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편재와 인간의 공간



유승현

(GTU Ph.D Candidate)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시편 139:7-8)



New Horizons


   2015년 7월 14일 우리 지구에서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2006년 1월 19일 플로리다 주 케네디 우주 센터에서 발사된 우주 탐사선 New Horizons 호가 약 9년 반 동안 30억 마일이 넘는 여행을 거쳐 목적지인 명왕성 (Pluto)을 서울과 뉴욕 사이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아주 가까운 거리로 통과했습니다. 탐사선은 며칠 동안 명왕성에 대한 새로운 정보들과 정밀한 사진들을 지구로 보내왔습니다. 실로 우리는 우리 인간의 과학기술에 대해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우주 탐사선에는 흥미 있는 물체 두 가지가 부착되어 있다고 합니다. 한 가지는 25센트 짜리 쿼터 동전 2개 입니다. 동전 한 개는 탐사선이 발사된 플로리다 주 동전이고, 다른 한 개는 탐사선이 조립된 메릴랜드 주의 동전입니다. 왜 두 개의 동전을 달았을까요? 실용적인 이유로는 그 동전 두개가 균형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실용적인 이유 말고도 상징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작은 명왕성에도 그 둘레를 도는 위성이 있습니다. 그 위성의 이름은 ‘카론’입니다. 카론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명계의 강을 건너주는 뱃사공인데, 그는 뱃삯을 내는 사람만 배에 태워주는 습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명왕성의 위성 카론에게 줄 뱃삯으로 주기 위해 50센트를 매달았다고 합니다.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쓸데 없는 미신처럼 들리지만, 어쨌든 재미있는 이야기거리를 만들어주는 낭만적인 소재입니다. 그리고 이 동전들 말고 다른 한 가지 중요한 물건이 작은 통 안에 부착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1930년 명왕성을 최초로 발견한 미국의 천문학자 클라이드 톰보 (Clyde Tombaugh)의 유해 일부분입니다. 그의 뼛가루가 들어있는 이 작은 통에는 이런 글씨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이 안에 미국인 클라이드 톰보의 유해가 있습니다. 명왕성과 태양계 제 삼지대의 발견자, 아델과 모론의 아들, 천문학자, 교사, 달변가이자 친구: 클라이드 W. 톰보 (1906년부터 1997년)”

   New Horizon호와 명왕성이라는 작은 소행성을 발견한 사람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서 저는 가슴이 뭉클함과 측은함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바쳐서 연구했고 가 보고 싶었던 작은 별에 그는 85년이 지난 후에 살아서가 아니라, 죽은 후 유해로서 지나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우주 탐사선의 이름 New Horizons이 말해주는 것처럼 우리 인간이 새로운 공간의 지평을 발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현재 명왕성을 지나 태양계 바깥으로 끊없이 향하고 있는 그 탐사선과 한 번 교신을 하는데만 약 9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전파의 속도는 빛의 속도와 같이 일초에 약 삼십만 킬로미터를 움직입니다. 그런데, 그 빠른 속도로도 왕복하는데 9시간이 걸린다는 말은 우리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이, 이 지구가 얼마나 좁은 곳인가, 그 보다 우리 인간은 얼마나 유한한 존재인가를 잘 보여줍니다. 우리들은 참 가 보고 싶은 곳이 많습니다. 이번에는 꼭 이 곳에 여행을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이 가 보아도 평생을 여행하며 살아간다고 해도 우리가 가 본 곳은 너무나 적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어떤 순간에 우리의 몸이 있는 오직 그 곳에만 존재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공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 왔습니까? 자동차를 만들고, 비행기를 만들고, 우주선을 만듭니다. 통신기술을 개발해서 세계 어디에서나 소통이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현재의 기술로 만들어진 우주 탐사선이 태양계에서 가장 가까운 4.2 광년 떨어진 별까지 날아가는데는 무려 7만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편재성을 말하는 성경의 구절들


   이런 인간의 유한한 공간과 비교해 볼 때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편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에서는 많은 곳에서 하나님의 편재성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언 15장 3절에서는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말씀합니다. 예레미야 23장 23절과 24절은 말씀합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가까운데 하나님이요 먼데 하나님은 아니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히브리어로 하늘과 땅, 천지라는 말은 온 우주와 우주에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온 우주에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신약 성경에서도 비슷한 표현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 23절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이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 다른 말로 하면 모든 것들을 모든 방법으로 채우시는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4장 6절도 말씀합니다: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바울은 이렇게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신 분임을 알았습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하나님이 우주의 만유에게 생명력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당시 모든 철학과 사상의 중심지였던 아테네에서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학파의 저명한 철학자들을 대면해서도 결코 주눅들지 않고 자신이 알고 믿는 우주 어디에나 계시고 우주 전체를 다스리는 하나님에 대해 고백하면서 사도행전 17장 28절에서 말씀합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이 어렵게 보이는 말을 영어성경은 간단한 말로 표현합니다: “For in him we live and move and have our being.” 즉,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살고 움직이며 우리의 존재를 얻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어디에나 계실까?


   우리는 여기서 미련한 질문이지만 좀 더 깊이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모두 작은 제한된 공간에서만 살고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실까요? 이런 물음을 우리만 물었던 것이 아닙니다. 근대 시대 유명한 과학자였고 신앙인이었던 아이작 뉴튼은 아무 것도 없는 우주 공간을 통해서 빛이 전달되는 것에 의문을 느꼈고, 빛이 전달되기 위해서는 공간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에테르’라는 것으로 가득 차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현대에도 많은 천문학자들이 우주 공간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 실체는 알 수 없지만 우주 전체는 23%의 암흑물질과 73%의 암흑에너지, 그리고 4%의 별들과 행성, 생명체 같은 일반적인 물질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주가 실제로 그런 것들로 채워져 있다면,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 그것들의 실체를 밝히려고 하는 것은 아주 값어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큰 문제는 많은 무신론적인 과학자들은 우주가 그런 물질로서 채워져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은연 중에 우주 전체에 충만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거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우주가 채워져 있든 비워져 있든 관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편 139편 7절은 말씀합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여기서 “주의 신”이라고 말씀한 것처럼, 우리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물질로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신으로서 즉, 영으로서 존재하십니다. 사실 하나님이 왜 우주 전체에 충만할 수 있는지를 계속 묻는다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대학자 어거스틴 조차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원에 대해서 물어봤을 때 ‘나는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 대답할 수 없습니다’라고 겸손하게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우주 전체에 충만한 이유에 대해 우리의 이성으로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 위대하시고, 영원하신 능력의 하나님은 그의 시간과 능력이 무궁하시듯이, 그의 임재에 있어서도 매이지 않으신다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유한하기에 그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라고, 더 나아가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기도한 것처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왕상 8:27) 라고 겸손하게 고백할 수 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모든 공간에서 도우시는 하나님


   이렇게 하나님이 모든 공간에 계신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하나님께 어떻게 반응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말씀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간 요나 선지자의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계속 하나님을 피하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바다에 던지시고 큰 물고기를 예비해서 그를 삼키게 하셨을 때, 요나는 깊은 심연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디에나 편재하시는 하나님임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리고는 요나 2장 2절에서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요나의 이 기도가 진실하지 않은 기도였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물고기 뱃 속에서 하나님이 그를 건지신 다음 요나서 3장에서 나오는 그의 행동을 살펴봤을 때 끝까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요나는 이미 죽은 것과 같은 생명의 위기를 통해서 물고기의 뱃속, 더 나아가 스올 즉 죽음의 한 가운데에서도 계시는 하나님을 깊이 알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시편 139편을 쓴 다윗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왜 다윗이 139편 8절처럼 하늘로, 음부로 9절처럼 바다 끝까지 가야 했는지를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장소들은 생명이 위협에 처해 있는 상황, 더 심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없는 것과 같은 한계 상황들을 뜻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다윗은 그런 위기를 수도 없이 경험했습니다. 그런 곳에서조차 다윗은 하나님의 편재하심을 깨닫고 10절에서 고백합니다: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마찬가지로 다윗은 시편 23편에서도 4절에서도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사망의 골짜기에는 마치 명왕성의 위성 카론이 명계의 강을 건너주기 위해 기다리는 것처럼 죽음만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한계 상황에서도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점입니다.


인간의 공간을 넘어서


   우리는 공간을 점유해야만 하는 각박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내 땅과 영토를 확보해야만 하고, 큰 집과 큰 자동차가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와 이웃과 피조물 전체의 공간이 아니라 오직 나의 공간만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그래서 끝내 세상 속에서 자신만의 공간을 확보하지 못한 사람은 컴퓨터의 가상 공간을 찾고 끝내 자신의 방 안에 갖혀 은둔형 외톨이가 되어야만 하는 불행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2011년 통계로 일본에서는 히키코모리라고 불리는 은둔형 외톨이가 70만명이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도 30만명의 사람들이 방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고 합니다. 미국에도 약 100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은둔형 외톨이이거나 그렇게 될 소질들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나와 관계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관계의 단절을 경험하고 있는 내 자신이며 각종 미디어와 첨단 기기에 빠져 사는 내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살 수 있는 이유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를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의 창조의 공간을 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께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시편 139편 23절에서 다윗이 마지막으로 고백했던 겸손한 말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나를 살피시라고 간곡히 기도한 다윗처럼, 내 스스로가 나만의 공간을 만들려고만 하지는 않았는지 깊이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공간을 이웃과 나누면서 살아가는 자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웹진 <제3시대>

저작자 표시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과학"(Scientia)의 개념



유승현

(GTU Ph.D Candidate)


   과학은 신학의 적인가, 동지인가? 신학과 과학의 올바른 관계성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과학”이라는 용어에 대한 현대 신학적 이해의 장단점 뿐만 아니라, 고대와 중세의 신학자들이 과학의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들의 신학에 적용했는가를 추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과학은 현대의 자연과학에 국한된 특정한 연구 영역이 아니라, 보다 넓은 의미에서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인 지식의 총체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그들의 폭넓고 깊이 있는 과학이라는 용어 이해에 대한 관점이 오늘날 과학과 신학의 논의에 적용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2회에 걸쳐서 고대와 중세의 대표적인 신학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와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과학”의 개념에 관해 논의하려고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후의 논의는 다음 세가지 물음에 초점이 맞추어질 것이다. 1) 그들의 과학 개념을 형성한 철학적인 배경은 무엇인가? 2) 그들은 과학과 신학의 관계성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3) 그들은 당시의 자연 과학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었는가?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과학' 개념의 철학적 배경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론적 지성 (speculative intellect)의 성격을 지혜 (wisdom), 과학 (science), 이해 (understanding)으로 세분화한다.[각주:1] “이해”는 그것 자신에 의해서 인식될 수 있는 진리인데 반해서 “지혜”와 “과학”은 다른 것들에 의해서 인식된다. 더 나아가 “지혜”는 본성에 의해 우선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것들을 나타내는데 반해서, “과학”은 다양한 인식 가능한 질료 (matters)에 의해 인식된다. 그렇다면 지혜, 과학, 이해의 세 가지는 어떤 층위를 가지고 있는가? 토마스에 따르면, “과학은 보다 상위의 가치인 이해에 의존한다. 또한 이 둘은 최상위에 이르기 위해 지혜에 의존한다. 과학의 결론과 과학과 이해가 기반하고 있는 원리들 모두를 판단함으로써, 지혜는 그 하위에 이해와 과학을 포함한다.”[각주:2]

   토마스는 과학이 지혜 뿐만 아니라 제일원인인 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믿었다. 이런 토마스의 기본적인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유산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에 대한 몇 가지 주석서들을 열정적으로 집필했다.[각주:3] 토마스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광범위한 영향력은 단적으로 그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철학자” (the Philosopher)라고 지칭한 것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그의 영향력은 형식 논리학 (formal logic), 현실태와 가능태 (actuality and potentiality), 4원인설, 지식에 대한 이해, 형이상학 등 다양한 영역을 포괄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 체계를 따라 아퀴나스는 명증적 삼단논법 (demonstrative syllogism)을 과학의 적절한 대상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논리학과 수학에 국한된 명증적 삼단논법의 결과로서의 토마스의 scientia에 대한 설명이 과학의 적절한 대상이 될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토마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교적 과학이 가능한가?

   이 문제에 관해서, 1912년에 출판된 The Catholic Encyclopedia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의 과학 개념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정의를 제시해 준다: “과학은 자연과학이라는 제한적 의미로 이해되지 않고,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용어의 일반적인 의미에서 이해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을 증명에 의해 얻을 수 있는 확실하고 분명한 지식으로 정의한다. 이것은 그들의 원인들로부터 파생되는 사물들 (things)에 대한 지식으로서 토마스의 과학에 대한 정의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각주:4]

   이 인용에서 나오는 토마스의 과학에 대한 정의는 그의 “이교도 대전” (Summa contra Gentiles)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서 토마스는 그의 과학에 대한 정의에 근거한 신에 대한 하나의 명제를 제시한다: “만약 과학이 그 원인에 의해서 발생하는 사건에 대한 지식이라면, 또한 신이 모든 원인들과 결과들의 순서를 안다면, 또한 그에 따라 개별자들의 적절한 원인을 안다면, 적절한 의미에서 그것은 신 안에 과학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각주:5] 이러한 추론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삼단논법의 하나의 전형을 보여준다. 만약 토마스가 신을 설명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을 적용한다면, 신에 대한 과학은 다른 과학과 마찬가지로 추론과 증명을 사용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은 아닌가?


이성인가 믿음인가?


   앞의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토마스의 체계에 내재되어 있는 이성과 믿음, 과학과 신학에 대한 관계성에 대해 고찰해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해 토마스의 입장이 어거스틴과 다른 점은 어거스틴의 경우 과학과 이성의 모호성을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측면 모두에서 논의하는 반면에, 토마스의 철학은 믿음과 모순되지 않으며 더 나아가 그의 체계에 있어서 보다 필수적인 위치를 점유한다는데 있다. 토마스는 때때로 이성에 관한 어기스틴의 생각을 받아들인다. 예를 들어, 그는 어거스틴의 “기독교 교리에 관하여” (On Christian Doctrine)에 나타난 철학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사용에 관해 인용한다.[각주:6] 그러나, 토마스는 어기스틴이 의도하는 것과 같은 철학의 신학적 전용을 의도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토마스에게 있어서 믿음과 이성은 각각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신성한 교리 (sacred doctrine)가 믿음의 빛에 기반하는 것처럼, 철학은 이성의 자연적 빛에 의존한다.”[각주:7] 이 점에서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신학과 신에 관한 지식은 오직 믿음의 빛에만 의존하는가? 토마스에게 있어서, 비록 이성이 철학의 영역에 속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오로지 철학에만 국한되지 않고, “신학에서 뿌리 깊은 역할” [각주:8](ineradicable role in theology)을 수행한다.

   과학에 있어서 이러한 철학의 확장된 기능은 토마스가 “신성한 지식” (scientia divina)과 “신에 관한 지식” (scientia dei)을 구분한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신성한 지식”은 신적인 문제들에 관련된 모든 영역들, 예를 들면 제일철학, 형이상학, 철학적 신학, 자연신학을 포괄한다. 반면에 “신에 관한 지식”은 계시의 영역에 제한된다.[각주:9] 중요한 점은 토마스가 계시에 의해서 드러난 지식까지도 과학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토마스에게 있어서 과학의 영역을 구분하는 결정적인 요소는 인식의 차이점들에 기인한다. 만약 자연과학과 자연철학이 인식의 차이점들에 의해서 다르게 인식된다면, 신적인 계시에 기반한 또다른 과학이 인간의 이성의 빛에서 이해되는 것이 가능하다.[각주:10]

   이성에 대한 토마스의 강조는 믿음의 기능에 대한 약화로 잘못 이해되어질 수 있다. 그러한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토마스는 이성의 궁극적인 과제는 단지 “믿음의 머리말”[각주:11] (the preambles of the faith)이라고 말함으로써 믿음이 이성에 의해서 완전하게 입증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신성한 교리가 인간의 이성을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이성은 믿음을 입증하기 위해서 위해서 사용될 수는 없다. 그것은 믿음의 가치를 박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성은 이 교리 안에 놓여진 다른 것들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사용된다.”[각주:12] 따라서, 토마스의 체계 안에서 신학적 추론이 가진 타당성에도 불구하고, 믿음은 모든 것으로 확장될 수 있다. 


과학의 영역들에 대한 토마스의 입장


   앞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과학에 대한 토마스의 개념은 논리학, 수학, 기하학과 같은 자연 세계로부터 분리된 선험적 진리들에 치우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토마스에게 있어서 그러한 전형적 과학 (paradigmatic science)의 영역들은 사실적 증명들이 필요한 비전형적이고 (non-paradigmatic) 종속적인 과학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왜 대상들에 대한 비전형적인 인식들은 절대적으로 필수불가결한 “과학”에 미치지 못하는가? 비전형적인 인식들이 우발성에 의해 지배되는 자연 세계에 있는 물질적인 대상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들은 그것들의 보편적인 특성 때문에 과학의 범주로 이해된다. 이런 의미에서 토마스는 특수성과 보편성, 감각적 인식과 신학적 추론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려고 한다. 자연 과학에 대한 토마스의 이해에 있어서 그는 과학의 영역을 단지 인식론으로 제한하지 않고, 세계의 물질적인 모든 대상들로 확대한다.

   이 짧은 글에서 필자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적 체계 속에서 그가 제시한 과학의 개념과 함께 이성과 믿음의 관계성에 관해 간략하게 고찰했다. 그가 철학적 추론의 신학적 전용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토마스는 철학과 이성을 단지 신학과 믿음을 위한 시녀로 이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성의 철학적 사용, 믿음의 신학적 사용을 구분해서 언급함으로써 과학과 신학이 평행적이고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서 이해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한다.

   과학은 신학의 적인가, 아니면 동지인가? 이 둘의 관계성을 정립하기 위해서 수 세기 전의 신학자들의 글을 읽는 것은 때로는 무의미하게 보인다. 왜냐하면, 자연과학에 국한된 현대적 이해로는 모든 인식의 영역을 “과학”이라 지칭하는 그들의 입장은 너무나 포괄적이고 막연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마스의 scientia에 대한 관점은 과학과 신학 사이의 대결 구도를 극복할 수 있는 개념적 기초를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1. Aquinas, Summa Theologica Ia-IIae, q.57, a.2. 앞으로 제시된 신학대전의 모든 인용은 영문판 http://www.ccel.org/ccel/aquinas/summa.toc.html 의 개인적인 번역임을 밝힌다. [본문으로]
  2. Ibid., Ia-IIae, q.57, a.2, r.2. [본문으로]
  3.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에 대한 토마스의 주석서들의 목록은 to Ian. A. Aertsen, “Aquinas’s Philosophy in Its Historical Setting,” in The Cambridge Companion to Aquinas, ed. Norman Kretzmann and Eleonore Stump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21. 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4. Charles G. Herbermann and others, ed., The Catholic Encyclopedia: An International Work of Reference on the Constitution, Doctrine, Discipline, and History of the Catholic Church, vol. XIII (New York: Robert Appleton Company, 1912), 598. [본문으로]
  5. Aquinas, Summa contra Gentiles, 1, 94. [본문으로]
  6. Augustine, On Christian Doctrine, II, 40, 60, quoted in Thomas Aquinas, Faith, Reason, and Theology: Questions I-IV of His Commentary on the De Trinitate of Boethius, trans. Armand Maurer (Toronto: Pontifical Institute of Mediaeval Studies, 1987), 48; cf. Summa Theologica, I,1,8 and II-II,1,a.5, ad 2 and 3; Summa contra Gentiles 1,2 and 9. [본문으로]
  7. Ibid; cf. Summa Contra Gentiles, II, 4. “신자와 철학자는 피조물들을 다른 방식으로 고찰한다. 철학자는 피조물들의 적절한 본성에 속한 것들을 고찰하는데 반해서, 신자는 오직 피조물들이 신에 관계되는 한에서, 예를 들면 피조물들이 신에 의해 창조되었고 그에게 종속된다는 것과 같은 진리에 대해서 고찰한다.” [본문으로]
  8. Denis J. M. Bradley, Aquinas on the Twofold Human Good: Reason and Human Happiness in Aquinas’s Moral Sciences (Washington, D.C.: The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Press, 1997), 78. [본문으로]
  9. Aquinas, Summa Theologica, II-II, 1, a.5. [본문으로]
  10. Ibid., Ia, 1, 1, ad 2; cf. scientia의 세가지 범주에 대한 토마스의 구분에 관해서는 Ia. 85. 1, ad 2. 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11. Aquinas, Summa contra Gentiles, I, 9, 3. [본문으로]
  12. Aquinas, Summa Theologica, I, 1, a.8, ad 2. [본문으로]
저작자 표시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BLOG main image
by 제3시대

공지사항

카테고리

웹진 <제3시대> (785)
특집 (8)
시평 (91)
목회 마당 (58)
신학 정보 (126)
사진에세이 (37)
비평의 눈 (63)
페미&퀴어 (20)
시선의 힘 (128)
소식 (150)
영화 읽기 (28)
신앙과 과학 (13)
팟캐스트 제삼시대 (12)
연구소의 책 (13)
새책 소개 (38)
Total : 316,402
Today : 11 Yesterday : 2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