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II : 은희경 <새의 선물>에 빚지다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은희경의 새의 선물과 김형경의 세월을 이야기하면서 서른이었던 나는 당시 스물 넷이었던 김희선을 만났다. 신춘문예 등단을 목표로 준비하고 있다고 허풍을 떠는 나, 그리고 은희경과 김형경을 자기와 함께 이야기하는 나를 바라보며 김희선은 내게 조금씩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고 그때를 회상한다. 그래서 지금도 죽기 전에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신춘문예 등단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늘 마음 한 구석에 빚진 마음으로 있다.

나와 내 아내 김희선을 연결시켜줬던 <새의 선물>(문학동네,1995)은 은희경이라는 작가를 세상에 알린 작품이다. 이 책으로 은희경은 문화동네에서 수여하는 무슨 작가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문단으로 진출하였고, 15년이 지난 지금 은희경은 한국문학의 얼굴이 되었다. 그 무렵 한국 문학계는90년대 이전 분단문학, 이념지향적 사회풍자적 작품으로 넘쳐나던 황금기(?)를 지나 사회주의 붕괴와 포스트 모더니즘의 광풍으로 인한 정신적 공황에 시달리며 심한 가슴앓이를 하던 때였다. 몇몇 전시대의 풍조와는 다른 도발적이고 그 당시로서는 실험적이고 신선한 작가들이 등장했고 은희경 역시 그 중 하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새의 선물>은 성장소설이다. 60년대 말 12살 소녀 진희와 진희와 함께 살아가는 외갓집 식구들,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의 삶과 일상을 12살 소녀의 시선으로, 하지만 전혀 12살 같지 않은 조숙함과 영악함으로 바라본 이 소설은 인간에 대한 진실, 사랑, 거짓, 풍자를 섬세하게 그리고 섬뜩하게 미장센한다. 갑자기 헤겔을 이야기하려는 지금 <새의 선물>에 등장하는12살 소녀 진희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헤겔철학의 체계가 마치 소설 속에 등장하는 12살 소녀가 사람들(타자)을 만나고 이해하고 종합하듯, 헤겔의 그것 역시 근대가 선사하는 온갖 타자적인 것들을 만나고 이해하고 종합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예감에서이다.        

    이 글의 주된 포인트는 <정신현상학> 4장에서 헤겔이 언급하는 자기의식, 즉 타자를 통해 자신을 실현하고 보존하는 주체에 대한 주목이다. 이를 위해 필자는 프랑스 철학자 알렉산드르 꼬제브의 헤겔해석에 기대어 근대적 사유에서 나타나는 주체와 타자의 관계를 추적해 갈 것이다. 글의 후반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헤겔철학의 현재성에 대한 논의를 간략하게 정리할 생각이고, 글의 시작은 칸트와 다른 헤겔철학의 독특성을 열거하는 것으로 문을 연다.

 

 

 

 

 

헤겔을 위한 예비적 지식

 

지난 웹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근대 이전까지 서양철학의 전통적 입장은 유한과 무한, 주체와 대상, 존재와 사유가 빛과 계시에 의해 하나로 이어져 안정적인 구도를 띄었고, 이러한 사회속에 사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낙관적이고 명료한 세계관을 지녔다. 근대란 유한한 존재와 무한한 사유를 이어주던 끈이 분리되는 전환점이었다. 영국 경험론(Empiricism)으로부터 시작된 인간의 경험 너머의 것에 대한 의심은 칸트에 이르러 물자체(Ding-an-sich, 物自體)에 대한 판단불가로 선포되었고,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빛의 차단, 계시의 실종, 교회의 추락, 세속화, 주체의 등장으로 명명되는 근대성의 도미노를 낳았다.

 

헤겔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헤겔은 근대가 이룩한 성과는 계승하고 좌절은 봉합하고자 했던 인물이다. 근대가 이룩한 성과라 함은 세계가 신적 계시에 의한 완벽한 세계가 아니라 불연속적이고 우발적이라는 것, 결론적으로 인간에 의해 세계가 재구성되는 것이라는 것을 선언했다는 점이고, 근대의 좌절이란 무한과 유한을 이어주던 빛의 몰락으로 인한 전체성의 상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칸트로 대표되는 근대철학이 빛과 어둠을 나누고 빛의 영역을 인식의 영역, 어둠의 영역을 우리가 파악할 수 없는 물자체, 즉 타자로 남겨둔 채 판단중지를 선언했다면, 헤겔은 칸트가 남겨놓은 타자를 다시 정신 속으로 흡수하려했다. 근대철학이 떼어놓은 무한과 유한의 재결합을 다루는 책이 바로 헤겔의 <정신현상학>이다.

적절한 비유일런지는 모르겠지만, 칸트철학을 수학적으로 비유하면 미분으로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순수이성비판-실천이성비판-판단력비판으로 이어지는 칸트의 비판철학은 인간정신의 역할, 능력, 한계 등에 대한 조밀한 해부라 할 수 있다. 반면, 헤겔은 칸트가 미분해놓은 성과들을 적분하여 다시 하나로 엮어나간다. 그리하여, 헤겔은 인간정신의 가장 낮은 단계라 할 수 있는 감각적 확신에서 오성, 자기의식, 불행한 의식, 이성, 도덕과 양심, 종교 등의 단계를 거치면서 어떻게 정신이 절대지에 이르는지, 즉 소박한 의식수준에서 출발하여 어떻게 성숙한 의식에 이르는지를 설명해냈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헤겔을 처음 접했던 시절, 헤겔에 대한 주석서 중 기억에 남는 책을 꼽으라면 단연 프랑스 철학자 알렉산드르 꼬제브(Alexandre Kojeve)가 쓴 Hegel (역사와 현실 변증법, 설헌영 역, 한벗출판사,1981)과 이폴리트(Jean Hyppolite)헤겔의 정신현상학 I,II(이종철 역,문예출판사,1986)이다. 후자가 비교적 원전에 충실했던 해설서였다면, 꼬제브의 책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해석의 출발점으로 삼은 독특한 헤겔 주석서로 평가 받는다. 이러한 꼬제브의 헤겔 해석은 후에 등장하는 프랑스철학자들의 헤겔 이해에 절대적 영향을 끼쳐고, 특별히 라깡의 욕망이론에 공헌했다고 평가받는다.[각주:1]

꼬제브는 근대적 사유에서 획득되는 타자성이 근대성 전체에서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에 주목하면서, 헤겔이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각주:2]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였다고 밝힌다. 가령, 여기에 나는 나!’라고 외치는 두 주체가 있다고 가정하자. 둘은 상호인정을 위한 투쟁에 돌입한다. 그래서 싸움이 시작되고, 싸움이 끝나 승자와 패자가 가려지면 승자는 주인이 되고 패자는 노예가 된다. 승자인 주인은 노예를 죽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인의 목적은 단순히 타자를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에 있지 않다. 타자인 노예로 하여금 주인에 의해 본인이 정복되었음을 인정케하는 것이다. 결국, 헤겔은 타자가 주체앞에서 거울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결코 주체는 자신을 자각 할 수 없으며, 주체로 인식할 수 없음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나는 자 자신을 고립 속에서 절대 파악할 수 없다. 나는 타자를 내 앞에 무릎 꿇게 한 후, 그가 나를 인정하고 주인으로 바라보며 내 말에 귀 기울일 때 비로소 주체로 우뚝 설 수 있다. 주체란 타자와 분열된 주체이고 타자에 대한 욕망을 전제로 한 주체인 셈이다. 이렇듯 헤겔식 근대적 자기의식이란 타자에 대한 배제와 부정, 타자와의 투쟁, 타자로부터의 인정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다.[각주:3]

 

 

 

헤겔의 유산

 

1. _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의 관점에서 인간을 바라본다면, 인간은 이기적 욕망과 열정을 지닌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겔의 역사발전의 원리에 따르면 욕망으로 가득 찬 인간은 신의 섭리에 힘입어 신의 자기현현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된다. 이를 통해 헤겔은 그리스도교의 신개념을 수정한다. 칸트는 이론적 인식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신을 물자체의 영역으로 추방시켰으나, 헤겔에게 있어 신은 인간세계와 동떨어진 저 높은 곳에 초월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구체적 현실속에서 속물 같은 우리의 욕망과 삶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내재적인 신이다. 영원불변한 고정되어 있는 신이 아니라, 인간사(세계사)를 통해 인간의 역사와 함께 변화하는 동태적인 신으로 (헤겔에 의해) 신은 거듭난다.

 

2. 욕망/윤리_ 칸트의 윤리에 있어 욕망은 억압과 배제의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욕망은 실천이성(윤리)으로 환원할 수 없었던 이성의 타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헤겔은 칸트와는 달리 욕망을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올렸다. 헤겔은 이기적 욕망을 오히려 삶을 구동시키는 주요 원인으로 보기에 욕망과 개인의 쾌락을 원천적으로 거부하는 칸트의 정언명법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헤겔에게 있어 자기의식은 후에 보편적 자아의식, 즉 이성으로 나가기 위한 전 단계였고, 욕망은 이러한 헤겔철학의 밑그림 속에서 일정구간 헤겔의 법칙을 실현시키기 위한 동력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헤겔의 관점은 후에 하버마스로 대표되는 담론윤리학, 즉 욕망과 개인의 이해관심을 일반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탐구와 대화적 이성(원할한 의사소통)에 입각해 합의를 추구하는 윤리형성에 영향을 미친다. 요약하면 이렇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드러난 욕망의 주체는 개별적 자아의식을 극복하고 보편적 자아의식으로 성장하여 공존의 윤리를 터득하게 되는데, 이 모든 과정은 이성의 모든 타자적인 것을 변증법적으로 사변의 총체성 안에서 통합시키려했던 헤겔철학의 믿음 위에 서있다.

 

3. 理性_ 우리는 헤겔에게서 근대적 이성의 이중성과 대면한다. 타자를 대상화함으로써 자기를 실현하는 주체의 논리가 첫 번째 근대성의 원리라면, 이성의 남용(무한신뢰)으로부터 야기된 근대성의 문제를 이성으로 해결하려 했던 것이 근대성의 두 번째 원칙이다. 근대성의 문제를 지목하는 학자들의 대안 역시 헤겔철학의 이러한 이중성에 기반한다. 하버마스로 대표되는 이성옹호론자들은 후자에 기대어 근대성이 야기시킨 현대사회의 문제들을 이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풀어나가려 한다. 하지만 이들이 시도했던 이성에 의한 이성의 자기 극복은 결국 그들이 문제 삼았던 이성을 또다시 긍정해야만 하는 수행적 모순을 되풀이한다는 비난을 (포스트모던 계열의 학자들로부터) 받는다. 반면, 포스트모더니즘 계열 사상가들은 근대적 인식론 자체에 대한 전면적 회의와 해체의 틀에서 문제에 접근한다. 주체의 동일성 안으로 타자를 끌어들이는 헤겔식 사유를 거부하고, 주체의 동일성밖으로 미끄러져 나가는 타자에 주목하는 것이 탈근대적 사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4. 타자_ 헤겔의 타자론은 주체와 주체 사이의 상호인정투쟁에서부터 시작된다. 데카르트적인 주체가 자족적인 코기토를 상정하고, 칸트의 그것이 선험적 주체를 내세우며 타자와 무관한 주체를 말했다면, 헤겔에게 있어 주체란 타자와 상관없는 내적사유 속에서 직관되는 그 무엇이 아니라, 나를 비추는 타자를 통해 비로소 주체성이 획득되는 존재이다. 헤겔은 이렇듯 이기적 욕망뿐 아니라 모든 타자적인 것들을 절대정신에 이르는 과정으로 포섭한다. 소설 <새의 선물>에서 12살 소녀 진희가 성장하면서 만나는 모든 타자적인 것을 섭취하면서 성인으로 되어가듯, 헤겔 역시 모든 이성의 타자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절대정신을 향해 성장해 간다. 그렇다고 볼 때, 헤겔철학은 정신의 거대한 성장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안에 감추어진 헤겔철학의 함의가 아닐까 싶다. 이러한 헤겔의 타자론은 후에 라깡에게 영향을 끼쳐 라깡의 거울단계’, 그리고 욕망이론을 전개하는데 중요한 이론적 토대로 다시 인용된다. 

 

<다음 웹진부터는 프로이트와 라깡으로 대표되는 정신분석학적 타자론이 이어집니다>

 

 

 ⓒ 웹진 <제3시대>


  1. 꼬제브의 헤겔해석이 라깡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Mardan Sarup, Jaques Lacan, (Toronto and Buffalo: University of Toronto Press, 1992), 31-34 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2. 헤겔은 주체를 타자와의 관계下에서 다름과 같이 규명한다: “주인은 물론 대자적 의식을 뜻하지만 그러나 이러한 의식을 결코 자기에 대한 개념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의식은 하나의 또다른 의식, 다시 말하면 스스로 자립적인 존재나 물성 일반과 종합, 연계되는 것을 자기의 본질로 삼는 그러한 의식에 의해서 스스로 매개된 자기확인자로서의 대자적 의식인 것이다.” – 헤겔, 『정신현상학』, 임석진 역, (서울: 분도출판사,1981), 264 [본문으로]
  3. Alexandre Kojeve, Hegel , 『역사와 현실 변증법』, 설헌영 역, (서울: 한벗출판사,1981), 27-2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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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 I :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따라서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 이제 타자(他者, the other)다!

 

타자에 대한 논의만큼 21세기에 유행처럼 번지는 담론이 있을까? 하지만, 타자에 대한 이론만큼 논란이 많은 경우도 드물어 타자에 대한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나 그에 대한 책을 접하는 독자들 모두 왕왕(아니, 대부분) 혼란에 빠지는 경우를 목격한다. 필자 역시 타자에 대한 윤리를 주제로 논문을 진행시키고 있는데, 타자에 대한 사상적, 신학적 의미를 논하기 이전에, ‘타자가 누구이고 무엇이냐?’는 첫 번째 질문에서부터 말문이 막힌다. 우리가 이런 문제에 봉착하는 이유는 타자에 대한 논의가 굉장히 복잡하고 길었던 사상사의 전개과정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고, 더 근본적으로는 타자에 대한 논의가 지난 호 웹진에서 살펴보았던 주체에 대한 논의, 다시 말해 자기에 대한 이해와 맞닿아 있기에 그렇다. 타자의 반대말이 자아, 주체 아닌가? 자기를 어떻게 무엇으로 인식하느냐에 따라 타자에 대한 규정과 이해가 다르다. 저마다의 입장과 맥락에 따라 저마다의 주체가 성립하고 그에 대한 대립각으로 다종의 타자가 존재한다고 볼 때 타자에 대한 논의는 그야말로 타자적이다.

 

본격적으로 타자의 윤리를 논하기 이전에, 사상사에 등장했던, 촘촘한 의미의 두께를 지닌 타자에 대한 굵직했던 흐름을 살펴보는 시간을 차례로 갖는다. 우선, 이번 웹진에서는 근대 이전의 타자론에 대한 부분을 다룬다. 특별히 몰락하는 중세를 배경으로 쓰여진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통해 중세인들이 지녔던 타자에 대한 배제의 강도가 어느 정도였는지, 그리고 타자의 출현이 중세의 몰락과 근대의 도래라는 역사적 전환기에서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시간에는 칸트와 헤겔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의 타자론이고, 마지막은 프로이트와 라깡으로 이어지는 타자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접근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필자의 논의는 거칠고 매끄럽지 못하다. 그것이 거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필자가 지닌 타자에 대한 이해가 아직 과문하기에 그렇다. 비록 지금은 이처럼 남루하지만, 언젠가 너덜너덜 이곳 저곳에 붙어있는 타자론을 유려한 칼솜씨로 깔끔하게 발라낼 그날을 꿈꾸며이제 타자에 대한 여행을 시작한다.   

 

 

 

투박하게 읽어내는 근대이전의 타자론

 

서구 기독교 발전과정에서 여러 교리 논쟁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핵심은 신과 인간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에 관한 해석을 둘러싼 싸움이 아니었나 싶다. 그것은 흔히 내재와 초월로 불리며 고대의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의 논쟁에서부터 20세기 바르트와 브루너의 자연신학 논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신학 논객들에 의해서 계속 이어져 왔다. 이처럼 신의 내재와 초월에 대한 해석은 당대 신학의 최대 이슈였으며 앞으로도 마땅히 그러할 것이다. 중세교회를 바라보는 이해의 창도 커다란 틀에서는 위의 도식으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실상은 초월적 신에 대한 일방적 독주가 중세 1000년을 내내 지배했다는 말이 옳다. 이 시기에는 세상과 유리된 전적타자로서의 신에 대한 믿음과 순종만이 허락되었고, 체제(로마교황청)밖에서 제공되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그것이 무엇이든 에어리언으로 취급되었다. 그리하여 중세인들에게 타자란 두려움, 죄악, 악마, 공포, 마녀, 처단 등등의 말로 대치되면서 중세 특유의 타자포비아를 낳았다.   

 

타자에 대한 의식이 광기적으로 작동하고 합리적인 타자에 대한 접근이 지연되었던 이유를 좀 더 자세히 언급하면 중세인들이 지녔던 세계관에 기인한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세계를 아름답고 친근하고 낙천적으로 이해한다. 세계관이 이처럼 따뜻했던 이유는 두 가지 원인에서 비롯되는데, 하나가 공동체 자체의 안정성(폐쇄성)이다. 태어나고 성장하고 성인이 되어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늙고 죽음을 맞이하는 인생의 모든 회로가 중세 전 까지는 모두 한 공간 안에서 이루어졌고 익숙한 구성원들 사이에서 발생하였다. 이렇듯 끈적하고 친밀한 횡적 공동체인 가정과 사회와 교회, 그리고 국가는 종적으로 하늘과 맞닿아 있다. 단일한 공동체성이 첫 번째 특징이라면, 하늘()과 관계맺는 무한에 대한 집단적 신뢰(믿음)가 중세 세계관의 두 번째 특징이었던 것이다. 근대 이전은 신과 인간 사이의 불연속성, 즉 무한에 대한 믿음이 당대를 지배했던 사회이고, 무한한 하나님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인 계시(은혜)에 의해 인간은 신과 만났다. 이러한 매커니즘에 의해 중세의 (폐쇄적)공동체는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고, 그 중심에는 어김없이 교회가 위치하였다.

 

만일, 이런 안정된 시스템을 파괴하는 것(타자)이 등장하면 무차별한 숙청이 자행된다. 중세의 마녀사냥이 그 좋은 예이고, 특별히 무한한 하나님의 자기현현 방식인 계시에 반하는,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시도는 그것이 무엇이든 감시와 통제와 제재를 받았다. 이를 통틀어 신비주의(mysticism)’라 부르고, 그것을 중세교회는 이단이라 정죄하였다. 근대이전 타자는 바로 이단자였던 셈이다. 전적 타자인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접속이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에 기인한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더 이상 피조물들의 타자로 머물게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며 인간 역시 하나님에게로 다가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두렵고 위험한 존재로 다가왔겠는가? 이처럼 타자에 대한 억압과 배제가 사회전체를 지배했던 사회가 중세였고, 중세의 위기는 이 공식에 균열이 가해지면서 도래하기 시작하는데……

지금부터 다룰 <장미의 이름>은 중세교회가 지녔던 타자규정의 매커니즘을 파악하기에 유용한 자료이고, 중세가 지녔던 타자에 대한 증오의 두께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케해주는 흥미로운 해석이 될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따라서

 

쟝자크 아노 감독에 의해 영화로도 만들어져 상영된 바 있는 움베르토 에코의 추리소설 장미의 이름은 단순한 소설이기에 이전에, 중세 말 흔들리는 교회의 권위와 위기속에서 이를 수호하려는 수구 기독교 세력이 처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학하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14세기 중세교회가 상한가를 치고 십자군 원정의 실패 후 차차 몰락의 길로 접어들던 그 무렵, 한 수도원(베네딕트 수도원)에서 의문의 살인사건이 연달아 발생한다. 이에 윌리암 수사(영화에서는 숀 코너리가 배역을 맡음)가 사건의 해결을 위해 급파되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범인은 수도원 도서관 사서로 40년 넘게 수도원을 장악했던 요르게 수도사였다. , 요르게는 사람들을 하나씩 죽였을까? 그리고 죽임을 당했던 인물들이 넘었던 금단의 벽은 무엇이었나? 이 질문은 소설의 주제이면서도 동시에 중세가 당면했던 교회의 위기와 세계관의 붕괴를 바라보는 중세 교권주의자들의 초조와 불안을 단적으로 상징한다.

 

’장미의 이름’ 책표지


우선, 사건의 시작이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벌어진 것이 흥미롭다. 베네딕트 수도원은 서방교회 수도원 운동의 효시로 평가받고 있는데 생활의 특색이 켈틱(Celtic) 수도원의 그것과 유사하였다. 켈틱 수도원은 영국의 웨일즈와 아이랜드에서 발달한 수도원 유형이었다. 그런데, 이 지역은 묘하게도 어거스틴과의 인간론 논쟁 이후 이단으로 몰린 펠라기우스가 숨어들어간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각주:1]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고, 원죄교리를 배격하였다. 무엇보다 그에게 있어 은혜란 인간의 이성을 개발시켜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은혜는 인간성의 한 부분이지, 인간 본성에 예외적으로 부가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펠라기우스의 이러한 견해는 제국의 질서를 신의 질서로 등치시키기 위한 로마제국의 기독교 국교화 정책에 반하는 발언이었고, 무엇보다 이제 막 형성되기 시작한 제도기독교의 입장에서도 마땅히 제거해야 할 불온 사상이었다. 이렇듯 교회사의 전개과정에서 변방으로 내몰리고 이단으로 정죄당했던 펠라기우스가 자리잡았던 곳에서 베네딕트 수도원의 전통이 시작된 것이다. 그들은 펠라기우스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자연신학을 신봉하였고, 창조의 선함과 긍정적인 면을 강조하였다. 또한 그들은 세상을 이해하는 도구로서 학문을 장려하였고, 창조의 선함을 믿기에 금욕생활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지도 않았으며, 피조세계의 건강함을 근거로 노동의 신성함도 이끌어낸다.

 

사실,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대결은 그 전시대에 있었던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 논쟁, 중세로 넘어가서는 유명론과 실재론 논쟁으로 이어지며 등장했던 초월과 내재를 둘러싼 오래된 지적, 신학적 전통의 연장선상에 위치한다. 그리고 양자간의 풀리지 않을 것 같았던 긴장과 갈등은 토마스 아퀴나스로 대표되는 스콜라 철학에 와서 표면적으로 봉합되고 종합되었다. 스콜라철학은 그간 교회사 전통에서 배제되어왔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자연현상과 창조현상을 이해하는 도구로, 아울러 세상속에 내재하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한 접촉점으로 인간 이성을 내세웠다. 그 후 억제되어왔던 인간이성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점차 (교황청입장에서 볼 때) 암세포처럼 번져나가기 시작하면서 1000년의 전통을 자랑하던 중세교회는 서서히 몰락의 수순을 밟게 되는데[각주:2]

 

소설 속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발생한 연쇄 살인사건은 수도원내 도서관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의 유일한 필사본을 둘러싼 비밀로부터 연유한다. <시학> 2권은 희극론, 즉 웃음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살해당한 사람들은 웃음은 예술이며 사람들의 마음이 열리는 세상의 문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의 내용을 알고 이에 접근했던 인물들이다. 그렇다면, 요르게는 왜 그들을 죽이면서까지 <시학> 2권의 존재를 감추려 했을까? 이는 혹 중세 세계 전체를 감싸고 있었던 신과 인간사이의 불연속성, 즉 무한에 대한 믿음을 수호하기 위한 중세 교회의 최후 발악이 아니었을까? 요르게로 대표되는 중세교회의 교권주의자들에게 있어 웃음이란 엄숙과 경건을 저해하는 요소이며, 교회에 대한 권위와 두려움마저 소멸케하는 위험인자이다. 그리하여 필경에는 신적 계시의 위엄과 무한한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파괴시키는 역할을 할 것이기에 세상에 알려져서는 안된다. 만약 이 사실이 만방에 알려졌을 경우 교회를 위협하는 많은 이단(타자)들이 창궐할 것이고 그 전에 미리 이것을 차단하여야 한다.[각주:3]

  

요르게 수사는 몰락하는 중세교회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자로서 신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무한의 관계를 유지시키기 위한 투쟁를 벌이며 온몸을 바쳐 잠재적 이단의 등장을 막고자 살인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요르게의 발악은 이미 시작된 근대를 향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이키기에는 너무 역부족이었다. 새로운 시대의 도래와 그에 따른 타자의 등장은 <시학> 2권을 감추는 것만으로 멈춰서지 않는다. 그야말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다. 이미 전방위적으로 중세의 붕괴는 시작되고 있었고, 그것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타자의 출현을 의미하였다. 

 

무너지는 중세, 도래하는 근대

 

중세의 붕괴와 근대의 도래를 규정하는 여러 가지 입각점이 있다. 문화사적으로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으로부터 중세에 대한 균열과 근대를 여는 단초가 마련되었다고 주장 할 수 있고, 경제적으로는 산업혁명에 따른 봉건경제의 붕괴, 이에 따른 초기 자본주의의 등장을 거론하는 사람들도 있다. 정치적으로는 종교개혁의 후폭풍이라 할 수 있는, 수 백년간 진행된 각종 종교전쟁들로 인한 유럽대륙의 국민국가화와 프랑스 대혁명의 발발로 야기된 고양된 시민의식을 들 수 있다. 이는 중세 교회와 봉건영주의 전횡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 태동과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이 밖에도 각 분야별로 중세의 종말과 근대의 도래를 예감케하는 여러 전조들을 거론 할 수 있겠지만, 특별히 타자론의 관점에서 근대의 시작은 물리적으로는 지리상의 발견, 정신사적으로는 칸트와 헤겔로 이어지는 지적전통에 기반한다. 지리상의 발견을 통한 횡적 세계의 확대는 안정적이고 폐쇄적 공동체이었던 중세사회에 틈을 내면서 다름에 대한 공포, 충격, 그를 대하는 자세, 대책 등을 한꺼번에 모색하게 만들었다. 상상해보라! 평온했던 우리 마을에 배를 타고 온 노란머리 하얀피부 (검은 머리 검은피부 혹 노란피부)의 사람들이 등장한다면? 그 다름과 차이에 대한 해석, 타자를 하나로 엮어내는 방식, 타자에 대한 논의의 집대성, 내지 (당대 유럽식) 타자에 대한 해법의 완결판이 바로 헤겔철학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 웹진 <제3시대>

  1. Philip Newell, A Celtic Spirituality, 정미현 역, 『겔트 영성 이야기』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1) 중 1장 “창조의 선함에 귀기울이기: 펠라기우스”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2. 소설 속 요르게는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다: “창세기는 우주의 창조에 대해 모자람 없이 설명하고 있는데도 저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철학자는 자연과학으로 우주를 음산하고 불결한 언어로 나타내고 있소”-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이윤기역 (열린책들, 1989), 533. [본문으로]
  3. 계속 요르게의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소설 속 발언을 인용하면: “저 철학자(아리스토텔레스)의 일자일언은 이 세상의 형상을 바꾸어 놓았오. 이 서책( 『시학』 2권)이 공공연한 해석의 대상이 되는 날, 우리는 하느님이 그어놓으신 마지막 경계를 넘게 될 것이오.”- Ibid.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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