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세론’ VS. 데리다 ‘유령론’ (I)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

 

프롤로그 1: 간략한 정세분석

 

지난 4.11 총선이 있기 전 많은 예측들이 있었다. 역시 가장 굵직했던 총선 이슈는 지난 4년간 MB정권의 실정에 대한 심판론이었다. 그 무렵에 터졌던 사정기관에 의한 불법민간인 사찰, 친인척, 측근비리 등 많은 호재들은 야권의 총선승리를 짐작케하였고, 야당 역시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고자 야권연대를 통해 최대한의 표를 흡입하고자 노력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예측과 다르게 야당은 박근혜 혼자 선거를 치루다시피 한 새누리당에게 완패하였다. 수도권에서 승리하였고, 부산.경남에서 득표율면에서 새누리당과 접전을 벌였다는 점, 통합진보당이 비례대표 득표에서 200만 표가 넘는 지지를 받았다는 점등 야권은 몇 가지 긍정적 지표를 들면서 애써 선거결과에 대해 자위를 해 보지만 그 변명은 궁색해 보인다.

반면, 새누리당 입장에서는 총선의 승리도 고무적인 사실이지만, MB 정권에 대한 심판론과 박근혜의 대세론이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는 별개의 사안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는 점에서 이번 총선은 (박근혜 캠프입장에서) 연말 대선으로 나가는데 확실한 토대와 명분이 된 사건이었다. 총선 후 새누리당은 현재 당의 전 조직이 친박계 인사들로 채워졌고, 완성된 박근혜 대세론 앞에서 그 누구도 딴지를 걸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여기에다 천우신조인지, 통진당의 내분으로 인해 진보세력 전체가 매도당하는 사태가 현재 전개되고 있고, 이를 종북논쟁, 빨갱이 시비 등으로 쌍으로 엮으면 연말대선 때까지 충분히 야당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오히려 본 게임보다 ‘표정관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가 새누리당의 입장에서는 더 고민해야 되는 현재 정국이다..

물론, 대한민국 선거의 특성상 대선까지 남은 6개월은 너무나 긴 시간이고, 노무현의 경우에서도 드러났듯이 한 번 바람이 일면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한국정치의 지형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10년 전에 한번 쓰라린 학습효과를 경험했던 새누리당은 다시금 그 악몽을 되새김질 안하려고 노력할 것이고, 10년 전 노무현이라는 극적인 감동드라마를 연출했던 야권은 노무현만한 내러티브를 갖추고 있는 인물이 없어 고민이다. 현재 잠재적 대항마로 하마평에 오르는 안철수는 정확한 실체가 없는 인물이고, 문재인은 노무현의 그림자를 넘지 못한다. 이러한 모든 점을 감안하고 종합해 봤을 때, 현재 스코어 누가 봐도 7회말 투아웃 7:0, 이제 아웃 카운트 하나면 박근혜의 7회 콜드게임승이다. 이것이 솔직한 지금까지 2012년 대선전광판이다.

 

프롤로그 2: 선린상고는 왜 졌을까?

 

서른 살 까지 다녔던 나의 모교회는 동대문운동장에서 한 블록 위 장충동 족발집이 시작되는 초입에 있었다. 덕분에 나는 가끔 교회땡땡이치고 혹은 교회 마치고, 아니면 교회핑계대고 동대문야구장(당시에는 서울야구장이었다)으로 부흥회가는 심정보다 더 간절하고 뜨거운 마음으로 발길을 옮겼었다. 정말이지 동대문운동장이 우리교회 근처에 있었던 것은 찬송가 가사처럼 ‘그 크신 하나님의 은혜’였다.

동대문운동장 개표소를 지나 구장으로 들어가기 전 긴 복도는 어딘가 구리고, 어둑어둑하고, 퀘퀘하고, 진한 마초성이 느껴지고, 음란했다. 내가 동대문운동장을 더 많이 갈 수 있었는데 안 갔던 이유는 그 복도를 걷는 것이 싫어서였다. 하지만, 눈 질끈감고 판도라상자 같았던 복도를 지나 야구장안으로 들어가는 문을 통과하면 파란잔디밭과 파란하늘이 펼쳐지는데… 내 생의 자유와 해방에 대한 가장 원초적 감각을 꼽으라면 단연 동대문운동장 복도를 지나 구장으로 통하는 입구에 서서 만났던 그 하늘과 잔디에 대한 기억이 아닐까 싶다. 정말 그렇다. ‘하나님은 교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분명 동대문 운동장안에도 있어!’라고 소년 상철은 분연히 소리치지는 않았지만, 나의 음험한 일탈에 난 떳떳했고, 오히려 사람들에게 ‘야구장에서 들려오는 기쁜소식, 복음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지?’를 놓고 한동안 전전긍긍 했었다.

지금은 고교야구의 열기가 프로야구의 등장으로 인해 시들해졌지만 내가 어렸을때까지만 해도 고교야구는 가히 국민스포츠라 할만 했다. 필자가 고교야구에 매료되었던 이유는 순전히 선린상고(현 선린인터넷고등학교)때문이었다. 당시 선린상고는 박노준, 김건우라는 불세출의 스타를 보유하고 있던 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해인가(81년 or 82년) 네 번이나 결승에 올랐지만 네 번 모두 준우승이라는 비운에 울었던 팀이기도 했다. 특히, 경북고와 선린상고와의 청룡기 결승전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세드무비다. 경북고에는 당시 빼어난 좌완투수 성준과 제2의 김재박으로 불리던, 지금 삼성라이온스의 감독이 된 유중일이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선린상고의 적수가 되지는 못했다. 초반부터 선린상고가 원사이드하게 앞서는 상황에서 박노준이 홈으로 쇄도하다가 그만 다리골절로 병원으로 호송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만다. 그때부터 김건우도 흔들리고, 잘하던 야수들은 실책을 하고, 결국 그 결승전에서 선린상고는 경북고에 역전패당해 또다시 준우승에 머물고 말았다.

박근혜 대세론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첫 꼭지에서 갑자기 필자의 잊혀졌던 동대문운동장과 선린상고에 대한 기억이 뗘오르는 이유는 왜일까? 막강한 전력을 자랑하던 선린상고! 하지만, 나는 늘 불안한 마음으로 그들의 게임을 지켜봤고, 앞서고 있는 상황에서도 뭔가 꺼림칙했으며, 패배가 확정이 되면 안타까운데도 불구하고 그 패배가 오히려 안심이 되고 안도가 되는 증상이 발생했었다. 앞서고 있고 이기고 있는 이 상황이 오히려 불안하고 불쾌한… 패배와 죽음이 확정되고 나서야 오히려 모든 갈등이 해소되는 이 황당한 시츄에이션! 나중에 안 사실인데, 이를 프로이트는 ‘죽음본능(타나토스)’으로 설명하더군. 프로이트를 알지 못했던 나는 선린상고 야구팀에게 뭔가 알 수 없는 액운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다분히 ‘전설의 고향’을 많이 본 탓이겠지만, 분명 그랬다. 선린상고 야구팀에게는 뭔가 설명이 불가능한 유령이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 유령이 이제 박근혜에게로 옮겨가고 있다면……흐흐흐(이것은 유령이 움직이는 소리임). 이제야 비로소 데리다로 넘어간다.


데리다가 수입되던 무렵 우리는…

 

1980년대 한국사회는 그야말로 화려한 내공을 뽐내는 각 정파의 무사들이 강호의 주도권을 놓고 필력을 휘날리던 시절이었다. 흔히 사회구성체논쟁(사구체논쟁)으로부터 시작된 한국사회의 진보논쟁은 민족해방(NL)과 민중민주(PD)로 나뉜 채 치열한 권력투쟁의 양상을 보였고, 물론 그 과정에서 가깝게는 요근래 발생한 통진당 사태에서부터 멀게는 민노당 분당까지 볼썽사나운 광경이 연출되기는 했지만, 진보진영내에서의 논쟁은 분명 한국 사회가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는데 중요한 동력의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19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를 거치면서 연쇄적으로 발생한 소련과 동유럽 공산주의 의 붕괴는 20세기 세계체계의 한 축을 담당했던 거대 담론을 한 순식간에 무너뜨림과 동시에 진보논의의 틀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광풍이 몰아닥친 것이다. 그 무렵에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말과 자유주의의 최종 승리를 선언하였고, 포스트모던 사상의 원조라고 평가되는 리오타르는 ‘더 이상 거대시사는 없다’고 소리쳤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국도 이러한 세계사적인 흐름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아니 가장 순식간에 이러한 시대적 조류에 함몰된 곳이 한국이 아닐까 싶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온갖 진보 사상이 넘쳐나던 한국의 변혁 운동은 1990년대가 되자 일제히 "거대 담론은 없다"면서 미시정치. 미시권력에 집중하는 시민운동의 시대로 전환된다. 김영삼 정권 때 등장한 경실련(초대사무총장: 서경석)과 김대중 정부 때 맹활약한 참여연대(초대사무총장: 박원순)같은 시민 단체는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창립되었다. 기한이 만료되고 용도가 폐기된 거대 담론보다는 삶의 작은 변화와 개선에 주력하자는 것이 그들의 모토였고, 이를 계기로 한국의 진보는 점차 전선이 다양해지기 시작한다. 풀뿌리 민주주의니, 소액주주운동이니, 대안학교/대안교육, 생명/환경 운동, 선거 때 등장했던 시민단체 주도의 낙선운동 등이 우리 귀를 스쳐갔던 이 무렵 등장했던 새로운 운동 형태들이었다. 어느 시인은 이러한 현상에 직면하고는 ‘잔치가 끝났다’며 이제 그만 손 털자고 허탈하게 속삭였고, 가열차고 숭고하게 ‘민주주의여 만세!’를 외쳤던 김지하는 도사가 되어 ‘생명, 율려’ 어쩌구 하면서 새로운 문명의 틀을 제안했다. 이 틈을 타서 사노맹사건으로 구속되었던 박노해가 슬그머니 전향을 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과거 혁명의 전사들은 하나씩 본인들의 이상을 현실정치에서 실현하겠다고 큰소리치며 국회로 들어갔다.

너무나 아이러니컬했던 현상은 탈냉전과 탈이념이 선전되어지던 그 시절, 한국 사회는 여전히 너무나도 이념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었다는 사실이다. 1989년에 문익환 목사님과 임수경의 방북이 있었고, 그 후로 한동안 통일에 대한 논의가 우리사회를 지배했었다. 당시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읽고 지리산을 종주하고,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I>을 읽고 남도로 달려갔던 청년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하루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들먹이며 유연하고 세련되게, 또 하루는 통일과 민족을 이야기하며 뜨겁고 가열차게… 그렇게 그 세대는 개념의 홍수 속에서 붕붕 떠다니면서 배회하고, 배회하다 좌초하고, 그러다가 지쳐갔다.

데리다가 본격적으로 한국 사회에 알려지고 소개되어지던 때가 바로 그 무렵이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쓰나미가 몰아치던 90년대 초, 하지만 여전히 이데올로기적인 한국땅에 데리다는 폼나는 포스트포더니즘 아바타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데리다 지도 그리기

 

통상 데리다를 읽다보면 데리다의 전기사상[각주:1]과 후기사상[각주:2]이 극명하게 나뉘는 것을 볼 수 있다. 데리다 전기를 지배했던 키워드들을 살펴보면 dissemination(산종), differance, supplement(대리보충), fold(주름), margin, trace(흔적), writing 등의 어휘들이고, 데리다 후기는 specters, gift(선물), law, hospitality(환대), pardon(애도), the messianic without messianism, justice 등 보다 실천적인 측면으로 이동했음을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데리다가 시종일관 문제를 제기했던 부분은 서구 정신사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원본(Origin)불변의 법칙’이다. 통상 ‘로고스중심주의(Logocntrism)’라 부르는 이것은 ‘개념이란 개인과 집단 사이에서 고정된 의미를 지닌 채 소통된다는 믿음’에 근거하고, ‘어떤 단어의 의미는 세상과 소통되기 이전에 우리의 마음속에 현전한다’는 전제에 기초한다. 데리다는 이런 사유를 ‘현전의 형이상학(the metaphysics of presence)’이라 불렀고, 서구 정신은 이 허상위에 존재한다고 보았다. 데리다는 바로 이러한 서구정신의 전통에 대한 해체(deconstruction)를 시도한다. 그러나 데리다의 해체는 서구철학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논리적으로 수미일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그를 읽는 독자로 하여금 종종(아니, 매번) 낭패감으로 빠지게 한다.

본디 개념이란 자고로 다른 개념이나 특정 대상을 자신과 구별짓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개념의 힘이고 미덕이다. 이러한 개념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의지가 발동이 되고, 운동이 발생하며, 그 과정을 되풀이 하면서 세상은 진보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구 정신사에서 나타났던 진리를 향한 온갖 종류의 개념적 정의들은 당대의 시대적 고민과 요청에 대한 치열했던 논리적 추론의 결과물들이며, 가장 적합하게 한 용어 안에 그 개념을 담지하고자 했던 몸부림들이었다는 점에서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의미의 두께다. 
하지만, 데리다의  ‘해체’는 이러한 기존의 문법을 배반한다. 일차적으로 해체는 해체되어야 할 대상을 전제한다는 점에서는 개념과 개념을 구획지어 자신을 보호하는 서구철학의 패턴을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해체는 그 다음 단계에서 돌연변이한다. 해체는 앞으로 오게 될 또 다른 무언가를 향한 준비 내지 과정을 암시하는 것이지, 기존의 철학전통처럼 도래할 개념에 대한 지목이 없다. 이 부분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해체’를 불안하고 위태롭게 바라보게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해체’를 개념이라 부를 수 있는가? 어찌보면, 데리다가 말하는 해체(deconstruction)란 하나의 사유체계가 아니라, 기존 서구철학이 만들어 놓은 토대와 우상에 흠집을 내고 딴지를 거는 하나의 전술적 실천이라 해야 맞지 않을까?
데리다 전기사상은 이러한 전술을 위한 이론적 terminology들이 마련되었던 시기였으며,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차연(differance)’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차연은 ‘다르다’(differ)와 ‘연기하다’(defer)를 동시에 의미하는 데리다의 신조어이다. ‘현존(presence)’과 ‘부재(absence)’라는 서구전통철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차연은 현존하는 것도 부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현존의 효과를 발생시키는 부재이다. 현존은 ‘다름’을 통해 다가오고, 현존의 생명력은 ‘지연(or 연기)’을 통해 유지된다. 이러한 전술을 통해 데리다는 어떠한 개념도 자기 폐쇄적인 동일성안에 머무르지 못하도록 한다.
이 대목에서 데리다에 대한 일반적 비판이 대두된다. 기원과 로고스에 대한 지위와 권위가 상실하게 되면, 결국 회의주의와 상대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결국, 어디로 가자는 말인가? 데리다가 사람들에게 의심과 두려움의 대상이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보수적 입장의 사람들은 데리다의 해체로 인해 기존의 삶의 질서와 법칙이 와해될지 모른다는 불안을 느꼈고, 진보적 인사들은 데리다의 입장이 거대담론에 입각한 혁명의 기운을 무화시키고 체제에 대한 전복의지를 감퇴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는 이유에서 그를 비판한다. 이들의 던지는 비판의 칼날들에 데리다는 어떻게 반응하고, 그것이 데리다 후기철학을 대변하는 ‘유령론’과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그리고, 데리다의 ‘유령론’은 박근혜 ‘대세론’의 잡귀가 될 수 있을까? 

<다음 달 웹진에 계속>

 

ⓒ 웹진 <제3시대>


  1. 1967년 동시에 출판된 세 권의 책들, Speech and Phenomena(1973) Of Grammatology (1997) Writing and Difference(2003), 1972년에 역시 나란히 출판된 세 권, Positions(1981) Dissemination(1981) Margins of Philosophy(1982)가 데리다의 전기사상을 대표하는 저서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괄호 안의 연도는 미국에서 번역되어 출판된 해임) [본문으로]
  2. 후기 데리다의 윤리학과 정치학, 그리고 메시아성을 다루고 있는 책으로는 Rogues(2005) Specters of Marx(1994) Deconstruction in a Nutshell(1997) 등이 있고, 데리다의 후기 작업의 키워드라 할 수 있는 애도, 선물, 환대, 타자성을 담고 있는 책으로는 Acts of Religion(2001) Adieu to Emmanuel Levinas(1999) For What Tomorrow … A Dialogue(2004) Of Hospitality(2000) The Work of Mourning(2001) Given Time(1992) 등이 있다. 데리다가 직접 쓴 책 이외에 데리다 후기사상을 다루는 두 권의 안내서를 소개한다. 한 권은 빛나는 데리다 해설가 John D.Caputo가 쓴 The Prayers and Tears of Jacques Derrida(1997)이다. 이 책은 데리다 철학에 대한 개설서로, 특별히 후기 데리다 철학에 관심하는 연구가들에게 미국내에서 매력적으로 읽히는 책이다. 시카고 신학교 Ted Jennings가 쓴 Reading Derrida/ Thinking Paul(2005)은 데리다와 바울을 연결하는 책으로, 요즘 한창 논의되는 좌파이론가인 아감벤, 바디우, 지젝이 시도하는 정치신학과 맥이 닿아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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