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 나가면 과연 애국자가 되는가?


이원필
(독일 보쿰(Bochum)에서 미술사 공부 중)

마리아(Maria)와 토비아스(Tobias)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 3월 말쯤이었다. 독일에서 회사를 다니고 있는 아는 형님이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하는 독일인이 있다고 해서 내게 소개시켜준 두 사람이다. 자신이 외국인인 것을 이해해주고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에 적응하도록 도와주는 현지인, 모든 유학생이 가장 바라는 것 중에 하나가 아닐까? 그래서 독일에서 많은 한국인 유학생들이 소위 탄뎀(Tandem)이라고 불리는 독일인 회화 파트너를 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탄템의 의미는 쌍방이 상호적이라는 것 즉, 배우는 것이 있으면 가르쳐주는 것도 있어야 한다. 내가 독일어를 상대방에게 배우면 나는 상대방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어야 한다는 것인데, 독일어를 배우고 싶어하는 유학생은 많은데 비해 한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독일인은 상대적으로 극소수이기 때문에 언제나 극심한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 속에 있는 것이 바로 탄뎀 파트너이다.

많은 유학생들이 바라는 탄템 파트너에 더해서 보수까지 있는 한국어 과외 선생님(?)자리를 어떻게 마다할 수 있으랴, 너무나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토비아스에게는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한국인 여자친구가 있으며 업무 때문에 한국에도 몇 번 출장을 다녀온 적이 있다고 한다. 토비아스의 어머니인 마리아는 아들과 여자친구 덕분에 한국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한국 여행을 위해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고 한다. 독일 유학 생활을 하다 보면 독일인 남성과 한국인 여성의 부부를 드물지 않게 만나게 되는데 이들 중에서 한국어에 관심 있고 배우려고 하는 독일인 남편을 보기란 경험적으로 굉장히 힘든 일이다. 그런데 아직 결혼도 안 한 독일인 남성에다가 그의 어머니까지 한국어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지극히 드문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외국어로 그것도 능숙하지 못한 외국어로 모국어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너무도 새로운 것이어서 사실 걱정이 되었다. 괜히 걱정이 된 나머지 첫 만남에서 내 독일어가 서툴기 때문에 영어와 섞어서 설명해도 괜찮겠느냐고 양해까지 구하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두 시간 정도의 공부를 위해 나름 내용적으로도 그리고 제대로 된 독일어를 구사하기 위해서 준비를 해가지만 막상 두 사람 앞에서 이것 저것 설명하다 보면 나의 독일어는 구문론적 질서를 완전히 무시하는 단어들의 나열이 되기 일쑤고 독일어만의 독특한 발음을 제대로 발음 못해서 더듬거리며 일련의 분절음들을 내뱉는 내 자신을 보게 된다. 특히 독일어의 ‘r’발음은 한국인에게 꽤나 어려운 발음인데 말하고자 하는 마음만 급하고 아직 단련되지 못한 입술로 ‘r’로 시작하는 단어를 말하려 할 때는 항상 말더듬이가 되곤 한다. 마음이 급한 것은 항상 올바른 문장을 말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이리라. 마치 독일어 수업에서 독일인 선생님이 문장을 제대로 끝맺지 못하고 얼버무리는 외국인 학생에게 “Ganzen Satz!”(완전한 문장)라고 다그치는 것처럼.

유학생–되기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압도적인 다수어와 다수적 문화에 대면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이 쉽지 않기 때문에 많은 유학생은 민족 별로 일종의 문화적 게토를 이루며 살아가는데, 다수적인 것과의 대면의 강도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유학생–되기의 주체는 어느 정도 분열증적인 양상을 갖는 것 같다. 다수적인 것에 대면해서는 마치 항상 도움을 필요로 하는 말더듬이 어린아이와 같은 자신을 만나게 된다면 반대로 자신의 문화적 게토에서는 위축되었던 자신을 위한 일종의 보상으로써의 다소 과장된 몸짓을 취하는 자신을 보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내가 아는 대부분의 독일인들의 조언은 아마도 이것일 것이다. 독일 사회와 문화에 통합되도록(integrieren) 노력하라. 분열되는 주체를 다수적인 것으로 통합하라.

독일 사회의 주목을 끌기에 유의미한 규모를 이루지 못한 한국인 유학생 사회와 달리 독일 내의 터키계 이주민 문제를 생각해 보면 어떨까? 지난 몇 년 새 인종차별 문제로 몇 번의 폭동의 일어나는 등 다문화 사회의 홍역을 치르고 있는 이웃나라 프랑스에 비해 덜 극적이긴 하지만 독일 역시 지난 수십 년간 계속되어온 터키계 이주민 문제에다가 근래에 들어 고조되고 있는 이슬람에 대한 불안감이 더해져서 그들만의 물티쿨티(Multikulti: 다문화 사회의 독일식 표현) 문제를 겪고 있다. 터키의 3대 도시가 이스탄불, 앙카라, 베를린이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약 200만 명의 터키계 이주민들이 독일 전역에 거주하고 있는데, 이들의 언어는 정확한 터키어도 독일어도 아닌 터키어와 독일어가 혼합된 것이라고 한다. 언어적으로 사회적으로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터키인들에 대한 일반적인 독일인들의 태도는 지난 독일의 과거로 인한 조심스러움이 묻어 있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유학생들에 대한 그들의 조언과 같다. 그들의 종교와 문화를 (어느 정도의 한도까지) 인정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독일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상 언어와 사회적인 측면 에서 독일 사회에 통합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다수적인 것으로의 통합이 단지 이루어지지 않는 소망으로만 남으며 끊임 없는 마찰을 일으키는 것은 아마도 프라하에 살았던 유태인 카프카가 독일어로 글을 쓸 수도 없으며, 독일어 외의 다른 언어로 글을 쓸 수도 없으며, 어떤 언어로도 글을 쓸 수 없었던(들뢰즈/가타리) 이유와 무언가 관련이 있지 않을까. 물론 유학생은 이주민과는 다르다. 통합 역시 일시적인 것이며 언젠가는 통합을 유지하거나 본래의 그것으로 돌아가는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유학생–되기의 중요한 측면이다. 그러나 이러한 임시성과 간(間)존재적인 성격 때문에 유학생은 더욱 독일어도 한국어도 아닌 중간의 어떤 것으로 말할 수 밖에 없으며 양자 사이에서 분열적인 상황에 처한다. 그렇기 때문에 “외국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는 말은 단지 외국 사회, 문화로의 통합의 실패 혹은 포기에 대한 보상적 반작용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정원이 딸린 독일의 평범한 가정집에서 마리아와 토비아스와 함께 한국어를 공부하고 가끔 식사도 같이하는 시간만큼은 내가 어느 정도 독일 문화에 통합되었음을 느낀다. 동시에, 그들의 썼다기보다는 그린 것에 가까운 한글 글씨, 한국어의 된소리와 복모음을 발음하기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약간의 위안을 얻으며 독일어에 대한 부담을 잠시 덜어보기도 한다. 하지만 유학생–되기의 과정은 본래적인 것(한국적인 것)을 어느 정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체득하기를 소망하지만 결국 소망에 다다르지 못하고 본래적인 것에 불가피하게 끌려가는 자신을 보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본래적인 것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것임을 언제나 다시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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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양미강
    2010.05.15 08:28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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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감합니다. 원필 선생, 화이팅 입니다. 좋은 친구 만드세요.

[성서연구] 마가복음 10:17~31

로마와 유대의 문화적 경계에 선 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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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청
(신약학 |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석사과정 수료,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석사과정 수료)

탈식민주의와 주변부 문화의 문제를 탐색한 호미 바바는『문화의 위치』라는 책에서 이주민들의 사회문화적 경험을 ‘어중간한 집’ 혹은 ‘사이에 낀’이라는 사태로 명명하고 더구나 이러한 경험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는 의미에서 번역의 미결정이라는 발터 벤야민의 용어를 동원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바바의 이 ‘어중간한 집’ 혹은 ‘사이에 낀’이라는 그래서 번역의 미결정이라는 언표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태어난 곳의 문화와 전혀 다른 곳으로 이주를 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고작해야 지방에서 서울로 왔다는 것뿐인데 이러한 경험은 이주민의 경험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 그런데 나의 이러한 이해하지 못함 혹은 낯섦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물론 이것은 복음서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역사적 사실로 상정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일일 것이다. 어쨌든 여러분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이 본문은 바바가 자주 언급한 일종의 문화들 간의 뒤섞임 혹은 교배 같은 텍스트로 다가온다. 

우선, 이 이야기의 처음에서 계명을 잘 지키는 한 사람이 예수를 유대인들에게는 낯선 용어인 ‘선한 선생님’으로 지칭하는 것이 좀 이상하다. 또한 ‘영생을 얻으리이까’에서 ‘얻다’라는 말은 내세의 의미를 뜻하는 용어가 아니라 땅과 관련해 쓰이던 용어였다. 물론 야브로 콜린스는 솔로몬의 시편에서는 이 용어가 내세적 의미의 용어와 함께 쓰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녀 역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땅에 초점을 두었다고 지적한다. 게다가 구약은 유대인들이 내세 개념을 거의 가지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때문에 나는 영생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도 이 용어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의 맥락에서 사용되던 용어가 아니었는가 하는 의심을 품고 있다. 이외에도 이 당시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계명을 잘 지키면 별 문제가 없는 것으로 간주했음에도 계명으로 충분치 않아 예수에게 영생에 이르는 길을 구하는 이 사람의 태도는 따라서 유대적인 맥락에서는 약간 괴기하다고 할 수 있다. 랍비 문헌에는 이와 달리 토라의 계명을 잘 지키면 영생을 얻는 데 족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역사적 예수보다는 헬레니즘적 맥락에서 예수를 이해하고자 하는 열망이 담겨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두 번째로, 재밌는 점은 영생의 조건으로 이 신실한 유대인에게 예수는 십계명에서 가장 중요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는 1~4 계명보다는 인간과의 관계를 논하는 5~10 계명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십계명의 1계명이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유대인의 종교적 정체성에 핵이자 오늘날 과격한 종교다원주의들이 일종의 걸림돌로 간주하는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이 아니던가? 그런데 예수는 유대인의 정체성 문제보다는 이웃 간의 관계 문제를 영생의 핵심조건으로 설파한다. 그래서 로버트 프라이스는 이것을 이미 이방인 그리스 세계에 사는 사람들에게 맞는 쪽으로 번역된 마가적 예수의 계명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논의가 이상하게 들리는가? 그러하다면 마가복음 10:19를 사도행전 15:29과 비교해보라.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제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행15:29)

세 번째로, 가족과 관련한 베드로의 말 역시 역사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말해 베드로는 가족을 떠나거나 버린 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고린도 전서 9장 5절은 이 점을 확인해 주고 있다.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고전9:5). 또한 마가복음 1장에서는 베드로의 장모를 예수가 고쳐주는 일화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빌레발트 뵈젠은 역사적 예수가 나사렛이 아닌 가버나움의 베드로의 집을 거점으로 삼고 자신이 도모하고자 했던 일을 넓혀간 것으로 판단한다. 게다가 뤼데만이 지적했듯이 아내를 가진 베드로에 대한 고려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눅14:26에는 아내를 미워하라는 예수의 말이 있는 반면 우리가 본 막10:29에는 아내에 대한 말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나의 판단에 따르면 지상적인 혈연 가족이 아니라 신성가족으로 재구성하려는 마가의 욕망이 베드로로 하여금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다고 말하게 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또한 이 때문에 가족에 관한 마가의 다른 말도 내게는 흥미롭게 다가온다. 즉, 나에게는 마가복음 3장의 바알세불 논쟁에서 본 것과 같이 예수를 반대하는 예수 가족에 대한 일화 역시 역사적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낯선 일화로 보인다는 점이다. 실제로 마가와 달리 마가복음보다 좀 더 빠른 문헌인 Q의 바알세불 논쟁에서는 예수의 가족이 등장하지 않으며 게다가 놀라운 점은 마가복음에서 예수를 반대했던 예수의 형제 야고보가 사도행전에서는 초기 예루살렘 공동체의 수장으로 등장하고 있다. 물론 이와 관련해 마가의 이야기를 역사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정보를 제공하는 문헌으로 간주하는 학자들은 야고보의 이러한 변신에 대해 야고보가 예수 사후에 예수를 믿었고 사도가 되었다는 일종의 궤변(?)을 펴기도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나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의 가족과 관련한 베드로의 말이 역사적 사실이 아닌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따라야 할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범례에 속하듯이 예수의 가족, 특히 야고보에 대한 학자들의 논의 역시 역사적 근거가 불충분한 따라서 마가의 이야기에 근거한 일종의 착시 현상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고 있다.
 
더구나 나는 대체로 가족에 관한 베드로의 말(막10:28)과 이를 되받아치는 예수의 말(막10:29~30)을 유대사회의 가족개념에 깔린 혈연적 관계를 비판한 결과로 생긴 구성원들의 고통에 대해 마가가 위로를 시도하는 일종의 담론으로 간주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막10:28~30의 이야기를 막3:20~35와 막13:9~13과 함께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다. 우선 막3:20~35는 마가가 혈연에 기초한 유대 가족 사회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막3:20~35에서 마가는 예수의 가족들이 예수를 반대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그리고 이에 대항하기라도 하듯 가족을 혈연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재정의해 버리는 예수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마가 공동체는 유대사회에서 비판받을 수밖에 없는 위치에 놓인다. 막13:9~13은 이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즉, 유대를 넘어 결국엔 만국에 전파되어야 하는 복음과 그로 인한 가족에 대한 재정의는 마가 공동체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가족 내에서 불화를 겪도록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동시에 이것은 복음이 유대사회를 넘어 이방사회로 흘러들어가야 하는데 지상의 유대적인 가치관 대 만국의 복음이라는 대립구도가 빚어낸 고난이 자칫 마가 공동체 구성원으로 하여금 지상의 유대적인 가치관들에 연연하도록 만들어 버린다면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할 복음은 결국 파국을 겪고 말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보상도 따르는데 막10:28~30은 예수로 하여금 가족을 버린 자는 현세뿐만 아니라 내세에서도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도록 하고 있다. 이처럼 가족에 관한 마가의 이야기는 촘촘히 얽혀 있기 때문에 가족과 관련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정보를 확실히 제공해주는 전승이라기보다는 앞서 말한 것처럼 이러한 위기를 맞이한 마가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예수를 통해 위로를 주고자 하는 마가의 이야기들일 가능성이 더 큰 것 같다. 또한 이와 관련해 그닐카가 지적했듯이 오는 세상에서 보상이 주어진다는 이 마가의 말이 헬레니즘적인 사고 도식으로 되어 있다는 점은 자못 흥미롭다. 결국 이러한 점을 고려해볼 때 가족과 관련한 막10:28의 베드로의 말과 이를 되받아치는 막10:29~30의 예수의 말을 역사적인 것으로 간주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권위적인 예수의 말로 판정되는 10:21과 10:25에 대한 문제다. 이 말이 예수의 말이라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대부분의 학자들이 판단하는 것처럼 나 역시 이 말을 예수의 진정한 말로 간주한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다시 말해, 과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이 말이 예수하면 흔히 가난한 자를 떠올리곤 하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검토되지 않은 우리의 상상력을 보증해주는가 하는 점이다. 텍스트의 한 구절은 텍스트 전체를 통해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구조주의 문학비평을 동원하면 우리가 읽은 본문의 이 말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우리의 흔한 역사적 상상력과는 다소 다른 의미를 전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와 관련해 마가복음 14장의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붓는 여인의 이야기에 나오는 구절인 막14:5과 14:7은 막10:21과 10:25와 관련한 우리의 상상력을 흔들어 버린다. 이 구절들을 막10:21과 10:25과 비교해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보다는 예수 주변에 있는 어떤 사람이 막10:21과 10:25의 예수의 말을 더 잘 구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에 대해 학자들은 다양한 변증을 펼치기도 한다. 하지만 더욱 놀랍게도 현대의 성서학자들뿐만 아니라 복음서 저자들도 당혹스러웠던지 마가복음보다 후대인 마태복음은 어떤 사람들을 제자들로 그리고 요한복음은 아예 가룟 유다로 바꾸어 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게다가 마가복음 10:17~31을 꼼꼼하게 읽으면 막10:21과 10:25에서의 예수의 말은 표면적으로는 가난한 자들에게 자신의 소유를 주지 못한 그래서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것을 버린 예수의 제자들도 막10:31에 가서는 일종의 경고를 듣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에게 자신의 소유를 주지 못한 어떤 신실한 유대인의 주저함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는 식으로만 이해해 버리면 곤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부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 있어 걸림돌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부를 버린 예수의 제자들 또한 막10:22의 신실한 유대인의 주저함 못지않게 막10:31 그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권력을 두고 다투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느냐 들어가지 못하느냐가 단순히 부와 관련된 문제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제자들의 권력 투쟁과 관련해 마가는 그 자신의 예수의 수난 이야기에서 예수를 막10:31의 말처럼 제자들과 달리 유대인들의 지상적인 이해들 중 하나에 속하는 전통적으로 메시야로 이해되는 찬란하고 힘 있는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볼품없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자로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막10:31은 지상적인 것들에 대한 연연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막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마가의 이야기는 지상적인 것들에 대한 연연이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세상적인 부나 명예 혹은 권력과 같은 일반적인 것들에 관한 것이 아니라 -물론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대체로는 이러한 것들과 관련된 유대적 가치관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본문인 부와 관련한 이야기(막10:24~27)는 이것들 중 하나에 속한다. 사실 막10:24, 26은 제자들의 놀람을 통해 부와 하나님 나라에 관한 유대인의 일상적인 가치관을 뒤흔들어버리는 예수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러한 뒤흔들어버림에 관한 마가의 이야기 전략은 다소 궁색하기 그지없다. 물론 주석서들 역시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에 관한 제자들의 질문인 막10:26에 관한 예수의 대답(막10:27)이 대단히 궁색해 보인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로써 이제 막10:17~31에 깔려 있는 마가의 이야기 전략이 다소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즉,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의 이야기는 지상적인 것들에 대한 연연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즉 영생을 막고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지상적인 것들에 연연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앞서 나는 이 지상적인 것들에 대한 연연이 어느 사회에서나 통용되는 일반적인 것들이 아닌 유대적인 가치관들에 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막10:17~31에 나오는 이야기는 대체로 유대사회를 넘어 이방사회에 전해져야 하는 복음 혹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다시 말해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유대사회의 지배적인 가치관, 특히 부와 가족에 관한 유대적 가치관을 비판적으로 돌파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는 마가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제 그만 여기서 지금까지 여러분을 골치 아프게 했을 수도 있는 막10:17~31에 관한 나의 분석을 끝맺고자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논의를 잘 따라왔다면 이제 여러분들은 그러면 당신의 이러한 텍스트 분석은 당신이 첫 부분에서 바바를 들먹이면서 말한 이주민의 경험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하는 물음을 내게 던질 때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미 여러분들 중에 예리한 분들은 지금까지 나의 논의에 내포된 문제의식을 간파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간파한 것처럼 그것은 처음에 말한 이주민들이 자신들과 다른 문화를 가진 나라에 갔을 때 부딪히는 낯섦 혹은 어색함 같은 그러한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과 관련된 문제다. 이와 관련해 우선 오늘의 본문을 만약 예수 당시의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이었다면 어떻게 생각했을까를 고려해보자. 지금까지의 나의 논의에 따른다면 앞서 본 마가의 이야기에 대해 그들은 아마 어색해 했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그들 중에는 이 본문을 불쾌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마태복음과 비교하면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본문 분석에서 우리가 읽은 본문이 헬레니즘화된 맥락을 갖고 있다고 계속 지적한 것은 이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반면에 디아스포라의 헬레니즘 유대인들이나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친숙하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들에게는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처럼 유대적인 가치관은 다소 누그러뜨려져야 하거나 심하게는 극복되어야 하는 그 무엇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점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91년부터 지금까지 마이어 신부는『주변부 유대인 예수』라는 책을 계속해서 출간해 오고 있는데 이 책에서 역사적 예수는 당시의 유대사회에서 주류가 아닌 주변부 유대인으로 그리고 이 때문에 주류 유대사회가 공유했던 유대교와는 다른, 즉 비주류가 가지는 방식으로 유대교를 개혁하고자 했던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물론 마이어의 이러한 역사적 예수에 관한 묘사 밑에는 마가의 이야기가 판본으로 깔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주의 형제 야고보를 연구한 아이젠만은 예수를 마이어와는 다른 식으로 묘사한다. 게다가 노벨 평화상에 천거되기도 한 휴고 숀필드나 마코비 같은 학자도 주류 유대 사회가 공유할 수 있는 방식으로 예수를 묘사한다. 이들에게 예수는 나자렌파나 바리새인으로서 정결법을 잘 지키고 로마에 저항한 일종의 투사다. 그리고 최근에『예수왕조』를 쓴 제임스 타보르 역시 이들의 논의에 동조하기도 한다. 

그러면 이처럼 서로 다른 논의들에서 우리는 오늘의 본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일단 나는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두 문화 사이에 있는 사람들 간에 나타나는 사회문화적 갈등 혹은 충돌이 잠재되어 있고 그리고 이러한 점을 해결하기 위해 마가가 예수의 권위에 의존해 자신의 이야기를 신뢰할 만한 것으로 만들고 있는 텍스트로 간주한다. 하지만 1세기에 격렬한 반유대적인 분위기가 꽤 있었음을 고려하면 예수를 유대 주류 사회에서 주변부 유대인으로 설정하고 동시에 헬레니즘화된 맥락을 잘 이해하고 있었던 사람으로 묘사하는 마가의 이야기는 마이어가 생각하는 것처럼 주변부 유대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 당시의 로마 제국의 지구화(?)에 포섭 혹은 동화되어 가는 도상에 있는 마가 공동체의 이야기로 최소한 설정해야 하지 않나 하는 의심도 든다. 그러나 오늘 경계 밖의 아이들이라는 권유미 선생의 주제를 고려해볼 때 여전히 마가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어느 정도 유의미한 이야기를 던져 준다고 생각한다. 즉, 마가의 이야기가 로마제국의 지구화(?)에 포섭되는 이야기라 할지라도 한 사람이 다른 문화를 가진 곳으로 이동하려 할 때, 즉 문화들 간에 놓인 경계를 넘고자 할 때는 수많은 갈등과 충돌이 일어나고 때로는 바바가 말한 것처럼 뒤섞임이 때로는 적대가 발생하기도 하는 그래서 어떤 방향으로든지 간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전략들과 대안들을 모색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문화들 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들의 복잡한 사회적·문화적·심리적 갈등과 그로 인한 이들 나름대로의 모색들을 이처럼 한 문장으로 처리해버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이주해본 경험도 없거니와 너무 복잡한 담론이어서 내가 감히 개입할 처지가 되지 못한다는 심정이 깔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배적인 주류 유대문화를 벗어나 이방인 문화인 그리스 문화와의 뒤섞임을 경험하고 그래서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가는 마가의 이야기는 이들의 복잡한 경험의 한 축은 보여주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것은 전 세계의 맥도널드화를 의미하는 시대를 말없이 살아내고 있는 이주민들에게 한정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맥도널드화에 저항하고자 하는 이주민들은 이와는 다른 이야기를 써야할 것이며 실제로 쓰고 있을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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