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교자유정책연구원이 주관하는 정교분리 학술세미나가 3월 6일 만해NGO센터에서 개최됩니다. 우리 연구소에서는 김진호 연구실장이 토론자로 참여합니다. 많은 성원과 참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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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분리 신학에는 복음이 없다
- 「로마서」 13장 1절, ‘권세에 복종하라’의 역사적 자리 찾기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도시 대중은 네로 황제(재위 54~68)에게 커다란 지지와 환호를 보냈다. 전임자들과는 달리 대중을 위한 여러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던 덕이다.[각주:1] 옥타비아누스 때보다도 많은 공공건설사업을 벌임으로써 부를 재분배하는 데 힘썼고, 연극, 검투, 기타 축제 등 각종 대중문화 장려책을 통해 대중의 정치적 능동성을 강화하는 데 힘썼다. 또한 상인들의 농간에도 불구하고 곡물가격을 안정되게 낮은 가격으로 유지하기 위해 식민지로부터 들여오는 식량의 안정된 물류체계를 구축하는 데도 큰 노력을 쏟았다.

뿐만 아니라 대중에 대한 귀족의 횡포를 통제하는 데도 적지 않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에 의해 처형되거나 처벌된 귀족들의 수는 선대 통치자들 때보다 훨씬 많았다. 이것은 대중에게 귀족들의 행태를 비판하는 언어를 부여해 주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로마서126~32절에 반영된 성적 방종, 탐욕, 폭력 등은 대중을 견딜 수 없게 하는 귀족들의 행동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선대 황제 클라우디우스(글라우디오, 재위 41~54) 때보다 거의 세 배나 되는 속주출신 인사를 로마의 원로원 의원에 위임했는데, 이는 귀족의 혈통적 연고로부터는 보다 자유롭고 통치자의 의도와 대중의 여론에 보다 의존적인 신흥귀족이 더 많아졌음을 의미한다. 나아가 그는 선대 황제 때에 소요혐의로 추방되었던 그리스도파 유대인들이 다시 로마로 되돌아오는 것을 허용했다. 이런 의미에서 황제의 공권력은 대중의 입장에서는 정당한 권력이고 복종할 만한 권력이었다.

클라우디우스 때에 추방되었던 프리스카(브리스가)-아퀼라스(아굴라) 부부와 절친한 바울은 그이들이 네로 때에 로마로 귀향하게 되었음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로마시의 사정을 꽤나 소상히 듣고 있었겠다. 전임과 현 황제의 도시 정책이 어땠으며, 이 도시의 이스라엘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분위기와 그 속의 그리스도파의 성향이 어땠는지 등등.

로마시의 그리스도파는 제국의 다른 도시들과는 달리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엘리트 출신이 많았다. 그들은 좀더 부유했고 좀더 학식도 높았으며, 도시 문화에도 좀더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좀더 반체제적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하여 선대 황제인 클라우디우스 때에 소요를 일으킨 주역이 그들이었다. 황제는 주모자를 잡아 처형 등 실형에 처했다. 그리고 혐의가 깊지 않은 관련자들은 추방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각주:2]

하여 클라우디우스는 이스라엘 디아스포라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자 원망의 대상이었다. 한데 그가 죽었다. 사인이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의 아내 아그리피나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그리고 이 혼란의 와중에서 추방당했던 이들의 일부가 귀향했다. 이스라엘 디아스포라에는 하느님이 황비를 통해 복수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고, 이런 분위기를 등에 업고 그리스도파 사람들은 반체제 활동을 조심스럽게 재개하고 있었다.

학식이 높은 그리스도파 인사들은 이스라엘 디아스포라 회당 내에서 이스라엘 본토 중심의 기획은 실패했다고 설파했다. 바울이 자기가 공박하고 있는 상대편의 주장을 가지고 되묻고 있는 로마서1111절 이하의 구절은 저들 헬라주의적 그리스도파의 주장이 무엇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그러면 내가 묻습니다. 이스라엘이 걸려 넘어져서 완전히 쓰러져 망하게끔 되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들의 허물 때문에 구원이 이방 사람에게 이르렀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질투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로마서11,11


곧 저들은 이스라엘
, 특히 예루살렘이나 사마리아에서 메시아가 일어나야 하느님의 변혁이 일어날 거라는 이스라엘 중심적 구원의 기획은 실패했다고, 아니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로마시의 이스라엘 디아스포라에서 예루살렘 혹은 사마리아 운운하는 주장을 펴는 이들은 세계의 중심이 된 이 도시, 이곳에서 벌어지는 억압과 착취의 역사를 꿰뚫어 보지 못한 채 여전히 저 머나먼 변두리 도시에서나 가질 수 있는 시골뜨기 괴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도 클라우디우스 때도 헬라주의적 그리스도계 급진파는 이런 주장으로 무장한 채 모종의 반체제적 소요를 일으켰던 듯하다. 그때도 구닥다리 랍비들은 아직 때가 아니라고 하면서 사람들을 진정시키려고 했을 것이다. 예루살렘 혹은 사마리아에서 메시아 소식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이다. 반면 그리스도파는 주장했다. 이미 그리스도는 나타났고, 지금 자신들과 함께 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클라우디우스가 죽은 직후, 로마시의 이스라엘 디아스포라 내에서는 다시 이런 반체제적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던 것 같다.

로마시의 이러한 사정은 바울에게는 낯선 광경이었다. 이제까지 그가 경험했던 디아스포라 회당의 모습은, 갈라디아서326~28절처럼 소외된 이들이 그리스도파였다. 한데 로마시는 그 정반대다. 자기들이 지혜롭다고 허풍떨던 이들은 이스라엘계 랍비가 아니라 헬라주의적 그리스도파 지도자였던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의인론을 얘기하면서 소외된 그리스도파 대중을 옹호했다. 한데 이번엔 의인론으로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하는(11,25) 그리스도파 지도자들을 비판하고 있다.

당시 로마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웃의 미움을 사고 있었다.[각주:3] 도시 축제에 참여를 꺼리고 자기들의 종교행사에만 몰두하는 폐쇄적인 집단이라는 평판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르와 옥타비아누스에서 칼리굴라(재위 37~41)에 이르기까지 갖은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게 눈에 거슬렸다.

그러던 차에 클라우디우스가 그리스도파를 처형하고 추방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것은 주민들에게 이스라엘 디아스포라를 공격해도 된다는 신호처럼 보였다. 이런 분위기를 잘 알고 있던 귀족들은 대중의 환심을 사고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못된 짓을 해댔던 듯하다.

그 무렵 네로가 즉위하고 그리스도파 인사들이 귀향하면서 회당 내에서 반체제적 발언을 하며 예루살렘의 기획이 아닌 로마의 기획을 주장하자 많은 이들이 그 말에 설득되었다. 한데 바울은 브라스가와 아굴라가 전해준 이런 소식에 접하자 로마로 가려던 자신의 계획을 전격 실행에 옮기고자 편지를 보낸다.

한데, 앞서 보았듯이, 그는 서신에서 그리스도파와 반대논지를 펴고 있다. 그는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기획을 폐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율법의 폐기가 아니라 완성을 주장한다(13,8~10). 이제까지의 그와는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바로 그 비밀이 저 유명한, 그리고 오랫동안 오독되어 온 로마서131절의 수수께기에서 드러난다.



사람은 누구나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해야 합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이미 있는 권세들도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것입니다― 「로마서13,1


여기서
그는 공권력을 지지하고 있다. 그것에 순종하라고 한다. 이 구절에 대해서 미국의 비판적 성서학 연구자 닐 엘리엇(Neil Elliott)은 다음과 같은 통찰력 있는 해석을 제안한다.


이 구절에서 바울 사도는 로마 정부 관료에게 순종하라고 명령한다. 이것은 바울 사도가 로마에 있는 유대인 공동체의 안전을 옹호하기 위해 호소하는 의도였다. ... 로마에서 유대인이 곤경을 당하는 위험한 역사적 상황을 재고하여야 한다. 그리고 헬라 지역과 로마 지방 도시들에서 유대인들은 이런 비슷한 상황을 맞고 있었다고 본다. 만약 로마의 군대가 유대인들을 보호하지 않았다면 유대인들은 지역 주민들의 적대행위로 말미암아 어려운 곤경에 빠질 수 있었다. 로마 도시에서 이방인들이 유대인을 반대하여 주도한 폭력 행위는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의 종교적인 차이에서가 아니라 로마의 사회적 압박 때문에 촉발되었고 이방인들은 로마인 대신 유대인을 공격했던 것이다. 특별히 헬라의 상류 사회층은 로마의 식민지 지배하의 착취와 압제, 압박의 부당함을 유대인들에게 대신 감정적으로 해소하였다. [각주:4]


여기서 로마제국 전역에서 유대인들이 이웃 족속들에게 린치를 당했다고 하는 것과 또 전역에서 로마군이 유대인을 보호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다
. 또한 헬라의 상류 사회층이 그러한 폭력의 주역이었다는 점도 근거가 희박하다. 그보다는 로마제국 초기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69~130)황제전(De vita Caesarum)에서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로마에서 유대인을 추방한 것은 크레스투스(Chrestus)의 선동으로 야기된 소요 때문이라고 한 것에 기초해서, 클라우디우스 당시 로마시에서 이스라엘 디아스포라가 당국에 의해 공격당하고 있었다는 점을 해석의 실마리로 하는 게 낫겠다.

이 사실 위에서 엘리엇의 해석을 재해석하여, 당시 로마시로 몰려든 많은 대중은 권력자들에 의해 착취와 폭력에 시달렸다. 그것은 많은 이들에게 좌절과 분노감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로마에 적대하는 행위는 불가능하다. 그런 상황에서 당국에 의해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힌 이스라엘 이민자들은 그들의 분노의 대상이 될 법하다. 게다가 군중의 이런 분노를 이용하면서 여론정치를 하던 로마의 귀족들이 이런 집단 분풀이에 가세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네로 황제의 군대가 도시의 무분별한 폭력행위를 제압하는 것은 도시 치안을 위해서 있을 법한 일이다. 게다가 귀족과 경쟁관계에 있던 네로가 귀족의 여론정치를 방관하기는 만무하다. 해서 그는 도시의 집단 따돌림과 린치를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을 이스라엘 디아스포라의 관점에서는 하느님의 뜻을 받드는 제국의 황제의 모습으로 비추어졌을 것이고, 하여 그의 권세는 신이 부여한 것이니 복종하라는 주장이 나왔을 법하다. 그리고 바울은 이런 주장을 통해서, 급진파 헬라주의적 그리스도파의 무모한 과격성을 제어하려 하는 것이다.

한편 권력에 순종하라는 말에 이어지는 바울의 말 또한 우리의 주목을 끈다.


사람은 누구나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해야 합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이미 있는 권세들도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것입니다―「로마서13,1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공박하는 헬라주의적 그리스도파의 주장의 일면을 읽어낼 수 있다
. 그들은 필경 반로마 주장을 펴면서 조세거부 선동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로마시의 납세자는 이스라엘 사람들 개개인이 아니라 디아스포라 회당이었다. 인구 100만이나 되고, 특히 그중 적어도 80만이 넘는 이민자들[각주:5]에게 인두세를 거둬들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해서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었는데, 종족별 종교별 자치결사조직들 단위로 조세를 징수하는 방법도 그 중 하나였다. 이스라엘 디아스포라 회당은 전형적인 자치결사체로서, 이 결사체에 포함된 이스라엘인들과 개종자들은 로마 당국에 조세를 내는 것이 아니라 회당에 기부금을 내고, 회당이 로마 당국에 조세를 냈던 것이다.

한데 이스라엘인이든 개종자든 기부금을 낼 수 없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일종의 면세자들이다. 빈곤해서 아무것도 낼 수 없는 자들이다. 그런 이들을 가리키는 용어가 가난한 사람들(프토코스)이다. 이들은 기부금을 낼 형편이 못했지만 회당에 속해 있기 때문에 사실상 면세자가 될 수 있는 자들이다. 한데 그들이 면세자가 되는 대신에 그들은 멸시의 대상이었고 기부금을 내는, 사실상의 납세자들인 사람들의 통제와 관리를 받아야 했다. 한데 로마시 회당에서 사실상의 납세자의 다수는 그리스도파 인사들이었다. 그러니 그들이 세금거부 선동을 하면 사실상의 면세자들인 가난한 사람들은 납세자의 지도에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납세자들인 그리스도파는 그렇게 생각했다.

한데 바울은 저들 납세거부를 선동하는 그리스도파 인사들을 향해 말한다. 세금을 내라고. 그것은 조세거부운동의 중지를 말하며, 납세자가 아닌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선동의 중지를 말한다. 아마도 바울의 심중에는 이런 무모한 모험주의는 수많은 이들, 특히 저들의 선동의 대상이 되는 다수의 면세자들을 죽음으로 몰아갈 뿐이라는 문제의식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하여 권세에 복종하라느니, 제국 당국에 세금을 내라느니 하는, 바울의 평소 주장과는 엇갈린 듯이 보이는 이런 주장의 이면에는, 그러나 일관된 그의 생각이 들어 있다. 그것은 복음이라는 것은 유대파 신앙이든 그리스도파 신앙이든 특정 계파를 위해 작동되는 것이 아니라 면세자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작동한다는 것이다.

한데 바울의 이 구절은 한국역사에서 정교분리를 논증하는 성서텍스트로 읽혀져 왔다. 문제는 정교분리는 힘의 논리를 반영해왔다는 데 있으며, 이 구절은 그런 힘의 논리의 관점에서 해석되었다는 데 있다. 식민지 시대나 군부귄위주의 정권 시대에 국가가 대중의 인권을 유린하던 때에는 그런 반인권적 체제를 비판하는 이들을 단죄하는 논리가 정교분리였다.

또 최근 기독교정당 옹호론자들은 교회의 정치참여를 정당화하는 맥락에서 정교분리를 폐기하거나 재해석하려 한다. 이들 역시 인권의 문제, 약자를 옹호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체제를 비판하기보다는 그 정반대의 맥락에서 정교분리의 재해석 혹은 폐지를 논한다. 요컨대 정교분리는 약자를 옹호하고 그들의 인권과 생존권을 지지하기보다는 종교권력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존속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로마서131절이 읽혀져 왔다.

하여 교회의 정교분리의 신학은 바울의 이 텍스트를 핵심 전거로 삼아왔지만 여기에는 바울이 실종되었고 바울이 옹호했던 민중이 망각되었다. 결국 교회의 정교분리 신학에는 복음이 유실되었다.



ⓒ 웹진 <제3시대>


  1. 네로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의 역사 만들기와 친평민적 정책을 편 황제로서 그를 재평가하는 수정주의적 연구에 대하여는 안희돈, 『네로황제연구』 (다락방, 2004), 2~3장 참조. [본문으로]
  2. 여기서 나는 하나의 가정을 하고 있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비판하고 있는 대상이 로마시의 이스라엘 디아스포라 내의 그리스도파라고 말이다. 「로마서」에 묘사된 그들은 이스라엘계 헬라주의자들로, 공동체의 다른 이들보다 지위가 좀더 나은 이들이고, 이방 종교의 제사음식 등에 대해 거리낌이 없을 만큼 로마의 문화에 대해 자신이 있는 이들이었다. 이들이 우월한 사회적 위치에 있는 이들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정승우, 『로마서의 예수와 바울』(이레서원, 2008)의 제1장 「로마의 크리스천 공동체의 기원과 형성」을 보라. 하지만 정승우는 이들 헬라주의자들이 헬라파 유대인이고, 보다 유대주의적인 ‘약한 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보고 있다는 점에서는 나와는 정반대의 입장을 갖고 있다. 내가 이들을 ‘그리스도파’라고 본 것은 프리스카와 아퀼라 부부가 본래 이들의 일원이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들도 로마시의 이스라엘 디아스포라 출신의 헬라주의자였는데, 클라우디우스 때에 추방당한 사람들이었다. 한데 앞에서 보았듯이 그들이 추방당한 이유는 디아스포라 내에 ‘크레투스’의 사람들의 소요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이 ‘크레투스’가 30년경 팔레스티나에서 처형당했던 크리스투스(그리스도)와 같은 존재를 가리킨다고 본다. 즉 로마시의 이스라엘 디아스포라 내에 반체제적인 헬라주의적 이스라엘인들이 그리스도를 추종하며 반체제적 활동을 벌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로마서」에서 바울이 비판하는 헬라주의자들은 이스라엘 디아스포라 공동체 내의 그리스도파 급진주의자들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본문으로]
  3. 이에 대하여는 제임스 던, 『로마서 9~16』 (솔로몬, 2005) 참조. [본문으로]
  4. 닐 엘리엇, 「십자가의 반제국주의 메시지」, 리처드 호슬리 엮음, 홍성철 옮김, 『바울과 로마제국』 (기독교문서선교회, 2007), 288쪽. [본문으로]
  5. 카이사르 이후 로마제국은 로마시의 시민들에게 무상으로 곡물을 나누어 주었다. 그 수혜자를 일컫는 용어가 '곡물평민'(Plebs frumentaria)인데, 문제는 이들이 도시의 주민 전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옥타비아누스는 곡물평민의 자격을 세 가지 원칙, (1)로마시민권자, (2)로마시 태생, (3)생래 자유인 여부에 따라 제한했다. 하여 그 수혜자의 수가 15만 명 정도였다. 이에 대하여는 안희돈, 『네로 황제 연구』 제7장 참조. 로마시의 인구에 대하여는 김상엽, 「제정기 로마의 곡물수급문제에서 나타난 제국과 속주의 관계―제정기 곡물수급지로서 이집트와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서양고대사연구』 5(1997.11), 39~42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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