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8일 한숨결교회 열두 번째 예배 메시지

우리에게 여전히 진리가 필요하다면.......


정용택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빌라도가 예수에게 물었다. “진리가 무엇이오?” (요한복음 18:38)
당신들이 진리를 알지니, 그 진리가 당신들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8:32)


1. 진리가 무엇이기에?

요한복음 18장 28절부터 38절까지의 본문은 “빌라도의 심문”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가 빌라도 앞에 서게 되어 그로부터 심문을 당하는 이야기는 네 복음서 전체에 모두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역시나 이 부분에서 다른 복음서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에서 빌라도는 예수에게 딱 한 가지만 질문합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그러자 예수는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합니다(23:3). 마가복음과 마태복음도 동일한 질문과 답변이 한차례 오고가고, 다음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예수가 고발을 당하는데도 정작 자신을 위한 아무런 변호도 하지 않고 있으니까 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라고 묻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되고, 빌라도는 예수의 이런 침묵을 놀랍게 여기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반면에 요한복음은 예수와 빌라도 사이에 최소한 네 차례의 질문과 대답이 오고 가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질문까진 공관복음서와 동일합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18:33). 그런데 그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공관복음서와 전혀 다릅니다. “내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말은 너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너한테 해 준 말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냐?” 예수는 빌라도의 질문을 다시 자신의 질문으로 바꾸어서 빌라도에게 던집니다. 이번에는 빌라도가 답변을 합니다. 누가 심문을 하고 누가 심문을 당하고 있는 것인지 헷갈리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빌라도가 대답합니다. 그리고 이 대답은 다시 예수를 향한 질문이 됩니다. “내가 유대인이냐? 유대인도 아닌 내가 니가 유대인의 왕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겠느냐?” 그리고 또 묻습니다. “니네 나라 사람들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나한테 재판하라고 넘겼다. 너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그들이 너를 나한테 넘긴 것이냐?”

그런데 예수는 자신이 뭘 했는지는 말하지 않고, 그냥 자신의 ‘나라’가 어떤 것인지에 관해서만 말합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의 전체적인 문맥에서 이 말은 정확히 종말론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단순히 세속적인 의미의 왕국에 반대되는 영적인 왕국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시간적인 구조에 대비되는 그런 나라입니다. 왕국은 왕국이되, 지금 여기의 시간대, 즉 세상에 속하는 왕국이 아니라 도래하고 있는 종말론적 시간의 구조 안에 있는 그런 나라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빌라도가 제대로 알아들을 리 만무합니다. 그는 재차 묻습니다. “됐고! 그러니까 니가 왕이라는 것 아니냐?” 예수는 대답합니다. “그래. 맞다. 나 왕이다. 내가 왕이 되려고 태어났고, 왕이 되기 위해 이 세상에 와서 진리를 증거했다. 진리에 속한 사람이라면 내 말을 알아 듣게 되어 있다.” 그러자 빌라도가 마지막으로 의미심장하게 묻습니다. “진리가 뭥미?” 예수와 빌라도의 문답이 시종일관 뭔가 엇박자를 내고 있다가 드디어 빌라도가 예수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고 핵심적인 물음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예수의 답변이 없습니다. 예수는 진리가 무엇이냐는 빌라도의 질문에 과연 무엇이라 답변했을까요? 혹시 다른 복음서에서처럼 침묵했을까요? 오늘 메시지의 초점은 예수에게 진리란 무엇이었고, 나아가 예수의 그러한 진리 이해가 오늘 이곳의 우리 한숨결교회에 어떠한 성찰의 여지를 제공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보는 데 있습니다.

2. 정말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했던가요?

요한복음에는 진리, 곧 알레떼이아(αλληθεια)라고 하는 단어가 유독 많이 등장합니다. 알레떼이아가 신약성서 전체에서 98회 정도 등장하는데, 요한복음에서만 무려 20회나 등장합니다. 바울 서신을 다 합쳐도 44회 정도 나오고, 공관복음서 세 권을 다 합쳐도 7회 밖에 나오지 않는 것을 감안하면 요한복음 저자가 얼마나 이 단어를 선호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요한복음 어디에서도 진리가 무엇인지를 명쾌하게 설명해주고 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저 세례 요한이나 예수가 이 진리에 대해 증언하러 왔는데,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이고, 예수가 곧 진리이며, 예수 혹은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을 향해 나아가고, 진리로 사람들은 거룩해질 수 있다 정도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물론 이런 얘기 갖고는 진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진리를 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명확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예외적으로 주목한 만한 진술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8장 32절의 “당신들이 진리를 알 것이니, 그 진리가 당신들을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을 처음 듣는 분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너무나도 유명하여 가장 자주 인용되는 구절들 중 하나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해봅니다. “진리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그것이 곧 진리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쉽지 않습니까?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것, 그것이 곧 진리이며, 자유롭게 해주지 못한다면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데 정말 그렇던가요? 여러분은 진리를 앎으로 인해 과연 지금 자유롭습니까? 요한복음의 문맥에서 진리를 안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을 뜻한다고 했을 때,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 이 순간에도 여러분은 충분히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까? 진리는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라고 예수는 말하고 있지만, 우리의 경험 속에서 진리는 별로 우리를 자유롭게 해준 적이 없습니다. 외려 진리는 우리를 더욱 숨 막히게 하는 것이었을 뿐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도 그렇겠지만, 우리 시대 사람들에게 진리는 더 이상 가슴 설레는 단어가 아닙니다. 그간 진리의 이름으로 자행된 수많은 폭력과 야만의 역사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종교는 진리를 참칭하면서 자유를 억압해온 대표적인 집단이었습니다. 엔도 슈샤쿠의 소설 <침묵>이나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은 종교에 내재하는 진리와 자유 간의 관계의 역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만큼 무서운 자도 없는 법입니다. 진리를 살리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죽이려 했기 때문이지요.

흔히 철학적인 의미에서 진리라고 하면 적어도 ‘참되고 옳은 것’, 더 나아가 그 무엇을 바로 그렇게 ‘참되고 옳게 하는 것’이라는 최소한의 정의를 만족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참됨과 옳음을 판단할 수 있는 근거나 기준이 여전히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정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정답이 있을 수도 없는 그것에 대해 역사는 어떤 특정한 것이 진리라고 강요해왔고, 그렇게 강요된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는커녕 구속하고 억압해왔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시대에 진리는 이제 진부한 것이고 고리타분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굳이 기독교 신앙적 맥락에서 진리라고 할 수 있을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어도, 사람들은 진리 일반에 대해 더 이상 긍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진리?! 세상에 그런 게 어딨어?” 기독교인이건 아니건 포스트모던 사상의 물을 조금이라도 먹고 나면 그렇게 말합니다.

이러한 사고를 대변하는 아이콘은 단연 20세기 최대의 회의주의적 사상가라 할 미셸 푸코가 아닐까 싶습니다. 폴 벤느(Paul Veyne)라고 하는 역사학자에 따르면, 푸코는 죽기 25일 전 가진 대담에서 그러한 면모를 확실히 보여주었습니다. 대담자가 그에게 질문했습니다. “어떤 보편적 진리도 긍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당신은 회의주의자 아닌가요?” 그가 대답했습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푸코는 너무 일반적인 모든 진리, 시간을 초월한 우리의 모든 거대한 진리를 의심했습니다. 푸코가 겨냥하는 그런 의심스러운 진리의 범주에 기독교 신앙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가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물론 이때 제가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각 개인에게 경험된 그런 차원의 실존적인 신앙 대상으로서의 예수가 아닙니다. 차라리 세상의 모든 지식과 원리 위에서 작동하는 초월적인 규범이자 명제가 되어버린 ‘교리’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렇게 교리로서 정착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개념은 세상이 변하고 상황이 달라지고 믿는 사람의 삶의 자리가 아무리 바뀌어도 그 자체로 변하지 않는 ‘진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들은 그와 같은 형식으로 믿고 계십니까? 제가 아는 한 이 자리에 그런 교리적 진리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계신 분은 없는 것 같습니다. 교리적 근본주의자를 자처하는 분은 계시지만, 제가 보기엔 결코 근본주의자가 아닙니다. 근본주의자라고 하기엔 너무나 자유로운 삶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익히 경험해본 바 교리적 근본주의자는 종교적으로나 신앙윤리적으로 어떠한 자유의 여지도 스스로에게 그리고 타인에게까지 허락하지 않는 철저함을 보여줍니다. 그 철저함이 없다면 결코 교리적 근본주의자일 수 없습니다.

다시 본래의 맥락으로 돌아와서 교조적인 의미 혹은 고전철학적 의미에서 진리를 이해했을 때,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예수의 말은 더 이상 진리일 수 없습니다. 예수가 말한 진리를 새로운 개념적 현실에서 해석하지 않는 이상, 예수의 말은 우리에게 아무런 매력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고전적인 철학의 진리관을 그대로 따라서, 예수가 말한 진리를 받아들일 경우, 진리란 동일성, 보편타당성, 객관성, 만물의 본질, 영원불변성, 안정성, 초월성....... 뭐 그런 것에 다름 아닌 것일 텐데, 그러한 진리는 언제나 자기 이외의 것들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자기충족적이기 때문에, 따라서 다른 존재 내지는 다른 특성이 끼어들 여지를 찾기 어렵습니다. 다시 말해 자유가 허용되고 행사될 공간을 찾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진리와 자유는 결코 양립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가 의도했건 그렇지 않건, 우리의 상식 속에 자리 잡은 그런 의미의 진리 개념으로는 결코 자유롭게 하는 진리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의 말을 틀렸다고 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갖고 있는 진리에 대한 상식적인 편견부터 고칠 필요가 있습니다. 일단 그러기 위해서는 자유롭게 하는 것만이 진리라고 전제를 해야 합니다.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즉 다름을 허용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같음’의 진리란 그저 맹목적인 순종만을 강요하는 교리일 뿐, 주체적인 혹은 주체 각자의 성찰과 고민의 결과로 나온 것은 아닙니다. 신앙고백에서 교리적 고백이 무의미한 것은 교리는 주체의 개별적 경험과 상황적 특수성을 배제하기 때문입니다. 교리는 보편지향적이지 개별지향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느 진보적인 신학자는 진리와 자유의 관계의 위상을 역전시켜, 이제는 “자유가 너희들을 진리하게 하리라”는 도발적인 명제를 제출하기도 했습니다. 자기절대화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무조건적 진리를 거슬러 서로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터져 나오는 개별적인 다름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자유에 상대적으로 더 무게를 실어주자는 것입니다.

3. 다시, 진리가 우리에게 여전히 필요하다면

자, 그럼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그런 의미의 진리를 이제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요? 과거 우리가 알고 있었던 그런 의미의 진리에서는 결코 자유로움을 찾을 수 없었기에, 우리는 자유롭게 하는 것만이 진리라는 새로운 생각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새로운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모든 것이 다 진리인 것이냐는 것입니다.

사실 진리에 비해서 정의 내리기가 더 어려운 것이 바로 이 자유라는 개념입니다. 단순히 억압이나 강제가 없는 상태라는 소극적 의미에서의 자유에서부터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선택할 수 있는 적극적인 행위로서 자유의 의미에 이르기까지 실로 광범위한 자유의 스펙트럼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자유라고 하면 개별적인 다름을 지향하는 것으로서, 저마다의 길을 갈 수 있는 조건이나 능력을 뜻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자유는 서로 간에 다를 수 있는, 아니 다를 수밖에 없는, 조건과 상황에 주목하는 요소인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의미의 자유가 현대 사회에서는 정치적 실천의 차원이나 사상적 신념의 차원 보다는 고용의 자유, 해고의 자유, 투자의 자유, 소비의 자유, 통치의 자유 같은 자본주의적 의미로만 통용되고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하여 우리에게 감각적으로 더욱 친숙한 자유는 사상의 자유, 종교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 같은 것 보다는 말그대로 소비생활의 자유, 즉 원하는 만큼 먹고 살 수 있는 그런 자유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자유를 우리에게 허락해줄 수 있는 것이 진리라고 한다면, 결국 진리 중의 진리는 ‘자본’이라고 해야 합니다. 예수에서 자본으로 진리가 바뀌는 것이지요. 상황이 이렇게 되어 버리면, 애써 지금껏 우리가 진리의 개념을 자유의 맥락에서 되살리려 노력했던 것도 무의미해지고 맙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종교적으로나 철학적인 의미에서 진리를 새롭게 발견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으며, 그저 열심히 각자 돈 버는 데 더 매진하고, 교회는 그 자본이라고 하는 진리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강화하기 위한 모임으로 활용하면 될 뿐입니다.

우리 한숨결교회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앞서 말한 그런 의미에서 진리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믿고 있는 교회는 분명 아닌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교리적으로 믿는다는 것은 자기 삶의 특정한 맥락과 상황성에 대한 고민 없이 전통적으로 교회가 신조화한 그대로 예수를 고백하겠다는 것이며, 또한 성경을 교리적으로 해석하겠다는 것은 성경에 대한 모든 역사적, 문학적, 이데올로기적 비평과 재해석을 포기하겠다는 것일텐데, 그러한 모든 것들은 결국 생각이나 고민 따위는 없이 그냥 교회에서 말하던 그대로 기독교를 계속 믿겠다는 것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제가 단언컨대, 그런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하자고 굳이 한숨결교회에까지 나오고 계신 분은 없을 줄로 압니다. 우리가 더 이상 교리적 진리로서 기독교를 믿지 않는다고 할 때, 그 말 속에는 각자가 경험한 하느님의 다른 얼굴과 신앙사건의 다른 결들, 기독교라고 하는 종교의 역사성과 영토성에 대한 인정, 기독교 내의 다양한 분파와 전통에 대한 인정, 성서의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들, 타종교와 종교 이외의 다양한 문화와 현상들 가운데서 일어나는 누미노제의 가치, 기독교만이 절대적인 보편 진리이고 구원의 길이라는 사고의 거부 등을 일차적으로 긍정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일단 진리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을 몸으로나 삶으로 이미 믿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자유로움을 용납하지 않는 그런 교리적 진리의 차원에서 기독교를 믿고 있는 분은 이 자리에 결코 없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자유롭게 하는 것만이 무조건 진리라고 믿고 있는 그런 사람들은 또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획일적인 같음을 강요하는 진리에 반대하여 차이와 다양성의 자유를 옹호한다고 해서, 자본이 약속하는 그런 삶의 자유를 진리로 절대화하는 그런 이들도 아닐 것입니다. 그럴 것이면 굳이 한숨결교회를 만들고 예배를 나눌 이유도 없었겠지요.

우리는 진리에 대하여 자유의 가치를 끝까지 옹호하는 사람들이고, 더 나아가 자유롭게 할 수 없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생각에 (우연히든 아니든) 일치하여 여기까지 모일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우리 또한 다른 이들처럼 역설에 부딪힐 수도 있습니다. 절대적 진리의 억압에 대한 거부에서 비롯된 자유의 옹호가 자본의 자유와 같은 무질서의 자유와 혼동되어 결국 모든 것이 진리일 수도 있으며, 그렇게 모든 것이 다 진리라고 한다면 굳이 진리라고 할 만한 것이 세상에 더 이상 없다고 하는 상대주의 내지는 허무주의에 빠져 버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진리라고 하는 가치를 완전히 버리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진리를 버린다는 것,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가치, 혹은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어떤 삶의 양식이 갖는 가치를 버리는 것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진리에 대해 다시 한 번만 생각해보자고 말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한숨결교회를 통해서 교회라고 하는 것 혹은 기독교적 신앙이라고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돌아보자는 뜻에서 그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말한 진리를 새로운 사고의 빛에서 재해석해보자는 것, 기독교적 신앙 혹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을 한숨결교회의 맥락에서 우리 나름대로 새롭게 만들어나가 보자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이 진리에 대한 예수의 개념 규정이라고 했을 때,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진리를 주어로 놓았을 때 술어는 “자유롭게 할 것이다”가 됩니다. 여기서 술어의 시제는 현재형이 아니라 미래형입니다. 진리란 현재에 속한 것이 아니라 미래에 속한 것입니다. 진리는 지금 현재의 차원에서는 영원히 알 수 없는 미지(未知)의 것입니다. 오직 미래의 차원을 향해 열려 있는 것입니다.

유교의 고전 『중용』에서는 미발(未發)을 천하의 바탕(本)이라고 했습니다. 이미 알려진 것[기지(旣知)], 이미 발한 것[이발(已發)]은 오직 아직 알려져 있지 않고(미지), 아직 발하지 않는 것(미발)을 근본에 두어야 제 위치를 잡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미지와 미발로서 진리는 현재에는 아직 없고 오직 미래에만 있을 수 있는 그 무엇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가능성으로서 혹은 잠재성으로 엄연히 현실 안에 있고, 현재와 현실의 바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현재와 현실에 ‘나아갈 바’, 즉 지향성을 줍니다. 그래서 저는 진리를 ‘이것이면서 동시에 그 너머’라고 일컫습니다. 풀어 말하면 ‘이것이면서 동시에 그 너머’란 ‘그 너머(미지)에 대한 지향을 근본으로 ‘이것(기지)’을 조율한다는 뜻입니다. 미지는 늘 현실의 바탕에 있고, ‘자유롭게 함’으로서의 진리라고 하는 것은 ‘그 너머’에 대한 운동적 지향의 가장 포괄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부터 우리 한숨결교회가 모종의 지향성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요청이 있어 왔습니다. 저는 우리의 지향성을 굳이 찾자면 바로 이러한 미지의 차원에서, 다시 말해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서의 진리”라고 하는 현실 너머의 현실에서 찾고 싶습니다.

진리는 우리가 만들어갈 자유로움에 의해 규정되는 그 어떤 것입니다. 진리는 실체가 분명한 물질명사가 아닙니다. 추상명사로서 진리라고 하는 주어의 의미는 오로지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하는 술어에 의해 규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말한 그 진리라는 것, 결국 우리가 지금부터 앞으로 만들어 나가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교리로서의 진리, 우리와 상관없이 과거에 누군가에 의해 이미 확정된 그런 것을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부터 진리를 우리 마음대로 새롭게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당연히 그 진리는 우리를 언제나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어떤 것이 참된 자유인지를 모릅니다. 결국 우리는 미래의 진리를 지향하기 위해 자유로움에 대한 모험을 함께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리로서의 진리를 버리는 것만으로는 아직 자유로움에 도달하기엔 부족함을 많이 느낄 것입니다. 자유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 동시에 더 적극적으로 무엇을 향한 자유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적극적인 자유로움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최소한 우리의 자유가 자본의 자유는 넉넉히 넘어설 수 있는 그런 자유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자유로움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유’를 누릴 것이며, 그 자유를 누림이 우리에겐 즉각적으로 새로운 진리가 될 것입니다. 저는 한숨결교회에서 여러분들과 함께 자유를 누리고 싶습니다. 진정한 자유를 향해 나아가고 싶습니다.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그 과정에서 진리를 새롭게 알고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한 번 만나고 싶고, 교회라고 하는 그 이상적 공동체를 새롭게 경험해보고 싶습니다. 한숨결교회가 자유의 공동체, 진리의 공동체, 아직 단 한 번도 실현된 적 없는 그런 미래의 교회공동체가 되어 가기를 꿈꿉니다.

우리가 그러한 꿈을 함께 꾸는 그 순간부터 그 미래는 우리의 현실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 곧바로 자유인으로 삽시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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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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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해츨링
    2010.01.06 00:4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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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글 보고갑니다.
    저에게 있어서 '완성형'이라는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 해주는 글이였던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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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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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15(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설교
본문: 고린도후서 3:4~6


문자는 사람을 죽이지만,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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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묵
(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꽤 오래 전부터 떠도는 이야기이지만, 천국과 지옥 사이에 분쟁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흉악해지다보니 지옥이 만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지옥으로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급기야는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담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천국측에서는 당연히 보수를 요구하였으나 지옥측은 태연히 버팅기고 있었습니다. 천국측은 도리없이 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옥측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나 몰라라 하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뱃심으로 그렇게 버티는지 천국측이 다그쳐 묻자 지옥측은 세상의 유능한 변호사가 다 자기네 소속이니 걱정할 것 없다고 응수했답니다. 

오해 없기를 바랍니다. 특정한 법조인들을 폄훼할 할 의도로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더 근본적인 문제, 곧 법적 논리가 지니는 근본적 한계를 지적하려는 것입니다. 이 우스갯소리는 법적 정의와 실체적 진실 사이에 괴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꼬집고 있습니다.

심오한 법철학 이론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법적 논리가 지니는 결함을 그다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쉽게 생각해 법적 논리는 그 나름의 일관된 논리와 그 논리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덧붙여짐으로써 완결됩니다. 그 논리는 그것을 주장하는 편에 유리한 조건에 따라 구성되며, 어떤 사건에 관련된 내용들을 완벽하게 재구성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명문화된 법조문에 의거해 그 시비가 비교적 분명히 가려질 수 있는 단서들을 중심으로 재구성됩니다. 여기에서 사건의 진실을 밝힐 수 있는 많은 단서들이 명문화된 법조문으로 시비를 가릴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부차화되거나 아예 사상되는 경우들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법적 소송은 진정한 의미의 실체적 진실보다는 완벽한 논리의 재구성 성패 여하에 그 판결이 좌우되는 경우들이 적지 않습니다.

더욱이 법적 판결이 이루어질 때 사회적 강자에게는 충분히 배려되는 것도 사회적 약자에게는 배려되지 않는 경우들도 허다합니다. 사회적 유력인사나 재벌 등이 범죄나 비리를 범했을 때 직접적으로 범죄 사건을 구성하는 요인 말고도 사회적 기여도 등이 폭넓게 감안되어 당사자가 형을 선고 받고도 그 집행을 유예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에 사회적으로 그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범죄를 범했을 경우 그 동기나 정황 등이 충분히 헤아려지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고도 아무런 제약 없이 활동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소한 좀도둑질만으로 완전히 인생의 행로가 뒤바뀌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통용되는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법의 집행이 재력이나 권력에 의해 좌우되고 있는 현실을 말합니다.

법적인 논리 자체가 지니는 근본적인 한계에 덧붙여 그 집행이 재력이나 권력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면 법이 곧 정의라는 통념은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법이 정의를 보증해주는 것도 아니요 실체적 진실을 드러내주는 것도 아니라면 그 법은 제도적 폭력에 지나지 않습니다. 

요즘 법을 만들고 그것을 집행하는 일에 관한 논란이 뜨거운 관심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수시로 법질서의 준수를 강조하고 있고, 대법관은 ‘촛불재판’에 지침을 내려 개별 판사들에게 압력을 행사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국민의 정당한 권리 주장을 보장하기보다는 권력의 안위만을 보장하려는 의도와 직결되어 있는 사태들입니다.

국회에서는 ‘입법전쟁’이라는 이상한 말이 통용되고 있습니다. 어쩌다 법을 만들기 위해 전쟁을 치러야 하는 사태에 이르렀을까요? 재벌의 언론사 소유를 가능케 하는 언론관계 법안들은 이미 통과되어 버렸고, 이 밖에 국민의 정당한 권리 주장 및 사생활 보호와 직결되어 있는 집회와 통신 관련법안, 재벌에게 더욱 큰 힘을 실어주는 금산분리 법안, 출자총액 제한 완화 법안, 민생과 직결된 교육세와 농어촌특별세폐지 법안, 수돗물 민영화 법안, 비정규직 법안 등등이 쟁점이 되고 있습니다. 힘있는 이들에게 더욱 힘을 실어주고 힘없는 서민들을 더욱 옥죌 소지를 안고 있는 법안들입니다. 

법의 집행도, 법을 만드는 일도 온통 힘있는 사람들의 편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법이 곧 정의라는 통념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케 해 주는 사태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법질서의 준수가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겠습니까? 그것은 끽 소리 말고 하라는 대로 살라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사도 바울의 편지의 한 대목을 함께 읽었습니다. 한편으로 율법의 속박을 강조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 그와 대비되는 믿음의 자유를 역설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지만,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고린도후서 3:6).

오늘 본문 말씀은 일차적인 맥락이 있습니다. 사도로서 고린도교회 교우들과의 관계를 밝히는 대목에서 이 말씀이 등장합니다. 오늘날에도 추천장 제도가 있지만, 그리스-로마 세계 안에서도 추천장이 널리 통용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스스로와 고린도교회 교우들 사이에 문자로 된 그 어떤 추천장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역설합니다. 추천장을 내보여야 하는 관계도, 또는 추천장을 받아 그 관계를 입증해야 하는 사이도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 만큼 서로 신뢰와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아주 아름다운 언어로 고린도교회 교우들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표합니다.

“여러분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편지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작성하는 데 봉사하였습니다. 이것은 먹물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요, 돌판에 쓴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쓴 것입니다.”(고린도후서 3:3).

여기서 사도 바울은 문자로 기록된 그 어떤 추천장이나 편지가 필요하지 않은 까닭을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문자로 기록된 문서를 말하면서 한 걸음 나아가 율법의 조문을 유념하고 있습니다. ‘돌판에 쓴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쓴 것’이라는 말은 율법과 믿음을 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소 바울의 일관된 논지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지만,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따라서 오늘 이 말씀에서 말하는 문자는 율법 조문, 곧 법률 조문을 뜻합니다. 저는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오늘의 현실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용산참사는 제도적 폭력 내지는 제도적 테러의 결과입니다. 법 조문에 의거한 폭력이요 테러입니다.
  
사도 바울은 때로 법의 운용과 집행의 문제를 지적합니다. 예컨대 사도 바울이 율법의 완성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율법의 긍정성을 인정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 남용을 문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보다 근본적으로 율법의 폐기를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법의 형식 그 자체, 법의 한계 그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제한적인 의미에서 법의 필요성과 유용성을 인정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법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 한계를 넘어서는 것으로 하느님의 영을 말하고 있습니다. 법 질서에 순종하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을 따르는 삶을 구원의 희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삶이 우리의 구체적 현실에서 어떻게 가능할까요? 오늘의 그리스도인은 현실적으로 수많은 법의 제약 가운데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하느님의 영을 따르는 삶을 추구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어떤 모양을 띠는지는 끊임없이 물어야 할 과제입니다.

하지만 우선 지금 당장 하나님의 영을 따르는 삶을 결단하고자 할 때 우리의 선택은 분명합니다. 적어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문자로서 법 조문에 우리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국민의 정당한 권리를 제약하고 기득권자들의 이익을 보장하는 법 질서를 준수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따르는 삶은 제도나 법조문 또는 문자의 격식에 매여 사람을 소홀히 하거나 죽이는 과오를 범하지 않는 삶입니다. 그 격식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삶이 아니라 그 모든 격식에 앞서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는 삶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에 이어지는 내용의 말미를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영이신 주께서 하시는 일입니다.”(고린도후서 3:17~18).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후손이 모세의 율법을 대할 때 여전히 그들의 마음에서 너울 벗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며, 그 너울은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비로소 제거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영으로서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함을 얻는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역설합니다.

지금 읽은 이 말씀은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영이신 주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놀라운 이야기 아닙니까?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런 힘에나 내맡겨져 굴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누가 우리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놀라운 영광에 이르게 되리라는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그 영광에 이르는 삶을 소망하며 진정한 삶의 용기를 얻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 웹진 <제3시대>

* 천안살림교회 http://www.salri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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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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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준호
    2009.03.29 22:47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목사님 글 잘봤습니다. 은혜가 깔끔하네요^^

    - 부산에서 이준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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