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과 주체 6]


알튀세르와 이데올로기적 주체



 

허석헌

(미국 샌프란시스코 GTU 박사과정, 조직신학)



왜 알튀세르인가


      루이 알튀세르(1918-90)라는 이름이 맑스주의 논쟁의 한복판에서 한 때 큰 영향력을 끼쳤던 적이 있었다. 발리바르가 ‘알튀세르를 위한 조사’[각주:1]에서 말한 것 처럼, 그는 맑스주의와 공산주의라는 테제를 프랑스철학사에 남긴 철학자이며, 맑스주의를 둘러싼 수많은 논쟁에서 프랑스철학이 중심적인 위치를 점유하게 만든 공로자이다. 그로부터 반세기 가까이 지난 지금에 그의 이름은 거의 잊혀진 듯 보이지만, 오늘에도 그의 철학적 유산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맑스주의가 스탈린식 사회주의 실패 이후 포스트구조주의의 변화 안에서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방황하는 처지가 되었을 때, 맑스주의를 관념론적으로 수용하려는 유혹으로부터 과감히 분리시키고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재구성해내었다는 점에서, 그의 노력은 학문적 완결성을 떠나 오늘날 맑스주의의 부활을 꿈꾸는 모든 시도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굳이 열렬한 알튀세리앵이 아니더라도 우리 시대에 맑스를 말하려면 알튀세르는 한번 쯤은 넘어야할 할 관문같은 것이면서 동시에 관문을 통과시켜주는 열쇠와 같은 존재이다.

    이 글은 알튀세르가 이해하는 맑스주의적 입장에서 ‘주체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 글에서 그의 전체 철학의 내용을 조망할 여유는 주어지지 않는다. 다만, 알튀세르가 맑스주의의 휴머니즘적인 요소를 구별시켜내기 위해, 인간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발전시켰으며, 이를 위해 정신분석학을 통해 이데올로기의 실체를 어떻게 파악했는지를 중점적으로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서 알튀세르는 주체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는지, ‘다양한 해석이 아니라 변혁을 위한 철학’이라는 맑스주의의 궁극적인 목표에 얼마만큼 충실하였는지를 평가해 보려고 한다.


맑스를 위한 자본론 읽기


    알튀세르의 철학적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우리의 논의는 그의 두 권의 논문집에서 시작해야 하는데, 첫번째는 ‘맑스를 위하여Pour Marx (1965)’이고 두번째는 ‘자본론을 읽는다 Lire le Capital(1965)’이다. 이 두권의 논문집을 통해서 알튀세르라는 이름은 맑스주의 철학자로서 주목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저술들은 무엇보다 책의 제목 자체가 그의 전 생애에 걸친 맑스철학자로서의 정체성을 한마디로 드러내 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이유가있다. 제목 그대로, 그의 철학은 ‘맑스를 위한’ 동기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맑스를 위한’ 그의 실천전략은 다시 ‘자본론을 읽자’는 제안으로 전개된다. ‘맑스를 위한, 자본론 읽기’가 겨냥하는 일차적인 목표는 제일 먼저 맑스주의를 이데올로기화시키려는 모든 시도들로부터 경계짓는 것이다. 스탈린의 시대는 지나갔지만 맑스주의에 대한 스탈린식의 교조적 적용에 대해 돌파구를 찾고 있던 때에, 맑스주의를 옹호하려는 운동의 일환으로 나타난 손쉬운 반응은 맑스주의의 휴머니즘적 해석이었다.[각주:2] 이 휴머니즘적 해석은 맑스의 청년기 저작에 근거하는데, 특히 ‘경제철학수고(1844)’에서 재발견된 ‘소외’의 개념은 그간 무시되었거나 간과되었던 인간의 윤리적 심리적 차원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러한 청년 맑스의 재발견은 그동안 스탈린의 교조주의를 통해서만 맑스주의의 저작을 해석해야 했던 이들에게는 일종의 해방으로 경험되었다. 이 해방감은 다시 ‘자유주의’적이고 윤리적이며 휴머니즘적인 맑스주의를 진보처럼 받아들이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 자유, 소외와 같은 휴머니즘적인 개념들로 맑스주의를 재해석하려는 흐름에 대해 알튀세르는 맑스주의를 이데올로기로 오염시키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대신에, 알튀세르는 맑스주의에 대한 ‘과학적 독해’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가 말하는 과학적 독해라는 것은, 맑스주의를 비판하거나 혹은 옹호하기 위해 맑스의 저작들을 이데올로기적 읽기방법으로 체계화시키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그의 해석방식을 말한다. 말하자면, 맑스를 순수하게 읽어야 하지, 다른 의도를 숨겨둔채 읽지 말것을 주문하는 것이다.[각주:3] 알튀세르가 보기에, 맑스주의의 휴머니즘적 해석은 청년 맑스에서 간헐적으로 보이는 이데올로기적인 요소들을 맑스 전체를 해석하는 틀로 오해한 나머지, 맑스 성숙기의 저술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고 비판한다.[각주:4]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에서, 알튀세르가 내세운 ‘맑스를 위한’ 읽기 방법은 맑스주의 이론을 다른 이데올로기적 해석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맑스를 훗설로, 맑스를 헤겔로, 맑스를 윤리적이거나 휴머니스트적인 청년 맑스로 위장”[각주:5] 시키려는 시도들에 대해 반박하는 것을 과제로 보았다.   

    따라서, 알튀세르에게 일차적으로 맑스 청년기 저술 안에 보여지는 휴머니즘적인 경향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이를 위해서, 알튀세르는 이론적 형성의 특수한 차이를 드러내는 선별 지점을 지시하기위해 자끄 마르땡에게서 ‘문제틀’이라는 개념을, 그리고 과학적 학문의 토대에 대한 이론적 문제들의 변화를 감지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가스통 바슐라르로부터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개념을 차용한다.

    먼저, ‘문제틀’이라는 것은, 개별 저자가 제시하는 “대답들을 주재하는 질문들의 체계”[각주:6]를 말한다. 쉽게 말해서, 질문에 대한 답은 질문과의 연관성/일관성을 벗어나서 답해지지 않고, 반드시 질문의 체계안에서 대답되어진다는 말이다. 모든 이론과 철학은 그 자체가 일관성 있는 연속적 개념들로 구조화되어 있기에 문제와 답은 항상 서로 연관된 틀안에서 상호작용하게 된다. 예를 들어서, 우물가서 숭늉을 찾을 수 없는 것 처럼, 헤겔식의 관념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맑스적인 유물론적 대답에서 찾을 수 없다는 말이다. 질문은 이미 대답이 발견될 범위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틀’이라는 개념은 청년 맑스와 성숙한 맑스의 차이를 분별해 줄 수 있는 방법이론으로 차용되었다. 이 개념을 통해 알튀세르는 청년맑스의 ‘경-철수고’는 포이에르바하의 문제틀이지 맑스적 문제틀이 될 수 없다고 분석하며,청년 맑스와 성숙한 맑스를 분시시켜놓는다.

    ‘인식론적 단절’[각주:7]이라는 개념 역시 사적유물론의 주창자로서 성숙한 맑스를 이데올로기적 관념에서 발견되는 맑스를 분리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된다.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말은 앞선 ‘문제틀’이라는말과 연관되어 있는데, 과학 이전의 사고양식이라는 문제틀에서 과학적 사고양식이라는 문제틀로의 급격한 인식론적 전환을 의미한다. 이 전환은 서로 유착관계에서 일어나는 순리적인 변화가 아니라, 전환점을 기준으로 이전과 이후가 서로 모순되고 단절되며 불연속적인 대립속에서 벌어지는 적대적인 전환을 말한다. 알튀세르는 청년 맑스와 성숙기의 맑스안에서 인식론적 단절이 일어났다고 보는데, 그 기점은 ‘독일이데올로기’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독일이데올로기’[각주:8]에서 비로소 맑스가 목적론적 사고방식, 실증주의적 역사관, 휴머니즘적인 태도와 같은 이데올로기적인 방식과 완전히 결별하고 그의 독창적인 ‘사적유물론’을 전개하기에 이르렀으며, ‘자본론’의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진보하는 길을 열어놓은 것으로 보았다.

    이제, ‘문제틀’과 ‘인식론적 단절’의 개념들을 통해서 맑스주의를 다른 이데올로기적 체계(틀)과 분리시키고, 서구 부즈조아적인 휴머니즘으로부터 성숙한 맑스를 되돌려 놓기위한 알튀세르의 기획은 보다 구체적인 문제로 진입한다. 알튀세르는 이 목적을 보다 현실적으로 가시화시키기 위해 맑스의 초기 저작들 안에서 나타난 사회변혁의 주체로서의 인간 개념을 뒤집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한 알튀세르의 대답은 이데올로기론에서 다뤄진다.


이데올로기는 물질이다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를 직접적으로 문제삼는 글은 그의 논문집 ‘레닌과 철학(1969)’에 실린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는 논문에서이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해서, 이데올로기에 대한 논의는 이미 ‘맑스를 위하여’에 수록된 ‘모순과 중층결정’이라는 글에서 먼저 다뤄진바 있다. ‘모순의 중층결정론’이 함의하는 바는, 다양하고 상이한 여러 층위들로 구성되는 사회와 역사는 경제라는 ‘기본모순’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사회는 다양한 사회적 실천들로 구성되는 복합적 총체이고, 각 실천들은 제 각각 특수한 자질들을 갖기 때문에 어느 하나의 실천이 본질적 영역이 될 수 없고, 모순 또한 사회구성체의 다양한 층위와 심급들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사회구성체는 서로 보조적이고 역동적인 관계를 맺으며 모순은 원리에 있어서 중층적으로 결정된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이다.[각주:9] 맑스주의에서 하부구조가 상부구조가 결정한다는 것이 불문율처럼 수용되었다면, 알튀세르에게서, 상부와 하부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서로 자리를 맞바꿈 하는 중층관계라는 변칙적인 관계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하부토대를 이루는 자본과 노동의 경제적 모순이 가지는 상부구조에 대한 일방적인 결정구조를 비판하면서, 하부구조에 의해 파악될 수밖에 없는 상부구조라고 믿어왔던 요소들은 동시에 하부구조 안에서 ‘중층결정’[각주:10]의 관계를 구성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를 허위의식으로 보아 왔고 과학적 사고와 대립시켜왔던 기존의 입장에서 벗어나, 현실 세계속에서 이데올로기가 차지하는 실제적인 물리적 성질에 주목한다. 알튀세르는, 대체로 오류나 환상, 왜곡된 의식, 관념적인 현상이라는 받아들여졌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데올로기는 사실 개인들의 실제적 존재 조건들에 대한 그들의 ‘상상적인 관계’를 나타내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실제적 관계의 표현은 아니지만, 실제적 관계처럼 보여지는 개인들의 ‘상상적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이론, 이론적 실천 그리고 이론적 형성(1966)’에서 이데올로기는 역사적인 실제에 관해서 ‘환영illusion’’을 구성함과 동시에, 역사적 실제를 ‘암시’한다고 말한다. 대표적인 예는 기독교에서 발견된다. 크리스챤은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라는 상상적인 관계를 표상한다. 오늘 한국의 현실을 빗대자면, 열혈 친박-수구세력은 자신들을 국가와의 관계에서, 좌파를 청산하는 국가의 수호자라는 ‘상상적인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그 관계는 상상으로만 머물지 않고 실제안에서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나려는 속성을 갖는다. 이런 점에서, 상상적인 관계로서 이데올로기는 단지 허위나 왜곡이 아닌 실제로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는 ‘물적존재’가 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데올로기는 상부구조에서 맴도는 허구가 아니라 현실과 관계맺는 물리적 성격을 가진다는 말이다. 따라서, 포이에르바하는 ‘기독교의 본질’에서 종교는 인간 욕망의 투영일 뿐이라면서 종교를 실체없는 허상으로 간주하였지만, 알튀세르식으로 보면 종교라는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토대에 구체적인 행동을 유발하는 물적 형태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상상적인 관계에서 개인이 부여받은 의식은 단순히 관계를 인지하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고, 이 관계에 부합하는 실질적인 실천을 수반한다. 마치, 신의 자녀로 상상적인 관계를 맺는 자는 그에 걸맞는 종교의식, 종교적 규율과 의무를 하게 되는 것 처럼, 또는 친박-수구 단체 회원이 좌파로부터 조국을 수호하려는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상상적인 관계속에 지나치게 몰입하였을 때에, 폭력적이고 비정상적인 집단행동을 보이는 것과 같다. 인간 개인들은 상상적인 관계와 실천의 상호작용 안에서 점차 이데올로기에 예속된 주체로 나타난다.


이데올로기의 호명


    이데올로기에 예속된 주체는 부르조아 국가에서 사회를 작동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는 생산관계의 재생산이라는 매우 중요한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국가가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생산관계가 유지 재생산 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 두가지 수단이 동원된다고 본다. 하나는 정부, 행정, 군대, 경찰, 감옥과 같은 ‘억압적 국가장치’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 교육, 가족, 언론, 문화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이다. 전자가 폭력을 통해 작동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작동하는 차이점을 갖는다.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확산하고 강화하는 근본적 수단이며, 이데올로기 장치안에서 개인은 이데올로기에 지배력을 장악당하는 주체로 재생산되는 것이다.

   이처럼, 이데올로기가 주체를 구성하는 관련성을 정리하자면, 개별자가 가지는 믿음, 신념의 존재는 관념에 머물지 않고 물화된 형태로 주어지는데, 왜냐면 개인의 주어진 관념은 물질적 실천들 속에 삽입되어 있는 물질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 물질적 실천은 물질적 의식에 지배되며, 그 물질적 의식은 물질적 이데올로기 장치에 의해 정의되고, 그 물질적 이데올로기 장치로부터 주체 관념은 파생된다. 여기서, 우리는 주체와 이데올로기의 역전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있다. 이데올로기는 주체의 산물이 아니다. 반대로 주체는 이데올로기의 산물이 되는 것이다. 유사하게,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개별자들에 선행한다. 신념이 있기에 이데올로기적 장치를 주체적으로 구축하는 것이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장치가 있음으로 해서 개별자들은 신념을 가지게 된다. 말하자면, 알튀세르에게 주체는 이데올로기의 결과이다.

    이를 다르게 표현한 개념이 ‘호명interpellate’이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마지막에서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주체로 호출/호명 한다’고 규정하는데, 이 말로서 알튀세르는 인간의 주체성의 본질을 가장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이데올로기의 기본 기능은 개인들을 생산관계에 적합한 주체를 생산해 내는 것인데, 이는 호명을 통해 이뤄진다는 것이다. 즉, ‘이봐 거기 당신’이라는 작은 말 하나만으로도 상상될 수 있는 매우 세밀한 상상적 관계의 조작을 통해 모든 개인들을 주체로 구성하거나 변형시키는 방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지젝은 ‘까다로운 주체’에서 호명과 관련된 슬로보니아의 농담을 적절한 예로 든다. 극장에 늦게 들어온 한 부자가 있었는데, 그가 연극을 방해한 죄책감에 싸여 있을 때에, 때 마침 배우가 내 뱉은 ‘누가 내 침묵을 방해하는가?’라는 대사를 부자 자신을 향한 말로 오인하였고, 결국 그는 극장 안에서 큰 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대답했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가 말해주는 것은, 배우의 호명이 부자관객으로 하여금 큰 소리로 대답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배우에 의해 주체로 호명되는 사건은 이처럼 뚜렷한 인과관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호명은 상상적 관계를 불러일으키고 행동을 유발하는 데 이 모든 과정은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오인’된 호출에서 이뤄진다는 것을 시사한다.

    알튀세르에게서 ‘호명’이 이데올로기와 주체간의 관계에 대한 열쇠로 되는 이유는 개인을 주체로 되게하는 과정이 사실은 이데올로기의 환영/오인과 자기 암시에 의한 것임을 말해주기 위함일 것이다. 또한 환영으로 존재하는 상상적 관계일지라도 그것이 자신을 호명한 것으로 오인했다면, 그것은 개별자를 주체로 불러내는 것이며, 복종의 강요와 억압이 아닌 순주히 자신의 자발적인 선택과 행동에 의한 것으로 착각하도록 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이 스스로 주체가 되었다는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국가장치에 의해 호출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자발적으로 존재한다는 환상에 도취되어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인간을 파악하는 알튀세르의 입장이 드러난다. ‘인간’은 부르조아 이데올로기의 구성물이다.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사회가 요구하는 주체로 구성하기 때문에 주체는 이데올로기 없이 불가능하며, 이데올로기 없이 사회는 존재할 수없다고 본다. 사회적 재생산은 자신을 인식하는 자발적인 주체에 의해 수행되기보다 인간의 배후에 있는 장치구조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다. 인간 자신이 선택한 목적을 의식적으로 추구하는 행위는 없으며, 모순의 중증결정 구조에서 경제적인 최종심급으로 규정되는 행위들과 효과만이 나타날 뿐이다.

    이렇게 인간에게서 어떤 본질적인 행위의 근거를 제거하는 것이 알튀세르가 맑스를 위해 자본론을 다시 읽기를 제안했던 의도이다. 알튀세르는, 자본론을 소외된 주체의 복권과정으로 읽어내는 주체 중심적인 독법을 신화적인 것으로 비판하고, 대신 ‘주체없는 과정’이라는 역사 개념을 등장시킨다. 역사는 주체가 없는 과정이다. “역사속에서 작동하는 변증법은 그것이 절대자이든 인간이든 그 어떤 주체의 활동도 아니며, 역사의 기원은 언제나 이미 역사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고 따라서 역사에는 철학적 기원도 철학적 주체도 없다”[각주:11]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인간을 보는 알튀세르의 입장은 고스란히 드러난다. 인간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신화일 뿐이다. 때문에 맑스주의는 인간의 주체로부터 출발할 수없다. 때문에, 계급투쟁도 역시 자유로운 인간주체들의 인식과 실천행위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일정한 사회의 생산관계를 구성하는 관계들 차이들, 대립들로 이루어진 체계와 구조의 반영물일 뿐이다. 이렇게 알튀세르는 맑스에게서 인간의 제거하고 과학만을 남겨놓았다.  


알튀세르가 남긴 것들


    맑스의 관점에서 모든 계급적 모순과 대립, 그리고 계급투쟁은 경제적인 동기에서 발생하여 경제적인 목적으로 회귀한다. 이러한 맑스주의 경제적 환원주의는 정치적 변혁과 계급투쟁의 개념들을 지극히 좁은 영역으로 제한하며 정치적 주체성이 발현되는 공간의 가능성을 애초부터 차단하고 만다. 이러한 맑스주의의 당면한 한계에 스탈린적인 교조주의로 응답해온 맑스주의 진영에 대해 알튀세르는 새로운 맑스주의 독법을 제시한다. 알튀세르가 주목하는 것은, 모순은 경제적 토대에서 결정되기보다 상부구조의 존재와 본질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계급적 모순은 경제라는 단선적인 층위로만 제기되지 않고,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의 국가장치들이라는 복잡하고 중층적인 계기를 통해 발생하게 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이로써, 맑스적인 계급투쟁의 협소한 개념은 알튀세르에 의해 넓은 외연으로 확장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계급적 모순의 문제는 정치 이데올로기적인 구조의 문제들에 대한 정치적 실천의 차원에서 변화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것이다. 이와 같이 알튀세르는, 맑스주의에 대한 교조주의를 반대하면서도 이데올로기적인 해석 또한 분리시켜내어, 맑스주의를 오늘의 자리에서 진지하게 사고하는 길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나 알튀세르의 반휴머니즘으로 드러난 이데올로기의 실체와 그로 인해 구성되는 인간은 역사에 대한 인간의 무능함을 넘어 회의감마저 들게 만든다. 인간은 역사를 구성하는 주체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구성되는 주체라는 점은 인간의 주체에 덧붙여진 환상과 오인을 제거할 수 있게 해 주었지만, 한편으로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극복할 수 없는 한계 같은 것이 이미 설정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알튀세르의 반휴머니즘은 모순에 대한 인간의 승리를 전망해 주기보다 인간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구조의 승리를 인정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만든다. 마치 푸코가 지식과 담론이 구성하는 권력구조에 대한 탁월한 분석을 내놓았으나, ‘그러면 인간의 해방의 길이 어디에 있느냐’는 물음 앞에서는 정작 궁색해지는 것처럼, 알튀세르 역시 이 점으로부터 인간주체에 대한 회의주의적 물음을 어떻게 처리할 지가 또다시 문제로 제기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제기 조차도 인간주체에 대한 불확실성을 견딜 수 없어하는 조급함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진정한 변혁은 현상을 현상대로 직시하는 자리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에 익숙해지기 전까지 이러한 물음은 계속될지도 모른다. 알튀세르 자신에게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알튀세르는 말년에 정신병을 앓던 중 아내를 살해한 비극적인 인생의 결말을 맞이한다. 이보다 더 큰 비극은 그가 평생을 붙들고 온 철학자로서의 걸어온 길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는 철학자로서의 삶을 정리하며 자신은 인생 전반에 영향을 미친 맑스와 프로이트를 결코 완독하지 못했고 따라서 둘을 결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기꾼이라고 털어놓는다. 그가 맑스와 프로이트를 완독하지 못했다는 말이 그들의 책을 섭렵하지 못했다는 뜻은 물론 아닐 것이다. ‘맑스를 위하여, 맑스를 다시 읽기’를 ‘해석이 아닌 변혁을 위한’ 철학자로서의 절대 사명으로 여겼던 그에게도 ‘맑스적인 주체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여전히 미완으로 남겨진 풀지 못한 숙제였다는 자기 고백이 아니었을까.



ⓒ 웹진 <제3시대>

  1. 에티엔 발리바르, 루이알튀세르 1918~1990 (민맥신서, 1991), 33. [본문으로]
  2. 가장 잘 알려진 휴머니즘적 맑스 해석으로서, 가톨릭 철학자 Jean Yves Calves와 Pierre Bigo, 알튀세르의 옛스승인 Jean lacroix, 실존주의자 Jean Paul Sartre, 현상학자 maurice Merleau-Ponty와 같은 철학자들은 맑스의 철학이 본질상 인간 삶의 질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자신들의 철학으로 포함시켰다. 이들은 맑스주의를 자본주의의 비인간적인 상태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사유체계로 규정한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이런 종류의 휴머니즘은 도리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간교한 계략이며, 이는 맑스주의와 관련없는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루크 페레터, 루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앨피, 2006), 55. 참조. [본문으로]
  3. 알튀세르는 ‘맑스를 위하여’ 다시 ‘자본론을 읽자’고 제안한다. 맑스를 그 어떤 이데올로기와 연관지어 해석하려는 모든 시도들을 접어두고 순수의 자리에서 다시 맑스를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알튀세르는 ‘맑스를 위하여’ 불어판 서문에서 그의 학문적 지향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우리는 뒤로 물러서서 반쯤은 방향 감각을 잃은 상태로 기초부터 다시 시작했어야 했다. 나는 나 자신으로서 그리고 우리의 과거로부터 오직 우리의 현재를 밝혀주고 우리의 미래를 비추어줄 그 무엇인가를 찾는 공산주의자로서 이 글을 쓰고있다.” [본문으로]
  4. 알튀세르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우리는 맑스의 청년기 저작들에 나타나는 이데올로기적 불꽃 속에서 우리들 자신의 불타는 정열을 찾기에 급급한 나머지 흥에 겨워 맑스의 성숙기 저술들의 뜻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맑스를 위하여, 24) 여기서 맑스의 청년기 저작은 ‘유대인의 문제’, ‘경제 철학 수고’, ‘신성가족’ 등을 말하며, 정확히는 ‘독일이데올로기(1845-46)’ 이전의 맑스철학과 저술들을 의미한다. 알튀세르는 맑스의 청년기와 성숙기의 분기점을 ‘독일이데올로기’로 구분한다. [본문으로]
  5. 맑스를 위하여, 서문 [본문으로]
  6. 맑스를 위하여, 67. [본문으로]
  7. 이 개념은 가스통 바슐라르(1884-1962)에 의해 사용되었는데 그에 따르면, 과학의 역사는 일련의 지속적 단절을 통해서 진보하는데, 이 단절을 통해 기존 과학은 폐기되고 새로운 이론 체계가 그것을 대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콩트의 실증주의 역사관과 유사한듯 보이지만, 전혀 반대되는 개념이다. 콩트에게 역사는 진보의 과정으로서 연속성을 가지지만, 바슐라르에게는 역사는 불연속성이라는 단절에 의한 것으로 파악된다.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의 전환 Paradigm shift’과 같은 의미라고 보아도 무방할 듯 하다. [본문으로]
  8. ‘독일이데올로기(1845-46)’가 ‘인식론적 단절’의 전환점이 되었던 배경은 다음과 같다. 맑스와 엥겔스가 ‘독일이데올로기’를 집필하는 당시까지만 해도 맑스주의는 사회주의의 많은 집단과 경향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이는 맑스주의의 당면 과제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맑스주의를 자유주의 부르조아 이데올로기와 쁘디 부르주아 사회주의와 대비시키는 것임을 함축한다. 한편으로, 과학적 공산주의만이 노동자계급의 사회적 해방을 위한 현실적인 길이고, 자본주의의 모순에 의해 노동계급이 자발적으로 선택되어지는 영도이념으로 확신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다. [본문으로]
  9. 맑스를 위하여, 116. [본문으로]
  10. 알튀세르는 ‘중층결정 Surdetermination’이라는 용어를 다른 영역에서 빌어온 것이라고만 말하지만, 사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적 용어에서 유래되었다고 본다. 알튀세르가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헤겔적 모순에 대한 비판적 의도를 담고있는데,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의 경험들과 절대지의 도래에서 경험되는 모순들은 단순하지 않고 오히려 복잡성을 보여준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본문으로]
  11. 알튀세르, 레닌과 철학, 13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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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지젝을 아느냐? (IV)
: 쫄지마, 이데올로기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 과정)

 

다소 긴 프롤로그

독자들은 이데올로기라는 말을 접하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난 솔직히 숨이 막힌다. 답답해서… 인간과 사회, 인간과 자연, 인간과 세계 사이의 역학 속에서 인간이 품는 현실적이며 이념적인 의식 형태를 이데올로기라 부른다고 사전에는 정의되어 있다. 아울러, 이런 설명들도 추가된다. 이데올로기는 인간 존재의 기반이 되는 가치 체계, 혹은 사회적인 조건에 대한 판단의 선택 체계 등등… 이 얼마나 지루하고 따분한, 김빠진 콜라 같은 말들인가?
이렇게 밍밍한 콜라를 마시고 있던 우리에게 청량하고 자극적인 신상품이 하나 출시되었다. 그가 바로 지젝이다. 감사하게도 지젝의 이데올로기 논의는 21세기 사상계의 전체 지형에서 볼 때 진정 김빠진 콜라에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데올로기 비판을 다시 메뉴판에 당당히 입적시켜 우리로 하여금 간만에 이데올로기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물론, 지젝이 일으키는 요란함으로 인해 간혹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도 있음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젝이 일으키는 이 소동이 좋다.
우선, 온갖 것에 시비를 걸어대는 싸움닭 같은 그의 태도가 나를 매료시킨다. 복서로 따지면 전형적인 인파이터다. 나는 지젝을 읽을 때 마다, 80년대 웰터급의 왕좌를 놓고 토마스 헌즈와 세기의 대결을 연출했던 슈거레이 레너드를 떠올린다. 토마스 헌즈가 큰 키와 긴 리치를 이용하여 날카로운 잽과 강력한 스트레이트를 바탕으로 링 주의를 돌면서 우아한 아웃복싱을 전개했다면, 슈거레이 레너드는 쉴새없이 헌즈를 파고든다. 물론, 레너드의 펀치는 헤비급의 조지포먼 만큼 강력하지도, 미들급 세계챔피언 마빈 헤글러같이 묵직하지도 않았지만, 그 빈도와 펀치가 나가는 다양한 각도만큼은 당대 최고였다. 결국, 학같이 우아했던 헌즈는 레너드의 집요함 앞에 무릅을 꿇고 만다. 지젝의 발언들을 지켜보면서 왜 나는 80년대 전설의 복서였던 슈거레이 레너드가 생각나는 걸까?
내가 지젝을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는 ‘지젝 증후군’으로 나타나는 그가 일으키는 후폭풍이다. 지젝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지젝의 이론에서는 새로운 세상을 향한 실천적 측면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꼬집는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지젝을 오독한 것이다. 자본의 전 지구적 재편이 완료된, 미국식 세계 자본주의가 세계를 덥고 있는 현 시점에서 혁명이 요원하다는 사실을 이제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또한 지젝이다. 그의 책을 읽다보면 이러한 현실의 이 엄연함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지젝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똘아이처럼 지젝은 마치 이 모든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처럼 혁명을 연기한다.
이런 지젝을 지난 시대가 지녔던 혁명의 프레임 안에 집어넣어 바라본다면 불편해진다. 지젝은 혁명 그 자체를 말하려는 것보다는 우리에게 현시대 이념적 지형과 그로부터 야기되는 폭력적 증상과 징후들을 하나씩 보여주고, 거기에 적합한 혁명의 조건들을 맛나게 나열한 후에, 최종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이 엄연한 현실속에서 다시금 혁명에 대한 발칙한 상상을 도발케한다. 이러한 ‘지젝 현상’이 지금 시대를 돌파하는 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런지 아직 실험 중이지만, 그것만으로 나는 지젝이 충분히 본인의 역할을 다 하고 있다고 본다.
사상적으로 지젝이 지닌 특이점은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혁명과 정신분석을 결합시켰다는 점일 것이다. 전통적으로 프로이트로 대변되는 정신분석학은 혁명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여왔었다. 지젝은 바로 그 정신분석을 혁명을 이해하는 도구로 끌어들인다. 이 말은 지젝이 혁명을 그 전 인물들과 다르게 해석한다는 말이다. 지젝에게 있어 혁명은 단순히 인민을 굴종시키는 오래된 억압과 착취의 물리적 체제를 전복시키는 행위가 아니다. 전통적 혁명론이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모토 하에, 주체의 투철한 의지와 인식론적인 앎이 조화를 이루는 철인의 혁명론이라면, 지젝의 혁명론은 그 주체의 꿈꾸는 방식에 주목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깨어있는 시민이라 자부하는 우리는 무슨 공청회장에서는 아이들을 입시지옥에서 해방시켜야 된다고, 전인적인 인성교육이 절실하다고 열변을 토하다가도, 정작 집으로 돌아와서는 한글도 모르는 아이를 영어유치원에 보내고, 초등학교 3학년부터 아이들을 특목고 대비반에 몰아넣는 속물적인 우리들이다. 물론, 우리는 이런 자신의 잘못을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행동은 계속되는 것인가? 지젝이 혁명을 이야기하면서 정신분석학과 공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 시대의 혁명은 단지 국가를 전복시키는 행위가 아니다. 우리 의식을 마비시키고 있는 자본의 욕망을 건드리지 못하고 그 욕망이 꿈꾸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혁명이 요원하다는 사실을 지젝은 알아차렸던 것이다.
지젝은 이러한 본인 사상의 밑그림을 선보이면서, 그것의 첫 단추를 이데올로기 비판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지젝을 읽는 것은 우선, 지젝식 이데올로기 비판의 화법을 따라 가는 것이다. 그 순서를 거치면서 우리는 지젝이 말하는 실재와 실재의 윤리와 유물론적 믿음과 만난다. 지젝의 발언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외치게 하고, 우리를 어디로 인도할는지는 물론 좀 더 지켜봐야 할 성질이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지젝을 통해 우리는 사상사를 수놓았던 (지젝을 통과한) 철인들을 다시 만나고, 그들이 고민했던 문제와 대안을 벗삼아 오늘의 문제를 다시 다각도에서 반추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저마다의 자리에서 자신의 목소리로 다시 혁명을 이야기 할 수 있다면……그래서, 나는 지젝이 일으키고 이 소동이 유쾌하고 흥미롭다. 이제야 비로소 지젝의 이데올로기 비판으로 넘어갑니다. Are you 뤠디?


고전적 이데올로기 비판

지젝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 이데올로기 비판의 세 가지 차원을 언급하고 있다.
우선, 고전적 의미의 이데올로기 비판이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맑스의 이데올로기 비판이 아닐까 싶다.[각주:1] 맑스에 의하면, 역사란 이데올로기의 오류인식과정이고, 이데올로기는 계급에 의해 결정되며, 그런 의미에서 다분히 당파적이다. 계급과 당파는 ‘쭉~’ 계속 보편적으로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변하고 뒤틀리고 역전된다. 그러므로 맑스에게 있어 이데올로기 비판이란 지배자와 피지배자간의 관계와 그 역학을 밝히고, 그 과정에서 작동하는 허위의식과 순진함을 까발리는 일이다. 즉, 체제의 의해 왜곡된 현실과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인민의 순진함을 해부해 보이는 것이 고전적 이데올로기 비판의 주된 임무였다.
지젝은 이 대목에서 냉소주의를 거론하며 고전적 이데올로기 비판이 지니는 나이브함을 역으로 고발한다. 오늘날의 우리는 체제에 의해 자행되는 현실에 대한 왜곡과 모순의 매카니즘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체제는 더 이상 우리를 속이지 못한다. 우리의 집요한 네티즌들과 인터넷 논객들이 그것을 가만두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현실을 거부하지 못하고 오히려 전 시대보다 체제에 편입하고자 더 목을 매는 이유는 무엇인가?[각주:2]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결국 지젝의 욕망과 환상에 대한 이론일텐데, 연재를 거듭하면서 이 부분은 계속 보충되고 증액될 것이다.)


다시, 알튀세를 위하여...

고전적 이데올로기 비판이 지배자와 피지배라는 구조를 전제로 한다면, 이보다 좀 더 진화한이데올로기 비판은 이데올로기가 특정 집단에 의해 작동되는 것이 아니라, 구조와 제도를 통해 작동된다는 원리다. 이것의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가 지난 <웹진 51호>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 알튀세의 호명이론이 아닐까 싶다. 
맑시즘과 정신분석학은 각각 걸어온 길이 다르고, 방법론이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이데올로기의 오류인식을 본인들 사상의 발판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를 닮았다. 맑스에게 있어서는 역사가 이데올로기의 오류인식이었고, 프로이트에게는 근대적 이성에 기반하고 중심이 꽉 차 있었다고 믿어왔던 주체가 이데올로기의 오류인식이었다. 왜냐하면 프로이트에게 있어 주체란 명료한 의식이 아닌 불확실한 무의식에 기반한 주체이고, 꽉 차있는 중심이 아닌, 비어있는 중심을 기반으로 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각주:3]
알튀세는 바로 이러한 맑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의 공통점을 알아차리고,[각주:4] 양자의 결합을 시도하여, 맑스주의에는 없는 무의식(타자)의 개념을 정신분석학(라깡)에서 끌어온다. 라깡이 무의식의 영역인 상상계와 상징계를 거치면서 어떻게 개인이 주체로 되어가는지를 분석하듯,[각주:5] 알튀세 역시 무의식과도 같은 이데올로기(대중적 표상체계로서의) 속에서 개개인이 어떻게 주체로 만들어지는지에 주목한다. 
근대적 주체는 타자의 영역을 지우고, 그 타자의 영토에 깃발을 휘날리면서 자신의 주인됨을 입증하려 했던 존재였고, 그런 의미에서 타자란 정복과 제거의 대상이지, 성찰과 관조와 대화의 대상이 아니었다. 맑스주의는 이런 근대적 주체론의 결정판이었고…그런데 맑스주의자 알튀세가 우리안의 타자, 즉 무의식을 맑스주의안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알튀세는 맑스주의 논쟁사에서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중요한 인물이 된다.


대타자의 호명 앞으로!

알튀세에 의하면, 이데올로기는 지배자와 피지배자간의 허위의식과 순진함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같이 구조화되고 내재화된 이데올로기 장치(ex: 국가)를 통해 작동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길을 가는데 전경이 내 뒤통수에 대고 “어이~, 학생, 가방 좀 봅시다”라고 하면서 나를 불러 세운다. 이때, 내가 뒤를 돌아보면서 “저요? 저 아무짓도 안 했는데요...”라고 반응한다면? 나는 아주 충실한 이데올로기적인 주체로 호명당하는 그 주체이다. 내가 전경에게 급 쫄아서 보인 반응은 사고하고 의식하고 학습해서 보인 반응이 아니다. 사고하고 의식했다면 개겼어야 맞다. 이 말은 우리의 의식보다 먼저 작동하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영어로 representation, 번역하면 표상 혹은 재현체계, 즉 구조이다.
본디 의식이란 칸트 이래 인식론적인 전통에서 보면 무엇 무엇에 대한 의식이고, 그 의식은 반드시 표상체계 안에서 일어나는 의식이었다. 그것이 칸트에게는 ‘범주’로, 후설에게는 ‘선험적 의식’으로, 가다머에게는 ‘지평’으로 표현되는데, 이 말들에는 공히 우리의 의식에 앞서 어떤 재현체계가 먼저 선행됨이 깔려있다. 그 ‘선행한다!’는 말의 의미를 달리 표현해 ‘무의식적!’이라 불러도 어느 정도 무방하리라.
이를 종합하여 내가 전경에게 보인 반응을 판단하면, 나의 국가를 향한 말과 태도는 대한민국(이데올로기 장치)이라는 거대한 표상체계 안에서 드러나는 나의 무의식적 반응이라는 말인데. 결국, 알튀세에게 있어 인간 주체란 무의식적 체계를 통과한 이데올로기적 존재이고, 그 이데올로기는 신념과 지식의 차원이 아닌, 재현의 차원, 즉 구조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적인 비판이란 체계와 구조에 의해 자행되는 이데올로기적 신화화에 대한 비신화화의 역할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겠다. 
지젝 역시 라깡을 정치적으로 전유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알튀세 계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젝은 알튀세를 넘어간다. 알튀세가 라깡의 초기이론 의지했다면, 지젝은 라깡의 후기이론을 차용하여 본인의 이데올로기론으로 나아간다. (이 부분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다음 웹진부터 전개될 것이다) 

예고편: 지젝이 나를 아프게 하는 이유

살짝 짧게 다음 웹진 원고의 시놉시스를 공개한다. (내가) 헛소리 하지 않도록.
지젝에 있어 이데올로기 비판이란 맑스가 말하는 기만적인 허위의식에 대한 비판도 아니고, 알튀세가 지적하는 무의식의 구조화도 아니다. 이 말은 이데올로기가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었던 앎의 차원(인식론적 차원)이 아니라는 말이다. 정녕 이데올로기가 겨냥하는 것은 우리의 행위다. 우리는 왜 그렇게 행동하는가? 왜, 우리는 다 알면서 그렇게 행위하지 않는가? 우리의 행위를 지배하는 그 매커니즘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SNS를 통하여, 페이스북 담벼락에다 이명박과 박근혜를 조롱하고 비난하는 글을 몇 자 끄적이고, 또 다른 그런 류의 글들에 like 버튼을 힘껏 누르는 것으로 우리는 양심적 진보적 개혁적 민주시민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명박과 박근혜식 논리와 정책을 허락하고 그들에게 한 표를 던진 우리들의 무의식을 들여다 보는 것이다.   
빛나는 계몽이성을 바탕으로 부단히 학습하고 갈고 닦고 조이면 밝혀질 것 같았던 이데올로기의 정체는 기실 우리의 무의식적 환상 너머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었고, 그것을 추동케하는 원리가 바로 욕망이며, 그 욕망에 맞춰 우리는 미친X 널뛰듯 춤을 추고 있다. 그 춤에 대한 연구가, 그 춤을 추게 하는 바람에 대한 연구가 바로 지젝식 이데올로기 비판인 셈이고, 그 비판을 통해 우리는 내 안에 도사린 무의식적 욕망과 섬뜩하게 대면한다. 하여 지젝을 읽는 것은 때때로 불편하고, 그래서 가끔은 아프다.  (다음 호에 계속)

ⓒ 웹진 <제3시대>

 

  1. “The most elementary definition of ideology is probably the well-known phrase from Marx’s Capital: ‘Sie wissen das nicht, aber sie tun es’ – ‘they do not know it, but they are doing it’. The very concept of ideology implies a kind of basic, constitutive naivete.” – Zizek, Slavoj.,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New York: Verso, 1989), 28. [본문으로]
  2. “one knows the falsehood very well, one is well aware of a particular interest hidden behind an ideological universality, but still one does not renounce it.”-Ibid., 29 [본문으로]
  3. 익히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근대적 인간이란 의지적으로나 이성적으로 꽉 차있는 주체이고, 근대사회는 그 주체가 담지하고 있는 신념과 믿음에 대한 전적 신뢰와 희망에 의지했던 사회였다. 그렇다고 볼 때, 근대적 주체에 대한 딴지와 그 주체가 그려내는 사회와 역사에 대해 조소를 날렸던 맑스와 프로이트는 포스트모던을 열어젖힌 선구자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실례로 20세 중반 이후 거세게 몰아친 포스트모던 백가쟁명이 거의 예외없이 맑스와 프로이트로부터 지적 세례를 받은 후예들에 의해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만 하다. 현대사상에서 맑스주의와 정신분석학간의 통섭과 간섭, 그리고 교차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본문으로]
  4. Louis Althusser, Lenin and Philosophy and Other Essay, trans. Ben Brewster,(New Yoor: Monthly Review, 1971), 218-219. [본문으로]
  5. 알튀세는 라깡의 초기이론(무의식의 구조화)을 받아들여 이데올로기를 무의식의 영역에서 작동하는 그 무엇으로 보았다. 라깡의 초기 이론은 크게 거울단계와 상징계로 요약할 수 있다. 거울단계는 아이와 엄마 사이 형성되는 완벽한 2항 관계를 일컫는 말로, 아버지의 존재를 인식하기 전까지 지속된다. 이때 아이의 자기 동일성은 상상적 오인에 의존하고 있다. 상상계(거울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아이는 언어를 습득하면서 상징계로 진입하게 되는데, 이것은 인간의 사회화 과정을 의미한다. 아이는 상징계의 질서로 진입하면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불리는 대타자의 법과 규율과 관습을 받아들이고, 대타자가 제시하는 기표를 따라 살면서 드디어 ‘인간’으로 거듭나게 된다. 그렇게 성장한 주체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상징되는 큰 주체의 부름에 “예”라고 화답하는, 즉 대타자의 호명에 응답하는 주체인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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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달리야
민족이냐 민중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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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1

‘민족’이라는 사회적 결속체는 역사적으로 대개의 경우 종족보다 커다란 범위에서 형성되며, 이러한 결속을 보증하는 정치제도적 장치는 종족적 혈연성 범주보다 훨씬 복잡한 경향이 있다. 그런 점에서 국가는 많은 경우에 민족과 쌍개념을 이루는 역사적 실체다. ‘국가’가 영토에 대한 배타적 독점권을 유지하는 제도적 통치형태로서, 기본적으로 폭력수단을 통한 강제력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민족이라는 것이 소수에 의한 자원의 전유 및 그러한 전유를 위한 폭력 수단의 독점을 전제로 하는 사회적 결속체로서 역사적으로 형성 전개되어 왔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민족은 상징의 공유 및 문화적 동질성을 결속의 전제조건으로 하고 있다. 즉 문화적 상징적 유대가 없다면 민족은 형성될 수도, 지속될 수도 없다. 하지만 그러한 동질감이 작은 공동체의 범주가 아닌 민족처럼 거대한 공동체적 범주로 형성되는 데는 문화적 상징적 소통기재를 거대 영역에서 운용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로서 국가 같은 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민족주의’는 이러한 민족-국가를 통한 사회적 결속의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민족주의는 민족-국가적 결속의 정당성을, 역사적 필요성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초역사적 당위성의 차원에서 사고하게 한다. 즉 민족-국가는 선재적(先在的)으로 주어진 것이며, 영원히 지속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만약 누군가가 현존하는 민족-국가에 대해서 문제시하더라도, 그는 민족-국가의 결속의 초역사적 정당성을 전제로 하여 자신의 논지를 펴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의 주장은 전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족-국가가 이런 것인 한, 민중문제는 항상 잠재되어 있게 된다. (물질적이든 상징적이든) 자원의 불평등한 배분으로 인한 배제의 문제를 둘러싼 이해의 차이가 언제나 있게 마련이고, 그것이 때로 소통 불능의 상황, 즉 긴장과 갈등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것은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단순한 일탈적 반항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민족-국가의 초역사적 당위성의 코드를 다른 형태의 민족-국가의 코드로 대체할 것을 주장하는 형태를 띠고 나타나기도 한다. 전자의 형태로 나타난 민중운동을 전정치적(pro-political)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정치적/변혁적 저항(political resistance)이라고 할 수 있다. 군주국 후기 및 식민지 시대 이스라엘의 경우, 이러한 재코드화는 ‘남은 자’ 사상과 ‘신정통치’ 사상이 결합된 형태로 나타났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이러한 재코드화의 실현은 항상 변혁적인 것으로 구현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개는 민중적 의제가 반영된 역사적 타협물을 탄생시키곤 했다.

여로보암 1세에 의한 군주국 초기 시대의 반다윗-솔로몬 혁명은―비록 민족적 동질감이 아직 매우 허술하던 때임에도―반국가적인 지파동맹 시대의 비전으로 되돌아간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민족-국가로 구현되었다. 한편 요시아 개혁의 경우는, 민중적 저항의 에너지를 중앙정부가 개혁의 동력으로 활용하여, 이른바 ‘위로부터의 혁명’을 이루어낸 사례다. 두 경우 다 민중적 동기가 그 바탕에 깔려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민족-국가의 코드화에 대한 위기의 요소였다. 반면 전자는 ‘기존의’ 민족-국가의 코드화의 재형성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후자는 (창조적 재해석을 통한) 연속성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양자는 차이가 있지만,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모두 기존의 코드화로는 더 이상 ‘안 된다’는 문제의식의 공유라는 인식론적 지반을 같이 한다. 그러나 어느 것도 ‘민족-국가’라는 결속의 코드 자체를 변형시키지는 못했다.

한편 이 장에서 다룰 게달리야 이야기는 정치사적인 차원에서 볼 때, ‘민족주의’와 ‘민중문제’를 둘러싼 왕국 말기의 복잡한 논쟁의 컨텍스트를 이해해야만 정당하게 다루어질 수 있는 하나의 텍스트다. 여기에도 ‘민족-국가’라는 코드는 전제사항이다. 단 그것의 구체성을 둘러싼 상이한 입장이 갈등을 빗고 있다. 편의상 한편을 ‘민족-국가-민중’의 코드화로서 이야기하고, 다른 한편을 전통적 ‘민족-국가’론이라고 하자.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러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는 엉뚱한 것으로 귀결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이야기의 흐름을 텍스트 자체는 교란시키고 있다. 여기에도 하나의 아이러니가 있는데, 왜냐하면 텍스트 저자의 관점과 게달리야의 관점이 요시아 개혁의 승계자라는 점에서 입장이 공유되고 있다. 반면, 게달리야와 대비되는 인물인 여호야긴은 그 반대편에 있다. 그런데 텍스트는 오히려 여호야긴에게 더 우호적인 반면, 게달리야는 냉정하리만큼 담담하게 기술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민족-국가’라는 전통적 코드의 지속성이라는 관점에서 다룰 때 해명될 수 있다고 본다. 아래에서는 바로 이 점을 초점을 두고 게달리야에 얽힌 역사를, 특히 민중적 관점에서 복원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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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아 개혁은 이스라엘 역사 및 야훼 신앙사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기념비적 사건이다. 유다 왕국 말기와 식민지 시대의 역사에서 이런 개혁적 역사신학 운동은, 성서의 본격적인 대단위 편찬이 이 개혁의 신학화 작업과 관련이 있다는 데서 볼 수 있듯이, 야훼신앙사의 지성사적 차원을 풍부하게 채웠을 뿐 아니라, 위기 극복의 사회적 비전을 추구하는 하나의 실천적 대안 운동을 구축하기도 했다. 우리가 관심 갖는 왕국 말기와 식민지 초기의 역사는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요시아 개혁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귀족 세력을 억제하려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다. 이에 동맹을 맺은 세력은 다양한데, 특히 우리는 성서에 ‘암하아레츠’라고 표기하고 있는 민중세력도 그 중에 하나다. 그리하여 요시아 개혁은 ‘위로부터의 민중적 혁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요시아 개혁이 어느 정도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였을 무렵 갑작스런 사건으로 인해 중단되고 만다. 그것은 에집트 제26왕조가 들어서면서 잃었던 국제적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 팽창주의 정책을 펴고, 이 과정에서 바빌론과 메대 군의 동진을 막기 위해 북쪽으로 출병을 하게 됨으로써 야기된 사건이다. 요시아 정부는 앗시리아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바빌론-메대 연합군과 동맹을 맺으며 개혁을 펼쳤는데, 에집트의 팽창주의는 그러한 요시아 개혁의 기반을 송두리째 앗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므기또라는 천험의 요새를 통해 요시아는 에집트 군의 출병로를 가로막고자 했다. 그러나 결과는 그의 전사였다.

이런 갑작스런 사건은 유다로서는 중대한 위기였다. 아마도 이 시기 예루살렘 궁중에는 비상한 사태가 벌어진 모양이다. 요시아의 장자인 여호야킴이 아니라, 그의 동생인 여호아하즈가 즉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 즉위에 개혁파, 특히 암하아레츠가 깊이 관여되어 있었다. 그러나 북정(北征)에서 실패한 느고2세는 여호아하즈를 폐위시켜 본국으로 끌고감으로써 자신의 실패를 조금이라도 만회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자기의 지지자들로 유다의 조정을 개편하고자 했고, 그 소임을 맡고서 즉위한 자가 바로 여호야킴이었다.

이후 여호야킴, 여호야긴, 시드키야 왕으로 이어지는 유다의 조정 내에는 크게 두 개의 파벌로 나뉘어 지속적인 정쟁을 벌였다. 친에집트파가 그 하나이고, 친바빌론파가 다른 하나다. 여기서 전자가 전통적 귀족주의를 고집하는 세력이라면, 후자는 요시아 개혁의 광범위한 지지세력으로 편성되었다. 따라서 전자가 수구파라면, 후자는 개혁파라고 할 수 있고, 그런 점에서 후자는 어느 정도의 스팩트럼을 형성하고 있음에도 대체로 민중적 편향을 띠었다고 할 수 있다. 여호야킴과 여호야긴 치하에서는 친에집트파가 정국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고, 시드키야 왕 시절에는 전기에는 친바빌론 세력이, 후기에는 친에집트파가 정국을 주도했다.

예레미야는 여호야킴 시절 가장 대표적인 재야 급진파 인사였던 것 같다. 그는 왕의 강력한 통치에 굴복하지 않고 비판의 소리를 드높였다. 아마도 이 시기 그의 명망이 크게 상승했던 것 같다. 사실, 그는 요시아 왕 시절 개혁의 주도세력의 하나이던 힐키야 대사제의 아들이었다(「예레」1,2; 「열하」22,4․8). 동시대에 유력한 사제 가운데 동일한 이름의 사람이 두 명 있었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예레미야서에는 살룸이라는 그의 삼촌이 등장하는데, 그렇다면 그는 요시아 개혁 당시 핵심세력의 하나였던 여예언자 훌다의 남편이다(「예레」32,7; 「열하」22,14). 즉 예레미야는 요시아 개혁을 주도했던 사제귀족 가문의 일원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요시아 개혁을 지지한 것만은 아니었다. 특히 요시아 말기 피상적인 개혁에 그치고 마는 현상을 간파했고 그것을 비판했다(「예레」4,3이하; 8,4~7). 그는 요시아가 죽은 직후 암하아레츠가 주동하여 일으킨 정변과 모종의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 사건으로 인해 즉위한 여호아하즈가 강제로 폐위당한 것에 그는 몹시 안타까워했다.

 너희는 죽은 왕(=요시아) 때문에 울지 말며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오히려, 너희는
 잡혀 간 왕(=여호아하즈)을 생각하고 슬피 울어라.
 그는 절대로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다시는 고향 땅을 보지 못한다.
  ― 「예레」 22,10

여호야킴 왕에 대해서는 항상 그는 비판을 서슴치 않았고, 심지어는 왕의 시해를 충동하기까지 했다(「예레」22,13~17). 그래서 그는 수차례나 죽을 고비를 겪어야 했고, 그때마다 그를 후원하는 일단의 고위층 인사들의 보호로 겨우 목숨을 연명하곤 했다. 그의 후원자들은 주로, 사반이나 악볼처럼, 과거 요시아 개혁의 주도세력을 형성하던 인물들의 후손들이었다. 게다가 예레미야서 36장 11~32절의 예레미야 필화사건에서 보듯이 그들은 이 급진파 인사의 과격한 발언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까지 했다.

시드키야 왕 시절, 그는 자신의 주장을 정책에 반영하기도 하는, 왕의 국정자문관 역할을 하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시드키야 정부가 후기에 친에집트 편향을 띠자 강력한 정책 비판을 가한다. 한번은 시리아-팔레스틴의 6개국(암몬, 모압, 에돔, 띠르, 시돈, 유다)이 예루살렘에 모여 반바빌론 연합전선을 모의할 때, 그 회의장 앞에서 시위를 하기도 했고, 이 과정에서 당대의 유력한 사제의 하나였던 하나니야와 논쟁을 하면서 모욕을 당하기까지 했다(27~28장).

이상과 같은 예레미야의 활동의 초점은 국가가 바빌론에 우호적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여기서 우리가 길게 그에 관해서 주목한 것은, 그의 활동이 당시의 친바빌론자들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당시 바빌론이 국제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공지된 사실을 전제로 한다. 이런 상황에서 바빌론과 싸운다는 것은 정부 당국으로서는 자주적 주권정부가 된다는 점에서 유의미하지만, 전쟁을 피할 수 없다. 예레미야의 판단으로는 그 전쟁은 전혀 승산이 없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가 더 중요시한 것은, 전쟁의 승패에 대한 판단 문제가 아니라(어쩌면 친바빌론 파의 일단의 세력은 이 문제에 더 관심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바빌론 치하든 아니든, 민중적 개혁에 정부가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백성들에게 식량을 대대적으로 반출하고, 백성을 강제동원하는 식의 정책을 중단하는 것은 개혁의 전제 조건인 것이다.

결국 시드키야는 반란을 일으키고, 끝내 예루살렘은 정복당하고 불타 없어지고 만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당하고 포로로 끌려갔다. 또 수많은 촌락과 도시들이 파괴되었다. 예루살렘을 포함한 인근의 여러 성읍들의 파괴의 흔적들이 고고학을 통해서 발굴되었는데, 그 참화를 충분히 짐작하고 남을 만큼 처참한 잔해를 볼 수 있다.

바빌론 당국은 유다 같은 작은 지역에 깊은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다. 여전히 강력한 저항을 펼치고 있는 띠로와 시돈을 정복하는 데 여념이 없었고, 그 후원세력인 에집트를 제압하는 데 그들의 서방원정의 궁극적인 목적이 있었다. 그러니 친바빌론 입장의 유력인사에게 위임통치를 맡긴다면, 이 사소한 지역에 큰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적임자로 선택된 것이 그달리야였다.

그는 유다의 가장 유력한 가문의 하나인 사반 가문의 후손이었다. 이미 보았듯이 이 가문은 친바빌론 노선의 세력 가운데 가장 유력한 가문이다. 또 그달리야는, 라기스에서 출토된 한 인장에 의하면, 시드키야 당시 군부 지도자의 하나였던 같다. 즉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군사작전을 펼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실재로 그의 정부 내에로 과거 유다 군의 잔존 세력이 속속 투항해 왔음이 분명하다(「예레」40,8). 정국은 빠르게 안정되어 갔다.

그의 직위는 아마도 총독이 아니라 왕이었던 것 같다. 성서는 그의 공식 직위를 한번도 명시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예레미야서 41장 10절의 ‘왕의 딸들’이라는 표현이나 41장 1절의 ‘왕의 장관’이라는 표현은 문맥상 그 왕이 게달리야를 지칭할 경우에만 자연스러운 진행을 나타낸다. 아마도 텍스트 저자들은 그가 다윗의 혈통이 아니라는 사실이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통해 볼 때, 게달리야는 바빌론으로부터 왕으로 위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실재로 바빌론의 입장에서, 총독부라는 새로운 관리기구를 설치하는 것보다는 왕권을 승계하는 것으로 할 때, 가장 손쉽게 이 지역을 안정화시킬 수 있으리라는 판단이 섰을 것이다.

게달리야(Gedaliah)는 자신의 새 도읍을 미스바로 정했다. 이것 또한 유의미하다. 예루살렘을 이미 잿더미가 됐으니 도읍으로 정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여러 대안이 나올 수 있는데, 그는 그 중에서 미스바를 선택했다. 우선 예루살렘과 가까운 곳이니, 위치상 적합했다. 그밖에 요새도시들은 필시 바빌론 군에 의해 거의 완파됐을 터이니 예루살렘과 대동소이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 가운데 그는 왜 하필 미스바를 택했을까? 그런데 독자들은 이 지명이 매우 익숙하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렇다. 이 곳은 지파동맹 시절 유명한 성서가 있는 곳이다(「판관」20,1~3; 21,1~8; 「삼상」 7장; 10,17). 더욱 흥미로운 것은 미스바는 국가로 이행한 뒤,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요컨대 게달리야는 옛 전통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그의 정부의 특징이 드러난다.

더욱이 정황은 개혁을 펴기에 매우 유리했다. 구왕족 치하에서 귀족노릇하던 많은 이들이 처형당하거나 포로로 끌려가, 주인 없는 토지와 재산이 매우 많았던 것이다. 토지와 재산의 재분배가 가능했고, 이는 자신의 가문이 그토록 추구했던 신명기 개혁의 핵심 사안이기도 했다. 국가 경제의 기반을 송두리째 앗아가버린 이 엄청난 국난은 동시에 기회를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인근 지역으로 피난갔던 유민들이 속속 돌아왔다. 그것은 그의 모종의 개혁정책의 대가이기도 했을 것이다. 예레미야는 이 정부의 참여했음이 분명하다. 단, 그가 노령이었고, 여호야킴과 시드키야 당시 숱한 고초를 겪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건강상태는 퍽 좋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므로 정책 자문역을 활발히 펼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게달리야의 정부가 채 꽃을 피우기도 전, 그는 측근 장교에 의해 시해되고 만다. 주범 이스마엘은 구왕족의 방계친척으로, 아마도 다윗 혈통이 아닌 자가 왕이 된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또 그는 게달리야가 민족을 바빌론에 팔아먹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민족-국가의 자주권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던 열광적 민족주의 당파에 속했던 귀족 출신 인물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그리고 그의 배후에는 유다 지역에서 도망해서 목숨을 건진 그 당파에 속한 인사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여기에는 이 망명인사들을 보호하고 있던 암몬 왕 바알리스가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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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내용 구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신명기적 역사가는 이 텍스트에서 여호야긴 왕에 대한 아련한, 그러나 애틋한 기조의 기억을 남긴다. 마치 거기에서 희망의 단초가 있을 것처럼 말이다. 그는 포로로 끌려갔지만, 37년간 수감된 이후에는 바빌론 왕과 더불어 식사하고 후대받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슬쩍 지나가는 듯한 문투지만, 그것이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마감하는 부분에 나온다는 사실은 결코 지나쳐버릴 수 없는 암시로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여호야긴이라는 인물은 불과 3개월간 등극했다가 제대로 왕권도 휘둘러보지 못한 채, 바빌론으로 유배된 인물이지만, 유다의 적어도 한 당파에 의해서 정통적인 유일한 왕처럼 여겨졌었다. 그의 삼촌인 시드키야가 그를 이어서 왕이 된 이후에도 여전히 반대파들은 여호야긴이 유일한 합법적 왕이라고 생각했고, 게달리야가 그 뒤를 이어 임명되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마도 이 당파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시드키야나 게달리야가 바빌론에 의해 임명된 왕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자주적 주권을 갖지 못한, 아니 오히려 주권을 외세에 양도함으로써 왕이 된 인물들이라는 혐의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 충분한 개연성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중시하는 여호야킴 왕도 외세인 에집트에 의해 위임된 통치자였기 때문이다. 그런 논리대로라면, 여호야킴이나 그의 아들 여호야긴의 정통성도 의심받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텍스트의 저자는 이 정파와는 대립적 입장에 있던 신명기 학파의 일원이다. 그러니 이들은 시드키야를 왕으로 인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게달리야는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더구나 신명기 개혁 정신의 입장에서 볼 때, 시드키야처럼 별 성과 없는 통치자에 비해, 게달리야는 분명 뚜렷한 공적을 가진 인물로 추정되고 있으니, 이 텍스트가 게달리야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과 여호야긴을 합법적 왕으로일 뿐 아니라 희망의 전거로 기억하고자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우리가 유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민족-국가’라는 코드가, 신명기 학파든 귀족당파든 간에, 그들 모두에게 공지되고 있었던 전제사항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국가란 ‘다윗의 왕권’을 전제로 한다. 그러니 다른 이가 왕권을 승계한다는 것은 허용할 수 없는 재코드화인 것이다. 재코드화가 이루어지더라도 허용 가능한 코드화는 다윗의 혈통이라는 조건이 붙는다. 훗날 예수를 다윗의 후손으로 만들려는 일련의 노력도 이러한 유다인들의 이해 방식과 무관하지 않다. 바로 이것이 민족주의다. 그것은 역사적 정당성을 필요로 하기보다는 초역사적 상징성을 더욱 필요로 한다. 그 통치자가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떤 실천을 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징화된 정당성 메커니즘이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서를 읽을 때, 유다인의 민족주의라는 늪을 헤어 나오지 않는다면, 그 텍스트의 정황에 허우적거리며 야훼신앙의 의미를 재현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텍스트가 사건을 읽고 있는 정황을 해체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게달리야를 다시 읽는다는 것은 물론 영웅 만들기의 또 하나의 주인공으로 그를 선택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역할을 간소하게 묘사하고자 했던 텍스트의 의미화 전략을 밝혀냄으로써, 야훼신앙을 둘러싼 일련의 논쟁을 비판적으로 보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러한 읽기를 시도하는 우리의 시좌는 ‘민중의 눈’이다. 즉 민중의 눈으로 성서를 다시 읽는데, 장애가 되었던 하나의 요소인 유다 민족주의를 거두어 냄으로써, 민중적 읽기 전략을 더욱 가능하게 하기 위함이다.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했듯이, 성서 읽기 또한 시간의 대화 과정이다. 그것은 우리의 시각이 텍스트 읽기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그 시각을 민중의 눈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가 재현할 수 있는 한, 모세사건이나 예수사건은 바로 그러한 눈으로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래서 우리와 성서와의 대와가 바로 그 지점에서 더욱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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