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신학가이드2]

새관점주의의 시작

유대교에 대한 오해와 진실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기독교인으로서 한번쯤은 받게 되는 질문 또는 고민해보는 것이 제사에 관한 일이다. 기독교도로서 제사를 허용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이를 우상숭배로 보고 금해야 할 것인가? 한국에 (그 당시에는 조선) 18세기말 들어온 카톨릭 교회의 선교사들은 조선인들이 자신들의 이미 사망한 부모나 조부모들을 신처럼 받드는 행위를 보고 아연실색했다. 아마 그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을 것이고, 자녀된 자들로서 마땅한 도리라든가 그렇지 않으면 재앙을 받게 된다든가 하는 말들을 들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물음을 교황청에 올리게 되었고, 교황은 제사행위가 우상숭배라는 결정을 내려준다. 당시 기독교로 개종한 한 여성은 자신의 아들에게 제사상을 차리지 말로 자신을 신주로 모시지 말라는 유언을 하고 사망하고 아들 윤지충은 그 어머니의 유언을 받들게 된다. 당시 양반이었던 윤지충의 행동을 패륜으로 여겨 참수해 버리는 일이 벌어졌으니 이 사건이 1971년의 신유박해였다. 결국 1936년 교황 비오 11세가 제사를 하나의 문화로 봄으로서 교황의 결정이 번복되었고 제사를 드리냐 마느냐의 목숨을 건 종교적 결단을 해야했던 위기 상황은 교황의 말 한마디에 신앙과는 크게 상관이 없는 문화적 행위로 바뀌게 된 것이다. 

    한 인간의 장례와 제사로 연결되는 의식은 유교적인 의미를 가진 행사일뿐 아니라 샤머니즘적 의미도 담겨있다고 들은 기억이 있다. 복잡한 여러 의식은 유교적 우주론과 가치가 한국에 토착화 되어 자연스럽게 발전하였다는 이야기였다. 그러한 역사를 가진 하나의 의식을 단순히 이것이다라고 정의하는 것은 그 문화권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필자는 가끔 한국신학에 관심이 있는 미국인들에게 ‘한’ 또는 ‘정’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받곤한다. 그때마다 주저리 주저리 여러 이야기를 하기는 하지만 몇마디로 정의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 적이 많았다. 무엇보다 그 문화권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언어는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무엇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 몇가지 문장으로 정의를 내려달라는 요구는 책의 한 챕터를 몇마디로 요약해 달라는 것 만큼이나 어려웠다. 독일 기독교백과사전에는 조상숭배가 이렇게 요약되어 있다고 한다. “조상숭배는 죽은 조상들의 진노를 막고 축복을 받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진다. 살아있는 후손들이 죽은 조상들을 위한 제의식을 잘 수행할 때, 조상들은 그들을 잘 보호해주며, 반면에 후손들이 제의식을 소홀히 할 때는 화를 가져다준다.” 한국의 문화에 대해 과문한 필자이나 조상에 대해 존경과 죽은 자에 대한 관심이 이렇듯 미개한 종교적 행위로 짧게 정의되는 것에는 실소를 금할 수 없다. 하나의 우주론을 행성했고,  그 안에 정치와 인간의 종합적인 삶을 담았던 철학적 체계가 하나의 우상숭배로 전략해 버린 것이다. 한 서구인의 또는 서구적 체계에 물든 세련된 한국인의 눈에서 말이다. 20세기 인문학의 화두였던 타자에 대한 기본적인 담론을 입에 올리지 않더라도 타인의 문화에 대한 폭력적이기까지 한 편견의 문제는 상아탑내에서도 존재해왔다. 오늘 다루려고 하는 C.E. (공통시대) 1세기의 유대주의에 대한 해석의 문제만큼 명확한 예를 보여주는 것도 드물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른바 바울의 새관점주의 연구의 실질적인 토대가 되었던  E. P. Sanders 의 연구를 그의 책,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주의’ (Paul and Palestinian Judaism)를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샌더스에 대해서는 두 번으로 나누어 살펴볼 것인데, 이번 웹진에서는 샌더스의 연구를 이해하기 위한 배경이 그 주를 이루게 될 것이다. 다음의 글에서는 과 타나임 문헌, 사해문서와 위경과 외경에서 본 유대주의와 바울과의 관계를 다루게 될 것이다.

 

    샌더스는 누구인가?

    1962년 남감리교 신학대학을 졸업한 샌더스는 그 후 2년 동안 괴팅헨과 옥스퍼드 대학, 그리고 예루살렘을 두루 다닌후 뉴욕의 유니온 신학대학의 데이비스 (W. D. Davies) 밑에서 박사논문을 1966년에 마치게 된다. 샌더스의 독일, 영국, 그리고 이스라엘의 여행과 데이비스와의 만남은 그 후로 그의 연구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샌더스의 스승인 데이비스는 영국 신약신학의 거장인 다드 (C. H. Dodd)와 라비닉 문서들와 신약성서에 대해 많은 글을 남겼던 유대인 법학자인 다우베 (David Daube)와 캠브리지에서 함께 연구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는데 듀크를 거쳐 유니온 신학대학에서 가르치게 된 후, 한 길건너에 위치하고 있는 Jewish Theological Seminary of America의 탈무드 학자인 핑컬슈타인 (Luise Finkelstein), 랍비인 길먼 (Neil Gillman), 그 유명한 유대교 신학자 랍비 헤셜 (Abraham Joshua Heschel)과 친분을 쌓고 있었다. 유대교와 신약성서의 관계에 대한 연구에 박차를 가해 샌더스가 유니온에서 공부할 당시, 데이비스 ‘바울과 라비닉 유대주의’ (Paul and Rabbinic Judaism)을 출판하였는데, 이 책이 샌더스에게 큰 영향을 미쳤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드로 부터 시작된 공관복음과 바울서신의 연구는 상대적으로 당시에 대세를 이루고 있었던 독일의 신약성서신학의 바깥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이를 이어 받은 데이비스는 여러 유대교 학자들의 연구를 직간접적으로 접하면서 예수 시대의 유대주의의 심도깊은 연구가 신약성서신학의 새로운 축으로 떠오를 것을 예감하였다. 데이비스는 그의 첫 저서인 ‘바울과 라비닉 유대주의’에서 당시에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바울과 헬레니즘과의 연관에 대해 반기를 들고 오히려 바울의 여러 사상이 당시의 유대주의와 필접한 연관이 있음을 주장하였다.

    신약성서신학에서 데이비스의 연구는 크게 두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당시에 거대한 트랜드를 형성했던 바울과 1세기 헬레니즘의 관계에 대한 단절을 의미하였다. 바울이 당시의 헬레니즘과 연관이 전혀 없다고 하는 것은 넌센스이다. 하지만 20세기 초중반의 신약성서 신학의 분위기는 바울 기독교의 원천을 헬레니즘에서 보는 연구가 활발하였다. 가장 큰 이유는 바울이야말로 1세기 유대주의의 율법주의 또는 유대주의 기독교에 반대하여 나타난 운동이었고 자연스럽게 헬레니즘의 여러 사상들을 흡수하면서 기독교가 형성되었다는 인식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데이비스는 바울서신과 복음서, 그리고 유대주의의 율법이해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바울의 서신이 오히려 여러면에서 유대주의와 연관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데이비스의 연구의 두번째 의미는 헬레니즘에 중심한 바울의 연구를 넘어서 바울을 이해하기 위해 유대문헌에 대한 연구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증명했다는 것에 있다. 하지만 이 연구는 길고도 힘든 여정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일단 1세기의 유대주의가 어떤 것이었냐에 대한 답을 내리기 위해서는 당시의 거의 대부분의 자료들을 연구하여 선정하고 읽고 해석함을 거듭해야 하기 때문이었고, 적어도 당시에 기독교 신학역사 안에는 그러한 연구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니온에서 샌더스가 학위를 마치고 십여년이 지난 1977년 캐나다의 맥매스터 (McMaster University)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던 샌더스는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주의’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를 세상에 내어놓게 된다. (원래는 1975년에 완성하였으나 2년 동안의 노력 끝에 겨우 출판하였다.) 

    샌더스는 그의 연구 대상을 팔레스타인 유대주의 (Palestinian Judaism)으로 한정하고 이를 세부분으로 나누어 접근한다. 첫번째는 라비닉 유대주의이고, 두번째는 사해사본에서 나타나는 유대주의이고, 세번째는 외경과 위경에 나타난 유대주의이다. 두번째와 세번째에 대해서 익숙한 독자가 많을 것이나 라비닉 유대주의에 대해서는 필자조차도 풍문으로만 아는 수준인바, 라비닉 유대주의에 대한 간략하게 나마 설명하고자 한다.

 

    타나임 시대 –라비닉 유대주의의 시대-

    그 명확한 시작은 알려져있지 않으나, 제 2성전기의 유대사회에는 예루살렘에는 대 산헤드린 (Great Sanhedrin), 그리고 다른 유대공동체가 존재했던 도시들에는 소 산헤드린 (Less Sanhedrin)이 조직되었고 그 우두머리를 나지(Nazi)라 불렀다. 산헤드린은 유대사회의 최고위 결정기관이었는데, 대법원과 같은 역할과 각종 정치적 문제들이 논의되고 의결되었다고 한다. 초기의 산헤드린의 우두머리는 대제사장이었으나 BCE (공통시대이전, 주전) 1세기 후반부부터 특출한 두명의 율법학자들과 그 제자들이 서서히 중심세력으로 떠올랐다. 우리가 샴마이 학파와 힐렐학파로 알고 있는 이들은 샴마이 하 자켄 (Shammai ha-Zaken, 50 BCE – 30 CE 30)과 그를 따르는 자들인 샴마이의 집 (Beit Shammai- Academy of Shammai)과 힐렐 (Hillel the elder, 110 BCE – 10 CE)과 힐렐의 집 (Beit Hillel – Academy of Hillel)이 그들이었는데, 샴마이와 힐렐은 당시에 내려오던 오경과 구전전승의 법률적인 해석에 독보적인 스승들었다. 유대전승을 따르면 샴마이는 문자적 해석을 강조한 반면 힐렐은 율법에 대한 유연한 해석을 중시함으로써 서로 대립하였고 결국 예수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힐렐이 대 산헤드린의 주도권을 가지게 되었고 샴마이와 힐렐로 대표되던 랍비전통은 힐렐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발전하게 된다. 유대인들의 연표를 보편 공통시대 10-220년대(주후 10-220년과 같음)를 탄나임 (Tannaim)이라고 불렀는데 이시대에 라비닉 유대주의가 그 기틀을 형성하게 된다. 탄나 (Tanna)는 선생이라는 뜻인데, 랍비 선생을 뜻하며 이의 복수인 탄나임 (Tannaim)은 이 시대에 구전으로 전승되던 율법과 그 뜻을 가르치고 이를 문서로 기록했던 대표적인 랍비들을 뜻한다. 이때 당시에 구전으로 전승되어 오던 구전 율법들이 200년경에 문서로 기록되었는데 미쉬나 (Mishnah)라 불렀다. 그래서 탄나임시대는 미쉬나시대라고도 불리며 대략 120명의 탄나임들이 알려져 있다. 한편 미쉬나외에 탄나임들은 문서로 남아있던 모세오경 (토라, Torah 또는 Tanak)에 대한 해석에도 중요한 업적을 남겼는데, 그 기록들을 미드라쉬(Midrash)라고 한다. 미드라쉬는 크게 율법에 대한 해석인 할라카 (Midrash halakha)와 그 이외의 내러티브등에 대한 주석인 미드라쉬 학가다 미드라쉬 ( Midrash Aggadic) 로 나누어지며, 출애굽에 대한 미드라쉬(주석)는 ‘메킬타’ (Mekhilta)라 하며, 레위기는 ‘시프라’ (Sifra), 민수기와 신명기는 ‘시프레’ (Sifre)라 한다. 결국, 1세기의 율법연구의 중심으로 부상했던 율법학자인 힐렐로 부터 시작하여 그의 제자들이 탄나임의 시초가 되었고 이후의 광범위한 유대주의의 역사의 중요한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를 라비닉 유대주의 (Rabbinic Judaism)이라 하는 것이다. 

    라비닉 유대주의가 유대역사의 한 축으로 떠오리게 된데에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 공통시대 70년경 오랜동안의 저항끝에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 무너지자 중요 율법학자둥 하나였던 요하난 벤 자카이 (Johanan ben Zakai)는 예루살렘에서 좀 떨어져 있었던 도시인 유대인들의 많이 거주했던 야브네 (Yavne)를 새로운 유대교의 중심지로 세우고 랍비들이 중심이된 유대사회의 재건을 이루고자 하였다. 예루살렘의 몰락은 당시의 유대교에게 새로운 도전이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성전, 제사중심의 유대교에서 율법중심의 유대교로의 전환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성전을 잃은 유대인들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공동체를 새롭게 세우기 위해 성전의 시대 이전에 유대사회에 주어졌던 율법에 대한 재해석이 필요했는데, 예를 들면 속죄의 효력을 가졌던 제사가 대신 과연 무엇으로 죄를 해결할 수 있는가의 문제등을 해결해야 했다.

 

    예수를 따르던 자들과 라비닉 유대주의

    라비닉 유대주의의 등장은 당시에 예수를 따르던 자들에게는 중요한 사건이 아닐수 없었다. 유대전승에 따르면 예수를 따르던 유대인들은 유대독립전쟁에 동참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예루살렘을 떠났다고 한다. 성서학자들은 야브네에서 있었던 얌니아 회의 등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이 시기에 유대주의가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을 저주하고 배척했으며 그 후로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사람들은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고 보고 있다. 적어도 데이비스나 샌더스의 연구이전의 성서학계가 가지고 있는 당시 유대교에 대한 시각은 이러한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의 대립을 기반을 하고 있다. 게다가 초기 예수를 따르던 유대공동체는 주류 유대사회에서 약자였을 것이므로 갑인 유대교로 인해 힘겹게 공동체를 지탱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와 유대 정치 분파들(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의 대립은 이러한 생각의 증거가 되었고, 예수는 당시의 성전중심의 또는 율법중심의 유대교를 개혁하고자 했던 인물로 그려졌다. 유대교와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공동체의 갈등이 가장 첨예하게 나타나는 것은 요한복음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를 죽이려 하는 것은 유대인들로 그려지고 있다. 이 갈등적 관계는 바울 서신에 대한 이해에도 그대로 그러났다. 바울이 다메섹도상에서 부활한 예수를 보고 말에서 굴러 떨어졌을때 (행 9:1-19), 이 기록이 바울이 기록한 것이 아닌 사도행전의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바울은 한번도 자신의 드라마틱한 회심에 대해서 말한 적이 없다.) 많은 설교자들만이 아니라 성서학자들도 이를 유대교와의 결별을 고하는 사건이라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유대교 또는 1세기의 유대주의(Judaism)는 기독교의 복음과는 반대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 이해되기 시작하였고 현재 신약성서라고 부르는 경전에 그려진 유대인들의 모습에서 유대교를 재구성해내기 시작했다. 결국 유대교는 20세기 성서학안에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기독교의 반명제로써 자리잡게 된 것이다.

 

    샌더스의 도전

    샌더스는 기독교의 반명제로서의 유대교의 모습은 몇몇 학자들의 생각이 아니라 신약성서학계의 공통적인 관점이라고 말한다. 곳곳에서 어느정도 균형된 생각을 보여주는 루돌프 불트만 (Rudolf Bultmann)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각주:1] 불트만이나 여러 학자들은 바울의 신학의 기본 구조가 유대교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이신칭의에 대한 바울의 생각은 정확하게 유대교와 반대지점에 있다고 생각했다.[각주:2] 샌더스 자신도 바울과 당시 유대교간의 율법에 대한 의견에 차이가 있음을 인정한다. 샌더스의 불만은 신약성서학자들이 바울의 논쟁적인 어투에서 나오는 유대교에 대한 설명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고 유대교에 대한 연구의 목적을 그 받아들인 관점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에 있었다. 바울이 생각한 유대교와 당시의 유대교간에 차이가 없을 것이라는 환상이 신약성서학이라는 학문안에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이다.[각주:3]

    당시의 유대교에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성서학자들의 이해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세기의 유대교의 하나님은 한마디로 말하면 저울을 들고 있는 하나님과 같다. 한쪽에는 율법을 통한 선행이 담기고 다른쪽에는 죄의 양이 담긴다. 그래서 죄의 양이 무거운 자들에게 임하는 것은 심판이고 선행의 양쪽으로 저울이 기운 사람들에게는 장차 임할 하나님나라를 누릴 자격이 주어진다. 신약성서에 나타난 율법주의적인 바래새인들의 모습과 바울의 논쟁적인 어투를 바탕으로 당시 유대주의의 위의 언급했던 여러 문헌들에서 이를 지지하는 내용들을 바탕으로 재구성해낸 모습이 바로 철저한 율법의 행함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구원을 불안해하며 살아가는 개인들의 집합이 바로 유대교의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대부분의 현대의 기독교인들조차도 당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유대교에 대한 생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구약성서의 하나님을 생각해 보더라도 이렇듯 경도된 율법주의는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구약성서의 하나님이 누구이던가? 이스라엘이라면, 자신의 백성이라면 사죽을 못 쓰는 분이 아니었던가? 우리가 자주 부르는 찬양에서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는’ (스바냐 3:17) 그런 하나님이 아니던가? 히브리 백성을 너무 사랑하셔서 가나안 민족들을 멸절하시고, 이집트의 군대를 산채로 수장시키신 하나님이 아니었던가? 그런 하나님과 자신들의 이야기를 어릴때부터 외우고 마음에 새기는 민족들이 자신의 죄의 양이 선행의 양보다 조금더 가벼운지 무거운지 계산기를 두들기는 심판자로 하나님을 생각했을까? C. G. 몽테피오레 (Claude G. Montefiore)는 20세기 초에 신약성서에 대한 책을 쓴 유대교 신학자였는데 유대인인 그가 본 바울이 생각한 유대교는 당시의 라비닉 유대주의와는 명확하게 달랐다고 말한다. 라비닉 유대주의의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셔서 율법과 회계를 통하여 인간이 쉽고 효과적으로 하나님과 만날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러한 죄의 문제 때문에 천지가 뒤집어지는 우주적인 사건, 즉 화육 (Incarnation)과 십자가와 같은 사건이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았다는 것이다.[각주:4] 이와 비슷한 논지로 샌더스의 선생이었던 데이비스는 바울은 메시아가 이미 왔다고 믿은 랍비와 다름 없었다는 생각을 개진하기도 하였다. 샌더스의 질문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그렇다면 과연 당시의 유대교는 어떤 종교였었는가? 그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그들의 기록을 바탕으로 라비닉 유대주의, 사해문서에 나타난 유대공동체, 그리고 외경과 위경의 기록들을 통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먼저 보통의 유대교에 대한 생각이 과연 옳은지 문서들을 읽음으로 알아보고 오해의 소지가 있다면 바로 잡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하지만 여기에서 머물지 않고 바울과 가지는 차이점이 있다면 분명이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 샌더스의 생각이었다. 각설하면 유대교에 대한 오해가 있다면 풀고, 바울과 당시의 유대교가 얼마나 비슷하고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밝히자는 것이 샌더스의 입장이었다. 다음 웹진에서는 본격적으로 샌더스의 의견을 들어보기로 하자.

(원래 샌더스에 대한 글을 한편으로 끝내는 것이 필자의 목적이었으나 새관점주의의 연구를 이해함에 있어서 배경이 되는 것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번 웹진을 맺으려 합니다. 독자들의 양해를 구합니다.)

ⓒ 웹진 <제3시대>

 

  1. E. P Sanders,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a Comparison of Patterns of Religion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7), 3. [본문으로]
  2. “바울과 유대교사이의 차이는 그의 현실적 실재로서의 의에 대한 확신뿐 아니라 좀 더 확실한 주제에 있는데, 하나님의 무죄함에 대한 결정에 관한 조건이 바로 그것이다. 유대인은 율법을 지킴, 즉 율법에 나와있는 행위들을 완수하는 것이 무죄함을 얻는 조건이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바울의 관점은 이와는 정반대이다.” Rudolf Bultmann,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Waco, Tex.: Baylor University Press, 2007), 273. (Sanders,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4.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3. 바울이 생각하는 유대교라는 것마저도 어거스틴이나 루터가 생각했던 유대교라는 것은 스탠달의 글에서 설명했었다. 바울이 과연 유대교를 어떻게 생각했는가에 대한 문제는 아직도 여러 학자들의 논쟁속에 있다. [본문으로]
  4. Sanders,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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