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이 보이지 않는 혼탁한 삶의 자리에 찾아든 아름다운 

이창동의 <시>




이희승*



  꼭 일년 전, 다르덴 형제의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의 리뷰로 2016년 한해를 열었던 것이 마치 어제처럼 가까운데 벌써 2017년 첫번째 영화 읽기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다사다난’이라는 표현조차 무색할 정도로 모두의 눈과 귀를 의심케 하는 소식들이 쏟아지고, 그 절망감 속에서 그간 공동체라는 명제에 냉랭했던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혁명에 가까운 변화들을 체험하는 와중에, 저도 모르게 급물살에 휩쓸리듯 2017년의 출발점에 도착해버리고만 기분입니다. 땅끝 나라에 사는 저 또한 대한민국의 운명을 염려하며 어지러운 뉴스들 속에서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영화를 고르려니 쉽지가 않을 정도로 마음이 달아 올랐었나 봅니다. 그래서인지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 (2010)>가 소란스러운 머릿속을 다스려 주지 않을까 하는 소망을 가져 봅니다.


  이창동 감독은 소설가로 등단한 후, <그 섬에 가고 싶다 (1993)> 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1995)> 의 시나리오 집필로 영화인생을 시작한 문인 출신의 영화감독입니다. 주변의 적극적인 권유로 만들게 되었다는 그의 감독 데뷰작 <초록 물고기 (1997)>는, 장르와 국적을 가리지 않는 열렬한 영화팬이었지만 역사적인 관점을 담지하면서 공감가는 동시대의 초상을 제대로 그려낸 한국영화에 목말라 있던 저에게 한국영화의 미래에 대한 확신을 준 영화였습니다. 모두가 오래도록 기억하는, 또 기억해야 하는 영화 <박하사탕 (2000)>은 저의 단골 강의 주제이기도 하지요. 숨겨지고 외면당한 현대사의 그늘만을 예리하게 가려내어, 철저히 정제된 영화미학으로 전달하는 이창동 감독의 영화들은 시대를 가열차게 이끈 ‘영웅’보다는 한번도 스스로를 역사의 주체라고 인식하지 못했지만 현재의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가 존재하는 이유인 ‘그들’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가집니다. <오아시스 (2002)>는 장애를 가진 공주(문소리)와 사회부적응자인 종두(설경구)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번영을 앞세우며 내달리는 대한민국이 적극적으로 추방시키고자 했던 사회적 유배자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그들’을 우리 사회의 일부로 복원시키고자 합니다. <밀양 (2007)>은 남편과 아들을 잃고도 처절할 정도로 그 상실을 망각하고 싶어하는 신애(전도연)를 폭압과 독재의 기억과 흔적을 애써 지우려는 우리 사회의 모습과 등치시키죠. 그리고 <시 (2010)>는 억울하게 희생당하고 잊혀지는 어린 소녀를 기리는 미자(윤정희)의 시작 (詩作)을 통해,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정의와 화해를 가로막는 자기보호 본능과 이기심을 예술행위를 통해 극복해 보려는 영화적 실험을 시도합니다. 어찌보면 다행스럽게도 2016년 말, 역사는 그간 이창동 감독의 영화 속에 등장한, 출구없이 지리멸렬한 삶에 고통스러워 하는 ‘그들’이 바로, 어둠을 밝히는 촛불을 모아들고 광장으로 향한 ‘우리’라는 사실을 선명하게 증명해낸 것 같습니다.



  이 영화의 포스터에서 이창동 감독이 직접 썼다고 알려진 한 글자 ‘시’ 가 우선 눈에 띱니다. 정성을 다해 완성한 단 세 획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글자. 엄청난 사건을 담아내면서도 그 단아함을 잃지 않는 <시>는 바로 이 글자와 닮아 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미자는 예순을 훌쩍 넘긴 노년의 여성입니다. 이혼한 딸이 맡기고 떠난 외손자 종욱(이다윗)을 돌보며 자신의 인생 자체에 그다지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생의 남은 날들을 가볍게 지워 나가는 미자이기에 치매 초기라는 진단도 마치 가벼운 어깨 통증처럼 별로 충격적이지 않습니다. 젊은 시절, 남자들 마음께나 설레게 했던 미모의 흔적이 그나마 그녀에게 남겨진 유일한 삶의 훈장이고, 예쁜 꽃을 좋아하고 처지에 맞지 않는 화사한 옷차림으로 자신 속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향한 본능을 발산하는 좀 엉뚱한 할머니일뿐이지요. 중풍으로 몸이 불편한 강 노인 (김희라)의 시중을 들며 용돈벌이를 하고, 동네 문화센터의 시짓기 교실에 다니던 그녀의 평온한 일상은 예상치 못한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겨우 중학생인 외손자 종욱이 집단 강간 사건의 피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지요. 종욱과 그의 친구들이 동급생인 희진(세례명 아네스)을 상습적으로 강간했고 피해자인 희진이 끝내 강물에 투신자살하는 사건은 절망도 희망도 없이 진공관같던 미자의 노년을 송두리째 흔들죠. 시덥지 않게 시작했던 시짓기는 이제 엄청난 고통과 충격을 견디게 하는 절실한 희망이 되고, 미자는 평생 한번도 써보지 않았던 시 한편을 쓰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된 양 매달리며 시를 완성하는 ‘인생의 가장 뜨거운 순간’을 간절히 소망하게 됩니다.


    영화의 전개는 이렇게 둘로 내달리는 평행선을 그리는 듯 합니다. 주인공 미자가 아무것도 이룬 것 없는 인생의 마지막 장에서 붙잡은 시에 대한 뜬금없는 열정, 그리고 집단 강간 사건을 소리없이 마무리하려는 가해자 소년들의 아버지들과 학교의 후안무치. 하지만 창작의 고통을 통해 세상과 교감하기 시작한 미자는 이 평행선에 의미있는 교차점을 만들고자 혼자 애를 씁니다. 미자의 좌충우돌 시쓰기 프로젝트는, 목소리를 잃은 채 희생자요 망자로써 플롯의 외곽에 존재하던 어린 소녀 희진을 끝내 내러티브의 중심으로 불러 들이죠. 영화는 비아그라의 힘을 빌어서라도 육신의 마지막 불꽃을 사르고자 미자와의 육체적 관계를 요구하는 강 노인, 정작 시쓰기엔 별 관심없는 이들이 모여 앉아 커피와 술과 무게없는 말들을 나누는 시짓기 교실, 그리고 일말의 뉘우침없는 종욱과 그의 친구들 사이를 오가는 미자의 일상을 통과하면서 시쓰기와 생에 대한 윤리적 자세를 찾는 과정을 명백하게 동일시합니다.  


    앞이 보이지 않게 혼탁한 삶 가운데 놓인 미자에게 시짓기 교실 강사이자 시인으로 등장하는 진짜 시인 김용택은 시를 쓰려면 세상을 잘 봐야 한다고 일러 줍니다. 미자는 어린 여학생처럼 순진하게 처음엔 식탁에 놓인 사과를, 집 앞에 선 나무를, 죽은 소녀의 사진을, 희진의 학교 교실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린 소녀가 그 짧은 생을 내던졌던 검은 강물을 진지하게 들여다 보지요. 강가에서 홀로 맞은 굵은 빗방울이 종잇장에 세차게 새겨 넣은 말없는 ‘시’를 받아내는 미자는 이제 시를 쓸 준비를 마친 듯 합니다. 카메라는 미자가 찾아 오지 않는 시상을 기다리며 정한수처럼 받쳐든 노트의 빈 페이지에 뚝뚝 떨어져 박힌 빗물 자국을 한참동안 응시하며, 관객에게도 시인의 자리에 앉아 볼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합니다. 이창동 감독은 경박하고 의미없고 결코 아름다움을 담아 낼 수 없었던 미자의 삶이 서서히, 잊혀진 자들의 목소리에 자리를 내어 주는 자기희생적인 진혼곡으로 마감하는 모습을 그립다 미처 생각지도 못하고 잊어버린 정감어린 소박한 풍경들 속에 담아 냅니다. 그리고는, 클로즈업으로 드디어 만나는 희진과 눈을 맞추는 것으로 영화를 닫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당시 썼다는 이창동 감독의 ‘아네스의 노래’는, 진실된 예술행위를 통해 볼품없는 인생의 가장 뜨거운 순간을 경험한 미자의 손끝을 통해 곱게 원고지에 옮겨지고, 미자의 시를 통해 비로소 가해자들의 일방적이고 고의적인 망각에서 부활한 희진의 목소리에 실려 관객들의 마음을 울리게 됩니다. 나누고 싶었던 그 수많은 재잘거림을 뒤로 하고 깊은 바다에서 침묵한 아이들을 기억하기 위해 태웠던 광장의 촛불을 먼 타국에서 지켜보면서 문득 이창동의 ‘아네스의 노래’를 떠올렸습니다. 제발 2017년에는 그들이 불렀을 노래를, 그들이 써내려갔을 아름다운 시를 기억하고, 함께 부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탓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니 그래서 2017년 첫 영화읽기는 ‘아네스의 노래’로 맺으려 합니다.


 아네스의 노래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래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제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나는 기도합니다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 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래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 필자소개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 강사 및 정신분석가. 동 대학의 미디어 영화학과에서 각색영화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아시안학과에서 한국 영화와 텔레비젼 드라마에 관한 강의를 맡고 있다. 호주 정신분석학회의 정신분석가 과정을 수료하고, 국제 라캉 포럼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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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처에, 당신, 당신, 당신들 뿐


(연구집단 CAIROS)



 태초에 말이 있었다.

 나는 항상 이 문장이 궁금했지만, 왜냐는 물음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어떤 말이었을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내게 일어났던 ‘어떤 일들’, 그리고 그 ‘일’들에 대한 내 ‘감정들’까지 나는 말할 수 없었으니까.
 “말하지 마. 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더.”
 십 여 년 동안이나 계속되어 온 금기는, 내게 사랑하는 것보다도 먼저, 나를 사랑해주는 모두에게 버림받는 것에 대한 공포를 가르쳤다. 단지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버림받은 사람들에 대하여, 나는 숱한 사례로 교육받아왔다. 나의 일들에 대하여 이야기 할 수 있었던 곳은 오로지 나 자신, 그리고 아무도 없는 어둠 속ㅡ장롱 안 이었다.
 나는 오래도록 장롱 안에 있었다. 장롱 안에서 말을 던지면, 목소리는 뿌연 안개와 같은 메아리로 내게 돌아왔다. 나는 그 목소리가 좋았다. 그래서 자주 나에게 묻고, 나에게 대답하는 식으로 어둠에 대화를 걸었다.
 장롱 안은 어두웠지만, 문틈의 빛줄기가 칼날같이 날카롭게 반을 가르는 곳이기도 했다. 장롱 안에서 나는 얼마든지 말할 수 있었는데, 가끔 누군가에게 발칵 문이 열릴 때면, 하릴없이 튀어나와 입을 다물어야 했다. 하지만 혹시나 백마 탄 왕자님이 마음 넓게 귀를 쫑긋 세워줄지도 모르니까. 빛줄기가 문 앞에 선 누군가에게 가려져 완전한 어둠이 될 때, 나는 공포와 설렘으로 마음이 뛰곤 했다.

 죽음과 삶이 있다.
 언제나 단절된 것이었을까. 나는 이것도 궁금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곳은 오로지 어둠 속이었으므로, 나는 생이 좀처럼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히려는 죽음이 내게 가까웠고, 나는 장롱 속에 들어가듯 죽음으로 빠져들고 싶었다. 죽음을 동반하는 삶은 어떤 것일까. 알지 못했지만, 확실히 삶은 죽음보다 훨씬 먼발치에서 그 자신을 방조하고 있었다.

 삶은 언제나 나를 짓눌렀지만, 죽음은 늘 따뜻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죽음에 귀 기울였다. 그러면 죽음은 슬그머니 다가와 내게 말을 들려주었는데, 그건 반쯤은 우렁찬, 검은 강의 물소리였다.

 
1.

 여자의 강이었다. 《The Hours》(스티븐 달드리, 2003)의 강이라거나, 《시》(이창동, 2010)의 강이라고만 부를 수는 없는. 두 여자가 내처 몸을 맡긴 것만큼 중요했던 건, 그들의 편지였다. 각각은 사랑하는 사람을 향하고 있었고, 그와 함께 세상과, 그녀들의 고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래는 《The Hours》에서 낭송되었던 것과는 다른, 버지니아 울프의 실제 유서 중 한 단락이다.

“(전략) 저는 지난 30년 동안 남성 중심의 이 사회와 부단히 싸웠습니다. 오로지 글로써. 유럽이 세계 대전의 회오리바람 속으로 빨려들 때 모든 남성이 전쟁을 옹호했고, 당신[각주:1]마저도 참전론자가 되었죠. 저는 생명을 잉태해 본 적은 없지만 모성애를 느껴 이 전쟁에 반대했습니다. 작가로서의 역할은 여기서 중단되어야 할 것입니다. 추행과 폭력이 없는 세상, 성차별이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을 간직한 채 저는 지금 저 강물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녀가 죽음을 선택한 건, 정신병 때문이 아니라 순간순간마다 죽어갈 생명들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마침내 강물에 발을 내디뎠을 때, 그녀와 함께 했던 건 단 한 장의 편지-그리고 편지를 읽는 하나의 목소리, 그러니까 내게 다가온 ‘말’이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그녀의 저작 『자기만의 방』에서, 셰익스피어의 여동생을 상상했었다. 셰익스피어만큼의 열정과 실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녀의 ‘불우한 성별’은 그녀를 예술가로 만들어줄 수 없었고, 끝내 그녀는 이름 없는 채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버지니아 울프의 상상은 단지 비극으로 그치지는 않았다. 오히려는 희망찼는데, 그건 셰익스피어의 여동생에게 언젠가 이름을 불러줄, 그리고 이름을 넘어 그녀 자신만의 방, 누구에게도 점유되지 않는 그녀만의 온전한 몸을 돌려줄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이었다.

만약 한 세기가 더 지난 후, 우리 모두에게 일 년에 500파운드의 돈과 자신만의 방이 주어지고, 우리가 자유를 습관으로서 가지고, 또한 생각하는 그대로 글로 써내는 용기를 지닌다면, 현실 속 서로의 관계에서 인간을 파악하고, 사실을 사실로서 바라보고, 우리를 이끌어줄 팔은 없으니 결국 홀로 걸어가야 하며, 현실과 우리의 관계를 다시 인식한다면, 그렇다면 셰익스피어의 여동생이었던 죽은 시인은 그녀의 버림받았던 육신을 다시 입고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라 믿습니다.[각주:2]

 여기에 하나의 진실이 있다. 버지니아는 글로써 저항하다가 절필과 동시에 몸을 던졌고, 그것은 분명 삶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삶들을 사랑하는 의미였다. 그녀에게 ‘몸’은 매초마다 펌프질하는 심장이 아니었다. 오히려는 언제든 다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그 무엇이었다. (물로) 걸어가는 것은 오로지 ‘홀로’였음에도, 걸어갈 ‘육신’은 다른 이들의 자가 인식을 통하여, 그러한 인식들이 뒷받침되는 세상을 통하여 다시금 획득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생명을 위한 자살’이라는 건 결코 모순이 아니었다. 온몸을 던진 그녀의 투쟁을 통해, 그녀는 재차 반전과 평화를 말하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혼들에 대한 인식의 울림, 거듭된 각성에의 요청이었다. 오로지, 생(生)들을 위한.
 이러한 맥락에서, 《시》의 <아네스의 노래>는 물에 뛰어든 소녀의 육신을 되살려냈던 진정 시/노래였다. 누구의 귀에도 와 닿지 않았던 소녀의 말은 무던히 허공을 떠돌다가 이윽고 미자(윤정희 역)와의 시/노래로 드러난다. 그제야 그녀는 그녀의 사랑했던 것들과 작별 인사를 건넬 목소리를, 그리고 몸을 얻게 되는 것이다.
 미자는《시》에서 항상 두 차원의 공간을 떠돌아다닌다. 남성성이 지배하는 일방적 권력의 현실과, 그녀와 사물이 편견 없이 공존하는 시의 세계가 바로 그것이다. 양 쪽 모두 언어의 장이었고, 실제로 그것은 분명히 드러나지 않도록 혼재되어 있었지만, 양쪽의 경계가《시》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던 건 미자의 망각 덕택이었다. 그녀는 현실을 끊임없이 망각했고, 그 망각의 순간동안 대신 그녀는, 그녀가 마주치는 모든 것들에 집중했다. 꽃, 새소리, 나무, 살구…미자는 하나하나를 주의 깊게 살피며 글들을 메모했고, 그것은 바로 그녀가 현실을 다른 방식으로 그리는 방법이었다. 동백꽃을 단순한 조화가 아니라 짙은 고통으로 보고, 살구를 땅으로 뛰어들은 하나의 몸으로서 대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윽고 소녀가 뛰어들었던 강을 만났을 때 그녀의 메모지를 채운 건 어떤 글귀가 아니라, 단지 물방울이었다. 침묵이 아닌 깊은 애도, 말로서 꺼내질 수 없는 하나의 슬픔을 그녀는 마주쳤던 것이다.
 <아네스의 노래>는 그녀와 소녀의 고통으로 탄생한 노래다. 생전에는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두 여성이, 서로의 고통이 겹쳐지는 순간, 현실과 시 양자의 관계를 뒤바꾸어 놓는 몸의 말을 발화하는 것이다. 시는 작중에서 언제나 무시당하기 일쑤였지만, 결국 마지막 순간에 그 어떤 논리로도 접근 불가능한 것, 즉 정복할 수 없는 잉여의 것으로 남는다. 시를 쓰기 위해서 ‘마음’을 가져야한다는 강사의 말은 “어렵다”에 내포된 논리와 해석의 위계들을 단숨에 무력화시킨다. 바로 이 안에서 ‘말’이 떠오른다. 어떤 이해관계에도 포섭되지 않으면서, 순수하게 관계를 마주할 수 있을 때, 우리들의 몸 저 쪽 끝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고통의 소리.
 성서의 누가복음 7장에는 한 청년이 등장한다. 과부의 아들로 지칭되는 이 청년은 죽어 관에 실려 나가는 중이었다. 예수가 관에 손을 대고 청년에게 일어나라고 했을 때, 청년은 일어나 앉아 ‘말’을 했다고 한다. 죽음에서 막 깨어난 그가 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각주:3] 
 과부의 아들로서 어떤 삶을 살아냈을 지, 그 이른 나이에 어떤 이유로 죽었을 지, 아무도 몰랐지만, 예수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 고통들을 감싸 안고, 그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불렀을 때, 그는 이윽고 일어나 ‘말’하기 시작했다. 몸의 일어남과 동시에 터져 나왔던 그 말들은, 어떤 말이었을지 감히 추측할 수도 없지만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것은 바로 고통 자체, 몸 자체인 말이었다는 사실이다.

2.

 그리고 말은 흐른다. 편지가 끝난 후에도 강은 여전히 흐른다.
 여기에서 물음은 남는다. 이 물소리는 왜 미자에게만 들렸을까. 소녀의 어머니조차 다가서지 않았던 곳에, 소녀와는 일면식도 없었던 미자가 그 자리로 다가갔을까. 혹은, 왜 버지니아 울프가 죽었어야 했을까. 전쟁터와는 다소 먼 시골에서 살았던 그녀가, 그녀 자신과는 상관이 없었던 사람들의 생명을 위해 왜 그녀를 던져야 했을까. 혹은…그 청년으로 하여금 말하게 한 것이 왜 예수였던 것일까. 잉여의 물음에 잉여의 언어로 대답한 것은, 이 ‘강’에 대해 오래 생각했던 유하였다.

사라지는 것만이 사라지는 것들을 생각한다
서둘러 노을의 하늘을 갈아치우는 잠자리의 눈동자
흔들릴 때마다 나뭇잎 속에 깃드는 푸른 신성같은 것,

세상은 늘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지만,
끝내 그 어디에도 다다를 순 없었다
가는 곳까지만 길이었을 뿐,
덧없는 물살에 덧없는 마음의 지느러미만
하릴없이 놓아 주다가

다만 물고기는 간데없고 남아 있는
비늘의 번득임만 안타까이 건져 올리듯
기어코 그리운 사람 하나 떠올릴 때,
사라짐보다 더 아픈 정지의 순간이 오고
치자꽃 향기 밟으며
온 강에 멎을 듯 내려앉는 별빛의 나비떼

스쳐가는 바람이 거기 없었다면
송두리때 제 넋을 흔들어 구원받는 갈대를
누가 알기나 했으리[각주:4]

 버지니아 울프는 여자의 목소리가 도저히 사회의 그 어디에도 닿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시》에서 미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숨 막힐 듯 사방을 가로 막은 남성들의 목소리들 사이에서 미자의 말은 어디에도 가 닿을 수 없었다. 실은 버지니아 울프와 미자도, 전쟁터에서 죽어갈 사람들, 그리고 강으로 뛰어든 소녀와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도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말조차 어디에도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도처에 흐르고 있지만 여전히 들리지 않았던 말들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닌가. 단지 스쳐지나갈 뿐, 어느 순간 있었는지도 모르게 잦아들을 뿐인 바람이 있었기에 갈대가 보였던 것처럼.


3.

 버지니아 울프의 글을 다시 읽는다. 여기에서 그녀의 말을 들었다. 나는 내 몸의 상처를 자극적인 서사로 재구성해 던지곤 했는데, 그건 타인을 향한 발화의 두려움에서 발로했던 자기방어였다. 어이없게 웃으면서 술안주 삼아 던지는 이야기들에는 내 감정이 없었고, 따라서 내 말도 없었다. 모든 고통을 배제시키고 사건들만 부각시키는 서사적 말하기는, 여전히 나의 고통을 진짜 ‘고통’으로 수용하기를 보류하고 있었다.
 고통을 말하기. 고통으로서 말하기. 그리고 고통을 위해 말하기.
 장롱에서 말하고 장롱에서 돌아오는 내 자폐적 서사를 깨뜨렸던 건 오로지 그녀의 말이었다. 한 세기를 건너 나와 공감할 수 있었던 그녀의 말은 나로서 내 고통마저 사랑하게 만들었다. 이 상처들로 인해서 말할 수 없었지만, 말할 수 없었기에 그녀의 말을 ‘마음’으로 들을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그녀의 말은 한 세기를 건너, 그보다도 더 멀리 계속해서 살아 숨 쉬고 있던 것이다. 더 넓은 진폭으로, 보다 많은 생을 만나기 위해. 그렇다면 FTA를 반대하는 말들, 쌍용차의 해고를 규탄하는 말들을 포함하여, 전-지구적으로 외쳐지는 반(反)생명에 대한 우리의 울림들도 결코 공중에서 흩어지는 것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 모든 말들은 강물처럼 도처에 흐르고 있다가, 또 다시 말 못하는 이의 귀에 희망으로 닿으리라.


4.


 태초에 말이 있었다.
 몸이 태어날 말이었다. 머리가 아니라, 고통이, 사무치는 아픔들이.

 그러므로 내가 만났었던 것처럼, 그 어떤 죽음에도 침묵은 없었다. 오히려 그것은 생보다도 훨씬 가까운 곳에서, 생만큼이나 우렁차게 외쳤던 볼륨이었다. 오로지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하기 위하여, 더 큰 삶을 사랑하기 위하여 말이다. 그리고 그 말 안에서 바로 내가, 우리가, 태어났던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이 편지는 버지니아 울프가 자살 직전, 그녀 인생의 동반자였던 레너드에게 부친 것이었다. [본문으로]
  2.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본문으로]
  3. 2010년 9월, 충정로 맑은샘교회의 렉시오디비나 성서 나눔에서 공유된 이야기임을 밝힌다. [본문으로]
  4. 유하, 「7월의 강」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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