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가 허락되지 않은 삶들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진실이 갖는 허무함


    그렇다. 실로 진심으로 우려하던 바가 실제로 밝혀졌다. ‘그’는 머리를 하고 있었다 한다. 7시간 중 90분의 행동이 나왔고 나머지 시간을 캐는 건 의미 없다. 이미 90분 머리한 게 이미 7시간을 대표하고 있다. 나머지 5시간 반은 더 이상 들어볼 것도 없다. 그냥 ‘그’는 머리를 하기 전에 전날 고질적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수면제를 먹었거나 평소 즐겨하던 약물을 맞고 그 기운에 취해서 자고 있었을테다. 그리고 일어나서 머리하고 옷 입고 중대본으로 나갔다. 돌아와서는 평소와 조금 달랐던 일과를 보낸 기념으로 ‘보약’인 밥을 한그릇 뚝딱 해치웠을 것이다. 7시간 동안 취해 있었던 주사가 마늘 주사든 태반 주사든 프로포폴이든 수면제든 마약이든 그건 그리 중요한 게 아닌듯 싶다.

   상황을 정리해보면, 머리하기 전에는 잤고, 머리하고 난 뒤에는 옷 챙기고 메이크업했다. 상의는 정해졌으니 바지 고르고 화장하고 나간 것이다. 부스스하게 머리를 만진 것도 크게 의미 둘 필요 없다. 옆에서 참모들이 너무 평소대로 화려한 “육여사 올림머리” 하고 가면 좀 그래 보이니까 적당한 연출을 하자는 것 뿐이었다. (평소 참모들이 하는 말이 고작 이런 수준의 말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랬다. 그는 청와대의 해명 그대로였다. 한 일이라고는 오로지 보고를 받은 것이었다. 정말 말 그대로 보고를 "받.고.만 "있었다. 보고를 받는 순간의 그의 대사를 예상해보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예, 그런가요. 아이들이 빠졌군요. 하던 대로 조치하세요.” 


<그렇다, 그는 졸려 보인다>


   멍했다. 자다 일어나서 “아이들이 구명 조끼를 입었다는데, 발견하기가 그렇게 힘듭니까?” 라고 말한 걸 번역하자면 ‘나는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나는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의 변형이다. 즉, 사고 전부터 아무 생각이 없었고, 보고 후에도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다.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에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조치를 해야할 순간에 조치를 하지 않았다.


'얌전한' 광기


    사람들은 생각한다. 매우 거대한 음모가 있을 것이라고. 정윤회 문건 수사를 막아야 했고, 부정선거 의혹을 잠재워야 했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가 보여온 행태를 보면 매우 치밀하게 음모를 꾸밀 만한 사람이라고. 중대본에 나타나지 않는 와중에는 손가락 물어 뜯으면서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는 한 ‘광인’의 모습을 상상했을 것이다. 물론, 그 가능성도 배제하지는 않는다. 통영함과 미군 함대의 출동을 막았다는 것은 그런 면에서 수상하기는 하다. 하지만, ‘광기’라는 것이 매우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은 익히 알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의 그러한 ‘얌전한’ 광기와 더불어 참모들도 그의 광기와 그닥 다르지 않았음은 불보듯 뻔하다. 그들로 말할 것 같으면 가장 윗선에서 아무 지시가 없는데 구조한답시고 움직였다가 뭔 불호령을 들을지 모르는 인간들이다. 즉 가만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 말을 금과옥조로 받드는 우리 내각과 관료들이 출동을 막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김기춘이 바로 ‘그’ 옆에서 이 모든 정황들을 만들어내는 구심점이다. 박정희, 전두환 등 독재시대의 모진(?) 풍파를 겪으며 단련된 이가 김기춘이다.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부터 생각하고 일을 진행하는 이가 김기춘이다. 자기 죽은 아들을 팔고서도 결코 진실을 입밖에 내지 않는 괴수가 김기춘이다. 그런 이가 ‘그’ 우편에서 호위하고 있는데, 거기다 대고 참모로서 자기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건 불가능하다.  


    실로 그렇게 아무 일은 없었다. 그들은 보고했고, 그는 보고를 받았다. 점심도 먹었고, 저녁도 먹었다. 머리도 했고, 자기 리듬에 따라 출근한다. 급박한 상황은 바닷 속에 갇혀 있는 사람과 갇혀 있는 사람의 가족들 몇몇에게만 급박했지 아무 일도 없는 것이었다. 오직 ‘그’의 심기의 문제 때문에 말이다.

    우리는 또 하나의 장면을 연상해보면 좋겠다. 삼성의 이재용을 비롯한 9명의 재벌 총수들이 12월 6일에 ‘최순실 국정조사 청문회’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는 그 장면 말이다. ‘모르겠다,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송구스럽다, 죄송하다, 더 잘하겠다’를 마치 ‘자동응답기’마냥 되풀이하는 이들을 보고 한편으로 우리는 생각한다. 저렇게 오랜 시간 동안 질책 아닌 질책을 받는데 괴롭지는 않을까, 자기에게 추궁을 저리도 하는데 심란한 마음을 갖지는 않을까 하고 말이다. 아니,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럴 일은 없다. 그들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 그는 그 와중에 건조한 입술에 립밤을 바른다>


    우리가 글의 앞에서 ‘그’라고 부르는 정체 모를 생물의 눈빛은 매우 일관되다. 삼성의 전(또는 현) 주인 이건희를 비롯하여 그 일가와 ‘그’의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닮아 있다. 최순실을 비롯하여 그 일가도 마찬가지다. 대단히 기계적이고 상황에 대한 대처능력이 닮아 있다. 깜빡임도 별로 없고, 사람의 희로애락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어딘지 모르게 멍하다. 생각을 하고 있는건지 아닌지 알 수 없고, 누가 질문을 하면 그 질문에 대한 반응을 하기보다는 일단 ‘죄송하다’고만 선수를 친다. 묘하게도 이 생물들에게는 어딘지 모르게 순진해 보이는 구석이 있다. 증인 장시호에게 안민석 의원이 ‘나 밉죠?’라고 물어보았을 때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네’라고 대답하는 것은 김기춘의 ‘신중한’ “모릅니다.”, “부덕의 소치입니다”와는 대비된다. 그렇다 해서 그들이 어린아이의 순수함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모질게 단련이 되어 있다. 그들은 목숨을 건지는 요령에 도가 텄다. ‘대의’라는 큰 그림에는 절대적으로 소인배처럼 행동하며, 후일을 기약하는 간신 눈빛을 하다가도 바로 그 즉자적인 상황을 모면하는 것에는 도가 트였다. 고(故) 황유미씨의 500만원 이야기에는 꿈쩍 않다가도 자기 상속세 이야기에서는 동공이 지진 나는 게 그런 생물들의 특징이다. 후일에 벌어질 뒷처리를 해주는 사람과 '아버지'를 비롯한 후견인이 있으니 자기는 그 상황만을 넘기면 되는 것이다. ‘아무 사람에게나 한껏 짜증을 내고도 뒤에 있는 엄마를 믿고 사과를 하지 않는다, 오로지 아버지의 눈만 속이고 형제들 몇몇만 제거하면 8조의 재산이 내 통장에 들어와 있다’ 이와 같은 종류의 사고가 그들로 하여금 세상을 쉽고 간편한 ‘e-편한세상’으로 인식하게 한다.


실패를 허락받지 못한 자들의 거대한 실패


    그들은 결코 자신들이 하는 일이 뭔지 모른다.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고, 즉흥적으로 반응하는 동물적인 감각만이 있을 뿐이다. 먹이를 포착하는 맹수와 같은 살기가 있지만, 그 외의 상황 자체에 대처하는 능력이란 눈곱만큼도 없다. 그저 생존과 관련하여 특화된 몇몇 상황에만 기가 막힌 대처능력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멍한 채로 구명조끼를 이야기할 수 있고, 바닷 속에서 아이들이 죽어갈 때 주사를 맞을 수 있고 엄중한 상황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립밤을 바를 수 있다. 

    그들은 한 번도 실패를 허락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의 ‘아버지’는 실제로 거대함 그 자체였을 것이다. 정신분석학과 심리학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누구에게나 아버지는 큰 존재이다. 그래서 심리학에서는 아버지라는 이름을 ‘대타자’라고 명명하지 않던가. 그런데 이들의 아버지는 실로 막강한 권력과 막강한 대통령과 재벌 총수다. 박근혜의 아버지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대통령이었다. 그는 북한체제와 경쟁하여 승리한 남한 사회의 영웅이었고, 말 한 마디면 누구 하나 죽어 나가는 것은 예삿일이었던 것이 아버지 박정희다. 부하의 배신에 스러졌지만, 전쟁의 잿더미에서 국가를 일으킨 불멸의 영웅 아니던가. 이재용의 아버지 이건희는 20세기 말과 21세기 들어 휘몰아친 경제의 흥망성쇠간에 꿋꿋이 살아남은 삼성 재벌가의 알파요, 오메가이며 소위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는' 선의 화신이 아닌가 말이다.   

    자기들 또한 경쟁자들을 뚫고 아버지의 권력과 부의 옷을 입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았던 사람들 아니겠는가. 한 번의 실패는 곧 낭떠러지이며, 죽음이다. 실패를 통한 배움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실패는 죽음과 동의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아니라, 실패는 실패 그 자체다.  수많은 정적들을 제쳐야만 한다. '박근혜 5촌 살인사건'의 전말을 보고 우리는 영화가 현실인지 현실이 영화인지 그 경계마저 혼란스러운 상황에 이르렀다. 보통의 멘탈로는 해낼 수 없는(?) 일들을 해내야 하는 이들이 그들이다. 이재용 또한 지금의 그 자리에 이르기까지 형제자매를 제쳐야 했고, 수많은 외척들과 싸워야만 했다. 빈 틈은 죽음이다. 자기들 나름대로 눈물 흘릴만한 '시련'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결국 그렇게 실패를 허락받지 못했던 그들의 가슴에 종국적으로 붙여진 이름표는 ‘살인마’다. 박근혜 살인마는 304명을 죽이고, 5천만 대한민국 시민들의 얼굴에 침을 뱉었고 인류의 존엄을 모욕했다. 이재용 살인마는 고(故) 황유미씨를 죽이고, 수많은 노동자들의 가정을 짓밟았으며,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돈 귀신을 심었다.


우리 아이들을 실패하게 하라      

 

    우리는 촛불을 오랫동안 들었고, 국회에서 탄핵안은 가결되었다. 앞으로도 먼 길이 남아 있다. 누가 누가 더 나쁜가, 누가 누가 더 실패했는가를 따질 것은 따지되 이제 우리 아이들에게도 작은 실패를 가르쳐줄 때다. 넘어지기를 가르치고, 무너지는 것도 가르쳐야 한다. 스스로 넘어지되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 환경, 그렇지만 그것을 아이들이 너무 적나라하게 눈치채지 못하게 세밀한 셋팅이 필요한 시점이다.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너무도 자주 일어나고 있지 않는가!

<넘어져도 괜찮다, 잃을 것은 강냉이 몇 개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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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우파'와 대형교회, 아홉번째[각주:1]


자기계발의 시대 신자유주의적 귀족교육

성공과 신앙, '착한 동거'의 논리를 찾아서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자기계발서 열풍


    1997년 외환위기 직후 사람들은 당황했다.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이것이 그 시간을 살았던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물음이었다. 대답은 하나다. 적어도 그 시대에는 여러 가치관에 따른 다양한 답을 이야기할 여유가 없었다. 단지 하나만이 절박하게 요청되었다. 돈, 돈을 벌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무렵 출판계에는 주목할 만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그러한 추세는 이후 거의 10년 동안 서점가를 휩쓸었다. 이른바 ‘자기계발서’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 이전까지 가장 높은 판매부수는 단연 소설 분야의 것이었고, 몇몇 소설가들은 밀리언셀러 작가로 등극했다. 그런데 2천 년대에는 자기계발서들이 그 자리를 대체하였다. 놀랍게도 2천 년대 베스트셀러 20권 중 무려 10권이 자기계발서들이다. 

   기독교 출판계도 예외가 아니다. 1999년 번역되어 출간된 《최고 경영자 예수》가 그 신호탄이었다. 이 책은 2년 만에 무려 27쇄, 20만 부 이상 팔렸다. 이후 수많은 기독교 자기계발서들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2006년 번역 출간된, 미국 최대의 메가처치 레이크우드교회의 담임목사인 조엘 오스틴의 책 《긍정의 힘》은 기독교출판물 중 최대의 밀리언셀러가 되었다. 또 미국에서 가장 특징적인 메가처치인 새들백교회 담임목사인 릭 워렌의 책 《목적이 이끄는 삶》 시리즈도 밀리언셀러의 반열에 올랐다. 한국인 저자 김동환의 책 《다니엘 학습법》의 판매고도 수십만 권에 달했다.  


   이 책들은 거의 모두 ‘성공’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돈을 벌 수 있게 하는 다양한 방법들에 관한 것이다. 이 시기 자기계발서들에 대한 주목할 만한 비평서인 《거대한 사기극》에서 저자 이원석은 이 공통점에 대하여 “바깥의 사회구조를 배제하고, 순수하게 자기 자신을 주목하도록" 만드는 신화들이라고 좀더 분석적으로 이야기한다. 즉 자기계발서들이 주장하는 성공 비법들은 개개인의 자기계발에 딸려 있다는 것이다. 하여 자기계발에 매진하는 개개인은 능동적으로 자기를 쇄신해야 한다. 그런 쇄신은 무한히 가능하고, 그 쇄신에 따라 성공이 실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이가 남자건 여자건, 부자건 빈자건, 내국인이건 외국인이건, 사회적 범주가 어떠하건 상관없다. 쇄신은 사회적 규정에 좌우되는 게 아니라 그이 자신의 노력에 좌우된다. 즉 자기계발은 철저히 개개인의 문제다.  

   한데 흥미로운 것은, 자기계발은 개인적으로 수행되지만, 그 내용은 사회가 이미 규정한 것이라는 점에 있다. 즉 자기계발은 사회가 정한 원리에 따라 개개인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규율하는 수행과정을 의미한다. 이때 사회가 정한 원리란 크게 보면 신자유주의적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자기계발은 신자유주의적 삶의 수행법이며, 신자유주의적 인간의 자기 관리법이다.   

   지난 글에서 우리는 교회들의 배금주의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것은 이 시기 자기계발서들 속의 신자유주의적 원리가 여과되지 않고 적나라하게 표출된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날것 상태의 신자유주의적 양상으로서의 배금주의는 동시대 기독교 출판물들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니엘학습 신드롬 - 삶 전체가 투여된 자기계발적 수행


    “서울대 출신 최강의 국・영・수 선생님들이 ( )에서 뭉쳤다.” 여기서 괄호 안에 들어갈 문구는 무엇일까? 참고로 이 전단지에 들어간 다른 문구들은 이렇다. 


 

   “강북 강남 통틀어 이렇게 막강한 선생님들이 한꺼번에 모인 학원은 찾기 어렵습니다.” “수준별, 실력별, 맞춤식 학습을 통해 확실한 실력향상을 목표로 학습이 이루어집니다.”  


    정답은 “장안평 다니엘비전학원”이다. 모두가 예상한 대로 학원광고다. 그런데 핫한 학원가로 유명한 대치동도 아니고 분당 정자동도 아니다. 게다가 사람들이 잘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다. ‘다니엘’이니 ‘비전’이니 하는 표현으로 봐서는 기독교 냄새가 풀풀 난다.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이 섞여 있다. 

   이 학원은, 장안평이라는 지명에서 드러나듯이, 고소득층 자녀를 대상으로 하는 학원이 아니라 서민층을 대상으로 한다. 그리고 기숙학원이다. 흥미로운 것은 새벽 5시 10분에 예배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 세 번의 기도와 예배를 통해 철저한 신앙훈련을 하는 곳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신학대학 입시학원이 아니라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입학을 목적으로 하는 입시학원이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것은 무료학원이라는 점에 있다.  

    원장은 《다니엘학습법》의 저자 김동환이다. 서울대 종교학과 출신이고 전교수석 졸업자로 알려졌다. 그가 이 학원에서 문제아인 청소년들을 SKY대학들에 입학시켰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것은 그가 창안했다는 공부법인 ‘다니엘학습법’에 대한 폭발적인 반응을 야기시켰다. 입학 문의가 속출했다. 이에 중상위층 학생 대상의 유료학원을 만들려 했다가 재정투명성 문제로 실패했다.  

    그렇지만 책은 전국 도처에서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그는 전국의 무수한 대형교회들을 돌면서 강연을 했다. 또 다니엘학습법을 주제로 하는 무수한 수련회를 이끌었다. 즉 장안평의 기숙학원은 소문의 진원지뿐이다. 다니엘학습법 신드롬은 전국적 현상이었고, 특히 대학입학을 꿈꾸어도 좋을 중상위계층에서 더 열기를 띠었다.  

    이는, 자기계발서 현상이 단지 독서 행위에 그치는 게 아니라 삶 전체가 투입된 실천적 수행으로 나타나는 하나의 사례에 속한다는 것을 뜻한다. 다니엘비전학원 전단지에 의하면 “21세기 다니엘 같은 하나님의 준비된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다니엘학습법’의 목표다. 즉 ‘21세기 크리스천 인재 양성’, 그것이 바로 ‘다니엘학습법’으로 표상되는 신자유주의적 기독교 입시교육 신드롬의 지향점인 것이다. 

    김동환은 기숙학원을 통해서 다른 교육, 즉 공교육의 교육과정 전체를 대체하고자 했다. 국・영・수 세 과목의 ‘입시교육’과 예배와 기도라는 ‘종교교육’으로 구성되는, 입시 맞춤형으로 축소된 교육과정으로 크리스천 인재를 양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대형교회적 대안학교운동 - 귀족교육으로서의 자기계발적 수행법


    《다니엘학습법》이 대놓고 신자유주의적 성공주의를 드러내고 있다면, 이러한 날것 상태의 자기계발주의와는 달리, 많이 ‘조리된’, 하여 그 욕구를 보다 승화된 양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교육운동이 대형교회 대안학교운동이다.


    1990년대 말 이전까지 개신교계 대안학교들은 크게 세 가지 양상으로 나타났다. 첫째는 장애인학교 같은 특수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대안학교이고, 둘째는 일종의 진보적 가치의 대안교육운동으로, 입시중심 교육에 반대하는 생태주의나 사회공동체주의적 대안학교다. 그리고 셋째는 근본주의적 신앙에 기반을 홈스쿨링운동이다. 이 세 가지 대안학교들은 모두 주류사회의 질서에서,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벗어난 교육운동의 성격을 띤다. 그런데 2천 년대 이후 개신교계에는 특히 대형교회가 주도하는 새로운 대안교육운동들이 활기를 띤다.

    이 시기에 대형교회들이 대안교육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은 이렇다. 2천 년대에 들어서면서 종교계, 특히 개신교계 사립학교의 종교교육에 대한 사회적 저항이 거세졌다. 나아가 종교계 사학법인들의 비민주적 재단운영에 대한 사회적 검열의 요구도 빗발쳤다. 여기에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교회학교도 문제였다. 이때 대형교회의 대안교육에 대한 관심은 두 가지 문제제기가 결합된 양상으로 나타났다. 하나는 민주주의적 사회론의 기조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였고, 다른 하나는 교회의 사학운영의 전근대성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이 두 문제제기가 수렴되는 지점에 ‘21세기 글로벌 시대 크리스천 인재 양성’이라는 목표가 있다. 즉 민주주의적 사회론의 평등주의나 사학운영의 전근대성의 공통된 문제점은 현행의 교육제도가 사회를 이끌어갈 엘리트의 양성을 방해하고 있다는 데 있다. 하여 기독교가 주도해서 엘리트 교육을 위한 대안적 교육운동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2천 년대 대형교회들이 주목했던 대안학교운동이다.

    그런데 다니엘학습법이 개발자 개인의 교수법에 의존하고 있다면, 대형교회의 대안학교운동은 좀더 제도적이고 시스템적 체계를 중요시했다. 즉 신자유주의 시대의 엘리트로 성장하게끔 하는 제도적이고 체계적인 교육 장치들이 활용되는 교육기관으로 기독교계 대안학교가 부각된 것이다. 그러므로 개발자 개인의 창의적 교수법 외에는 별다른 자원을 필요로 하지 않았던 전자와는 달리, 후자는 인적, 물적 자원이 기존의 공교육보다 훨씬 더 풍부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다. 이는 막대한 인적, 물적 자원을 보유하고 있고, 그 자원을 활용하는 데 있어 지지부진한 논의과정을 거의 거치지 않고 신속하게 활용할 수 있는 대형교회에게 가장 용이한 것이었다. 더구나 자녀교육에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고 있는 강남, 강동, 분당의 중상위계층이 대대적으로 결집된 이 지역의 대형교회들에겐 교인들의 필요에 대한 맞춤형 기획인 측면도 강했다.

    하여 대형교회들의 대안학교운동은 일종의 귀족화교육의 측면을 지닌다. 그것은 명문대학 입학뿐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글로벌 시대에 맞는 국제적인 인재의 자격을 갖추게 하는 총체적 교육을 추구하는 학교라는 것이다. 유초년 교육기관에서부터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까지 다양한 대안교육기관들이 속속 설립되었고, 그 학비는 일반교육기관보다 훨씬 높았다. 단, 교인들에게 입학의 특전이나 학비의 특전을 주는 경우가 많아, 이런 교육운동은 일종의 선교 프로그램이기도 했다. 지역 사회에 대중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일이고 그들을 교인화하기에도 용이하며, 교인들의 결속도를 높이는 방법이기도 했던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귀족학교들은 배금주의나 성공지상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사실 다니엘학습법처럼 가난한 학생들에게 성공욕구를 부추기는 교육과는 달리, 처음부터 풍요로운 학생들에게 성공이란 삶의 최종 목적이 아니다. 성공도 격조 있게 이룩되어야 한다. 풍요를 위임받은 자가 격조 있게 재산을 관리하는 청부론처럼, 귀족적 대안교육은 성공도 품격을 필요로 하는 삶의 요소임을 강조했다. 신앙은 바로 그러한 품격 있는 성공의 준거다. 하여 귀족적 대안학교의 신앙은 웰빙적 자기계발의 수행법인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주간경향>에서 연재하고 있는 '김진호의 웰빙-우파와 대형교회'의 다섯번째 글입니다.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606271603271&code=11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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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에 대항하는 도구로서의 이상 단편소설(1)


: 1930년대 단편소설의 위상  



신윤주*


 

    이상이 세상에 내놓은 첫 작품은 장편소설이었다.[각주:1] 그러나 이상 생애의 마지막 작품 목록을 채운 것은 단편소설이었다. 동경 생활의 어려움으로 건강 상태가 악화되었을 때에도 이상은 단편소설 쓰기에 열의를 보였다. 이상이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 김기림은 이상의 숙소에서 그를 만났다. 김기림은 자신이 본 이상의 마지막 모습을 두고 마치 “골고다의 예수” 같았다고 증언한다. 동경 어느 거리 뒷골목의 골방을 찾아온 김기림을 앞에 두고 “상아보다도 더 창백”하고 아무렇게나 자란 수염이 무성했던 이상은 그간 쌓인 이야기를 풀어놓느라 장장 두 시간을 앉아있었다고 한다.


‘엘만을 찬탄하고 정돈에 빠진 몇몇 벗의 문운(文運)을 걱정하다가 말이 그의 작품에 대한 월평(月評)에 미치자 그는 몹시 흥분해서 속견(俗見)을 꾸짖는다. 재서의 ‘모더니티’를 찬양하고 또 씨의 <날개> 평은 대체로 승인하나 작자로서 다소 이의가 있다고도 말했다. …… 시인이면서 왜 혼자 짓는 것을 그렇게 두려워하느냐, 세상이야 알아주든 말든 값있는 일만 정성껏 하다가 가면 그만이 아니냐 하고 어색하게나마 위로해 보았다.[각주:2] 


    김기림에게 이상은 마지막까지도 ‘시인’[각주:3]이었지만, 오랜만에 김기림을 마주한 이상이 정작 나누고 싶었던 이야기는 단편소설에 관한 것이었다. 단편소설에 관한 이상의 생각들은「지주회시(鼅鼄會豕)」를 발표하기 몇 달 전부터 그가 김기림에게 보내기 시작한 편지들에서도 읽을 수 있다. 편지의 본문에서 이상은 ‘우리의 행복을 신에게 과시하는’ 해괴망칙한 소설을 쓰겠다고 선언하거나, 자신이 지금 “문학 천년이 회신에 돌아갈 지상 최종의 걸작”인 「종생기」를 쓰는 중이라거나, “철저히 소설을 쓸 결심”이라고 밝힌다. 한 번은 『조광』에 실린 「동해」에 관해 언급하면서는 단편소설 작품에 대한 일말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다는 듯 자신은 ‘「동해」를 퇴고하면서 당분간 시간을 보낼 계획이고 그 때문에 아마 새로운 작품은 쓰지 못할 것이며, 「동해」는 작년 6, 7월 경에 쓴 작품이니 “그것을 가지고 지금의 나를 촌탁하지 말기” 바란다’고 당부하기도 한다. 

    이상은 비록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했지만, 동인들 사이에서는 일문 연작시「이상한가역반응」에서 마지막 국문 연작시「위독」에 이르기까지 분명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다양한 시 실험을 했던 시인으로 이해되고 있었다. 보들레르에 버금가는 시를 썼노라[각주:4]고 자부하기까지 했던 이상이 언젠가부터 굳이 단편소설에 매진했다면 분명히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상을 그토록 단편소설 쓰기에 몰두하게 만들었을까?   

    이어질 내용을 통해 이상이 소설을 쓰던 시기에 단편소설의 위상은 어떤 것이었으며, 단편소설이라는 양식이 지니고 있는 어떤 특징으로 인해 단편소설이 그의 문제의식을 표현하는 최후의 도구로 채택될 수 있었을지 알아보고자 한다.  


소설 독자층의 형성


    벤야민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꾼의 이야기와 소설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소설이 “근본적으로 책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하며, 소설의 보급과 인쇄술의 발명을 연관짓는다.[각주:5] 한국 근대문학사에서도 소설의 보급과 인쇄술의 발달은 중요한 관계가 있는데, 신활자본 서적의 유통으로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서사를 향유하는 독자층이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한국 근대문학사에 ‘단편소설’ 및 ‘장편소설’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때는 1910년대로 잡지 및 신문에서 최초로 사용했다. 이들 용어가 처음 사용되었을 때에는 각 양식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를 바탕에 두고 있었다기 보다는, 소설 가운데 비교적 길이가 긴 것에 장편소설이라는 이름을,[각주:6] 매체에 한 회 분량으로 실을 수 있는 짧은 소설 혹은 장편소설이 되지 못한 것에 단편소설이라는 이름을 붙인 매우 단순한 개념[각주:7]이었고 새로운 문학의 흐름을 주도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각주:8]

   한편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했을 당시 주류를 이루고 있던 서사양식은 신소설과 활자본 고소설[각주:9]이었는데 신소설과 활자본 고소설은 독자들의 욕구를 충분히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知德의 양성에 독서의 필요함은 말할 것은 업거니와 只今 우리 청년은 독서력이 缺乏하야 독서의 미를 깨닫지 못하나니 이것이 취미의 비천한 第一因이라 …… 혹 조선문으로 된 서적이 잇다 하더라도 一瞥의 가치가 잇는 것이 업스니 나는 추하고 꼴 되지 아니한 보기부터 천하고 더럽은 소위 신소설이라는 것에 눈을 더럽히기 보다 옥루몽 슈호지 셔유기 삼국지 가튼 고문학을 닑음이 어문의 발달과 취미의 향상에 썩 有助할줄 밋노라[각주:10]


    위의 글에서는 청년 세대의 지성과 인격을 도야해야 할 필요를 따라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책을 읽는 것이 중요하지만 다양한 제약 조건들로 독서 활동을 하기가 수월치 않은 가운데, 특히 신소설은 자아의 성장에 관한 한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보다는 고문학을 읽겠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당시의 문학 환경이 신소설 혹은 활자본 고소설 양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신소설과 활자본 고소설을 유행시킨 것은 신활자본이라는 기술이었는데, 이는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만드는 인쇄술이었다.[각주:11] 서적의 대량생산은 새로운 독자층을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잉태한다. 우리나라의 신활자본 서적 출판의 경우 본격화되기 시작할 무렵에 출판법이 공포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독자층의 형성이 충분히 일어났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 하지만 최소한 “독서인구의 저변을 확대했다”[각주:12]고는 볼 수 있다. 이렇게 서서히 확대되기 시작한 독서인구는 소설의 독자층으로 전환되었을 것이다.

    소설을 읽을 만한 독자층이 예비되어 있음을 시사하는 예로 당시 신문과 잡지에서 실시했던 현상문예가 있다. 이들 현상문예는 무엇보다 구독률을 높이기 위한 자구책이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매일신보의 경우 1912년의 2월을 시작으로 네 차례의 현상 문예가 실시되었다. 매일신보는 전신이었던 대한매일신보를 총독부에서 인수하여 관제신문으로 만든 것인데 관제신문이 된 후로 신문의 구독률이 저조해졌다. 이에 기존에 없던 광고란을 새로 만들어서 소설 연재에 관한 광고를 하고, 1면에 있던 소설연재란을 4면에 삽화까지 넣은 독립적인 소설란으로 바꾸는 등의 자구책을 마련했던 것이다. 매일신보에 실린 단편소설의 절반 이상이 현상 문예에서 당선된 작품들이었다.[각주:13]

   소설의 작자들은 신소설과 고소설의 전근대성을 비판하며 대안적 담론으로서의 소설의 입지를 만들어갔다. 신문은 날마다 소설을 연재함으로써 독자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사로잡고자 했고, 그런 까닭에 장편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 잡지는 한 달 혹은 몇 달에 한 번씩 발간되었기 때문에 한 회만에 완결지을 수 있는 단편 양식에 더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신문과 잡지는 소설을 읽을 수 있고, 소설 작품을 내놓을 수 있는 장으로 자리매김해갔다.


잡지와 문단의 형성


   신소설과 고소설의 전근대성에 대한 비판이 독자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던 것은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소설에 대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세계와 어울리는 새로운 서사 양식을 필요로 했다.[각주:14] 그런데 이 시기의 소설들은 전범이 없는 상태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바꿔 말하면, 새로운 요구가 존재했으되 그것을 어떻게 구현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막연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난제를 돌파하기 위해 당시의 소설 텍스트는 평론가들의 문학 비평문, 독자들이 투고한 독서 감상문과 서로 매개되고 의존하면서 소설이라는 양식의 체계를 만들어 가게 된다.[각주:15]

    소설 양식의 발전에는 문단의 형성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문단 형성 과정의 핵심에는 문예 동인지가 있었다. 1920년대에는『창조』『폐허』『백조』등의 동인지가 민족 개조운동을 구호로 삼은『개벽』지와 『동아일보』등과 같은 시기에 창간된다. 1920년대 동인지의 문인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자비유학생집단”의 일원이었다. 이들의 선배세대는 민족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었고, 동년배들은 식민지 관료, 은행원이나 회사원, 의사, 변호사, 교사, 언론인 등 지식 전문가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중 동인지 문인들의 사회적 지위는 신문기자나 교사였다.[각주:16]

    3.1 운동 이후 지식인들은 “식민지 시기 부르주아 지식인의 당대적 이념이 한번도 대중을, 사회 전체를 장악하지 못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는데, 기왕 하나의 절대적인 이념을 가치로 내세울 수 없게된 상황에서 문인들은 과거의 권위 기준이 상대화되었음을 활용하여 근대적 분화와 전문화의 논리로 “ ‘문학이라는 것’, ‘소설이라는 것’의 전문성을 새로이 권위화”하고자 했다. 이러한 지식인의 세대교체, 부르주아 중간층의 이데올로기적 위상 변화, 지식 정치학의 패러다임 변화라는 정치사회학적 흐름 속에서 문단이 형성된다.[각주:17] 

    동인지 문인들이 근대적 분화로 창출된 지식인 집단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작가 그룹”이었던 만큼, 이들은 “문학적 숙련과 기교에 대해 자의식적으로 집단적인 담론”을 이루고 “동종직업 종사자로서의 울타리를 의식”했다. 또 일의 의도나 목적이 아니라 “그 일의 전문적이고 숙련된 성취 여부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가리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에 의해 최초의 “비평논쟁” 이 생겨났다[각주:18]는 사실은 전혀 놀랄만한 일이 아닐 것이다.


단편소설의 양식적 특성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문단의 가장 커다란 관심사는 소설이 현실 제반의 문제를 어떻게 그려내야 하고, 작가는 현실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었다. 창작방법론 논의 및 리얼리즘론, 행동주의 문학론, 휴머니즘론 등으로 이어진 비평의 흐름 역시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의 문제로 집약되었다. 이중 최재서는 소설에 대한 논의를 중심으로 자신의 비평활동을 전개했는데 그의 소설론이 당시 우리 소설이 안고 있었던 과제들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할만하다. 더욱이 그는 소설 양식 자체의 특성을 경유하여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당시 평단에서 그의 이론이 주류는 아니었지만 소설의 당면과제를 돌파하기 위해 단순히 현실의 문제(소설의 대상) 혹은 작가의 문제(소설 쓰는 주체)만을 다룬다면, 소설 자체가 지닌 본질에 다가서는 데에 양식적인 특성을 고려하는 것에 비해 제한이 있다는 것은 자명할 것이다.[각주:19]

    최재서는 당시 문단에서 발표되고 있는 장편소설의 통속화 현상과 단편소설의 관념화 현상을 문제라고 보았다. 그리고 소설의 양식에 관한 고민을 바탕으로 이러한 경향성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한다. 이러한 논의는 맨 처음 단편소설과 장편소설이라는 말이 등장할 당시에 장편과 단편을 단순히 텍스트의 길이를 기준으로 가르던 것에서 멀리까지 나간 것이다. 이제 소설쓰기의 주체인 작가는 소설 양식을 선택함에 있어 구성상의 요인을 구체적으로 고려할 수 있게 된다.  

    이어질 내용에서는 소설의 양식적 특성에 관한 최재서의 논의 중 그의 단편소설론을 기초로 당대에 단편소설을 쓴다는 것이 지닐 수 있는 의의가 어떤 것일 수 있는지 확인해보고자 한다.  


단편소설은 …… 인생의 전면이 아니고 일면, 실재성의 전부가 아니고 일부인 이상, 작자는 그 효과를 내기 위한 모든 재료를 이용하는 반면에 그 효과를 방해할만한 재료거나 또는 비교적 간접적인 재료는 용서없이 제거할 것이다. …… 작자의 의장에서 벗어나는 사건을 제거한다는 프로세스가 없이는 단편소설은 성립되지 않는다.[각주:20]  


    위의 내용에서 추출할 수 있는 단편소설 양식의 가장 기본적인 특성은 ‘배제의 원리’이다. 장편소설이 어떻게 하면 삶의 총체적인 모습을 형상화할 것인가를 모색하는 양식이라면, 단편소설은 삶을 축소하고 배제함으로써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은 ‘배제를 지향하는 작가의 의도’로 확장하여 정리할 수 있다. 작가는 단편을 창작하기 위하여 일차적으로 전체적인 세계의 형상을 배제한다. 인물의 다양성도 배제한다. 단편의 작가는 삶의 다양성보다 ‘통찰의 순간’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자연 배경과 문장, 단어에 이르기까지 배제의 원리를 작동시켜야만 한다. 이로써 작가는 “ ‘효과와 인상의 단일성’을 성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작가는 짧기 때문에 발생하는 다양한 미적 특질을 획득하기 위해 배제를 지향하게 되는 것이다.[각주:21]  

    단편 양식이 짧을 수 있는 것은 “소재 자체가 작기 때문”일 수 있고, 아니면 “소재가 크더라도 작가가 예술적 효과의 극대화를 위해 소재를 삭감”하기 때문이다.[각주:22] 전자는 소설이 다루는 대상에 관한 논의에 연결되므로, 여기서는 양식의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하는 특징인 후자를 다룰 것이다.  

    단편소설의 양식적 특성 중 첫 번째는 단편소설이 삶과 멀어진다는 점이다. 단편소설이 채택하는 ‘배제의 원리’는 하나의 ‘소실점’ 혹은 폭발점과 짝을 이룸으로써 작품의 의도와 효과를 통합적으로 구현할 수 있다. 스프링에 비유하여 이야기하자면 배제의 원리를 잡아당기는 힘에, 튀어오르는 순간을 소실점에 해당하는 것이다. 즉, “배제는 폭발을 위해 행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지점인 소실점은 인물의 전체 혹은 삶의 본질을 포착하고 작품 내 모든 요소의 의미를 실현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신중하게 ‘소실점’을 선택한다 해도 순간을 통해 본질을 통찰하는 행위 자체가 동반하는 오인의 가능성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것이 바로 단편이라는 ‘형식적 준거’가 생의 치밀한 논리를 들어 설득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는 사실, 곧 ‘삶과 멀어질 수 밖에 없는 양식’임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단편이 삶으로부터 자신의 제재를 빌려올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을 제시하는 형식은 빌려올 수 없”는 것이다.[각주:23]   

    이것은 다시 두 번째 특징으로 이어지는데, 단편소설은 삶에서 형식을 빌려올 수 없기 때문에 작가가 형식을 창안해내야 한다. 뒤집어 말하면 작가는 단편소설 양식을 통해 삶을 제시하는 형식을 창안할 권리를 부여받는 것이기도 하다[각주:24]. 작가는 단편양식에는 다양한 형식 실험의 가능성을 얻게 된다. 고정된 형식적 준거가 존재하지 않는 단편의 특성은 세계와 인간에 대한 보편적 해석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과 함께 출발한 시대인 근대와 닮아있다. 식민지 시대의 작가들은 이러한 “가변성과 폭과 깊이”를 지닌 단편 양식에서 “근대성의 물질적 흔적”을 보았다. [각주:25] 

    셋째, 단편소설은 “저항담론이 ‘이미’ 기존 사회의 부정적 인식에는 도달했으나, 사회 전반에 대한 체계적인 해석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을 때” 작가의 이데올로기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삶을 표현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다. 이는 사회 전반에 대한 통일된 이데올로기를 갖출 것을 요구하는 장편과 대조적이다. 또한 단편은 정상의 순간에 완결을 선언할 수 있으며[각주:26] 표면적 순간을 통해서도 이면적 진실을 드러낼 수 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아이러니적 양식이다. 아이러니는 부정할 수는 있지만 변화시킬 수는 없는 현실을 드러내는 데에 효과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와 식민지를 동시에 경험하는 혼란 속에서 답을 찾아가는 과정으로서의 문학 행위에 새로운 삶의 본질을 추출하는 도구로서 유용했을 것이다. [각주:27]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소설이 새로운 시대의 대안적 서사 문학으로 자리를 잡고 소설 ‘양식’에 관한 고민을 하게 되기까지의 흐름을 살펴보았다. 나아가 단편소설이 지니고 있는 양식적 특성과 그것이 식민지 조선의 현실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에 관하여 확인해보았다. 식민지 조선에서의 단편소설 양식은 글쓰기 주체가 ‘삶을 제시하는 다양한 형식을 실험할 수 있는 장’이자 부정하는 단계에는 이르렀으나 변화시키기에는 역부족인 현실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하기에 적절한 소설의 형태였다. 문학함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소설을 썼던 작가들은 의식적/무의식적 선택을 따라 자신의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가작 적절한 도구로서 단편소설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의식 과잉에 시달리곤 했던 이상이 세계에 대해 가졌던 주제의식과 단편소설 양식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이어지는 내용에서는 이상의 수필 작품을 통해 이상이 표현하고 싶었던 주제 및 그의 예술관을 구체적으로 고찰해보고, 그것이 단편 양식의 특성과 어떻게 호응하는지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 필자소개  

메모광. 학부에서 국제어문학을, 석사과정으로 비교문학을 공부했으며, 향후 프로이트 라깡주의 정신분석학을 중심으로 연구를 지속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1. ‘이상(李箱)’이라는 필명으로 1930년 2월부터 12월까지 잡지『조선(朝鮮)』의 국문판에 연재한 처녀작,『12월 12일』은 이상의 처음이자 마지막 장편소설이었다. [본문으로]
  2. 김기림, 「고 이상의 추억」, 『조광』, 1937.6. [본문으로]
  3. 김기림에게 이상이 시인이었던 것처럼 변동림에게도 이상은 시인이었다. “이상은 시인이다. 소설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상의 시 <오감도>는 세계적 수준에 이른 탁월한 시라고 하는 믿음은, 그때나 이제나 변함이 없다. 그러나 이상의 잡문들은 고매한 시 정신에서 대단히 멀어져 있음을 느낀다.” (김향안, 「이상에서 창조된 이상」, 『문학사상』, 1986.8.) [본문으로]
  4. 조용만, 「이상 시대, 젊은 예술가들의 초상」, 『문학사상』(1987.5) [본문으로]
  5. 발터 벤야민, 「얘기꾼과 소설가」, 『발터벤야민의 문예이론』, 반성완 편역, 170-171쪽 [본문으로]
  6. 김영민, 「근대 개념어의 출현과 의미 변화의 계보-식민지 시기 ‘장편소설’의 경우」, 11~13쪽 [본문으로]
  7. 이희정, 「1910년대 매체를 통해서 본 단편소설의 정착과정 연구」, 326쪽 [본문으로]
  8. 무엇이 단편소설과 장편소설 나아가 중편소설을 규정하는가에 관한 논의는 1920년대에 좀더 심도있게 일어나다가 1930년대에 들어선 후에야 소설의 ‘양식’ 자체에 관한 본격적인 비평이 등장한다. 이 부분은 뒤에 좀 더 자세히 다루게 될 것이다. [본문으로]
  9. 이희정, 앞의 글, 322쪽; 박헌호, 「한국 근대소설사에서 단편양식의 주류성 문제」, 『식민지 근대성과 소설의 양식』, 소명출판, 2004, 71쪽 [본문으로]
  10. 작자미상(1915), 「고상한 쾌락」, 『청춘』6호, 1915.2, 54-55쪽 [본문으로]
  11. 당시에 신소설과 활자본 고소설이 유행하게 된 데에는 출판 환경이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출판 시장이 사립학교 수 증가에 따라 교과서 수요가 늘어난 상황에 맞추어 급격히 성장했던 것이다. 개화기부터 공유된 보통교육의 필요는, 1905년의 제2차 한일협약 이후 대항적으로 일어난 교육운동과 함께 전국 각지의 사립학교 설립으로 이어졌다. 학교의 수가 갑작스럽게 늘어나면서 교과서 부족 현상이 심해졌고, 이에 민간단체, 학교, 개화선각자들이 서적 편찬에 뛰어들어 교과서 제작에 힘을 모았다. 1907~1908년 사이에는 집중적으로 신활자본 서적이 출판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만성적인 교과서 부족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지만, 1908년에 일제는 학부령 16호로 ‘敎科用圖書檢定規程(교과용도서검정규정)’을 제정하면서 교과용 도서의 질적 향상을 명목으로 애국적이고 계몽적인 교과서의 사용을 막기 시작한다. 나아가 1909년에는 <출판법>을 제정하여 도서 출판에 앞서 원고를 제출하여 허가 받도록 규정하였고, 법 제정 이전에 발행된 서적일지라도 다시 허가를 받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전국의 사립학교에는 학부 검정이 이루어지지 않은 교과서, 곧 우리의 출판사들이 발행한 교과서는 거의 사용할 수 없게 되고, 이에 따라 대부분의 영세성을 면치 못했던 우리의 출판사는 더 이상 서적을 발행할 수 없게 된다. 이때 출판 시장의 유일한 대안이었던 것이 1907년부터 간행되기 시작했던 신소설이었다. 신소설은 처음에는 강한 계몽성을 띠고 있었지만 출판법으로 인한 검열의 강화로 인해 1910년대에 들어서는 1900년대 후반에 비해 훨씬 통속성이 강화되고, 현실비판적인 면모가 약화된다. 더 이상 현실비판적이고, 애국계몽적인 내용은 발간 자체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더불어 1912년부터는 신활자본으로 고전소설을 대거 간행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출판물이 도서의 대부분을 이루게 된 것이다. (류준경, 독서층의 새로운 지평, 방각본과 신활자본, 290-294) [본문으로]
  12. 류준경, 앞의 글, 295-297쪽 [본문으로]
  13. 이희정, 앞의 글, 323쪽 [본문으로]
  14. 근대문학에 관한 선행 논의를 집대성하는 이광수의 <문학이란 하오>를 통해 간단히 살펴보자면 당시 문학을 둘러싼 고민으로는 “신구 문학개념의 차이, 지, 정, 의에 대한 인식에 바탕한 문하그이 정의, 예술이 삶과 동떨어진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라는 논의와 연관시킬 수 있는 문학재료의 일상성, 학문과 도덕과 구분되어야 한다는 문학의 독립성, 그 지향은 미(정의 만족)의 추구에 있어야 한다는 자율성, 문학자(작자, 비평가)에게 요구되는 전문성, 조선문학은 과거는 없고 장래만 있을 뿐이라는 근대문학으로서의 선언적 특성” 등을 꼽을 수 있다. (이은주, 「한국 근대 단편소설의 양식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4, 46쪽) [본문으로]
  15. 이은주, 앞의 글, 98-103쪽 [본문으로]
  16. 차혜영, 「1920년대 초반 동인지 문단 형성과정-한국 근대 부르주아 지식인의 분화와 자기정체성 형성과 관련하여」, 121쪽 [본문으로]
  17. 차혜영, 앞의 글, 124-125쪽 [본문으로]
  18. 차혜영, 앞의 글, 132쪽 [본문으로]
  19. 권영민, 「최재서의 소설론 비판」, 150-159쪽 [본문으로]
  20. 최재서, 앞의 글, 338쪽 [본문으로]
  21. 박헌호, 「한국 근대소설사에서 단편양식의 주류성 문제」, 『식민지 근대성과 소설의 양식』, 74-75쪽 [본문으로]
  22. 박헌호, 앞의 글, 76쪽 [본문으로]
  23. 앞의 글, 76-79쪽 [본문으로]
  24. 앞의 글, 79쪽 [본문으로]
  25. 앞의 글, 83쪽 [본문으로]
  26. 박헌호는「B사감과 러브레터」를 예로 들며 “단편은 정상(頂上)에서 멈추는 것이 정상(正常)”임을 제시한다. 뒷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야말로 작품을 죽이는 실수라는 것이다. 그것은 “종종 반전을 수반하고, 독자의 허를 찌르며, 축적돼왔던 정서의 폭발로 종결”되는데 만일「B사감과 러브레터」를 읽은 독자가 그 후에 B사감이 어떻게 살았을까에 관해 질문한다면 그것은 순진한 독자의 자연스러운 호기심일지언정, 작품의 미학적 질감의 측면에서 본다면 불필요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앞의 글, 86쪽) [본문으로]
  27. 앞의 글, 88-89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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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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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숫제
    2016.12.24 01:30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172에 48키로 여자 일기




 김정원*


    내 일상에 가장 깊숙하게 스민 욕망 중 하나가 ‘마른 몸’이다. 이 욕망의 출발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마른 몸을 아름답다고 생각한지는 꽤 오래되었다.



    중학교 시절의 나는 아주 바짝 마른 여자아이였다. 키는 날로 크는데, 살은 당최 붙질 않았다. 키에 맞춰 교복을 입고 있었던 지라, 자루를 뒤집어 쓴 허수아비가 따로 없었다. 중학교 3학년이 되어 키는 170이 다 돼 가는데, 몸무게는 겨우 40키로에 그쳤다. 아빠는 ‘용든약’을 지어왔다. 약발이 좋았는지 겨우내 살이 올랐고, 고등학교에 갈 적엔 48키로까지 몸이 커져 있었다. 그거나 거기까지였다. 키는 172까지 계속 컸지만 몸에 살은 붙지 않았다. 다이어트커녕 한 끼도 놓치지 않고 꼬박 밥을 먹어도 ‘축복받은 유전자’ 덕으로 나는 계속해서 ‘마른 여자’였다. 그로부터 쭉 48키로는 어김이 없이 나와 붙어있는 숫자였다. 대학에 들어가고, 대학원에 들어가도록 몸무게는 변하지 않았다. 이제 48은 나의 정체성이 되었고, 나는 그대로 48키로의 여자로 살아가고자 했다. 종이 인형이란 말을 듣고, 방아깨비 다리 같다는 얘길 들어도 나는 아랑곳 하지 않고 48키로였다. 주위에서 “살 좀 쪄~ 조금만 더 찌면 훨씬 건강해 보일 거야.” 라는 말을 백 번을 듣는다 한들, 나는 48키로의 여자로 살고 싶었다. 평생을 마른 여자로 살아왔기에 마르지 않은 몸을 갖는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더욱 솔직하게는 나는 계속해서 여성들의 욕망의 대상이고 싶었다.

    그런데 서른이 넘자 몸의 판도가 약간 달라지기 시작했다. 별다른 노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하지 않아도 온전히 48키로였던 내게 변화가 찾아왔다. ‘축복받은 유전자’를 가진 여자라도, 자연의 파편일 뿐인 몸뚱이가 노화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기초 대사량은 떨어지고 먹는 양은 그대로이다 보니, 1키로가 늘고 다시 1키로가 늘어 몸무게는 50키로가 되었다. 누군가에게는 또 하나의 망언이겠지만, 50키로에 식겁한 뒤로 나의 일상은 변했다. 사회적 관계망 안에서 나는 이미 나 스스로를 퍽 통제하며 살아가지만, 그에 하나를 더한 것이다. 이제는 아주 기본적인 욕구인 식욕을, 그러니까 내 정신과 영혼이 통으로 깃든 내 몸뚱이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도를 지켜야 한다. 다이어트 때문에 수선스러워 보이면 곤란하다. 나는 생태주의자이면서 페미니스트이고, 자본주의를 반대함은 물론, 목사라는 직업을 가졌기에 싸질러 놓은 게 많기 때문이다. 복인지 화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자리 저 자리에 불려 다니며 온갖 그럴싸한 말을 많이 한 탓에, 겨우 ‘다이어트나 하는 여자’로 보여져서는 안될 일이었다. 적어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당당한 여자’라는 주변의 기대를 져버릴 수는 없었다. 표준 몸무게를 훨씬 밑도는 몸뚱이를 가졌음에도, 하루 1500칼로리 이하로 식사량을 제한하고 있다는 사실로 많은 여성들이 불편할까 조바심이 났다. 전달했던 메시지들이 ‘구라’로 취급 당할까 염려됐고, 진정성 없는 여자로 전락될까 두려웠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보면, 이런 염려들은 다 몹쓸 것들이다. 사태의 핵은 다른 이들의 기대감이나 시선에 있는 것이 아닌, 앎과 삶의 분리가 낳은 죄책감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은폐되어야 할 것(되었으면 하는 것)들의 폭로, 즉 스스로를 ‘짜가’라고 인식되는 그 순간을 마주하는, 바로 그 좌절감을 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내 방구석에서 행해지는 다이어트지만, 그러니까 누구도 가타부타 말하지 않는 나만의 은신처에서 일어나는 다이어트지만 불편한 마음은 떨쳐지지가 않았다. 아무도 없는 대신, 앎과 삶의 분리가 낳은 죄책감이 나와 함께 있었다.

    코르셋과 뽕브라 따위는 벗어 던져야 한다고 외치면서, 고구마와 닭가슴살을 주워먹고 있는 내 꼬라지가 싫었다. ‘마른 몸’을 향한 욕망은 결국 시장의 논리에서 오는 것을 일찍이 알던 탓이다. 천박한 자본주의적 미의 기준을 표본삼고 있는 것을 인식하기에 스스로에게 부끄러웠다. 웰빙과 몸짱 아줌마는 다른 말이 아니다. 둘은 상품으로서 존재한다. 이와 관련한 구미정의 표현이 비상하다.


주름살과 흰머리, 기미와 검버섯, 터진 배와 늘어진 뱃살은 그 자체가 자연이고, 역사이며, 실존이다. 인간의 삶의 궤적이 가감 없이 기록되고,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정직한 몸은 그 자체가 예술이고, 시이며, 영성이다. 그런데도 ‘젊고 탱탱한 몸’을 우상시하는 시장의 논리 앞에서 정직한 몸은 당장에 추한 몸으로 전락하니, 이 무슨 횡포인가 싶다(구미정, ‘몸의 신학’, 2006).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자’라는 외침은 페미니즘의 기조와 같은 것이며 나아가 그 자체로 생태적이다. 노화에 마냥 달가울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노화야 말로 자연의 섭리를 온 몸으로 감각하는 일이다. 세월의 흔적을 담은 몸을 포용하는 일이야 말로 사람과 사랑을 배우는 일이며, 정직함을 성취하는 길인 것이다.


    하! 알면 뭐하나. ‘지금, 여기의 나’는 그저 마른 몸 따위를 지향하고 자빠져 있는데…… 속을 파 보면 남성은 물론 여성에게도 ‘예쁜 여자’로서 보여지길 원하는 하질의 에코페미니스트인 것을. 누가 아는 것을 힘이라 했나. 앎은 그저 고뇌이고 고통이며, 죄책감이자 우울감이다.         


    책을 보고 글을 쓰는 일이 늘수록, 살도 함께 늘어난다. 영국에 머물며 살은 조금 더 붙었고, 덕분에 조금 당당해질 수 있었다. 키로 수가 조금 늘 때마다 나의 진정성도 늘어간다. 아무도 모르게 살이 찌고, 아무도 모르게 죄책감에서 벗어난다. 살이 찐 만큼 페미니스트로서의 진정성이 회복되고, 허벅지가 통통해진 만큼 생태주의자에 보다 가까워진다. 단, 죄책감이 덜어지고, 진정성을 얻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우울감을 느낀다는 것에 아이러니가 있다. 살이 찌면 못생겨진다는 생각에서는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마른 몸’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왜곡된 기준에서 온다. 그렇다면 이제, 왜곡된 미의 기준을 갈아 마시면 될 일이다.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을 바꿔 보려 노력해도 이게 쉽지가 않다. 나는 다시 우울감에 젖는다. 이 때, 내 맘 속의 제일 가치는 에코페미니스트가 아닌 것이 탄로 난다. 그게 아니고서 살이 조금 붙었다고 이리 우울해질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이 순간 위로가 되는 것은 “나의 육체는 나의 전부이다. 나는 육체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라는 니체의 말이다. 물론, 니체의 이러한 주장은 육체를 덧없는 것으로 간주하며 정신을 강조했던 철학자들을 비판한 것이지만, 나의 고뇌와 실존적 물음들이 ‘몸뚱이’를 통한 것이라고 할 때, 그의 말은 충분한 위로가 된다. 나의 우울감은 “우리의 가장 근원적인 소유물, 우리의 가장 확실한 존재, 요컨대 우리들의 자아로서의 육체”를 곱씹으며 발생한 것이기에 나는 그나마 철학적이었다. 그냥 그렇다 치자.


    오늘 아침 몸무게를 달아보니 51키로를 조금 넘어간다. 3키로어치의 에코페미니즘과 진정성을 얻었다. 물론 3키로어치의 우울감도 함께 얻어왔다. 그러므로 나는 저녁으로 닭가슴살과 토마토를 먹을 것이고, 당분간 라면은 먹지 않을 것이다. 그런 나를 마주하며 나는 다시 죄책감을 느낄 것이며,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고자 다시 라면을 먹을 것이다. 먹고 빼고, 먹고 빼고, 해방되고 억눌리고, 해방되고 억눌리고, 진짜였다가 가짜였다가, 진짜였다가 가짜였다가. 아주 미친년이 널을 뛴다. 앎과 삶의 분리가 주는 형벌이다. 아는 만큼 살지 못하는 한, 적어도 ‘다이어트 하는 여자’로 사는 한, 나는 제 명에 못 살 것이 분명하다. 이런 나를 누가 구원하겠나. 결국 더한 각성과 반성과 결단 밖에는 없다. 그게 안 된다면 스스로를 좀 놓아주면 되는 일이다. 나약한 나에게 그러한 용기가 작동된다면 말이다. 다만 이 상태가 어느 방향으로든 한동안은 변하지 않을 것을 직감하고 있기에 나는 내가 몹시 안타깝다. 오호 통재라!


* 필자소개

   "한신에서 기독교교육을 공부하고, 킹스칼리지런던에서 조직신학으로 석사 과정을 마쳤다. 현재 박사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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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원소연
    2016.12.29 09:2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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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이어트는 마른여자든 뚱뚱한여자든 여자들의 평생숙제라하잖아요

    저는 최근 7개월간 다이어트를 해서 10킬로는 감량했는데
    일하는 곳에 원장님의 질투도 엄청 났고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담니다.

    저는 목사님의 마음을 조금은 알꺼같아요
    죄책감을가진다는건 주의보는눈인데
    솔직히 여지로 태어나 예쁜몸매가지는게 소망이잖아요 그리고 이것도 자기관리중하나입니다.
    건강한생각을 가지고 스트레스는 받지마세요
    화이팅



예쁘지 않아도 돼



유하림*

 


   예쁘지 않아도 된다는 깨달음이 내 인생을 바꿨다.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난 뒤로 내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말이다. 가느다란 팔 다리에 잘록한 허리, 커다란 가슴과 엉덩이. 큰 눈과 오똑한 코, 빨간 입술, 매끄러운 피부. 이런 요소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예쁘지 않은걸까? 그럼 나는 예쁘지 않은거네. 근데 나는 꼭 예뻐야만 하는걸까? '예쁘다'는 것의 기준은 누가 만들고, 누구를 위한 것일까?  

   나는 4kg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어딜가나 덩치가 큰 편이었고 덩치가 큰 사람들에겐 으레 따오르는 별명들이 내게 붙여졌다. 엄마는 소아당뇨나, 이른 초경을 걱정하며 더 이상 살이 찌지 않도록 먹던 밥을 빼앗아 버리기도 하고 큰 돈을 들여 다이어트 약을 사주기도 했다. 어쩌다가 옷을 사야 할 시간이 오면 꼭 우울해진 채로 집에 돌아왔다. 내가 입고 싶은 짧은 치마나 무늬가 화려한 옷들을 고르면 엄마는 ‘뚱뚱해 보인다’는 이유로 그 옷들을 사주지 않았다. 아주 어렸을 때는 그래도 사달라며 졸랐던 것 같은데 조금씩 머리가 크면서 이내 엄마 말에 수긍하게 됐다. 싸우기도 싫었을 뿐더러 엄마 말 처럼 뚱뚱해보이는 옷은 입고 싶지 않아졌기 때문이다. 나의 선호와는 상관없이 무난하고, 덜 뚱뚱해 보이는, 그리고 사이즈가 맞는 옷을 찾아서 구매했다.   

   어린 시절은 내 몸에 대한 혐오와 덜 뚱뚱해 보이고 싶은 욕구로 가득 차있었다. 나는 예뻐지고 싶었고, 뚱뚱한 사람은 예쁘지 않으니까. 음식을 보고 식탐이 생길 때는 죄책감이 들었고, 입안 가득 달달한 음식을 먹을 때면 불안했다. 그럼에도 다행스러운 건 그나마 타고나게 낙관적인 구석이 있었다. 언젠가는 빠지겠지, 뭐 그런 마음가짐이었다.   

   중학생 정도 되니 대놓고 ‘뚱뚱하다’고 놀리거나 면박을 주는 애들은 없었다. 그러나 예뻐지고 싶은 욕구는 날이 갈 수록 강해졌다. 사건이 하나 있었다. 전교생이 20명 남짓한 기숙형 대안학교에서 생활을 했는데, 남자와 여자가 각각 10명씩 있었다. 언제인가 그 10명의 남자애들끼리 모여 여자애들의 얼굴, 몸매, 성격 같은 것들로 1위부터 10위까지 순위를 매겼다고 했다. 여자애들은 화가 나서 다같이 남자애들에게도 똑같이 순위를 매기고, 칠판에다 그 순위를 적어놓았다. 나도 화가 나기는 했지만 실은 남자애들한테 왜 매력적으로 보이지 못할까에 대한 고민이 더 컸다. 아마 그때 그 경험이 내가 내 몸을 더 혐오하는 계기이자, 예뻐지고 싶은 강렬한 욕구를 느끼게 한 동기가 되었던 듯 싶다. 

   겨우 중학교 2학년이 돼서야 혐오에서 아주 조금 벗어날 수가 있었는데, 그 때 남자친구를 사귀었다. 그 애는 학교의 신입생이었고, 자신을 잘 챙겨주는 내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1년 정도 연애를 하며 뚱뚱하지만 매력적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그렇게’ 뚱뚱하진 않다는 말로 스스로에게 위로를 건네고, ‘그래도’ 매력적이라는 말로 용기를 가졌다. 그러나 스스로 말을 건네는 동안에도 마음 속에는 날씬한 몸과 예쁜 얼굴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 삶은 앞서 말했듯 태생적으로 낙관적인, 지극히 개인적인 나의 성향 덕에 견뎌낼 수 있었던거지 실은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그렇다. 나는 내 몸을 계속해서 혐오하고 있었다. 정작 나는 내 몸이 아무렇지도 않은데 주위 사람들은 자꾸만 내 몸에 대해 말했다. 통통하게 나온 배나, 친구들보다 한 사이즈 옷을 크게 입어야하는게 걱정스런 일이 된건 그런 주위사람들의 말 때문이었다. 그래서 예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내게 해방이고 곧 구원이다. 세상이 만들어낸 ‘예쁨’의 기준 따위에 내가 나를 맞춰야 할 필요가 전혀 없다.  

   물론 예쁘지 않아도 된다는 말로부터 갑자기 내 몸이 자랑스러워진 것은 아니다. 다만 혐오하지 않을 수 있을 뿐이지. 그러나 그 혐오하지 않음으로서 내 삶은 많이 바뀌었다. 더 이상 ‘사실’이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나는 많이 편해졌다.  

   뚱뚱함은 상대적인 기준이지만, 어쨌든 난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뚱뚱한 여자다. 근데, 뭐, 어쩌라고.  


* 필자소개 


페미니스트. 모든 차별에 반대하지만 차별을 찬성하는 사람은 기꺼이 차별합니다. 간간히 글을 쓰고 덜 구려지기 위해 노력합니다. 꿈은 나태하고 건강한 백수이고 소원은 세계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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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은 체리향기가 되어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인)

 


“사람아, 너는 생기에게 대언하여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렇게 일러라. ‘나 주 하나님이 너에게 말한다. 너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불어와서 이 살해당한 사람들에게 불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여라.’”- 에스겔 37:9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작품들...  


    내가 좋아하는 이란의 영화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겠다. 우리에게 가장 먼저 알려진 그의 영화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였다. 이 영화는 제목 그대로 내 친구의 집을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같은 반 친구가 한번 만 더 숙제를 안 해오면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된 것을 알아버린 어린 주인공의 번뇌를 눈물나게 재미있고 아름답게 그려낸 작품이었다. 비극은 처음에 이렇게 시작된다. 친구의 숙제노트를 실수로 자기 가방에 넣어서 갖고 온 것이다. 집에 도착해서 그것을 안 주인공은 엄마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많은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그 친구의 집을 찾아나서는 나름 로드무비다.   

   <올리브 나무사이로> 의 마지막 장면은 내가 그동안 봤던 영화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엔딩이 아니었나 싶다. 남자주인공(호세인)이 여자주인공(테헤레)을 좋아하는데 집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여자 주인공 부모가 반대를 한다. 이런 저런 사건들을 지나 마지막에 테헤레가 올리브 나무사이로 난 길을 먼저 걸어가고 호세인이 뒤에서 뭐라고 하면서 소리치며 따라 간다. 굽이굽이 녹색으로 덮인 초원길과 밭길을 여자는 앞에서 남자는 뒤에 서서 걸어가는데 둘 다 하얀색 윗도리를 입었다. 스크린 상에서 두 사람이 하얀 점이 되어 안보일 때 까지 감독은 롱테이크로 둘을 끈기있게 관찰한다. 그 시간이 약 3-4분쯤 되었던 것 같은데 관객들은 둘 사이에서 어떤 대화가 오고갔는지 그때 상상할 수 있다. 짠하고 애틋하고 답답하고 조마조마하고 슬프고 행복하고...뭐라 말할 수 없는 여러 복잡한 감정이 들면서 피곤해질 무렵, 음악이 조용히 경쾌하게 바뀌면서 저 끝에서 하얀점 하나가 다시 관객을 향해 달려오는 것이 보인다. 그것도 마구 아주 신이 나서 달려오는 것 아닌가! 영화는 호세인의 상기되고 환호하는 얼굴을 살짝 보여주면서 끝이 났다. 테헤레와 호세인은 결혼을 했을까?  


그리고 체리향기


   두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내 마음이 티없이 맑고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샤워를 막하고 나온 느낌이랄까. 그런 감동과 기대를 가지고 키아로스타미의 <체리향기>를 보러갔었다. 그런데 시종일관 그 영화는 전작들이 지녔던 경쾌함과 유쾌함과는 다른 무거운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영화였다. <체리향기>는 주인공이 자신의 자살을 도와줄 사람을 찾아다니는 이야기다.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주인공은 한 노인으로 부터 약속을 받아낸다. 자살한 자기를 양지바른 곳에 잘 묻어주겠다는 약속말이다. 그런 다음 그 노인이 주인공에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자기도 예전에 목을 매려고 줄을 갖고 나무 위로 올라간 적이 있었다며... 막 죽으려고 하는데 나무에 걸린 체리가 눈에 들어왔다고. 무심결에 그냥 손을 내밀어 하나를 떼어서 먹었더니 무척 그 체리가 달더란다. 그래서 계속 먹었다. 그랬더니 문득 세상이 좀 달리 보이고, 붉은 태양처럼 삶에 대한 열정도 되살아나는 것 같고, 학교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도 정겹게 다가오고, 그래서 나무 밑을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체리를 따서 던져주다가 나무에서 내려왔다고...   

    영화는 결말을 열어두어 그 주인공이 자살을 했는지 안했는지 밝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전체 영화톤은 노인의 말로 인해 사내가 용기를 얻고 다시 세상으로 나갔을 것이라는 전망을 가능케 한다. 비록 <체리향기>는 전작인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올리브 나무 사이로>보다는 전체적인 분위기와 톤이 무거웠지만 관객의 가슴을 활짝 열리게 하고 짜릿하게 하는 강도는 전작들보다 더 강렬했던 것 같다. 

    이 영화를 보면서 두 가지가 궁금해졌다. 첫 번째가 체리맛에 관한 것이다. 과연 그 체리 맛이 어떤 맛이었을까? 죽으려고 마음먹고 나무 위로 올라갔던 사내의 모진 마음을 녹여버린 그 맛이 무엇이었을까? 두 번째로 들었던 궁금증은 영화 제목을 왜 <체리 맛>이라고 안하고 <체리 향기>라고 붙였을까? 라는 점이었다. 문득,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 흙으로 형상을 빚으시고 코에다가 생기를 불어넣으셨다고 기록된 창세기의 구절이 생각났다. 하나님이 아담의 코에 불어 넣었다는 그 생기가 혹 <체리 향기>는 아니었을까? 


마른 뼈. 다시 살아나...


    글을 시작하면서 구약성서에 나오는 에스겔서 중 일부를 적어 놓았다. 거기에도‘생기’라는 말이 나온다. 에스겔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강가로 포로로 잡혀갔던 시기에 활동했던 예언자이다. 그 절패의 공간에서 에스겔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하고, 이스라엘의 회복을 이야기한다. 특별히 위에서 언급한 에스겔 37장에는“마른 뼈가 다시 살아날 것!”(5절)을 선포하는 유명한 구절이 있는데, 오늘은 그 구절을 택하지 않고 그 밑에 있는 ‘생기’와 관련된 구절을 택하였다.   

    이 부분은 창세기 인간창조 설화와 상동성이 있다. 창세기에서는 흙이라는 질료가 있었고, 다니엘서에서는 그 질료가 뼈이다. 질료인 흙과 뼈가 살아 움직이게 하는 기재를 창세기와 다니엘서에서는 공히‘생기’로 표현하고 있다. 그 생기가 뭘까? 키아로스타미는 그것을‘체리향기’라고 말한다.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체리향기’는 물론 단순한 냄새는 아니다. 자살하려고 나무에 올랐던 그 중년의 사람을 살아서 다시 나무 아래로 내려가게 했던 기운이‘체리향기’이다. 키아로스타미는 아직도 여전히 생명의 기운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 기운이 주는 힘에게 신뢰와 희망을 부여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것을 아주 매혹적이고 섹시하게 ‘체리향기’라 명명하였던 것이고.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들을 묘사하는 장면이 에스겔 37장 초반에 나온다. 골짜기마다 아주 말라 버린 마른 뼈들이 널려있었다고 적혀 있다.‘마른 뼈’라는 표현도 부족해서 아주 말라버린 마른 뼈!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어떤 느낌이 드시는지? 나는 갑자기 마른 뼈가 우리나라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말라 버린 마른 뼈! 그 어떤 희망과 가능성과 가치도 금방 증발하고 바짝 말라버리는 이 사회가 대한민국 사회라고 한다면, 에스겔의 ‘마른 뼈’ 묘사는 지금의 대한민국에 대한 정확한 상징이자 은유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얼마나 많은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자살을 하려고 나무위로 올라가는가? 우리나라는 노인, 중년, 청소년 할 것 없이 전 연령대에서 OECD 가맹국 중에서 자살율 1위를 달리는 나라다. 이런 이유로 우리에게는 마른 뼈를 되살아 나게 하는 생기가 필요한 것이고, 그래서 우리에게는‘체리향기’가 필요하지만, 아무도 그것이 도래하리라고는 예상하지도, 기대하지도 않는 것이 어쩌면 더 비극적인지도 모르겠다.


촛불이 체리향기가 되어


    비참한 일상을 살아가던 이 땅의 백성들이 촛불을 하나씩 들기 시작했다. 그 불씨가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올 여름 이화여대에서 학생들이 학교 측의 방만한 운영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면서 시작된 소요는 급기야 총장이 사퇴하는 단계로까지 번졌고, 곧이어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입학부정이 알려졌다. 조직적으로 학교측이 정유라의 입시부정에 개입을 한 정황이 포착되었고 학생들은 다시 분노하였다. 거기서부터 봉합되었던 체리향기는 풀어져서 스멀스멀 번져나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후 최순실의 행각은 단순한 입시부정에만 그치는 것이 아님이 드러났다. JTBC를 통해 일파만파로 전해지기 시작한 최순실의 국정농단은 들불처럼 박근혜에 대한 의혹과 분노와 울분으로 번져나가면서 바른 뼈 같았던 시민들은 하나 둘 광장에서 촛불을 들기 시작했다.  

    지금 돌이켜보니, 촛불은 계속 불타오르고 있었다. 304명의 죽음이 농락되고 왜곡되었던 4.16 세월호 광장에서, 평화를 전쟁으로 바꾸려는 강정과 성주에서, 자본의 물신이 발악하던 용산과 밀양에서, 사람의 인권이 짐승의 야만 앞에 짓밟힌 소녀상 앞에서, 그리고 백남기 농민이 시신이 안치되었던 장례식장 앞에서도 촛불은 계속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었다. 그 하나하나의 한과 설움, 울분과 분노, 그리고 염원과 기도가 2016년 11월에 나비효과가 되어 빅뱅을 일으킨 것이다.  

    광장에서 촛불을 밝히면서 우리가 얻어낸 수확은 박근혜에 대한 탄핵안 통과도, 새로운 민주주의에 대한 상상도 아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하나 하나가 ‘채리향기’였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것이다. 체제와 권력이 그토록 감추고 싶어하고 두려워하던 그 비밀을 말이다. 혁명이 미래로부터 도래하는 어느 한 슈퍼스타가 지니는 광할한 빛의 에너지에 의해 성취되리라는 환상에 젖어있던 백성들에게 촛불은 거짓과 어둠의 세력을 몰아내는 건 그런 거대한 빛이 아니라 인고와 어둠의 세월을 살아온 여기 광장에 모인 작은 촛불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또한, 촛불은 언제나 세상을 세상답게, 사람을 사람답게 돌이키는 것은 어떤 특정집단의 영도력과 일부 계층의 기획과 조작에 의한 것이 아니라 촛불을 들고 어둔 밤을 밝히는 무수한 개개의 단자들임을 알려주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촛불을 밝혔더니, 그 수백만 촉의 빛을 받아 체리향기가 어디서부터인가 본격적으로 발향하기 시작했고, 그 생기에 취한 사람들이 마른뼈가 되살아나듯 살아서 꿈틀거리더니 말하고 춤추고 노래하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는 그 향기에 취해 중독중이고 그 중독은 누구처럼 밀실에 갇힌 향락의 중독이 아닌 드넓은 광장에서 맛보는 혁명에 취한 중독이다. 서울 광화문 광장은 에스겔이 말하는 묵시론적인 환상이 실현되는 공간이 되었고, 우리는 지금 그곳에서 묵시가 실재가 되는 메시아적인 시간에 참여하고 있다. 천천히 그리고 똑똑히 이 시간을 두 눈 부릅뜬 채로 즐기라.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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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편집장
    2016.12.21 19:59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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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마지막 웹진(99호)이 발행되었습니다. 2016년 한 해 동안 월 2회 2주 간격으로 총 24회 웹진이 발행된 셈입니다. 필진들을 헤어려보니 40명이 훌쩍 넘어가네요. 무엇보다 편집장의 원고 독촉에 시달리면서도 늦지 않게 옥고를 보내준 국내외 여러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재미있게 읽고 따듯한 느낌 나누어준 독자분들께도 감솨. 내년에도 큰 목표나 다짐없이 그냥 해오던 대로 공기처럼 일상처럼 거기 한 켠에 우뚝 서 있도록 하겠습니다. 내년에도 변함없는 관심과 애정 부탁드립니다.


눈이 한 번 내리고 간


십이월의 오늘...



푸욱~ 담궈 두었던,


해 질 녁


밭질에 피부를 뚫는


독한 모기떼 같은 여름의 볕을


꺼냈다.



겨우 십이월인데,


여름 밭에 김 매러 다녔던 치매 할머님이 떠나셨고,


가물었던 배추밭에서, 함께 물을 대며 쿨럭이시던 할아버님도 어제.. 떠나셨다.



그 배추밭 앞에서 깨를 털던 할머님께선


그날의 하루를 일기에 적었다.



'오늘은 펑뚜기 장사가 와서 펑뚜기도 맛있게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며 재미있게 놀았다.


오후 4시경에 경로당 회원이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인생이란 너무 허무하고 쓸쓸했다.'





해질녘 밭질에 독한 모기떼 같은 인생도


사라지면 허무하고 쓸쓸하니, 


아름다운 것은


그저 지나간 것 뿐이다.




 

 

 이수만 作 (한백교회 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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