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후마니타스(Homo-Humanitas)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인)

 


인문학 위기의 요체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유학 10년을 마치고 돌아온 고국은 놀라우리만큼 변해 있었다. 우선 표면적으로 정권이 바뀐 것이 가장 큰 낯섦이었다. 미국으로 갈 때는 노무현 정권이었는데 돌아와보니 이명박을 거쳐 박근혜 정권으로 이어지는 보수정권이 연거푸 집권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정권들 아래에서 한국은 신자유주의의 본고장인 미국보다 훨씬 더 철저하고 착실하게 신자유주의를 이행하는 신자유주의의 실험장 같았다. 구조조정이 상식이 되어버렸고, 계약직과 비정규직간의 물리적, 심리적 거리감은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었다. 갑/을 관계의 냉엄함과 잔혹함은 하늘을 찌른다. 연일 신문지상에서는 신자유주의가 선사하는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민중들의 비관 자살보도가 넘쳐나고, 20.30대들 사이에서는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3포세대가 등장했다. 그야말로 10년 만에 돌아온 조국은 디스토피아 그 자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특별하게 발견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한국사회를 휩쓰는 인문학 열풍이다.

   “무한경쟁”, “누구도 2등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마누라와 자식들 빼고는 다 바꿔라”... 이상은 신자유주의가 휘몰아치던 1990년대 광고카피들이었다. 무한경쟁에 승리하기 위해서, 기억되지 않는 2등을 면하기 위하여, 가정을 지키기 위해 한국인들은 열심히 일을 했다. 한국의 인문학 열풍을 체험하면서 나는 신자유주의가 지니는 파토스와 인문학 사이에 모종의 결탁이 이루어 진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다. 신자유주의적인 논리와 질서 속으로 인문학이 녹아들어 가면서 신자유주의화 된 인문학, 신자유주의를 위해 봉사하고 협력하는 인문학이 한국 땅에서 돌연변이로 탄생한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인문학이 신자유주의 이론을 축조하고 견고하게 하는데 일조했다는 말이 아니다. 인문학이 신자유주의 논리를 학습하고 내재화했다는 말이다. 실례로 현재 한국의 지식사회는 인문학이라는 말을 빼놓고는 논의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인문학의 위상이 막강하다. 각종 인문학 프로젝트들과 인문학 강좌들은 홍수를 이루고 있고, 서점을 둘러보면 온통 제목에 인문학字 붙은 책들이다. 10년 동안 국외자의 입장에 있다가 내부자의 시선으로 이런 현상들을 바라보면서 처음에는 흥미로왔다. 그간에 고양된 한국인들의 인문학을 대하는 자세가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슬슬 불편해지더니 요즘은 한국사회를 휩쓰는 인문학 열풍이 모욕적이고 심지어 수치스럽기까지 하다. 과연 어디서부터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일까.


스펙(Spec) 우선주의


   지금까지 살펴본 바, 현재 진행 중인 인문학열풍은 한국인들에게 잠재해 있는 두 가지 욕망과 모종의 연관이 있어 보인다. 하나는 스팩(Spec) 우선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힐링(Healing) 지상주의다. 『세상을 지배하는 0.1%의 인문고전 독서법』, 『동서양 천재들의 사색공부법』, 『서울대 인문학 글쓰기 강의』, 『CEO가 읽는 인문학』 같은 제목의 책들이 인문학 관련 서적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높은 순위에 등재되어 있는 것을 보면 한국의 인문학 풍토에서 스펙 우선주의가 차지하는 비중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부가가치가 높고 효율적인 스팩을 쌓은 사람을 신자유주의형 인간이라고 했을 때, 인문학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최적화된 인간을 양성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강철과도 같은 의지를 지닌 불패의 정신으로 무장된 주체를 이 시대로 다시 소환하자는 말은 아니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와 더불어 등장한 21세기형 주체는 너무나도 무력하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의 ‘액체근대’[각주:1]를 패러디하여 21세기 신자유주의형 인간을 ‘액체화된 주체’라고 명명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지난 시대 우리를 지배했던 이데올로기, 공동체, 대의, 국가, 체제 등과 같은 굳건했던 숭고함들은 전 지구적으로 몰아닥친 자본의 열풍에 녹아내려 흐물흐물해져 버렸다. 바우만의 ‘액체화된 근대’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신자유주의 이후 변화된 세상의 모습을 정확하게 묘사하였다.

    액체화된 시대 속에서 강철과도 같은 의지과 날카로운 이성으로 무장된 근대적 주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액체화된 시대 속에서 나를 지켜주는 것은 전과 같은 공동체 의식 혹은 투철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21세기로 접어들면서 삶의 무게는 오로지 개인의 몫이 되었고, 그것에 대한 결과 역시 오롯이 개인의 책임이다. 우주와 세상 앞에서 개인은 홀로 이 모든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 그런 개인인 내가 우주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런 개인인 내가 세상을 지배하는 0.1%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서울대에 들어가기 위해서, 잘 나가는 CEO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인문학이다.

    그래서일까 오늘의 인문학은 더 이상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체제의 구조적인 모순에 대해 묻지 않는다. 전체 안에 깃들어 있는 부조리의 문제를 한 개인의 지극히 사적인 문제로 치환시키거나, 젊은 시절 감내해야만 하는 통과의례적인 과정 혹은 개인의 자기계발의 문제로 전환시키면서, 시스템의 균열과 사회의 모순에 대해서는 눈을 감게 만든다. 대신에 아프니까 청춘이고,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하는 것이다, 라는 말로 우리를 우롱하고, 아직 2%가 부족하다, 열심히 살다보면 내일의 태양의 뜰테니 ... 그러니 열심히 뺑이쳐라. 그러면 대박 날지도 모른다, 라는 말로 희망을 고문한다. 이것이 오늘의 인문학이 우리들에게 제공하는 속삭임이고, 그러면서 인문학은 시장의 언어가 되었다.


힐링(Healing) 지상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신문을!”이라고 말하였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의 균형, 신앙과 이성 사이의 긴장, 믿음과 논리 사이의 간극을 강조한 말이라 하겠다. 바르트의 말을 빌어 한국의 인문학 열풍을 풍자하자면, 현재 한국인의 손에는 한 쪽에는 Spec, 다른 한 손에는 Healing 관련 서적이 쥐여져 있다. 아침 출근길에는 무한경쟁 사회에서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쟁취하고 다시 도전하고 마침내 승리한다는 내용의 책을 읽고, 저녁 퇴근길에는 상처받고 좌절당한 몸과 마음의 평안을 위해 힐링 관련 서적을 읽는다. 이것이 한국사회를 휩쓰는 인문학 풍속의 단상이라 한다면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

    앞서 언급했던 Spec 우선순위와 더불어 한국 사회를 휩쓰는 인문학 열풍을 담당하고 있는 또 하나의 축은 Healing 지상주의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류의 상처극복 시리즈, 분노와 화를 다스리는 방법을 둘러싼 내면 강화시리즈, 희망과 행복을 상상하고 꿈꾸게 하는 환타지 같은 성격의 책들이 대표적인 힐링 관련 서적들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한국인들은 Healing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일까?

   기본적으로 인간은 누군가로부터 위로 받고 싶어하고 인정받고 싶어한다. 하지만 한국의 힐링 열풍은 지나친 과잉이다. 어쩌다 우리사회가 힐링을 갈망하고 욕망하는 사회가 되었을까? 물론, 한국사회 전체가 병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해 아프고, 1등이 못되어서 좌절하고,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않아 아프고,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비정규직에서 실업자로 추락하는 바람에 우리는 아프다. 그래서 모든 감기 증상들을 단번에 달려버리는 종합 감기약처럼, 우리 역시 모든 슬픔을 모아 단번에 달려버리는 종합처방전이 필요하다. 그것이 힐링지상주의의 요체라 한다면 너무나 과문한 진단일까.

    연대하는 공동체, 굳건한 이데올로기가 녹아내려 액체로 화한 세계속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은 액체로 된 세상 속에서 홀로 외로이 유영하면서 자기경영에 매진해야 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가 우리에게 허락한 문법이고 그곳의 개인은 한번 몰락하면 재기 불가능하다. 존재 전체를 걸고 전력투구를 해야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인간은 항상 불안과 공황과 우울의 상황과 직면해 있다. 힐링은 대타자 신자유주의의 추하고 타락한 몰골을 개인적 차원으로 축소시키려는 체제의 전략이고, 또한 그것은 자본의 문제를 저격하지 않으면서 어떻게든 자본이 저지른 만행을 최대한 감추고 그것을 한 개인의 몫으로 전가시키려는 신자유주의가 고안한 간교한 계략이다.

    이것은 마치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교통사고로 인해 응급외상센터로 후송된 중환자에게 외상(外傷)은 크지 않아 네 마음이 그것을 아프다고 느끼는 것이 문제야, 라고 속삭이면서 몰핀을 계속 투여한다면 환자는 어떻게 될까. 여기서 교통사고를 신자유주의로, 환자를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민으로, 몰핀을 힐링담론으로 치환하면 정확한 우리의 현실이 된다. 힐링은 쌓이고 쌓인 자본의 문제를 개인 내면의 문제로 변질시키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술책이다. 힐링이 본래 지니고 있었던 숭고하고 따뜻했던 의도와는 별개로 신자유주의 시대 힐링 열풍의 이면에는 이러한 음모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인문학의 기원, 혹은 전통


   그렇다면 우리는 스팩과 힐링에 갇혀버린 인문학을 어떻게 구원할 수 있을까? 나는 그것에 대한 답을 르네상스시대에 부활한 인문정신을 복기하면서 찾고자 한다. 십자군 원정의 패배와 패스트의 창궐로 인해 중세유럽을 지배했던 교회의 권력은 서서히 막을 내리기 시작하였고, 그러는 가운데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에 대한 요청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르네상스다. 신과 교회의 권위가 무너진 자리에서 피어난 인간에 대한 관심과 인간성에 대한 재발견이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대두되면서 유럽은 중세를 벗어나 새로운 시대 근대를 향한 발돋움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발흥할 수 있었던 데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었다. 십자군 원정으로 인한 동서무역로가 확보되면서 지중해무역권이 형성되었고 그 통로에 위치했던 이탈리아의 도시들, 예를 들면 피렌체 베네치아 같은 도시들이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특히 동로마제국이 1453년 오스만투르크에게 멸망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을 이어받았던 동로마의 학자들이 대거 이탈리아로 유입되었고, 동서문화가 다시 한번 대융합하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이제는 더 이상 과거의 패러다임으로는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할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고대 그리스 고전에 대한 복기가 시작되었다.

    르네상스 휴머니스트들은 로마시대의 자유학문(liberal arts)을 복원하고 시대가 요구하는 필요를 수용하면서 새롭게 학문체계를 재구성하였다. 중세 대학은 고대 로마의 9 자유학문(문법, 수사학, 논리학, 대수학, 기하학, 천문학, 음악이론, 의학, 건축학)에서 의학과 건축을 제외한 7과목을 삼학(문법, 수사학, 논리학)과 사학(대수학, 기하학, 천문학, 음악)으로 구성하였다.[각주:2] 이러한 학문분류는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로 상징되는 이탈리아 휴머니스트들에 의해 studia humanitatis(인문학)라는 이름 아래 재편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기존의 논리학이 위축되었고 수사학은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그리고 역사학, 시학, 윤리학, 정치학 같은 학문들이 새롭게 부상하였으며 라틴어와 헬라어 원전에 대한 독해가 요구되어졌다.

    이 대목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겠다. 르네상스의 모토로 알려진 ‘고전으로의 복귀’가 미래를 향한 도전이라기 보다는 과거의 전통(경험)으로 돌아가다는 복고주의가 아닌가, 라는 의혹이 그것이다. 하지만, 르네상스 휴머니스트들의 생각은 그와는 정반대였다. 고대의 시간을 현재로 소환하여 타산지석으로 삼기 위해서, 신화적 이야기를 현재를 위한 창조적 상상의 원천으로 소급하기 위해서 르네상스는‘고전으로의 복귀’를 주장했던 것이다. 변화된 세계의 요구에 부응하는 새로운 상상력을 시대는 요청하였고,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자들은 그 변화의 동력을 고대 그리스로의 복귀를 통해 탐색하였던 셈이다.

    이는 인문학의 위기론 속에서 인문학의 갈 바를 몰라 방황하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선사한다. 인문학이 스팩과 힐링, 즉 현실정복과 현실도피의 도구로 전락한 한국사회에서 르네상스 휴머니스트들이 우리들에게 주는 충고는 인문학이란 상상력과 관계한다는 점이다. 현실에 대한 매몰과 현실에 대한 적응에 목적을 두는 인문학이 아니라, 현실과의 거리두기, 현실에 대한 낯설게 하기를 통해 현실에 대한 변혁을 꿈꿨던 사람들이 르네상스 시절 휴머니스트들이었고, 그들로 인해 유럽은 중세를 벗어나 근대로 진입할 수 있었다.


인문(人文), 인간의 무늬


    이 글은 스팩과 힐링 위주로 돌아가는 한국 인문학 풍속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시작되었다. 천문(天文)이 ‘하늘의 무늬’이고, 인문(人文)을 ‘인간의 무늬’라고 할 때[각주:3],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 그리고 배려를 기본으로 한다. 그런 점에서 개인의 스팩 강화와 자아의 상처 극복을 테마로 진행되고 있는 한국의 인문학 열풍은 동시대 한국민들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와 욕구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라는 점에서 인문학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에 마냥 호의적일 수는 없다.

    인문을 인간들이 이루는 무늬라고 했을 때, 인문학은 그 무늬를 연구하는 학문이 된다. 무늬를 제대로 보려면 거리를 두고 전체를 봐야 무늬가 나타내고자 하는 바를 비로소 알 수 있다. 그리므로 ‘인간의 무늬’라는 말 안에는 인간은 복잡다단하여서 두부모를 자르듯 인간에 대해 재단할 수 없다, 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인간을 쉽게 판단할 수 없듯이 인간이 만들어내는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이유로 인문학은 사회 속에서 쉽게 환호 받으며 유통되고 소비되다 폐기되는 개념과 풍조에 대해 어김없이 삐딱한 태도로 회의하고 그것을 응시하면서 넌 누구니, 넌 어디서 왔니, 라고 물어왔다.

    그렇다고 볼 때 현재 한국사회에서 스팩과 힐링으로 포장되어 열렬히 환호받으며 유통되는 인문학 풍속도는 인문학적으로 마땅히 비판의 대상이 된다. 모든 사안과 문제 앞에 인문학이란 단어가 차고 넘치지만 실상은 인문학적 태도가 전무한 한국의 인문학 열풍, 그 속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인문정신은 없다. 비행기 타고 서울 시내를 내려다 볼 때 보이는 빨간 십자가의 풍년이 오히려 한국 개신교의 타락과 부패를 상징하는 것처럼, 한국 사회에서의 인문학 열풍 또한 그런 처지로 타락한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기우만은 아닐 것이다.

    만약 우리사회가 인문학은 인간의 무늬를 추구해야 한다고 믿는다면,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그러다가 실업자로 전락하면서 울분을 품고 살다 고공농성을 할 수 밖에 없는 노동자들의 삶을 외면하면 안 된다. 대한민국 사회가 인문학, 즉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중시하는 열풍에 빠져있었다면 어린 학생들이 물에 빠져 죽어간 세월호에 사건에 대해 그리 무능한 대처와 무책임한 행보를 보여서는 안 되었다. 이 땅의 학부모들이 진정 인문학적이라면 인문학적 상상력 대신 점수따기식 학습과 수량화된 현재 학생 평가 시스템 안으로 우리의 자녀들을 밀어넣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무늬를 존중하는 인문학은 인간 현존 하나하나의 삶과 호흡에 관여하고 그 아우성과 몸짓에 일일이 반응하면서 최대한 성심껏 함께 답을 찾아가는 공동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다시, 인문학이다


    결론적으로 인문학이란 어떻게 하면 내가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강박도 아니고, 어떻게 하면 나의 아픔을 치유받을 수 있을까를 둘러싼 집착도 아니다. 오히려,“세상이 이렇게 불합리 한데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이것은 죄악이 아닐까?”를 묻는 것이 인문학이고, 타인의 불행과 나의 행복사이에 있는 함수와 변수를 계산하여 내 행복의 정체를 의심하고 타인의 불행에 대해 면목없어해 하는 마음이 인문학이다. 물론, 인문학은 나의 아레테를 발견하고 계발하여 널리 인간을 복되게 하는 긍정의 정신이고, 고통과 슬픔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그것으로 인한 상처로 부터의 회복을 바라는 희망의 변증법을 포함하겠지만, 더 근본적인 인문학적 의제는 우리시대 고통과 슬픔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함께 힘을 모아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비참과 탄식을 극복할 방도를 모색하는 비판의 정신이어야 맞다. 그 마음으로 신자유주의가 선사하는 불편한 진실과 타협하지 말고 우리 시대 가장 비천한 이들과의 연대에 동참하는 것, 우리사회 속에서 잊혀지고 가려지는 진실들을 외면하지 않고 들춰내어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게 하는 것, 그 하나하나의 과정이 진정한 우리의 스팩이고, 그 순간순간들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힐링을 맛보게 될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이일수 옮김, 『액체근대』 (서울: 강, 2009). [본문으로]
  2. 서보명 지음, 『대학의 몰락』 (서울: 동연, 2011). 65-81 [본문으로]
  3. 『周易』 「賁卦」. “觀乎天文以察時變 觀乎人文以化成天下_ 천문을 살펴서 시간의 변화를 관찰하고, 인문을 살펴서 천하를 화성한다.”- 이승환,“동양의 학문과 인문정신”, 『인문정신과 인문학』(한국학술협의회 편, 아카넷, 2007), 29쪽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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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과 꿀이 흐르는 독서모임



심범섭*



   독서모임이라는 세계에 내가 본격적으로 들어선 것은 2013년 가을이다. 어썸피플(Awesome People)이라는 모임에서 주최하는 독서모임에 나가기 시작했다. 작년부터는 다른 독서모임에도 나가보고 또 내가 직접 모임을 주최해보기도 하면서, 지난 3년 남짓되는 시간 동안 꾸준히 독서모임 경험을 쌓게 되었다. 정확한 통계수치는 손안에 없지만 젊은 직장인이 참여하는 독서모임이 지난 3년 사이에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은 분명하다고 본다. 대한민국에서 왜 젊은 사회인들이 독서모임에 더 관심을 보이는지 궁금해하면서, 또 독서모임의 좋은 영향력이 더 확대되기를 바라면서, 독서모임의 의미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고자 한다.

   먼저 독서모임이라는 활동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상당히 긍정적으로 인식된다는 사실에서부터 생각을 시작해보고 싶다. 이런 긍정적 인식은 독서모임이 어떤 구체적인 시기 또는 상황에서 얼마나 인기를 누리는가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해 독서모임이 활성화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사람들은 이 활동을 바람직하고 격조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이 형성되어 있는 이유는 물론 책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확고하게 정립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우리나라 사람들이 책을 많이 읽지는 않지만 그 의식에서 책의 권위 자체가 약해지지는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책의 권위란 무엇인가? 책의 권위에는 수준있는 정신활동의 권위와 글의 권위가 결합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무릇 ‘책’이라고 부르는 매체에는 어느 정도 격조있는 정보 또는 지식 또는 지혜가 담겨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전화번호부를 책이라고 이름하지는 않는다. 그 생김새는 책과 같지만 그 내용에 우리의 생각과 정서를 심화하는 요소가 부족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신문 읽기도 책 읽기와는 다른 활동으로 인식한다. 비록 신문에 실리는 어떤 글은 그 내용이 좋은 책의 내용으로도 전혀 손색이 없지만 신문의 전형적인 기능은 사실을 보도하는 것이고 이런 목적으로 씌여지는 기사의 내용은 쉽게 ‘책’의 내용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전철에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책을 읽는 사람은 보기 힘들다!”라는 탄식이 일상에서 큰 저항없이 이해되고 수용된다. 사실 따져서 생각해보면 스마트폰으로 받아들이는 어떤 내용은 책으로 읽는 어떤 내용보다 확실히 더 수준 높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스마트폰으로 유통되는 전형적인 정보가 책으로 전달되는 전형적인 정보보다 격이 떨어진다는 전제가 자리잡고 있다. 이런 전제는 책이란 쉽게 쓸 수 없는 것, 아무나 쓸 수 없는 것이라는 인식과 이어져 있다. 책이란 어떤 주제에 대해 어느 정도 깊이 있는 지식이 있어야 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표현하는 능력이 있어야만 쓸 수 있는 것이다. 책이란 진지하고 고상한 것이며, 훈련이 있고 긴장된 노력이 있어야만 쓸 수 있는 것이다.

    책의 권위에는 이러한 내용의 수준에 대한 판단에 더하여 글이라는 표현방식에 대한 긍정적 판단도 관여한다. 많은 경우 글을 쓰는 것은 말을 하는 것보다 확실히 더 어렵게 다가온다. 사실 우리는 말은 나도 모르게 배우기 시작했지만 글은 자리에 앉아 의식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는 글이 말보다 더 지적 에너지를 더 많이 함축하는 매체라고 생각한다. 글을 제대로 쓰려면 말을 하는 것보다도 더 논리적이고 정연해야 하고 더 집중해야 하고 생각이 더 정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말해 글을 잘 쓰는 일은 어려운 일, 상당한 수련을 요구하는 일이고 그러므로 진지하고 고상한 일이라고 인식한다. 

    책의 권위가 뜻하는 바가 이러하므로 책은 공부, 배움, 교육, 지적 권위 등과 매우 밀접하게 엮이어 있다. 똑똑한 것, 많이 아는 것, 공부 잘 하는 것, 체계있는 것 등에 대한 존중과 인정과 연결되어 있으며, “문”의 숭상, 지성 및 지혜의 숭상과도 이어져 있다. 책에 실리는 내용은 보존하고 전파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며, 이런 판단은 글이라는 매체가 지니는 전파성과 영속성에 의해 더 강화되는 측면이 있는 듯 하다. 철학자 안병욱 선생의 다음과 같은 지극한 책 예찬도 책에 대한 이러한 평가에 근거하고 있다.


책은 인간의 창조물 중에서 가장 위대하다. 영원의 도시 로마는 망했지만 로마의 책은 남아 있다. 신라는 무너졌지만 원효의 책은 살아있다. 그리스도를 처형한 권력자들은 죽었지만 그리스도의 말씀을 담은 성서는 영원히 빛난다.[각주:1] 


    책의 권위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을 정리해 본 다음 이제 모임이라는 것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어떤 모임의 가장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는 개인적으로 만나서는 쉽게 나눌 수 없는 이야기를 쉽게 나누도록 중매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사실 삶에서 중요한 솔직하거나 진지한 대화는 매개자가 있어야만 순조롭게 생성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아가씨에게 이성으로서 관심이 있다고 할 때 그 사람에게 직접 다가가 이런 관심을 보이는 것은 우매한 처사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누군가 중간에서 다리를 놓아 소개팅을 주선해 준다면 나는 자연스럽게 이 사람을 이성으로 대하면서 대화를 할 수 있게 된다. 가족이나 친한 동무한테도 못하는 이야기를 생명부지의 정신과 의사한테는 털어놓을 수 있다. 이 의사의 자격을 공인하는 사회가 중간에서 매개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같은 이치로 어떤 공통 관심사 아래 모임이 열리면 비록 그 모임에 온 사람이 단 두 사람이라도, 더군다나 이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사이라 하더라도 이들은 사적으로 만나서는 할 수 없는 솔직하거나 진지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다. 매개자가 이렇게 소통을 원활히 할 수 있게 하려면 소통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이 중매자를 신뢰해야만 한다. 달리 말해 어떤 모임에 와서 모르는 사람하고도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이 모임이라는 활동을 신뢰하는 것이다.  

    독서모임은 진지한 대화의 중매자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 모임이라는 활동 자체에 부여되는 신뢰가 있는데다가 책에 대한 신뢰도가 높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는 솔직하고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이 욕구는 근본적으로 성장하고 싶은 욕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친한 동무하고도 이런 이야기를 쉽게 하기는 늘 쉽지는 않다. 눈치를 봐야하고 분위기를 따져야 한다. 그래서 친구 사이에서도 부부 사이에서도 이 장벽을 넘기 위해 같이 술을 먹어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 때로 심각하고 허심탄회한 이야기는 ‘맨 정신’으로는 하기 어렵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맨 정신으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독서모임은 제공해 준다. 그리고 책 안에는 여러가지 생각과 표현이 있기 때문에 심도있는 소통으로 가는 통로를 아주 다양하게 제공한다는 장점도 있다.

   ‘대화’는 말하기와 듣기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대화는 동시에 ‘대청’이다. 독서모임은 깊이 있는 대화대청의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내 경험상 흥미로운 사실은 독서모임에 나온 사람들은 그 동기로서 듣고 싶은 바람만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곧, 절대다수는 ‘다른 사람들이 같은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를 배우고 싶어서’라고 말한다. 풀어서 말하면, 나는 아직 생각하고 느끼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음으로써 같은 책을 더 풍부하게 경험하고 나아가서 내 인식과 정서의 지평 자체를 넓히고 싶어서 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독서모임에 온 이유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 책에 대한 내 생각을 이야기해 주고 싶어서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적어도 나는 한 명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나부터도 이렇게 말하면 잘난 척한다는 인상을 준다고 생각하므로 감히 발설하지 못하는 것일 뿐,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듣고 싶은 욕구보다 더 강한 말하고 싶은 욕구가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에 따라 누구는 이런 욕구를 아직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자기 하고 싶은 말을 하고 그 말을 다른 사람이 경청해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독서모임에 온 사람들이 차마 말하지 못하는 이유를, 철학자 이태수 교수는 대한민국의 대중인문학에 대해서 말하면서 고맙게도 언급해 준다.


    인문학은 스타 강사 강연에 수천명이 모이는 빅 이벤트에서 승부가 나는 게 아니라, 누구나 인문학을 읽고 입을 열 수 있게 하는 쪽으로 끌고 가야 한다. . . . 인문학도 유명 강사가 멋진 강연하고 박수치고 끝나는 게 아니라, 몇 사람이라도 모여서 책 읽고 이야기 나누는 게 진정한 인문학이다. 유명 인사의 말만 듣고 감탄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스타 강사 없이도 내가 내 얘기를 할 수 있게 해주는 쪽으로 가야 한다. 그걸 지원해줘야 한다.[각주:2]


    이태수 교수가 부각시키는, “내 얘기를” 하는 것의 중요성을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의 ‘생산성(productivity)’ 개념을 통해 이해해보는 것도 의미있으리라 생각한다. 프롬은 저서 <사랑의 기술 (The Art of Loving)>에서 생산성이라는 개념을 여러 번 되풀이해서 언급하는데, 그가 이 개념에 부여하는 의미 (가운데 하나)는 다음 구절에서 드러난다. 


    어떤 창조적인 작업에서도 창조하는 사람은 자기 밖의 세계를 대표하는 그의 재료와 자신을 연합시킨다. . . . 모든 종류의 창조적인 작업에서 작업자와 그의 대상은 하나가 되고, 사람은 창조의 과정에서 세계와 자신을 연합시킨다. 그러나 이는 생산적인 작업, 곧 내가 내 작업을 계획하고, 생산하고, 그 결과를 보는 경우에 대해서만 유효하다.[각주:3]


    내가 주체적으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일, 달리 말해 내 본질이 투여되는 일에서 나와 대상은 하나가 되며, 이런 일이 창조라고 불릴 자격이 있다고 프롬은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개념을 “내 얘기를” 하는 것에 적용한다면, 내 삶의 고유한 맥락에서 우러나온 이야기, 내 본질을 반영하는 이야기, 그래서 그 언어가 나로부터 소외되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것도 생산적인 일이요, 창조의 한 예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듣는 이로부터 깊고 진실한 반응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이 반응이 말하는 이에게 기쁨과 만족을 준다. 더 일반적으로 말해 생산적인 일, 창조에는 기쁨과 만족과 보람이 동반하며, 이러한 내적 경험이 일하는 사람과 대상이 하나가 되는데 크게 기여한다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창조와 그에 따르는 보람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이야기의 예가 구약성서 창세기의 첫머리에 나오는 창조설화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 .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 . . 하나님이 물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 . .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 . .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 . . (1:1-31의 일부)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엿새 동안 창조 작업을 하는데 그의 창조물이 그가 보기에 좋았다는 말이 일곱 번 나온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은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 대상에 대해서 느끼는 기쁨과 만족과 보람을 암시한다. 더불어 이 대상에 대해 느끼는 애정도 암시한다. 이러한 의미를 내포하는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창조 대상에 대한 이러한 내적 반응이 진정한 창조의 한 조건이라고 암시하는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생성 대상에 대한 기쁨과 사랑을 낳는 작업만이 창조라는 의미를 이 이야기에서 끌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서너 달 전 어썸피플 독서모임에서, 이 모임에 처음 온 서른 살 된 한 여자분이 모임이 끝난 다음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다른 분들이 제가 하는 말을 열심히 들어주셔서 정말 좋았어요.” 이 분이 느낀 기쁨과 만족이 “내 얘기를” 함이라는 생산적 활동의 보람이요, 따라서 이 분이 이 모임에서 한 일을 창조라고 이름할 수 있다고 믿는다.[각주:4]

    위에서 창세기의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표현으로부터 창조자의 행복에 대한 해석을 끌어냈는데, <사랑의 기술>에서 에리히 프롬은 같은 표현으로부터 창조된 인간의 행복이라는 의미를 끌어낸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한 것은 피조물의 존재 자체를 긍정함을 뜻하며, 피조물이 보기 좋다고 한 것은 인간이 삶(생명)을 사랑할 수 있음을 뜻한다. 그는 이 두 가지 의미가 어머니의 사랑의 특성이라고 규정하면서 이를 구약성서 출애굽기에 나오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표현에도 적용한다. “약속의 땅(땅은 언제나 어머니의 상징이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것으로 묘사된다. 젖은 사랑의 첫번째 측면, 돌봄과 긍정의 측면을 상징한다. 꿀은 삶의 달콤함, 삶에 대한 사랑과 살아있음의 행복을 상징한다.”[각주:5]

    비록 창세기 이야기에 대해 프롬과 나는 접근 방향이 조금 다르고, 또 프롬은 “젖과 꿀”을 사랑에 적용하여 해석하지만, 나는 그의 생각의 틀을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에 적용할 수 있다고 본다. 달리 말해, 창세기 이야기의 창조사건과 출애굽기의 ‘젖’은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의 긍정을, 창조대상이 좋게 보임과 ‘꿀’은 이에 따르는 행복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창조가 이루어지는 소통을 젖과 꿀이 흐르는 소통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이태수 교수의 말에서 그는 유명 인사의 강연을 듣기만 하는 것과 독서모임에서 “내 얘기를” 하는 것을 대조함으로써 독서모임에서 말하기의 능동성과 참여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에서 자기 이야기를 자유롭게 하도록 허락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감지할 수도 있다. 독서모임에서 다른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어서 정말 좋았다고 말하는 서른 살 된 젊은 여성의 소감에서도 이 분 개인의 과거 소통 경험과 우리 (여성) 젊은이들의 일반적인 소통체험을 읽을 수 있다고 본다. 한마디로 말해 대한민국에서는 2, 30대 젊은이들도 자기 이야기를 마음껏 하지 못하면서 살아온 것이다. 사실 지난 3년 남짓 내가 참석한, 젊은 직장인이 주로 참여하는 수 많은 독서모임에서 받은 인상도 이와 일치한다. 달리 말해 대한민국은 소통의 젖과 꿀이 매우 부족한 사회이다.

    이런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서 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다양한 주제에 대해 깊은 대화를 쉽게 성사시키며, 너와 나가 함께 이루는 창조를 경험하게 하는, 그리고 이 밖에도 여러가지 장점을 지니는 훌륭한 독서모임이 더 많이 생겨야 하지 않을까? 창세기 첫머리의 창조 이야기에서는 창조물이 하나님이 보기에 좋았다는 말이 일곱 번 나온다. 여섯 번은 (매번은 아니지만) 개별적인 창조 단계가 끝났을 때 나오고 마지막 표현은 창조세계 전체에 적용된다. 구체적이고 특정한 창조물에 대해 ‘좋다’라고 느꼈을 때 이 기쁨과 만족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 다음 단계 창조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하는 동기가 되었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창조가 창조를 낳는, ‘창조의 창조성’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독서모임에서 경험하는 소통의 창조에도 이런 힘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창조성이 넘쳐나는, 젖과 꿀이 흐르는 독서모임이 우리 사회에 더욱 많아지고 더욱 흥성하기를 기원한다.


    * 필자소개  

영어강사. Rice Univ 언어학 박사(Ph.D) 후에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과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 웹진 <제3시대>



  1. <미와 진실의 합창>, 삼육출판사, 1990, p. 59. [본문으로]
  2. 조선 비즈, 석학 인터뷰,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전병근 기자, 2014.10.25. 굵은 글씨 강조는 인용자가 함. [본문으로]
  3. Harper & Row, New York, 1956, p.17. 번역과 굵은 글씨 강조는 인용자가 함. [본문으로]
  4. 독서모임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창조를 이야기할 때 짚고 넘어가야할 사항이 적어도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대화대청을 통해 이루어지는 창조에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같이 참여한다는 사실이다. 위에서 예로 든 여자분이 말하는 이야기하는 사람의 행복은 듣는 사람의 경청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독서모임에서 이루어지는 깊이 있는 말하기와 듣기는 개인적인 만남이나 책을 매개로 하지 않는 모임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창조적인 대화와 다른 측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차이는 역시 위에서 말한 책에 결부된 권위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책에 사회적인 권위가 있는 한 책을 매개로 말하는 사람은 이 권위에 관여하면서 자신의 권위의 성격과 정도를 결정하게 된다. 우리는 책의 권위와 더불어 갈 수도 있고 거슬러 갈 수도 있다. 책의 내용에 동의하면서 이야기할 때 우리는 책의 권위에 편승할 수 있다. 책의 내용을 비판할 때 이 비판이 설득력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저자의 권위를 위협하는 사람의 권위가 부여된다. 그리고 말하는 사람이 책의 권위와 교섭하면서 얻는 권위가 그가 얻는 창조의 기쁨과 만족에 직접 관여하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본문으로]
  5. 같은 책, p.49. 번역은 인용자가 함.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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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조금 더 들어봅시다
- ‘말함을 돕는’ 인문학을 위하여


김신식
(《당대비평》간사)


# 1 올곧지만 무기력한

<대학의 몰락>은 “이 시대에 적합하고 수용 가능한 대학의 본질과 사명이 무엇인지”(9)를 묻는 책이다. 그리고 그 물음을 위해 저자가 동원하는 것은 역사적 접근이다. 책 속에서 역사적 접근은 대학의 ‘변질’을 고발하는 주요 방식이다. 원래 대학은 이런 모습이었는데, 오늘날의 대학은 이렇게 변하였다는 사고는 ‘대학의 몰락’이라는 제법 묵시록적인 책의 제목을 지탱하는데 필요한 정석이라고 할 수 있다. ‘정석’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본 책에서 저자는 깔끔한 도식을 만들어낸다. 저자가 책 속 도식에서 강조하는 잣대는 ‘세상과의 비판적인 거리라는 조건’(27)인 듯하다. 오늘날 세상은 자본주의의 논리에 침윤되어 있고, 여기서 대학도 무관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대학이 추구하는 학문적 이상이 시장의 아이템으로 절하되고, 이러한 대학은 현실과의 불화를 더 이상 꾀할 수 없는 곳이 되었다는 것. 저자는 시종일관 이 주장을 밀어붙인다.

그러나 저자의 이러한 주장이 옳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오늘날 이러한 주장과 그 주장을 위해 쓰이는 저자의 서술 방식이 ‘대학의 위기론’을 진단하는 전략으로서 무기력함을 숨길 수 없었다. 좀 더 나아가자면 이 책은 요즘 횡행하는 ‘~의 인문학’과 같이 ‘인문학’을 ‘생활용 교양’으로 취급하려는 사회적 분위기에 좋은 먹잇감이 될 수 있다는 우려까지 들었다. (조금 맥락에서 벗어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책 뒤에 적힌 네 분의 추천사도 이 책을 ‘정직하게’ 판단하고 쓴 것인가라는 생각까지 했다) 

# 2 ‘인상 깊은’ 현실이 아닌 ‘인상만’ 남은 책 속 대학

특히 저자가 언급하는 대학 내 현실에 대한 문제점들이 큼직하다보니 그러한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언어들도 지나치게 피상적이고 굳어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굳은’ 언어는 그 어떤 문제점들이 닥쳐도 주변 상황에 개의치 않은 채 ‘성스러운 비판적 사유’를 전개하겠다는 ‘옳은 태도’를 보여주는 데 장점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옳은 태도’는 “자본과 시장과 경쟁이라는 이 시대의 대학의 우상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어야 한다”(260)는 주장 그 자체의 올곧음만을 도드라지게 하는 데만 그 가치를 다한다고 느껴졌다.

저자는 ‘대학의 기업화’를 강요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적 사유, 그것을 행할 수 있는 거리(distance)의 힘을 강조하지만, 정작 그 ‘거리의 힘’은 오늘날 대학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부딪히는 ‘대학- 현장’과의 간극을 드러내는 한계로 작용한 듯 보인다. 물론 이것은 대학의 잘못된 현실을 꾸짖는 데 있어 ‘대학의 이상과 목적을 질문하기 위한 사유’라는 실천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 책이 ‘대학의 몰락’을 걱정하면서도 그 속에서 존재하고 있는 사람들이 처한 생활상, 구체적으로 ‘대학생’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그들과 관계 맺고 있는 사회상에 관련된 문제점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인상이 짙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내가 이 책을 읽고 아쉬웠던 점은 2장 ‘대학의 역사에서’와 3장 ‘대학과 철학’을 위해 할애한 저자의 ‘논리적 에너지’가 결국 대학의 현실을 ‘인상 깊게’ 살피는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인상만’ 살피는 데 동원되었다는 점이다)

# 3 대학, 조금 더 들어보자

저자가 ‘대학의 몰락’을 극복하기 위한 작은 방편으로 이 책을 썼다고 한다면 그것에 맞는 ‘몰락의 징후’혹은 ‘몰락의 현실’들을 더 듣고 챙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 일까? 이것은 비단 저자뿐 아니라 근래 ‘20대 담론’과 엮어 ‘대학의 위기’를 논하는 사람들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학점 쌓기? 토익 공부 치중? 경영학의 인기? 취업난? 경쟁? 효율성? (이미 많은 논자들이 제기하였듯이) ‘대학의 위기론’이 하나의 담론적 유형으로 우리 사회에 인식되면서 그러한 위기론을 강조하기 위해 드는 사례 혹은 개념들도 너무나 안이하게 관습적으로 분류, 배치되고 있다. 이러한 분류, 배치를 통해 문제가 되는 것은 ‘대학의 위기는 이 정도 알았으면 되었다’로 섣불리 귀결되어 이후 기계적으로 제시되는 온갖 해결의 언어들이다. 여기서 대학의 위기에 대한 ‘해결어’(특히 ‘20대 담론’과 묶어서)에 대하여 정작 대학을 다니는 사람들이 흥미를 보이고 있지 않다는 것은 다시 한 번 꼬집어 볼 대목이다.

관심 있는 사람은 알다시피, ‘대학의 위기론’은 ‘20대 담론’과 마찬가지로 말하기 신난 사람들만 더욱 신난 구조가 지속 되고 있는 것 같다. 이를 통해 대학을 감싸고 있는 문제들을 더욱 끌어내지 못함으로써 문제점들을 단순하게 유형화시키고, 그 문제점 안에서만 대학의 몰락과 동시에 대학생의 몰락이란 비난 섞인 비판이 온 /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인기 있는 대화거리가 되었다.(여기서 인기 있는 이유가 ‘재단하기 쉽다’와 유사한 의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는 대학의 몰락을 막기 위해 필요한 것은 대학에서 힘겹게 ‘생존’하고 있는 자들의 언어를 더 듣고 모으려는 진심어린 노력이라고 본다. 이 정도면 다 들었지 않았는가,라는 오만함을 버리고 대학 내 현장의 언어를 당사자들이 더 말하게 함으로써, 그 말함의 표출을 ‘분노의 힘’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희망이 강조되어야 한다고 본다. 지금 인문학은 너무나 ‘말하고자 하는’ 사람들만이 넘친다. 정작 ‘말하도록 돕는’ 인문학은 거의 본 적이 없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저자가 “인문이라는 학문의 언어는 원래 고백과 증언의 언어였다”(51)라는 언급한 대목을 지나칠 수 없었다. 단, 대학의 문제를 논함 가운데 이런 고백과 증언의 언어가 ‘대학의 위기론’을 설파하는 사람들만이 확보한 제한된 권리로만 행사된다면 유감일 것이다. 이는 정작 ‘인문학’의 길이 아니라 ‘인무(人無)-학’의 길로 빠지는 지름길이 아닐까. ‘대학의 몰락’을 걱정하면서도 ‘대학의 몰락을 걱정하는 사람들’도 더불어 걱정해야 함을 깨닫게 된 것은 이 책을 통해 느낀 유감이자 이 책에서 얻게 된 어떤 교훈일지도 모른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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