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이브 패러디: 문제적 성서, 여성의 눈으로 다시읽기[각주:1]




정나진* 




패러디에 대하여


      패러디. 문학, 음악 등의 작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만들어 놓은 어떤 특징적인 부분을 모방해서 자신의 작품에 집어넣는 기법[각주:2], 이론가에 의하면 이전의 예술작품에 대해 상이성을 염두에 두고 재편집하고 재구성하고 전도시키고 초맥락화하는 통합된 구조적 모방[각주:3]이다. 좀 거칠게 적자면 원작의 모방이지만, 그러나 해체와 재구성, 비틀기, 전복 등을 통해서 재해석과 풍자, 교훈을 가져오려는 목적이다. 대부분은 희극적 요소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예술의 주요기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패러디’는 이러한 방법들을 통해서 고전적인 주제에 문제를 제기하거나, 근대의 합리성에 질문과 비판을 가하고 있다.


'나쁜 패러디'


      옆의 그림은 지난 탄핵심판 정국 때 국회회관에 걸렸던 그림 <더러운 잠>의 원작이 되는 마네의 <올랭피아>라는 그림이다. 이 작품 또한 16세기 초 티치아노의 대표작 <우르비노의 비너스>라는 그림을 패러디한 것인데, 마네는 그림의 주인공을 원작의 요염하고 부끄러운 듯 관객을 바라보는 자세와 달리, 관객을 당당하게 응시하는 구도로 그렸다. 뿐만 아니라 작품의 제목을 어느 여신의 이름이 아닌 ‘올랭피아’라는 그 당시 흔한 매춘부의 이름을 빌려와, 여신/성녀숭배라는 위선을 덧입고 관음증적인 시선으로 여성을 대상화하던 당시의 사람들을 비꼬았다. 

Édouard Manet, Olympia(1863)


      <더러운 잠>은 사실 마네의 이 작품 뿐만 아니라, <우르비노의 비너스>의 원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조르조네(Giorgione)의 <잠자는 비너스>도 함께 참고하고 합성하였는데, 박근혜의 잠자는 얼굴이라든지, 비스듬히 누워있는 나체라든지 하는 부분이다. 작가라고 하는 이는 원작의 함의나 의의에 대한 어떠한 고민이나 성찰도 없이 ‘패러디’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여러 작품들의 도상을 오직 자신의 의도를 위해 편할 대로 도용하였는데, 이러한 경우는 ‘패러디’라는 예술기법의 전형적인 나쁜 예, 올바르지 못한 예라고 보여진다. 더구나 <더러운 잠>이 큰 논란이 된 것은, 일종의 정치운동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공공미술적인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동시대적인 성찰없는 ‘편할 대로’의 태도와 시선이 그 속에 여과없이 들어가면서,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고 동시에 혐오하는 한국사회의 모습을, 그리고 그것도 소위 ‘진보진영’이라고 하는 그룹도 이런 태도에서 전혀 다를 바가 없음을 고스란히 재현했기 때문이다. 고민과 성찰이 없는 패러디의 ‘나쁜 예’는 풍자와 재해석을 통한 문제제기와 비판은커녕, 또다시 누군가를 희생시키고 대상화시킬 뿐이다. 고상한 척 ‘비너스’라는 이름으로, 그러나 결국 성적 쾌락을 위해 여성누드화를 사고 팔았던 남성들을 향한 올랭피아의 무뚝뚝하고 당당한 시선과 목소리는 또다시 희석되고 삭제되었다.  


패러디-낯설게 보기


René Magritte, La trahison des images(1928-1929)


      패러디 기법으로 알려져 있는 작품 중 하나는 르네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왼쪽)이라는 작품이다. 마그리트는 흔한 파이프를 그려놓고 밑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적는다. 실상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 파이프를 재현한 그림이 맞다. 그러나 작품을 보는 관객은 저 모양의 그림을 관습적으로 파이프라 부르므로, 곧 파이프 그림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라는 캘리그래피 문구 사이의 모순에 당착하고, 관습을 벗어나 곧 작품에 대하여 다시 보기, 낯설게 보기를 시작할 것이다.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작가인 마그리트는 이런 식으로 파이프의 패러디를 통해 통속적인 이미지의 재현으로서의 회화에 반발하고, 규범화된 근대의 합리성에 문제를 제기했다.


성서는 어떻게 패러디 되어 왔는가?


      패러디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요기법 중 하나이긴 하지만, 사실 패러디는 항상 있어왔고, 인기있는 대중작품들은 회자되는 동시에 역사 속에서 좋게든 나쁘게든 끊임없이 패러디되어왔다. 패러디를 단순한 모방이나 흉내가 아니라 비틀기와 해체, 재구성을 통한 재해석이라고 할 때, ‘성서’라는 텍스트 또한 각 시대에 따라, 공동체에 따라, 개인에 따라 끊임없이 패러디되어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 삶의 자리 속에서 경험되고 만들어진 이야기들이 구전되고, 그것이 편집되어 문자화된 성서 텍스트는 그 행간의 빈틈들과 모호성들 속에서 끊임없이 (재)해석되어져왔다. 그리고 그 (재)해석에는 텍스트의 삶의 자리뿐만 아니라 해석자의 삶의 자리 또한 뒤섞여있기 일쑤이다.  

      그런데 문제는 성서가 남성에 의해 쓰여지고, 또한 성서의 패러디-(재)해석- 또한 주로 남성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독자가 여성이라 하더라도) 줄곧 남성의 눈으로만 읽혀져왔다는 것이다. 텍스트가 누구에 의해 쓰여지고 해석되어지는가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이다. 성서가 모두(의 구원)를 위한 책이라면, ‘남성’이 아닌 이의 눈으로도 주체적으로 읽을 수 있어야 할 것인데, 성서에서 여성의 목소리는 숨겨지고 지워지거나 왜곡되어지기 일쑤였다. 성서에 여성이 등장하지만 중요한 구원역사의 순간 여성은 사라지거나 미래의 중요한 아들들의 대를 잇기 위한 도구와 희생자로 전락해버리곤 한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알아차리고 마지막까지 함께 한 것은 결국 여성들이었으나, 이름조차 기록되어있지 못하기도 하고, 예수의 공생애를 함께 보낸 주요인물은 결국 열두명의 남성사도들만으로 기억된다. 사도바울의 선교에 큰 기여를 하고 일약을 담당한 여성들이 꽤 있으나 성서에서 그들을 찾아보기는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해야 하는 식이다.  

      성서가 남자들만을 위한 구원의 책이 아니라면 성서에서 지워지고 잊혀진, 왜곡되고 오해된 이들의 존재와 목소리 또한 읽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동안의 성서해석이 성차별적인 시선에서 이루어져왔다면, 그 성차별적인 시선 또한 찾아내고, 제거해나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브'의 나쁜 패러디 역사


      특히 구약으로 불리우는 제 1성서의 여성 대표주자로 가장 많이 패러디되는 이는 단연 ‘이브’일 것이다. 그리고 작금의 교회 안의 여성혐오의 근원에는 이브가 출연하는 창세기의 나쁜 패러디가 자리한다. 그것은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이브가 아담의 갈비뼈로부터 나왔으므로(창세기 2장) 여자가 남자에게 종속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이야기나, 이브가 뱀의 꼬임에 넘어가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본인도 먹고 아담까지 먹여 낙원에서 쫓겨나고 원죄를 입었으며 인류의 고통이 시작되었으므로(창세기 3장), 여자는 만가지 악의 근원이라는 이야기 등이다. 바울로 서신의 여성에 대한 언급들도 결국 그 기원은 같은 창세기의 본문으로부터 시작된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14장의 “여자여 잠잠하라. ... 여자들은 남자에게 복종해야 한다”라는 말도 창세기 3장 16절(“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다”)에서 온 것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창세기, 특히 야웨기자의 것으로 불리우는 2, 3장 본문의 시대적 배경 자체가 다윗왕조 시대의 가부장적 문화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후 각 시대마다 있어왔던 성차별적이고 여성혐오적인 관점들 속에서 이브 신화의 나쁜 패러디가 재생산되어왔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의 형성기 때는 교회에 비교적 여성 리더들도 꽤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교회의 제도화와 국가공인 이후로부터 여성들은 배제되거나, 창세기 2장, 이브의 역할의 명명처럼 ‘돕는 자’로서의 존재의 한계가 명백했다. 교부들은 여성이란 하나님의 창조물인데 남성들에게는 선물이지만 세상의 저주라고 보았고 이러한 교부들의 여성의 본성에 대한 이해가 교회 내 여성의 지위와 역할을 결정했다. 존경받기 그지없는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출산이라는 이유를 배제하면 여자가 남자의 돕는 자로 만들어질 아무런 이유도 상상할 수 없다”고 하면서 여성은 약한 지성을 가지고 있으며 고등한 이성에 따라 살기보다는 열등한 육신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존재인 것 같다고 여성을 인식하며 창세기 주석을 저술했다. 이러한 교회의 여성에 대한 이해는 14세기부터 근대 초까지 이어진 20-50만명이 희생된 마녀사냥에서 여지없이 이용되었다. 교회의 의도를 위한 ‘편할 대로’의 나쁜 패러디는 너무나도 쉽게 여성들을 마녀들로 만들어버렸다. “교회에 가기 싫어하는 여자는 마녀다. 열심히 다니는 사람도 마녀일지 모른다.”[각주:4]


창세기 2장 다시 읽기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나쁜 패러디의 전형적인 예는 원작의 의도와 함의를 충분히 살피지 않은 채, 작가의 편의를 위해서 원작을 1차원적으로 흉내, 모방하고 갖다쓰는 것이다. 원작을 비꼬거나 해체, 재구성하려는 목적이라면 더더욱 그렇거니와, 원작의 의도를 다시 살리고 싶은 경우에도 원작의 의미를 깊이있게 성찰해보는 과정은 필수적이다. 가부장적이고 여성혐오적인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서, 그리고 그리스도교를 보편적 종교로 받아들였던 서구문명 전체와 근대화 과정에서 그 서구문명을 그대로 세례받은 한국의 문화에 이브의 나쁜 패러디는 그대로 영향을 끼쳐왔다.

      그러나 이브의 나쁜 패러디가 성서텍스트의 원형에서도 진리화되어있는지는 다시 한번 읽어볼 일이다. 성서의 목소리는 일괄적이지 않다. 우리는 텍스트 속에서 누구의 진리가 주장되고, 누구의 진리가 억눌려졌는지를 함께 보아야 한다.[각주:5]


여자, 남자를 돕는 자?


      먼저 여성의 존재를 남성의 소극적이고 부속적인 역할로 정당화시킨 창세기 2장의 아담과 이브의 창조 장면을 다시 재구성해보려고 한다. 첫째로 야훼는 땅의 먼지(히브리어로 ‘아다마’, 성서에는 알고보면 이와 같은 유쾌한 말장난 식의 단어들이 많다)로부터 사람(아담)을 지으셨다. 아다마에서 나왔으니 아담이다. 나는 여기에서 첫사람인 ‘아담’을 남자로 전제하고 해석하는 것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아담을 남자(man)가 아닌 사람(human being)으로 바꿔 읽어보았다.


“한처음에 야훼는 땅의 먼지(아다마)로 사람(아담)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첫사람을 창조하셨다(7). 그리고 그를 에덴동산에 두시고 에덴동산을 섬기며 지키도록 하셨다(15). 어느날 야훼가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 내가 그를 위해서 그의 앞에(그에게 맞는, 그의 파트너로) 돕는 사람(에쩨르)을 만들겠다.’(18) ... 사람이 모든 집짐승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러나 사람을 위해 적합한 돕는 자는 발견되지 않았다(20). 그래서 야훼는 사람을 깊이 잠들게 하셨다. 그가 잠들었다. 야훼는 사람의 갈빗대 하나를 뽑고, 빈 자리를 살로 메우셨다.(21)..... 아담이 말하였다. 내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23)”


      이렇게 성서를 다시 읽으면 아담과 이브의 창조 이야기는 남성/여성 이분법적인 창조이야기가 아니라 ‘인간과 그를 돕는 자’의 창조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두 번째로 성별분업을 정당화시킨 ‘돕는 자(에쩨르)’에 대한 재해석이다. 통속적으로 생각할 때, ‘돕는 자’라면 주체의 옆에서 부가적인 역할을 하는 정도의 존재가 맞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언어든지, 그 언어권에서든 언어가 함유하는 문화 속의 의미와 용례를 함께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돕는 자'(helper)의 히브리어 '에쩨르(עֵזֶר)'는 (우리가 그동안 이 본문에서 생각하는 여성의 이미지를 벗어나 놀랍게도) 여성명사가 아닌 남성명사이다. 더 놀라운 것은, '에쩨르'는 구약 전체에서 21회 사용되는데 그 중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창세기 본문의 2회를 제외한, 나머지 19회는 모두 '구원자로서의 하느님'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라는 것이다(창 2:18,20, 출 18:4; 신 33:7,26,29; 시 20:2; 33:20; 70:5; 89:19; 115:9-11; 121:1,2; 124:8; 146:5; 사 30:5; 겔 12:14; 호 13:9; 단 11:34).[각주:6] 이렇게 본다면 아담의 돕는 자 ‘에쩨르’는 '야훼의 도움'을 표상하는 신적 대행자로서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에쩨르(עֵזֶר), 온전한 인간을 위하여" : 21세기 이브 패러디


      앞선 창세기 본문을 여성중심적으로 다시 읽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텍스트가 쓰여졌던 시대의 가부장적 문화의 한계를 인식하며 회의적인 이들도 있다. 어떠한 텍스트도 순수하게 친여성신학적이거나 친가부장적인 본문이라 단정지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텍스트들이 새로운 의미가 발굴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각주:7]

      사람은 누구도 단독자로 온전할 수 없다. 사람은 결코 단독자로 창조된 것이 아니다. 사람은 ‘돕는 자(에쩨르)’와의 결합을 통해서 상호 협력적이고 상호 구원적인 사회적 존재로 지음 받은 것이다. 아담과 이브 창조에 대한 이러한 재해석은 그동안 가부장제와 성별분업의 규범을 정당화시켜준 성서해석에 일갈을 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여/남 이분법적인 정체성의 젠더정치를 넘어서 모든 차이(성별, 인종, 장애/비장애 등)에도 불구하고, 또는 오히려 그 차이를 자원으로 새로운 시대의 해방과 구원의 텍스트로 읽혀질 수 있지 않을까?


마치며 : 멀미, 패러디로 시작해보기


      지난 2월, 속해있는 교회공동체에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문제적 성서, 여성의 눈으로 다시읽기”라는 주제로 4주 동안 강좌를 이끈 적이 있다. 그동안 성서가 (독자가 혹시 여성이더라도) ‘남성’의 눈으로만 읽혀져 왔으므로, 이번에는 거꾸로 (혹시 남성이더라도) ‘여성’의 눈으로의 성서읽기를 해보자는 의도였다. 네 번의 짧은 강좌였으므로, 실제로 성서를 함께 다시 읽기보다는 재해석을 위한 선작업으로, 그동안의 남성중심적인 시각을 해체해보고, 성서와 기독교의 역사를 객관화해보고, 동시대의 페미니즘과 그리스도교 신앙의 시선의 거리차를 확인하는 정도의 워밍업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세 번째 시간인가에 강의를 마칠 무렵, 수강자 중의 한 분이 고뇌를 토로했다.

      “아 진짜 힘드네요. 이게 그냥 이론이 아니고, 삶하고 결부되어 있고, 신앙하고 결부되어 있으니 고민이 들어요.”

      마치 파이프를 보고 있는 나에게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하는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 패러디 앞에서 느껴지는 당황스러움처럼, 성서를 그동안 소외되었던 여성의 눈으로 다시 읽는다는 것은 일종의 멀미를 동반한다. 그것은 그만큼 지금까지 나의 인식방법으로서의 (남성중심적) 제도와 규범, 언어의 틀이 땅처럼 견고했기 때문이고, 이제는 그 규범과 언어, 때로는 신앙까지도 불변하는 진리의 땅과 공간이 아니며 다른 문화들과 더불어 시대의 생산물일 뿐인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성서해석이 유희나 이론, 머리로만 하는 평등이나 정의의 윤리 문제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일상에 영향을 미치는 절대적 존대에 대한 ‘신앙’의 문제라고 보았을 때, ‘여성’의 눈으로 성서를 다시 읽는다는 것은, 여태까지 내가 살아왔던 삶의 태도의 기반을 흔드는 문제로 다가온다. 바라는 바, 여성이든, 남성이든 그것은 어떤 면에서 그동안에 내가 가져왔던, 그리고 사회가 나에게 강요했던 정체성에서의 이탈과 남성중심주의의 가부장제와 성별분업, 남녀이분법이라는, 우리를 가둬두는 성차별적 정체성 정치의 성서해석으로부터의 해방이 될 것이다.

      ‘성서 다시 읽기’ 강좌를 이끌면서, 느꼈던 한계 중 한 가지는, 참여자들이 주체적으로 스스로 성서를 해석해보는 일을 기술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 어려워하더라는 점이다. 그래서 부러 ‘성서 다시읽기’를 ‘패러디’에 빗대어보았다. 교회의 교육은 신자로 하여금 성서텍스트를 주체적으로 마주하지 못하고, 성서의 권위, 사실은 결구 성서해석의 권위에 짓눌려있게 해왔고 성서에 대해 질문하지 못하고 교회의 해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주로 희극적 요소로 이미지화되는 패러디는 그래서 신자들에게 좀더 성서를 가볍게 다시 읽을 수 있도록 할수 있지 않을까? 행간을 상상하기, 삭제된 목소리 들어보기, 숨은그림찾기. 뒤틀고 해체하여 재구성해보기.


* 필자소개

  글쓴이는 상호문화신학(Intercultural Theology)을 전공으로 지구화, 공간, 이주 등에 관심하며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바를 고민하고 있다. 사람들과 오순도순 함께 사는 것이 꿈이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가톨릭평론>> 2017년 5,6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본문으로]
  2. https://ko.wikipedia.org/wiki/%ED%8C%A8%EB%9F%AC%EB%94%94 [본문으로]
  3. Linda Hutcheon, 김상구, 윤여복 역, 『패러디이론』, 서울: 문예출판사, 1992, 23. [본문으로]
  4. Heinrich Kramer, Jacob Sprenger, 󰡔마녀의 망치(Malleus Maleficarum)󰡕, 1487. 마녀를 찾는 지침으로 인증되었던 책. [본문으로]
  5. Dana Fewell, “Reading the Bible Ideologically: Feminist Cristicism”(1993), 270-280. [본문으로]
  6. http://biblehub.com/hebrew/ezer_5828.htm [본문으로]
  7. Dana Fewell, 앞의 책.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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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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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은 접경지대(Frontier Distirics)

① Prologue - 지구화시대, 황새들과 함께 살기




정나진



      ‘난민’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특별히 ‘시리아’ 난민들에 관한 뉴스가 연일 언론매체에 등장하고 있다. 세 살배기 시리아 난민 아일란 쿠르디의 죽음 이후 일이다. 아일란의 죽음은 역사적 죽음이 되었다. 그후 유럽연합은 지지부진하던 ‘난민쿼터제(유럽연합 회원국의 인구와 경제력 등에 따라 난민을 강제로 할당하는 제도)’ 시행에 합의했고, 난민 추가 수용 불가 입장이었던 영국의 총리도 “시리아 유엔 캠프에 있는 난민 수천 명을 추가로 받아들이겠다”고 발표했다. 개개인들의 관심 또한 높아졌다. 시민들은 난민 루트에 서서 “웰컴”이라고 쓴 현수막을 들고 환영하기도 하고 축구팀은 “Wir helfen(우리가 돕겠습니다)”이라는 완장을 차고 경기를 뛰기도 했다(독일의 대표적인 우파 잡지 <Bild>의 파퓰리즘적 후원 광고라는 비난이 거세지만). ‘난민’이라는 단어 자체를 낯설어하던 지구 반대편의 한국에서도 ‘국내 난민 신청 승인 빈도와 난민들의 처우’ 등에 관한 분석과 르포 기사가 빈번해졌다. 

터키의 해변에서 발견된 세 살 아기 

난민 아일란 쿠르디(Eilan Kurdi) 를 추모하며 

(그림의 글씨 내용은 터키어로 

“인권이 더 이상 유린되어서는 안된다!”)




            독일 뮌헨의 한 역 앞에서 난민들을 환영하고 있는 독일 시민들                     독일 분데스리가 축구팀이 차고 있는 "Wir helfen" 완장

                              (출처 : 짤쯔부르쿠자이퉁)


      난민의 비극적 희생은 계속 있어왔다. 아일란의 죽음 한 주 전에는 역시 시리아 난민들로 추정되는 71구의 시신이 헝가리와 오스트리아의 국경지대의 버려진 냉동차 속에서 발견되었다. 그 시신들 중에는 4명의 아동도 있었다. 브로커들을 통해 무리하게(사실 자국으로부터의 탈출을 선택한 이후 무리하지 않은 루트는 없다) 탈출하다 배가 전복하는 등의 사고로 수십, 수백 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달리하는 일들도 빈번히 있어왔다. 북아프리카에서 유럽까지의 가장 짧은 루트인 일부 지중해 구간은 사고가 하도 많이 나서 ‘통곡의 바다’, ‘난민들의 무덤’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이다. 내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이유로 동유럽과 중동, 아프리카 등지에서 넘어오는 사람들은 정착국에 와서 난민 지위를 받기까지 수많은 위험과 생존의 위기를 겪기 마련이다. 최근 들어 이러한 난민들에 대한 관심이 점점 식어가고 처우 또한 미비해져왔다. 이런 상황에서 벌어진 세 살배기 난민 아일란의 조용해보이는 듯 하지만 그래서 더 충격적이고 처참했던 죽음은, 난민들을 서로에게 떠밀기에 바빴던 유럽 각국에게, 또 일상의 거리에서 난민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던 개인들에게,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존엄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었다. 지금의 ‘난민’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그동안 지각하지 못했던 일상이라는 그림의 ‘난민’이라는 배경이 살아 꿈틀거리는 것에 대한 갑작스런 자각의 표출일 것이다.  




  그런데 실은 이주국에서 ‘난민’이 ‘난민’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고 정착을 하기까지는 참으로 복잡한 과정을 거치게 된다. 국제협약 상의 ‘난민’에 대한 규정[각주:1]부터가 그 판단을 모호하게 한다. 규정에 따르면 난민은 망명자인데,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인 박해로부터의 망명의 이유를 가져야 한다. 자국으로부터의 탈출에 성공한 난민은 1차적으로는 차별 없이 난민보호소에 가게 되겠지만, 거기서 망명 신청을 하게 되면 그 때부터는 자국에서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인 이유들 중 하나로 박해를 받았다는 지난한 자기변론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들은 이주국의 주관에 따라 난민 지위 획득 적격자/부적격자로 판단된다.(난민 자격 획득의 문은 종종 이주국의 예산과 사회분위기 등의 상황에 따라 시시각각 커지기도 좁아지기도 한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독일이 난민의 급속한 유입에 대응하기 위해서 난민 수용 방안을 다시 정하고 있다는 기사가 새로 뜨고 있다.[각주:2])


                 북아프리카에서 바라본 유럽의 모습

   (‘2006 세계보도사진전’ 사진 부문 1등 작품 ‘빛과 그림자’)


       난민 지위를 인정 받았다 해도 그 사회에서 어울려 살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 이미 난민을 대하는 사회적 시선은 시작부터 따가울 때가 많다. 수없이 떠도는 이주자들 중에 도대체 어디까지가 ‘난민’인가 하는 물음을 묻는 순간, 눈앞의 난민에 대한 관심과 관용은 멈칫하게 된다. 연민과 관용은 보통은 ‘나보다’ 불쌍하고 처참함 앞에서만 발휘되기 때문이다. 미디어에서 보는 터키 해변가의 아기의 사진과는 달리, 내 삶의 현실 영역에서 직접적으로 마주치는 이방인들에 대한 나의 태도는 냉정해지기 일쑤이다. 내가 낸 세금이 허비되고, 나의 일자리를 빼앗아가는 존재는 아닌지, 더 나아가서 그들이 정말로 개인적인 욕망이 아니라 박해를 피해 온 자들인지 그들의 순수성(?)을 의심하고 심사한다. 난민을 비꼬는 말로 ‘이주쇼핑’이라는 말이 있다. 현대의 난민들은 이동하면서 어디가 자신들에게 가장 유리한 보호국이 될지 정보를 얻으며 움직인다. 과거의 보트피플이 일단 바다로 나가서 외국국적의 배를 무작정 기다렸던 때와는 달리, 요즘에는 GPS와 핸드폰으로, 그리고 산업화된 브로커들을 통해 그러한 정보를 확인하고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적 시선과 문화적 이방인으로서의 여러 제약들은 그들이 사회 안에 쉽게 어우러지지 못하게 하고, 결국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뭉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일종의 게토 현상에 대해 사회는 또다시 그 그룹에 대한 부정적 시선을 가지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남쪽으로 날아가는 황새 두 마리(사진: 김성호(한겨레신문))


    얼마 전 신문에서 충남 예산에서 멸종 위기에 놓인 황새를 다시 번식시키기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는 기사[각주:3]를 읽은 적이 있다. 흥미로웠던 것은 황새의 습성과 황새가 생태계에서 차지하는 의미였다. 텃새이면서 철새이기도 한 황새는 한국전쟁을 치르며 아름드리 나무가 많이 파괴되어 둥지를 틀 곳이 적어지고, 농약과 화학비료의 사용이 늘면서 환경이 파괴되어 그 수가 점점 더 줄어들다가, 1971년을 끝으로 멸종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같은 해 황새는 일본에서도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다.(텃새인 황새는 한국과 일본을 한 터전으로 삼으며, 때로는 철새로 조금 멀리 러시아 연해주 지방 등지에서 날아오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황새를 복원하는 일이 곧 전원생태계를 복원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황새는 날개를 펴면 2미터나 되는 먹이 피라미드의 최상위 포자식자[각주:4]로, 생물다양성이 풍부해야만 서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황새가 정착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황새를 방사하는 것을 넘어 농약을 쓰지 않는 생태적인 농사를 지어야 하고, 하천이나 습지 같은 자연환경도 친환경적으로 조성해야 한다. 결국 황새가 살고 있다는 것은 그 지역의 생태계의 균형이 깨지지 않고 다른 다양한 종들이 공존하고 있다는 뜻이며 황새의 야생복귀는 황새 뿐만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건강한 자연 환경 전체를 만드는데 그 의의가 있는 것이다.    

      황새 이야기를 읽으며, 난민을 포함한 이주자들이 곧 황새 같은 존재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나은 삶을 찾아 떠난 이들이 선택해서 찾아온 곳이라면, 어느 정도는 그만큼의 가치가 이루어진 사회일 것이기 때문이다. 황새가 사는 마을이 풍요로운 생태계의 상징인 것처럼 이주자들이 함께 살 수 있는 사회 또한 풍요와 환대의 표식일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의 건강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마치 황새가 완전히 정착하기 위해서 단순한 황새 방사를 넘어서서 생태계 복원이 먼저 되어야 되는 것처럼, 더 나은 삶을 위해 온 이주자들이 자국민들과 함께 어우러져 살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제도적 장치와 함께, 이주자들에 대한 자국민들의 시선과 의식도 함께 변해가야 할 것이다.  

      세 살 배기 난민 아기의 죽음에 눈물을 흘릴 관용과 연민의 준비가 된 마음이라면, ‘타인의 존재에 대한 부정이 적대[각주:5]’일 때 그 반대로 타인의 존재에 대한 인정인 환대는 출생과 더불어 사람이 되는 모든 인간 생명에게 '신원을 묻지 않는 환대'[각주:6]여야 한다. 난민 ‘조차도’ 받아들이기를 꺼려하는 국가적 상황에서,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제도적 난민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으로 일상에서 만나는 개인의 삶에게라도 한 발짝 나아간 질문을 하고 싶다. 왜 ‘난민만’ 받아들여야 하는가? 나(우리)는 타자의 욕망의 실현에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고 판단할 자격이 있을 만큼 (하늘 아래) 타자에 대한 존재 우위를 가지고 있는가?  

      독일의 지르마르 가브리엘 부총리는 끊임없이 몰려드는 난민들에 대한 대응과 정착에 대한 정책을 이야기하면서 ‘위대한 도전’이라고 표현했다. 그 도전은 정책과 제도를 넘어서는 환대와 통합[각주:7]의 문제를 포함한 것일 것이다. 환대와 통합의 문제는 제도와 정책이라는 거시적인 내용도 포함하겠지만, 그러나 시작은 개인이 마주치는 일상적인 미시의 공간에서부터일 것이다. 2009년 이후 한국 정부에 망명을 신청한 이가 만이천여명이나 된다. (그러나 그들 중 4.2% 만이 난민으로 인정되었다.) 또한 한국에는 이미 약 200만 명의 이주민이 살고 있으며 이제는 길에서 외국인을 만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언젠가는 어쩌면 지구화된 세계 속에서 어느 곳의 이주민이 될지 모르는 삶을 살고 있다. 나는, 우리는 지구화 시대 ‘황새’들과 함께 어우러져 살 준비가 되어 있는가?  


* 필자소개

  글쓴이는 상호문화신학(Intercultural Theology)을 전공으로 지구화, 공간, 이주 등에 관심하며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바를 고민하고 있다. 사람들과 오순도순 함께 사는 것이 꿈이다.


ⓒ 웹진 <제3시대>



  1. 인종, 종교, 국적 또는 특정의 사회적 집단의 구성원이거나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박해를 받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위험 때문에 국적국 외에 있는 자로 그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자, 또는 받을 것을 희망하지 않는 자, 및 상거소(常居所)를 가지고 있던 국가 외에 있는 무적 국자로 그 국가에 돌아갈 수 없는 자, 또는 돌아가기를 희망하지 않는 자(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 IA(2) 참조) [본문으로]
  2. http://news1.kr/articles/?2447094 [본문으로]
  3. “조홍섭의 물바람 숲: 황해도 연백평야에도 황새 복원을”, 한겨레신문, 2015년 9월 14일자. [본문으로]
  4. Berger의 종의 분류(1997)에 따르면 우산종(umbrella Species)이라 한다. 몸집이 큰 종이 필요로 하는 면적의 서식지를 보전함으로서 그 서식지에 함께 살고 있는 수가 많고 크기가 작은 다른 종들이 자연적으로 함께 서식할 수 있으므로 종 다양성을 유지시킬 수 있다는 새로운 개념이다. [본문으로]
  5. Karl Smith, 『정치적인 것의 개념』, 7장 정치이론과 인간론 [본문으로]
  6.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209쪽. [본문으로]
  7. 사실 ‘통합(Integrati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조차도 불편하다. 그동안의 대부분의 다문화 정책의 내용이 ‘통합’이라는 이름으로 ‘동화(assimilation)’를 요구해왔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서로의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뒤섞임’을 뜻하는 우리말 ‘어우러짐’을 지향하고 싶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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