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신학가이드24]



알란 바디우 II : 바디우에게 진리란 무엇인가?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박사)



   아감벤 이전에 다루었던 지젝과 바디우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그 둘은 한 스승을 모신 사람들이다. 바디우는 직계제자쯤 되고 지젝은 그 스승의 글을 읽고 독학으로 엄청난 후계자로 우뚝 선 제자쯤 될 것이다. 아담 코스트코(2008, 77~78)는 둘을 소개하며 그들의 철학의 위치를 설명하였다. 지젝과 바디우가 모신 스승이 있었으니, 바로 포스트모던의 전설의 세 명의 고수 중 하나인 라깡이었다.(데리다, 라깡, 푸코) 이 세 명의 전설의 고수들이 포스트 구조주의 내지는 포스트모던의 주축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이른바 진리(truth)라는 단어를 인문학의 세계에서 지워버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진리라는 것은 없는데, 데리다는 진리에 가장 가까운 것이 바로 해체라고 했을 것이고, 푸코는 그럼 당신이 생각하는 진리라는 것은 무엇인가요? 라고 물으면서 득의의 웃음을 지을 것이고, 라깡 또한 프로이드를 재발견하며 진리라는 Big other는 이미 구조화된 주체가 그 이전으로 돌아가기 위한 그리움을 지우기 위해 위안거리로 만들어낸 무엇일 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결국, 그들에 의해 진리를 더는 말할 필요가 없어졌으며, 또는 말하려면 그들 이전의 방법들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말해야하는 시대에 살게 된 것이다.


결국 진리를 아무도 말하지 않는 시대에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으니 그 중 하나가 바로 라깡의 제자였던 바디우였다. 바로 스승의 진리를 없앤 그 자리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진리를 구성해나간 것이다. 먼저 왜 그랬어야 했는지 생각해 보자. 포스트모던이라고 하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다원화된 사회라는 말이 필자에게는 유행이었다. 즉, 하나의 가치가 다른 모든 가치의 중심이 되는 사회에서 여러 가치들이 공존하게 된 사회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1990년대에는 이른바 플루럴리즘, 다원주의라 종교에서도 큰 영향을 미쳤다. 종교 간의 대화라든가 구원의 길이 하나일 필요는 없다는 여러 가지 말들이 유행처럼 번져갔다. 그것은 결국 포스트모던이라는 인문학과 사회과학 전반에 걸쳐 일어난 역사적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거기에 대한 성찰과 개발이 필요한 시대였다. 그러나 한국의 기독교는 그 이전의 종교적 도그마와 가치들로 그러한 조류를 억누르는 방법을 선택했었다. 아마 작금의 교회의 여러 현상은 그러한 선택의 부작용인지도 모른다. 자 그럼 생각해 보자. 과거로 회귀하는 방법이 힘들다고 한다면, 그럼 진리라는 것을 포기하고 다가 치적 사회에서 여러 가치가 공존하는 사회로 나가야 할까?


바디우는 여기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구조 내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에 괄호를 치고,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또는 예측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에도 엑스 표시를 하고, 순수하게 예측 불가능성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집중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사건 중에 그야말로 보편적인 것 모든 가치를 안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진리이다. 그리고 이 진리를 현재화 할 수 있는 사건은 언제나 어떠한 조건(상황, condition)에서 시작된다. 한국이란 나라의 어떤 정치적 상황에서(정치), 어떤 연구 담론에 의해 운영되는 하나의 과학적 상황에서(과학), 어떤 기대들이나 일반적인 규칙에 의해 지배되는 한 예술적 상황에서(예술), 또는 개인들간의 관계에서(사랑) 진리 사건은 출연한다 진리-사건(Truth-event)이 출연하면 어떤 이들은 무시해 버리고, 또는 부정하는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이를 알아차리고 이를 받아들인다. 이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주체들이 되며 이 진리-사건의 결과를 따르는 사람들의 시도를 진리-과정(Truth-process)이라 한다. (Kotsko, 78-79)


바디우의 생각에 좀 더 접근하게 위해 왜 그가 진리-과정의 예로 정치, 과학, 예술, 사랑을 말하면서 철학을 언급하지 않는가를 살펴보자. 결론부터 말하면 철학은 그 스스로 진리-과정을 도출해내지 못한다. 오로지 “진리란 존재한다.”고 말할 뿐이다. 철학은 하나의 독립적인 담론이 아니라 언제나 그 자신의 영역을 위해 외부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외부를 구성하는 것이 조건(Condition)이다.(Steven Corcoran, 2015, 68) 그 조건들을 바디우는 대표적으로 과학, 예술, 정치, 사랑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서구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울 플라톤의 철학은 바로 위의 네개의 조건들로 부터 그의 철학을 구성하였다. 그러므로 철학은 진리들이 머무르는 공간을 창조해내는 역할을 하고 이 공간 자체는 시간과의 관계를 통해 진리를 나타내게 된다. 즉, 진리-사건이 진리-과정이 되는 것을 감지하고 거기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 철학의 역할인 것이다.(Alain Badiou, 2009, 521)


아주 어설프게 바디우의 진리-과정과 철학의 역할에 대하여 설명하려 한 것은, 바로 바디우가 바울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이와는 전혀 다른 관점이기 때문이다. 과학, 예술, 정치, 사랑이란 조건에서 나타나는 진리-과정에 다시금 이름을 부여하는 철학은 비록 진리-사건이 그 이전에 계획되거나 예상되어진 어떤 것이 아니며 또한 하나의 지식의 형태를 가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진리로서 보편성을 확보해야한다. 바울은 이와는 달리 매우 구세대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신화적 요소’를 가진 ‘예수가 부활했다’는 오직 하나의 선언에 기반하고 있다.(Badiou, 2003, 108) 그리고 바울은 그 하나의 특수한 선언을 통하여 보편적 진리-과정으로 들어가는 매우 독특한 사유구조를 보여준다고. 곧 바디우는 바울이 ‘보편에 대한 첫번째 이론가들 중 하나’(실천의 반대인 이론이 아니라, 현실성의 반대로서의 이론)라고 말한다. 다음 웹진에서는 바디우가 이천년전의 신화적 선언으로 통해 보편성으로 나아갔던 바울을 현대로 소환하는 이유와 그 이유를 통한 바울의 현대적 의미를 살펴보기로 하자.


참고문헌 

Kotsko, Adam. Žižek and Theology. London: T & T Clark, 2008. 

Badiou, Alain, and Ray Brassier. Saint Paul: The Foundation of Universalism. Stanford, Calif: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3. 

Badiou, Alain. Being and Event 2, 2. London: Continuum, 2009. 

Corcoran, Steven. The Badiou Dictionary. Edinburgh: Edinburgh Univ. Press, 2015.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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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를 위한 변명[각주:1]

: 유대인의 왕, '노르웨이의 숲'으로 읽기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인)

 

빌라도는 또한 명패도 써서, 십자가에 붙였다. 그 명패에는 ‘유대인의 왕 나사렛 사람 예수’라고 썼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곳은 도성에서 가까우므로, 많은 유대 사람이 이 명패를 읽었다. 유대 사람들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말하기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십시오”하였으나, 빌라도는“나는 쓸 것을 썼다”하고 대답하였다. (요한복음 19: 19-22)



01. 빌라도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인식이 안 좋은 사람이 누구일까요? 보통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때마다 사도신경을 암송하는데, 빌라도라는 이름은 매주 암송하는 사도신경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이런 사도신경의 영향으로 그리스도교 역사가 계속되는 한,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아주 나쁜 놈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빌라도에게 그런 오명이 생기게 된 결정적 원인이라 할 수 있는 예수를 심판하는 장면입니다. 저는 과연 빌라도가 이렇게 사도신경에까지 올라 대대로 죽일 놈이라고 지탄받고 저주의 대상이 될 만한 인물인가, 라는 의문을 가지고 빌라도에 대한 나름의 변명을 오늘 하늘 뜻 시간을 통해 시도하려고 합니다.

빌라도는 로마가 이스라엘에 파견한 총독입니다. 예를 들어, 일본이 옛날 우리나라를 식민지화했을때 조선총독부를 두어 총독을 파견하지 않았습니까? 그 당시 로마의 종교는 다신교입니다. 로마는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등 많은 땅을 식민지로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엄격하게 다스렸지만 식민지 통치에 있어 종교적으로는 관대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종교였던 유대교를 인정하는 정책을 펼칩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거리가 등장합니다. 유대교 지도자들 (대제사장, 바리새파 등등)과 로마의 관계가 어떠했는냐? 하는 점이죠. 로마의 총독들은 식민지 국가의 민족지도자들에게 정치적, 경제적 특권을 부여하여 그들을 자기네 편으로 끌어들여 밀약관계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오직 목표는 원활한 세금징수와 노동력 제공입니다. 반란이 일어나지 않고 조용하고 평온한 임기를 보내는 것도 로마의 식민지 총독들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덕목이었습니다.


02. 빌라도의 어록

그런 빌라도가 지금 골치 아픈 일에 연루되었습니다. 예수라는 사나이 때문입니다. 대제사장과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처형하라고, 예수를 살려두면 민심이 이반될 것이라고 그러니 그 자를 빨리 제거해야 한다고 야단입니다. 그래서 지금 빌라도는 예수를 재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를 재판하는 장면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모두 다 나오는 장면이고, 예수의 죄목으로 십자가 위에 달린 죄패 “유대인의 왕”에 대한 기사 역시 4복음서에 다 등장합니다. 아래 각주에 빌라도가 재판에서 한 어록을 복음서 별로 달아놓았습니다. 아래 각주에 빌라도가 재판에서 한 어록을 복음서별로 달아놓았습니다.[각주:2] 마태, 마가, 누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의 빌라도 재판 사이에 있는 빌라도의 예수를 바라보는 관점과 심정의 차이가 느껴지시나요. 요한복음이 좀 더 질문의 층이 다양하고 심층적이라는 것은 느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대한 차이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문구를 다른 복음서에서는 누가 썼는지 불분명한데, 요한복음에서는 빌라도가 쓴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가 예수에 대한 조롱과 멸시를 위한 것이었다면, 요한복음에 나오는 빌라도가 선택한 ‘유대인의 왕’은 그것과는 좀 다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말하기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십시오”하였으나, 빌라도는“나는 쓸 것을 썼다”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영어로는 (What I have written, I have written)입니다. 카톨릭 성경에는 “내가 한번 썼으면 그만이오”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총독인 내가 이렇게 쓰겠다는데 왜 이렇게 토를 달지, 총독인 내가 이렇게 하겠다는데 왜 이렇게 말이 많아, 라고 해석할 수 있고, 심문 과정에서 예수를 대면하고 대화하면서 그 아우라와 품격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면서 정말 예수가‘유대인의 왕’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겠죠. 그래서 정말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것이라면.... 빌라도가 한“나는 쓸 것을 썼다”라는 답변은 그래서 많은 상상을 하게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03. '노르웨이의 숲' 혹은 '노르웨이산 가구'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는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올 무렵 당시 젊은이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죠. 젊은 청춘들의 사랑, 이별, 죽음, 삼각관계, 허무...이런 감정들이 하루키의 특유의 문체로 잘 전달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하루키앓이를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상실의 시대’의 원제가 <노르웨이 숲>입니다. 이 책의 제목과 관련된 이야기를 지금 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제가 좋아하는 비틀즈와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틀즈가 1965년에 본인들의 여섯 번째 앨범(Rubber Soul)을 출시합니다. 그 앨범에 수록된 곡 중 <노위전 우드>(Norwegian Wood)라는 곡이 있습니다. 북유럽 스칸디나비아반도에 있는 Norway(노르웨이)라는 나라 아시죠. Norweigian는 형용사로 쓰일때는 노르웨이의, 명사로 쓰일때는 노르웨이 사람으로 해석됩니다. 그렇다면 Norwegian Wood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노위전 우드>(Norwegian Wood)는 1987년에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 소설이기도 합니다. 하루키는 Norwegian Wood를 ‘ノルウェイの森 ’, 즉 ‘노르웨이의 숲’이라 옮겼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노르웨이의 숲>으로 알려 졌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못된 번역이라는 지적이 있어왔습니다. 통상 Wood 나무(혹은 가구로 해석되기도 함), Woods 가 숲(林)입니다. Norwegian Wood는 ‘노르웨이 나무 or 가구’로 번역하는 것이‘노르웨이 숲’으로 번역하는 것 보다 낫다는 것이죠.

제가 아래에 비틀즈의 Norwegian Wood 가사를 한글로 달아드리겠습니다. Norwegian Wood 나오는 부분만 영어로 남겨 둘께요. 여러분이 한번 판단해 주십시오. <노르웨이 숲>이 좋은지, <노르웨이 가구>가 좋은지를: “한때 난 사귀는 사람이 있었지. 아니 그 사람이 나랑 사귀어준 거라고 해야 하나. 그 사람은 방을 보여줬어. Isn’t it good? norwegian wood. 편히 있다 가라며 아무 곳에나 앉으라고 했지. 그래서 둘러보았지만 의자가 없더군. 바닥 깔개에 앉아 와인을 홀짝이며 시간을 죽였어. 2시까지 이야기를 나눴고, 그때 그 사람이 말했어. 이제 잘 시간이야. 자기는 아침에 근무라며 웃기 시작하더군. 난 아니라고 말하고는 욕조로 기어들어가 잤지. 눈을 떴을 때는 혼자였고 새는 날아가버렸더군. 그래서 난 불을 질렀어. Isn’t it good? norwegian wood.”

영어로 쓰여져 있는 부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저는 솔직히 둘 다 맞지 않는 것 같아요. 갑자기 노르웨이 가구와 숲 이야기를 왜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택일을 하라면 둘 다 써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멋지지 않아(짱이지, 좋지 않아) 노르웨이 가구 or 노르웨이 숲”. 저는 다 쓸 수 있다고 봅니다. 그냥 후렴구처럼 “멋지지 않아요. 노르웨이 숲”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고, 자기 집에 있는 노르웨이 가구를 자랑하면서 “멋지지 않아요 (우리집) 노르웨이 가구”라고 말할 수도 있죠.

어떤 문학작품을 해석하려면 당시 문화와 관습과 그 사회의 배경을 아는 것이 중요하죠. 비틀즈 전문가들에 의하면 1960년대 영국에서 노르웨이산 가구(Norwegian Wood)가 인기였다는 겁니다. 이 노래에서는‘노르웨이 숲’ 보다는 ‘노르웨이 가구’가 더 맞는 해석이다, 라고 주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노르웨이 숲’이든 ‘노르웨이 가구’든 간에 그 부분의 가사가 이 노래 전체에서 이질적인 그로테스크한 불순물 같다는 인상을 지을 수 없습니다.


04. 돌발, 우연 그리고 진실

하루키는 영미소설 번역가이기도 합니다. 하루키가 이러한 사실을 몰랐을까요. 그 누구보다 더 민감하고 예민하게 이 사실을 감지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루키가 왜 ‘노르웨이의 숲’이라고 번역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한마디쯤 답변을 했을법도 한데 별다른 하루키의 대응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2011년에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이영미 역, 비채)에 보면 ‘노르웨이의 나무는 보고 숲은 못보고’라는 글에서 이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번역한 ‘노르웨이의 숲’은 오역이 아닌가, 라는 질문에 하루키는 No, 나는 잘못 번역하지 않았다, 라고 답을 합니다. 왜냐하면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라는 것이 하루키의 변론이유입니다. 실제로 비틀즈 노래를 들어보면, Isn’t it good? Norweigan Wood가 들릴 듯 말 듯 애매하게 들립니다. 전체적으로 곡을 지배하는 메시지는 모호하고 몽롱하고 흐릿합니다. 그 노래 가사 중 배치된 돌출적인 Isn’t it good? Norweigan Wood 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하루키는 그 모호함과 불편함이 이 곡의 생명이고 메세지라 말합니다. 자기가 번역한 ‘노르웨이의 숲’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노르웨이산 가구’역시 맞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하루키는 말합니다. 그 정답을 말해버리는 것이 이 곡에서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정답을 말해버리면 이 곡의 생명은 끝난다는 것이죠. 그냥 답답하고 뭔가 풀리지 않는 불쾌함과 군더더기를 남기면서 그 곡은 보존되는 것입니다.

하루키는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들려줍니다. 비틀즈 멤버가 4명이었죠.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스타). 조지 해리슨 사무실에 있었던 직원의 증언에 따르면, 원래 제목이‘Knowing s/he Would’였답니다. 문제가 되는 가사도 “Isn‘t it good? knowing s/he would”였다는 거죠. “멋지지 않아? 그(녀)가 하려는 것을 안다는 건 말이야.” 전체적인 노래 가사가 몽환적이고 약간 썸타는 분위기도 있고, 무슨 로맨틱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상황을 전제로 하는데, 서로 호감이 있는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발생할 것 같은 아찔한 순간을 예상하는 말이 바로 knowing s/he would입니다.

그런데 음반 회사 측에서 가사가 선정적이어서 검열에 걸릴 수도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자, 존 레넌이 홧김에 knowing s/he would 를 Norweigan Wood로 바꿔버렸다는 겁니다. 어쩌면 Norweigan Wood, 즉 <노르웨이의 숲> 혹은 <노르웨이산 가구>는 뻥카입니다. 그렇다고 한 세대가 흐른 시점에서 모두가 Norweigan Wood로 불렀던 노래가사를 knowing s/he would로 바꿔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죠. 지금까지 저는 Norweigan Wood를 둘러싼 여러 이야기들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Norweigan Wood는 무엇일까요?


05. 진리가 작동하는 방식에 관하여

저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빌라도를 쫓아가면서 하루키도 생각이 났고, 존 레논 생각도 났습니다. 하루키가 생각이 난 이유는 Norweigan Wood를 <노르웨이의 숲>이라고 번역해놓고 그것이 틀리지 않느냐는 지적에 정답이 없으므로 나의 번역은 틀리지 않았다고 말해버리는 배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쿨함. 그래도 그때는 <노르웨이의 숲>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라고 밝히는 그의 솔직함 때문이었습니다. 존 레논이 생각나는 이유는 원래는 knowing s/he would 였는데, 검열당국의 성화에 못 이겨 비록 가사를 Norweigan Wood로 바꿀 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계속 불명확하게 Norweigan Wood를 읊조리면서 knowing s/he would로 부르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에서입니다.

유대인의 왕은 메시아죠. 우리가 처한 압제와 구속에서 해방시켜줄 메시아의 도래를 유대인들은 대망하고 있습니다. 로마제국 하에서는 그런 메시아를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 내란죄, 국가보안법에 저촉을 받는 큰 죄일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조롱하면서 예수의 십자가에 ‘유대인의 왕’이라 써서 붙입니다. 네 주제에 우리의 왕이라니. 어림없는 소리고 웃기는 소리다, 라는 경멸의 메시지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에 달려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 전하는 빌라도가 직접 써서 붙인 ‘유대인의 왕’은 좀 느낌이 다릅니다. 빌라도는 ‘어쩌면 이 자가 정말 유대인의 왕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빌라도는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죄패에 쓰라는 유대인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굳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면서 “나는 쓸 것을 썼다”라는 말을 남깁니다. 어쩌면 유일하게 예수를 메시아로 생각하고 있었던 최초의 인물은 스승이 잡히고 뿔뿔이 흩어졌던 예수의 제자들이 아니라 빌라도 아니었을까. 진짜 메시아는 이렇게 남루하고 초라하게 우리 곁에 머물다 가는구나, 라는 깨달음을 빌라도 혼자 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는 진심을 담아 정말로 예수가 메시아였다, 라는 의미에서 ‘유대인의 왕’이라 썼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빌라도를 소환하여 그에게 여러 가지를 묻고 싶어졌습니다. 당신이 썼던 ‘유대인의 왕’은 무슨 의미였고, 당신이 만났던 예수는 어떤 인물이었냐고 말입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다시 존 레논이 생각났습니다. knowing s/he would를 Norweigan Wood로 부르는 존 레논, 아니 Norweigan Wood를 knowing s/he would 부르는 존 레논. 어쩌면 이런 교란이 존 레논이 자신의 노래를 부르는 방식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교란의 방식이 Norweigan Wood가 텍스트로 작동하면서 살아남았던 이유입니다. 전통적으로 알고 있는 유대인의 왕(메시아), 유대인들이 예수를 조롱하면서 그의 십자가 위에 죄패로 붙인 유대인의 왕(메시아), 빌라도가 예수를 대면한 후 쓴 유대인의 왕(메시아), 어쩌면 빌라도는 전통적인 유대인의 왕(메시아) 서사를 교란시키면서 유대인의 왕(메시아)에 대한 서사를 다시 써 내려갔던 인물은 아닐까. 저자가, 지금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리면서 절규하지만 자기 목숨 하나도 구하지 못하고 있는 저 사람이 진짜 메시아라고 말입니다. 이 비밀을 누설하는 바람에 빌라도는 사도신경에 등장하여 그 후로 2000년이 흐른 지금까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원성과 아우성을 받는 인물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이렇듯 빌라도가 말한 ‘유대인의 왕’은 우리의 (신앙, 혹은 신학의)경계를 교란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어쩌면 그 경계에 대한 교란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진리가 전달되어 왔던 것은 아닐까. 예수가 존재했던 방식과 그의 행위가 그것을 보증하고 있습니다. 그것의 절정이 십자가 사건이고요. 유대인들의 메시아주의가 지배했던 세상은, 로마의 평화가 제국을 지배했던 세상은 온갖 경계로 가득했던 세상이었습니다. 그것은 종교적 도그마가 만든 경계였고, 제국의 질서가 만든 경계였습니다. 그로부터 2천년이 흐른 21세기, 자본이 지배하는 지구촌의 상황도 그리 이전과는 다르지 않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은 <할례를 받은 사람/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 정상인/장애인, 남자/여자, 백인/흑인, 내국인/난민, 이성애자/동성애자, 제국의 시민/ 그 밖의 인간>이라는 이항 대립의 원칙으로 구성됩니다. 빌라도가 물었던, 그리고 직접 예수의 십자가위 죄패로 썼던‘유대인의 왕’은 그 나누어진 경계를 교란시키고 흔들고, 결국에는 경계를 무너뜨리는 기표가 아닐는지.


06. 지금은, 2018 사순절

저는 빌라도가 자기의 목숨을 구하지도 못하고 십자가에 매달려 몸부림치며 죽어가는 그 사람이, 군중들에게 ‘유대인의 왕’이라 조롱받는 저자가 진정한 메시아라는 비밀을 알았고, 그리고 예수와 만났던 그 순간이 자신에게 자유와 해방이 임했던 경이적이고 매혹적인 한 순간이었다, 라고, 그 찰나의 변화가 사실은 내 모든 선택의 순간과 삶의 고비마다 다짐과 결단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고 간증하지 않았을까, 라는 순진하고 나이브한 생각을 잠시 해봤습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여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의 사건이, 그 실패한 메시아 사건이 예수의 죽음으로 사라지는 일회적인 이벤트가 아니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당장에 급한 불만 끄면 위기를 모면할 것이라고 빌라도는 생각했겠지만,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그 불은 꺼지지 않고 불씨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져 또 다른 메시아 사건의 원인이 되었고 그곳의 질서를 교란시키는 기재가 되었습니다. 예수에 의해 감행되었던 실험은 유일회적인 실패한 기억으로 화석이 된 채로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계속 역사에서 재생 반복되면서 더 큰 음모와 반란, 그리고 변혁의 시나리오가 되어 지금까지 유전되면서 우리에게 강한 영향을 미치리라고는 빌라도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그리스도교의 믿음은 출발한다고 봐야겠죠. 그것에 대한 해석은 <노르웨의 숲>을 독해하는 방식처럼 지난하겠지만, 신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사건의 의미와 그것의 현재화를 가능하게 하는 요인이 무엇인가를 둘러싼 치열한 고민과 기도를 회피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을 저는 신비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사순절과 고난주간과 부활절은 바로 그런 그리스도교가 갖는 신비를 묵상하는 기간이고, 그것에 참여하는 시간이구요. 지금 우리는 2018년 사순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 웹진 <제3시대>



  1. 2018년 3월 11일 한백교회 ‘하늘 뜻 나누기’(설교) 원고를 수정. 보완했습니다. [본문으로]
  2. 1) 마태복음: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오?" (27:11), "사람들이 저렇게 여러 가지로 당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데, 들리지 않소?" (27:13), "여러분은, 내가 누구를 놓아주기를 바라오? 바라바 [예수]요?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요?"(27:17), "이 두 사람 가운데서, 누구를 놓아주기를 바라오?" (27:21), “그러면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는,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요?" (27:22), "정말 이 사람이 무슨 나쁜 일을 하였소?" (27:23),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책임이 없으니, 여러분이 알아서 하시오."(27:24) 2) 마가복음: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오?" (15:2),"당신은 아무 답변도 하지 않소? 사람들이 얼마나 여러 가지로 당신을 고발하는지 보시오." (15:4), "여러분은 내가 그 유대인의 왕을 여러분에게 놓아주기를 바라는 거요?" (15:9), "그러면, 당신들은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그 사람을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요?" (15:12), "정말 이 사람이 무슨 나쁜 일을 하였소?" (15:14), 15절에 가서 넘겨줌. 3) 누가복음: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오?" (23:3),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는 아무 죄도 없소." (23:4), "이 사람이 갈릴리 사람이오?" (23:6), "그대들은, 이 사람이 백성을 오도한다고 하여 내게로 끌고 왔으나, 보다시피, 내가 그대들 앞에서 친히 신문하여 보았지만, 그대들이 고발한 것과 같은 죄목은 아무것도 이 사람에게서 찾지 못하였소. 헤롯도 또한 그것을 찾지 못하고, 그를 우리에게 돌려보낸 것이오. 이 사람은 사형을 받을 만한 일을 하나도 저지르지 않았소. 그러므로 나는 이 사람을 매질이나 하고, 놓아주겠소."(23:14-16),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나쁜 일을 하였단 말이오? 나는 그에게서 사형에 처할 아무런 죄를 찾지 못하였소. 그러므로 나는 그를 매질이나 해서 놓아줄까 하오." (23:22) 후에 백성의 아우성이 너무 커서 넘겨줌 4) 요한복음: “당신이 유대 사람들의 왕이오?”(18:35),“당신은 무슨 일을 하였소?”(18:35),“당신은 왕이오?”(18:37), “진리가 무엇이오?”(18:38),“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소, 유월절에는 내가 여러분에게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관례가 있소. 그러니 유대사람들의 왕을 놓아주는 것이 어떻겠소?”(18:38-39), "보시오, 내가 그 사람을 당신들 앞에 데려 오겠소.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소. 나는 당신들이 그것을 알아주기를 바라오." (19:4), "보시오, 이 사람이오" (19:5), "당신들이 이 사람을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소" (19:6), "당신은 어디서 왔소?"(19:9), "나에게 말을 하지 않을 작정이오? 나에게는 당신을 놓아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처형할 권한도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 (19:10),"보시오, 당신들의 왕이오." (19:14), "당신들의 왕을 십자가에 못박으란 말이오?" (19:15), "나는 쓸 것을 썼다"(19:2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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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8일 한숨결교회 열두 번째 예배 메시지

우리에게 여전히 진리가 필요하다면.......


정용택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빌라도가 예수에게 물었다. “진리가 무엇이오?” (요한복음 18:38)
당신들이 진리를 알지니, 그 진리가 당신들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8:32)


1. 진리가 무엇이기에?

요한복음 18장 28절부터 38절까지의 본문은 “빌라도의 심문”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가 빌라도 앞에 서게 되어 그로부터 심문을 당하는 이야기는 네 복음서 전체에 모두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역시나 이 부분에서 다른 복음서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에서 빌라도는 예수에게 딱 한 가지만 질문합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그러자 예수는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합니다(23:3). 마가복음과 마태복음도 동일한 질문과 답변이 한차례 오고가고, 다음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예수가 고발을 당하는데도 정작 자신을 위한 아무런 변호도 하지 않고 있으니까 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라고 묻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되고, 빌라도는 예수의 이런 침묵을 놀랍게 여기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반면에 요한복음은 예수와 빌라도 사이에 최소한 네 차례의 질문과 대답이 오고 가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질문까진 공관복음서와 동일합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18:33). 그런데 그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공관복음서와 전혀 다릅니다. “내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말은 너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너한테 해 준 말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냐?” 예수는 빌라도의 질문을 다시 자신의 질문으로 바꾸어서 빌라도에게 던집니다. 이번에는 빌라도가 답변을 합니다. 누가 심문을 하고 누가 심문을 당하고 있는 것인지 헷갈리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빌라도가 대답합니다. 그리고 이 대답은 다시 예수를 향한 질문이 됩니다. “내가 유대인이냐? 유대인도 아닌 내가 니가 유대인의 왕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겠느냐?” 그리고 또 묻습니다. “니네 나라 사람들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나한테 재판하라고 넘겼다. 너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그들이 너를 나한테 넘긴 것이냐?”

그런데 예수는 자신이 뭘 했는지는 말하지 않고, 그냥 자신의 ‘나라’가 어떤 것인지에 관해서만 말합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의 전체적인 문맥에서 이 말은 정확히 종말론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단순히 세속적인 의미의 왕국에 반대되는 영적인 왕국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시간적인 구조에 대비되는 그런 나라입니다. 왕국은 왕국이되, 지금 여기의 시간대, 즉 세상에 속하는 왕국이 아니라 도래하고 있는 종말론적 시간의 구조 안에 있는 그런 나라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빌라도가 제대로 알아들을 리 만무합니다. 그는 재차 묻습니다. “됐고! 그러니까 니가 왕이라는 것 아니냐?” 예수는 대답합니다. “그래. 맞다. 나 왕이다. 내가 왕이 되려고 태어났고, 왕이 되기 위해 이 세상에 와서 진리를 증거했다. 진리에 속한 사람이라면 내 말을 알아 듣게 되어 있다.” 그러자 빌라도가 마지막으로 의미심장하게 묻습니다. “진리가 뭥미?” 예수와 빌라도의 문답이 시종일관 뭔가 엇박자를 내고 있다가 드디어 빌라도가 예수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고 핵심적인 물음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예수의 답변이 없습니다. 예수는 진리가 무엇이냐는 빌라도의 질문에 과연 무엇이라 답변했을까요? 혹시 다른 복음서에서처럼 침묵했을까요? 오늘 메시지의 초점은 예수에게 진리란 무엇이었고, 나아가 예수의 그러한 진리 이해가 오늘 이곳의 우리 한숨결교회에 어떠한 성찰의 여지를 제공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보는 데 있습니다.

2. 정말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했던가요?

요한복음에는 진리, 곧 알레떼이아(αλληθεια)라고 하는 단어가 유독 많이 등장합니다. 알레떼이아가 신약성서 전체에서 98회 정도 등장하는데, 요한복음에서만 무려 20회나 등장합니다. 바울 서신을 다 합쳐도 44회 정도 나오고, 공관복음서 세 권을 다 합쳐도 7회 밖에 나오지 않는 것을 감안하면 요한복음 저자가 얼마나 이 단어를 선호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요한복음 어디에서도 진리가 무엇인지를 명쾌하게 설명해주고 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저 세례 요한이나 예수가 이 진리에 대해 증언하러 왔는데,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이고, 예수가 곧 진리이며, 예수 혹은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을 향해 나아가고, 진리로 사람들은 거룩해질 수 있다 정도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물론 이런 얘기 갖고는 진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진리를 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명확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예외적으로 주목한 만한 진술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8장 32절의 “당신들이 진리를 알 것이니, 그 진리가 당신들을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을 처음 듣는 분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너무나도 유명하여 가장 자주 인용되는 구절들 중 하나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해봅니다. “진리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그것이 곧 진리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쉽지 않습니까?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것, 그것이 곧 진리이며, 자유롭게 해주지 못한다면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데 정말 그렇던가요? 여러분은 진리를 앎으로 인해 과연 지금 자유롭습니까? 요한복음의 문맥에서 진리를 안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을 뜻한다고 했을 때,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 이 순간에도 여러분은 충분히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까? 진리는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라고 예수는 말하고 있지만, 우리의 경험 속에서 진리는 별로 우리를 자유롭게 해준 적이 없습니다. 외려 진리는 우리를 더욱 숨 막히게 하는 것이었을 뿐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도 그렇겠지만, 우리 시대 사람들에게 진리는 더 이상 가슴 설레는 단어가 아닙니다. 그간 진리의 이름으로 자행된 수많은 폭력과 야만의 역사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종교는 진리를 참칭하면서 자유를 억압해온 대표적인 집단이었습니다. 엔도 슈샤쿠의 소설 <침묵>이나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은 종교에 내재하는 진리와 자유 간의 관계의 역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만큼 무서운 자도 없는 법입니다. 진리를 살리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죽이려 했기 때문이지요.

흔히 철학적인 의미에서 진리라고 하면 적어도 ‘참되고 옳은 것’, 더 나아가 그 무엇을 바로 그렇게 ‘참되고 옳게 하는 것’이라는 최소한의 정의를 만족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참됨과 옳음을 판단할 수 있는 근거나 기준이 여전히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정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정답이 있을 수도 없는 그것에 대해 역사는 어떤 특정한 것이 진리라고 강요해왔고, 그렇게 강요된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는커녕 구속하고 억압해왔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시대에 진리는 이제 진부한 것이고 고리타분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굳이 기독교 신앙적 맥락에서 진리라고 할 수 있을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어도, 사람들은 진리 일반에 대해 더 이상 긍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진리?! 세상에 그런 게 어딨어?” 기독교인이건 아니건 포스트모던 사상의 물을 조금이라도 먹고 나면 그렇게 말합니다.

이러한 사고를 대변하는 아이콘은 단연 20세기 최대의 회의주의적 사상가라 할 미셸 푸코가 아닐까 싶습니다. 폴 벤느(Paul Veyne)라고 하는 역사학자에 따르면, 푸코는 죽기 25일 전 가진 대담에서 그러한 면모를 확실히 보여주었습니다. 대담자가 그에게 질문했습니다. “어떤 보편적 진리도 긍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당신은 회의주의자 아닌가요?” 그가 대답했습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푸코는 너무 일반적인 모든 진리, 시간을 초월한 우리의 모든 거대한 진리를 의심했습니다. 푸코가 겨냥하는 그런 의심스러운 진리의 범주에 기독교 신앙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가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물론 이때 제가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각 개인에게 경험된 그런 차원의 실존적인 신앙 대상으로서의 예수가 아닙니다. 차라리 세상의 모든 지식과 원리 위에서 작동하는 초월적인 규범이자 명제가 되어버린 ‘교리’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렇게 교리로서 정착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개념은 세상이 변하고 상황이 달라지고 믿는 사람의 삶의 자리가 아무리 바뀌어도 그 자체로 변하지 않는 ‘진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들은 그와 같은 형식으로 믿고 계십니까? 제가 아는 한 이 자리에 그런 교리적 진리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계신 분은 없는 것 같습니다. 교리적 근본주의자를 자처하는 분은 계시지만, 제가 보기엔 결코 근본주의자가 아닙니다. 근본주의자라고 하기엔 너무나 자유로운 삶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익히 경험해본 바 교리적 근본주의자는 종교적으로나 신앙윤리적으로 어떠한 자유의 여지도 스스로에게 그리고 타인에게까지 허락하지 않는 철저함을 보여줍니다. 그 철저함이 없다면 결코 교리적 근본주의자일 수 없습니다.

다시 본래의 맥락으로 돌아와서 교조적인 의미 혹은 고전철학적 의미에서 진리를 이해했을 때,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예수의 말은 더 이상 진리일 수 없습니다. 예수가 말한 진리를 새로운 개념적 현실에서 해석하지 않는 이상, 예수의 말은 우리에게 아무런 매력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고전적인 철학의 진리관을 그대로 따라서, 예수가 말한 진리를 받아들일 경우, 진리란 동일성, 보편타당성, 객관성, 만물의 본질, 영원불변성, 안정성, 초월성....... 뭐 그런 것에 다름 아닌 것일 텐데, 그러한 진리는 언제나 자기 이외의 것들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자기충족적이기 때문에, 따라서 다른 존재 내지는 다른 특성이 끼어들 여지를 찾기 어렵습니다. 다시 말해 자유가 허용되고 행사될 공간을 찾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진리와 자유는 결코 양립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가 의도했건 그렇지 않건, 우리의 상식 속에 자리 잡은 그런 의미의 진리 개념으로는 결코 자유롭게 하는 진리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의 말을 틀렸다고 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갖고 있는 진리에 대한 상식적인 편견부터 고칠 필요가 있습니다. 일단 그러기 위해서는 자유롭게 하는 것만이 진리라고 전제를 해야 합니다.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즉 다름을 허용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같음’의 진리란 그저 맹목적인 순종만을 강요하는 교리일 뿐, 주체적인 혹은 주체 각자의 성찰과 고민의 결과로 나온 것은 아닙니다. 신앙고백에서 교리적 고백이 무의미한 것은 교리는 주체의 개별적 경험과 상황적 특수성을 배제하기 때문입니다. 교리는 보편지향적이지 개별지향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느 진보적인 신학자는 진리와 자유의 관계의 위상을 역전시켜, 이제는 “자유가 너희들을 진리하게 하리라”는 도발적인 명제를 제출하기도 했습니다. 자기절대화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무조건적 진리를 거슬러 서로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터져 나오는 개별적인 다름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자유에 상대적으로 더 무게를 실어주자는 것입니다.

3. 다시, 진리가 우리에게 여전히 필요하다면

자, 그럼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그런 의미의 진리를 이제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요? 과거 우리가 알고 있었던 그런 의미의 진리에서는 결코 자유로움을 찾을 수 없었기에, 우리는 자유롭게 하는 것만이 진리라는 새로운 생각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새로운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모든 것이 다 진리인 것이냐는 것입니다.

사실 진리에 비해서 정의 내리기가 더 어려운 것이 바로 이 자유라는 개념입니다. 단순히 억압이나 강제가 없는 상태라는 소극적 의미에서의 자유에서부터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선택할 수 있는 적극적인 행위로서 자유의 의미에 이르기까지 실로 광범위한 자유의 스펙트럼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자유라고 하면 개별적인 다름을 지향하는 것으로서, 저마다의 길을 갈 수 있는 조건이나 능력을 뜻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자유는 서로 간에 다를 수 있는, 아니 다를 수밖에 없는, 조건과 상황에 주목하는 요소인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의미의 자유가 현대 사회에서는 정치적 실천의 차원이나 사상적 신념의 차원 보다는 고용의 자유, 해고의 자유, 투자의 자유, 소비의 자유, 통치의 자유 같은 자본주의적 의미로만 통용되고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하여 우리에게 감각적으로 더욱 친숙한 자유는 사상의 자유, 종교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 같은 것 보다는 말그대로 소비생활의 자유, 즉 원하는 만큼 먹고 살 수 있는 그런 자유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자유를 우리에게 허락해줄 수 있는 것이 진리라고 한다면, 결국 진리 중의 진리는 ‘자본’이라고 해야 합니다. 예수에서 자본으로 진리가 바뀌는 것이지요. 상황이 이렇게 되어 버리면, 애써 지금껏 우리가 진리의 개념을 자유의 맥락에서 되살리려 노력했던 것도 무의미해지고 맙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종교적으로나 철학적인 의미에서 진리를 새롭게 발견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으며, 그저 열심히 각자 돈 버는 데 더 매진하고, 교회는 그 자본이라고 하는 진리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강화하기 위한 모임으로 활용하면 될 뿐입니다.

우리 한숨결교회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앞서 말한 그런 의미에서 진리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믿고 있는 교회는 분명 아닌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교리적으로 믿는다는 것은 자기 삶의 특정한 맥락과 상황성에 대한 고민 없이 전통적으로 교회가 신조화한 그대로 예수를 고백하겠다는 것이며, 또한 성경을 교리적으로 해석하겠다는 것은 성경에 대한 모든 역사적, 문학적, 이데올로기적 비평과 재해석을 포기하겠다는 것일텐데, 그러한 모든 것들은 결국 생각이나 고민 따위는 없이 그냥 교회에서 말하던 그대로 기독교를 계속 믿겠다는 것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제가 단언컨대, 그런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하자고 굳이 한숨결교회에까지 나오고 계신 분은 없을 줄로 압니다. 우리가 더 이상 교리적 진리로서 기독교를 믿지 않는다고 할 때, 그 말 속에는 각자가 경험한 하느님의 다른 얼굴과 신앙사건의 다른 결들, 기독교라고 하는 종교의 역사성과 영토성에 대한 인정, 기독교 내의 다양한 분파와 전통에 대한 인정, 성서의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들, 타종교와 종교 이외의 다양한 문화와 현상들 가운데서 일어나는 누미노제의 가치, 기독교만이 절대적인 보편 진리이고 구원의 길이라는 사고의 거부 등을 일차적으로 긍정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일단 진리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을 몸으로나 삶으로 이미 믿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자유로움을 용납하지 않는 그런 교리적 진리의 차원에서 기독교를 믿고 있는 분은 이 자리에 결코 없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자유롭게 하는 것만이 무조건 진리라고 믿고 있는 그런 사람들은 또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획일적인 같음을 강요하는 진리에 반대하여 차이와 다양성의 자유를 옹호한다고 해서, 자본이 약속하는 그런 삶의 자유를 진리로 절대화하는 그런 이들도 아닐 것입니다. 그럴 것이면 굳이 한숨결교회를 만들고 예배를 나눌 이유도 없었겠지요.

우리는 진리에 대하여 자유의 가치를 끝까지 옹호하는 사람들이고, 더 나아가 자유롭게 할 수 없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생각에 (우연히든 아니든) 일치하여 여기까지 모일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우리 또한 다른 이들처럼 역설에 부딪힐 수도 있습니다. 절대적 진리의 억압에 대한 거부에서 비롯된 자유의 옹호가 자본의 자유와 같은 무질서의 자유와 혼동되어 결국 모든 것이 진리일 수도 있으며, 그렇게 모든 것이 다 진리라고 한다면 굳이 진리라고 할 만한 것이 세상에 더 이상 없다고 하는 상대주의 내지는 허무주의에 빠져 버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진리라고 하는 가치를 완전히 버리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진리를 버린다는 것,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가치, 혹은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어떤 삶의 양식이 갖는 가치를 버리는 것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진리에 대해 다시 한 번만 생각해보자고 말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한숨결교회를 통해서 교회라고 하는 것 혹은 기독교적 신앙이라고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돌아보자는 뜻에서 그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말한 진리를 새로운 사고의 빛에서 재해석해보자는 것, 기독교적 신앙 혹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을 한숨결교회의 맥락에서 우리 나름대로 새롭게 만들어나가 보자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이 진리에 대한 예수의 개념 규정이라고 했을 때,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진리를 주어로 놓았을 때 술어는 “자유롭게 할 것이다”가 됩니다. 여기서 술어의 시제는 현재형이 아니라 미래형입니다. 진리란 현재에 속한 것이 아니라 미래에 속한 것입니다. 진리는 지금 현재의 차원에서는 영원히 알 수 없는 미지(未知)의 것입니다. 오직 미래의 차원을 향해 열려 있는 것입니다.

유교의 고전 『중용』에서는 미발(未發)을 천하의 바탕(本)이라고 했습니다. 이미 알려진 것[기지(旣知)], 이미 발한 것[이발(已發)]은 오직 아직 알려져 있지 않고(미지), 아직 발하지 않는 것(미발)을 근본에 두어야 제 위치를 잡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미지와 미발로서 진리는 현재에는 아직 없고 오직 미래에만 있을 수 있는 그 무엇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가능성으로서 혹은 잠재성으로 엄연히 현실 안에 있고, 현재와 현실의 바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현재와 현실에 ‘나아갈 바’, 즉 지향성을 줍니다. 그래서 저는 진리를 ‘이것이면서 동시에 그 너머’라고 일컫습니다. 풀어 말하면 ‘이것이면서 동시에 그 너머’란 ‘그 너머(미지)에 대한 지향을 근본으로 ‘이것(기지)’을 조율한다는 뜻입니다. 미지는 늘 현실의 바탕에 있고, ‘자유롭게 함’으로서의 진리라고 하는 것은 ‘그 너머’에 대한 운동적 지향의 가장 포괄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부터 우리 한숨결교회가 모종의 지향성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요청이 있어 왔습니다. 저는 우리의 지향성을 굳이 찾자면 바로 이러한 미지의 차원에서, 다시 말해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서의 진리”라고 하는 현실 너머의 현실에서 찾고 싶습니다.

진리는 우리가 만들어갈 자유로움에 의해 규정되는 그 어떤 것입니다. 진리는 실체가 분명한 물질명사가 아닙니다. 추상명사로서 진리라고 하는 주어의 의미는 오로지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하는 술어에 의해 규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말한 그 진리라는 것, 결국 우리가 지금부터 앞으로 만들어 나가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교리로서의 진리, 우리와 상관없이 과거에 누군가에 의해 이미 확정된 그런 것을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부터 진리를 우리 마음대로 새롭게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당연히 그 진리는 우리를 언제나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어떤 것이 참된 자유인지를 모릅니다. 결국 우리는 미래의 진리를 지향하기 위해 자유로움에 대한 모험을 함께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리로서의 진리를 버리는 것만으로는 아직 자유로움에 도달하기엔 부족함을 많이 느낄 것입니다. 자유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 동시에 더 적극적으로 무엇을 향한 자유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적극적인 자유로움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최소한 우리의 자유가 자본의 자유는 넉넉히 넘어설 수 있는 그런 자유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자유로움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유’를 누릴 것이며, 그 자유를 누림이 우리에겐 즉각적으로 새로운 진리가 될 것입니다. 저는 한숨결교회에서 여러분들과 함께 자유를 누리고 싶습니다. 진정한 자유를 향해 나아가고 싶습니다.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그 과정에서 진리를 새롭게 알고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한 번 만나고 싶고, 교회라고 하는 그 이상적 공동체를 새롭게 경험해보고 싶습니다. 한숨결교회가 자유의 공동체, 진리의 공동체, 아직 단 한 번도 실현된 적 없는 그런 미래의 교회공동체가 되어 가기를 꿈꿉니다.

우리가 그러한 꿈을 함께 꾸는 그 순간부터 그 미래는 우리의 현실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 곧바로 자유인으로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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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해츨링
    2010.01.06 00:44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좋은글 보고갑니다.
    저에게 있어서 '완성형'이라는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 해주는 글이였던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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