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의 출발점이자 종교간 대화로서의 반유대주의




이해청
(성공회대 박사과정 / 탈식민성서해석학)

 


     해석의 사전적 의미를 뒤지면, 문장이나 사물 따위로 표현된 내용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일이라고 되어 있다. 또한, 텍스트는 기호 가운데 특히 구어/문어 등의 언어로 이루어진 복합체를 뜻하는 것으로 나온다. 따라서 텍스트와 해석을 합치면 언어로 표현된 내용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인간의 활동쯤 될 것 같다. 그리고 텍스트와 관련한 해석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로 취급될 수 있다. 하지만 이때의 텍스트란 좁은 의미에서 정의된 것이다. 좀 더 넓은 맥락, 즉 문화연구의 개념을 통해 본 사전에서 텍스트 개념은 이데올로기 분석 연구, 수용 연구, 또는 담론 분석 연구 등과 관련해 정의되고 있다. 다시 말해, “문화연구에서 텍스트 분석을 통해 텍스트가 어떤 방식으로 이데올로기를 재현하는지에 대한 연구와, 텍스트에 대한 수용 연구, 즉 하나의 텍스트가 해독될 때 독자는 그 텍스트와 어떻게 상호작용하거나 교섭하는지에 대한 연구 등에서 텍스트라는 용어는 빈번히 사용”[각주:1]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텍스트와 관련한 해석은 그리 간단치 않다고 할 수 있다. 텍스트도 해석도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하나의 사물로 덩그러니 놓여 있지 않은 셈이다. 마지막으로, 타자란 자기 이외의 사람 또는 다른 것이라고 나온다. 하지만 타자 역시 하나의 사물처럼 그저 그렇게 놓여 있지 않다. 현상학은 이 문제를 처음으로 중요한 주제로 부각시켰는데, 후설에게 타자란 세계를 구성하는 하나의 지향적 대상이었다. 하지만 “나에게 고유한 지각 영역에 속하는 나의 신체와 유사한 하나의 물체'로서 만약 내가 거기에 있게 된다면'이라는[각주:2]”식으로 파악되고 있기에, 그에게 타자란 자아와 유사한 존재 내지는 그 변양태에 지나지 않았다. 즉, 타자가 주체에 의해 언제든 처분될 수 있는 존재로 나타나 있는 셈이다. 이와 달리, 하이데거에게 타자란 단순히 눈앞에 있는 존재이거나 내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타자는 나처럼 살아 움직이는 존재인 것이다. “나처럼 현존재이며 세계-내-존재로서 도구적인 것을 둘러보는 가운데 고려하며 실존”[각주:3]하고 있다. 때문에 “현존재의 세계는 공동 세계이고, 이 공동세계 속의 우리는 서로 타자이지만 동시에 공동 현존재(Mitdasein)”[각주:4]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므로 텍스트, 타자, 해석을 묶어 하나의 주제로 고찰하는 일은 그리 간단치 않다고 할 수 있다. 텍스트라는 문제 하나만 고찰해도 버거운 일인 것을 텍스트, 타자, 해석을 묶어 하나의 일관된 주제로 고찰하는 일은 어쩌면 무덤을 파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때문에,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아드소처럼 “나는 나 자신에게 유물의 파편에서 떠오르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 때 있었던 이 일련의 사건과 그 사건을 연결하는 시간 사이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 아니,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이야기를 되풀이하면 할수록 나는 여기에서 멀어져 가는 것 같다. 죽음의 문턱에 이른 늙은 수도사에게 제가 쓴 글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많은지 적은지, 있는지 없는지 그것도 모른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다.”[각주:5]라고 고백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주제를 뽑은 것은 이것이 기독교의 역사에 매우 흥미로운 화두거리를 던져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유대인/교 문제다. 알다시피, 기독교에서 유대교는 해결할 수 없는 타자였다. 그것도 신의 아들을 죽인 살해자이자 개종을 거부하는 타자였다. 그렇기에 중세에 유대인은 악마나 사탄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하지만 홀로코스트 이후 이러한 사태는 변해왔고 마침내 지난 10일 바티칸은 가톨릭은 유대교인을 개종시키려 들지 말라고까지 선언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일까? 한때는 악마나 사탄으로까지 이해되던 인종/종교가 어떻게 개종대상이 아닌 인종/종교로 바뀔 수 있었던 것일까? 정말 우리가 가진 종교 텍스트, 즉 경전인 신약성서는 유대인을 개종대상이 아니라고 혹은 사탄의 자식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을까? 그러니까 어제까지는 살인자 및 사탄이라고 외치던 것에서 오늘에는 개종대상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 현상을 성서라는 기독교 텍스트에 근거해 볼 때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사실, 이 문제는 카톨릭에선 그리 심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카톨릭은 ‘오직 성서만으로’라는 프로테스탄트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듯, 카톨릭에선 성서 이외에 교회의 전통이 또 하나의 중요한 덕목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지만 ‘오직 성서만으로’라는 논제를 금과옥조처럼 받드는 개신교에서는 심각한 도전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근대에 시작된 개신교는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우선적으로 책의 종교로 등장했고, 그것도 우선적으로 문자적으로 이해해보고자 노력한 종교이며, 그렇기에 텍스트적인 종교적 인간형을 산출해낸 특이한 종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텍스트적 인간형은 홀로코스트를 산출하는데 결국 일조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한 예로 미쓰오의 말을 들어보자.[각주:6] 


 사실 영향사적으로 봤을 때 예를 들면 마태복음 23장은 중세 말까지는 상대적으로 거의 미지의 텍스트로, 수사본에 기반을 둔 성서 기사의 영향력도 한정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활판 인쇄가 시작되었던 16세기 이후 성서가 광범한 독자를 얻게 되면서 기독교적 바리새파상이 각인되어 갑니다. 유럽 각국의 언어에서 바리새적=위선적이라는 관용어법이 일반화되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바리새파의 모습이 현대 유대교의 조상으로서 이해되어 근대 이후의 시민적=기독교적 반유대주의와 결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데 이러한 상황은 단지 서구에만 해당되는 일일까? 다시 말해, 서구는 반유대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반면 서구 이외의 지역은 상관없는 그러한 일일까 하는 점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 흥미롭게도 노만 콘은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뼈아픈 지적을 한 바 있다.[각주:7] 


     절멸적인 반유대주의가 맹렬히 불타오르는 현상은 대중이 유대인이라는 존재가 그들 이외의 인류를 섬멸하고 지배하고자 획책하는 집단적인 악의 화신이라고 상상하는 경우로만 한정된다. 이런 종류의 반유대주의는 유대인이 현실 생활에서 수행하고 있는 사회적 역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실제로 이러한 반유대주의는 한 번도 유대인을 본 적이 없는 사람들, 수백 년도 전에 유대인이 사라진 나라들에서도 출현한다. 


     그렇다. 실제로 이러한 일은 일어났다. 일본의 일유동조론은 그 한 예다. 타츠루는 “언제 유대인을 일본에 출현하게 됐는지, 우리는 그 날짜까지 알 수 있다. 그럼 소개하겠다. 일본에 유대인을 존재하게 만든 사람은 스코틀랜드인 선교사 노먼 매클러드라는 인물이다. 그는 일본에서 행한 현지 조사의 결과 일본인은 유대인의 잃어버린 10부족의 후예라는 기상천외한 설을 1875년에 발표했다. 이것이 그 후 현재까지 전해지는 일유동조론의 기원이 되었다.”[각주:8]라고 말한다. 이것은 유대인이 현실 생활에서 수행하고 있는 사회적 역할과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출몰한다고 지적한 콘의 말을 정확히 대변해주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타츠루도 “낮과 밤, 남과 여, 평화와 전쟁, 이러한 대립은 그 밖에도 얼마든지 열거할 수 있습니다. 이런 대립은 현실적인 세계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대립은 현실 세계에 골격과 축과 구조를 부여하고, 현실 세계를 조직화하고, 인간에게 현실이 존재하게 하고, 그 속에서 인간이 스스로를 다시 발견하게 만드는 그러한 대립입니다.”[각주:9]라는 라캉의 말을 적용해서, “유대인과 비유대인이라는 대립은 현실적인 세계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대립이 아니다. 반대로 이 대립은 현실 세계에 골격과 축과 구조를 부여하고, 현실 세계를 조직화하고, 인간에게 현실이 존재하게 만드는 대립이다.”[각주:10]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타츠루의 책을 번역한 역자 박인순의 말은 더욱 흥미롭다. 왜냐하면 이렇게 적고 있기 때문이다.[각주:11] 


     북왕국이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에게 멸망당하면서 10부족은 아시리아로 끌려가 나머지 2부족에 의해 잃어버린 10부족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기록이 남지 않아 이들의 행방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난무하게 되었다. 10부족의 일부가 아프가니스탄, 인도, 미얀마, 중국, 일본, 한국, 영국, 미국, 스키타이, 아프리카 등으로 이동했다는 설이 대표적이다. 


     10부족의 일부가 이동했다는 지역으로 언급되고 있는 지역 가운데 우리나라가 들어 있다. 그리고 잃어버린 10부족 중 하나인 단지파가 바로 한국이라고 주장을 하는 이들이 실제로 있다. 들어보도록 하자.[각주:12]  


     삼성기 하편에 의하면 환국의 12국 중 하나인 수밀이국은 단군 족, 곧 백두산족의 일파이다. 기독교의 12지파 중에 단지파가 있다. 체형, 언어, 생활습관이 수메르인과 이스라엘인과 한국인이 유사하다이스라엘이 말하는 선민(選民)은 그 뜻을 선택받은 민족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원어는 chosen people로써 말을 그대로 해석하면「조선 사람」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단군 민족이라는 의미다. 세계를 방황하던 이스라엘이 유엔에 청원할 때 만주를 달라고 했다고 한다. 고향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인 아브라함은 수메르 인으로써 함께 천신제(天神祭)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한민족과 이스라엘의 동질적 역사와 문화(文化)를 보면 너무나 유사점이 많이 있다. 


     이러한 말은 분명 누가 봐도 말이 되지 않는 주장이다. 너무나 허무맹랑하여 정신병자가 지껄이는 말로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관심을 두고 봐야 하는 것은 이 말이 전하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러니까 “일본인이 이 가상의 유대인을 반복하여 호출하는 까닭은 자신들의 사정 때문이었다. 일유동조론부터 시오텐의 반유대주의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에 공통된 점은 국민국가의 정치적 위기와 국민적 정체성의 동요라는 두 가지 정치적 요인이다.”[각주:13]라는 타츠루의 말을 참조했을 때, 왜 이러한 일이 우리나라에도 일어나는지를 한번쯤은 검토해봐야 한다는 점이다. 일단 지금까지 살펴본 주장, 즉 실제의 유대인이 거의 없는 지역에서 일어난 유대인에 관한 생각들이 반유대주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고 물을 수 있다. 이에 대해 타츠루는 따끔하게 지적하고 있다. “반유대주의란 꼭 유대인을 배척하라는 명시적인 박해운동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이 일종의 국제적 네트워크를 매개로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설사 현실적인 상황에서는 유대인에 대해 친화적인 태도나 경의를 표한다고 해도, 반유대주의자와 기본적인 세계인식의 도식을 공유한다는 말이다.”[각주:14]라고 말이다. 경제적 성공을 위해 유대인의 지혜를 배우자는 한국 개신교인들의 뜨거운 반응은 성서를 통해 예수를 살해한 사람이 유대인이라고 말해야만 하는 자신의 신앙적 고백과 모순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상기하면 이러한 지적은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어쩌면 한민족이 단지파라는 망상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막강한 힘을 가진 유대인의 기원이 바로 한민족이라고 말함으로써 우리 민족이 가진 힘을 역설하고자 하는 욕망일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에 대한 긍정적 인식은 유대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맞닿아 있는 야누스적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반유대주의는 유럽 및 비유럽을 가리지 않는다는 콘의 지적은 꽤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특히, 텍스트적 인간형의 유산을 이어받고 있는 개신교인들에게는 더더욱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타츠루가 지적한 것처럼 비유럽 지역의 나라들이 처한 위기와 관련해 유대인이 해석되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현실 속 유대인이 아니라 텍스트, 특히 신약의 복음서에 박힌 고정된 전혀 변함이 없이 책을 뒤지면 언제나 특정한 타입으로 등장하는 유대인이 복음서를 읽는 독자가 처한 특정한 상황과 맞물려 어떻게 읽혀지고 있는지를 해석해낼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불행히도, 유럽의 역사에서 유대인은 언제나 약탈하는 경제적 인간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베니스 상인의 샤일록은 그 한 예이다. 사실, 고리대금업자로서의 샤일록은 우연히 탄생한 인물이 아니다. 오한진의 지적을 참작하면, 고리대금업자로 유대인이 등장하는 맥락은 반유대주의와 결부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3세기 이후부터는 유대인들이 고리대금업을 하고 있다는 비난이 점증되었고, 페스트 전염으로 인한 대량사망이 유대인들의 인신제물죄로 유포되면서 유대인들에 대한 적개심은 날로 커져갔다. 그리고 이러한 비난들이 유대인과 적대시하고 있는 승령들이나 신분 낮은 로마카톨릭 성직자들에 의해 설파되고 있었기에 일반 국민들에게는 쉽게 전파되었다.”[각주:15] 약탈하는 경제적 인간으로서의 유대인은 유럽의 역사에서 언제나 하층민에게 불쾌한 반응을 일으켰고 하층민이 돈을 갚지 못할 상황에 이르면 유대인을 폭력으로 응수했다. 이러한 일이 중세 유럽에만 일어났었던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토브는 21세기에도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것도 미국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말이다. “반유대주의자는 흑인과 백인 실업자, 노숙자, 빈민, 하층계급, 엘리트 코스에서 탈락한 중산 계급의 사회적 불만을 희생양인 유대인에게 향하게 만들어 피해 간다. 엘리트들은 반유대주의적 폭력을 저지하기는커녕 유대인, 흑인, 빈곤층 백인 등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괴리의 심화에 가담한다. 그들이 단결하여 엘리트들에게 반격해 오는 것을 막기 위한 고전적인 분열 통치의 룰이다.”[각주:16] 한데, 이처럼 통치엘리트의 분열전략으로 반유대주의가 사용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정의를 위해, 가난한 자를 위한 싸움을 위해 혹은 아나키즘을 위해서도 반유대주의는 동원될 수 있다. 다시, 타츠루의 말을 들어보도록 하자. 


     내가 반유대주의자의 저작을 읽고 알게 된 사실은 그 사람들이 꼭 사악한 인간이거나 이기적인 인간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오히려 신앙심이 깊고, 박식하고, 공정하며, 불의를 격렬히 증오하고, 탁상공론을 싫어하고, 싸움의 현장에서 도망치지 않으며, 자신의 주먹에 사상의 무게를 주저 없이 거는 수컷 농도가 짙은 인간이 자주 최악의 반유대주의자가 되었다. 단순한 반유대주의자=인간의 탈을 쓴 악귀라는 설에 기댄다면 분명 역사 기술은 간단해진다. 그러나 거기에 머문다면 지금도 존재하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존재할 인종차별이나 민족차별이나 제노사이드라는 재앙을 막을 수 없다. 


     이러한 지적들, 13세기부터 시작된 약탈하는 경제적 인간으로서의 유대인이라는 것에서부터 불의를 격렬히 저항하며 기꺼이 해방을 도모하는 인간이 반유대주의자일 수도 있음을 말하는 이런 지적을 복음서를 통해 해방을 역설하고자 하는 여러 착한 학자들의 담론과 포개어 놓는다면 어떤 밑그림이 그려질지 궁금해진다. 물론, 이들이 반유대주의자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 자신이 실제적으로 유럽이 반유대주의자들 소굴임을 알지만 그럼에도 텍스트에 나타난 유대인의 이미지를 국가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해방의 담론에 적용코자할 때 자기도 모르게 걸려드는 반유대주의의 여러 유형들, 그것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간에 무의식적으로 접속하게 되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지적은 무슨 일이 있든지 간에 유대인은 용서받아야 마땅하다는 식의 논지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니까 유대인이 홀로코스트를 겪었기에 팔레스타인들에 대한 현대 이스라엘의 무자비한 탄압은 눈감아줘야 한다는 식의 발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점이다. 한 예로, 사이드는 이와 관련해 이미 옳게 지적한 바 있다. “레온 폴리아코프는 아리안 신화를 쓴 사람입니다. 가설에 불과한 인도-유럽어족의 특징으로 상정된 석과 이른바 아리안족이라는 관념과 인종주의 사이의 공생관계를 연구해 왔습니다. 그러나 폴리아코프는 유럽에서 셈족을 유대인뿐만 아니라 무슬림까지도 가리키는 말로 쓴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당면 목표와 어울리지 않는 현실에는 눈을 슬쩍 감아버리는 것이 요즘 지식인들의 유행인 모양입니다. 참 아이러니한 것은 폴리아코프의 책이 인종 이론을 공격하면서도 중동 사람과 셈족을 한 데 묶어 말하는 것이 얼마나 광범위한지를 보여줄 역사는 생략한다는 점입니다.”[각주:17] 오히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이드가 이슬람과 관련해 말한 바가, 다시 말해 서구인들이 이슬람에 대해 가진 스테레오타입적인 이미지가 유대인에 대해서도 적용된다는 점이다. 들어보도록 하자.[각주:18] 


     다른 문제는 이런 것입니다. 대부분의 동양학 연구에서는 아랍 문학을 아주 조금씩만 다룹니다. 아니면 아랍인의 생활을 보여주는 예로만 살짝 다룹니다. 이것은 오리엔탈리즘에서 가장 주목해 볼 만한 부분 중 하나입니다. 제가 오리엔탈리즘을 연구하게 된 것도 이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참 재미있는 건, 동양학자들이 아랍을 꾸란의 예시라고 보거나 자신들의 주장이 꾸란에 써 있다는 식으로 말한다는 겁니다. 방법론적으로 보면 이 태도는 미국의 역사를 신약 성서의 예시라고 보는 것과 비슷합니다. 아무도 셰익스피어, 생 시몽 19세기 미국 역사연구를 대신해서 기독교를 연구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동양학에서는 일반화된 일입니다. 


     사이드의 이 같은 지적은 유대교와 관련해 기독교 신학이 저지르는 신학적 논의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데, 수 세기 동안 하나의 스테레오타입적인 전통으로 굳어져서 그런지 몰라도 이것이 괴기한 일인지를 모르고 지낸다. 따라서 신학자의 글들에는 부지불식간에 반유대주의적 서사가 기어들어온다. 언제나 유대교는 하나의 화석으로, 그러니까 2천 년 전의 복음서에 나온 상태로 발전 하나 없이 굳어져버린 하나의 원시적 정신을 가진 존재로 취급되고 만다. 유대교를 정의할 때 현재의 살아있는 유대인들이 무엇을 믿는지가 아니라 고대의 유대교 경전을 통해 현대의 유대인들과 그 종교를 규정해내며, 그렇기에 늘 이들의 종교는 예수를 죽인 자들의 종교로 정의된다. 유대인, 그들의 종교는 복음서가 규정하는 바와 같이 무자비한 종교이고, 노력의 종교이며, 결국 은혜는 거부하는 그러한 종교다. 따라서 기독교적 서사에서는 헤롯과 가야바를 비롯해 심지어 바리새인들까지도 1세기의 민중들의 피를 흡혈귀처럼 빨아먹는 인간들로, 반면에 예수는 이들과는 달리 비록 천출이지만 고귀한 정신의 혈통을 지닌 자유의 아들로 그려진다. 그렇다면 이것은 반유대주의의 새로운 버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일종의 사회학적 틀을 빌린 반유대주의 말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이해를 무엇으로 봐야 할까? 솔직하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더구나 이러한 신학적 해석의 궤도 위에서 예수를 자리매김하고자 한다면, 유대교와의 대화가 과연 가능할까?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네이버 지식백과] 텍스트 (문화연구의핵심개념, 2014. 4. 15., 커뮤니케이션북스) [본문으로]
  2. [네이버 지식백과] 타자 [他者, der Andere, l'autre] (현상학사전, 2011. 12. 24., 도서출판 b) [본문으로]
  3. [네이버 지식백과] 타자 [das Andere, others, 他者]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본문으로]
  4. [네이버 지식백과] 타자 [das Andere, others, 他者]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본문으로]
  5.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하)』,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1994, p.774 [본문으로]
  6. 미야타 미쓰오, 『홀로코스트 이후를 살다』, 박은영․ 양현혜 옮김, 한울아카데미, 2013, p.56 [본문으로]
  7. Norman Cohn, Warrant for Genocide, London: Eyre & Spottiswoode, 1967, p.252 [본문으로]
  8. 우치다 타츠루, 『유대문화론』, 박인순 옮김, 아모르문디, 2011, p.65 [본문으로]
  9. 우치다 타츠루, 같은 책, p.59 [본문으로]
  10. 우치다 타츠루, 같은 책, p.59 [본문으로]
  11. 우치다 타츠루, 같은 책, p.65 [본문으로]
  12. http://www.dailywrn.com/sub_read.html?uid=5775 [본문으로]
  13. 우치다 타츠루, 앞의 책, p.96 [본문으로]
  14. 우치다, 타츠루, 같은 책, p.75 [본문으로]
  15. 오한진, 『유럽문화 속의 독일인과 유대인, 그 비극적 이중주』, 한울림, 2006, p.30 [본문으로]
  16. Lawrence Taub, The Spiritual Imperative: Sex, Age, and the Last Caste, Clear Glass Press, 1995, p.199 [본문으로]
  17. 에드워드 사이드, 『권력, 정치, 문화』, 최영석 옮김, 마티, 2012, p.58 [본문으로]
  18. 에드워드 사이드, 같은 책, p.6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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