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 무감한 시대에 던지는 화살  

<피에타 (김기덕, 2012)> 




이희승*



  신기하기만 합니다. 촛불을 들고서 다시는 찾지 않을 줄 알았던 빈 광장을 가득 채운 시민들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던 지난 겨울부터 예감은 했습니다. 많은 이들의 절규, 고통 그리고 죽음을 지불하고 겨우 벗어난 줄 알았던 과거의 망령을 소환해서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미래까지 옭아매려 했던 그 세력들이 줄줄이 포승줄이 묶여 심판대로 향할 때, 다시 뒤로 가지는 않으리라 확신을 했습니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지켜본 이번 대선은 승부를 알고도 손에 땀이 나는 경기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침 뉴스에도 이상하게 마음이 설레네요.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에 오르기를 바랬던 많은 이들도 서서히 이 흥분과 기대에 전염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손수 양복 저고리를 벗어내려 놓고, 소매를 걷어 올리며 거꾸로 향했던 이정표를 바로 돌리려고 하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막연하지만 꽤나 단단한 믿음을 갖게 되는 이유라면 단 한가지. 그가 타인의 고통을 교감할 수 있는 사람이며, 그 고통에 민감함으로 번민하는 지도자일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문득, 고통의 교감에 번민하는 외로운 영화감독 김기덕의 <피에타(2012)>가 떠오릅니다.


  뤼미에르 형제의 ‘신기한’ 발명품으로 세상에 첫선 보였던 영화는, 새로운 예술매체로써의 가능성때문에 현대를 함께 열어가던 많은 지성인들과 예술가들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했지요. 활발하고 진보적인 실험과 모험의 대상이었던 영화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불행히도) 개인적 관음의 쾌락을 추구하는 문화산업의 구조 위에 재조립되어 버렸습니다. 현실의 괴로움과 고통을 잠시라도 잊고자 하는 대중의 심리와 대량 생산 체제를 갖춘 헐리우드의 상업적 이해가 만나 탄생한 여러 장르 영화들은 스크린에서 재현되는 인간의 갖가지 감정들을 궁극의 쾌락을 위한 도구로 사용합니다. 예를 들면, 두려움이라는 원초적 감정은 호러 영화의 문법을 통해 말초적 쾌락의 도구로 재활용됩니다. 욕망하는 존재인 인간의 본질적 고뇌에서 비롯된 상실감과 좌절은 멜로 영화의 제조 공정을 통과하면서, 삶을 관통하고 변화시키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카타르시스보다는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서는 순간 상큼하게 떨쳐버릴 수 있는 소모성 슬픔을 선사하죠. 예술 영화라고 분류되는 영화들조차도 거의 장르화되어버린 엘리트적 주제의식과 시각적 탐미주의을 통해 일부 관객의 기대에 부응하는 미학적 쾌락을 제공하는데 심혈을 기울일 때가 많습니다. 해외에서의 평가와는 달리, 국내 비평가나 관객들과 늘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도 이런 도식화된 예술영화로 해석될 만한 소지를 다분히 가지고 있기는 합니다. 특히, 페미니스트적 관점에서 보면,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여성의 육체를 가학적 유미주의의 재료로 사용하고, 여성의 주체성을 인류의 구원이라는 추상적 주제를 위해 희생한다는 지적을 온전히 피하기란 쉽지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논란을 잠시 뒤로 하고, 열띤 찬반 논쟁의 한가운데 서기 일쑤인 그의 영화들을 살펴보면 고통이라는 공통된 지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 영화인 <악어 (1996)>에서부터 그가 직간접적으로 제작에 참여하고 탄생시킨 거의 모든 영화들은, 어떤 장르적 장치를 통해서도 관음적 쾌락으로 온전히 전환할 수 없는 ‘불편한’ 고통의 경험을 관객의 마음에 선명하게 남기죠. 단순히 센세이션널리즘이라고 폄하하기에는 긴 세월동안, 그의 작품활동과 평범하지 않은 삶의 여정은 고통이라는 일관된 테마를 고스란히 실재화하는 지난한 과정으로 보입니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은 하나같이 소외계급의 고통을 매개로, 계급화된 문화 엘리트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는 예술영화의 지평을 넓혀 보려는 끊임없는 시도를 보여 줍니다. 마치 그 무게를 감당하기도 어려운 커다란 붓으로, 아직 제대로 형상화되지도 않았으며 영화예술의 구조적 변화없이는 제대로 형상화될 수도 없을만큼 ‘날것’의 고통을 스크린에 그려 넣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말이죠. 그래서 저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볼때마다, 쾌락을 상품화하는 문화산업에서 고통의 공감을 통해 인류와 문명의 변화를 촉구하는 예술로 영화를 복원하려는 그의 의지를 읽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국내외에서 상당한 호평을 끌어낸 영화 <피에타>는 비문명의 수준에 가닿은 자본주의의 야만적인 이윤추구, 누적된 피로와 고통과 절망을 감당하며 서로를 물어 뜯어야 하는 도시빈민들, 그리고 이를 벗어나기 위한 자기 희생과 구원에 대한 물음을 거칠게 던져 놓은 알레고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 색채가 짙은 포스터와는 달리, <피에타>의 주인공인 강도(이정진)는 다 허물어진 청계천 골목을 누비며 악덕 사채업자를 위해 채무자들의 사지를 절단해 불구로 만들고는 그 보험금을 가로채는 하이에나같은 존재입니다. 김기덕 감독의 남자 주인공들이 늘 그렇듯이, 태어나서부터 버려진 채 거칠게 자란 강도는 돈을 벌겠다는 욕망보다는 원초적인 폭력에의 본능에 의해 움직입니다. 성적 쾌감을 위해 남이나 자신의 신체에 위해를 가하는 새디즘과 메조키즘이라는 발전된 형태의 욕망의 구조를 찾아 볼 수 없는 날 것 그대로의 잔인성을 표현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죠. 느닷없이 어머니를 자청하며 찾아온 미선(조민수)은, 청계천 개발을 핑계로 수십년간 자리잡고 있던 군소업체들이 내쫓기고 황량하게 변한 도심 한복판의 메탈정글에서 홀로 살아 가고 있는 맹수같은 강도를 ‘관계’라는 문명의 첫 단계로 끌어 들이게 됩니다.


    이 묘령의 여인이 자신을 버린 엄마라는 사실에 치를 떠는 강도의 모습은 야수적인 폭력성을 극복하고 문명으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누구나 겪는 내적 외적 고통을 여과없이 보여줍니다. 미선을 강간함으로써 자궁으로의 회귀를 시도하는 강도는, 수치심과 고통에 휩싸여 신음을 토해내는 미선의 얼굴을 내려다 봅니다. 채무자들의 팔다리를 절단하면서 수없이 본 고통의 장면이었건만, 강도는 미선이 느끼는 고통을 고스란이 교감합니다. 김기덕 감독은 미선의 비명과 절규가 귀를 멍멍하게 하는, 고통이 가득찬 클로즈업을 눈에 띄게 거친 핸드헬드 카메라로 잡아내며 ‘고의적인’ 줌인을 사용해서 관객으로 하여금 강도의 망설임에 주목하게 합니다. 미선이 느끼는 모욕과 수치심과 고통을, 가해자인 강도와 그 가해의 현장에 비밀스런 공모자로 함께한 카메라가 함께 체험하는 듯합니다. 강간이라는 폭력행위의 영화적 재현에 내포된 가학적, 피학적 쾌락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고 생생한 고통을 스크린 너머로 전달하는 이 충격적인 장면은, 근친 상간이라는 근원적 욕망의 대리만족을 통한 관습적인 쾌락 추구에 젖은 관객을 향해 찬물을 끼얹습니다. 


    자신을 문명의 경계 안에서 성찰한 적이 없었던 강도는 처음으로 타인의 고통을 체험적으로 교감하면서, 그간 채무자들에게 무차별적으로 가했던 자신의 폭력과 그 끔찍한 결과를 하나하나 되짚어 갑니다.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을 향한 무한한 애정, 그 사람을 잃는 단장의 고통을 통과하면서 강도는 자신이 부지중에 공모했던 자본주의의 야만적 본성을 자각하게 되죠. 어느날, 한 채무자가 건물 옥상에서 떨어져 자살하는 광경을 목격한 강도는 묻습니다. “돈이 뭐죠?” 미선은 대답합니다.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지.”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 되어버린 ‘돈’이 가시 돋힌 그물로 모두를 옭아매고 신음하게 만든 청계천 풍경은 이 영화가 제시하고자 하는 한국사회의 단면이자, 현대문명의 척박함에 김기덕 감독이 들이댄, 필터없는 거울인 것 같습니다. 영화 곳곳에 고스란이 드러나는 청계천의 뒷골목들은 다소 도식적인 미장센을 만들어내긴 합니다. 하지만, 최소의 자본(이 영화를 제작하고 배급하는데 김기덕 감독은 미처 2억원이 안되는 버젯을 사용했다고 하네요)이 최선의 선택을 통해서 탄생시킨 이 암울한 미장센은, 우리가 상승욕구에 몸을 맡기고 최고를 외치는 동안 잔인하게 파괴하고 멸종시킨 주변인들이 화석이 아니라 살아서 고통을 느끼는 인간임을 보여주는데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유수의 비평가들은, 이제는 김기덕 감독이 피비린내나는 몸부림과 비명으로 가득한 가학과 피학의 미학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허나, 프로이트가 천명했듯이, 고통이란 성적 쾌감을 목표로 주조된 육체의 환상인 새디즘과 메조키즘을 넘어서는, 보다 근본적인 인간의 능력입니다. 고통은 원초적 폭력성에 대응하고 대항하는 인간 본연의 초월적 방패막이로써, 문명을 탄생시키고 유지하는 예술성 혹은 종교성의 근간이 된다는 해석이지요. ‘고통에 처한 신체’라는 저서에서 일레인 스캐리는 고통은, 당하는 이에게는 홀로 세상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는 끔찍한 체험이지만, 고통을 진정으로 교감하는 이에게는 고통을 당하는 이의 관점을 체화함으로써 그들과 함께 세상을 새로이 창조하는 경험이기도 하다라고 기술합니다. 이러한 고통의 교감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바로 예술이라고 할 때, 김기덕의 <피에타>는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처럼, 타인에게 가해진 상상할 수도 없는 고통을 나의 것으로, 더 나아가 나의 책임으로 끌어 안으려는 예술적 시도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그 문이 살짝 열린 듯한 ‘새로운’ 시대가 많은 이들의 고통과 타인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공감하고 교감하려는 수많은 이들의 안간힘으로 탄생했음을 잊지 않기를, 그리하여 진정으로 거듭나는 공동체로 나아가는 길에 우리가 서있는 것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 필자소개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 강사 및 정신분석가. 동 대학의 미디어 영화학과에서 각색영화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아시안학과에서 한국 영화와 텔레비젼 드라마에 관한 강의를 맡고 있다. 호주 정신분석학회의 정신분석가 과정을 수료하고, 국제 라캉 포럼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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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제의 폭력을 되받아 치는 발칙한 그녀 

<Elle (폴 버호벤, 2016)> 




이희승*



  영화과 동료가 감독한 저예산 영화를 단 한번, 게릴라 개봉한다는 이메일이 도착했지만, 오후 6시인 상영시간을 확인하고는 조용히 이메일을 닫습니다. 흔치 않은 일은 아니지요. 결혼생활하고 아이 키우며 대학가 언저리에서 교편잡고 있는 워킹맘들은 강의 시간이 다 끝난 후에야 시작하는 여러 학술 활동 및 친목모임에 참여하기 쉽지 않은 현실을 한탄하면서, 서서히 교수사회의 중심에서 멀어져 가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여권신장에 있어서는 세계 최고를 자부하는 뉴질랜드에 산다고, 꽤나 진보적인 인문학부에 속해 있다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은 이 자괴감 충만한 에피소드는 기득권을 결코 여성들과 순순히 나눠 가질 수 없다고 버티는 가부장제의 뿌리깊은 독점욕을 공적, 사적 영역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게 합니다. 난공불락인 듯 보이는 가부장제의 전방위적인 차별과 폭력에 대한 소심한 복수라고 해도 할 말은 없지만, 이번 호에는 아직 국내에 개봉하지 않은 최신 영화이자 제 마음에 쌓였던 앙금을 잠시나마 해소해 준 폴 버호벤 감독의 신작 <그녀( Elle)>를 소개할까 합니다.


  필립 지앙의 소설을 영화한 <그녀>는, 이제는 거의 대명사처럼 쓰이게 된 제목만으로도 그 파급력을 가늠할 수 있는 <원초적 본능 (1992)>을 감독한 폴 버호벤 감독의 첫번째 프랑스 영화입니다. 홍상수 감독의 <다른 나라에서(2012)>를 통해 국내 영화에도 출연한 바 있는, 프랑스의 명배우 이자벨 위페르가 주인공인 미셸 역할을 맡아서 명불허전의 연기를 펼치죠. 폴 버호벤 감독의 영화세계에는 특유의 긴장감이 존재합니다. 이는 겹겹이 감추어진 진실에 서서히 다가가는 동안 느껴지는 은근한 긴장감이라기보다는 종잇장보다 얇은 문명의 가면 뒤에 누구나 품고 있는 잔인성과 폭력에의 본능이 금방이라도 튀어 나올 것 같은 말초적 긴장감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폴 버호벤의 영화들은 예외없이 남성본위의 사회 구조를 성(性)과 폭력의 합일체로 묘사하고 있고, 고유의 말초적 긴장감은 그 주제의식을 관객에게 각인시키는 중요한 영화적 장치로 활용됩니다. <원초적 본능>에서도 그랬듯이, <그녀>는 일일이 거론하고 반박할 수도 없을 정도로 일상화되고 관습화된 가부장적 권위의 폭력은 인간관계의 가장 내밀한 층위인 섹슈얼리티를 도구로 삼는다는 진실을 폭로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폭로나 증언에서 한발 더 나아가, 영화라는 매체가 허락하는 대안적 공간에서만큼은 이 부조리한 구조를 철저히 응징하는 핏빛 유토피아를 구현하려고 하죠. 물론, 폭력을 폭력으로 갚는다는 논리나 그의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부르조아적 문제인식의 한계에 얼마나 동의하느냐에 따라서 이 영화에 대한 개인적인 호불호가 결정될 것 같습니다.




  <원초적 본능>의 캐서린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미셸은 뚜렷한 자기 주관과 성적 취향으로 무장하고, 먹잇감을 기다리는 맹수와 닮았습니다. 파리의 부유한 주택가에서 고급스러운 취향으로 인생을 즐기며 혼자 사는 이혼녀인 미셸은 한때 문학을 공부했지만, 초고도화된 자본주의의 총아인 비디오게임 업계에서 성공적으로 자리잡은 게임회사의 공동대표이기도 합니다. 남부러울 것 없이 보이는 그녀이지만 현실은 좀 한심합니다. 절필한 소설가로 이혼한 전부인의 회사에 일거리를 찾아 기웃거리는 찌질한 전남편, 변변한 직장도 없이 표독한 여자친구에게 치이고 부자 엄마에게 손 벌리는 외아들, 잘사는 딸의 도움으로 연명하면서 젊은 남자와 연애 놀이에 푹 빠져 사는 엄마, 희대의 연쇄살인범으로 장기수감 중에도 심심찮게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아빠, 절친이자 회사를 함께 운영하는 안느와 그녀의 남편이자 부끄러운 줄 모르고 끊임없이 만나자며 들이대는 내연남. 마치 복잡한 게임이라도 하는 양, 이 거미줄처럼 얽힌 관계들 사이를 거침없이 유영하던 당찬 미셸은 어느날 느닷없이 침입한 괴한에 의해 강간을 당합니다. 잠시 바닥에 앉아 텅빈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던 미셸은 말없이 일어나 어지러진 집안을 정리하고 욕조에 몸을 담그죠. 눈깜짝할 사이에 들이 닥친 토네이도처럼 일상을 산산조각낸 사건을 겪었지만 미셸은 개의치 않겠다는 듯 고개를 빳빳이 들고 혼란스러운 순간을 견딥니다. 미셸이 마치 밀린 업무라도 처리하는 것처럼 성병 검사를 받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하다가 지인들에게 강간당한 사실을 알리는 영화 초반의 비관습적인 장면들에서, 이자벨 위페르는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이 가녀린 몸으로 이 강철같은 인물을 완벽히 표현해 냅니다.


    강간범으로부터 줄기차게 협박 메세지가 오고 집안에 그가 다시 침입한 흔적이 선명하지만, 미셸은 이를 경찰에 알리지 않고 – 혹은, 또하나의 제도화된 남성 권력에 의존하지 않고 – 주변을 의심스런 눈초리로 둘러 보기 시작하죠. 영화의 중반부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남성들을 관찰하는 미셸의 시선을 통해, 가부장적 사회구조와 그 안에서 묵인되는 배타적 특권의식이 낳은 기형적 남성상을 가차없이 카메라 앞에 드러냅니다. 탐욕, 위선, 불관용, 이기심, 자기연민, 그리고 무력감과 우울 – 이 모두가 바로 <그녀>가 직시하는 오랜 권력독점으로 인해 안에서부터 썩고 있는 가부장 제도의 자화상이지요. 강간이라는 가장 원초적 형태의 남성 폭력에 노출되었지만 주체의식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미셸과, 그런 그녀와 팽팽한 줄다리기를 벌이는 주변남성들, 우아하고 럭셔리한 파리 상류층의 일상에서조차 발톱을 드러내고 있는 욕망의 호전성, 그리고 내재된 공격본능을 돈벌이에 이용하려는 자본의 천박한 속성 간의 충돌은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버호벤 감독 특유의 서슬퍼런 긴장감을 유지합니다.  


    비록 정글같이 위험천만한 현실에 살지만, 그녀가 유일하게 호의적인 태도로 대하는 이가 있으니, 잘생기고 듬직한 이웃집 남자 패트릭입니다. 패트릭은 신앙심 깊은 아름다운 아내와 그림같은 가정을 꾸미고 살아가는 은행간부죠. 불안과 공포를 홀로 견디는 미셸에게 보호본능을 느끼는 듯, 무슨 일이든 나서서 미셸을 돕는 패트릭은 서서히 미셸의 주변을 맴돌며,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그녀의 일상에 스며 듭니다. 관객 또한 이 친절한 앞집 남자의 등장으로 한숨을 돌리게 되지요. 허나, 이미 <원초적 본능>에서 예견된 바대로, 성적 욕망에 있어서 남녀 구분없이 ‘뻔뻔한’ <그녀>는 미셸이 사람좋은 패트릭을 망원경으로 훔쳐 보면서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이 자위행위를 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나도 관음과 자위를 누릴 자유와 권리가 있다’는 미셸의 당당한 선언으로 해석이 가능한 이 작은 반전은, 두 인물 사이에서 로맨틱한 관계 발전을 살짝 기대했던 저를 비롯한 관객들의 습관적 기대감을 머쓱하게 합니다. 올가미처럼 목을 조여 오는 강간범의 협박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자, 미셸은 간단한 호신 무기에서부터 권총 사격에 이르기까지 가부장제의 근간이자 남성 우위를 정당화하는 마초적 폭력에 잠시 의탁해 보려고도 하죠. 하지만 이자벨 위페르가 품격있게 연기해낸 미셸은, 얼음 송곳을 침대 밑에 감춘 채 대상화시킨 남자의 육체를 맘껏 탐하는 <원초적 본능>의 캐서린보다는 한 수 위인 듯 합니다. 노련한 미셸은 서로의 손에 피를 묻히는 유아기적 폭력 대신, 가부장적 독점욕 안에서 이미 자랄대로 자라난 자기파괴 본능을 살짝 비트는 전략을 써서, 독버섯처럼 그녀의 인생에 기생하던 찌질한 남자들을 한방에 청소해 버립니다.


    영화는 상상만으로도, 아니면 상상 속에서나마 통쾌한 페미니즘적 복수극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려고 애를 씁니다. 미셸은 부조리한 사회 구조에 젖어 있는 동안 저지른 본인의 위선과 자기기만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자기 스스로에게 그리고 상처입힌 누군가에게 그녀만의 방법으로 용서를 구합니다. 그리고, 폴 버호벤 감독은 나름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나 이제는 다소 식상한 감이 있는 대안적 여성연대로 영화를 맺으려 하지요. 이 영화가 담지하려고 했던 부조리의 폭로와 비판 그리고 전복에의 시도와 그 결과를 어떻게 평가할지의 문제와 별개로, 여든이 다 된 백발의 할아버지 감독은 사실 속빈 강정에 불구한 펠러스 (phallus)를 마구 휘둘러대는 남근 중심적 문명의 민낯을 솔직히 드러낸 <그녀>를 통해서, 보편화된 성차별의 폭력에 감금된 수많은 “그녀”들에게 잠시나마 해방구를 선물하려는 듯 합니다. 그리고 억압과 불평등으로 유지해온 가부장 질서의 내압으로부터 발생한 무의식적 자책과 불안에 떨며 ‘이러다가 이 세상이 끝내 멸망’하리라고 예견했으나 너무나 멀쩡히 21세기가 도래한지도 한참이건만, 독주하는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의 치열한 경쟁과 생산성을 명목삼아 여전히- 아니 그 어느때보다도 더 공고히 –남성 우위를 지속하려는 “그”들에게 섬뜩한 경고장을 날립니다. 진짜 위험한 건 바로 ‘그녀’라고.


* 필자소개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 강사 및 정신분석가. 동 대학의 미디어 영화학과에서 각색영화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아시안학과에서 한국 영화와 텔레비젼 드라마에 관한 강의를 맡고 있다. 호주 정신분석학회의 정신분석가 과정을 수료하고, 국제 라캉 포럼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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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이 보이지 않는 혼탁한 삶의 자리에 찾아든 아름다운 

이창동의 <시>




이희승*



  꼭 일년 전, 다르덴 형제의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의 리뷰로 2016년 한해를 열었던 것이 마치 어제처럼 가까운데 벌써 2017년 첫번째 영화 읽기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다사다난’이라는 표현조차 무색할 정도로 모두의 눈과 귀를 의심케 하는 소식들이 쏟아지고, 그 절망감 속에서 그간 공동체라는 명제에 냉랭했던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혁명에 가까운 변화들을 체험하는 와중에, 저도 모르게 급물살에 휩쓸리듯 2017년의 출발점에 도착해버리고만 기분입니다. 땅끝 나라에 사는 저 또한 대한민국의 운명을 염려하며 어지러운 뉴스들 속에서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영화를 고르려니 쉽지가 않을 정도로 마음이 달아 올랐었나 봅니다. 그래서인지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 (2010)>가 소란스러운 머릿속을 다스려 주지 않을까 하는 소망을 가져 봅니다.


  이창동 감독은 소설가로 등단한 후, <그 섬에 가고 싶다 (1993)> 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1995)> 의 시나리오 집필로 영화인생을 시작한 문인 출신의 영화감독입니다. 주변의 적극적인 권유로 만들게 되었다는 그의 감독 데뷰작 <초록 물고기 (1997)>는, 장르와 국적을 가리지 않는 열렬한 영화팬이었지만 역사적인 관점을 담지하면서 공감가는 동시대의 초상을 제대로 그려낸 한국영화에 목말라 있던 저에게 한국영화의 미래에 대한 확신을 준 영화였습니다. 모두가 오래도록 기억하는, 또 기억해야 하는 영화 <박하사탕 (2000)>은 저의 단골 강의 주제이기도 하지요. 숨겨지고 외면당한 현대사의 그늘만을 예리하게 가려내어, 철저히 정제된 영화미학으로 전달하는 이창동 감독의 영화들은 시대를 가열차게 이끈 ‘영웅’보다는 한번도 스스로를 역사의 주체라고 인식하지 못했지만 현재의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가 존재하는 이유인 ‘그들’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가집니다. <오아시스 (2002)>는 장애를 가진 공주(문소리)와 사회부적응자인 종두(설경구)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번영을 앞세우며 내달리는 대한민국이 적극적으로 추방시키고자 했던 사회적 유배자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그들’을 우리 사회의 일부로 복원시키고자 합니다. <밀양 (2007)>은 남편과 아들을 잃고도 처절할 정도로 그 상실을 망각하고 싶어하는 신애(전도연)를 폭압과 독재의 기억과 흔적을 애써 지우려는 우리 사회의 모습과 등치시키죠. 그리고 <시 (2010)>는 억울하게 희생당하고 잊혀지는 어린 소녀를 기리는 미자(윤정희)의 시작 (詩作)을 통해,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정의와 화해를 가로막는 자기보호 본능과 이기심을 예술행위를 통해 극복해 보려는 영화적 실험을 시도합니다. 어찌보면 다행스럽게도 2016년 말, 역사는 그간 이창동 감독의 영화 속에 등장한, 출구없이 지리멸렬한 삶에 고통스러워 하는 ‘그들’이 바로, 어둠을 밝히는 촛불을 모아들고 광장으로 향한 ‘우리’라는 사실을 선명하게 증명해낸 것 같습니다.



  이 영화의 포스터에서 이창동 감독이 직접 썼다고 알려진 한 글자 ‘시’ 가 우선 눈에 띱니다. 정성을 다해 완성한 단 세 획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글자. 엄청난 사건을 담아내면서도 그 단아함을 잃지 않는 <시>는 바로 이 글자와 닮아 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미자는 예순을 훌쩍 넘긴 노년의 여성입니다. 이혼한 딸이 맡기고 떠난 외손자 종욱(이다윗)을 돌보며 자신의 인생 자체에 그다지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생의 남은 날들을 가볍게 지워 나가는 미자이기에 치매 초기라는 진단도 마치 가벼운 어깨 통증처럼 별로 충격적이지 않습니다. 젊은 시절, 남자들 마음께나 설레게 했던 미모의 흔적이 그나마 그녀에게 남겨진 유일한 삶의 훈장이고, 예쁜 꽃을 좋아하고 처지에 맞지 않는 화사한 옷차림으로 자신 속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향한 본능을 발산하는 좀 엉뚱한 할머니일뿐이지요. 중풍으로 몸이 불편한 강 노인 (김희라)의 시중을 들며 용돈벌이를 하고, 동네 문화센터의 시짓기 교실에 다니던 그녀의 평온한 일상은 예상치 못한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겨우 중학생인 외손자 종욱이 집단 강간 사건의 피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지요. 종욱과 그의 친구들이 동급생인 희진(세례명 아네스)을 상습적으로 강간했고 피해자인 희진이 끝내 강물에 투신자살하는 사건은 절망도 희망도 없이 진공관같던 미자의 노년을 송두리째 흔들죠. 시덥지 않게 시작했던 시짓기는 이제 엄청난 고통과 충격을 견디게 하는 절실한 희망이 되고, 미자는 평생 한번도 써보지 않았던 시 한편을 쓰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된 양 매달리며 시를 완성하는 ‘인생의 가장 뜨거운 순간’을 간절히 소망하게 됩니다.


    영화의 전개는 이렇게 둘로 내달리는 평행선을 그리는 듯 합니다. 주인공 미자가 아무것도 이룬 것 없는 인생의 마지막 장에서 붙잡은 시에 대한 뜬금없는 열정, 그리고 집단 강간 사건을 소리없이 마무리하려는 가해자 소년들의 아버지들과 학교의 후안무치. 하지만 창작의 고통을 통해 세상과 교감하기 시작한 미자는 이 평행선에 의미있는 교차점을 만들고자 혼자 애를 씁니다. 미자의 좌충우돌 시쓰기 프로젝트는, 목소리를 잃은 채 희생자요 망자로써 플롯의 외곽에 존재하던 어린 소녀 희진을 끝내 내러티브의 중심으로 불러 들이죠. 영화는 비아그라의 힘을 빌어서라도 육신의 마지막 불꽃을 사르고자 미자와의 육체적 관계를 요구하는 강 노인, 정작 시쓰기엔 별 관심없는 이들이 모여 앉아 커피와 술과 무게없는 말들을 나누는 시짓기 교실, 그리고 일말의 뉘우침없는 종욱과 그의 친구들 사이를 오가는 미자의 일상을 통과하면서 시쓰기와 생에 대한 윤리적 자세를 찾는 과정을 명백하게 동일시합니다.  


    앞이 보이지 않게 혼탁한 삶 가운데 놓인 미자에게 시짓기 교실 강사이자 시인으로 등장하는 진짜 시인 김용택은 시를 쓰려면 세상을 잘 봐야 한다고 일러 줍니다. 미자는 어린 여학생처럼 순진하게 처음엔 식탁에 놓인 사과를, 집 앞에 선 나무를, 죽은 소녀의 사진을, 희진의 학교 교실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린 소녀가 그 짧은 생을 내던졌던 검은 강물을 진지하게 들여다 보지요. 강가에서 홀로 맞은 굵은 빗방울이 종잇장에 세차게 새겨 넣은 말없는 ‘시’를 받아내는 미자는 이제 시를 쓸 준비를 마친 듯 합니다. 카메라는 미자가 찾아 오지 않는 시상을 기다리며 정한수처럼 받쳐든 노트의 빈 페이지에 뚝뚝 떨어져 박힌 빗물 자국을 한참동안 응시하며, 관객에게도 시인의 자리에 앉아 볼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합니다. 이창동 감독은 경박하고 의미없고 결코 아름다움을 담아 낼 수 없었던 미자의 삶이 서서히, 잊혀진 자들의 목소리에 자리를 내어 주는 자기희생적인 진혼곡으로 마감하는 모습을 그립다 미처 생각지도 못하고 잊어버린 정감어린 소박한 풍경들 속에 담아 냅니다. 그리고는, 클로즈업으로 드디어 만나는 희진과 눈을 맞추는 것으로 영화를 닫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당시 썼다는 이창동 감독의 ‘아네스의 노래’는, 진실된 예술행위를 통해 볼품없는 인생의 가장 뜨거운 순간을 경험한 미자의 손끝을 통해 곱게 원고지에 옮겨지고, 미자의 시를 통해 비로소 가해자들의 일방적이고 고의적인 망각에서 부활한 희진의 목소리에 실려 관객들의 마음을 울리게 됩니다. 나누고 싶었던 그 수많은 재잘거림을 뒤로 하고 깊은 바다에서 침묵한 아이들을 기억하기 위해 태웠던 광장의 촛불을 먼 타국에서 지켜보면서 문득 이창동의 ‘아네스의 노래’를 떠올렸습니다. 제발 2017년에는 그들이 불렀을 노래를, 그들이 써내려갔을 아름다운 시를 기억하고, 함께 부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탓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니 그래서 2017년 첫 영화읽기는 ‘아네스의 노래’로 맺으려 합니다.


 아네스의 노래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래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제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나는 기도합니다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 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래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 필자소개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 강사 및 정신분석가. 동 대학의 미디어 영화학과에서 각색영화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아시안학과에서 한국 영화와 텔레비젼 드라마에 관한 강의를 맡고 있다. 호주 정신분석학회의 정신분석가 과정을 수료하고, 국제 라캉 포럼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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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

고레에다 히로키츠의 <아무도 모른다>




이희승*



  프로이트가 인간 정신의 구조와 작용을 설명하기 위해 정립한 여러 이론과 가설 중에는,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이제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가 있습니다. 섹슈얼러티와 사회화라는 과제를 통해 호의적이지 않은 세상과 대면하는 인간화의 과정이 필연적으로 비극을 내포하고 있다는, 결코 반갑지 않은 진실을 전달하는 신화적 알레고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성장과 비극의 이중주는 비단 개인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한 사회가 성장이라는 모티브로 운용되는 동안 개개인의 삶에 쌓여 가는 필연적인 고통은, 자랄 수록 피부를 파고드는 내성발톱처럼 더욱 예리하게 비극의 깊이를 더하게 마련인가 봅니다. 억울한 죽음을 맞은 한 시민의 주검을 앞에 놓고 벌어지는 희극을 닮은 어느 비극에서 우리는 고속 성장을 이룬 대한민국 사회 안에서 그간 ‘아무도 모르게’ 자라온 서글픈 괴물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허나, 성장과 비극의 필연적인 동반 관계를 운명이라고 순응하기에는 인간이라는 개별적 존재가 고통에 매우 민감하다는 현실을, 제 눈을 찔러 버린 오이디푸스의 형상을 통해 소포클라스의 비극이, 그리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역설하고 있는 듯 합니다.


  심심치 않게 찾아 볼 수 있는 성장영화라는 장르화된 공식 또한 고통과 성장이 맞물린 인생의 진리를 소재로 삼지만, 그 안에서 개별화된 의미를 생산해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지요. 대개, 성장영화의 미덕과 교훈은 다름아니라 고통을 이겨내고 성장을 이뤄내는 주인공의 투쟁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성장과 고통의 명쾌한 일차함수는 그리스 비극이, 그리고 프로이트가 담아내려는 인간화의 아이러니를 표현하기에는 역부족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매우 특별한 성장영화라고 할 수 있는, 일본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부모에게 버려지고 사회에서 잊혀진 채로 도시 한복판에서 성장하는 네 아이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결코 간단히, 가볍게 풀어 낼 수 없는 이 어마어마한 비극의 핵에 가까이 다가가려고 시도합니다. 1988년 일본 열도를 떠들썩하게 했던 나시 스가모 사남매 방임 사건을 소재로 해서 2004년에 만든 이 영화는 주인공을 연기한 12세 소년 야기라 유야가 최연소 칸느영화제 남우 주연상을 수상하면서 평단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당시 심사위원장이었던 쿠엔틴 타렌티노 감독이 수많은 영화제 출품작들을 보고나서 단 한가지 기억에 남는 것을 꼽으라면 바로 이 영화 속 소년의 얼굴이었다라고 했을 정도로, 히로카즈 감독의 사려깊은 카메라는 성장과 비극의 틈바구니에 갖힌 소년 아키라와 어린 형제들의 모습을 잊지 못할 이미지로 관객의 마음에 각인시킵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동경의 한 아파트로 후쿠시마 모자가 이사를 오는 것으로 시작하지요. 주인집 남자는 어린아이가 있으면 다른 세입자들이 불평을 많이 한다고 주의를 줍니다. 젊은 엄마는 이제 중학교에 진학하는 외아들 아키라가 얌전하고 공부를 잘 하는 모범생임을 강조하며 주인을 안심시키고는 부지런히 이사짐을 정리하지요. 명랑한 톤으로 가볍게 움직이는 카메라와 무심한 듯하지만 인물들의 디테일한 움직임과 시선을 이어 붙이는 편집은 여느 이삿날과 다를 바 없는 풍경을 담아내면서도 아키라와 엄마가 주고 받는 은밀한 눈빛안에 숨겨진 비밀의 존재를 암시합니다. 이삿짐 속에 섞여 있던 두 개의 커다란 여행가방 안에 막내 유키와 장난꾸러기 시게루가 각각 숨어 있었던 것이지요. 저녁이 내려 앉은 낯선 거리를 지나, 아키라는 기차역으로 바로 밑의 여동생인 쿄코를 데리러 나갑니다. 재잘거리는 네 아이들이 저녁식탁에 다 모이자 엄마는 큰 아들인 아키라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규칙을 정합니다. 빨래를 담당하는 쿄코는 베란다에 설치한 세탁기까지는 나갈 수 있지만 어린 시게루와 유키는 아예 집밖 출입을 할 수 없다고 말이지요. 출생신고가 되지 않아 학교에 갈 수도 없는 네명의 아이들이 속절없이 갇혀 있는 비좁은 아파트에도 어김없이 새날의 아침이 찾아 들고, 거실 깊숙이 팔을 뻗은 햇살을 동무 삼아 네명의 아이들은 일하러 나간 엄마를 기다리며 하루를 보냅니다. 이사 온지 며칠 후, 아버지가 각기 다른 이 아이들의 엄마는 또다른 사랑과 그 사랑이 약속하는 행복을 찾아 아이들을 남기고 떠납니다. 무책임하게 사라진 아빠들을 대신해 여지껏 아이들을 맡아 왔다고 주장하는 철없는 엄마에게 아키라는 쉽게 따지지도 못하지요. 간간히 돈을 부쳐 주는 것으로 엄마의 존재를 희미하게 느끼지만 이제 아무런 보호장치없이 12살 아키라와 그의 어린 동생들은 세상을 향해 조금씩 발을 내딛습니다.    


    모두에게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만 모두가 불행해지고만 이 상황에서도 아이들은 부지런히 자랍니다. 먼지 한톨없이 깔끔한 동경의 한복판에서 네 아이들의 행색이 눈에 띄게 남루해지는데 그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현실을 극명하게 암시하는 몇개의 롱 쇼트는 “아무도 모른다”라는 영화의 제목에 숨겨진 언중유골을 드러냅니다. 사실, 이 영화는 모두가 다 알지만, 누구도 알고 싶어 하지 않기에 아무도 모르는 그 지점을 보여 주려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모른다>의 진정한 매력과 힘은 누구를 탓하지 않는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키라와 아이들은 돌아 오지 않는 엄마나 애초에 사라져 버린 아빠들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사회의 무관심에 상처받는 것 같지도 않고요. 부모 그늘에 사는 다른 아이들을 부러워 하거나 자신들의 처지가 부끄러워 세상으로부터 숨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지메로 상처받고 소외된 여학생 사키를 보듬기까지 하지요. 절망과 박탈감에서 자유로운 네 아이들은 쉽게 받아 들여지지 않는 상황이지만 굳이 그것때문에 성장을 멈추거나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아이들의 머리카락이 쉼없이 자라고, 키가 자라고, 표정에서 언뜻언뜻 나이보다 웃자란 세상에 대한 이해심이 배어 나올 때, 관객은 아이들에 대한 먹먹함이나 미안함보다는 비극과 접붙은 성장에의 본능이 아무것도 남지 않은 순간까지도 살아 있는 생(生)의 동력임을 경험하게 됩니다. 특히, 자신의 생일에 엄마가 돌아 올 거라고 철썩같이 믿고 기차역에 나가 엄마를 기다리겠다는 막내 유키의 첫번째 외출장면이 그렇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아파트를 빠져 나가야 하지만 막내 유키가 고른 신발은 이제는 좀 작아지고 추워 보이는, 걸을 때마다 뽁뽁 소리나는 슬리퍼지요. 사람이 꽉 찬 저녁 거리에서 오빠 손을 잡고 야무지게 간판에 쓰인 글씨를 읽으며 지나가는 유키의 발걸음에 맞춘 슬리퍼 소리는, 나름의 비극에 눈 먼 이 세상이 애써 보지 않으려고 해도 난 이렇게 살아 있다라고 외치는 아이를 위한 행진곡처럼 느껴지기도 하네요. 오지 않을 엄마를 한참 기다리다가 텅빈 거리를 통과해 집으로 돌아오는 유키의 슬리퍼는 이 서글픈 장면에 관습적인 눈물 대신 리듬을 불어 넣습니다.  


    히로카즈 감독은 일년의 긴 촬영기간 동안 비전문 배우들인 아이들과 지내면서 비극과 함께 성장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섬세하게 관찰하고 예리하게 잡아 냅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이미 성장을 멈춘 누군가의 시선으로 아이들을 해석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잊혀지고 버려진 아이들의 눈물보다는, 아무데서나 터져 나올 준비가 된 아이들의 높은 웃음소리와, 잡초씨를 받아다가 다먹은 컵라면 그릇에 심고 자신들이 마실 물을 나누어 주면서 기어이 싹을 틔우는 아이들이 표현하는 살아 성장하는 모든 것에 대한 동질감, 그리고 극도로 곤궁한 중에도 누구하나 적으로 몰지 않고 함께 살아 가는 법을 터득하는 아이들의 천진함을 관객이 보아주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물론, 영화의 후반부는 가혹한 현실을 무시하고 세상을 동화로 포장하는데 급급한 성장영화의 뻔한 결론을 버리고, 아이들의 눈높이에서도 너무나 분명하게 감지되는 비극의 깊이와 그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유키의 뜻하지 않은 죽음으로 묘사합니다. 도대체 어디에 어떻게 어떤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지 마음을 정하기 어려울 만큼 세상의 도움을 받아 본적 없는 아이들은 막내 유키의 주검을, 아파트에 이사온 그 날 엄마가 그랬듯이, 여행가방에 넣고 유키의 마지막 외출을 준비합니다. 이 지긋지긋한 반년을 보내면서도 아이가 끊임없이 자랐던 듯, 유키의 시신은 이사 올 때 들어갔던 작은 여행가방에 더이상 맞지 않습니다. 더 큰 여행가방에 유키와 유키가 좋아하던 초코과자를 잔뜩 넣은 채로 길을 나서는 아키라와 사키는, 큰소리로 한번 울지도 않고 동생을 묻고 나란히 돌아오죠. 텅빈 기차 안에서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며 망연히 앉은 두 아이들의 모습은 그간의 성장, 성장과 함께 깊어진 고통, 그리고 고통과 함께 전진하는 생의 운동력을 조용히 관찰하게 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동경 하늘에 원을 그리는 모노레일 트랙을 닮은 이 성장과 비극의 순환고리 안에서 여전히 악착같이 자라는 아이들을 대견한 듯 바라보며 끝을 맺습니다. 관객의 눈을 파고들며 작렬하는 여름 한낮의 태양빛을 온몸으로 견디며 함께 걸어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에서 카메라의 시선을 차마 거두지 못하겠다는 듯이 말이죠. 숙명처럼 성장에의 요구와 고통의 늪 사이에 놓인 인간 안에서 작은 기적을 발견하려는 감독의 인내심에 박수를 보냅니다. 


 

* 필자소개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 강사 및 정신분석가. 동 대학의 미디어 영화학과에서 각색영화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아시안학과에서 한국 영화와 텔레비젼 드라마에 관한 강의를 맡고 있다. 호주 정신분석학회의 정신분석가 과정을 수료하고, 국제 라캉 포럼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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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Irene
    2016.11.09 18:28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편집장님, 지난글의 마지막 문단이 이번 리뷰 끝자리에 아직 붙어 있네요...
  2. 2016.11.20 23:19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수정했습니다. 이희승 선생님 죄송합니다.

아직도 삶이, 예술이 그리고 영화가 유의한가요?  

키아로스타미의 <체리향기>




이희승*



  제가 일하고 있는 대학에서도 구조조정이 한참입니다. 인적 자원의 효율적 관리와 무한경쟁에서 살아 남기 위한 생존전략을 마련해 내놓으라고 연일 격려와 독촉의 이메일들이 날아 듭니다. 소위 실용학문을 하는 타 단과대학도 머리를 싸매게 하는 이 상황은 르네상스의 미학을 연구하고, 세익스피어 시대를 읽고, 고대 중국 역사와 문화를 가르치는데 평생을 바쳐 오신 인문학 교수님들에게는 참 난감하기 그지없는 요구네요. 특히, 대학 경영진이 보낸 이메일에 이런 쓸모없는 ‘Hobby course (취미 과목)’ 들을 정리해 내라는 모욕적인 표현이 부끄러움 없이 등장하기 시작하자, 인문학부에서 이제 막 커리어를 시작하려는 새내기 시간강사로써 분노와 함께 좌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 이 시대가 요구하는 인간의 삶이란 자원과 시간을 효율적으로 자본으로 전환하기 위한 여정일까요?


  춘추전국시대를 능가하는 이런 난세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지난달 안타깝게 유명을 달리한 이란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들이 꼭 필요한 것 같습니다. 돈과 유명세를 얻기 위해서, 무슨 사상과 주장을 펼치기 위해서, 어떤 정보와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서 등등의 실용적인 이유에 기대지 않고도, 영화를 만들고 보는 것만으로도 생면부지의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그런 영화들을 말입니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빛나는 카메라는 소박하지만 천박하지 않게, 어눌하지만 가식적이지 않게 사는 사람들을 서로 만나게 하는 묘한 재주가 있습니다. 실수로 집에 가져온 친구의 공책을 돌려 주려고 낯선 이웃마을을 헤메는 어린 소년의 오후를 그린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1987)>의 마지막 컷에 수줍게 모습을 드러내는 말린 들꽃 책갈피, <올리브 나무 사이로 (1994)>의 엔딩에서 언덕 아래로 소멸하는 하얀 점 두개로 변한 젊은 연인들 사이의 대화를 대신하던 올리브 나무 사이를 지나는 잔잔한 바람소리 등은, 영화 보기를 밥먹듯 해야하는 저같은 사람에게조차도 신산한 마음과 고단한 삶을 든든히 지탱해 주는 기둥같은 순간들입니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1997년 수작 <체리향기>는 특히나 그렇습니다. 삼십년 넘게 불패의 경제 성장을 이루던 대한민국이 IMF라는 경제 위기에 직면해 휘청거리던 그 때, 요동치는 환율로 영국유학을 접고 서울에 돌아와 있던 저에게 세상 저편에서 기적같이 도착한 편지 한 통처럼 다가왔던 영화지요. 1998년 대한민국 자살율이 그 전 해보다 40%이상 급증했던 그 암울한 시절, 도대체 무슨 이유로 저 먼 땅 이란에서 그런 영화를 만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영화는 상큼하게 입맛을 돋우는 그 제목과는 달리, 당시 대한민국에 느닷없이 드리운 죽음의 향기를 진하게 풍기며 시작합니다. 밑도끝도 없이 인생을 결말짓고 싶은 중년의 남자가 자신이 스스로 판 무덤에 누워 수면제를 먹고 죽음을 맞이한 아침, 시체가 되어 누워 있을 자신을 위해 흙 몇 삽을 뿌려 덮어 줄 누군가를 찾아 헤메는 이야기이니까요.    


    1990년에 국토를 강타한 어마어마한 대지진의 폐허에서 회복 중인 이란의 근교는 보기에도 처참하리 만큼 황량하고, 민망하게 헐벗은 신작로와 벌거숭이 언덕을 분주하게 누비며 주인공 남자는 자신의 무덤에 흙 덮어 줄 누군가를 찾아 헤맵니다. 돈은 좀 있는 듯 보이는 미스터 버디는 길에서 마주친 선량하지만 경제적으로 곤궁한 사람들에게 거부하기 어려운 큰 돈을 제안합니다. 하나같이 순박한 이들은 주인공이 제시하는 큰 돈도 마다하고 이 남자를 절망과 죽음에서 구해 내려고 애를 쓰지요. 미스터 버디와 일련의 인물들은 삶과 죽음에 대해, 그리고 삶의 유의함에 대해 나름 진지한 대화를 이어갑니다. 시멘트와 모래가 풀풀 날리는 건설현장의 주변에서 근근히 삶을 이어가는 주변인들은 어찌보면 배부른 투정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주인공을 진심으로 걱정해 줍니다. 허나, 죽음의 논리를 오랫동안 준비해온 이 남자를 설득하기는 역부족입니다. 무슨 연유인지 완전히 증발해 버린 삶의 향기로 인해 죽음에 가까이 닿은 미스터 버디를 진심으로 이해하기에는, 그의 죽음을 향한 행진에 잠시 동행하는 이들은 모두 비루하지만 그래도 사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삶을 긍정하는 사람좋은 이웃들이지요. 신기하게도 영화가 중반부를 넘어 가면서 관객들은 모두 저마다 삶의 시름이나 걱정을 내려 놓고 이 남자가 죽지 않기를, 이 남자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돌려 놓을 입심좋은 누군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게 되죠. 혹은 누군가 나타나 관객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도 자리잡고 있는 이 끈질긴 죽음에의 유혹을 이겨 주기를 바라는 마음인 것도 같습니다.  


    그때, 혜성처럼 –이라고 하기엔 행색이 너무 초라한 – 장년의 박제사가 주인공의 차에 동승합니다. 자기 이야기를 다 듣고도 꼭 죽어야 겠다면 그때가서 흙 덮는 일을 해주리라 약속하고는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죠. 엄청나게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설득을 기대했다면 다분히 실망스러울 수 있는 그저 그런 보통 사람의 삶인데, 유독 한 장면이 이 간절히 죽고 싶은 남자의 마음을 흔들게 됩니다. 노인의 젊은 시절, 좌절감에 목을 매 죽으려고 올라간 뽕나무에서 해돋이를 망연히 쳐다 보며 따먹은 뽕나무 열매 맛을 잊을 수 없다는 이야기이지요. 더욱 재미있는 것은 노인이 목을 맬 밭줄을 묶으려고 올라간 뽕나무 위에 앉아, 나무 밑을 지나서 학교로 향하던 아이들에게 나뭇가지를 흔들어 뽕나무 열매를 떨궈주고는 자신도 그 맛난 열매를 한줌 집어서 집에서 세상 모르고 자고 있던 아내에게 가져다 주었다는 대목입니다. 자신이 회복한 삶의 향기를 혼자만 음미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나눔으로써 진정 죽음을 극복할 수 있었다는 노인의 진실한 체험이 과거의 이야기에서 현재의 장면으로 자연스레 넘어 오면서, 죽지 못해 안달이 난 이 중년의 남자에게도 ‘삶 아니면 죽음’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초월하는 새로운 삶의 지경을 은근히 보여 주는 것만 같습니다.  


  노인은 이야기 중간중간 길 안내를 하며, 나무에 물이 오르기 시작하고 연한 색깔의 잎사귀와 꽃들이 비치기 시작한 언덕 저편으로 차를 몰게 합니다. 천하 절경은 아니지만, 심오한 지혜의 한마디는 아니지만 어쩐지 이렇게 그냥 죽기는 좀 억울한 기분이 들게 하는 이 영화의 후반부 장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야만 하는 낮은 곳에서나 가능한 그런 힘을 가진 듯 합니다. 미스터 버디는 끝내 죽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지만, 자신의 무덤을 봉해 달라는 다짐을 받아내고 헤어져 돌아 가는 길에 다시 노인이 일하는 박물관으로 미친 듯이 달려 갑니다. 그리고는 노인에게 아침에 무덤가에 와서 자신을 세번 정도 아주 세게 흔들어 깨워서 그냥 잠이 든 것이 아닌지 확인을 해 보고, 그래도 죽은 것 같으면 흙을 덮어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지요. 이유를 딱히 설명할 수 없지만, 제 마음에 오래도록 남는 장면입니다. ‘그래, 딱 저만큼만 삶에 대한 희망이 있어도 살 수 있어!’ 라는 깨달음에 맥이 탁 풀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입안을 가득 채우는 물기 많은 체리를 꼭 내 입에다 넣고 씹지 않더라도, 피처럼 붉은 체리가 풍기는 그 흐드러진 향기를 생각하기만 해도 우리는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참 겸손한 생각을 나누는 이런 영화가 있기 때문에, 예술과 사상이 인류에게 ‘취미’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확신을 다잡아 봅니다. 


* 필자소개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 강사 및 정신분석가. 동 대학의 미디어 영화학과에서 각색영화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아시안학과에서 한국 영화와 텔레비젼 드라마에 관한 강의를 맡고 있다. 호주 정신분석학회의 정신분석가 과정을 수료하고, 국제 라캉 포럼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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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 로치의 '랜드 앤 프리덤'




이희승*



  학회 참석 차, 런던을 다녀 온 지 일주일만에 영국에서 들려 온 끔찍한 소식에 치를 떨어야 했습니다. 바로, 노동당의 젊은 여성 국회의원인 조 콕스가 백주 대로에서 한 극우주의자, 혹은 극우 성향을 가진 정신병자의 손에 무참히 살해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지요. 일명 브렉시트라고 일컬어지는 영국의 EU 탈퇴의 찬반을 놓고 벌인 뜨거운 논쟁과 과열된 정치적 대립이 이렇듯 비극적이고 폭력적인 민낯을 드러내고, 사회운동에서 의회로 선한 영향력을 막 넓혀 가던 젊은 여성 정치인의 생을 상상하기도 싫을 만큼 잔혹하게 끝장내었습니다. 유월 초였지만 아직 매서운 기운이 남아 있던 거리에서 노숙을 하던 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 사이를 활기차게 지나던 또 다른 무리의 사람들이 어우러져, 거대하고 불균질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런던 거리의 잔상이 아직 가시기도 전에 접한 조 콕스의 피살 뉴스는 휴머니티, 공동체 그리고 이 모두를 집어 삼키는 신자유주의의 경제 논리에 관한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영화를 읽고 정신을 분석하는 일을 직업삼은 이가 복잡한 경제 논리와 정치 공학으로 파악해야 하는 브렉시트 논쟁에 대해 코멘트를 한다는 것은 무리겠지만, 브렉시트를 둘러싸고 불거져 나온 대립항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오래된 영화 한편을 다시 꺼내 보기로 했습니다.


  여든의 나이로 올해 두번째 칸 영화제 대상을 수상한, 영원한 좌파 켄 로치 감독의 1995년도 작품 <랜드 앤 프리덤 (Land and Freedom)> 이 바로 오늘의 영화입니다. 칸 영화제 대상을 두번 수상한 감독은 열손가락으로 꼽는다니 켄 로치 감독의 기나긴 여정에 대한 칸의 존경과 애정을 엿볼 수 있는 수상이었습니다. 물론, 비평가들 사이에서는 별로 새롭지 않은 미니멀한 텔레비젼 영화 형식에다가 지난 40년간 지치지도 않고 표현해온 좌파적 세계관을 담은 <나, 다니엘 블레이크 (I, Daniel Blake 2016)>의 대상 수상을 놓고, 유럽의 문제를 다루는 영화들에게만 유독 편파적인 칸의 심사 기준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오기도 합니다만, 저는 이 영화가, 그리고 켄 로치 감독이 말하고자하는 휴머니즘을 핵심으로 한 좌파적 세계관이 유럽의 문제에만 국한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본이 아니라, 노동 – 그것이 어떤 종류의 노동이던간에 – 으로 생존을 감당해야 하는 모두를 향한 노감독의 변치 않는 애정은 단순히 정치색을 기준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힘과 진실’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지요. 세상 힘든 줄 모르고 천방지축이던 이십대 초반의 저에게 이런 확신을 준 영화가 바로 이름조차도 너무 정직한 <랜드 앤 프리덤>이었습니다. 영국 노동자 데이빗의 눈으로 목격한 스페인 내전의 기록인 <랜드 앤 프리덤>은 ‘나, 내 가족, 내 나라가 우선’이라는 이기적이고도 폭력적인 명제를 훌쩍 뛰어 넘는 타인들 사이의 이해와 연대를 처절하고도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영화는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데이빗의 고독하고 늙은 죽음으로 시작합니다. 사람이 두셋만 들어서도 비좁게 느껴지는 궁색한 아파트에서 쓰러진 채 발견된 데이빗은 병원으로 향하던 응급차 안에서 말없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남겨진 유품을 정리하던 이십대의 손녀는 거실 한 켠에 놓인 낡은 가방안에서 오래된 신문기사, 편지 뭉치, 사진들 그리고 빨간 머플러에 담긴 정체 모를 흙 한줌을 발견하지요. 그로부터 손녀는 관객을 이끌고 할아버지의 젊은 날을 향해 시간여행을 시작합니다.    


    1936년 프랑코 장군의 깃발 아래 모여든 파시스트와 왕정주의자들은, 국민 선거로 정당하게 선출된 국민의 대표인 공화주의자들을 무력으로 탄압하기 시작합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세계 각지의 공산당, 노동조합, 무정부주의 단체에서는 스페인 땅에서 흔들리고 있는 인간 존엄과 자유를 함께 지키기 위해 힘을 보태기로 하고, 영국 공산당 당원이자 실직한 노동자였던 데이빗도 리버풀에서 이 소식을 듣자마자 무작정 스페인으로 향합니다. 영화의 초반은 이 순진한 혁명주의자들이 인종, 국가,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치기와 우정으로 서로와 가까워지는 모습을 아기자기하게 그립니다. 혁명은 장밋빛이고 연대는 순조롭고 파시스트와의 전쟁은 귓가를 간지르는 총성으로만 느껴질 뿐이지요.  


  영화가 삼분의 일 지점을 지나는 순간, 세계 각지에서 몰려 든 젊은이들은 타인의 땅과 자유를 지키기 위한 자신들의 희생이 결코 추상적이고 낭만적인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누가 적이고 동지인지 알 수 없는 지옥같은 혼돈과 난장이 눈앞에 펼쳐지고, 조금전까지 담배를 나눠 피우던 친구가 죽음을 준비할 새도 없이 쓰러지는 첫 전투는 모두를 두려움과 비통함 그리고 혼란으로 몰아 넣습니다. 산도 물도 사람도 낯선 스페인의 어느 시골 마을을 파시스트의 손에서 해방시키고자 했던 젊은 혁명주의자들의 첫 승리는 이제 마을 사람들의 서로 다른 입장 속에서 지루한 논쟁으로 치환되고, 땅주인으로부터 토지를 부여받아 농사를 지어온 소작인들, 토지를 받지 못하고 부역만으로 살아 가던 농부들, 주인집에서 평생을 봉사하던 하인계급들은 모두 제각각 마을 지주의 재산을 어떻게 분배해야 하는지를 놓고 격렬한 토론을 벌입니다. 혁명군들 스스로도 이 문제를 보는 시각을 놓고 편이 갈라지기 시작하지요. 혁명의 정신을 다림줄 삼아 이 작은 소동은 잠시 소강 상태를 맞이하지만, 이 난장토론은 혁명군들의 마음에, 어쩌면 프랑코 군대와 벌이는 전투보다 더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역사적 사실과 맥락을 함께 합니다. 스탈린의 개입으로 혁명군은 반으로 나뉘어 서로에게 총을 겨누죠. 스탈린의 무기 원조와 병력 지원을 받아서 조직적으로 전쟁을 해야 한다는 스탈린주의자들과 혁명은 조직화되고 권력화되는 순간 내부에서부터 와해된다는 순수 혁명주의자들은 끝내 서로를 밀어내고 적이 되어버립니다. 타인의 삶과 나의 삶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다는 확신과 믿음을 바탕으로 이뤄낸 인간주체적인 연대는 전쟁에서의 승리라는 실질적인 욕망 앞에서 흔들리게 됩니다. 공산당원이자 혁명주의자였던 데이빗은 이 두 편을 모두 오가며 자신이 서야 할 곳이 어딘지를 찾습니다. 결국 목표를 위해 정신을 희생하는 스탈린주의자들의 잘 정렬된 진지를 빠져 나와, 경제논리보다는 사람의 노동과 애씀을, 정치권력보다는 사람사이의 연대를 중심에 둔 혁명주의자들의 초라하지만 따뜻한 병영으로 돌아 옵니다. 비극적인 이 영화의 말미, 두 진영의 반목으로 내 몸처럼 애틋한 동지들이 죽어 나가고 사랑하는 여인을 잃은 데이빗에게 스페인은 남의 땅, 그리고 스페인의 자유는 남의 자유가 되어 버린 듯합니다. 쓸쓸히 영국으로 돌아왔을 데이빗의 모습,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노동자로써 ‘번영과 발전’의 시대를 살아낸 데이빗의 삶을 영화는 과감히 생략합니다. 데이빗이 대지로 돌아 가는 마지막 장례식 장면에서 긴 세월동안 침묵해야 했던 할아버지 삶의 구심점을 이해한 손녀딸은, 젊은 날 데이빗이 연인 블랑카를 스페인 땅에 묻고 돌아서면서 그녀의 무덤에서 가져온 한 줌의 흙을 데이빗의 관 위에 뿌립니다. 그녀의 땅과 그의 땅, 그리고 그녀의 자유와 그의 자유는 한치도 다를게 없는 한몸, 한뿌리라는 켄 로치의 선언이겠지요. 늙은 동지의 무덤가에 선, 백발이 성성한 몇몇 노인들은 데이빗이 젊은 손녀의 손에 남겨 놓은 붉은 머플러를 보면서 주먹 쥔 손을 짧고 힘차게 들어 올립니다. 다시 볼때마다 새로운 출발을 요구하는 이 마지막 장면은, 1939년 끝나버린 스페인 내전에서 남겨진 ‘나와 타인’의 관계에 관한 질문이 데이빗의 삶을 통과해 1995년 영화 <랜드 앤 프리덤>의 피날레에서, 브렉시트로 분열된 2016년의 영국땅에서, 그리고 자유시장의 방패 뒤에 숨어 타인의 땅과 자유를 나의 소유로 귀속하려는 탐욕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서, 다시한번 진지하게 성찰되어지기는 바라는 켄 로치의 유산이 아닐까 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진리를 구현할 수 있는 네가지 영역으로 사랑, 예술, 정치, 과학을 꼽습니다. 영화 읽는 사람으로써 이런 영화를 볼때마다, 마음을 다해 나의 문제와 타인의 문제에 관한 최선의 답을 구하다 보면, 이 네가지 영역 모두를 아우르는 – 즉, 뚜렷한 정치적 관점을 견지하면서도 과학의 객관성과 집요함을 잃지 않으며 소박한 예술적 감흥을 통해 인간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애정을 소통하는 – 진리에 가까운 무언가가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네요. 영화적 형식이나 주제로 볼때 그다지 화려하거나 새롭지 않고, 주제를 아름답게 표현하려는 미학적인 의도나 계산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무뚝뚝한’ 영화지만 꼭 한번 다시 보시기를 마음을 다해 감히 권합니다. 



* 필자소개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 강사 및 정신분석가. 동 대학의 미디어 영화학과에서 각색영화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아시안학과에서 한국 영화와 텔레비젼 드라마에 관한 강의를 맡고 있다. 호주 정신분석학회의 정신분석가 과정을 수료하고, 국제 라캉 포럼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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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 반복하는 삶 속에서 길찾기, 

홍상수의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이희승*



  온 나라가 예상치 못했던 총선 결과로 미래에 대한 기대감에 들썩이고 사람들의 목소리와 얼굴에 전에 없던 총기가 반짝이는 지금 이 순간이 맞다라고 외치고픈 마음으로 홍상수 감독의 열일곱번째 영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2015)를 되돌려 보았습니다. 저처럼 대략 ‘중년’이라는 타이틀이 울컥 억울하지만 그래도 부정하기 어려운 독자분들이라면, 폭염에 숨이 막히던 여름날 종로 어딘가에 있는 텅빈 예술영화관 구석에 앉아서 홍상수 감독의 영화와 함께 어리둥절한 오후를 보낸 경험이 한번씩은 있지 않을까 짐작해 봅니다. 저 또한, 엉뚱한 제목에 이끌려 보게 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1996)로 시작해서, 절대로 소개팅한 그와 함께 보지 말았어야 했던 <강원도의 힘> (1998), <오! 수정> (2000) 그리고 <생활의 발견> (2002)을 지나 연애의 발견, 결혼의 발견, 육아의 발견 등등을 거치면서 어느새 홍감독님 영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혼자 보나 여럿이 함께 보나 매한가지로 손발이 오글거리는 취중진담에 중독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홍상수 감독은 한국 영화계에 전무후무한, 참으로 독특한 존재입니다. 문민 정부 시절, 컨텐츠 산업에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보았던 김영삼 대통령의 소나기 투자로 영화산업이 몸집 불리기에 정신줄을 놓고 있던 그 때에 혜성처럼 나타난 홍상수 감독은, 영화만들기에 있어서 자본이 반드시 필요충분 조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증명해 보이며 배신, 타협, 투항, 혹은 변절없이 이십년을 한결같이 외부 투자에 큰 의존없이 영화 제작과 배급의 길을 가고 있는 흔치 않은 영화작가입니다. 물론 홍상수의 영화는 반자본주의적 제작구조 말고도 영화의 형식과 주제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를 배반하는 듯하나 결국에는 보완하고 완성짓는 영화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귀한 텍스트이지요. <투캅스>와 <결혼이야기>로는 성에 차지 않고 <라이언 킹>이나 <보디가드>는 어쩐지 인공감미료 향이 강하다고 느끼지만 아직 <원초적 본능>에 충실하기에는 조금 어렸던 90년대부터 홍상수 감독의 ‘기름기 쪽 빠진’ 영화들을 보면서, 정치적 안정과 경제 성장이라는 술에 취해 체면을 잊고 화장기를 벗어 던진 동시대의 자화상이 커다란 스크린을 가득 메우는 그 민망한 ‘지금’을 견뎌야만, 관습적인 거짓과 모순에서 아주 조금 더 자유로운 내일이 올 수 있다는 진리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 저만의 경험은 아닐 듯 하네요. 숙취로 무거워진 머리를 들어 이미 중천에 떠있는 해를 원망스레 올려다 보고는 주섬주섬 낯선 여관방을 나서는 그 한심한 순간에도, 인생은 바로 지금 문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진실을 받아 들이려고 애쓰는 홍상수의 인물들이 낯설지 않은 그 데자뷰의 경험 말입니다.  



  영화는 정확히 두 개의 이야기로 나누어 집니다. 하지만 마치 쌍둥이처럼 닮아 있는 이 두 개의 이야기는 둘 사이의 닮음과 반복을 인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은 채 헐렁하게 이어져 있습니다. 기승전결의 구조로는 도무지 연결할 수 없는 두 개의 이야기는 영화의 제목인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와 마찬가지로, 두 개의 댓구 – 즉, 지금과 그때, 그리고 맞다와 틀리다 – 를 살짝 헝클어서 늘어 놓은 듯합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영화 감독인 주인공이 특강 날짜를 착각하고 수원에 하루 일찍 내려와서는 낯선 도시에서 목적없이 하루를 메꿔 가는 과정을 따라갑니다. 수원 여기저기를 돌던 함춘수는 화가 윤희정을 우연히 만나게 되고 살짝 허세가 있는 듯도 하고, 그 허세가 외로움 때문인 것도 같은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름이 알려진 영화감독이 보이는 관심이 싫지 않은 윤희정은 다소 앙큼하게 속내를 숨기며 함춘수의 할 일 없는 하루 보내기에 동참 하기로 합니다. 윤희정의 작업실 방문, 그리고 이어진 둘만의 술자리, 마지막으로 윤희정의 지인들과의 파티로 자리를 바꿔 가며 희정을 쫓던 함춘수는 끝내 순진하지만 또 응큼하기도 한 연애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희정과 헤어지죠. 실망과 불만족으로 마음이 답답해진 함춘수는 다음날 특강에서도 만족할 만한 모습을 보이지 못한 채 서울로 돌아 가게 됩니다.    


    첫번째 이야기는 이렇게 뒷맛이 개운치 못한 마무리로 끝을 맺고, 영화는 곧장 두번째 이야기로 향합니다. 같은 인물과 설정으로 시작한 두번째 이야기는 ‘어, 왜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지?’ 라며 의아해 하는 관객들에게 시치미를 뚝 떼고 같은 장면들을 꼼꼼히 복기해 나갑니다. 겨울 햇살이 와닿는 복내당 툇마루에서 살포시 잠을 청하던 함춘수는 1부와 똑같이 비닐 봉지에서 부스럭거리며 바나나 우유를 꺼내 마시는 윤희정을 발견하고 호감을 느낍니다. 함께 커피 한잔 하자며 예민해서 커피를 못 마시는 윤희정을 데리고 카페로 들어온 함춘수는 어쩐지 첫번째 이야기의 함춘수보다는 살짝 더 편안해지고 솔직한 태도로 윤희정에 대한 호감과 궁금증을 표현합니다. 결코 1부에서 겪은 함춘수의 실패가 이야기의 틀 밖으로 튀어나와 2부의 주인공인 그에게 교훈이 되지 못하는 단절된 반복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관객은 왠지 모를 이 바람직한 변화에 마음이 흡족해지는 것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2부의 윤희정 또한, 1부에서는 허세로 무장했던 외로움과 혼란을 솔직히 털어 놓습니다. 1부에서는 몹시 수동적이고 관습적이던 윤희정의 태도는 변하고, 두번째 이야기에서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더 사랑스러워진 듯합니다. 윤희정이 입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자신의 순간적인 감정과 함춘수에 대한 관심에 충실하면서, 영화는 둘의 관계가 1부의 함춘수가 그토록 소망하던 결실을 맺을지도 모른다는 희망과 기대를 감추지 않습니다. 하지만 눈에 띄지 않게 아주 조금 더 성숙해진 듯한 두 주인공들은 순간의 감정에 솔직함으로 현실의 벽을 망각하는 우를 범하지 않습니다. 유부남인 함춘수는 자신을 향해 흔쾌히 무장해제한 윤희정을 지금 이순간 열렬히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그녀를 향한 애정을 환각제 삼아 하룻밤을 함께 보내는 것에 더이상 연연하지도 않습니다. 애틋한 밤을 아쉬움으로 넘기고, 둘은 다음날 함춘수의 영화를 상영하는 공간에서 다시 마주합니다. 예측하지 못한 작은 변화들이 만들어 낸 새로운 함춘수와 윤희정은 마치 오랜 친구 혹은 오랜 연인처럼 각자의 공허함, 외로움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향한 흥분을 이해하고 보듬어 줍니다. 이렇게 두번째 이야기는 홍상수 감독이 시나리오에 써 넣지도 않았던 흰 눈을 소복하게 맞으며 흐뭇한 결말을 맺습니다.  


  하루를 살고 보면 그 하루가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생각에 허탈한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런 순간에는 내일이 그렇게 반갑게 느껴지지 않기도 합니다. 지리멸렬한 어제를 안타깝게 돌아보며 반드시, 그리고 완벽하게 달라져 있어야 할 내일을 끊임없이 갈구하는 우리는 지지부진한 ‘지금’을 긍정하기 어렵습니다. 현재를 살지 못하는 우리의 갈급함을 채우려는 듯, 수많은 영화들이 과거를 아름답게 기억하고 미래를 화사하게 색칠하며 ‘앞으로, 앞으로!’를 외칩니다. 그러던 어느날, 당혹함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민망한 ‘지금’을 견뎌낸 이십년 전의 ‘나’와는 좀 달라져 버린 듯한 자신을 발견합니다. 눈빛이 형형한 젊은 유학파 감독 홍상수가 잘못 흘러가는 영화판을 향해 호통을 치고 세상을 다 바꿀 듯한 기세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세상에 내놓았던 ‘그때’를 거쳐, 시네마 파라디조를 홀로 지키는 고독한 장수같던 ‘한때’를 지나고, 이제는 백발이 성성하고 목소리도 한결 나긋한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희망, 혼란, 실망 그리고 체념이 뒤섞인 스무해를 보낸 탓인가 봅니다. 쨍쨍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컷’을 외치던 그때나, 자신의 이름 앞에 열일곱개의 영화 타이틀을 무심히 쌓아 놓은 지금이나, 또 앞으로 올 그 어느때나, 한결같이 안경을 앞이마에 척 걸쳐 놓고 뚫어져라 보는 모니터와 듬성듬성 자리가 찬 영화관에서, 자신과 관객이 마음을 다해 ‘지금’을 살기 원하는 홍상수 감독이 넌지시 읊조리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엉성하지만 기품이 있고 다소곳하지만 힘이 있습니다. 선거가 끝나고 세상이 바뀐다면, 그리고 그 바뀐 세상이 이전의 세상보다 극적으로 나아진 세상일 수만 있다면 우리에게 이런 영화가 무슨 소용일까요? 분명히 달라질 줄 알았지만 똑같고, 혹시 나아지나 싶었지만 역시 그대로인 ‘그때’를 만날지라도 당장의 최선을 다해 ‘지금’을 살아 낸다면, 이 영화가 두 개의 반복적인 이야기 사이로 내비치는 은근한 변화들로 인해 우리는 아주 천천히 앞으로 나아 갈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 필자소개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 강사 및 정신분석가. 동 대학의 미디어 영화학과에서 각색영화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아시안학과에서 한국 영화와 텔레비젼 드라마에 관한 강의를 맡고 있다. 호주 정신분석학회의 정신분석가 과정을 수료하고, 국제 라캉 포럼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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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 앞에 선 사랑, 미하엘 하네케의 아무르(Amour, 2012)




이희승*



  영화 보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다음부터 종종 어떤 영화를 좋아하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물어보는 사람들의 시선 너머로 제 영화 취향을 통해 저라는 사람, 즉 제 소양과 인성, 그리고 세계관을 짐작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을 봅니다. 새로 만난 연인들 사이에 ‘무슨 영화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이 빠지지 않는 것 또한 서로에 대해 궁금한 점들을 상대방의 문화적 취향을 통해 알아보려는 의도가 다분하지요. 하물며 영화를 보는 취향으로도 그 사람의 됨됨이를 측량하는데, 영화를 만드는 취향이야말로 영화 만드는 이의 혼을 송두리째 보여주는 거울이 아닐까 합니다. 제가 애정과 존경, 그리고 경외심을 가지고 신작을 가급적 챙겨 보는 감독들 중 하나가 오스트리아 태생의 미하엘 하네케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감독”이라는 별칭이 있는 하네케 감독은, 처음 본 지가 거의 이십년이 지난 지금도 그 제목을 떠올리면 등줄기가 오싹해 오는 ‘퍼니게임’(Funny Game, 1997)으로 기억되는, 잔혹할만치 냉철하게 사회와 인간의 본성을 카메라 앞에서 낱낱이 노출시켜 온 영화작가입니다. 그래서인지 2012년 유수의 국제영화제를 떠들썩하게 만든 하네케 감독의 신작 제목이 ‘아무르’ (Amour, 사랑)라는 소식을 접하고는 살짝 제 귀를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칠순을 넘겨도 사람이 쉽게 변하는 법은 없건만, 갑자기 왠 ‘사랑’ 영화를 만드셨을까?


  물론, 사랑만큼 예술가의 마음을 사로잡는 난해한 주제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 마음을 들여다 보는 일을 업으로 하는 정신분석가들 또한 이 ‘사랑’을 놓고 각자의 이론이 분분합니다. 프로이트는 ‘애도와 멜랑콜리아’에서 자아의 죽음을 경험하는 가장 흔한 예로써 사랑에 빠진 상태를 설명합니다. 사랑 앞에서는 서슬이 퍼런 자존심과 자의식도 무장해제를 당하고 만다는 낭만적인 해석일 수도 있겠지만, 마취를 당한 듯이 자아가 무방비 상태에 노출되는 심각한 위험을 두고 한 말이기도 하겠지요.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사랑이란 자기가 갖고 있지도 않은 무언가를 그것을 원하지도 않는 상대에게 주는 것’이라고 기술합니다. 다시 말해, 두 사람이 서로에게서 자기 자신의 존재의 핵인 근원적인 결핍을 발견하고 그 공백을 서투르게 공유하는 관계가 사랑인 셈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사랑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완벽한 불완전함’을 상징하는 메타포라는 라캉의 정의를 읽을 때마다, 내 것도 아닌 것을 손에 쥐고는 ‘자, 이게 바로 네가 원하는 거야’라며 원하지도 않는 선물을 상대에게 들이미는 천진난만한 연인들이 가면으로 얼굴을 감추는 것도 모자라서 두 눈을 가리는 안대까지 쓰고서 사랑을 찾겠다고 한바탕 소동을 벌이는 세익스피어 풍의 코메디가 떠오릅니다. 연인 사이의 사랑 뿐만 아니라, 사랑이라는 메타포로 맺어진 모든 관계에서 우리는 라캉이 암시한 막막한 무지와 몰이해, 안타까운 오해와 그로 인한 불행한 폭력, 이 모든 위험에도 불구하고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절박함과 그 절박함이 빚어낸 사랑에 관한 아름다운 환상 혹은 허상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조르주와 안느는 누구나 그렇듯, 다소 달뜨고 어설픈 연인으로 만나, 이제는 서로의 불완전함을 평화롭게 협주하는 지경에 이른 노부부입니다. 파리 한복판에 있는 고풍스런 아파트에서 우아한 노년을 보내고 있는 이 음악가 부부에게 죽음은 무자비하게 현관문 자물쇠를 비틀고 침입한 도둑처럼, 어느날 불쑥 모습을 드러냅니다. 매무새가 단정하고 고상한 취향과 애교있는 위트를 갖춘 아내 안느에게 느닷없이 찾아온 뇌경색으로 노부부가 공유하던 고즈넉한 세계는 빠르게 관 속처럼 어두워지기 시작합니다. 처음으로 조르주가 넋이 나간 아내를 발견하고 ‘왜 그래?’라고 물으며 황급히 안느의 촛점 잃은 시선속에서 평생을 함께한 명민한 아내를 되찾으려 애쓰는 장면에서 하네케 감독은 마치 렘브란트의 그림처럼 어둠의 세밀한 깊이를 표현합니다. 빛의 화가라는 렘브란트의 그림들이 그 애칭이 무색하게 하나같이 어둠을 담은 것처럼, ‘사랑’이라는 촌스러우리만치 정직한 제목을 단 이 영화는 이야기의 시작부터 사랑에 관한 센티멘탈리즘 따위는 깨끗하게 걷어내 버리고,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애초부터 놓여 있던 플라톤의 동굴처럼 어두운 ‘공백’을 카메라 앞에 꺼내 놓습니다. 뺨이 붉고 머리채가 빛나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찬란한 사랑의 대단원에서 안타까운 젊은 죽음이 비극의 화룡정점을 찍는 것이 우리가 꿈꾸는 사랑과 죽음의 교향곡이라면, 칠순을 넘긴 완벽주의자 하네케 감독이 제시하는 사랑의 해부도인 이 영화는 무표정한 안느의 텅빈 동공을 통해 사랑은 애초부터 누구나 생의 가운데 숙명처럼 품고 살아가는 불가지 혹은 죽음의 부분집합에 지나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 같습니다.    


    굼뜨고 노쇠한 몸을 이끌고 조르주는 산 채로 죽음을 맞이하는 아내를 묵묵히 돌보기 시작합니다. 손 끝에서 섬세한 음악을 빚어 내던 피아니스트 안느가 가장 기본적인 신체 활동도 하지 못하고, ‘엄마’와 ‘아파’이외에는 자신을 표현할 언어조차 모두 잃어 버리게 되자, 조르주는 사랑하는 아내 안느의 이미지가 죽음으로 잔인하게 치환되는 과정을 손놓고 지켜 보는 고통을 마주합니다. 이제 말을 잃은 안느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것이 삶인지 죽음인지, 조르주는 가늠할 수가 없게 됩니다. 아내의 남은 생을 사려깊게 마감해 주고 싶지만, 이제 안느의 죽음이 더이상 선택이 아닌 것처럼 자신의 죽음 역시 정해진 운명임을 깨닫기 시작하지요. 그 어떤 절망보다도 조르주를 힘들게 하는 것은 이 불가지한 죽음에 관한 해석이 온전히 자신의 책임으로 남겨 졌다는 사실입니다. 영화는 죽음에 갇힌 안느의 절망과 두 죽음을 혼자 처리해야 하는 조르주의 막막함을 공간의 제한과 관계의 단절로 표현합니다. 즉, 부부가 음악회에 참석하는 첫 장면을 제외하고는 빛과 소리 그리고 사람의 온기가 사라진 부부의 적막한 아파트에서 하네케 감독은 단 한발짝도 내딛지 않습니다.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이 둘다 유사 죽음에서 깨어나지만, 입구가 영원히 봉인된 무덤에 갇혀 늙어 죽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보여 주고야 말겠다는 괴상한 결의를 품은 듯이 말이죠. 역시 사람은 잘 변하지 않나 봅니다. 하네케 감독의 ‘사랑’의 비둘기는 ‘퍼니게임’의 달걀과 골프채처럼 트라우마를 남기고 영화는 클라이맥스로 다가갑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에 투명하게 존재하던 공백이 죽음이라는 실체가 되어 다가왔음을 깨닫는 그 순간, 조르주는 죽어가는 안느가 아니라 안느의 죽음을 끌어 안는 쪽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 안에는 자신의 죽음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담담히 받아 들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두 사람이 함께 떠난 후, 중년의 딸 에바가 텅빈 아파트를 돌아 보다가 아버지 조르주의 의자, 그 고뇌의 자리에 털썩 주저 앉습니다. 삶과 죽음의 연쇄고리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는 법이니까요. 영화를 보고 온 밤, 음악회에서 돌아와 얼핏 죽음을 예감한 안느가 그랬듯이, 쉬 잠이 들지 못하고 침대에 앉아 잠든 남편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습니다. 죽음을 전제로 유한한 생을 함께 하기로 한 나의 동지가 안쓰러워 이불을 살며시 덮어 주었더니 5초도 되지 않아 무심히 젖혀 버리더군요. 십오년을 함께 살고도 이순간 그가 이불을 덮고 싶은지, 젖히고 싶은지 알 수가 없는 게 사랑의 명확한 한계라고 지적하는 하네케의 냉정한 ‘아무르’는 만인에게 공평한 죽음 앞에서 함께 허둥거릴 누군가를 찾는 일이, 그리고 그 누군가가 될지도 모르는 타인을 측은히 여기는 것이 한없이 중하다는 사실 또한 역설하고 있는 듯 합니다. 



* 필자소개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 강사 및 정신분석가. 동 대학의 미디어 영화학과에서 각색영화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아시안학과에서 한국 영화와 텔레비젼 드라마에 관한 강의를 맡고 있다. 호주 정신분석학회의 정신분석가 과정을 수료하고, 국제 라캉 포럼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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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와 내가 함께 걷는 '내일을 위한 시간, 투 데이즈 원 나잇'




이희승*



  2016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무심한 마음으로 보자면 다른 날과 하나 다를 것 없는, 시계 태엽처럼 조용히 세상 첫 날부터 같은 궤도를 돌며 땅 위에 생명을 나눠 준 태양이지만 그래도 그 묵묵한 걸음에 새 날의 희망을 기대해보고 싶은 것은 저 혼자만의 바람은 아닐 것이라 믿습니다. 청년 실업, 비정규직, 고용 불안, 그리고 정부가 앞장 선 노동 개혁 혹은 개악으로 소란스러웠던 201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벼랑 끝에 서서, 소리 낮춰 신음하고 있는 이웃들을 향해 새해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왠지 조심스럽게 느껴지네요.




  2014년에 개봉한 <내일을 위한 시간 (원제: Deux jours, une nuit)> 을 만든 벨기에 출신의 형제 감독인 장피에르 다르덴과 뤽 다르덴 역시 이와 비슷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신자유주의의 횡포로 강팍해져 가는 유럽 노동 현실의 맨얼굴을 다룬 이 영화는 마치 온갖 맛집의 향연같은 헐리우드 대작들과 볼거리가 화려한 국내 흥행작들 사이에서 오랜만에 맛보는 담백한 동치미 같다고 하겠습니다. 젊은 시절, 영화라는 매체에 입문하면서부터 직접 카메라를 둘러 매고 줄곧 공장지대, 파업현장 등을 돌며 다큐멘타리를 찍었던 다르덴 형제의 저력과 노장으로써의 성숙함이 어우러져 가식없이 깊은 맛을 내는 명작이라고 꼽고 싶네요. 주연을 맡은 마리옹 코티야르가 화장기 없는 얼굴로 영화 상영 시간인 95분 내내 목이 타들어 가는 여름 햇볕 아래 마른 먼지가 흩날리는 거리를 하염없이 걷고 또 걷는 동안, 다르덴 형제의 카메라는 그녀의 뒤를 묵묵히 따를 뿐입니다.  


  주인공인 산드라는 참으로 절박한 상황에 처합니다. 공장 노동자였던 그녀는 심한 우울증으로 휴직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얼마간의 휴식 후에 복직을 준비하던 산드라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습니다. 산드라가 없는 동안 그녀의 일을 나누어 맡았던 동료 열 여섯명에게 회사가 거절하기 힘든 제안을 했던 것이지요. 각자에게 매월 천 유로의 보너스를 지급하는 조건으로 산드라가 공장에서 해고 당하는 것에 찬성하도록 말입니다. 겨우 우울증의 그늘에서 벗어난 산드라는 이 절망적인 소식을 듣고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하지만, 그녀 또한 순순히 일자리를 포기할 만큼 여유로운 입장이 아니지요. 주말이 가기 전에 열 여섯명의 동료들을 찾아 다니며, 보너스를 포기하고 자신의 복직을 위해 재투표해 줄 것을 부탁하기로 결심합니다. 동료들의 넉넉치 않은 형편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산드라는 자신이 얼마나 무리한 부탁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대체 무슨 명분으로 천 유로라는 큰 돈을 포기해달라고 종용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한 산드라의 목소리는 미안함과 수치심으로 매순간 가늘게 떨리고, 한없이 작아진 존재감 앞에 산드라는 삶을 포기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하지요. 이렇게 산드라가 생의 가장 초라한 순간을 견디는 동안, 냉정하리 만큼 담담한 이 영화는 산드라와 독대하며 서로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야 하는 동료들을 악인으로 만들거나, 보너스를 포기하고라도 산드라의 손을 들어 주는 동료들을 의인으로 만드는 것에 주저합니다. 그저 조용히 산드라의 곁을 지키는 다르덴 형제의 시선은 양편의 노동자들이, 아픈 동료의 등에 칼을 꽂게 만든 회사의 소위 ‘효율적인’ 경영 시스템이 얼마나 비인간적인가를 서서히 깨닫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처럼 보입니다.    


    비록 고단한 일박 이일간의 수고는 해피엔딩을 맞지 못하지만, 산드라를 포함한 열 일곱명의 노동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자본주의적인 욕망을 미끼로 자신들을 모래알처럼 흩어 놓은 회사의 방침에 대한 분노를 함께 공유하는 신선한 연대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다르덴 형제는 죽은 듯 보이지만 단단히 버티고 선 늙은 나무의 밑둥같은 결말을 선사합니다. 모래 먼지가 흩날리는 공장지대의 신작로에 선 해고 노동자 산드라는 더이상 해고의 두려움에 떨지 않습니다. 작은 절망에도 쉬이 눈물을 떨구던 산드라가 이제 홀로 서서 망망한 허공을 응시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내일은 온다는 사실을 애써 기억해 내는 이 영화의 결론에, 그 무뚝뚝하고 뭉툭한 감동에 필자는 주착없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물론, 대학에서 비정규직 지식노동자 (시간 강사)로 근무하고 있는 필자의 기약없는 오늘과 희망없는 내일이, 쫓겨난 일터에서 남은 짐을 챙겨 나와 목적지 없이 황망히 길 위로 내몰린 산드라의 월요일 아침과 오버랩된 탓만은 아닐 것입니다. 고집스럽게 리얼리즘에 사명을 건 듯한 이 영화는 도무지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는 환상 위에 진한 화장을 덧입힌 듯한 가식적인 승리감에 충만한 해피엔딩을 거부하고, 비관적인 오늘을 꿋꿋이 함께 버티는 이웃들이 꿈꾸는 좀 덜 비관적인 ‘내일’을 위한 시간을 관객들의 가슴에 남겨 놓고 끝을 맺으려는 듯 합니다. 


  사실, 산업 사회의 도래와 함께 새롭게 재편된 자본주의 구조의 척박한 가장자리를 차지하게 된 노동자들의 현실을 직시하는 영화는 그리 흔치 않습니다. 20세기가 만들어낸 꿈의 공장이라는 영화 산업의 붐을 가져 온 니켈오디언 (5센트 극장)의 주요 관객이 바로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 든 노동자들이었는데도 말입니다. 미국이 대공황의 철퇴에 휘청거리던 1930년대 초, 무성영화의 거장 찰리 채플린이 그린 이 시대 노동자의 자화상 <모던 타임즈>는 초기 영화 산업이 가지고 있던 이러한 내재적인 모순을 여과없이 드러낸 바 있습니다. 하지만 대중문화가 근원적으로 품고 있는, 현실과 환상의 괴리라는 이 아이러니한 현상은 우리가 바라보는 ‘꿈’ 혹은 ‘환상’의 본질과 관련이 있습니다. 즉, 인간은 누구나 현재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욕망한다는 아주 상식적인 욕망의 원리와 더불어, 내가 욕망하는 것은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이라는 욕망의 근본적인 모순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면서도 이 모순을 이용해서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현대의 산업이 바로 영화 산업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우리는 눈 앞에 펼쳐진 거대한 스크린이 제공하는 이 가상의 공간에서 과연 무엇을 보고 싶은 것일까요? 이 물음에 얼른 대답할 수 없다고 해도, 아마 대부분의 관객들은 꿈의 공간이라고 불리는 스크린을 통해, 땀내가 후끈나는 어수선한 잠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나, 다니던 일터에서 해고를 당했다는 전화 한 통을 받는 공장 노동자 산드라의 단춧구멍만큼 작은 (그래도 그 집 사는데 빌린 대출을 갚으려면 한 삼십년은 더 걸릴 것 같은) 이층집 풍경을 들여다 보고 싶지는 않다는데 동의하실 것 같네요. 왜냐하면 이 후줄근한 산드라의 공간, 즉 다음 장면을 안 봐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내 손바닥 보듯 뻔히 알 수 있을 것 같은 산드라의 삶은 바로 우리가 살아 내고 있는 현실 그 자체이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관객으로 하여금 희망 혹은 꿈이라는 이름으로 더 나은 내일을 무턱대고 기대하게 하는 것이 예술가로써 과연 윤리적인 선택인가라는 질문에 끊임없이 답하고자 하는 다르덴 형제는 우리 이웃 산드라의 <내일을 위한 시간>을 통해, 새해 첫날 누구나 맘 속에 그려 보는 화사한 희망의 채도를 두어 단계쯤 낮춰야 비로소 볼 수 있는 현실을, 우리가 발딛은 초라한 세상을, 부조리와 결핍으로 고통받는 우리의 삶을, 영화라는 꿈의 공간에 오롯이 올려 놓습니다. 그리고 스크린 위에 불편하게 펼쳐지는 상처투성이의 자화상을 바라봄으로써, 이웃의 비루한 일상과 고민 그리고 갈등을 겹겹이 공유한 끝에야 얻어지는, 산드라와 그녀의 동료들이 어느 주말 오후에 느닷없이 경험한 그 단단한 연대를 욕망하게 합니다. 환상 혹은 신기루가 아닌,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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