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사랑한 남자> 출판기념회(2011.6.7) 서평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

 


정혜윤
(CBS 라디오 프로듀서)


저는 학자나 목회자가 아니라 정말로 소박한, 무지한
신앙인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저는 세례교인이지만 또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평소에 이렇게 입에 달고 다닙니다

난 탕자다. 난 집을 떠난 탕자다

정말이지 요즘 한국 교회를 보면 탕자가 가출하고 싶어했던 이유를
열배는 더 잘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집을 나가고 싶습니다.

한국 교회는 꽤 성공한 졸부 
부모처럼 굴고 있습니다
그들 말에 따르면
하느님은 하나에서 열까지
지상에 마치 사소한 일에 시시콜콜 간섭이나 하려고 오신 듯합니다

요즘 교회는 남의 성생활에는 관심이 있으면서
교회가 이권 나눠 먹기의 장소가 되고
중산층들만의 배타적인 지리멸렬한 사교 장소가 되는데 대해선
관심이 없습니다.

큰 건물 짓는데 혈안이 되 있기 때문에
그런 것만을 은총으로 여깁니다

대형 교회들의 타락상은 환멸감을 안겨줍니다.

한국에서 하나님은 이미 혜택 받은 자만을 특별히 사랑하는 분 같습니다
그리고 그 혜택받은 자들이 더할 나위 없이 오만하고 기만적으로
남한테 진부한 훈계를 늘어놓는 것을 기꺼이 봐주시는 분 같습니다.
저 역시 그것 때문에 몹시 슬픕니다.


저는 기독교인들이 목회자들이
삶은 엉망진창으로 꾸려나가면서
구원과 믿음과 사랑을
말하는데 저는 정말로 넌더리가 납니다

예수의 놀라운 약속
하층민들에게 주었던 놀라운 약속이
어떻게
부유층들의 전유물들이 되어갔는지
저는
예수님이 이 꼴을 보면 뭐라고 하실까요?라고 생각해봅니다.


저는 이제라도 한국 교회가
키에르케고르식으로 말하면
기독교 세계로부터 기독교를 구하는데
관심을 가져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파스칼이 팡세에서 스스로의 비참함을 알지 못하고 신을 아는 사람들은
신이 아니라 자기를 찬양해 왔을 뿐이다.
고했는데 그게 바로 한국의 교인들입니다.


이제 책 이야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제 절망감이 컸기 때문인지
저는 예수가 한 개인으로서 누구를 사랑했는지에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가 누구를 사랑하는가? 적어도 그 성별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가 동성애적 사랑을 했으니 동성애는 괜찮은가봐
이렇게 말하는 것도 이상하고
솔직히 예수의 행동 하나하나에
그런 절대적 권위를 부여할 마음도 없었습니다

예수가 사랑한 남자란 제목을 봤을 때도
예수가 사랑한 인류 정도로 제목을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된데는 몇 가지 원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에로스와 아가페란 단어에 대해 제가 처음 들은 곳이
바로 교회였습니다.
 
이 책 108페이지에 보면 이러한 구분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사람들은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사랑이 아가페로 표현되었다는 사실로부터
특정한 우정 또는 성애적 애정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출할 것이다
고 했는데
그게 바로 저입니다


오늘날 다수의 사람들은 동성애적 욕망은 그 자체로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사랑이 보다 정신적인 형태로 승화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즉 성관계를 맺지 말아야한다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는 이로 말해질수 있는 사람이 친밀한 의미에서
특정하게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이로 판명되는 것의 부적합함


이 책을 다 읽은 지금
이 책이 열두제자중 혹은 열두제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누구를 사랑했느냐 추적하는 것에 관한 책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예수의 성생활에 밝히는 책도 아니고요.
저는 다른 것들을 기쁨속에서 봤습니다.

-하나님은 종교적 규칙들보다 인간적 행복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신다. 126페이지

-십자가에 달린 자가 메시아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공동체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놀라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127페이지

-노예적인 수용과 복종의 태도가 아니라
관습적인 도덕과 생활양식에 대한 훨씬 집요하고 끈질긴 전복이란 것이다

-그는 단적으로 거룩한 사람 예언자 메시아에 관한
어떤 기대에도 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벤덤이 말했듯이
인간의 행복과 중요한 진실에 대한 존중
애 관한 글이라고 읽었습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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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영준
    2011.10.07 21:33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참으로 감사한 글입니다.
    돌아봐야지요.
    반성해야지요.
    더 없이 더 없이 더 우리가 아닙을 고백해야지요.
    나는 아무것도 아님을...
    내가 하는 즉시 바로 헛짓꺼리를 하닌까요.
    그저 그분을 바라봅니다.

<예수가 사랑한 남자> 출판기념회(2011.6.7) 서평

평등과 해방의 관계로 ‘제국’을 해체하는 예수의 새 가족들

 


백소영
(이화여자대학교 )


저는 성서신학자가 아닙니다.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며 문서비평이나 양식비평적 차원에서의 공감이나 반문을 제기할 기초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성신학적 시각을 가진 기독교사회윤리학자로서, 그러니까 주변자적 시선을 가지고 성서를 읽는 것에 상당히 익숙한 한 지식인 독자의 입장에서 이 글을 읽었고 그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저의 소박한 ‘독후감’을 나눌까 합니다.

1. 식탁 위에 차려진 만찬 즐기기, 예수 전승으로부터의 적극적 독해

예수는 게이였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은 이 질문으로부터 시작하지만 아주 직접적으로 ‘예수가 게이였다’는 것을 설득하도록 구성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저는 이 점이 오히려 매력적이었습니다. 이 책은 ‘예수가 게이라 해도 그의 메시지 전반의 핵심 내용과 위배됨이 없다’ 그리고 ‘오히려 예수가 게이인 것이 주변인들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평등하게 바라보려는 그의 선교사역의 수행성으로 더욱 적합하며 그의 전반적인 메시지에 부합한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여섯 구절밖에 안 되는 동성애혐오적 텍스트를 가지고 씨름하기보다 복음서에 나타난 전반적인 예수전승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싸움에 나선 개들이 서로 차지하려고 으르렁거리는 바닥에 깔린 몇 개의 부스러기들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무시하고, 그 대신 신약성서 서사라는 식탁 위에 차려진 만찬에만 집중하는 편”을 선택했다는(414) 제닝스 박사의 말처럼 말이죠.

흑인, 여성, 제3세계 민중의 시각에서 전통적 성서해석에 이의를 제기해온 그 모든 해방신학적 전통과 맥을 같이 하며 제닝스 박사는 이 책의 시도가 “‘완전한 해방’을 위한 것”이라고 역설합니다. “다른 것들의 희생의 대가로 얻는 부분적인 해방은 예수 안에서 약속되고 이미 시작된 새로운 창조의 지평 내에서 해방일 수 없”(19-20)으니까요.

때문에 “오늘날의 게이적 또는 퀴어적 감수성의 관점으로부터 텍스트들을 해석하는 전략”(22)을 택한 이 책은 “동성애적 욕망과 관계들을 감싸 안고 긍정하는 많은 증거에 대한 검토에 집중”(23)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제안 받으며 책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얼른 떠올렸던 전제처럼, 제닝스 박사는 제일 먼저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사랑받는 자’에게 주목합니다. “예수의 무릎에 기대어 있고” “예수의 가슴에 등을 기댄 상태로 예수에게 말을 건네는”(49), 그리고 십자가 증인 중 유일한 남자였으며 예수가 죽기 전 자신의 생모 마리아와 그를 가족으로 연결해준 ‘그 남자’ 말입니다. 불트만이 이 사랑받는 자에 대해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한 것, 즉 후대의 추가로서 이방인 교회의 전형으로 풀이한 것에 반대(79)하며 제닝스 박사는 “예수가 제자들 모두를 사랑하지만, 다른 제자들을 사랑하는 것과는 다른 특별한 방식으로 [즉 성애적 의미에서] 이 제자를 사랑했음”을 강조합니다(81). 물론 이 사랑은 예수 사역의 공적 지위에서는 그 어떤 특별함이나 우위를 가지지 않는 사랑입니다.

제닝스 박사는 무엇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성육신의 메시지가 강한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성애는 오히려 그 주장을 강화시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더구나 당시의 관습적 제도들이 가진 억압성에 반대했던 예수이고 보면 “결혼과 가족적 가치들에 의해 대표되는 관습성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면서 다루어지기 위해서는 동성애적 관계의 암시가 하나의 적절한 수단”(139)일 수도 있겠지요. 제닝스 박사는 “예수가 사랑했던 제자에 관한 에피소드들이 예수와 그 제자의 관계가 성적인 표현을 포함하는 것으로 추정될 수 있는 동성애적 관계였다는 가정에 기초할 때 가장 잘 이해”되며, 무엇보다 “텍스트 전체의 전반적인 세계관과 합치한다.”(169-170)고 결론짓습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들과 같이 예수를 모든 면에서 비관습적인 인물로 표상한다. 그의 비관습성 자체가 동시대인들의 신학적-사회적 가정들에 문제를 제기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그래서 예수는 경건하고 인격적인 고결함에 들어맞지 않는다. 그는 금식, 정결례, 성전 참배와 같은 경건함을 실천하는 예시적인 인물이 아니다. 그는 성서 해석에 대한 관습들을 수용하지 않는다. 하물며 그는 경건하고 존경받을 만한 사람들이 죄인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하는 관습적인 방식들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는 먹보에 술꾼으로 악명이 높았으며, 오로지 (사회에서) 가장 평판이 나쁜 구성원들인 창녀나 (로마 제국의) 부역자들과 함께 한다. 그는 자신의 의례적 정결함에 대해 신경 쓰지 않으며, 문둥병자, 시체, 생리중인 여자를 거리낌 없이 만진다.(181)

요한복음의 예수가 “정의와 관용 그리고 기쁨이라는 가치들이 표현될 수 있는 새로운 사회적 현실을 정립하기 위해 관습적인 사회생활의 구조들을 전복시키는 사람으로 나타난다”면(181)“사회적, 생물학적, 경제적 필요에 대한 구속으로부터 해방된 성애적 관계를, 그래서 이성애적 관계들 역시 변화시킬 수 있는 그러한 성애적 관계를 예기한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제닝스 박사의 주장은, 이성애자인 저에게 그 어떤 거부감도 없는,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였습니다.

2. 예수, ‘게이’이거나 ‘젠더제한으로부터 자유롭거나’
 
이어지는 II부에서 제닝스 박사는 1-2세기에 유통되었던 ‘비밀의 마가복음’에서 전해지는 ‘부유한 젊은 관원’ 전승과 정경 복음서에 남아있는 ‘백부장과 젊은 애인’ 에피소드의 면밀한 독해를 통해 이미 제국의 질서 안에 일부 편입되어 있었던 초대 교회가 동성애적 성향을 ‘위험한 기억’으로 간주하고 이를 예수 전승으로부터 삭제하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드러나는 흔적들을 주목합니다. 무엇보다 복음서의 예수 전승들이 가지는 체제 전복적 메시지들, 주변화된 사람들이 주된 증거자요 체험자로 등장하는 구성을 고려할 때 동성애자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한 예수의 전승은 충분히 가능한 서사라는 것이죠: “그는 그의 사랑하는 이를 위한 치유와 온전함을 원했고 갈망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걸고 무엇이라도 할 것만 같았다. 이런 욕망으로 그는 행동한다.”(257) ‘욕망’이라는 단어를 읽었을 때 문득 떠오른 것은 주디스 버틀러의 책 『안티고네의 주장』이었습니다. 국가의 법에 의해 범법자로 낙인찍힌 오라비이기에 그 시신을 수습하는 일 역시 역모로 규정되던 상황에서 오로지 사랑하는 오라비의 주검을 고이 묻어주고 싶은 그 욕망에 충실했기에 범법자가 되었던 안티고네 말입니다. 예수 전승에서 백부장은 제도와 규칙의 위반자로서가 아니라 분명하게 믿음의 범례로서 예수의 칭찬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는 법보다 욕망의 지지자이기 때문이겠죠?

이 에피소드는 복음서의 예수 전승들이 담고 있는 ‘젠더해방적인’ 담화들, 즉 기쁜 소식을 전해들은 환관들과 1세기 젠더적 역할 기대와의 근본적인 단절을 선언하며 예수를 따른 여제자들의 이야기, 예수 선교사역의 클라이맥스에 주요한 역할자로 등장한 “물동이를 이고 가는 남자” 또는 ‘전통적으로 여성의 일이던 발을 씻기시던 예수’의 이야기와 조화를 이루며 하나의 커다란 서사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게이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히 제가 동의하는 한 가지는 “젠더 역할들의 신성함”은 “예수 전승들에 대한 관계를 완전히 은폐하지 않고서는 동성 간의 성애적 행위들에 반대하는 논거로 주장될 수 없다”(302)는 제닝스 박사의 결론입니다.

3. 평등과 해방의 관계로 ‘제국’을 해체하는 예수의 새 가족들

III부는 복음서들에 나타난 결혼 및 가족적 가치들에 대한 예수의 전복적 가르침에 대한 검토를 통해 동성애자들의 상호적 성애가 배제되지 아니하는 예수의 (확대가족)공동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형제자매들의 연합과 연대 말입니다: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그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났다.”(340) 사두개인들의 질문, 즉 형제들이 모두 한 여자와 결혼관계 후 죽고 부활했을 때 그 여인은 누구의 아내여야 하냐는 질문에 “예수는 결혼 및 가족 제도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미래가 없으며, 오히려 죽은 자들의 부활에 의해 폐지될 것이라고 주장”(350)합니다. 사두개인들이 제기한 “문제는 그녀가 누구에게 귀속되는가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부활에 의해 소유권이 완전히 폐지된다는 것”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은 그들이 부활할 때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 “인간적인 제도들의 굴레로부터 자유롭게 될 것” “한 사람에 의한 다른 한 사람의 지배 또는 소유가 폐지된다는 것”(350)이었다는 겁니다.

결혼은 예수 전승에서 “하나님 나라의 윤리(행동양식)를 구현하는 자유롭게 선택된 충실성을 나타내는 것”(365)이나 “두 사람이 욕망과 환희 내에서 연합하는 것”(370)으로서는 옹호되지만, “분리와 지배를 특징으로 하는 세상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가치들의 기초적인 생산 단위 내에 인간들을 얽어매는”(371) 제도로서는 거부되고 폐기됩니다. 때문에 이런 서사 속에서 “제도화되지 않은 성애에 대한 긍정”은 “동성애와 동성적 관계”라는 주제와 연관될 수 있다고, 제닝스 박사는 말합니다, 예수와 그가 사랑했던 남자 사이의 관계는 동성애라는 젠더적 특성보다는 ‘종속과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상호적 사랑’이라는 데 방점이 찍힌 채 읽혀져야 하니까요. 

“창세기 1장에 등장하는 생물학적 재생산이라는 개념이 신약성서에서 선교적인 재생산이라는 개념으로 교체된다”는 제닝스 박사의 독해,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의 ‘열매를 많이 맺고 증식하라’는 명령은 ‘선포하고 제자들을 만들라’는 명령으로 전환된다.”(375)는 그의 읽기방식이 상당히 흥미로웠습니다. 홍수 때 동물들의 생명을 구하는 방식과 비교하며,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내보낸 예수의 에피소드를 해석하는 방식 역시 재미있었습니다: “예수에게서 실현된 새로운 약속은 새로운 민족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 내에서 완성에 이르게 될 새로운 운동이다. 이 맥락에서 우리는 예수가 어떻게 열두 명의 아들이 아니라 열두 명의 제자를 두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이에 이어 땅 위의 모든 민족들로부터 제자들을 만들라는 명령을 받는다.”(381) 사랑하는 두 사람을 연합시키는 욕망이 “자손에 대한 약속의 도구”가 아니라 “믿음의 새로운 창조의 시작을 위한 도구가 되는 것”(382)이라면, 그 ‘연합에 동성애적 성애를 배제할 이유가 없다’는 제닝스 박사의 말에 동의합니다.

전통적으로 바울에게 저작이 돌려지는 일부 서신들에서 여성억압적이고 반동성애적 언급들이 나오지만, 현대의 신학자들은 이를 후기바울적인, 그리고 종종 반바울적인 텍스트임을 밝히고 있는 마당입니다. 복음서와 동시대적으로 편집되었을 이 서신들은 기독교 초기 전통 안에서 예수 전승에 반하는 뚜렷한 한 흐름, 즉 기존질서를 유지하고 그 구조를 신성화하려는 ‘제국적’ 의도를 보여줍니다. 제국은 ‘동질화’와 ‘보수화’를 그 핵심가치로 하는 시스템이니까요. 결론으로 가면서 저자가 분명히 하듯이 문제는 ‘두려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게이를 긍정하는 독해는 성서상의 모든 구절에 대해 폭력을 행사하도록 강요하지 않음”(415)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한 특정 시스템을 위협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두려움’ 말입니다. 그들은 근대・자본주의・가부장적 시스템의 유지를 위해 이성애적 결혼과 가족제도의 ‘신성화’가 필수불가결하다고 믿고 있으니까요. 제국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교회 전통의 시각에서는 여성의 진정한 해방을 추구하는 ‘페미니스트’들이 ‘페미년’으로 읽히고 거부되듯이, 동성애와 동성애자들을 향한 교회의 알레르기 반응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가 제국의 중심 예루살렘이 아니라 주변인 갈릴리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커다란 상징성을 가진다고 봅니다. 또한 그 여정이 점차로 예루살렘을 향해 갔던 것 역시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아래, 그 모든 차이들의 위계화와 분리가 해체된다고 고백하는 신앙인이라면, 이 책의 주장과 이 책이 선택한 읽기방식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녀)가 제국의 옹호자, 예수의 반대자가 아니라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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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사랑한 남자> 출판기념회(2011.6.7) 축사

동성애자들과 민중
 


서광선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


멀리 미국 쉬카고에서 방한하신 쉬카고 신학대학원의 제닝스 교수님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감사합니다. 그리고 교수님의 방한을 계기로 제3시대 그리스도교연구소와 출판사 동연이 공동으로 하는 출판사업의 일환으로 제닝스 교수님의 역작인 2003년도 판, [The Man Jesus Loved]를 [예수가 사랑한 남자]라는 제목으로 출판하게 된 것 진심으로 축하드리고 참 좋은 일 하셨다고 치하하고 싶습니다.

저는 1950년, 61년 전에 터진 한국전쟁 당시, 해군에 지원병으로 입대해서, 미국 해군 종합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동안에 만난, 미국 해군 친구의 도움으로 1956년 미국 서부에 있는 작은 기독교 인문대학에 유학할 수 있는 행운이 있었습니다. 저는 철학공부를 시작해서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고 신학공부를 뉴욕에 있는 유니언에서 했습니다. 북한에서 목사 아들로 성장하면서 철저한 근본주의 신앙으로 교육 받은 사람으로, 유니언에서 180도 다른 신학을 공부해야 했습니다. 구약성서 개론을 들으면서, 처음으로 창조설화가 하나만이 아니라, 둘이라는 것도 비로소 내 눈으로 확인하고, 성서가 글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 그대로 믿어야 한다는 내 믿음이 허물어졌습니다.

1960년대 미국 흑인 민권운동에 참여하면서,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인간 억압과 노예제도를 정당한 것으로 강요하는 일에 회의와 함께 분노를 느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워싱튼 연설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며, 저의 신학적 꿈을 키웠습니다. 저의 목사 아버지는 일제 식민지 시대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만주에 망명한 항일 목사였습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북한으로 귀국했지만, 공산당 치하에서 반공분자로 낙인 찍혀, 625 전쟁 중 북한군에 납치되어 평양에서 총살 당했습니다. 이념적 탄압,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는 악독한 권력에 대한 저항을 몸으로 겪은 사람으로서, 마틴 루터 킹의 꿈은 미국 흑인들의 꿈 만이 아니라 저의 꿈이 되었습니다. 남과 북의 독재 정권에서 시달리고 있는 한국 민중이 자유롭게 그리고 평화롭게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민주화 된 나라를 만드는 꿈이었습니다.

이 꿈은 우리 신학의 선배들, 김재준, 서남동, 안병무, 현영학, 박형규, 문익환, 문동환 등과 후배인 김용복 등과 함께 민중의 해방과 인간화를 위해서 일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전개하였습니다. 우리들의 민중 연대와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신학화한 것이 민중신학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민중과 함께 민주화를 위하여 행동하면서, 우리는 성서를 다시 읽었습니다. 우리는 성서 속에서 민중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가 민중의 편이었다는 것을 발견했을 뿐 아니라, 예수 자신이 민중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는 신약성서의 오클로스의 친구이며, 동시에 민중입니다.

"민중"이 누구냐? "민중"을 정의하라는 학문적인 압력을 안과 밖에서 많이 받았습니다. 우리는 "민중"을 관념적인 어떤 범주에 넣기를 거부했습니다. 민중의 사회전기, 민중의 삶을 보고, 연대함으로써 알게 되는 실체입니다. 그러나 구지 서술하자면, 민중이라고 불릴 만 한 사람들은, 게급과 계층, 남자나 여자를 막론하고, 정치적으로 억압받는 사람들, 경제적으로 수탈당하는 사람들, 문화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라고 윤곽 만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죄인들, 세리들, 창녀들, 가난하고 병든자들, 여자들, 마가복음서에 나오는 오클로스, 구약성서의 하피루라고 했습니다.

저희 민중신학자들은 한국의 여성해방신학자들의 도전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여성은 민중 중의 민중이다. 정치적으로 억압 받고, 경제적으로 착취당하고, 문화적으로 가부장제 사회에서 차별대우를 받고 무시당하고, 남성들의 폭력의 희생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민중신학자들과 여성신학자들의 연대는 아직 요원한 상태입니다.

오늘 우리는 제닝스 교수님의 책을 통해서 또다른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작년에 방한하셔서 바로 이자리에서 강연하신 내용을 이 책에서 다시 읽게 되면서, 동성애자들 역시 민중 중의 민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사회적 개인적 혐오의 대상이 되어, 사회에 발 붙일 수 없어서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 밖에 할 수 없는 극한상항에 처해 있어서, 연민의 대상으로서의 "타자 (Others)"거나, 싸구려 관용의 대상이라는 의미에서 민중이 아니라, 성서적으로 신학적으로 예수시대의 세리나 창녀와 같은 죄인들로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어찌하여 요한복음의 분명한 구절들을 읽지 못했을까? 어려서 부터 수십번 읽은 성경, 신학교에서 시험까지 보고 합격한 성경말씀들, 대학에서 교회에서 수십번 설교하면서도-- 눈 먼 사람처럼, 예수 역시 성적 주변인으로서의 민중이라는 것을 왜 보지 못했을까 싶습니다. 예수는 민중신학자들이 신학적 상상력을 동원해서 발견한 정치적, 문화적 반항아 이상의 혁명가, 하나님나라의 정의와 관용과 기쁨을 설파한 선지자라는 것을, 이책은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이 책은 제가 소경이었다는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이제 겨우 눈을 뜨게 된것 같습니다. 우리 한국 남자들은 유교의 가족 중심주의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세뇌를 받아 여성을 인간으로 보는 눈이 멀었습니다. 한국에 들어 온 서양 선교사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하나님 나라를 유교 문화와 접목시켰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가부장적이고 엄하고 강하고 폭력적인, 그러나 다분히 도덕군자 연하는 유교적 아버지로 알고, 교회의 목사들을 하나님처럼 모시라고 강요하고 절대 복종을 명령해 왔습니다. 가부장적이며 재국주의적인 선교사의 기독교와 유교가 힘을 합친 종교권력은 어느 나라 기독교 보다 권위적이고, 억압적이고, 폭력적입니다. 인간 해방의 복음을 우리는 돈과 권력을 추구하는 종교로 왜곡해 왔습니다.

"예수는 게이였는가?" 이 질문 만이 아니라, 차마 질문할 수 없는 질문들을 던지고 있는 것이 이 책입니다. 그리고 우리 철통 같은 가부장제와 가족 중심주의를 해체하는 지진의 굉음이 들리는 책입니다. 제닝스 교수님의 신학, 성서 읽기는 신학적 상상력을 넘어서, 신학적 용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신학적 용기는 이단의 눈으로, 종교적 순교자, 지적 순교자, 십자가의 죽음을 각오하는, "queer" 즉 이상한 사람, 색 다른 사람, 괴상한 사람, 수상한 사람의 눈으로 성서를 읽고, 읽은 그대로 말하는 용기입니다. 예수를 따르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참으로 민중신학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일깨워 주신 제닝스 교수님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난생 처음으로 번역하시노라고 수고하신 박성훈 선생님에게 경의와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혁명적이며 체제 해체적인 무서운 책을 기획하고 출판한 연구소 김진호 실장님과 도서 출판 동연  김영호 사장님의 신학적 상상력과 용기에 큰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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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사랑한 남자> 출판기념회(2011.6.7) 인사말

교회가 소외된 사람들의 잔치마당으로 변하는 그날을 바라며

 


김창락
(본 연구소 소장)


1.

우리는 저마다 자기의 눈에 자기도 모르게 해석학적 색안경이 끼워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충격적으로 깨우쳐줄 책이 이렇게 이른 시기에 우리말로 번역, 출간된 것을 다 함께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자축하고 서로 격려하는 의미로 큰 박수를 칩시다.

2.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나고 20세기 후반기에 들어와서 세계 각 곳에서 갖 가지 해방운동들이 잇달아 일어났습니다. 이에 호응하여 갖 가지 급진적 신학사상들이 등장했습니다. 1950년대와 60년대에는 남미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자기들이 당하는 격심한 경제적 불의로부터 해방하려는 운동이 확산되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해방신학(liberation theology)이 탄생했습니다. 1960년대 초에에는 백인과 흑인 사이에 인종차별이 극심한 미국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흑인들의 민권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졌습니다. 여기에서 black theology(흑인신학)가 탄생했습니다. 1960년에서 70년대에 한국에서는 급속한 산업화 정책으로 희생을 당하는 노동자들의 생존권쟁취 투쟁과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차원에서 소외당한 민중들의 반독재민주화 투쟁이 치열하게 벌어젔습니다. 이 맥락에서 민중신학이 탄생했습니다. 민중신학은 현재의 체제 아래서 억압받고 소외당한 사람들의 해방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사상사적으로 해방신학과 흑인신학과 같은 궤도에 서 있다고 하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해방, 흑인의 해방, 민중의 해방보다 한 걸음 더 급진적으로 나아간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1970년대에 세계 각 곳에서 일어난 여성운동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여성신학(femnist theology)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여성신학들은 주장하기를 설령 가난한 사람들, 흑인들, 민중의 해방이 실현된다 하더라도 여성의 해방은 자동적으로 이루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여성은 고통을 당하는 가난한 사람들, 흑인들, 민중들 가운데서도 차별적으로 가장 고통을 당하는 층을 이루고 있습니다. 여성의 차별과 억압을 당연시하는 현재의 가부장적 제도와 문화를 변혁하지 않고서는 총체적인 인간 해방은 있을 수 없다는 기치를 내걸고 여성해방이야말로 참된 인간 해방을 지향하는 모든 신학의 알파와 오메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970년대와 80년대에 또 한 걸음 더 급진적으로 나아간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미국과 유럽 각지에서 일어난 성소수자 권리 운동입니다. LGBT(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 여성 동성애자, 남성 동성애자, 양성애자, 성전환자) 권리옹호라 불리는 이 운동은 남성과 여성 양쪽으로부터 다 배제당하는 특별한 성소수자의 권리를 주장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queer theology가 등장했습니다. 이 신학은 성소수자에 속하는 사람들에도 이른바 정상적인 남성/여성과 꼭 마찬가지로 차별없이 그들의 성정체성을 향유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3. 

우리나라에서는 법무부가 입법 예고한 차별금지법안이 2007년 10월에 동성애 조항이 삭제된 채 국회에 제출되어 통과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된 까닭은 일부 대형교회와 기독교인 네티즌들의 극렬한 반대운동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기독교회가 약자의 인권문제에 대하여 가장 배타적이며 보수적 성향의 단체임을 단적으로 반증하는 것입니다.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도 교회가 성소수자를 포용해야 하느냐의 가부를 놓고서는 교회가 분열되는 현상이 벌어지는 지경입니다. queer 신학은 교회가 성 문제와 관련된 현 사회의 지배적인 제도와 가치를 문제 삼지 않으면서 성소수자의 처지를 단지 예외적 사항으로 보고 시혜적 차원에서 용인해 주려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오히려 이들의 존엄성을 짓밟는 행위라고 비판합니다. 저자는 기독교인들의 극단적인 동성애 혐오증은 잘못된 성서해석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많은 성서본문들의 세밀한 해석을 통해서 밝히고 있습니다.

4.

독일에는 2년에 한 번씩 Kirchentag이라고 하는 신도대회가 열립니다. 이것은 교회 당국이 아니라 평신도들의 주관으로 신학적, 교회적, 정치적, 사회적 주요 당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2년마다 약 일주일 간 전국 곳곳으로부터 수십만명이 참가하는 큰 회의입니다. 1974년은 제가 독일에 간 후에 처음으로  Kirchentag이 열리는 해였습니다. 특이한 것은 이 대회에서 호모섹스의 문제가 독일에서 처음으로 공론화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것입니다. 호모섹스 집단도 이 대회에 참가 단체로 초청을 받았으며 그들에게도 자기네의 주장을 공개적으로 펼칠 수 있는 장(場)이 제공되었습니다. 그 때에 이 집단이 발표하려는 연제는 “나는 한 남자를 사랑했다”였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3,000여명을 수용하는 대형 강당이 특별히 제공되었습니다. 많은 청중이 예상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도 일찍부터 자리를 잡고 기다렸습니다. 동성애자의 연제가 “나는 한 남자를 사랑했다”니까 그가 동성애자로서 그의 상대역 되는 한 남자와 어떻게 동성애 관계에 빠지게 되었는지 그 내력을 이야기하리라고 지레짐작을 하고 호기심을 가지고 귀을 귀울였는데 그는 한 남자, 즉 예수라는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이야기의 내용은 기대와 전혀 달랐지마는 그 동성애자도 예수를 사랑한다면 똑 같은 예수를 사랑하는 우리와 그 사람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Kirchentag 이후에 신학교 게시판에는 동성애자 파트너를 구한하다는 광고가 공공연히 나붙게 되었으며 교회의 목사가 동성애자임을 표명하더라도 해임당하지 않고 목사직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의 제목은 <예수가 사랑한 남자>입니다. 예수와 한 여자, 예를 들어 막달라 마리아 사이에 에로틱한 로맨스 사건이 일어났다는 가상적 풍설에도 우리는 충격을 받을 터인데 예수와 한 남자 사이에 아가페적 사랑이라면 몰라도 육체적 친밀함이라는 기이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면 더욱 충격을 받지 않겠습니까?

5.

성서는 억압, 차별, 착취, 탐욕, 교만과 같은 강자가 약자에게 행하는 불의를 가장 큰 죄악으로 규탄했는데 이와 달리 교회는 인간의 성본능을 가장 가장 큰 죄악으로 부각시켰습니다. 이렇게 하여 교회는 한편으로는 사회적 강자들, 즉 부유한 자들과 권력자들과 지배자들의 죄악을 눈감아 줌으로써 그들과 한 편이 되어 특권을 누리는 길을 마련했으며 다른 한 편으로 교회는 성에 대한 죄의식을 극대화하여 그것으로 모든 인간을 꼼짝없이 옭아매고 죄사함이라는 필요불가결한 미끼를 사용하여 그들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섹슈앨리티(성애, sexuality)를 죄 중의 죄로 내세우는 난공불락의 신화를 일찍부터 쉽게 구축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날 교회는 동성애를 가장 혐오스러운 죄악으로 규탄하는 그 한 가지 일로써 교회가 이 사회에서 최선의 윤리를 수호하는 고귀한 투쟁의 최선봉에 서있다는 자기 최면에 빠집니다. 그 결과로 대다수의 이성애적 교인들로 하여금 동성애와 무관하고 이성애적 성관계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는 한, 성과 관련된 현재의 어떠한 제도와 문화에도 아무런 문제점도 없다는 착각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6.

이성애를 근거로 하여 대다수의 교인들은 혼인과 가족 제도, 자녀 출산과 같은 가치를 훼손해서는 안되는 완전무결한 절대적 가치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가족이 개인에게 안정을 부여하고 자녀 생산이 사회를 존속하게 해 주는 순기능을 함에도 불구하고 가정은 현재의 체제를 유지하는 기본 조직이라는 사실을 꿰뚫어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가족 제도는 분리, 사유재산, 지배로 특징지워집니다. 교회가 이 제도를 현재 있는 그대로 영속 불변적인 것으로 보는 한, 여성들과 아이들을 가정의 폭력에 내동이치는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부활 때에는 시집하고 장가가는 일이 없는 전혀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는 빛에서 혼인과 가족이라는 현재의 제도를 비판적으로 재고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7.

저자는 작년 이맘 때 이 자리서 “교회와 동성애”라는 주제의 강연에서 밝혔습니다. 교회의 극단적인 동성애 혐오는 성소수자에 속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을 교회 밖으로 또는 죽음으로 휘몰아갔다고 고발하면서 교회는 이들에게 끼친 피해와 하나님의 말씀에 끼친 피해에 대하여 회개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교회가 가진 자들만의 잔치마당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참여하여 즐기는 잔치마당으로 변하는 그 날이 도래하는 것입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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