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함과 지능의 상관관계





조은채*

 


       어두운 밤길을 혼자 걷는다고 상상해 보세요. 

      친구가 듣는 여성학 수업에서 저 말과 동시에 강의실 안의 분위기가 싸해졌다고 한다. 몇몇은 대놓고 한숨을 쉬었고, 나머지는 표는 내지 않았지만 실망한 기색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조차도 그 말의 진부함에 기대가 한풀 꺾이는 느낌이었다고, 친구가 고백했다. 잠깐 말문이 막혔다. 거의 클리셰가 되어버린 그 말이 이제 진부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을 쉽사리 부정할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반발심도 들었다. 저 말에 진부함을 느끼고 다들 실망해버릴 거라면, 도대체 여성학 수업에 얼마나 새로운 것을 기대했다는 말인가? 물론, 오랫동안 반복해서 회자된 예시가 진부하게 느껴질 수는 있다. 하지만 성별에 따라 밤길을 걸을 때 느끼는 두려움에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차이가 이미 너무 익숙하고 진부해졌지만 조금도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사실은, 전혀 진부하지 않았다. 조금 더 세련된 방식으로 페미니즘에 관해서 설명할 수는 없었겠느냐고 순간이나마 느꼈던 아쉬움은 곧 희미해졌다.

        물론 저 말에 진부함을 느꼈을 모든 사람을 한 데 묶어 비난하고자 하는 생각은 없다. 사실 진부함을 표현한 것 정도는 여성학 수업에서는 꽤나 준수한 반응일지도 모른다는 것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다. 멀쩡해 보였던, 때로는 심지어 아주 배울만하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었던 사람들까지도 갖가지 헛소리를 앞다투어 정성스럽게 늘어놓는 마당에, 페미니즘이 진부하다고 실망하거나 지적하는 것 정도는 어느 정도 수용 가능한 범위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그들이 그나마 ‘들어줄 의지’가 있는, 그리고 ‘배울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진부함에 대한 그들의 공격은 이쪽에서 개선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다른 페미니즘 수업에서 얼마나 많은 한심한 반응들이 있었는지, 아주 잠깐의 시간만 투자해도 수많은 사례를 떠올릴 수 있어서 더욱 그랬다. 친구의 수업에서는 적어도, 페미니즘 수업에서 왜 여성의 입장을 위주로 다루냐고 반발하거나, 교수가 ‘심각한’ 페미니스트라고 불평을 늘어놓는 학생은 없지 않았는가. 그나마 이해할 수 있는 이유로 페미니즘에 공감하지 못하는 그들을 설득하는 것이 일차적인 과제가 아닐까? 들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잡을 수 없는 사례를 제시한 것은 이쪽의 실책이 아닐까? 덜 진부한, 그러니까 더 세련되고 쿨한 방식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여혐은 지능의 문제”라는 말이 있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소위 ‘과격’하다고 불리곤 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자주 사용하던 말 중 하나이다. 친구는 내게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일명 높은 지능의 조건을 완비한 주변인들이, 실제로 페미니즘에 관해서 자기보다도 더 많은 학술서나 논문을 읽는 사람들이, 페미니즘 안에 새로운 것이 없었다고 했다고 한다. 여성혐오를 하는 사람들이 바뀌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지능 문제도 아니고, 그들이 페미니즘을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도 아닐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페미니즘 안에서 그들을 설득할 만한 정밀하고 객관적인 논리나, 과학적인 방법론, 혹은 합리적인 사례들이 없기 때문이 아닌지, 페미니스트인 친구는 조심스럽게 반성했다. 그들을 단순히 ‘지능’이 떨어지는 무리로 매도하는 것은 일시의 후련함 말고는 아무런 이득도 없다고 판단하기도 했다. 친구는 페미니즘이 어떠한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수용될 수 없는 이유를, 진부함과 같은 페미니즘 내부의 문제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분명, 페미니즘은 다양한 방식으로 갖가지 영역에서 작동해야만 하고, 때와 상황에 맞춰 그 형상을 바꿔야만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예시를 마냥 진부한 것으로만 느끼고 불평하는 사람들을 과연 설득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그리고 그들을 설득하지 못하는 이유를 페미니즘 내부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것은 영 타당해 보이지도 않는다. 처음에는 혼자 걷는 밤길을 떠올려 보라는 저 진술이 진부하게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거기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그 진부함에 대해 불평만 하는 사람들이, 과연 설득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사람들일까? 세상의 절반이 매일 마주해야 하는 문제를 그렇게 간단하게 외면할 수 있는, 그래서 그 문제에 조금도 공감할 수 없는 사람들은, 공감 능력이나 감수성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총체적인 의미에서 지능이 떨어진다고 확장해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만약 여성혐오가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면, 의도적인 태만을 폐기하든지 감수성을 키우든지 해서 이를 반증해야 하는 것은, 이쪽이 아니라 그쪽일 것이다. 누군가는 매일 직면하는 문제에서 완전하게 격리된, 안락한 곳에 앉아 새로움이나 세련됨의 잣대만을 들이대는 사람들을 합리적이라고, 혹은 지능이 높다고 속 편히 평가할 수는 없다. IQ에서 EQ, 그리고 SQ까지 여러 방면에서 사람의 지능을 평가하는 시대가 아닌가. 그들이 페미니즘에서 고루함이나 진부함의 흔적밖에 찾아낼 수 없었다면, 그것은 사실 페미니즘의 문제라기보다는 총체적인 의미에서, 그들의 지능 문제라고 결론짓고 싶다.

       페미니즘이 진부하고 그 어떠한 새로운 통찰도 주지 못한다고 비난하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사실 하나이다. 그들은 페미니즘의 올바른 정의나 가야 할 길을 모색하는 것에 큰 관심이 없다. 그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의식하든 못 하든 감각은 하고 있으며, 이를 결코 포기할 마음도 없다. 더 반박의 여지가 없는 증거를 제시하고, 더 밀도 높은 주장을 하고, 대단히 효과적인 전략을 선택한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페미니즘이 덜 진부한 것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온갖 수사 아래 감춰진 그들의 본심은 페미니즘이라는 이 지긋지긋한 주제에 대해 이제 영원히 입을 다물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의지가 없는 이들을 설득할 수 없는 이유를 페미니즘 내부의 문제로 환원시키거나, 페미니즘의 한계라고 인식할 필요는 없다.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페미니즘이 진부한 것에서 탈피해야 할 이유도 없다. 페미니즘은 단 한 순간도 진부했던 적이 없다. 그저 사회에 만연했던 가부장적 감수성이 이를 진부하다고 규정했던 것뿐이고, 그래서 그렇게 믿어져 왔던 것일 뿐이다. 이제 좋게 설득할 때는 지났다. 차라리 문제를 그들의 지능으로 환원시켜, 그들 스스로 반증과 증명의 굴레에 갇히게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 필자소개

      학부에서 예술학을 전공하면서, 조형예술을 기반으로 다양한 문화예술 현상을 감상하고 분석하는 법을 배웠다. 동일 전공으로 석사에 진학하여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 관심 분야는 페미니즘과 미디어아트를 비롯한 현대미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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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화된 불평등과 대상화된 여성




조은채*

 


       남자 지인 중에 페미니즘 강연을 종종 들으러 다니고, 그 주제에 대해 나름 유의미한 대화를 나눈 적도 있었던 사람이 있었다. 그렇게 친하지는 않았지만 대개 친절한 편이었고, 딱히 나쁜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가 이전에 저질렀던 성폭력이 sns를 통해 폭로되고 고발되었을 때, 나는 놀라기는 했지만 경악하지는 않았다. 나에게 그런 행동을 직접 한 적은 없었지만, 그의 어떤 태도나 말에서 미묘하게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느끼던 의혹을 사소한 것으로, 혹은 괜한 것으로 치부해서 넘겨버렸다. 그가 나에게도, 그리고 대외적으로도 나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니,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오히려 좋은 사람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는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며 투쟁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노동자의 권익, 성 소수자의 인권, 그리고 옳다고 여겨지는 거의 모든 것을 위해 싸웠으면서도, 그에게 여성은 사실 자신과 동등한 주체는 아니었던 것 같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일이라는 소리에 페미니즘에 관심은 가졌지만, 자기 주변의 여성들이 자신과 동등한 인간이라는 당연한 진리는 인식하지 못했던, 흔한 여성혐오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가해 사실이 밝혀졌을 때 내가 엄청나게는 충격받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지금까지 이와 비슷한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기 때문이었다. 주위에서 순수하고 착한 사람이라고 통하던 남자 지인은, 같은 무리 여학생들을 ‘부위 별로’ 등급을 매겼다. 여성 인권에 관심이 있다고 누누이 밝히던 동료는 무리 내의 페미니스트를 뒤에서 성적으로 희화화하고 조롱했다. 앞서 언급한 ‘그’에게서 몇 가지 조건을 더하거나 빼고 이름만 바꾸면 똑같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말이 통하는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음에도, 가끔 그 생각이 내 착각이었나 싶은 질문을 던지는 남자 지인들도 많았다. 그리고 그 질문 안에 담겨 있는 여성혐오를 조금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그들의 태도 때문에 더욱 답답해지곤 했다. 다른 문제에서는 대단히 이성적이고 중립적이었던 친구들이 남성 장애인의 성욕 해결을 이유로 들며 성매매 합법화를 역설했다. 하지만 그들의 논지에서 여성 장애인이나 그들의 성욕은 등장조차 하지 않았고, 남성의 성욕은 누군가 반드시 해결해주어야만 하는 불가피하지만 절대적인 것으로 치환되었다. 왜 남성의 성욕에만 애정 없이도 그것을 해소해줄 대상이 필요한가? 왜 그 해소 방법을 여성과의 성관계로 당연하다는 듯이 한정하는가? 그들은 남성 장애인이라는 특수한 경우를 예시로 들며 성매매를 합법화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 주장은 얼마든지 그 적용 범위가 확대될 수 있었다. 기러기 아빠라서, 여자친구는 혼후관계주의자라서. 세상에는 어떤 이유로든 성관계가 불가능한 사람들이 있을 테고, 그들에게는 비슷한 논리로 성매매를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 역시 그 논리대로라면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었다. 결국, 그 주장은 여성을 철저하게 타자화시켜, 남성의 성욕을 위해서는 보급되거나 구입될 수도 있는 존재로 만들고 있었다.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성적 대상화된 객체로 인식한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여성은 사회에서 사람임에 앞서 여자로 규정된다. 여성이 등장하는 기사에는 ‘여(女)’ 자가 빠지지를 않는다. 여대생, 여교사, 여배우, 여교수. 며칠 전에 본 기사의 제목은 ‘IS 대원 100명을 사살해서 현상금 11억이 걸린 23살 여대생’이었다. ISIS 무장세력때문에 고통받는 시리아 난민 소식을 접한 뒤, 대학을 그만두고 시리아의 쿠르드족 군대에 자원입대한 여성의 이야기였다. 이미 대학생이라는 신분을 버린 지 오래이며 최전선에서 저격수로 활동하고 있음에도, 기사 속의 주인공은 군인이기 이전에, ‘어린 여대생’으로 먼저 이미지화되어 있었다. 반면, 남성은 사회 안에서 성별로 규정되기보다는 보편적이고 정규적인 ‘인간’으로 등장한다. 우리는 ‘청년’ 혹은 ‘청소년’, ‘교수’, ‘의사’라는 말에 자연스럽게 남성 주체를 먼저 떠올린다. 신문 기사에서도 굳이 ‘남의사’, ‘남교수’, ‘남기사’라는 단어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남’은 ‘여’와는 달리 불필요한 수식어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청소년’이라는 말에 남성 청소년만 연상하기 때문에 ‘청소녀’라는 괴상한 명칭이 실제로 사용되기까지 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인간의 디폴트 값은 남성인 것이다. 결국 어느 한쪽은 남자이기 이전에 인간이 될 수 있지만, 다른 한쪽은 인간이기 이전에 여자가 되어버린다. 이 연장 선상에서 여성이라는 집단의 이미지는 종종 과잉되게 성애화된다. 그리고 남성 집단이 이 이미지에 기반을 두고 여성을 인식하는 것이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일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뒤에 앉은 남자의 전화 통화를 듣게 된 적이 있다. 그는 꽤 큰 목소리로 이름 모를 형님에게 오늘 ‘연애’를 하러 가자고 설득하고 있었다. 가격도 괜찮고 ‘여배우’ 같은 애들도 널렸다며. 잘 말해두면 시간도 길게 할 수 있다며. 그는 아쉬워하며 전화를 끊었다. 형님이 오늘은 안된다고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또 다른 형님에게 ‘연애’를 하러 가자고, 자기가 오늘 다 알아봐 놓았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번 형님은 된다고 한 것인지 그가 신나서 계획을 읊었다. 절대 당사자 면전에 대고는 할 수 없는 모욕과 조롱이 양념처럼 곁들여졌지만, 그 남자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어 보였다. 통화 내용을 들을수록 그 남자가 말하는 ‘연애’가 성매수를 가리키는, 성매매 산업에서 흔히 쓰이곤 한다는 은어인 ‘연애’라는 것은 점점 명백해졌다.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통화 내용을 들어야만 했던 나는 문득, 그리고 아주 뜬금없이 남자는 만나는 모든 여자를 잠재적 연애대상으로 본다는, 제법 자주 쓰이는 농담이 떠올랐다. 물론 이 농담에서 말하는 연애가 그 남자가 통화로 형님들에게 같이 하자고 조르던 그 ‘연애’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런 ‘연애’를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할 수 있는 남자가 하는 또 다른 연애는, 과연 그 ‘연애’와 얼마나 다를 것인가? 여성을 구입할 수 있는 성애화된 객체로 여기는데 이미 익숙한 사회에서, 그와 같은 여성혐오자들이 하는 또다른 연애는 ‘연애’가 아닌 연애라고 해서 무고(無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여성을 동등한 주체가 아닌 성적 대상화된 객체로 간주하는 것에 너무나도 익숙하다는 사실이 그가 발화한 말들로 선명하게 입증된 기분이었다. 친구였으면서 단체카톡방에서는 말로 온갖 성추행을 다 하고, 연인이었으면서도 헤어지자는 말에 폭력을 휘두르고, 자기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했으면서 성폭력을 저지르는 남자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도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전화 한 통만으로도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와 혐오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 증명되는, 그리고 그 증명이 공공장소에서 버젓이 그리고 별 거리낌 없이 일어나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피부로 와 닿았기 때문이다.


* 필자소개

      부에서 예술학을 전공하면서, 조형예술을 기반으로 다양한 문화예술 현상을 감상하고 분석하는 법을 배웠다. 동일 전공으로 석사에 진학하여 공부를 이어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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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안의 페미니즘 : 예민함과 자기검열



조은채*

 


       매주 집회에 나가면서 어떤 혐오 발언들은 나를 상처 입히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 혼자만 어떤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내 불편함은 구체적인 행동이 되기 전에 망설임으로 종결되곤 했다. 이제 더 이상은 예민하다거나 유난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집회 때 쏟아졌던 “미스박”, “강남 아줌마”, “아몰랑” 등 수많은 혐오 언어들을 보고도 별다른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나에게 집회에 참여하는 일은 어떤 의미에서는 일상에서 피하려고 노력해왔던 수많은 혐오와 정면에서 부딪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애써 외면한 채 거리에 나섰다.

        쏟아지고 있는 여성혐오 발언에 제동을 거는 것은 대통령 혹은 비선실세를 옹호하는 일이 아니다. 혐오 발언을 멈추자는 것은 그들에 대한 비판의 정도를 낮춰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여성혐오 발언을 반복하는 것은, 여성성 비하가 얼마나 효과적인지를 여실히 증명한다. 그 효과가 대단하다는 것은 사회에 여성혐오가 얼마나 만연하였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하지만 이러한 지적들은 모두 “해일이 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다.”는 말로 조롱당하고, 분열을 굳이 조장하는 불온한 움직임이라고 낙인 찍힌다. 이 낙인은 혐오 발언에 대한 자정의 목소리를 망설이게 한다. 더 거대하고 시급한 문제가 있는데 작은 소란을 크게 키우고 있는 걸까? 계속 입을 닫고 있었으니 이번까지만, 혹은 이번에도 참아야 하는 걸까? 자기검열에서 기인한 질문들이 끝없이 이어졌고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제대로 시작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자기검열만 거듭하다 포기해버린 경험은 이번뿐이 아니라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다.

      분열을 조장하지 말라는 말은 어디에나 있었다. 강남역 사건이 여성혐오 때문에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은 양성 갈등을 부추기는 행위로 치부되었다. 성희롱이 난무하던 단톡방을 고발한 피해자들은 동기들에게 그렇게까지 하고 싶으냐고 도리어 비난을 당했다. 문화예술계 성폭력에 대한 수많은 공개 폭로는 업계를 들쑤신 골칫거리가 되었다. 결국, 이 모든 사건들은 ‘예민한 여자’들 때문에 조장된 분열과 갈등으로 변모한다. 유난스러운 일부 여자들은 비난과 혐오의 대상이 되고, 바로 그런 여자들 때문에 중립적인 남성인 나조차 ‘너희들이 말하는’ 페미니즘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라는 훈계가 뒤따른다. 예민하거나 이기적인 여자, 혹은 혐오의 표적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검열의 끈을 더 조이거나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위험성을 감수하더라도 여성혐오를 멈추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면, 여러 번 순화된 언어를 써야만 했다. 최대한 남성 전체를 일반화하지 않는 것처럼 세심하게, 덜 과격하게 느껴지도록 중립적이고 온건한 어휘를 사용하면서. 상대가 예민하고 피해의식에 가득 찬 ‘그’ 페미니스트처럼 느껴지면, 남성들, 혹은 더는 페미니즘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다시는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사례를 들 때도 조심해야만 했다. 그들에게도 설득력 있게 다가갈 수 있는지를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최대한 객관적이고 공정해 보이는 예시를 골랐다. 자기검열의 기준은 내가 발화하는 어휘의 정치적 올바름이나 정확성이 아니었다. 그저 그들의 눈에서 얼마나 덜 거슬리는지, 그리고 들어보고자 하는 의사를 불러일으키는지였다. 일명 ‘받아들일 기분이 나는’ 페미니즘을 찾고 있었던 셈이다. 

        자기검열의 결과물이긴 했지만, 결국 지극히 남성의 눈을 기준으로 검열된 언어로 할 수 있는 말에는 한계가 있었다. 박탈당했던 여성의 권리에 관해 이야기하면서도 그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던 셈이니 당연한 수순이다.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그런 태도를 유지했던 것은 언젠가는 그들이 내 말을 듣고 생각을 바꿀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를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예민함’이라는 낙인을 더더욱 피하고 싶었다. 그 낙인이 찍히고 나면, 내가 말하는 모든 부당함이 그저 일부 여성 고유의 예민함의 발현인 것처럼 결론지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혹은 피해의식에 가득 차서 분열이나 갈등을 부추기는 일부 여성의 문제로 규정될까 봐 두렵기도 했다. 그 낙인은 결국 내 말들에서 아주 오랫동안 그 설득력을 앗아가 버릴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만큼 분열을 조장하지 말라는 말과 왜 이렇게 예민하냐는 말은 나를 통제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더는 그런 말들에 자신을 스스로 검열하지 않으려고 한다. 페미니즘이 향하는 곳은, 굳이 따지자면 분열이 아니라 균열이다. 유구하게 이어져 왔던 가부장적 질서에 균열을 만들고, 그 틈을 통해서 지워져 왔던 존재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제 분열을 조장하지 말라는 말이나 내 예민함을 비난하는 말들에 속지 않는다. 내가 내는 목소리가 분열이 아니라 균열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 균열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내게 낙인이 있든 없든, 자기들에게 불편한 목소리는 듣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 낙인 찍히는 것에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그저 타자였던 여성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그들에게는 성가실 예민함으로 불편한 목소리를 이어 나가야겠다고 생각할 뿐이다.


* 필자소개

      학부에서 예술학을 전공하면서, 조형예술을 기반으로 다양한 문화예술 현상을 감상하고 분석하는 법을 배웠다. 동일 전공으로 석사에 진학하여 공부를 이어갈 생각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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