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하느님이라는 쉬운 말 앞에서 머뭇거리다


김강기명
(연구집단 CAIROS 연구원)

 
가끔씩 노약자석 앞에 선 임산부에게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우리 때는 밭에서 일하다가 애 낳고 다시 일하고 그랬어."같은 이야기를 하는 장면을 목격하곤 한다. 자리를 양보하면서도 농담조로 저런 이야기를 보태기도 한다. 아마 그 이야기는 사실일 것이다. , 그렇게 했어도 살아남은 이들에게 말이다. 고된 시집살이를 계속 하면서 애까지 나아 길렀는데도 살아남은 사람들, 밭을 매다가 애를 낳고 다시 일을 했어도 살아남았던 사람들만이, 그리고 그들의 자식들만이 ''을 할 수 있기에 그 말은 '사실'이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거지만 이 이야기 뒤에는 수많은 은폐된 죽음들이 있다. "우리 때"의 영아사망율, 산모사망율이란 건 지금과 비교할 수 없는 것 아니었나.

그러니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오늘날 지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주검으로 돌아갔다. 땅은 그들을 파묻어 버렸다. 벤야민이 이야기한 '신적 폭력'이 우리 앞에 스펙타클로 펼쳐졌다. 피 흘릴 틈도 없이 그들은 땅 속에, 뻘과 건축자재 속에 묻혀버렸다. 그들은 말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번 지진은 우상숭배에 대한 신의 심판이다"라던가, "하느님이 사랑이신데 그럴 리가 없다. 우리는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야 한다."던가 하는 말을 할 수 없다. '의미'는 산 자만이 만들어 낼 수 있다. 전자의 이야기가 분노를 자아낸다면, 후자는 꺼림칙함을 자아낸다. 그래, 하느님이 사랑이라고 하자. 그런데 당신은 그 동안 그 하느님을 인간의 생사화복과 자연만물을 주관하는 분이라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그 하느님의 "주관" 아래에서 왜 이런 일이 생겼는가. 지진으로 죽은 자가 말할 수 있다면, 그들은 당신의 말에 항의할 것이다. "하느님이 사랑이시라고?"

"이것은 하느님의 심판이다."가 되었던, "아니다. 하느님은 사랑이다."가 되었든, 그것은 살아남은 자의 발언이며, 신학이다. 어쩌면 모든 구원론이란 구원받은 자의 편에서, 살아남은 자의 편에서만 구성되었던 것 같다. 그들은 살아남았기에 - 그러나 누군가는 죽었기에 - '살아남음'을 해명해야 했다. "나를 살려주신 하느님 감사합니다."에 집중한 자는 사랑의 신학과 구원론을, "하지만 저들은 죽었군요."에 집중한 자는 심판과 징계의 구원론을 각각 열심히 구성했다. 그것을 통해 신은 높여지고, 우리도 신과 함께 높여진다. 그들은 구원론 속에서 살아남은 자의 권리를 누린다. "우는 자와 함께 웁시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예수님입니다."라는 사랑의 윤리조차도 살아남은 자들의 권리다.

우리가 죽은 자들의 편에서 구원론을, 혹은 신학을 전개할 수는 있는 걸까? 아마 없을 것이다. 우리는 단지 그것을 상상해볼 수 있을 뿐이다. 신의 창조물이 거대한 죽음으로 엄습해올 때 그것은 무엇인가. 그 신은 어떤 신인가?(물론 이 질문은 하느님이 생사화복과 자연만물을 주관한다는 고백을 하는 이들에게 해당할 것이다. 애초에 특수한 개인성이나 개별적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고, 모든 것이 인연 속에서 빚어갈 뿐이라 사유하는 불교도에게는 이런 질문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솔직히 불교가 이러한 죽음 앞에서 섣부른 악담이나 위로가 아닌 '빛나는 초연함'을 보여줄 수 있는 위대한 사유라고 생각한다.) 지진이 신의 심판이나 악마의 놀음이 아니라면, 그 신은 무엇보다도 '무의미'. 지진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은 채 단지 도래할 뿐인 것으로서 도래했다. 그렇게 절대적인 무의미로서, 해석되지 않고, 해석될 수 없는 거대한 폭력으로 신은 임재한다. 죽은 자도 말이 없고, 죽이는 자도 말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 산 자들의 시끄러운 그 구원론들, 그 신학은 바로 이 죽은 자들의 '무의미성의 신학' 위에 서 있는 게 아닐까. 삶이란 죽음 앞에서 삶이므로.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자랑할 때, 거기에는 언제나 그림자로서 절대적인 무의미로서의 그 ''이 따라다니고 있지 않은가. "I am who I am"(3:13) 하느님이 그런 존재라면 그 신은 우리의 신학이 묘사하는 신의 모든 성품 - 심판하는 하느님이라던지, 사랑하시는 하느님 같은 - 을 넘어서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우리가 알 수 없는 것, 그래서 '무의미'한 존재로서의 하느님이 모든 '의미'를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산자들로 하여금 살게 하는 위로이며, 따뜻한 도움의 손길이다. "하느님이 사랑이다."라는 말이 그런 위로와 도움을 낳게 한다면 기꺼이 우리는 그 말을 빈번하게, 확신에 차서 외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계속 살기 위해서라도, 죽은 자들의 그 '죽음'을 해명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그때 우리는 하느님의 이 무의미를 마주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우리의 삶은 죽음에 빚지고 있고, 우리의 의미들은 무의미에 빚지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빚을 모두 죽음과 무의미가 탕감해 준 것이다. 죽은 자가 빚을 받을 수는 없으므로. 무의미한 신이 우리에게 의미를 요구할 수 없으므로. 그러므로 이 죽음에 억지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신앙과 종교체제를 유지하려는 시도는 자유인이 된 우리를 다시 채무자로 만드는 것일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다만 '탕감받은 자'로서 죽음 앞에서 예의를 지키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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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바우
    2011.03.24 21:4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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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공감하는 내용입니다.

비극과 구원을 변주하는 새로운 신학의 내러티브를 위하여



정용택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우리가 사는 세계가 점점 재난으로 파괴되어가고 묵시록의 파국적 이미지가 막연한 불안을 넘어 현실적 공포를 자아내고 있는 현재, 수많은 이들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자연 일반의 재난 앞에서 이런저런 질문들을 쏟아내고 있다. “이러한 일들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 “앞으로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우리는 이 파국적 공포 앞에서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하는가?” 물론 그 모든 질문들도 정작 재난을 직접적으로 당한 사람들 앞에선 살아남은 자들, 그래서 미래를 염려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자들에게나 해당하는 사치스러운 질문에 불과할지 모른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재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 가까운 가족과 이웃과 친구를 방금 막 잃어버린 자들에게서 우리가 듣게 되는 가장 절실한 물음은 바로 ‘왜?’라는 질문이 아닐까. 그런 사건이 '어떻게' 일어난 것인가를 완벽하게 복기할 수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인간은 '왜?'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게 된다. 너무나도 당연한 얘기일 텐데, 인간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의미를 먹고 사는 존재이므로. 그런데 과연 이 ‘왜’라는 질문 앞에서 정직하게 이유를 말할 수 있는 담론이나 학문이 존재할까. 물론 나 역시도 “이유가 없다는 것”. 혹은 “인간사의 불가해한 비극 앞엔 그 어떤 초월적/외부적 원인도 없다는 것”. 그래서 “그 이유 없음, 그 무의미함이 가장 잔혹한 ‘실재’(real)일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니힐(Nihil)한 답변들이 갖고 있는 윤리적 가치에 대해서도 충분히 긍정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그리스도인인 이상 왜 인간은 특히 유신론자들은 그와 같은 니힐한 답변에 여전히 만족하지 못할까를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사실 그러한 니힐리즘적 답변들에선 니힐을 신의 부재로 보든, 타자와의 완벽한 통합의 불가능성 또는 인간 커뮤니티의 완벽한 조화의 불가능성으로 보든, 또는 온전한 만족이나 행복, 인간 존재의 영원이나 불멸의 불가능성 등으로 보든, 결국 그것은 애당초 소유하지 않았던 그 무엇이 없음을 확인하게 되는 계기를 의미한다. 욥이 자신의 고난에 사실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처럼 말이다.

The Patient Job by SEGHERS, Gerard
Oil on canvas, 192 x 242.5 cm, National Gallery, Prague

한데 만일 진실이 그런 것이라면 비극적 사건 앞에서 ‘신의 부재’를 말해온, 더 나아가 ‘신의 부재 가운데 현존’을 주장해온 신학의 전통은 그야말로 우울증적 주체들의 병리적 증상 밖에 되지 않는다.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우울증적 주체가 어떤 대상을 애도하는 과정에서 범하는 결정적인 오류는 '상실'과 '결핍(결여)'을 혼동하는 데 있다. 우울증은 소유했던 대상의 상실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 대상을 결핍하고 있었다는 데서 비롯된다. 결국 우울증은 “마치 결핍된 대상을 과거에 소유했지만 나중에 잃어버리고 만 것처럼” 행하기 때문에 일종의 '기만'인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은 대상이란 그 자체로서 결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실재'로서 존재할 뿐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우울증은 대상이 처음부터 결핍되어 있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 다시 말해, 대상의 출현은 그 대상의 결핍과 함께 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대상은 공허/결핍을 긍정하는 것 이외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는 것이다. 대상은 결국 그 '자체로' 실존하지 않는 왜상(歪像)적 실체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울증의 패러독스는 결핍이 상실처럼 기만적으로 전이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마치 대상을 소유했던 것처럼 보이게 한다는 데 있다. 그러한 우울증의 패러독스로 인해 “기만적인 스펙터클”이 나타난다고 지젝은 주장한다. 애초부터 결핍된 대상, 우리가 결코 소유하지 않았던 대상을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우리가 아직 소유하지 않은 대상을 마치 잃어버렸던 것처럼 행동하는 데 있다. 이처럼, 정상적인 애도 과정의 작동에 저항하는 우울증자는 정반대의 형식을 취한다. 대상을 잃어버리기도 전에 그 대상에 대해 지나치고 과도하게 슬퍼하는 기만적인 스펙터클의 형식 말이다(지젝, 『전체주의가 어쨌다구?』, 220-221쪽).

그런데 정말 이것이 모든 종교인들의 '신 부재' 경험에 그대로 다 적용될 수 있을까? 적어도 난 아니라고 본다. 신의 부재에 관한 경험은 결코 근원적인 결여의 문제일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애초부터 없던 것을 나중에 가서야 원래 있었다고 착각하는 '결핍'(lack)이 아니라 오히려 정말로 있음을 경험해온 것을 갑작스럽게 잃어버린 '상실'(loss)이라고 봐야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신의 부재만큼이나 신의 현존 역시 지금 우리에게 너무나 현재적인 경험으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이제는 흔적만 남은 것이라 할지라도 신의 현존은 신의 부재만큼이나 명확한 인간의 경험이다. 우리는 수많은 비극의 사건들 속에서 반드시 신의 부재만을 경험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곳에서 비통한 눈물을 흘리며 희생당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으로 육화하는 신을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의 부재 가운데 현존”(God's presence in absence)이라고 하는 신학의 오래된 통찰은 억압된 것의 귀환 같은 것으로서, 현존을 경험해온 신을 상실한 것, 혹은 그의 떠남/죽음에 대한 인간의 애도이자 신의 귀환을 염원하는 존재론적 갈망으로 이해해야 한다. 물론 이 근원적인 부재의 상실감은 신의 현존에 관한 경험만큼이나 역시 원형적인 차원의 것일 테다. 그리고 그것들은 어떤 것이 먼저라고 말하기 힘든 비선형적 시간의 구조 속에 존재한다. 더 정확히 말해서, “현존-부재-상실감-애도”의 순환 고리 속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역사적(사회적, 자연적) 사건을 경험하며 그 가운데 초월적/원형적 사건에서 무의식적으로 원인을 찾게 마련이다. 그만큼 인간사에서 부딪히게 되는 다양한 차원의 비극적 사건들, 자연재해건 사회적 시스템의 위기에서 초래된 재난이건 인간관계 안에서의 불행한 사건이건 간에 그런 사건들엔 언제나 해석의 잉여 혹은 공백의 지점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고대 이래 전통적으로는 종교나 신화가, 그리고 근대를 거치면서 종교를 제치고 정신분석학이나 문학이 인간이 겪는 문제상황을 정의하고 해석하는 새로운 상징체계로 기능해왔다. 즉 종교/신화/정신분석학/문학이 계속하여 불가해한 사건 앞에서 해석의 공백을 채우려는 인간의 무의식적 욕망에 대해 가장 공감적인 그러나 비합리적인 인과관계의 답변을 제시해왔던 것이다. 이를테면, “일본의 대지진은 우상숭배에 관한 하나님의 징벌이다”, “홀로코스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의 죄과이다”, “홀로코스트는 지라르가 말한 희생양메커니즘의 세속적 회귀이다”, “아우슈비츠에서 죽어간 것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유대-그리스도교 모두의 신이었다”, “남자 유아들의 거세불안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이다”, “전태일이 예수다”, “9ㆍ11은 뉴욕 시민들을 실재의 사막으로 초대한 것이다” 등등. 출처와 맥락은 다를지라도 하나 같이 합리적 인과관계라곤 찾아보기 어려운, 거칠게 말해서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이, 관념론과 유물론이 한데 뒤섞인 그런 진술들이다.

역사 너머에 있는 원형적/초월적 진실, 그 검증도 반박도 불가능한 사건을 역사적(사회적, 자연적) 사건과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 짓는 사고. 그럼으로써 규범화된 역사적 논의를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초역사적 설명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사람들은 그런 해석을 여전히 욕망하며 또한 그것을 긍정한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종교/신화/정신분석학/문학은 설명 불가능한 사건의 잉여/공백을 둘러싸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초월적 원인과 역사적 원인을 융합하고 때론 둘 간의 인과관계를 구조화한 내러티브를 제시해왔고, 소위 탈주술화된 계몽의 시대를 살고 있는 근대인들조차도 여전히 그것을 계속 수용해온 것이다.

물론 각 내러티브 간에도 윤리적, 이데올로기적 편차가 있기 마련이고, 그 가운데는 아주 폭력적이고 비윤리적 얘기에서부터, 한결 세련되고 정교하게 발전된 얘기도 있다. 예컨대, 지금 일본의 대지진 앞에서 그것이 우상숭배의 결과라고 주장하는 일부 한국의 개신교 목사들처럼 아주 저열한 해석도 존재한다. 이들의 내러티브가 고통의 당사자들에 대한 일말의 윤리적 책임도 결여하고 있다는 그런 비판은 일단 차치하고라도, 너무나도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다는 게 문제이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구약시대가 아니다. 원형적 비극이 역사를 초월해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역사적 개연성은 갖고 있어야 한다. 우상숭배와 그것의 징벌로서 재앙이라고 하는 현실적 비극의 인과관계에 관한 히브리성서적 전망은 그것이 써질 당시의 세계에나 적용 가능한(물론 그것도 이스라엘민족 입장에서나) 논리일 뿐이다.

그렇다면, 초월적 비극과 역사적(혹은 사회적, 자연적 비극) 비극을 혼동하지 않으면서도 양쪽을 모두 감안하는 그런 신앙적 시각을 우린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신학은 이러한 해석의 현상에 관해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학문 중 하나일 텐데, 문제는 해석에 관한 해석의 단계에 멈춰야 하는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신학도 초월적/원형적 사건과 역사적 사건 간의 인과관계 혹은 조응관계를 반영하고 있는 자기만의 해석적 내러티브를 생산할 것인가 하는 것. 역사적 비극의 사건의 경우 초월적 사건을 부재하는 원인으로 설정 할 때 해석의 위험성이 분명 뒤따른다. 예를 들어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비극을 예수를 죽인 유대인들의 죄과라고 하는 그리스도교적 역사론의 맥락에서 표현하려는 내러티브는 오이디푸스의 비극이 그랬듯 특정 대상의 희생이라는 결론을 처방으로 제시한다. 무언가가 우리로부터 부재한다는 그 상실감의 조건이 특정한 역사적 비극으로 응축되고 치환될 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특정한 집단이나 인물을 희생양으로 삼는 근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도미니크 라카프라(Dominick LaCapra)식으로 홀로코스트의 불가해성을 나치 이데올로기의 초월적 측면, 즉 전도된 형태의 숭고라는 개념으로 접근할 수도 있다. 근대화/세속화와 더불어 억압되었던 제례, 희생, 구원, 폭력, 속죄양, 정화, 숭고 등의 종교적 요소들이 근대국민국가의 합리적 메커니즘으로 재활성화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홀로코스트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성찰을 진행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역시 문제는 자연적 재해이다. 자연적 차원의 비극을 위와 같은 식으로 초월적 차원과 매개시키는 것이 과연 윤리적/정치적으로 정당한 것인가? 이 물음 앞에선 신학조차도 일단은 침묵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물론 대지진이 일어난 원인이 결국 피해자 자신들에게 있다고 하는 그 어떤 종류의 사이비신학도 우리는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당분간은 침묵 가운데 고통의 당사자들을 최대한 애도하고 위로하면서, 고통에 공감하고자 노력하며, 또한 그들의 회복을 위해 연대하고 도울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가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준비를 조금씩 해나가야 할 것이다.

지금 이 땅에서 겪는 현실적 비극에 대해 다양한 종류의 합리적 설명들이 주어지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초월적인 것에 대한 갈망을 결코 놓지 않고 있다. 초월적인 것과 매개된 설명이 많은 경우 부정적인 결과를 낳아 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적어도 고통의 당사자들 입장에서 생각했을 때 그들이 정말 원한다면, 초월적인 것에 대한 물음을 애써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것보다는 어떻게든 윤리적 정당성을 잃지 않는 선에서 신학적-합리적 설명이 주어져야 할 것이다. 나는 그것이 인문학으로서 신학이 여전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논리를 어떻게 만들어나갈 것인가는 앞으로의 과제겠지만, 설사 성서의 내러티브를 우리가 다 버리고 새로운 내러티브를 만들어내는 한이 있더라도 사람을 살리는 그런 대안적 해석의 내러티브를 제공할 책임이 신학에겐 있음을 잊지 말자. 각축하고 있는 다양한 해석의 현상들 자체를 해석하고 또 각 해석들을 비평하는 것을 넘어, 신학은 자신의 해석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할 텐데, 대단히 섬세하고 지난한 작업이 되리라 생각한다. 물론 실마리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무고한 한 사람의 죽음은 온 인류의 죽음과 같다.” 어쩌면 이러한 반(反)신학적 통찰 위에서부터 비극과 구원을 변주(變奏)하는 새로운 신학의 내러티브를 짜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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