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제국주의자 "모세"[각주:1]





김진양

(Ph.D. The Lutheran School of Theology at Chicago (the Old Testament))




    시카고 루터란 신학교(Lutheran School of Theology at Chicago) 도서관 2층에는 중세기 희귀문서를 보관하는 방이 있다. 15세기에서 18세기에 출판된 책들로 무려 300여권을 소장하고 있고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직접 작성한 편지와 그가 번역한 성서도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 이중 오래된 성서 한 권이 내 눈에 들어왔다. 종교개혁 이전에 출판되었던 독일어 성서다(Koberger Bible, 1483). 15세기 성서의 내용이 궁금해서 페이지를 한 장 두 장 넘겨보는데 한 삽화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성서에 삽화가 포함된 이유는 글을 읽지 못하는 문맹자들이 삽화를 보고 성서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삽화는 출애굽기 2장의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출 2:1-10). 모세의 모친이 모세를 나일강에 띄워 보내고 바로의 딸은 모세를 강에서 건져내어 모세를 자신의 아들로 양육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출애굽기 2장은 모세의 모친이 모세를 강에 띄워 보낸 것이 아니라 강가 갈대 사이에 숨겨 놓았다고 한다.


   필자가 이 삽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따로 있다. 삽화 오른쪽 중간에 모세가 바로의 머리에서 왕관을 벗기는 장면이 보인다. 참으로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출애굽기는 모세가 바로의 왕관을 벗기는 행동을 전혀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이 삽화를 그린 이는 어떤 근거에서 이 장면을 그려 넣었을까? 그 답은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책 『유대 고대사』(Jewish Antiquities, 2:232-36)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요세푸스는 출애굽기 2장을 다음과 같이 의역하였다: 


   때무티스는 모세를 양자로 삼았다. 어느 날 그녀는 모세를 아버지 바로에게 데려갔다. 자신에게 자식이 없기에 바로의 대를 이을 자가 바로 모세임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데리고 온 이 아이는 강의 혜택으로 얻었는데 신의 성품을 가진 아름다운 아이로서 제 자식으로 삼았고, 앞으로 이 제국을 이어갈 황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녀는 바로에게 아이를 건네주었고 바로는 그 아이를 가슴으로 껴안으면서 자신의 왕관을 모세 머리에 얹었다. 하지만 모세는 그 왕관을 바닥에 집어 던지고 발로 짓밟았다. 이는 애굽 제국에 재앙이 임함을 예견하는 것이었다. 이를 본 애굽의 신령한 학자가 발끈하여 이렇게 말했다. “왕이시여! 이는 하늘이 주는 메시지로서 이 아이를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애굽 제국은 멸망 할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이 이 아이를 통해 자신들이 노예에서 해방될 것을 희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때무티스는 모세를 보호하기 위해 모세를 잡아챘고 바로도 모세를 즉시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 다행히 모세는 바로 딸의 보호 아래서 교육받고 자랐다. 히브리인들은 모세를 의지하게 되었고, 앞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것을 희망했다. 반면, 애굽인들은 모세로 인해 일어날 일에 대해 염려했다. 


    요세푸스의 글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바로가 자신의 왕관을 모세에게 건네주지만 어린 모세는 왕관을 바닥에 던지고 발로 짓밟았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애굽 학자의 경고처럼 애굽 제국의 멸망을 의미한다. 즉 모세의 등장이 애굽 제국의 멸망을 의미함과 동시에 모세는 반제국주의 사상을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것도 함께 명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야말로 모세를 새로운 관점으로 보는 놀라운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요세푸스와 비슷하게 유대인 미드라쉬 전통도 모세가 바로의 왕관을 받아 자신의 머리에 얹으므로 모세가 바로를 대신하는 왕으로 해석한다. 이는 모세의 등장이 억압과 폭정의 애굽 제국의 멸망을 초래하지만 동시에 해방과 나눔의 새로운 세상의 시작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Tanhuma Exodus 8; Midrash Exodus Rabbah 1.26; Midrash Dueteronomy Rabbah 11.10; Yashar Exodus 131b-132b).


    요세푸스는 정치적으로 친 로마 성향을 보였지만 자신의 뿌리인 유대교 문화와 종교의 우월성을 그 어느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대변한 사람이었다. 그의 글 여러 곳에서 로마 제국을 간접적으로 비판한 흔적이 보인다. 따라서 요세푸스가 묘사하는 모세의 모습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글이 로마제국에 대한 비판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지적을 교묘히 빠져 나가기 위해 요세푸스는 모세가 너무 어려 어린이의 장난으로 바로의 왕관을 집어 던진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로마제국을 간접적으로 비판한 것은 요세푸스의 다니엘서 의역에서도 여전히 드러난다. 요세푸스는 다른 예언자들보다 다니엘에 더욱 관심을 보였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다니엘서가 내포한 묵시 종말론적 메시지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다니엘서 2장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자신의 꿈에서 본 거대한 신상을 소개하고 있다. 정금으로 만든 머리는 바벨론 제국을 상징하고, 은으로 만든 가슴과 팔은 메데 제국을 상징하고, 놋으로 만든 배와 넓적다리는 페르시아 제국을 상징하고, 철로 만든 종아리는 그리스 제국을 상징한다. 그러나 요세푸스의 네 왕국은 첫째는 바벨론 제국, 둘째는 페르시아 제국, 셋째는 마케도니아 제국, 넷째는 바로 로마 제국이다(『유대고대사』 [Jewish Antiquities] 10.10.4, §209). 느부갓네살의 거대한 신상 꿈은 세상에 순차적으로 등장한 제국이 하나씩 멸망하지만 마지막에 하늘이 세우는 영원한 나라가 도래할 것이라는 묵시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따라서 유세푸스는 다른 모든 제국과 마찬가지로 로마 제국 역시 멸망의 길로 갈 것이라는 로마 제국의 멸망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모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요세푸스는 로마의 멸망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각주:2]  


   요한계시록 15장 3절은 짐승(로마제국)을 물리친 자들이 유리바다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모세가 부른 애굽 제국에 대한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다시 재현하고 있다. 이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후 애굽 제국과 그들의 신을 물리친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찬양하는 모세의 노래를 연상케 한다(출애굽기 15장). 모세는 이렇게 노래한다: “주님께서 영원무궁토록 다스릴 것입니다!”출 15:18, 새번역). 이렇게 요세푸스의 글에서 발견되는 모세의 반 제국주의적 이미지는 이사야의 예언처럼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는 묵시적 맥락으로 보아야 한다(이사야 65:17).



* 필자소개

    현재 미 연합감리교회 북 일리노이 연회에서 목회, 시카고 루터란 신학대학에서 구약학 전공(Ph.D.), Wartburg College에서 강의


ⓒ 웹진 <제3시대>

  1. 이글은 지난 2010년 8월 9일 필자의 블로그 Old Testament Story에 게재한 글을, “Moses in the Koberger Bible (1483),” 수정/보완한 것임을 알린다. [본문으로]
  2. Louis H. Feldman, Josephus's Interpretation of the Bible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8), p. 65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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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비의 ‘악령’들린 노예소녀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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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1

영화 <식스 센스>(The Sixth Sense, 1999)에는 한 소년이 혼령과 대화를 한다. 소년이 공포에 휩싸인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그러나 결국 두려움 없이 혼령과 소통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공포영화다운 어법에서 벗어나 ‘성장담’의 형태를 띠고 있다. 나아가 그 소통을 통해 인간의 사회적 행위에 혼령의 언어가 개입되게 한다는 점에서, 하여 폭력적 현실을 정화하는 중개자의 역할을 그 아이가 담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메시아적 구원담’의 성격도 지닌다. 여기에서 우리는 언어의 확장된 지평을 본다. 언어는 삶과 죽음이라는 고전적 이분법을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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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식스센스>에서 8살박이 소년 콜 시어는 혼령과 대화를 한다

정찬의 소설 「별들의 냄새」에는 또 다른 차원의 소통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강문규라는 이는 은행원이었는데,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한다. 다행히 큰 사고는 아니어서,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외상은 다 치료된다. 한데 사고 이후 그의 후각이 갑자기 예민해졌다. 다른 사람이 감지할 수 없는 냄새를 느끼게 된 것이다. 사람들의 외양 속에 감추어진 냄새가 그의 예민한 후각을 통해서 인지되었다. 아내만의 고유한 내음을 맡을 수 있었고, 또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 사람들의 냄새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뿐이 아니다. 꽃 나무 하늘 밤낮 계절 등 삼라만상의 향기가 그를 사로잡았다. 또한 인간 가공물의 악취, 문명의 역겨운 냄새가 자연의 향기로움을 얼마나 착취하고 있는지를 느끼게 되었다. 한갓 인간의 도구로 전락해버린 세상 만물의 고통스런 울부짖음을 알게 된 것이다. 해서 그는 ‘환각’에 빠진다. 문명이라는 환각에 빠진 인간과는 다른 종류의 환각이다. 닫힌 문명의 세계를 향한 초문명의 샤먼(자연/우주와 인간을 중개하는)이 된다. 별의 내음을 이야기하는 샤먼이다. 구원을 갈구하면서 말이다. 하여 이 소설은 언어의 지평을 자연, 우주로 확장시킨다. 소통의 당사자는 인간만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강문규는 직장을 잃고 정신병원에 들어가야 했다. 그리고 아내로부터 버림받아야 했다. 단지 닫힌 세계의 충실한 일원인 ‘나’라는 화자를 향한 구원담화를 위해서 그는 모든 것을 희생한 존재여야 했다. 오늘의 지배적 세계 담론이 은폐한, 감추어진 세계를 발설한 탓일까? 적어도 오늘의 시대엔 그것은 천기에 해당했던 것일까?

「사도행전」 16장 11~40절에는 흥미로운 일화 하나가 포함되어 있다. 바울이 ‘악령’들린 한 소녀를 치유한 이야기다. 그런데 그 소녀는 점쟁이다. 남의 운명을 감지하는 존재다. 그는 무언가 남들이 갖지 못한 언어를 가지고 있고, 남들이 모르는 세계를 이야기한다. 비록 이 일화가 그녀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지도 않고, 심지어 단지 바울 영웅담을 위한 대상화된 몰주체적 존재로만 취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속에는 당시의 사회와 「사도행전」 저자가 꿈꾸는 소통 상황에 대한 하나의 암시가 들어 있다. 거기에는 폭력이, 착취가 자리잡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 소녀를 둘러싸고 있는, 이 은폐된 소통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탐구하려 한다.

2

그래서 그들은 무시아를 지나서 드로아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밤에 바울에게 환상이 나타났는데,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바울 앞에 서서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바울이 그 환상을 본 뒤에, 우리는 곧 마케도니아로 건너가려고 하였다.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라고, 우리가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6장 8~10절

바울은 예루살렘 사도회의에 참석한 뒤에 바나바와 불화하여 갈라진 후, 소아시아 지역을 두루 다니며 선교하던 중 꿈에 마케도니아인의 환상을 본 것을 계기로 그곳을 새로운 선교 개척지로 삼기로 한다. 하여 본문이 묘사하는 대로, 소아시아의 트로아스를 출발하여 사모드라게 섬을 거쳐, 네아폴리스에 당도한 후 빌립보(Philippi)에 이르게 되었다. 이곳은 그리스 이북 지역인 마케도니아의 항구도시로, 주전 356년,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인 필립 2세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건설함으로써 도시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이래, 소아시아와 가까이 있다는 점에서 전략적으로(군사적 상업적) 중요한 곳으로 크게 번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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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바울의 2차 전도여행과 빌립보

주전 168년 로마가 마케도니아를 정복하여 이곳을 네 지역으로 분할하여 원로원의 속주로 삼았는데, 빌립보는 동부마케도니아의 속주 수도가 되었다. 후에 아우구스투스(Augustus, 옥타비아누스, BCE. 63~AD 14)가 악티움 해전 이후 투항한 안토니우스의 추종자들을 이 도시에 이주시켜 정착하게 함으로써, 많은 유력한 로마인들이 거주하게 되어 도시의 정치적 위상이 더욱 격상하였다. 즉 이 도시는 고대 지중해 문명의 핵심을 간직하고 있을 뿐 아니라, 특히 로마적 도시의 전형성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바울 일행은 이곳에서 유대인들의 모임을 찾았는데, 성밖 외딴 곳에 유대인의 기도처(프로슠헤, προσευχη)가 있었다. 이는 유대인 결사체가 상대적으로 약한 상태임을 말해준다. 이곳에서 바울은 여러 신실한 여인들을 만났는데, 그중 루디아는 초기 바울 선교에서 매우 유력한 활동가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그녀는 비유대인 출신의 부유한 상인(고급의류)이었는데, “하느님을 공경하는 사람”, 곧 유대교 개종자의 한 사람(「사도」 16,14)으로 공동체에서 유력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으로 보인다. 그런 이가 바울의 가르침에 동화되어 그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고, 자기 집에 그의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15절).

어느 날 기도처로 가는 길에, ‘점 치는 귀신’(프뉴마 퓌토나, πνευμα πυθωνα) 붙은 소녀를 만난다. 그리스어로 퓌톤(πυθων)은 ‘점쟁이 영’을 뜻하고, 퓌토네스(πυθωνες)는 ‘복화술사’를 뜻한다. 아마도 점 치는 귀신 붙은 소녀는 복화술사처럼 거의 입을 움직이지 않은 모습으로 사람들의 감추어진 것들을 이야기하는 부류의 점쟁이였던 것 같다. 이것은 고대인들에게 그녀가 말하는 것이 아닌 그녀 속의 영이 말하는 것으로 비추어졌다. 그러므로 이런 행태는 신뢰받는 점쟁이의 전형적 모습(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소녀는 ‘주인들’에 의해 고용되어 있다. 주인이 복수로 나온 것은, 해석하기 매우 어려운 부분이다. 아마도 점쟁이의 상행위에 이러저러하게 얽힌 복잡한 이권집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고대인에게 있서 ‘점’은 원래 신탁의 개인적 차원을 가리킨다. 그렇기 때문에 점술사는 치부를 목적으로 점술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다만 점술의 대가로 일정양의 보답을 받을 수는 있다. 한데 도시화의 진척, 그리고 도시화와 (그 부수적 현상이라 할 수 있는) 전쟁 등으로 인한 급속한 인구 이동은 많은 사람들의 비교적 안정된 기초생활을 교란시켰을 뿐 아니라 가치의 붕괴를 초래했다. 일상생활에 관여되는 신뢰 메커니즘의 붕괴 속에서 사람들은 불안정한 생활 여건을 보상받기 위해 크게 두 유형의 방편을 구축한다. 하나는 실리적 판단의 영역으로, 비교적 강력한 자치 결사체에 소속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혈연적이건 종교적이건) 귀속성이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에게 있어 유리한 결사체에 소속되는 일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해서 자연스레 사람들은 신비주의적 종교나 점술사 등을 통해서 위안을 구했다. 신앙적 판단의 영역이다.

한편 소비사회인 도시에서 잉여가치의 창출은 비생산적 가치창출을 통해 일어난다. ‘위안’이라는 가치를 창출하는 점술사들은 그렇기 때문에 도시사회의 잉여창출 메커니즘의 도구로서 활용되게 된다. 이런 일은 신성 중심적인 전통적 가치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의 영역인데, 점술사들은 신접 체험을 통해 신성적 가치에 묶여 있기 때문에 대체로 이윤을 위해 자발적으로 일하기 어려운 존재들이다. 해서 브로커가 존재하게 되며 점차 그들에 의해 예속되어 일하게 된다. 

점술업은 구역별로 활동영역이 나뉘고, 그러한 인위적인 구분을 통해서 조합이 결성되었다. 물론 이런 조직화의 주체는 대개 점술가가 아니었다. 구역별 점술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그들의 후견인들이 생기고, 이들 후견인들은 한편으로는 주먹패들과 결연되어 있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하위와 상위의) 행정 당국과 연계되어 있었다. 이렇게 복잡한 이해의 고리를 형성하며 점술의 상업화가 이루어졌다.

본문에 의하면 점술사 소녀는 바울 일행을 보자 그들의 신원(identity)과 지향 목적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떠벌렸다. 여러 날을 그렇게 하자 바울은 귀찮아서 그녀를 사로잡고 있던 악령을 내쫓았다고 한다. 이것은 점술을 둘러싼 이권행위를 방해한 것이고, 도시의 상업 질서를 교란시킨 셈이 된다. 결국 바울과 실라(실루아노)는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 이야기는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 하느님이 그를 구원했으며, 그런 상황에서 하느님이 바울을 통해 복음을 전하고 있음을 예시하는 데 초점이 있다. 또한 부수적으로 다른 신이 아닌 그리스도만이 진정한 점술의 주역임을 증언하고 있다. 즉, 여기서 악령들인 소녀는 아무런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도리어 ‘악령’이라는 가치판단을 따라, 소녀도 은연 중 비하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소녀에게서 악령을 추방한 것으로 텍스트는 충분한 선행을 베푼 듯이 묘사한다. 그러나 추정컨대, 이 이야기가 사실적 묘사라면 그녀는 생계 수단을 상실한 셈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행전」 저자의 편견을 본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동시에 대중의 불안감을 깊이 유념하지 않은 채 사회의 구축과 변화를 기도한 주류 사회의 시각과 다르지 않다. 즉, 점술을 한갓 사술로 보는 편견이다. 점술가들은, 마치 태풍이 몰아친다거나 지진이 일어난다거나 하는 자연의 변화를 미리 알아차리는 동물의 감지 능력과 같은 예지력을 갖춘 존재다. 동물들에게서 그런 것처럼 그것은 예민한 감각의 대가이며, 그런 감각은 소통불가의 타자적 대상과의 소통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즉 점술은 인간의 언어 행위 속에 감추어진 감각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하나의 소통수단이다. 그것이 다른 것의 상위에 있음으로써 다른 의미를 부차적인 것으로 전락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하나의 의미, 하나의 소통의 결과다. 문제는 그것이 다른 것의 우위에 있다고 보는 것 혹은 그것을 무의미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 이 양극단의 태도에 있다.

「사도행전」 저자는 바울이 이 소녀가 자신의 뒤를 따라다니며 자신들이 하느님의 사도며, 구원의 길을 선포하는 자라는 것을 이야기한 것에 화났다고 한다. 그들이 숨기고 조심스레 해야 할 것을 폭로한 것이 문제가 되었을까? 그러나, 실재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것을 기술한 「사도행전」에는 복음 전파를 굳이 숨기고 다녀야 한다는 ‘은폐의 동기’가 별로 부각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 텍스트에서 바울의 격분은 그 동기가 정당하지 않다. 텍스트는 사도의 격분이라는 권위에 찬 이미지를 구마 과정에 개입시키고 있는 것 같다. 즉 사도는 이미 권위 있는 존재이고, 그런 점에서 대상들에게 자혜로운 이의 모습을 띠고 있지 않다.

여기서 바울은 소녀의 점술을 무가치한 것으로 본다. 로마제국 시대 도시 대중사회의 역경과 그 속에서 잉태한 신앙 유형은 한마디로 쓸데없는 것이 되고 만다. 「사도행전」 전체가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 텍스트의 주된 관심은 신의 말이 인간에게 어떻게 전달되는지에 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중을 향한 신의 말의 ‘내용’에만 관심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고상한 말이라고 해도, 때로 그것이 전달되는 방식 때문에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것이 있다. 많은 종교들이 그렇듯이 그리스도교의 제국주의적 선교 행태의 맹아가 여기서 이미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이 텍스트에는 루디아와 악령 들린 소녀가 연이어 나옴으로써 자연스레 그들이 비교되고 있다. 하나는 부유하고 점잖은 부류로서(바울 텍스트에 나오는 활동적인 암시가 여기에는 어디에도 없다), 단지 사도를 부양하는 여인의 모습이다. 반면 신들린 여인이 있다. 바울의 텍스트에서 여러 차례 시사되고 있는 것처럼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이런 여인은 거의 언제나 악령 들린 사람으로 묘사할 뿐이다.

이와 같은 부정적 여성상은 특히 문제적이다. 왜냐하면 당시 사회에서 여성이 교회에서 발화권을 가질 수 있는 주된 통로는 바로 이런 비일상적 소통수단과 관련되어 있고, 그것은 비일상적 감지능력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이 텍스트는 그리스도 공동체에서 통용되는 언어매체를 제한하고 있고, 그것을 통해서 그 제한된 영역 외부의 언어에 대해서 배제적인 제도화를 구축하고 있다.

3

예수는 막힌 사회를 돌파하는 대중의 언어로 등장했다. 그것은 비록 비현실적이긴 해도, 현실의 닫힌 구조를 비판하는 신랄한 저항담론이자 희망의 이야기였다. 그것은 전파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요소들과 마주치면서 변형되지 않을 수 없다. 시간이라는 요소는 아마도 예수담론의 비일상성, 그 혁명성을 시대와 어느 정도 타협시키게 하는 결정적인 변수였겠다. 그밖의 여러 요소들 또한 그런 역할을 했다.

이 점에서 「사도행전」은, 특히 점치는 귀신 들린 소녀 텍스트 그리스도교 역사의 뚜렷한 체제내화의 흔적을 보여준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생명력을 긴 시간 존속할 수 있게끔 하였지만, 동시에 많은 시대적 한계를 공유하는 존재로서 그리스도교를 재탄생시켰다. 그 중의 한 양태를 「사도행전」 16장의 이른바 ‘점치는 귀신 붙은 소녀’ 텍스트는 보여준다. 인류 문명이 인간 언어를 제한시켰다면, 교회의 문명화 또한 신앙의 언어 양상을 제한시켰다.

‘영’은 자유로움에 그 본질이 있다. 무엇에 구속되지 아니함이다. 어떤 것으로 형태화함에 대한 저항이다. 무한한 일탈인 것이다. 한편, 자유로움의 반대에는 ‘육’이 있다. 그것은 종종 제도화의 신앙적 언어로 쓰인다. 바울이 교회를 주의 몸이라고 묘사하는 것이 그렇다(「고전」 12,27). 바울 후대에 그를 추종하는 한 공동체 또한 이러한 수사어를 제도화의 언어로써 해석하여 계승했다(「에베」 5,30). 교회는 분명 신앙의 제도화의 하나로서 발전했던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발전에서 영은 제도화의 장애물 내지는 견제 장치였다. 육과 영, 이 둘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발전에서 중요한 키워드다. 모두가 예수의 삶과 신앙을 계승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경험의 중요한 요소다. 특히 그 길항성, 서로 모순되면서도 서로 얽힌 관계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신앙의 요소였다.

한데 육의 체계, 곧 교회는 이러한 영의 자유로움을 교회를 통한 신앙의 언어에서 제거시켜버렸다. 그것이 교회의 비극이다. 교회는 제도화에 ‘순응하는 영’만을 허용했고, 자유로움을 신앙 외부를 밀어내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럼으로써 교회는 인간과 대화하는 또 하나의 주된 통로를 상실하고 말았다. 아니 어쩌면 대화의 가능성을 잃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교회가 대화할 수 있는 세계가 패권주의적인 문명화의 주체, 도구적 이성의 소유자로서의 인간인 이상, 교회는 인간에 의해 비인간화된, 비주체화된 대상세계를 착취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대화가 아니라 독백이며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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