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땅에서 라깡적으로 윤리하기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라깡으로 <트루먼 쇼> 읽기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의 내 삶 전체가 몰래카메라의 내용이 되어 시청자들에게 다 전달되고 있었다면 독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라깡이론의 윤리적 전회를 논하기 이전에 이 질문을 하는 이유는 짐 케리 주연의 영화 <트루먼 쇼>를 소개하기 위함이다. 평범한 보험회사 직원 트루먼 버뱅크(짐 케리)의 삶이 그랬다. 그 쇼는 거대한 돔 안에 인공도시를 짓고 5천대의 카메라를 도시곳곳에 숨겨 24시간 내내 트루먼의 일거수일투족을 30년 동안 생중계 했다. 트루먼에게 있어 세트장, 아니 영화속 도시 시헤이븐은 완벽한 아내, 좋은 친구들, 따뜻한 이웃들, 온화한 기후를 갖춘 완벽한 삶의 공간(상징계)이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되면서 대상소타자가 상징계를 뚫고 실재계의 모습을 간헐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하늘에서 촬영용 조명이 떨어지고, 어렸을 때 물에 빠져 죽은 아버지를 길에서 만나는 등 납득이 안가는 일이 벌어질 무렵, 트루먼은 대학 시절 여자친구였던 실비아로부터 자신의 삶이 모두 연출이고 조작된 삶이라는 사실을 전해 듣는다. 어느날 갑자기 실재(the real)가 확 내게로 다가온 것이다. 이후 트루먼은 안락했던 상징계의 질서를 박차고 실재계를 향해 항해를 한 후 세상끝(세트장끝)에 도착하여 마침내 실재계와 상징계의 경계라 할 수 있는 세트장의 벽을 뚫는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트루먼의 의지와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진하게 눈물 한 방울 흘리며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는 있겠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사회는 그런 트루먼 같은 사람들을 돈키호테니, 소영웅주의자니, 감상적 낭만주의자니 하면서 시대착오적 인물로 낙인찍는다. 보통의 우리는 현실(상징적 질서)에 구멍이 뚫려 자신의 존재를 들키는 순간 재빨리 이를 봉합하여 현실(상징적 질서)의 질서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강박적 주체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상징계를 벗어날 수 없고, 세상과 등을 져서도 안 된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트루먼처럼 우리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상징계 전체를 배반하고 실재계를 찾아 투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상징계에 갇혀있는 존재가 아니라 상징계를 변형시키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상정해 볼 수 있지는 않을까? 라깡이 제안하는 정신분석학적 윤리가 노리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라깡, 칸트에 反하다

라깡의 윤리는 근대 서구윤리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칸트 윤리학과의 숙명적인 대결을 수반한다. 왜냐하면, 라깡과 칸트 모두 실재계에 대해 언급하였고, 실재에 대한 규정에서부터 윤리학이 나왔기 때문에 그렇다. 칸트에게 있어 실재, 즉 물자체란 인간의 현상계와 단절되어 있는 부분이다. 칸트는 물자체를 신앙의 영역에 포함시켜 언표 가능한 것으로 간주하였던 서구형이상학의 전통을 비판한 후에 그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알 수 없는 영역이라고 선언하였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중세 1000년을 이어왔던 무한의 철학에 대한 폐기였다. 이는 은총의 빛으로, 신의 시선으로부터 독립한 불안하고 불안전한 인간이 역사의 전면으로 등장함을 의미한다. 아울러, 무한철학의 폐기에 따른 물자체에 대한 선언은 ‘인간의 의식은 인간 스스로가 구성하는 것이다’라는 근대 주체철학을 낳았다. 현실의 사건과 증상들은 하늘로부터 내려 오는 계시의 빛과 목소리를 통해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틀, 입장, 경험을 통해 (이를 칸트는 범주라 표현하였다) 우리 스스로 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범주의 보편성에 대해서는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후에 등장하는 많은 사조들이 칸트 철학의 완고한 틀을 언급하면서 그 구조 역시 계급, 역사, 문명, 성에 따라 조건지어졌음을 비판하지만 말이다. 칸트의 범주 혹은 인식의 틀은 라깡적으로 말하면 상징계의 질서라 말할 수 있다. ‘저 하늘에 별이 빛나듯 내 마음에 도덕율이 빛난다’는 칸트의 발언과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보편 타당한 입법에 맞게 행위 하라’는 칸트의 요구는 비록 실재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지만, 실재에 대한 접근이 상징계 안에 있음을 혹은 실재에 대한 인식이 상징계를 통해야함을 전제한다. 그 결과 ‘도덕율’과 ‘의지의 준칙’이 상징계 안에서 마치 실재의 목소리인양 울려 퍼지게 되었다. 기표에 대한 욕망은 보호하고 실재에 대한 향유는 억압된 윤리, 숭고한 이성의 이름으로 상징계의 질서를 합리화하는 윤리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결국, 우리의 감각적 경험 너머의 것에 대해 인간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던 칸트는, 나중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캄캄한 밤하늘에 빛나는 별이 좌표를 표시하듯 우리마음에도 우리를 이끌어갈 무엇인가를 상정해야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칸트에게 있어 윤리란 상징계의 질서들을 굳건히 구축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이런 이유로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대문밖으로 추방시켰던 물자체를 실천이성을 언급하면서 다시 후문을 통해 불러들였다는 비아냥을 듣게 된다.

반면, 라깡의 실재계는 칸트와는 다르게 현상과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징계 곳곳에서 출현하는 무엇이다. 우리는 상징계의 막을 찢고 나오는 불순물들(대상소타자)을 통해 실재와 대면한다. 하지만, 영화 <트루먼 쇼>에 나오는 짐 케리와는 달리 현실에서의 인간은 그 실재를 끌어당길 힘이 없다. 트루먼처럼 기표체계를 무시할 수도 없고, 영화에서처럼 실재계가 세트 뒤에 뚜렷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이 지점이 바로 라깡의 윤리가 다다른 마지막 지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윤리란 무엇인가?’라는 궁극적 질문과 다시 대면한다. 윤리를 우리의 삶과 공동체속에서 타자와 관계맺는 방식과 절차에 관한 문제라고 봤을 때, 윤리의 대상인 타자를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대두된다. 그리고 타자는 필연적으로 그 타자를 상정하는 주체의 문제를 야기시킨다. 라깡에 의하면 주체는 이원화되어 있다. ‘욕망하는 주체’와 ‘향유하는 주체’가 그것이다. 상징계의 시스템 속에서 일정한 기표를 차지하고 있는 주체는 항상 상징계 속 기표들의 차이에 따라 옮겨다니며 놀이를 한다. 그러나, 그 기표란 사회적 인정과 사회적 합의를 내포한다는 점에서 진정한 내 것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상징계속 기표의 지배를 받은 주체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주체’로 걸러진다. 문제는 상징계속 주체로 환원되지 않는 또 다른 주체가 있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분명히 다가오지는 않지만 나를 가만히 놔주지 않고 나를 정신적으로 가위눌리게 하는 그 무엇 말이다. 시인 류시화는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라는 애절함으로 그 갈증과 답답함을 훌륭히 표현하였다. 라깡은 이 주체를 ‘욕망하는 주체’와는 구분하여 ‘향유하는 주체’라 부른다.

라깡의 윤리학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욕망하는 주체’에서 ‘향유하는 주체’로의 이월이다. 라깡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속 기표시스템이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밝혀냈고, 그 위선적 현실을 변혁시킬 원동력을 실재계에서 끌어온다. 그것은 뾰족한 것(대상소타자)을 가지고 상징계를 둘러싸고 있는 막에 구멍을 내어 현실의 부조리를 폭로하는 것이고, 현실의 영역, 상징의 영역, 욕망의 세계가 강제하는 요구에 맞서 마치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실재를 향해 거슬러 올라가는 그 무엇이다.


한국땅에서 라깡적으로 윤리하기

90년대 한국 대중문화의 아이콘이었던 ‘서태지와 아이들’의 앨범 중에 <환상속의 그대>라는 노래가 있었다. 문득 그 곡의 가사 한 구절이 떠오른다: “환상 속에 그대가 있다. 모든 것이 이제 다 무너지고 있어도 환상 속엔 아직 그대가 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은 진짜가 아니라고 말한다” 어쩌면 현실(상징계의 질서)은 환상(판타지)일런지 모른다. 영화 <트루먼 쇼>에서 짐 케리의 일상이 판타지였던 것처럼, 한국땅에서 뉴타운이다 영어공교육이다 하면서 일확천금과 유창한 영어실력을 꿈꾸는 것 또한 환상이다. 그 환상이 있기에 서태지의 노래 속 가사처럼, 모든 것이 다 무너지고 있어도 우리는 지금 나의 모습이 진짜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환상은 절대로 현실의 나에게는 발생하지 않는다. 누구나 허각처럼 몇 십만대 일의 경쟁을 뚫고 슈퍼스타 K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말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환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에 퍼져있는 환상에 대한 집단적 열정 내지 무의식의 강도는 가히 놀랍다. 국내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밖에 나와 다른 민족들과 어울리고, 다른 문화를 접할수록 판타스틱 코리아에 대한 환상은 굳어져만 간다. 그것이 한강의 기적, 다이나믹 코리아, 2002년 월드컵 4강을 가능하게 했던 원동력이었다고 애써 긍정적 평가를 할 수도 있겠지만 난 못 믿겠다. 그 환상을 말이다.

라깡적 관점에서 볼 때 상징계속 기표의 욕망을 부추기는 한국 사회, 그리고 그 욕망을 욕망하는 우리는 너무나도 비윤리적 체제, 그리고 존재이다. 욕망에 대한 추구는 한국사회에서 보수와 진보 가릴 것 없이 똑같다. 보수적인 사람은 대놓고(까놓고) 그 욕망을 아무데서나 배설하고, 진보적인 사람들은 겸연쩍어 하면서도 슬그머니 그 욕망을 수음한다. 형태는 다르지만 그 놈이 그 놈이다. 특별히, 자식교육에 대한 욕망의 강도는 보혁에 관계없이 100% 균일하다. 재산증식에 대한 추구에 있어서도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의 욕망이 최종적으로 도달하려는 지점은 어딜까? 아마도 부와 지식의 대물림이 아닐까 싶다. 가히, 그것은 한국사회를 움직이는 강력한 리비도라 할만하다. 재벌은 말할 것도 없고, 필자가 머물고 있는 시카고의 대표적 명문대학인 노스웨스턴 대학, 시카고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는 한국 유학생들은 거의 예외 없이 교수님, 사장님, 의사, 변호사, 정부고위관료 아드님 따님들이다. 심지어 가장 숭고해야 할 교회 역시 아비 목사에게서 아들목사로의 세습이 상식화 되어가는, 聖과 俗이 맞물려 집단으로 난교를 벌이는 이곳이 바로 대한민국이다. 이토록 황당한 현실이 용인되는 이유는 멀리 있지 않다. 우리 역시 그 욕망을 욕망하기에, 우리 역시 상징계속 기표들의 놀이를 즐기고 있기에, 우리 역시 그 주인공이 되고 싶기에 이 모두를 관대히 용서한다.


결론적으로, 현실 속 상징, 욕망, 그리고 환상은 실재(the Real)위를 떠다니는 판타지임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체계이다. 우리의 불행은 어쩌면 여기(불확실한 환상을 쫓는 현실)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전통적으로 윤리란 그 시스템을 뒷바침하는 버팀목 역할을 해왔다. 기존의 윤리는 상징계에 타격을 가하면서 실재를 드러내는 대상소타자를 악성코드 혹은 악성 바이러스 같은 것으로 간주하여 진압해왔다. 하지만, 더 이상 큰 타자와 제휴하는 윤리, 사회적 욕망을 인정하고 욕망의 충족을 위한 정글의 법칙을 합법적으로 보호하는 것이 윤리의 역할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상징계의 질서를 보존하는 윤리가 아니라 그것의 전복을 꿈꾸는 위험한 윤리를 말해야 한다. 윤리를 도덕이라는 체제에 의해 오염된 해석의 잣대에서 해방시켜 더 이상 그것이 나를 체제 유지를 위한 도구로 호명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결국, 라깡은 실재(the Real)의 빈번한 출현으로 인해 상징계의 균열이 폭로되고, 그로 인해 세상의 모순과 진리가 드러날 때 인간은 드디어 윤리적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고 믿었다. 바로 이점이 라깡식 윤리의 미덕이고, 그것은 오늘날 슬라보예 지젝으로 전해져 맹렬히 진화중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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