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늙은 민중신학자의 편지(II)[각주:1]

: 민중신학의 위기론에 부쳐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 과정)

 

<지난 51호 웹진에 이어>

IV

형. 이 대목에서 부정성에 입각한 민중신학의 윤리학에 대한 논의로 넘어가기에 앞서, ‘부정의 변증법’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예전에 수없이 나누었던 변증법 관련 대화들은 결국 ‘유한과 무한의 대립이 어떻게 종합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을 둘러싼 공방이었습니다. 헤겔은 이 대립을 철폐하면서 논리적 일치성을 향해 치달았고, 결국 모든 것의 차이를 무화시키는 일원론(ex, 절대정신)으로 자신의 주장을 마무리합니다. 이것이 헤겔식 변증법의 정의라 한다면 너무 조야한가요? 
헤겔과 동시대에 살았던 키에르케고르는 헤겔적인 변증법에 대한 최초의 반항아였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높은 단계에서 종합되는 헤겔의 ‘전체성의 변증법’에 맞서 본인 특유의 ‘실존의 변증법’을 고안합니다. ‘진리의 내용이 무엇이다’라는 논증보다는, ‘그 진리에 내가 어떻게 도달했고, 그 진리가 어떻게 내게 역사하는가?’를 묻는 것이 더 옳은 관전 포인트가 아니냐며, 헤겔을 물고 늘어진 것이죠.
예를 들어, 성육신, 즉 신이 인간이 된 사건을 설명한다고 하면서, 헤겔은 신과 인간의 대립을 너무나 서둘러 봉합한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독교의 진리는 헤겔식 변증법의 논리와는 달리, 신과 인간사이의 간격(대립)이 여전히 유지되면서, 그 차이를 고스란히 느끼고 고민하는 가운데, 그 역설과 간격을 통해 유지되는 것이 아닐런지요? 키에르 케고르는 바로 이점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기독교의 진리는 우리 실존에서 절대적으로 역설과 간극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결국,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 진리란 헤겔식의 거대하고 종합화된 ‘내용(What)’보다는 구체적 실존의 ‘어떻게(How)’를 통해 결정되는 것이었습니다.
키에르케고르에 의해 헤겔의 변증법이 한차례 의심의 대상이 되긴 하였으나, 막 일시 시작한 서구 근대의 진보적 사관과 낙관적 사고는 18세기 말부터 시작되어 19세기를 풍미하였습니다. 그리고 헤겔식의 종합과 체계와 전체의 변증법은 이런 세계사를 움직이는 힘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세기 말에 니체와 맑스, 그리고 프로이트가 등장하여 그 질주에 제동을 걸긴 했지만, 아마도 헤겔 변증법에 대놓고 딴지를 걸었던 사람은 아도르노가 아닐까 싶군요.
그는 프랑트푸르트 학파의 탄생을 알린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쓴 기념비적인 작품인 <계몽의 변증법>과 더불어 <부정의 변증법>을 세상에 내놓으며 헤겔 변증법의 균열을 직시합니다.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죠. 그는 종전 후에도 계속 이 문제에 매달렸고, 최종적으로 아우슈비츠의 비극은 히틀러의 광기가 아니라, 근대적 이성이 쌓아올린 동일성의 논리가 그 원인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는 이러한 본인의 주장을 파리의 콜레쥬 드 프랑스에서 행한 강연들을 통해 밝혔고, 그 강의들이 모아져 나온 책이 바로 <부정의 변증법>(1966)입니다.

 

V

<부정의 변증법>에서 아도르노는 변증법이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정-반-합’의 도식을 따라 어떤 사태나 현상에 대한 해결로 나가는 법칙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보편성과 동일성을 요구하는 모든 방법들에 대한 저항과 대립을 의미하는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각주:2] 특별히, 아도르노는 인식론적 영역에서 벌어지는 동일성의 법칙이 실질적인 삶에서 작동되는 자본주의 교환시스템에 대해 예리한 비판을 가합니다. 동일성의 원칙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교환가치로 전환되어 인간의 주체성을 물화된 형식으로 치환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 입니다. 이곳 시카고에는 매일 새벽마다 인력시장이 섭니다. 어쩌다 새벽기도 가다 길을 잘 못 들어 그 곳을 지나치다 보면,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누군가의 선택을 기다리며 삼삼오오 공원주변으로 모여드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멘트 할 줄 아는 사람 4명!” 하면서 차량 한대가 그들 앞에 멈춰서면 열 댓 명의 사람들이 손을 급하게 흔들며 자신의 의지를 표명합니다. 그 상황에서는 마이클이 가도 되고, 호세가 가도 됩니다. 물론 나 이상철이 가도 되고, 김진호 목사도 가능합니다. 그 누구든 상관없습니다. 시멘트를 할 줄 아는 건장한 남자라면 말입니다. 이때 호세, 마이클, 이상철, 김진호는 서로 교환 가능합니다. 아니, 이 네 명만이 아니라, 시멘트를 할 줄 아는 신체 건강한 남자 모두는 이 교환 시스템의 일원이 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모든 개별존재자들을 거의 예외 없이 100% 돈으로 교환할 수 있는 원칙입니다. 그것은 서구 근대이성이 이룩한 동일성 원칙의 결정판입니다. 이 법칙하에서는 인간과 사물 사이의 질적 차이가 없습니다. 교환가치로 매개된 노동자와 자본가, 그리고 이 시스템을 뒷바침하는 부르주아 사회장치는 각각의 존재가 지니는 질적인 차이와 다름을 물화된 공동성으로 탈바꿈 시켰습니다.
<부정의 변증법>에서 아도르노가 비판하고 있는 대목이 바로 이점입니다. 동일성의 원칙에 의해 억압당한 단독자 혹은 비개념적인 것들, 특수하고 예외적인 것들, 셈해지지 않는 것들, 혹은 셈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 그것들은 역사에서 고아와 과부였고, 여성이었고, 장애인이었고, 이교도들이었고, 흑인이었고, 유대인이었고, 제3세계 민중이었고, 불법이민자들이었고, 빨갱이었고, 그리고 동성애자들었습니다. 그들에 대한 해방을 위한 전략이 아도르노에게 있어서는 <부정의 변증법>이었던 셈이죠.
흔히, 서구사상(신학 포함)은 아우슈비츠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할 만큼, 아우슈비츠가 서구사회에 던진 파장은 엄청났습니다. 전후 대륙 철학을 휩쓸고 있는 프랑스의 실존주의, 구조주의, 포스트모던 철학, 해체주의 등은 기본적으로 동일성에 기반한 서구정신 전반에 대한 부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프랑스의 해체의 철학자들이 등장하기 전에 이미 아도르노에 의해 우리는 이러한 전조를 맛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정의 변증법>이 지닌 미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해체를 말하고, 부정을 언급하는 것일까요? 이 대목에서 ‘위기담론’에 대한 내용으로 화제를 전환할까 합니다. 그와 동시에 ‘민중신학의 위기론’에 대한 생각과 위기의 시대에 대응하는 ‘민중신학적 윤리’를 다루면서 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VI

프랑스 철학자들이 해체를 말하고, 아도르노가 ‘부정의 변증법’을 말하는 이유는 한마디로 현대 사회가 ‘위기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진보에 대한 신념과 신기루로부터 출항한 근대! 그곳의 사람들은, ‘비록 지금 우리에게 약간의 혼돈과 동요가 있지만, 저 지평선 너머에는 어김없이 찬란한 미래가 있다’는 환상에 휩싸였던 족속들이었습니다. 하지만, 20세기 초에 발생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유토피아를 향했던 동경은 미래에 대한 공포와 허무와 위기로 전환되었습니다. 바야흐로 본격적으로 위기사회가 도래한 셈이죠. 2차 대전 후 확립된 미.소의 냉전체제와 그 구도 밑에서 전개되는 핵무기 경쟁도 이러한 위기담론을 급하게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고전적 위기의식이라면, 지금부터 말하는 부분은 현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새로운 버젼의 위기의식일 것입니다.
20세기 말을 휩쓴 냉전체제의 붕괴는 우리에게 다른 차원의 위기를 선사하였습니다. 현실의 모순과 역설을 봉합하려 했던 이데올로기의 역할이 공식적으로 수명을 다한 것입니다. 사회주의의 붕괴는 세상의 변혁과 인류의 진보를 낙관하고 믿고 의지하였던 많은 사람들을 광장으로부터 떠나가게 했습니다.  텅 빈 광장을 바라보고 그 광장의 부활이 요원하다는 현실을 직시하기까지, 동시에 우리에게 새로운 차원의 위기가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데까지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던 것으로 회고됩니다. 그 무렵부터 쏟아지기 시작된 온갖 종류의 위기담론은 이제 우리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물론, 민중신학도 그 예외는 아닙니다.
진화생물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이 다른 동물들보다 발달한 것이 위기본능이라고 합니다. 위기를 예감하고 그 위기에 대처하면서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였고 물리적으로 우세한 다른 종들을 지배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위기의식은 인간이 삶을 영위하고 종족을 보존시키고 문명을 이룩해가는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불가결한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펼쳐지는 위기담론은 진화생물학자들이 말하는 그것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 위기의 요체는 우리 삶의 구조와 방식이 인간의 통제와 예측이 통하지 않는 강력한 자본의 자기장안에서 형성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또한 우리가 만든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인간이 교환가치로 전락되어 개별적이고 단독적인 인간가치가 셈해지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어둡고 몽매했던 중세의 어둠을 비추던 한 줄기 이성의 빛, 그것으로 인해 인간은 어둠의 터널을 벗어나 자유와 번영을 구가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빛은 주인의 손을 벗어난 통제가 안 되는 광선검이 되어 세상을 베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치 한번 가열된 원자로가 식을 때까지는 외부에서 손을 쓸 수 없는 것처럼, 현대 문명은 이미 인간의 손을 벗어났습니다. 인류역사상 가장 풍요롭고 기술의 발달한 이 시대에, 인류역사상 가장 불투명한 디스토피아적인 전망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미증유의 사태가 현 위기담론의 요체인 셈이죠. 그러므로 지금의 위기담론들은 어떤 구체적인 정황이라기 보다는, 지금까지 우리를 지켜왔고 지탱해왔던 중심들이 사라진 시대를 살아가는 주체들이 느끼는 막연한 불안 내지는 징후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 위기는 요체는 ‘우리가 의지했던 중심들이 우리가 생각하고 믿었던 그것이 아닌가 봐!’라는 황망함과도 연관됩니다. 즉 지젝식 실재(the Real)를 봐버린 후에 주체가 느끼는 트라우마 같은 것 말입니다. 밤새 달게 마셨던 바가지에 담겨 있던 그 물이 사실은 해골에 담겨져 있었던 물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원효에게 다가온 그 실재(the Real)! 물론, 원효는 그 다음 단계에서 깨달음이 와 당나라로 가던 길을 돌려 신라로 돌아갔지만, 대부분의 범인들은 어둠 속에 벨이 울리면서 다가오는, 그 동안의 믿음과 신뢰를 무너뜨리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우악스럽고 흉측한 실재 앞에서 위기를 느낍니다. 민중신학의 위기도 그와 같은 연장선상에 위치합니다. 중심의 부재와 상실, 그리고 믿었던 실재에 대한 배신, 실망 등등의 복합적인 감정들이 ‘민중신학의 위기’를 발설케 한 것이죠.

 

VII

하지만, 본디 중심이란, 데리다의 말처럼, 무엇인가 꽉 차 있어 중심이 아니라, 비어있는 공간으로, 실재하는 현실에 대한 不定으로, 반드시 도래할 그 무엇에 대한 대망으로 존재하는 중심이 아닐런지요. 그 비어있는 중심을 차지하려는 세력에 대해 성서는 ‘선악과 이후 아담’, ‘바벨의 언어’, ‘금송아지 상’ 등으로 치환하면서 맹렬히 비난합니다. 성서는 또한 신의 자기비움(필리오케)을 통해야만 드러나는 그리스도 현존을 강한 어조로 주장합니다. 중심을 잃어버려 방황하는 우리들에게 그 사라져 버린 중심의 형태와 격이 어떠해야 할런지를 성서는 비교적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민중신학이 이런 성서의 메시지에 너무나도 충실했다고 봅니다. 민중신학은 태생적으로 중심의 부재와 해체를 선언하면서 등장한 진정한 위기의 신학이었고, 그로 말미암아 본성상 주변에 위기를 선사할 수 밖에 없는 싸이렌의 음성이었습니다. 그것이 민중신학을 여전히 현재진행적인 위태로운 사건의 문법으로, 혹은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위험한 증환의 방식으로, 아니면 도래할 미래를 불러내는 유령의 언어로 남아 있게 하는 건지도 모르죠.
형. 그래서 저는 ‘민중신학의 위기’라는 말이 좋습니다. 물론, 민중신학의 위기론을 어떤 의도를 갖고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민중신학이 위기다!’라는 선전을 통해 얻어지는 반사이익으로 비어있는 중심을 차지하려는 자들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고, 민중신학의 위기론 유포를 통해 자신들의 불안과 조급증을 극복하고자 하는 세력들이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무리들을 향한 지적질과 그들과의 대결을 통해 민중신학의 외연을 확장시키고 내용을 좀 더 촘촘히 가다듬어야 하겠지요. 그러므로 ‘민중신학이 위기다!’라는 안팎에서의 걱정과 비난은 민중신학의 체질을 강화하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 봅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제가 ‘민중신학의 위기’라는 용어를 좋아하는 이유는 다른데 있습니다. ‘민중신학의 위기’라는 말은 우리 안에 있는 결핍을 확인케 하는 거울이고, 그 결핍을 메울 환상을 제공 하는 기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마치 ‘광주 민주화운동’이라는 말보다 ‘광주사태’라는 말이 더 生으로 날것으로 다가와 살 냄새가 나고 피 냄새가 나서 우리의 심장을 뛰게 하였던 것처럼, ‘광주사태’라는 말을 곱씹으며 미완으로 끝난 우리의 혁명을 상상했던 것처럼, ‘민중신학의 위기’라는 말 역시, 적어도 제게는 아직 끝나지 않은 어떤 사태를 직감하고 예감케 하는 용어입니다.
맞습니다. 민중신학은 위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민중신학은 여전히 위기 가운데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민중신학이 안전한 토대 위에서 그 위용이 전파되는 순간 이미 민중신학은 민중신학이 아닌 것이 되어버리는 까닭입니다. 민중신학을 말하면서, “민중신학은 무엇이고, 앞으로 이런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라는 선언을 물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구호는 결단코 민중신학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민중신학은 부단히 스스로를 부정적으로 해체적으로 대하면서 그 권위와 정당성이 유지되는 탈영토화된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영토화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선언되지 않고 규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민중신학이 위기’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 비난에 오히려 감사의 마음을 전해야 하리라 봅니다.      

형. 아도르노가 “진정한 깊이는 저항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말했다지요. 결국, 모든 저항은 자기 자신에 대한 저항이 아닐까라는 의미로 저는 그 말을 해석하고 싶습니다. 민중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저항이 멈추는 날, ‘민중신학의 위기’라는 말이 걷히는 날이 될 것입니다. ‘민중신학의 위기’라는 말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우리의 저항이 계속 지속되고 있다는 반증일테구요. 그럴 것입니다. Peace.  <다음 호에 계속>

 


  1. 졸고는 현재 진행중인 필자의 학위 논문 [The Turn to the Other: Minjung Theology in a Dialogue with Levinasian Ethics and Derrida’s Deconstruction Ethics]중 서론의 일부를 번역 각색한 원고입니다. 글의 제목으로 사용된 ‘어느 늙은 민중신학자’는 특정인이 아니라, 논문을 웹진 원고로 번역 각색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작중화자임을 밝힙니다. [본문으로]
  2. Theodor. Adorno, Negative Dialectics, trans. E.B. Ashton,(New York: Seabury Press, 1973), 6. [본문으로]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1. 박재형
    2013.05.10 14:43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형의 글을 읽고, 많은 영감을 얻고 공감을 갖습니다. 어서 빨리 형과 함꼐 배울 그 날이 오길 기대해 봅니다. 결핍과 부정이 민중신학의 동력이고 가능성이라는 말... 깊게 되새겨봅니다.^^ 주님의 평화!!!


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학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간략한 윤리학史, 그리고 레비나스의 위치

레비나스의 ‘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학’을 살펴보기 이전에 서양윤리사상에서 발생했던 굵직한 윤리적 원칙인 목적론적 윤리, 의무론적 윤리, 그리고 책임윤리에 대한 이해를 먼저 살펴본다. 좋음과 기쁨, 그리고 행복을 추구하는 목적론적 윤리의 계보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하여 에피쿠르스학파, 영국의 경험론, 공리주의로 이어지면서 행위의 결과에 주안점을 두는 윤리학설이다. 이런 까닭에 좋은 결과를 위한 개인의 혹은 공동체의 목적, 이상, 목표 등이 윤리적 이슈로 등장한다. 비록 중세 기독교 문명과 근대의 이성주의를 거치는 동안 그 빛을 발하지 못했지만, 이는 니체 이후 다시 복권되어 푸코와 들뢰즈 등으로 이어지면서 억압되고 압제되었던 노예의 도덕이 아닌, 명랑하고 유쾌한 주인의 도덕을 꿈꾸며 21세기 사상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의무론적 윤리는 행위의 결과보다는 행위의 동기에 무게를 둔다. 칸트가 대표적 인물이고, 목표와 이상에 따라 행위가 달라지는 목적론적 윤리와는 달리 조건에 관계없이 내가 따라야 할 최고법칙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들에 의하면 선이란 행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선이란 바른 행위를 가능케하는 동력이다.

예를 들어, 현상금 1000만원이 붙은 국가보안법을 어긴 시국사범이 경찰에 쫓기다가 우리집으로 들어왔다. 경찰이 문을 두드리면서 지금 누가 들어오지 않았냐고 묻는다. 이때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목적론적 윤리에 따른 행위를 하는 사람은 행복의 기준이 문제가 될 것이다. 1000만원이 주는 물질적 기쁨이 신고를 하는 불쾌보다 큰 사람은 신고를 할 것이고 (양적공리주의), 물질적 기쁨보다 정신의 평온을 중시하는 사람(질적공리주의)은 그 도망자를 숨겨줄 확률이 높다. 의무론적 윤리를 중시하는 사람은 칸트의 표현대로라면 보편 타당한 입법에 맞게 행위하는 사람이므로 거짓말을 하지마라, 현실의 국가보안법이 보편입법이기에 신고하는 것이 본인의 신념에 맞는 행위이다.

목적론적 윤리와 의무론적 윤리 이외에 한가지 더 덧붙이자면 책임윤리를 들 수 있다. 목적론적 윤리와 의무론적 윤리가 윤리적 판단기준의 문제에 집중하면서 외삽적 논리싸움으로 전락하지 않았는가? 에 대한 문제제기가 발생한다. 이는 윤리 본연의 쟁점이라 할 수 있는 인간의 행위에 대해 다시 숙고케한다. 책임윤리는 개별적 인간들이 자아내는 관계들에 주목하면서, 결국 윤리적 행위란 관계속에서 발생하는 물음들과 아픔과 상처에 응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행복과 우리의 입법이 과연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중시하는 책임윤리 안에서는 윤리적 주체와 윤리적 대상간의 관계가 주된 행위의 기준으로 등장한다.

이렇듯 위에서 살펴본 윤리방법론에도 알 수 있듯이, 인간의 윤리적 행위는 목적론과 의무론, 책임의 원칙이 어우러진 종합적인 행위이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윤리적 선택의 문제에 있어서 So What?, 즉 ‘네가 지금 당면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어떤 선택과 행동을 할 것인가?’라는 물음 앞으로 우리를 내몬다. 레비나스의 윤리학을 굳이 이 세가지 범주에서 분류하자면 책임윤리라 부를 수 있겠지만, ‘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학’이라는 레비나스의 발언 속에는 이러한 기계적 분류보다는 더 복잡한 함의가 깔려있다.

레비나스의 사상속에는 서양철학에 대한 안티테제가 깊게 드리워져 있다. 칸트, 헤겔 또는 후설과 하이데거의 사상에 공통으로 깔려있는 존재중심의 사고, 주체 중심의 자율성은 ‘나는 타자를 나의 동일성안으로 환원시켜야 한다’는 근대의 도그마를 전제한다. 그들에게 있어 타자는 또 하나의 자아이다. 남을 자아로 바라본다는 것은 어느 면에서는 기특한 것이다. 내가 나를 생각하고 배려하듯 타자를 그렇게 대한다는 논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성적 사고와 교양으로 채색된 근대인들이 지니는 자기교만이다. 내가 나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듯이 남에 대해서도 주체는 나를 알듯이 속속이 알고 있어야 한다는 강박의 도그마는 근대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모든 야만의 근거가 되었다.[각주:1] 레비나스는 이를 비판하면서 전통적인 서구의 도덕과 책임은 파르메니데스 이래로 서구철학을 지배했던 유령, 즉 개인(타자)을 전체(동일성)로 환원시키려했던 돌림병 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고, 이를 ‘힘의 철학’[각주:2], ‘전쟁의 존재론’[각주:3]이라 비난한다. 홀로코스트는 이런 서구형이상학의 실재가 돌출하여 인류전체를 베었던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는 이러한 전체주의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되었고, 그에 대한 반론을 펴는 첫 번째 단계에서 동일성으로 포획되지 않는 타자를 설정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런 의미에서 ‘타자의 얼굴’은 동일성의 폭력에 반대하면서 윤리학에 기초한 새로운 사상으로의 전환을 도모하려는 레비나스에게 중요한 사유의 거점이 된다. 전통적으로 레비나스를 공부할 때 ‘타자의 얼굴’을 설명하는 대목에 이르면 후설의 현상학과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 개념, 그리고 양자를 극복해나가는 레비나스 현상학의 독특함을 거론한 후 ‘타자의 얼굴’에 이르는 순서를 밟는다. 필자는 이런 도식보다는 복음서에 나타난 타자에 대한 환대가 드러난 기사(예수의 비유에 나타난)와 레비나스의 ‘타자의 얼굴’을 상관시킴으로써 이 문제에 좀 더 친근하게 다가서고자 한다.

타자의 얼굴_ 예수의 비유를 중심으로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비유들은 ‘하나님 나라’를 민중들에게 설명할 때 사용하는 그릇이라 할 수 있다. 어떤 그릇이 사용되어지는가에 따라 음식의 종류와 맛을 상상할 수 있듯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도 몇 가지 종류의 그릇에 담겨 전달되어져 우리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맛과 향을 달리 느끼게한다. 예수가 민중들에게 들려주는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는 크게 세 가지 종류의 그릇에 담겨 배달된다. 하나는 ‘언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가?’, 즉 하나님 나라의 때(시간)와 관련된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 나라와 현실세계와의 차이점을 언급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은 누구인가?’라는 주제이다. 지금부터 언급하려고 하는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사마리아인의 비유’와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비유는 대표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은 누구인가?’를 언급하는 본문임과 동시에 레비나스의 ‘타자의 얼굴’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예수는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을 받고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준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은 서로 만날 수 없는 타자이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사마리아인에게는 더러운 이방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유대사회는 사마리아산 포도주나 기름의 사용을 금지하였고, ‘사마리아인의 빵을 먹는 자는 돼지고기를 먹는 자와 같다’라는 속설이 유대사회 전체에 퍼져있었다.[각주:4] 이렇듯, 유대인에게 있어 사마리아인은 자신들의 율법안으로 포섭되지 않는, 우리 인식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타자다. 그런데, 그토록 격멸했던 타자 사마리아인이 강도만나 초죽음이 된 유대인을 받아들인 것이다. 본문이 처음 읽혀지고 유포될 당시 유대인 독자들은 모두 의아했을 것이다. 유대사회의 지도층을 대변하는 제사장과 레위인 모두 피해갔는데 왜 하필 사마리아인가? 이 비유 안에 나타난 타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내가 알 수 없는 존재, 내가 모르는 존재에 대한 응답을 의미한다. 타자란 나의 앎과 계산에 의해, 나의 율법과 관습에 의해 선택되고 받아들여지는 존재가 아니라, 내게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으로 내가 즉각적으로 응답을 해야 할 대상인 셈이다.

마태복음 25장 ‘최후의 심판’ 비유에서 인자는 심판 날에 양을 자기 오른쪽에 염소를 자기 왼편에 세운다. 양과 염소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상징한다. 이 심판을 지켜보는 청중이나 오른쪽에 있는 양, 왼쪽에 있는 염소 모두에게 인자의 판정이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이유는 그 판정기준 때문이었다. 김창락 교수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놀라운 것은 멸망을 선고받은 사람들도 비신자가 아니라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무슨 악행을 저질렀거나 의식적으로 범죄를 하였기 때문에 멸망을 선고 받은 것이 아니라 이름없는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을 선고 받았다는 것입니다.”[각주:5]

판정의 기준 못지않게 논란이 되는 대목은 인자의 자기인식이다: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 23:35-36). 김창락은 이 구절에 기대어 인자가 당대의 타자였음을 분명히 한다: “인자는 자신을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와 완전히 동일시 하였다.”[각주:6] 인자가 타자라는 사실, 즉 내가 모르고 있었고 나와 다른 처지에 있는 사람이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메시아라는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각주:7] 결국, 위의 예수의 비유를 통해 확인된, 인자가 나의 인식과 나의 결단과 신앙의 도그마 안으로 포섭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얼굴을 통해 어느 순간 내게 확 다가와 응답을 요구하는 존재라는 사실은[각주:8] 레비나스가 주장하는 ‘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학’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학


레비나스의 ‘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학’[각주:9]은 한마디로 타자의 얼굴에 반응하는 것이다. 요즘 같이 아름다운 것이 선한 것이 되고, 신체와 몸과 얼굴이 자본화 권력화 되어가는 시점에서 시대착오적발언이 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레비나스의 얼굴은 단순히 눈, 코, 입이 조합된 성형외과에서 개조의 대상이 되는 즉물적 개별적 얼굴이 아님은 당연하다.

정확하게 말하면, 레비나스가 ‘타자의 얼굴’에서 강조하는 점은 타자의 얼굴로부터 호명되어진 무엇으로 인해 우리 마음에 생채기가 생겨 ‘내가 여기 있나이다’[각주:10]라는 답변을 지닌 채 타자의 얼굴과 대면하는 것이다(face to face).[각주:11]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윤리는 새롭게 태어난다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동일자에 대한 의심, 즉 동일자의 자기중심적 자발성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이 일이 타자(타자의 얼굴과 대면하는 것)를 통해 일어난다. 타자의 현존으로 인해 나의 자발성에 문제제기가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윤리라 부른다.”[각주:12]

위의 문장은 다음과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 주체, 즉 동일자의 자기의식 안에 갇혀있는 그 주체로는 우리가 타자를 인지할 수 없다는 것, 이 말은 또한 주체이전에 타자가 먼저 상정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타자를 먼저 인식하고, 그런 타자의 얼굴에 반응(응답)하는 윤리적 주체로 자기를 정립하게 되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무한의 미래, 가능성이 펼쳐진다. 이것이 바로 레비나스가 말하는 존재론에 우선하는 윤리학, ‘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학’이다.

사실, 기존의 윤리는 타자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말한다고 하지만 주체중심의 인식론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타자에 대한 윤리는 실상은 나의 의지, 판단, 결정의 소산이고, 주체의 그것을 돋는 기저에는 항상 권력관계가 작동한다고 푸코는 비판한 바 있다. 레비나스 역시 푸코가 같은 문제의식을 지녔으나 양자가 취했던 방법은 다르다. 푸코는 주체 대신 자기를 발견하면서 내면으로의 수렴을 강화한 반면, 레비나스는 주체를 향한 수렴대신 초월을 향한 발산으로 방향을 틀었다.

결론적으로 레비나스가 지녔던 서구윤리학에 대한 문제제기는 다음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서구철학 깊숙히 문신처럼 베어있는 주체중심의 인식론 바깥에 새로이 윤리학을 위치시킬 수는 없을까?” 이러한 전환은 헤겔식의 근대적 주체, 그리고 그 주체가 지녔던 무한한 자유에 대한 반성이자 폐기선언이라 할 만하다.[각주:13] 인간은 근대가 이룩한 정신의 성취가 아니라, 그 외부에 있는 무엇인가로부터 비로소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근거가 확보되는 존재이다. 그것을 레비나스는 존재론 혹은 주체중심의 인식론에 선행하는 인간이라 표현하였고, 그 결과 윤리학은 레비나스에 와서 제일철학으로 등극하게 된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Emmanuel Levinas, Totality and Infinity: An Essay on Exteriority. Trans. Alphonso Lingis,( Pittsburgh, PA: Duquesne University Press, 1969), 87-88. [본문으로]
  2. Ibid., 44. [본문으로]
  3. Ibid., 22 [본문으로]
  4. 조태연 외. 『뒤집어 읽는 신약성서』.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9), 84. [본문으로]
  5. 김창락. 『귀로 보는 비유의 세계』 (천안:한국신학연구소,1997), 392. [본문으로]
  6. Ibid., [본문으로]
  7. “Messianism is that apogee in Being-a reversal of being persevering in his being”- Emmanuel Levinas, Entre Nous: On Thinking-of-the-Other. Trans. Michael B. Smith & Barbare Harshav.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8), 60. [본문으로]
  8. Emmanuel Levinas, Totality and Infinity: An Essay on Exteriority. Trans. Alphonso Lingis,( Pittsburgh, PA: Duquesne University Press, 1969), 199-200. [본문으로]
  9. Levinas, Emmanuel. Levinas Reader. Edited by Sean Hand, (MA: Balckwell, 1989), 75-87. [본문으로]
  10. 임마누엘 레비나스, 『윤리와 무한』,양명수 옮김 (서울: 다산글방,2000), 136. [본문으로]
  11. Ibid., 99. [본문으로]
  12. “A calling into question of the same-which cannot occur within the egoist spontaneity of the same- is brought about by the other. We name this calling into question of my spontaneity by the presence of the Other ethics.”- Emmanuel Levinas, Totality and Infinity: An Essay on Exteriority. Trans. Alphonso Lingis,( Pittsburgh, PA: Duquesne University Press, 1969), 43. [본문으로]
  13. Ibid., 196-197 [본문으로]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BLOG main image
by 제3시대

공지사항

카테고리

웹진 <제3시대> (831)
특집 (8)
시평 (94)
목회 마당 (60)
신학 정보 (136)
사진에세이 (39)
비평의 눈 (72)
페미&퀴어 (25)
시선의 힘 (135)
소식 (153)
영화 읽기 (32)
신앙과 과학 (14)
팟캐스트 제삼시대 (12)
연구소의 책 (13)
새책 소개 (38)
Total : 352,465
Today : 93 Yesterday : 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