이 왜 이렇게 힘든지 고통의 무게에 대해 쓰면서 글을 시작했다. 몇 달이 지난 지금 그 삶의 무게는 그 삶의 부피는 전혀 줄지않고 점점 더 커지고 있다. 한국만이 아니라 온 세계가 어지럽고, 고통스럽고, 그 고통을 감내하는 한숨과 저항의 소리 역시 커지고 있다.  

    경제, 사회, 환경, 교육, 여러 분야로 총체적 난국이지만, 이 난국의 원인을 진단하는 의미로 정치, 특히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지면의 한계상 오늘 다룰 민주주의 주제는 다음 원고에서도 계속될 것이다.  

    2016년 11월 이 원고를 쓰고 있는 주는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주다. 모든 예상을 뒤엎고 도날드 트럼프 (70세)가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선거 바로 다음날부터 미국 전역에 거쳐 많는 시민들이, 특히 많은 젊은 세대 그룹들과 여성들이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면서 거리로 나오고 있다. 이들은 선거의 패배를 무기력한 한탄이 아니라 저항의 소리로 바꾸면서 이렇게 외쳤다. “트럼프는 우리 대통령이 아니다” “트럼프가 공공연히 떠드는 여성혐오, 백인우월주의, 반이민, 반이슬람, 반외교정책으로 가득찬 미국은 우리가 믿고 꿈꾸는 미국이 아니다.” 이렇게 거리로 나온 많은 이들에게 선거는 끝났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꿈꾸는 미국, 인권과 약자, 여성, 종교, 이민, 이주의 자유가 보장되는 삶을 향한 투쟁은 전혀 끝나지 않았다. 이들의 시위는 그동안 노력해서 성취해낸 흑인차별반대 운동을 포함한 미국시민인권운동 (civil rights movement)의 역사적 진보가 역행되고 있는 현실을 그냥 앉아서 방관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그렇다. 여기서 우리는 마치 역사가 거꾸로 가고 있는 건 아닌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런 현실은 비단 미국의 문제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해 새로 선출된 필리핀 대통령 로드리고 두테르테 (71세) 은 마약과의 전쟁을 빌미로 마약거래를 했다고 의심이 되는 시민들을 공정한 사법절차 없이 마구 죽이고 있다. 히틀러처럼 자신도 수백만명을 죽일 수 있다고 공적 선포를 하고 있다.[각주:1] 도저히 정상적인 민주주의제도 하에서 적법하게 선출된 대통령으로서 할 수 있는 말도 행위도 아니다. 그런데, 이런 비인간적이고 비민주주의적인 악행들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다.   

    한국은 어떠한가? 전쟁 이후 약 40년간 군사독재 불식을 위해 그토록 많은 투쟁과 헌신, 그리고 희생이 있었다. 그리고 10년의 김대중, 노무현 문민정부를 거치면서, 드디어 한국의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는다고 믿으며 21세기를 열었다. 그러나 짧은 10년이었다. 두번의 정권 교체이후 신자유 자본주의를 옹호하고 군사주의를 신봉하는 보수세력의 힘으로 (아니 우매한 대중의 선택과 비판적 사고의 결여, 이 부분을 다음 원고에서 집중적으로 다룰 것이다) 2007년 이명박을 경제대통령이라는 환상으로 만들어 당선시켰다. 이명박과 그를 지지한 보수정권은 지난 5년동안 인권, 경제만을 망친 것이 아니라 환경 (4대강 사업)까지 파괴시키고, 서민, 약자의 삶을 더 피폐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전 노무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그 5년간 고통이 너무 힘들어서였을까? 아니면, 이른바 독재가 양산한 삶의 쓴맛을 덜 봐서였을까? 아니면, 정말로 민주주의가 거꾸로 가고 있는걸까? 한국은 다시 2012년 12 월 대선에서 독재자의 박정희 딸인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이 어처구니없는 선거의 결과전후로 한국에선 새로운 영어-한글 퓨전 용어가 퍼져나갔다: “멘붕 (mental붕괴).” 2016년 11월 8일 트럼프의 당선소식으로 많은 미국인들, 그리고 그 선거를 지켜봤던 전세계는 일종의 “멘붕”을 경험하고 있는 것 같다. 적어도 내가 살고 있는 이 곳 카나다에선 그렇다. 최종확정결과가 워낙 늦게 발표되어, 많은 사람들이 잠을 설쳤다. 11월 9일 이른 아침 발표된 선거결과를 지켜보고 출근해 멍해있는 학교 교수, 직원, 학생들에게 난 한국인들이 만들어낸 “멘붕” 용어를 설명했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도저히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런 정치적 결과가 미치는 멍때리는 정신상태에 동감한 것이다.

    지난 4년동안 박근혜 정권하에 한국의 상황은 이명박정권때보다 훨씬 심각해졌다. 아니 그 때 저지른 잘못된 정책의 결과가 이 곳 저 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한국사람들은 삶이 삶이 아니라 죽음이라 말했다. 그래서 이런 죽음같은 삶을 설명하는 또다른 퓨전용어가 탄생했다: “헬조선.”[각주:2] 멘붕에 비해 훨씬 자조적이고 잔인하고, 강한 혐오가 담겨있는 표현이라 사실 조금 섬짓하다. 왜냐하면 이 용어가 담고 있는 의미는 지옥같은 한국의 상황을 표현하기 보다, 지옥이 되어라 하는 자폭과 자신 혐오가 강하게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런 헬조선의 현실도 부족한가? 최근 또다시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최순실 파일”의 공개사건이다. 이로 1987년 6.10항쟁처럼, 1960년 4.19항쟁처럼 전 국민들이 분노하고 거리로 나오고 있다.

    도날드 트럼프, 로드리오 두테르테, 박근혜, 이 대통령의 당선은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는 당선이다. 제정신이 있는 자라면, 최소한의 이성적, 비판적 교육을 받은 자라면, 민주주의와 최소한의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을 믿는 자라면, 그 누구라도 이들을 대통령이 될만한 지도자라고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도 이들이 당선된 것이다. 그것도 독재가 아닌 민주주의 제도를 통해 정권이 탄생되어서, 이른바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이들의 권력이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더 심각하다. 오늘 이런 비정상적인 정치현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멘붕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리고 깨어있으라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실천하기 위해, 아니, 이런 지옥, 죽음같은 상황으로 스스로를 자학하는 민중들과 시민들의 폭력을 끊어내기 위해, 요즘 미국, 한국, 필리핀을 포함해서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거꾸로 가는 민주주의로 표현한 학자의 입장을 소개하고자 한다.

    제니퍼 왈쉬는 2016년 CBC - Massey Lectures강의를 맡도록 영광의 선택를 받은 정치학 교수이자 역사학자이다.[각주:3] CBC - Massey Lectures는 카나다 공영방송 (CBC)과 토론토대학 소속 Massey College그리고 House of Anansie 출판사의 합작품으로 매년 카나다인으로서 다양한 분야에서 공헌을 한 철학자, 과학자, 정치가, 예술가, 문학가 등이 선택되어 자신들의 관심주제를 심도깊게 발표하는 행사이다. 1961년부터 이 강의는 매년 지속되어왔다. 5일동안 5번 강의가 매일 라디오로 전국에 방송이 되며, 전국을 돌면서 강의가 행해지고, 강의내용은 책으로 출판이 되어 두루 읽힌다. 이른바CBC - Massey Lectures는 공신력있는 카나다의 지적 운동의 양산지라 할 수 있다.[각주:4]

    제니퍼 왈쉬는 현재 이탈리아 플로랑스에 있는 유럽대학 국제관계학과 석좌 교수이자, 최근까지 UN 자문위원으로 국제분쟁문제를 깊이 관여해 온 학자이다. 왈쉬의 CBC Massey강의제목은 “역사의 회귀: 21세기 분쟁, 이주, 그리고 지정학”[각주:5] 이다. 

    왈쉬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이른바 냉전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한 그 사건을 보면서 이를 “역사의 종말”이라고 해석한 미국 정치학자 프란시스 후꾸야마를 인용하면서 강의를 열었다.[각주:6] 여기서 후꾸야마가 말하는 종말은 곧, 자본주의-공산주의의 대결의 끝을 의미했다. 동시에, 서구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지칭했다. 궁극적으로 역사는 진보한다는 낙관주의를 과감하게 선언한 것이다. 그런데, 후꾸야마의 에세이가 발표되고 25년이 지난 지금 그가 선언한 종말은 커녕 그 종말의 역사가 회귀하고 있다. 이 점이 왈쉬 강의의 핵심테제이다. 죽었다고 믿었던 역사가 좀비처럼 귀신이 되어 다시 현재에 나타난 것이다. 난 왈쉬가 주장하는 역사의 회귀를 좀비로 표현하고 싶다. 이런 좀비의 정체성은 죽음, 죽임이다. 좀비의 유일한 타켓은 살인이고, 억압이고, 정복이다. 좀비는 생존위해 가족까지도 죽여야하는 존재이다. 2010년 방영이후 아직까지 방영되면서 대중의 인기를 차지하고 있는 미국 TV 드라마, Walking Dead[각주:7]가 이 죽임의 현현인 좀비현상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다.

    왈쉬는 적법한 절차없이 공권력에 의해 벌어지는 살인 (앞서 예를 든 필리핀 포함), 소수 인종, 소수 종교인들을 향한 증오와 학살, 전대미문의 기아상황 (자연재해, 환경재해포함), 전대미문의 피난민사태, 그리고 이른바 서구 민주주의의 발원지이자 그러므로 본보기가 되어야 할 국가들 (유럽, 미국) 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제불균등, 배타적 외교정책, 백인우월주의, 수국주의, 인종차별의 현실을 자세하게 예로 들면서 민주주의가 거꾸로 가고 있다고, 아니, 비민주주의적인 역사가 회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거꾸로 가고 있는 민주주의는 소위 “고대시대, 중세시대 행해진 야만적인” 행위가 민주주의라는 근대주의 (모던니즘)옷을 입고 재등장한 것과 유사하다. 엄밀히 말하면, 이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탈을 쓴 독재, 전제주의의 행태라는 것이다.

   왈쉬는 우리가 방심하면, 즉, 깨어있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바로 거꾸로 간다고, 추악한 역사로 회귀한다고 조언한다. 왈쉬는 카나다인으로서 유럽에 살면서, 또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를 두루 두루 살핀 오랜 경험과 토대를 기반으로 어떻게 역사가 좀비로의 회귀를 거듭해왔는지 보여준다. 동시에, 그 회귀를 막고자 한 인간들의 노력, 분투, 그리고 승리까지도 설득력있게 주장한다. 역사는 한번 진보하면 바뀌지 않는 딱딱한 돌덩이가 아니라, 우리의 잘못된 선택과 행위로 언제든지 깨질 수 있는 유리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아니, 흐르는 물처럼 상황에 민감하고, 그래서 쓰나미처럼 우리 삶을 송두리채 가져갈 수도 있고,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목마른 우리 삶을 살려내는 움직이는 제도이다. 동시에 우리의 바르고 꾸준한 노력으로 더 성숙하게 유지, 지속될 수 있는 역동적 존재가 바로 민주주의이다. 그러므로 깨지지 않게 그 소중한 민주주의를 지키기위해 한 사람 한 사람 노력하고, 투쟁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격려를 하면서 강의를 마친다.

    왈쉬의 강의를 들으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실천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한다. 우리는 이명박, 박근혜, 그리고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든 대선을 거치면 한 사람 한 사람의 투표가 얼마나 역사를 가늠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지 뼈저리게 배웠다. 상황이 어렵고, 계란에 바위를 치는 것처럼 무의미한 노력으로 보여도, 이것이 민주주의를 살리는 길이다. 그 길이, 소중한 인권을 지키고, 약자, 소수자의 존엄성이 존중되는 사회로 가는 길이다. 이 길은 단순한 이념도 아니고, 부질없는 믿음도 아니다. 이 길은 꿈틀꿈틀 살아있는 심장과 같은 운동이자 끊임없은 개혁되고 지속되어야 하는 여정이다. 힘들고 지치고 온 세계 기운이 흐트려진 오늘, 그 운동의 한 예를 나누면서 소고를 마친다. 

    카나다는 이번해가 전국적으로 지방자치제 선거가 있는 해이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 Saskatoon에서도 시장을 뽑고 시의회의원들을 뽑는 선거가 10월 26일에 있었다. 새로운 물결, 변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소망이 있었다. 그리고 기아문제, 인종문제, 원주민 문제, 환경문제등을 적극적으로 타개하려는 진보적인 후보 찰리 클락(Charlie Clark)이 있었다.그러나 클락은 선거당일까지 여론조사에서 계속 3위 (후보자 4명 중)에 머물렀다. 즉 여론에 따르면 그가 당선되리라는 가능성은 없었다. 그런데, 그를 지지하고 새로운 도시를 꿈꾸는 이들은 쉼없이 뛰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선거운동을 했다. 절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한 사람의 소중한 노력과 한 사람 한사람의 투표로 시선거 역사상 전대미문한 높은 투표율을 기록하면서 찰리 클락은 시장으로 당선되었다. [각주:8]


ⓒ 웹진 <제3시대>



  1. https://www.theguardian.com/world/2016/sep/30/rodrigo-duterte-vows-to-kill-3-million-drug-addicts-and-likens-himself-to-hitler [본문으로]
  2. https://namu.wiki/w/%ED%97%AC%EC%A1%B0%EC%84%A0 [본문으로]
  3. http://www.cbc.ca/books/2016/07/jennifer-welsh-to-present-2016-massey-lectures.html [본문으로]
  4. http://www.cbc.ca/radio/ideas/masseys/about [본문으로]
  5. Jennifer Walsh, The Return of History: Conflict, Migration, and Geopolitics in the Twenty-First Century (Toronto: Anansie Press, 2016). [본문으로]
  6. Francis Fukuyama, 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 (New York: Avon Books, 1992). 1989년 에세이 “The end of Histor”y는 저널 The National Interest에 기재되었고, 본 책에 다시 수록되었다. [본문으로]
  7. https://en.wikipedia.org/wiki/The_Walking_Dead_(TV_series) [본문으로]
  8. http://www.charlieclarkformayor.ca/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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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할 세상 흥할 하나님 나라: 다니엘서 2장과 7장 비교분석





김진양

(Ph.D. The Lutheran School of Theology at Chicago (the Old Testament))




 복음서가 서술하는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 한 예수 사역의 중심주제는 하나님 나라다. 로마제국의 지배 아래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것은 예수운동이 반제국주의 메시지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의 반제국주의적인 하나님 나라는 구약성서의 다니엘서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각주:1] 다니엘서 2장과 7장의 비교 분석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면서 반제국주의를 주장하였던 다니엘서 저자의 신학적 기조를 밝혀보려고 한다.


  1. 다니엘서는 세상 제국의 지배체제와 구조를 여러 가지 다양한 측면에서 보여주고 있다. 다니엘서는 두 언어로 (히브리어: 다니엘서 1장, 8-12장; 아람어: 다니엘서 2-7장) 기록된 사실 자체도 이미 다니엘서의 저자가[각주:2] 세상제국의 지배아래 살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각주:3] 다니엘서 2-6장 설화는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유대인의 상황을 아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면, 다니엘서 1장은 제국의 음식을 먹고 제국의 언어를 배워야 하는 식민지 유대인의 상황, 다니엘서 2장과 4장은 주류인 제국 관리와 바벨론 점성가들 사이에서 차별받는 유대인 소수인종의 삶, 다니엘서 3장과 6장은 금 신상 또는 황제숭배를 강요당하는 유대인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다니엘서 5장은 제국의 웅장한 축제를 소개하면서 제국의 위협을 과시한다.


  다니엘서를 연구하는 성서학자들은 제국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을 보이는 다니엘서 7-12장의 묵시적 비전과는 달리 다니엘서 1-6장은 제국에 충성하거나 또는 제국에 순응하는 유대인의 삶을 보여준다고 주장하였다.[각주:4] 그러나 최근 성서학자들은 다니엘서 1-6장의 설화와 7-12장의 묵시적 비전 모두 제국의 억압적 지배에 대한 저항적 메시지가 있다고 주장한다.[각주:5]


  다니엘서의 하나님 나라 이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아람어로 기록된 다니엘서 2장의 설화와 다니엘서 7장의 묵시적 비전이다. 다니엘서 2-7장은 각각 주전 6세기의 바벨론 제국, 5세기의 페르시아 제국, 2세기의 헬라 제국이 그 역사적 배경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다니엘서 2장과 7장은 역사상 연속적으로 발생한 네 제국을 독특한 문학적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각주:6] 아래의 도표에서 보는 것처럼, 다니엘서 2장은 네 개의 금속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신상으로 그리고 다니엘서 7장은 네 개의 짐승으로 제국을 각각 묘사하고 있다.



  다니엘서 저자는 왜 네 개의 금속으로 된 거대한 신상과 네 짐승으로 제국을 표현했을까? 그 이유는 다니엘서 저자가 보는 제국의 운명과 관련이 있다. 즉, 다니엘서 저자가 경험한 역사상 모든 제국은 모두가 멸망했다는 사실이다. 제국이 강력한 힘과 영광으로 영원할 것 같지만 실은 언젠가는 멸망 할 수밖에 없는 금속 조각 같은 것이며, 포악한 짐승처럼 날카로운 이빨로 위협하지만 결국은 죽을 운명이라는 것이다. 다니엘서 저자가 묘사하는 제국의 이미지인 네 금속과 네 짐승을 자세히 살펴보자.


    다니엘서 2장은 바벨론 제국의 황제 느부갓네살이 꿈에서 본 거대한 신상을 통해 제국의 모습을 서술한다. 이 거대한 신상은 크고 그 빛이 아주 찬란하며 그 모습이 무시무시하다 (다니엘 2:31). 머리는 순금, 가슴과 팔은 은, 배와 넓적다리는 청동, 무릎 아래는 놋쇠, 발의 일부는 진흙이다 (다니엘 2:32-33). 다니엘서 저자는 이 거대한 신상이 결국 부서져 흔적도 찾을 수 없게 될 운명이라고 기록한다.


그 때에 쇠와 진흙과 청동과 은과 금이 산산 조각나 여름 타작마당의 겨와 같이 바람에 날려 흔적도 없이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다니엘 2:35).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이 꾼 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바벨론 제국의 황제 느부갓네살은 이 거대한 신상의 머리로서 세상의 모든 사람과 짐승을 통치하는 권력자고 그 이후 느부갓네살보다 못한 나라가 일어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 뒤에 놋쇠로 된 셋째 나라가 온 땅을 다스릴 것이라고 해석한다. 마지막으로 넷째 나라는 놋쇠처럼 강할 것이라는 것이 다니엘의 꿈 해석이다.  

 다니엘서 7장은 제국을 짐승으로 표현하고 있다. 다니엘서 7장은 천사가 다니엘에게 환상을 설명한다. 다니엘은 바다에서 모양이 서로 다른 큰 짐승 네 마리가 올라오는 것을 본다. 첫째 짐승은 사자같이 보이나 독수리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고 서술한다. 이 첫째 짐승이 바로 바벨론 제국이다. 둘째 짐승은 곰처럼 생겼는데 갈빗대 세 개를 물고 있었다고 서술한다. 이 둘째 짐승은 메디아 제국이다. 셋째 짐승은 표범처럼 생겼으나 등에 새 날개가 네 개나 있었고, 머리도 네 개나 달려 있었으며 아주 권위가 있어 보인다고 한다. 넷째 짐승은 사납고 무섭게 생겼으며 힘이 아주 세다. 쇠로 된 이빨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으로 먹이를 잡아먹고, 으스러뜨리며, 먹고 남은 것은 발로 짓밟아 버렸다. 이 짐승은 앞에서 말한 짐승들과는 달리 열 개나 되는 뿔을 달고 있다.


 네 짐승 중 마지막 네 번째 짐승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에서 앞의 세 짐승들과 구별된다. 첫째, 이 짐승은 매우 사나워 나머지 짐승들을 발로 짓밟아 버리고 놋쇠 이빨과 놋쇠 발톱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다니엘서 2장의 느부갓네살이 꿈에서 본 이전의 모든 제국을 다 부셔버린 네 번째 제국의 모습과 동일하다 (다니엘 2:40). 둘째, 이 짐승은 머리에 열 개의 뿔이 달려 있다. 성서에서 뿔은 힘을 상징하며 다니엘서 7장의 네 번째 짐승의 뿔은 폭력적인 제국의 힘을 상징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로 네 번째 짐승의 머리에 열 개의 뿔에 눈이 달려 있고, 그 뿔들에는 교만하게 떠드는 입이 있으며 그 모습은 다른 뿔들보다 더욱 강하게 보였다는 것이다 (다니엘 7:20). 이 괴상한 모습의 정체는 바로 주전 2세기 유대인을 박해했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4세를 가리킨다. 다니엘서 7장 23-25절은 넷째 짐승의 억압적 힘에 대해 아래와 같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넷째 짐승은 땅위의 일어날 넷째 나라로서 다른 모든 나라와 다르고, 온 땅을 삼키며 짓밟고 으스러뜨릴 것이다. 그 열 뿔은 이 나라에서 일어날 열 왕이다. 그 뒤에 또 다른 왕이 일어날 것인데, 그 왕은 먼저 있던 왕들과 다르고, 또 전에 있던 세 왕을 굴복시킬 것이다. 그가 가장 높으신 분께 대항하여 말하며, 가장 높으신 분의 성도들을 괴롭히며, 정해진 때와 법을 바꾸려고 할 것이다. 성도들은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까지 그의 권세 아래에 놓일 것이다.


 마카비서는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4세의 유대인 박해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마카비전서 1:44-50). 그는 성전에서 제물을 바치는 행위를 금지하고 유대인들의 안식일과 종교적인 절기를 더럽혔고, 유대인 성전 재단에 우상을 세우고, 할례를 금지하여 유대인의 정해진 때와 법을 바꾸려 하였다. 주전 169년에 안티오코스는 유대인들에게 제국의 바알 샤먼을 (Baal Shamen) 섬기기를 강요하고 그 신이 오직 자신을 통해서만 드러난다고 주장하였다. 다니엘서 3장의 설화는 느부갓네살왕이 금 신상을 만들고 그것에게 경배하기를 강요하지만 다니엘의 세 친구는 결코 느부갓네살의 금 신상을 예배하지 않는다. 느부갓네살과 바벨론 사람들이 그들을 불타는 용광로에 집어넣지만 그들은 그곳에서 손끝하나 다치지 않고 구원을 받는다. 안티오코스의 신 바알 샤먼을 예배하기를 강요당하는 주전 2세기의 독자들에게 다니엘 3장은 큰 위로와 용기를 주었음에 틀림없다.


 제국을 짐승으로 묘사하는 다니엘서 7장은 요한계시록 저자의 역사적 상황에서 재인용되었다. 요한은 뿔이 열이고 머리가 일곱인 한 짐승이 바다에서 나오는 것을 본다 (요한계시록 13:1). 이 짐승은 로마제국을 상징하며 열 뿔은 로마제국의 황제들을 상징한다.


 다니엘서 2장에 의하면, 그 거대한 신상은 난데없이 날아온 “작은 돌”[각주:7] 하나에 의해 부서지고 후에 큰 산이 되어 온 땅에 가득 찬다고 한다 (다니엘 2:34-35). 다니엘서 7장에 의하면, 하늘의 하나님이 짐승으로부터 나라와 권세를 빼앗아 “사람의 아들”에게 영원한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었다고 한다 (다니엘 7:12-14). 즉, 다니엘서 2장과 7장은 하나님의 통치 혹은 하나님 나라를 각각 “작은 돌”과 “사람의 아들”로 묘사하고 있다.


 다니엘서 저자가 “작은 돌”과 “사람의 아들”로 비유하는 하나님 나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세상의 제국을 무너뜨리고 하늘의 하나님이 세우실 하나님 나라는 영원하다는 것이다.


 이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실 터인데 [작은 돌], 그 나라는 영원히 망하지 않을 것이며, 다른 백성에게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 나라가 도리어 다른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입니다 (표준새번역, 다니엘 2:44). 


 옛적부터 계신분이 그에게 [사람의 아들]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셔서 민족과 언어가 다른 모든 백성들이 그를 섬기게 하셨다.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여서 옮겨가지 않을 것이며 그 나라가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표준새번역, 다니엘 7:14).


 아래의 도표에서 보는 것처럼 세상제국과 하나님 나라는 여러 측면에서 대조된다. 첫째, 짐승이 제국을 상징하는 반면 사람의 아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한다. 둘째, 짐승은 바다에서 올라오지만 사람의 아들은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온다. 셋째, 짐승의 나라는 일시적이지만 하나님 나라는 영원하다.



 여기서 “작은 돌”과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는 없지만 하나님의 통치가 메시야라는 한 개인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인지 아니면 유대민족의 회복을 통하여 이루어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J. A. Montgomery: 185-92). 폴 리꾀르는 앙드레 라콕의 책 『다니엘과 그 시대』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글이 비밀스러운 것이라고 할 때 그러한 글을 읽는다는 것은 그 글이 쓰인 삶의 자리를 재 구성한다는 것이다” (앙드레 라콕: 22). 즉, 다니엘서 저자의 “작은 돌”과 “사람의 아들”은 주전 2세기 셀류커스 제국의 황제 안티오코스의 박해 아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였던 묵시적 비전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를 상징하는 “작은 돌”과 “사람의 아들”은 초대 기독교인과 유대교의 하나님 나라 이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주전 1세기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자신의 책 『유대 고대사』에서 다니엘 2:44의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이 “작은 돌”에 대한 해석을 기피했다 (Antiquities of the Jews 10:210).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요세푸스는 로마가 하나님 나라에 의해 멸망될 것이라는 해석하여 로마인들을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G. Pfandl: 250). 초대 기독교인들은 “작은 돌”과 “사람의 아들”을 자신들의 교회와 그리스도 이해에 각각 적용하였다. 예를 들면, 공관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를 다니엘 2장의 “작은 돌”에 비유한다 (마가복음 12:10; 마태복음 21:42; 누가복음 20:17). 특히 다니엘서 2장의 제국들이 작은 돌에 의해 파괴되듯이 누가복음 저자는 로마제국의 통치를 대변하는 율법학자와 대제사장들에 의해 예수가 수난을 받지만 결국 불의의 세력에 대항하여 승리한다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이야기 한다: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하고 기록된 말은 무슨 뜻이냐? 누구든지 그 돌 위에 떨어지면, 그는 부스러질 것이요, 그 돌이 어느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 것이다 (표준새번역, 누가복음 20:18-19).[각주:8]


 마가복음 저자도 예수가 대제사장에게 수난 받는 장면에서 “사람의 아들”이 하늘의 하나님 오른편에 앉을 것이고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올 것이라고 이야기함으로써 자신의 부활과 다니엘서 7장의 “사람의 아들”을 연결시킨 부분을 기록하고 있다 (마가복음 14:61). 교회 교부들도 다니엘서 2장의 “작은 돌”을 예수의 성육신에 비유하고 다니엘 7장의 “사람의 아들”을 예수의 부활에 비유하였다. 예를 들면, 이레니우스는 세상 제국의 불의한 힘을 무찌르고 부활하신 예수가 바로 다니엘서가 예언한 “작은 돌”이라고 하였다 (Against Heresies 5.26.1).


 다니엘서의 하나님 나라를 논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다니엘서 2장, 4장, 6장에서 느부갓네살과 다리우스에 의해 고백된 신을 찬양하는 영광의 성가다 (Doxology). 이 찬양의 성가는 제국 황제의 힘과 그들의 영광을 부인하고 오직 하늘의 하나님의 권세와 나라만이 영원하다고 고백한다. 다니엘서 2장은 바벨론의 술객과 마술사들이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하지 못하지만 다니엘이 그 꿈의 의미를 해석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한 이후 느부갓네살 제국의 영광은 궁극적으로 하늘에서 부여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왕이여! 당신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라와 권세와 능력과 영광을 당신에게 주셨습니다” (다니엘 2:37). 결국 다니엘 2장 설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이렇게 고백한다:


너의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 가운데 으뜸가는 신이시오, 

세상의 모든 황제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왕이시라! 

오직 그대만이 이 비밀을 드러낼 수 있었으니, 

과연 그대의 하나님은 비밀을 드러내시는 분이시로다! (다니엘 2:47)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바로 이방 제국 황제의 입술에 의해 하나님 나라가 가장 으뜸가는 나라라는 고백이 나왔다는 것이다. 느부갓네살의 신을 찬양하는 노래는 다니엘 4장에서 그리고 다리우스의 찬양은 6장에서 각각 예전적 형태의 고백으로 이어진다.[각주:9]


크도다, 이 이적이여! 

능하도다, 이 기사여! 

그 나라 영원하고 그 통치 대대에 이를 것이다! (다니엘 4:3)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을 우르르 보고서 

정신을 되찾았고, 가장 높으신 분을 찬송하고, 

영원하신 분을 찬양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렸다. 

그의 통치 영원하고 그의 나라 대대로 이어진다! (다니엘 4:34) 


내가 이 법령을 공포한다. 

내 나라에서 나의 통치를 받는 모든 백성들은 반드시 다니엘이 

섬기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여야 한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영원히 다스리신다. 

그 나라는 멸망하지 않으며 그의 권세는 무궁하다 (다니엘 6:26)


 이처럼 다니엘서 2-6장의 설화는 이방제국의 황제의 입을 통해 제국 낸다는 하늘의 심판의 메시지를 기록하고 있다. 다니엘서 5장은 벨사살 왕이 베푼 거대한 궁정잔치 중 갑자기 사람의 손이 벽 위에다 글을 쓰는 사건을 서술하고 있다. 다니엘은 기록된 글자를 “메네, 메네, 데켈과 바르신” (מנא, תקל, פרס) 이라고 판독한다. 이 아람어의 뜻은 하나님이 벨사살 제국의 무게를 달아보니 그 무게가 모자라 그의 제국을 메대와 페르시아로 나눈다는 심판의 메시지다. 다니엘서 6장은 불의한 제국의 법에 저항하여 사자 굴에 던져졌던 다니엘이 구원받는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다니엘서 설화와 묵시적 비전은 반제국주의 메시지를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작은 돌”과 “사람의 아들”로 보여주고 있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제국의 황제들이 자신들의 입으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고백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다니엘서 2-6장의 설화는 제국의 힘과 억압적 정책을 “풍자적”으로 해체하고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는 저항적 묵시록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다니엘서 설화의 이러한 풍자적 성격은 다니엘서 7-12장의 묵시적 비전과도 같은 맥락에 있다.


 앞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통치의 개념을 다니엘서를 통해서 살펴보았듯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개념 역시 영원한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한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마태복음 6:13). 다니엘서 저자가 살았단 주전 2세기의 유대인들이 셀류커스 헬라제국의 핍박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기대했던 것처럼 예수 역시 의를 위해서 핍박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고 하였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라고 선포하였다 (마태복음 5:10).


* 필자소개

    현재 미 연합감리교회 북 일리노이 연회에서 목회, 시카고 루터란 신학대학에서 구약학 전공(Ph.D.), 시카고 루터란 신학대학 외래교수,  Wartburg College에서 강의


ⓒ 웹진 <제3시대>

  1. 안병무는 예수시대를 지배하던 묵시문학의 선구를 다니엘서로 보는데, 예수 사역의 역사적 상황을 셀류커스 제국과 같은 헬라제국의 박해로 보고 있다. 따라서 안병무는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는 묵시문학을 민중의 글이라고 주장한다. 자세한 내용은 안병무의 다음의 글을 참조하라: "마가복음에서 본 역사의 주체" 『민중과 한국신학』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2). [본문으로]
  2. 다수의 성서학자들은 다니엘서 최종 편집자는 주전 2세기의 셀류커스 헬라제국의 지배아래 살았단 것으로 추정한다. 그 이유는 다니엘서 7-12장의 묵시적 비전에서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4세의 유대인 박해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역사적 상황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John J. Collins, Daniel, Hermeneia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3). [본문으로]
  3. Stephen Breck Reid는 (“Daniel, Book of," Eerdmans Dictionary of the Bible, ed. David N. Freedman [Grad Rapids; Mich.: W. B. Eerdmans, 2003], p. 3) 다니엘서가 두 가지 언어로 기록된 것은 식민 지배를 받는 피지배자의 언어와 식민지배를 하는 지배자의 언어가 동시에 공존하는 삶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본문으로]
  4. W. Lee Humphreys는 자신의 논문에서(A Life-Style for Diaspora: A Study of the Tales of Esther and Daniel," JBL [1973]: 211-23.) 다니엘서 1-6장의 설화는 본질적으로 제국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본문으로]
  5. Daniel Smith-Christopher는 다니엘서 1-6장은 제국의 힘보다 더 위대한 하늘의 힘을 이야기하고 있는 점에서 다니엘서는 결코 제국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글을 참고하라: Daniel Smith-Christopher, “The Book of Daniel,” New Interpreter's Bible, Vol. VII (Nashville: Abingdon Press, 1994). [본문으로]
  6. A. Lenglet는 자신의 논문 “La Structure littéraire de Daniel 2-7,” Bib 53 (1972): 169-90, 에서 다니엘서 2-7장이 문학적인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다니엘서 2장과 7장은 각각 네 제국이라는 도식을 서술하고 있다. 다니엘서 3장과 6장은 각각 불타는 용광로에서 구원받은 다니엘의 세 친구와 사자의 굴에서 구원받은 다니엘을 서술하고 있다. 다니엘서 4장과 5장은 하나님에 의해 심판받는 이왕제국의 운명을 서술하고 있다. [본문으로]
  7. 아람어 원문에는 단순히 “돌” (אבן) 이다. 그러나 본 글에서 필자는 하나님 나라가 네 금속의 강력한 힘에 비해 보잘 것 없는 돌덩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작은 돌”로 표현한다. [본문으로]
  8. 공관복음의 “작은 돌”로서의 예수 이미지에 대해서 다음의 글을 참고하라: E. F. Siegman, The Stone Hewen from the Mountain (Daniel 2), CBQ 18 (1956): 364-79. “작은 돌”이 하나님 나라로 해석된 역사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을 참조하라: Gerhard Pfandl, "Interpretations of the Kingdom of God in Daniel 2:44," Andrews University Seminary Studies, Vol. 34/2: 249-68. [본문으로]
  9. Daniel Smith-Christopher는 (“The Book of Daniel,” p. 51) 다니엘 2:21-23의 다니엘의 기도와 함께 느부갓네살의 신을 찬양하는 노래를 이방제국의 세력에 저항을 촉구하는 정치적 찬양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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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 초월하는 ‘크리스토파시즘’: 미국 대선을 보면서





김나미

(미국 Spelman College 교수, 종교학)




    미국의 페미니스트 학자인 질라 아이젠스타인(Zillah Eisenstein)은 2016년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2016년 미국의 대통령 경합은 여성혐오적이고 인종차별적인 편협한 사람과 제국적 페미니스트 사이에서 벌어진 지옥으로부터의 선거였다.” 그 ‘지옥으로부터의 선거’에서 미국의 선거인단투표를 통해 승리한 사람은 백인우월주의자이며 여성혐오적이고 반이민주의자인 도널드 트럼프였고, 일반투표에서 이긴 사람은 ‘제국적 페미니스트’인 힐러리 클린턴이었다. 따라서, 미국의 선거인단투표에서 클린턴이 졌다고 제국건설을 지지하는 ‘제국적 페미니즘’[각주:1]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게 되는 것은 아니다. 누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던 미국의 제국주의적 야심과 횡포가 금방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미국을 비판적으로 지켜보는 사람들이라면 알 수 있다. 그러나,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으로 인해 더욱 분명해 진 것은 이미 다양한 형태의 폭력을 경험해 온 소수인종들, 이민자들, 무슬림들, 성소수자들, 저임금 노동자들, 장애인들, 여성들의 삶이 더 어려워 질 것이라는 것이다. 벌써 학교를 비롯한 미국내 이곳 저곳에서 스스럼없이 백인우월주의와 극단주의를 표출하면서 유색인종들과 성소수자들을 상대로 폭력을 휘두르는 사태가 발생하고 있다.


    이번 미국의 대통령선거에 관해서 많은 분석이 나왔고, 앞으로도 당분간은 다양한 의견들이 지속적으로 보태질 것이다. 예를 들어, 힐러리 클린턴이 여러가지 정치적 불신을 일으켰지만 궁극적으로 당선되지 않은 이유는 그가 여성이기 때문이라는 젠더와 관련된 분석이 많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의 성추행과 여성혐오 발언에도 불구하고 백인 여성들의 절반 이상이 트럼프를 지지한 것을 보면 젠더라는 축으로만 이번 미대선의 결과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수 있다. 트럼프의 “아메리카를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라는 슬로건이 백인들을 집결 시키는데 성공했고, 트럼프의 ‘아메리카’는 백인들만의 미국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백인여성들에겐 백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여성으로서의 정체성보다 더 중요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따른다. 또한, 위싱턴의 집권세력에 의해 상대적으로 소외되어져 왔던 저소득층 백인들이 월가의 금권정치와 빈부격차의 증가를 비판한 트럼프를 지지했기에 선거에서 이길수 있었다고 하면서 ‘계급’과 관련시키는 분석도 나오고 있지만, 트럼프를 지지한 대다수의 미국인들이 고학력자와 고소득자들을 포함한 다양한 계층에 속하는 백인 남성들과 여성들이라는 점은 ‘계급’으로만 이번 대선을 바라보는 분석의 한계를 보여준다. 미국에서 인종차별주의와 자본주의, 성차별과 인종차별주의를 분리해서 설명할 수 없듯이, ‘트럼프 현상’을 인종이던, 계급이던, 젠더이던 한 가지 축으로만 설명하려는 분석은 미흡할 수 밖에 없다. 


    이번 미 대선과 관련해서 실망스럽지만 놀랍지 않은 사항들 중 하나는 트럼프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낸 사람들이 ‘거듭난’, 혹은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을 포함한 백인들이었다는 것이다. 백인들 4명당 1명이 복음주의계열 기독교인들이고, 선거 출구 조사에 따르면 78%-81%의 백인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백인 남성과 여성포함) 트럼프를 지지했다고 한다.[각주:2] 실망스럽지만 그닥 놀랍지도 않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물론 왜 대다수의 백인 복음주의자들이 공공연하게 인종차별적이고 여성혐오적인 발언과 행동을 보여온 트럼프를 선택했는지에 관한 분석은 계속 나오고 있지만, 미국 백인 복음주의자들의 이런한 정치적 선택이 놀랍지 않은 것은 지난 몇 십년동안 사회,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기독교계가 보여온 정치적 편향과 행태 때문일 것이다. 또한, 비록 이번에 투표를 한 소수인종들의 대다수가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했다는 보고가 있지만, 한국계와 중국계 미국인들 중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백인 복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도널드 트럼프에게 표를 던졌다는 이야기도 계속 나오고 있다. 이렇게 지속되는 복음주의자들의 선거 양식을 보면서 어떤 이들은 ‘복음주의’ 기독교가 보수적 정치의 동반자임을 더이상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고, 따라서 기독교내의 분열이 지속될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한다. 


    그저 형태만 민주주의의 모습을 띠고 있는 미국의 ‘부드러운 파시즘’과 독일 나찌의 파시즘을 비교하면서, 독일의 신학자 도로테 죌레 (Dorothee Soelle)는 미국의 파시즘을 지지하는 우파기독교를 ‘크리스토파시즘’ (Christofascism)이라고 비판한다.[각주:3] 죌레가 미국의 ‘크리스토파시즘’을 비판하는 상황은 1980년대 레이건 정권하의 미국이지만, 트럼프의 대통령 선거운동 과정과 결과에서 보여진 ‘크리스토파시즘’의 영향 및 더 이상은 ‘부드러운 파시스트’고 할 수 없는 새정권의 핵심이 될 인물들을 보면 죌레의 비판은 여전히 설득력이 있다.[각주:4] 죌레에 의하면, ‘크리스토파시즘’은 국가주의, 군사주의, 가족이데올로기, 노동자들에 대한 적대심등의 이데올로기들이 우파세력에 의해 기독교와 혼합되어진 수단화된 종교이다.[각주:5] 죌레는 기독교를 모르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기독교도 이런 ‘크리스토파시즘’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죌레는 ‘크리스토파시즘’의 특징은 구약성서, 즉 유대교성서에 담긴 기독교의 모든 뿌리들을 잘라낸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정의와 하느님이 도우시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고, 죄책감이나 고난에 대해서도 거의 말하지 않고 있다. ‘크리스토파시즘’에서 ‘희망’은 완전히 개별화되어지고, 개인의 성공으로 축소되어진다. 억압된 사람들과 연대했던 예수는 ‘크리스토파시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존재로 남는다. 그 대신, “예수님을 사랑합니다”와 “아메리카를 사랑합니다”라는 구호가 구별하기 어렵게 외쳐질 뿐이라고 한다.[각주:6]  


    한국에서도 이러한 ‘크리스토파시즘’의 현상을 어렵지 않게 볼수 있다. 백인이 아니면서도 ‘백인하나님’, ‘백인예수’를 ‘주’로 선포하면서 우파정치인들과 그들의 정책을 지지해온 한국의 보수 개신교회의 모습에서 죌레가 비판한 ‘크리스토파시즘’이 보인다. 트럼프를 지지한 미국의 ‘크리스토파시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한국의 ‘크리스토파시즘’의 겹쳐지는 모습들을 보면 더욱 분명해 지는데, 성차별과 여성혐오 조장, 사회적 약자 멸시, 호모포비아, 트랜스포비아, 이슬라모포비아, 기독교 우월주의, 미 군사주의 지지등이 그러하다. 국경을 넘나드는 ‘크리스토파시즘’의 세력은 앞으로도 당분간 지속될 듯하다. 그렇다면, 그런 ‘크리스토파시즘’에 대한 저항도 국경을 넘는 연대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진행되어져야 할 것이다. 뿌리가 잘린 기독교와 ‘금관의 예수’를 숭배하고, 가해자만을 옹호하면서 ‘값싼 은혜’를 선포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거부하고 내칠 수 있는 ‘거룩한 분노’가 그런 저항의 동력이 될수 있을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https://www.thecairoreview.com/essays/hillary-clintons-imperial-feminism/ [본문으로]
  2. 물론 이런 통계가 정확하지 않다고 지적하는 분석도 있다. https://www.thegospelcoalition.org/article/no-the-majority-of-american-evangelicals-did-not-vote-for-trump. [본문으로]
  3. Dorothee Soelle, The Window of Vulnerability: A Political Spirituality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0), 133-141. 이 글에서 “Christofacism”은 영어발음을 그대로 옮긴 ‘크리스토파시즘’으로 적고 있다. [본문으로]
  4. 단적인 예로, 트럼프정권의 부통령이 될 마이크 펜스는 미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기독교 우월주의자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https://theintercept.com/2016/11/15/mike-pence-will-be-the-most-powerful-christian-supremacist-in-us-history/. [본문으로]
  5. Ibid., 138-140. [본문으로]
  6. Ibid.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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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우파'와 대형교회, 일곱번째[각주:1]


2천년대, 보수대연합의 시대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1990년대’적 캐릭터교회의 몰락


    1990년대 한국개신교 신자들에게 가장 주목 받았던 두 교회인 사랑의교회와 온누리교회는 2천 년대 이후 신망도가 크게 실추했다. 캐릭터화를 선도했던 두 교회의 이미지정치의 효과는 급락했고, 대중에게는 또 다른 권력화와 비리, 그리고 부조리함의 표상으로 비추어지기 시작했다. 

    온누리교회는 1999년 저 유명한 ‘옷로비 사건’과 연루되었다는 언론 보도와 함께 이미지 추락이 시작되었다. 신동아 그룹의 재정이 이 교회로 지속적으로 유용되었다는 사실, 나아가 최순영 신동아 전 회장의 비밀장부와 교회 재산이 얽혀 있다는 풍문 등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미담이 넘쳐났던 교회에 관한 이야기들이 추문으로 재해석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2004년 이라크에서 피랍되어 살해당한 김선일씨 사건이 그 대표적 사례다. 오랜 동안 성장지상주의를 제1 원리로 삼아온 한국교회에 있어 교세의 정체가 뚜렷해진 1990년대는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를 겪게 되는 출발점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 즈음에 본격화된 해외선교라는 비전은 국내선교의 위기로 인한 위축감을 자긍심으로 보상받게 하려는 가장 적극적인 돌파구인 셈이었다. 한데 이 무렵 해외선교를 선도했던 교회가 바로 온누리교회다. 1996년부터 시작된 해외선교 프로젝트는 2천 년대 초 ‘Acts 29 비전’(28장으로 끝나는 〈사도행전〉(Acts)의 새 장을 해외선교로 구체화하겠다는 선교 아젠다)으로 체계화되는데, 김선일 씨는 바로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현지에서 섭외된 활동가였다. 그는 이라크의 미군 군납업체이면서 일종의 선교 브로커 역할을 하고 있던 가나무역의 팀장이었고, 온누리교회는 이 회사를 거점 삼아 이라크 선교를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온누리교회의 Acts 29는 포교를 위해서라면 전쟁마저도 기회로 활용하는 맹목적인 전도 중심주의, 그것에 다름 아니라는 비판을 받았다. 

   실제로 이슬람 지역에서 악명 높은 국제선교기구 인터콥의 주요 후원자가 바로 온누리교회였다. 몇 년 후 아프간에서 피랍된 분당샘물교회 단기선교팀의 현지 인솔을 맡은 이들도 바로 이 단체 소속 선교사들이었다. 결국 온누리교회의 적극적인 해외선교 프로젝트는 한국개신교의 위신을 국내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실추시키고 말았다.  

   사랑의교회는 설립자인 옥한음 목사를 이어 2003년 제2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오정현 아래에서 치명적인 이미지 추락을 경험한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장지상주의로 회귀하였다는 비판이 도처에서 제기된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 교회 교인인 권력 엘리트들이 교회의 불법과 탈법에 동원되고 있다는 사회적 평판이 폭넓게 회자되었다. 앞의 김선일 사태 때에 온누리교회와 관련된 외교관들이 교회와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사태를 먼저 대처하려 했던 탓에 국가가 빠른 대처를 할 수 없었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사랑의교회에 속한 권력 엘리트들도 공공적 직무보다는 사적 단체의 일원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명박 정부 때의 소망교회 인맥이 특권적 지위를 누렸던 것을 빗댄 ‘고소영’이라는 표현처럼 박근혜 정부 시절의 ‘사미자’라는 표현은 사랑의교회가 이 정권의 핵심인맥으로 깊이 관여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 최근 전무후무한 대형 법조비리의 중심인물인 홍만표 씨도 이 교회의 교인이라는 사실은 사랑의교회가 우리사회에서 어떤 방식으로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시사한다. 

   이렇게 2천 년대에 이 두 교회는 천민적 성장지상주의의 화신이라는 굴욕적 평판의 대상이 되었다. 지난 1990년대에 참신해보였던 그 캐릭터들로 기억하는 이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하여 이 교회들로 모여들었던 많은 주권교인들의 일부는 또 다른 교회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더 많은 이들은 신앙적 문제의식을 유보하고, 이미 거대하게 형성된 인맥과 그것이 일으키는 사회적 자본에 취해가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비단 이 두 교회만의 현상이 아니다. 과거에 성장지상주의적 신앙은 풍요를 신앙의 열매로 갈망하고 있었음에도 여전히 풍요는 낯선 것이었기에, 자본주의와 신앙 간에는 미묘한 긴장이 있었다. 그러나 2천 년대에 오면 종교, 특히 개신교는 자본주의에 깊게 매수되어 버렸고, 강남, 강동, 분당 지역에 집중된 대형교회의 신자들인 중상위계층에서 그 현상은 훨씬 더 두드러졌다. 


진보대연합 대 보수대연합으로 모든 것이 빨려들다


   ‘2천 년대’는, 거칠게 요약하면, 사회가 두 개의 범주로 이분화된 시대였다. 반면 그 이전 시대까지 한국을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개념은 ‘총화’였다. 

    총화가 권위주의 시대의 가치였다면, 2천년 어간 이후는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1998년 이후 두 번에 걸친 민주정권이 포스트권위주의 시대의 첫 번째 국면을 추동했다. 이때 민주주의는 ‘공화주의적 요소가 결여된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사회를 결속시키기보다는 시민 각자의 고조된 권리의식이 사회관계를 규정하는 주요 작동원리가 된 사회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런 점에서 이 시대 민주주의는 ‘탈권위주의적’ 혹은 ‘권위주의 해체적’ 성격이 강했다.



   한편 이 시대에 결속의 논리를 부여한 것은 공화주의적 가치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였다. 이 시기에 사회는 심하게 양극화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사회적 결속이란 평등과 기회균등을 통한 결속이 아니라 자본을 통한 권위주의적 결속이다. 이 새로운 권력의 원리는 누가 이윤을 창출하는 능력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느냐에 따른 것이다. 아무튼 2천년 어간 이후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라는 사회형성의 기조는 ‘자본에 의한 재권위주의적’ 성격이 강했다.  

    이러한 탈권위주의적 가치를 추구하는 이상과 재권위주의적 가치를 추구하는 이상, 이 두 개의 이상이 2천 년대 한국사회를 두 개의 범주로 양분시키는 주된 요소였다. 하여 이 시기 한국사회에서 진보는 탈권위주의 혹은 권위주의 해체적 지향성이 강했고, 보수는 자본친화적인 재권위주의적 성격이 강했다. 

    여기서 2천 년대 초 격화된 진보-보수의 갈등을 주목해 보자. 당시 진보의 가장 중요한 의제는 권위주의와 친미주의의 청산에 있었다. 진보 진영이 이러한 조합을 권위주의 청산의 요소라고 본 것은, 남한사회의 권위주의 세력이 줄곧 미국을 등에 업고 형성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한편 이러한 진보 진영의 권력 해체적 청산주의에 위협을 느낀 보수도 대대적으로 결속하였는데, 이때 보수의 중심 기조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친미주의였다. 2002년 이후 시청 앞 광장에서 대규모로 벌어진 진보의 반미 촛불집회와 2004년 이후 벌어진 보수의 친미집회는 그러한 첨예화된 진보-보수 갈등의 단면을 보여준다.  

    민주주의적 사회통합에 실패하고 신자유주의적 양극화를 심화시킨 두 번에 걸친 민주정부는 2008년 대선에서 재집권에 실패한다. 이로서 포스트권위주의적 대안가치로서 부상했던 민주주의라는 이상은 좌절하고 말았다. 그리고 새로 집권한 정부의 상징적 인물은, 민주화운동 투사가 아니라, 기업인이었다. 그것도 전형적인 한국적 자본주의의 표상인 토건주의적 전설을 등에 업은 존재였다. 

    그렇게 이명박 정권이 탄생했다. 그 이면에는 민주정부들이 초래한 양극화를, 기업가 정부가 해소시켜줄 것이라는 시민사회적 기대가 깔려 있었다. 하여 새 정권은 토건주의적 기업국가답게 전국토를 공사판으로 만듦으로써 경제적 성공을 이룩하려 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위기를 더욱 심화시켰고, 그것으로 인한 사회적 갈등을 ‘반미=종북’이라는 이념 프레임으로 환원시켜 물타기 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뜻밖에도 기업가 정부는, 경제지상주의적 합리성을 강화한 것이 아니라, 이념지상주의적 보수대연합을 낳았다. 그렇게 대두한 것이 바로 박근혜 정권이라는 극우주의 정부였다.  


기독교 보수대연합


    지난 글에서 우리는 1990년대 이후에 등장한 대형교회들은 대규모의 교회당을 지을 수 있는 여건과 능력이 갖추어진 강남, 강동, 분당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였다. 하여 대형교회는 중상위계층이 대대적으로 결집한 사회적 장소가 되었다. 여기서 이 연재의 두 번째 글에서 대형교회가 보수주의적 장소라고 주장한 것을 주목하자. 즉 대형교회는 강남, 강동, 분당 지역의 중상위계층을 보수주의적으로 결속시킨 장소라는 것이다. 


    그런데 2천년 어간 이후 사회가 진보 대 보수라는 이분화된 가치로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고, 진보와 보수가 각기 대연합을 구축하게 되었을 때, 대형교회의 보수주의는 보수의 깃발 아래 결속한 가장 적극적인 사회적 단위가 되었다. 지난 1990년대에 보수주의 내의 분화된 측면을 지녔던, 그러나 아직은 캐릭터로서만 ‘그 다름’이 표현될 뿐인 몇몇 새로운 대형교회적 신앙은 2천 년대의 이분법적 이념의 시대에 다시 보수대연합의 기치 아래 포획되었다. 

    특히 이명박 정부 탄생 무렵 교회는 전무후무한 바이블벨트를 구축하여 장로대통령 만들기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그것은 형식적으로 보면 일종의 기독교국가의 이상이었다. 하지만 내막은 민주정부들이 추구했던 권위주의 세력의 해체라는 청산주의에 대한 대항전선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었다. 가령 기독교계 사립학교의 편협한 종교교육이 민주주의와 인권의 잣대에 의해 청산의 대상으로 지목되는 것에 대해, 포교의 권리를 보장받음으로써 종국에는 기독교국가를 이룩하겠다는 주장으로 교회를 결속시켰다. 이러한 한국판 바이블벨트 형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이른바 ‘성시화 캠페인’이다. 1972년 김준곤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총재가 춘천시를 하느님의 거점도시로 봉헌하는 캠페인을 벌였던 것을 2005년에 그가 다시 리바이벌해서, 한국 전역에서, 나아가 한인교회가 만들어진 전 세계 각 지역에서 그곳을 하느님의 나라로 만들기 위한 복음운동의 장소로 봉헌하자는 캠페인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이것은 각 지역의 기독교 신자인 권력 엘리트들이 그 운동에 앞장서도록 압박을 가했다. 이것은 기독교국가 건설이라는 이상으로 이명박 장로를 지지하는 선거연합을 구축하는 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2013년 박근혜 정부가 집권하게 될 때는, 훨씬 미약했지만,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등을 축으로 하는 극우주의 기독교 동맹이 구축되었다. 

    이렇게 2천 년대 이념대립의 정세 속에서 한국개신교는 보수대연합의 기치 아래 결속되었고 다른 목소리는 가려졌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적 전선에서만 그랬다. 문화적, 경제적, 사회적인 차원에서 대형교회 내부에서는 새로운 보수주의적 실험이 진행되고 있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주간경향>에서 연재하고 있는 '김진호의 웰빙-우파와 대형교회'의 다섯번째 글입니다.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606271603271&code=11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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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이상철
(본지 편집인 / 한백교회 담임목사)

 


   제가 최초로 전태일이라는 이름 석자를 들었던 날은 아주 까마득합니다. 그날이 언제였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그 이름을 제게 일러준 사람은 저의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목사로 안수받기 전에 꽤나 많은 직업을 전전했습니다. 신문사편집국장, 고등학교 영어선생님, YMCA 총무, 고등학교 윤리선생님, 대학강사, 번역가...등. 사회가 분화되기 이전 전근대 상황에 놓여있었던 한국사회에서는 이러한 일이 가능했겠지만 지금처럼 사회가 분화된 상황속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씩 발행되는 라는 잡지가 있습니다. 전태일이 불에 타 죽던 1970년 11월, 아버지는 기획조사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전태일 사건이 터졌고, 그 사건에 대한 기획기사를 편집회의를 거쳐 그 호의 헤드라인으로 잡고 분명 인쇄소로 넘겼는데, 다음 날 나온 신문에는 그 기사가 빠져있었다 합니다. 그래서 당장 편집국장에게 올라가서 따지면서 항의하고 옥신각신 하다가 결국, 그 날 사표를 던지고 나왔다고 합니다. 사표를 장렬하게 던지고 나오는데 편집국장이 아버지 뒤통수에다 대고 했던 말을 아버지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하십니다. “야, 네가 그런 식으로 얼마나 대한민국에서 버틸 수 있을지 지켜보겠다!”며 비아냥거리고 조롱하던 것이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나오는데 등골이 오싹하게 무서웠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고 하십니다. 이 일은 제가 생후 16개월 때 발생했던 일입니다. 아버지의 당시 나이는 지금의 제 나이보다도 열일곱살이나 적은 서른 한 살 때 였습니다.   

   전태일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 47년이 지났습니다. 한국에는 지난 47년 동안 엄청난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 변화에 대한 필모그라피를 일일이 여기서 나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불변하는 진실이 있네요. 여전히 한국은 47년 전 전근대적이었던 시절이나, 2016년 최첨단을 달리는 현재나 같은 패밀리의 지배하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1970년 전태일의 죽음의 배후에는 박정희가 있었고, 2016년 백남기의 죽음 뒤, 그 전에 있었던 세월호의 죽음 배후에는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우뚝 서 있다는 사실입니다. 언제면 이 지긋지긋한 주술이 풀릴까요? 

    예전에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저는 청년이라는 말보다, 전태일이라는 말보다 ‘아름답다’ 라는 말에 눈길이 꼿혔습니다. 이성적인 청년 전태일, 의지적인 청년 전태일, 용감한 청년 전태일이 아니라, 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랄요? ‘진,선,미’를 통해 세상을 해석하는 서양전통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정은 제일 하위개념입니다. 그것은 감성, 욕망과 쌍을 이루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감성과 욕망은 이성과 의지에 의해서 억압되어야 합니다. 고양된 이성과 투철한 의지를 지닌 인간! 그들이 이룩한 진보의 역사, 발전의 역사가 다다른 종착역이 바로 이곳, 21세기 디스토피아적인 세상입니다.  

   그래서 일까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라는 영화제목에서 저는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라는 종말론적 메시지를 발견합니다. 전통적인 미학이론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정은 어떤 대상을 향한, 혹은 그 대상으로부터 전달되는 숭고함에서 비롯됩니다. 숭고란 이성과 의지, 논리와 윤리로 잡히지 않는 영역입니다. 그 잡히지 않는 영역을 향한 비월과 낙하를 칸트는 자유라고 말했다지요. 그렇다고 볼 때, 어떤 시스템을 넘어가는 자유로운 행위를 감행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성도 아니고, 논리도 아니고, 의지도 아니고, 용기도 아닙니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영민한 감수성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세상의 법칙과 세상의 질서와 다른 진공의 영역이 있다면 그곳은 분명 미적인 감수성이 지배하는 공간이라 생각합니다. 그 아름다움을 동경하는 마음이 현실의 질서에 틈을 내고 균열을 일으키는 것! 그것이 혁명 아닐런지요. 이런 이유로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라는 말은 적어도 제게는 유효한 언사이고, 이런 이유로 저는 혁명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아름다워야 한다고 봅니다.  

    지난 주간에 아버지가 제주도에서 올라와서 하루 묵고 내려가셨습니다. 병원 검진 때문에 올라오신 것입니다. 늘 그렇듯이 아버지는 공항에 도착하면 종로 3가 극장가를 먼저 찾습니다. 피카데리, 단성사, 서울극장이 몰려있는 그곳말입니다. 그곳에서 영화 한편을 꼭 봅니다. 주기적으로 종로3가에서 영화를 보기 위해 병원예약을 하는 건지, 아니면 병원 올라온 김에 시내구경을 하는 건지 약간 헷갈릴때가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저녁 무렵에 저와 종로통에서 만나 순대국을 먹고 종로길을 걷다가 교보문고에 가서 책을 몇 권사고, 광화문 세월호 광장으로 올라와 참배도 하고 각 부스를 돌아보면서 거기서 자원봉사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누십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광화문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저는 너무나 뻔하고 익숙한 광화문인지라 한쪽에 앉아 카톡질을 하고 있었답니다. 아버지의 광화문 기행을 마치고 우리는 박근혜 퇴진을 외치는 무리들 틈을 천천히 거슬러 걷다가 지하철 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로서는 오래간만에 맛보는 미세먼지가 가득했던 서울의 싸늘한 밤공기였을텐데... 어떤 심정이었을지 궁금해졌지만 묻지는 않았습니다.... 분명 ‘아름다운 밤’이었을 것입니다. 전태일이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었듯 말입니다.  

    _ 한백교회 전태일기념주일 중 <삶의고백> 에서...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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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다

 

 

 

근대의 문턱에서 스피노자는 중세의 미몽과 대결한다. 중세의 신은 인간의 무지와 나약함의 대체물이다. 신은 전지전능하고 인간의 길흉화복을 주관한다. 인간은 필멸의 두려움으로 신을 찾는다. 종교는 기복과 불멸의 희망을 선포하는 장치이다. 신이 절대 인격자가 되고, 종교가 구원의 방주가 될수록 인간은 비참해진다. 인간은 스스로 원인(自由)이 되지 못하고 예속된 삶을 살 뿐이다. 스피노자는 인격신을 거세하여 신에게 자연이라는 제 이름을 돌려주었다.

 

 

탈근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중세의 미망에서 해방되었는가. 어떤 사람은 신을 내동댕이쳤고, 누구는 더욱 집착한다. 또 다른 이들은 새로운 신을 발명한다. 세속화된 종교적 의례는 일상이 되었고, 위안의 담론은 넘쳐난다. 하지만 우리들은 여전히 자유롭지 않다. 오히려 인간의 비참은 심화되고 있다. 그래서 렌즈를 통해서 묻고 싶었다. 부유하는 인간들이여, 그대들은 무엇을 꿈꾸고, 기다리고, 노동하며 살아가는가. 그대들의 신은 어디 있는가? 
 

 


 

 

 


 

 

 

도홍찬 作 (본 연구소 회원, 한백교회 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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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0지수

 

    도시를 이해하는 방식으로써 “5000지수”를 고안해 보았다. 지역 내에서 5000만원으로 구할 수 있는 전셋집을 조사하고 서로 비교하는 방식이다. 5000만원이라는 정량적이고 현실적인 기준을 세움으로써 도시의 본질적인 현상에 접근하고자 했다.

    2016년 7월 군산시에서 5000만원으로 구할 수 있는 전셋집을 조사하였다. 사정에 따라 다르겠지만, 5000만 원이면 신혼부부로써 스스로 마련할 수 있는 자금 수준이라고 가정했다.

   결과적으로, 군산 시내인 나운동은 4500만원에 방1개짜리 15층 아파트를 구할 수 있는데, 변두리 옥서면은 2500만원에 방3개짜리 단독주택 2층을 구할 수 있었다. 이 때 방 1개의 가격은 나운동이 4500만원, 옥서면은 833만원인 셈이다. 비율로 따지면 5.4배다. 시내와 변두리의 수준차이가 약 5배 정도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물론 전세 값을 결정하는 요인은 다양하기 때문에 가격대비 방의 개수를 비교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사 과정에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도시의 정보를 파악 할 수 있었다. 

 

 

 

 

 

 


 


백정기 作 (미디어작가)


- 작가소개

홍대 회화과를 중퇴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을 졸업했다. 2008년 개인전 를 시작으로 5회의 개인전을 했고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2012년 홍은예술창작센터, 2013년 경기창작센터 입주작가로 레지던시 활동을 한바 있다. 음악적 청각화를 주제로 “Walking alone on a clear night: Musical sonification based on cityscape”외 1편을 등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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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그들, 제로섬 게임을 벌이다[각주:1]


 

권오윤[각주:2]



       현실 사회에서 범죄는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해 금기시 하는 행위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범죄자의 편이 되어 그를 응원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범죄자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들이 범행을 모의하고 실행하는 과정을 다루는 케이퍼 영화가 대표적인 경우죠. 값진 물건을 절도하거나 현금성 자산을 강탈하는 범죄를 모의하고 실행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관객은 마치 자기가 그 일원이라도 된 것처럼 스릴을 느낍니다.

       일반적인 범죄 스릴러 영화, 즉 범죄를 저지르는 인물과 그에 맞서는 인물이 엇비슷한 분량으로 등장하면서 쫓고 쫓기는 대결을 펼치는 경우에도 범죄자에게 어느 정도 감정 이입할 수 있습니다. 범죄에 특별한 사연이 있거나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다면요. 사람을 마구 죽이는 사이코패스 살인마와 동일시 할 관객은 거의 없을 테지만, 강간범을 살해하고 도망치는 여성의 심정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을 것입니다.

       범죄자에 대한 호감은, 관객의 마음 속에서 범죄 행위에 대한 본능적인 반감과 갈등을 일으키며 영화에 대한 흥미와 집중도를 높여 줍니다. 이 영화 <로스트 인 더스트>는 그런 식의 양가 감정을 잘 활용하여 영화의 재미를 확보한 아주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과가 화려한 형 태너(벤 포스터)와 차분한 성격의 동생 토비(크리스 파인)는 서부 텍사스의 미들랜드 은행 지점에 연쇄적으로 침입해 현금을 강탈합니다. 이 은행에 저당 잡힌 가족의 농장에서 석유가 발견되었는데, 대출 만기일이 다가와 소유권을 완전히 박탈당할 처지에 놓였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맡은 베테랑 수사관 해밀턴(제프 브리지스)은 이들의 범죄 수법을 간파하고 곧바로 추적에 나섭니다.

       황량한 텍사스를 무대로 서로 쫓고 쫓기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같은 영화가 연상되기도 하지만, 이 영화는 그만큼 냉혹한 하드보일드도 아니고 이야기 구성도 복잡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은행 강도에 나서게 된 형제의 감정과 상황을 자세히 보여 줌으로써 관객의 공감을 얻는 데 주력합니다.


       벤 포스터와 크리스 파인의 앙상블이 빛을 발하는 지점도 그런 부분들입니다. 두 배우는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말썽꾸러기 형과 이성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냉정한 성격의 동생이라는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진짜 형제 간에 있을 법한 감정의 교류를 사실적으로 구현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 때문에 관객은 이 어설픈 무법자 형제들이 어떻게든 성공했으면 하는 생각을 점점 더 많이 하게 됩니다.

       은퇴를 앞둔 수사관 역할을 맡은 제프 브리지스는 보수적인 텍사스 남자들 특유의, 거들먹거리는 늙은 수탉 같은 느낌을 잘 표현하면서 현실감을 높여 줍니다. 베테랑 특유의 직감과 혜안을 바탕으로 움직이는 그의 존재감은 주인공 형제들이 정말 잡힐 수도 있겠다는 느낌을 주면서 극에 스릴을 더하지요.

      <영 아담>(2003), <할람 포>(2007) 등으로 국제 영화제에서 주목을 받았던 영국 감독 데이빗 맥켄지는 우리나라에서는 작년에 개봉됐던 <스타드 업>(2013)으로 상업적인 아이템에도 자신의 연출력이 통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 바 있습니다. 이번 영화에서는 쫓는 자와 쫓기는 자 사이의 잡힐 듯 말 듯 이어지는 서스펜스를 점진적으로 끌어 올려 결말까지 쭉 밀고 나가는 뚝심을 보여 줬습니다.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2015)의 각본으로 이름을 알린 시나리오 작가 테일러 쉐리던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범죄 행위와 수사하는 과정의 디테일을 꼼꼼하게 재현합니다. 삼촌과 사촌 형제들이 모두 텍사스 주의 법 집행관인 ‘텍사스 레인저’였기 때문에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그를 통해 시나리오의 디테일을 채워 넣었다고 합니다. 초반부는 다소 심심하지만, 형제의 진짜 동기가 제시된 이후의 전개는 흥미진진합니다. 특히 곳곳에 자리잡은 세련되고 맛깔스런 대사들이 돋보이지요.

       이 세상에 가난하고 궁핍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가난한 삶에 만족하고 욕심부리지 않는 태도를 좋게 여기는 ’안빈낙도’라는 말도 있지만, 이 사자성어의 대표격으로 칭송받는 공자의 제자 안회는 평생을 궁핍하게 살다가 불과 서른 한 살에 요절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본적인 의식주 해결도 안 되어 늘 쪼들리는 사람에게 ‘도’를 논하자고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 영화 속의 형제는 다음 세대에게 가난을 물려 주지 않기 위해서 은행 강도를 저지릅니다. ‘빈곤은 모두를 피폐하게 하는데, 그걸 내 자식들이 겪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는 주인공 토비의 말은 너무나 가슴에 와닿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의 돈과 기회를 불법적인 방법으로 강탈한 그들의 행동은 일종의 ‘제로섬 게임’에 불과합니다. 자신들의 빈곤과 불행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일을 한 것 뿐이니까요.

       개개인이 자력 구제 하는 것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그냥 저절로 벌어진 일이 아닙니다. 각자 알아서 잘 먹고 잘 사는 게 중요하고, 돈과 권력이 있으면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생각을 용인해 온 이 사회가 만들어 낸 일입니다. 개인의 탐욕을 위해 멋대로 사회의 룰을 바꾸려 한 사람들과, 자기의 알량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거기에 빌붙고 떡고물을 얻어 먹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썩은 고름이지요.

       이제는 더 늦기 전에 소수에게 집중된 부와 권력을 적절하게 제어하여 다수가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사회 안전망을 구축하는 데 힘써야 합니다. ‘혜실 게이트’(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제대로 단죄하는 일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보여 주는 확고한 이정표를 세울 수 있으니까요. 그러지 못하면 소수의 선택받은 자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가난에 허덕일 수 밖에 없는, 각자도생의 지옥은 계속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황량한 벌판에 석유 시추기만 조용히 움직이고 있는 텍사스의 풍경이 바로 그런 세상의 미래일 것입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오마이뉴스의 11월 9일자 기사 <빈곤을 물려 주고 싶지 않았던 그들, 제로섬 게임을 벌이다>(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258964 [본문으로]
  2. <발레교습소> <삼거리극장> <화차> 등의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일했으며, 현재 연출 데뷔작을 준비 중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물 [권오윤의 더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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