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영화의 윤리: <레이디 버드>(2018)



조은채*

 

※ 영화 <레이디 버드>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레이디 버드>는 “내가 새크라멘토 사람처럼 보인다고 생각해?”라는 주인공 크리스틴의 보이스오버(V.O.)와 함께 시작된다. 가톨릭 교구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보수적이고 조용한 새크라멘토에서 나고 자란, 하지만 도저히 자신을 그 마을 사람이라고 인정하고 싶지는 않은 열일곱 살의 소녀. <레이디 버드>의 감독 그레타 거윅(Greta Gerwig)은 원래 이름인 크리스틴 대신에 ‘레이디 버드’라고 불리기를 원하는 이 소녀를 설명하기 위해 내레이션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소녀의 속마음을 속속들이 나열한 일기장이나 편지를 읽는 장면도 등장하지 않는다. 성장 영화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론이 바로 내레이션이겠지만, <레이디 버드>는 처음 이후 단 한 순간도 라디오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잘 안다고 넘겨짚는 십 대 시절이 쉽게 언어로 가지런히 정리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프닝 시퀀스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내레이션은 주인공인 레이디 버드가 어떤 소녀인지, 그리고 영화가 앞으로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를 단번에 예감하게 한다.


   <레이디 버드>가 ‘윤리적인’ 성장영화로 보이는 것은 이 영화가 이 소녀를 알고 있다고 함부로 단정짓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겪었던 일 혹은 지나온 시기에 대해 모든 것을 안다고 과신한다. 그 순간을 겪고 있는 당사자, 흔히 나이가 어린 이가 말하지 않는 속마음이나 사정도 뻔히 다 안다고 착각한다. 다른 성장영화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자주 헛발질을 하곤 한다. 인물에게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정교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세심한 설계가 필요한 법이다. 하지만 어떤 성장영화들은 굳이 고심하지 않아도 그 시절을 너무 잘 기억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종종 일을 그르친다. 그 영화의 주인공들 역시 영화에서 자연스럽게 숨 쉬고 있다기보다는, 누군가에 의해 실체 없이 부풀려진 채 설명적으로 연출되기도 한다. 그 누군가는 대체로 감독이고, 그가 자신이 아직도 얼마나 소년 같은 감수성을 지니고 있는지를 과시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은 굳이 덧붙이도 않아도 될 것 같다.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과시욕에서 비롯된 연출이 청소년기의 인물을 대상화해서 흥밋거리로 착취하는 장면도 종종 목격된다. 감독 그레타 거윅은 이 보편적이지만 다소 비윤리적인 성장영화들과 달리 <레이디 버드>에 넘겨짚은 추측이나 주제넘은 단정이 자리할 빈틈을 남겨두지 않는다. 물론, 영화가 항상 도덕적으로 올바른 이야기만 다룰 수는 없고, 연출력을 뽐내며 인물의 감정을 과하게 극대화해서 담아내는 장면도 필요할 수 있다. 카메라는 근본적으로 대상의 불안 또는 기쁨에 이입하지 않고 그저 관찰하고 수록하는 중립적인 매체이다. 하지만 대상을 ‘어떻게’ 담아내는지는 필연적으로 감독의 가치판단을 수반한다. 이때 감독의 시선과 태도는 윤리적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고통을 다루는 영화라고 해서 타인의 고통을 그저 전시하고 때로는 미학화라는 명목으로 대상화하는 것은 비윤리적인 데다가 때로는 게으르기까지 하다. 반면, <레이디 버드>는 이미 성장한 자가 그 시기를 겪는 자를 관찰하는 데서 오는 불가피한 비윤리성을 인식하고 그 경계선을 넘지 않기 위해 매진한다.


  ‘철길 건너 구린 동네(the wrong side of the tracks)’에 사는 레이디 버드에게 새크라멘토는 녹록하지만은 않다. 엄마는 매번 야근을 반복하지만 아빠의 실직은 쉽게 메꿔지지 않고, 부자 친구들과 비교되는 집안 사정에 자주 위축되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레이디 버드에게 새크라멘토는 얼마간 관대한 보금자리이다. 레이디 버드는 학교 선생님의 채점표를 몰래 버려버리지만, 선생님은 범인을 색출하는 대신에 양심에 맡게 본인이 받은 점수를 적어내라고 한다. 다시 떠올리기도 창피한 거짓말을 친구에게 들켰지만, 레이디 버드는 동네방네 거짓말쟁이로 소문이 나서 웃음거리가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보수적인 미션 스쿨의 성교육 시간에 임신 중단을 무조건 부도덕한 일이라고 서슴지 않는 강사의 말에 반론을 제기했다가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정학을 당하기도 한다. 이 마을에서는 아무도 하지 않는 생각을 혼자 품고 사는(혹은 그렇다고 스스로 믿는) 소녀에게는 새크라멘토는 마냥 싫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간절하게 벗어나고 싶은 곳이다. 엄마는 다른 지역에 있는 대학의 학비까지는 지원해줄 수 없다고 못 박은 상태라서 떠날 가능성도 희박하게만 보인다. 레이디 버드에게는 엄마인 매리언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이 넓고 따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사건건 트집 잡고 프라이버시를 존중해주지 않아서 자주 부딪친다. 누구보다도 엄마에게 인정받고 싶지만, 때로는 그냥 조금 멀리 떨어져 있고 싶기도 하다.


  <레이디 버드>는 흔히 가장 자의식이 과잉된 시기라고 여겨지는 십 대의 소녀를 다루고 있지만, 그 연출은 과잉된 감정이나 자의식을 극대화하는 대신 도리어 절제하면서 효과적으로 배가한다. 배우의 얼굴과 표정을 클로즈업해서 민망함이나 비참함, 슬픔과 같은 강렬한 감정을 스크린 가득 전시하는 법도 없다. 그런 욕망이 들 법한 상황을 설정해 놓고도, 가상의 인물인 데다가 나이도 어린 이 주인공과 그녀를 둘러싼 인물들을 최대한 존중할 수 있는 윤리적인 연출을 선택한다. 알고 보니 게이였던, 그래서 결국은 레이디 버드를 속인 것이 된 첫 번째 남자친구 대니와의 신(scene) 역시 그렇다. 레이디 버드는 대니가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에 분노하지만, 자신의 비밀이 들킬까 봐 무서웠다는 그를 이해하고 결국 함께 울어준다. 영화는 자신의 속마음을 가감없이 표출하며 우는 두 소년∙소녀의 얼굴을 과시적으로 내세우기보다는,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그들이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둘 사이에 새롭게 싹튼 신뢰와 우정을 암시한다. 레이디 버드는 카일과 엉망인 첫 섹스를 마친 후, 자신을 데리러 온 엄마의 얼굴을 보고 울음을 터뜨린다. 영화는 비참함, 죄책감, 후회, 민망함, 서운함 같은 것들이 북받쳐 올라왔을 레이디 버드의 얼굴을 포착하는 것에 집중하지 않는다. 아마 미세하게 떨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레이디 버드의 다리를 내보이지도 않고, 서러움 울음소리를 배경음악이나 효과음으로 삼지도 않는다. 대신 일요일에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자고 레이디 버드를 달래는 엄마의 목소리와 함께, 사지도 않을 집을 함께 보러 다니는 모녀의 즐거운 일요일로 화면이 금방 전환된다. 이러한 연출 방식은 특별하지만 평범한 레이디 버드, 혹은 모든 이의 소녀 시절을 조금이라도 더 윤리적으로 그리고자 한 고민의 연장 선상이다.


  알고 보면 레이디 버드와 엄마 매리언은 서로 무척 닮았다. 둘이 서로 닮았다는 사실은 대사로 직접 주어지기도 하지만, 장면과 장면 사이를 잇는 연출을 통해 선명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사과하러 왔던 대니는 당황했기 때문인지 되려 레이디 버드에게 그녀의 엄마가 무섭다고 험담한다. 레이디 버드는 발끈해서 엄마는 따뜻하고 마음이 넓은 사람이라고 항변한다. 대니는 그녀의 엄마가 무서우면서도 따뜻한 사람이라고 결론지어버리고, 레이디 버드는 무서운 동시에 따뜻할 수는 없다고 소리친다. 그러나 레이디 버드는 대니를 몰아세우다가도 이내 그를 용서하고 위로해주기까지 한다. 곧바로 레이디 버드의 학교에서 연극을 가르치는 신부님이 간호사인 레이디 버드의 엄마에게 자신이 우울증을 털어놓는 장면이 이어진다. 엄마는 신부님에게 비밀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그의 마음에 깊이 공감하고 연민한다. 영화는 ‘무섭지만 따뜻하다’는 얼핏 상반되어 보이는 말이 진실일 수도 있음을 레이디 버드와 엄마의 모습을 통해 증명한다. 레이디 버드와 그녀의 엄마는 때로는 신경질적이지만 강하고 따뜻한 사람, 즉 닮은 사람이다.


  졸업을 앞둔 레이디 버드는 학교 수녀님에게 그녀의 대학 지원 에세이에 새크라멘토에 관한 애정이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말을 듣는다. 레이디 버드는 그럴 리 없다고, 그저 관심을 가진 것뿐이라고 부정하지만, 수녀님은 관심과 사랑이 같은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녀는 대답하지 못한다. 바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레이디버드는 프롬 드레스를 함께 고르던 엄마의 지적에 크게 상처받는다. 엄마가 나를 좋아해 줬으면 한다는 레이디 버드에게 엄마는 당연히 사랑한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레이디 버드는 자신을 좋아하냐고 되묻는다. 엄마는 쉽게 답변하지 못하고 네가 언제 어디서든 최고의 모습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이게 내 최고의 모습이면 어쩔 거냐는 레이디 버드의 말에, 수녀님 앞에서의 레이디 버드처럼 엄마의 말문도 막힌다. 닮은 두 사람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대면하자 똑같이 침묵에 잠긴다. 레이디 버드는 고향이 지긋지긋하기만 하다고 말했지만 사실 깊이 사랑했고, 엄마는 레이디 버드를 몹시 사랑하지만 소녀의 지금을 있는 그대로 좋아하고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둘은 일견 반대되는 깨달음은 얻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 둘이 누구보다도 닮고 서로에게 관심을 쏟고 있다는 점에서 결국에는 맞물리는 해답을 찾을 수도 있다. 하지만 관심과 애정, 사랑함과 좋아함 사이의 미묘한 차이 속에서 그들은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하고 관계는 앙금을 남긴 채로 멈춰버린다.


  엄마 몰래 지원했던 뉴욕의 대학에 결국 합격하면서 모녀 사이의 관계는 더 틀어진다. 자신이 반대하던 일을 슬쩍 저질러버린 레이디 버드에게 엄마가 단단히 화가 났기 때문이다. 엄마는 레이디 버드와 대화를 내내 거부하고, 그녀가 뉴욕으로 떠나는 공항에 데려다줄 때도 게이트까지 배웅해주지도 않는다. 엄마가 뒤늦게 후회하고 울며 달려왔다는 사실을 레이디 버드가 알 길은 없다. 엄마가 자신을 아주 많이 사랑하고 언제나 가장 많이 관심을 쏟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까지도 좋아하는지를 확신할 수 없는 채로 레이디 버드는 뉴욕에 도착한다. 이때 레이디 버드가 수녀님에게 자기도 몰랐던 새크라멘토에 대한 애정을 들키게 한 대학 에세이처럼, 아빠가 엄마 모르게 가방에 넣어둔 엄마의 부치지 않은 편지가 등장한다. 엄마의 내레이션으로 이 편지가 읽히고 레이디 버드가 펑펑 눈물을 흘리는 식의 효과적이겠지만 진부한 장면 대신, 그저 엄마가 편지에 쓴 문장 몇 개가 화면을 언뜻언뜻 스쳐 지나간다. 마지 못해 레이디 버드라고 불러주기는 했지만 늘 못마땅해하고 심지어 비웃기까지 하던 엄마가 쓴 “레이디 버드라는 네 예명 참 예뻐.”라는 문장은 그 절제된 연출 속에서도 스크린 밖까지 잔상을 남긴다.


  뉴욕에 도착하고 엄마의 편지를 읽은 후에야 레이디 버드는 자신의 이름인 ‘크리스틴’이 꽤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주어진 것은 고향이든 심지어 이름이든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열일곱 살 소녀에게도 객관적으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거리’가 드디어 주어진 것이다. 떨어져야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있는 법이듯이, 이제 레이디 버드에게는 고향과 엄마 모두를 사랑하는 동시에 좋아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레이디 버드는 고향 집의 자동응답기를 통해 엄마에게 크리스틴이 참 좋은 이름인 것 같고, 사랑하고 고맙다는 메시지를 남긴다. 아직 영화상에서는 엄마에게 도착하지 못한 이 메시지는 둘 사이의 관계 역시 성장하리라고 암시한다. 미숙해서 혹은 너무 사랑해서 서로에게 가장 깊은 상처를 남기기도 했으며, 서로를 좋아하는 일이 가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던. 하지만 누구보다도 서로를 좋아하고 싶어서 매번 삐걱대다가 멈춰버린 둘 사이의 관계도 비록 영화에서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이내 움직이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새크라멘토에서도 “보기에 추한 것이 꼭 부도덕한 것은 아니”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었던 소녀는 뉴욕에서는 아마 더 자주 세상과 부딪칠 것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앞으로 성장할 엄마와의 관계가, 그리고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무엇이든 성장하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소녀를 지탱하는 힘이 될 것이다. <레이디 버드>의 결말은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으로부터의 졸업, 또는 ‘크리스틴’과 ‘레이디 버드’ 사이의 화해와 같은 쉬운 말로는 봉합되지 않는다. 성장이 결코 완료된 후 닫히는 개념이 아니라고 믿는 감독 그레타 거윅은 엄마에게 소녀의 메시지가 아직 도달하지 못한 시점에서 이야기의 끝을 맺는다. 누군가의 소녀 시절을 전지적인 위치에서 하나의 분명한 결말로 종결하는 대신,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 두고 끝마치는 것이 더 옳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마지막까지 <레이디 버드>가 지키고자 노력하고 있는 성장영화의 윤리이다.



* 필자소개

학부에서 예술학을 전공하면서, 조형예술을 기반으로 다양한 문화예술 현상을 감상하고 분석하는 법을 배웠다. 같은 전공으로 석사에 진학하여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 관심 분야는 페미니즘, 그리고 미디어아트를 비롯한 현대미술이다. 블로그(http://eunchaecho.tistory.com)를 드문드문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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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한 선택지에 가려진 것들: <코코>(2017)



조은채*

 

※ 영화 <코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딱히 불편한 감수성으로 점철되어 있지 않은 데다가 좋은 점이 훨씬 더 많은데도 그 영화에서 어떤 점이 너무 거슬릴 때가 있다. 이럴 때마다 왜 괜찮은 결과물에서도 '굳이' 나쁜 점을 찾게 되는지 스스로 뒤돌아보게 된다. 그건 명백하고 노골적이게 불편한 작업에서 거슬리는 부분을 짚어내는 것보다 훨씬 더 마음이 불편한 경험이다. <코코>(2017)가 그랬다.


  멕시코의 설화에 기반을 둔 <코코>는 아름답고 화려하면서 이승보다도 더 생기가 넘치는 '저승'을 무대로 진행된다. 멕시코에는 '죽은 자의 날'이라는 전통 축제가 있는데, 죽은 자들은 1년에 단 하루 이 '죽은 자의 날'에 이승의 가족을 방문할 수 있다. <코코>의 주인공 미구엘은 바로 이날 죽은 자의 물건을 훔친 벌로 저승에 떨어지게 된다. 벌이라고 보기에는 미구엘이 도착한 저승은 온통 반짝이는 데다가 활기가 넘쳐서 '살아있는 자'도 충분히 마음을 빼앗길 만큼 매력적이다. <코코>에서 이승과 저승은 오갈 수 있는 이웃 나라가 되고, 죽음은 두렵거나 불길하다기보다는 오히려 가까운 친구 같은 존재가 된다. 나를 먼저 떠난 소중한 존재가 이승보다도 더 아름다운 곳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으며,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코코>의 메시지는 기꺼이 믿어보고 싶을 정도로 달콤하다. 하지만 <코코>는 자주 '안전한' 선택을 한다. 아니, 안전한 것 외의 선택지는 '굳이' 염두에 두지조차 않았던 것 같아서 어쩐지 마음에 걸린다.


  코코에서 이야기의 진정한 '발단'은 주인공 미구엘이 아니라 그의 고조할머니와 고조할아버지이다. 한 남자가 자신의 꿈을 위해 아내와 어린 딸을 버리고 떠났다. 그리고 여자, 이멜다는 살아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구두를 만들기 시작한다. 왜 하필 구두 만드는 일을 골랐는지 이유는 나오지 않지만, 그녀의 수완이 좋았던 건지 혹은 손재주가 뛰어났던지 어쨌든 이멜다의 사업은 꽤 성공한다. 고손자인 미구엘이 태어나기까지 꽤 대가족이 되었음에도 온 가족이 구두 만드는 일을 가업으로 삼고 여유롭게 살아간다. 하지만 구두 사업의 성공이 이멜다의 모든 상처를 치유해주지는 못했다. 이멜다는 음악을 하겠다며 가족을 버린 남편을 결코 용서할 수 없었고, 결국 그녀의 집안에서 음악을 완전히 금지한다. 그 금지는 이멜다와 이멜다의 딸인 코코, 그리고 고손자 미구엘에게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세대를 거듭할수록 금지의 원인이 되었던 떠나버린 가장에 대한 분노는 점차 옅어진다. 이멜다는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고, 딸인 코코는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미구엘의 증조할머니로만 등장하면서 별 대사 없이 웃기만 한다. 도망친 가장에 분노나 원망을 품고 있는 사람은 이승에는 단 한 명도 남지 않는다. 고손자인 미구엘에게 이멜다의 해묵은 분노는 솔직히 이입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는 남의 일이다. 영화 <코코>는 가족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아버지라는 가족의 중요한 역할을 분노의 대상으로만 남길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코코>는 세대를 거쳐 그 분노를 조금씩 희석한 후에, 가족 외부에서 분노의 원인을 설정하는 안전한 선택을 한다.


  전설적인 가수인 에르네스토는 여러모로 중요한 인물이다. 미구엘은 에르네스토가 자신의 숨겨진 고조할아버지라고 오해하고 그의 기타를 훔친다. 미구엘은 음악을 반대하는 할머니가 부숴버린 기타 대신의 에르네스토의 기타로 마을 노래대회에 참가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미구엘은 무려 '죽은 자의 날'에 '죽은 자'의 기타를 훔친 죄로 저승에 오게 된다. 미구엘은 이승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기 위해서, 또 전설적인 가수이자 자신의 고조할아버지인 에르네스토를 만나기 위해 왕년에는 뮤지션이었다는 초라한 행색의 남자 헥터와 함께 고군분투한다.


  에르네스토는 이승에서와 마찬가지로 엄청난 인기를 누리며 살고 있다. 그는 자신의 고손자라는 미구엘이 노래 경연대회에서 두각을 보였다는 사실에 그를 퍽 반가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에르네스토가 희대의 악인이자, 미구엘과는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승에서 아무도 자신의 사진을 제단에 올려주지 않은 데다가 딱히 기억해주는 사람도 없다는, 내내 우스워 보였던 헥터가 사실 미구엘의 고조할아버지였다. 더욱 놀라운 진실도 밝혀진다. 헥터는 음악에 대한 자신의 꿈을 위해 아내와 딸을 뒤로하고 에르네스토와 함께 떠났다. 하지만 가족 생각을 떨칠 수 없었던 헥터는 에르네스토에게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에르네스토는 헥터가 만든 곡 없이는 유명해질 수 없다고 생각했고, 결국 헥터를 독살하고 그의 곡을 훔쳐 유명해진다. 알고 보니 헥터는 능력이 뛰어난 데다가 가족을 깊이 사랑하기까지 했던 멋진 가장이었다. 이멜다는 헥터가 실은 살해당했었다고 하더라도 자신과 딸을 떠났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고손자인 미구엘에게 헥터도 돌아오고 싶었지만 '에르네스토 때문에' 불가능했다는 '훈계'를 들을 뿐이다. 왜 헥터만 떠날 수 있었고 이멜다는 없었는지, 혹은 헥터에게 어떠한 이유가 있었든 이멜다의 고통이나 분노가 정당하다는 사실은 너무도 쉽게 곁가지가 되어 <코코>에서 잘려나간다. 헥터가 애초에 가족을 떠났다는 사실은 에르네스토라는 악당의 존재감에 밀려 더는 별 문제가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가족이 갖는 위대한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코코>는 에르네스토라는 악당의 몸집을 불려 모든 문제를 그에게 환원해버린다. <코코>는 에르네스토라는 안전하고 편리한 선택지로 우회하면서 가족 문제의 원인을 가족 외부로 돌리는 것에 성공한다.


  <코코> 속 저승에도 영원한 작별은 존재한다. 이승의 어느 누구도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면 저승의 존재는 소멸된다. 유일하게 자신을 기억하던 딸인 코코가 모든 기억을 점차 잃어가기 때문에 헥터도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있다. 저승에서 돌아온 미구엘은 증조할머니 코코에게 달려가 헥터가 만든 노래인 '기억해줘(Remember me)'를 간절하게 부르며 그녀의 아버지를 기억해낼 것을 간청한다. 어느새 정신이 돌아온 코코는 놀랍게도 그 노래를 따라 부르며 '다정했던 아버지' 헥터를 기억해낸다. 아마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일 장면이겠지만, 이 장면은 화해도 용서도 아니다. 용서나 화해 모두 한 사람의 다른 사람에 대한 잘못을 인정해야만 하므로 문제를 가족 외부로 돌리려는 <코코>에서 코코에게 이 두 선택지는 주어지지 않는다. 코코에게는 아버지를 망각에서 소환해내 그에게 다시 '가부장' 혹은 '아버지'라는 위치를 돌려주는 선택지밖에 없다.


  <코코>는 가족은 그 자체로 일단 선하고 완전한 것이라는 절대적인 명제를 지니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 <코코> 속의 '진정한 가족'은 대단히 협소한 의미로 쓰이고 있다. 저승에서도 가족이 없는 사람들은 모여 살면서 유사가족과 같은 형태를 이루기도 한다. 그러나 <코코>는 이들이 '진짜 가족'을 대체할 수는 없으며, 그들보다 행복할 수도 없다고 믿는 듯하다. 유사가족은 화려한 저승과 대비되는 어두침침하고 누추한 곳에서 영원한 소멸을 두려워하면서 숨죽이고 살아간다. 하지만 헥터는 고손자의 활약과 내가 떠나도 나를 항상 기억해달라는 어찌 보면 이기적인 노래로 유사가족에서 무사히 졸업하고 진짜 가족에 다시 편입된다. <코코>는 한때 가족을 버리고 꿈을 좇았던 아버지의 가족에 대한 부채를 고손자를 통해 대신 상환해주고, 그가 다시 가족에 돌아올 수 있게끔 그럴싸하고 멋진 사연까지 마련해준다. 하지만 모습을 되찾은 <코코> 속의 '정상 가족'을 위해 누군가의 희생은 그저 증발해버리고, 누군가의 잘못은 잘못이 아니게 된다.



* 필자소개

      학부에서 예술학을 전공하면서, 조형예술을 기반으로 다양한 문화예술 현상을 감상하고 분석하는 법을 배웠다. 같은 전공으로 석사에 진학하여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 관심 분야는 페미니즘, 그리고 미디어아트를 비롯한 현대미술이다. 블로그(http://eunchaecho.tistory.com)를 드문드문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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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 속 “말하는 서발턴”의 “복화술”[각주:1]



조은채*

 

※ 영화 <히든 피겨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2016)는 NASA(미항공우주국)의 랭글리 센터에서 ‘인간 컴퓨터(computer 혹은 계산원)’, 즉 백인 남성 과학자를 보조해서 계산하는 역할로 고용되었던 세 명의 흑인 여성의 이야기이다. 아직 인종 분리 정책을 실시하고 있던 버지니아 햄프턴에서 캐서린, 메리, 그리고 도로시는 ‘흑인’이자 ‘여성’이기 때문에 온갖 차별과 수모를 당하지만, 굴하지 않고 무려 NASA에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한다. 동쪽 전산실의 백인 여성은 ‘동쪽 컴퓨터(East Computers)’로, 서쪽 전산실의 흑인 여성은 ‘서쪽 컴퓨터(West Computers)’로 불리던 1961년, 계산 같은 단순 업무만 맡을 수 있었던 이 세 명의 ‘서쪽 컴퓨터(West Computers)’는 결국 관리자와 엔지니어, 그리고 수학자로서 러시와의 우주 개발 경쟁에서 자신의 새로운 몫을 톡톡히 해낸다. NASA가, 혹은 폭넓게 보자면 사회가 그들에게 부과한 한계와 고정된 역할을 능력과 열정으로 뛰어넘은 것이다. 영화 포스터에 적혀있는 그대로 “천재성에는 인종이 없고, 강인함에는 남녀가 없으며, 용기에는 한계가 없다.”


  영화 <히든 피겨스>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동명의 논픽션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엄연한 실화는 영화화의 ‘각색’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더 감동적이고 유쾌한, 즉 ‘영화적’인 구성을 갖추게 된다. <히든 피겨스>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모든 영화의 목표인, 현실과 가상을 적절히 섞은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 기분 좋은 영화는 이 영화가 유쾌한 바로 그 만큼 어떤 위화감을 유발하기도 한다. 특히나 <히든 피겨스>의 가장 통쾌하면서도 감동적이어야 했을 한두 장면에서 그 위화감은 극에 달한다. 이 영화를 각색한 사람은 백인 여성이고 감독은 백인 남성이라는 점, 그리고 영화에 등장하는 몇몇 백인 캐릭터가 가상의 인물이었다는 점은 영화에 대한 모종의 의심을 더욱 부추긴다. 흑인 여성의 이야기는 흑인 여성에 의해서만 제대로 포착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려는 것은 아니지만, 스피박이 오래전 자신의 글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에서 했던 주장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히든 피겨스>가 사실 중심부의 입장에서 타자로서 캐서린과 도로시, 그리고 메리라는 식민 주체를 구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뒤를 잇는다. 사실 이 세 명의 서쪽 컴퓨터는 ‘서발턴(subaltern)’이고 <히든 피겨스>는 말할 수 없는 서발턴이라는 반복된 실패를 답습하지만 이를 매끄러운 완성도로 숨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도 출신의 문학평론가이자 비교문학 교수, 그리고 탈식민주의 페미니스트인 가야트리 차크라보티 스피박(Gayatri Chakravorty Spivak)은 1988년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라는 글을 발표한다. 스피박은 ‘계급으로 환원되지 않는 위계에 종속적인 하층’을 의미하는 그람시(Antonio Gramsci)의 서발턴에 관한 정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녀는 서발턴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규정하지 않고 재현체계의 바깥에 위치하는, 계층, 인종, 젠더를 포함하는 포괄적이고 자유로운 의미로 사용한다. 스피박은 1988년에 발표한 자신의 글을 1999년에 다소 수정해서 다시 발표하지만, 서발턴, 특히 여성으로서의 서발턴은 말할 수 없다는 논지의 중추는 변하지 않았다. 글의 서두에서 스피박은 비서구지역의 서발턴이 자기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푸코와 들뢰즈 같은 유럽 지식인이 말하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이는 서발턴이 실제로 말을 할 수 없다는 즉자적인 의미라기보다는, 과거 서구의 제국주의 혹은 현대의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그 재현체계로 편입되지 않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피박에 따르면, 푸코와 들뢰즈가 말하는 “기만당하지 않는” 피억압자는 사실 존재하지 않으며, 그들이 주장했던 “말하는 서발턴”은 “투명한” 지식인 주체에 의해 “복화술”이라는 방식으로 재현[대표]되고 있을 뿐이다. 스피박의 주장은 영화로 각색된 <히든 피겨스>에도 적용된다. <히든 피겨스>는 결국 중심부의 재현체계로 편입될 수 있는 목소리를 담고 있으며, 이 목소리는 결국 서발턴을 재현하면서 자신을 투명한 주체로 재현하고자 하는 백인 남성 감독의 것이 아닌가? 영화의 클라이막스라고도 할 수 있을, ‘유색인종 화장실’이 그냥 ‘화장실’이 되는 순간이 철저하게 백인 남성 캐릭터의 손에 달려 있었다는 점은 이 의심을 부추긴다. 스피박은 힌두의 과부 희생 관습인 ‘사티(sati)’의 폐지가 영국의 식민지 제국주의적 해석에 의해 “황인종 남자에게서 황인종 여자를 구해 준 백인종 남자”의 사례가 되었으며, 이 담론 속에서 서발턴 여성은 재현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어쩌면 <히든 피겨스>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실화가 영화로 각색되면서 추가된 몇 가지 에피소드는 “흑인종 여자에게 관용을 베푼 백인종 남자”라는 레퍼토리를 반복한다. 엄격한 인종 분리 정책이 시행되던 버지니아주에서 백인 남성만을 주인공으로 하는 직장인 NASA의 ‘서발턴’이었던 캐서린과 메리, 그리고 도로시는 2016년에 이르러서도 대변될 뿐 제대로 재현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제국주의적 관점에서 사티의 폐지가 영국의 미담이 되었던 것처럼, <히든 피겨스> 속의 유색인종 화장실 폐지는 백인 남성 상사의 선행이 되어버린다. 사티 폐지에 관한 중심부 주체의 메커니즘이 비록 의도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히든 피겨스>에도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던 것이다.


  우주 임무 그룹(Space Task Group)의 본부장이자, 캐서린을 처음으로 인정해준 상사인 알 해리슨은 놀랍게도 가상의 인물이다. 영화에서 세 명의 주인공 다음으로 거의 가장 많이 등장하는 데다가, 꽤나 입체적인 면모를 보여주지만 실존했던 모델조차 없다고 한다. 알 해리슨은 가상의 인물인 동시에 ‘백인’에다 ‘남성’이지만, 세 명의 흑인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히든 피겨스>에서 과다한 역할을 부여받으며, “흑인종 여자에게 관용을 베푼 백인종 남자” 혹은 “흑인종 여자를 구해준 백인종 남자”의 견본이 된다. 해리슨은 캐서린이 영화에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장애물을 뛰어넘게 하는 유일한 열쇠이자, 때로는 그 장애물을 직접 허물어주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유색인종 화장실’이 철폐되는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에서는 돌연 주인공이 되어버리기까지 한다. 그야말로 “황인종 남자에게서 황인종 여자를 구해준 백인종 남자”의 <히든 피겨스> 판이다.


  NASA에서 일하는 여성은 ‘무릎을 덮는 치마, 블라우스보다는 스웨터, 진주 목걸이를 제외한 장식구 착용 금지’라는 복장 규정을 따라야 한다. NASA의 모든 남자 직원이 마치 교복 같은 차림으로 편안하게 업무를 볼 때, 여자 직원은 흑인이든 백인이든 관계없이 반드시 나름대로 ‘모양을 내야만’ 했던 것이다. 복장 규정에 따라 구두를 신은 캐서린이 휘청이며 화장실에 뛰어가거나, 구두가 바닥에 끼어 고생하는 메리, 늘 완벽하게 세팅된 모습으로 우주 임무 그룹을 지키는 백인 여성 콜먼 부인은 NASA가 여성에게만 강요하는 ‘꾸밈 노동’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반면, 여성인 동시에 흑인인 캐서린이 처한 이중적인 억압의 구조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예시는 바로 ‘유색인종 여자 화장실’이다. 캐서린이 ‘서쪽 컴퓨터’였을 때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던 화장실은, 그녀가 자신에게 허용되었던 자리를 벗어나는 순간 몹시 어려운 문제로 돌변하게 된다. 우주 임무 그룹이 속한 건물에는 그녀가 갈 수 있는 화장실, 즉 유색인종 화장실이 없다. 이는 우주 임무 그룹에 ‘인간 컴퓨터(계산원)’이라는 임시직으로 잠깐 동안만 출입이 허용된 캐서린의 처지를 잘 보여준다. 캐서린은 매일 800m나 떨어진 유색인종 여자 화장실에 갈 수밖에 없고, 하루에 족히 40분은 화장실에 가는 데 써야만 한다. 캐서린이 무심코 사용한 이후로 갑자기 ‘유색인종용’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새 커피포트가 생겨난 것처럼, 캐서린은 같은 부서에 속해 있으면서도, 다른 백인 남성 혹은 여성과 같은 동일한 공간을 할당받지는 못한다. 하지만 실존 인물 ‘캐서린 존슨’은 딱히 NASA에서 흑인이기 때문에 차별을 당했던 적은 없다고 회상했다고 한다. 영화 속의 캐서린처럼 화장실 문제를 겪었던 적도 없고, 유색인종 화장실이 따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했다. 실제로 그녀는 백인으로 종종 오해받곤 하던 외모였기 때문에 백인종 화장실을 사용해도 별 탈이 없었던 것이다. 도리어 유색인종 화장실 때문에 문제를 겪었던 쪽은 메리 잭슨이었다. 하지만 메리 잭슨에게는 자신을 위해 대신 싸워주는 영화 속의 해리슨 같은 “흑인 여성을 구해주는 백인 남성”은 없었고, 그저 부서를 옮기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러나 영화 <히든 피겨스>는 백인 남성인 해리슨이 커피포트에 붙은 ‘유색인종’이라는 꼬리표를 떼거나 화장실에 붙어 있는 ‘유색인종 화장실’이라는 팻말을 망치로 때려 부수게 만든다. 유색인종 화장실과 백인 화장실의 구분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 구분을 애초에 만들었던 백인, 그것도 백인 남성의 손으로 철폐되는 것이다. 해리슨은 백인 남성과 여성 그리고 많은 흑인 여성이 보는 앞에서 “나사에서 모든 사람의 오줌 색깔은 같다(Here at NASA we all pee the same color)”라는 명대사를 읊기까지 한다. 그는 유색인종 여자 화장실이라는 팻말을 부수며 그동안의 암묵적 동조를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흑인 여성의 구원자가 되어버린다. 여성인 동시에 흑인이었기 때문에 캐서린에게 부당하게 부과되었던 800m라는 장애물은 해리슨이 선사하는 클라이맥스를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동시에 화장실 인종 구분의 폐지는 당연히 철폐되어야 했을 악습이 아니라, 캐서린의 능력을 높이 산 해리슨에 의해 하사된 포상이 되어버린다.


  <히든 피겨스>의 마지막 부분에서 캐서린과 도로시, 그리고 메리는 불가능하다고만 여겨졌던 각자의 꿈을 NASA 안에서 현실로 만드는 것에 성공한다. 그러나 이 매끈하고 완벽한 성공담에 어떤 위화감을 느꼈던 것은 ‘알 해리슨’이라는 캐릭터에 중심부 주체의 “투명한 주체로 자신을 재현하고자 하는 욕망”이 투영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주인공인 캐서린은 1초에 24,000개의 숫자를 처리하는 ‘괴물’ IBM보다 소수점에서 더 정확한 계산을 하는, 즉 중심부의 재현체계가 가진 기준을 완벽하게 능가하는 것으로 자기 자신을 대변했기 때문이다. 스피박은 부바네스와리 바두리라는 열일곱살 가량의 소녀의 죽음이 오해되는 방식 때문에 서발턴은 말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실 바두리가 부유한 계층에 속했던 것과는 관 없이 스피박에게 서발턴이었던 것처럼, 캐서린에게도 주류의 담론으로는 포착될 수 없었던 ‘말’이 존재했을 것이다. 하지만 <히든 피겨스>에서 캐서린의 ‘서발터니티’는 해리슨으로 대변되는 중심부의 재현체계 속에서 말끔하게 소거된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억압의 구조를 파헤치기보다는 차라리 복무해서 자신을 증명하는 것을 택하기 때문이다. <히든 피겨스>는 여전히 장점이 더 많은 소위 ‘잘 만든’ 영화이지만, 백인 남성에 의한 한 편의 거대하고 성공적인 복화술이라는 의심이 쉽게 해소되지는 않는다.


* 필자소개

      학부에서 예술학을 전공하면서, 조형예술을 기반으로 다양한 문화예술 현상을 감상하고 분석하는 법을 배웠다. 동일 전공으로 석사에 진학하여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 관심 분야는 페미니즘, 그리고 미디어아트를 비롯한 현대미술이다.




ⓒ 웹진 <제3시대>

  1. 차크라보르티 스피박(외), 태혜숙(역),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그린비, 2013, pp.42-139.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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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장된 불쾌함: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와 <킹스맨: 골든 서클>



조은채*

 

※ 영화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와 <킹스맨: 골든 서클>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이하 <시크릿 에이전트>)의 속편인 <킹스맨: 골든 서클>(이하 <골든 서클>)은 개봉을 앞두고 불거졌던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예상되었던 대로 흥행하고 있다. 전작인 <시크릿 에이전트>가 그랬듯이, <골든 서클> 역시 여러 모로 준수한 오락영화이다. 무엇보다도 141분의 상영시간이 큰 지루함 없이 흘러간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시크릿 에이전트>가 가지고 있었던 가장 큰 매력 포인트인 ‘신선함’은 <골든 서클>에서는 더는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그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것처럼 느껴진다. <시크릿 에이전트>에서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Manners Maketh Man)”는 베테랑 요원인 해리 하트(콜린 퍼스)의 신조 아래, 동네 ‘양아치’였던 주인공 에그시(태런 에저튼)는 세계를 구한 국제 비밀정보기구 요원이자 최고의 ‘젠틀맨’으로 거듭난다. 교육과 훈련을 바탕으로 습득한 에그시의 ‘매너’는 열두시가 지나면 사라져버리는 요정의 마법 따위가 아니기 때문에, 에그시는 유리구두보다 단단하고 안정적인 옥스포드화를 신고 새로운 세계에 성공적으로 입성한다. 관객의 예상을 조금씩 비틀어 전개되는 스토리, 기발하면서도 현란한 액션, 매력적이지만 구구절절하지 않은 다양한 캐릭터는 영화의 신선함을 더욱 부각시킨다.


  하지만 <시크릿 에이전트>의 마지막 몇 분은 산뜻하게 마무리될 수 있었던 에그시의 신데렐라 스토리를 돌연 불쾌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썩 나쁘지도 않았다고 생각했던 <시크릿 에이전트>의 여성관에 대한 평가는 갑자기 곤두박질 친다. 틸디 공주는 에그시에게 “세상을 구하면 뒤(asshole)로” 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고, 이후 정말로 세상을 구한 에그시는 약속을 이행 받기 위해 달려간다. 영화는 에그시가 틸디라는 전리품을 차지하는 과정의 바로 그 직전까지를 보여준다. 카메라가 누워있는 틸디 공주의 몸을 ‘전형적인’ 구도로 훑고, 종래에는 그녀의 벗은 엉덩이만이 스크린을 꽉 채우던 순간의 당혹과 불쾌함은 여전히 생생하다. 이처럼 <시크릿 에이전트>의 불쾌함은 마지막 몇 분에 응축되어 있었다. 영화관을 나선 뒤에야 불편했어야만 했을 장면과 설정이 머릿속에서 플래시백처럼 재생되었다. 하지만 영화가 지닌 신선함이라는 마법 때문인지 영화를 보는 중에는 마지막 장면을 제외하고는 크게 거슬리지 않았었다는 사실에 조금의 가책을 느끼기도 했다.


  <골든 서클>은 <시크릿 에이전트>보다 불리한 조건에서 시작한다. 이미 한번 시작한 이야기를 반복해야 하지만, 여전히 새로워야 하기 때문이다. <시크릿 에이전트>에는 뒷골목 양아치에서 영국 최고의 젠틀맨이 되는 에그시의 신데렐라 서사가 있었다. 그 시작과 끝이 대단히 분명한 이 고전적인 이야기는 분명 전형적이지만 그래서 더 효과적이고 흥미로운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이미 에그시가 젠틀맨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이 서사를 재활용할 수 없게 된 <골든 서클>은 전작이 구축해둔 세계관을 철저하게 부수는 것부터 시작한다. 메인 빌런 포피(줄리언 무어)를 통해 킹스맨 본부는 물론이고 거의 모든 인원을 몰살시키면서까지 말이다. 하지만 전작의 신데렐라 서사만큼이나 효과적인 메인 스토리를 찾지 못한 탓인지, <골든 서클>은 <시크릿 에이전트>보다 자주, 그리고 더 많이 방향을 헤맨다.


  <시크릿 에이전트>에서는 그나마 마지막 장면에 응축되어 있었던 눈살 찌푸려지는 여성관은 <골든 서클>에서는 그 범위가 영화 전체로 확장되고, 때로는 지나치게 반복된다. 여성 캐릭터의 등장도 활약도 대폭 줄어든 <골든 서클>에서 가장 중책을 맡고 화면에 자주 얼굴을 비추는 것은 악당 포피이다. 거대 마약상인 포피는 마약을 합법화라는 조건으로 세계 정부와 거래를 한다. 포피가 쥐고 있는 것은 한 번이라도 마약을 했던 모든 사람의 목숨이다. 전 세계의 마약에는 이미 포피가 고의로 넣은 바이러스가 포함되어 있고, 해독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오로지 포피 뿐이기 때문이다. 포피는 환상 속의 놀이공원 같은 ‘포피랜드’에서 신입 부하에게 상냥한 표정과 다정한 말씨로 동료를 갈아 인육으로 만들 것을 부탁하기도 한다. 여기까지 생각하면 포피는 참 독특하고도 대단한 악당이다. 그러나 영화가 끝에 다다를수록, 진정한 흑막은 포피를 역이용하고자 했던 미국의 ‘남성’ 대통령이나 알고 보니 스파이였던 스테이츠맨의 ‘남성’ 요원 ‘위스키’에 가깝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포피는 100여분이 넘게 열심히 최고의 악당을 연기하지만, 결국 임팩트 없는 죽음과 함께 퇴장 당한다. 포피는 <골든 서클>의 메인 빌런이라고 소개되지만, <골든 서클>의 클라이맥스는 포피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스토리 상 절정에 해당하는 장면은 상당 부분 남성 캐릭터들에게만 할당되어 있기 때문이다. 포피에게는 메인 빌런이라는 타이틀과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적절히 활용되지 못하는 설정이라는 껍데기만이 주어진다. 아름다운 ‘포피랜드’가 포피 외에는 아무런 정서적 상호작용 없이, 포피와 로봇만으로 굴러가는 껍데기 같은 허상인 것처럼 말이다.


  포피랜드가 포피에 대한 거대한 메타포라고 해석하고 끝낼 수 있다면 좋았을 것이다. 예고되었던 것보다 심심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포피만의 캐릭터성이라고 좋게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골든 서클>에 나오는 모든 여성 캐릭터가 ‘포피랜드’ 같았다는 사실이다. 겉보기에는 매력적인 설정을 부여받았지만 실속 있는 역할이나 장면은 주어지지 않았고, 그저 껍데기뿐이었다. 더 나아가, 포피랜드에 구현되어 있던 ‘여성성’이 구시대적이고 보수적이었던 것처럼, <골든 서클>이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 역시 마찬가지였다. 포피를 제외한 <골든 서클>의 주요 여성 캐릭터는 오로지 두 가지 유형으로만 등장한다. 여성이라는 점이 강조되는 캐릭터(틸디 공주, 클라라)는 남성 캐릭터의 ‘여자’친구라는 점만이 두드러졌고, 당연한 순서인 것처럼 성적 대상화의 대상으로만 소비된다. 반면, 여성성이 강조되지 않는 캐릭터(진저, 록시)는 아무런 활약도 존재감도 없이 스크린에서 사라져버렸다. 예를 들어, 비록 마지막에 성적 대상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교본이 될 만한 장면을 남기기는 했지만, 악당 발렌타인에게 당당하게 맞서다가 감옥에 갇혔던 <시크릿 에이전트>의 틸디 공주는, <골든 서클>에서는 에그시 때문에 마약에 손을 댔다가 구출 당하는 여자친구로만 남을 뿐이다. <시크릿 에이전트>에서 에그시보다 뛰어난 기량을 보였던, 그리고 아마 최초의 여성 킹스맨 요원일 록시는 영화 시작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허무하게 죽으면서 영화의 서사에서 완전히 사라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폭력적으로 소비되고 있는 것은 찰리의 애인이었던 ‘클라라’이다. 찰리는 <시크릿 에이전트>에서 유력한 킹스맨 후보였지만 탈락한다. 평민 에그시에 밀려 떨어진 것이 참을 수 없었던 ‘귀족’ 찰리는, 포피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그의 부하가 된다. 클라라는 찰리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심지어 포피의 정체에 대해서도 알고 있지만, 놀랄 만큼 메인 스토리에서 비켜나 있다. 클라라에게는 그저 찰리’의’ 전 ’여자’친구라는 정체성만이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클라라는 문제의 ‘추적기 장면’에서 완전히 도구화된다. 찰리를 통해 포피의 소재를 알아내기 위해서, 에그시는 찰리와 연락을 주고받는 클라라에게 추적기를 달아야만 하는 상황에 부닥쳐있다. 하지만 이 추적기는 대단히 특이하게도 콧구멍이나 질과 같은 점막이 있는 곳에 삽입되어야만 작동할 수 있다. 에그시는 클라라의 콧구멍에 추적기를 넣을 길이 요원해 보였는지 그녀의 성기에 이 추적기를 넣기로 한다. <시크릿 에이전트>에서 발렌타인이 와인 안에 추적 물질을 넣어 상대에게 건넸던 것과 비교하면 일종의 기술 퇴행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무척이나 미심쩍은 이 추적기가 겨냥하고 있는 대상의 성별 역시 무척 제한적이다. 남성에게는 어떻게 사용하겠다는 걸까? 그때는 무리해서라도 콧구멍이나 항문? 아니, 애초에 남성이 대상이었다면 이런 방식으로만 작동하는 추적기가 영화에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추적기의 존재 자체는 처음부터 끝까지 여성의 몸을 도구화하기 위한 아주 질이 나쁜 농담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클라라는 이 불쾌한 장면을 구현해내기 위해 만들어낸 캐릭터처럼 보인다. 불필요할 정도로 포르노와 유사한 방식으로 클라라의 몸을 훑는 카메라보다도 더 끔찍했던 것은, 추적기가 들어간 클라라의 질 안의 모습까지도 적나라하게 연출되었다는 사실이다. 스크린이 틸디 공주의 엉덩이만으로 채워졌던 <시크릿 에이전트>에서 한 발 더 나가, <골든 서클>은 여성의 질 내벽으로 스크린을 꽉 채운다. 클라라의 몸뿐만 아니라 클라라라는 인물 자체는 완벽하게 ‘객체’가 된다. 그리고 이 불쾌한 장면을 위해 꽤 긴 시간이 할애되어 있다.


  <시크릿 에이전트>의 개봉 이후, 많은 페미니스트 비평가는 이 영화의 마지막 몇 분에 대해 비판했다. 하지만 감독인 매튜 본은 이들을 블러디 페미니스트로 일축하고 전혀 개선의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시크릿 에이전트>에서는 그래도 그나마 마지막 몇 분으로 응축되어 있었던 불쾌함이 <골든 서클>에서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늘어났으며, 오히려 강도가 높아지기도 했다. 이로써 <골든 서클>은 나쁘지 않다고 말할 때조차 가책을 느끼게 되는 꺼림칙한 영화가 되어버렸다.


* 필자소개

      학부에서 예술학을 전공하면서, 조형예술을 기반으로 다양한 문화예술 현상을 감상하고 분석하는 법을 배웠다. 동일 전공으로 석사에 진학하여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 관심 분야는 페미니즘, 그리고 미디어아트를 비롯한 현대미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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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라이팅: 성별화된 세뇌(1)





조은채*

 


       잉그리드 버그만 주연의 영화 <가스등(Gaslight)>(1944)은 『가스등 이펙트』의 저자 로빈 스턴(Robin Stern)에 의해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라고 명명된 정서적 학대의 양상을 면면이 보여준다. 스턴에 따르면, 가스라이팅은 “상대방을 조종하려는 가해자(gaslighter)”와 “상대방이 자신의 현실감을 좌우하도록 허용하는 피해자(gaslightee)” 사이에서 발생한다. 가해자의 반복된 상황 조작과 거짓말에 노출된 피해자는 자기 자신의 현실감각, 판단력, 기억력에 의심을 품게 된다. 피해자가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약해질수록 가해자의 영향력은 강화되며, 종국에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자기 자신에 대한 지배권까지 내어주게 된다. <가스등>의 주인공인 폴라(잉그리드 버그만)가 남편에게 결혼 생활 내내 당하는 것이 바로 이 가스라이팅이다. 

      유명한 오페라 가수였던 이모가 살해된 후 모든 유산을 상속받은 폴라(잉그리드 버그만)에게 어느 날 그레고리라는 남자가 접근한다. 그레고리를 잘 모르면서도 깊이 사랑하게 된 폴라는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물려받은 런던의 이모 집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 생활은 시작부터 삐걱거린다. 그레고리가 폴라를 정신병자로 몰아가기 때문이다. 그레고리는 폴라가 자신의 말과 행동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며,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고 듣는다고 주장한다. 폴라가 병에 걸려 건강하지 못한 데다가 거의 매번 소지품을 잃어버린다는 이유로 외출을 금지하기도 한다. 폴라가 만날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남편인 그레고리와 그가 고용한 하녀 두 명뿐인데, 그 두 명 역시 폴라에게는 적절한 대화 상대가 될 수 없다. 한 명은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 일상적인 대화조차 어렵고, 다른 한 명은 폴라에게 정신병이 있다는 그레고리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그녀를 환자 취급하기 때문이다. 폴라는 그레고리가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는, 다른 사람과의 소통이 원천적으로 차단된 환경 속에서 그의 걱정을 빙자한 교묘한 거짓말과 속임수에 무방비하게 노출된다.


"당신은 잘 잃어버리잖아."

"제가요. 몰랐는데요.” 


“건망증에 의심까지 생겨?” 

 “그럴 리가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정말로?” 

 “모르겠어요.” 


 “당신이 아프거나 환각을 보면 슬퍼.” 

 “………”


   폴라는 그레고리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기 어렵지만, 마땅한 증거도 증인도 없다. 처음에는 그의 말에 반문하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하지만 점차 폴라는 자신의 판단력을 믿지 못하게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고 그레고리의 가스라이팅이 점점 그 강도와 빈도가 높아질수록, 폴라는 “갑자기 내 기억력이 의심스러워져요.”, “나도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하거나 혹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레고리가 의도했던 것처럼 자신의 판단력과 기억력을 믿을 수 없게 된 폴라는 완전히 무기력한 상태가 된다.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조차 두려워하게 된다. 점차 폴라는 그레고리 없이는 살 수 없는, 그레고리의 기준과 명령이 있어야만 안심하고 행동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레고리의 “정서적 학대”, 즉 가스라이팅이 성공한 것이다.

   폴라의 두려움과 자기 자신에 대한 불신이 극대화되는 것은 매일 밤 일어나는, 그녀 혼자만 듣고 보는 어떤 사건 때문이다. 매일 밤 그레고리가 일하기 위해 집 밖으로 나가고 나면, 갑자기 천장에서 정체 모를 발소리가 들려온다. 방 안의 가스등도 돌연 희미해진다. 그러나 폴라 말고는 누구도 목격하지 못한다. 둘 뿐인 하녀 중 하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고, 다른 하나는 늘 외출하기 때문이다. 그레고리는 폴라의 목격담이 완전한 허구, 즉 폴라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상상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그레고리에 의해서 폴라의 경험은 그녀가 정신병을 앓고 있다는 징후이자 증거가 되어버린다.

   영화는 두 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 동안 그레고리가 얼마나 교묘하고 치밀하게 폴라를 조종하고자 하는지 면밀하게 보여준다. 어렴풋하게 암시만 되었던 그레고리의 동기가 명확하게 밝혀지는 것은 이미 영화가 후반부에 접어들고나서이다. 그레고리가 폴라에게 접근한 것은 폴라의 이모가 생전에 소유했던 “외국 왕실의 보석” 때문이다. 폴라가 매일 밤 들었던 천장 위의 발소리와 희미해지던 가스등의 불빛은 폴라의 망상이 아니었다. 그레고리가 다락방의 불을 환히 밝힌 채로 폴라 이모의 유품을 하나 하나 샅샅이 뒤졌기 때문이다. 그는 속편히 보석을 차지하기 위해서 방해가 될 뿐인 폴라를 정신병원으로 보낼 계획까지 세워둔 상태였다. 그가 결혼 생활 동안 폴라에게 저질렀던 수많은 정신적 학대는 그녀를 정신병원에 보내기 위한 과정이었다. 전부터 그들 부부, 정확히 말하면 그레고리를 의심스럽게 보고 있던 런던 경시청 소속의 어떤 경위의 도움과 증언으로 폴라는 그레고리의 모든 비밀을 알게 된다. 경시청에 그레고리를 넘긴 폴라는 자신이 조금도 ‘미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의 가스라이팅으로부터 벗어난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가스라이팅은 현실에서도 비슷한 양상으로 자행된다. 그레고리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스스로 불신하게 만드는 갖가지 방법을 영화 내내 직접 시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레고리에게 “외국 왕실의 보석”을 훔치겠다는 비교적 뚜렷한 목적이 있었던 것과는 달리, 스턴은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면서도 가스라이팅을 하는 가해자들도 있다고 말한다. 특별한 이유나 의도 없이도 상대에게 가스라이팅을 하는 이들도 다수 존재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관계에서 이 가스라이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위계이다. 스턴이 예시로 드는 상사와 부하 사이의 혹은 부모와 어린 자식 사이의 가스라이팅은 이 위계를 비교적 뚜렷하게 보여준다. 상사와 부하 사이에 존재하는 직급, 경험, 숙련도 등의 차이와 부모와 어린 자식 사이에 존재하는 연령, 경제력 등의 차이. 이 차이를 기준으로 권력의 위계 구조가 형성되고, 한쪽이 다른 쪽의 영향력 행사에 필연적으로 취약해진다.

   스턴은 가스라이팅이 “성별에 관계없이 모든 관계”, 즉 연인, 친구, 가족, 상사와 부하, 동료들과의 다양한 관계에서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미국에서 20년간 심리치료사로 활동한 그의 경험에 따르면 “가해자”는 남성인 경우가 많은 반면 “피해자”는 여성인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형태가 가장 빈번했기 때문인지, 스턴의 저서 『가스등 이펙트』는 “남녀 관계”에서 발생하는 가스라이팅 사례로 빼곡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예시는 여성에게는 피해자, 그리고 남성에게는 가해자라는 역할이 처음부터 성별에 따라 정해져 있었다는 증거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스턴은 왜 대부분의 가스라이팅이 남성에 의해 여성에게 가해지는 형태로 나타나는지에 대해 정면으로 맞부딪칠 생각은 없어 보인다.

   대신에 스턴은 가스라이팅을 “신종 전염병”이라고 명명하는 장에서 부분적인 해명을 시도한다. 사회의 변화에 따른 결과인 세 가지 요인이 이 새로운 질병을 창궐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는 “성 역할의 근본적인 변화와 그에 대한 반발”, “개인주의 만연과 개인의 고립”, “사회의 압력과 세뇌”을 그 원인으로 제시한다. 스턴에 따르면, 1940년대부터 시작된 “성 역할의 변화”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일종의 “위협”이었다. 이 위협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특정 남성”들은 “강하고 똑똑한 여성”을 “통제”하려고 했고, “특정 여성”들은 “자신의 정체성”까지 남성들에게 “의지”함으로써 “자발적으로” 그들의 통제에 “동조”했다. 스턴은 남성에 의해 여성에게 가해지는 가스라이팅이 사회의 변화에 역행하는 “특정”한 남성과 여성 사이의 합작인 것처럼 진단한다. 이 특정한 남성과 여성을 “새로운 세대”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새로운 세대” 내의 “신종 전염병”이라는 말은 가스라이팅을 “특정”한 남성과 “특정”한 여성, 즉 “특정”집단 내의 문제로 축소해버린다. 아득히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여성과 남성 사이의 권력 차이, 그리고 그 차이에서 비롯된 착취와 폭력은 담론의 장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스턴은 여성에게 가해져 왔던 폭력과 착취를 가스라이팅과 연결짓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그는 젠더의 위계에서 오는 차이가 가스라이팅을 성별화했다는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는 셈이다. 성 역할에 있어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시점에서도 가스라이팅이 드물지 않게 자행되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기도 하다. 실제로 <가스등>의 폴라 역시 전통적인 성 역할을 벗어나기 위한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았으며, 그레고리의 가부장적 남성성에 조금의 위협을 끼치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고 있던 젠더의 위계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지배 혹은 영향력에 더 취약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레고리가 폴라에게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두 사람이 지닌 권력 차이 때문이고, 그 권력의 차이는 결국 그들의 성별에서 기인한다.

   가스라이팅이 애초에 성별화-즉 남성에게는 가해로, 그러나 여성에게는 피해로-되었던 것은 유구하게 존재해왔던 여성혐오(misogyny) 덕분일 것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남성과 여성 사이의 존재해왔던 위계는 한 성별(주로 남성)이 다른 성별(주로 여성)을 멸시하고, 혐오하며, 성애화하고, 이 혐오를 다양한 방식으로 재생산하는 것까지를 가능하게 했다. 여성을 그저 사유재산의 일부로 여기거나, 마녀로 몰아가 불에 태웠던 시대가 존재했던 것처럼, 이 혐오는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는 대단히 자연스러운 현상이기까지 했다. 멸시하고 업신여기는 대상을 내 뜻대로 조종하기 위해 상황을 조작하거나 거짓말을 반복하는 것은 어쩌면 아주 쉬운 일이다. 성별화된 가스라이팅은 ‘신종’ 전염병이 아니다. 한쪽 성별이 다른 성별을 아주 용이하게 통제할 수 있는 무기로써, 젠더의 위계에 의해 생겨난 아주 오래된 발명품이다. 동시에 수많은 형태와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는 여성혐오의 양상 중 하나이기도 하다. 만약에 이 성별화된 가스라이팅이 전염병이라면, 마을을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가는 것으로는 끝이 나지 않을 것이다. 전염병의 원인이 되는 바이러스는 아직도 철폐되지 않은 젠더의 위계, 그 간격 속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혐오라는 이름으로 배양되고 있기 때문이다.


* 필자소개

      학부에서 예술학을 전공하면서, 조형예술을 기반으로 다양한 문화예술 현상을 감상하고 분석하는 법을 배웠다. 동일 전공으로 석사에 진학하여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 관심 분야는 페미니즘, 그리고 미디어아트를 비롯한 현대미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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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함과 지능의 상관관계





조은채*

 


       어두운 밤길을 혼자 걷는다고 상상해 보세요. 

      친구가 듣는 여성학 수업에서 저 말과 동시에 강의실 안의 분위기가 싸해졌다고 한다. 몇몇은 대놓고 한숨을 쉬었고, 나머지는 표는 내지 않았지만 실망한 기색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조차도 그 말의 진부함에 기대가 한풀 꺾이는 느낌이었다고, 친구가 고백했다. 잠깐 말문이 막혔다. 거의 클리셰가 되어버린 그 말이 이제 진부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을 쉽사리 부정할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반발심도 들었다. 저 말에 진부함을 느끼고 다들 실망해버릴 거라면, 도대체 여성학 수업에 얼마나 새로운 것을 기대했다는 말인가? 물론, 오랫동안 반복해서 회자된 예시가 진부하게 느껴질 수는 있다. 하지만 성별에 따라 밤길을 걸을 때 느끼는 두려움에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차이가 이미 너무 익숙하고 진부해졌지만 조금도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사실은, 전혀 진부하지 않았다. 조금 더 세련된 방식으로 페미니즘에 관해서 설명할 수는 없었겠느냐고 순간이나마 느꼈던 아쉬움은 곧 희미해졌다.

        물론 저 말에 진부함을 느꼈을 모든 사람을 한 데 묶어 비난하고자 하는 생각은 없다. 사실 진부함을 표현한 것 정도는 여성학 수업에서는 꽤나 준수한 반응일지도 모른다는 것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다. 멀쩡해 보였던, 때로는 심지어 아주 배울만하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었던 사람들까지도 갖가지 헛소리를 앞다투어 정성스럽게 늘어놓는 마당에, 페미니즘이 진부하다고 실망하거나 지적하는 것 정도는 어느 정도 수용 가능한 범위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그들이 그나마 ‘들어줄 의지’가 있는, 그리고 ‘배울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진부함에 대한 그들의 공격은 이쪽에서 개선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다른 페미니즘 수업에서 얼마나 많은 한심한 반응들이 있었는지, 아주 잠깐의 시간만 투자해도 수많은 사례를 떠올릴 수 있어서 더욱 그랬다. 친구의 수업에서는 적어도, 페미니즘 수업에서 왜 여성의 입장을 위주로 다루냐고 반발하거나, 교수가 ‘심각한’ 페미니스트라고 불평을 늘어놓는 학생은 없지 않았는가. 그나마 이해할 수 있는 이유로 페미니즘에 공감하지 못하는 그들을 설득하는 것이 일차적인 과제가 아닐까? 들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잡을 수 없는 사례를 제시한 것은 이쪽의 실책이 아닐까? 덜 진부한, 그러니까 더 세련되고 쿨한 방식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여혐은 지능의 문제”라는 말이 있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소위 ‘과격’하다고 불리곤 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자주 사용하던 말 중 하나이다. 친구는 내게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일명 높은 지능의 조건을 완비한 주변인들이, 실제로 페미니즘에 관해서 자기보다도 더 많은 학술서나 논문을 읽는 사람들이, 페미니즘 안에 새로운 것이 없었다고 했다고 한다. 여성혐오를 하는 사람들이 바뀌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지능 문제도 아니고, 그들이 페미니즘을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도 아닐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페미니즘 안에서 그들을 설득할 만한 정밀하고 객관적인 논리나, 과학적인 방법론, 혹은 합리적인 사례들이 없기 때문이 아닌지, 페미니스트인 친구는 조심스럽게 반성했다. 그들을 단순히 ‘지능’이 떨어지는 무리로 매도하는 것은 일시의 후련함 말고는 아무런 이득도 없다고 판단하기도 했다. 친구는 페미니즘이 어떠한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수용될 수 없는 이유를, 진부함과 같은 페미니즘 내부의 문제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분명, 페미니즘은 다양한 방식으로 갖가지 영역에서 작동해야만 하고, 때와 상황에 맞춰 그 형상을 바꿔야만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예시를 마냥 진부한 것으로만 느끼고 불평하는 사람들을 과연 설득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그리고 그들을 설득하지 못하는 이유를 페미니즘 내부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것은 영 타당해 보이지도 않는다. 처음에는 혼자 걷는 밤길을 떠올려 보라는 저 진술이 진부하게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거기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그 진부함에 대해 불평만 하는 사람들이, 과연 설득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사람들일까? 세상의 절반이 매일 마주해야 하는 문제를 그렇게 간단하게 외면할 수 있는, 그래서 그 문제에 조금도 공감할 수 없는 사람들은, 공감 능력이나 감수성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총체적인 의미에서 지능이 떨어진다고 확장해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만약 여성혐오가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면, 의도적인 태만을 폐기하든지 감수성을 키우든지 해서 이를 반증해야 하는 것은, 이쪽이 아니라 그쪽일 것이다. 누군가는 매일 직면하는 문제에서 완전하게 격리된, 안락한 곳에 앉아 새로움이나 세련됨의 잣대만을 들이대는 사람들을 합리적이라고, 혹은 지능이 높다고 속 편히 평가할 수는 없다. IQ에서 EQ, 그리고 SQ까지 여러 방면에서 사람의 지능을 평가하는 시대가 아닌가. 그들이 페미니즘에서 고루함이나 진부함의 흔적밖에 찾아낼 수 없었다면, 그것은 사실 페미니즘의 문제라기보다는 총체적인 의미에서, 그들의 지능 문제라고 결론짓고 싶다.

       페미니즘이 진부하고 그 어떠한 새로운 통찰도 주지 못한다고 비난하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사실 하나이다. 그들은 페미니즘의 올바른 정의나 가야 할 길을 모색하는 것에 큰 관심이 없다. 그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의식하든 못 하든 감각은 하고 있으며, 이를 결코 포기할 마음도 없다. 더 반박의 여지가 없는 증거를 제시하고, 더 밀도 높은 주장을 하고, 대단히 효과적인 전략을 선택한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페미니즘이 덜 진부한 것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온갖 수사 아래 감춰진 그들의 본심은 페미니즘이라는 이 지긋지긋한 주제에 대해 이제 영원히 입을 다물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의지가 없는 이들을 설득할 수 없는 이유를 페미니즘 내부의 문제로 환원시키거나, 페미니즘의 한계라고 인식할 필요는 없다.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페미니즘이 진부한 것에서 탈피해야 할 이유도 없다. 페미니즘은 단 한 순간도 진부했던 적이 없다. 그저 사회에 만연했던 가부장적 감수성이 이를 진부하다고 규정했던 것뿐이고, 그래서 그렇게 믿어져 왔던 것일 뿐이다. 이제 좋게 설득할 때는 지났다. 차라리 문제를 그들의 지능으로 환원시켜, 그들 스스로 반증과 증명의 굴레에 갇히게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 필자소개

      학부에서 예술학을 전공하면서, 조형예술을 기반으로 다양한 문화예술 현상을 감상하고 분석하는 법을 배웠다. 동일 전공으로 석사에 진학하여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 관심 분야는 페미니즘과 미디어아트를 비롯한 현대미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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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화된 불평등과 대상화된 여성




조은채*

 


       남자 지인 중에 페미니즘 강연을 종종 들으러 다니고, 그 주제에 대해 나름 유의미한 대화를 나눈 적도 있었던 사람이 있었다. 그렇게 친하지는 않았지만 대개 친절한 편이었고, 딱히 나쁜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가 이전에 저질렀던 성폭력이 sns를 통해 폭로되고 고발되었을 때, 나는 놀라기는 했지만 경악하지는 않았다. 나에게 그런 행동을 직접 한 적은 없었지만, 그의 어떤 태도나 말에서 미묘하게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느끼던 의혹을 사소한 것으로, 혹은 괜한 것으로 치부해서 넘겨버렸다. 그가 나에게도, 그리고 대외적으로도 나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니,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오히려 좋은 사람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는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며 투쟁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노동자의 권익, 성 소수자의 인권, 그리고 옳다고 여겨지는 거의 모든 것을 위해 싸웠으면서도, 그에게 여성은 사실 자신과 동등한 주체는 아니었던 것 같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일이라는 소리에 페미니즘에 관심은 가졌지만, 자기 주변의 여성들이 자신과 동등한 인간이라는 당연한 진리는 인식하지 못했던, 흔한 여성혐오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가해 사실이 밝혀졌을 때 내가 엄청나게는 충격받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지금까지 이와 비슷한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기 때문이었다. 주위에서 순수하고 착한 사람이라고 통하던 남자 지인은, 같은 무리 여학생들을 ‘부위 별로’ 등급을 매겼다. 여성 인권에 관심이 있다고 누누이 밝히던 동료는 무리 내의 페미니스트를 뒤에서 성적으로 희화화하고 조롱했다. 앞서 언급한 ‘그’에게서 몇 가지 조건을 더하거나 빼고 이름만 바꾸면 똑같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말이 통하는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음에도, 가끔 그 생각이 내 착각이었나 싶은 질문을 던지는 남자 지인들도 많았다. 그리고 그 질문 안에 담겨 있는 여성혐오를 조금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그들의 태도 때문에 더욱 답답해지곤 했다. 다른 문제에서는 대단히 이성적이고 중립적이었던 친구들이 남성 장애인의 성욕 해결을 이유로 들며 성매매 합법화를 역설했다. 하지만 그들의 논지에서 여성 장애인이나 그들의 성욕은 등장조차 하지 않았고, 남성의 성욕은 누군가 반드시 해결해주어야만 하는 불가피하지만 절대적인 것으로 치환되었다. 왜 남성의 성욕에만 애정 없이도 그것을 해소해줄 대상이 필요한가? 왜 그 해소 방법을 여성과의 성관계로 당연하다는 듯이 한정하는가? 그들은 남성 장애인이라는 특수한 경우를 예시로 들며 성매매를 합법화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 주장은 얼마든지 그 적용 범위가 확대될 수 있었다. 기러기 아빠라서, 여자친구는 혼후관계주의자라서. 세상에는 어떤 이유로든 성관계가 불가능한 사람들이 있을 테고, 그들에게는 비슷한 논리로 성매매를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 역시 그 논리대로라면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었다. 결국, 그 주장은 여성을 철저하게 타자화시켜, 남성의 성욕을 위해서는 보급되거나 구입될 수도 있는 존재로 만들고 있었다.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성적 대상화된 객체로 인식한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여성은 사회에서 사람임에 앞서 여자로 규정된다. 여성이 등장하는 기사에는 ‘여(女)’ 자가 빠지지를 않는다. 여대생, 여교사, 여배우, 여교수. 며칠 전에 본 기사의 제목은 ‘IS 대원 100명을 사살해서 현상금 11억이 걸린 23살 여대생’이었다. ISIS 무장세력때문에 고통받는 시리아 난민 소식을 접한 뒤, 대학을 그만두고 시리아의 쿠르드족 군대에 자원입대한 여성의 이야기였다. 이미 대학생이라는 신분을 버린 지 오래이며 최전선에서 저격수로 활동하고 있음에도, 기사 속의 주인공은 군인이기 이전에, ‘어린 여대생’으로 먼저 이미지화되어 있었다. 반면, 남성은 사회 안에서 성별로 규정되기보다는 보편적이고 정규적인 ‘인간’으로 등장한다. 우리는 ‘청년’ 혹은 ‘청소년’, ‘교수’, ‘의사’라는 말에 자연스럽게 남성 주체를 먼저 떠올린다. 신문 기사에서도 굳이 ‘남의사’, ‘남교수’, ‘남기사’라는 단어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남’은 ‘여’와는 달리 불필요한 수식어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청소년’이라는 말에 남성 청소년만 연상하기 때문에 ‘청소녀’라는 괴상한 명칭이 실제로 사용되기까지 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인간의 디폴트 값은 남성인 것이다. 결국 어느 한쪽은 남자이기 이전에 인간이 될 수 있지만, 다른 한쪽은 인간이기 이전에 여자가 되어버린다. 이 연장 선상에서 여성이라는 집단의 이미지는 종종 과잉되게 성애화된다. 그리고 남성 집단이 이 이미지에 기반을 두고 여성을 인식하는 것이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일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뒤에 앉은 남자의 전화 통화를 듣게 된 적이 있다. 그는 꽤 큰 목소리로 이름 모를 형님에게 오늘 ‘연애’를 하러 가자고 설득하고 있었다. 가격도 괜찮고 ‘여배우’ 같은 애들도 널렸다며. 잘 말해두면 시간도 길게 할 수 있다며. 그는 아쉬워하며 전화를 끊었다. 형님이 오늘은 안된다고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또 다른 형님에게 ‘연애’를 하러 가자고, 자기가 오늘 다 알아봐 놓았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번 형님은 된다고 한 것인지 그가 신나서 계획을 읊었다. 절대 당사자 면전에 대고는 할 수 없는 모욕과 조롱이 양념처럼 곁들여졌지만, 그 남자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어 보였다. 통화 내용을 들을수록 그 남자가 말하는 ‘연애’가 성매수를 가리키는, 성매매 산업에서 흔히 쓰이곤 한다는 은어인 ‘연애’라는 것은 점점 명백해졌다.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통화 내용을 들어야만 했던 나는 문득, 그리고 아주 뜬금없이 남자는 만나는 모든 여자를 잠재적 연애대상으로 본다는, 제법 자주 쓰이는 농담이 떠올랐다. 물론 이 농담에서 말하는 연애가 그 남자가 통화로 형님들에게 같이 하자고 조르던 그 ‘연애’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런 ‘연애’를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할 수 있는 남자가 하는 또 다른 연애는, 과연 그 ‘연애’와 얼마나 다를 것인가? 여성을 구입할 수 있는 성애화된 객체로 여기는데 이미 익숙한 사회에서, 그와 같은 여성혐오자들이 하는 또다른 연애는 ‘연애’가 아닌 연애라고 해서 무고(無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여성을 동등한 주체가 아닌 성적 대상화된 객체로 간주하는 것에 너무나도 익숙하다는 사실이 그가 발화한 말들로 선명하게 입증된 기분이었다. 친구였으면서 단체카톡방에서는 말로 온갖 성추행을 다 하고, 연인이었으면서도 헤어지자는 말에 폭력을 휘두르고, 자기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했으면서 성폭력을 저지르는 남자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도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전화 한 통만으로도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와 혐오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 증명되는, 그리고 그 증명이 공공장소에서 버젓이 그리고 별 거리낌 없이 일어나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피부로 와 닿았기 때문이다.


* 필자소개

      부에서 예술학을 전공하면서, 조형예술을 기반으로 다양한 문화예술 현상을 감상하고 분석하는 법을 배웠다. 동일 전공으로 석사에 진학하여 공부를 이어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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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안의 페미니즘 : 예민함과 자기검열



조은채*

 


       매주 집회에 나가면서 어떤 혐오 발언들은 나를 상처 입히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 혼자만 어떤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내 불편함은 구체적인 행동이 되기 전에 망설임으로 종결되곤 했다. 이제 더 이상은 예민하다거나 유난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집회 때 쏟아졌던 “미스박”, “강남 아줌마”, “아몰랑” 등 수많은 혐오 언어들을 보고도 별다른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나에게 집회에 참여하는 일은 어떤 의미에서는 일상에서 피하려고 노력해왔던 수많은 혐오와 정면에서 부딪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애써 외면한 채 거리에 나섰다.

        쏟아지고 있는 여성혐오 발언에 제동을 거는 것은 대통령 혹은 비선실세를 옹호하는 일이 아니다. 혐오 발언을 멈추자는 것은 그들에 대한 비판의 정도를 낮춰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여성혐오 발언을 반복하는 것은, 여성성 비하가 얼마나 효과적인지를 여실히 증명한다. 그 효과가 대단하다는 것은 사회에 여성혐오가 얼마나 만연하였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하지만 이러한 지적들은 모두 “해일이 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다.”는 말로 조롱당하고, 분열을 굳이 조장하는 불온한 움직임이라고 낙인 찍힌다. 이 낙인은 혐오 발언에 대한 자정의 목소리를 망설이게 한다. 더 거대하고 시급한 문제가 있는데 작은 소란을 크게 키우고 있는 걸까? 계속 입을 닫고 있었으니 이번까지만, 혹은 이번에도 참아야 하는 걸까? 자기검열에서 기인한 질문들이 끝없이 이어졌고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제대로 시작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자기검열만 거듭하다 포기해버린 경험은 이번뿐이 아니라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다.

      분열을 조장하지 말라는 말은 어디에나 있었다. 강남역 사건이 여성혐오 때문에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은 양성 갈등을 부추기는 행위로 치부되었다. 성희롱이 난무하던 단톡방을 고발한 피해자들은 동기들에게 그렇게까지 하고 싶으냐고 도리어 비난을 당했다. 문화예술계 성폭력에 대한 수많은 공개 폭로는 업계를 들쑤신 골칫거리가 되었다. 결국, 이 모든 사건들은 ‘예민한 여자’들 때문에 조장된 분열과 갈등으로 변모한다. 유난스러운 일부 여자들은 비난과 혐오의 대상이 되고, 바로 그런 여자들 때문에 중립적인 남성인 나조차 ‘너희들이 말하는’ 페미니즘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라는 훈계가 뒤따른다. 예민하거나 이기적인 여자, 혹은 혐오의 표적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검열의 끈을 더 조이거나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위험성을 감수하더라도 여성혐오를 멈추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면, 여러 번 순화된 언어를 써야만 했다. 최대한 남성 전체를 일반화하지 않는 것처럼 세심하게, 덜 과격하게 느껴지도록 중립적이고 온건한 어휘를 사용하면서. 상대가 예민하고 피해의식에 가득 찬 ‘그’ 페미니스트처럼 느껴지면, 남성들, 혹은 더는 페미니즘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다시는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사례를 들 때도 조심해야만 했다. 그들에게도 설득력 있게 다가갈 수 있는지를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최대한 객관적이고 공정해 보이는 예시를 골랐다. 자기검열의 기준은 내가 발화하는 어휘의 정치적 올바름이나 정확성이 아니었다. 그저 그들의 눈에서 얼마나 덜 거슬리는지, 그리고 들어보고자 하는 의사를 불러일으키는지였다. 일명 ‘받아들일 기분이 나는’ 페미니즘을 찾고 있었던 셈이다. 

        자기검열의 결과물이긴 했지만, 결국 지극히 남성의 눈을 기준으로 검열된 언어로 할 수 있는 말에는 한계가 있었다. 박탈당했던 여성의 권리에 관해 이야기하면서도 그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던 셈이니 당연한 수순이다.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그런 태도를 유지했던 것은 언젠가는 그들이 내 말을 듣고 생각을 바꿀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를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예민함’이라는 낙인을 더더욱 피하고 싶었다. 그 낙인이 찍히고 나면, 내가 말하는 모든 부당함이 그저 일부 여성 고유의 예민함의 발현인 것처럼 결론지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혹은 피해의식에 가득 차서 분열이나 갈등을 부추기는 일부 여성의 문제로 규정될까 봐 두렵기도 했다. 그 낙인은 결국 내 말들에서 아주 오랫동안 그 설득력을 앗아가 버릴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만큼 분열을 조장하지 말라는 말과 왜 이렇게 예민하냐는 말은 나를 통제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더는 그런 말들에 자신을 스스로 검열하지 않으려고 한다. 페미니즘이 향하는 곳은, 굳이 따지자면 분열이 아니라 균열이다. 유구하게 이어져 왔던 가부장적 질서에 균열을 만들고, 그 틈을 통해서 지워져 왔던 존재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제 분열을 조장하지 말라는 말이나 내 예민함을 비난하는 말들에 속지 않는다. 내가 내는 목소리가 분열이 아니라 균열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 균열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내게 낙인이 있든 없든, 자기들에게 불편한 목소리는 듣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 낙인 찍히는 것에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그저 타자였던 여성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그들에게는 성가실 예민함으로 불편한 목소리를 이어 나가야겠다고 생각할 뿐이다.


* 필자소개

      학부에서 예술학을 전공하면서, 조형예술을 기반으로 다양한 문화예술 현상을 감상하고 분석하는 법을 배웠다. 동일 전공으로 석사에 진학하여 공부를 이어갈 생각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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