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지젝을 아느냐? (V)
: ‘실재(the Real)’에 관하여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 과정)

 

프롤로그: ‘세계철학사’(소비에트 과학아카데미철학연구소 著)와 ‘수학의 정석’(홍성대 著)

대학 신입생때 이런 저런 철학사책들을 접할 기회가 많았는데, 우리때는 흔히 빨간책이라 불리던 요한네스 힐쉬베르거가 쓴 <서양철학사>를 많이 읽었다. 철없던 시절 묵직했던 그 책을 허리춤에 무슨 훈장마냥 끼고 다니며 허세를 떨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하나를 더 꼽자면, ‘소비에트 과학아카데미철학연구소’에서 간행한 10권짜리 <세계철학사>였다. 중원(출)에서 출판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둘 다 훌륭했으나, 필자는 후자를 더 좋아했다. 대부분의 철학사책들이 관념론적인 입장과 서양철학사 위주로 기술되었던 것과는 다르게, 소련에서 나온 철학사책은 맑스와 레닌의 후예들답게 유물론적 전통에서 기존의 철학사를 비판했을 뿐 아니라, 책 전체에서 동양철학이 차지하는 비중 또한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신학교 처음 입학했을 때 신.구약 개론시간에 역사비평학을 배우면서 성서에 대한 기존의 생각에 균열이 생기며 충격과 동시에 묘한 흥분을 느꼈던처럼, 소련에서 나온 <세계철학사>는 그런 의미로 내게 다가왔었다. (문득, 요즘 한국의 대학생들은 어떤 철학사책을 읽는지 궁금해지네…)
예나 지금이나 철학사책을 처음 넘기면 으레 고대그리스 자연철학에 대한 순서가 먼저다.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그리고 ‘그것들은 어떻게 운동하는가?’ 등등의 주제가 먼저 소개되고, 그에 대한 답변을 시도했던 그 무렵 등장했다는 수많았던 철인들의 발언을 접하며, 나는 철학에 대한 흥미를 채 느끼기도 전에, 그들이 토해내는 친절하지 않은 개념의 홍수에 치여 질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나서는 잠시 책을 덮었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처음부터 책을 펼쳐들고는, 또 다시 휘청거리다 덮고, 다시 펴곤 하던 행위를 반복했었다. 마치, 새학기가 시작되면 수학 정석책 처음부분인 집합편과 방정식부분을 반복하다 보면 그 부분만 손때가 묻어 빛이 바랬던 것처럼, 내가 읽었던 철학사 책의 고대 그리스편과 칸트와 헤겔편이 그랬다.


너무나 오래된 질문, 실재!

포스트모더니즘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현대철학의 논의 역시 어쩌면 고대 그리스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지지하는 사람이나, 반대하는 사람이나 모두 그들 사상의 근거를 고대 그리스로부터 끌고 오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런 고대그리스 자연철학을 요약하는 상징적인 문구가 있다. ‘일자(一者)와 다자(多者)논쟁’이 그것이다. 일자측을 대표해서는 파르메니데스가 나오고, 다자측의 대표선수로는 헤라클레이토스가 등장한다. 변화와 운동을 강조했던 헤라클레이토스와는 달리, 파르메니데스는 확고부동한 일자의 존재를 신봉했으며, ‘세상에는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언가(something) 있는가?’라는 문구는 파르메니데스 이후 서양 관념론을 대변하는 아포리아가 된다. 그 something 을 둘러싼 해석의 역사가 서양철학의 시작이었고, 그 something을 서구철학에서는 실재라 부르기로 공식적으로 합의하였는데, 아마도 그 공인 시기는 플라톤 이후가 아닐까 싶다. 화이트헤드가 ‘서구철학의 역사는 플라톤의 각주’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지젝의 실재에 대한 언급에 앞서 전체 철학사의 지형속에서 실재론의 기원, 전개과정 등을 언급함이 마땅한데 지면관계상 생략한다. 솔직히 말해 그만한 깜양도 안되고. 비록 전체 실재론의 역사를 다루지는 못하지만, 이 글에서 적어도 본격적으로 지젝의 실재를 언급하기에 앞서 칸트의 실재에 대한 논의는 잠시 짚고 넘어가려 한다.
간단히 비교하자면, 칸트의 실재(물자체)는 현상과 절연되어 있는 반면, 지젝이 말하는 실재는 현상 곳곳에서 출몰하는 그 무엇이다. 라깡식으로 말하면 상징계의 그물을 찢고서 섬뜩하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 무엇인 것이다. 실재를 타자로 번역하면 그 의미는 더 확 다가온다. 칸트의 타자는 우리가 닿을 수 없는 저편에 있는, 불러도 불러도 대답없는 그대이고, 지젝이 말하는 타자는 내 안에 있는 타자, 즉 ‘그대가 곁에 있어도 여전히 그대가 그립다’는 어느 시인의 고백처럼, 씹어먹고 갈아먹어도 여전히 우리를 허기지게 하는 그 무엇이다.
지젝의 실재를 언급하기에 앞서 칸트의 실재를 언급하는 이유는 당연하다. 칸트와 지젝 모두 실재를 언급하였다는 점, 그리고 양자의 실재에 대한 상이한 발언은 후에 전개되는 주체에 대한 논의, 그리고 본인들의 신학과 윤리학에 대한 서술에 있어 서로 다른 길을 가게 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칸트의 실재

전체 철학사의 흐름속에서 통상적으로 칸트가 성취한 업적을 거론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부분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 아닐까 싶다. 빛으로 이어졌던 무한(신)과 유한(인간)사이 통일성을 깨뜨렸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현실(경험)의 영역과 우리가 알 수 없는 경험 밖의 영역을 갈라 그 경험 밖의 영역을 칸트는 물자체라 칭하였다.
물자체에 대해 좀 더 부연하자면 이런 것이라 할 수 있다. 50m 밖으로는 수영할 수 없는 인간이 있다고 가정하자. 고작 50m 수영하고 돌아온 한 인간이, 50m를 수영한 그 경험을 바탕으로 수평선 너머 수십 km를 수영해야 닿을 수 있는 어느 지점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면 그 담화는 맞는 것일까? 칸트는 기존의 서구 형이상학이 저지른 오류를 이런 식으로 비판한다. 그리고 질문한다: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상상속의 그대(실재)를 둘러싼 짝사랑이 결국 서양정신의 역사였다면?” 칸트는 정직하게 그 물음에 대해 ‘Yes”라 시인하였다.
좀 심하게 표현하자면, 불러도 불러도 대답없는 이름(실재)에 대한 편집증적 집착과 도착이 서구 형이상학의 역사이므로, 이제 그만, 그 변태적 행위를 중단하자! 이제 그만, 현실의 사태에 대한 규명에 있어 신의 은총과 신의 자비가 아닌, 불완전하고 미흡하지만, ‘나의 경험과 판단과 인식에 입각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정직한 것 아니냐?’며 칸트는 그 동안의 서구정신에 대한 전면적 부정을 선언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최종적으로 인간은 칸트에 의해 줄 끊어진 연이 되었고, 하늘에 떠있던 연과 땅에서 연을 날리던 소년.소녀와의 일체감은 종료되었다. 하늘에 떠 있던 연이 물자체였는지, 땅에서 연을 날리던 그 소녀,소년이 물자체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이제 둘은 다시는 만날 수 없고, 만나서는 안 되는 운명이 되었다. 신화상에서 존재하던 에덴 이후의 삶과 바벨 이후의 삶이 칸트에 의해 일상에서 섬뜩하게 선포되는 순간이었다. (참고로 여기까지가 필자가 좋아하는 칸트씨입니다)


칸트의 반전

하지만 서구정신에 대해 이처럼 가열찬 칼부림을 감행하던 칸트는 ‘저 하늘에 별이 빛나듯 내 마음에는 도덕률이 빛난다’라는 말을 시작으로 본인 주장에 대한 첨삭을 시도한다. 칸트는 현실의 사태를 진단함에 있어 계시의 음성이 아닌, 인식의 틀, 즉 범주(예:양, 질, 관계, 양상)의 보편성을 끌어들인다. 이 부분에 대해 좀 더 부연하자면, 우리가 흔히 초월적이라고 할 때, 플라톤이 말하는 급격한 이원론에 바탕한, 현실을 초월한 어떤 영역을 지칭하는 경우에만 ‘초월적!’이라 생각하기 쉬운데, 플라톤류의 초월은 급격한 초월인 경우이고, 약한 의미의 초월도 가능하겠다.
예를 들어, 북한의 카드섹션을 상상해보라. 얼마 전 CNN뉴스에서 북한 관련 뉴스를 보는데, 평양 능라도 경기장에서 수 만명의 북한 인민들이 모여 카드섹션을 하는 모습이 흘러나왔다. 주제는 주로 사상적인 것으로 사회주의 우월성, 내지 반미, 반일, 김일성.김정일 우상화, 김정은에 대한 찬양이었다. 그 광경을 보며 현실을 초월한 모습이 느껴졌던 것은 왜일까?
능라도 경기장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북한인민들의 모습도 카메라에 잡혔는데, 그것은 분명 조금 전 카드섹션에서 보여준 보편적 주체의 모습과는 대비되는, 일사 분란했던 대열이 와해되고 산종되면서 흩어지는 개별적 주체라는 점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였다.
수많은 군중이 완벽한 카드섹션을 연출하려면 한치의 오차도 없는 인원과 도구에 대한 계산, 인물들의 위치설정과 구성원 전체의 정확한 타이밍 포착 등이 필요하다. 어떤 강력한 보편성이 그 카드섹션을 지배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 보편성을 어기는 개별적 존재가 등장할 때 카드섹션은 망가지게 된다. 보편적 게임의 원칙과 그 보편성에 입각해 수 만명의 인민에 의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연출되는 카드섹션! 우리는 그 안에 깃들어 있는 기운에 대해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 이 또한 다른 의미의 초월적 영역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칸트가 비록 그간의 서구형이상학 특유의 초월적 이성에 대해 용도폐기를 선언했다고는 하지만, 현실의 사건과 증상을 파악하는 데 필요한 일정한 망(범주)을 설치했다 함은, 개별주체에게 인식일반에 대한 보편적 틀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카드섹션을 지배하는 보편적 룰과 같은 초월적 기재에 대한 인정을 뜻하는 것은 아닐런지! 바로 이 지점이 칸트의 이율배반이 감지되는 대목이다.
결국, 우리의 감각적 인식너머의 것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던 칸트는 그 경험적 인식의 엄격함을 마련하는 단계에서 범주의 영역, 즉 라깡적 의미의 상징계를 설정하였고, 비록 물자체로서의 실재에는 도달하지 못하였다 할 지라도, 약한 의미의 초월적 룰에 대한 재소환을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여전히 칸트는 서구 초월철학의 강력한 자기장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 결과, 칸트는 ‘초월’씨의 앞문을 멋있게 박차고 나왔지만, 나중에 소리도 없이 그 집의 뒷문으로 슬그머니 다시 기어들어가는 궁색한 모양새의 칸트가 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칸트의 윤리학은 본인이 훼손한 실재에 대한 보충과 첨삭의 의미를 지니고 있고, 호기 어렸던 칸트 초기 실재론에 대한 궁색한 미장센의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면 칸트에 대한 몰지각하고도 예의 없는 발언일까? 
 (다음 호에 계속)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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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상철
    2013.07.29 23:3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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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에 링크시킨 지젝과 촘스키의 설전을 지켜보며 여러가지 생각이 많이 듭니다. 사실 촘스키의 지젝을 향한 공격과 그리고 지젝의 대응은 그닥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전에 하버마스와 리오타르의 그것처럼 모던과 포스트모던 논쟁,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근대)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 (중세) 실재론과 유명론, (고대)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라이토스로 이어지는 서구 정신사의 지리한 논쟁을 다시 재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둘의 논쟁이 진부한 소재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젝이어서, 촘스키여서 사람들이 관심을 갖네요. 지젝과 촘스키에 기대어 우리의 과거를 다시 한번 반추해 보겠다는 의미, 지젝과 촘스키에 역시 기대어 미래를 예단해 보겠다는 의지... 이런 기운들이 섞이면서 게임이 완료된 신자유주의에 대한 소환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이런 논쟁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여러곳에서 있다보면 어느덧 (혁명을 향한) 비등점으로 향하는 우리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기대도 앙자의 논쟁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깔려 있는 듯 합니다. 양적 축적에 따른 질적 승화라는 변증법적 논리학의 기본 공식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고, 이러한 논쟁들을 통해 이완되어 버린 우리네 머리와 가슴에 다시 현실에 대한 변혁을 담은 이야기들이 계속 재생산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백만, 백만 스물 하나, 백만 스물 둘, ....그렇게 거듭 이어지다보면 어느순간 '빅뱅'이 우리에게 몰려들어 올것입니다. 요한복음 한 처음에 등장하는 구절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백만스물세번째만에 우리에게 일어난 '양적축적에 따른 질적전환의 찰나를 목격한 사람들의 입에서 동시에 터진 감동과 전율, 감격과 감사의 방언!'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저는 더 맹렬히 지젝과 촘스키가 싸웠으면 합니다.
  2. 이상철
    2013.07.31 01:21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요즘 촘스키의 지젝비판, 그리고 이에 대한 지젝의 대응이 화제네요. 둘 다 현재 진행중인 필자의 학위 논문에 등장하시는 분들인데, 이렇게 싸우시면 논란해요~ ㅋㅋ
    아래에 관련 기사 링크시킵니다.

    http://www.openculture.com/2013/06/noam_chomsky_slams_zizek_and_lacan_empty_posturing.html

    http://www.openculture.com/2013/07/slavoj-zizek-responds-to-noam-chomsky.html


한국땅에서 라깡적으로 윤리하기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라깡으로 <트루먼 쇼> 읽기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의 내 삶 전체가 몰래카메라의 내용이 되어 시청자들에게 다 전달되고 있었다면 독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라깡이론의 윤리적 전회를 논하기 이전에 이 질문을 하는 이유는 짐 케리 주연의 영화 <트루먼 쇼>를 소개하기 위함이다. 평범한 보험회사 직원 트루먼 버뱅크(짐 케리)의 삶이 그랬다. 그 쇼는 거대한 돔 안에 인공도시를 짓고 5천대의 카메라를 도시곳곳에 숨겨 24시간 내내 트루먼의 일거수일투족을 30년 동안 생중계 했다. 트루먼에게 있어 세트장, 아니 영화속 도시 시헤이븐은 완벽한 아내, 좋은 친구들, 따뜻한 이웃들, 온화한 기후를 갖춘 완벽한 삶의 공간(상징계)이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되면서 대상소타자가 상징계를 뚫고 실재계의 모습을 간헐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하늘에서 촬영용 조명이 떨어지고, 어렸을 때 물에 빠져 죽은 아버지를 길에서 만나는 등 납득이 안가는 일이 벌어질 무렵, 트루먼은 대학 시절 여자친구였던 실비아로부터 자신의 삶이 모두 연출이고 조작된 삶이라는 사실을 전해 듣는다. 어느날 갑자기 실재(the real)가 확 내게로 다가온 것이다. 이후 트루먼은 안락했던 상징계의 질서를 박차고 실재계를 향해 항해를 한 후 세상끝(세트장끝)에 도착하여 마침내 실재계와 상징계의 경계라 할 수 있는 세트장의 벽을 뚫는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트루먼의 의지와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진하게 눈물 한 방울 흘리며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는 있겠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사회는 그런 트루먼 같은 사람들을 돈키호테니, 소영웅주의자니, 감상적 낭만주의자니 하면서 시대착오적 인물로 낙인찍는다. 보통의 우리는 현실(상징적 질서)에 구멍이 뚫려 자신의 존재를 들키는 순간 재빨리 이를 봉합하여 현실(상징적 질서)의 질서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강박적 주체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상징계를 벗어날 수 없고, 세상과 등을 져서도 안 된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트루먼처럼 우리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상징계 전체를 배반하고 실재계를 찾아 투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상징계에 갇혀있는 존재가 아니라 상징계를 변형시키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상정해 볼 수 있지는 않을까? 라깡이 제안하는 정신분석학적 윤리가 노리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라깡, 칸트에 反하다

라깡의 윤리는 근대 서구윤리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칸트 윤리학과의 숙명적인 대결을 수반한다. 왜냐하면, 라깡과 칸트 모두 실재계에 대해 언급하였고, 실재에 대한 규정에서부터 윤리학이 나왔기 때문에 그렇다. 칸트에게 있어 실재, 즉 물자체란 인간의 현상계와 단절되어 있는 부분이다. 칸트는 물자체를 신앙의 영역에 포함시켜 언표 가능한 것으로 간주하였던 서구형이상학의 전통을 비판한 후에 그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알 수 없는 영역이라고 선언하였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중세 1000년을 이어왔던 무한의 철학에 대한 폐기였다. 이는 은총의 빛으로, 신의 시선으로부터 독립한 불안하고 불안전한 인간이 역사의 전면으로 등장함을 의미한다. 아울러, 무한철학의 폐기에 따른 물자체에 대한 선언은 ‘인간의 의식은 인간 스스로가 구성하는 것이다’라는 근대 주체철학을 낳았다. 현실의 사건과 증상들은 하늘로부터 내려 오는 계시의 빛과 목소리를 통해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틀, 입장, 경험을 통해 (이를 칸트는 범주라 표현하였다) 우리 스스로 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범주의 보편성에 대해서는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후에 등장하는 많은 사조들이 칸트 철학의 완고한 틀을 언급하면서 그 구조 역시 계급, 역사, 문명, 성에 따라 조건지어졌음을 비판하지만 말이다. 칸트의 범주 혹은 인식의 틀은 라깡적으로 말하면 상징계의 질서라 말할 수 있다. ‘저 하늘에 별이 빛나듯 내 마음에 도덕율이 빛난다’는 칸트의 발언과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보편 타당한 입법에 맞게 행위 하라’는 칸트의 요구는 비록 실재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지만, 실재에 대한 접근이 상징계 안에 있음을 혹은 실재에 대한 인식이 상징계를 통해야함을 전제한다. 그 결과 ‘도덕율’과 ‘의지의 준칙’이 상징계 안에서 마치 실재의 목소리인양 울려 퍼지게 되었다. 기표에 대한 욕망은 보호하고 실재에 대한 향유는 억압된 윤리, 숭고한 이성의 이름으로 상징계의 질서를 합리화하는 윤리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결국, 우리의 감각적 경험 너머의 것에 대해 인간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던 칸트는, 나중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캄캄한 밤하늘에 빛나는 별이 좌표를 표시하듯 우리마음에도 우리를 이끌어갈 무엇인가를 상정해야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칸트에게 있어 윤리란 상징계의 질서들을 굳건히 구축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이런 이유로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대문밖으로 추방시켰던 물자체를 실천이성을 언급하면서 다시 후문을 통해 불러들였다는 비아냥을 듣게 된다.

반면, 라깡의 실재계는 칸트와는 다르게 현상과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징계 곳곳에서 출현하는 무엇이다. 우리는 상징계의 막을 찢고 나오는 불순물들(대상소타자)을 통해 실재와 대면한다. 하지만, 영화 <트루먼 쇼>에 나오는 짐 케리와는 달리 현실에서의 인간은 그 실재를 끌어당길 힘이 없다. 트루먼처럼 기표체계를 무시할 수도 없고, 영화에서처럼 실재계가 세트 뒤에 뚜렷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이 지점이 바로 라깡의 윤리가 다다른 마지막 지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윤리란 무엇인가?’라는 궁극적 질문과 다시 대면한다. 윤리를 우리의 삶과 공동체속에서 타자와 관계맺는 방식과 절차에 관한 문제라고 봤을 때, 윤리의 대상인 타자를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대두된다. 그리고 타자는 필연적으로 그 타자를 상정하는 주체의 문제를 야기시킨다. 라깡에 의하면 주체는 이원화되어 있다. ‘욕망하는 주체’와 ‘향유하는 주체’가 그것이다. 상징계의 시스템 속에서 일정한 기표를 차지하고 있는 주체는 항상 상징계 속 기표들의 차이에 따라 옮겨다니며 놀이를 한다. 그러나, 그 기표란 사회적 인정과 사회적 합의를 내포한다는 점에서 진정한 내 것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상징계속 기표의 지배를 받은 주체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주체’로 걸러진다. 문제는 상징계속 주체로 환원되지 않는 또 다른 주체가 있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분명히 다가오지는 않지만 나를 가만히 놔주지 않고 나를 정신적으로 가위눌리게 하는 그 무엇 말이다. 시인 류시화는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라는 애절함으로 그 갈증과 답답함을 훌륭히 표현하였다. 라깡은 이 주체를 ‘욕망하는 주체’와는 구분하여 ‘향유하는 주체’라 부른다.

라깡의 윤리학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욕망하는 주체’에서 ‘향유하는 주체’로의 이월이다. 라깡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속 기표시스템이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밝혀냈고, 그 위선적 현실을 변혁시킬 원동력을 실재계에서 끌어온다. 그것은 뾰족한 것(대상소타자)을 가지고 상징계를 둘러싸고 있는 막에 구멍을 내어 현실의 부조리를 폭로하는 것이고, 현실의 영역, 상징의 영역, 욕망의 세계가 강제하는 요구에 맞서 마치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실재를 향해 거슬러 올라가는 그 무엇이다.


한국땅에서 라깡적으로 윤리하기

90년대 한국 대중문화의 아이콘이었던 ‘서태지와 아이들’의 앨범 중에 <환상속의 그대>라는 노래가 있었다. 문득 그 곡의 가사 한 구절이 떠오른다: “환상 속에 그대가 있다. 모든 것이 이제 다 무너지고 있어도 환상 속엔 아직 그대가 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은 진짜가 아니라고 말한다” 어쩌면 현실(상징계의 질서)은 환상(판타지)일런지 모른다. 영화 <트루먼 쇼>에서 짐 케리의 일상이 판타지였던 것처럼, 한국땅에서 뉴타운이다 영어공교육이다 하면서 일확천금과 유창한 영어실력을 꿈꾸는 것 또한 환상이다. 그 환상이 있기에 서태지의 노래 속 가사처럼, 모든 것이 다 무너지고 있어도 우리는 지금 나의 모습이 진짜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환상은 절대로 현실의 나에게는 발생하지 않는다. 누구나 허각처럼 몇 십만대 일의 경쟁을 뚫고 슈퍼스타 K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말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환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에 퍼져있는 환상에 대한 집단적 열정 내지 무의식의 강도는 가히 놀랍다. 국내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밖에 나와 다른 민족들과 어울리고, 다른 문화를 접할수록 판타스틱 코리아에 대한 환상은 굳어져만 간다. 그것이 한강의 기적, 다이나믹 코리아, 2002년 월드컵 4강을 가능하게 했던 원동력이었다고 애써 긍정적 평가를 할 수도 있겠지만 난 못 믿겠다. 그 환상을 말이다.

라깡적 관점에서 볼 때 상징계속 기표의 욕망을 부추기는 한국 사회, 그리고 그 욕망을 욕망하는 우리는 너무나도 비윤리적 체제, 그리고 존재이다. 욕망에 대한 추구는 한국사회에서 보수와 진보 가릴 것 없이 똑같다. 보수적인 사람은 대놓고(까놓고) 그 욕망을 아무데서나 배설하고, 진보적인 사람들은 겸연쩍어 하면서도 슬그머니 그 욕망을 수음한다. 형태는 다르지만 그 놈이 그 놈이다. 특별히, 자식교육에 대한 욕망의 강도는 보혁에 관계없이 100% 균일하다. 재산증식에 대한 추구에 있어서도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의 욕망이 최종적으로 도달하려는 지점은 어딜까? 아마도 부와 지식의 대물림이 아닐까 싶다. 가히, 그것은 한국사회를 움직이는 강력한 리비도라 할만하다. 재벌은 말할 것도 없고, 필자가 머물고 있는 시카고의 대표적 명문대학인 노스웨스턴 대학, 시카고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는 한국 유학생들은 거의 예외 없이 교수님, 사장님, 의사, 변호사, 정부고위관료 아드님 따님들이다. 심지어 가장 숭고해야 할 교회 역시 아비 목사에게서 아들목사로의 세습이 상식화 되어가는, 聖과 俗이 맞물려 집단으로 난교를 벌이는 이곳이 바로 대한민국이다. 이토록 황당한 현실이 용인되는 이유는 멀리 있지 않다. 우리 역시 그 욕망을 욕망하기에, 우리 역시 상징계속 기표들의 놀이를 즐기고 있기에, 우리 역시 그 주인공이 되고 싶기에 이 모두를 관대히 용서한다.


결론적으로, 현실 속 상징, 욕망, 그리고 환상은 실재(the Real)위를 떠다니는 판타지임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체계이다. 우리의 불행은 어쩌면 여기(불확실한 환상을 쫓는 현실)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전통적으로 윤리란 그 시스템을 뒷바침하는 버팀목 역할을 해왔다. 기존의 윤리는 상징계에 타격을 가하면서 실재를 드러내는 대상소타자를 악성코드 혹은 악성 바이러스 같은 것으로 간주하여 진압해왔다. 하지만, 더 이상 큰 타자와 제휴하는 윤리, 사회적 욕망을 인정하고 욕망의 충족을 위한 정글의 법칙을 합법적으로 보호하는 것이 윤리의 역할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상징계의 질서를 보존하는 윤리가 아니라 그것의 전복을 꿈꾸는 위험한 윤리를 말해야 한다. 윤리를 도덕이라는 체제에 의해 오염된 해석의 잣대에서 해방시켜 더 이상 그것이 나를 체제 유지를 위한 도구로 호명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결국, 라깡은 실재(the Real)의 빈번한 출현으로 인해 상징계의 균열이 폭로되고, 그로 인해 세상의 모순과 진리가 드러날 때 인간은 드디어 윤리적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고 믿었다. 바로 이점이 라깡식 윤리의 미덕이고, 그것은 오늘날 슬라보예 지젝으로 전해져 맹렬히 진화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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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도, 당신 호흡의 열매입니다’


손성호
(밀알교회 목사)

아직도 어렵다. 아무리 돌이켜도 용서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한때 아주 가까웠던 사람들 중에도 있다. 차를 몰고 가다가도 불쑥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다. 종종 머리가 쭈뼛 서는 것 같은 전율을 동반하는 것들이다. ‘용서는 결국 다 잊는 것’이라는데, 난 아직 멀었나보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누가복음 23:34)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아려온다. 두렵고 부끄러워진다. ‘그동안 조금도 성숙하지 않았단 말인가!’ 언젠가 읽었을 때에도, 오늘 다시 읽어도 이 말씀은 여전히 어렵다.

마음 한 가운데서부터 ‘기도하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한참동안 기도를 하는데 명치끝으로부터 아주 뜨거운 덩어리 하나가 솟구쳐 오르는걸 느꼈다. 분노인 것 같았다. 잠시 후, 머릿속이 뜨거워지더니 눈물이 주륵주륵 흘러내렸다. 목사로서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때에 비로소, 용서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님을 새삼 깨달은 것 같다. 용서는 상대를 향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한 것임도. 기도를 마치고, 다시 본문을 읽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예수를 죽이라고 외쳤던 사람들, 침 뱉고 조롱하는 사람들, 그토록 많은 은혜를 입고도 예수를 ‘강도’라고도 하고, ‘반역도당의 수장’이라고도 하는 ‘바라바’와 맞바꾼 어리석은 유대인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너나 구원해 보아라!’ 하고 빈정거리던 사람들, 어리석고 천박한 식민지 노예들끼리 서로 죽이고, 욕하고, 침 뱉는 장면을 지켜보며 로마시민의 우월감을 느꼈을 백부장들과 병사들. 제비를 뽑아서 그분 입으신 옷들을 나누어 가진 지독한 군인들.

이 모든 사람들을 두고 주님께서 하신 그 말씀. 그렇다. 그분은 용서마저도 아버지께 맡겨버렸다. 용서하시겠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용서해주시도록 기도하셨다. 바로 예수님의 방법이 아닌가! 결코 용서가 되지 않는 사람들을 내가 용서하겠다고 너스레를 떠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맡겨버리셨다. 간음하여 돌에 맞아 죽을뻔한 여인을 구해주시고 물으셨다. ‘너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모두 갔습니다’ ‘나도 너를 용서한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단 한사람도 편을 들어주지 않았던 죽어야만 했던 그 여인을 향해 용서한다고 말씀하신 그분이다. 그런 예수님도 이 어리석은 유대인들과 잔인한 로마인들을 놓고서는 아버지께 맡기신다. 마치 깔데기를 통해 걸러져 나온 진액처럼, 주님의 이 말씀이 내 안에서 새로이 해석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저 사람들도, 하나님 당신의 호흡으로 생명이 된 열매들입니다” 치유의 지점이 아닐까? 그들 또한 하나님의 입김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바로 내가 용서받을 수 있는 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아~! 결국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 딸들이 아닌가!’

이라크의 한 기자가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며, 죽어가는 아이들과 여인들을 지켜본 뒤 쓴 글이다. 

‘아브라함, 모세, 예수의 아버지 위대하신 하나님! 혹은 아브라힘, 무싸, 아이싸의 위대한 알라여! 어떤 사람들은 정말 더러운 영혼을 지녔습니다. 당신께 기도합니다. 이 참상을 목격한 아이들이 어른이 되기 전에, 그들의 종교가 무엇이건, 그들의 피부가 어떤 색깔이건, 타인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부어주소서! 그들은 모두 같은 세상, 이 거대하면서도 작디작은 세계의 시민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릅니다. 자기들이 ‘단 하나의 민족, 인간이라는 종족에 속해 있다는 것을’

‘이웃을 용서하세요’ ‘이웃을 사랑하세요’ 이것은 결코 계명 또는 의무가 될 수 없다. 칸트는 ‘사람의 행위의 윤리성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정복한 정도에 의존한다’고 그의 윤리학에서 거듭 말했다. 그가 의미하는 바는, 윤리적인 것은 항상 ‘너는 해야 한다’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느슨해진다면, 그 삶은 자연 비윤리적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행하시지 않았다. 사랑도 용서도 결코 명령될 수 없다. 그것들은 항상 마음 전체를 요구한다. 혹 내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또는 목사이기 때문에 누군가를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면, 나 자신에게도, 사랑 받고 용서 받는 대상에게도 참을 수 없는 일이다. 타율적인 것은 윤리적 행동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용서해야 한단 말인가!

독일의 설교자 ‘헬무트 틸리케’가 전한 이야기 하나를 인용해야겠다. 레마르크가 쓴 세계1차대전에 관한 책, ‘서부전선의 적막’의 한 장면이다. 한 독일군이 적군과 접전을 벌이다 포탄으로 패인 구덩이로 뛰어내렸다. 그는 거기서 영국군 하나를 보았다. 깜짝 놀라 총을 겨눴지만, 잠시 후, 영국 군인이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상황은 달라졌다. 영국군인의 상처가 독일군인의 마음을 녹인 것이다. 그는 먼저 자기 물병을 꺼내 부상병에게 마시게 했다. 영국군인은 고맙다는 눈인사를 한 다음, 자기 옷에 달린 주머니를 열어 달라고 손짓했다. 그가 그 주머니를 열었을 때, 그의 가족사진이 들어있는 봉투가 떨어졌다. 영국군인은 죽기 전에, 그 사진을 다시한번 보기 원했던 것이다. 독일군인도 그 사람의 손에 들려진 사진 속 영국군인의 아내와 어머니 사진을 보았다. 처음 이 둘은 서로 싸우는 적이었다. 죽든지, 살든지의 선택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독일군 병사가 구렁텅이에 누워있는 이 부상당하고, 방어할 수 없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리고 그의 가족사진을 보았을 때, 그의 눈에 이 영국군인은 더 이상 원수나 무기를 소지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사람의 두 차원을 경험하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이 결국 두 차원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한쪽은 살기를 띤 군인의 모습이다. 그러나 다른 한쪽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누군가의 사랑을 받으며 사는 ‘한 존재’이며 ‘인격’인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스스로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라고 하셨을 때, 이 말씀은, ‘원수를 사랑하라’ 하신 가르침의 극단적인 자기표현이 아니었다. 그것은 당신께서 보시는 시선이었다. 그분은 늘 그랬다. 지금 주님을 향해, 침 뱉고, 조롱하고, 때리고, 모욕을 주는 ‘이 일들’을 하고 있는 저들도, 다른 한 면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호흡으로 생명을 누리고 사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것을 깨닫게 해주는 일이 ‘예수의 목적’ 아니었던가! 진흙으로 뒤덮여 있는 사람에게서 진흙을 닦아내 밝고 윤기 나는 얼굴과 눈빛을 보신 분이다. 그래서 삭개오도 만나주셨고, 문등병자도 만져주셨고, 간음한 여인도 변호해주셨던 것이다. 내가 귀하듯, 저들도 귀하다.


여중생을 살해한 범인으로 지목되어 체포된 김길태라는 사람의 얼굴을 버젓이 드러내고, 그의 뒤통수를 때리는 어떤 사람을 여과 없이 보여준 방송국 카메라는 너무 저속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같은 말장난으로 ‘초상권이 존중받거나, 존중받지 않을 조건들’을 나열하는 경찰의 대변인은 비열했다. 그를 용서하는 몫은 일차적으로 피해자의 가족들이며, 광의의 범주에서 온 국민이 판단할 일이다. ‘나쁜 놈들은 모조리 쓸어버리고, 사회에서 매장시켜야 한다!’는 논리를 가진 사람들의 갈증을 해결이라도 해주겠다는 듯, 카메라는 자신의 뒤통수를 때린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려 쳐다보는 ‘피의자’의 모습을 보며 조롱하고 있었다. 더러운 영혼들!

난 이제부터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더러운 영혼들을 위해서 더욱 열심히 기도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하나님께 맡기기로 결심했다. 용서와 사랑은 결국 나에게서 나와, 나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나의 용서받아야할 수많은 기억들과 사랑받고 싶은 갈망을 위무해줄 것이다. 하긴, 진정으로 자신을 십자가 앞에 세운 사람이라면, 그 어떤 말도, 그 어떤 행위도 자기 의지만을 쫓아 함부로 지껄이고, 행동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형폐지론자들이 말한다. "누가 사람이 사람을 죽일 권리를 주었는가?"
그러자 사형찬성론자들이 말한다. "누가 사람을 창살아래 가두어 둘 권리를 주었는가?"

다시 또 사순절 한복판에 섰다. 황지우의 시 한 편을 덧붙인다. 

소나무에 대한 예배

학교 뒷산 산책하다, 반성하는 자세로,
눈발 뒤집어 쓴 소나무, 그 아래에서
오늘 나는 한 사람을 용서하고 내려왔다.
내가 내 품격을 위해서
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닌,
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것이
나를 이렇게 흐트리지 않고
이 地表 위에서 가장 기품 있는
建木 ; 소나무. 머리에 눈을 털며
잠시 진저리친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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