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이후를 묻다

 



양권석

(본 연구소 소장 / 성공회대 신학과 교수)


    2014년 4월 16일 그 날부터 사람들은 집에 있거나 길거리에서 풍찬노숙을 하거나 모두가 제대로 잠들 수 없었다. 이건 아니야! 이건 나라가 아니야! 잠꼬대하듯 중얼거리며 이 나라 사람들은 길고 긴 겨울 추위를 견뎌야 했다. 작년 4월 13일 매우 분명한 신호를 보았다. 더 이상 두고 보지 않겠노라는 결연함의 신호였다. 지난 10월 말부터 3월까지 넉 달도 넘게 촛불은 차가운 도시에 온기를 불어넣고, 식은 가슴에 뜨거운 생명의 율동을 되살려냈다.


    신영복 선생은 주역(周易)에 있는 ‘석과불식’(不食)을 풀이하면서, 겨울 찬바람을 견뎌낸 씨과실(碩果)은 역경과 고난의 상징이지만, 그것을 먹지 않고 땅에 심어 나무로 숲으로 키워내는 일이 석과불식의 정신이라 했다. 바로 이 희망을 위해 나무는 모든 잎을 떨구어 자신의 뿌리를 두텁게 덥고, 오직 뿌리만은 살려 내겠다는 일념으로 벌거벗은 나목으로 겨울 추위에 맞선다고 했다.


    촛불 시민혁명도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탄핵은 헌법 1조가 살아 있음을, 국민이 권력의 원천임을 확인해준 사건이었고, 법 앞에서의 평등을, 사람이 법을 만들고 국가를 만든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케 해준 사건이었다. 그 점에서 광장의 촛불은 가장 평화롭고 명예로운 혁명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이 혁명은 탄핵의 성취만으로는 결코 다 설명될 수 없는, 오래 묵은 깊고도 간절한 희망의 계시였다. 지난 넉 달 반의 과정을 생각하면, 자신을 보호하고 가릴 수 있는 모든 것들 그리고 자신의 삶을 위해서 본질적이지 않은 모든 것들을 과감히 떨어내고, 오직 뿌리만을 지키기 위해서 북풍 한설 앞에 맨 몸으로 선 겨울 나무의 모습이 촛불 가운데 있었다. 인간과 생명의 존엄과 가치라는 모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관계의 바탕을 다시 분명히 해야 한다는 강렬한 의지를 품은 촛불이었다는 말이다.  


    어쩌면 세월호 참사가 있기 이전부터 참사는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고, 최순실과 박근혜에 의한 국가 권력의 사유화와 독점이 있기 이전부터 공권력의 사유화와 독점은 우리 눈 앞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던 일이 아닌가? 저성장, 고용둔화, 노령화, 대기업 위주의 독식체제가 유지되면 청년층의 중산층 진입 경로가 차단되고, 양극화가 고착화 되고 저변도 넓어지게 되어, 그 결과 각종 범죄와 자살, 사회불신의 고조, 잃을 게 없는 청장년층의 묻지마 범죄 급증 등 사회병리 현상의 확산과 악화를 피할 수 없으리라는 예측과 경고는 하루 이틀 들어온 이야기가 아니지 않은가? 무절제한 사유화와 독점의 논리가 우리 삶의 깊숙한 곳까지 점령해 들어와 있었고, 그 깊이에서 삶을 무너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최순실과 박근혜는 이처럼 권력과 부의 사유화와 독점을 정당화하는 의식의 체계, 문화상징들의 체계, 그리고 개념들의 체계가 만들어낸 것 아닌가?


    촛불은 결코 최순실의 구속과 박근혜의 탄핵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발표하던 날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정작 일어서 뛰거나 소리지르지도 못하고, 서로 부둥켜 안고 울고 있던 세월호 유가족들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보았다. 그 순간의 감정을 소리 없는 눈물로 표현하고 있는 그들을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걸어온 결코 짧지 않은 과정이 보였고, 앞으로도 그들이 우리와 함께 걸어야 할 긴 여정이 보이는 듯 했다. 아직은 가야 할 먼 길이 있기에 쉽게 긴장을 놓을 수 없음을 그분들은 이미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탄핵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 해결을 향한 출발점일 뿐이라고 분명히 말하는 것 같았다.


    보수 언론은 지금 조급하다. 최순실과 박근혜로 꼬리짜르기 하기 위해서, 촛불을 울타리로 둘러치려고 할 것이다. 촛불은 탄핵을 위한 것이었고, 탄핵은 미르.K스포츠 두 재단 문제와 관련된 것일 뿐이라고 이미 말하고 있다. 그 보수언론과 박근혜 정부가 했던 대부분의 일은 지극히 정당하고, 사드 배치, 위안부 합의, 국정교과서 모두 정당했던 것이고, 오직 미르.K스포츠만 문제라는 사실을 헌법재판소가 명백히 판단해 놓았다고 강변할 것이다. 이렇게 촛불, 미르.K스포츠 재단 운영 문제, 최순실구속 박근혜 탄핵으로 문제 해결, 이라는 폐쇄된 연결고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조급하게 서두르는 이유는, 결국 그들이 즐겨 사용해 왔던 안보프레임을 재가동 시킬 수 있는 공간을 만들려는 것이다. 그와 함께 통합이 적폐청산을 압도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 보수 언론에서 통합의 이야기는 박근혜의 사면이야기로 이미 옮겨가고 있다. 정말로 통합이 사면 논의로 옮겨 간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말한 탄핵 당한 전직 대통령의 생각과 만나는 날도 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네 달 반이라는 시간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문제의 깊이를 파악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 조급하게 울타리를 쳤다 해도, 그 안에 갇히는 촛불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은 끊임없이 때를 분별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모든 순간의 의미를 하느님의 뜻 가운데서 읽어내려는 사람들이다. “’하늘이 붉고 흐린 것을 보니 오늘은 날씨가 궂겠구나’ 한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들은 분별하지 못하느냐?”(마태16:3)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할 것이다. 신앙인들에게 시대를 읽는 일, 우리가 서 있는 이곳에서, 지금이 어떤 때인지 묻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때를 묻는 다는 것은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지금 여기를 지배하는 가치와 질서에 대해서 파악하는 일이 될 것이다. 둘째는 그러한 질서와 가치가 지배하는 이곳에서, 그것들에 대항해서,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어떤 실천을 하도록 부름 받았는지 파악하는 일이다. 말하자면 소명의 문제다. 촛불혁명은 시대의 실상과 우리의 소명을 한꺼번에 드러내 준 사건이었을지 모르겠다. 촛불이 드러낸 새로운 희망의 세계를 향한 부름에 기뻐 응답하는 삶이 되고, 신학적 실천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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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그들, 제로섬 게임을 벌이다[각주:1]


 

권오윤[각주:2]



       현실 사회에서 범죄는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해 금기시 하는 행위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범죄자의 편이 되어 그를 응원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범죄자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들이 범행을 모의하고 실행하는 과정을 다루는 케이퍼 영화가 대표적인 경우죠. 값진 물건을 절도하거나 현금성 자산을 강탈하는 범죄를 모의하고 실행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관객은 마치 자기가 그 일원이라도 된 것처럼 스릴을 느낍니다.

       일반적인 범죄 스릴러 영화, 즉 범죄를 저지르는 인물과 그에 맞서는 인물이 엇비슷한 분량으로 등장하면서 쫓고 쫓기는 대결을 펼치는 경우에도 범죄자에게 어느 정도 감정 이입할 수 있습니다. 범죄에 특별한 사연이 있거나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다면요. 사람을 마구 죽이는 사이코패스 살인마와 동일시 할 관객은 거의 없을 테지만, 강간범을 살해하고 도망치는 여성의 심정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을 것입니다.

       범죄자에 대한 호감은, 관객의 마음 속에서 범죄 행위에 대한 본능적인 반감과 갈등을 일으키며 영화에 대한 흥미와 집중도를 높여 줍니다. 이 영화 <로스트 인 더스트>는 그런 식의 양가 감정을 잘 활용하여 영화의 재미를 확보한 아주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과가 화려한 형 태너(벤 포스터)와 차분한 성격의 동생 토비(크리스 파인)는 서부 텍사스의 미들랜드 은행 지점에 연쇄적으로 침입해 현금을 강탈합니다. 이 은행에 저당 잡힌 가족의 농장에서 석유가 발견되었는데, 대출 만기일이 다가와 소유권을 완전히 박탈당할 처지에 놓였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맡은 베테랑 수사관 해밀턴(제프 브리지스)은 이들의 범죄 수법을 간파하고 곧바로 추적에 나섭니다.

       황량한 텍사스를 무대로 서로 쫓고 쫓기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같은 영화가 연상되기도 하지만, 이 영화는 그만큼 냉혹한 하드보일드도 아니고 이야기 구성도 복잡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은행 강도에 나서게 된 형제의 감정과 상황을 자세히 보여 줌으로써 관객의 공감을 얻는 데 주력합니다.


       벤 포스터와 크리스 파인의 앙상블이 빛을 발하는 지점도 그런 부분들입니다. 두 배우는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말썽꾸러기 형과 이성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냉정한 성격의 동생이라는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진짜 형제 간에 있을 법한 감정의 교류를 사실적으로 구현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 때문에 관객은 이 어설픈 무법자 형제들이 어떻게든 성공했으면 하는 생각을 점점 더 많이 하게 됩니다.

       은퇴를 앞둔 수사관 역할을 맡은 제프 브리지스는 보수적인 텍사스 남자들 특유의, 거들먹거리는 늙은 수탉 같은 느낌을 잘 표현하면서 현실감을 높여 줍니다. 베테랑 특유의 직감과 혜안을 바탕으로 움직이는 그의 존재감은 주인공 형제들이 정말 잡힐 수도 있겠다는 느낌을 주면서 극에 스릴을 더하지요.

      <영 아담>(2003), <할람 포>(2007) 등으로 국제 영화제에서 주목을 받았던 영국 감독 데이빗 맥켄지는 우리나라에서는 작년에 개봉됐던 <스타드 업>(2013)으로 상업적인 아이템에도 자신의 연출력이 통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 바 있습니다. 이번 영화에서는 쫓는 자와 쫓기는 자 사이의 잡힐 듯 말 듯 이어지는 서스펜스를 점진적으로 끌어 올려 결말까지 쭉 밀고 나가는 뚝심을 보여 줬습니다.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2015)의 각본으로 이름을 알린 시나리오 작가 테일러 쉐리던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범죄 행위와 수사하는 과정의 디테일을 꼼꼼하게 재현합니다. 삼촌과 사촌 형제들이 모두 텍사스 주의 법 집행관인 ‘텍사스 레인저’였기 때문에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그를 통해 시나리오의 디테일을 채워 넣었다고 합니다. 초반부는 다소 심심하지만, 형제의 진짜 동기가 제시된 이후의 전개는 흥미진진합니다. 특히 곳곳에 자리잡은 세련되고 맛깔스런 대사들이 돋보이지요.

       이 세상에 가난하고 궁핍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가난한 삶에 만족하고 욕심부리지 않는 태도를 좋게 여기는 ’안빈낙도’라는 말도 있지만, 이 사자성어의 대표격으로 칭송받는 공자의 제자 안회는 평생을 궁핍하게 살다가 불과 서른 한 살에 요절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본적인 의식주 해결도 안 되어 늘 쪼들리는 사람에게 ‘도’를 논하자고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 영화 속의 형제는 다음 세대에게 가난을 물려 주지 않기 위해서 은행 강도를 저지릅니다. ‘빈곤은 모두를 피폐하게 하는데, 그걸 내 자식들이 겪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는 주인공 토비의 말은 너무나 가슴에 와닿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의 돈과 기회를 불법적인 방법으로 강탈한 그들의 행동은 일종의 ‘제로섬 게임’에 불과합니다. 자신들의 빈곤과 불행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일을 한 것 뿐이니까요.

       개개인이 자력 구제 하는 것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그냥 저절로 벌어진 일이 아닙니다. 각자 알아서 잘 먹고 잘 사는 게 중요하고, 돈과 권력이 있으면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생각을 용인해 온 이 사회가 만들어 낸 일입니다. 개인의 탐욕을 위해 멋대로 사회의 룰을 바꾸려 한 사람들과, 자기의 알량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거기에 빌붙고 떡고물을 얻어 먹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썩은 고름이지요.

       이제는 더 늦기 전에 소수에게 집중된 부와 권력을 적절하게 제어하여 다수가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사회 안전망을 구축하는 데 힘써야 합니다. ‘혜실 게이트’(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제대로 단죄하는 일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보여 주는 확고한 이정표를 세울 수 있으니까요. 그러지 못하면 소수의 선택받은 자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가난에 허덕일 수 밖에 없는, 각자도생의 지옥은 계속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황량한 벌판에 석유 시추기만 조용히 움직이고 있는 텍사스의 풍경이 바로 그런 세상의 미래일 것입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오마이뉴스의 11월 9일자 기사 <빈곤을 물려 주고 싶지 않았던 그들, 제로섬 게임을 벌이다>(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258964 [본문으로]
  2. <발레교습소> <삼거리극장> <화차> 등의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일했으며, 현재 연출 데뷔작을 준비 중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물 [권오윤의 더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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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의 근본원인은 아직도 얼굴을 감추고 있다

 



양권석

(본 연구소 소장 / 성공회대 신학과 교수)


    뉴스가 드라마 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뉴스를 보고 있노라면 막장드라마와 리얼리즘의 간격이 일순간 무너진다. 한 두 번만 보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정확히 예측할 수 있고, 또 마지막 결론까지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고, 대개는 그 짐작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의 예측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이 다음 회를 기다리게 만드는 것이 막장 드라마다. 뉴스를 보는 것인지 막장드라마를 보고 있는 것인지, 이미 막장 드라마 같은 뉴스에 충분히 중독되어 버린듯하다.  


    그리고 깊은 의심이 생긴다. 막장드라마 같은 뉴스가 사실로 드러날 때 마다, 오히려 그렇게까지 된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다. 막장드라마를 이해하는 상식이면 충분히 예측 가능했던 것인데, 우리는 왜 몰랐던 것인가? 왜 묻지도 의심하지도 않았을까? 막장드라마가 리얼리즘이 되는 이 상황이 못내 의심스럽다. 최대한 앵글을 좁혀 최순실이라는 막장드라마적으로 과장된 캐릭터에 초점을 맞춘다거나, 아니면 최태민을 연결고리로 해서 박근혜와 최순실이 맺고 있는 관계구도에 모든 원인이 있는 것처럼 만든다거나, 그와 같은 초점의 집중과 시계의 한정을 위해서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이번 일이 벌어지기 전에는 까마득히 몰랐던 것처럼 화들짝 놀란 표정과 목소리와 행동을 나타낼 수 있도록 상황을 구성하고 있는 그 모습이 정말 의심스럽다. 


    어쩌면 “집단 유체이탈 국가”라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박근혜-최순실 커넥션이 국정농단을 할 수 있도록 모든 조건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아니 그들의 국정 농단에 충분히 혜택을 입은 사람들이 당연히 있을 것인데, 아무도 말이 없다. 박근혜와 최순실을 비호하기 위해서 온몸을 던졌던 정치인들, 박근혜 개인에게 권위의 휘광을 둘러 보수와 애국민족정신의 아이콘으로 만들어 온 언론인들, 감시와 사정의 책임을 버리고 박근혜 권력과 재벌의 시녀가 되어 온 판.검사들, 자존심도 책임감도 없는 관료들, 이들 모두가 마치 아무것도 몰랐던 사람들처럼 행동하고 있다. 문제가 되었던 두 재단에 돈을 기부한 기업관계자가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매우 억울하다는 듯이, 자신들은 어둔 밤 길가다가 강도를 당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명박근혜 정권을 복음을 지키는 파수꾼처럼 여기며 노골적으로 이념과 색깔 놀이의 적극적인 주체가 되어 온 기독교 교계가 이제 와서 최순실의 아버지 최태민은 가짜 목사라고 하면서 일종의 선 긋기를 하고, 자신의 흑역사를 감추는데 급급하고 있다. 사실은 이들, 정치인, 언론인, 법조인, 관료, 종교인, 재벌들은 박근혜 최순실 국정농단의 엄청난 혜택을 입은 자들이 아닌가? 아마도 최순실 자신보다 더 많은 경제적 이득을 취한 개인이나 기업이나 집단도 분명히 있을 것인데, 전혀 몰랐다는 표정이다. 


    이 의심스러운 상황전개는 이미 예정된 어떤 결말을 향해서 작동중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수사관이 원하는 완벽한 범죄 서사를 다 구성해 주고, 또 범인에 대한 분명한 논리적.서사적 근거를 다 제공해 주고, 유유히 경찰서를 빠져 나와 사라지는 진짜 범인. 대표적인 반전영화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1995년작 “유주얼 서스펙트”의 이야기다. 우리들에게 그럴듯한 원인과 결과의 서사를 제공하고, 그래서 처벌하거나 응징해야 할 범인을 정해 주고는, 진짜 원인은 슬그머니 얼굴을 감춰버리고 말지도 모른다. 아니 진짜 원인을 교묘히 가리는 정도가 아니라, 박근혜-최순실 커넥션을 가능하게 한 그 프레임 안으로 우리를 돌려 놓으려고 할 것이다. 만약 우리들의 분노가 아직도 박근혜-최순실의 관계구도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향한 깊은 탐색이 진행되지 못하고, 문제를 벗어나기 위한 형식적 절차에 매달린다면, 새로운 비젼 혹은 새로운 대안의 형성은 불가능하다. 결국 분노가 창조적 저항이 되지 못하고, 새로운 가치와 질서를 향한 희망을 만들지 못한다면 시민사회와 대중은 다시 현실과 타협하게 될 것이다.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과거가 지금 여기서 현실이 되고 있고, 미래가 될 것이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도 마찬가지다. 청산하지 못한 과거에 그 사태의 뿌리가 있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우리가 청산하지 못하면 또 다시 미래가 되어 나타날 것이다. 87년 이후 어느 정도 형식적 민주주의를 진전시켰다는 성취감을 얻었을지는 몰라도, 사람과 사회와 세계에 대한 새로운 비젼을 만들어 내는 일에서는 턱없이 부족했고, 오히려 기성의 보수적 가치와 타협하고 말았다. 그것이 결국 박정희 신화에 기초한 보수정권 재창출의 명분을 제공했고, 박근혜-최순실 커넥션은 그 박정희 신화 혹은 신드롬 안에서 풍부하게 양분을 섭취하며 자라난 괴물이다. 


    박정희 신드롬은 주린 배를 채워주었고 앞으로도 배불리 먹여줄 것이라는 신화다. 배불리 먹여주기 위해서 한 일이기에 유신체제도 정당했다거나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신화다. 말하자면 배를 채우고 채워주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는 신화다. 배를 채우기 위해서라면 권력자에게 기본적인 인권마저도 포기하거나 양도해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신화다. 하지만 예수는 정반대였다. 예수는 배불리 먹여주었다고 해서 자신을 왕으로 세우겠다는 무리를 냉정히 뿌리치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묵묵히 가셨다. 가난하고 굶주린 배를 채워주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한 순간 특정한 사람들만 배불리 먹여주는 것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어떻게 먹느냐에 딸린 문제, 곧 새로운 가치와 질서의 문제다. 예수는 먹여주는 것을 담보로 자신에게 권력을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과는 다른 미래, 곧 먹고 사는 새로운 길을 향해 나아가도록 요구하셨다. 


    아마도 눈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박정희 신드롬의 흉측한 속내는 박근혜 정권이 충분히 보여주었고 지금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박근혜 정권과 함께 박정희 신드롬도 명운을 다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언제 또 어떤 옷을 입고 다시 등장할지 모를 일이다. 아니 지금도 겉옷만 바꾸고 다시 등장하기 위해서, 박정희 대통령이라면 박근혜 같이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말을 너무도 쉽게 하고 있는 것 아닌가? 박정희 신드롬을 지키기 위해서 박근혜를 버리는 수순에 들어갔는지도 모르겠다. 그와 같은 방어 프레임에 걸려 다시 청산하지 못한 과거를 만들지 않으려면, 박근혜-최순실 사태의 근본뿌리를 직시하면서 새로운 대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자세와 지혜가 정말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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