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과 주체 7]


유령과 함께 살아가기



 

허석헌

(미국 샌프란시스코 GTU 박사과정, 조직신학)



후기구조주의와 해체


      ‘인간은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율적 주체’라는 믿음을 깨뜨리고, 인간의 주체성은 구조에 의해 구성된 결과일 뿐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파헤친 것은 구조주의의 성과이다. 구조주의는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시작되는데, 그는 ‘언어는 사물의 이름이 아니며, 기의란 기표의 차이에 의해서만 드러나는 것’이라 말한다.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은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이 아니라, 언어가 실체와 조우할 수 없는 한계내에서 발생하는 언어들의 차이라는 것이다. 소쉬르는 언어의 구조[각주:1]를 분석함으로서 실체를 로고스에서 발견해왔던 기존의 형이상학적 전통을 거부하는 대신, 언어의 차이와 관계에 주목한 것이다. 이를 통해, 명증한 사실로 여겨진 자아 혹은 의식을 실재의 출발로 보았던 자아중심주의에 균열을 가하였다.이같은 구조주의적 관심은 20세기 후반 프랑스 철학사에서 실존주의가 봉착했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대안으로 부상하였다.

    그러면 후기구조주의는 구조주의와 어떤 차별성을 갖는가? 후기구조주의자라고 불리는 푸코, 라캉, 들뢰즈, 알튀세르, 데리다와 같은 이들은 구조주의의 업적을 고스란히 계승하면서도, 한편으로 구조주의가 간과하였던 문제를 니체, 프로이트, 맑스주의에 대한 그들 나름대로의 해석에 기반하여 전개한다. 말하자면, 라캉은 프로이트를, 알튀세르는 맑스주의를, 푸코와 들뢰즈는 니체에 대한 다시읽기를 주장하는데, 물론 이들의 시도 조차도 소쉬르의 언어학으로 시작된 구조주의의 기여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비록 그들은 실체적 형이상학의 철학사를 뒤집기 위해 다른 경로를 채택했지만, 지향했던 지점은 다르지 않다. 데리다의 표현대로 하자면, 기원과 중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다. 중심이나 기원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당위적인 것으로 여겨진 시뮬라르크에 대한 위계질서와 그에 대한 차별과 억압도 일시에 무효화 된다. 그러나 그들은 한발 더나아가 구조주의의 노력으로 그나마 밝혀진 차이의 구조마저 의미관계의 본질은 아니라고 부정한다.


    영화 매트릭스는 후기구조주의를 이해하는데 좋은 예가 된다. 구조주의는 영화에서처럼 매트릭스라는 거대한 컴퓨터 가상 인식체계가 지배하는 구조가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인간은 자율적으로 살아가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매트릭스라는 완벽한 통제시스템에 의해 컨트롤 당하고 있음을 구조주의는 드러냈다. 그러나, 후기구조주의는 매트릭스의 실체를 밝혀낸 구조주의의 성과를 인정하지만, 매트릭스가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로 한 발 더 나간다. 말하자면, 매트릭스 조차도 가상적인 조작물일 뿐이지, 인간은 매트릭스에 의해 구조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매트릭스에 장악되지 않는 '네오(키아누 리브스)' 같은 자들이 있다는 것이며, 그들이 살아가는 시온이라는 구역이야말로 매트릭스의 구조가 지배하는 세상을 이해하는 핵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후기구조주의자들은 인간을 일정한 규칙성과 폐쇄적 구조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로 인정하는 순간, 철학은 형이상학적 로고스 중심의 철학사가 걸어온 길로 되돌아갈 위험에 빠질 수 있게 된다는 점에 유의하였다. 따라서, 모든 중심과 기원에 대한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매트릭스의 존재를 직시하는 것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네오와 같이 매트릭스의 감시를 빠져나오는 탈주하고 해체하는 것이야말로 현상을 바로 인식하는 길이라고 보는 것이다.

    후기구조주의가 넘어서려 했던 지점이 여기에 있다. 푸코는 성(sexuality)이 구조적으로 억압되어 왔다는 가설을 깨고 성에 대한 지식과 담론은 오히려 확산되어왔음을, 들뢰즈는 영토화/코드화된 억압적 체계를 인정하지만 그 가운데에서 영토를 가로지르는 노마딕한 탈주선을 제시하였고, 라캉은 구조화된 무의식의 세계를 정신분석학의 주제로 등장시켰지만 동시에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주체로 한걸음 더 나아갔으며, 알튀세르는 자본의 착쥐구조를 넘어 이데올로기와 국가장치라는 중층적 관계를 인식론적 틀로 제시하였다. 이들과 마찬가지로, 데리다가 말하는 해체(deconstruction)는 실체론적 철학에 저항하기 위한 구조주의의 기초위에 세워졌지만 구조주의적 인식체계 마저 넘어서려는 탈구조적인 사유행위를 함축해 놓은 말로 이해할 수 있다. 매트릭스라는 형이상학의 시스템을 분석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완벽할 것 처럼 보이는 구조 안에서도 네오처럼 ‘뚫고 나오는 송곳 같은 놈이 반드시 하나쯤은 있다’는 사실에 의해 매트릭스조차 마침내 부정되고 해체될 수 있음을, 그리고 그렇게 치밀한 관계망을 비집고 모습을 드러내는 송곳 같은 현상이야말로 매트릭스로 구조화된 사회를 인식하는 본질로 대우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데리다가 주목하는 것은 메타적 구조가 아니라, 구조를 전복시키는 미시적인 차이와 차이들 사이의 관계들이다.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려던 태도에서 벗어나서, 안정과 질서라는 이름의 경계를 넘어 일탈하는 작은 변화들이 인간의 삶에 어떠한 질적 변화를 가져다 주는지를 묻는다. 이렇게 데리다에게서 후기구조주의는 전통적 사유방식을 해체(deconstruction)하는 것 뿐만 아니라, 해체된 빈 공간 위에 아무것도 다시 구축하지 않으려는 탈-구조화(de-construction)라는 이중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그렇다면, 데리다는 무엇을 해체하려고 했으며, 해체 뒤에 남겨진 것은 무엇인가? 해체를 허무주의의 유포라고 비판하는 우려에 대한 반론은 무엇인가? 해체론 안에서 주체의 윤리적 실천의 계기는 여전히 살아남아 있는가? 이러한 문제들이 이글이 관심하는 주제인데, 그의 핵심적인 개념들 몇가지로 제한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텍스트


    데리다는 로고스중심주의 철학을 현존(presence)의 형이상학, 음성중심주의, 남근 중심주의로 파악하며, 이를 해체의 대상으로 파악한다. 전통적인 이성중심의 형이상학을 타겟으로 삼는 데리다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이 어떠한 기원이나 중심위에 세워진 사유체계도 아님을 증명하는데 초점을 둔다. 형이상학의 근거지가 부정될 때에 순수성의 신화는 궤멸하게 되고, 비로소 본질과 현상, 선과 악, 자본과 노동, 남성과 여성, 음성과 문자 등과 같이 이항대립의 관계로 놓고 전자가 후자를 억압하고 지배하는 것을 필연적인 결과로 정당화시켜왔던 근거들이 폭력적인 위계질서에 불가할 뿐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Of Grammatology)’에서 ‘텍스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선언한다. 이러한 데리다의 주장은 로고스 중심주의에 대한 전면전을 선포하였던 니체와 존재의 복구를 통해 근대로부터 벗어나고자 한 하이데거, 그리고 소쉬르의 반실체적인 구조주의적 언어학의 성과를 계승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데리다가 보기에 소쉬르의 구조주의는 차이의 논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모든 관계에 선행하는 원초적인 기원을 고수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구조를 유한하고 폐쇄된 총체성으로 이해했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소쉬르에게서 문자에 대한 음성의 우월적 지위는 완전히 제거되지 못하였다는 것이 데리다의 진단이다. 그라마톨로지에서 데리다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나타난 음성우월주의는 소쉬르에게서도 유사하게 나타나는데, “문자는 언어를 표상하는 유일한 목적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그의 주장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텍스트에 대한 억압을 정당화시킴으로서 로고스중심주의의 근거를 제공해 주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데리다는 소쉬르적인 구조주의를 넘어서기 위해 음성 대신 텍스트의 우월성을 주장하려는 것일까? 열등한 것으로 여겨진 항목들을 복권시키는 것으로 충분한가? 그것으로 로고스중심주의로 파생된 폭력적인 위계질서는 해체될 수 있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데리다의 해체전략은 또다른 형태의 이항대립구조의 탄생에 의해 좌초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데리다가 의도한 것은 매트릭스를 대체할 다른 구조물이 아니라, 폐쇄적이고 총체적인 구조로 실체를 파악해야한다는 어떠한 형태의 시도도 출현하지 않을 만큼의 해체로 까지 밀고나가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해체는 단순히 형이상학의 근거를 전복시키는 작업을 의미하지 않는다. 데리다에게, 해체란 부수고 무너뜨리는 과격한 파괴운동(destruction)이 아니라, 이를 넘어서 어떠한 위계지배질서의 출현도 용인하지 않으려는 탈-구조화(de-construction)에 대한 지향성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차연(difference)’이라는 개념은 탈-구조화를 위한 그의 의도안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차연


   데리다는 탈-구조화의 전략을 달성하기 위해서, 소쉬르가 주장했던 ‘기표 사이의 차이에 의해 기의가 구성된다’는 주장을 기원의 개념으로 확장시킴으로서 순수한 기원에 대한 신화를 완전히 제거하기에 나선다. 다시말해서, 기의는 기표의 차이에 의해 발생하는 것처럼, 기원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기표들의 차이가 반드시 기원보다 선행해야 하는 것이 논리적이다. 이렇게 기표와 기의의 관계구조 안에서 보면, 기원은 더 이상 실체적인 것,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없는데, 기원이라는 것 역시 기원에 선행하고 우선하는 다른 하위 기표들의 차이와 관계에서 파생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원보다 더 앞선 기원도 텍스트에 의해 차이화된 것에 불과하다. 데리다의 표현 그대로, ‘텍스트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텍스트 중심주의는 기존의 사유체계를 철저하게 전복시킨다. 기표(문자)는 로고스철학에서 원본과는 무관한 열등한 것으로 배제되어 왔지만, 기표와 기의의 관계구조를 기원으로까지 확대적용시킬 때에 문자(기표)는 말(기의, 로고스)에 우선하는 반전이 일어난다. 이로써 기원의 기원으로서 적용된 기표들의 차이와 관계는 기원이 가지는 말의 모순성을 폭로하며 마침내 기원의 기원으로서의 자격을 박탈시킨다.

    기표들의 차이를 기원으로 확장시킴으로서 데리다는 순수한 기원이란 말 자체가 가지는 모순을 드러냄과 동시에 음성중심의 기원의 신화를 해체시킨다. 그러나, 이것이 곧 말에 대한 텍스트의 우월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한다면 탈-구조화(de-construction)는 재-구조화(re-construction)로 퇴색하고 말 것이다. 텍스트는 기원적이지만 결코 기원의 지위를 획득할 수 없다. 텍스트는 대상을 지시하는 ‘대리보충(supplement)’으로서의 기능으로 제한되기 때문이다. 문자는 그 자체로 대상을 의미하지 못하고 단지 대리적인 보충물로서 문자들간의 차이를 통해 대상의 존재를 흔적으로 남길 뿐이다. 그러므로 흔적은 이미 시간적으로 항상 뒤에서서 대상을 쫓아가는 지연된 관계에 놓여 있다. 흔적으로서 텍스트는 대상을 은유적으로 지시할 수는 있지만 대상과 동일성을 가질수는 없다. 대상은 텍스트에 의한 ‘차이’와 ‘지연’이라는 시공간적 방식을 통해서만 식별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공간성의 차이와 함께, 시간성의 지연이라는 이중적인 운동을 통해서 기원은 파악될 수 없는 흔적으로만 남겨지게 된다. 이렇게 공간적 차이와 시간적인 지연을 통칭하는 ‘차연’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데리다는 우리가 대상을 인식한다고 여기게 만드는 의미의 효과가 사실은 무의미한 것임을 주장한다. 이렇게, ‘차연’은 소쉬르의 기표가 드러내는 공간성의 차이만으로는 형이상학의 인식구조를 벗어날 수 없는 구조주의 철학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시도이이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게 하는 근거가 되어온 전통적인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뒤섞어 버림으로서 끊임없이 기원을 재생산해 내려는 모든 철학적 시도를 봉쇄해 버리려는 해체와 탈-구조화의 이중적인 전략을 수행하는 데리다의 핵심적인 개념이 된다.


유령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철학하기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데리다가 말하는 차연에 따른다면, 철학이 무언가에 대해 설명하고 논증하기 위해 텍스트를 동원할수록 지시하려는 대상은 자꾸만 멀어져 갈 뿐이기 때문이다. 흔적으로서 글쓰기가 증명하는 것은 말해질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사실 뿐이다. 프랑스의 68혁명의 분위기에서 지식인들에게 보다 날카롭고 급진적인 정치철학의 태도가 요구되었던 것을 감안하자면, 데리다의 해체는 한가한 지식인의 말장난처럼 보이기도 하고, 비정치적인 것을 넘어서 투항주의적인 태도로 비춰진다. 데리다의 비판론자들이 그를 철학의 종말을 고하는 허무주의로, 심지어는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동력마저 무력화시키는 위선자로 낙인하는 이유는 이점에 있다. 그러나, 데리다의 초기에 거침없이 써내려간 해체적 입장이 의미하는 정치 윤리적 실천의 면모는 그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전개된 유령론에서 드러난다.

   데리다에게 차연은 전통적 시공간에 대한 통념을 뒤집는개념인데, 전통적인 입장에서 현존하는 것은 과거로부터 단절되었으며 미래와는 연결되지 않은 ‘지금’이라는 정적이고 직선적인 시간안에서만 파악되는 것이지만, 차연의 운동은 현존의 대상을 끊임없이 과거로 밀어내고 다시 미래를 향해 달아나며 남기는 흔적을 추적해야 하는 통시적인 시간속에서 파악된다. 차연의 통시적 효과는 과거, 현재와 미래의 시간성들이 일직선상위에 차례로 나열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교집합을 이루는 새로운 공간을 창출한다. 이러한 시간과 공간안에서 현존은 과거에 의해 부정되며, 미래에 의해서만 유추될 수 있는 불확실성으로 남는다. 따라서 현존하는 것은 존재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또한 존재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는 모호한 것이다. 그는 이를 유령(specter)으로 표현한다. 유령은 현존하는 것도 부재하는 것도 아니기에, 존재의 부재와 더불어 부재의 존재를 지칭하기에 매우 적절한 은유로 채택된다. 유령과 결부된 과거와 미래는 지금, 여기의 현존을 일자의 동일성으로 파악하는 것을 거부한다. 유령은 그것과는 무관한 개방적이고 불투명한 절대적인 타자성이다. 데리다는, 철학이 당위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왔던 자아와 현존의 형이상학적인 존재론을 유령으로 존재하는 비현존의 존재론으로 뒤집어 놓는다. 인식의 근거는 자아의 의식, 혹은 기원이 아니라 유령과 같이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흔적으로 등장하는 타자일 수밖에 없다. 유령으로서 존재하는 타자는 자아의 이성과 판단에 의해 포섭되지 않으며 단지 무조건적으로 환대(hospitality)해야할 관계일 뿐이다.

    데리다에게서 해체의 정치적 급진성은 바로 이 유령의 존재에서 발견된다. 유령은 자아중심적인 시공간 구조에서 만들어지는 예측된 미래를 추구하는 일체의 목적론적 실천행위를 무의미하고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착취의 현실에 저항하는 정치적 행위 역시 공산주의의 필연성을 낙관하는 것으로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맑스의 공산주의라는 단선적이고 목적론적 구조위에서 공산주의는 ‘유럽 전역을 떠돌며 자본가를 위협하는 유령’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데리다는, 맑스를 넘어 계급, 국가, 제도의 경계를 허물고 도래하는 종말론적이고 메시아적인 새로운 형태의 타자들과의 연대를 요구한다. 경계를 넘어선 개방적인 연대 안에서 공산주의라는 유령은 오늘의 불의한 착취의 구조안에서 다시 소환될 수 있게 된다고 믿는다. 실체론적 존재론은 자본주의와의 공모관계안에서 세계를 이분법적이고 위계적인 질서로 계층화하고 차별과 억압을 정당화시켜 왔다면, 맑스의 공산주의는 같은 방식으로 가시적인 현존을 인간사회의 진보 가치로 삼아왔다. 그러나 데리다는 그 양쪽 모두가 믿어온 현존의 공간과 시간적인 경계를 넘어서 출몰하는 유령의 존재를 인식하고 유령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정치윤리를 제안한다.


유령과 함께 살아가기


    데리다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이 구축해 놓은 확고부동한 존재를 존재하지만 동시에 부재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유령으로 대체시켜 놓았다. 그러나 여전히 모호하다. 존재가 아닌 유령을 실재하는 것으로 수용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데리다는 주체의 구성 가능성 자체를 완전히 봉쇄하려는 것으로 보아야 할까? 데리다의 의도에 접근하기 위해서, 우리는 고정관념 하나를 지워버릴 필요가 있다. 데리다의 형이상학적 주체 개념에 대한 비판은 주체를 부정하느냐 긍정하느냐는 식의 양자택일의 문제로 추궁하는 것은 유령론이 지시하는 정치윤리적인 의미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주체는 존재하는가, 부재하는가’라는 질문에 익숙해 왔던 전통적인 접근법의 한계를 비판하기 위해 고흐의 그림 “끈이 달린 낡은 구두”를 소재로 사용한다. 데리다는 하이데거와 샤피로의 입장에서 이 그림에 대한 감상법을 재구성하는데, 샤피로는 구두 그림의 제작자인 화가가 누구인지를, 하이데거는 이 구두의 소유자에게 관심을 둔다고 본다. 두 사람의 감상법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 구두그림의 귀속관계가 그림을 그린 화가에 있든지, 아니면 실제 구두를 신었던 한 노동자로 보든지 간에 그들은 구두의 주체를 발견해 내려는 노력에 몰두한다는 점에서 만큼은 동일한 감상법을 취한다고 보았다. 반면, 이 그림을 보는 데리다는, 이 두 감상법이 모두 적절치 않다고 본다. 왜냐면, 이 구두의 그림은 신고 있는 상태가 아닐 뿐 아니라, 그림은 이미 화가의 화실에서 떠나 전람관에 전시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구두의 주인은 화가도, 실제 신었을 법한 누군가도 될 수 없는 것이다. 이 그림에서 구두의 주인는 부재할 뿐이다. 그러나 구두의 주인이 부재하다는 사실이, 구두는 누구에게도 소유될 수 없는 폐쇄적인 상태에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데리다가 주체의 부재를 통해 주장하려는 바는 대상을 특정 주체에 귀속시키는 것으로는 사물의 실재에 다가설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유령과 같이 존재와 부재의 경계를 자유롭게 가로지르는 방식으로만 실재는 드러날 수 있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데리다가 유령론을 통해서 말하려는 바는 자기 동일적인 주체를 해체하려는 것이며, 자기 동일성이 현존의 근거로 왜곡되어온 형이상학전통을 차이와 반복, 흔적으로 치환하려는 것에 있다. 존재에 대한 인식을 기반으로 하는 철학을 통해 인간의 책임과 윤리를 말해왔던 전통을 해체하고, 역으로 절대적인 타자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윤리적 태도를 통해서만 존재에 대해 말하려는 철학의 시도는 가능해 진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데리다가 유령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환대의 윤리는 소수자, 약자에 대한 인도주의적인 행동규범을 도덕적 감성에 기대어 호소하려는 것과 거리가 멀다. 유령론은 서양의 형이상학적 존재론에 대한 해체작업이며 차이와 흔적을 통해서 출현하게 될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에 대한 기다림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경계없이 예측불가능하게 도래하게 되는 선물과 같은 약속에 대한 기다림이며, 기존의 사고방식과 틀을 넘어서는 낯선 변화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다. 유령이 출몰하고 있다. 데리다는 묻는다. 유령과 함께 어울려 살아갈 것인가, 유령을 축출할 것인가? 윤리적 주체로 설 것인지 말것인지는 그 물음에 달려 있다.



ⓒ 웹진 <제3시대>

  1. 소쉬르는 언어가 ‘랑그’와 ‘빠롤’이라는 구조로 이뤄져 있다고 설명한다. 랑그가 언어의 원리/체계라면 빠롤은 언어를 말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랑그는 빠롤을 통해 나타난다. 여기서, 그의 중요한 또다른 개념, 시니피앙(기표/기호)과 시니피에(기의/대상)가 있는데, 이 구분을 통해 소쉬르가 주장하려 한 것은, 시니피에는 시니피앙의 차이에 의해 드러난다는 것이다. 즉, 언어는 사물/대상을 직접적으로 지시할 수 없다는 것. 소쉬르는 서구의 로고스 중심의 형이상학적 언어학에 대해 반기를 들면서, 실체란 언어의 구조와 기표의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구조적 결과라는 사실을 증명해 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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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 주간)

 

영화 <우리 선희> 속 세 가지 시선


   홍상수 감독의 2013년 작품 <우리 선희>는 주인공 선희(정유미)와 세 명의 남자 사이에서 일어난 이야기다. 그 세 명의 남자는 선희의 대학 시절 교수(김상중), 선배(정재영), 구 남친(이선균)이다. 영화로 미국 유학을 떠나기 위해 추천서를 부탁하러 학교로 간 선희는 추천서를 써 주기로 한 교수 동현(김상중)을 만나고, 옛 남친이자 갓 영화감독으로 입봉한 문수(이선균)와 역시 대학선배이자 영화감독인 재학(정재영)을 만난다. 선희는 세 명의 남자로부터 차례로 자신에 관한 각각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 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선희에 대한 이야기를 모은 것이 <우리 선희>일텐데, 영화는 세 남자의 선희에 대한 각자의 내러티브를 종합하고 정리한 총량으로서의 <우리 선희>가 진정 ‘선희’라는 사건과 대상의 본질인지를 관객들로 하여금 의심하게 만든다.

    추천서 때문에 오랜만에 자기를 방문한 제자 앞에서 교수는 이런저런 삶을 살아가는 지혜와 충고를 선희에게 늘어놓는다. 그렇게 추천서를 부탁하고 나오는 길에 선희는 자신과의 연애담을 기초로 영화를 만들어 감독으로 데뷔한 구 남친 문수를 만나 낯술을 하면서 그의 뒤늦은 사랑고백을 듣고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다음날 선희는 교수를 찾아가 “숨겨진 재능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을 입증할 수는 없고...”라는 문구가 새겨진 긍정인지, 부정인지 모를 추천서를 받는다. 선희는 다시 써 달라는 부탁을 할 겸 자리를 옮겨 교수와 술 한잔을 하게 되는데, 그 자리에서 두 사람 사이에는 사제관계를 넘어서는 뭔가 묘한 기류가 감지된다. 가슴이 후끈 달아오른 교수는 절친한 후배 재학을 만나 선희를 향한 마음을 털어놓는다(재학은 그 상대가 선희인지 모름).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재학은 선희를 우연히 만나 역시 술잔을 기울이는데... 두 사람 사이에도 묘한 분위기가 감지되고.

   이렇듯 교수와 문수, 재학 사이에서 선희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혀있다. 서로의 감정과 애정사가 교차하고 빗나가는 지점에 선희는 존재한다. 이 세 명이 함께 모이면 선희에 대해 뭐라 말할까. 그들의 말들을 다 긁어모은 선희는 이렇다: “내성적이긴 하지만, 머리가 좋고, 안목이 있고, 또라이 같은 면도 있지만 똑똑하고 솔직한 여자.” 그가 바로 <우리 선희>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내내 세 남자의 선희에 관한 증언들, 그리고 회고담들이 과연 진짜 선희인가라는 의심와 회의가 점점 세게 밀려왔던 것은 왜일까. 셋이 모두 선희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 같지만, 그 어느 것도 선희에 적중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그들이 말하는 <우리 선희>는 선희에 대한 진실이 아니라, 선희에 대한 오만과 편견 아니었나 싶다.

   영화는 텅 빈 기표로서의 <우리 선희>를 잘 드러내며 끝이 난다. 어느 가을날 창경궁에서 선희와 교수가 만나고, 동기는 선배를, 선배는 교수를 찾아 창경궁으로 온다. 그 순간 우리 선희가 사라졌다. 그러자 세 남자는 창경궁에서 길을 잃었다. 우리 선희는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우리가 봐왔던 선희가 진짜 선희였을까.


<우리 선희> Vs. <라쇼몽>


   영화 <우리 선희>를 보면서 일본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의 작품 <라쇼몽>(1950)이 계속 생각났다. 일본 헤이안 시대 산속에서 칼에 찔려 죽은 사무라이 시체가 발견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살인 사건과 연루된 사람은 모두 네 명이다. 최초 신고자 나무꾼, 절에 도망쳐 있다가 잡혀온 사무라이 아내 마사고, 체포된 도적 타조마루. 그는 사무라이 아내 마사고를 겁탈하였고 그 후에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그리고 무당이 등장하는데 그 무당의 입을 통해 죽은 사무라이 타케히로가 말을 한다.  

    그러나 하나의 사건을 바라보는 네 사람의 서사는 모두 다를 뿐 아니라, 서로 모순되기까지 한다. 과연 누가 범인이고 이 사건의 실체는 무엇일까. 슬라보예 지젝은 영화 <라쇼몽>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객관적인 진실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주관적으로 왜곡되고 편향된 서사들의 환원불가능한 다층성만이 존재한다.”[각주:1] 지젝이 언급한 ‘환원 불가능한 진리의 다층성’을 추구하는 것이 ‘해체’라면, ‘객관적인 진실에 대한 믿음’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 ‘해석’이다. 그렇다고 볼 때 <우리 선희>와 <라쇼몽>은 해체가 무엇인지를 놓고 고민하는 우리들에게 많은 영감을 선사한다.

    하지만, 두 영화는 진실에 대한 해체적 접근을 시도한다고는 하나, 객관적 진실에 대한 믿음을 100% 포기한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라쇼몽>에 등장하는 스님과 <우리 선희>에서 극 초반에 등장하는 또 다른 선배의 발언을 보면 말이다. 두 사람은 극에 등장하는 사람들이긴 하나, 비중도 미비한 영화 밖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텍스트 밖에서 혹 있을 수 있는 내부의 진실을 발설하는 역할을 한다.

    영화 <우리 선희> 초반에 교수에게 추천서를 부탁하러 학교에 온 선희가 우연히 만난 선배(이민우)에게 교수의 소재를 묻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이민우를 대하는 선희의 행동을 보면 주인공 세 남자들의 해석의 조각을 모두 합친 우리 선희, 즉 “내성적이긴 하지만, 머리가 좋고, 안목이 있고, 똘아이 같은 면도 있지만 똑똑하고 솔직한 여자”가 아닌, 다른 여자 선희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 선배는 선희에게 금방 들킬 거짓말(교수가 외국 출장갔다는)을 한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진심으로 화를 내는 선희에게 ‘재미있으라고 한 말이었다’고 변명한 후에, ‘너 참 순수하구나’라며 선희에게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앞의 세 남자의 평에서는 어디에도 순수한 선희는 없었다. 어쩌면 선희는 순수한 여자 아니었을까.

   <라쇼몽>에 등장하는 스님도 비슷한 케이스다. 그는 살인사건에 대한 증인들의 다른 진술이 참을 수가 없었다. ‘진실이 없다면 지옥’이라고 말할 정도니 말이다. 나중에 나무꾼이 버려진 아기를 자기가 키우겠다고 하자 그 스님은 감사의 뜻을 표하며, “당신 덕에 인간에 대한 신뢰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라는 훈훈한 말을 남긴다. 곧이어 아기를 안고 가는 나무꾼 위로 쏟아지는 밝은 햇살은 너무나 익숙하고 관습적인 장면이라 할 수 있겠는데, 변함없는 진실에 대한 믿음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다분히 해석학적인 냄새가 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단순비교 하자면, <라쇼몽>의 결말은 <우리 선희>보다 확실히 진리에 대한 미련이 더 강하다. 그런 면에서 홍상수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보다는 훨씬 세련되게 해석과 해체 사이의 간극을 잘 연출한 것 같다.


해석과 해체


    영화 <라쇼몽>중 어린아이를 안고 가는 나무꾼에게 쏟아지는 빛에 대한 이야기를 앞에서 했는데, 빛은 해석학에서 매우 중요한 상징이다. 서양철학에서 추구했던 최고의 원리는 신플라톤주의를 창시했던 플로티누스 이래로 완전히 초월적인 절대 밝음에 대한 추구였다. 논리학에서 명증성(lucidity, lucid는 ‘빛나는, 밝은’)이 강조되는 이유도 이와 같다. 반면, 최저의 수준은 절대 어둠의 영역인데 그곳에는 적나라한 물질이 있다.

    플로티누스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유출설을 통해 설명하면서, 초자연적인 존재와 물질사이의 연관을 계층화, 등급화하여 하나로 연결시키고자 하였다.[각주:2] 그리하여 그는 서구철학의 오래된 전통인 빛의 존재론, 빛의 윤리학, 빛의 미학을 정초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 한다”라는 공리는 그런 의미에서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세를 마감하고 근대를 열었다고 평가되는 계몽주의의 영어표현이 Enlightment인데, 그 가운데 빛을 의미하는 단어 ‘lihgt'가 배치되어 있는 것도 중세를 암흑(타자)이라 상정하고 그것을 비추고 밝힌다는 의미다. 기본적으로 근대적 이성이란 계몽적 이성이고, 계몽(enlinghtmnet)이란 빛(light)의 사유다. 해석학은 이런 빛에 대한 믿음, 즉 빛에 의해 조명되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목적지에 이른다는 믿음에 의해 그 권위가 유지된다.

       루카치는 빛의 사유와 그것에 대한 믿음으로 유지되었던 시절을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적고 있다:“별이 빛나는 하늘을 보면서 갈 수 있고 또 가야 할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각주:3] 하늘에 떠 있는 저 별은 온갖 공상과학 영화에 나오는 우주전쟁의 배경이 되는 별이 아니다. 저 별은 고. 중세인들에게는 삶의 지도, 인생의 나침반, 선택의 기준이 되었던 좌표였다. 인간은 그저 하늘에 떠 있는 별로 대변되는 천상의 이치(로고스)를 따라 가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별을 보고 걷다 걷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목적지에 이르게 될 것이고, 우리가 꿈꾸는 구원에도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천상의 질서와 인간의 질서는 빛을 매개로 하나로 이어져 삶의 완결성과 총체성을 완성하였다.

   해석학적 전통 안에서는 경험의 잡다한 다발들과 그로 인한 상대적 관점들이 각자도생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하나의 목표점을 향한 초월의 행렬을 이루고, 최종적으로 그 행진은 끝에서 객관적 진리와 만날 것이다. 해석은 이러한 믿음 위에 서있다. 그렇다면 해체란? 해체는 해석이 지니는 믿음에 딴지를 걸고 조롱하고 야유하면서, 해석이 만들어 놓은 절대적 믿음의 시스템을 교란시키는 행위라 할 것이다. 해체는 절대 초월적 진리를 허락하지 않는다. 해체주의 철학자 데리다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텍스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There is nothing outside of the text)”[각주:4]

    해석학적 믿음은 텍스트 밖에 로고스(혹은 코기토)로 상징되는 해석의 빛이 있어서 텍스트 안으로 그 빛을 비추어 텍스트 속에 숨어 있는 천상의 진리를 발견하는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마치 자궁에 있는 태아가 탯줄에 의지해 산모와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천상의 진리 이데아는, 이성의 원리인 로고스 혹은 코기토에 의해 인도되어 텍스트와 교신한다. 데리다의 발언은 서양철학 전반에 뿌리 깊게 베어있는 해석학적인 믿음에 대한 반기라 할 수 있다. 그럼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해체주의 사상의 상징적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자크 데리다의 삶과 사상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자크 데리다'에게 있어 해체란?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는 1930년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 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알제리에서 광폭하게 시행된 프랑스의 반셈주의와 페탕정책(학교에서 유대인 학생의 비율을 7% 제한하는 유대인 차별정책)의 피해를 받으며 고등학교를 마쳤다. 데리다가 그의 글이나 발언에서 강조하는 차이와 다름, 그리고 타자에 대한 환대개념은 유소년 시절 식민지 국가 알제리에서 유대인으로 살았던 차별과 배제의 경험이 사후적으로 재구성되어 귀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각주:5] 알제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데리다는 프랑스로 건너와 몇 차례의 낙방 끝에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여(1952) 수학하였다. 27살(1957년)의 나이에 교수자격시험을 통과한 데리다는 1964년부터 1984년까지 파리고등사범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데리다 연구자들은 1990년대 현실 사회주의가 패망한 이후의 데리다와 그 이전 데리다를 구분한다. 데리다는 사회주의가 몰락한 이후에 절필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나서 1992년에 후쿠야마가 자본주의의 전 지구적 승리를 선언한 『역사의 종말』이라는 책을 썼고, 그로부터 1년 후에 데리다의 가장 문제적인 저작이라 할 수 있는 『마르크스의 유령들』[각주:6]이 출판된다. 이 책을 기점으로 해서 전기 데리다와 후기 데리다를 나눈다. 전기 데리다는 주로 서구 형이상학에 대한 해체에 주력하면서 그에 대한 전략으로 언어, 기호, 텍스트에 대한 천착을 그 특징으로 한다면,[각주:7] 후기 데리다는 정치, 윤리, 법, 신학,정의론 등 정치철학과 신학적인 부분으로까지 자신의 관심사를 확대하여 해체론을 적용하기에 이른다.[각주:8]

   데리다가 활동할 무렵 프랑스에는 가히 천재들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사상가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했다. 샤르뜨르, 폴 리꾀르, 미셸 푸코, 들뢰즈, 알튀세, 바디우, 자끄 라깡, 레비스트로스, 소쉬르, 야콥슨, 레비나스 등 서로 다른 무닉와 색깔을 지닌 일군의 학자들이 등장하면서 그야 말로 백가쟁명의 시대를 연출했는데, 그 중에서도 데리다는 당대 철학의 상징으로 우뚝 자리한다. 이런 데리다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바로 해체와 차연이다.

    통상 해체주의는 파괴, 전복,폭력 등의 용어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어렵고 무거운 느낌을 던져준다. 이런 까닭으로 데리다를 변호하는 학자들마다 제일 먼저 시도하는 것은 해체주의에 대한 선입견을 불식시키는 작업이다. 데리다에게 있어 해체란 즉물적인 의미에서 무엇인가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 해체란 기존 텍스트 안에 묻혀 있었던, 저자 조차도 의도하지 못했던 진실을 발굴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텍스트 해석의 지평을 확장하는 과정 혹은 절차 일반을 의미한다.

    이것은 데리다가 지니고 있었던 문헌학자로서의 특이한 이력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후설, 하이데거, 소쉬르 등의 책을 면밀히 분석하면서 기존의 관점이 아닌 새로운 시각으로 그들의 텍스트를 읽어냈다. 데리다가 플라톤의 『티마이오스 Timaeus』를 읽으며 플라톤조차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코라(Khora)의 중요성을 언급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코라’는 조물주인 데미우르고스가 우주를 창조 할 때 물질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세상은 이데아의 모방(imitation)이고, 세상속에서 이데아가 구현되는 터, 질료, 대지가 바로 “코라”다. 이데아가 질서(Order)라면 코라는 혼돈(Chaos)을 상징한다. 흔히 서양 철학의 오래된 질문이라 할 수 있는 형상과 질료, 주관과 객관의 조화란 범박하게 말하면 이데아를 코라에 이식함으로 코라의 혼동을 극복하고 현실가운데 안정과 질서, 그리고 통일을 가지고 오는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는 플라톤 스스로도 의도하지 못했던 코라의 의미를 찾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리하여 발견한 것이 ‘코라 없이는 이데아도 없다’는 것이다. 코라는 지금까지 논외의 영역이었고, 단지 이데아가 발현되는 과정에서 소모되는 것으로 치부되었었는데, 데리다의 꼼꼼한 텍스트 분석에 의해 코라는 이데아 못지않은 위상을 부여받게 된다. 코라에 이데아가 심겨져야 비로소 그것이 발현되는 것으로 말이다. 이렇듯 그동안 묻혀있었던 텍스트의 의미를 재발견하는 것, 혹은 그 과정 일반을 데리다는 ‘deconstruction’이라 불렀다.


'차연'에 관하여


    해체주의(deconstruction)의 대명사격인 데리다의 ‘차연’개념은 데리다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임과 동시에 이후 다루어지는 데리다의 사회철학으로 접근하는 데 있어 통과의례적 성격을 지닌다.‘차연’으로 번역된 differance는 어원적으로는 Differ(다르다) 와 defer(연기하다), 이 둘이 합쳐진 조합어이다. 영어로 번역된 데리다의 저작을 보면 불어인 differance를 그냥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사실, 영어로 differance를 표현하는 단어는 없다. 새롭게 만들어내야 하는데, differ와 defer의 의미 다 들어간 단어를 만들어 내기가 만만치 않은 까닭에 굳이 그것을 만드는 것 보다는 불어인 differance를 그대로 쓰는 것일 게다.

    미국 Northwestern Univ 철학과에서 현상학을 가르치면서 데리다 해석의 권위자로 각광받는 페넬로페 도이쳐(Penelope Deutscher)교수는 데리다의 차연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차연은 현존(present)도 부재(absent)도 아니다. 그것은 현존의 효과를 발생시키는 일종의 부재이다. 그것은 동일성(identity)도 아니고 차이(difference)도 아니다. 대신 그것은 일종의 미분화(differentiaition)이다. 그것은 그러한 동일성들 사이에서 동일성과 차이의 효과를 산출한다.”[각주:9]

    differentiation는 수학용어로는 미분을 뜻하는 말이다. 미분이 무엇인가? 계속 잘게 쪼개는 것이다. 이렇듯 Differntiation은 사전적으로는 ‘미분화하기’이지만, 의미론적으로는‘차이화하기’로 치환된다.[각주:10] 미분했다는 말은 쪼개어져서 이 전 형태와 다른 차이가 발생했다는 뜻이니 말이다. 그렇다고 볼 때,‘차이화 하기’라는 말은 차이를 계속 생성한다는 의미에서 ‘차이’ 와 ‘연기’의 의미가 고스란히 담겨져있는 말이고, ‘차이를 계속 생성한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틈과 여백이 계속 생겨난다는 뜻이며, 해석학적으로 의미를 부여하자면 해석에 대한 독점없이 해석의 준거점들이 계속 바뀌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위 글에서 ‘차연’은 틈과 여백을 창출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틈과 여백이란 의미가 재현할 수 없는 공간을 뜻한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예가 카푸카의 소설 <굴>이다.[각주:11] 소설은 굴을 파는 짐승의 시선으로 처리되어 있다. 누구도 침입하지 못하도록 안전하게 굴을 파는 짐승이 있다. 어느 정도 안락한 거처를 마련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디서부터 소리가 들린다. 짐승은 그 소리가 분명 바깥에서 들리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짐승은 그 소리의 출처를 찾아 끊임없이 탐색한다. 소설은 그것으로 끝이다.

    하지만, 카푸카의 <굴>을 읽다보면 그 소리가 바깥이 아니라, 이 짐승의 내부에서 나오는 것임을 느낄 수 있다. 짐승은 그 소리가 밖에서 나고 있다고 믿고 있는데, 그 확신이 바로 자기동일성이고, 환상이고, 환타지다. 어쩌면 서양철학에서 말하는 ‘자기동일성’이란 타자에게 노출되는 것을 꺼리는, 그래서 그 틈을 메워야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던 히스테리였고, 변증법이란 그 틈과 여백을 메우기 위해 고완된 정신의 방어기재인지도 모르겠다. 헤겔은 “역사는 절대정신의 자기실현과정이다”라고 말했다지만, 데리다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절대정신의 자기실현 과정은 서구인들의 허풍이고 위선이다.

    현대철학은 헤겔류의 자기동일성에 대한 반동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자기동일성을 ‘Totality’(전체성)이라 비난한 후, ‘전쟁의 존재론’[각주:12]이라는 저주를 퍼부었고, 푸코는 서구의 근대가 그려나갔던 자기동일성의 역사를 ‘광기의 역사’였다고 회고한다. 데리다가 말하는 ‘차연’ 역시 이러한 서구가 지녔던 자기동일성에 대한 비판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해체적으로 산다는 것


   인종적, 종교적, 문화적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고, 그 사이의 간격을 유지한 채 나이스하게 서로의 다름을 넉넉히 바라볼 줄 아는 미덕, 이것이 글로벌하고도 포스트모던한 사회를 살아가는 명법이라 우리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하지만,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화법은 신자유주의로 요약되는 현대사회의 정치-경제적 현실을 왜곡하고 희석시킨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식자들에 의해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데리다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상징하는 대표적 학자로 지목되었고, 그리하여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로부터 집중 포화의 대상이 되었다. <맑스의 유령들> 출판이후에 이런 오해들이 다소나마 풀리기는 했지만, 데리다를 향한 편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데리다에 대한 세인들의 평가에는 다소 곡해가 있다. 데리다가 말하는 ‘차연’은 우리의 예상과는 다르게 ‘차이’ 그 자체에는 관심이 없다. 명사화된 차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차이가 계속 발생하는 상황과 차이가 발생하면서 일으키는 사건과 사태에 관심한다. 이것이 데리다의 차연이 지니는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한 간과가 데리다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켰던 셈이다. 데리다의 ‘차연’은 차이를 계속 발생시키면서 도래하는 사건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다. 그렇다면 데리다의 차연을 현실의 삶에 적용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차이가 차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에는 여성혐오, 동성애혐오, 장애인혐오, 유색인종에 대한 혐오(백인제외), 특정 종교(이슬람)에 대한 혐오가 난무하고 있다. 어떤 이유로 차이가 적대의 매카니즘으로 작동되는 것일까. 혹 절대적 진리에 대한 초월의 사유, 초월에 대한 믿음, 그리고 초월적 진리에 대한 해석의 전통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연후에 그것 이외의 것들을 적(敵), 혹은 균(菌)으로 분류하여 증오하고 혐오하면서 순혈주의를 강화하다보니, 우리와 다른 차이는 우리 사회에서 악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해체적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남성중심주의, 이성애중심주의, 백인중심주의, 기독교중심주의로 상징되는 절대적 믿음의 시스템속에서 차이를 계속 발생시키는 행위이고, 뿌리깊은 해석의 권위에 틈을 내고 균열을 일으키는 것이다. 여혐에 대해 저항하고, 동성애자들의 권리를 옹호하며, 한국교회가 지닌 아집과 독선에 대해 회개운동을 펼쳐나가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자본에 의한 전 지구적 재편이 완료되고, 자본의 법칙만이 유일한 정언명법이 되어버린 세계 속에서 해체적으로 산다는 것은, 자본이라는 초월적 보편성에 딴지를 걸고, 자본의 원칙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상상하는 것이다. 무엇이 있을까. 4대강, 강정, 밀양, 핵발전소, 사드배치 등, 거대자본의 논리와 특정집단의 이익에 따라 국토를 유린하는, 국가의 행정집행에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작게는 편리와 유행이라는 시대의 유혹 때문에 잃어버렸던 내 삶의 습관과 방식을 점검해보는 것, 그리고 나서 좀 느리고 불편하더라도 유행과 욕망에 둔감해지는 방법을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고민한 후에 실행해보면 어떨까.

   결국, 해체적으로 산다는 것은 거창하지도 무시무시한 것도 아니다. 내가 내 삶속에서 차이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내 스스로가 우리 삶을 지배하는 법칙들을 의심해보고 재해석 하면서, 나만의 삶의 방식을 상상하고 실험하는 것, 이것이 자본으로부터의 일탈을 시도하면서 새로운 삶을 추구하는 해체적 인간이 출현하는 지점이다.


ⓒ 웹진 <제3시대>



  1.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서영 옮김, 『시차적 관점』, (서울: 마티, 2009), 349. [본문으로]
  2. 에버렛 퍼거슨 지음, 박경범 옮김, 『초대교회 배경사』 (은성, 1993), 384-386 [본문으로]
  3. 게오르그 루카치, 반성완 옮김, 『소설의 이론』(심설당, 1998) [본문으로]
  4. Derrida, Jacques., Of Grammatology, Corrected edition. Trans. Gayatri Chakravoty Spivak (Bultimore and London: Johns Hopkins Press, 1997), 158. [본문으로]
  5. 제이슨 포웰, 박현정 옮김, “1장, 알제리”,『데리다 평전』,(인간사랑, 2010), 37-53. [본문으로]
  6. Jacques Derrida, Specters of Marx. Translated from the French by Peggy Kamuf (N.Y:Routledge, 1994). [본문으로]
  7. 데리다는 1967년에 세 개의 주요 저서, 『목소리와 현상 Speech and Phenomena』(김상록 역, 인간사랑, 2006),『그라마톨로지 Of grammatology』(김성도 역, 민음사, 2010 개정판),『글쓰기와 차이 Writing and Difference』(남수인 역,동문선, 2001)를 발표하면서 일약 스타철학자로 급부상하였고, 1972년에 두 번째 세 개의 주요저서인 『산종 Dissemination 』,『철학의 가장자리 Margins of Philosophy 철학의 가장자리』,『입장들 Positions』,(솔출판사, 1992)을 발표하면서 그의 전기 사상을 완성지었다. [본문으로]
  8. 『법의 힘 Force of Law』(진태원 역, 문학과 지성사, 2004),『환대에 관하여 Of Hospitality』,(남수인 역,동문선, 2004),『불량배들: 이성에 관한 두 편의 에세이 Rogues』,(이경신 역,휴머니스트, 2003),『우정의 정치학 Politics of Friendship』(1994)등이 있다. 특별히 『The Gift of Death』(1986)과『Religion』(1998)은 해체론과 신학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본문으로]
  9. Penelope Deutscher, How to Read Derrida (New York: WW Norton & Company, 2005), 29. [본문으로]
  10. “그것은 미분화(differentiation)된 상황을 지시하는데, 그것은 거리두기(간격두기)를 말하는 것이고, 어떤 기호도 자기폐쇄적인 동일성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Ibid., 31. [본문으로]
  11. 프란츠 카프카 지음, 전영애 옮김,“굴”,『변신.시골의사 –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 (민음사, 1998) [본문으로]
  12. Levinas, Emmanuel. Totality and Infinity: An Essay on Exteriority. trans. Alphonso Lingis, Pittsburgh, (PA: Duquesne University Press, 1969), 2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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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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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의 환대와 방문의 환대

 


김혜령[각주:1]
(이화여대)


 

          얼마 전 우연히 EBS <다문화 고부열전>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캄보디아에서 시집온 며느리와 함께 살고 있는 한 시어머니의 곤란한 이야기를 보았다. 며느리의 아버지인 사돈어른이 한국에 일을 찾아오게 되었는데, 몇 달 되지 않아 공장이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러자 시어머니는 오갈 데가 없는 신세가 된 사돈어른을 아들과 며느리, 손주와 함께 사는 자기 집에서 지낼 수 있도록 호의를 베풀었다. 그러나 안타까운 마음에 사돈어른의 동거를 허락한 첫 마음은 날이 지날수록 점점 더 불편한 마음으로 변하게 되었다. 더운 기후를 갖고 있는 캄보디아 문화를 따라 사돈어른이 유난히도 더운 올 여름 장소를 가리지 않고 웃통을 훌러덩 벗어버리고 거실 한가운데를 떡 하니 차지한 채 TV 삼매경에 빠졌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집주인 시어머니는 아들 며느리 모두 일하러간 낮이면 웃통 벗은 사돈어른이 민망하여 자기 방에서 나오지도 못한 채 땀을 뻘뻘 흘리며 속앓이를 하게 되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사돈어른의 이해되지 않는 행동이 불편했던 시어머니의 20대 딸은 아예 견디지 못하고 당분간 친구 집에서 지내겠다며 짐까지 싸서 나가고 말았다.  

          이 이야기에 마음이 끌린 것은 눈치 없이 거실 한 가운데에서 웃통을 벗도 TV를 보는 캄보디아 사돈어른을 보며 나도 모르게 ‘뻔뻔함’이라는 느낌과 ‘못마땅함’이라고 불러야 하는 감정이 본능처럼 솟아올랐기 때문이다. 평소 스스로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졌다 자부했던 윤리적 자만 때문이었을까? 아무도 모르게 일어나는 거친 마음결을 다시금 확인하며 여전히 내 자신이 진보 코스프레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되었다.  

          우리는 어려운 형편에 처한 사람, 고아, 과부, 외국인 등 약자라 불릴 만한 이들에게 따뜻한 호의와 나눔을 베풀라는 사랑의 명령이 그리스도인 모두를 향한 예수의 명령임을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신약학자 바이런은 이러한 사랑의 명령이야 말로 사회적 기피대상으로 취급받던 약자들에 대한 예수의 ‘환대 선교’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는 이방인과 약자들을 공동체의 울타리 밖으로 내치고 그들과 더불어 살기를 거부하는 반(反)환대주의자인 것이다.  

         낯선 이방인, 과부, 어린이, 병자, 몸 파는 여인 등 다양한 이유에서 사회적으로 주류 공동체의 외부에 있을 수밖에 없는 약자들에 대한 무한 ‘환대’가 예수 선교의 중요한 핵심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캄보디아 사돈어른의 예에서처럼 우리는 예수를 따라 현실에서 타자를 환대하는 일이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열매 맺지 못한다는 것을 종종 경험하고는 당혹감에 휩싸이게 된다. 그래서 처음에는 좋은 마음으로 호의를 베풀었으나 자신에게 제공된 은혜를 당연한 것처럼 누리는 이들을 마주하게 될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결을 거칠게 만드는 못된 감정들의 발생원인을 금세 ‘배은망덕’이라는 사자성어로 아주 자연스럽게 합리화한다. 

          선한 마음을 그릇이라고 비유한다면, 우리의 선한 마음은 바닥이 그리 깊지 못한 그릇인가보다. 시원한 물을 퍼주다가도, 계속 상대방이 요청을 하게 되면, 금세 아... 이거 내가 먹을 물까지 다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생기게 되고, 눈치 없이 물을 더 달라고 요구하는 상대방이 야속해 지기도 한다. 선한 마음으로 분명히 다가간 것이지만, 받아들이는 이가 요청을 계속해서 더 하거나, 고마운 마음을 내가 충분히 만족할 만큼 표하지 않을 때, 어느새 우리는 그를 환대한 것에, 그에게 나의 것을 나누어 준 것에 후회를 하게 되고 만다.  

          이러한 현실적 경험들이 쌓이게 되면 사람들은 아무나 환대하기를 바라지 않게 된다. 우리가 환대하면 그 환대에 예의바르게 반응할 사람, 또 우리가 환대한 만큼 자신을 변화시켜서 가난이나 어려움에서 스스로 자립할 수 있을 만큼 매우 성실한 사람, 우리의 환대에 진심으로 고마워 할 줄 아는 사람... 이런 사람을 우리는 환대하기를 원한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거리의 술 취한 노숙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는 것은, 그들이 우리의 ‘선한’ 환대를 마땅히 받을 수 있는 요건에 부합하지 않은 사람들, 보다 야박하게 말해서 그러한 환대를 받을 가치나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이러한 현실적 환대의 아이러니를 정치적 영역으로까지 확대하며 설득력 있는 분석을 보여준다. 그는 앞의 예와 같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환대받을 만한 사람을 환대하는 것을 ‘초대의 환대’라 부른다. 즉 환대받을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 조건을 따져서 선별적으로 환대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선택된 환대, 즉 ‘초대의 환대’라는 것이다. 데리다는 한 공동체에서 누구를 선택하여 초대의 호의를 베풀 것인가라는 문제는 ‘우리 공동체에 이익이 될 것인가, 안될 것인가’를 따져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결국 정치적 문제이고, 환대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구별한 법적 절차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  

          ‘현실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모든 이들을 환대할 만한 공간적, 물리적, 경제적 여유가 넉넉하지 않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초대의 환대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최근 몇 년간 유럽의 난민 유입과정에 있어서, 난민으로 수용될 수 있는 사람들의 자격을 따지는 것도 사실을 ‘초대의 환대’의 대표적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난민을 수용하되, 우리 공동체의 해가 되지 않는 이들만 수용할 것! 고마워 할 줄 아는 이들만 받아들일 것! 우리 공동체에 이익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을 수용할 것! 테러와 같은 위험 요소를 가진 이들은 철저하게 배제할 것! 이 모든 것이 결국 조건을 따져서 선택적으로 환대하는 ‘초대의 환대’의 정치적이고 법적인 조건인 것이다.  

          물론 데리다는 이렇게 초대의 환대라도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 매우 고무적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실제로 난민 수용을 거의하지 않는 우리나라와 비교해 보자면, 까다로운 조건이나마 따져서 난민 수용을 할 수 있는 만큼 최대치로 하려는 일부 서유럽 국가들의 난민정책은 인류의 역사상 가장 진보한 것들 중에 하나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데리다는 환대가 이렇게 ‘초대의 환대’에만 머물게 될 때의 위험도 잘 짚어낸다. 초대의 환대는 결국 선택된 이방인이나 약자가 환대를 베푸는 사람이나 공동체의 규칙과 문화를 침해하지 않고, 그것을 아주 잘 따르겠다는 암묵적이고 심지어 법적인 동의 아래에서만 이루어지기에, 그 선택을 받는 이의 입장에서는 – 당장은 고마운 일일 수 있으나 – 결국 자신을 이제까지 구성하였던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존재방식을 일정부분 혹은 전체를 포기해야하는 것의 다름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선택적 환대는 정확히 말해 환대를 받는 이의 모든 다름을 인정하고 그가 내 집이나, 우리 공동체에서 완전히 동등하게 활동하게 하는 권리까진 주진 않는다. 그래서 데리다는 이러한 ‘초대의 환대’가 약자에 대한 강자의 ‘관용’(tolerance)에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우리가 현실 속에서 누구를 환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을 벌일 때, 성서와 예수의 복음은 우리의 논쟁을 근본부터 흔들어 놓는다. 레위기 19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외국인을 환대하라고 하시는데, 여기에는 어떠한 조건이 달려 있지 않다. 어떠한 종교를 가진 외국인인지, 어떠한 피부색을 가진 외국인인지, 어떠한 신분의 외국인인지 그 단서가 달려 있지 않다. 유일한 환대의 단서가 있다면, 그것은 환대받는 자에게 있지 않고 환대하는 자에게 있다. 곧 이스라엘 백성이 외국인으로 떠돌아 다녔던 경험이 환대의 단서가 될 뿐이다. 예수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헐벗은 자, 굶주린 자들을 환대하던 자들이 최후에 날에 복을 받을 것이라 말했다. 여기서 예수는 그들이 굶주리는 이유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들이 게을러서이건, 병들어서이건, 부모를 잘못 만나서이건, 노력하지 않아서이건 가난의 이유가 언급되지 않았다. 그들이 헐벗고 굶주린다는 사실 하나만이 환대의 충분조건을 갖춘 것이다.  

          오직 도움이 필요하다는 상황만이 환대의 조건이 되는 ‘무조건적 환대’에는 주도권이 환대받는 이에게 있다. 낯선 피부색과 언어를 사용하며 다가오는 이, 굶주림에 배를 움켜잡고 손을 내미는 이. 그들 자신이 우리에게 자신을 환대하라고 요청하고 명령한다. 그들이 우리의 호의에 배신하지 않고 우리 공동체에 이익을 줄 것인지, 배은망덕하지 않고 충분하게 우리에게 고마워 할 것인지 먼저 선별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도움을 요청하고, 우리는 그 요청에 조건 없이 환대하고 도와야 하는 명령만이 있을 뿐이다. 데리다는 이러한 무조건적 환대를 초대의 환대와 구별하여 ‘방문의 환대’라는 다른 이름을 붙여준다. 초대와 달리, 방문은 예기치 않게 다가올 때가 많다. 방문의 환대는 그들의 갑작스런 방문에 문고리를 쥐고 방범구멍으로 그 얼굴을 탐색하지 않는다. 방문의 환대는 조건 없이 문을 여는 것이다.  

          그러나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조건 없이 문을 열어 우리의 공간 안에 받아들이는 호의는 환대받는 자의 태도를 예상할 수 없기에 큰 두려움을 동반한다. 실제로 캄보디아 사돈어른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 아니 이러한 예 정도는 아직은 감당할 정도일지 모른다 -, 혹은 유럽에서 테러를 일으키는 소수의 이민자들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방문의 환대는 우리의 공간과 삶, 심지어 생명의 손해까지 감수해야하는 매우 어렵고 위험한 일일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데리다는 ‘방문의 환대’는 현실적이라기보다 ‘이념의 환대’에 불과하며, 법적으로도 명시화 할 수 없는 것임을 분명하게 밝힌다.  

          ‘방문의 환대’는 ‘이념의 환대’일 뿐이라는 데리다의 선언은 자칫 무조건적 환대의 전면적 포기로 보일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무조건적 환대의 현실적 불가능성에 대한 인정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환대를 끊임없이 이념적으로 생각하고 추구하는 인간의 무한한 윤리성에 매우 큰 의미를 둔다. 인간이 무조건적 환대의 현실적 어려움에 더 이상 그러한 환대를 논하고 생각하지 않을 때 발생하는 매우 심각한 문제는 ‘초대의 환대’의 대상과 범위마저 야박해지기 십상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이방인의 조건을 따지지 않고 굶주림이라는 단 한가지의 사실만으로도 그를 환대해야 한다는 성서의 명령을 하늘나라에서나 통하는 예외적 법쯤으로 외면할 때, 우리는 우리가 하는 야박하고 소심한 선택적 환대 행위에 스스로 만족하고 안도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현실적 최선이라고 자위하게 될 것이란 말이다.  

          어쩌면 환대받는 이의 배신이나 배은망덕은 우리가 타인에게 선택적으로 베풀고 있는 것이 “현실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호의이자 최고의 환대라는 우리의 윤리적 자만이자 자아도취에 기인하는 것일지 모르겠다. 어찌 보면 우리의 호의와 친절에 더 큰 호의와 친절을 요구하고 감사한 마음을 충분히 표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도움을 받는 이가 사실은 그 나름의 존재 방식을 가지고 있는 ‘자유인’임을 증명하는 것일 수 있다. 친절한 환대에 대해 감사해야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이지만, 그래도 그러한 도리가 의무로 강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 구속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감사가 신앙의 자유에서 기인할 때에만 참된 의미가 있음을 유비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초대의 환대’와 ‘방문의 환대’, 다시 말해 ‘선택적 환대’와 ‘무조건적 환대’의 아이러니를 앞에, 우리는 ‘나는 베풀고 너는 고마워해야만 한다’ 식의 태도, 요즘말로 ‘답정너’(답은 정해져있고, 너는 대답만 하라는 뜻의 줄임말)의 태도가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한번 쯤 신중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 웹진 <제3시대>

  1. 이화여대 기독교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신학박사(윤리)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대 호크마교양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다. 서울 향연감리교회에서 점심봉사를 하며 가끔 설교를 맡기도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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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는 가라![각주:1]

: 발터 벤야민과 자크 데리다의 메시아론 소고(小考)




이상철
(본지 편집인 / 한백교회 담임목사)

 


Intro: 메시아의 귀환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메시아주의는 미래의 어느 막연한 시점에서 현실의 절망적 공간안으로 귀환하는 한 슈퍼스타를 기다리는 열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메시아적 대망은 현실의 고통과 환난을 견디게 하는 종교적 위안이자 미래를 대망하는 종교적 비젼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녀)의 재림으로 인해 체제의 압제로부터 비롯되는 이 땅에서의 고통과 억울함, 분노와 절망은 일거에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이 땅의 민중들이여, 조금만 더 참고 견디라! 이제 곧 그 분이 오신다!” 이것이 메시아주의를 바라보는 범박한 정의이자 주술이라고 한다면 불손한 발언일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역사에서 전개되었던 메시아주의의 현실은 배제와 차별, 적대와 응징의 매카니즘을 양산하면서 비극적 메시아 현상학으로 나타났다. 현실의 역사가운데 전개되었던 메시아적인 열망과 환상은 그것 이외의 것들을 끊임없이 타자화시키는 배제의 매카니즘을 낳았고 폭력을 정당화시켰다. 멀게는 중세 십자군 원정과 근세에 벌어졌던 서구 열강들의 제3세계 침탈 과정에서부터 얼마 전에 있었던 미국의 이라크 전쟁으로 대변되는 ‘테러와의 전쟁’까지, 시대와 이유를 떠나서 그 이면에는 서구열강의 음모를 메시아적 환상으로 등치시키고 그것들 이외의 것은 모두 악으로 규정하는 배제의 매카니즘이 깔려있다. 이러한 메시아주의 안에 깃든 광신성을 감지했던 데리다는 ‘the meesianic without messianism’이라는 다소 과한 표현을 동원하면서 전통적 메시아주의를 향한 적대를 선언한 바 있다.   

   민중신학에서 말하는 민중메시아는 위에서 잠시 언급한 서구 메시아론의 지형에서 보면 그 위상이 꽤나 독특하다. 역사적 예수가 성취했던 유일회적 그리스도 사건을 예수라는 어느 한 슈퍼스타의 일인 무용담으로 가두지 않고, 예수와 더불어 함께 한 민중(오클로스)까지를 포함한 사건으로 취급했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당대의 화석화된 메시아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까지 민중의 함성과 저항을 통해 이어지는 살아있는 메시아 사건으로 해석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런 이유로 민중신학의 메시아론은 주체의 역동과 시대적 사명이 강조되었던 시기에 진보기독교 진영은 물론, 인문-사회과학에 몸담고 있었던 많은 양심적 지식인들에게 당대를 해석하는 중요한 해석학적 창구 역할을 담당했었다. 하지만, 포스트모던 광풍이 몰아친 이후 주체의 죽음이 선언되고, 시대의 요구와 당대의 원칙이 대의와 명분에서 실리와 자본으로 바뀌는 신자유주의가 등장하면서 민중신학을 포함한 대부분의 진보이론들은 변두리로 밀려나가기 시작했다.  

    사실, 현실 사회주의의 실험이 실패한 이후 지금까지 자본의 무한 질주는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2001년 9.11 테러를 통해서, 2008년 미국을 강타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거치면서 문제점들을 하나씩 노출하기 시작한다. 신자유주의가 갖는 모순들, 즉 체제는 숨기려 하지만 감출 수 없는 틈과 균열이 더 이상 은폐가 안 되고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그동안 움츠려 있었던 진보진영으로 하여금 변혁에 대한 꿈을 다시한번 상상하게 하고 감행하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항이 있다. 맑스의 세례를 받은 진보적 좌파지식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그리스도교 논쟁이 근래에 핫한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로 따지면 빨갱이들이 그리스도교로부터 변혁을 위한 상상을 끌어오고 있는 셈인데... 특이한 것은 그들의 논의 주제가 메시아라는 점이다. 왜, 무엇 때문에 다시 메시아는 소환되는가? 이 글은 전 시대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는 현대철학자들의 메시아 논의를 따라가면서 그것이 어떻게 신학적 상상력과 조우할 수 있을지에 대한 수고(手鼓)이다.  


서로 다른 메시아: 유대교 메시아 Vs. 개신교 메시아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유대교 메시아론과 개신교의 메시아론 사이의 차이점에 대해 언급할 필요를 느낀다. 이는 이후 전개되는 유대계 사상가인 발터 벤야민과 자크 데리다의 메시아론을 이해하는데 필수적 요소이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개신교 메시아주의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메시아에 대한 이해의 폭을 확장시킨다는 점에서도 유의미한 작업이다.  

    개신교의 메시아주의에는 역사적 종말과 인간의 믿음사이에 일정한 함수 관계가 있지만, 유대교 메시아주의에는 개신교의 그것과는 다르게 세상의 법칙과 하늘의 법칙, 세속적 질서와 신적 질서 사이에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다. 구원이란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나타나는 변증법적 원리도 아니고, 인간 주체의 변혁을 향한 의지와 노력과도 하등의 관련이 없다는 말이다. 이렇듯 초월적 질서의 도래가 현실의 세계와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유대 메시아주의는 개신교 메시아 주의와 근본적으로 그 성격을 달리한다. 개신교가 구원을 믿음에 대한 신의 응답으로 이해한다면, 유대교 사상에는 구원을 위한 인간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유대교에서 구원은 전적 초월의 사건이 되는 셈이다. 결론적으로 유대 메시아론에서 메시아는 그(녀)의 도래를 염원하는 인간의 바람, 노력, 분투와 상관없이 스스로 오는 자이다. 이러한 전 이해를 갖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유대교 사상가인 발터벤야민과 자크데리다의 메시아론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그들의 조상, 발터 벤야민


    현대 좌파 철학자들 가운데 신학적 상상력으로부터 혁명의 기운을 취하려는 사람들은 대략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다. 자크 데리다, 알랑 바디우, 조르조 아감벤, 야곱 타베스, 슬라보예 지젝 등이 그런 인물들이라 할 수 있을텐데, 이들보다 앞서서 20세기 초반에 벌써 유물론적인 신학, 혹은 유물론자들의 신학을 언급한 섹시한 사상가가 있었다. 그가 바로 발터 벤야민이다.

    벤야민이 활동하던 20세기 초반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그리고 그들의 광기로 자행된 세계대전이 창궐하던 때였다. 이러한 시기에 벤야민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에서 공히 취급되는 메시아담론을 유물론적 상상력과 결합하여 혁명을 위한 정치술로 제안하였다. 벤야민은 개신교 메시아주의에서 말하는 강한 메시아가 아니라 약한 메시아를 주장했는데, 이는 그의 기념비적 논문 <역사철학테제>에 등장하는 ‘희미한 메시아적인 힘’과 연관이 있다.   

    본래 변증법적 시간관은 과거로부터 시작하여 현재를 거쳐 미래를 향해 중단없이 이어지는 시간관이다. 기본적적으로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역사관이고, 오늘보다는 내일이 나이지리라는 기대와 지평 속에서 미래를 향해 가슴을 열고 뛰쳐나가는 것이 특징으로 한다. 그런데, 벤야민은 “희미한 메시아적 힘”을 이야기하면서 기존의 변증법적 시간관에 대해서, 더 나아가 미래에서 기인하는 메시아의 도래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가 말하는 ‘희미한 메시아적인 힘’이란 지나간 과거의 역사적 순간, 혹은 그것을 통해 현실의 비젼을 보게 끔하는 통로로 작용하지만 기존의 메시아론처럼 뚜렷한 목적론적 역사의식에 젖어있지 않다.


<역사철학테제>가 전하는 새로운 메시아

 

    벤야민은 자신의 유명한 소논문 <역사철학테제>에서 신학과‘사적 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의 결합을 동화와 같은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체스게임 판 앞에 터키풍의 의상을 입고 파이프를 물고 있는 인형이 앉아있다. 이 인형은 게임을 매번 승리로 이끈다. 좀 더 그림을 살펴보면 인형의 배후에는 게임의 명수인 난쟁이 곱추가 있고, 그 둘은 줄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벤야민은 인형을 사적 유물론으로, 체스의 명수인 곱추를 신학으로 비유한 후에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상상을 한다. 신학과 사적 유물론이 제휴하면 “그 누구와도 한 판 싸움을 벌일 수 있다”[각주:2]고 말이다.   

    난쟁이 곱추로 그려진 숨어 있는 신은 메시아 혹은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으로 상징된다. 우리의 상상속에서 빛나는 메시아의 모습, 혹은 지난 역사에서 유토피아 건설을 가열차게 주장했던 혁명전사들의 늠늠한 모습에 비하면, 난쟁이 곱추로 묘사된 숨어 있는 신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이렇듯 벤야민이 말하는 메시아론은 기존 메시아론과는 다른 느낌을 우리들에게 선사한다.  

    우리가 흔히 메시아론이라고 할 때 그것은 현실 세계와의 혁명적 결렬 내지 극적 파국의 과정을 겪은 후에 도래하는(to-come) 상태, 내지 상황을 전제로 한다. 전통적 유대사상에서는 현실의 압제를 풀어줄 슈퍼스타의 등장을 대망해왔는데 그(녀)에 대한 기표가 바로 메시아이다. 메시아는 누구이고, 그는 언제 등장하며, 메시아가 등장한 후에 벌어지는 사건들, 상황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그동안 전개되어왔던 주된 메시아론의 토픽들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벤야민이 말하는 메시아론의 핵심은 기존의 메시아론의 시간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벤야민에게 있어 구원의 때는 전통적인 메시아관과는 다르게 미래의 어느 한 지점으로부터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사후적으로 구성되어[각주:3] 현재 시간을 충만케하는 시간[Jetztzeit]이다.[각주:4] 벤야민이 논란의 중심이 되었던 이유는 이런 시간관 때문이다.앞서도 언급했듯이 벤야민의 시간의식은 전통적인 변증법과 다르다. 본래 변증법적 시간관은 과거로부터 시작하여 현재를 거쳐 미래를 향해 중단없이 이어지는 시간관이다. 기본적으로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역사관이고, 오늘보다는 내일이 나아지리라는 기대와 지평속에서 미래를 향해 가슴을 열고 뛰쳐나가는 것이 변증법적 시간관의 특징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벤야민이 “희미한 메시아적 힘”과 “현재시간[Jetztzeit]”을 이야기하면서 기존의 변증법적 시간관에 대해서, 더 나아가 미래에서 기인하는 메시아의 도래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희미한 메시아적 힘’이란 지나간 과거의 역사적 순간, 혹은 그것을 통해 현실의 비젼을 보게끔 하는 통로이겠지만, 그것은 기존의 메시아관 처럼 뚜렷한 목적론적 역사의식에 젖어있지는 않다. 그것을 벤야민은 “역사의 자유로운 하늘에로의 도약”[각주:5]이라 표현하였다.  

    어쩌면 메시아적 현실은 현실에 뿌리박지 않은 미래로부터 도래하는 환상이 아니라, 이 땅에서 투쟁하던(는) 사람들의 집단적 기억속에서 재생되어 사후적으로 도래하는 것 아닐까? 벤야민은 그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 아닐런지? 이는 마치 그림으로 비유하자면 모자이크와 같다. 수많은 조각들이 이루어져 하나의 작품을 형성하듯, 수많은 이들의 꿈과 기억의 퍼즐로 이루어진 것이 메시아적 사건이다. 어느 천재적 화가의 단 한번의 붓질로 미래의 언젠가에 완성되는 그림이 메시아적 사건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파편들이 모이고 자리를 잡고 쌓여서 희미했던 메시아적 힘은 마침내 사건을 만들어 낼 것이다. 이런 뉘앙스가 벤야민의 메시아론에 깃들어 있는 함의다.  


자크 데리다의 '메시아적인 것'


    자크 데리다는 벤야민의 메시아를 둘러싼 문제의식으로부터 본인 사상의 후기를 대표하는 명제인 “the messianic without messianism”[각주:6] 을 끌어온다. 우리가 흔히 메시아론이라고 할 때 그것은“현실 세계와의 혁명적 결렬 내지 극적 파국의 과정을 겪은 후에 도래하는(to-come) 상태 내지 상황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데리다가 말하는 ‘메시아적인 것 the messianic’은 기존의 ‘메시아론을 배제한다(without messianism)’는 점에서 이채롭다.  

    우선, 데리다의 ‘메시아적인 것’은 벤야민이 그랬던 것처럼 시간관부터가 종전 메시아론과 다르다. 데리다는 햄릿에 나오는 대사을 인용하면서, 메시아적 사건으로 인해 현재의 질서와‘시간이 탈구될 것(time is out of the joint)’이라고 예언하였다.[각주:7] 데리다의 이 말은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변증법적 시간관과 더 나아가 변증법적 논리에 입각한 역사발전의 원리를 부정하는 입장을 데리다가 취했기 때문이다.  

    본래 변증법적 시간관은 과거(예: 창조)로부터 시작하여 현재를 거쳐 미래(예: 새하늘 새땅)를 향해 중단없이 이어지는 시간관이다. 기본적으로 진보적이고 긍정적인 역사관이고, 오늘보다는 내일이 나아지리라는 기대 속에서 미래를 향해 달려 나가는 낙관적 세계관이다. 그런데 데리다가 “시간은 탈구될 것”을 이야기하면서 기존의 변증법적 시간관에 대해서, 더 나아가 미래에서 기인하는 메시아의 도래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데리다는 ‘메시아적인 것’을 언급하면서 햄릿의 대사를 인용했던 것일까?  

    데리다가 ‘메시아적인 것’을 언급하면서 ‘시간이 탈구’을 끌어들이는 이유는 분명하다.‘메시아적인 것’이란 메시아주의로 대표되는 신학적 도그마와 교리적 환상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고, 그것은 또한 피안의 세계에 대한 맹목적 황홀경도 아니다.‘메시아적인 것’이란 나를 한곳에 정주하지 않게 하고 나를 체제에 순응하지 않게 한다는 점에서 ‘메시아적인 것’이고, 기존의 체제와 시스템, 교리와 도그마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메시아적이다.  

    그러므로 ‘메시아적인 것’은 역사의 계기에서 스스로를 산종하다가 메시아적 계기를 불어넣고 다시 체계에 갇히지 않고 사라지는 역사의 새로움을 겨냥한다. 전통적인 강한 메시아론이 기실 헤겔적인 변증법의 포로에 불과하다면, 데리다에게서 ‘메시아적인 것’이란 변증법을 넘어서는 진공의 상태 혹은 그 가장자리에서 변증법을 조롱하다 뒤돌아서 예측 불가능성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기표가 차연을 통해서 영원히 지연되는 의미의 껍데기만을 지속적으로 산출해내는 것처럼, 데리다에게 있어 메시아란 하나의 기표일뿐이고, 이 지점에서 일어난 ‘메시아적인 것’역시 단순히 껍데기로서 이후의 전혀 새로운 산종에 자신을 양도하는 것이다.  

    이는 분명 꽉 찬 중심을 지향하는 강한 메시아주의(messianism)와는 다른 개념이다. 메시아주의(messianism)로 상징되는 존재론적 확신이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광기로 몰아넣었던가? 이런 이유로 데리다는‘the messianic’을 그 누구도 정착할 수 없는 탈영토화된 공간으로 조성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메시아적인 것’을 텅 빈 공간으로 남겨둔 이유는 보다 더 정치적 속셈이 있다. 텅 빈 기표로서 ‘메시아적인 것’이 현재의 지배적인 시스템속에서 틈과 균열의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이고, 그 틈과 균열을 통해 도래하는 사건과 희망을 예감하고 전망하자는 취지다. 이 대목에서 ‘메시아적인 것’은 위험한 정치적, 윤리적 상상으로 전환되어 우리에게 다가온다.  


'메시아적인 것'의 정치학, 혹은 윤리학


    인종적, 종교적, 문화적 다양성과 다름을 인정하고, 나와 입장과 생각이 다른 타자의 권리를 옹호하며, 신자유주의 시스템 속에서 억압된 욕망을 건강하게 승화시키는 일은 우리시대 중요한 과제다. 특별히 차이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상대방과 나와의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 간격을 유지한 채 나이스하게 서로의 다름을 넉넉히 바라볼 줄 아는 미덕, 이것이야 말로 바로 이 광명한 글로벌하고도 포스트모던한 사회를 살아가는 명법이라 우리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하지만,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화법은 신자유주의로 요약되는 현대사회의 정치-경제적 현실을 왜곡하고 희석시킨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식자들에 의해 의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특별히 맑스주의 계열의 학자들로부터 이런 비판은 드세었는데, 그 중에서도 지젝은 포스트모더니즘이 말하는 수평적 다양성이 혁명에 이르는 수직적 적대를 가로막는 장애물이라 지적하였다. 한마디로 사이비 저항을 멈추라는 것이다.  

    데리다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상징하는 대표적 학자로 지목되었고, 그리하여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로부터 집중 포화의 대상이 되었다. <맑스의 유령들> 출판이후에 이런 오해들이 다소나마 풀리기는 했지만, 데리다를 향한 편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데리다에 대한 세인들의 평가에는 다소 곡해가 있다. 데리다의 차연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차이 자체에는 방점이 없다. 차연은 엄격히 말해 ‘차이가 생성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차이가 생성된다는 말은 불확정성, 비대칭성, 비등가성이 생긴다는 의미이다. 데리다는 후에 ‘차연’을 ‘the messianic without messianism’라는 용어로 정치-신학화 하였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메시아주의에 대한 대항담론의 성격을 지닌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자본에 의한 전 지구적 재편이 완성되고, 그 자본의 법칙만이 유일한 정언명법이 되어버린 이 세계속에서 ‘메시아주의’가 아닌 ‘메시아적인 것’을 유포하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 일까? 신자유주의로 상징되는 이 견고한 텍스트에 차이를 발생시켜 균열을 내고, 주름을 만들고, 틈을 내고, 그래서 이 시스템이 안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불안정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메시아적인 것’ 안에 담긴 정치적 음모가 아닐까? 그리하여 체제로 하여금 불순세력에 의한 공작이 이 사회속 어딘가에서 획책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들게 하고, 뭔가 상스럽지 못한 기운이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은 환상이 보이고, 거리에선‘아직 게임이 끝나지 않았다!’는 주문이 환청이 되어 들리면서, 이 사회가 결코 안정적이지 않음을 유포시키는 것! 그것이 데리다의 ‘the messianic without messianism’ 안에 깃들어있는 정치적 음모이고 윤리적 강령이라 한다면?  

   그러므로,‘메시아적인 것’은 신에 대한 경외를 암시하는 것도 아니고, 신의 전지전능함에 대한 고백과 성찰에서 기인한 말도 아니다. 오히려 신은 텅 빈 기표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초월적 메시아가 스스로를 비워 이 땅으로 하강하는 힘이다. 그런 면에서 신은 충만과 충족의 신이라기보다는 결핍과 잉여로서의 신이다. 텅 비어 있는 신 자체를 세계에 집어넣음으로써, 구멍 자체인 신을 기입함으로 세계는, 그리고 상징적 질서인 세계에 익숙해 있는 우리는 혼란에 빠진다. 그것이 데리다의 ‘메시아적인 것’이 노리는 계략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혁명은 다시 사유되고 시작된다.  


ⓒ 웹진 <제3시대>



  1. 본고는 에큐메니안에 기고한 기사 '메시아는 가라!'의 원고입니다. http://www.ecumen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13787 [본문으로]
  2. Walter Benjamin, “Theses on the Philosophy of History” in Illuminations, with an introduction by Hannah Arendt (New York: Schocken Books, 1968), 253. [본문으로]
  3. 벤야민은 이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지난 세대와 현 세대 사이에 비밀스런 협약이 있다. Our coming(구원을 상징?)이 지구상에서 기대되어 진다. 우리 앞을 살았던 모든 세대처럼, 우리에게도 희미한(약한) 메시아적 힘이 부여되었다. 과거는 그 힘을 요구할 수 있다.”-Ibid., 254. [본문으로]
  4. “역사는 특정한 구조물의 대상인데, 그 구조물의 자리는 단일하고(동일하고) 비어있는 시간이 아니라, Jetztzeit(the presence of the now)에 의해 충만한 시간이다. 그래서 로베스피에르에게 있어 고대 로마는 지금의 시간에 의해 충전된 과거였다... 프랑스 혁명은 스스로를 다시 태어난 로마로 간주하였다.”-Ibid., 261. [본문으로]
  5. Ibid., 261. [본문으로]
  6. “the messianic without messianism”-Jacques Derrida, Acts of Religion. Edited by Anidjar (N.Y:Routledge, 2002), 56. [본문으로]
  7. 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1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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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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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시를 쓰는 수도사
    2016.08.24 20:48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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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미있고 재미있는 설명과 해석입니다. 발터 벤야빈과 자크 데리다의 차이는 시대적 배경이라고 봅니다. 그리스도교가 사회적 체제로서 자리잡은 유럽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았고 따라서 신, 하나님은 진작부터 공기같은 존재로 여겨졌지요. 때문에 저는 메시아론을 검토함에 있어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개신교의 차이라고만 규정하기에 뭔가 부족하지 않는가 생각됩니다. 그런 차이는 구태여 구분하자면 묵시론과 종말론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뭐 어쨌거나 벤야민이나 데리다나 인격적인 또는 외부에서 진입하는 메시아론에는 반대하고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요, 오늘날 금융자본을 독점하고 있는 유대인들이 세운 이스라엘이란 국가가 개신교와 같이 걷고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으셨는지요? 이른바 메시아닉 유태인들 messianic jews 을 비롯한 많은 유대인들이 적어도 미국에서 이를테면 성서고고학 등의 분야에서 개신교와 공조해왔다는 현실에 대한 정치적 문화적 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보지 않으십니까? 벤야민이나 데리다가 이런 현실을 직시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말하는 메시아적 틈새가 과연 어떤 동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개신교의 메시아론이 특별하다고 보십니까? 님의 설명에 따르면, 유대인의 메시아는 정치적 함의를 전면에 내세우는 집단적 기대치라고 말할 수 있고요, 개신교의 메시아론은 도리어 정치적 개념을 탈각시킨 그럼으로써 현실에 대한 아무런 비판도 할 수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기대치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성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집단과 개인 양자를 모두 포괄합니다. 예수가 스스로 "다윗의 자손"이라는 유대인들의 정치적 메시아를 거부한 것에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메시아는 현존하는 모든 인간의 질서 즉 지배를 추구하는 체제에 반하는 하나님의 질서를 이 지구에 항존적으로 설치한 것입니다. 그게 완성되는 시점이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파국이지요. 그때까지 하나님의 창조는 계속되고, 인간의 행위도 계속되겠지요. 하나님의 창조는 혼돈에서 질서로 가는 것이고, 인간의 행위는 엔트로피 법칙을 따르는 것이지요. 이렇게 보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산다는 것의 의미가 복잡해지겠지요.

    메시아에 대한 전제가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아는 이미 왔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최종국에 오는 하나님의 나라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인류 전체에게 희망과 기쁨을 안겨주는 메시아의 나라가 아닙니다. 마지막에 오는 그 나라는 심판의 결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헤겔의 변증법이 틀린 것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이론이 틀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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