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과 타자성의 관점에서 본 신약성서 1



이해청
(성공회대 박사과정 / 탈식민성서해석학)

 


1. 시작하며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고 평했다. 세월호 이후를 사는 우리 역시 그렇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세월호 이후 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절망적이게도 300여 명의 아이들이 수장된 현실을 애도하기는커녕 혐오스러운 말을 쏟아내는 교회들을 돌아보면서 야만이 아닌 살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러면서 의심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교회는,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 해온 신학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앙리 레비의 말대로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으로 전락해 있었던 것은 아닐까라고 말이다. 다시 말해, 세월호 사건을 향한 교회의 혐오스러운 발언들은 교회뿐만 아니라 신학에서 신앙적인 것으로 공공연히 통용되던 타자를 향한 평상시의 폭력적인 이해가 표출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고 말이다. 또한, 자연스럽게 이러한 의심은 내게 기독교의 경전인 성서를 다시 묻도록 만들었다. 어쩌면 타자를 향해 혐오스러운 말들을 내뱉도록 하는 하나의 근거로 이미 성서가 자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하나의 깊은 회의가 찾아왔던 것이다. 다행인 걸까. 바로 그 순간 다음과 같이 물었던 스퐁의 말이 떠올랐다.[각주:1]

 

우리는 궁극적으로 묻지 않을 수 없다. 서구 종교계에서 그렇게 널리 존중되고 있던 이 성경책이 어떻게 또 다른 악의 근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 성경을 악용하는 것을 막고 중지시킬 수 있을까? 성경은 다시 한번 생명의 원천, 그것도 궁극적 원천이 될 수 있을까? 아니면 이미 늦었고 성경도 이미 너무 더럽혀졌나? 나는 이 책에서 이런 주제들을 다루고자 하는 것이다.


     당연히 스퐁의 이러한 질문들 중 눈에 들어온 것은 그 어느 것도 아닌 “이미 늦었고 성경도 너무 더럽혀졌나?”라는 그의 물음이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하나의 답으로 르낭, 지라르, 그리고 프로이트의 복음서 해석은 꽤 유용했다. 왜냐하면 이들은 내게 타자에 대한 기독교적 폭력의 시초가 반유대주의라는 점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기독교적 동일자로 신앙을 일궈온 내게 이것은 아주 신선한 충격이었다. 믿고 따랐던 복음서가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일으키는 근거가 되었다는 점은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타자에 대한 폭력의 문제가 성서에 이미 내장되어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계기였다. 사실 이런 나와 달리, 이미 교회의 역사에서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아주 오래된 하나의 전제였다. "반유대주의는 결코 근대에 생겨난 현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과 함께 오랫 동안 몇 천년에 걸쳐서 그들의 존재를 따라다녔던 것입니다. 이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는 다양한 변종을 하고는 했습니다. 오래전 신을 죽인 백성 유대인에 대한 기독교회나 교부들의 적의에서 시작된 그것은 이윽고 세속화되어 유럽 정신사의 그림자 부분을 형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각주:2] 하지만 교부들에서야 비로소 이 문제가 돌출했을까? "바울의 선교행동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원시 기독교회는 저들을 유대교에서 떼어놓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1세기 말부터 2세기 초에 걸쳐 발생한 원시 기독교회의 유대교 회당으로부터의 분리 단절은 그 후 수많은 트라우마를 야기했던 기독교적 반유대주의의 배경을 이루는 사건입니다."[각주:3]는 지적을 참조하면, 애초에 복음서부터가 유대교를 하나의 타자로 놓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반유대주의 문제는 복음서가 타자에 대한 폭력으로 이미 얼룩져 있음을 보여주는 적절한 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반유대주의 문제뿐이겠는가. 여성과 동성애도 성서에 내장된 타자에 대한 폭력을 보여주는 예들이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이 부분에 대해 도킨스를 비롯한 전투적 무신론자들이 엄청난 열을 올리고 있음을 참조한다면 말이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폭력적이고, 비이성적이고, 관용을 모르며, 인종차별주의, 부족주의, 편협성과 손을 잡고, 무지라는 옷을 입고, 자유로운 탐색을 적대시하고, 여성을 경멸하고, 아이들에게는 강압적인, 조직화된 종교는 양심에 커다란 짐을 지고 있어야 마땅하다."[각주:4]는 히치스의 말을 인정하고선 성서를 찢어버려야 하는 걸까. 마치 2세기의 마르시온처럼 말이다. 하지만 무시간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진리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참조한다면, 성서 역시 악으로 혹은 폭력으로 더럽혀져 있다는 점을 너그럽게 인정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결국 어떻게 읽고 해석할 것인가가 더욱 중요해진다고 봐야하는 건 아닐까. 사실 이런 일이 비단 성서에만 적용되는 일이겠는가. 다른 종교의 경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전투적 무신론자들이 유대교뿐만 아니라 이슬람 경전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을 가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나아가 종교의 경전들뿐만 아니라 실은 모든 텍스트가 떠안고 있는 운명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은 복음서의 폭력성을 인지시키고, "반유대주의적 편견의 뿌리로 만들려 하는 지배적 이데올로기와 그대로 동일시할 수 없는" 해석을 제안하는 일이지 않을까.

     이를 위해, 본론에서 독서행위에 관한 논의를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독서행위는 읽고 있는 텍스트를 그대로 따르는 행위일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육영수가 지적한 것처럼 독서행위는 "흰 종이 위에 고정된 검은 글씨를 인지하는 지각 행위가 아니라 개인의 취향과 경험, 교육과 가치관 등에 비추어 텍스트의 복잡한 의미를 적극적으로 발굴하는 능동적 행위"[각주:5]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비록 폭력에 오염된 성서구절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늦깍이 신학생 마르틴 루터는 어느날 수도원 다락방에서 오직 신앙에 의한 의로움이라는 성경 구절에 벼락 맞아 면죄를 구원의 보증수표로 선전하는 가톨릭 천년왕국에 분연히 도전"[각주:6]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루터가 유대인을 향해서는 "전 그리스도교국에 대한 굶주린 경찰견이자 살인마이며, 완전 고의로 … 그들은 물과 우물에 독을 풀고, 아이들을 유괴하며 토막 내었는데 이는 그리스도인의 피로 은밀하게 자신의 분노를 삭이기 위해서였다."[각주:7]는 악랄한 저주를 퍼부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가 유대인에게 이랬던 것은 아니었다. 한때 그는 유대인을 약속의 자녀로 꽤 극찬했던 적이 있다. 그렇다면 루터는 독서행위는 단순히 텍스트를 따르는 행위가 아니라 이 보다 좀 더 복잡한 행위라는 육영수의 지적을 잘 보여주는 예이지 않을까. 아무튼, 독서행위에 관한 논의는 우리에게 성서가 나쁜 텍스트이기에 찢어버리거나 애초에 믿지 말아야 하는 열등한 경전이라고 주장하는 오늘날의 전투적인 무신론자들보다 좀 더 복잡한 물음과 답을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계속되는 논의에서 독서행위가 텍스트를 단순히 반복하는 행위가 아닌 좀 더 복잡한 행위라면 대체 성서를 어떻게 읽고 이해해야 하는지를 모색하기 위해 르낭, 지라르, 그리고 프로이트를 차례로 살펴볼 것이다. 앞서 잠시 언급한 바 있지만, 이들을 반유대주의가 복음서에 내장되어 있음을 보여준 사람들로 간주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복음서를 읽고 이해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서로 달랐다. 기독교적 사고를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눈 킴볼의 논의에 기대어 보자면, 르낭은 배타주의적 사고에, 지라르는 포괄주의적 사고에, 그리고 프로이트는 다원주의적 사고에 속한다. 킴볼에 따르면 배타주의적 사고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정당한 구원의 방법을 제공해준다는 신념”[각주:8]인데, 특히 배타주의에서도 극단에 위치한 입장인 문자주의는 “종교적 다양성이 야기하는 복잡한 이슈들을 해결해보려 애쓰는 태도는 찾아보기”[각주:9]어려운 그런 사고를 갖고 있다. 포괄주의적 사고는 "과거 수백 년 동안의 많은 다툼과 불화를 잊고 상호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며 함께 힘을 합쳐 평화, 자유, 사회적 정의, 도덕적 가치관을 보존하고 장려할 것을 강력하게 요청"[각주:10]하는 입장지만, 그럼에도 "모든 종교에 나타난 하느님의 구원과 역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완전하고 결정적인 계시를 모두 인정"[각주:11]한다. 다원주의적 사고는 "기독교를 구원의 유일한 수단으로 보지도 않고, 다른 종교의 완성형으로 보지도 않는다. 구원을 얻기 위한 다양한 행로가 모두 실질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인정한다."[각주:12] 물론 르낭, 지라르, 프로이트를 이 유형들에 딱 들어맞는 것으로 분류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서에 나타난 반유대주의를 어떻게 대면하고 해석해 가야하는지를 모색함에 있어 중요한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하나의 결론적 제안을 도모할 것이다. 반유대주의를 비롯해 타자에 대한 폭력을 하나의 성스러운 종교적 경험으로 제안하는 신약성서의 이야기들을 읽을 때 어떤 독법이 권장될 수 있는지와 관련해서 말이다. 특히, 개인의 거룩한 종교적 행위로서의 성서 읽기가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함께 고려하면서 말이다.


2. 중심글


   1. 종교적 체험으로서의 독서행위 : 배제인가 포용인가


     엘리아데는 종교적 체험을 성스러움에 대한 경험이라고 했다. 물론, 그에 따르면 성스러움은 혼란스러운 것들을 정돈해주는 일종의 방향잡기 혹은 자리 잡기로 정의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방향잡기는 소위 신들이 행한 것들을 그대로 따르려는 소위 모방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엘리아데의 논의를 참조할 때 비로소 이해가 가능해진다. “인간 행위의 의미와 가치는 있는 그대로의 물질적인 여건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원초적인 행위의 재현, 신화적인 전범의 반복이라는 인간 행위의 특성과 결부되어 있다. 영양섭취는 단순한 생리작용이 아니라 일종의 성찬식의 되풀이이다. 혼례와 집단적인 오르지도 신화적인 원형들의 반향이다. 그런 행위들이 반복되는 것은 태초에 신들, 조상들, 영웅들에 의해 그 행위들이 축성되었기 때문이다.”[각주:13] 한 마디로, 종교적 체험은 신들이 행한 행동들을 그대로 따르려는 인간의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책의 종교인 기독교는 성서를 읽음으로써 이런 욕망을 실현한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기독교, 특히 오직 성서만으로를 외치는 개신교는 이런 현상이 좀 더 심하게 나타난다. 스펄전의 말을 들어보도록 하자.[각주:14]

 

다른 모든 책이 한곳에 모아져 불에 태워졌다고 해도 그것은 거룩한 책 한 페이지를 소거했을 때보다 세상에 끼치는 손실이 적습니다. 다른 모든 책은 아무리 좋더라도 단지 금박과 같아서 금 1온스를 얻기 위해서는 다량의 책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순금입니다.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들의 정신적인 부라 해도 그 안에는 계시의 진리와 같은 보석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성서가 다른 어떤 책보다 귀하고 중요하다는 논지는 기독교인들이라면 대체로 수긍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논지가 좀 더 확대되면 성서는 영감 받은 책이기에 오류가 없고, 성서만으로 충분하며, 최고의 책이고, 일관되고 참된 세계관을 주는 유일한 책이라는 주장으로까지 번진다. 성서는 일종의 나침반으로서 모든 것을 결정하고 해석해주는 결정체가 된다. 이렇게 되면 이미 스펄전의 말에서도 드러나듯 다른 모든 것은 열등하고 하찮으며 성서에 비춰서 이해되어야 하는 부차적인 것이기에 배타적인 태도가 쉽게 형성된다. 성서가 말하는 바가 무조건 옳다는 식으로 정립되고 나면 성서가 말하는 모든 문자는 진실이고 진리이고 따라야 할 기준이 되는 것이다. 특히, 개신교인들에겐 성서와 일치시키는 삶이 하나의 종교적 체험임을 상기하면 때론 꽤 위험한, 심지어 폭력으로까지 비화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음을 예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때문에 개신교에서 독서, 특히 성서읽기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중요한 덕목으로 자리 잡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알다시피, 점차 사회가 다원화되고 개방되어가고 사람들 역시 그러함에도, 교회는 배타적인 방식의 성서읽기만을 추천함으로써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고 있는 측면이 많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성서읽기가 배타적이 아닌 타자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이것은 일단 자기가 읽는 성서에 대해 거리를 두고 심지어 비판적으로 읽을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물론, 읽기의 묘미는 설사 문자 그대로를 따른다하더라도 읽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라는 점에 있다. 예를 들어, 어떤 폭력적인 본문을 읽는다하더라도 누군가는 그냥 지나칠 것이고, 누군가는 그대로 따라할 것이다. 하지만 대체로 성서를 문자 그대로 따르려는 사람들이 교회에선 신앙심이 깊은 걸로 존중받는다. 그렇기에 나쁘게는 성서읽기란 무엇이며 어떤 태도로 성서를 읽어야 타인과 소통하는 삶을 살 수 있는지에 관한 고민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게 된다. 오늘날 교회에서 드러나는 소수자와 타종교를 향한 끊임없는 혐오는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아무튼, 이제 중심을 잡아주는 성스러운 종교적 체험으로서의 성서 읽기가 타자를 배제하지 않고 포용하는 읽기가 되기 위해선 어떠해야 하는지를 르낭, 지라르, 그리고 프로이트를 통해 알아보도록 하자. 또한, 이 세 사람을 통해 서문에서 독서란 흰 종이 위에 고정된 검은 글씨를 인지하는 지각 행위가 아니라 개인의 취향과 경험, 교육과 가치관 등에 비추어 텍스트의 복잡한 의미를 적극적으로 발굴하는 능동적 행위라는 육영수의 말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같은 복음서를 읽었음에도 이 세 사람은 전혀 다르게 읽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2. 배타주의적인 기독교적 동일자로서 복음서 읽기 : 르낭의 『예수의 삶』


     1863년 에른스트 르낭은 초자연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순전히 인간적인 모습만을 묘사한 『예수의 삶』을 세상에 내놓았다. 오늘날 우리가 보기엔 당연하게 보이지만 당시에 이 저서는 많은 사회적 논란을 야기했다. 왜냐하면 당시 프랑스의 가톨릭은 이 책을 금서목록으로까지 지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슈바이처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아주 감동적인 사건으로 묘사한다.[각주:15]

     르낭의 예수의 삶은 세계 문학의 한 사건이었다. 그는 지금까지는 단지 신학자들만 관심을 가졌던 문제를 전 교양인의 세계에 제시한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하나의 예수상을 제시했는데, 그 예수는 생활한, 그가 문예작가로서 갈릴리의 푸른 하늘에서 만난, 감동된 붓으로 포착한 예수였다. 세상은 감동을 받았으며 살아있는 예수를 보는 것 같았다. 세상은 르낭과 함께 푸른 하늘을, 물결치는 누런 곡식들을 먼 산들과 화려한 백합들을 게네사렛 호수 주변에서 보았으며, 그와 함께 살랑거리는 갈대밭에서 산성 설교의 영원한 선율을 들었다.  

     확실히, 르낭은 슈바이처의 이런 찬사를 받을 만하다. 그는 이 저서를 쓰기 위해 갈릴리 지역을 자주 여행했음을 강조하고, 특히 역사비평의 원칙을 고수했음을 분명히 밝힌다. “새로운 질서가 수립되기까지 우리는 역사비평의 원칙, 즉 조차연적인 이야기는 말 그대로 허용될 수 없으며 그것은 항상 고지식함이나 속임수를 내포하고 있고, 역사가의 임무는 그것을 해석하고, 그것이 품고 있는 진리와 오류가 어떤 것인가를 찾아내는 것이라는 원칙을 고수할 것이다.”[각주:16] 따라서 독자는 1세기 갈릴리에서 살았던 한 인간을 객관적이고 편견이 없는, 마치 살아있는 실제의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특히, 자신의 저서에 묘사된 예수는 기독교의 교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그가 주장하는 대목에선 더욱 그러할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기독교 기원에 관한 역사를 구상했을 때, 하고 싶었던 것은 요컨대 인물이 거의 관련이 되지 않은 교리의 역사였다. 그러나 그 이후 역사란 추상적인 개념의 단순한 유희가 아니며, 역사 속에는 교리보다는 인물이 더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종교개혁이 만들어 낸 것은 은총 받음과 속죄에 관한 교리가 아니라 루터와 칼빈인 것이다.”[각주:17]

     그러나 르낭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슈바이처의 찬사는 길어봐야 한 페이지를 넘지 않았다. 이후 슈바이처는 줄곧 르낭을 비판하기에 여념이 없다. 르낭은 자신이 역사적 원칙을 견지했다고 불평하겠지만, 슈바이처가 보기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르낭이 취급한 방법들에게는 역사적 계획에 관한 언급을 볼 수 없다. 말은 모두 가장 잘 맞는다고 생각되는 곳이면 어디나 삽입해 넣었다. 한 마디 말도 거저 버려두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적 상황에 맞는다고 본 것은 한 마디도 없다. 개체 장면들을 너무나도 마음대로 짜 맞추고 있다.”[각주:18] 심지어, 찬사를 보낸 뒤 바로 거침없는 혐오를 내뿜었다. “르낭의 예수의 생애처럼 무미한 것들이 꿈틀거리는 책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가장 혐오한 책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그것은 예술이라는 말이 가진 가장 추악한 의미에서의 그리스도교적 예술품이다.”[각주:19] 또한, 르낭에 대한 콜라니의 비판을 전하며 확인사살을 감행하기까지 했다. “우리는 기대에 부풀어서 관심을 가지고 르낭의 책을 읽었으나 가장 분격된 실망으로 그 책을 덮었다.”[각주:20] 슈바이처가 이렇게까지 비판하는 이유는 르낭이 그린 예수가 1세기 유대교의 맥락이 아니라 19세기 서구의 도덕적 이상향에 따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고로, 1세기 유대교의 묵시적인 세계상을 고려하고자 했던 슈바이처에게 “그가 실현하려는 혁명은 언제나 정신적인 혁명이었다. …사실 그가 세운 것은 내가 영혼의 나라라고 부르고 싶은 하느님 나라였으며, 예수가 세웠던 것, …바로 이것이 영혼의 자유라는 교리”[각주:21]라는 르낭의 진술은 "단순한 세계에서 살기 위해 감상으로 향유를 바르고 화려하게 꾸며야 했던 것“[각주:22]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이 같은 슈바이처의 비판엔 가혹한 측면이 있다. 1세기 유대교의 맥락을 르낭이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을지라도, 르낭의 『예수의 삶』은 슈바이처 자신도 인정한 바와 같이 대중에게 엄청난 인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비판적으로 조사된 예수의 생애』를 썼다가 독일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대학으로부터 쫓겨난 슈트라우스마저도 르낭의 필체를 본받아 대중으로부터 인기를 얻으려 했을 정도니 말이다. 더군다나, “이교적이지만 공손함으로 가득한 종교의 역사를 만들고자 하며, 18세기의 메마른 합리주의에서와 마찬가지로 신학의 엄격함으로부터 종교를 보호하고자 한다. 이런 점에서 랑송은 르낭이 비종교적인 과학으로 이 작품을 종교적으로 만들었다고 쓸 수 있었던 것”[각주:23]이라는 박무호의 지적을 기억하면, 르낭은 19세기의 일반적인 서구 기독교 대중들에 맞는 새로운 기독교를 제시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특히, 당시의 기독교 교리에 염증이 난 일반 대중들에게 1800년 동안 기독교는 보편적이고 단순한 영혼의 가르침을 설파한 예수를 교리로 혹은 철학으로 가두어왔다는 르낭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가슴을 뛰게 하는 한편의 시처럼 들렸을지도 모른다.[각주:24]

 

     예수는 교리의 창시자가 아니라 상징의 제작자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새로운 정신을 가진 세상의 선구자인 것이다. 한편으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덜 기독교적인 사람들은 4세기부터 기독교를 형이상학적인 유치한 토론의 수단으로 몰아 버린 그리스 교회의 박사들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복음서로부터 거대한 대전이라는 수백만 개의 논문을 끌어내려 했던 중세 라틴의 스콜라 철학자들이었다. 어떤 예외적인 운명에 의해서 18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 여전히 순수한 기독교가 보편적이며 영원한 종교라는 특성을 지닌 채 나타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기독교는 완전히 자발적인 영혼들의 운동의 결실이며, 태어날 때부터 교리의 속박이라고는 없었고 300년 동안이나 양심의 자유를 위하여 투쟁해 왔기 때문에 기독교가 겪어온 타락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그 탁월한 기원의 결실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새로워지기 위해서 기독교는 복음서로 되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이 때문에, 다시 말해 기독교가 보편적이고 영원한 종교라는, 따라서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복음서로 되돌아가기만 하면 된다는 르낭의 인식은 다른 종교, 특히 유대교를 꽤 폭력적으로 다루는 토대가 된다. 역사가 아닌 인간의 보편적 정신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르낭은 "예수가 유대교에서 출발한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예수는 유대교의 계승자라기보다는 그의 업적이 특징짓고 있는 것을 보면 유대 정신과의 단절인 것이다."[각주:25]라고 선언해 버린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은 건방지고 오만하며, 중세의 스콜라 철학자나 신학자들처럼 논쟁과 궤변을 일삼기를 좋아할 뿐 영혼에 대해서는 정작 아무 것도 모르는 얼간이들로 전락하고 만다. 샴마이 학파는 편협하고 배타적이다. 이들의 율법은 구시대적 악습이고 철폐되어야 하는 유치한 것이다. 때문에 율법이란 단지 기독교 탄생의 필수적인 근원만을 보유한다는 의미에서만 좋은 것이다. 이 외에는 위선이고 광기이고 오류인 것이다. "유대인들이 미치광이에 가까울 정도로 율법을 사랑했던 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 자체에 휩싸여 버린 낡은 엄격함은 유치한 것에 불과했다. 엄격함을 유지하고 있던 유대 회당은 단지 오류의 산실에 불과했다. 융통성이 없는 위선과 예수와의 투쟁은 지속되었다."[각주:26] 심지어 유대교에 그치지 않고 이슬람과 교묘하게 겹쳐놓고선 이 두 종교에 대해 독설을 퍼붓기까지 한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1세기 유대교의 맥락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예수의 생애를 다루었다는 슈바이처의 지적은 정확했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에 “르낭이 예컨대 유태인이나 이슬람교도에 관한 의견을 서술하고자 하는 때면 언제나 그의 마음 속에는 셈족에 관한 현저히 신랄한 비판이 숨어 있었다. 인도 유럽어에 비하면 셈어는 윤리적으로도 생물학적으로도 타락된 형태이고 …르낭의 자아에서 셈어가 유럽인의 동양지배의 상징이며 또 자신이 속하는 시대를 지배하는 것의 상징이기도 했다는 점을 우리들은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각주:27]고 지적한 사이드의 말을 참조하면, 르낭이 『예수의 삶』에서 왜 그렇게 유대교와 이슬람을 다음과 같이 헐뜯었는지도 이해가 된다. [각주:28]

     조그만 갈릴래아인 집단은 이곳이 상당히 낯설었다. 당시의 예루살렘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현학적인 태도, 신랄함, 논쟁, 증오, 그리고 영혼의 왜소함 등으로 이루어진 도시였다. 그곳에서는 광신이 극에 달해 있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었으며,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도 결국 궤변가의 문제로 귀착되어 버리는 율법연구가 유일한 공부였다. 이러한 문화는 영혼을 연마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러한 것은 회교도들의 부질없는 교리, 즉 회교 사원 주변에서 발생되는 공허한 지식과 다를 바 없었으며, 많은 시간과 추리력을 소비하면서도 손실만을 초래할 뿐, 영혼에 대한 교리에는 이용되지 않았다. 유대박사와 율법학자들의 지식은 완전히 미개한 것이었으며 도덕성이 완전히 결여된 보상없는 부조리였다.  


     인류를 고양시킬 수 있는 보편적인 영혼의 종교를 예수를 통해 찾고자 했던 르낭이 어떻게 유대교나 이슬람교를 이렇게까지 왜곡하고 저주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는 물론 <예수의 삶>의 저자로서 유명하고, 그것이야말로 기독교와 유대인에 관한 그의 기념비적인 역사서술의 선두를 장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예수의 삶이 사실은 일반사와 완전히 동일한 유형의 업적이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각주:29]는 사이드의 말을 거치면 놀랍지 않다. 차라리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닌 게 아니라 사이드는 르낭에 대해 직격탄을 날렸다. "민족지의 발생과 함께, 차이가 분류되고 다양한 진화 과정이 확장되었다. 즉 진화는 원시종족으로부터 종속 인종을 거쳐 마지막으로는 우등 인종 또는 문명 민족으로 나아간다. 고비노, 메인, 르낭, 흄볼트는 핵심이다. 원시, 야만, 퇴화, 자연, 반자연과 같은 일반적으로 사용된 범주도 여기에 속한다."[각주:30] 그렇다면, 르낭이 그린 예수는 유럽중심이고, 심하게는 인종주의적인 측면까지도 내포하고 있었던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그의 다음과 같은 진술은 이를 확인해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각주:31]

 

     자국민보다도 현명하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사람은 스스로의 조국에 대하여 고통을 느낄 수 없다. 국민들에게 가혹한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과 함께 과도하게 바르게 사는 것보다도, 도리어 국민과 함께 오류를 범하는 쪽이 낫다.  


     이제, 기독교가 보편적이고 영원한 영혼의 종교라는, 따라서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복음서로 되돌아가기만 하면 된다는 르낭의 말은 이전과 달리 아름답게만 들리지 않는다. 한번 물어보자. 과연 그는 자신이 말한 바대로 복음서로 되돌아갔는가. 되돌아갔음에도 복음서에 서술된 초자연적 요소를 배제해 버리는 그의 시도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까지의 논의를 참조한다면, 복음서로 되돌아가기만 하면 된다는 그의 말은 차라리 어떤 의도, 즉 교리나 철학을 던져버리고 단순한 영혼의 세계에 살고자 하는 소망을 강렬히 키워야 하는데, 그 영혼의 세계란 다른 어떤 장소도 아닌 유럽이어야 한다는 전제를 내포하고 있었던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유럽의 타자인 유대교가 열등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더구나 복음서마저도 유대교를 비판해주고 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일인가. 문명 대 야만이라는 19세기의 서구적 서사를 이미 승인한 르낭에겐 말이다. 서구 백인 기독교라는 동일자의 입장에서 철저하게 사유했던 르낭에게 유대교에 대한 복음서의 폭력적 서사는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고 오히려 예수의 선한 영혼을 선명하게 부각시켜주는 촉진제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폭력과 타자성의 문제는 예수의 고귀한 영혼에 비해 부차적인 것이었고, 할 수만 있다면 짓밟아도 상관없는 배경이지 전경은 결코 될 수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존 쉘비 스퐁, 『성경과 폭력』, 김준년․ 이계준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2007, p.31 [본문으로]
  2. 미야타 미쓰오, 『홀로코스트 이후를 살다』, 박은영·양현혜 옮김, 한울, 2013, p.18 [본문으로]
  3. 미야타 미쓰오, 앞의 책, pp.58~59 [본문으로]
  4. 크리스토퍼 히친스, 『신은 위대하지 않다』, 김승욱 옮김, 알마, 2008, p.90 [본문으로]
  5. 육영수, 『책과 독서의 문화사』, 책세상, 2010, p.40 [본문으로]
  6. 육영수, 같은 책, p.21 [본문으로]
  7. 레너드 스위들러, 『절대 그 이후』, 이찬수·유정원 옮김,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3, p.234 [본문으로]
  8. 찰스 킴볼, 『종교가 사악해질 때』, 김승욱 옮김, 에코리브르, 2005, p.286 [본문으로]
  9. 찰스 킴볼, 같은 책, .p286 [본문으로]
  10. 찰스 킴볼, 같은 책, p.289 [본문으로]
  11. 찰스 킴볼, 같은 책, p.288 [본문으로]
  12. 찰스 킴볼, 같은 책, p.291 [본문으로]
  13. 미르치아 엘리아데, 『영원회귀의 신화』, 심재중 옮김, 이학사, 2003, p.15 [본문으로]
  14. 토니 레인케, 『독서신학』, 김귀탁 옮김, 부흥과 개혁사, 2012, p.40 [본문으로]
  15. A. 쉬바이처, 『예수의 생애연구사』, 허혁 옮김, 대한기독교출판사, 1986, p.188 [본문으로]
  16. 에르네스트 르낭, 『예수의 삶』, 박무호 옮김, UUP, 1999, p.47 [본문으로]
  17. 에르네스트 르낭, 같은 책, p.48 [본문으로]
  18. A. 쉬바이처, 같은 책, p.190 [본문으로]
  19. A. 쉬바이처, 같은 책, pp.188~189 [본문으로]
  20. A. 쉬바이처, 앞의 책, p.196 [본문으로]
  21. 에르네스트 르낭, 앞의 책, p,132 [본문으로]
  22. A. 쉬바이처, 같은 책, p.198 [본문으로]
  23. 에르네스트 르낭, 같은 책, p,420 [본문으로]
  24. 에르네스트 르낭, 같은 책, pp.348~349 [본문으로]
  25. 에르네스트 르낭, 같은 책, p.356 [본문으로]
  26. 에르네스트 르낭, 앞의 책, p.273 [본문으로]
  27.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박홍규 옮김, 교보문고, 1999, pp.256~257 [본문으로]
  28. 에르네스트 르낭, 같은 책, pp.189~190 [본문으로]
  29. 에드워드 사이드, 같은 책, p.264 [본문으로]
  30. 에드워드 사이드, 『문화와 제국주의』, 박홍규 옮김, 문예출판사, 2005, p.229 [본문으로]
  31.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p.268 이와 관련해 르낭의 예수 연구가 인종주의에 오염되어 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켈리의 연구는 주목할 만하다. Shawn Kelly, Racializing Jesus, London: Routledge, 2002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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