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아카데미 탈/2013년 겨울봄 강독 모임

[1] 초기 그리스도교 사회사 공부 모임

함께 읽을 책: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회사: 고대 지중해 세계의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에케하르트 슈테게만볼프강 슈테게만 지음, 손성현 김판임 옮김; 동연출판사 2009)

책임도우미: 김진호(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참가비 : 1회당 5,000

일정: 2012219~ 611, 매주 화 pm. 7:30~10:00

219

1

1세기 지중해 연안의 경제와 사회

서문 & 1

23~42

2 26

2

43~100

305

3

101~167

312

휴가

 

3 19

2

이스라엘에서 유대교의 사회사, 그리고 예수 따름

서론 & 4

171~211

3 26

5

212~227

402

6

228~302

4 09

7

303~354

4 16

8

355~396

4 23

휴가

4 30

3

로마제국 도시 안에 있던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의 사회사

서문 & 9

399~454

507

10

455~498

5 14

11

499~565

5 21

휴가

528

4

지중해 세계와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여성의 사회적 역할과 사회적 상황

서문 & 12

569~593

604

13& 14

594~639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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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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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회사』(동연, 2009)의 출판기념회를 위해 작성된 원고입니다.



사상-사건-사회상(社會相)/사회상(社會像)/사회사(社會史)-사회사적/사회학적(=사회과학적) 성서 해석/연구
이 아들은 여전히 ‘거지 왕자’의 신세인가?

김창락
(본 연구소 소장 | 신약학)

1. 어느 청개구리 집안 이야기 한 마당


청개구리 엄마가 죽으면서 자식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거들랑 냇가에 묻어다오.”

청개구리 자식들은 평소에 엄마가 시키는 일이면 꼭 반대로 해서 엄마의 속을 썩이었다. 못된 자식들이지만 엄마의 마지막 유언만은 그대로 시행해서 마지막으로 단 한 번이라도 엄마에게 효도를 하기로 결의하고 엄마의 시신을 냇가에 묻었다.

그런데 걱정거리가 생겼다. 비가 내릴 때마다 엄마의 무덤이 냇물에 씻겨 내려 갈 위험 때문이다. 그래서 청개구리 자식들은 여름철에 갑자기 소낙비가 내리려고 할 때면 엄마의 무덤이 걱정되어 “꽥꽥” 하며 울어대야 하는 것이란다.

물음 1: “청개구리 자식들은 마지막으로 효도를 한 것인가?”
답    : “엄마의 뜻이 유언에 똑 바로 표현되었다면 그렇다.”

물음 2: “청개구리 엄마는 실제로 냇가에 묻히기를 원했는가?”
답    : “속 썩이는 딸이 엄마로부터 ‘이년아, 차라리 죽어버려!’라는 극한적 꾸중을 듣고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면 그것은 엄마의 말의 액면상의 내용에는 부합될지라도 그 말의 진정한 의미/뜻과는 정반대이다. 이 딸은 엄마의 마지막 말 한 마디에서 엄마의 진정한 뜻을 찾을 것이 아니라 엄마와 자기 사이의 평소의 삶의 총체적 관계에서 찾아야 했을 것이다. 청개구리 집안 이야기에 대해서는 우리는 전지적(全知的) 시각을 가지고 있다. 즉 청개구리 엄마는 양지바른 산비탈에 묻히기를 원했다는 것, 자식들이 평생 동안 자기 말을 꼭 반대로 했기 때문에 자기가 유언을 이렇게 하면 자식들은 저렇게 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산비탈에 묻히기를 원하면서도 정반대로 냇가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런 시각은 신에게만 속한 것이지 이야기 속의 어느 누구에게도 부여되지 않았다. 청개구리 자식들이 진정으로 마지막 효도를 하려고 했다면 엄마의 살아생전의 삶에 비추어서 엄마의 뜻을 조명해야 했을 것이다.”

물음 1과 2는 글 또는 저자의 뜻을 규명하는 해석학의 문제이다.

물음 3: “이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는가?”
답    : “이 이야기에 담긴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작업이다. 전통적 성서해석은 바로 이러한 작업이었다. 즉 성서 본문 속에 담긴 신학적 사상, 도덕적 교훈, 윤리적 지 시 사항 등을 끌어내는 것이 성서해석의 해석의 과제였다.”

물음 4: “이런 일은 실제로 일어났는가?”
답  : “이것은 역사적-비평적 방법(historical-critical method) 또는 역사비평(historical criticism)에 관련된 물음이다. 성서에 대한 이 접근방법은 성서 본문의 이야기에서 ‘실제로 무엇이 일어났는가?’(What happened really?) 또는 ‘그 사건은 정말로 일어났는가?’(Did the event really happen?)를 탐구한다. 이 방법은 더욱 간단하게 역사적 방법(historical method 또는 historical approach)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또한 성서의 각 문서를 역사적 산물로 전제하고 저자와 독자와 누구이며 저작 장소와 연대, 저작의 계기와 목적, 저작에 사용된 자료, 다른 문서와의 문학적 관계 등등을 탐구한다. 역사 연구의 주된 관찰 대상은 과거의 사건이다. 사건은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관계의 연쇄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시간이라는 일직선을 따라 진행되는 것이다. 사건의 진행 과정을 관찰하는 것을 통시적(通時的, diachronic) 방법이라 한다. 이 관찰 방법은 시간이라는 선로(線路) 위에서 사건이 진행하거나 일이 전개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며칠 전에 이라크에서 한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 대통령 부시의 기자 회견장에서 일어난 사건 말이다. 한 아랍 기자가 그의 신발을 벗어 부시에게 내던졌다고 한다. 이것은 사건이다. 사건은 시간 선을 따라서 진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만일 그 현장에 자동 무비 카메라가 비치되었더라면 그 사건의 진행 과정이 연속으로 촬영되었을 것이다. 이 사건을 신발 투척 사건이라 하자. 여기서 우선 기자석으로부터 구두 한 짝이 날아와 부시 앞에 떨어진 일만을 떼어서 살펴보기로 하자. 이 일의 맨 처음 장면은 한 기자가 그의 신발을 벗는 동작, 그 다음 장면은 한 손으로 신발을 들어 올리는 동작, 그 다음 장면은 신발이 날아가는 운동, 맨 마지막 장면은 그 신발이 부시 앞에 떨어지는 모습이다. 신발을 벗는 장면에서 시작하여 그것이 부시 앞에 떨어지는 장면까지 진행된 일을 죽 열거하는 것을 사건의 서술(description)이라 한다. 사건은 단순히 서술하는 것으로 그 내용이 다 전달되지 않는다. 우선 그 사건이 일어난 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혀야 한다. 원인(原因, cause)이라는 것은 물리적 운동을 촉발시킨 작동력을 가리킨다. 신발이 날아간 사건을 순전히 물리학적인 측면에서 관찰하는 경우에는 한 기자가 신발을 던지는 행위가 이 사건을 일으킨 원인이다. 화재 사건이 일어났을 경우에 눈앞에 진행된 화재의 과정과 결과만을 진술하지 않고 화재의 원인이 무엇인지, 즉 방화인지, 실화(失火)인지, 전기 누전과 같은 사고로 일어난 것인지를 밝혀주어야만 화재의 내용을 좀 더 실제에 가깝게 제시하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이 사건을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관계의 틀에 넣어서 관찰하거나 이 사건을 둘러싼 전후의 더 큰 맥락에 넣어서 관찰하는 것을 사건의 설명/해설(explanation)이라 한다. 그런데 구두 투척과 같은 사건은 사람의 행위가 원인이 되어 일어났는데 우리는 이제 무엇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이러한 행위를 하게 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의 행위를 촉발시킨 것이 무엇인지를 지칭하는 경우에는 원인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아니하고 동기(動機, motive), 의도(意圖, intention) 또는 목적(目的, purpose) 등등의 용어가 사용된다. 이것을 규명하는 데는 여러 가지 접근 방법이 있다. 우선 심리학적 방법으로 접근하면, 그 사람의 소영웅 심리, 열등감, 원한, 복수심, 피해의식, 당일 부부 싸움으로 인한 의기소침 등등 갖가지 개인의 심리 상태를 그 행위의 동인(動因, drive)으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리적 운동에서 원인과 결과는 순전히 기계적으로 잇달아 일어난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개입하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에 있어서는, 동인에서 기계적으로 행위가 발생한다고 볼 수 없다. 동인과 행위 사이에는 그 행위자의 판단, 의지, 결단과 같은 의식작용이 반드시 개입한다. 이러한 의식작용은 행위를 추동할 뿐만 아니라 그 행위가 일정한 목표점에 이르도록 진행 방향을 미리 정한다. 인간의 의식적인 행위에는 행위가 작동하기 전에 예기하는 미래의 결과가 이미 장치되어 있다. 이러한 것을 행위의 의도 또는 목적이라 한다.

“행위의 동인, 동기, 의도, 목적 등등은 행위자의 내면, 즉 그의 심리나 정신 속에서 찾아내는 것이다. 우리는 그 행위의 원인—이 표현은 정확하지 않지만 다른 적절한 표현이 없으므로 편의상 그렇게 사용하기기로 하자—을 그 행위자의 외부에서 찾을 수도 있다. 이러한 경우에 첫째로 역사적 접근 방법이 있다. 이 방법은 이 행위에 선행한 역사적 사건과 연관관계에서 해명하는 것이다. 이라크 전쟁이라는 큰 사건이 앞서 일어났다. 그 행위자의 판단으로 이 전쟁은 이라크 민중을 불행에 빠뜨린 침략전쟁이며 부시가 바로 이 전쟁을 일으킨 원흉이다. 이러한 사실을 만천하에 폭로하거나 이러한 전쟁의 원흉을 응징하는 뜻으로 이러한 행위를 했다고 설명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 이라크 전쟁은 이 행위가 일어난 상황이며 폭로나 응징은 이 행위의 목적 또는 의도이다. 둘째로 종교적 접근 방법이 있다. 미국은 이라크 전쟁을 통해서 이슬람 종교와 문화를 말살하려고 한다. 이러한 종교전쟁의 원흉인 부시에게 모욕을 가하는 것은 알라에 대한 신성한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기에 이러한 행동을 했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다른 접근 방법이 있다. 또 이 행위의 의미를 평가하는 데도 이라크 민중의 분노를 대변한 애국적 행위에서부터 국빈에게 외교적 결례를 행한 파렴치 행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물음 5: “청개구리 가족의 삶의 환경은 어떠했는가? 그들의 살림살이 형편은 어떠했는가? 가족 사이의 관계는? 이웃 개구리들과의 교우 관계는?”
답    : “자녀의 배필을 결정하는 경우에 ‘착한 사위/며느리 노릇을 하겠습니다’라는 후보 자의 말 한 마디에만 근거하여 결정을 내리는 부모는 없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의 됨됨이는 어떤 말 한 마디에 죄다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총체적인 삶에 비추어 볼 때에 실상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청개구리 가족은 2000년 전에 이 세상에 살다가 없어졌다고 가정하자. 그들이 남겨 놓은 것은 부모 세대로부터 손자 세대에 이르기까지 약 100년 기간에 그들이 쓴 몇 편의 글들을 남겨 놓고 떠나갔다고 하자. 우리가 이 청개구리 가족이 어떤 존재들이었는지를 알게 해주는 거의 유일한 자료는 그들의 글들이다. 우리는 이 글들을 통해서 그들에 관해서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너무 많이 알게 되고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눈감고 지나쳐버린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이 글들을 통해서 그들의 생각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너무나 많이 알지마는 그들의 먹이가 어느 정도로 결핍했는지 또는 이웃 마을의 황소개구리의 횡포 때문에 날마다 얼마나 불안한 삶을 살아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너무 모른다. 이러한 사정은 1세기에 그리스도인들이 남겨 놓은 신약성서의 문서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는 신약성서의 문서들 중에서도 특히 복음서들과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들을 통해서 그들의 믿음의 내용이 무엇이며 이단 사상으로 배격한 것이 무엇인지를 성서에서 신학적 내용과 교훈적 사상을 끌어내는 작업을 신학적 해석이라 부르기도 하고 관념론적 해석이라 부르기도 한다.

청개구리 가족이 어떤 존재들이었는지를 총체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그들이 일상의 삶을 영위한 구체적인 삶의 정황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그 자리에 본토박이로 살고 있었는지 아니면 이주자로서 나그네 신세로 살았는지, 그들이 사는 지역은 도시 빈민촌인지 농촌 지역인지, 지역 터줏대감과 황소개구리에게 얼마나 많은 양의 공세를 바쳐야 했는지, 종교적인 문제로 이웃집과 갈등 관계에 놓여 있었는지, 청개구리 엄마는 과부인지, 미혼모인지, 무직자인지, 피고용자인지, 자영업자인지, 청개구리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어떠했는지, 청개구리 자녀들 중에서 전문직에 종사할 수 있는 정도의 교육을 받은 자가 있는지, 전체적으로 그 청개구리 가족은 개구리 사회 전체에서 어느 계층에 속하는지, 그들은 빚 없이 또는 과중한 빚을 떠안고 살아가야 했는지 등등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청개구리 가족의 삶과 관련된 이러한 모든 측면을 총체적으로 일컬어서 사회적 정황이라 한다. 개개인은 고립된 존재로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회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여러 가지 제도, 기구, 윤리, 가치관 등등의 관계망 속에 얽혀서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사회의 이러한 관계망은 역사적 사건과는 달리 그 성격이 정태적(靜態的, static)이다. ‘정태적’이라 함은 불변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지탱하는 틀거지인 제도, 기관, 계급, 생산양식, 가치관 등등은 장구하게 동일한 양식으로 동일한 힘을 발휘한다는 뜻이다. 사회적 존재라는 것은 이러한 사회적 관계망 속에 얽혀 있는 존재이다. 이러한 사회적 관계망이나 이 관계망 속에 얽혀 살아가는 존재의 사회적 정황을 관찰하는 방법은 사건을 관찰하는 방법과 다를 수밖에 없다. 사건은 시간의 선 위에서 진행해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매 순간순간 변화한다. 이러한 변화의 전체 과정을 포착하는 데는 무비 카메라가 사용된다. 이러한 관찰 방법을 통시적 방법이라 했다. 그러나 사회의 제도나 기구 따위는 정태적인 것이고 사회 구성원이 이러한 제도를 매개로 해서 맺은 사회적 관계는 정적(靜的)인 상태이다. 정적인 상태라 함은 운동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동일한 상태가 지속된다는 뜻이다. 정적인 상태를 포착하는 데는 무비 카메라가 필요 없고 정지 사진을 찍는 카메라로 충분하다. 이러한 관찰 방법을 공시적(共時的, synchronic) 방법이라 한다. 공시적 방법은 정지된 동일한 시점에서 구성원들 사이에 얽혀 있는 모든 관계의 실태를 관찰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사회의 현상이나 인간 삶의 사회적 여러 차원을 서술하는 데 적절하다.”


2. 대상과 방법론 문제


오늘 우리가 논의하는 연구 대상은 1세기의 원시그리스도교의 사회이다. 연구의 어려움은 그리스도교 사회라는 것이 단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이스라엘 땅에 유대인으로만 구성된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이방 세계에 이전의 이방인들로 구성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70년 유대 독립전쟁 이전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70년 이후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그 사회적 성격이 확실하게 다르다. 그리스도교 사회를 탐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교 사회의 사회적 차원의 삶의 현실을 구명하는 것이다. 사회적 삶의 현실이라는 것은 공시적 관찰 방법으로 특정한 시점에서 파악된 것이다. 그리스도교 사회를 지역별로 분류하여 취급한다 하더라도 이 현실이 그 사회의 100년에 걸친 전 기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

연구의 목표를 세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첫째는 사회 서술(social description)이다. 이것은 사회적 현실을 단순히 기술하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사회상(社會相)이다. 그런데 사회학이 사회 현상을 서술하는 경우에는 전형적인 것, 일반적인 것, 동일성이 있는 것을 채택하지 특수한 현상은 배제한다. 빈약한 자료를 이용해서 이렇게 구성한 사회상이 어느 곳, 어느 시점의 특수한 사회 현상인지 전형적인 현상인지 판별하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이다.

둘째는 그 사회에 대하여 총체적인 성격 규정을 내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갱신운동 단체, 사회통합 세력이니 대안사회니 하는 식으로 판정하는 것이다. 이 연구는 사회상(社會像)을 구축하는 것을 일차적 목표로 한다.

셋째는 사회사(社會史)를 기술하는 것이다. 사회사(Sozialgeschichte, social history)는 학문분과로서는 역사학적 사회과학(Historische Sozialwissenschaft)이다. 그것은 일반적 역사과학의 한 특수한 관찰 방법이다. 여기서 ‘사회’(Sozial)라는 구성어는 관찰 방법을 가리킨다기보다는 관찰 대상을 가리킨다. 즉 여러 집단과 계층과 계급에 따른 사회 구조의 발전을 서술하고 이러한 각 집단의 크기, 처지, 의미를 다루며 나아가서 각 구성 요소들 사이에 상호작용과 사회적 과정의 역사를 구명한다. 그러니까 ‘역사’(-geschichte)라는 구성어는 관찰 방법을 가리키는 동시에 관찰 대상을 한정한다. 즉 그것은 과거의 사회가 연구 대상임을 뜻하는 동시에 장기간에 걸친 변화 과정을 추적하는 데 역사학적 관찰 방법이 사용된다는 것을 뜻한다. 사회가 연구 대상이기 때문에 사회과학적 개념이나 분석 방법을 당연히 사용한다. 사회사라는 말은 이 학문의 연구 결과물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상의 세 가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방법론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사회적’(social)이라는 용어로 표현되는 방법이다. 이것은 ‘사회적 서술’(social description)이라는 표현 속에 나타나 있다. 사회적 서술은 사회의 여러 문제와 관련된 모든 내용을 이용하여 그 사회의 모습을 서술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수립한 결과물은 사회상(社會相)이다. 여기에는 엄격한 사회과학적인 판단 기준을 적용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구성된 사회상이 특수한 현상인지 전형적인 현상인지 판별하지 못한다는 약점이 있다.

둘째는 ‘사회학적’(sociological) 또는 ‘사회과학적’(social-scientific) 방법이다. 여기서 ‘사회학적’이라는 표현은 사회학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회과학을 대표해서 표현하는 것이다. 사회과학은 사회학을 위시해서 경제학, 정치학, 인류학, 인구학 등등을 포함한다. 그러니까 모든 사회과학적 학문분야를 함께 뭉뚱그려 지칭하는 정확한 표현은 ‘사회과학적’이라는 표현이다. 이 두 가지 표현은 동의어로 사용된다.

사회학적 또는 사회과학적 방법은 사회의 모습을 구명하는 데 무엇보다도 사회학의 이론과 분류 체계를 이용한다. 사회학에는 여러 유형의 사회학이 있다. 기능주의 사회학이 있는가 하면 갈등론적 사회학이 있다. 기능주의 사회학 이론을 채택하느냐 갈등론적 사회학 이론을 채택하느냐에 따라서 연구 결과는 정반대로 갈라진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구축되는 전체적인 사회의 모습은 사회상(社會像)이다.

셋째는 ‘사회사적’ 방법이다. 이 방법의 특이성은 역사학적 관찰 방법을 포용한다는 데 있다. 그러면서도 이 방법은 사회적 사실을 서술하는 점에서는 첫째 방법론을 수용하며 사회학적 분류 도식을 응용한다는 점에서는 둘째 방법론을 수용하고 있다. 이러한 방법론을 통해서 형성한 결과물은 일정 기간에 걸친 그리스도교 사회의 역사 즉 사회사이다.


3. ‘거지 왕자’의 신세


그리스도인들은 성서를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 있는 거룩한 책으로 받아들인다. 사회학을 위시한 사회과학들은 순전히 세속적인 인간 사회의 문제를 다루는 학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거의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성서 연구에 사회과학적 방법을 도입하는 것은 “우리는 우리의 원수와 결혼한다”는 어느 아프리카 추장의 말이 뜻하듯이 위험할 뿐만 아니라 전혀 불필요한 일로 여긴다. 하나님의 계시는 믿음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는 것이지 세속적 학문을 이용하여 계시를 밝히려는 노력은 배격되어야 한다는 사상이 전체 그리스도교계를 지배하고 있다. 특히 개신교는 개인의 신앙과 개인 영혼 구원에 역점을 두기 때문에 사회 문제는 전적으로 외면되거나 소홀히 취급되었다. 1930년대에 미국에서 사회복음 운동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사회적 책임을 반짝 강조하다가 곧 신정통주의 신학과 보수주의 신학의 위세에 짓눌려 사라져버렸다. 1960년대에 이르러서 남미의 해방신학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정치사회적 문제에 대한 관심을 일깨워 주었다. 그렇지만 해방신학은 성서의 사회학적 연구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를 개척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성서의 사회학적 연구가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에 들어서서부터이다. 이 이후로 특히 미국 신학계에서 성서의 사회학적 연구물이 다양하게 산출되었다.

여기서는 이러한 새로운 연구의 물결을 처음으로 일으킨 한 사람만을 언급하겠다. 그는 독일 신학자 타이센(G. Theissen)이다. 그는 1974년에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회학』이라는 저서를 내놓았다. 이 저서가 연구사적으로 볼 때에 성서의 사회학적 연구를 촉발시킨 공적은 아무리 높이 평가하더라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저서는 공로 못지않게 많은 악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가장 큰 한 가지 단점만 지적한다면 기능주의 사회학 이론이 여기에 이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이론 때문에 연구 결과 전체가 정반대로 왜곡되게 되었다.

특히 미국에서 많은 신학자들이 이 연구에 종사하면서 많은 귀중한 연구 성과를 내고 있지마는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연구는 여전히 서자의 신세에 머물러 있다고 할 것이다.


4. 성서 연구냐 성서 해석이냐?


성서 연구와 성서 해석은 같은 뜻으로 사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구별해서 사용해야 할 것이다. 성서 해석은 성서의 말씀, 즉 성서에 담긴 메시지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다. 이와 달리 성서 연구는 성서와 관련된 사항들, 예를 들어 성서의 생성, 성서의 세계, 성서 시대의 역사, 선교의 역사, 사도들의 활동 등등의 주제를 연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서 연구는 성서가 전하고자 하는 계시의 내용 자체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 해석을 위한 예비 작업이나 보조 역할을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회학적 방법이나 사회사적 방법으로 올바로 재구성한 성서에 나타나 있는 여러 형태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사회적 상황에 비추어 볼 때에 그 공동체의 삶과 관련해서 전해진 성서 본문의 의미가 더욱 생동감 있는 말씀으로 들려올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성서 연구 자체가 성서 본래의 궁극적 목표, 즉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관한 기쁜 소식을 듣는 것 자체를 대체할 수는 없다. 이 본래적 목표는 올바른 성서 해석을 통해서 이룩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회학적 성서 해석이나 사회사적 성서 해석이란 무엇인가? 사회학적 방법이나 사회사적 방법이라는 것은 성서의 본래적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동원된 유용한 보조 장치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비유를 사용해서 말하자면, 성서를 읽을 때에 전통적으로 촛불을 사용해서 읽던 것을 훨씬 더 밝은 전등이라는 조명등을 사용하여 읽는 것과 같은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성서 읽기의 방법을 비교한다면 다른 점은 조명등이 교체되었다는 점이다. 조명도가 높아지면 읽기가 더 편리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성서 본문에서 찾아내려고 하는 대상을 바꾸지 않는 한, 아무리 조명이 밝아졌다 하더라도 독자가 찾으려고 목표하는 것 이외의 것이 그의 눈에 띌 수 없다. 전통적인 성서(聖書觀)은 성서 속에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 있는데 이 계시의 내용은 신학적 담론, 즉 신학 사상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므로 성서를 읽고 해석하고 이해하는 작업은 이 신학 사상을 알기 쉬운 말로 풀이하는 작업이다. 이 경우에 성서 해석이라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신학 사상을 알기 쉬운 말로 바꾸어 놓는 작업이 되는 셈인데 성서 해석의 과제는 한 신학 사상을 다른 하나의 신학 사상으로 풀이해 내는 작업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러한 성서 해석을 신학적 성서 해석이라 이름 붙일 수 있다. 신학적 성서 해석은 오로지 사상만을 다룬다는 점에서 관념적 성서 해석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해석의 최종 목표인 계시의 내용이 신학 사상이라고 하는 전통적 신학의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상 아무리 밝은 조명등으로 바꾸더라도 해석의 결과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다.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이분하고 인간의 삶을 영적인 삶의 영역과 물질적인 삶의 영역으로 이분하거나 현세와 내세로 이분하여 어느 한 쪽을 무가치한 것으로 폐기 처분하거나 전적으로 무시하는 사고방식은 그리스의 이원론 철학 사상에서 유입된 그릇된 사상이다. 성서가 인간의 구원, 해방, 자유를 말하는 경우에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떠나서 살아 있는 인간으로부터 반쪽 떼어낸 영혼이나 마음이라는 가상 존재가 누리는 어떤 것일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건이 계시 사건이다. 그러므로 계시 사건은 육신과 관련해서 해석해야지 육신과 분리해서 해석한다는 것은 계시 사건의 근본 원리에 위배된다. 계시의 내용을 순전히 신학적 사상으로 이해하는 것은 육신이 된 말씀을 도루 말씀으로 뒤바꾸어 놓는 반역 행위가 아니겠는가?

1970년 대 말에 당시의 서독과 동독, 프랑스, 네덜란드 출신의 몇몇 성서학자들이 사회사적 성서 해석에 종사하다가 전통적 성서 해석을 배격하고 전적으로 새로운 성서 해석을 제창하려는 취지로 “비관념적 성서 해석” 또는 “물질적 성서 해석”(materialistische Bibelauslegung)이라는 이름을 붙여 해석 모임을 결성했다. 우리나라에는 “실사적(實事的) 성서해석”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된 바 있다. 이 성서해석 방법은 아직까지는 ‘거지 왕자’의 신세이지마는 성서해석의 본래적 왕자, 참된 적자(嫡子)로 판명될 날이 곧 도래하기를 고대한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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