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생결단식 앞에서

 



양권석

(본 연구소 소장 / 성공회대 신학과 교수)


    4.16 세월호 유가족 협의회가 지금 광화문에서 “사생결단식”을 하고 있다. 사생결단(死生決斷)이라는 말과 단식(斷食)이라는 말이 합쳐 사생결단식이라 했으니, 살든지 죽든지 끝까지 가서 결말을 보고야 말겠다는 각오로 단식하겠다는 뜻이다. 왜 세월호 유가족들은 "사생결단식"이라는 엄청난 표현을 써가며 단식해야 할까? 효과적인 단식이 되려면, 희생자들을 포함한 많은 보통 사람들의 공감의 바탕 위에서, 그 공감하는 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권력자들이나 억압자들을 향해서 호소하고 저항하는 방식이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단식의 과정에서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 진실을 향한 공통의 인식이 얻어지고, 끝내 화해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출구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하는 것이 단식이다. 하지만 "사생결단식"이라는 타이틀을 만나면서 드는 생각은 희망보다는 염려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가슴 속에 자신들이 공감을 얻고 있다는 확신이 흔들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실을 볼 수 있으리라는 믿음과 끝내 소통하고 화해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마저 멀어지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사생결단식이라는 이 무거운 이름을 내걸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유경근 4.16 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이 단식을 시작하면서 페이스북에 올린, <사생결단식을 시작하며>라는 글을 몇 번이고 읽었다. 사생결단식을 감행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 배후가 하나 둘 그려진다. 온갖 방법으로 진실을 감추려고 하고, 진실을 찾으려는 모든 노력을 집요하게 방해하는 이 시대의 권력들이 있다. 뿐만 아니라, 진실보다는 권력이 중요하고 백성을 진실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먹고 사는 것을 원할 뿐이라는 민중 개돼지론도 버젓이 활개치고 있다. 더 나아가 진실로부터 힘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힘과 권력으로부터 진실이 나온다고 강변하면서, 먼저 권력을 잡고 난 이후에 진실을 문제 삼겠다는, 그래서 먼저 권력을 달라고 외치는 소위 국민이 뽑은 대표들도 있다. 그리고 먹고 살기에도 바쁜데 진실이 뭐 그리 중요하냐며 말없이 힐난하는 눈빛들이 그 성명서의 배경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사람들의 관심과 공감의 확산을 애써 가로막고 서 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어찌 세월호 유가족들의 단식뿐이겠는가? 노동현장 곳곳에서, 내가 일하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우리 서로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서 이야기 해보자는 외침이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공감과 메아리는 그 어느 때 보다 적다. 착취하고 억압하는 자가 들어주지 않고 공감하지 않는 문제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정치와 언론의 관심은 점점 멀어지고, 바라보고 듣는 사람들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마치 인정 받지 못하는 증언이나 순교처럼, 어쩔 수 없이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나 대가처럼, 메아리도 없이 바람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듯 하다. 그래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도 줄 수 없도록 철저히 차단되어 있다. 


    자신의 인간됨을 주장하면서 그리고 사람 대 사람의 진정한 만남과 대화를 요청하면서, 지금 거리에 서 있는 저 사람들이 이 무관심과 무공감의 시간을 얼마나 오래 견뎌야 하는 것일까? 참으로 호된 시련이다. 그들이 우리를 향해 묻고 있다. 정말로 이 세상이 인간이 살만한 세상이라 할 수 있는가? 아니 이런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당신들이 정말로 인간일 수 있느냐고 우리에게 묻고 있는 듯하다. 관심과 공감의 능력을 잃어버린 우리들의 무기력 앞에서, 탈출구를 찾지 못한 채 속으로 까맣게 타 들어간 이들의 분노가 지금 절망으로 기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생결단의 단식에 몸을 던지는 저들이 세계와 공동체와 인간 삶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들의 진실을 향한 염원에 연대하는 길뿐이다. 하지만 이 공감과 연대의 길은 우리 자신이 지금 맺고 사는 모든 관계들의 변혁을 통해서 가는 길이다. 지금 우리는 모래 알처럼 뿔뿔이 흩어져 살면서, 그렇게 고립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기 위해서 수 많은 연결 다리를 놓고 있다. 하지만 그래 보아도 잠시 스치듯 만날 뿐, 결코 서로를 향해 인격적으로 참여할 수 없는 매우 간접적이고 사물화된 접촉이 있을 뿐이다. 그처럼 간접화되고 사물화된 관계를 넘어, 직접적이고도 긴밀한 인격적인 만남의 가능성을 향해 자신을 개방하지 않고서는, 서로 간에 진정한 공감과 연대를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변명 같이 들리겠지만, 공감과 연대를 가로막는 엄청난 힘들 앞에서 우리는 지금 허우적거리고 있다. 나찌즘, 피시즘, 종교와 같은 신념의 체계들은 그 신념이 만들어 내는 불타는 증오심으로 수 백만을 살해했지만, 자본주의는 그 차가운 무관심과 탐욕으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지금도 살해하고 있다고 보는 유발 하라리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부와 권력으로 일컬어지는 사물을 향한 탐욕은 우리를 눈 멀게 하고 귀 멀게 하고 우리의 모든 감각을 마비시키고 왜곡한다. 만물을 생명과 인격으로 바라보기 보다는 사물로 바라보게 하고, 공약 가능한 수나 양으로 바라 보게 만든다. 그래서 김포 공항 청소 노동자들은 온갖 수모와 착취를 견디다 못해 그저 "인간대접을 받고 싶다"라고 하였다. 임금 얼마에 모든 것을 포기한 노동기계가 아니라, 사람으로 보아 달라고 하였다. 사람 대 사람으로서 서로 공감하고 소통하며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을 뿐이다. 


    사물에 대한 욕망이, 우리들로부터 관심하는 능력과 공감하는 능력을 빼앗아 버린 그 결과를 나향욱 기획관은 숨김없이 증언하였다. 그는 구의역에서 컵라면도 못 먹고 죽은 아이가 어떻게 자기 자식처럼 생각될 수 있냐고 반문하였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위선이라 하였다. 그에게 관심과 공감은 위선이다. 그에게는 사람과 사람이, 인격과 인격이 모든 장벽을 뚫고 서로 간절하고도 긴밀하게 만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인간과 인간이 만나서, 생명과 생명이 만나서, 새로운 삶의 공동체, 곧 우리가 이야기하는 코이노니아나 코뮤니온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자본주의 질서 하에서 우리들의 마비된 관심능력과 공감능력의 실상을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생명들과 함께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공감능력을 마비시키는 또 하나의 질서가 오랜 동안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인간의 유한함, 불완전함, 혹은 다 알지 못함이 가져다 주는 불안과 두려움은 그 자체로 반드시 나쁜 것도 아니고, 언제나 인간의 삶을 억압하고 왜곡하는 것도 아니다. 그와 같은 두려움과 불안은 오히려 보다 높은 의미와 지혜를 추구할 가능성, 서로간에 보다 긴밀한 만남과 협력을 이루어낼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한다. 코이노니아, 코뮤니온, 페리코레시스 등과 같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인간관계나 공동체에 대한 이상들은 바로 그와 같은 유한함의 두려움과 불안이 만들어내는 건강하고도 창조적인 생산물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억압적인 권력이 조장하는 두려움과 공포는 그 백성들을 끊임없이 노예로 만든다. 그리고 그 노예들 사이에 인격적 공감과 연대가 자라 날 수 있는 가능성을 처음부터 차단한다. 전제정치 이데올로기나 분단체제의 이대올로기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지배를 벗어나면 곧 죽음이 있을 뿐이라는 협박이 만들어내는 공포와 두려움이 지배하는 체제다. 분단의 적대관계는 우리들의 이성적인 판단을 마비 시킬 뿐만 아니라, 때로는 사람을 사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최소한의 인간적 도리도 포기하도록 만들어 왔다. 사드 배치가 전쟁을 막는 수단인지 전쟁위험을 높이는 수단인지,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 애국이다. 더 나아가 그것이 한반도를 살아가는 인간과 생명들을 위해서 무슨 도움이 되는 것인지 아무도 설명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우리가 애써 모르는 척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반도는 사람이 사는 땅이 아니라, 국제적 헤게모니 쟁탈전을 위해서 언제든지 전쟁터로 만들 수 있는 땅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자본주의 시장의 물신주의와, 분단체제의 적대주의가 서로 돕는 가운데서, 우리는 사람을 사람으로 생명을 생명으로 볼 수 있는 힘을 점점 잃어 왔던 것이리라. 이데올로기적 강제와 무절제한 경쟁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자폐적 각자도생의 길을 있는 힘을 다해 찾아야 했고, 그러는 사이에 사회적 책임, 공감, 죄책감등을 때때로 표현하기는 했어도, 그것들이 본심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라고 자신을 은밀하게 세뇌하였다. 그래서 도덕적 윤리적 책임의식에 구애되지 않고, 모든 사람과 사물과 사태를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는 능력을 발전시켜왔다. 어쩌면 그것이 지금 과대망상으로 치달아, 어떤 공감능력도 없이 세상을 자기 멋대로 심판하는 사이코패스적 단계로 나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이미 공감 능력을 잃어버린 세상이고 삶이라면, 사생결단식이라는 말이 오히려 위태롭고 불안하게 들리는 것이 당연하다. 


    현재의 상황을 참으로 위태롭다고 느끼는 내가 어쩌면 과도한 상상에 사로잡힌 것인지도 모르겠다. 민중들에게 가해지는 억압과 그것으로부터 오는 분노는 자기 파괴적 폭발의 가능성과 자신과 세상의 삶을 변혁하는 새로운 힘으로 솟아 오를 가능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배웠다. 사실 민중은 자기파괴적인 폭발의 가능성을 억제하여 보다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 지금도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자신들을 사람으로 대접해 달라고 외치는 그분들과, 사생결단의 단식을 하고 있는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은 이미 그와 같이 자신의 고통을 뜬 눈으로 직시하면서, 지금의 고난을 새 희망의 밑거름으로 삼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나찌의 억압하에서 아무도 들어주지도 공감해 주지도 않는 유대인들의 고통과 분노를 바라보면서, 마르틴 부버는 억압의 반대는 자유가 아니라 코뮤니온이라고 하였다. 억압과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각자도생의 삶으로 도피하는 길이 아니라, 끝내 사람과 사람 생명과 생명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이루어 내는 길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미 민중은 그 길을 가고 있다. 각자 도생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를 향하여 우리를 부르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향하여 진정으로 공감하고 연대하며, 진실을 향해 가는 길을 향해 우리를 부르고 있다. 그러므로 문제는 이제 응답해야 할 우리다. 이미 길들여진 무관심과 무공감의 삶으로부터 벗어나, 적극적으로 함께 공감하고 연대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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