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지젝을 아느냐? (II)
: 우리는 어떻게 인간이 되었나?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 과정)

 

프롤로그: 우리는 어떻게 인간이 되었나?

‘신은 누구인가?’라는 물음 못지 않게 오랜 시간 동안 많이 물어왔던 질문이 바로 ‘인간이란 무엇인가?’이다. 그것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 주변을 떠도는 많은 명제들이 기본적으로 ‘인간은 …이다’라는 선언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로부터 우리 삶의 의미와 목적, 희망과 행위가 선택되고 결정된다. 하지만, 인간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 오래되었다고는 하나, 동.서양 공히 신적인 ‘로고스’ 내지 하늘의 이치인 ‘道’에 의해 구성되어지고 운행되어지는 그 인간을 참 인간으로 오랫동안 간주해 왔었다. 사물의 형성과 운행의 법칙이 확고부동한 질서로 실재하고 있는 우주에서 인간은 그 법칙의 한 일원이었을 뿐이다. 어떤 비밀도, 어떠한 사연도 모두 속속들이 하늘의 빛 아래 선명하게 드러나야 했고, 인간의 내포와 인간의 외연은 그 빛 아래에서 수미일관하게 하나로 엮어졌다. 어쩌면 인간의 삶은 신적인 로고스(내지 天理) 아래 놓여있다는 점에서, 주체적 의지와 신념을 바탕으로 결단하고 행위하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신적인 기표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그 중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기독교의 인간론이다. 구약성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얻었나이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편 8편)”라고 노래하면서, ‘인간이란 전적으로 절대자 하나님의 섭리 안에 놓여 있는 존재’로 자신을 규정하였다. 포스트 맑시스트의 선두주자라 할 수 있는 게오르그 루카치는 이러한 인간이 살던 시대를 다음과 같은 낭만적인 문장으로 표현한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루카치, <소설의 이론> 서문 中)
그러나, 수 천 년 동안 인간의 갈 바를 밝혀주던 그 빛은 계몽주의 시대를 지나며 점점 광채를 상실하더니, 19세기에 이르러 어둠에 휩싸이고 만다. 빛이 사라진 것이다. 빛이 사라졌다 함은 그 빛 아래에서 살았던 인간(성)의 상실을 의미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찰스 다윈과 칼 맑스가 그 진앙의 진원였다고 후대 역사가들은 평한다. 맑스는 1845년에 발표한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테제>에서 “인간의 본질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성이다”라고 말하였고, 같은 논문에서 “세계는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변혁의 대상”이라 주장하면서, 그토록 지긋지긋했던 신의 그늘에서 벗어난, 물적 토대에 기반한 인간을 선언하였다. 다윈의 ‘진화론’은 오늘날의 인간이란 오랜 세월 시간을 버티면서 축적한 경험과 기억과 본능과 생존방식의 총체라는 것 이외에 인간에게 더 이상의 큰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프로이트는 본인이 창안한 ‘정신분석학’을 통해 인간이란 의식이라는 명료한 정신의 활동이 아닌, 알 수 없는 무의식에 의해 떠받쳐져 있는 불안한 실존임을 서늘하게 증명해 보였다. 각기 다른 분야에서 활동했던 세 사람었지만, 그들을 통해 신적인 원리에서 벗어난 인간, 오랫동안 익숙하고 낯익은 고향을 등지고 길을 떠나는 인간, 그래서 이제는 고향집 아버지가 사라진, 더 이상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modern 인간!’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지난 <웹진 49호>에 이은 ‘너희가 지젝을 아느냐?’ 두 번째 글의 제목을 ‘우리는 어떻게 인간이 되었나?’로 정하였다. 그렇다고 인간의 본질에 관한 여러 이론들을 이 글에서 다루지는 않는다. 내 깜냥에 그럴 능력도 없고…… 앞으로 연재를 계속하면서 기독교와 맑스주의에서 말하는 인간에 대한 논의를 간헐적으로 끌어들이겠지만, 이번 <웹진 50호>의 주된 내용은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발달(?)과정’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난 웹진에 이어<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 나오는 지젝의 라깡 해석을 토대로 이루어진다.
사실 지젝 이론의 화두는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넘어가면서 개인이 사회적 주체로 전환되는 과정에 관심을 두었던 라깡의 초기이론보다는, 라깡의 후기 이론, 즉 현실(the reality)은 그 자체로 완벽한 무엇이 아니라, 곳곳에 구멍이 뚫려있는 그 무엇인데, 그 구멍들이 환상에 의해 봉합되어 구성된 현실이라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므로 현실보다는 현실을 지탱케하는 그 무엇, 곧 실재(the Real)에 대한 규명이 지젝을 이해하는 첫 단추이고, 그 단추를 풀어가면서 지젝 특유의 (실재의) 정치학, 윤리학, 신학, 문화비평이 전개된다. 졸고에서 논의되는 내용은 라깡의 초기이론, 즉 주체구성의 상징화 과정에 대한 지젝식 해설이고, 실재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다음 웹진부터 전개될 것이다. 자~~이제부터 가 볼까요? 아 유 뤠디?
     
징후(Symptom): 억압된 것의 귀환

지난 <49호 웹진>에서 ‘빗금 그어진 주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정신분석학의 제 1원리를 ‘억압된 것의 귀환’이라고 정의했었고, 그 억압이 숨겨져 있는 지점을 우리가 흔히 ‘무의식’이라 부른다고 했었다. 그러나 무의식은 실증할 수 있는, 덩어리가 있고 물리적 실체가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징후(Symptom)’로서 나타난다.[각주:1] 이 징후에 대한 실례로 우리는 지난 웹진에서 어렸을때 성폭행을 당했던 소녀가 성인이 되어 우연히 어느 문방구로 들어갔는데 갑자기 몸이 떨려오고 심장이 격하게 뛰는 예를 들면서 설명한바 있다.
다시 한번 징후에 대해 생각해보자. 징후란 무엇이고 언제 나타나는가? 징후는 뭔가 억압되었던 것이 튀어나온 것이다. 이번 미국 대선에서 오바마의 재선에 혁혁한 공을 세운 빌 클린턴이 대통령 재임시절 본인의 집무실에서 백안관 인턴으로 일하고 있던 모니카 르윈스키와 정사를 벌인 사건으로 말미암아 미국 전체가 발칵 뒤집혔었다.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클린턴에 대한 청문회가 열렸고, 대통령 탄핵에 대한 여론까지 조성되면서 미국 정계 전체가 큰 소용돌이로 휘말렸던 사건이었다. 그 무렵 ‘클린턴이 왜 그랬을까?’를 둘러싸고 온갖 이야기들이 나돌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클린턴의 어린 시절 성장배경이 그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클린턴의 생부는 그가 태어나기 석 달 전 교통사고로 사망하였고, 그의 나이 4살 때 클린턴은 알코올중독자 로저 클린턴을 계부로 맞이하였다. 그는 자주 취해 폭력을 일삼는 자였고, 그 아버지 밑에서 성장하면서 클린턴은 유소년 시절을 보냈다. 로저 클린턴 사망 후 클린턴의 생모는 세 명의 남자와 세 번 더 결혼하였다. 얼굴도 못 본 생부와 계부 4명, 총 다섯 명의 아버지가 클린턴에게 있었던 것이다. 성장기 내내 클린턴은 자기집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불행한 일이 없는 것처럼 최면을 걸었다.
이 때문에 클린턴은 어렸을 때부터 모순되는 것을 잘 조화시키고 상황에 따라 잘 적응하는 법을 길렀다고 전해진다. 불굴의 의지, 승부욕, 남에게 인정받으려는 강한 욕구 등이 이때 자리잡았고, 그것이 여성에게는 성적욕구로, 정치적으로는 승리에 대한 욕망으로 표출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던 심리학자들의 인터뷰가 당시 난무했었다. 요약하면, 어린시절 억압되었던 그 무엇인가가 드디어 징후가 되어 귀환하여 대통령이 된 클린턴으로 하여금 르윈스키와 백악관 정사를 벌이게 했다는 결론인데…..
어렸을 때 아무런 억압 없이 성장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클린턴과 같은 강렬한 징후는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 하나씩 그런 징후들을 갖고 있는 셈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본격적으로 라깡의 사유와 만난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이 왜 생기는가?’라는 물음에 무의식은 어떤 억압적인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즉 이런 억압이 눌려 저장되어 있는 장소가 무의식인 셈이다. 하지만, 라깡은 프로이트보다 한 발짝 더 나간다. 라깡은 개별적 한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인간이 반드시 겪게 되는 억압의 경험을 말하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이 언어의 세계로 진입하는 경험이다.

라깡의 주체론
 
‘언어의 세계로 진입한다’함은 아기가 제도와 문화와 사회속으로 진입함을 의미한다. 시간적으로 환산하면 옹알이를 시작한다는 생후 6개월에서부터 말을 하기 시작한다는 18개월 사이다. 그 기간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그 이전 엄마와 아기의 관계는 연속적이고 합체된 이자관계였다. 아기에게는 나는 나이고, 저것은 엄마라는 주객 이분이 없다. 주관과 객관 사이의 거리가 확보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지만, 18개월이 지나면서 엄마와 아기사이의 연속성은 서서히 깨어지고 불연속면이 펼쳐지는데, 그 파열을 제공하는 자가 바로 아빠다. 그곳은 엄마의 젖가슴이 곧 나였던 달콤한 상상계와 대비되는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법이 지배하는 차가운 상징계를 대변한다.
라깡은 이와 같은 상상계와 상징계를 설명하기 위해  ‘the ideal ego(이상적 자아)’와 ‘the ego-ideal(자아이상)’라는 개념을 끌어온다. 각각은 상상적 동일시, 그리고 상징적 동일시와 쌍을 이루는 말이다. 지젝은 상상적 동일시를 “우리가 되고 싶어하는 그 무엇을 표상하는 이미지와 동일시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상징적 동일시는 “우리가 관찰 당하는 장소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바라보는 장소를 동일시 함으로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사랑할 가치가 있고 좋아할 만하게 보이는 것”이라 표현한다.[각주:2]
예를 들어, 엄마의 젖가슴 만으로도 충분히 엄마와 합일이 가능했던 아이에게, 어느 날 엄마가 “너는 의사가 되어야 해! 그래야만 나와 합일을 계속 유지할 수 있어!”라고 말했다고 치자. 엄마는 더 이상 나를 더 이상 당신의 젖가슴을 만지는 나로 만족하지 않는다. 뭔가 다른 것을 보여달라고 성화다. ‘나는 가수다!’ ‘나는 의사다!’ ‘나는 박사다!’……이렇듯 엄마는 자신의 젖가슴만을 탐닉하면서 상상계속에만 머물러 있는 내가 아닌, 가수, 의사, 박사, 판검사 등등의 이름으로 기표화된 나를 요구한다. 그 결과 아이는 더 이상 엄마의 젖가슴을 만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깨닫게 되고, 엄마가 제시하는 이름표(기표)를 따는, 즉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주체로 거듭나게 된다.
이 지점에서 라깡은 desire와 jouissance를 구분한다. Desire은 상징계속 주체가 갖는 욕망이다. 이것은 타인의 시선을 따라가는 욕망이다. 박사가 되고 교수가 되고, 의사가 되고 CEO되는 것과 같이 어떤 기표를 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욕망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이다. 남이 좋아라 하는 시선을 내가 따라가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한국의 결혼풍속도를 보면 상징계의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결혼식에서 신랑과 신부간의 사랑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남들이 이 결혼을 어떻게 볼까?’ 가 제일 중요한 부분이다. 신랑은 뭐하는 사람이고, 신부의 집안 배경은? 혼수도 얼마나 했는지? 예식장은 어디? 신혼여행은? 이 모든 사항들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조정되고 꾸며진다. 반면, jouissance는 상상징계 진입할 때 제거당한(남겨진) 대상을 향한(대한) 욕망이다. (이 부분은 다음 시간에 실재에 대한 부분을 다루면서 본격적으로 다룰 것이다.)
이런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통과의례를 경험한 주체는 (내가 보기에) 슬픔과 외로움과 안타까움을 마음속 깊숙히 근원적으로 간직한, 자기소외와 분열과 억압을 동반한 주체다. 왜냐하면, 상징계속 주체(사회적 주체)가 되는 과정에서 원래 아기(상상계속 주체)가 지녔던 것이 모두 상징계속 주체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지금 시카고에 살고, 신학으로 박사공부하고 있고, 결혼했고, 목사인 이상철이다. 하지만, 그 이상철으로 완전히 온전히 환원되지 않은 또 다른 이상철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남겨진 부분, 즉 잔여다. 이런 이유로 주체가 상징계로 진입하는 과정은 무척이나 고통스럽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를 spaltung(파열)이라 표현한다. 이것은 아기가 엄마의 자궁을 뚫고 나올 때 엄마의 배가 찢어지는 것과 비유할만 하다. 그 고통을 수반해야 아기는 더 이상 자궁속에만 머무르고 있는 잠재적 주체가 아닌, 세상에서 카운트 되어 살아가는 주체로 설 수 있다. 

결국, 주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라깡의 답변은 근대철학이 제시하는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계몽이성에 의해 인도받은 근대적 주체는 이성의 빛으로 중세적 어두움을 정복하고 무지와 미지의 지점을 하나씩 무너뜨리면서 세계를 통합하고 종합하면서 전체를 총체적으로 구성해나갈 줄 아는 그런 주체였다. 하지만, 라깡의 주체는 근대적 주체와는 반대로 uncanny하고 weird한 존재이다. 독일말로는 Ungeheuer! 카프카의 <변신>에 보면 한 친구가 아침에 자고 일어났더니 엄청 큰 괴기스러운 벌레로 변신이 된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카프가가 쓴 단어가 Ungeheuer이다. 섬뜩하고 무시무시한 무엇인가를 표시할 때 쓰는 단어다. 예전에 리들리 스콧, 제임스 카메론 감독 같은 대가들이 연출하고 시고니 위버가 주연으로 나왔던 영화 <에어리언>시리즈가 있었는데, 그 영화에서 괴물들의 숙주가 인간의 몸에서 자라는 씬이 나오는데, <변신>에서와 마찬가지로 uncanny하고 Ungeheuer하다는 표현을 쓰기에 딱 걸맞는 장면이었다. 영화 <에어리언>의 그 장면은 라깡의 주체에 대한 이미지를 설명하는 데 가장 탁월한 그림이 아닐까 싶다. 이렇듯 내 안에는 내가 모르는 어떤 파열과 분열과 섬뜩함의 도사리고 있는 공간이 있다. 그것은 우리 속 어딘가에 꼭꼭 숨어있다가 징후가 되어 간간이 우리의 통제와 제약을 넘어 분출한다. 라깡은 징후가 되어 귀환하는, uncanny한 에어리언 같은 ‘내가 인간임!’을 선언하였다.  이것이 바로 라깡이 이룩한 주체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통찰이다. 너무 우울한가?      

<다음 웹진에 계속>

  1. Slavoj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New York: Verso, 1989), 56. [본문으로]
  2. Ibid., 10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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