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 서구신학을 쏘다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자기의 윤리 vs. 타자의 윤리

‘자기의 윤리학’[각주:1]으로 세상의 눈물과 회한을 닦을 수 있을까? 레비나스의 의심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도덕적 규범을 강조하고 개인을 그 규범에 종속시키려했던 기존의 윤리에 맞서 니체-푸코-들뢰즈로 이어지는 계열이 ‘자기의 윤리학’을 전개했다면, 레비나스는 ‘타자의 윤리학’을 제안한다. 그의 시도는 근대적 주체가 지녔던 자율성(autonomism)에 반하는 타율성(heteronomism)의 추구라 할 수 있다.

윤리는 그동안 세상의 억압과 불평등과 불의에 맞서는 자율적 주체의 윤리적 행위가 무엇인지 물어왔다. 그러나 타자의 윤리학은 그 주체에서 빠져나올 때 비로소 윤리적 행위가 작동된다고 주장한다. 니체류의 윤리학이 서구 형이상학이 시도했던 초월에 반대하여 자기 안으로의 내재를 전략적 도구로 취했다면, 레비나스는 오히려 서구 형이상학의 초월개념에 대한 적극적인 윤리적 해석과 실천으로 그것이 지녔던 병폐를 극복하려 했던 것이다. 즉, 초월적 세계 저편에 있는 타자를 통해 바로 이곳에 있는 우리를 다시 발견하고, 이곳의 문제를 다시 바라본 것이다. 이때의 타자란 레비나스에 의하면 억압받고 소외된 경계 밖의 사람들이다.[각주:2]

결론과도 같은 서론으로 ‘자기의 윤리’와 ‘타자의 윤리’간의 굵직한 논쟁거리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자기의 윤리와 다른 레비나스로 대표되는 타자윤리의 쟁점을 조목조목 열거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미국 철학계와 신학계에서 레비나스에 대한 연구는 보통 세 가지 측면에서 전개되고 있다. 하나는 후설-하이데거-레비나스로 이어지는 현상학적인 계보를 따라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레비나스에게 영향을 주었던 로젠츠바이크로 대표되는 유대교 전통을 이해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레비나스가 직접 경험한 아우슈비츠에 대한 역사적 이해와 영향, 그리고 아우슈비츠 이후 신학에 대한 연구가 그것이다.

필자는 이번 웹진부터 네 차례에 걸쳐 레비나스로 대표되는 타자의 윤리에 대해 다룰 것이다. 하지만, 나는 위에서 잠시 언급했던 전통적인 레비나스 연구의 경향을 따르지도, 레비나스에 대한 주례사적 비평도 지양할 것이다. 그보다는 레비나스의 서구형이상학을 향한 비판, 신학이 어떻게 악(고통)을 정당화 시키는 기재로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추적, 그 고리를 파헤쳐가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포물선을 그렸던 레비나스의 타자론과 본회퍼의 타자론 간의 비교, 그리고 최종적으로 타자의 윤리가 기독교 윤리학 안에서 차지하는 함의가 무엇인지를 예단하는 것이 이번 시리즈의 전체적 그림이다.

그 전에 일종의 워밍업 차원에서 지난 웹진에서 살펴보았던 라깡의 사유와 레비나스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이는 서구 전체성을 비판하는 레비나스가 지닌 비난의 탄착군이 어느 지점에서 형성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

레비나스와 라깡

근대는 인간에게 자유와 해방을 선사한 시기였다. 계몽이성의 빛은 몽매한 중세의 두터운 장벽을 허물며 새로운 시대를 앞당기는 역할을 하였고, 인류에게 번영과 진보를 약속하는 장미빛 청사진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근대는 인간을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따른 생존경쟁의 난투극 속으로 몰아넣은 시기이고,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을 주체와 객체로 분류하고 주체로 하여금 대상을 지배하게 하는 논리가 싹튼 시기이기도 하다. 주체와 객체간의 간극은 헤겔에 의하면 변증법적 발전과정을 거치며 진화하여 마침내 절대정신에 도달한다. 이것이 바로 근대의 형이상학이 지녔던 주술이었다.[각주:3] 레비나스는 이를 서양철학이 걸어온 ‘전체성의 향수’ 라 지적하고, 개인들의 고유성을 말살하고 타자를 제거하는 폭력적인 개념이라 비판하면서,[각주:4] 홀로코스트를 서양철학의 전체성이 단적으로 드러난 사건으로 지목한다.

우리는 지난 호 웹진에서 라깡에게 있어 타자가 상징계 속의 타자와 실재계 속 타자로 분류되고 있음을 알았고, 상징계속 타자를 향한 욕구를 욕망, 실재계속 타자를 향한 욕구를 욕망과 구분하여 향유라고 불렀음을 기억한다. 라깡적으로 해석하면 홀로코스트는 전체성의 철학이 실재(the Real)를 드러낸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정치적 유토피아를 창조하겠다던 현실의 기표와 욕망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실재였는지가 확인되었던 순간이, 이성의 법칙이라는 상징적 질서 안에 잠재되어 있었던 실재계속 대상소타자가 우리에게 불쑥 다가 온 것이 바로 홀로코스트이다.

이렇듯, 라깡이 말하는 타자성의 진면목은 상징계속 타자에 갇히지 않는다.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타자가 아니라, 향유의 대상으로서의 타자는 (레비나스의 표현대로라면 동일성의 형태로 환원되지 않는) 연기되면서 미끄러져가는 그 무엇이다. 그렇다고 볼 때, 라깡이 말하는 향유의 대상으로서의 타자는 기존의 서양철학의 전체성으로 타자를 포획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레비나스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굳이 양자를 비교하는 이유는 서구 전체성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 두 사람은 일정 부분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도 구체적 분석 틀에 있어서는 다른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레비나스와 라깡은 공히 서구 철학의 전통에서 등장하는 주체에 대한 타자의 전유와 배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동일성의 폭력안으로 말려들어가지 않는 타자를 다시 정초하려 했다. 하지만, 그 방법에 있어 양자는 길을 달리한다. 라깡이 의미의 결정을 계속 연기시키며 미끄러져가는 타자를 상정함으로 전체성으로부터의 탈주를 시도한 반면, 레비나스는 타자를 급격한 초월, 즉 계시의 단계까지 끌어올림으로 현실을 지배하는 전체성과의 과격한 분리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다르다. 이러한 전 이해를 갖고 이제 본격적으로 레비나스의 전체성 비판, 특별히 서구 기독교가 어떻게 그것의 옹호에 기여했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서구신학은 어떻게 전체성을 옹호하였나?

신정론(Theodicy, 神正論)은 의인에게 닥치는 고난과 악의 명백한 현존 속에서도 신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일한다는 사실, 그런 신의 전능과 계획에 의해 악과 고난은 현실적 차원이 아닌 신의 섭리가 작동하는 영역으로 고양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이론이다. 근대적 이성이 사상적인 측면에서 주체의 타자를 향한 동일성의 폭력을 정당화한 사례라면, 그리스도교 신학의 신정론은 인간의 삶 속에서 부딪치는 삶의 타자들(죽음, 고통, 악)을 신앙의 동일성안으로 끌어들였던 또다른 폭력이었다고 레비나스는 평가한다.[각주:5]

돌이켜보면 서구 그리스도교 발전과정에서 등장하는 악의 문제와 고통의 문제에 있어 각 시대마다 다른 해법이 있어왔다고는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신정론적인 전제로 묶을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제도화 과정에서부터 중세까지 교회를 지배했던 계시신학, 이에 반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바탕으로 중세신학을 완성한 스콜라철학은 자연의 조화를 인식함으로써 신에 이를 수 있다는 자연신학을 낳았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인간이 이성을 통해 신을 인식할 수 있다는 스콜라적인 신학을 부정하고, ‘오직 믿음으로’ 신에 이르는 ‘십자가 신학’을 모토로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다시 꾀한 패러다임 전환이었다고 볼 수 있다. 루터가 신앙의 영역에서 이성을 추방시켰다면, 칸트는 이성의 영역에서 신을 제외시켜 물자체의 영역으로 등극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양자는 라깡의 표현대로라면 ‘거울단계’에서 엄마와 아이가 상상적 양자합을 이루는 것과 같이 서로에 기대고 있다. 하나는 초월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하나는 내재라는 이름으로 달리 불릴 수 있겠지만 ‘궁극적 실재의 다차원적인 존재방식(틸리히)’ 이라는 측면에서 양자는 서로의 거울이며 그림자이다. 헤겔은 이런 해묵은 종교 갈등을 ‘세계는 정신의 자기 전개과정’이라는 말로 통합하려 했던 인물이었다.

이렇듯 그리스도교 발전과정에서 치열하게 신론이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고난과 악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양자의 반응은 별반 다르지 않다. 범박하게 표현하면, 신의 섭리와 은총 안에서 예수 잘 믿으면 보상을 받는다는 주장과 신이 우리의 고난과 함께 참여하면서 우리를 통해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일구어 간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리고 양자의 정점에는 공히 십자가신학이 있다.[각주:6] 어쩌면 십자가 신학은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발생했던 악의문제를 신앙인들이 직면할 때 마다 그 사건과 신앙을 하나로 묶어주어 그리스도교의 정체성과 권위가 훼손되지 않도록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준 부적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레비나스는 지난 세기에 있었던 양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 히로시마 등 총체성에 입각한 전체주의의 망령을 목도한 후, 고통의 신학화를 통해 이루어낸 고난의 유의미성, 절대정신으로 나가기 위한 발전단계로서의 고난, 신적 섭리를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고난 등 다양한 이름으로 포장되는 고난에 대한 낙관적 해석을 거부하면서 최종적으로 신정론의 폐기를 선언한다.[각주:7] 만일 레비나스의 지적처럼 신정론이 현재의 고난을 미래의 축복으로 연결시킴으로 현실세계에서 일어나는 부조리와 고난을 신앙적으로 무마시키는 역할을 했다면 맑스의 종교 폄하발언, 즉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표현은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비판들에 대해 어떤 대응을 해야하는가? 다음 호 웹진에서 레비나스 사상을 대변하는 키워드인 ‘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학’과 ‘타자의 얼굴’을 고찰함으로써 서구신학 내지 서구윤리에 대한 반성을 도모하고자 한다.

ⓒ 웹진 <제3시대>


  1. 웹진 제3시대 29호에 실렸던 필자의 졸고 “자기의 윤리I-주체여, 안녕히!” (http://minjungtheology.tistory.com/235)와 30호 기사 “자기의 윤리II-주체여, 다시 한번!” (http://minjungtheology.tistory.com/241)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2. 임마누엘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강영안 옮김 (서울: 문예출판사,1996), 101. [본문으로]
  3. 근대의 프로젝트에 대한 비판을 가하는 많은 글들이 있다. 대부분 백인에 의한 백인의 자기비판 내지 1세계 관점에서 풀어보는 해법으로 머무는 경우가 허다하다. 얼마 전 출판되어 화제를 모으고 있는 『대학의 몰락』(동연, 2011)의 저자인 시카고 신학교 서보명 교수는 1.5세 이민자의 눈으로 서구의 근대성을 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 받는 학자이다. 그의 저서 A Critique of Western Theological Anthropology: Understanding Human Beings in a Third World Context. (New York: Edwin Mellen Press, 2005)은 이러한 취지를 잘 살린 책이고, 특별히 이 책의 1장 The Project of Modern Theological Anthropology: The Question of Freedom 에 근대성의 특징과 문제점에 대한 그의 신학적 분석이 잘 전개되고 있다. [본문으로]
  4. “헤겔철학에게서 정점에 이르는 서양철학이 모두 그렇다. 헤겔은 철학 그 자체의 정점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어떻든 영의 차원이든 분별력의 차원이든 모두 앎으로 해결하려고 한 서양철학 속에서는 어디서나 전체성의 향수를 볼 수 있다. 전체성이 사라지기라도 한다면 그것이 곧 죄인 것처럼 알이다.” -임마누엘 레비나스, 『윤리와 무한』,양명수 옮김 (서울: 다산글방,2000), 98. [본문으로]
  5. Emmanuel Levinas, Entre Nous: On Thinking-of-the-Other. Trans. Michael B. Smith & Barbare Harshav.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8), 96. [본문으로]
  6. 비교적 최근에 출간된 책 중에 미국 신학계내에서 십자가신학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선사하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몇 권의 책을 아래에 소개한다. /// _Jennings, Theodore W., Jr.Transforming Atonement: A Political Theology of the Cross.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9.(한국에서는 퀴어신학자으로 알려진 시카고 신학교 제닝스 교수의 주된 관심사는 바울과 제국과의 관계를 데리다, 지젝, 맑스의 이론을 갖고 바라보면서 신자유주의 체제를 신학적으로 비판하는 것이다. 이러한 틀속에서 제닝스 교수는 십자가 신학이 어떻게 서구문명의 발전과정에서 자리매김을 해왔는지 이 책에서 밝히고 있다) /// _ Douglas, Kelly Brown. What’s Faith Got to Do With It? Black Bodies/Christian Souls. N.Y: Orbis Books, 2005.(유명한 The Black Christ 의 저자이기도 한 Kelly Brown Douglas는 이 책에서 흑인에 대한 lynching과 십자가 신학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그리스도교의 대속론이 흑인들 스스로에게 체제의 폭력을 견디고 순응하게 하는 기재로 사용되었음을 밝힌다.) /// _Terrell, Joanne. Power in the Blood?: The Cross in the African American Experience. N.Y: Orbis Books, 1998.(시카고 신학교에서 윤리와 조직신학을 강의하고 있는 Terrell은 유니언 신학교에 있는 흑인신학의 대부 제임스 콘의 직계제자이다. 그녀는 Womanist 관점에서 십자가 신학을 gender와 race, 그리고 power의 문제로 돌려 바라보고 있다.) /// _Westhelle, Vitor. The Scandalous God: The Use and Abuse of the Cross.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6(시카고 루터란 신학교에 있는 Vitor Westhelle는 미국신학계에서도 보기드문 헤겔좌파 신학자이고 브라질에서 신학수업을 받은 탓에 해방신학에도 조예가 깊으며 유럽에서도 활동한 바 있는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이런 이력을 바탕으로 Vitor는 다양한 문화에서 이해하는 십자가신학에 대한 풍부한 해석을 이 책을 통해 선사한다) /// _Joh, Anne. Heart of The Cross: A Postcolonial Christology. Louisville: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6(시카고인근 에반스톤에 위치한 Garrett신학교에서 Theology를 강의하는 Anne Joh교수는 Drew의 Catherine Keller의 제자이고, Heart of The Cross는 그녀의 박사논문으로 출판 당시 신학계에 화제가 되었던 책이다. Anne Joh교수를 언급할 때 흔히 ‘정(jeong, 情)의 신학’을 먼저 거론한다. 전통적인 서구 십자가 신학에 대한 포스트콜로니얼니즘적인 해석(혹은 여성신학적 해석)을 통한 기독교 구원의 재발굴은 한인 이민 2세로 미국땅에서 신학을 하고 있는 그녀의 고투와 맞물려 많은 착상과 울림으로 미국 신학계로 번져가고 있다. /// _Trelstad, Marit. ed., Cross Examinations: Readings on the Meaning of the Cross Today,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6.(Trelstad가 책임편집에 참여한 이 책은 근래 일고 있는 십자가신학 논쟁을 총망라한 책이라 볼 수 있다. 독일의 Moltmann 교수, 자칫 미시적 차원으로 함몰될 수 있는 목회상담의 영역을 정치와 사회 시스템 등 거시적 차원으로 확대시켰다고 평가 받는 Garrett을 상징하는 미국 목회상담계의 거목 James Poling, 뉴욕 유니언 신학교의 명예교수 Delores S.Williams 등 원로들의 글 뿐 아니라, 시카고 신학교의 Joanne Terrell, 주목받는 일본계 신학자 Rita Nakashima Brock 등 신.구 학자들이 공동으로 이 책에 참여하여 십자가신학의 이슈들을 다시 써 내려간다) [본문으로]
  7. Emmanuel Levinas, Entre Nous: On Thinking-of-the-Other. Trans. Michael B. Smith & Barbare Harshav.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8), 97. [본문으로]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1. 2011.06.17 15:08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편집자의 실수로 이번 원고에 지난 호 원고 한 문단이 삽입돼 있었습니다. 지금은 수정했습니다만, 본의 아니게 혼동을 드린 것 같네요. 이상철 선생님과 이미 글을 읽으신 모든 분께 죄송한 마음을 전합니다.

자기의 윤리(II) – “주체여, 다시 한번!”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프롤로그: 한국땅에서 윤리적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울화

 

돌이켜보면 학창시절 도덕과 윤리는 늘 재미가 없었다. 회상해보라, <바른생활 (초등학교) -도덕(중학교) -국민윤리(고등학교)>로 이름을 달리하여 불렸던 그 과목들이 얼마나 지루했었나를! 그것은 한국이라는 집단병영(?) 시스템 속에서 독재자들의 통치 이데올로기와 맞물려 새마을 운동(박정희)’정의사회 구현(전두환)’으로 대표되는 윤리적 슬로건으로 국민들에게 다가왔다.  잘 살아보세!’로 대변되는 유신정권의 국면전환용 구호와 오랜 윤리적 주제였던 정의를 자신들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끌어들여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정언명령으로 각색한 제5공화국의 그것은 서구윤리 사상의 양대축이라 할 수 있는 목적론적 윤리와 의무론적 윤리를 떠올리게 한다. 전자는 에피쿠르스학파-영국의 경험론-공리주의로 계승되었고, 후자는 스토아학파-대륙의 합리론-칸트로 이어지면서 윤리적 논쟁을 벌여왔음을 고등학교 국민윤리 교과서에 있었던 서구 윤리사상의 발전이라는 장에서 우리는 이미 배웠다.

 

하지만, 대한민국에는 전혀 섞일 수 없는 이 두 가지 윤리적 전략을 아우르는 절대적인 음성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분단이다. 한국의 분단체제, 반공이데올로기는 수 천 년간 이어져왔던 서로 다른 윤리적 행위의 원칙을 간단히 하나로 화해시켰다. 그리하여 적어도 남한 땅에서 국민윤리란(북한도 마찬가지겠지만) 북과 맞서는 거대한 상징의 체계,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며 엄하게 타이르던 아버지의 권위,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말라는 금기의 영역으로 등극한다. 어쩌면 한국은 이러한 틀 속에서 집단과 체제와 이데올로기에 의한 의식의 세례가 거의 무방비적으로 이루어지는, 얼마 전 돌아가신 리영희 선생의 표현대로 야만의 사회이고, 반면 그 이데올로기가 지닌 음모가 놀라우리만큼 약발이 받지 않는 문명화된(?) 사회이기도 하다.

만일, 의식과 집단(체제), 의식과 이데올로기의 문제에 천착했던 푸코가 이렇듯 기이한 한국땅에서 활동했다면 뭐라 말했을까? 이제서야 겨우 본론으로 넘어간다.

   

 

푸코 (Michel Foucault, 1926-1984)

푸코 (Michel Foucault, 1926-1984)

 


드디어, 푸코와 만나다

 

푸코는 1984 5 25, 그의 나이 57세가 되던 해에 에이즈로 사망했다. 현대 프랑스 철학의 전개과정에서 발생했던 몇몇 뭉클한 장면이 있는데, 하나는 1995년 레비나스가 죽었을 때 데리다가 레비나스의 영전에서 행한 아듀, 레비나스라는 추모사이다. 그다지 관계가 좋지 않았던 둘이었지만 점점 본인 사상의 후반으로 갈수록 레비나스에 다가갔던 데리다였기에 그의 슬픔은 더했다. 레비나스가 죽기 10년 전 푸코가 죽었고, 레비나스를 데리다가 추모하듯, 푸코에 대한 추모는 그의 절친했던 친구인 들뢰즈의 몫이었다. 들뢰즈는 별다른 말없이 푸코가 병상에서 최후로 완성한 성의 역사2권인 <쾌락의 활용>, 3 <자기배려>의 서문을 떨리는 목소리로 읽어 내려간다.   

 

데카르트가 보편적이면서도 무역사적인 코기토적인 주체를 말하고, 칸트가 경험에 주어진 한계를 이성을 통해 묶음으로 선험적 주체의 탄생을 기획했다면, 푸코는 성의 역사 3, <자기 배려>에서 이런 근대적 주체와는 구분된, 그 자신의 독특한 성과이자 사상사의 전개 과정에서 주체논의의 새로운 물꼬를 틀었다고 평가받는 자기 soi/self’ 개념을 기존의 주체 subject’ 대신 사용하기 시작한다. 그후 푸코의 자기개념은 지난 호 웹진에서 살펴보았던 주체의 죽음이 운운되는 시대속에서 다시금 주체에 대한 새로운 생기를 부여하였다.[각주:1]

 

그래도, 주체는 계속된다!

우리가 말하는 근대, 즉 인식주체의 인식대상을 향한 포섭과 간섭에 강한 능력과 권한이 부여되었던 그 시대! 인식주체가 기획한 구성아래 세계 축조의 가능성이 조심스레 예감되던 그 시절! 근대적 인간이란 루카치의 표현대로라면 잃어버린 고향을 찾아 길을 떠나는 소설속 주인공이라 볼 수 있다. 그것은 마치 무협지의 단골 내용으로 등장하는, 어렸을 때 원수로부터 부모를 여의고 하인 (어김없이 하인은 도망 중 장렬히 사망하고 숨이 넘어가려는 순간에 주인공의 출생의 비밀을 약간 흘린다) 등에 업혀 산사로 피신한 주인공(인식주체)과 같다. 그는 산에서 우연히(아니, 필연적으로) 신의 음성을 지닌 스승을 만나고 각고의 노력 끝에 어느 경지에 이른 후 터미네이터가 되어 하산한다. 그 후 자신의 부모를 죽인 원수들(인식대상)을 찾아 하나씩 제거하는 내용이 무협지 후반에 전개된다. 이 과정에서 반드시 삽입되어야 하는 것이 인정투쟁이다. 원수는 성장하여 자신에게 칼을 겨누는 주인공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그 당시 어렸던 네가…! 그때 내가 너를 죽였어야 할 것을분하다!!”, 주인공은 이를 받아 내가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네가 아느냐? 내 칼을 받아라!” 노예의 복종(내지 패배)과 주인의 선포(내지 승리)가 만방에 알려지는 순간이다.   

 

위의 무협지 플롯은 근대적 인식론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화이다. (인식)주체가 (인식)대상을 잠식해가는 과정이 진보이고 획득이며 발전이라는 근대적 패러다임하에서 객체는 무릎꿇어 인식주체를 향해 패배와 복종을 인정하여야 한다. 그 객체는 자연일 수 있고, 식민지 국가일 수 있으며, 당시에는 세상속에 섞여 사람들과 함께 평화(?)롭게 살았으나 지금은 사라진 정신병자, 부랑아, 동성애자, 히피들그 밖에 인식주체와는 다른 무리들, 즉 타자라 할 수 있다. 근대는 체제에 의해 타자를 향한 인정투쟁의 거대한 망이 만들어지던 시대였다. 그 망을 통과한 자만이 체제안으로 편입되고 망에 걸린 무리들은 버려진다.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푸코의 근대비판은 시작되는데

 

말과 사물, 광기의 역사 등으로 대표되는 푸코 초기 계보학적 연구들이 역사적으로 힘과 지식의 역학속에 구성된 주체의 허위를 폭로했던 작업이라면, 성의 역사로 대변되는 푸코의 후기 작업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허물이 벗겨져 탈영토화된 주체를 어떤식으로 재영토화 시키는가의 문제, 즉 자기가 자기를 형성하는 방식에 관한 몰두로 그 관심이 바뀌었다. 이를 윤리적 화두로 전환하면, 근대 주체 철학 위에 서있었던 도덕이 보편에 개별을 맞추는 입법의 차원이었고, 그러한 도식속에서 윤리란 그 명법을 내 것으로 끌어당겨서 (자발적, 의식적으로) 자기 스스로를 보편을 향해 투항하게 만드는 그런 주체를 위한 윤리였다. 반면, 푸코의 후기사상에 나타나는 윤리적 판단의 근거는 보편보다는 개별에 포커스가 있다는 점에서, 칸트류의 의무론적 윤리나 니체가 비판했던 노예의 도덕과는 사고의 지점도 다르고 전개양상도 판이하다.

 

푸코는 근대 프로젝트 안에 펴져있던 총체적 난맥의 첫 단추를 주체규명에서부터 찾았고, 이런 이유에서 주체대신 자기를 제안한다. ‘자기라는 말은 기존의 철학에서 말해왔던 주체개념과는 다른, 자기의 욕망(혹은 본색)이 더 충실히 반영된, 즉 체제가 선사하는 이데올로기로부터 기름이 빠진 주체라 할 수 있다.[각주:2] 비록 근대적 주체는 사망했지만, ‘자기라는 이름이 부여된 새로운 주체가 등장한 셈이다. 이는 데카르트이래 등장한 근대적 주체가 절대적 주체로 등극한 이래 한차례도 흔들리지 않았던 서구 주체중심의 철학에 대한 의식적이고도 악의(?)적인 반동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고대 그리스로!

 

서구 현대 사상가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는 그들이 당면한 문제의 해법을 찾아 많은 경우 고대 그리스를 향해 회귀한다는 점이다. 마치 교회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를 외치는 듯 말이다. 대표적으로 하이데거가 그랬다. 서구 형이상학에 대해 평하면서 존재망각의 역사였다고 비판하던 하이데거가 내세운 전략이 바로 고대 그리스로의 귀환이었다. 이는 근원적 존재체험과 기원에 대한에 여전한 미련과 애착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하이데거 안에 깃들어있는 사상적 혹은 미적 보수성을 엿볼 수 있다.[각주:3]

 

푸코 역시 자기의식의 단초를 고대 그리스로부터 끌어온다. 하지만 근대적 주체에 대한 문제제기 후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 고대그리스의 존재체험으로 돌아가자고 제안했던 하이데거와는 달리, 푸코는 근대적 주체가 해체되어야 하는 이유를 오히려 고대그리스의 존재 체험에 기대어 전개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양자는 확연히 구분된다.[각주:4]

 

고대그리스인들에게 있어 선함이란 착함보다는 좋음이었다. 즉 내게 쾌를 선사하는 것이 선한 것이고, 내게 불쾌를 선사하는 것은 악한것이다. 물론 그것은 감각적인 쾌락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정신적인 영역까지를 포함한 쾌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윤리학에서 인생의 목표를 행복이라 했을 때 이는 전적으로 좋음을 의식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푸코가 의도했던 것은 그리스적인 좋음을 다시 현대의 윤리적 테마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가 진정 원했던 것은 어떤 보편과 규범에 의해 개인이 함몰되지 않고, 자기가 자발적으로 자기를 구성하는 테크놀로지의 추구이다. 그런 의미에서, 푸코에게 있어 윤리란 미학적 성격을 띤다.[각주:5] 전통적 의미에서 미적 판단력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영향을 받아 예술작품 안에 스며있는 이데아의 순도를 측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모방(복사)의 정도가 정교할수록 진품으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현대 미학에서는 미적 주체와 미적 대상간의 일치라는 전통적인 미에 대한 의식을 거부한다. 오히려 이데아가 지닌 아우라의 파괴를 통한 새로운 감동, 새로운 가치 창출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한다. 푸코는 이러한 현대 미학의 패러다임을 그의 윤리학으로 초대한다.

 

에필로그: 결국, 자기의 윤리란?

 

윤리학은 자고로 본질주의와 토대주의에 입각해 이데아를 상정한 후 윤리적으로 그 본질에 따라 사는 삶을 안내하는 학문이었다. 그러나 자기의 윤리학은 이 세계를 근본적으로 생성으로 보기 때문에 뭔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 시간의 경과속에서 창조적인 삶을 사는 것, 그리고 동일성안으로 들어온 창조와 변화를 수렴하고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생성과 창조의 과정속에서 동일성을 파악하는 것이다. 즉 자기가 자기의 도덕을 어느 누군가의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내고, 그렇게 만들어진 자기의 윤리를 보편성으로 관철시키기 위한 설득과 대화와 연대의 과정 모두가 윤리학의 범주가 된다. 종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윤리학이 등장한 셈이고, 이에 대한 발전과 도전과 응전은 지금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 웹진 <제3시대>


  1. “자기에 대한 실천에 있어 그 실천의 주된 목표는 자기와의 관계속에서, 바로 자기 자신 속에서 찾아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이러한 (자기로의) 전환은 우리 자신의 관점의 이동을 뜻한다.”- Michel. Foucault, 『The Care of the Self - Vol 3 of The History of Sexuality』, Translate by Robert Hurly. (New York: Pantheon Books, 1986), 64-65. [본문으로]
  2. “자기체험은 단순히 통제된 힘이나 언제나 반항할 준비가 된 힘에 대한 지배력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자신에 대해 느끼는 일종의 기쁨이다. 이렇게 자기 자신에 접근할 수 있는 자는 자신을 즐거움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자신의 현 모습에 만족할 뿐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마음에 들게 하는 것’이다.”- Michel. Foucault, 『The Care of the Self - Vol 3 of The History of Sexuality』, Translate by Robert Hurly. (New York: Pantheon Books, 1986), 66. [본문으로]
  3. 하이데거가 걸어갔던 그리스전통에로의 복귀에 대한 부분은 2009년 9월 25일 웹진에 게재되었던 졸고 “메멘토모리-죽음을 기억하라(3)” (http://minjungtheology.tistory.com/119)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4. 『성의 역사』 2권과 3권은 주로 고대 그리스.로마의 성도덕을 다루면서 윤리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시도하는데, 특별히 자기이해와 고대 그리스와의 연관에 주목하려면 아래 부분에 주목하기를: Michel. Foucault, 『The Care of the Self - Vol 3 of The History of Sexuality』, Translate by Robert Hurly. (New York: Pantheon Books, 1986), 57이하. [본문으로]
  5. “왜 우리의 삶은 예술작품이 될 수 없는가? 사물은 예술의 대상이 되는데 우리의 삶은 왜 그렇지 못하는가?” - Michel. Foucault, ‘On the Genealogy of Ethics: An Overview of Work in Progress’ in 『The Foucault Reader』, Edited by Paul Rabinow. (New York: Pantheon Books, 1984), 350. [본문으로]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자기의 윤리(I) – “주체여, 안녕히!”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프롤로그: 포스트모던 윤리의 지형

포스트모던 윤리학의 계보를 투박하게 분석하면, 니체로부터 기원하여 푸코, 들뢰즈로 이어지는 흐름이 있고, 다른 하나는 레비나스와 (후기)데리다로 이어지는 흐름이 있다. 한가지를 덧붙이자면 요근래 급격하게 부상하고 있는 슬로베니아 학파를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실재(the Real)의 윤리를 들 수 있다. 기본적으로 맑스와 라깡의 세례를 받은 이 그룹에 속한 학자들에는 21세기 최대의 스타철학자라고 불리우는 지젝과 칸트에 대한 라깡적 독해를 시도한 <실재의 윤리>의 저자 주판치치가 있다. 요약하면, 포스트모던 윤리는 크게 세가지 흐름으로 전개되고 있는데, 니체로부터 시작되는 자기의 윤리, 레비나스와 데리다로 대변되는 타자의 윤리, 그리고 슬로베니아 학파를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는 실재의 윤리가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논의의 집중을 위해 전자의 두 경우에 포커스를 맞추어 내용을 전개할 것이고, 새롭게 등장하는 실재의 윤리에 대한 부분은 다음의 과제로 넘긴다.

우선 두 그룹의 공통점을 지적하자면, 서구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자행되었던 개별자를 향한 동일자의 무차별한 폭력에 반대하였다는 점이다. 이런 까닭에 많은 경우 레비나스와 데리다가 성급하게 포스트구조주의[각주:1] 계열의 학자로 묶여서 알려지게 된다. 물론 해체주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초기 데리다를 포스트구조주의 계열로 분류하는 것은 어느 정도 납득이 가지만, 적어도 90년대 이후 자신의 해체주의적 이론을 윤리적 테마로 이행하던 시기의 데리다는 오히려 레비나스를 닮았다. 레비나스는 애초부터 니체-푸코라인과는 다른 출발점이었다. 후설과 하이데거로 이어지는 현상학적 계보를 따라 레비나스의 사유는 시작되었고, 특별히 유대교 신비주의의 영향이 그의 문장 곳곳에 포진하고 있다. 이렇듯 서로 다른 포물선을 그려왔던 양 진영은 서구 형이상학이 지니는 전체성의 폭력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를 이루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전략적인 면에서 니체-푸코-들뢰즈로 이어지는 계열은 자기의 해석학으로 치달았고, 레비나스와 (후기)데리다는 타자의 발견에서 그 해결점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다르다.

포스트모더니즘, 니체에 기대다!

영어원서를 읽다보면 Subject 라는 단어를 만날 때 만큼 모호하고 이중적인 해석을 하는 경우도 드물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주체, 실체, 자아, 주제라는 뜻 이외에, ‘신민(臣民), 신하, (집합적)국민이라는 뜻도 Subject 안에 들어 있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더니, 급기야는 형용사로 쓰일 때는 복종하는, 지배를 받는, 당하기 쉬운,…에 빠지기 쉬운으로 해석을 해야한다.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었던 주체, 강철과도 같은 불패의 정신을 지녔던 그 주체를 비웃기라도 하듯 사전 깊숙한 곳에는 우리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주체의 숨은 뜻이 버젓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니체 (Friedrich Nietzsche, 1844-1900)


이렇듯 가려져 있었던 주체를 수면위로 강하게 끌어올린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니체였다. 기본적으로 니체에게 있어 세상이란 더 이상 나를 어떤 합리적 구조에 가두는 아폴론적인 세계가 아닌 디오니소스적인 축제가 벌어지는 공간이다. 이런 이유로 세상은 나의 욕망이 끊임없이 활기치는 놀이터 같은 곳이 된다. 우리가 지난 호 웹진에서 살펴보았듯이, 니체가 도덕의 계보학에서 밝힌 주인의 도덕이란 이러한 세계 속에 있는 나의 삶을 긍정하고, 그런 삶의 유지를 위해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상상하고 생성시키는 윤리이다. 이는 근대성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투명하고 통합된 주체의 도덕도 아니고, 엄숙하고 너무나도 체제 순응적인 노예의 도덕일수도 없다. 어떤 에네르기에 의해 분열되고 그래서 앞날이 불투명하고 혼돈에 쌓인 그런 주체를 위한 도덕인것이다.[각주:2]

이렇듯 니체의 사상 안에 함의된, 체제가 선사하는 이데올로기와 그 이데올로기에 의해 길들여진 주체에 대한 거부는 집단에 대한 딴지와 개인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모색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원조격으로 받아들여진다. 니체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리오타르가 포스트모던의 조건에서 밝힌 것처럼 거대담론의 붕괴와 작은 이야기들의 발견으로 전승된다.[각주:3]  진정 우리 삶을 지배하는 중요한 포인트는 거대담론이니 공동체니 역사의 발전이니 하는 선언적인 구호들이 아니다. 그보다는 작은 이야기들, 예를 들어 개인은 누구인가? 집단과 이념의 그늘에서 개인은 어떻게 살아남아 왔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이다.[각주:4] 이 질문은 완강했던 근대적 주체의 붕괴를 예고하는 서술임과 동시에 새롭게 번역되는 주체에 대한 기대와 전망으로 우리를 이끈다.

Episode: 내가 주체로 서기까지

결국, 포스트모더니즘이 지적하고 있는 주체란 어떤 집단에 몸담고 난 이후에 만들어진  주체이고, 어느 특정 이념에 노출된 이후 형성된 그 주체이다. 예를 들어, 한국사회에서 남자로서의 주체성을 담보하려면 군대에 갔다와야 한다. 병역미필자는 해외에 나갈 때도 제한이 있고, 이력서를 쓸라치면 어딘가 마음 한 구석이 항상 꿀린다. 사람들은 군대를 갔다와야 사람이 된다고 하는데, 그럼 군대 가기 전 사람과 군대갔다 와서 된 그 사람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고백하자면 내 경우는 군대에서 세상을 살아가면서 체득해야 할 온갖 나쁜 것은 다 배웠다. 굴욕에 복종하는 법, 짜웅(아첨)하는 법, 여자를 오로지 즉물적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법, 가라(허위)로 보고하는 법, 인간을 격멸하는 것까지그런데 세상은 그런 군대를 나온 남자를 사람됐다고 사회적으로 인정한다.

공적차원에서 내 주체되기의 완성이 군대를 통과한 이후의 일이라면, 그것의 시작은 그 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지금도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띄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을 거의 다 외우고 있다. 중학교 1학년 1학기 중간고사 도덕 시험이 그것을 외워서 쓰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국민교육헌장은 그 이후로 내가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에 이어 통째로 암기하고 있는 세 번째 주문이 되었다. 당시 중간고사 시험을 보면서 국민교육헌장의 마지막 문장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를 쓰고 난 후 책상에 엎드려 펑펑 울었던 기억이 있다. 내 자신이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띄고 있다는 것, 내가 민족의 역사를 창조할 일꾼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감격스러웠고 그런 조국이 너무나 자랑스러웠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원통하고 분하다. 그 어린아이를 그렇게 기만하다니! 어떻게 나라 전체가 이런 사기극에 집단적으로 공모할 수 있는가?

주체의 죽음! 주체여 안녕 !!

군대를 갔다오지 않아도 사람이 될 수 있고, 구태여 국민교육헌장을 외우지 않아도 삶은 넉넉히 지속된다. 누군가가 창조하려했던 새 역사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초를 당했는지 우리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않은가! 병역을 필해야만 비로소 한국땅에서 남자 노릇 할 수 있는 그 주체!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되새기며 새 역사를 창조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 세례를 받으며 자라난 그 주체! 어쩌면 주체란 이런 필터링을 거친 후에 걸러진 찌꺼기가 아닐까? 그 필터는 군대일수도 있고, 국민교육헌장일수도 있으며, 그 밖의 여러가지 이름과 가능성으로 현존하며 그 다음을 대기하고 있다. 현대 철학자들이 언급하는 주체의 죽음이란 바로 그렇게 필터링된 주체에 대한 사망선고인 셈이다.  (다음 호에 계속)

ⓒ 웹진 <제3시대>


  1.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논쟁: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의 경계를 나누고 그것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에 시간을 할애하는 일은 필자가 보기에는 소모적인 일이다. 왜냐하면 구조주의의 주창자라 평가받는 레비-스트로스, 알튀세, 라깡, 푸코 등의 학자들 스스로가 구조주의의 틀 안에 묶이는 것을 거부했고, 그 거부의 몸짓들을 투박하게 포스트구조주의라 부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조주의/포스트구조주의에 대한 변별점을 분석하는 작업보다는 오히려 구조주의/탈구조주의 논쟁이 사상사에서 차지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 것이 더 유익한 논의가 되리라 본다. 서구 근대 형이상학을 대표하는 데카르트의 코기토(생각하는 나) 중심의 철학은 시대를 달리하며 현상학과 해석학, 실존주의로 이름을 달리하면서 포물선을 그리게한 동력이었다. 물론 이것은 대상이 주체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전 시대의 형이상학과는 차이가 있지만, 인식 주체가 인식 대상을 포섭한다는 점에서는 여전한 동일자의 폭력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구조주의는 이에 맞서 인간의 인식과정이 결코 투명한 의식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들은 인간의 의식으로는 파악이 안되는 구조(언어, 문화, 역사, 무의식 등) 안에서 인간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한다고 본다. 인간이 선천적 종합판단과 의지적 결단에 의해 행위하는것 같지만, 기실 그것은 어떤 짜여진 판에 의해 의도되어진 예상 가능한 함수라는 것이다. 이는 코기토적 주체에 대한 정면도전이라 할 만하다. 구조주의 처음 시작은 소쉬르의 언어학, 레비스트로스의 문화인류학등 과학적 분석방법에서 출발을 했지만, 이는 점차 영역을 확대하여 서구사상 전반에 대한 비판(반이성주의, 반인간중심주의, 반민족중심주의, 반서구중심주의 등)으로 이어지는데 그 일련의 과정을 포스트구조주의라 부른다. 포스트구조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포인트는 이론, 이념, 주의등이 지닌 보편화의 가능성과 영토화의 음모를 의심하는 것이다.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구조주의, 더 나가서 근대성이 닦고 조이고 기름칠하면서 공들인 체제 어딘가에 틈이 생겨 물이 한 방울씩 똑똑 떨어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닦고 조이고 기름칠해서 그럴싸하게 보이는 그것이 실재가 아니라, 지금 실재라고 일컫는 것의 보이지 않는 어느 구석에 틈이 생기고 그 틈새로 무언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는 것이 진짜 실재라고 말이다. 라깡은 이를 ‘증상’이라 말하고, 데리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는 ‘해체불가능자’이다. 지젝은 아예 대놓고 이를 ‘실재’라 부른다. 물론 구석에 난 틈과 그 틈을 통해 스며나오는 불순물은 이론의 체계 내에서는 비합리적, 비이론적, 비학문적 요소이지만, 포스트구조주의는 오히려 이 부분을 통해 이론의 체계가 성립된 흔적을 역으로 추적하면서 이론에 주름을 내어 결론적으로는 이론의 표면적을 넗히는 역할을 한다. 기존 이론의 문제를 지적하고 무화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것의 허위를 인정하지만 안고 나가는 애정이 포스트구조주의에 스며있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포스트구조주의는 근대라고 일컬어지는 전 지역에서 파생된 문제에 대한 변론이자 땜질이며, 그러기에 그들에게 있어 사유는 단절과 봉합이 아닌 개방과 재서술의 형태로 미끄러져간다. [본문으로]
  2. 니체식 (흔들리는 혹은 욕동하는) 주체를 잘 드러내는 문장을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용한다: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내가 나의 모든 의지를 다해 의지해야만 하는 곳에, 내가 사랑하고 또 소멸하기를 원하는 곳에, 하나의 상이 단지 상으로만 남아 있지 않은 곳에 존재한다” - Friedrich. Nietzsche.「Thus Spoke Zarathustra」in the Portable Nietzsche, Edited by Walter Kaufmann. (New York: The Viking Press, 1968), 235. [본문으로]
  3. J.F. Lyotard. 『The Postmodern Condition: A Report on Knowledge』, trans. Geoffrey Bennington and Brian Massumi (Manchester: Manchester University Press, 1984), 60. [본문으로]
  4.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은 이 대목에서부터 시작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사회의식을 결여하고 있다는 문제제기가 그것이다. 작은 이야기들을 발굴하고 자기의 의지와 욕망에 대한 한없는 관용이 냉전 종식 이후 몰아 닥친 신자유주의 시스템과 교묘한 결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미시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작은 이야기들의 발굴을 통한 자기의 확장이 거대담론을 다시 복원하고 거시세계의 건강성을 담보할 수 있으리라는 그들의 낙관적 견해는 과연 어느 정도 타당한 것인지? 이같은 지적은 90년대 초.,중반 사상계를 달구었던 중요했던 이슈 중 하나였다. [본문으로]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BLOG main image
by 제3시대

공지사항

카테고리

웹진 <제3시대> (831)
특집 (8)
시평 (94)
목회 마당 (60)
신학 정보 (136)
사진에세이 (39)
비평의 눈 (72)
페미&퀴어 (25)
시선의 힘 (135)
소식 (153)
영화 읽기 (32)
신앙과 과학 (14)
팟캐스트 제삼시대 (12)
연구소의 책 (13)
새책 소개 (38)
Total : 352,474
Today : 102 Yesterday : 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