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생명의 말



심범섭



   올해 5월에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The Man Booker International Prize)을 받은 소설 <채식주의자>는 채식이라는 소재를 중심으로 우리 일상에 만연한 폭력과 평범한 사람의 마음에 숨어있는 폭력성, 더불어 소통, 이해, 소외, 책임, 시간, 죽음 등 삶에서 중요한 주제를 다루는 작품이다. 서로 연결된 이야기 세 편(“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상당히 복잡하고 매우 어렵다. 작가 한강도 상을 받은 다음 한 매체와 인터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조금 어렵게 느껴지더라도 내치는 것이 아니라 호기심을 갖고, 질문을 나눠갖는 마음으로 읽어주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긴다.” 이 소설을 처음 읽으면서 재미있게, 또는 몰입해서 읽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면서 읽은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믿는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상징성와 암시성이 높은 대목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런 작품을 자기 나름대로 유기적으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되풀이해서 읽는 것과 더불어 ‘한달만에 토익 점수를 200점 올리겠다!’라고 하는 학생 같은 열의도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물론 나 자신도 이렇게 성실한 자세로 읽은 것은 아니지만 <채식주의자>를 읽으면서 특히 흥미로웠던 한 대목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와 관련한 몇 가지 문제를 함께 생각해보자고 감히 제안하고자 한다.   


1. 불편하지만 낯설지 않은 진실


   <채식주의자>의 주인공은 영혜라는 젊은 여자로서 어느날 무서운 꿈을 꾸기 시작하면서 채식을 하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정신병원에 간 다음 급기야 나무가 되겠다며 음식 먹는 것 자체를 거부하면서 죽어가는 인물이다. 이 소설에서는 특히 가족 구성원 사이에서 경험하는 여러가지 폭력과 폭력 충동이 묘사 되는데, 그 가운데 폭력성이 가장 암시적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가장 복잡하면서도 또 충격적인 예는 영혜의 언니인 인혜가 자살을 시도하는 대목이라고 여겨진다. 인혜는 동생과는 달리 일상성의 경계 안에 머무르며 좀 지나칠 정도로 남을 배려하고 또 가족에 대한 책임감도 투철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사실 지나치게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살면서 자기 삶을 잃어버린 사람이다. 그리고 남편과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고 때로 그로부터 성관계를 강요당한다. 이런저런 계기로 그는 자신의 이런 소외를 깨닫게 되고 어느날 새벽 (사실 남편으로부터 또 한번 ‘배우자 강간’을 당한 다음) 급기야 삶의 의욕을 모두 잃고 자살을 결심한다.

  

    이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더이상은 견딜 수 없다. 

    더 앞으로 갈 수 없다. 

    가고 싶지 않다. (p.200)  


    인혜는 자신이 사는 아파트 뒷산에 올라가 나무에 목을 매달아 죽기로 한다. 집을 나서기 전 그가 이를 위해 준비하는 행동은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마치 추운 듯 떨려오는 몸을 일으켜 그녀는 장난감을 놓아 두는 방의 문으로 다가갔다. 지난 일주일 동안 저녁마다 지우와 함께 장식해 걸어놓은 모빌을 떼어낸 뒤 끈을 풀기 시작했다. 단단히 묶어두었기 때문에 손가락 끝이 아팠지만, 참을성 있게 마지막 매듭을 풀어냈다. 장식했던 별 모양의 색종이와 셀로판지를 차곡차곡 모아 바구니에 정리한 뒤, 끈을 말아 바지주머니에 넣었다. (p.201)  


    인혜는 목을 매는 도구로서 왜 굳이 아들 지우와 같이 만들었던 모빌 끈을 선택할까? “단단히 묶어두었기 때문에” 풀어 챙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에도 하필 이 끈을 가져가는 것을 보면 뭔가 분명한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혜가 이 끈으로 나무에 목을 매어 죽은 광경을 상상하면 우리는 그의 숨은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이 끈은 원래 모빌을 달았던 끈이므로 이제 그의 시신이 모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모빌이란 원래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사물이므로 인혜도 자기 시신으로 만든 모빌이 누군가에게 보이길 원한다. 그가 원하는 시선이 다름아닌 네 살 난 아들 지우의 시선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어린 아들이 엄마와 함께 만들었던 모빌 대신 엄마의 죽은 몸이 모빌이 된 것을 보기 원하는 것이다.  

    이 상상 속의 장면은 이때 인혜가 어떤 옷을 입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더욱 섬뜩해진다. 이날 새벽 아직 자살을 생각하기 전에 인혜는 “이상한 흉통”, 곧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점점 자신의 몸을 죄어들어오는 것 같은 압박감”을 느낀다 (p.200). 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가 취하는 행동은 다음과 같다.  


    그녀는 옷장문을 열었다. 아이가 젖먹이 때부터 좋아했던, 그래서 그녀가 집에서 자주 입었기 때문에 색이 바랠 대로 바랜 보라색 면티셔츠를 꺼냈다. 몸이 좋지 않을 때 그녀는 그 옷을 입곤 했는데, 수없이 빨았는데도 젖내와 배냇내가 맡아지는 것 같은 안도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효력이 없었다. 흉통은 차츰 심해졌다. 숨이 가빠왔으므로 그녀는 계속 심호흡을 해야했다. (p. 200)  


    그러므로 인혜가 바라는 것은 아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옷을 입은 엄마의 시체로 만들어진 모빌을 보는 것이다. (이 옷을 입을 당시에는 아직 자살을 생각하지 않았지만 자살을 결심한 다음에도 이 옷을 계속 입고 있었다는 사실은 적어도 무의식에서 이런 바람이 있었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그럼으로써 아들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큰 상처(트라우마)를 주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의 이러한 의도를 특별하고 기괴한 유형의 폭력 충동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가 애초에 집밖에서 죽으려 했음을 고려할 때 인혜의 이러한 가학 의도는 의식적인 생각으로 형성되지 않고 무의식에만 머물렀을 가능성이 높다. 이때 그의 무의식은 “무의식이 하나의 충동, 모호한 충동의 자리가 아니라 꾀바른 전략적 자리”라는 통찰을 실감나게 하기도 한다.  

    자살하러 산을 오르기 전의 인혜의 행동이 충격적인 이유는 그가 평소에 선량하고 타인에게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고, 그의 폭력적 충동이 아들을 대상으로 했다는 것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이 장면은 좋은 엄마에게도 자식에 대한 잔인한 가학 충동이 숨어 있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인혜의 의도가 문제가 되는 또 다른 이유는 아들 지우는 인혜의 절망에 책임이 없다는 사실이다. 인혜의 삶이 고통스러웠던 것은 그 자신과 그의 남편 때문이었고 더 깊이 따져본다면 친정 부모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혜의 가학 의도는 가장 약하고 무고한 존재에게 향해 있다. 이때 인혜는 비겁한 사람이며, 자신의 죽음이 고통을 초래한 자에 대한 보복이 된다는 정의의 명분도 성립시키지 못한다. (사실 인혜의 마음 깊은 곳에서 성관계를 강요하는 남편과 그와 성을 나눔으로써 존재하게 된 아들이 동일시된다는 해석도 가능한 것 같다. 작품에서 그가 자살을 생각하기 전 “어둠속에 희미하게 드러난 부자의 옆 얼굴이 가련하게 닮아 있는 것을 보았다”(p.199)라는 구절이 등장하는데 이는 그가 두 사람을 동일시한다는 근거가 될 만하다. 달리 말해 인혜는 남편에게 할 복수를 아들에게 대신하려고 한다고 할 수 있다.)  

    인혜의 자살 기도에는 아들에게 의도하는 정신적 폭력이라는 차원과 더불어 그가 아들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고 싶어한다는 차원도 있다고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그가 계획하는 자살에는 자신이 힘들게 살았음을 이해받고 싶어하는 마음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더 일반적으로 말해 많은 경우 폭력에는 이해받고 수용받고 싶은 욕구가 동반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해석은 다시금 인혜가 보이는 것을 전제하는 모빌이 되고 싶어했다는 점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다. (사실 이 소설 전체에 걸쳐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소통과 이해와 수용을 원하는 것은 중요한 한 주제로 암시되어 있다.)  

    그런데 주어진 대목에서 인혜의 왜곡된 가학 의도를 읽을 때 우리는 이것이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가족의 사랑 아래 감춰진 적의와 폭력, 그로 인한 고통과 인식 왜곡 등은 사실 특별하기보다는 흔한 경험이다. 한강의 소설은 매우 독특하고 인상적인 방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이 불편하지만 낯익은 진실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고민하게 하는 것 뿐이다. 


2. 새로운 "생명의 말"을 찾을 수 있을까?


    그러나 인혜는 (다행히도) 그의 자기 파괴와 아들에 대한 가학의 의도를 실행하지 못한다. 그는 자살을 허락하는 나무를 찾을 수 없었다. 당시의 경험은 이후의 회상에서 이렇게 이야기 된다.  


    그녀는 알 수 없다. . . . . 그 새벽 좁다란 산길의 끝에서 그녀가 보았던, 박명 속에서 일제히 푸른 불길처럼 일어서던 나무들은 또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그것은 결코 따뜻한 말이 아니었다. 위안을 주며 그녀를 일으키는 말도 아니었다. 오히려 무자비한, 무서울 만큼 서늘한 생명의 말이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받아줄 나무를 찾아낼 수 없었다. 어떤 나무도 그녀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마치 살아 있는 거대한 짐승들처럼, 완강하고 삼엄하게 온몸을 버티고 서 있을 뿐이었다. (p.205-06)  


    인혜의 자살 기도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바로 이 대목인 것 같다. 목매달을 나무를 찾는 사람에게 죽기를 단념하게 하는 “무자비”하고 “서늘한 생명의 말”이란 도대체 어떤 말 또는 기운인가? (햇빛을 받아 초록색 잎이 불꽃처럼 느껴지는 나무들은 이 소설에서 강한 식물적 생명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관련된 심상이 되풀이해서 등장하며, 세번째 이야기의 제목 “나무 불꽃”에도 이런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인혜가 나무들에게서 들었던 말에 해당하는 말이 사람 사이에서도 가능하다면 그것은 어떤 말 또는 기운 또는 행동일까? 삶에 지쳐 죽고 싶은 사람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네어 다시 살아갈 힘을 준다는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생각이다. 예를 들어 목회자들은 이런 일을 더 잘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가? 선지자 이사야도 “주 하나님께서 나를 학자처럼 말할 수 있게 하셔서, 지친 사람을 말로 격려할 수 있게 하신다” (50:4)라고 말하지 않는가? 하지만 “무자비한, 무서울 만큼 서늘한 생명의 말”에 대해서 우리는 들어본 바가 있었던가?  

    어쩌면 인혜가 새벽 햇빛 속에 선 나무들에게서 느낀 어떤 특별한 느낌을 인간 사이에서도 가능한 소통의 비유로서 이해하려는 이런 시도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사에서 그 상응물을 찾아보고 싶은 유혹을 강하게 느끼는 것은 절망한 사람에게 힘을 주는 새로운 방식을 찾고 싶은 바람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할 때 적어도 세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위로를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전해지는 언어적 표현과 단지 자기 존재에 충실하게 사는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행사하는 건강한 영향력의 구분이다. 이때 의도되지 않은 긍정적 영향력이 더욱 소중하게 다가오게 하는 것은 위로하는 언어에도 곧잘 숨어있는 조종(통제)의 욕구 때문이다. “도움은 통제의 밝은 측면이다(Help is the sunny side of control).”이라는 말에는 쉽게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 있다. 부드러운 말에도 때로 딱딱한 억압(폭력)의 충동이 숨어 있다. 더하여 언어는 그 의도가 순수할 때에도 늘 부정확함과 오해의 부작용을 동반할 위험이 있다. 그저 자기에 충실한 사람의 영향력에는 이러한 그늘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인혜가 만났던 나무들은 단지 같이 있는 여러 나무가 아니라 서로 유대하고 연대하는 나무들이었을 수 있다. 이런 해석의 근거는 나무가 되고 싶어하는 영혜가 어느날 언니에게 하는 말, “언니. . . . 세상의 나무들은 모두 형제 같아.” (p.175)에서 찾을 수 있다. 달리 말해 나무들이 의도하지도 않으면서 발산하는 강한 생명력은 그들이 한 가족으로서 서로 손을 잡은 존재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를 인간 세상에 적용한다면 서로 밀접하게 연대하는 공동체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셋째, <채식주의자>의 세계에서 나무들은 폭력을 행사하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생명체이다. 영혜가 나무가 되려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으며, 인혜가 마주친 나무들도 이런 존재들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비폭력성이 폭력에 익숙한 사람에겐 사실 생경하고 이해하기 힘든 것이어서 나무들의 기운이 인혜에게 오히려 “무자비”하고 “서늘”하게 느껴진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러한 폭력성의 부재가 우리가 사는 인간 현실에서 가능한 것일까? 답은 물론 ‘아니다’이다. 하지만 우리는 폭력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할 수는 있지 않을까?  

    이런 노력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한 가르침이 있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옛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살인하지 말아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얼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의회에 불려갈 것이요, 또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5:21-22) 


    우선 일상적인 무례함을 살인과 동일시하는 이런 관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더 상식적인 차원에서 적어도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고 본다. 하나는 불끈 화를 내거나 욕 한 마디 한 것이 때로 이런저런 불운한 인과의 연쇄로 살인과 같은 결과를 낳기도 한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화내고 욕하게 하는 마음이, 비록 그 표현에서는 살인보다 훨씬 사소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살인하는 마음과 같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 두 해석에서는 욕하거나 화내는 행동은 작은 잘못으로 살인은 큰 잘못으로 구분하는 인식이 담겨 있는데, 이런 인식을 거부하는 제3의 해석도 가능하다. 곧 존재의 가장 심원한 차원에서는 처음부터 폭력의 경중을 따질 수 없다라는 해석이다. 바꾸어 말해 모든 폭력은 본질적으로 그 위상이 같으며, 작고 큰 폭력을 구별하는 것은 단지 지엽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할 때 예수의 말은 ‘이제 지엽에 속지 말고 본질을 파악하라’는 명령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나무들의 비폭력성을 가능한한 닮으려고 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세번째 해석이 일으키는 경각심이 아닐까? 흥미로운 사실은 예수도 나무를 비유로 하늘나라(이상적인 질서, 그러므로 당연히 폭력도 없는 질서)를 이야기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심었다. 겨자씨는 어떤 씨보다 더 작은 것이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 더 커져서 나무가 된다. 그리하여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마태복음 13:31-32) 어쩌면 폭력에는 크고 작음의 구분이 없다는 인식이 이 세상을 변혁시키는 한 겨자씨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 글에서는 소설 <채식주의자>에서 한 선량한 엄마가 자살을 시도하다 포기하는 대목을 살펴보면서, 그의 절망에 내포된 듯한 미묘하고 잔인한 폭력성을 생각해 보고, 또 그가 자기 파괴라는 폭력을 저지르지 못하게 막은 나무들의 “서늘한 생명의 말”을 인간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에 대해 소박하게 생각해 보았다. 기본적으로 문학 작품을 독해하는 이 글은 매우 서툴고 주관적이다. 하지만 이런 글도 약자 및 소수자에 대한 폭력이 첨예한 담론으로 대두되는 오늘 우리 안에 숨어 있는 폭력과 이에 대처하는 방식에 대해 더 철저히 생각하도록 추동할 수 있지 않을까 감히 기대해 본다. 


    * 필자소개  

영어강사. Rice Univ 언어학 박사(Ph.D) 후에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과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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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이 맨부커상을 수상한 날 


강남역 호프집에선 한 여자가 죽었다


- 한강 소설 [채식주의자] 리뷰

 






(평범한 워킹맘, 페미니스트, 간간이 글쟁이로 변신)


0.


    소설가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으로 떠들썩하던 어느 날, 문득 아버지가 내게 물었다. “거, <채식주의자> 읽어 봤냐?” “네, 당연히 읽어봤지요.” 아버지는 내 감상을 조곤조곤 물어보다가, 내가 나름 긍정적이었다고 하자 ‘큼'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난 별로더라. 어떻게 그런 소설이 상을 탔는 지 모르겠다.”고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왜 별로였냐고 묻는 내게 아버지는 이렇게 답했다. “감동이 없고, 인간적인 정도 없고.. 그런게 뭐 상을 탔나 싶다.” 


   노벨문학상에 버금간다는 ‘맨부커상’에 대해 접하곤, 아버지는 <노인과 바다>나 <무기여 잘 있거라> 같은 소설을 기대했던 것 같았다. 단단한 근육 위로 바짝 선 핏줄 같은, 노장의 짙은 풍미가 지배하는 세상 말이다.  


   아버지는 어쩐지 추천해드린 <7년의 밤>도 퍽 좋아하지 않으셨다. 그저 스릴러 영화 같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 여전히 문학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떠올리며 생신 선물을 고민하다가, 고민 끝에 시인 백석의 시집 <사슴> 초판본을 골라 들었다. <사슴>을 들고 계산을 기다리면서 나는 어떤 고집 센 취향에 대한 상념에 빠져 들었다.


1.


    얼마 전 SNS에서 대학 시절 교수님의 포스팅을 접했다.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이라는 이분법에 대한 이야기였다. 다른 무엇보다도 마지막 글귀가 마음에 아득하게 남았다. “실제로 중앙 문단의 한국문학사도 ‘순수/대중’으로 전개되어 오지 않았다. 처음부터 ‘순수/대중’의 대립은 ‘순수’ 비평가의 틀이어다. 또 이 틀은 구별짓기에 기초하며 꽤 ‘혐오적’이다. 여성, 소수자, 노동자 및 대중에 대해.”[각주:1] 


   한강의 소설은 한국 문단에서 분명 ‘순수 문학’에 속할테지만 이청준, 김훈, 그리고 수많은 세계의 ‘명작 전집’을 읽어 온 아버지의 시각에서는 ‘장르 문학’에 가까웠다. 아무것도 아닌 작은 계기들이 일상의 시간을 파열내 버리고, 이윽고 소설의 세상은 현실과 완전히 다른 것이 된다. 작가의 의견이나 목적같은 건 강하게 휘몰아치기 보다는, 바스라지는 듯한 생의 감각과 섬세하게 엮인 감각의 틀 속에 사라질 듯 말 듯 고요히 잠자고 있다. <수레바퀴 밑에서>나 <데미안>처럼 명실상부하게 얘기해주지 않고, <노인과 바다>처럼 직접 대화를 건네지도 않는다. 보여주는 건 실타락처럼 풀어헤쳐지는 어떤 기묘한 감각과 감성들 뿐. 분명 그건 아버지의 서재에 꽂힌 책들과는 다른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아버지의 서재에 있는 <세계명작 전집>에 여성의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고전이나 명작이라고 하는 전집들 사이에서 여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내용을 찾기는 극히 힘들었다. 아버지의 서재엔 <죄와 벌>, <무기여 잘 있거라>, <좁은 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방인>, <데미안>, <1984>, <위대한 개츠비> 등이 있었다.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된 고전 명작 시리즈의 팔할 정도가 꽂혀 있었고, 아버지가 구매하지 않은 나머지 이할의 목록을 찾아보니 그나마 <인형의 집> 한 권은 찾을 수 있었다. 


   그러니 아버지가 소설가 한강의 작품을 읽으며 고개를 갸웃했을 상황은 눈에 보이고도 남았다. 그것은 결코 순전한 개인의 취향이라고 할 수 없는 문제였다. 우리가 여태 접해 온 세계 명작, 그리고 고전 시리즈 가운데 여성의 세계는 거의 없었다. 여성 작가도, 여성성의 세계도, 그리고 여성이라는 질문 조차도.


2. 


    소설가 한강이 맨부커상을 수상한 날, 강남역 근처에 위치한 호프집의 공용 화장실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한 시간이나 화장실을 서성였던 가해자는 이십대의 여자를 발견했고, 그녀는 억울하게 살해 당했다.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공간에는 ‘나는 너다’ 혹은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 라는 포스트잇이 붙었다. ‘여성혐오 범죄’라는 말이 끓어 올랐고, 너무나 쉽게 반대편의 전선이 생겨났다.


   이 전선에서 한 발짝 떨어진 일각에서는 ‘여성혐오 범죄’라는 목소리를 두고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말라.’ 고 했다. 정신분석학과 수사학은 이 사건을 조현증 환자의 개별 문제로 보았고, 사회학과 여성학은 한 사람의 가해자보다 그를 둘러싼 이 사회 속의 여성 혐오 문화를 지적했다. 서로의 결에 따라 분석하고 도출해낸 결과였으나 합리와 객관은 전자가, 비약과 감성은 후자가 각각 차지했다. 남녀 뿐 아니라 학문 역시 결코 평등하지 않았다. 학문과 전문가도 그랬는데 비전문가인, 순전히 ‘여성’일 뿐인 그녀들의 목소리는 말할 것도 없었다. 


   강남역 살인 사건으로 인해 여성들의 공포 수위는 끔찍하게 치솟았는데, 일부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되려 ‘남성 혐오를 조장하지 말라’며 반발했다. 이 모든 일은 고인의 삼일장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일어났다. 


   한편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에 등장하는 영혜는 어느 날부턴가 갑자기 채식을 시작한다. 왜 갑자기 채식을 시작하느냐는 남편의 말에 그녀는 “꿈을 꿨어"라고 나직이 답한다. 그녀의 꿈은 붉은 피와 날것의 고깃덩어리로 점철되어 있었다. 꿈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동안 그녀는 고기를 끊고, 브래지어를 풀어버린다. 영혜의 남편은 ‘고기 냄새가 난다'며 섹스를 거부하는 영혜를 강제로 벗겨 삽입하고, 아버지는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영혜의 입에 강제로 탕수육을 쑤셔 넣는다. 단지 그녀는 채식을 할 뿐이었다. 


   영혜를 둘러싼 남성성의 세계는 영혜를 혐오했다. 티셔츠 위로 도드라진 그녀의 유두와 고기를 입에 대지 않는 그녀의 식성, 그리고 지극히 비합리적인 그녀의 이야기까지- 다른 이들과는 사뭇 다른 그녀의 모든 것에 대해 사람들은 참을 수 없어 했다. 그래서 그녀의 입을 틀어 막고, 멸시하고, 폭행하고, 강간했던 것이다.


3.


   한강의 소설에 대해 ‘K문학의 쾌거'라고 묘사하는 사람들은 ‘여성혐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같은 날 일어난 대조적인 이 두 사건을 보면서 회의감에 빠졌다. 한 여자의 성공은 사회가 너무나 손쉽게 취득해 가는 데에 반해, 다른 한 여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 책무에 대해 모두가 침묵한다. 아니, 침묵을 넘어서 그 책무에 대해 열렬히 반대한다. 그것을 ‘남성 혐오'라는 이름으로 그들은 일부러 오독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사람들은 ‘여성혐오'라는 그녀들의 목소리를 멸시하고 혐오하고 조롱한다. 심지어는 성적인 표현을 끌고 들어와 모욕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런 와중에서도 언제나 ‘너무 과잉되었다.’라는 평가는 늘 ‘여성 혐오’를 주장하는 그녀들의 몫이다. 채식을 고집했을 뿐인 영혜를 향해 모두가 힐난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런 남자들 모두가 실은 집에서 설거지도 하고, 직장에서 열심히 일도 하고, 주말에는 아기를 잘 돌보는 사람임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군대도 다녀온데다가 이렇게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내게 ‘잠재적 가해자'라니, 분노할 수밖에 없을 일이겠지만 ‘여성혐오'라는 말은 오직 당신만을 탓하는 게 아니다. 고전 문학 시리즈에 여성의 작품이 없는 것, 역사 책에 여자란 선덕여왕과 유관순밖에 없는 것, 대기업 임원급에 여자는 거의 찾아보기도 힘든 사실들. 이 모든 현실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더워서 상의를 탈의하고 있었다던 영혜는 남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렇게 묻는다. “...그러면 안돼?” 그녀는 그녀의 몸에 대한 결정을 스스로 했고, 그에 대해 인정과 존중을 받기 원한 것 뿐이었다. 바라건대 영혜와 함께 질문해주시라. ‘그러면 안되는 걸까? 왜 안됐었을까’라고. 대답이 아닌, 질문조차도 우리에겐 희망이다.


   꽃보다도 아름다울 나이, 그녀의 명복을 빈다. 부디 편히 쉬시기를.


ⓒ 웹진 <제3시대>

  1. 천정환 교수 페이스북에서 발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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