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장과 찜질방에 깃들은 인종차별과 편견





김나미

(미국 Spelman College 교수, 종교학)




    지난 8월 초 브라질의 리우 데 자네이루 (Rio de Janeiro)에서 열렸던 올림픽과 관련하여 미국의 주류 방송사에서 방영하지 않은 이야기들과 경기들이 있다. 리우올림픽이 열리기 전까지, 그리고 열리는 동안에도 계속 일어난 브라질 사람들의 올림픽 반대 시위와 그에 대한 경찰의 가혹한 진압은 방송에서 물론 보기 어려웠지만, 경기 자체가 미디아의 조명을 받지 못한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미국의 수영선수인 시몬 마뉴엘 (Simone Manuel)이 금메달을 딴 수영 개인종목 경기였다. 미국의 대부분의 주류 방송사들은 시몬 마뉴엘이 결승전에서 금메달을 따는 순간은 물론이고 금메달을 받는 시상식 장면 또한 방영하지 않았다. 아무도 흑인여자 수영선수가 수영 개인 종목에서 금메달을 딸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 그냥 그럴 수도 있겠지’ 하고 지나칠 수 있는 이 일을 그냥 지나칠 수 만은 없는 이유는 시몬 마뉴엘의 메달 획득이 수영과 미국의 인종차별주의 역사의 연관성에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1865년에 끝난 미국의 시민전쟁과 그 해에 비준된 미헌법 제 13조에 의해 약 400년간 이어져온 노예제도가 폐지 됬기는 했지만 그것이 곧 흑인들의 삶의 향상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노예제도 폐지후 얼마 되지 않아 남부지역에서 실행된 짐크로우 (Jim Crow) 법은 흑인과 백인의 ‘분리’ (segregation) 를 법으로 정한 반흑인 인종차별법으로써 1965년 까지 유효했다. 이 법에 따라 흑인들과 백인들의 생활의 모든 공간이 분리되어 졌고, 만약 이 법을 어길 경우는 법의 처벌을 받는 제도화된 인종차별법이었다. 군대[각주:1], 학교, 식당, 화장실, 엘리베이터, 버스, 열차, 극장내의 ‘분리’된 공간들은 물론이고, 아이들의 놀이기구, 수영장, 해변가에서도 ‘분리’는 분명했다. 백인들만의 공간에 흑인들이 들어 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고, 그것을 위반 했을 때에는 백인들에 의해 잔혹하게 폭행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시몬 마누엘(출처 : https://au.tv.yahoo.com)


    1950년대에 도로시 덴드리지라는(Dorothy Dandridge) 흑인 여배우가 발가락을 잠깐 담궜다 꺼냈다는 이유로 라스베가스 한 호텔의 수영장물 전체를 다버린 사건, 1964년 플로리다주의 한 모텔주인이 흑인들이 들어가 있는 모텔의 수영장에 염산을 뿌린 사건등은 전혀 정치적이지 않을 것 같은 수영장, 해변가, 사우나시설들이 어떻게 인종차별을 첨예하게 드러내는 공간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각주:2] 수영장의 이런 인종차별적 역사 속에서 많은 흑인들은 수영을 배울 기회를 갖지 못했고, 수영이란 운동과 가까와 지기 어려웠다. 이렇게 수영과 관련된 인종차별 역사 때문인지 미국의 주류 방송사들도 미국을 대표하는 흑인여자 수영 선수의 개인 종목 결승전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수영장에 깃들은 흑인들에 대한 인종차별과 동일시 될 수 는 없지만, 한인들의 흑인들에 대한 인종적 편견과 태도가 드러나는 장소들 중 하나가 바로 찜질방이다. 점점 늘어나는 미국내 한인들의 숫자를 보여주듯이 한인들이 밀집한 대도시에는 한인 사우나, 또는 찜질방이 있다. 애틀란타라는 남부의 큰 도시에도 한인들이 운영하는 사우나와 찜질방이 있다. 한국에 있는 찜질방에 비해서 훨씬 비싸지만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처음 찜질방이 문을 열었을 때는 한인들이 대다수 였지만, 지금은 흑인들이 많이 이용한다고 한다. 그런데, 바로 흑인들이 많이 가기 때문에 더이상 찜질방에 가지 않는 다거나, 가지 말라고 조언을 하는 한인들을 주위에서 종종 만나 볼 수 있다. 이유는 흑인들이 많아서 ‘더럽다’는 것이다.


    ‘흰색은 순수하고 깨끗하다’, ‘검은색은 오염됬고 더럽다’라며 색깔과 인종을 연결시켜 우열을 나누는 것은 인종차별주의를 지탱하는 여러가지 이데올로기들 중의 하나이다. 한국사회에서도 흑인이나 ‘혼혈아’로 불리는 사람들을 상대로 쓰여지는 여러가지 용어들이 있는데, 여기서 일일히 나열할 필요도 없이 부정적이고, 혐오적이다. 도대체 흑인에 대한 이런 편견과 부정적인 태도가 언제부터 어떤 경로를 통해서 한국인들 사이에 퍼지게 된 것일까? ;


    한국 사회와 미국의 한인 공동체의 초국가적 (transnational) 연관성을 연구해온 한국계 미국학자 김나디아 (Nadia Y. Kim)는 자신의 책 [제국의 시민들] (Imperial Citizens)에서 한국 사람들이 흑백인종질서를 받아 들이는 것을 가능하게 한 여섯가지의 연관된 요인들을 논의하고 있다. 간략하게 요약을 하면, (1) 한국인들과 일본인들 사이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색깔사이의 위계, (2) 각 사회 구성 집단의 적합한 위치를 강조하는 유교관념, (3) 애국계몽운동이후에 (1895-1905) 형성된 ‘한핏줄’ 국가개념, (4) 엘리트 백인들과의 접촉, (5) 일본에 의해 소개된 미국-유럽의 인종 이데올로기들, (6) 한국에서 반인종차별운동의 역사와 담론의 결핍 등이다.[각주:3]


    김나디아는 이렇게 역사적으로 연관된 요인들이 다른 유색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가능하게 한 토양을 만들었고, 냉전시대 이후 부터 현재 한국사회에 만연한 유색인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미국의 흑백인종질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한다[각주:4]. 다시 말해서, 미국이 문화, 경제, 군사적으로 그 힘을 확장해 나갔던 냉전시대에 미국 사회의 흑백인종질서로 다른 나라들도 “인종적으로 ‘미국화’” 시켰다는 것이다. 흑백질서라는 미국의 인종 이데올로기, 좀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반흑인 인종차별주의가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미국의 영향아래에 있는 한국과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었고, 미국으로 이민을 간 한인들도 이민을 가기 전부터 이미 흑인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과 태도를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 사람들과 미국내 한인들 사이에 팽배해 있는 반흑인 편견과 태도는 미국의 인종차별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각주:5]


   미디아만 보더라도 미국의 인종차별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전세계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는지 알수 있다. 흑인들과 관련된 미디아 이미지는 ‘아프리카의 미개인’으로 부터, ‘무력한 노예’, 마약과 폭력을 일삼는 도심지의 ‘난폭한 갱’, 국가의 복지 혜택을 누리면서 세금을 축내는 ‘게으른 미혼모’등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두가 부정적이다.[각주:6] 한국 미디어에서 간혹 미국의 유명한 흑인 운동선수나 연예인들이 긍정적인 모습으로 조명되기도 하지만, 이것 또한 상당히 제한되어져 있고, 몇 몇의 ‘뛰어난’ 흑인들을 ‘예외’인 것으로 부각시키면서 오히려 흑인들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을 강화시키는 기제가 되기도 한다.


   물론 백인들의 유색인 차별과 한인들의 다른 유색인에 대한 인종적 편견과 태도를 동일 선상에 놓고서 얘기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힘의 역학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한인들도 백인들과 똑같은 인종차별주의자들이다’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종차별주의는 개개인들의 차별적 언어, 행위와 편견이라는 중요한 측면이 있지만, 무엇보다 구조적 차원의 문제이다. 흑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을 포함하여 유색인에 대한 인종차별과 억압은 백인우월주의 (white supremacy)라는 큰 틀과 연결 시켜서 봐야 한다. 여성신학자 앤디 스미스 (Andy Smith)는 백인우월주의를 지탱해온 세가지의 각각 다르면서도 서로 연결된 “기둥”들을 논하는데, 그 세가지의 기둥은 다음과 같다: (1) 미국 노예제도와 자본주의, (2) 미 ‘원주민’ 학살과 미국에 정착했던 유럽인들의 정착형 식민주의, (3) 미국이 관여한 아시아에서의 전쟁과 오리엔탈리즘이다.

   

   흑인들, 한인들을 포함한 아시아인들, 그리고 미국의 ‘원주민’들이 백인우월주의에 의해 억압을 받아온 경위와 역사가 동일 하지는 않지만, 각각의 그룹이 경험하는 억압은 백인우월주의와 연결되어져서 서로의 억압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렇게 다른 “기둥”들에 의해 억압받아온 사람들이 취해야 할 행동은 ‘우리는 저 사람들과 다르다’라는 인식론적 차원에서의 ‘분리’나, ‘우리는 저 사람들 보다 훨씬 낫다’라는 우월주의적 사고를 갖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서로가 “공유하는” 억압의 경험을 얘기하면서 누가 더 억압받았는지 경쟁하는 “억압 올림픽” (the oppression olympics)에 참가하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각주:7] 각각의 억압 경험이 다르지만, 서로의 억압을 강화시키는데 알게 모르게 참여해 온 것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백인우월주의와 그것을 지탱하는 “기둥”들을 무너뜨리는데 힘을 합할 수 밖에 없다.

  

    수영장에 깃든 미국의 기나긴 인종차별의 역사를 비인간적인 억압의 구조로 본다면 찜질방에 깃들은 한인들의 인종적 편견과 태도 역시 간과 할 수 없겠다. 나/우리의 인종차별적 편견과 태도가 흑인들을 억압하는 인종차별적 구조를 견고하게 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사실은 나/우리를 열등하게 여기고 차별하는 구조를 굳건히 하는데 내/우리가 오히려 앞장서는 이상한 상황이 되기 때문이다. 다른 유색인들의 삶을 힘들게 하는 억압구조에 동조하면서 한인들만은 차별받지 않고 다양한 가능성을 실현 하면서 살 수 있는 사회란 있을 수도 없고 꿈을 꿀 수도 없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의 삶을 더 고달프게 하는 구조에 동참하면서 나/우리만 잘 살 수 있는 사회란 많은 이들에게는 깨어나고 싶은 악몽일 것이다. 미국의 인종차별주의에 맞서 싸웠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을 기억하면서 나/우리의 삶이 다른 사람들의 삶과 어떻게 서로 떼어 질 수 없이 연결 되어있는 지 보도록 하자. 그러면 별 일 아닌 것 같이 보일 수 있는 수영장과 찜질방에 깃든 인종차별과 편견이 사실은 모두의 삶을 황폐하게 하고 위협하는 부정의라는 것을 알 수 있을테니 말이다: “어딘가에 있는 부정의는 곳곳에 있는 정의에 대한 위협이다. 우리는 하나의 운명에 묶인 채 피할 수 없는 상호관계성의 네트워크안에 있다. 무엇이든 한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것은 모두에게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다.”[각주:8]


ⓒ 웹진 <제3시대>



  1. 미군대내의 분리는 1948년에 폐지 되었다. [본문으로]
  2. http://www.sportingnews.com/athletics/news/simone-manuel-gold-medal-swimming-legacy-history-african-american-barred-pools-beaches/y6t5l0c7b55h166ovrc5ssxid; https://www.washingtonpost.com/sports/olympics/the-significance-of-simone-manuels-swim-is-clear-if-you-know-jim-crowe/2016/08/12/870e3bb6-60ad-11e6-af8e-54aa2e849447_story.html?tid=sm_fb [본문으로]
  3. Nadia Y. Kim, Imperial Citizens: Koreans and Race from Seoul to LA (Stanford, CA: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8), 37. [본문으로]
  4. Ibid. [본문으로]
  5. 여기에 관해서는 본인의 책에서 조금 더 자세히 논의하고 있다. Nami Kim, The Gendered Politics of the Korean Protestant Right: Hegemonic Masculinity (Palgrave Macmillan, forthcoming). [본문으로]
  6. 한국 사람들의 흑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에 관한 다음의 글을 참조하기 바람. Dave Hazzan, “Korea’s Black Racism Epidemic.” Groove (February 11, 2014). Available at http://groovekorea.com/article/koreas-black-racism-epidemic-0. [본문으로]
  7. Andy Smith, “Heteropatriarchy and the The Three Pillars of Oppression: Rethinking Women of Color Organizing.” In Color of Violence: The Incite! Anthology. Ed. Incite! Women of Color Against Violence (Cambridge, MA: South End Press, 2006). [본문으로]
  8. Martin Luther King Jr., "Letter from a Birmingham Jail” (16 April 196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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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백인 남성'은 누구인가?




김나미

(미국 Spelman College 교수, 종교학)




     아기예수가 태어난 것을 축하하는 기독교의 성탄절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성탄절이 되면 영화극장에 굳이 가지 않더라도 텔레비젼을 통해서 예수의 생애나 초대 기독교인들이 로마제국에서 박해 받는 이야기, 아니면 성경의 인물들에 관한 할리우드의 ‘고전’영화를 시청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왕중의 왕’, ‘벤허’, ‘쿼바디스’, ‘메시아’, ‘나사렛 예수’, ‘예수 그리스도 수퍼스타’, ‘십계명’등이 있다. 아니면 유툽이나 비디오로 멜 깁슨이 2004년에 제작한 ‘그리스도의 수난’이나 러셀 크로우 주연의 최근 영화인 ‘노아’를 본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영화에 나오는 주연 배우들은, 노아이든, 모세이든, 예수이든, 예수의 제자들이든 거의 대부분이 유럽인의 형상을 한 백인 남성들이다. 주연 배우들과 그들을 옆에서 돕는 ‘선한’ 역할의 배우들이 백인 남성과 여성들이라면 악역은 주로 유색인종이나 검게 분장을 한 백인들이 맡는다. 악역으로 나오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머리 색깔이든 수염 색깔이든, 피부 색깔이든 어느 한 부분이 ‘검게’ 묘사되곤 한다.


    많은 교회들의 예배당과 방들의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예수의 이미지는 또 어떠한가? 눈부신 금발과 푸른 눈을 가진 키가 큰 백인 남성이 하얀 옷을 입고 서 있는 모습. 부드러워 보이는 갈색의 머리와 갸름한 얼굴을 한 백인 남성의 모습. 하얀 양떼들 사이에서 지팡이를 짚고 온화한 미소를 지으면서 서있는 젊은 백인 남성의 모습. 마굿간의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예수와 그의 젊은 부모인 마리아와 요셉도 백인의 모습으로 묘사되곤 한다. 심지어 그 옆을 지키는 천사들도 곱슬한 금발머리의 백인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데 법인류학자들이 (forensic anthropologists) 여러가지 자료들에 근거해서 약 2,000여년 전 예수의 모습과 가장 흡사할 것으로 추정해서 그려낸 이미지는 할리우드 영화에서 묘사해온 ‘백인 남성’ 예수나 교회당을 장식하는 ‘백인 남성’ 예수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아래의 링크 사진 참조][각주:1]. 아마 그렇게 생긴 팔레스타인에서 온 남성이 지금 미국이나 유럽국가들의 공항에 나타난다면 철저한 검문검색을 당하거나 특별한 이유없이 단지 ‘수상해’ 보인다는 이유로 입국이 허용되지 않을 수도 있고, 비행기 탑승이 거부될 수도 있다. 요즘의 국제 정세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이 결코 아니다.  


   


[잘 알려진 워너 살맨(Warner Sallman)의 ‘그리스도의 머리’ (Head of Christ, 1941)[각주:2], 좌측 /  

예수의 실제 모습과 가장 흡사할 것으로 추정되는 이미지[각주:3], 우측] 


    그렇다면, 지금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약 2000년 전에 태어난 것으로 믿어지는 유대인 예수가 언제부터 어떻게 ‘백인’의 모습으로 묘사 되기 시작했을까? 2000여년이 되는 기독교 역사에서 예수의 이미지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를 이 짧은 글에서 충분히 논의할 수는 없지만, 학자들은 반유태주의 정서가 심해지기 시작한 유럽 중세시대부터 르네상스시기를 거치는 동안 유대인 예수가 유럽인의 형상을 한 백인 남성으로 그려지기 시작됬다고 보고 있다. [그리스도의 피부색] (The Color of Christ: The Son of God and the Saga of Race in America)이라는 책을 보면 최소한 지난 5세기 동안 아메리카(미국)에서 진행된 ‘백인’ 예수 만들기와 그 이미지의 재생산 과정에서 백인우월주의, 인종차별주의, 미국의 제국주의, 그리고 기독교의 선교가 어떻게 서로 긴밀하게 연결 되어져 왔는지를 조금은 알수 있다.  


    [그리스도의 피부색]의 공동 저자인 에드워드 블룸과 폴 하비는 아메리카(미국)라는 국가형성기와 아메리칸(미국) 시민권을 규정하는 시기에 예수가 ‘백인’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새로운 이민자들의 물결이 백인 미국들인들로 하여금 “백인성 (whiteness)의 범주와 그리스도의 모습을 백인 남성으로 더욱 엄격하게 규정”[각주:4]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백인’ 예수가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큰 백인 형으로서 ‘반은 악마같고 반은 아이같은’ 외국인들에게 수출”[각주:5] 되어져 왔다고 주장한다. 저자들은 미국에서 그런 ‘백인’ 예수의 모습에 계속 도전하고 저항해 온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종과 관련된 상징적인 힘 때문에 ‘백인’ 예수의 이미지가 계속해서 만연할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미국내에서 ‘백인’ 예수 형상에 대한 저항의 이미지로 ‘검은’ 예수 (흑인의 이미지) 와 ‘붉은’ 예수 (‘인디언’이라고 불리는 원주민의 이미지) 의 형상이 제시되었지만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백인’ 예수의 이미지를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제국주의는 선교사들의 노력과, 세계 도처에 있는 미군기지들과, 글로벌 영화 시장을 통해서 백인 인종차별주의와 인종간의 위계질서를 확장해 나감으로서 ‘백인’ 예수를 다른 나라에도 수출해왔다. 선교를 통해서 성서의 이야기들 뿐만이 아니라 어린이들의 성경공부 교재와, 교회 장식 용품, 다양한 선교용 팜플렛들, 그리고 영화들을 통해서 일정한 이미지들도 전달된 것이다. ‘백인’ 예수가 다른 나라로 ‘수출’되었다는 것은 ‘백인’ 예수에 함축되어져 있는 백인우월주의와 미국의 인종간의 위계질서와 인종차별주의가 다른 ‘작은 형제’국가들에도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편적인 구세주로 만들어진 ‘백인’ 예수는 백인의 권위와 지배에 특권을 부여했다.[각주:6] 에드워드 블룸과 폴 하비는 이런 ‘백인’ 예수가 가장 극적인 방법으로 소비 자본주의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 계기가 영화라는 미디어를 통해서라고 한다. 처음엔 영화산업이 자신들의 ‘도덕성’을 정당화 시키기 위해서 예수를 필요로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미국내와 다른 나라들로 예수를 퍼트리기 위한 수단으로 오히려 영화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각주:7] 백인 선교사들을 통해서 전달 받은 예수의 이미지는 ‘백인 남성’이었고, 그 이미지가 ‘은막의 예수’를 통해서 더욱 견고하게 되었다.  

   

   예수의 이미지가 ‘백인 남성’으로 기정사실화 된 것은 백인우월주의 사회에서 만들어진 현상이지만 한국의 많은 교회들도 이런 ‘백인 남성’ 예수와 그의 ‘아버지’인 하느님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문제는 예수의 피부색이 그저 하얗다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하느님을 대표하는 ‘백인성’이 곧 ‘선함’과 ‘우월성’을 상징하게 되고, 그것과 대조되는 ‘검은색’이나 ‘갈색’은 잘하면 ‘종속적’이거나 ‘열등한’ 상태, 그렇지 않으면 ‘악함’을 상징하게 된다는 것이다. 피부색에 따라 사람의 가치와 가능성이 다르게 평가되고, 피부색에 근거해서 인종간에 우열이 매겨지게 된다. 나아가 그런 인종간의 ‘질서’가 하느님이 의도한 질서라고 믿게 되면서 흑백간의 인종적 위계질서가 신학적으로도 정당화 되어진다.[각주:8] 여기서 물론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예수와 하느님의 백인성뿐 아니라 남성성이다. 백인성과 남성성 이 두가지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지금은 고전이 된 [하느님 아버지를 넘어서] (Beyond God the Father)에서 철학자이며 신학자였던 메리 데일리 (Mary Daly)가 “만약 하느님이 남성이라면, 남성이 곧 하느님”이라고 기독교의 가부장적 하느님 이미지를 신랄하게 비판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하느님이 특정한 성/젠더가 없는 실체이고 한가지로 규정될 수 없는 존재 또는 힘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부장적 사회에서는 하느님이 남성적인 존재로 투사된다는 것이다. 한국의 여성신학자인 이숙진도 여성들을 ‘공적 언어활동’에서 소외시키고 통제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의 하나는 “언어의 차별성을 규범화하여 제도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종교의 가장 핵심 상징인 ‘신’을 ‘남성’으로 표상하고, 소수의 남성들이 성서의 몇 몇 구절에 근거해서 여성들의 설교를 불허하면서 설교권을 장악하는 경우이다.[각주:9] 이숙진은 “가부장적 헤게모니가 작동하는 교회공간”이 여성들의 말할 권리를 제한하는 대표적인 공간이라고 한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하지만 어머니 또는 다른 친밀한 존재로 부르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고 용납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가 될 수 있는 남성들만이 교회에서 말할 권리가 있고 ‘어머니’로 대표되는 여성들은 ‘보살피는’ 역할만을 하도록 노골적으로 또는 암묵적으로 요구되어진다.  


    메일 데일리와 이숙진이 말하는 것에서 좀 더 나아가면, 예수나 하느님이 그냥 남성인 것이 아니라 ‘백인 남성’이고, 그런 이미지가 규범적인 모습으로 받아 들여지면서 ‘백인 남성이 곧 하느님’이 되는 것이다. 여성신학자 로즈메리 류터 (Rosemary Redford Ruether)가 남성 지배적인 신학을 비판하면서 쓴 “남성 구원자가 여성을 구원 할 수 있을까?”라는 글의 주장과 관련해서 워머니스트 (womanist) 신학자 재클린 그랜트 (Jacquelyn Grant)는 “유색여성들, 예를 들어 흑인 여성들은 하느님의 이미지로 부터 두 배나 멀리 떨어져있다”[각주:10]고 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나 하느님과 관련된 신학적 토론에서 남성성만을 얘기하는 것은 인종차별의 경험이 없는 백인 여성의 경험을 표준화하고 우선시하는 것이기에 남성성과 인종 모두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랜트가 이런 주장을 편 것은 이미 25여년 전이고,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성과 계급과 인종은 물론이고, 섹슈얼리티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또한, 조선시대 양반 남성들의 복장인 도포와 갓을 쓴 ‘조선인’ 예수, ‘중국인’ 예수, ‘일본인’ 예수, ‘아프리카’인 예수등 다양한 이미지들의 등장과 이를 뒷받침하는 신학적 주장들도 이미 펼쳐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인 남성’으로서의 예수와 하느님의 이미지는 당연한 것으로 국경을 초월하여 받아들여 지고 있다. 더불어, 하느님은 남성으로 뿐만이 아니라, 호전적이고 적을 정복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 왕정 시대의 군사적 왕이나 군주로도 아무 문제없이 불러지고 찬양되고 있다. 한국사회와 세계 곳곳에 팽배해 있는 인종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를 이데올로기적으로 뒷받침 해온 ‘백인 남성’으로서의 예수와 하느님의 이미지를 더 이상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일 수 없는 이유이다. 


    인간의 ‘다름’에 근거한 차별이 없는 사회를 만들어 가려면 알게 모르게 쓰고 내뱉는 인종차별적, 성차별적, 장애비하적 언어와 이미지, 군사주의와 사회의 군사화를 당연하게 여기는 언어와 이미지가 왜 문제가 되는지를 먼저 묻고 알아나가는 것으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봄과 함께 찾아오는 기독교의 또 다른 큰 명절인 부활절에 부활의 새벽을 알리는 ‘밝은 빛’으로 더욱 ‘눈부셔진’ ‘백인 남성’의 모습이 교회들을 수놓는다면 물어보자. 도대체 그 백인 남성이 누구인지.  


ⓒ 웹진 <제3시대>



  1. http://news.bbc.co.uk/2/hi/entertainment/tv_and_radio/1243954.stm. [본문으로]
  2. http://www.warnersallman.com/collection/images/head-of-christ/ [본문으로]
  3. http://www.popularmechanics.com/science/health/a234/1282186/ [본문으로]
  4. Edward J. Blum and Paul Harvey, The Color of Christ: The Son of God & The Saga of Race in America (Chapel Hill, NC: The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2012), 143. [본문으로]
  5. Ibid., 159. [본문으로]
  6. Ibid., 154. [본문으로]
  7. Ibid., 183. [본문으로]
  8. Regarding the image of Jesus in film, see David Morgan, ed., Icons of American Protestantism: The Arts of Warner Sallman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6); W. Barnes Tatum, Jesus at the Movies: A Guide to the First Hundred Years (Polebridge Press, 1997); Lloyd Baugh, Imaging the Divine: Jesus and Christ-Figures in film (Kansas, KY: Sheed & Ward, 1997); Stephenson Humphries-Brooks, Cinematic Savior: Hollywood’s Making of the American Christ (Westport, CT: Praeger, 2006); Adele Reinhartz, Jesus of Hollywoo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7). [본문으로]
  9. 이숙진, “방언과 간증: 성령운동의 젠더 정치학.” 종교문화비평10 (2006), 235. [본문으로]
  10. Jacquelyn Grant, White Women's Christ and Black Women's Jesus: Feminist Christology and Womanist Response (Scholars Press, 1989), 6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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