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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4.30 [시선의 힘: 서평] 카메라 루시다 (오종희)

카메라 루시다

오종희
(본 연구소 회원, 한백교회 교인)

 

이 세상에 존재를 알린 지 이백년도 안 된 사진은 그것의 선배 격이자 오랜 세월을 두고 우리에게 ‘예술’이란 이미지를 선명하게 남겨준 숱한 천재들을 배출한 ‘회화’에게 향하는 음울한 콤플렉스에서 이미 벗어났는가.
사진의 역사적 흐름을 보자면, 대상의 절대적 재현이라는 사진만의 기능으로 말미암은 사실적 증거자료로, 또는 회화주의 사진과 같은 사진의 자기 탐색이 결여된 시기를 거쳐, 세계대전 등의 보도 사진이 보여주는 실재와 조작, 계몽과 선동, 타인의 고통과 자신의 안락, 정치와 미학 등의 혼재된 경험을 치르며 지금의 디지털 증강 사진에 이르기까지 소비자본주의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그 당사자로서의 독특한 지위를 사진은 향유하고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수전 손택의 말대로 모더니스트들이 ‘모든 예술이 음악이 되기를 갈망’ 했듯 이제 ‘모든 예술은 사진이 되기를 갈망’ 하는 시대에 사진의 위치가 있다.
우리 모두의 손 안에 폰카를 들고 다니며 모든 개인의 생활이 낱낱이 찍히며 원하는 모습대로 뽀샵되어 물리적 감각 없이 무제한 타인에게 전송되는 전대미문이 시대에 어찌 보면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란 책은 너무 고루하고 정적인, 그리하여 이 시대 사진 미학을 설명할 수 없는 구시대적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1980년대에 출판된 이 책에서 바르트 역시 그러한 것을 예감하고 있다.

“사진의 시대는 혁명의 시대이며 거부의 침해의 시대, 파열의 시대, 간단히 말해서 초조함의 시대, 모든 성숙을 거부하는 시대이다. 그리고 의심의 여지없이 ‘그것이 존재했다’는 놀라움도 역시 사라 질 것이다. 그 것은 이미 사라졌다.... 나는 그 것을 목격한 최후의 증인( 반 시대성의 증인) 중의 한 사람이며 이 책은 그 것에 관한 고풍스런 흔적이다”  (P94)

바르트는 자신을 반시대성의 증인이라 말한다. 이미 도래한 새로운 감각을 거스르는 자로써 자신을 정의한다. 또한 그가 늘 사진에서 얻는 놀라움의 원인이었던 ‘그것이 존재했다’라는 존재론적인 감각도 사라질 것이라고 고백했으며 그것은 실재성 없이 컴퓨터 기술로도 대상 자체를 만들 수 있는 디지털 사진으로 말미암아 이미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왜 이 ‘고풍스런’ 책은 여전히 사진 미학을 논할 때 빠짐 없이 인용되고 거론되는 걸까?
그것은 바르트의 글이 사회성과 역사성을 배제한, 오로지 사진과 사진의 ‘대상’ 안으로 침잠하는 작은 구멍과 같이 그 범위는 협소하나 그 구멍을 통과하고 나면 샘처럼 순수하고 근원적인 ‘인식론’의 새 국면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부분의 이론서는 사진이 갖는 사회, 역사적 의미와 이미지가 인간에게 주는 실재적 영향에 대한 글들이라면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는 ‘대상물’과 ‘갈망하는 사물’, ‘사랑하는 사람의 육체’에 대한 파토스 넘치는 극히 개인적인 에세이인 것이다.

“가장 강한 또 다른 목소리가 나로 하여금 사회적인 주석을 부정하라고 부추겼다. 어떤 사진들을 볼 때면 나는 스스로가 야만적이고 무지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P15)

즉, 프리미티브 화가처럼 전통적 예술 문법을 따르지 않는 개인 특유의 경험과 강렬함으로 바르트 자신을 매개자로 하여 ‘보편적이 아닌 대상의 성격 그 자체에 의한 새로운 이론’을 밝히고자 한 것이 이 책의 의도이다.
자신에게 어떤 식의 공명을 일으키는 사진 앞에서 그 전까지의 사진이론으론 그 공명의 특질들을 설명할 수 없었음이 <카메라 루시다>가 탄생한 이유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 현학적이고 구조적인 해석에 대립하여 무규정적인 사진의 특질들을 이해하기 위해 사용한 그의 용어는 ‘푼크툼’이다.

문화적이고 체계적인 사진 이해 용어인 ‘스투디움’에 맞서 비문화적이고 비체계적인 이해를 지시하는 푼크툼은 벤야민의 ‘아우라’와 비교되기도 하는데 벤야민의 아우라가 어떤 때는 대상만의 유일하고도 마적인 현상으로 설명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예술의 제의적 요소로, 그 것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할 부정적 요소로 설명되기도 하지만 내가 보기에 푼크툼은 대상에 밀착되어 무게감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훨씬 더 날카롭고 가볍고 가변적이며 전혀 전통적이지 않고 제의적이지 않다.
푼크툼은 대상으로부터 마치 화살처럼 주체를 꿰뚫기 위해 날아오지만 그것은 대상이 소유했다기 보다는 주체와 대상사이의 지극히 은밀하고 사적인 소통가운데 있다.
바르트의 푼크툼은 철저하게 수용자 미학이다. ‘촬영자-대상-구경꾼’이라는 사진 내 역학관계에서 촬영자의 의도를 뺀, 대상의 사진적 특질과 그 것을 감상하는 구경꾼의 비의도적 재구성이 이 책을 이끄는 요소인데 이는 그의 또 다른 글 <저자의 죽음>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왜냐하면 푼크툼은 촬영자의 의도와는 무관한, 맥락을 통한 결과물이 아닌, 독립적이고 장외적인 존재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르트가 라틴어 ‘점’, ‘찌름’ 등을 뜻하는 푼크툼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카메라 루시다>를 쓰기 전부터 보여 왔던 사진에 관한 그의 관심을 종합하기 위해서였을까? 그 정도의 이론적 유희에서였다면 이 책은 아름답지 않았을 것이다.
사진의 이론만을 위한 거였다면 푼크툼은 기억되었을지 모르지만 진혼곡의 회색 빛 울림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사진의 증거, 사진을 바라보는 어떤 사람도 볼 수 있는, 그리고 그가 보기에 그 것은 모든 다른 영상과 구별 시켜 주는 이 사물을 찾아 내기 위해서 내 자신 속으로 더 깊이 내려가야 만 했다. 나는 나의 개영시 (먼저 썼던 시를 취소하는 시)를 써야만 했다.” (P63)

즉 그는 자신 속 더 깊은 곳의 ‘어머니’란 상처를 이끌어내어 그 이전 기호적 체계로 이루어진 자신의 학문적 논리를 취소해야만 했던 것이다.

바르트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사진, 그것도 어머니의 다섯 살 무렵에 찍힌 아주 오래된 ‘온실사진’에서 존재의 푼크툼, 시간의 푼크툼에 찔린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어머니다’라는 외마디 비명과 같은, 불현듯 찾아오는 ‘깨달음’을 설명하기 위한 부수적 장치에 지나지 않다.
“어머니다!”, “참으로 어머니다!”라는 이 지칭적 외침은 그 어떤 시각 예술과도 구분되는 사진만의 황홀한 특질이며 바르트 내면의 사랑과 죽음이라는 환원되지 않는 외상의 결정체이기도 하다.
우선 그에게 사진은 ‘그것이-존재-했음’ 혹은 존재의 ‘완강함’이며 그것이 사진의 기반을 이루는 노에마이다.
‘그것이-존재-했음’에는 찍힌 대상물의 존재론적 자국과 과거에로의 시간적 역류가 동시에 포함된다. 사진에 의한 대상의 재현은 단순한 모사의 정도를 떠나 실재 존재와 ‘탯줄로 연결되듯’한 완강함이 있는데, 예를 들어 우리는 같은 이차원의 평면임에도 불구하고 회화를 볼 때와는 달리 사진의 대상은 실재의 그것으로 확신하며 바라본다.
이것이 바로 사진의 대상을 향한 관람자의 ‘상상적 의식 작용’에 의한 ‘아날로공’, 즉 ‘절대 유사’의 경험인데 이 아날로공은 바르트가 싸르트르의 <상상적인 것>에서 차용해와 이 책의 기반을 이루게 하고 있다.

사진에서의 대상의 재현은 대상을 해석하거나 번역하는 인공적 규명 이전에 생성된 탈코드적인 것이며 발자국이 하얀 눈 위에 찍히듯 존재의 직접적인 ‘자국’이 된다.
즉, 빛에 의해 ‘그때’ ‘거기’ ‘그 대상’으로부터 발산하는 지표인 것이다.
이러한 존재의 자국으로서의 사진 현상은 후에 필립 뒤바 등에 의해 ‘사진-인덱스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사진이 침묵 속에 보여주는 존재의 자국 혹은 물리적 지표들은 수용자에게 전해지며 마치 묵독이 내면화된 세계를 형성하듯 각자의 경험과 함께 또 다른 환유적 세계의 재구성을 사진을 통해 형성하게 된다.

바르트가 보았던 어머니의 ‘온실사진’은 그때 거기 어머니로부터 사출된 빛이 그에게 이른 것이며 단순히 어머니임을 알아 본 것이 아닌, 분위기라는 작은 영혼을 알아보며 “참으로 어머니!” “마침내 어머니!”를 깨닫게 된다.
그 때 “사진은 자신을 넘어선 하나의 영매가 되어 자신을 무화시키고 기호가 아닌 사물 그 자체”가 된다. 바르트가 사진을 통해 찾은 것은 ‘어머니’다. 일반적인 어머니라는 존재로 환원시키고 싶지 않은 ‘나의 어머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그가 잃어버린 것은 “어머니라는 하나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 하나의 특질, 하나의 영혼으로 다른 것으로 대치될 수 없는 무엇”인 것이다.
그는 사진에서 죽음을 본다. 셔터를 눌러 삶이 정지하는 그 찰라의 순간에 삶의 장외를, 자신이 타자화되는 불편한 경험을 느끼며 어머니의 온실사진에서 출구 없이 꼼짝할 수 없는 고통을 느낀다. 변형시킬 수 없는 슬픔, 해독되지 못하는 고통, 그리고 학문의 이론적 지성이 해결할 수 없는 충일한 이미지 앞에서 비환원적인 죽음의 무력감을 느낀다.
내가 느끼기에 바르트가 이 책에서 절규하는 것은 사진이론 자체가 아닌 “모든 환원적인 체계에 대한 격렬한 저항”이다.
어머니의 죽음은 사회적 의미의 죽음이나 인간 개체를 넘어선 종의 죽음이라는 진화론적인 냉혹한 설명으론 해결할 수 없는 깊은 사랑의 상실이었을 것이고 대체할 수 없는 존재의 상실은 비환원적 세계로의 깨달음을 불러오게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참으로 아름다운 모성 숭배의 밀교적 제의로서 바르트는 ‘아픈 어머니를 통해 스스로가 어머니를 자식으로 낳고 어머니가 죽자 자신은 비변증법적인 죽음을 기다리며 진화론으로 환원되는 생명체의 행진에 자신을 일치시키지 않기로’ 결정한다.
이것은 그가 교통사고 이후에 치료를 거부하고 거의 자살하다시피 한 그의 죽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사랑하는 어머니의 죽음과 스스로의 죽음의 예감과 또한 자신만의 참 어머니를 되찾게 해준 사진적 특질들은 그로하여금 언어적인 학문의 세계에 대해 그리고 체계적이고 환원적 설명을 요구하는 사회적 질서에 대해 전복적 사고로 저항하게 하는 푼크툼의 깊은 상처가 되게 하지 않았을까?
푼크툼의 그 전복적 저항은 바로 사랑이고 연민이며, 죽음이고 비언어이며, 무규정자이며, 역류하는 시간이며, 예술에 속하지 않으며, 사회와 문화에 순치되지 않는 무엇이다.
다시 말해 푼크툼은 광기다.
그것은 바르트의 광기이기도 하고 사진의 광기이기도 하다.

* 참고로  이 글은 절판된 ‘열화당’의 <카메라 루시다>에 관련한 것입니다.
   바르트의 책은 지금은 ‘동문선’의 <밝은 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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