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안의 페미니즘 : 예민함과 자기검열



조은채*

 


       매주 집회에 나가면서 어떤 혐오 발언들은 나를 상처 입히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 혼자만 어떤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내 불편함은 구체적인 행동이 되기 전에 망설임으로 종결되곤 했다. 이제 더 이상은 예민하다거나 유난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집회 때 쏟아졌던 “미스박”, “강남 아줌마”, “아몰랑” 등 수많은 혐오 언어들을 보고도 별다른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나에게 집회에 참여하는 일은 어떤 의미에서는 일상에서 피하려고 노력해왔던 수많은 혐오와 정면에서 부딪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애써 외면한 채 거리에 나섰다.

        쏟아지고 있는 여성혐오 발언에 제동을 거는 것은 대통령 혹은 비선실세를 옹호하는 일이 아니다. 혐오 발언을 멈추자는 것은 그들에 대한 비판의 정도를 낮춰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여성혐오 발언을 반복하는 것은, 여성성 비하가 얼마나 효과적인지를 여실히 증명한다. 그 효과가 대단하다는 것은 사회에 여성혐오가 얼마나 만연하였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하지만 이러한 지적들은 모두 “해일이 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다.”는 말로 조롱당하고, 분열을 굳이 조장하는 불온한 움직임이라고 낙인 찍힌다. 이 낙인은 혐오 발언에 대한 자정의 목소리를 망설이게 한다. 더 거대하고 시급한 문제가 있는데 작은 소란을 크게 키우고 있는 걸까? 계속 입을 닫고 있었으니 이번까지만, 혹은 이번에도 참아야 하는 걸까? 자기검열에서 기인한 질문들이 끝없이 이어졌고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제대로 시작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자기검열만 거듭하다 포기해버린 경험은 이번뿐이 아니라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다.

      분열을 조장하지 말라는 말은 어디에나 있었다. 강남역 사건이 여성혐오 때문에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은 양성 갈등을 부추기는 행위로 치부되었다. 성희롱이 난무하던 단톡방을 고발한 피해자들은 동기들에게 그렇게까지 하고 싶으냐고 도리어 비난을 당했다. 문화예술계 성폭력에 대한 수많은 공개 폭로는 업계를 들쑤신 골칫거리가 되었다. 결국, 이 모든 사건들은 ‘예민한 여자’들 때문에 조장된 분열과 갈등으로 변모한다. 유난스러운 일부 여자들은 비난과 혐오의 대상이 되고, 바로 그런 여자들 때문에 중립적인 남성인 나조차 ‘너희들이 말하는’ 페미니즘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라는 훈계가 뒤따른다. 예민하거나 이기적인 여자, 혹은 혐오의 표적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검열의 끈을 더 조이거나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위험성을 감수하더라도 여성혐오를 멈추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면, 여러 번 순화된 언어를 써야만 했다. 최대한 남성 전체를 일반화하지 않는 것처럼 세심하게, 덜 과격하게 느껴지도록 중립적이고 온건한 어휘를 사용하면서. 상대가 예민하고 피해의식에 가득 찬 ‘그’ 페미니스트처럼 느껴지면, 남성들, 혹은 더는 페미니즘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다시는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사례를 들 때도 조심해야만 했다. 그들에게도 설득력 있게 다가갈 수 있는지를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최대한 객관적이고 공정해 보이는 예시를 골랐다. 자기검열의 기준은 내가 발화하는 어휘의 정치적 올바름이나 정확성이 아니었다. 그저 그들의 눈에서 얼마나 덜 거슬리는지, 그리고 들어보고자 하는 의사를 불러일으키는지였다. 일명 ‘받아들일 기분이 나는’ 페미니즘을 찾고 있었던 셈이다. 

        자기검열의 결과물이긴 했지만, 결국 지극히 남성의 눈을 기준으로 검열된 언어로 할 수 있는 말에는 한계가 있었다. 박탈당했던 여성의 권리에 관해 이야기하면서도 그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던 셈이니 당연한 수순이다.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그런 태도를 유지했던 것은 언젠가는 그들이 내 말을 듣고 생각을 바꿀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를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예민함’이라는 낙인을 더더욱 피하고 싶었다. 그 낙인이 찍히고 나면, 내가 말하는 모든 부당함이 그저 일부 여성 고유의 예민함의 발현인 것처럼 결론지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혹은 피해의식에 가득 차서 분열이나 갈등을 부추기는 일부 여성의 문제로 규정될까 봐 두렵기도 했다. 그 낙인은 결국 내 말들에서 아주 오랫동안 그 설득력을 앗아가 버릴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만큼 분열을 조장하지 말라는 말과 왜 이렇게 예민하냐는 말은 나를 통제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더는 그런 말들에 자신을 스스로 검열하지 않으려고 한다. 페미니즘이 향하는 곳은, 굳이 따지자면 분열이 아니라 균열이다. 유구하게 이어져 왔던 가부장적 질서에 균열을 만들고, 그 틈을 통해서 지워져 왔던 존재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제 분열을 조장하지 말라는 말이나 내 예민함을 비난하는 말들에 속지 않는다. 내가 내는 목소리가 분열이 아니라 균열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 균열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내게 낙인이 있든 없든, 자기들에게 불편한 목소리는 듣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 낙인 찍히는 것에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그저 타자였던 여성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그들에게는 성가실 예민함으로 불편한 목소리를 이어 나가야겠다고 생각할 뿐이다.


* 필자소개

      학부에서 예술학을 전공하면서, 조형예술을 기반으로 다양한 문화예술 현상을 감상하고 분석하는 법을 배웠다. 동일 전공으로 석사에 진학하여 공부를 이어갈 생각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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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촛불집회는



김난영

(한백교회 교인)

 


       큰 맘 먹고 아이들과 집회에 참석하기로 했습니다. 며칠 전부터 촛불집회에 가보고 싶다는 여섯 살 첫째 녀석의 성화에 못 이겨 약속을 하긴 했는데, 갑자기 남편 일정에 변동이 생겨 저 혼자 아이 둘을 데리고 지하철로 광화문까지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환승하기 직전 잠이든 두 녀석들. 첫째는 겨우 깨워 손을 잡고, 깊이 잠든 십팔 킬로그램의 둘째는 어깨에 둘러업고 환승을 합니다. 헉헉 소리가 절로 나고, 대체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해야 하나, 내가 이러려고 집회가나 싶습니다. 

        그래도 무사히 약속 장소에 도착하고 남편과 일행을 만나 서대문에서 광화문, 광화문에서 효자동까지 걷고 다시 광화문으로 청계광장으로 두 시간 넘게 걸었습니다. 큰 아이는 곧잘 걸었지만, 낯선 분위기 때문인지 둘째 아이는 걸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남편과 저는 그런 아이들을 안고 업고 목마 태우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첫눈 오는 날 콧물 질질 흘리는 어린 아이들이 집회에 나온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지나가는 어른들이 초콜릿, 사탕, 귤도 주셨습니다. 그러다가 둘째가 LED 촛불을 얻었는데, 그걸 본 첫째 녀석이 자기는 왜 촛불이 없냐고, 촛불집회인데 촛불은 언제 주냐고 혼자만의 시위를 시작합니다. 아빠를 이리저리 끌고 동동거리며 '나에게도 촛불을 달라'는 촛불시위를 시작한 거죠. 한참을 아이를 어르고 달래다 지친 남편은 결국 광화문에서 천원을 주고 촛불을 삽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형님의 진짜 촛불이 갖고 싶은 아우가 또 울기 시작합니다. 어린 아이와 함께 하는 집회가 다 이런 거 아니겠냐며 저희 부부는 더 이상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을 어루만지며 따끈한 음식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큰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율아, 오늘 촛불집회 어땠어?" 아이는 언 몸이 녹는 중인지 그저 멍하니 아무 대답도 안합니다. 아이의 눈에 비친 집회가 어땠을까 궁금했는데 아이는 그저 촛불을 만지작거릴 뿐이었습니다. 기대보다 싱거운 반응에 좀 아쉽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며칠 전, 큰 아이의 친구네를 집으로 초대해 저녁식사를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방에서 노는 아이들이 조용하다 싶더니, 태극기를 그려 나와서는 흔들며“박근혜는 하야하라! 박근혜는 퇴진하라!”고 목청껏 외치며 밥상 주변을 뛰며 돕니다. 한창 어수선한 세상이야기를 하고 있던 어른들은 깜짝 놀랍니다. 어른들이 집회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고, 집회에서 본 건 있어서 참견하려면 뭐라도 적어 들고 해야겠는데 두 녀석 모두 까막눈이라 태극기라도 들고 나가보자 했나봅니다. 흥분한 아이들을 진정시키고 물으니, 박근혜가 누군지도 ‘하야’가 무슨 뜻인지도 모른답니다. 한참을 소리 지르고 뛰느라 숨이 찬 목소리로 깔깔 웃으며, 묻는 말에 “몰라, 모르는데”라고 대답하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에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난감하기만 합니다. 


        아이가 그린 태극기를 다시 봅니다. 순서가 뒤죽박죽이긴 합니다만 제법 건곤감리도 흉내 낸 모양입니다.(어쩌면 순서가 뒤바뀐 모양이 꼭 지금의 우리나라 같습니다.) 자세히 관찰하고 그린 흔적입니다. 집회 때 어른들의 모습도 그렇게 살폈겠지요. 어른들이 무엇을 외치는지 어떻게 행동하는지, 태극기의 색과 모양을 새기듯 마음에 새겼을 겁니다. 광장 곳곳에 나부꼈던 태극기. 태극기가 우리나라를 상징한다는 것은 여섯 살 꼬마도 압니다. 엄마, 아빠가, 그리고 많은 어른들이 나라를 위해 태극기를 흔들고 있었다고, 촛불을 들고 있었다고 짐작해주길 바랄뿐입니다. 

        어른의 상식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작금의 사태를 아이에게 나쁜 임금의 허튼 짓쯤으로 설명하기엔 저도 이제 더 이상 화가 나서 못 하겠습니다. 겨울 추위 속에 더 이상 많은 사람 고생 않게 하루 빨리 정신 차리고 방 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박근혜는 퇴진하라! 세월호 7시간! 박근혜를 구속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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